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곁의 두 숫자를 한데 싸잡아 지칭하기
예전에 몇 번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한국어는 영어 대비 참 기괴한 면모가 많은 언어이다.
- 청자를 포함하지 않으면서 화자를 낮추는 1인칭 복수 대명사 ‘저희’
- 청자를 의식하지 않는 독백투 “어 그게 뭐더라?” 따위
- 부정 의미의 한 단어 타동사 “모르다”.. 내가 아는 외국어 중엔 이게 존재하는 언어는 없다. 전~부 “do not know”.. ‘알다’에다가 not 연산자를 씌울 뿐이지. 한국어에서 “싸다 / 비싸다”와 비슷하게 말이다.
그리고 한두, 두셋, 서너, 너댓, 대여섯, 예닐곱처럼 주변의 숫자 둘 정도를 싸잡아서 일컫는 므흣한 단어가 존재하는 것도 독특하다.
영어에서 아주 적절한 사례를 개인적으로 꼽자면.. 디즈니 포카혼타스에서 초반부 뮤지컬 ‘Virginia Company’ 노래의 reprise 부분에 나오는 요 대사가 아닐까 한다.
우린 인뎐도 해치울 거야~ 하나? 아니면 두세 놈 정도?
이건 “신대륙을 개척하다가 미개한 야만인과 맞닥뜨리면? 야만인쯤이야 걍 없애 버리면 그만이지~ 숫자가 많지도 않을 거야” 정도의 뉘앙스이다.
자막이나 더빙은 저런 뉘앙스를 짧은 음표와 화면에 도저히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아주 뭉뚱그려진 의역만 나갔다.
- 저 영어 문장은 kill Indians라고만 하지 않고 간접목적어 ourselves를 집어넣은 4형식 문장이다. God will provide himself a lamb처럼..;; (저 성경 구절은 뭐 5형식 중의적 해석까지 가능..)
- Indian을 Injun이라고 줄여 놓은 걸 보면.. 구개음화는 꼭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음운 변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긴, don’t you / could you 따위의 발음이 ‘츄 / 쥬’로 바뀌는 것도 같은 예이다.
- 뒷부분에 mine, mine, mine 노래에서는 제임스 폐하를 Jimmy라고 가리키는 것도 나오는데.. 우리나라는 아시다시피 애칭이라는 개념이 없는 문화권이다. (Bill이랑 William이 어떻게 같은 이름인가!) ‘지미’가 아니라 ‘젬쑤 왕’ 정도로 줄이는 게 더 직관적일 것 같다.
2. 동물 관련 순우리말
(1) 흘레
동물의 교미(mating)를 나타내는 명사이며 '흘레하다'라는 형태로 동사도 될 수 있다.
이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엄연히 올라 있긴 하지만.. 현실의 인지도는 가히 듣보잡 사어 수준이다. 텔레비전 순우리말 퀴즈 같은 데서나 나올 것 같다. 저 말소리가 어딜 봐서 그런 동작을 연상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짝짓기'라는 말이 대신 쓰이게 됐는데.. 이걸 처음으로 퍼뜨린 곳은 다름아닌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 TV 프로였다고 한다.
(2) 무녀리
한자어 무녀(巫女/舞女) 따위와는 전혀 관계 없고, 그냥 '문열이'를 대충 풀어서 적은 것이다. 한 배에서 태어난 여러 포유류 새끼들 중에서 엄마 태라는 문을 제일 먼저 열고 나온 놈을 '무녀리'라고 한댄다.
그런데 이런 무녀리는 확률적으로 다른 새끼들에 비해 덩치 작고 약하고 젖 쟁탈 경쟁에서도 밀리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얘는 사람으로 치면 열 달을 덜 채우고 좀 모자란 채 태어난 '팔불출'과 비슷한 뉘앙스의 단어가 됐다.
이 단어를 '문열이'라고 형태를 밝혀 표기하지 않는 이유는.. '문닫이'라는 단어가 있는 게 아니니 생산성이 없고, 의미도 gate/door opener라는 원래 뜻과는 상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키미'를 '지킴이'로 적는 것보다도 명분이 더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열쭝이'라는 말도 있다.
이 역시 "1.겨우 날기 시작한 새 새끼 2.겁이 많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뜻.
3. 돼지에게서 유래된 한자어
돼지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한자어는 돈(豚)이긴 한데.. 다른 한자도 있다. 마치 개를 가리키는 견(犬)과 구(狗)의 관계와 비슷해 보인다.
- 저돌적: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돌진하는. '저'가 저팔계, 제육 할 때의 猪(돼지 저)이다. 멧돼지가 원래 저렇게 저돌적으로 돌진을 잘 하나 보다. '전투적으로, 의욕적으로' 대신 '저돌적'을 즐겨 사용해야겠다. ^^;;
- 해안면: 강원도 양구에 원래 뱀이 그렇게 많이 들끓었나 보다. 그런데 돼지를 잔뜩 데려와서 키우니 돼지가 뱀들을 내쫓거나 잡아먹어서 없애 줬다고 한다. 그래서 지명의 '해'가 亥(돼지 해)이다.
4. 도전
현재까지는 '도전'이라는 말이 챌린지의 뜻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지만, 앞으로 미래엔 전기 절도(盜電)라는 쓰임도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도청, 도촬처럼 말이다. 챌린지와 어감상 구분하기 위해서 '도'는 좀 장음이 될 것이다.
세계 각국이 앞으로 2, 30년 안으로 내연기관 자동차를 주류에서 퇴출시키려 하고 있다. 그 자리를 전기차가 차지할 것이고 충전 시설이 곳곳에 들어설 것이다.
충전 시설을 이용하려는 운전자 사이에 자잘한 마찰이나 분쟁이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꼭 자동차가 아니라 폰 충전기를 공공장소 콘센트에다 몰래 쓰윽 꽂는 것도 지금보다 더 강하고 적극적으로 금지되는 분위기가 형성되리라 여겨진다.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이런 것에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다. 자리값에 이미 그런 가격이 포함돼 있는 카페 같은 곳이 아닌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려면 콘센트를 사용하는 것도 반드시 꼬박꼬박 돈을 내야 한다.
이런 시국이 예상되는데 앞으로 즐겨 쓰이게 될 단어는 아무래도 '도전'의 새로운 동음이의어 한자어일 수밖에 없다. 지금도 사전에 올라 있기는 하지만 잘 쓰이지 않을 뿐.. 하지만 언론에서 매번 번거롭게 '전기 절도'라고 풀어서 쓰지 않는 한, '도전'의 쓰임이 재조명을 받게 될 것이다.
5. 군대, 경찰, 소방..??
공무원 중에서 사회의 치안과 안녕을 직접적으로 담당하는 직업, 대놓고 순직할 가능성이 높은 직업, 오늘날까지도 계급장 달린 제복이 남아 있는 직업을 꼽자면 군인, 경찰, 소방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각각 외적과 싸우고 자국 범죄자와 싸우고, 화마와 싸운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거기에다 자연재해나 유해조수와 싸우는 건 일단 소방관에서 시작하는데, 감당이 안 되면 경찰, 군인의 순으로 공조도 하게 된다.
군인, 경찰관, 소방관이 들어가 있는 조직을 건물 관점에서 가리키는 명칭은 각각 군부대, 경찰서, 소방서 정도에 대응한다.
그런데 집단 전체의 총체적인 명칭은 무엇일까? 군인이 있는 곳이야 군대 내지 그냥 군이라고 간단하게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경찰도 단독으로 직업이나 집단, 심지어 사람까지도 두루 간편하게 가리킬 수 있다. 꼭 경찰'관'이나 순경이라고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소방'은 그렇지 않다! 이 단어는 그냥 '화재를 진압하거나 예방함', firefighting이라는 동작만 나타낼 뿐, 그 일을 수행하는 관청 조직이라는 뜻이 없다. 그래서 신문 기사를 쓸 때 난감하다.
"신고를 받은 경찰과 소방(???)에서는 멧돼지의 포획에 나섰다" 이런 식으로 간편하게 워딩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소방 당국' 정도는 돼야 관청 조직이라는 뜻이 들어가니 번거롭다.
"경찰을 부르겠다!", "경찰에 신고하겠다",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 군대 대신에 소방 당국을 집어넣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그러니 신고 전화번호인 119 '일일구'가 소방 당국을 가리키는 편의상의 총칭으로 통용되고 있는 거다. 신기하지 않은가? 경찰에 신고하려고 할 때 "112 불러라, 112에 신고해라" 이렇게는 잘 말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 보자~!
게다가 119는 화재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의료 응급 상황까지 다 처리하지 않는가? 애초에 '소방'이라는 말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수백 년 뒤, 먼 미래에 우리의 후손은 필요에 따라서 '이릴구' 이런 말을 표준어로 받아들여서 "화재와 응급 환자, 자연재해에 대처하는 정부 조직"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 언론에서 "경찰과 이릴구가 출동.." 운운하면서 말이다. 그건 중립적인 2인칭 대명사 '너님/유님'만큼이나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6. 방송
라디오나 텔레비전 따위가 없던 시절, 우리말에서 '방송'이라는 단어는 원래 '내놓아 보냄', 석방과 거의 같은 뜻이었다고 한다.
영어로 치면 release와 비슷한데.. 영어에서는 죄수만 release하는 게 아니라, 제품을 출시하는 것도 release라고 한다. 한국어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의미 확장이다.
한편으로 현재 영어에서 방송을 뜻하는 broadcast는 원래 씨앗을 널리 흩뿌린다는 뜻인 농사 용어였다.;;
이런 걸 생각하면 언어의 의미 변화라는 게 참 신통방통하게 느껴진다. 우리말에서 '생도'도 꼭 사관학교 재학생에 국한되지 않은 제자, 학생이라는 더 넓은 뜻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7. 나머지
(1) '백엽상'은 백이 white 白이 아니었구나..!! 충격이다. =_=;; 당연히 화이트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다른 어원에서 유래됐기 때문에 100 百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학교마다 운동장 한켠에 있었던 물건이지만 요즘은 거의 찾을 수 없어지고 있다..
(2) 우리말에 "if and only if"(역도 성립하는 필요충분조건)라든가 "and/or"(둘 다인지 하나만인지는 중요하지 않)을 분명히 나타내는 조사, 부사, 어미 따위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3) '괴멸/궤멸'은 분간이 거의 안 되는 발음에 뜻은 거의 같은 단어쌍인 것 같다. '저지/제지', '환난/환란'처럼 말이다.
우리말에 이런 예가 더 있지 싶은데 당장은 기억이 안 난다.
(4) 우리말은 '낳다'와 그 반의어 '태어나다'가 모두 능동인 반면, 영어는 be born이 수동 형태이다. '출산되었다/출산 당했다' 이렇게 워딩을 하지 않는다는 게 인상적이다.
영어는 '결혼하고 결혼 당하다'(marry and be married to)라고 말하지만, 한국어는 이 역시 '장가 가다, 시집 가다'라고 모두 능동이라는 차이가 있다.
(5) 금융과 관련된 '외상, 어음'이 한자어가 전혀 아니고 순우리말이라니 굉장히 의외이다.
기왕이면 더치페이, 1/n을 뜻하는 '각추렴'도 대중적으로 더 널리 쓰였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