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기자가 남긴 조각보

이 혜순 (이화 여자 대학교 국어 국문학과 교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론인은 한 시대를 주도하는 주역임은 틀림이 없다. 언론인을 무관의 제왕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제 강침 시기만큼 언론인들이 한 시대를 이끌어 가는 책임과 의식을 자각하고 노력했던 시기는 드물 것 같다. 어머님은 바로 이러한 시기인 1924년에 여성 최초로 민족지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일하신 기자이다.

조산료 85원 10전을 받아낸 배짱

어머님은 여학생의 몸으로 두 번에 걸친 만세 운동을 주도할 만큼 민족 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셨고, 타고난 성격이 곧고 의지가 강하며 활동적인 분이셔서, 오늘날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남성 위주였던 그 당시의 언론계에서 독자적인 여성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이른바 고기가 물 만난 듯 그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셨던 것이다.

어머님의 조선일보 입사에 얽힌 일화가 있다.

스물한 살의 나이로 동경 일본 여자 대학 사회사업학부 3학년에 재학중이던 1924년에 어머니는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해서 춘원 이광수 선생댁을 방문했다가 그 부인이자 산부인과 의사인 허영숙 씨로부터 하소연을 듣게 되었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그 몇 달 전에 황금정(지금의 서울 롯데 호텔 부근)의 한 부호가 노산하는 아내의 산고에 닥쳐 허 산부인과로 왕진을 청해왔다. 허영숙 씨는 밤중에 인력거로 왕진을 가서 새벽녘에 해산을 마쳐주고, 그 뒤로 닷새 동안 간호부를 대동하고 다니며 산모 뒷처리, 배꼽이 떨어지기까지의 신생아 처리 등을 해주었다. 일을 다 마치고 나서 왕진비, 조산료, 처치료, 간호부 일당 해서 항목을 밝혀가며 85원 10전의 청구서를 보냈는데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 것이다.

“무슨 돈이 그렇게 엄청나게 많으냐? 부당 이득이니까 그대로는 못 보내겠다. 회계를 다시 뽑아가지고 오너라.”

이렇게 명령조로 말하며 청구서를 되돌려보냈다는 말을 전해 들은 허영숙 씨가 다시 전화를 걸어 의료 규정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다고 밝히고 다시 사람을 몇 차례 보내도 30원으로 깎아주지 않으면 돈을 못 치르겠다고 몇 달째 질질 끌고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당신이 그 일을 해결해주시겠노라고 자원하고 나서서, 하루 날을 잡아 오전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그 집에 끈질기게 앉아 한푼 깎임 없는 85원 10전을 받아다 주셨다.

그로부터 얼마 뒤에 조선일보는 신석우가 친일파 경영자로부터 판권을 사서 월남 이상재 선생을 사장으로 모시고 일대 혁신을 꾀하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여기자 등용 문제가 제안이 되었으나 적임자 물색이 곤란하였다. 그러던 차에 춘원이 중역들 앞에서 어머니가 그 부호집에 가서 조산료를 받아온 이야기를 하며 “그만한 수완과 배짱이면 넉넉하지 않겠습니까? 문장도 내 아내와 편지 왕래하는 것을 보니까 신문 기사 쓰기에는 넘치는 정도입니다”하고 추천하였다. 그러자 편집국장 민태원이 “동경서 나도 그 아가씨 보았는데 활발하고 붙임성이 있어 구실을 할 것 같다”고 찬동해 어머니도 모르는 사이에 최초의 여기자로 발탁이 되셨던 것이다.

명월관 기생을 동원한 수재민 구호 작업

조선일보 재직 중에 어머님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하셨던 것 같다.

부인 견학단을 조직하여 개성과 평양의 단오절 놀이 참관, 소요산 승경 감상과 밤줍기 대회 등을 열었는데, 이 견학단은 갈수록 부인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가장 흥미있는 행사가 되어, 무선 전화 방송을 견학하기로 한 제 14회 행사 때에는 참석자가 2,500명을 돌파했다.

무선 전화 방송이란 것에 대해서는 어머님이 당신의 회고록 <여성 전진 70년>에 기술해 놓으신 바를 토대로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방송국이 설치된 것은 1926년 11월 30일의 일로, 일본의 설립 허가를 얻어 덕수 국민학교 마당에서 동편으로 올려다보이는 정동 언덕 위에 자리잡았다. 그보다 앞서 그해 2월 16일에 체신국 안에 방 하나를 빌려서 무선 전화 방송소라는 간판을 걸고 한 주일에 나흘씩, 오후 여섯 시부터 여덟 시까지 방송을 하였다. 광석기나 진공관식 수신기를 갖추어 이 방송을 수신하는 집이 고작 여든 집 남짓했고, 물론 그 대부분은 일본인 가정이었다. 한 사람이 듣고는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하면서 돌아가며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뉴스를 들었다. 앞서 말한 부인 견학단은 바로 그 무선 전화 방송소를 견학한 것이다.

어머님은 또 을축년 대홍수 때는 기자들이 잘 가던 명월관의 기생들을 동원해서 수재민 구호 작업을 크게 벌였고, 민족혼을 고취하기 위해 시조 카드 놀이, 전조선 여학교 연합 바자회 등을 개최하여 대성황을 거두기도 했다. 융희 황제 인산일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키려던 '6월 사건'이 사전 누설되어 주도 인물들이 구속될 때에는, 이를 남보다 재빨리 감지하여 호외를 발간함으로써 일약 신문계의 패왕이란 칭호를 듣게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활약 때문에 여성으로서 남성이 가져보지 못한 많은 영광을 누리시기도 했다. 무선 방송으로는 우리나라 첫 공개 방송에서 사회를 맡음으로써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전파에 목소리를 싣는 주인공이 되었으며, 조선 비행구락부장으로 있던 비행사 신용인 씨의 고국 방문 비행 제 2일째의 행사로 개최된 신문 기자 동승 대회에서 어머님이 조선일보의 남자 기자들을 제치고 추천을 받아 영등포, 노량진, 용산, 고양군 일대를 300미터 높이에 떠서 나르는 비행기 탑승의 감격을 맛보기도 하였다. 남조선 여자 정구 대회에서 시구를 하신 것도 어머니셨다.

서울에서 가장 초라한 집을 찾으세요

돌아가시기 전 해인 83년에 어머님은 전재산을 조선일보에 기탁하였다. 이 기금으로 '최은희 여기자상'이 제정되었으니, 이것은 후배 여기자들이 어머님이 이루신 여성 기자의 전통을 잘 계승하여 사회에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어머님이 기탁하신 돈은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지만 모두 순수히 어머님이 팔순의 나이까지 끊임없이 해오신 문필 작업과 철저한 절검 정신의 소산이었기 때문에 정말로 귀중한 돈이다.

어머님을 회억하시는 분들은 무엇보다 어머님의 검약성을 말씀하신다. 실제로 어머님은 검약하게 사셨다. 얼마 전 여기자 상을 수상하신 분들이 모여 방담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중 한 분이 “최선생님이 생전에 사시던 행촌동 집을 가보고 놀랐습니다. 작은 한옥에서 다 떨어진 문고리를 다시 붙여 쓰실 정도로 검소하게 사시더군요.”라고 회고한 것을 보며 나는 차라리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어머니를 찾아오려고 집의 위치를 묻는 전화가 오자, 어머니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울에서 가장 초라한 집을 찾으시면 돼요.”

처음 시집오실 때 샀던 한옥에서 수십 년을 보내며 겨울이면 그 추운 외풍을 고스란히 맞고 주무시는 노년의 어머니를 보는 일은 나뿐 아니라 우리 삼남매에게 모두 너무나 속상한 일이었다. 더우면 선풍기도 좀 돌리시고 추우면 전기 난로라도 따뜻하게 피워놓고 지내시라고 우리는 어머니께 그런 것들을 사다 드렸지만 어머니는 거의 쓰질 않으셨다. 냉장고에 넣을 것들은 서늘한 곳에 잘 보관하시고 여름에 음식이 상할 성싶으면 제때제때 끓여놓으셔서 냉장고도 필요가 없었다.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서 누릴 수 있는 생활의 편리함을 어머니라고 모르셨을까? 우리는 어머니와 그 문제를 두고 늘 갈등했지만 문명의 이기가 넘쳐나서 환경을 오염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는 요즈음, 나는 어머니가 먼 날을 내다보시고 그리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다 탄 연탄재도 그냥 버리질 않으셨던 어머니의 자원 재활용 정신은 '새 것 컴플렉스'에 걸린 요즈음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전기와 수도는 물론 절약의 일차적 대상이었다. 사람들이 없는 방이나 마루에 등불을 환히 켜놓는 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수한 물에 발을 닦게 하신 뒤에 빨래를 담가 놓았다가 그 물을 다시 화단에 주셨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철저한 검약 정신으로 살아왔다면 환경 문제나 자연 문제가 이처럼 빨리 다가오지는 않았을 터이다.

습자지 달력을 휴지로 쓰시고

어머니는 늘 헌옷을 입고 지내셨다. 그래서 약속을 않고 집으로 찾아온 이들이 어머니의 입성을 보고 놀라곤 했을 뿐더러 어떤 분들은 어머니를 바라보고 “주인 안 계십니까?”라고 묻곤 했다. 자식들이 입던 옷도 하나 버리시지 않으시고 그대로 모아 두셨다가 그중 성하고 좋은 것은 깨끗이 손질해서 구호품으로 보내셨다. 언니가 미국 유학 중이었을 때에 여학교 동창생인 한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 친구가 편지에 쓰기를, 우리 집에 들렀더니 어머님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 데에 보내실 헌옷가지를 깨끗이 빨아서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손질하고 계시더라면서 “너는 참 훌륭한 어머니를 모셨구나”라고 썼다 한다.

어머니는 우리가 입던 옷을 당신이 물려 입으시기도 했고 못 입게 된 옷들은 잘라서 조각보, 방석, 방장, 이불을 만들기도 하셨다. 어머니를 방문했던 많은 명사들이 감탄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프게 여기기도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조각보들이었다. 그 당시에는 자식된 우리들에게도 이 조각보들이 빈곤의 표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방석, 커튼, 이불 등 거의 완제품이 판을 치는 요즈음 어머님이 손수 만드셨던 조각 모음은 내게는 개성과 사랑, 그리고 성실의 결정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나 역시 종이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살다 보니 어쩌다 종이가 제 구실을 다 못하고 내 방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호통이 떨어질 것만 같아 조마조마하다. 어머님은 원고지나 흰 연습장 뒷면을 알뜰히 활용하셨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계속해서 습자지로 된 달력 종이를 휴지로 쓰셨다. 부드러운 휴지를 사다 드리고 아무리 권해도 어머니는 그 습관을 바꾸지 않으셨다. 신문지도 꽁꽁 싸서 몇백 장씩 묶어두었다가 고물 장수에게 파셨다. 마침내 우리는 새 종이, 새 휴지를 사다 드리는 것보다 헌 종이, 묵은 신문지 뭉치를 갖다 드리는 게 어머니께 더욱 도움되는 일인 듯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신문지를 수백 장씩 묶어서 갖다드리거나 우리가 한 면만 쓴 종이를 갖다 드려 초고지로 쓰시게 했다.

어머니의 시간 관리는 물질 관리보다 훨씬 더 절제가 있었다. 어머니는 혼자 사셔도 친구를 만나러 다방에 가서 앉아 있다거나 멀거니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으셨다. 원고 쓰시는 일이 아니면 당시 맡고 계시던 대한부인회에 나가 남을 돕는 일에 시간을 바치셨다. 그럴 때의 옷차림은 또 어찌 그렇게 깔끔하셨던지, 집에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차리신 당신의 품위있는 모습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었다. 그렇게 잦은 사회 활동 중에서도 외식을 낭비라고 생각하셨던지 식사는 꼭 집에 와서 하셨다.

독립기념관 성금 100만 원

그러나 나는 어머님을 검소했던 생활로만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처녀 시절에 어머님은 여기자로서 상당히 유행에 민감하신 분이었으니 검정 통치마, 흰 저고리 일색이었던 당시의 신여성들의 의상에 근대화 바람을 일으켜 '멋쟁이 여기자'로 불리기도 했다.

어머님은 일찍 홀로 되어 우리 삼남매를 혼자 힘으로 키우시게 되면서도 극도의 검약 생활을 실천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머릿속에는 어머님의 검약성보다는 중요한 일과 중요치 않은 일을 구분하여 돈을 사용하신 엄격한 씀씀이의 원칙이 더 인상깊게 남아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기자상 기금 문제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되거니와, 어머님은 폐품을 이용하시고 함부로 버리시지 않으시는 등의 일에 모범을 보이시고 자원 절약에 앞장서시기는 했지만 뜻있는 중요한 일에는 돈을 아낌없이 내놓으셨다.

82년에 정부에서 독립 기념관을 세운다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조선일보에 제일차로 100만 원을 맡기시면서 후손들에게 독립 정신을 키워주도록 이 일이 꼭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 신문 기사를 읽고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그 뒤를 이어 성금 행렬이 줄을 이었다.

나는 66년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미국 유학을 준비하게 되었는데 지원한 대학 쪽에서 학비만 면제해주겠다는 바람에, 생활비를 지급해 줄 수 있는 대학을 찾기 위해 한 해를 유학을 미루어야 할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아신 어머님은 공부에 공백이 생기면 안 된다면서, 놀랍게도 생활비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말씀을 실천하셨다. 궁핍했던 60년대 그 시절에 어머님이 자녀의 학문을 위해 쓰신 그 깊고 큰 마음을 눈물겹게 느끼면서 나는 어머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머님 덕분에 차질없이 유학을 떠난 나는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해 이내 생활비 장학금을 받게 되었으며, 시간 나는 대로 도서관의 조교 일도 해서 어머님의 송금이 석달 만에 끝나게 해드렸다. 거기에는 언니의 덕도 컸다. 지금은 덕성 여대 자연과학대 학장으로 있는 언니는 그 당시에 코넬 대학 원예학과 조교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자기의 장학금을 아껴 달마다 나의 생활비를 보태주었다.

이렇듯이 어머님은 작은 것을 아껴 큰일에 쓰신 분이지 맹목적으로 절검하신 분은 절대 아니셨다. 우리들에게 용돈을 주신 적은 거의 없었지만, 여러 번의 전쟁과 사회 변동 속에서 나라 전체가 어려웠던 그 시절에 우리 삼남매 모두 대학원까지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어머님의 힘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학비 보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머님은 자신도 어려서부터 자력으로 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자립 정신을 항상 북돋아주셔서 우리들은 학생 시절부터 재정적으로도 자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 삼남매가 열심히 공부해서 각종 장학금의 혜택을 받았던 것도 어머님이 키워주신 이러한 자립 정신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 유학 시절에 언니가 자기의 경비를 요모조모로 절약하여 나를 도와준 것도 동생을 학문적으로 성장시켜 주려는 사랑과 배려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님의 경제적 부담을 벗겨드리려는 마음도 적지않게 작용했기 때문일 것으로 나는 믿고 있다. 어머님이 심어주신 이 정신은 오빠의 대학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오빠는 중앙 대학 전과정을 장학금으로 마쳤고, 지금도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머님의 검약은 그 자체로도 현대 사회에 귀감이 되지만, 그러나 무엇보다 이것이 가져다 준 성실한 생활 자세와 강인한 정신력이 더 소중하다고 본다.

인왕산 계곡에서 이불 호청 밟기

우리 삼남매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어머님이 자녀 교육에서 역점을 두신 것이 무엇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봄마다 우리 식구는 모두 집에서 비교적 가까웠던 인왕산에 올라가 계곡에서 밀린 빨래를 했다. 가장 힘이 없었던 나는 바위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물에 불린 이불 호청을 밟았던 기억이 난다. 그것은 참으로 자립과 협동을 일깨워준 산 교육이었다. 점심도 가져가서 둘러앉아 먹으며 함께 빨래하는 그날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힘들면서도 즐거운 날이었다.

우리가 가난했지만 당당하게 자란 것은 이러한 어머니의 교육 덕분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좀 큰 뒤에는 다들 어머니의 경제적인 사정을 헤아려 짐작하고 나름대로 어른스러운 행동들을 하곤 했다.

언니는 고등학교 시절에 어머님의 부담을 덜어드리겠다고 단체 영화 관람을 빠진 적도 있었다. 언니는 그날 영화 관람에서 빠진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에 학생회장이었던 오빠는 졸업식날 시장상을 비롯한 큰상을 받을 때에 궁둥이를 누벼 기운 교복 바지에 후배의 웃옷을 빌려 입고 앞으로 정중히 걸어나갔다.

어머님은 그 당시에는 아무 말씀이 없었으나 후에 이 두 가지 일이 자식을 키우며 있었던 가장 가슴 아팠던 사건들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회억하시던 생각이 난다.

이러한 근검 절약과 철저한 폐품 활용으로 본디 오래 되어 낡은 우리 집은 더욱더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누추함과는 판이하게 어머님의 위생 관리는 무섭도록 철저하였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 우리 삼남매는 각각 어머님에 대한 회억의 글을 쓰는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 중 전공이 식품과 관련된 언니가 무엇보다 어머니에게서 주목한 것이 바로 어머님의 위생 관념이었다. 언니는 그 글에 이렇게 썼다.

어머님은 집안이 잘 정돈되어 있지 않은 것은 크게 탓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위생 관념에 소홀할 때는 호되게 꾸중을 하셨다. 행주는 반드시 깨끗이 빨아서 햇볕에 말리셨고 늘 파리 한 마리가 호랑이 100마리보다 무섭다고 말씀하셨다. 자기 집 앞을 깨끗이 쓸고 그 쓰레기를 모아서 옆집 담에다 착 붙여 놓는 서울 사람들의 얕은 심성을 못마땅해 하셨다. 광복 뒤로 서울시의 외곽 단체인 보건 부인회를 창립하여 청소, 방역을 기본 목표로 활동하시던 어머님으로서는 당연한 질책이셨다. 그 회원들의 눈부신 활동으로 첩첩이 쌓인 쓰레기에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던 서울의 청계천과 뒷골목들이 눈에 띄게 변모되어 갔다.

어머님이 초대 회장으로 벌이신 보건 활동 계획에는 어린이 결핵 요양원과 부설 농장 및 목장의 건설, 신생아를 위한 실비의 산원 설치, 그리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영양 전문 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계획은 모든 여성 단체를 대한 부인회에 합류시키려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에 의해 중도에 좌절되었다. 어머님은 뒤에 식문화 연구회를 조직하기도 하셨는데, 이러한 활동은 반드시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원짜리로 채운 베개와 방석

해방과 그에 이은 사상적 과도기 그리고 전쟁 따위를 거치면서 어머니는 준비 정신을 몸에 익힌 듯했다. 우리 집에 쌀이니, 굴비니 하는 기본적인 양식과 공책이나 연필 같은 학용품은 늘 쌓여 있었고 간식용 건빵도 무척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묵은 쌀을 먹고 묵은 노트를 썼지만 어머니의 준비 정신 덕에 심리적으로 매우 든든해 했다.

6.25가 나고 라디오에서는 서울을 사수하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가 흘러나올 때에 어머님은 조흥은행 서대문 지점장에게 전화를 하셨다. 이미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은행마다 줄을 지어 거리로 뻗쳐 있던 터였다.

지점장은 고액 지폐가 없으니 부대를 가지고 뒷골목으로 오라고 했고 어머니는 10원짜리 지폐 한 부대를 지게꾼에게 지워가지고 돌아오셨다. 그리고는 그 돈으로 네 식구의 베개 네 개와 방석 두 개를 만드셨다.

6.25가 끝나고 공산당이 떠나기 직전에 그들은 마을에 온통 불을 지르고 갔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는데 어머니는 그 베개와 방석을 보따리 네 개로 꾸려서 언니와 내게 주어 내보내셨다. 나는 어머니가 주신 베개를 품에 꼭 안고 서 있었다.

“너희들은 철도 없다, 그까짓 방석이나 베개가 무에 그리 장하냐? 너희 옷들이나 챙겨가지고 나오너라.”

동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철부지라고 나무랐지만 나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머니의 비상금이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걸 아는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것만 안고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보다.

박물관에 기증한 장롱 두 개

어머님은 80년에 일흔일곱의 고령으로 앞서 얘기한 <여성 전진 70년-초기 여기자의 회고>란 자서전을 쓰셨다. 전통과 혁신의 중간 지점에 사시면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그 시대를 체험하며 새로움을 창조했던 어머니의 삶은 그 자체가 바로 살아 있는 역사적 증언이기도 했다. 그 책의 끝부분에 이런 소원을 기술하셨다.

“나는 생전에 여기자상을 제정하고 싶다. 신문방송학과 우수 여학생에게 장학금도 주고 싶다. 생전에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사후에라도 이행하여 주기를 아들 딸에게 부탁한다.

내가 50여 년을 애용한 내 혼수품인 주화류 삼층장과 자개 양복장은 국립박물관에 헌납할 것을 최순우 관장님께 서면으로 말씀드렸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최은희 여기자 상은 84년 5월에 첫 수상자가 나온 뒤로 올해 벌써 11회를 맞이하게 된다. 오빠를 중심으로 조직된 추계문화사업회는 해마다 각 대학 신문방송학과 우수 학생을 뽑아 이미 여러 해째 장학금을 제공하고 있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의 팔라는 유혹도 물리치시고 지켜오신 삼층장과 자개 양복장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한 해 전에 병원에 입원하고 계실 때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겉은 주화류고 속은 오동이며 백동 장식에 매화무늬, 국화무늬 등이 새겨져 있고 자개까지 모두 수제품이었다. 이들은 우리 삼남매의 어릴 적 꿈과 어머님의 숨결이 담겨져 있는 정말 귀중한 것이었다. 그 장을 옮겨가는 날, 현 박물관장이신 정양모 선생님도 오셨었는데, 이삼십년대의 희귀한 장이어서 시대적인 의미가 매우 큰 중요한 문화 유산이라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섭섭함을 미리 헤아리시고 장의 각 부분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셨다.

어머님은 '의롭고 깨끗하게 살자'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으시면서 실천하셨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훈으로 남겨주셨다. 많은 신여성들이 친일 활동을 벌일 때에 어머님은 지조를 지키시면서 고고한 삶을 영위하셨다. 그리하여 돌아가신 뒤에 정부가 주는 문화 훈장, 독립 유공자에게 주는 건국 훈장이 추서되었다. 어머니의 삶과 그 삶의 자세가 정말 소중하고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