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다. 한글만 쓰는 누리

ㄱ. 갑오 경장과 서양의 영향

어두운 그늘 아래 밟히면서도 죽지 않고 민중의 품에 안겨 살아 온 한글이 햇빛을 받는 날이 오고 말았다. 밖으로 청나라에 대한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 안으로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제도를 민주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한 이른바 '갑오 경장'(1894)은 특별이 한글의 지위가 높아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법률 칙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또는 국한문을 혼용함"이라는 고종 31년(1894)의 칙령은 당시의 시대적인 개화 분위기와 무관한 것이 아니겠거니와, 여기 표현된 대로 '국문' 또는 '나랏긄'이라는 이름은 언문, 암클, 반절 따위와는 비길 수 없이 높은 이름이 한글에 붙여진 사실을 말해 주며, 법률과 명령이라는 공문서들에 감히 끼이지도 못했던 한글이 섞이는 정도가 아니라 본이 되어 쓰이도록 일시에 공식적으로 격상되었음을 뜻한다. 이 칙령이 얼마나 충실하게 준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관보들이 적어도 한글과 한자를 함께 쓸 수 있게 한 것이고, 민간에서도 한글을 한결 떳떳하게 쓸 수 있도록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은 해에 유 길준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서유 견문>(1895)을 펴냈다. 이 책은 소설이나 수필 같은 문학적인 글이 아닌 만큼 당시의 통념으로 보면 무게 있게 한문으로 지었어야 되는데, 한글과 한자를 함께 섞어 썼다 해서 아주 심한 비난을 받았으나, 유 길준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첫째, 한문만으로는 자기 생각을 다 나타내기 어렵고, 둘째,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서는 쉽고 친근한 말로 새로운 지식을 보급해야 하며, 셋째, 한자를 버리고 아예 한글만으로 쓰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유감스럽고, 넷째, 국한 혼용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맡긴다고 반박했다 한다. 그 이듬해 4월 7일에는 최초로 한글만 쓰는 신문 <독닙 신문>이 민간 단체인 독립 협회에서 창간되었다. 이 신문은 독립 협회의 중심 인물인 서 재필과 주 시경 등의 선구적인 주장으로 한자를 아주 안 쓸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한글 띄어쓰기까지 처음으로 시행함으로써 한글 맞춤법을 한 단계 높이는 커다란 이바지를 했다.

갑오 경장을 전후해서 한국 사회의 개화 운동을 일으킨 주역들은 대개 직접이나 간접으로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특히 <독닙 신문>에서 시작된 띄어쓰기는 독립 협회를 만든 사람들이 대개 미국에 유학했거나 서양식의 교육을 받은 사실에 비추어 영어의 영향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8세기의 한글 문헌에서 더러 구둣점을 찍어 띄어쓰기와 같은 효과를 노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널리 퍼지거나 본격적으로 계승되지는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한글이 갑오 경장을 거치면서 나랏글로 공인되고 대중 계몽에 유리한 글자로 떠올라 점점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서양 특히 미국의 문물에 접한 인재들의 선견지명과 투철한 실천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4. 독립 신문 창간호. 한글만 쓰기와 띄어쓰기까지 선구적으로 실천한 최초의 신문. 이 신문의 창간 날짜가 오늘날의 '신문의 날'이 될 만큼 이 신문은 여러 모로 현대적인 신문의 본보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 신문의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거나 본받은 신문은 나오지 않은 것 같다.

ㄴ. 주 시경의 깨달음

한힌샘 주 시경(1876~1914)은 전통적인 한문 교육을 받는 동안에 제 말과 글을 두고 남의 말과 글로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낭비적인 일인가를 직관했다.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모두 한문이 아니면 글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 한문의 해독과 한글의 값어치를 알아차린 사람은 여간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서당 공부를 중단하고 서양 학문을 가르치는 배재 학당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비로소 세계의 어떤 민족이든지 저마다 제 말과 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문명하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더욱 확고하게 말과 글에 대한 자기 나름의 이념을 세우고, 뚜렷한 스승도 선배도 없이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의 분야를 참으로 씩씩하게 혼자서 개척하면서 좋은 제자들을 많이 길러 내었다.

오늘날 국어학 분야에는 서너 갈래의 이질적인 학문 경향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말의 사실을 한 가지라도 더 깊이 캐어 내고 정리하는 일에 치중하는 학문의 계통이 튼튼하게 서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한힌샘의 연구 태도와 업적이 잘 계승된 결과이다. 그는 아직도 충분히 이해되지 못할 정도로 독특한 술어를 만들어 가며 극도로 분석적인 방법을 써서 한국말의 소리와 말본을 연구하고, <국어 문법>(1898, 1910 수정판), <국어 문전 음학>(1908), <말의 소리>(1914) 등의 책을 펴내었다. 한힌샘의 언어학 이론은 앞으로 한층 더 정밀하게 연구되어야 하고, 그의 분석주의적인 국어 연구는 무엇보다 한국말의 바람직한 장래를 위해서 충분히 계승할 만 한 가치가 있는데 그렇게 되어 있지 못하다.

그는 독립 신문사에서 편집 일을 보는 동안 서 재필을 도와 한글만 쓰기 운동을 폈고, '국문 동식회(1896. 5. ~ 1898? 1905?)를 조직해서 한글을 동식으로 곧 같은 방식으로 통일해서 쓰자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그야말로 앉은 자리가 더워 질 새도 없이 바쁘게 서울 시내의 여러 정규 학교와 일요 강습회에서 자기 나름으로 깨달은 국어의 이치를 지성껏 가르쳤고, 대한 제국 학부에 속한 국문 연구소에서는 가장 젊고 적극적인 위원(1907. 7. 12 ~ 1910. 8)으로서 <훈민 정음>과 <용비어천가> 등을 통해 현대적인 한글 맞춤법의 근본 원리를 혼자 발견하고 주창했다. 또한 처음으로 한글 풀어쓰기의 필요성을 깨닫고 시범적인 실천을 했으며, 이러한 가르침과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모아 '국어 연구 학회'(1908. 8. 31 ~)를 창립해서 일본의 침략(1910)과 모진 총독 정치를 겪으며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을 계속하다가 1914년 7월 20일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별세하고 말았다.

그림 15. 주 시경. 현대적인 국어학을 개척하고 국어 운동의 기초를 닦는 일에 짧고도 충실한 삶을 알뜰히 바친 한겨레의 은인.
그림 16. 한글 강습 수료증 '맞힌 보람'. 주 시경 스승이 한글 풀어쓰기의 이상을 실천한 본보기.

한힌샘은 '한글'이란 이름을 지어 '언문', '암클', '아침글' 등으로 천대만 받던 '훈민 정음'의 권위와 영광을 되찾아 주었다. 그이는 한글과 한국말이 한국 사람의 삶의 바탕이오 나라의 기틀이라 믿고 국어 연구와 국어 운동을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방편으로 삼아 삶의 모든 것을 기울여 바쳤다. 그이의 통찰력이 없었다면 세종 임금에게 잠깐 번득였다 사라진 우리의 훌륭한 한글 맞춤법이 거듭 태어날 수 있었을까? 한힌샘의 정성과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그토록 튼튼하게 현대적인 국어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을까? 한힌샘은 누군가 부른 것처럼 세종 임금 다음으로 한글의 중간 시조가 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분이다. 그이는 아우가 영친왕의 일본 유학을 수행하려 할 때 그것이 조선을 삼키려는 일본의 술책임을 알아차리고, 불의한 길에 편승해서 영화를 누리려 하지 말라고 한사코 막은 고결한 인격자였다. 그이는 참으로 한겨레의 은인이며 스승으로서 그 짧은 삶에 안락이라고는 별로 누릴 새도 없이 일만 하다 갔기애 더욱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낸다.

ㄷ. 한글 학회의 아버지

한힌샘의 주도 아래 '국어 연구 학회'에 모였던 그 제자들은 일본 총독의 잔혹한 단압으로 말미암아 흩어졌다가 정세가 다소 누그러진 틈을 타서 다시 모여 '조선어 연구회'(1921. 12. 3~)로 재건했고, '조선어 학회' (1931. 1. 10. ~)로, '한글 학회'(1949. 9. 5. ~)로 이름을 바꾸어 가며 한국의 가장 오래된 학술 단체로, 한국말의 학술적인 연구, 한국말의 순화, 한글만 쓰기 및 한글의 기계화를 선도적으로 촉진함으로써 한힌샘의 정신과 사업을 그 대로 계승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학회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1933년 한글 반포 사백 여든 일곱 돌을 기념하며 반포한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통해서 한글 창제 이후 오백 해 가까이 이르는 동안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에 빠진 글자 생활을 청산하고, 지나치다는 이가 적지 않을 만큼 단번에 아주 합리적인 언어 규범을 세워 문화 발전의 기틀을 다진 일이다. 이것은 분명히 한국의 문화사에서 한글의 창제에 버금가는 위업이오, 세계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언어 혁명이었다. 이 학회에서 또한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완성함으로써 한국은 정상적인 국민 국어 교육의 기초를 최소한으로나마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7. 한글 마춤법 통일안. 오래동안 혼란스럽게만 했던 한국 사람들의 글자 생활을 단번에 아주 높은 수준으로 뛰어 오르게 한 법전으로서 거족적인 환영과 호응을 받아, 반포됨과 동시에 정착되는 놀라운 언어 혁명을 이룩했다.
그림 18.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사전 편찬의 뼈대를 세우고 국어 교육의 기초를 마련한 자료.

ㄹ. 성경과 한글

앞서 밝힌 대로 한글이 장체되자마자 <석보 상절>, <능엄경 언해>를 비롯한 많은 불교 서적인 한글로 간행되었다. 그러나 이 한글로 된 불교 서적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간행되지 못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불교인들은 아직도 한문으로 불교 서적을 읽어야 하고 한문이나 범어로 된 불경을 암송해야 하는가? <반야 심경>이 15세기에 이미 한글로 번역되었건만 이 한글 <반야 심경>이 왜 전수되어 오지 못하는가? 유교 서적도 마찬가지이다. 사서 삼경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에 걸쳐 모두 번역되고 간행되었다. 이 중세기의 한글로 된 유교 경전들이 그대로 계승되어 있지 못한 사실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사실들은 적으도 '어리석은 백성을 위한 한글'의 효능이 불교나 유교에서 잘 발휘되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두 종교가 한글이 창제되기 전에 토착화한 까닭에 한문의 텃세가 너무도 굳었다는 데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림 19. 반야 심경 언해. 불교인에게 가장 친숙한 경전이 15세기에 이미 쉬운 한글로 번역되었건만 오늘날까지 원문도 아닌 한문 번역으로만 어렵게 암송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에 비해서 예수교 성경의 번역과 보급은 한글의 역사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다. 불교나 유교에서와 달리 예수교는 애초부터 한글만으로 번역된 성경을 통해서 들어왔다. 중국에서 중국말로 된 한문 성경이 먼저 간행되어 있기는 하지만, 한국을 맡은 선교사들은 중국 땅을 거쳐 오면서도 한문 성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아예 한글 성경을 만들어 가지고 한국 땅에 들어왔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로스(John Ross) 목사가 만주에서 한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해 낸 <예수 셩교 젼셔>(1887)는 최초의 순전한 한글 신약 성경으로서 한글의 효능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 글이 진서가 못 되는 언문이라 해서 손해를 본 점이라고는 눈꼽 만큼도 없었다.

김 양선 박사는 이 한글 성경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Ross Version의 한글의 재생과 그 부흥에 미친 영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한문의 본고장에서 한문 성서를 가지고 번역하는 저들로서는 국한문 성서를 만들 법 한데도 순수한 한글 성경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의 높은 뜻은 만고에 빛날 것이다. 그 원고는 정확한 한글체로 만들기 위하여 저 멀리 서울에까지 보내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참고로 하였다. Ross Version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한문이 아니고 한글인 데서 더욱 친근감과 통쾌감을 느꼈다. 여자 아이들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한글을 배웠다. Ross Version은 한글로써 넉넉히 어렵고 고상한 사상을 표시할 수 있다는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후래의 선교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성경, 찬송가, 교리서,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글로 만들었다. 이 때로부터 한글은 완전히 재생되었고 또한 부흥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한글의 보급을 도왔고, 한글은 성경의 '어렵고 고상한 사상'이 유무식과 남녀노소를 차별함이 없이 널리 보급되어 한국 문화의 새로운 개화를 이끌게 해 준 것이다.

그림 20. 예수 셩교 젼서. 쉬운 한글을 백 퍼센트 활용한 신약 성경. 선교 백년 만에 세계의 주목을 받을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이 성경을 펴는 일로 출발했고, 이 성경을 읽고 새로운 종교를 알기 위해서 배운 한글이 한국 사람들의 밑천이 되어 서구 문명을 향한 개화와 근대적인 발전을 촉진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