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903년 우리나라가 아직 독립 국가의 형식은 갖추고 있었으나, 그 속으로는 거의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린 때에, 석인 정 태진 선생은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그리하여 순조롭게 학업을 계속하여, 그 때 다른 사람들로서는 들어가기 어려웠던 연희 전문학교를 마치고, 잠시 교편을 잡다가 다시 뜻을 세워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1927년, 그러니까 선생의 나이 스물다섯 살 때이었다.

그 때 미국 유학생을 만나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도 더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니까, 좀더 좋은 직장이 있었을 것인데도, 미국에서 돌아와서도 다시 옛날에 교편을 잡던 여학교로 돌아갔으니, 여기에서부터 선생의 세속을 떠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나마 그대로 계속하였더라면, 별일 없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었으련만, 어찌 그 어려운 조선어 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을 위해 그 학교마저 그만두었을까? 정말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수라도 넉넉하였으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 때의 조선어 학회는 지금의 한글 학회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한 학회였으니, 그 보수는 형편이 없을 것이었음은 생각해 보나 마나가 아닌가? 그런데도 그 일을 맡으려 여기 발을 들여놓았으니, 도대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이러한 일을 감행한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말과 글은 한 민족의 피요, 생명이요 혼이다. 우리는 지나간 마흔 해 동안 저 잔인무도한 왜적이 우리의 귀중한 말과 글을 이 땅덩이 위에서 흔적까지 없애기 위하여 온갖 독살을 부려온 것을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고 몸서리가 쳐진다.

아! 8·15 해방의 기쁨.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울려 나오는 우리 어린이들의 '가갸 거겨' 소리!

이 글은 '왜적의 정부'가 "재일동포를 교육하는 모든 교육 기관에서 조선말로 교육함을 금지하라"한 것을 보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쓴 글, <말과 글을 피로써 지키자!> (1946년 7월에 나온 <한글> 13권 2호, 통권 104호에 실림)의 첫 대목인데, 이 글만 보아도 선생이 어째서 그 평탄한 길을 가까이에 두고서도 그 어려운 가시밭 길을 자진하여 걷게 된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우리 겨레의 피요, 생명이요, 혼임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걸어온 길은 말 그대로 가시밭 길이었다.

조선어 학회에 와서 일을 보게 된 지 1년이 채 되지 못하여, 저 혹독한 조선어 학회의 수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3년의 혹독한 고난은 겪었으나, 그러나 8·15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불행한 가운데서도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풀어 볼 수 없는 선생의 행로를 더듬어 볼 수 있다.

해방 뒤 미국의 군대가 다시 들어왔을 때에 가장 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미국 유학생들이었다. 누구나가 다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였으며, 누구나가 다 정치의 제일선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선생은 다시 그 가난한 한글 학회로 돌아왔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친구들에 모두 고위 고관이 되었고, 정계의 거두들이 되었는데도, 가난과 고난의 길을 스스로 기리다니. 우리들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도리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길마저 하늘은 선생님에게 편안히 걸어가도록 두지를 않았다. 6·25의 어려운 고비를 어렵게 넘겼을 무렵, 1952년 11월 하느님은 무참하게도 선생을 불러갔다. 그 때 선생의 나이 불과 50세.

우리는 이러한 일을 볼 때마다, 정말 하느님이란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를 품게 된다. 있다면 이렇게 잔인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렇게도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그렇게도 무참한 죽음을 주다니 정말 인생의 무상함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아무리 울부짖어도 풀릴 것 같지 않은 우리들 마음속에 맺힌 원한이다.

1995년 4월 30일
한글 학회 이사장 허 웅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