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병우 식 한글 기계화의 철학

공 병우 박사의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 왔다>를 읽어보면, 우리는 공 박사가 살아 생전에 이룬 업적과 행적을 보면서 감탄, 존경을 금치 못하게 된다. 나 역시 최근에 자서전을 HTML 도움말로 정리하면서 책 전체를 쭉 정독했고, 그러면서 한번은 ‘이거 정말 너무 자기 자랑만 늘어놓은 거 아냐?’-_-;;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S 예를 들어, 공 박사께서는 책에서, 자신은 졸업장이 하나도 없다면서 학벌과 간판만 따지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셨는데, 실제로 알고보면 그분은 졸업장보다도 더한, 졸업장을 초월한 ‘학벌’을 갖고 계신 셈이다. 졸업장 받는 학년은 모조리 월반하셨으니...

자기가 예언한 건 다 맞아 떨어지고, 어느 분야에 손을 대기만 하면 그 분야에 공을 하나씩은 꼭 세우고... 그분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와 덕과 체를 두루 갖춘 완벽에 가까운 모범적인 삶을 사셨다. 그분이 지금 같은 미래에 태어나셨거나, 미국이나 일본 같은 선진국에 태어나셨다면 훨씬 편하게 살면서(군사 정권과 싸우는 것 같은 일 없이) 세계적인 의학자나 과학자가 되셨을 지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을 구한말에 우리 나라에 태어나게 하셔서 그분을 한글 기계화에 헌신하도록 하신 것을 우리는 얼마나 고마워해야 하는 지 모른다.

나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만들면서, 세벌 글씨체로 글씨를 쓰면서, 공 박사께서 평생 생각하셨던 한글 기계화의 이상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자서전을 편집하면서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서 공 박사의 “한글 실험”을 재현해 봤고,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이 글에서는 그 결과를 여러분과 나누고자 한다.

<나는 내 식대로 살아 왔다> 10장, <한글쓰기 무른모 개발> 부분을 펼쳐 보자. 뒷부분을 보면 공 박사가 한글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분은 그게 정말 획기적인 발명인 것처럼 소개한다.

프로그래밍을 전혀 모르는 그분이 어떻게 해서 영문 워드프로세서를 한글화했을까? 윈도우즈 프로그램처럼 리소스라도 고친 것일까? 한글 글꼴을 만들었다니, 풀어쓰기로 한글을 구현한 것일까? 어떻게 해서 그 복잡한(두벌식 자판 입력기를 만들어 보신 분 관점에서는 이 수식어가 꼭 붙게 된다) 한글 오토마타를 구현하셨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해서는 공 박사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분이 실제로 하신 일은 의외로 아주 단순했다. 하지만 결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복잡한 조치가 전혀 없이 모아쓰기 한글이 화면에 나타나고 입력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비밀은 만 바이트도 안 되는 아래 글꼴 파일에 있다. 트루타입 글꼴과, 한글 97용 글꼴 중 원하는 것을 하나 받아서 설치해 보자.

한글 97용 글꼴 (direct.hft) 7333바이트 | 트루타입 글꼴 (direct.ttf) 8008바이트

그럼, 적당한 워드 프로세서를 띄워서 DirectHangeul이라는 글꼴을 고른다. 그리고 다음을 유의하면서 영문 쿼티 자판에서 세벌식 최종 자판 쓰듯이 글자를 입력해 보라.

자판을 누르는대로 공한체 비슷한 세벌 글꼴이 나타난다. 뭔가 느낌이 오는지? 이것이 공 박사가 당시 한 일의 전부이다.

이 한글은 엄밀히 말해서 한글이 아니다. 한글을 고유한 코드에다 배당한 게 아니라 로마자, 숫자 등 모아쓰기 한글과 전혀 상관없는 기호들을 글꼴을 바꿔서 한글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단순함 그 자체다. 그래서 직결식이라 하는 거다. 그러니 버전이 올라가도 가변폭 글꼴을 지원하는 환경이라면 한글이 잘 나올 수밖에 없다. 한글과 영문을 나란히 입력하려면 한영 전환을 하는 게 아니라 글꼴 전환을 해야 한다.

글꼴의 원리에 대해서는 이제 이해가 가는지. 초성과 ㅏ, ㅗ 계열 모음은 풀어쓰기 한글처럼 고유한 폭과 모양이 있다. 초성은 된소리를 처리하기 위해 자간이 거의 없다. (위의 ‘꼴’자를 보라.) 하지만 ㅗ, ㅜ 계열 모음과 종성은 자신의 고유한 폭이 없고, 자기의 왼쪽에다가 글자를 찍는다. 그래서 모아쓰기가 되는 것이다. 세벌식 타자기는 “폭이 있는 글쇠”와 “폭이 없는 글쇠”를 모두 처리하기 위해 글자를 박는 촛점이 두 개 있다. 이것이 바로 공 박사가 고안하여 한국과 미국에서 발명 특허를 받은 쌍촛점 방식이다.

이 글꼴을 써 보면 세벌식 최종 자판에 대한 의문도 모두 풀릴 것이다. ‘외’를 ‘jvd’로도 쳐 보고 ‘j/d’로도 쳐 보면, ㅗ와 ㅜ가 왜 두 개씩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왜 모든 겹받침이 글쇠에 배당돼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받침은 초성과는 달리 고유한 폭이 없기 때문에, ㄴ+ㅎ 처럼 조합하는 식으로 입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 박사는 한글의 형태를 가장 직관적이고 일반적으로 기계화할 수 있는 자판을 만드신 것이다. 타자기에서 기계화가 가능하면 텔레타이프고 컴퓨터고 뭐고 한글을 기계화하지 못할 곳이 없다. 그 철학의 종점이 바로 우리가 쓰고 있는 세벌식 최종 자판이다. 이 자판을 바탕으로 우리는 필요에 따라 자판을 변형하든지 말든지 한다. 글쇠를 좀 넣고 빼서 옛한글 자판을 만들기도 하고, 로마자 자판의 기호가 더 필요해서 390을 쓰기도 있고, 자주 쓰이지 않는 겹받침에다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특수 글쇠를 집어넣어 쓰기도 한다. 쉬프트 키나 4단을 쓰고 싶지 않으면 컴퓨터 오토마타의 도움을 받아서 그렇게 글쇠배열을 변형하기도 한다.

그런데 세벌식 최종은 단순히 기계화만을 위한 자판이 아니라, 실제로 치기에도 매우 편리하고 한국어(각 음소의 출현 빈도)와 한글 맞춤법(문장 부호, 겹받침)의 특성을 잘 살린 글자판이다. 기계화를 위해서 ㅗ와 ㅜ를 한 쌍 더 넣고, 겹받침을 따로 글자판에 배당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타자가 더욱 능률스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공 박사의 업적에 더욱 감탄하는 것이다.

현대 한글만으로 국한시킨다고 하더라도, 만천여 자가 넘는 한글 소리마디들을 로마자 글꼴보다도 작은 크기의 글꼴로 모두 구현하고, 오토마타 같은 게 전혀 없는 입력기로 입력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 한글과 가나의 차이이며, 한글과 한자의 차이, 또한 한글과 로마자의 차이이다. 세벌식 자판과 세벌식 글꼴은--세벌식 입력, 세벌식 출력-- 이렇게도 찰떡같이 들어맞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자그마한 사고의 전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아래 그림을 보면서 그 “전환”을 느껴 보자.

공 박사의 작품이 두벌식 직결식 풀어쓰기에 비해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지를 견주기 위해, 같은 문장을 한글 97의 풀어쓰기 문자로 입력한 결과도 아래에 보였다.

글자판만 해도 그렇다. 특정한 조건 한두 가지를 잘 만족하는 글쇠배열을 만드는 것은 쉽다. 하지만 기계화, 기계 공학적인 요소, 인체 공학적인 요소 등등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글자판을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아니, 어지간해서는 그런 세세한 조건들의 필요성조차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공 박사는 위대한 통찰력으로 “작은 한글 기계화”의 뿌리를 세우고, “큰 한글 기계화”의 방향을 제시하셨다. 이런 이유로, 나는 글자판의 최종 권위는 공 병우 식 최종 자판이라고 여긴다.

어떤 시대가 도래하든 공 박사의 기계화 철학은, 더욱 다듬어지거나 확장되는 일은 있어도 결코 부정되거나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어떤 방면으로든 한글을 좀더 낫게 만들 의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세종대왕이 제시한 한글의 구성 원리와 공 박사가 생각한 한글 기계화 철학을 반드시 숙지해야 할 것이다.

2002년 7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