외솔 최 현배 선생의 약력

외솔 선생은 1884년 10월 19일 경상남도 울진군 하상면 동리에서 최 병수 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남동생 최 현구가 있다.

여섯살이 되매 동네 서당에서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곱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선생은 약한 몸을 이겨가며 공부를 열심히 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

열 한두 살이 되었을 때는 동네 어른들이 서당에 모여 두는 바둑 구경을 하며 이를 익혔다. 바둑 잘 둔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웃 동네 사람들이 시합을 걸어와 경기를 할 적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글 연구를 시작하고는 시간을 빼앗긴다 하여 바둑을 두지 않으셨다. 14세 되었을 때 근처에 일신학교가 신설되고 서당이 폐쇄되자 서당 훈장과 같이 입학하여 신식 교육을 받으셨다. 이곳에서 논어· 맹자는 물론 대학을 읽으셨고 특히 산술에 흥미를 느끼고 실력을 인정받아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때로는 다른 학급에서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0년, 17세 되었을 때 서울에 올라와 관립 한성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75명 모집에 응모자 1200명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선생이 입학한 해가 바로 융희 4년이라 그 여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나라가 없어지자 학교의 이름은 경성 고등보통학교로 바뀌고 교장도 일본인으로 갈리게 되니 이 학교에서 유쾌한 기분으로 공부하실 수가 없었다. 선생이 가슴을 터놓고 절거이 사귀던 동무는 오히려 다른 사립학교에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1910년 봄, 상동 예배당에서 열린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강습회에 참석하여 깊은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한글로 초등학교용 국어 독본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요일마다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1913년 조선언문회 고등과 제 1회를 평균 99.5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최우등생으로 스승 주시경과 원장 남형우 앞에서 답사를 했다. 고등과를 마친 후에도 일요일이면 언제나 강습원에 나가 일을 도왔으며 주시경 선생 댁을 찾아 아직 간행되지 않은 원고를 베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경성고보를 자퇴하고 고향이 돌아가 1년간 상복을 입었다. 1914년, 경성고보 4학년에 다시 입학하였다. 이 해 여름 방학에 선생은 경남 동래군에서 열리는 한글 강습회에 강사로 가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날 주시경 선생이 찾아와 '잘 가르치고 오라'고 부탁하고 가셨다. 강습 기간 중에 주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보를 받고 강습회장에서 추도회를 열고 백여 명의 강습생과 함께 우셨다.

1915년, 경성교보를 졸업하고 1명 뽑는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일본어 및 한문과에 입학하여 이 학교의 첫 한국인 유학생이 되었다. 3학년 때 두 명의 한국인 학생이 들어오자 고적함을 달래게 되었다. 3학년 때 정규학과로 한문학을 전공하라고 강권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교육학을 택하였다. 졸업반이 되던 해에 고종 황제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유학생과 함께 산에 올라 망제를 올렸다.

1919년, 고등사범을 마친 선생은 공립학교에서의 의무 복무 연한이 있었으나 병으로 쉬어야 한다는 구실로 향리에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조선인 상권 확보를 위해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고향의 논을 팔아 장학금을 갚고 1920년부터 사립 동래 고등보통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며 '우리말본'을 기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회복함에 뜻을 두신 선생은 그 방도를 연구하고자 더욱 공부할 필요를 느껴 다시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연구과를 수학하고 1922년에 교토 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철학· 심리학· 윤리학· 교육학· 사회학 등을 공부했으며 소년시절부터 손에서 놓지 않은 한글 연구를 위해 언어학 연구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1922년 일본 유학생들의 하기 순회 강좌에 참여하여 가로글씨의 안을 발표하고 이를 동아일보에 23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1925년 대학을 졸업하였다. 졸업논문은 <페스탈로치 교육사상>이었는데 주로 독일어와 영어로 된 책을 참고로 하였으며 현대의 학술논문으로서도 손색이 없는 조건을 갖추어 당시의 우리 학계의 수준으로는 이만한 수준의 논문을 달리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의 페스탈로치 연구의 권위자라고 불리우는 長田新이 1934년에 <페스탈로치 교육학>을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은 외솔 선생의 논문이 나온지 10년 후의 일이다. 이 논문이 인정을 받아 교토 교원회, 오사카 교원회 등에서 여러 차례 강연을 하였다.

또한 그동안의 언어학의 연구가 인정을 받아 나라(일본 땅이름) 외국어학교(현 천리대학) 조선어과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나라 외국어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선생은 교토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교육 사상을 연구했으며 <조선 민족갱생의 도>를 집필했으며 <우리말본> 집필도 많은 진전을 보았다.

1926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사는 사람들 같으면 식민지 출신으로 일본에서 정식 대학교수가 된 것에 크게 만족하였겠지만 외솔 선생은 나라를 되찾을 방도를 연구하고자 유학을 간 것이기에 겨레의 페스탈로치가 되리라 마음먹고 나라 외국어학교를 사직하고 귀국했다. 따라서 선생이 당시 식민사관에 봉사하는 일본인 교수들이 자리잡고 있는 경성제대 조선어과에 교수로 오라는 제안을 뿌리치고 연희전문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곳으로 선택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1926년, 동아일보에 '조선 민족갱생의 도'를 60회에 걸쳐 연재하여 천하의 독자를 감복케 하여 민족의 생기를 진작시키고 갱생의 희망을 품게 하였다. 이는 훗날 일제에 의해 독립운동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귀국한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우리말의 문법을 비롯하여 철학· 논리학· 윤리학· 교육학· 심리학 등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조선어연구회 등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정복당한 겨레가 다시 살아날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겨레 의식을 기르고 겨레 정신을 북돋우기 위해서는" 겨레의 말, 글을 보존, 발전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며 이를 위하여는 민족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한글 운동을 민족 운동으로 확대시켰다.

조선어학회의 동지들이 경성 제대 졸업생을 회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외솔 선생이 설득하여 받아들이게 한 것도 이런 사상에서 비롯됐다.

1937년, 선생은 드디어 <우리말본>을 완간하였으니 이는 국어학사상 획기적 금을 긋는 현대 문법의 과학적 체계의 최초의 확립이며 그 내용에 있어 오늘날까지 이에 미치는 큰 학술저서가 없는 불후의 역작으로 세계 언어학의 바이블이라 하는 블룸필드의 <언어 (Language)>를 능가하는 책이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3개월 간 투옥되어 고문을 받았으나 선생은 끝내 변절하지 않고 연희학원에서 강제 사직당하였다.

1940년, 국어학의 금자탑인 <한글갈> 완성. (1942년 간행)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3년간 옥고를 치름. 이 사건에서 외솔 선생은 피의자 33인 중 두 번째로 무거운 4년(이 극로 6년)을 언도받았다. 광복과 더불어 8월 19일 서울과 함경도 간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오신 외솔 선생은 8월 18일 총살당하기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소식을 출감하고서야 알았다고 술회하셨다. (1957년 코메트(공군본부 발행): <함흥감옥살이>, <나라 사랑> 10집에 재수록됨). 사흘만 광복이 늦었어도 외솔은 그 뒤 나라를 위하여 저 엄청난 일을 하시지도 못하고 돌아셨을 것이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형무소 문을 나서면서부터 외솔은 찾아온 제자들에게 학생을 가르칠 한글로 된 교과서가 없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교과서를 만들기 위해 선생은 미군정청 문교부 편수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일제가 버리고 간 식민지사관을 북치는 책들이 사방에 널려져 있어 직원들이 태워버리려는 것을 '책이란 언제 어느 때 한 줄을 인용하더라도 필요한 것'이라며 잘 정돈하여 보관하도록 하였다. 문교부 차관을 맡으라는 제안에 "나는 교과서를 만들어 문교부에 들어왔으니 차관 노릇은 않겠다"고 거절하고 교과서 만드는 작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아무도 엄두를 못내던 방대한 작업이 놀랍도록 빠른 시일에 이루어지자, 미 군정 장관은 외솔 선생에게 공로 표창을 수여했는데 선생께서는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우리 일을 하고 다른 나라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니 서글프다"고 아쉬워했다.

'막사이사이 상'이라는 것이 만들어져서 상을 주겠으니 서류를 보내라고 연락이 오자 역시 "나는 나라 잃은 백성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온 것뿐이니 남에게 상 받을 일 없다"고 거절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다.

1951년, 6· 25 동란으로 선생이 만들어 놓은 교과서들이 다 불타버리자 다시 편수국장으로 취임하여 전시의 어려운 상황에서 각급학교 교과서를 보전부 다시 발간하고 '우리말 어휘 조사'를 3년에 걸쳐 완성하였으며 초·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제정하는 등 해방 조국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 헌신하였다.

선생은 일생 동안 수많은 일본식 한자어를 새롭게 우리말로 바꾸셨지만 한글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특히 많은 말들이 만들어져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일제와 한자를 숭상하는 자들은 선생의 이러한 작업에 맹렬한 반감을 갖고 '날틀', '배꽃 계집 오로지문 배움집' 등 엉뚱한 말을 만들어가며 음해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지방색'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병이니 이를 없앨려면 타지방끼리 혼인을 맺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라 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전라도 규수를 울산 출신인 자신의 맏며느리로 삼았으며, 경상남도의 몇몇 문인들이 잡지를 만들고 창간호에 실을 축사를 부탁하자 '지방색을 표방하는 잡지에는 축사를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이렇듯 외솔 선생은 실천적 이상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문교부 재직 당시 공과 사의 구별을 철저히 하여 책상 위에 공용 편지지와 사용 편지지를 따로 구분하여 놓고 종이 한 장도 정부의 물건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으며, 퇴근 때에도 개인적 용무를 볼 일이 있으면 배당된 자동차를 타고 가지 않았으며, 서울사범대학에 국어 말본 강사로 나가게 되자 한 정부의 일을 공무 시간에 나가 보아주고 보수를 양쪽에서 받을 수 없다고 사범대학에서 주는 보수를 거절했다. 공무시간에는 사사로운 일로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 등 청백리의 표상으로 많은 일화들이 전해지나 당시 자유당 시절의 부패한 관료 사회에서 이를 질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생은 1970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연세대학교 부총장, 한글학회 이사장,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대표이사, 한글 기계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한글 수호의 선본장으로 일제 잔재에 맞서 투쟁의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주시경, 외솔로 내려오는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과 오구라, 다까하시 등 일본인에서 비롯된 학맥을 잇는 학자들의 대립에서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립대학 소속 학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자 1962년, 말본 용어에서 주시경, 외솔로 이어지는 우리말 용어가 금지되고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한자 용어가 채택되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글날'마저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외솔 선생이 빛날수록 자신들이 어둠에 묻힌다고 오해하는 몇몇 사람들은 외솔 선생을 폄하하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는다고 공언하기도 하지만, 민족이 힘을 합쳐 한글 운동을 해야 한다며 반대하는 동지들을 설득하여 경성제대 출신을 조선어학회에 받아들인 외솔의 정신은 세월이 흐를수록 역사에 더 큰 빛을 던진다.

선생은 일제 암흑기에 민족정신의 지표가 되었으며, 해방 후 격변의 사회에서 교육자로서, 사회사상가로서 <나라 건지는 교육>, <나라사랑의 길>, <우리말 존중의 근본 뜻>, <민주주의와 국민도덕>, <글자의 혁명>, <한글의 투쟁> 등 수많은 저서와 평생을 이어온 강의를 통해 겨레의 나아갈 길을 밝혔다. 평생 한글을 연구하여 학자로서 불후의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한글의 수호자로서 현대 한국정신사의 주춧돌이 되었다.

1970년 3월 23일, 선생은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국민 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의 하나뿐인 동생 최현구는 1919년 병영 3· 1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일제에 의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석방 후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다 요절했으며, 사촌동생 최현표 역시 6개월 징역형을 받아 후에 각기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