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잘 알다시피 현재까지 지구의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 거주지에 핵폭탄을 쳐맞아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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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기란 엄청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1945년 8월경의 일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단순히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범한(?) 악행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때 항복 안 하고, 총체적으로 멍청하고 병신같은 뻘짓만 골라서 하면서 천조국한테 개겼기 때문에 저 지경으로 참교육을 당한 것이었다. 지 무덤을 파면서 매를 벌었다.

1. 원폭이 떨어진 곳

잘 알다시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였다. 모두 후쿠오카 일대에 있으며 일본 본토의 완전 남서쪽 끝 지방이다. 수없이 많은 소이탄 폭격을 당해서 먼저 잿더미가 됐던 도쿄하고는 위치와 방법이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 근처에 있는 고쿠라, 그리고 좀 더 동부의 교토도 목표물 후보로 거론됐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비껴 가게 됐다.

2. 원폭의 위력

원폭 이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 폭발 사고였다고 여겨지는 건 1917년의 캐나다 핼리팩스 대폭발이었다.
거대한 화물선 한 척에 실려 있던 화약이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kt 정도의 위력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바닷가에서 불구경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과 잔해에 맞아서 사망자만 2천여 명이 발생했다.

그랬는데 우라늄235 기반의 히로시마 원폭의 폭발력이 TNT 16kt, 플루토늄238 기반의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력은 TNT 21kt 정도로 여겨진다. 두 원폭 모두 무게는 그냥 4톤에서 4.5톤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뒤에 0이 3개가 추가되고도 남는 사기적인 에너지가 나온 셈이다.

배수량 3000여 톤급 화물선에 가득 실린 일반 폭약 vs 대형 폭격기에 실린 4.5톤짜리 핵탄두 달랑 하나의 위력 차이가 이 정도이니..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에는 "이 폭탄은 30여 년 전, 핼리팩스 대폭발 위력의 수 배.."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갔었다. 지금이야 어디서 핵실험을 하면 "히로시마 원폭의 n배" 이렇게 비교 기사가 나가겠지만, 저 때는 헬리팩스가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핼리팩스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지점과 꽤 가까이 있어서 5년 전엔 구조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사망자의 일부가 여기에 매장되기도 했다. 어째 1910년대에 굵직한 사건 두 건과 연루되면서 유명해졌다.

3. 원폭이 떨어진 방식

1940년대에는 아직 지금 같은 미사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음속 왕복 엔진 폭격기가 적진의 상공까지 직접 날아가서 폭탄을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조국은 일본과 더 가까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1944년엔 B29라는 걸출한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드디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열악하던 둘리틀 특공대 시절처럼 깜짝쇼만 한 뒤에 비행기를 버리고 불시착하는 게 아니고, 살을 많이 뺀 함재기들이 평타 정도 폭격을 하다가 근처의 항공모함으로 허겁지겁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더 크고 묵직한 폭격기가 장거리 원정을 가서 왕창 폭격을 퍼부은 뒤에 공간 넉넉한 섬 비행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뭐, 이러고도 일본이 항복을 안 했으면 나중엔 연합군 육군까지 본토에 상륙해서 폭격이 아니라 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를린이 함락됐을 때처럼 말이다.

4. 비행기들이 출격 방식

원폭을 떨군 폭격기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발진했다. 얼추 괌 근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폭탄 투하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정찰기가 홀로 날아서 투하 지점의 날씨 같은 걸 최종 체크했다. 그 다음으로 폭격기 본체, 카메라맨이 탄 촬영 비행기, 계측기를 실은 비행기가 같이 날아갔고.. 폭탄을 투하한 뒤에는 비행기 세 대가 모두 폭발 예정지로부터 급선회· 급강하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파일럿들은 이런 기동 훈련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연습했다.

폭탄은 여객기 순항 고도에 맞먹는 거의 9km대 고도에서 떨어져서 히로시마 little boy 기준, 570m대 상공에서 터졌다. fat man도 뭐 대등소이하다.

히로시마에 간 폭격기와 나가사키에 간 폭격기는 같은 B29 기종이고 같은 지역에서 발진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기체였다. 전자의 애칭은 Enola Gay이고 후자는 Bockscar인데.. 아무래도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한 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유명하다.
두 폭격기의 승무원도 다 달랐다. 동일한 기체나 동일한 승무원이 두 도시에 원폭을 동시에 떨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원폭 재료의 수송

폭격기로 원폭을 떨어뜨리려면 그 전에 원폭을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단, 보안을 위해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와 부품만 날랐고, 조립은 출격 직전에 기지에서 행해졌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티니안 섬까지 수송한 건 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 호였다. 얘는 기밀 유지 명목으로 호위함 하나 없이 살금살금 몰래 항해하며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는 에놀라 게이 폭격기를 기억하기에 앞서 인디애나폴리스 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배는 그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항해할 때도 호위함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1945년 7월 30일, 인근의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어뢰를 맞고 격침 당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전쟁에서 다 졌고 바로 며칠 전에 포츠담 선언 최후통첩까지 나갔겠다, 우리 천조국한테 위험 요소 따위 없을 거라고 상부에서 함장의 요청까지 묵살하면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전 직전에 이렇게 순양함 한 척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 군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인디애나폴리스 측의 구조 요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서 수많은 병력을 망망대해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오히려 함장을 자기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배와 부하들을 날려먹은 패장으로 몰아붙이면서 진급을 누락시켰다. 그 함장은 말년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먼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함장이 직접 "인디애나폴리스 측은 특별히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우린 그 배가 어떤 기동을 하더라도 공격해서 격침시킬 수 있던 상태였습니다"라고 인증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더 밝혀지면서 함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아직 우라늄을 싣고 있던 상태에서 격침됐다면...? 햐~ 이건 "아폴로 13호가 달 착륙선을 분리시키고 난 뒤에 폭발했다면?" 같은 급의 비극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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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 격노해서 어떻게든 일본을 상대로 보복하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에 비해, 저 그림에서 껄껄 웃고 있는 후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한 뒤에야 원폭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원폭 사용을 지지하고 승인했었다.
허나, 그는 훗날 6· 25 때 한반도에서 원폭을 또 동원해서 북괴 중공을 몰아내자는 군부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다. 이 글의 요지는 인류 최초의 핵무기 투입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며 그 전에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조국은 이런 원폭을 떨구기 전에 핵 실험까지 미리 해 봤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모처의 사막에서 나가사키 원폭과 비슷한 규모의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려 본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자기들이 터뜨리는 폭탄이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도 아니었다.

물론 이 핵 실험은 진행 당시에는 극비로 부쳐졌고 종전 이후에야 비밀이 풀렸다. 어디서 뭐가 터졌다는 낌새가 신고된 건 모 공군 기지의 탄약고가 벼락 맞고 통째로 유폭해 버렸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로 무마시켰다.
'트리니티(삼위일체) 실험'이 바로 냉전 이전에 행해진 전무후무 유일한 핵 실험 기록이 됐다.

* 원폭을 맞은 것 갖고 굳이 죽은 일본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잘 죽었다, 쌤통이다' 이러는 거야 인간말종 짓이다.
그러나 지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입 싹 씻고 원폭 맞은 불쌍한 피해자 행세만 늘어놓는 건 더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짓일 것이다.;;

예전에 본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의 사진 기록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이 들어와서 찍은 사진 말고.. 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내부를 목숨 걸고 찍은 진귀한 사진은 딱 네 장이 전해진다고 말했었다. (☞ 이전 글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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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처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찍힌 제일 따끈한(폭발 이후 겨우 3시간 남짓 경과) 현장 사진은 딱 5장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1913-2005)라는 일본인 기자가 찍은 건데.. (☞ 보기)
이건 뭐 혐짤은 전혀 없고, 평범한 전쟁 폐허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쓴 사람들이 거지꼴로 앉았거나 줄지어 선 모습이 전부이다. 훨씬 더 끔찍한 혐짤 급의 시체 사진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찍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미국에서는 원폭 피해자의 참상을 묘사한 글이나 현장 사진은 절대로 언론을 타지 못하게 아주 강압적으로 검열하고 찍어눌렀다고 한다. 반전 반핵 여론이 조성되지 않게 할 의도였지 싶다. 그래서 저 사진들도 GHQ가 일본에서 철수한 1952년쯤 돼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간지나는 버섯구름 사진만 매스컴을 잔뜩 탔을 뿐, 버섯구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버섯구름조차도 위에서 보다시피 히로시마 껀 영 별로이고 나가사키 것이 훨씬 더 멋있으니 그것만 사골이 되도록 인용되고 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2/08/05 08:35 2022/08/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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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1년

(1) 조선에서는 1871년은 무려 천조국과 맞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해이다(6월).
당연히 절대적인 군사력으로는 조선이 택도 없이 쳐발렸다. 상대방은 그 시절에 벌써 초보적인 잠수함과 철갑선과 철도와 기관총, 후장식 저격총을 굴리면서 내전을 벌였던 미친 나라이다. 어디 조선 따위가.. -_-;;

전사자 교환비는 기관총 소지한 문명국 vs 화살이나 딱총 소유한 미개국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뭔 신념이 있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급으로 탈영병 한 명 없이 사기가 충만했으며, 정말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총알이 다 떨어진 뒤엔 돌 던지고 흙을 뿌리기라도 하면서 양키 코쟁이들한테 끝까지 저항했다.
포로로 잡혀 결박당해도 밥과 물을 일체 얻어먹지 않았으며.. 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차라리 찌르라고, 자길 죽이라고 길길이 악을 쓰고 날뛰었다. 아니,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한강으로 뛰어들어 줄줄이 자결한 병사 역시 부지기수였다.

이건 어찌 보면 70여 년 뒤의 태평양 전쟁 때 세뇌된 일본군이 미군한테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음 그래도 반자이 어택까지는.. -_-;; )
남북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여기까지 온 미군 베테랑들도 조선군의 이 병맛 같지만 너무 진지하고 숙연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고 별 메리트 없지.. 자기들도 남북전쟁 폐허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여기는 천조국이 보기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어 보여서 쟤들도 그냥 철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자뻑하여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뒤로 천조국은 조선을 결코 직접 침략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이웃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걸 걍 묵인하기로 입을 맞춰 버렸을 뿐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자 다음으로, 서양에서 1871년은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해이다(5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뜯기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겼으며,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도 언급된 그 유명한 전쟁 말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흑역사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엎치락뒷치락 악연은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 반대로 독일이 져서 천문학적 배상금크리, 그러다가 2차 대전 때는 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비시 프랑스 괴뢰 정부가 등장하는 식으로 더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질서가 개편된 뒤에야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게 됐다.

1871년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더욱 특이한 시기인 이유는.. 저런 혼란스러운 패전 시국을 틈타서 '파리 코뮌'이라는 사회주의/공산당 정권이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70일 남짓 집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표방했었지만, 공산당 특유의 과격한 과거 단절 노선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래된 프랑스 문화재 건축물들이 이때 많이 박살났었다.
또한, 혁명의 나라, 미터법의 원조 나라 아니랄까 봐, 시계와 달력까지 10진법 기반으로 고쳐서 시행했던가 보다. 무엇이든 과거 레거시와는 싹 단절이었다.

하지만 얘들은 오래 못 가고 무력으로 토벌됐다. 이때도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과 자코뱅 공포정치(1794), 홍 경래의 난(1812), 갑신정변(1884),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1864), 우리나라 6 25 부역자 인민재판(195x) 따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피바다가 벌어졌다. “뒈져라 빨갱이!” 우리나라만 이념 갖고 서로 죽고 죽이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당 인터내셔널가가 이 파리 코뮌의 투쟁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니 1871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해였다.
프랑스는 아무래도 영국 독일 미국하고는 동네 물이 좀 다르고, 러시아와 비슷한 기운이 있긴 해 보인다.;;
그나저나 2024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군..

2. 1894년

그 다음으로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연대는 1894년이다.
찬송가 중에서 '내세, 천국'을 노래하는 곡들은 크게 내 인생의 끝(사후 세계) 내지 이 세상의 끝(종말)으로 세부 주제가 또 나뉜다.
그냥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만나 보겠네, 셋째 하늘에 올라가겠네' 이런 건 내 인생의 끝이지만.. '나팔 소리, 새 예루살렘, 들려 올라감, 몸이 변화됨, 예수님 다시 오심' 이런 건 명백히 후자이다.

전자는 그나마 장례 예배 때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불릴 수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야 기독교라면 이견이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교파마다 해석이 차이가 나는 민감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찬송가에 선뜻 수록하기가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드물게 종말을 다루는 곡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팔소리 James. M. Black (1856-1938) Milton
  • 오랫동안 고대하던 James. M. Kirk (1854-1945) McPherson

(주의 신부인 교회가 먼저 들려 올라갔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임하는 건데.. 왜 "천년왕국이 이를 때" 들려 올라가는 걸까?? 후자곡은 가사가 무슨 생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ㄲㄲㄲㄲ)

그런데 위의 두 곡은 작사· 작곡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비슷하고 리듬도 비슷하고, 작사· 작곡자도 이름이 묘하게 비슷한 데다 거의 동시대를 산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두 곡은 모두 189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갑오개혁, 청일 전쟁, 전 봉준의 농민군 항쟁, 우금치 전투..;;
개막장 탐관오리가 백성 등골을 빼먹지, 나라는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지, 왕이라는 작자는 외국을 끌어들여서 민란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학살했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헬게이트에 혼돈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천조국에서는 저렇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올 것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가 이 꿈도 희망도 없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 전하고 학교 짓고 병원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이다.;;;

1800년대 말은 세계 열강의 관점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벨 에포크, 한창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팽창하던 리즈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나라의 자국민이라도 로동자로 저렴하게 착취 당하던 계층이라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피식민지 사람들의 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이때는 근대화 잘해서 아주 잘나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자국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은 묘하게 서양 냄새가 많이 나고 희망적이고 몽환적이다. 찬송가 하나만 생각하다 보니 조선하고는 어쩜 이렇게 극과 극이었나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18 08:36 2022/07/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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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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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야 맹수가 전멸했고 생태계가 단순하다 보니, 야생 동물 때문에 인간이 골머리를 썩는 게 고라니나 멧돼지 정도에 불과하다. 지리산 반달곰..?? 이건 뭐 등산객에게나 해당될 것이고 실제로 잘 지내는지도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의 북부 홋카이도 지방에서는 호랑이도 아니고 곰에게, 사람이 봉변 당하는 일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근현대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개척되면서 인간의 거주지와 기존 동물의 서식지가 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농작물이나 가축만 털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공격 받아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곰에게 잡아먹히기까지 한 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 블로그가 전문적인 잡학 위키는 아니니 모든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언급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건들 중 1915년 말에 벌어진 (1)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일본 역사상 단일 맹수에 의해 발생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 링크)

불곰 한 마리가 몇 번 사람들에게 쫓겨나더니 그 다음엔 작정하고 흑화해서 주변 사람들을 몇 차례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총 6명 + 태아 1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쳤다.
이 곰은 이전에도 살인에 심지어 식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었다. 그래도 사건 현장을 계속해서 집착해서 맴도는 습성 덕분에 엽사에게 금방 발견되어 사살도 됐다.

훗날 이 지역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피해자 위령비를 세웠는데, 흥미롭게도 가해자인 곰에 대해서도 위령비를 만들어 줬다. 곰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척 때문에 서식지를 빼앗긴 피해자라는 정황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에 발생한 후쿠치야마 선 전철 탈선 사고를 생각해 보자. 이때도 사고를 낸 서투른 기관사가 같이 사망했지만, 1주기 행사 때는 기관사를 제외한 승객 사망자 106명만 공식적으로 추모했던 게 같이 떠오른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의 집단주의 국민 정서상, 가해자를 추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 사고는 기관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지나치게 빡빡한 스케줄과 가혹한 벌칙, 징벌적 똥군기를 강요했던 JR 서일본 조직의 총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법적 판단이 바뀌었다. 그러니 지금 관점에서는 이 사고 역시 기관사도 실드와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저 때 불곰이 실내에 쳐들어왔을 때, 어떤 남자는 넘어진 자기 부인을 밟고 천장 근처 대들보로 양상군자-_- 마냥 올라가서 곰을 피했던 모양이다. 아이고~~
다행히 남자도 살고 부인도 살았지만.. 그 뒤로 이들 부부 관계는 당연히 완전 파탄 나 버렸다고 한다. 무슨 대놓고 불륜 바람이 아닌 범위에서 가히 최악의 대형 사고이지 않은지?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었고, 그 다음으로 본인이 하나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은 사례는 (2) 1970년 7월 말에 벌어졌던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자연인 내지 산악활동) 동아리 불곰 습격 사건”이다. 이건 사건의 진행 과정이 굉장히 처절하고 임팩트가 크다. (☞ 링크)

일본 혼슈의 완전 남서쪽 끝인 후쿠오카 대학에 다니던 혈기왕성한 20살 남짓 남자 대학생들 5명이 홋카이도까지 원정 가서 산맥 횡단 등산을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산 중턱 공터에서 텐트를 치고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쉬기 시작했는데.. 이때 문제의 야생 불곰(암컷)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곰은 처음에는 사람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텐트 밖에 놓여 있던 배낭들을 뒤적이면서 짐 속의 음식만 털어 가려 했던 것 같다.
허나, 곰알못이던 대학생들이 어설프게 라디오 틀고 금속류를 부딪히고 모닥불을 피우면서 그 곰을 쫓아냈다. 그리고 곰이 보는 앞에서 배낭을 도로 회수했다.

그 곰은 처음에는 순순히 물러가는 듯했지만.. 해가 떨어진 당일 밤 9시쯤 다시 나타나서 텐트의 한쪽 벽면을 앞발로 툭 쳐서 구멍을 내고는 “돌아갔다.”
그리고는 이튿날 새벽 4시 반쯤에 “또” 나타나서 텐트를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가려 들었다. 결국 이 애들은 텐트를 버리고 반대쪽으로 도망가야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시작된 그 곰의 집착과 찝적거림과 뒤끝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큰 야생동물의 근처에 있으면 콧김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거나 느껴지는가 보다. “멧돼지가 쿵쿵 호박이 둥둥” 동화에도 묘사돼 있음..)

이 사람들은 일단 곰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치고 산에서 아침을 맞이하긴 했다. 이때 짐이고 산 정상이고 다 포기하고 깔끔하게 하산했으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때는 다른 대학 산악팀 일행과 마주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개인 여행 가족 여행이 아니라 동아리의 활동 실적 홍보 경쟁 중이어서 등산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여러 대학생들이 오랫동안 알바 뛰며 돈 모아서 굉장히 고생해서 홋카이도까지 원정 갔으니 말이다.

그들은 다른 곳에 가서 텐트를 수리하고 이젠 상황이 완전히 종료됐다고 생각하고 둘째 날 야영을 시작했는데.. 어제 만났던 곰이 거기까지 또 따라와서는 이번엔 1시간씩이나 텐트 곁에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라졌다.

이들은 그제서야 더는 안 되겠다는 걸 느끼고 밤길에 무리해서 하산을 시작했는데.. 어느 땐가 맨 뒤의 멤버가 등골이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보니 이런 제기랄, 그놈의 불곰이 살금살금 쭐래쭐래 따라오고 있었다!

얘들은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쳤지만, 곰에게 직접 쫓기게 된 1명, 그리고 근처의 다른 산악팀이 버리고 떠난 텐트로 홀로 도망친 1명. 총 2명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연락이 끊겼다.
이런 상태가 되니 나머지 3명도 마냥 하산할 수 없어져서 이젠 곰을 피해 근처 험준한 암벽에서 밤을 지새웠다.

셋째 날 아침엔 나머지 2명을 찾다가 포기하고 멘붕 상태에서 진짜 하산을 다시 시작했는데..
해가 떴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불량한 상태에서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또 그 곰과 마주쳐 버렸다. 꺄아악~!

1명은 곰에게 쫓기면서 아웃.. 결국 원래 멤버 5명 중 2명만이 근처의 댐 공사장에 간신히 도착해서 구조 요청을 했다.
각개격파 당하면서 곰에게 쫓긴 2명은 말할 것도 없고, 혼자 텐트에 숨어 있던 1명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텐트 안에서 한숨 잠도 자고 이튿날 아침을 맞이하긴 했지만, 사람 냄새를 감지한 곰이 거기까지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텐트 안에서 나름 시간대별 일기도 남겼는데.. 곰이 거기 반경 수십 m를 떠날 생각을 안 하고 맴돌고 있어서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었으면, 일기의 끝부분은 글씨체도 완전 날림으로 일그러졌다. JAL123 추락 사고 때 승객이 여권 쪽지에다가 남긴 유언 같은 느낌이다.

그 곰은 대학생 생존자들이 하산한 뒤에도 거기서 계속 얼쩡거리고 있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엽사에게 사살됐다. 곰의 사체를 부검해 보니 사망자들을 잡아먹지는 않았고 그냥 사지를 분지르고 공격만 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공포 영화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걸..;; ㅠㅠㅠ

저 대학생들이 새끼곰을 건드린 것도 아니었고, 곰이 배가 심하게 고픈 거나 대놓고 악한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곰의 습성을 모르는 채로 (1) 곰이 관심을 보이던 물건을 도로 회수해 간 것, (2) 곧바로 하산하지 않은 것, (3) 패닉에 빠져 등을 보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것 같은 실수가 이 정도의 참극을 만들었다.

하다못해 프랑스에서 제보당의 괴수가 날뛰던 시절엔(1765년!!) 어떤 어린애들 여섯 명이 숲속에서 그 괴수와 마주쳤는데, 정말 침착하게 대처를 잘 해서 살아 돌아온 적이 있었던 걸 생각해 보자. 겁 먹고 울고불고 도망치다가 몰살 당한 게 아니라, 다같이 손을 한데 맞잡고 간격을 넓혀서 덩치를 부풀린 뒤 한꺼번에 괴수를 똑바로 째려봤던 것이다. 그러자 놈도 한참을 움찔 하다가 꽁무니를 뺐다~! 저 불곰 사건도 바로 이런 재치와 기지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곰이 한번 집적대기 시작한 타겟은 인간이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척 하고 있으면 안전하다”가 아니라는 것은 정말 확실한 사실 같다. 등을 보이고 도망쳐서도 안 되고, 납작 엎드려서도 안 되고 참..ㅠㅠㅠ
이런 곰에 비하면 우리나라처럼 겨우 멧돼지 정도는 그냥 양반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31 08:35 2022/05/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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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일본이건(태평양 전선), 영국/소련-독일이건(서부 전선) 각색해서 영화 만들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 영화를 주목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추천하고자 한다.

(1) 핵소 고지 Hacksaw Ridge (멜 깁슨 감독, 2016) -- 데스몬드 도스(1919-2006)의 일대기
(2) 언브로큰 Unbroken (안젤리나 졸리 감독, 2014) -- 루이스 잠페리니(1917-2014)의 일대기


보다시피 이 두 실존 인물은 거의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적병이나 적함· 적기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통상적 무공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초인적인 행적을 남기고 영웅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도 나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 출신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 나름 기독교 색채를 집어넣었다는 것, 평이 꽤 좋다는 것이 일치한다.

1.
핵소 고지는.. 주인공이 제칠일안식교 신자였다. 무정부 반전 평화주의자는 아니어서 진주만의 복수를 하고 싶고 군 복무는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집총은 거부하는 좀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항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여차여차 해서 의무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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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5년, 오키나와 상륙 전투에서 총 대신 구급상자를 들고 위험한 적진을 종횡무진하면서, 수십여 명의 부상병들을 혼자 구출해 냈다. 그들은 구출되지 못했으면 다들 그대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을 것이다.
의무병은 전장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119 구급대원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보직인지는 2002년 제2 연평해전 때 박 동혁 병장이 다쳤던 걸 생각해 보시라.

이 공로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영웅이 됐다. 동료와 상관들이 다 너를 얕잡아 봐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나중에는.. 레알인지 각색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 소대는 왜 아직 진격하지 않는 거냐? / 아, 도스 이병의 기도가 아직 안 끝났지 말입니다." 이렇게 신앙까지 당당히 인정받는 지경이 됐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군 측 인물이 뭔가 말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더라.

2.
다음으로 언브로큰은.. 주인공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 선수 출신이었다. (흠 육상 선수라니 뭔가 에릭 리들 같은 느낌이..)
그는 그 다음 194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하려 했지만 이제는 올림픽 경기 대신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게다가 올림픽 개최 예정국이 아예 적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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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폭격기 승무원으로 복무했는데.. 하루는 격추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비 불량으로 인해 기체가 태평양 망망대해에 추락했다. 구명보트에서 무려 7주를 근성으로 버티다가 구조됐지만, 운 나쁘게도 아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구조되어서 포로로 전락했다.

그는 일본 해군 수용소에서 2년 넘게 고생했다. 일본한테도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운동 선수여서 더 고생했다. 특히 수용소의 간수 일본군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하이라이트 장면은.. 주인공이 혹독한 노동에 기진맥진했던 상태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들고 땡볕에 서 있는 가혹행위까지 감당해 낸 것이다. (통나무를 떨어뜨리면 총살이라고 위협..) 주인공은 그 상태로 무려 40분 가까이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면서 간수를 노려보며 압도해 버렸다.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라면.. 솟은 못 위를 맨발로 걸은 일화가 이 장면에 대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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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주인공은 해방되고 무사히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심신의 장애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적국인 일본을 용서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1998년엔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도 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를 학대했던 간수 등 일본군 출신 인물들은 짱박혀 숨어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천조국은 "미드웨이" 같은 전투 분야에서도 짱이고, 저런 휴먼 드라마 분야에서도 그냥 짱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2/03 19:33 2022/02/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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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1) 외세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님
내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이 지구상에서 정말 중공만치 한국의 남북 통일을 온몸으로 반대하고 북괴 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악한 나라가 또 있냐..??
6 25 사변이 벌어졌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70여 년 뒤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말이다.

유엔군이 38선 넘어서 북진을 하니까 칼같이 개입해서 저지한 게 저놈들 아니었냐?
그걸 놔두고 도대체 무슨 염치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유체이탈 정신승리 화법으로.. 통일이 웬 얼어죽을 일본 미국의 반대와 방해 때문에 안/못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2) 이제는 남북 통일 한다고 해서 국력이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음
그리고 이 인간들은.. 남한 북한이 합쳐지면 한국이 순식간에 일본 미국을 능가하는 강대국 부자 나라가 될 거라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까? 허 참..

남한과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합쳐지면 일본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남한과 독일 정도가 합쳐져야 이제 일본과 맞장뜰 만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괴가 베트남· 필리핀보다 더 잘사는 나라이기라도 하나?? 어이구..

본인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드는 애들, 싫은 애들.. 그 누구든지 입이 있으면 말해 봐라. 변명이든 반박이든 해 보셔~ 도전장 날린다.
이래서 반일정신병은 정상적인 지능과 양심으로는 절대 걸릴 수 없는 병인 거다.

(3) 이제는 통일이 아니라 그냥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를 바라야 함
사실,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할 거면 쌍팔년도 이전의 할배나 원조가카 시절에 무력· 흡수통일 형태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남북 분단은 이제 사람들 세대가 바뀌어 버릴 정도로 장기화돼 버렸고, 북한 체제가 저절로 무너질 수 있던 기회까지도 다 놓쳐 버려서 이젠 때가 너무 늦었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제는 무리하게 통일을 바랄 게 아니라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부터 먼저 바라야 한다. 사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북한 주민들에게 저걸 주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없다.
북한을 평범하게 왕래할 수 있는 중국· 일본 같은 정상적인 외국으로라도 먼저 만드는 게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4) 북괴의 흉계
남조선이 멸공통일, 반공통일, 승공통일, 평화통일의 순으로 기조가 바뀌는 동안,
북괴는 전면 남침, 무장공비, 납치 폭파 테러이다가 그 다음으로 잠수함, 핵과 미사일로 기조가 바뀌었을 뿐이다!

일본은 패전 후에 GHQ한테서 교육받고 군국주의 쫙 빼내고 나라 체제가 싹 개조되기라도 했다. 그 뒤 일부 소수 또라이들이나 되도 않은 독도 갖고 트집잡고 지랄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북괴는 진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림 반푼어치도 바뀐 게 없는뎁쇼..?? 과거의 망령이랑 현재의 적을 구분할 줄도 모르냐?

우리나라한테 저지른 짓에 대해 일본이 한 것만치라도, 영혼 없는 립서비스 사죄 보상이라도 한 것조차 단 1도 없고..
그렇게 퍼주고 평화 지랄해서 지금 북한 주민이랑 검열 없는 편지 왕래, 전화 통화, 북한 내부로 개방된 인터넷..
도대체 뭐 어느 거 하나 이뤄진 게 있나..??

민주당 간첩과 북괴 체제야말로 진짜 시대착오적인 애들일 뿐..
그나마도 아주 좋게 점잖게 신사적으로 말했을 때 시대착오적인 거고, 감정대로 현실대로 말하면.. 바로 가스실로 보내고 대가리에 총알 구멍 내야 될 애들이다.
굳이 목숨은 부지하고 싶거들랑 삼청이 아니라 오청 백청교육대라도 보내서 두뇌 구조를 개조시켜야 된다.

'공산주의' 와 '공산주의자'는 같지 않으며 '좌파'와 '종북'도 전부 다른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다들 나쁜놈이거나 아니면 나쁜놈의 사상적 근간으로 오· 남용되고 있는 건 다 동일하다.

2. 사악하고 불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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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자유라는 게 왜 중요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흘려 가며 이를 지켜내야 했을까요?"


이렇게 묻는 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이고 인륜에 부합하고 올바른 질문이란다, 이 머저리 바보천치 등신아.
저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곧바로 민족 해방 항쟁이 미제 원쑤들에 의해 좌절됐다는 말 튀어나오겠지.

의병이고 독립군이고 싹 다 토벌되고 없어진 일제 식민지도 전쟁 없는 평화 상태였고,
학교에서 죄없고 약한 애가 양아치한테 고분고분 삥뜯기는 것도 싸움질 없는 평화 상태라구.. 안 그래, 이 사악한 위선자야?

3. 자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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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한두 번만 있었으면 그냥 우연일 수 있겠지만.. 줄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정권에 반대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코렁탕 먹는다거나.. 심지어 장 준하, 최 형욱처럼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하는 사건이 민주화 이전 군사 독재 시절에나 있는 줄 알았지?

반세기 전 버전은 그나마 반공과 경제 개발을 위한 선한 독재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독재이다. 진짜 지들만 해쳐먹고 나머지는 다 거지 되는 진짜 악한 독재란 말이다.

차이점을 모르겠으면..?? 니들만 책임지고 고생하면 내가 이런 글 올리지도 않는다. 정상인들까지 싸잡아서 고생하게 만들지는 말라고..!!
반대편 야당 진영에서 허구헌날 이런 자살 릴레이가 터졌어 봐라.. 무슨 난리를 쳤을까..??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쫙 돋는다.

지난 5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선의 편,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딱 인상을 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애국이 하루아침에 매국으로 뒤집힌 거라면 차라리 내가 죄인이 되고 말겠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한 부하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나는 또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동일하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딱~ 이러니 가슴이 다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사람은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너무 순진할 정도로 고매하고 도도하게 “나는 애초에 죄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결국 역사가 공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어차피 살 만치 다 산 인생인데, 구차하게 항소니 탄원이니 하는 것 자체가 적들이 짜 놓은 유죄 프레임에 말려드는 추한 짓이다” 이랬다.

그러나 그러나..
악의 편에 선 놈들은 정말 오로지 남 탓, 뭐시기 때문, 누구 때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었다. 그저 주둥아리로 말이 많고 변명이 많았다.

아니면 자살이나 싹 해서 책임 회피하고 수사를 흐지부지 시키고 혼자 도망가곤 했다. 아니면 자살 '당하거나' 말이다.
이건 정황상 결백 호소, 억울함 호소나 자기 명예 설욕을 위한 자결이라고도 절~~대로 간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각 사람들이 누군지는 차마 대놓고 얘기하지 않겠다.
올해 봄엔 대통령이 바뀔 예정이긴 한데.. 이번엔 제발 악의 무리가 아니라 정의와 선의 편에 선 사람이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
'멸공'이니 '우리의 주적은 북한' 같은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소리가 논란거리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좀 왔으면 좋겠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멸공을 외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 그럼 군대 갔다 온 대통령이 북괴를 옹호하는 건 말이 되고?
-- 그럼 일제 시대를 직접 겪지도 않은 사람이 반일 거리는 건 말이 되고?


멸공은 당연한 절대선이다.
멸공 갖고 전쟁 선동 지랄하는 건 절대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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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01/17 08:35 2022/0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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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토지 조사 같은 것만 한 게 아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조센징들이 옛날에 무슨 찬란한 문화재 유물들을 만들었는지도 아주 면밀히 조사했다.
그래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라는 총 15권짜리 방대한 도감을 1915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편찬해 냈다.

왜, 1910년대에 돌덩이가 다 무너진 폐가 흉가 수준의 불국사와 석굴암의 모습 사진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거 출처가 이 도감이다. 일본인들이 촬영해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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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제5권, 불국사는 제4권에 수록돼 있다.)

그리고 각종 역사 만화나 교과서를 보면, 북한 지역에 있는 문화재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흑백 사진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역시 일제 시대에 일본이 촬영한 저 도감의 옛날 사진을 인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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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990년대부터야 냉전이 끝나고 남북 민간 교류가 잦아지고 정보 통신 기술도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서는 북한의 현지 정보도 훨씬 더 풍부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현대에 컬러로 찍은 사진도 포함..). 하지만 그 전에는 개성의 선죽교 사진조차도 일제 시대에 찍힌 흑백 사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공권력으로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기록을 남긴 게 아니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게 1962~63년, 원조가카의 집권 초기라면,
우리나라 네임드급 문화재들이 대대적으로 조사되고 사진이 처음으로 찍힌 건 1910년대 일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저건 “식민지에 원래 이런 문화재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것들도 다 우리 일본 것이 됐다. 그러니 우리가 철저히 관리해야지” 그런 정치 행정적인 차원에서 조사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걔들도 최소한 이상한 감정--심지어 조선에 대한 열등감까지!!!--을 갖고 “다 때려부숴 버려야지, 없애서 조센징들 민족 정기를 말살해 버려야지” 이러지는 않았다.

일제 시대의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뭐시기 하는 그 아저씨는.. 정치 쪽은 가혹한 헌병 무단 통치 때문에 우리 쪽에서 썩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의외로 불상 덕후에 문화재 덕후 기질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그게 일본 본토로 무단 반출되지 않게 하는 일에 나름 애쓰기도 했다.

일례로, 그 당시의 석굴암 복원 작업은 졸속 날림으로 진행된 게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악의적인 고의 훼손은 절대 아니었다. 폭탄 맞은 듯한 폐허 상태에 비하면 그 기술과 자금 하에서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든 거지, 악화시킨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석굴암이 저런 막장 상태가 되도록 수백 년째 방치한 건 숭유억불의 조선 왕조였으니 말이다.

석굴암이 옛 신라인들의 넘사벽 lost technology를 동원해서 만들어졌는데 왜놈들이 어설프게 콘크리트를 쳐발라서 망가뜨리는 바람에 습도 조절이 안 되고 내부 상태가 꼬였네 뭐네 하는 소리는 2020년대에는 좀 안 나와야 할 것이다. 걔들은 문화재를 진짜로 다 때려부순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나 요즘 탈레반 집단보다는 정신 세계나 행정 시스템이 더 나은 애들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 6· 25 사변 중에 소실된 것, 그리고 결정타로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전부나 일부가 소실된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원본이 제대로 보존된 게 별로 없는 지경이다.
그런데 순종을 비롯해 일부 왕의 어진은 2010년대에 그림을 다시 그려서 복원이 완료되기도 했다. 이때는 소실된 부분을 무엇을 토대로 유추해 냈을까?

바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어진을 흑백으로나마 사진을 찍어 놓은 자료가 있어서 이를 참조해서 복원했다.
일부 소실인 경우, 색깔이야 불타지 않고 남은 부분으로부터 유추가 가능하니까 흑백 사진만 있으면 전체 복원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순종의 경우, 김 은호 화백이 어진을 그리는 모습까지 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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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자료인지, 아니면 다른 별개의 촬영 기록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다.

※ 여담: 문화재 관련 박물관

문화재 관리 얘기가 나왔으니, 이것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얘기도 같이 안 할 수가 없겠다.
박물관이야 워낙 분야가 다양하긴 하지만 무슨 국립 박물관이라 하면 일단은 상술했던 옛날 전근대 시절의 국보/보물 문화재를 전시해 놓은 곳을 말한다. 역사 박물관이라든가 아예 미술관하고는 영역이 약간 겹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제 시대에도 한반도엔 총독부 박물관이니, 이왕가 박물관이니 하는 전시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립 중앙 박물관’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주, 제주, 전주 등 10여 곳에 국립 박물관 에디션이 있긴 하지만.. ‘중앙’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박물관은 서울 에디션이다.

엄청 옛날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고궁 안에 있었다. 198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입주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그게 헐리면서 지금과 같은 용산 부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됐다. 전에는 거기가 미군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 여담: 과학관

다른 관련 주제를 하나만 더 열거하자면..
이런 옛날 문화재 박물관 말고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면서 여러 지역에 ‘파생 에디션’까지 존재하는 또 다른 관람 시설은.. 바로 ‘과학 박물관’, 일명 과학관이다.

얘 역시 나름 일제 시대부터 전신이 존재했었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자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기존 건물이 ‘은사 기념 과학관’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해방 후에도 이름만 ‘국립 과학 박물관’으로 바뀌어서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와룡동, 혜화 역 근처 지금의 위치에 ‘국립 서울 과학관’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부지가 너무 좁기도 하고 나중에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기도 했으니 대전에 엄청 큰 과학관이 새로 건립되면서 얘가 ‘중앙’ 타이틀을 대체하게 됐다. 즉, 국립 중앙 박물관과 달리, 국립 중앙 과학관은 대전에 있다.

지금은 수도권의 과천을 포함해 대구, 부산 같은 몇몇 대도시에 국립 과학관이 몇 곳 더 있다. 기존의 서울 과학관은 ‘어린이’ 과학관으로 리모델링 됐으며, 이와 별개로 강북에 서울 시립 과학관이 추가로 더 개관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9 19:35 2021/12/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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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나치 경례 거부

  • "주변에서 모두가 '예, 예' 할 때 혼자만 양심껏 소신껏 '아니요'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
  •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 (사관 생도 신조 중)

이런 것의 예시로 요런 짤방이 종종 인용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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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군중들이 오른팔을 뻗치면서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있을 때 혼자 생까고 가만히 있었던 이 사람은 정체가 무엇일까?
그는 아우구스트 란트메서(1910-1944)라는 독일인이며, 사진은 의외로 전시가 아니고 히틀러의 집권 초기이던 1936년, 나치 독일의 모 군함의 진수식 때 촬영된 거라고 한다.

구체적인 사연은 검색해 보면 다 나오니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 사람은 유대인 여자와 결혼해서 딸까지 생겼는데 하필 거의 같은 타이밍 때 나치가 집권하면서 유대인에게 축객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그는 저 군함을 제조한 조선소의 직원이었다. 그러니 진수식 행사엔 사실상 강제 동원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나치 당에도 가입하긴 했지만, 유대인이니 정치니 이념 그딴 건 별 관심 없고 그냥 취업 때문에 가입한 것에 가까웠다.

그랬는데 나치 당에서 유대인들을 못 살게 굴기 시작했으며, 자기에게도 멀쩡한 아내를 버리라고 이혼을 종용한 것이다. 그러니 당이 좋게 보일 리가 없고 경례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전부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훗날 등장한 백장미단 조피 숄 같은 급으로 전시에 거창한 신념이나 소신을 갖고 나치 경례를 거부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저런 포즈로 대외 공개용 사진이 찍혀 버리자 나치 당에는 저 괘씸한 놈이 누군지 곧장 추적을 시작했고, 당사자 역시 신변의 위협을 진지하게 느끼게 됐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스웨덴으로 도피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발각됐다. 인종오염법으로 기소되어서 수용소 행..;;

아내는 전쟁 중에 여러 수용소에 끌려 다니다가 1942년쯤에 결국 살해당했다(아마 가스실에서). 저 사람은 살아서 풀려나긴 했지만 이미 비국민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있었다. 어느 죄수 부대에 징집되었다가 1944년쯤에 전쟁터에서 실종 내지 전사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래도 어린 딸 둘은 고아원 내지 친인척 집을 거치면서 다행히 살아남아서 자기 부모의 사연을 후세에 전해 줄 수 있었다. 저 사진도 오랫동안 숨겨져 있다가 1991년에 딸에 의해 공개된 거라고 한다.

2.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 거부 (입법)

미국은 1941년 말에 일본으로부터 선전포고도 없이 진주만 공습을 당한 것으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그래서 새끼 빼앗긴 암곰을 능가하는 복수귀로 각성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엄청난 빡침이 담긴 대국민 담화인지 연설을 한 뒤, 의회로부터 대일 선전포고와 참전 승인을 받았는데.. 상원에서는 전쟁 개시 관련 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러나 하원에서는 388:1로 반대가 딱 하나 있었다.

전미가 왜놈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눈이 시뻘개졌던 험악한 시국에서 홀로 반대표를 던진 용자는 바로.. 미국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자 여호와의 증인 급의 반전주의 소신이던 '지넷 랭킨(1880-1973)'이라는 사람이었다.
이 아줌마는 1차 대전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6 25 사변, 월남전까지 일체의 전쟁에 대해 자국이 참전하는 것을 일관되게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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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위기에서 이런 아웃사이더가 당장 테러· 협박을 당하지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 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미국이 다양성이 존중받으며 사회적으로 얼마나 성숙한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일제나 나치 독일에서 누군가가 저런 반전 운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간 그 사람은 어찌 됐겠는가? (군중 속에서 팔 뻗어서 같이 경례 안 한 것만으로도 아까처럼 가정이 풍비박산 나는 뒤끝이 뒤따랐거늘..)

하지만 천조국이라도 선 넘을 정도로 이상한 소신을 포용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이를 계기로 소속됐던 공화당에서 퇴출되고, 정치판에서의 커리어가 통째로 끝장 났다고 한다.
결국 2차 대전 이후의 반전 운동은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가로서 개인 단위로 진행됐다. 분야는 다르지만 개고기 반대하면서 이상한 똥고집 부리던 프랑스의 그 아줌마 생각이 문득 난다.;;

3. 곁가지: 미군의 일본군 시체 훼손

이건 참 경이롭고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사진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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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1944년 5월, 미국의 어떤 아가씨가 남자친구로부터 웬 해골바가지를 선물로 받고는.. 잘 받았다며 감사 답장을 보내는 모습이 보도된 것이다.
남친은 해군에 입대해서 태평양 전쟁터에서 한창 고생 중이었는데.. 전사한 어느 적군 병사의 유해에서 두개골을 추출해서 여친에게 선물로 보낸 것이다.
전시이니 저 여친도 군수공장에서 근무 중이었으며.. 저 때 나이는 겨우 20살이었다.

그 당시에 일본에 대한 미국의 증오심은 일선의 병사들이 일본군 시체에서 해골바가지를 뜯어내서 장신구로 쓰고 연인에게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극심했다.
최악의 증오스러운 적을 상대로 싸우는 데다, 억만 리 떨어진 망망대해의 섬에 상륙해서 밀림 속에서 전투를 벌이던 태평양 전쟁터는 환경도 최악의 생지옥이었기 때문이다.

이 일본놈들도 상대방에 대해 "저놈들은 귀축영미, 항복했다간 무조건 죽음" 이딴 소리에 골수까지 세뇌된 괴물들이었다. (얼마나 세뇌됐으면, 훗날 전쟁이 끝났으니 귀환하라는 말조차도 안 믿고 섬에 틀어박혀서 거지꼴로 몇 년을 버틴 사람들조차 있었을 정도..)
같은 백인 코쟁이에 기독교 배경이 있고, 말과 문화가 일말의 통하는 구석이라도 있는 서부 전선의 나치 독일 같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 전쟁터에서는 최악의 조건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그야말로 인외마경이 펼쳐졌다. 그 살벌함은 포카혼타스 Savages를 아득히 능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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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해 보시라. 천조국 군인들이 차라리 평시에 군기가 빠져서 민간인을 상대로 외국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는 있지만..
전시에 적군의 시체를 훼손해서 저렇게 갖고 놀고 그게 저 정도로 대대적으로 매스컴까지 탔던 건 남북 전쟁, 미영 전쟁, 1차 대전, 월남전, 이라크전 등등등을 통틀어서 저 태평양 전쟁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물론 군 수뇌부에서 이런 짓을 금지하고 단속하긴 했지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군인 개개인의 감정을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천하의 미군이니까 이 정도로 정신줄을 놓은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해골바가지만 득템해서 장식품으로 써먹는 정도의 짓밖에 안 한 것이다.
일본군은 뭐.. 연합군 포로들을 훨씬 더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대해서 다 죽이고,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이고, 어떤 곳에서는 심지어 대놓고 식인까지 했다.

이런 악랄한 경험으로 인해, 미국은 쟤들은 안 되겠다고 원자 폭탄까지 터뜨릴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훗날 전범 재판에서도 일제 전범들을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총살도 아닌 그냥 교수형을 집행할 것을 건의하게 됐다. 교수형은 군인으로서의 예우를 박탈한다는 걸 뜻한다.
반대로 나치 독일 전범에 대해서는 독소 전쟁의 트라우마가 있는 소련이 더 강하게 교수형 사형 집행을 요구했다.

4. 일본 전범의 사형 거부 (사법)

태평양 전쟁이 일본의 패배와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뒤엔, 다들 잘 알다시피 일본의 군인 지휘관과 정치인 중에 전쟁 범죄자를 가려내어 단죄하는 재판이(극동 국제 군사 재판) 열렸다.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전투 중에 적군을 죽이는 게 아니라 민간인이나 포로를 고문하고 학살한 짓거리들 말이다.

그런데 이때 재판을 진행했던 연합국--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소련-- 판사들 중에 '라다비노드 팔'이라는 인도인은 유일하게 아싸 행세를 했다.
다른 판사들은 전범들을 처형하는 것에 다 동의했고 총살이냐 교수대냐를 갖고 논쟁하는 정도였던 반면, 저 인도인 판사는 혼자 강경하게 처형을 반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을 실드 쳤다.

그는 단순히 인본주의 박애주의자로서 사형 제도를 반대한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족 감정상으로 엄청난 친일 성향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에다가 법을 뒤늦게 끼워 맞춰서 적용하는 건 부당하다, 왜 일본에 대해서만 일관성 없이 가혹한 잣대를 적용하느냐, 연합국은 가혹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줄 아느냐, 너는 왜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인제 와서 일본 탓을 하느냐" 등..
법리까지 거의 무시하면서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일본을 적극 옹호했다.

그러니 일본에서는 저 사람이.. 우리 한국으로 치면 후세 다쓰지--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 변호사-- 같은 취급을 받으면서 극진한 예우와 존경의 대상이 됐다.;;; 야스쿠니 신사에 추모비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도 진작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일본이 자국 인도를 식민지로 부려먹은 영국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저 사람도 '적의 적은 친구' 논리로 일본을 옹호했던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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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인도는 나치 독일이나 히틀러에 대한 국민 정서도 오늘날까지 굉장히 우호적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애 이름까지 ‘아돌프 히틀러’라고 지어서 Adolf Lu Hitler Marak라는 이름의 1958년생 정치인도 있을 정도이다~!
하긴 인도인들은 영국인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지 나치 독일에 의해 수용소 가스실로 끌려갔던 적은 없으니까.. 일면 수긍이 간다.

Posted by 사무엘

2021/11/01 08:35 2021/1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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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구한말에 개신교가 전파되던 초창기에는 감리교가 우세했다. 서 재필, 이 승만, 김 구, 유 관순, 최 용신, 남궁 억, 이 준 이런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은 다 감리교인이었다.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국내에서 장로교가 감리교를 누르고 지금처럼 세력이 커지게 됐을까?? 아, 장로교 안에도 고신, 예장, 기장 온갖 브랜드들이 있어서 성향의 차이가 크다는 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쨌든 하나로 뭉뚱그려 봤을 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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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귀한 데이터는 어떤 근거로 산출되었고 믿을 만한지 모르겠다. (☞ 출처)
허나, 이 표에 따르면 장로교는 생각보다 이른 일제 시대 초기부터 감리교를 누르고 우위를 차지했던 것 같다. 1900년대 후반은 정말로 '평양 대부흥'의 버프를 받기라도 한 걸까..?

이 때문인지 일제 말기 때 한국 교회들이 신사 참배에 굴복했을 때, 개인 단위로라도 항거했던 목사들은 다 장로교 출신이었다. 선교 초기에 장로교와 감리교는 한국 땅에서 서로 나와바리(?)를 어떻게 분할했을까?
안 창호도 비슷한 성향과 연배의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리, 장로교 출신이다. 내 직관과 달리, 의외로 감리교가 아니더라.

그 대신 감리교는 초창기에 항일 민족주의 성향을 많이 드러냈고, 이 때문에 일찍부터 탄압을 많이 받아서 교세가 주춤해진 거라는 해석도 있다.
전라도가 3· 1 운동 참가자 비율이 낮았던 이유는 그 동네가 사상이 불온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구한말 때 의병이 제일 많이 활동했었는데 일찌감치 토벌 당하고 와해되고 탄압을 제일 심하게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감리교에 대해서 아는 건 남자한테도 권사라고 부르는 곳이 있는 거 같더라, 목사가 로만 칼라 복장이더라, 알미니안주의를 좋아한다더라, 영성 훈련 이런 거 좋아하더라.. 이렇게 소문으로만 들은 게 전부이다. 직접 경험한 건 전혀 없다.
동성애 지지, 여자 목사, WCC, 정치 운동 이런 거는 특정 교파만의 문제는 아니고 어디에서나 발생하는 일탈이니, 교파 전체의 문제로 싸잡아 침소봉대하지는 않겠다.

본인의 학창 시절에 학교 근처에 있는 교회들은 다 장로교였지, 감리교는 도통 눈에 띄지 않았다. 좀 엄한 비유이다만, 접근성과 존재감을 햄버거 가게에다 비유하자면 장로교는 롯데리아-_-이고, 감리교는 버거킹 내지 맥도날드 같다.;; ㄲㄲㄲㄲ

2. 일본

일본은 조선(한반도)보다 더 옛날, 중세 때 포루투갈과 교류하면서 가톨릭이 먼저 들어왔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왜군 적장 중에도 이미 독실한 신자가 있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여 에도 막부가 시작됐을 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독한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고 그게 공식적으로는 먼 훗날 메이지 유신 때가 돼서야 풀렸다.

쟤들은 왜 가톨릭을 박해했는지, 거기도 황 사영 백서 같은 사건이 있었는지, 일본과 나중에 교류를 시작한 네덜란드나 영국 같은 나라들은 개신교 선교를 하지 않았는지? 일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어떻게 되는지 뭐 그런 것들이 갑자기 궁금해진다.

내가 자료와 정보를 입수한 게 맞다면.. 일본에서 가톨릭은 제사 거부 같은 종교 교리 때문에 찍힌 것보다는 정치적으로 줄을 잘못 서고 밉보인 게 더 컸다. 하필 가톨릭 신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진영에 많이 있었고 그 중 일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들기도 했다. 그래서 가톨릭 전체가 역적의 종교로 싸잡아 낙인 찍혀 버렸던 것 같다.

나중엔 이웃 조선에서도 내가 추정하기로 종교 7 정치 3 정도 비율의 반감으로 인해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긴 했다. 하지만 조선은 법대로 곱게 목을 치기만 했지, 중세 일본처럼 사람을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찌른다거나, 갯벌에다 꽁꽁 묶어서 민물 바닷물에 서서히 익사시킨다거나, 펄펄 끓는 유황 온천에다가 사람을 쳐박아 넣는 식으로 가학적인 방식을 일부러 고안해서 고문·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에도 막부 때 일본은 왜구가 없어지고 중앙 집권 통치가 정착되고 유럽 나라들과 활발히 교류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나라로 탈바꿈했다. (왜구는 이웃나라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장에서도 통제가 안 되는 골칫거리였음)
하지만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 국가이던 영국이나 네덜란드와는 처음부터 종교 포교를 금지하고 물자와 기술 교류만 했다. 일본이 오늘날까지도 기독교 계열 종교가 맥을 못추고 소수에 머물러 있게 된 것에는 이런 역사 배경도 기여했다.

그때 일본에서는 '후미에'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신자를 색출했던 걸로 유명하다.
나는 지금 살아 계신 부모님 사진을 밟고 지나가라고 하면 도의적으로 못 하지만, 실제 모습을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라는 건 차라리 별다른 죄책감 없이 밟고 지나갈 것 같다..;;

물론 성화· 성물로 신자 색출이 안 된다면 쟤들도 어차피 "김 일성 개XX 해 봐" 같은 더 고차원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앙 고백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서 색출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성물· 성화를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개신교 사고방식에 근거한 후미에 회피는 별 영양가 없는 가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개신교 쪽이라고 해도 좀 보수적인 사람은 외형적인 경건(?)과 절도 있음을 강조하곤 한다. 꼭 예수· 마리아 얼굴 그림이 아니더라도 성경책을 다른 책보다 신줏단지 모시듯이 신성하게 취급한다거나 할 수는 있다. 이런 것까지 그 당시 주변 맥락을 무시하고서 우상 숭배라고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에서 산파들은 자기 양심과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애들을 살려 주고는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까지 "산파들이 이유야 어쨌든 거짓말을 했으니 쟤들은 나쁜놈" 이러는 무책임하고 융통성 없는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같은 사고방식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사고방식, 공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넓은 안목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저 때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은 성화를 감히 밟고 지나가지 않는 게 최선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내가 알기로 가톨릭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의 일환으로 성찬식 때의 빵과 잔도 굉장히 신성하게 취급한다. 정작 개신교에서는 주의 만찬 때 썼다는 포도 주스나 빵이 남았으면 그냥 별 생각 없이 애들 줘 버리거나 임의 처분을 해도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옛날에는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교리 차이였다는 게 참 므흣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한국과 일본은 가톨릭이 먼저 들어오고 박해를 한바탕 겪었다가.. 19세기 중후반,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물을 먹어서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군대와 선교사를 보낼 때쯤에 개신교가 들어왔다. 이때는 조선은 다 망해 가고 있었고, 일본은 반대로 서양물 먹으면서 근대화 중이었기 때문에 정부에 의한 종교 박해는 없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유럽의 기독교계에서도 교리에 목숨 걸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갖고 열나게 싸웠었는데.. 19세기 말에 가서는 초교파 선교 복음주의 쪽으로 트렌드가 바뀐 듯하다. 나중에는 그게 은사주의로까지 바뀌었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9/22 19:37 2021/09/2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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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다 살아나온 사람

"한글이 목숨"....;;; 이라는 압도적인 문구를 남긴 외솔 최 현배 선생(박사).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이숙 여사.

이분들은 대놓고 정치· 군사· 외교 쪽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한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자기 관심분야를 통해서 한국은 일본과 같지 않고 우리 민족은 일본이 강요하는 천황 숭배와 전쟁 프로파간다에 따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저것 말고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시는가?

일제 말기에 투옥됐고, 1945년 8월 18일에 형무소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17일에 극적으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 이건 검증 가능한 사실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 현배는 조선어 학회 사건 때문에 1942년에 체포· 투옥돼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안 이숙의 기록은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불온삐라(?)를 뿌린 뒤 체포됐는데 굳이 조선의 서대문도 아닌 평양 형무소에 옮겨져서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죄로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이북 지역이긴 하네..
(뭐, 주 기철 목사도 정식 재판과 형 선고 없이 그냥 경찰서 명의로 멋대로 구금 당한 채로 옥사함)

이 자리에서 모든 정황 근거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자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식민지의 형무소 죄수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본토 안에 있는 조선인들도 어떻게든 제압하고 해코지하고 같이 동귀어진할 시나리오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지자 프랑스 파리를 포함해 자기 휘하의 도시들을 몽땅 불살라서 없애려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심리, 같은 이치이다. 북괴도 무력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저런 식의 자폭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원자폭탄 두 방으로 인해 일본이 8월 15일에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본토로 돌아간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호재이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됐으면 굳이 8월 18일이 아니었더라도 저 사람들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광복군이 참전을 못 해서 나라가 분단됐네..? 애걔 그 병력으로 싸우긴 뭘 싸우냐,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정말로 쟤들이 8월 18일에 최소한 함흥과 평양.. 전국의 모든/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도 않은 죄수들을 제멋대로 한꺼번에 몽땅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비밀 행정 명령 문서 같은 거 나오는 게 없으려나..?? 8월 18일이 또 다른 D-day이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2.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강제 통합

안 이숙 여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절 얘기를 하나 첨언하자면..
1945년 7월, 우리나라의 모든 기성 기독교 교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단일 교파로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건 갑자기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라 거의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한 교파씩 야금야금 회유시키거나 없애면서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이제 무슨 평양 봉수교회마냥 어용 단일 교파만이 공인 정통이고, 나머지는 몽땅 비인가 이단이 된 것이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도 1년 넘게 지난 때이고, 내가 보기엔 이건 신사참배 이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한 더 심각한 문제 같은걸..? 그러나 다행히도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완전히 패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기존 교단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리고 긴 토론 끝에 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교파별로 다시 찢어지고 각자 제 갈 길 가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마치 정교분리만큼이나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3. 과거 커밍아웃

박 영희 여사는 함흥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1942년경, 전혀 의도치 않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역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할 것.)
저분은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생 좀 했지만 곧 풀려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도 했는데.. 그 뒤로 저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생의 비밀 흑역사로 치부한 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랬는데 40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일본에서 자기네 역사 교과서를 개정해서 침략을 진출이라고 수정하고 일본어 강요를 자발적인 일본어 선택 같은 식으로 말을 이상하게 바꿨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하게 됐다. 이때 이분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여학생 박영희였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직 나 같은 역사의 증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너무 뻔뻔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라고 언론에다 인터뷰를 했다. 그게 1982년 8월 2일자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것도 지금도 검색해 보면 나온다.

이분은 1982년 당시에 환갑을 앞둔 58세였다고 소개됐다. 그러니 한국식 나이라면 1925년생이겠다.
이분은 그 뒤로 딱히 다른 근황이나 소식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이 지금도(2021년)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또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으니..

그리고 저 박영희 여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
김 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타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납치와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살아서 나온 피해자라고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자면 일종의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박 영희 여사와 거의 같은 연배이고,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시기도 41~42년 사이.. 조선어 학회 사건과 아주 비슷한 시기이다. 그랬는데 전자는 그나마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저런 사건을 겪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더 험한 일을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한 시기가 9년 정도 차이가 있다.

최 현배 박사 vs 안이숙 여사 다음으로는 박 영희 여사 vs 김 학순 할머니 비교가 나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길어야 90년대까지 아직 암울하던 시절에 반일 하던 것은 그럭저럭 진정성을 인정하지만, 2010년, 2020년대에까지 뗑깡 부리듯이 되도 않은 반일 거리는 것은 진정성 신빙성을 굉장히 의심하고 반쯤 정신병으로 치부한다.
여사와 할머니라는 호칭은.. 중요한 커밍아웃을 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달리 붙였다.

4. 조선어 학회와 한글 학회의 사무실

정 세권(1888-1965)이라고 일제 시대인 192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서 건축 사업을 진행한 기업가가 있다. (☞ 관련 링크)

일제 시대에는 남산과 남대문에서 가까운 용산-중구 일대엔 일본인이 주로 살았고(지금의 서울/경성 역도 처음엔 이름이 남대문 역)..
좀 더 북쪽으로 서대문 근처 중-종로구 일대엔 조선인이 주로 살았다. 경부선 철도가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서대문 역이 경성 역 역할을 했는데 3· 1 운동 이후에 그 구간이 없어졌다.

이에, 정 세권은 일본인의 주거 구역이 서울의 북쪽으로 더 올라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로구 북쪽에 한옥 주택을 많이 지을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도 이때 그의 계획에 따라 조성된 주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특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에다 건물을 기부해서 사무실을 무료로 마련해 줬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주된 배경으로 나오는 그 작업실 말이다.

딱 종로에다가 사무실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던 간사장 이 극로 선생이 눈병에 걸렸을 때 근처의 공안과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공 병우 박사가 안과 의사에서 한글 덕후 세벌식 타자기 발명가가 되도록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렇게 연결된다.
정 세권은 건축과 자금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킨 큰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에 당연히 각종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 학회는 해방 후에 한글 학회로 간판을 바꿔 단 뒤에도 장소와 관련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입주해 있는 광화문 근처의 빨간 벽돌 한글 회관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거 건립을 위해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 선생이 사재를 무려 3천만 원이나 기부했고.. (당시 현대 포니 승용차 한 대가 230만 원 남짓)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몽땅 한글 학회에다 기증했다.

그리고 박 정희 대통령이 1억 원을 기부하고 그걸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가 직접 전해 줬다고 전해진다.
한글 회관은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지어졌다. 4년쯤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복습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8 08:35 2021/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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