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이전에 현대에서 만들었던 소형 트럭과 승합차

내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라고 블로그에다 글을 올린 것들이 사실은 그냥 현대 자동차의 역사인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딱히 특정 기업으로부터 향응을 받았거나 거기 입장을 대변하는 처지인 건 전혀 아니고, 어렸을 때 많이 접했고 경험과 기억이 더 남아 있는 것들이 거기 자동차여서 그런 것일 뿐이다.

본인은 현기차의 빠도, 까도 아니다. 물론 걔네들이 무엇 때문에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지 정도는 그럭저럭 안다. 하지만 걔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정말 맨땅에서 죽도록 고생해서 '기술' 개발에 전념해서 우뚝 일어선 건 까든 빠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이며, 본인은 그런 것에 흥미가 가서 추억을 정리한 글을 올리는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사실, 코티나가 어떻고 최초의 고유 모델, 최초의 전륜 구동, 최초의 DOHC 이런 198, 90년대 소사는 지금 현대 그룹에 다니는 직원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 자동차에서 생산하는 1톤 트럭의 이름은 잘 알다시피 '포터'이다. 모델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원조 포터는 이제 길거리에서 거의 찾을 수 없어졌지만, 이 각진 원조 포터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은 지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요즘 차들에 비해 각진 헤드라이트의 모양, 그리고 문짝에 새겨져 있는 사선형 무늬가 특징이다. 저 사진에서는 흰색 배경에 무늬가 하늘색이지만, 반대로 하늘색 배경에 무늬가 흰색인 도색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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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이것보다 더 옛날 모델도 있었으며, 걔도 '포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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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명의 이니셜을 딴 일명 HD1000. 얘는 일본 미쓰비시에 생산하던 트럭+승합차이던 델리카를 들여온 모델이었으며, 트럭에는 특별히 '짐꾼'이라는 뜻인 포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워낙 희귀한 차량이어서 인터넷을 뒤져도 저 하얀 도색의 모습밖에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난 저 트럭에 대한 기억은 정말 아주 희미하게.. 거의 영운기나 SMC 8톤 덤프트럭과 비슷한 급으로 남아 있다.

트럭이지만 뒷바퀴가 작은 바퀴 한 쌍이 아니라 앞바퀴와 완전히 동일한 형태인 게 인상적이다. 그래서 기아 세레스와 좀 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레스는 HD1000보다 나중에 등장했으며, 헤드라이트가 저렇게 두 겹(?)이 달린 적이 없었다. 설마 HD1000도 사륜구동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자료가 없다.

HD1000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생산되었다. 즉, 포니, 그라나다, 코티나 등과 동연배인 상용차였던 것이다. 승용차에서는 포니는 나름 고유 모델이고 코티나와 그라나다는 포드 사 자동차의 면허 생산인데, 포드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니 현대에서는 미쓰비시와 이런 식으로 기술 제휴를 맺기 시작했다.

이 트럭은 가성비가 좋았는지 나름 잘 팔리고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5공 초기,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현대는 상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단종되고 흑역사가 되었다. 오일 파동 속에서 기름을 아끼고 자동차 회사간의 쓸데없는 중복 투자 과열 경쟁 낭비를 막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런 식의 무식한 규제와 칼질로 인해 자동차 회사들 간의 건전한 경쟁 구도까지 망가지고, 자기들끼리 구축하던 기술 노하우와 미래 연구 계획이 무자비하게 짤린 것은 업계의 입장에서 큰 손해를 끼쳤다.

기아의 경우 승용차 브리사가 짤려서 흑역사로 전락했다. 훗날 대우 자동차가 내놓은 로얄 디젤만큼이나 브리사를 디젤 모델로도 개발할 작정이었는데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게 1980년대 초중반까지 자동차 업계의 중세 암흑기가 계속되는 동안 기아는 그래도 봉고라는 승합차와 트럭을 만들면서 회생에 성공했다. 봉고는 당사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뒀으며, 국내에 봉고라는 이름을 소형 승합차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정착시켜 버렸다. "봉고차!"

앞서 거론되었던 세레스도 1983년, 바로 이 기간에 만든 사륜구동 영농 최적화 트럭이다. 세레스의 모습을 위의 HD1000 트럭과 비교해 보시라. 맨 처음에는 헤드라이트가 각진 사각형 프레임 안의 원형이다가 중간에 텔레비전 브라운관 같은 둥근 사각형으로 바뀌었고, 그러다 곡선 프레임 안의 원으로 돌아온 듯하다. 어떤 경우든 HD1000처럼 1970년대 유행이던 쌍라이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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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훗날 차종 생산 규제가 풀리면서 기아는 잽싸게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았으며, 현대는 우리가 아는 그 포터와 그레이스를 내놓게 되었다.
이들과는 달리 대우 자동차에서 내놓았던 바네트와 엘프 같은 상용차는 정말 존재감이 없이 묻혀 버렸다. 오히려 경차인 다마스와 라보만이 불멸의 경지에 올라서 지금까지 생산 중이다.

2. 신칸센 0계와 미쓰비시 데보네어 1세대

끝으로, 과거에 현대 자동차의 기술 파트너였던 일본 미쓰비시 얘기를 하겠다. 한일 합작으로 만들었던 그랜저와 에쿠스가 한국에서는 대박을 친 반면 일본에서는 몽땅 망한 이야기는 차덕이라면 이미 잘 알 것이다.

그랜저의 경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국산 고급 승용차를 개발하려는 시대적 필요가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철도계에서는 서울 지하철 3, 4호선을 만들었고 새마을호 유선형 객차를 도입했다. 도로 쪽으로는 한강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올림픽대로를 닦았으며(김포 공항에서 올림픽 경기장까지 한강 따라 한번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랜저도 개발해서 출시하게 됐다.

한편, 일본에서는 미쓰비시의 대형 고급차가 데보네어 1세대였는데 얘가 1963년? 1964년에 처음 나오고 나서 일체의 개량 없이 20년이 넘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동차계의 살아 있는 화석 실러캔스라고 까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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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데보네어의 신버전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으며, 한국과 일본은 이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져서 각그랜저 내지 데보네어 2세대를 공동 개발하게 됐다. 첫 작품이 나온 게 1986년의 일이다.

그런데 1964년부터 1986년까지 22년을 버틴 데보네어 1세대의 연대기는 일본의 고속철인 신칸센 0계와 연대기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신칸센 0계도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간 동일 차체가 죽어라고 폐차와 교체를 수십 번, 정확히는 무려 36차 도입분까지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식빵 모양 초저항 전동차가 1974년 이래로 12년 동안 1986년까지 도입한 게 끝이었고, 서울 메트로 것도 1989년이 마지막임을 감안하면 동일 차량을 얼마나 오래 우려먹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나저나 각그랜저가 '88 서울 올림픽 대비라면, 데보네어 1세대 역시 신칸센 0계와 마찬가지로 '64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서 개발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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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차량인 신칸센 100계는 도입 연도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로, 얘 역시 각그랜저의 생존 주기와 얼추 비슷하다. 뉴 그랜저는 1992년 가을에 출시됐으며, 신칸센 300계도 1992년에 등장했다. 300계는 우리나라의 고속철 차량 입찰 경쟁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철덕은 자동차의 역사를 동일한 시기의 철도의 역사와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23 08:32 2016/12/2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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