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학회는 주 시경, 최 현배 선생의 문자관을 계승하면서 민족 수난사를 몸으로 겪은 민간 단체이다.
이런 취지로 창립된 어문 연구 민간 단체로는 거의 세계 최초급이라는 자부심이 있으며,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에 얽힌 프라이드가 정말 대단하다. 무슨 행사를 할 때 국민 의례 후에 호국 영령 묵념이 아니라, 그런 선배 국어학자들에 대한 묵념을 한다. 우리나라 고신 쪽이던가? 상당히 보수적인 장로 교회 교파인데, 신사 참배 거부 순교자 배출 하나 갖고 갑빠-_-가 장난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

때는 1940년대 초, 가장 악랄하던 일제 말기였다. 창씨 개명과 민족 말살, 조선어 말살 정책이 강행되던 시절이다. 소설 <꺼삐딴 리>에 있는 '국어 상용의 가(家)' 그게 현실이던 때다.
한 여학생의 일기장에 "(우리 담임) 선생님은 국어(당시의 일본어)를 사용하던 학생을 벌 줬다"라는 문구가 적힌 걸 일본인 형사가 발견하여, 즉시 당사자를 호출, "어? 일본어를 쓰는 학생을 선생이 왜 벌 주냐? 그 선생은 대체 누구야?" 하면서 취조했다.

여차여차 하던 끝에, 요주의 인물이던 석인 정 태진 선생이 걸려들었다. 그가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학회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제는 이 기회에 안 그래도 민족주의 성향이 다분하던 이 단체를 골수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로 조작하여 국어학자들을 줄줄이 잡아들이고, 없는 죄를 자백할 때까지 투옥과 고문을 일삼았다. 박통 시절로 치면, 쉽게 말해 다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였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어 학회는 큰사전(역사상 최초의 국어 사전)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작업은 전면 중단되고 원고마저 압수되고 말았다. 이때 이 윤재, 한 징 두 분이 옥사하기도 했다. 정 태진 선생은 최 현배와 더불어 가장 무거운 등급의 징역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가 8 15 광복과 더불어 풀려났다. 자세한 것은 이 홈페이지의 한글/세벌식 란에 이야기가 적혀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일제가 허겁지겁 도망친 덕분에 사전 원고를 되찾은 것은, 정말 천만 다행이었다.
http://moogi.new21.org/book23.htm

한글 학회는 내가 느끼기로 어지간한 어문 학회처럼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짬뽕으로 갖추고 있다.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70년대에 나라에서 지어 준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주지만, 각종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하고 여전히 상대적으로 열악한 재정을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뉴스에서 본 것 같다.

저런 역사, 저런 정신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한글 학회는 친일 잔재 청산, 민족 자결 성향도 무척 짙다. 친일 친미 수구꼴통 한자파들에 대해서 호전적이다. 실제로 한글 운동 하는 분들 중에 정치-종교 쪽으로도 진보 성향이 굉장히 강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명박 반대, 조선일보 반대, 이 승만-박 정희 캐증오, 거기서 더 나아가면 반기독교, 우리민족끼리 등등. -_-;;

그러나 한글 학회의 성향이 그렇게까지 편향적이지는 않다. 그래도 역대 대통령 중에 박 정희만치 한글 운동 단체에 지원 많이 해 주고 한글 사랑한 대통령은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인정한다.

또 하나의 변수. 진보 부류는 대체로 인본주의적이고 상당한 반기독교 성향인 경우가 많지만, 한글 학회는 일단 '한글 성경'이라는 역사적 유산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반기독교 성향일 수 없다. 말과 글과 얼이 셋이며 동시에 또 하나라는 말은 삼위일체 교리와 완전 일맥상통한다. -_-;;

여기에 활동하는 분들 중에는 아주 독실한 '교인'도 응당 계신다. 물론 '교인'이 반드시 진정한 의미의 bible believer를 뜻하지는 않는다. 가령 나 채운 장신대 교수의 경우, 말씀 보존 학회의 관점에서는 변개된 성경을 옹호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믿지 않는 적군(?)이지만, 한글 학회의 관점에서 보면 아군인 기독교인인 셈이다.

그럼 한글 전용은 진보 인사들만 지지하는가? 그렇지 않다. 김 대중 전대통령을 증오하고 이 승만-박 정희를 존경하고 한미 동맹 강조하는 진영에도 많다.
김 동길 연세대 명예 교수는 80년대엔 <한글 문화권의 꿈>이라는 글을 쓰고(타자연습 연습글로도 있음.) 얼마 전까지도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에 기부까지 한 분이다.

요즘도 프리존 같은 보수 성향 인터넷 매체의 주된 논객인 군사 평론가 정 창인 씨는, 90년대 말까지 한글 학회 소식지인 <한글 새소식>에 한자 혼용 정책을 조목조목 비판, 반박하는 글을 시리즈로 연재한 분이다. 최근에는 “나는 조 갑제 씨를 애국자로서 존경하지만, 그의 한자 사용 주장에는 찬성하지 않는다”고까지 글로 썼다.
http://hanmal.pe.kr/bbs/view.php?id=yeollingeulmadang&no=3493

현직 교사이며, 북한 인권 운동가 남 신우 씨를 공개 지지하고 격려하기도 한 우익 논객 최 성재 씨도 <한글은 얼마나 우수할까? 위대할까?>란 글을 썼다. 내 홈페이지에 역시 전재되어 있다. 한글 전용 성향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http://moogi.new21.org/sebulsik/hangeul_excellence.htm

우익의 대명사인 시스템 클럽의 지 만원 박사는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할 일 많은데 웬 한자 논란>이란 글에서 “필자는 한자만 보면 도망가 / 한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컨텐츠와 표현의 논리... 한문을 보기조차 싫어하는 필자는 문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수학 박사를 문맹이라 할 것인가?”라고 공학도다운 안목으로 정곡을 찌르는 논지를 편 바 있다.
http://www.systemclub.co.kr/bbs/zb4pl5/zboard.php?id=new_jee&no=5350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한자/한문, 영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깊게 잘 아는 사람들이다.
이 진영에서 정말 괴팍하게 유일한 예외는 앞서 언급된 조 모 씨뿐인 것이다.

* * * * *
덧.

한국어와 영어는 서로 정말 극단적으로 완전히 다른 언어이다. 어려서부터 해당 국가에서 장기간 살지 않은 이상, 발음까지 완전히 똑같이 원어민 모국어 수준으로 마스터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나랏말씀이 듕귁에 달라"가 지금은 "나랏말씀이 영어와 달라"이다. 또한 미국인들도 외국인이 그 정도로 영어를 구사해 주기란 바라지도 않는다!

일본어야 구조적으로 한국어와 비슷하고 더구나 한자까지 쓰니, 옛날에 총칼을 동원해서 밀어붙이기가 유리한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어는 아무리 돈 쏟아붓고 심지어 무력으로 위협한다 해도 과연 호락호락 한국어를 대체할 수 있을까?

나는 어렸을 때는 한국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그 국력과 위상도 있지, 이제 한국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변질될 뿐이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회하고 완전히 똑같다. 한국에서 영어 공용화는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가능하지가 않다.

한국인은 어차피 한국어 사고방식이라는 핸디캡(?)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니 미국인을 영어로 이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아예 출발선의 위치가 다르다! 영어는 언어이며 언어는 도구일 뿐이다. 그들보다 나은 실력, 더 수준 높은 정신 세계, 인류를 이롭게 하는 컨텐츠로 이겨야 한다. 그리고 차라리 번역과 통역 기술 개발에 애써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09:52 2010/01/1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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