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태진과 조선어 학회 사건 (2) - 일부

이 응호 (명지대 명예 교수, 국어학)

일본은 조선 침략 통치 말기에 이르렀는지, 조선에 오직 하나만 남은 조선의 최고 지식인들(민족 지도자들)의 단체인 '조선어 학회'를 때려부수려고 음모를 꾸몄다.

조선어 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회의 편찬원인 정 태진 선생이 그 음모의 첫 인물로 걸려들었다. 그리하여, 누구보다 가장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살아났다. 정 태진 선생이 극악한 일제의 음모에 걸린 날이 바로 1942년 9월 5일이었다.

1. 사건의 발단: 열차 안에서 여학생이 쓴 조선말

1942년 여름 방학 날이다. 함흥의 '영생여고보'도 방학을 하였다. 기숙사에 있던 여학생들은 책 보따리를 한 아름씩 안고 교문을 나서 '함흥 정거장'에 나가서 기차에 올라탔다. 그 가운데 세 학생은 '회령'을 향해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 세 학생은 집에 돌아가면 부모님 곁에서 쉴 것을 생각하니 마냥 기쁘기만 하였다. 깔깔 웃어대며 재각기 여름 방학 생활 계획을 발표하며 떠들어댔다. 이제 '전진 정거장' 하나만 지나면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홍원 정거장'이다.

바로 이 때에, 옆자리에 앉았던 일제의 앞잡이 '홍원 경찰서'의 형사부장 야스다(왜놈의 이름이나, 사실은 조선 사람임)가 여학생들의 말을 가로막으며,

어이('나쁜 자식들'과 같은 일본말) 나졔(어찌하여) 국어(일본어)를 상용하지 않고 조선말을 쓰는가?

하고 나섰다. 그 때는 일제가 우리 조선 사람들에게 "국어를 상용하자"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집집마다 그 구호를 써붙이게 하고, 관청에도, 거리의 전봇대에도, 심지어 공중 변소칸에까지 그 구호를 써붙이게 하였다. 곧 언제 어디에서나 국어(일본말)만을 쓰도록 했다. 일본말을 쓰지 않고는 기차표 한 장도 살 수 없었던 때였다. 그리고, 그 때는 조선말을 쓰는 이는 반제국주의자인 조선 독립 운동가요, 조선 민족주의 사상가로 몰아 무거운 벌을 주며 못살게 구는 때였다.

그 때의 학생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국어(일본말)를 써야 함을 알고 있었으나, 일제의 국어 강요는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반사적으로,

당신은 누구요? 조선 사람끼리 조선말을 좀 썼기로서니, 그것이 뭐가 나빠요?

하고, 한 학생이 일본말로 대들었다. 야스다 형사는 기차가 '전진 정거장'에 도착하자 여학생들을 기차에서 끌어내려 역장실로 끌고갔다. 거기에서 강제로 교복을 벗기고, 가슴을 담뱃불로 지져 가며 문초를 하였다.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반항하는 학생 박 영희의 집(홍원)에 가서 집안 수색을 하여 박 영희의 묵은 일기장을 압수하였다. 개만도 못한 야스다 형사는 여학생의 일기장에서 어떤 흥미를 느끼고 읽어 보려고 압수하였던 것이다.

무슨 냄새라도 맡을 듯이 코를 너불거리며 읽어가던 야스다는,

오늘 국어를 한 마디 썼다가 선생님한테 꾸지람을 받았다.

라는 구절을 보았다. 야스다란 놈은 '국어(일본어)를 썼는데, 왜 칭찬을 못 받고, 꾸지람을 받았을까?'하고, 의심을 가졌다. 이 의심이 꼬투리가 되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2. 국어(일어)를 쓴 것을 꾸지람한 정 태진 선생

야스다 형사는 어린 여학생들을 홍원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어 놓고, 개와 같이 달려들며 욕이란 욕은 다 퍼부으며 모진 고문을 하여, 꾸지람을 한 교사가 영어를 가르치던 정 태진 선생임을 알아냈다. 그리고, '영생여고보' 학생들이 남달리 투철한 민족 정신을 갖고 있는 것도 정 선생의 영향임을 알아냈다. 사실은 정 선생은 수업 시간마다 기회를 얻으면 학생들에게,

너희들끼리는 조선말만을 써야 한다. 너희들이 아름다운 조선말을 안 쓰면, 얼마 아니 가서 조선말과 민족은 이 지구상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게 된다.

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유명한 조선 문학 작품을 소개하여 감상케 하고 조선말글의 아름다움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간추린 조선 역사를 들려 주어 감수성이 많은 여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불어넣었다. 정 선생은 학생들이 영어와 수학을 잘 배워 주는 것도 고마웠지만, 나이 어린 학생들이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것에 더 만족하고 있었다.

한편, 홍원 경찰서에서는 여학생들이 고문에 못 견디어 억지 자백함에 따라, "조선 독립의 기초를 다지는 사상 교육과 일제에게 반항하는 교육"을 시킨 정 태진 선생을 잡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나, 정 선생은 1년 전에 '영생여고보'를 떠나고 함흥에는 없었다.

정 선생은 '연전' 재학 시절에 사상적으로 뜻이 맞았던 정 인승 선생이,

일제의 조선말 말살 정책으로 이 지구상에서 조선말이 없어져 가고 있음이 안타까워서 '고창고보' 교사직도 내던지고, 조선어 학회에 와서 봉사하고 있는 중인데, 같이 조선어 학회에서 일을 하자.

하고 간청하므로 1940년 봄방학에 '영생여고보'를 사직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때 조선어 학회에서는 하루빨리 <조선말 큰사전>을 엮어 내기로 하고 서두르고 있었다. 일제가 조선말을 없애기 전에 <조선말 큰사전>을 만들어 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0월에 조선의 유지 108명의 발기로 발족한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꾸준히 써 온 사전 원고를 가지고 사전 엮기를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1940년부터 사전 엮기 사업은 본격화했다. 조선어 학회는 일제가 발악하여 이 지구상에서 조선말이 사라질지라도, 조선말이 '사전'에 남아 있는 한, 언젠가는 조선이 국권을 회복하는 날에는 조선말도 되살아날 것을 믿고 <조선말 큰사전> 엮기를 서둘렀던 것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한 달도 안 되어 봄방학을 마치고 개학이 되자 '영생여고보' 학생들의 성화에 못 견디어 다시 '영생여고보' 교단에 섰다. 교단에 다시 섰으나,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면 학교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일제의 손이 학회에 미치기 전에, <조선말 큰사전> 엮기를 마쳐야 하므로, '얼마 동안은 인재 교육도 포기하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학교를 다시 사직하고, 이듬해(1941년) 봄에 서울로 올라와 조선어 학회의 사전 엮기를 계속하게 되었다. 정 선생은 자기로 말미암아 사전 엮기가 늦어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아예 이불을 싸들고 집에서 나왔다. 회관에서 정 인승 선생과 함께 밥을 손수 지어 들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전 엮기에 매달렸다. 이렇게 하여, 1년 6개월만인 1942년 3월에야 겨우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여섯 권 중)의 원고를 인쇄소로 넘기고 있었다.

3. 학회를 때려잡을 일제의 음모에 걸림

일제는 조선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민족 단체인 조선어 학회를 때려잡아 없앨 구실을 찾다가 그 기회를 잡았다.

함흥 '영생여고보' 학생들의 '조선말 사용 사건'의 주동자로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원인 정 태진 선생을 잡아들이고, 조선어 학회를 단방에 때려잡아 없앨 음모를 꾸몄다. 일제는 1942년 9월 5일부터 행동을 개시하였다. 정 태진 선생을 1942년 9월 5일에 '영생여고보' 학생들의 '조선말 사용 사건'의 증인으로 홍원 경찰서로 불렀다. 홍원 경찰서는 불려 온 정 선생에게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며 겁을 주고,

너를 증인으로 불렀으나, 너는 증인이 아니야! 네가 바로 사건의 주동자야, 임마. 알았소까?

하며, 정 태진 선생이 자신을 증인으로 부른 이유를 묻기도 전에 정 선생을 감방에 밀어 넣고는, '조선어 사용 사건'으로 걸려든, 곧 일기장의 주인 박 영희는 불러내어 그 자리에서 석방하였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경무국의 지시대로 함경남도와 경기도 두 경찰국의 민완 형사들이 서울로 종로구 화동의 조선어 학회 회관을 덮쳤다. 밤새워 사전 엮기를 하다가 막 새벽잠이 든 학회 대표 이 극로 간사장, 정 인승, 권 승욱 등의 편찬원을 체포 영장 한 장 없이 꽁꽁 묶어 끌어내고, 여기저기서 새벽 기습 작전으로 붙잡아 낸 조선어 학회의 중심 회원 열한 사람과 조선어 학회 사전 편찬실에서 사전의 원고와 그리고 학회의 회계 장부와 회의록, 후원자 명부 등을 모두 차압하여 같은 차에 싣고, 정 태진 선생이 묶여 있는, 사건의 발단이 된 홍원 경찰서로 끌어다가 가두었다. 이 날이 바로 1942년 10월 1일이다.

이 날은 일제가 조선을 삼키고, 서울 한복판에다가 '조선 총독부'라는 일본 제국의 통치 기관을 세우고, 조선을 식민지 통치한 지 33년이 된 기념일이다. 일제는 이 날을, 조선 안에서 마지막 남은 민족 운동 단체이며, 조선의 최고 지성인들이 거의 모여 있는 단체인 조선어 학회를 때려잡아 없애는 날로 삼았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때려잡기 오래 전부터 '3·1 운동'과 같은 '제 2의 3·1 운동'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가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1931년에 조선 반도를 발판 삼아 만주 땅을 송두리째 집어먹은 '만주 사변'과, 1937년 7월에 중국에 생트집을 잡고 중국 대륙도 삼켜 버린 '중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침략 야욕이 송두리째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쟁과 침략을 싫어하는 조선 사람들이 '3·1 운동'과 같은 민족 운동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하여, 1938년에 이르러서는 조선 학생에게 가르치는 조선어 교육을 폐지시키고, 1940년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창씨령'을 공포하여 조선 사람들의 '성'을 일본 사람의 '성'으로 바꾸도록 강압하고, 1941년 3월에 들어서는 해괴망측한 '조선 사상범 예비 구속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거나,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많은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을 사전에 검거하여, 곧 미리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어 두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선어로 된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모든 신문과 잡지는 죄다 폐간시키고, 그 해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과 영국에 대하여 전쟁을 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은 일본 군대로, 여자 청년들과 소녀들까지 끌어다가 소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의 위안부 노릇을 시키는 등 천인공로할 짓을 내놓고 버젓이 하고 있었다.

일제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세계 지배의 야욕까지 품고, 최후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야욕을 안 조선어 학회는 한시라도 빨리 <조선말 큰사전>을 엮기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4. 허위 자백서에 따른 회원 총검거

일제는 '홍원'으로 끌고 온 정 태진 선생 등 열한 명의 회원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다. 아무런 죄도 없는 피의자들을 알몸으로 뉘어 놓고 검도용 대나무 몽둥이로 살갗이 찢겨 나가도록 매질을 하는 이른바 '육상 전쟁'과, 피의자들을 나무 의자에 뉘여서 묶은 다음에 코에 고춧물을 숨이 끊어질 때까지 부어넣는 이른바 '해상 전쟁'과, 피의자들의 발목을 한데 모아 묶고 천장에 거꾸로 매달거나, 두 팔을 뒤로 젖혀서 허리에 묶고 목총을 두 팔과 허리 사이에 가로 지른 다음, 목총 양 끝에 줄을 매고 그 줄을 천정에 걸어 매다는 이른바 '공중 전쟁'이라는 극악한 고문을 하여,

조선어 학회는 상하이의 대한 임시 정부에 자금을 마련하여 보태는 비밀 독립 운동 단체이다.

라고, 일본 경찰이 작성한 허위 자백서에 손도장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는 그 자백서를 가지고 조선어 학회의 남은 주요 회원들을 차례로 잡아다가 가두니, 모두 33사람에 이르렀다. 이들을 날마다 아침 저녁 두 차례씩 감방에서 경찰 무술 연습장으로 끌어내어, 회원들이 서로 맺고 있는 우정을 끊기 위한 고문도 하였다. 지식인들로서의 수치심을 갖게 하려고, 서로 마주 선 동지의 얼굴 반쪽에다가 먹물로 먹칠하게 하였다. 또 동지들의 등에다가,

너는 거짓말쟁이다. 너를 극도로 미워한다.

라는 일본말을 먹물로 쓰게 한 다음에, 장내를 한 바퀴씩 번갈아 돌아오게 하였다. 그 때 돌지 않고 있던 동지는 한 바퀴를 돌고 오는 동지의 뺨을 한 대 때리고 정강이를 발로 한 번씩 걷어차게 하였다. 그리고, 뺨을 얻어맞거나 정강이를 걷어차일 때는 반드시,

나는 황국 신민(일왕의 백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뺨을 맞는다.

라는 소리를 지르게 하였다. 만일 마주한 이를 가만히 때리거나, 뺨맞는 이가 구호를 작게 지를 때에는, 두 사람 똑같이 다섯 대씩 몽둥이로 얻어맞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항상 매 맞는 동지가 "한 방에 넘어지도록 때려라"고 미리 주문하였다. 그러나, 한글 동지들은 아무리 왜놈들에게 혹독한 매를 맞을지언정 "우리는 동지의 뺨을 칠 수 없다"고 고집하다가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5.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시를 지어 바침

1942년 9월 5일에,

홍원에 내려갔다가 곧 돌아오겠습니다.

라고 하는 아들의 인사말이 귓전에서 채 사라지기 전, 9월 15일에 증인으로 불려간 아들이 곧 돌아오리라고 기다리고 있던 정 선생의 집에, 난데없이 형사대가 달려들었다.

요보('여보'라는 호칭을 낮춰서 부르는 왜말)는 사상범의 아버지야! 알았쇼까?

하고 정 선생의 아버님을 윽박지르며 가택 수색을 하였다. 책이란 책은 죄다 가져가면서,

요보 남편은 언제 석방될 지 몰라. 살아서 오면 다행이지. 하나님께 잘 빌어 봐.

하고, 정 선생의 아내에게 한 마디 내던지고 갔다. 이 때에 정 선생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자로 구속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어보지 못하고 자리에 누운 뒤 한 번도 일어나 보지 못하고 있게 되었다.

한편, 원체 건강하시던 아버지도 아들 태진의 소식을 듣고는 한 번 자리에 누운 뒤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였다. '홍원 경찰서는 고문으로 악명 높은 곳'이라는 소문까지 듣고는 넉 달 만에 아들의 편지 한 장 받아 보지 못하고 1943년 1월 30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이렇게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식을 정 선생은, 일본 군대에 징집되어 입대하는 장정에게 특별 허가된, 자기 아들의 면회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16살 어린 사이에 또 한 살 어린 학생(남편. 정 태진 자신을 가리키는 말)과 결혼한 후 10년 동안을, 시부모 모시고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정 선생의 학력은 중학교, 전문학교, 미국 유학)만 하던 아내마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집안 소식을 들었으나 아무 말 못 하고, 고문에 지친 얼굴에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얼마 뒤에,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을 곁에 두고 온 가족이 모여 살게 되었다고 좋아하는데도, 또 교편을 잡으러 함경남도 함흥으로 내려갔던 일이 눈에 떠올랐다. 그리고, 10년 동안을 시부모 모시고, 아들딸 거느리고 혼자 고달프게 살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남편이 모처럼 조선어 학회 사전 편찬원으로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

온 가족이 한 집에서 살게 되어 기쁘다.

고 말하던 아내의 모습도 눈앞에 보였다.

이렇게 지난날의 일이 떠올라 소리내어 울어 보려고 애써 보았으나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슬프고 분한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었다. 그리고는 감방을 돌아서 나가려는 아들에게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하고 힘주어 일렀다. 그리고, 아들이 간 다음 얼마 뒤에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한시 한 수를 지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맏아들로서 이 세상을 떠나시는 아버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를 시로써 사죄하였다.

홍원(洪原)에서
해 두고 헛 읽으나 이룬 일 무어런고! 蹟年虛構事何成
이룬 일 전혀 없고 죄만 가볍지 않네. 事意不成罪不輕
이팔의 배달 남아 원한이 크고 큰데, 二八南兒含寃大
무심한 저 하늘은 소리조차 없구나. 蒼天在上自無聲

망국한 섧다커늘 아비 또한 돌아가니, 國破父亡事事非
망망한 하늘 아래 내 어디로 가잔 말고! 天涯無際我何歸
한 조각 외로운 혼이 죽잖고 남아 있어, 一片孤魂今猶在
밤마다 꿈에 들어 남쪽으로 날아가네 夢裡向南夜夜飛

이 한시의 원문은 칠언율시이다. 이 시의 첫 연에서 '이팔의 배달 남아 원한이 크고 큰데'에서 한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옥중에 갇힌 자신은 크게 이룬 일 없이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참혹하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심정을 통곡하듯 읊고 있다. 그리고, 둘째 연에서 구구절절이 나라 잃은 한과 아들의 구속 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하고, 또 자기로 말미암아 모진 고문을 치른 동지들, 특히 옥중에서 세상을 떠난 이 윤재, 한 징 두 한글 동지를 바라보고, 너무도 참을 수 없는 망국의 한을 읊고 있다.

6. 이 윤재와 한 징의 옥중 순국

악독한 고문을 하기로 악명이 높은 홍원 경찰서에서 만 한 해 동안에 지옥에서나 받을 고역을 치른 한글 동지는 서른 세 사람이다. 증인으로 불려와서 조사 받은 한글 동지도 마흔 여덟 사람이나 된다.

1943년 10월 3일에, '내란 음모죄'란 죄 이름으로 33사람의 한글 동지는 함흥 지방 법원에 기소되어 함흥 감옥소로 옮겨 갇혔다. 함흥 감옥소에는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드나들며 독립 운동을 하다가 붙들려 온 애국 지사가 1000여 명이나 갇혀 있었다. 그 1000여 사람 모두가 왜놈의 극악한 고문을 받고 죽어 가고 있었다. 하루에 네다섯 사람의 애국자가 죽어 나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갇힌 이 윤재와 한 징 두 선생이 '한글을 사랑하고 지키다가 나라 없는 한'을 품고 감옥에서--고문과 추위,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순국하였다. '아, 원통하다'고 마음 속으로 외쳤으나 이 때처럼 정 선생의 마음이 아프도 설펐던 때가 없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일제의 계략에 따라 집행된 것이 조선어 학회 사건이지만, 정 태진 선생은 자기로 말미암아 두 동지가 순국하였으니 마음이 더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7. 문화적 독립 운동을 한 죄로 형 받음

1943년 10월 3일에 홍원 경찰서는 사건 조작을 시작한 지 한 해가 넘어가도록 고문과 취조로 세월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3일에 이르러서야 사건을 함흥 지방 법원으로 넘기었다. 지방 법원은 예심 판결에서 19사람의 한글 동지에게 기소 유예 처분을 내리어 감옥에서 석방시키고, 나머지 열두 명은 나머지 정식 재판에 회부하였다. 함흥 지방 법원은 몇 차례의 재판을 한 뒤에, 곧 1945년 1월 6일에,

민족 운동의 한 형태로서의 소위 어문 운동은 민족 고유의 어문 정리 통일을 도모하는 하나의 문화적 운동임과 동시에 가장 깊은 뜻을 품은 민족 독립 운동

이라고 최종 판결을 내리고, 정 태진 선생과 이 극로, 최 현배, 이 희승, 정 인승 등 다섯 분의 한글 동지에게 2년과 6년의 징역형을 내리었다. 그리고, 장 지영, 이 중화, 이 우식, 김 양수, 장 현식, 김 도연, 이 인, 정 열모, 김 법린 등 아홉 한글 동지에게는 징역 2년과 집행유예 3년 형을 내렸다. 그리하여, 아홉 한글 동지는 세 해만에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극로, 최 현배, 이 희승, 정 인승 등 네 한글 동지는 서울 고등 법원에 바로 상고하였으나, 정 태진 동지만은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상고할 비용을 마련할 수 없었고, 또 정 태진 동지는 자기로 말미암아 두 동지가 순국하고, 그 밖의 많은 동지들에게도 죽을 고통을 받게 한 것에 대한 죄책을 속죄하는 뜻으로 상고를 포기하고 언도된 실형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한편, 실형 언도를 받은 이 극로, 최 현배, 이 희승, 정 인승 네 한글 동지들이 서울 고등 법원에 곧 상고한 것은, 생각해 오던 것보다 형량이 너무 많았고, 또 아무리 나라 없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제 겨레의 말글을 연구 정리해 온 조선어 학회가 해 온 활동이 조금도 죄가 될 까닭이 없을 뿐더러 지극히 정당한 활동을 하였음을 다시 한 번 주장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 '조선어 학회 사건'이 서울 고등 법원에 계류되면, 피의자인 자기들은 서울 감옥소로 이송되기 때문에 상고하였다. 서울 감옥소와 함흥 감옥소의 감방 생활은 같다고 할지라도, 두 동지가 매맞아 죽어나간 감옥이고, 하루에도 한두 사람씩의 애국 운동자들이 죽어 나가는 악명 높은 함흥 감옥소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까닭이 있었는지, 상고한 지 다섯 달이 지나가도록 '서울로 간다 못 간다' 하는 말 한마디 없이 함흥 감옥소에 그대로 가둬 두고 있는 것이다.

겨우 여섯 달이 지나서야 서울 고등 법원은,

조선어 학회 사건의 공소 서류를 접수하였다.

라는 통지서를 상소자들에게 보냈다. 네 상소자들은 사건 접수 통지서를 받았으나 절망에 빠졌다.

접수가 그렇게 오래 걸리다니, 또 공판은 몇 달 걸려야 끝나지! 여기서 더 시달리게 되면, 우리들은 모두 함흥 감옥소 귀신이 되는 거 아니야!

하고 한탄만 하고 있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이 대동아 전쟁에서 패망의 길로 들어섰다.

는 소식을 감옥 안에서도 들었다. '예측한 대로 망해 가는구나'라고 마음 속으로 반기고 있었다. '우리가 다 죽어도 행악자는 언젠가는 망하겠지. 우리의 신념되로 세상이 될 것이다' 하고 생각하니, 하루가 더 길게 느껴졌다.

1945년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면서, 미군의 B 29 폭격기 편대가 하얀 연기를 길게 늘이며  함흥 감옥소 위로도 날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소리 없이 외쳐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하루의 감방 생활이 더 지루해졌다.

한편, 일제는 아주 다급해졌다.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한 일제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에 매우 바빴다. 그리하여, '조선어 학회 사건'을 접수한 서울 고등 법원마저 허둥지둥 상고를 기각해 놓고도 그 결과를 피의자들에게 엽서 한 장 띄우지 못하고, 쥐죽은 듯이 있다가 8· 15 대낮에 도망치고 말았다.

8.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한글 동지들

"행악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한글 동지들의 믿음대로 일본은 망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러나, 함흥 감옥소 감방 안에는 해방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8월 15일, 밤이 깊어서야 들리었다. 세상 천지 어디를 가나 날강도짓만 하던 일본 제국이 망하였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달 전에 실형을 마치고 풀려난 정 태진 동지에 대한 측은한 생각, 누구보다도 더 처참한 고문을 받고도 살아 나간 정 태진 동지의 딱한 집안 사정, 아버지를 잃고 아내는 심장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아들은 일찍 일본 군대에 끌려가서 죽을 지도 모르는 딱한 사정들을 이야기하다가 막 잠에 들었을 때였다.

술이요, 술! 조선 독립 축하의 술이오.

라고 하는 큰 소리에 귀를 의심들을 하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감옥소 길 건너편에 있는 약방집 심부름꾼이 감방에까지 들어와서,

조선이 독립했습니다, 우리 조선이!

하며, 목메인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우리 주인이 선생님들께 가져다가 드리라고 해서 가져온 술입니다. 오늘 낮 12시에 일본이 항복했어요. 일본놈들은 지금 울고불고 야단들 났어요.

라고, 소식을 전해 주어서 비로소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해방된 것을 알았다. '내일 아침이면 나간다. 살아서 집에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아 어서 오라. 해방되는 조국의 모습을 보자.

하며, 술을 마셨다. 많지 않은 그 술이었으나 그 술맛은 평생에 한 번 맛본 술이었다.

사실 그 술은 진짜 술이 아니었다. 가짜 술이라도 세 해 만에 마셔 보는 술이었으므로 얼마나 맛있게 마셨는지 모른다. 그 때는 돈을 주고도 진짜 술을 살 수 없었던 때였다. 병원에서 소독용으로 쓰는 알코올에 맹물을 타서, 향료와 설탕을 풀어 넣은 가짜 술을 만들어 마시던 때였다. 아무리 가짜 술이라도 행악자 일제가 망한 것을 기념하고, 조국이 독립하는 순간을 축하하는 술이고, 또 3년 만에 마시는 술이므로 맛도 맛이려니와 눈물 없이는 마실 수가 없었다.

16일 아침이었다. 함흥 시내 쪽에서 "조선 독립 만세!"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함흥 시민들이 몰려와서 독립 운동가와 애국자를 환영하며 부르는 애국가 소리를 들으며, 한글 동지들은 넓게 열려 젖힌 철문을 나섰다.

9. 제 2의 인생을 큰사전 엮기에 바침

정 태진 선생은 일본이 패망하기 한 달 전인 7월 1일에, 2년의 형을 마치고 석방되어 집에 돌아왔다. 반가운 어머니와 딸들의 영접을 받았다. 세 해만의 만남이었다.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러나 "남편이 구속되었다"는 말에 놀라서 생긴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내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기절하기까지 하였다. 세 해 만에 죽음에서 살아 온 아들을 만난 어머니와 딸들은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는 순간에 "얼마나 고생하였어요?" 하고 인사말 한 마디 못 하고 기절하였다가 깨어났다. 정 태진 선생은 이토록 허약해진 아내의 병 간호하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있었다.

정 선생은 해방된 다음날 혼자 조선어 학회 회관으로 달려나가 편찬실을 둘러보고 정리하였다. 큰사전 원고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다시 사전 원고를 쓸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고문 당할 때보다 마음은 더 아팠다. 그러나 정 선생은 조선어 학회가 20년 동안 써 모은 사전 원고를 다시 쓰는 일에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정 선생은 삶을 오로지 한글을 위하여 살기로 하였다.

8월 20일에 조선어 학회 긴급 총회가 열렸다. 제 말글을 찾은 새 나라에 가장 시급한 국어 교육을 맡아서 하기로 결의하였다. 초· 중등학교가 쓸 국어 교과서와 국사 교과서, 그리고 공민 교과서를 엮어 내는 일과, 전국민의 80%에 이르는 문맹자 퇴치를 위한 한글 전달 강습회와 초· 중등학교의 국어 교사 강습회를 전국적으로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큰사전 엮기에도 머뭇거리지 말고 계속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정 선생은 아침이면 밤새 아내의 병 시중 들기에 피곤한 몸도 돌보지 않고, 인절미 두 조각을 도시락 대신 싸들고 학회로 출근하셨다. 그리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새 학교에서 쓸 국어 교과서 엮기에 온힘을 바쳤다.

이렇게 하기를 세 주가 지난 9월 10일에, 일제에게 빼앗겼던 큰사전 원고가 되돌아왔다. 함흥 지방 법원에 '조선어 학회가 문화적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증거로 압류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화는 땅에 묻혀 버리지 않는가 보다.

라는 말대로 큰 원고지 2만 6천 5백 장에 이르는 큰사전 원고 뭉치가 모두 돌아왔다. '조선어 학회가 조선 민족 문화 운동을 내세운 대한 독립 단체'란 증거물로 압수당했던 것이, 피고들이 서울 고등 법원에 상고하므로, '조선어 학회 사건'의 증거물로 서울로 이송되어 서울역 창고에 보관 중이다가 미처 법원으로 넘겨지기 전에 해방이 되어 있다가 서울역장에게 발견되어 되돌아왔던 것이다.

눈만 뜨면 큰사전 원고를 빼앗아 간 일제가 원망스러웠는데, 큰사전 원고를 되찾고 보니, 3년 동안 치른 옥고도 씻은 듯이 잊어버리게 되었다. '서울'에 대해서는 '삼국 시대부터 지금까지'에 이르도록 자세히 설명하고, 일본의 '도쿄'에 대해서는 '일본 제국의 서울'이라고만 간단하게 설명했으며, 그리고 태극기, 창덕궁, 무궁화, 단군, 백두산, 압록강 등에 대한 설명--일제를 의식해서 이제까지 제대로 뜻풀이를 못 했던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채찍으로 손등을 맞을 때의 아픔도 영원히 다 잊어 버릴 듯도 하였다.

10. 장관도 교수도 싫다고 거절

빼앗겼던 큰사전 원고를 되찾은 기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아침에 학회에 출근하면,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내와 일본 군대에 끌려가서 어느 전쟁터에서 전사했는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생각도 잊어 가면서 큰사전 엮기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정 선생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들이 찾아왔다.

이 미군 정치 시대엔 영어 몇 마디만 알아도 출세하는데...

하며 여기저기에서 유혹이 심하였다. 미 군정청 부장(장관)으로, 또는 고문으로 오라는 것이다.

오랜 동안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까지 하였으니, 누구보다도 영어를 잘 하는데, 왜 높은 자리로 가지 않는가?

하며, 주위 사람들이 권하는 것이다. 또한, 이 대학 저 대학에서 교수로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이 여러 가지 권함을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한글로 말미암아 죽었다가 살아난 몸, 다시 한글에 바치기로 한 결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유혹은 계속되었다. 조선어 학회에 있는 한 자녀들의 교육도 변변히 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남편 때문에 심장병으로 누운 아내에게 약 한 첩 사 드리지 못하고 있으니 유혹은 끊이지 않았다. 때로는 유혹이 심하였다. 이 때는 가족들과 가족 회의를 열었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아내부터 늙은 어머님과 자녀들까지 한결같이

우리 모두 다 굶어 죽는 일이 있어도 큰사전을 꼭 만들어 내야 합니다.

고 하면서 정 선생을 크게 격려하곤 하였다. 그러나, 정 선생의 결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남들은,

이름 그대로 돌과 같은 이다. 그래서 세상 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만.

하고 비웃고 있었으나, 가족들만은 큰사전 엮기를 하는 정신을 누구보다 높이 받들며, 오히려 위로하며 안심시키고 있었다. 간혹,

이름 그대로 돌과 같이 지조가 굳은 이야. 그는 그의 아호인 '돌사람(석인)'처럼 차돌같이 지조가 매우 굳은 어르신네야.

라고 칭찬하는 이도 있었다. 정 선생 자신도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는 '태진'이라는 이름보다는 '석인(石人)' 곧 돌사람이란 이름을 즐겨 썼다. 좋은 뜻으로나, 나쁜 뜻으로나 돌로 비유되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광복된 새 나라에 아무리 할 일이 많을지라도 자기는 한글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굳은 결심히 그가 지은 다음과 같은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말은 자연의 꽃이요, / 우리의 글은 문화의 꽃이다.
이 말 이 글이 빛나는 날에 / 아름다운 꽃 향기
쓸쓸하던 이 강산에 / 새 봄을 사랑하리.

이 시는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제 말글을 찾아쓰게 된 행복한 학도들에게 전한 시이다.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우리 말글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볼 수 있다. 한글이 나라 안에 가득히 펼쳐지기만을 빌고 있었다. 석인 정 태진 선생에게 신앙이 있었다면 그의 신앙은 한글 사랑이었다.

마침내, 1948년 10월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이 세상에 나왔다. 세종 임금님께서 훈민정음을 반포하신 뒤 500해에 이르는 동안에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이제는 어느 침략자라도 조선말을 이 지구상에서 없앨 수는 없다. 조선말 큰사전이 나옴은 조선어 학회만의 기쁨이 아니고, 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 사전 편찬회'가 발족할 때에 성공을 빌었던 온 국민의 기쁨이다.

그러나, 석인 정 태진 선생에게는 기쁨보다 남다른 슬픔이 앞서 있었다. 함흥 감옥에서 같이 옥살이하다가 순국한 두 한글 동지에 대한 마음 아픔이 컸었다. 자기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은 두 한글 동지의 생각이 '석인'의 마음에 슬픔을 안겨다 주었던 것이다.

맺음말

- 큰사전 완간을 눈앞에 두고 순국 -

해방 직후 약 열다섯 해 동안은 우리 나라의 출판계 사정이 <조선말 큰사전>과 같은 큰 책을 찍어 낼 종이와 잉크가 없었다. 다행히 미국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인쇄 물자를 모두 원조받게 되었다. 1949년 봄에 큰사전 둘째 권을 내놓았고, 1950년 봄에는 셋째 권을 내놓았다. 바로 이 때에 6· 25 동란이 일어났다. 석인 정 태진 선생도 1· 4 후퇴로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겨우 난은 피하였으나, 큰사전 엮기를 하지 못하고 있는 석인 정 태진 선생에게는 감옥 안에 있었을 때와 별 다름 없이 마음이 괴로웠다. 한때라도 큰사전 엮기에 대한 걱정이 사라질 때가 없었다. 때마침, 학회의 유 제한 선생이 큰사전의 원고를 시골로 빼돌려 전쟁의 참화를 입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곧 1952년 5월이 되었다. 서울은 수복되었다. 석인 정 태진 선생은 큰사전의 원고가 무사한 이상 부산에 하루라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서울 수복지로 들어가는 '도강증', 곧 계엄 사령부로부터 한강 건너 서울에 들어가는 증명서를 특별히 얻어서 혼자 서울로 들어갔다. 서울이 아니면 사전 인쇄를 할 만한 시설이 있는 곳이 없고, 또 사전 엮기에 필요한 참고서를 얻어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서울 신문사의 방 한 칸을 빌려, 큰사전 원고를 시골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유 제한 선생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묻혀 있던 사전 원고를 다시 펴 놓고, 넷째 권, 다섯째 권, 여섯째 권의 큰사전 엮기를 시작하였다.

서울이 수복되었다고는 하나 포탄 연기는 아직 가시지 않았고, 변두리에서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전세가 아직 안정되지 않아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하는데도 석인 정 태진 선생은 큰사전 엮기에 바빴다. 언제 또 큰사전 원고가 수난을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

유 제한 선생, 당신이 먼저 죽나, 정 태진 내가 먼저 죽나 봅시다.

하고 둘이 농담을 주고니 받거니 하며, 하루도 쉬지 않고 큰사전 엮기에 매달렸다.

그리하기를 넉 달 만인 1952년 10월 28일에 넷째 권의 지형을 뜨고, 그의 교정도 마쳤다. 마음은 상쾌하고 몸은 날아갈 듯 하였다. 쌓였던 육체의 피곤도 다 풀리었다. 그러나, 다섯째 권과 여섯째 권의 지형이 나오기까지 아직 많은 일이 남아 있었다. 그 남은 일을 하자면 빈 자루에 쌀을 채워 놓아야 하였다. 우연하게도 큰사전 넷째 권의 작업을 끝마치자 쌀자루의 쌀도 한 알 남지 않고 떨어져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석인 정 태진 선생은 쌀을 구하려고 고향인 파주로 떠났다. 기차는 다니지 않았다. 한두 차례 해 본 대로, 서대문에서 북으로 가는 군용 트럭을 뒤쫓아가 올라탔다. 이렇게 올라탄 사람의 수가 셋이나 됐다. 털럭거리는 트럭이 파주 입구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언덕 길을 달리던 트럭이 논바닥으로 내리굴러 뒤집히었다.

원통하다. 나이 50에 이르기까지 남의 마음 한 번 아프게 한 적이 없는 분이, 아니, 살인마 일본 경찰의 악형에도 살아남은 이가 큰사전 완간을 바로 눈앞에 두고 돌아가실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그러나, 그의 죽음은 값진 죽음이었다. 그토록 한글을 사랑하다 가셨으니... 이 윤재와 한 징의 죽음을 따라가셨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3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가신 정 태진 선생에게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