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지금까지 이 블로그의 역사 카테고리에 올라오는 글은 대체로 우리나라 역사, 그것도 현대사 쪽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좀 신선하고 색다른 소재를 다루도록 하겠다.
이번에 ‘사무엘 블로깅 스튜디오’-_-;;의 내부 아이디어 회의에서 소재로 채택된 아이템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유명한 외국 인물이고 그것도 굉장히 옛날 사람이다.

잔 다르크!
오를레앙의 성녀/처녀라고 불리고 백년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구한 영웅이다. 한글이 창제되기 한 세대 남짓 전에 살았다.
(프랑스는 영국과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는 훗날 미국과도 어째 비슷한 구도이다.)

잔 다르크라는 명칭은 전통적인 first name / last name 형태는 아니다. 아르크의 조안(Joan of Arc) 정도에 가까우며, 이는 성경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막달라의 마리아인 것과 비슷한 맥락임을 감안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한국에서는 유 관순 열사가 잔 다르크와 여러 모로 비교되곤 한다. 잔의 생년은 1412, 몰년은 1431인데, 거기에다 490만 더하면 유 관순의 그것(1902~1920)과 거의 일치한다. 비록 성장 배경과 행적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으나, 만 20세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는 결정적인 공통점은..;; 실제로 유 관순 자신부터가 학창 시절에 잔 다르크의 전기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자기도 잔처럼 살고 싶다는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종교에 관한 한 아주 독실했다는 것. 유 관순은 이화여대의 전신인 학교에 다니면서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로부터 감리교 신앙을 간직하고 있었다. 잔은? 가톨릭 쪽인데, 아예 하늘로부터 ‘조국을 구하라’라는 계시=_=를 받았다고 한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변장을 하고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왕을 바로 찾아서 알아보고 경의를 표할 정도의 신통력도 소유했다고. (물론 왕을 전에 만나 본 적이 없는데도)

본인은 성경 이외의 직통 계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이상한 은사주의와 결부시켜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이다(북한 같은 극단적인 곳에서 정말 극소수 예외적인 간증이 나오는 건 제외 내지 판단 보류). 그러니 잔 다르크는 꽤 흥미로운 경우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파티마 예언 같은 게 생각나서 살짝은 섬뜩하기도 하다. 그걸 심지어 UFO 현상과 결부짓는 연구자도 있다던데.

나름 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있던 유 관순과는 달리, 잔 다르크는 아예 글을 배우지도 못한 문맹이었고 스펙상으로는 정말 보잘것없는 촌뜨기 시골 소녀였다. 그러나 자기를 깔보고 모함하고 해치려는 사람들과의 언쟁은 매우 논리정연하고 유창하게 잘 했다고 한다.1) 마 10:19-20이나 행 6:10이 적용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식 교육도, 군사 훈련도 받은 적이 없는 겨우 여고생뻘 소녀가 어떻게 해서 전쟁터에서 그렇게 큰 공을 세웠는지 신기하기 그지없다. 전투병으로든, 지휘관으로든, 아니면 그냥 얼굴마담 정신적 지주일 뿐이었든지 말이다.
잔은 그 흔한 초상화조차 전해지지 않으며, 오늘날 전해지는 관련 그림들은 다 그녀의 얼굴을 모르는 화가가 그린 상상화이다. 다만, 10대 소녀를 30대 이상의 아줌마처럼 삭힌-_- 그림이라든가, 치렁치렁한 긴 생머리 차림으로 갑옷을 입은 여군 모에화 그림은 아무래도 고증 오류가 아닌가 싶다. -_-;;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뮬란을 생각해 보자. ㄲㄲ)

그러나 이런 잔의 최후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고 너무나 비참했다. 군주인 샤를 7세와의 관계가 어째 성경에서 다윗과 사울의 관계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라? 다윗도 양치기 출신 촌놈) 듣보잡 촌뜨기 소녀가 전쟁에서 공을 세워 너무 유명해지고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그녀의 도움을 받은 국가는 위기에서 벗어난 뒤부터 그녀를 오히려 경계하게 된 것이다.2)

그렇게 프랑스 황실과 불편한 사이가 되어 있던 차에, 잔은 불리한 전투에 나갔다가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당시 관행이었던 몸값 지불이라든가 포로 교환 같은 대응책이 얼마든지 있었으며, 적국인 영국조차도 잔을 바로 죽여 버리는 것보다는 그런 협상을 기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샤를 7세는 어차피 정치적으로 이용 가치가 끝난 잔을 구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그녀를 고의로 철저히 외면했다. 자기를 당당한 프랑스 국왕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부하를 그렇게 배신하는 천하의 개쌍놈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른바 토사구팽.

마치 예수님이 동족으로부터 버림받았듯이, 잔 다르크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적국인 영국에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했다. 듣자하니 잔은 여성용이 아닌 일반 (남자) 군인용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불결하고 비위생적인 곳에서 힘들게 지냈으며, 간수들로부터 수시로 학대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삼손이 블레셋 군대에게 붙잡히고 나서 어떤 꼴을 당했는지를, 예수님이 체포된 후 무슨 짓을 당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잔을 이용해서 프랑스로부터 단물을 좀 빼내려고 했는데 정작 프랑스가 반응이 없으니 재미가 없다. 그럼 영국의 입장에서는 적군인 잔을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잔이 차라리 삼손처럼 다른 데에 이용할(노동력-_-) 가치가 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죽이긴 하는데, 뭔가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서 죽였다.

잔을 정죄하는 재판 역시 성경의 스토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성경을 보면 악의 무리들이 체포된 예수님을 짜고 치는 고스톱 각본대로 정죄하듯, 잔은 변호사 선임이나 가족 면담 같은 일체의 법적 권리도 행사하지 못했으며 재판은 일방적이고 불공정하게 진행됐다. 잔은 훗날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도 모르고서 ‘본인은 교회의 처분대로(=사형) 따르겠습니다’ 문서에 그냥 서명했다고 하니 이 정도면 막장이 따로 없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행적으로는 도저히 트집 못 잡으니까 신성 모독과 하나님 사칭 정도나 걸고 늘어졌듯, 잔을 이단자로 만들기 위한 떡밥으로 남장(신 22:5)이 거론되었다. 내가 보기에 이건 “성경에 드보라 같은 여걸도 나오니까 여자 목사도 교리적으로 OK” 내지, 예수님에 대해서 안식일에 병 고친 걸 갖고 트집 잡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한 마디로 말해 찌질하다.

결국 잔 다르크는 각본대로 유죄 판결을 받고 정말 꽃다운 나이에 화형대에서 끔찍한 최후를 마쳤다. 영화를 보면 화형 집행을 하기 전에 희생자에게 삭발을 하던데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백성들로 하여금 유해를 챙기지 못하게 하려고 그녀는 절명한 뒤에도 시신이 세 차례에 걸쳐 완전히 불타서 형체가 남지 않았으며, 가루는 그대로 강에 뿌려졌다고 한다.3)
뭐, 시신의 보존 상태에 관한 한은 유 관순도 만만찮게 처참하긴 했다. -_-;;

샤를 7세는 잔 다르크가 죽은 지 무려 25년이 지나서야 그녀에 대한 명예 복권을 선언하고, 이단 혐의를 철회했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평판은 당대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오히려 그녀가 본격적으로 재조명을 받기 시작한 건 근대에 와서 민족주의, 국가주의 같은 이념이 부각되고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가톨릭에 의한 성녀 승격도 20세기 초가 돼서야 이뤄진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 내부에서는 역시 우익들이 잔 다르크를 아주 좋아한다. 과거 박통이 이 순신 장군에 유달리 집착하고 성웅화한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 보면 정확하다. 박통의 롤모델이라 일컬어지는 나폴레옹이 잔 다르크를 팍팍 띄운 것도 응당 사실임. 그런데 다음으로는 히틀러가 그 나폴레옹을 굉장히 존경했다며?
위인을 존경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기 이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고인드립으로 변질되는 것은 언제든 경계해야 하겠다.

Notes:
1) 예를 들자면, “오호.. 네가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라? 그 신님의 말 억양은 어떻던데? ㅋㅋ”라는 비아냥거림에, “님 말투보다는 듣기 좋더군요! -_-” 식의 시크한 답변. 뭐, 이런 것 말고도 잔은 신학자, 종교 지도자들의 말문도 막을 정도로 조리 있게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관을 논증했다고 한다.

2) 군 수뇌부가 왕권보다 너무 강해져서 아브넬과 사울 내지 요압과 다윗처럼 된다면 그건 문제이지만, 반대로 저것도 영 아니잖아? 국가를 위해 충성한 사람을 저렇게 홀대하면..;;

3) 화장터에 가 보면 알겠지만, 사람의 시신은 신원 확인이 전혀 불가능할 정도로 깡그리 불태워 가루만 남기려면 은근히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 2차 세계 대전의 말엽엔 히틀러가 자살 후에 그렇게 화장되고 싶어하였으나, 차마 그렇게 되지 못했고, 결국 소련군이 치아 상태를 보고 히틀러의 시신을 확인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1/05/17 08:39 2011/05/17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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