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서 가스 폭발 사고라도 난 사진을 보면 주변은 그야말로 초토화 그 자체이다. 육중한 건물이 형체도 없이 박살 나 있기도 한다. 많은 양의 연료가 적절한 제어 없이 한꺼번에 폭발해 버리면 그 지경이 된다.
자동차는 바로 그런 화석 연료를 그야말로 개당 500ml 우유팩 정도 부피의 실린더에다가 극미량 찔끔찔끔 공기와 섞어서 넣어 준 뒤 전기 스파크를 넣어서 폭발시키고, 그 힘으로 피스톤을 누르고 왕복 운동으로부터 회전력을 얻는다.

그런데 자동차는 정지 상태에서 그런 동작 사이클로 진입하기 위해 초기에 외부 동력이 필요하다. 스타터 모터가 돌아서 흡기 밸브를 열어 주고 점화를 시켜야 하니까 말이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시동을 못 건다.
동력을 얻기 위해 동력이 필요하다니 뭔가 역설적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런 예는 주변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컴퓨터의 난수 생성기는 난수를 얻기 위해서는 초기에 seed라는 난수의 공급이 필요하다.
나무 같은 고체 연료는 일단 불만 붙으면 많은 열량을 내지만.. 발화점이 높고 처음에 불이 잘 안 붙는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불쏘시개가 필요하다.
또한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도 정지 상태에 있던 복잡한 기계들의 첫 가동을 위해서는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가 필요하지 않은 발전소는 메커니즘이 상대적으로 간단한 수력 정도밖에 없다. 물을 가둬 놓고 있던 밸브만 열면 되니까..;; (단, 이것도 동력 없이 인력만으로 여는 건 대단히 힘들다)

기름에 비해 전기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우월하다. 그 자체가 연료보다는 에너지라는 성격이 더 강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축적을 하는 건 대단히 까다롭지만, 전기를 사용하기 위한 별도의 ignition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기름으로 달리는 탈것에는 START라는 게 필요하지만, 전기 자동차나 전동차에는 그게 필요하지 않으며, ON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바로 주행 준비 완료이다. 자체 전력은 내려가 있던 팬터그래프를 전차선에 있는 데까지 올리는 정도만 보유하고 있으면 될 것이다.

자동차는 시동이 걸린 뒤에도 차 key는 start에서 on으로 되돌아갈지언정, 시동 상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지 상태에서도 엔진이 저속으로나마 계속 돌아가야 한다. 점화를 위해서 연료뿐만 아니라 전기도 지속적으로 쓰인다. 단지 시동이 걸린 뒤부터는 전기는 엔진과 연결된 발전기에 의해 자가생산이 되기 때문에 소비가 부각되지 않을 뿐이다.

자동차나 경운기 정도의 작은 엔진은 일부러 외부에서 회전력을 공급해 주면서 시동을 걸 수 있지만, 덩치가 더 큰 물건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거대한 비행기는 시동을 걸 때 별도의 시동 유닛을 가동시켜야 할 정도이다. (항덕이라면, 전방 기준 제일 오른쪽의 엔진부터 시동을 거는 게 관행이라는 것도 알 것이다.)
초대형 선박들 역시 거대한 엔진들에 시동을 완전히 거는 데만 수 분 이상이 걸린다.

이런 탈것들에 비해 전기로 달리는 전동차는 시동 절차가 얼마나 간편한지는.. 매일 남영-서울역, 용산-이촌 같은 절연 구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늘 느낄 것이다. 그게 내연기관으로 치면 주행 중에 휘발유 엔진의 시동을 끈 뒤, 연료를 디젤로 교체하고 다시 시동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2.
자, 엔진의 시동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본인은 차키 없이 시동을 거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얼마 전부터 문득 그게 궁금해졌다. (☞ 관련 영상)

우와..;;;
일단 드라이버로 억지로 키 구멍을 돌려 보고, 이것만으로 시동이 안 걸리면 핸들 부분 덮개를 연다. 이 절차만으로 시동이 바로 걸리지는 않더라도, 핸들에 걸린 락은 풀 수 있는 듯하다. (시동을 걸어 봤자 조향을 못 하면 과거의 먹튀 비행기 휴즈 H-4 허큘리스 꼴이 날 게다)

다음으로 전력 공급 케이블 한 쌍(대체로 빨강이라 함)을 끝부분을 자르고 서로 강제로 연결하여 ON 상태를 만들고,
스타터 모터 케이블 한 쌍(대체로 갈색이라 함)을 전력 케이블에다가 연결하면 시동이 걸린댄다. 물론, 시동이 걸린 뒤엔 스타터 모터 케이블은 도로 이격시켜 놓는다.
스타터 모터를 다루는 과정이 특별히 감전의 위험이 높으므로, 절연 장갑을 반드시 착용하고 조심해서 진행해야 한다.

이런 짓을 영어로는 hot-wiring이라고 한다. 키를 안 꽂고 스타터 모터에다가 어떻게든 강제로 전기 자극만 전해 주면 되는구나.
컴퓨터로 치면 오버클럭이라든가, 스마트폰의 탈옥, 해킨토시,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방지 장치를 해킹으로 제거하기, 운영체제의 문서화된 API가 아닌 비공개 내부 API를 직통으로 쓰기, 보안 버그를 이용한 exploit 등의 온갖 행동에 얼추 비유할 수 있겠다.

소프트웨어나 음반, 도서의 디지털 복사본을 만드는 것은 그 상품을 이미 구입한 사람이 자기 편의를 위해 개인 소장용으로 하는 것만이 합법이다.
그것처럼 키 없이 시동을 거는 것도 반드시 자가소유를 입증할 수 있는 자기 차에 한해서만 그것도 at your own risk로 해야 한다고 저 동영상은 강조한다.

뭐, 저렇게 시동을 거는 것 자체도 자동차의 구조가 굉장히 기계적이고 단순했던 옛날에나 가능했지, 요즘 자동차들은 전자식 인증이 강화되어서 안 통한다고 한다.
비슷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변속기가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뀌면서 배터리 방전 시에 차를 밀어서 시동을 거는 게 불가능해진 것처럼 말이다.

요즘 차는 저런 식으로 시동은커녕, 문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따는 순간부터 도난 방지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예전에 리모콘으로 문을 잠갔으면 다음에도 반드시 키가 아닌 리모콘으로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애초부터 키를 돌리는 게 아니라 버튼을 눌러서 시동을 거는 차도 있을 테니까.

예전에 무슨 자동차 상식 사이트에서.. 일반적인 차키의 열쇠 구조 가짓수가 몇천 가지 정도라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게, 조합이 무한할 수는 없을 테니, 수천 대의 자동차가 늘어서 있는 곳에서는 극한의 우연의 일치로 인해 내 키로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차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전자식 도난 방지 장치는.. 기계식 열쇠의 한계를 보완해 주겠지만, 차의 배터리가 방전되고 나면 무용지물이고 이 역시 전파를 교란시켜서 오동작하게 만들 수 있으니 다른 한계가 있다. 요즘은 블랙박스 영상조차도 조작할 수 있는 세상이니 뭐 말 다 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테이큰에서는 리암 니슨이 키 없이 남의 차를 문 따고 들어가서 시동 걸고 가 버리는 장면이 있다. "이 차는 이제 제 껍니다"의 실사판이다.
영화 전체에서 저 아저씨는 20여 명의 사람을 죽이고, 총 세 대의 차량을 훔친다. 오로지 자기 딸을 구하려고.

3.
오늘날은 운전하기가 어렵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트럭· 버스가 아닌 승용차 등급에서는 수동 변속기 차량을 거의 볼 수 없어졌다. 알다시피 수동이 자동에 비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좋은 점은 급발진 걱정이 전혀 없다는 것과 보안면에서 상대적으로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수동 변속기의 또 다른 장점이 있는데, 바로 배터리가 방전되어 스타터 모터가 죽었더라도 차를 밀어서 시동을 걸 수 있다는 점이다. hot-wiring이 아예 키 없이 시동을 거는 방법이라면, 이건 키를 꽂기는 하되 start로 돌리지는 않고 시동을 거는 방법이다.
요즘은 '밀어서 잠금해제'라는 표현이 유행이다만... 스마트폰이 아니어도 저것 역시 일종의 밀어서 잠금을 해제하는 방법이긴 하다. 비상 상황에서 굳이 보험사 긴급출동 부르고 엔진룸 따지 않고도 배터리가 방전된 자동차를 살릴 수 있으니 요긴하다.

물론 여기서 민다는 것은 주차장에서 이중주차된 차를 겨우 몇 미터 남짓 살짝 밀어내는 정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동차는 비록 바퀴가 달린 물건이라지만 1톤이 넘는 무게의 쇳덩어리인데, 이게 적어도 시속 10~20km 정도로 속도가 붙을 때까지 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운전자 말고도 동료가 최하 2명 정도는 있는 게 좋다.

또한 인력만으로 차가 그 정도로 속도가 붙을 때까지 밀어야 하기 때문에 전방에 최하 수십 m 이상의 직진 공간이 많이 필요하다. 비행기로 치면 활주로에 대응한다.
시동이 켜지지 않은 차는 파워 스티어링이 없고 브레이크에 진공도 없거나 제한적이기 때문에, 일단 속도가 붙고 나면 차를 다시 세우거나 제어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위험하다. 그러니 전방에 위험 요소가 확실하게 없는 곳에서 밀어야 한다. 이것까지도 비행기의 이륙과 작게나마 비슷한 특성이 있다.

차는 키를 on에다 꽂아 놓고 기어는 중립으로 한다. 차가 저 정도로 속도가 붙고 나면,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2단으로 놓은 뒤, 클러치에서 발을 뗀다. (애초에 1단이 아닌 2단을 기준으로 엔진 최소 회전수에 대응하는 속도만치 차를 밀었으므로) 평소에 운전할 때야 시동 유지를 위해서 클러치를 서서히 부드럽게 떼야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고려할 필요가 없다.

자동차는 엔진이 만들어 내는 힘만 바퀴를 굴리는 게 아니라, 이미 굴러가는 바퀴가 엔진 회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래서 엔진 브레이크라는 개념도 존재한다.
수동은 워낙 동력 전달이 직설적인지라, 엔진이 구동축과 연결되어 있는데 바퀴가 엔진 회전수에 비례하는 횟수만치 도저히 돌 수가 없으면 엔진도 그 부하를 그대로 받아서 자기 스스로 사이클을 도는 게 불가능해지고, 곧 시동이 꺼져 버린다. 그러나 그 특성은 반대로 저렇게 시동을 거는 데도 이용되니 여기서는 단점이 장점으로 바뀐다.

자동 변속기는 바퀴 구동과 엔진 구동 계층이 토크 컨버터에 의해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시동을 거는 게 불가능하다. 외부 부하에 의해 호락호락 시동이 꺼지지 않는 대신 외력을 전해서 시동을 켜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 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6 08:21 2015/03/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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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 기윤 2015/03/16 11:04 # M/D Reply Permalink

    밀어서 시동을 켜는것과 비슷하게, 내리막의 힘(..)을 이용해서 시동을 켜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습니다.

    방전된건 아니고 단지 시동에 걸리는 전기적 손해(?)를 줄이기 위해서였지만요.(..

    1. 사무엘 2015/03/16 15:12 # M/D Permalink

      사람의 팔이 아니라 중력 그 자체로 차를 미는 거나 마찬가지이죠. 주변에 내리막이 있으면 외력으로 시동 걸기가 확실히 더 수월해지긴 합니다.
      다만 자동차 제조사들은 밀어서 시동 거는 행동을 권하지 않더군요. 자동차 취급 설명서를 보면 어지간해서는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그 이유가 안전 문제나 엔진/변속 계통의 악영향 때문이 아니라, "배기가스 정화 계통"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환경에 안 좋은 건지 아니면 기계 장치에 악영향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렇게 시동을 걸면 순간적으로 매연이 많이 나온다고 하네요.

      "내리막에서 하다가 시동 안 걸리면 죽는다"...는 "활주로를 다 지날 때까지 비행기가 이륙 못 하면 죽는다"와 완전히 판박이처럼 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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