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 이곳 학교 이야기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에 해당하는 20세기 말에는 국어와 관련된 사건이 주변에 유난히 많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감수성 예민하던(?) 본인의 진로 결정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1999년에는 웬 뜬금없는 한자 병용 정책이 내려져서 한글 전용 지지 진영과 반대편 진영이 극심한 키배를 벌였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격렬하게 싸웠다. (그때 나도 혈기 넘치는 키보드 워리어 중 하나였다 ㄲㄲㄲㄲ) 지금 도로 표지판과 지하철 역명판에 한자가 병기된 건 이 시절의 산물이다.
사실, 소위 '한자파'들은 1998년에 전국 한자 교육 추진 총연합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그때부터 이미 의기투합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1998년에는 복 거일 씨의 영어 공용화 드립 때문에 시끄러웠다. 이 때가 뭐가 씌인 해이기라도 했는지?

그래도 1999년 3월 1일에는 그 보수적인 조선일보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를 따라 전면적으로 가로쓰기를 시행하고, 예전에 비해 한자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
2000년에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이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다.

운동 단체들만 시끌벅적했던 게 아니다.
1998년부터는 21세기 세종 계획이라는 게 정부 차원에서 10년간 추진되어, 한국어의 말뭉치 데이터를 구축하고 가공하고 이것으로부터 뭔가 의미 있는 실험 결과를 도출하는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출판사가 아닌 학술 연구소와 정부에서 각각 대형 국어 사전을 내놓았다. 전자는 바로 연세 한국어 사전(1998)이요, 후자는 그 이름도 유명한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1999)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첫 종이 사전은 둘 모두 두산동아에서 출판했다. 현재는 다들 개정판을 인터넷으로만 제공하고 종이 사전을 내지는 않는 듯.

연세대는 국어학에 관한 한 서울대와는 다른 독자적인 학풍을 형성하고 있다. 옛날에는 최 현배 파, 이 희승 파로 갈려서 교과서 용어조차 다를 정도로 서로 이질적이었지만 지금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연세대가 좀 말뭉치 기반 언어 연구라든가 사전학, 비교 언어학처럼 언어학 중에서도 응용 분야를 더 좋아한다.

이런 맥락에서 연세대에서는 국문과 교수들과 관련 인사를 주축으로, 이미 1980년대 중반에 국어사전을 자체적으로 만들겠다는 선언을 했다. 옛날 조선어 학회 시절에 천신만고 끝에 발간된 <큰사전>의 정신과 사명감을 계승하겠다고 말이다. (당장 정신적 지주인 故 최 현배 박사가 연세대 교수!)

10년에 가까운 시간과 수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된 끝에, 1998년 한글날에 처음으로 연세 한국어 사전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2000년 한글날에는 웹 기반 사전 서비스가 시작되었으며, 컨텐츠는 지금까지도 꾸준히 증보와 개정을 거듭하고 있다.;;

본인이 재학 중인 연세 대학교의 '언어 정보학' 협동 과정은 1990년대 말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개설된 상당히 독보적인 학과이다. 사전 편찬실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마침 국가에서도 세종 계획이다 뭐다 하면서 국어 정보학 분야에 종사할 인력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특히, 국어학과 컴퓨터 기술을 잘 융합할 수 있는 사람을!

나도 옛날에는 사전을 만든 국어학자들이 민족주의 정신이 투철한 독립 운동가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여기서 공부를 좀 해 보니, 저분들이 정말 똑똑한 수재였으며 이런 험난한 길을 안 갔으면 훨씬 더 돈 많이 벌고 성공했을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내 홈페이지에 있는 석인 정 태진 선생의 일화를 읽어 보기 바란다.

그래서 이 학과에는 말뭉치 언어학 내지 사전 편찬과 관련된 수업이 필수로 등재되어 있다. 사전 편찬학 수업을 들으면서 사전 편찬과 성경 번역도 뭔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걸 느꼈다. 사전을 잘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어렴풋이 느꼈으며, 사전 원고를 검증하는 도구(컴퓨터 프로그램)가 조금만 더 똑똑하면 지금보다 상당수의 번거로운 노가다 수작업을 줄이고 사전의 오류도 줄일 수 있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사전 뜻풀이에 정작 이 사전에 없는 어려운 어휘가 쓰인다거나, A라는 뜻풀이에 B 단어가 등장하고 B의 뜻풀이에 A 단어가 등장하는 순환 뜻풀이 같은 것. 일명 순환 참조가 되시겠다.

요즘은 사전 편찬자가 자기 언어 직감에 의지하여 뜻풀이와 예문을 작성하기보다는, 다량의 말뭉치를 분석하여 거기서 도출된 통계대로 용례와 뜻풀이를 추출하는 방법이 일반화되고 있다. 편찬자의 주관이 안 들어가고 객관적이라는 장점 하나는 확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연세 한국어 사전은 철저하게 이 방법을 활용하여 만들어진 게 특징이며 여타 사전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행 표준어 규범까지 무시할 정도로 독자 노선을 간 줄은 몰랐다.

지금이야 드디어 '짜장면'이 복수 표준어가 되었다지만, 10년도 더 전에 나온 연세 한국어 사전은 '자장면'의 풀이가 “짜장면의 잘못”이라고 되어 있었다! 덜덜덜;;; 미래를 내다본 것일까?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
당연히 국민 중에 '자장면'을 쓰는 사람은 전혀에 가깝게 없었을 것이고, 그 추세가 밑천인 말뭉치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서 그런 풀이가 나왔지 싶다.

이런 식으로 연세 사전은 라이벌(?)인 표준 국어 대사전과는 정반대의 뜻풀이를 한 게 여럿 있었다.
'흉내 내다' 대신 '흉내내다'를 한 단어로 풀이하고, '-측(one's side)'을 의존명사로 보아 붙이는 용법을 지지하였다. 아래아한글의 맞춤법 검사기만 돌려 봐도 빨간 줄이 쳐질 단어이지만, 솔직히 '흉내 내다'는 무의식적으로 붙여서 써지는 경우가 더 많긴 하다.

옛날에 문법 용어를 두고 동사 vs 움직씨 같은 기싸움을 한 것을, 사전으로 무대를 옮겨서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국어 정보학 쪽으로 식견이 있는 일부 사람들은 이런 파격적인 시도를 한 연세 사전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한편, 이에 반해 표준 국어 대사전은 정부 기관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 편찬했으니, 성경으로 치면 한국의 유일한 공역이라 할 수 있으며 여타 사전들과는 그 위상이 다르다.

하지만 이 사전은 이것대로 표제어 수 늘리느라 중국· 일본에서도 안 쓰는 이상한 한자어들을 잔뜩 덧붙였다고 비판 받고, 잘못된 풀이와 틀린 용법까지 무분별하게 다 실어서 책 두께를 부풀렸다고 욕 많이 얻어먹긴 마찬가지였다. 여기 국문과 대학원 재학생들 중에서도 표준 국어 대사전 좋아하는 분 별로 못 봤다. -_- 그래도 국립 국어원에서 만든 만큼 이건 표준어/맞춤법 규범을 어기지는 않는다.

21세기 세종 계획이 만료된 뒤, 이곳 언어 정보학 협동 과정은 한국어 교육 쪽과의 접목을 통해 경쟁력 확보를 시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그쪽이 수요가 많고(한류 열풍 약빨이 오래 가야 할 텐데!), 사전 편찬은 언어 교육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말뭉치 같은 걸 접목할 수 있는 응용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보다 '언어'에 비해 '정보'의 비중이 덜해진 건 사실이며 그건 나로서는 약간 아쉬운 점이다.

이런 와중에 본인은 진짜 두 분야를 완벽하게 섞은 연구를 하려고 이곳에 진학해 있다. 교수나 랩이 주도적으로 뭔가를 push해 넣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인플레이 위주이고 혼자 알아서 덕질을 찾아서 할 수 있는 곳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난 그런 곳이 낫다.
나는 더 빠른 하드웨어를 만들거나, 수학적으로 더 엄밀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하는 것보다는, 이를 이용해서 한국어와 한글 다루는 걸 더 멋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응용 쪽이 아무래도 훨씬 더 잘 어울린다.

Posted by 사무엘

2011/10/18 19:31 2011/10/1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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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소범준 2011/10/20 12:36 # M/D Reply Permalink

    1. 석인 정태진 선생의 일화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런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이 나라의 말을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을지.... 또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 그 공로 또한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2. 사전 편찬 = 성경 번역 : 동감입니다.
    사전은 사전대로 우리말 단어들의 용례를 올바로 조사하는 노력이 상당히 많이 들고, 성경은 성경대로 원어와 번역 언어를 비교하여 올바른 단어를 선정하고, 또한 문맥을 훼손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번역하는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에 또 힘들고... 마치 그리스도예수안에 분들이나 영어 킹-성경 번역자들이 겪었던 고초를 보는 것 같네요.

    3. 연세 사전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고, 동아 사전은 초등학교 때 제 옆에 끼다시피 한 사전이었습니다.(연세 사전에 비하면) 동아 사전도 그다지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더군요.

    1. 사무엘 2011/10/20 21:42 # M/D Permalink

      덧붙이자면, 저는 개인적으로는.. 사전이 오늘날의 언어 모습을 무조건 투영만 하진 말고, 어떤 건 잘잘못을 가리고 교정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아무리 사람들이 구분 없이 혼용하고 있더라도 '다르다'와 '틀리다'는 반드시 구분해서 뜻풀이를 실어 준다거나, '째'와 '번째'를 구분하는 것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걸 판단하는 게 역시 사람 주관이 많이 개입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를 판단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2. 비밀방문자 2014/12/03 13:4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4/12/01 00:50 # M/D Permalink

      안녕하세요~!
      선생님 같은 내력이 있으신 분께서 누추한 제 블로그를 찾아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또한 제 프로그램도 유용하게 사용하고 계신다니 기쁩니다.
      저도 한글이나 세벌식 글자판 같은 게 없었으면 그냥 평범한 여타 분야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지내거나 철도로 업종을 바꿨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10대 나이 때부터 시작한 본업을 지금도 버릴 수가 없고 지금까지 잊은 적이 없네요. ^^
      한글 학회 행사 같은 일이 있을 때 한번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 올리는 제 댓글은 공개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다가는 이 정도로 인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3. 들꽃 주중식 2014/12/03 13:55 # M/D Reply Permalink

    사무엘 님께

    바로 답장을 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들꽃 주중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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