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쪽 얘기 참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네..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며칠 동안 버퍼에 차곡차곡 쌓여서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말이다.. 뭐, 옛날 레퍼토리들도 많이 재탕했다. =_=;;

1.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권리?'랑, 금남로 한복판에서 전 대갈 만세 외칠 '자유?권리?'는 똑같이 보장하거나 똑같이 금지했으면 좋겠다. 회고록의 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파적 적용은 결사반대.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5· 18은 상대방을 오인한 민-군-관 쌍방과실에 가까운 비극이다. 그러니 5 18을 기념하려면 시민과 군경 희생자를 같이 기리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 5· 18 모독죄를 만들고 싶거들랑 천안함 모독죄와 리 승만 할배 허위비방 모독죄까지 같이 넣었으면 좋겠다.

6· 25에 대해서 쌍방과실, 남침 유도, 심지어 북침설까지 주장하며 국가유공자들을 모독하는 건 괜찮은데.. 5· 18은 어떤 이견도 용납 못한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최근에 지 만원 박사가 징역 2년형이 확정된 것도.. 그 사람 말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 천부당만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광주에 북괴군이 아니라 외계인이 침투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어도 실형을 때렸을 건가? 저게 감방 갈 죄이면 광우뻥, 세월호, 천안함 패잔병, 이 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 등등도 전부 처벌했어야 한다.

2. 병적인 집착

  • 별 희한한 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갖고 편집증적이고 변태적인 욱일기 논란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페미년들이 별걸 갖고 성차별이니 여혐이니 시비 거는 것과 비슷하다.
  • 소녀상에다가 옷 입히는 짓도 제발 좀..
  • 멀쩡한 6 25 노래, 멸공의 횃불 노래를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악한 반일 장사꾼들은 하루속히 정체가 탄로나고 X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군의 날 포스터나 행사에 웬 중공군 무기가 등장하고, 국내 철도 개통 포스터나 현수막에 웬 신칸센 그림이 등장하는 꼴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괜히 멀쩡한 일제 시대 대신에 ‘일제 강점기’, 을사조약 대신에 ‘을사늑약’, 한일합방 대신 ‘한일병탄’처럼 피해의식을 더 부추기는 말을 일부러 쓸데없이 만들고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조약 대신에 늑약이라고 바꿔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게 있나? 민족 정신이 고취되고 구한말 선조들의 행적에 실드가 쳐지고 자부심이 생기고 하다못해 국뽕이 생기는 거라도 있나? 일본이 더 나쁜놈이 되고  속이 더 후련해지나?

6 25 사변은 자꾸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라고 바꾸려 하고, 북괴라는 칭호를 안 쓰고.. 그쪽으로는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한없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일본 쪽은 왜 저러는데? 그 삐딱한 잣대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

3. 자유는 좋지만 자유주의는 좀..

나는 닥치고 시장 만능 방임주의는 경계하며, 지나친 자유뽕 성향도 극혐까지는 아니지만 싫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 싫으면 그냥 니가 때려치우고 나가던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 봐 가면서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자기가 제발로 종교 계열 고등학교-대학교에 지원하고 거기 방침에 동의를 하고 입학해 놓고는 거기서 채플 반대, 종교 강요 반대 짓거리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자기가 나가든지 해야지?
그러나 기업들이 다같이 비열한 담합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냥 파업만 욕하면서 귀족 노조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진짜 조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소수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한테 저딴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4. 윤석 열차

그림 한번 잘 그렸네. 고등학생이 벌써 머리에 뭐가 들어가서 저렇게 정치에 세뇌됐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고 치자.
저 열차는 물 먹고 석탄 먹고 칙칙폭폭 더 폭주해서 이전 정권의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 죄악을 다 까발리고 나쁜놈들 죄를 묻고 잡아 쳐넣었으면 좋겠다. 놈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 다음으로 지금 법무부 장관이 바톤 터치를 해서 정권을 물려받으면 우리나라는 21세기 최고의 황금기 중흥기가 찾아올 것 같은데.. 과연 국운이 거기까지 따라 줄지 잘 모르겠다.

5. 북한을 제대로 도우려면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돕고 싶으면 당장 굶지는 않게 밥을 주거나, 중독 치료를 받게 병원에 보내 주든가.. 어쨌든 당장 필요한 현물 서비스를 줘야 한다. 정상적인 경제 관념이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생돈을 덥석 쥐어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개인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의 원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돕고 싶다면.. 그 도움이 주민들에게 직접 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핵이니 미사일 같은 쓸데없는 도발 따위는 꿈에서라도 엄두를 못 내게 해 놓고 도와줘야 된다.
쌀이나 의약품을 줄 건 주더라도 핵 시설 같은 거 짓는 기미가 보이면 드론 날려서라도 폭격으로 조져 버리면서 도와야지..

저 동네는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수괴들 자기만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교통· 통신 인프라조차 없어서 주민들을 돕고 싶어도 물자가 그리로 가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 원문)


그러니 옛날에 원조가카가 괜히 고속도로부터 먼저 닦은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야 제철소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거 바탕으로 자동차나 조선소 만들고.. 할배 때 준비해 놓은 원자력 전문가를 이용해서 한참 뒤에야 원전까지 만들고..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프라가 없으면 만년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새마을 운동도 1960년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늦은 70년대 이후에 시작된 걸 알고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유신 독재 하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6.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

내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북한 컨텐츠도 그냥 있는 그대로 노출해도 되지 않나 싶다. 울나라가 물리적인 경제력 군사력이 북괴한테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로동신문이나 고려항공 웹사이트를 warning.or.kr로 틀어막지 말고 개방하라는 거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여전히 틀어막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까 김 일성 회고록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거 자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 개방되고 풀려나올 필요가 있다.
세월이 흐르니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히틀러 "나의 투쟁"이 해금돼서 서서히 풀려나오니 말이다. 물론 책 내용을 오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많이 달고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는 대신, 북한에다가는 성경이나 전 두환 회고록, 리 승만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을 보급하는 거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이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남한에다가만 북한 방송? 그것도 북한에다가 중계료 왕창 주고 사 와서? 그런 짓거리라면 이건 완전 종북 이적행위이니 나로서는 목숨 걸고 결사반대다.

신앙에서도 주변으로 복음 전파, 전도를 못 하게 하고 너 혼자만 조용히 믿으라는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출애굽기, 다니엘서)
이와 비슷하게.. 남북이 서로 똑같이 선전방송을 안 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남한(+북한 주민)에게 손해인 거래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소위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던 것에 분노하고 그게 정치쑈 사기극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퍼주기만 하고서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 실제로 개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을 진짜로 제대로 도와주고 북한 체제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한 게 없다.

그냥 정치쑈만 벌이다가 연평해전이나 박 왕자 피살 사건으로 뒤통수만 맞았으며, 그 뒤에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0년대 이후로는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만 하는 중..

제발 저것들이랑 통일 수작 벌이지 말고, 그냥 지원 끊고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는 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 안 해도 된다.
이 와중에 "우리 북한은 안 물어요" / "남측이 북한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 "이건 좀 더 도와 달라는 신호" 이러는 정신병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든가, 추방 아니면 공개 처형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쟤들은 "나는 너희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너희는 우리나라에서 포교 금지"를 고수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상호주의를 제일 안 지키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의 무슬림들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필요 이상의 편의는 절대 봐 주지 말고, 세력이 절대로 커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5 08:35 2023/01/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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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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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시아 국가들

서유럽에서 영-프-독이 참 독특한 강대국인 것처럼 동북아시아의 한중일도 참 만만찮게 서로 극과 극이다. 먼저 올림픽 개최 내역을 비교하면..

  • 일본은 수도 도쿄에서 하계 올림픽을 두 번 치렀다(1964, 2020). 동계는 삿포로(1972)와 나가노(1998)에서 총 두 번 치렀다.
  • 중국은 수도 베이징에서 하계와 동계 올림픽을 모두 한 번씩(2008, 2022) 치렀다.
  • 한국은 수도 서울에서 하계(1988), 평창에서 동계(2018) 이렇게 한 번씩 치렀다.

정치-외교 구도

  • 대한민국만이 직접 선거를 통해 유의미한 정권(= 집권 여당) 교체까지 이뤄지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북한, 중국, 러시아야 뭐.. 일본은 저런 동네 정도의 비민주 독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므흣하고 특이한 면이 있다(자민당)..
  • 한때 러시아는 소련이라고, 중국은 중공이라고, 몽골은 몽고라고 표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와 정식 수교하면서 표기가 바뀌었다. 이때 북한과 나란히 UN 가입도 했고.. ‘북괴’라는 표기가 공식 용어에서 사라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하고 중국-대만이 뭔가 비슷한 사이인 것 같다.

2. 기념일

  • 일본은 참 신기하게도 1년 중에 낮과 밤 길이가 같아지는 두 날인 춘분이랑 추분을 일부러 공휴일로 만들어 놨다. 오~ 참신한데? 뭔가 이꽈 감성이 느껴진다.
  • 그리고 히로히토 천황의 탄신일인 4월 29일도 '쇼와의 날'이라고 해서 논다. 나름 20세기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그리운 리즈 시절이라고 이때의 천황의 생일을 공휴일로 정해 놓고 노는 듯하다.
  • 그 반면, 우리나라는 한글날, 즉 자국 문자를 창제한 날을 공휴일로 기린다. 무척 독특하다.
  • 그리고 성탄절이 공휴일. 동북아시아에서 성탄절이 빨간날인 나라도 대한민국 남한밖에 없다.

  •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우리나라와 같지만, 일본에서는 더 정확하게는 '남자 어린이날'이다. 여자 어린이날은 3월 3일인데, 그래도 공휴일은 남자 버전뿐이다. 신기한 노릇.. 하긴, 외국에서는 어린이날이 아니라 어버이날이 아버지의 날과 어머니의 날로 나뉜 경우도 드물지 않다.
  • 그 반면, 우리나라는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 세분화된 게 아니라 종교 공휴일이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모두 존재하는.. 특이한 나라이다.

4월 29일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윤 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렸던 날이다.
윤 봉길은 천황의 생일에 맞춰 치러진 일제의 전쟁 승리 기념 행사 때 의거를 일으켰다. 그 반면, 그 천황 자체를 암살하려 했던 사람은 이 봉창 의사이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일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잊지 않는 근성이 개인적으로 정말 대단하고 부럽게 느껴진다. 꼭 달력에 표시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의사자 이 수현 씨를 20년째 계속 추모하고 있고.. 2005년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 사죄한다는 말이 JR서일본 홈페이지에 아직까지도 박제돼 있고..

이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일본 항공도 신입사원들한테 JAL123 추락 사고 현장을 방문시키고 사고 잔해를 보여주고 희생자 위령비 참배를 시킨댄다. 1985년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사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젊은 세대들한테도 자기 회사의 과거 흑역사 치부를 숨김 없이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저렇게 사고를 친 회사에서 직접 사죄하는 모습을 좀 볼 수 없을까..?? 글쎄, 세월호나 삼풍의 경우, 그 회사가 통째로 망해서 없어져 버리긴 했다만.. 씨랜드 화재 참사는 다시 생각해도 정말 답이 없는 막장 사례인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은 해상 사고를 한번 겪고 나서 전국의 초-중등학교들에 수영장을 설치했다고 그러는데.. 최소한 세월호 난동이나 민식이법보다는 훨씬 더 모범적인 대처인 것 같다.

물론, 걔들도 다 완벽한 건 아니다. 이 수현 씨 사고를 겪었다고 해서 그 많은 역에다 스크린도어를 다 도배하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무리인 듯.. 그리고 후쿠치야마 선 사고 이후로 일본 특유의 그 가혹한 똥군기 이지메 문화가 좀 개선되기는 했나 모르겠다.

글쎄, 저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반성하는 것처럼 태평양 전쟁도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허나, 그렇게도 목이 뻣뻣한 일본 정치인들이 그 정도로 애매한 표현으로나마 유감 표명하고 보상해 줬으면.. 반성을 전혀 안 한 것 역시 아니다. 최소한 북괴보다는 훨씬 더 사죄와 보상을 많이 했다.

또한, 정치가 아닌 민간에서는 "침략 전쟁을 사죄합니다. 제암리 학살을 사죄합니다. 우리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만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저희가 머리 박고 있겠습니다" 이러는 양심적인 일본인도 실제로 있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나치의 죄악을 그렇게도 반성(?)하고 청산했다지만, 걔들도 이스라엘 같은 빽 있는 나라 말고 다른 듣보잡 민족에게 저지른 학살이나 전쟁 범죄는 나몰라라 하고 보상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 결국 이런 건 여전히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역인 셈이다.

이웃 미국은 "스푸트니크를 잊지 말자, 진주만을 잊지 말자" 그러면서 당했던 것 이상의 설욕을 했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기술이 발달하고 안전 의식이 발달하면서 사회 시스템이 나아진 건 있지만.. 일제 식민지 이후로, 그리고 "잊지 말자 6 25, 때려잡자 공산당" 이후로 그렇게까지 절대로 잊지 말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이를 악물었던 계기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국은 군인과 소방관을 극진히 존중하고 예우하는 그 특유의 문화도 정말 부럽기 그지없다. 선진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고 분위기가 선진적이다.

3. 일본의 매체

일본은 1980~90년대에 어째 그리도 창의적이고 천재적이고 장인 정신 근성이 담긴(비록 성경적인 배경의 소재는 아니지만=_=) 만화와 영상물, 게임들을 많이 쏟아내면서 문화 산업에서 세계를 석권했는지 경이롭기 그지없다. 내가 일본 토박이었어도 이런 건 좀 국뽕을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도 역량이 굉장히 많이 향상돼서 일본의 위상이 옛날 정도로 절대 지존이지는 않다. 허나, 저런 걸 옛날에 최초로 만들어냈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1) 모 일본 AV의 BGM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TOKYO-HOT (☞ 듣기), =_= 그리고 모탈 컴뱃 OST BGM은 뭔가 비슷한 성격의 음악 같다. =_=;; 병맛스럽지만 그래도 완성도 높고 잘 만들어진 경쾌한 테크노-_- 음악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일본이 성에 대한 묘사가 그렇게도 개방적이고 야동 AV가 엄청 발달(...)했다지만.. 정작 일본 내부는 가정이나 결혼, 성 관련 관념이 아주 보수적이다. 듣기로는 일본 여자가 한국 여자보다 훨씬 더 다소곳하고 예의 바르고 착하고 신부감으로 더 좋다고 그럴 정도랜다.;;

(2) 한동안 에네르기파와 파동권..;;이 헷갈렸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자는 드래곤볼의 장풍이고 후자는 스트리트 파이터의 장풍이었다. 다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명작 일본 만화와 일본 게임이었다. ㅋㅋㅋㅋㅋ

(3)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기록 영화. (☞ 보기)
작년에도 한번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대단하고 감격스럽고 부러우니 복습 차원에서 또 소개한다. 누군가가 우리말 자막을 넣어 주셨다.
도쿄는 1963년에 이미 저런 대도시가 돼 있었구나..;; 우리나라 서울은 아무리 일러도 1970~80년대는 돼야 저런 모양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같았으면 '6 25 사변의 참화를 극복하고'라고 말했을 텐데.. 일본이니까 '2차 세계 대전의 참화를 극복하고'라고 말한다. 역시 이런 게 문화 역사 배경의 차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량 개발과 선로 건설을 전부 100% 자체 기술로 해냈다니.. 그것도 그 까마득한 옛날에? 그리고 개발 과정을 이런 고화질 컬러 영상으로 남겼다니.. 저때 이미 열차 집중 제어 장치(CTC)와 장대 레일을 취급했다니..

컴퓨터나 화면 장비, 각종 글자와 계기판을 봐야만 완전 옛날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아울러, 1960년대이니 비록 고속철도이지만 저 때는 아직 전부 콘크리트 노반은 아니고 재래식 목재 침목과 자갈 노반이 쓰였다.

(4) 도쿄 올림픽 픽토그램 (☞ 보기)
일본은 2020 올림픽 예고편? 티저 영상에서부터 약 빤 티를 철철 내더니, 올림픽이 개막한 뒤에는 50여 개에 달하는 운동 종목들의 픽토그램을 실사 재현한 근성 영상을 선보여서 또 세계를 놀라게 했다.

컴퓨터 아이콘이라는 게 없던 1964년 올림픽 때 저렇게 특징만 간소화된 그림으로 어떤 운동 경기나 장소를 나타낼 생각을 했다니, 쟤들은 디자인 내지 UX 쪽으로도 그때부터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저 영상도 보면 애니메이션, CG, 실사가 마구 뒤섞이면서 정말 현란하고 정교하기 그지없다.;;.

4. 20세기 초중반의 항일물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국뽕 항일물이라고 하면 으레 1920년대 초중.. 그나마 독립군이 있고 의열단 투사들이 활동하던 시절이 제일 때깔 나고 간지 나고 영화를 만들 소재가 제일 많다. 그래서 2010년대 중후반에 쏟아져 나왔던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심지어 엄복동도 다 이 시기를 다룬다.

그 반면,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국뽕 항일물은 상하이 사변에 중일 전쟁 어쩌구가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1930년대이고 넉넉하게는 1940년대 초까지 가야 된다.

이때는 정작 우리나라는 윤봉길 이후로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이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거리가 별로 없는 시기이다. 말모이(1940년대의 조선어 학회)처럼 성격이 많이 다른 영화가 하나 나왔을 뿐이며, 얘는 역사왜곡 각색이 엄청 많다. 실제 역사 다큐가 순수 쏘고기라면, 얘는 스팸도 아니고 거의 혼합 소시지 정도의 위치밖에 못 된다.

그리고.. 중국 국뽕 항일물에는 쿵푸 무협지가 꼭 들어간다. 일본군이 쳐들어왔다가 무림의 고수 한 명에게 쳐발리는 오글거리는 판타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문화 배경의 차이가 있구나..!!

요즘 들어 유튜브 자동 완성에 왜 자꾸 이런 영상들이 뜨는지 모르겠다. ㄲㄲㄲㄲ 일본이 스시를 세계에 퍼뜨렸듯, 중국은 소림사니 어쩌니 하면서 자기가 모든 동양 무술의 원조라는 식의 이미지메이킹을 꾸준히 한 모양이다.

한국과 중국이 저렇게 유치하게 열폭하는 동안, 정작 원쑤 나라 일본은 자기들의 1920년~1930년대를 매체에서 어떻게 묘사할까?
2 26 쿠데타를 영화로 만들기는 했다고 들었는데, 그것 말고 뭐 영화화할 만한 소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대동아 공영권에 덴노 헤이카 반자이" 이러는 극우 국뽕물이 당연히 있겠지만,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주류는 절대 아니라고 들었다.

5. 차이점

(1) 일본은 국력이 너무 강해서 사고를 단단히 쳐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자위대)
그러나 한국은 국력이 약한 주제에 자기들끼리도 갈라졌고,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징병제)

(2) 그리고 미국에서는 개인의 총기 소지와 관련된 헌법을 고치겠다고 난리인 반면,
일본은 국가의 군대 소유와 관련된 헌법을 고치겠다고 난리이구나~!

(3) 일본의 철도는 기존선이 협궤이고 고속철(신칸센)은 표준궤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철도는 기존선이 광궤이고 고속철(AVE)은 표준궤이다.

과거에는 군사 안보상의 이유로 인해 철도 궤간을 이웃 나라와 일부러 호환되지 않게 만들 정도였지만.. 오늘날은 이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담배에 대한 인식이 극과 극으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산업 혁명 근대화가 막 진행되던 시절의 철도와, 20세기 중후반의 철도는 위상과 역할과 기술 수준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4) 일본은 궤간의 차이 때문에 신칸센과 일반열차가 완전히 분리됐다. 고속선이 대도시의 도심 구간까지 고가 형태로 놓였다. 기존선은 화물이나 단거리 완행 연계로 싹 개편되었다.
그러나 한국과 프랑스는 모든 철도가 표준궤이기 때문에 고속철이 기존선과 직통 운행을 많이 한다. 그리고 기존선 일반열차도 서울-부산 장거리를 뛰는 게 여전히 남아 있고, 장거리 고속버스도 장사 잘 되고 있다.

역할 분담이 엄밀하게 되지 않은 것은 서울 시내버스들이 파랑-초록-노랑 역할 구분이 개편 당시에 의도했던 것만치 갈리지 않은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20 08:36 2022/11/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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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잘 알다시피 현재까지 지구의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 거주지에 핵폭탄을 쳐맞아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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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기란 엄청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1945년 8월경의 일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단순히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범한(?) 악행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때 항복 안 하고, 총체적으로 멍청하고 병신같은 뻘짓만 골라서 하면서 천조국한테 개겼기 때문에 저 지경으로 참교육을 당한 것이었다. 지 무덤을 파면서 매를 벌었다.

1. 원폭이 떨어진 곳

잘 알다시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였다. 모두 후쿠오카 일대에 있으며 일본 본토의 완전 남서쪽 끝 지방이다. 수없이 많은 소이탄 폭격을 당해서 먼저 잿더미가 됐던 도쿄하고는 위치와 방법이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 근처에 있는 고쿠라, 그리고 좀 더 동부의 교토도 목표물 후보로 거론됐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비껴 가게 됐다.

2. 원폭의 위력

원폭 이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 폭발 사고였다고 여겨지는 건 1917년의 캐나다 핼리팩스 대폭발이었다.
거대한 화물선 한 척에 실려 있던 화약이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kt 정도의 위력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바닷가에서 불구경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과 잔해에 맞아서 사망자만 2천여 명이 발생했다.

그랬는데 우라늄235 기반의 히로시마 원폭의 폭발력이 TNT 16kt, 플루토늄238 기반의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력은 TNT 21kt 정도로 여겨진다. 두 원폭 모두 무게는 그냥 4톤에서 4.5톤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뒤에 0이 3개가 추가되고도 남는 사기적인 에너지가 나온 셈이다.

배수량 3000여 톤급 화물선에 가득 실린 일반 폭약 vs 대형 폭격기에 실린 4.5톤짜리 핵탄두 달랑 하나의 위력 차이가 이 정도이니..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에는 "이 폭탄은 30여 년 전, 핼리팩스 대폭발 위력의 수 배.."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갔었다. 지금이야 어디서 핵실험을 하면 "히로시마 원폭의 n배" 이렇게 비교 기사가 나가겠지만, 저 때는 헬리팩스가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핼리팩스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지점과 꽤 가까이 있어서 5년 전엔 구조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사망자의 일부가 여기에 매장되기도 했다. 어째 1910년대에 굵직한 사건 두 건과 연루되면서 유명해졌다.

3. 원폭이 떨어진 방식

1940년대에는 아직 지금 같은 미사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음속 왕복 엔진 폭격기가 적진의 상공까지 직접 날아가서 폭탄을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조국은 일본과 더 가까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1944년엔 B29라는 걸출한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드디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열악하던 둘리틀 특공대 시절처럼 깜짝쇼만 한 뒤에 비행기를 버리고 불시착하는 게 아니고, 살을 많이 뺀 함재기들이 평타 정도 폭격을 하다가 근처의 항공모함으로 허겁지겁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더 크고 묵직한 폭격기가 장거리 원정을 가서 왕창 폭격을 퍼부은 뒤에 공간 넉넉한 섬 비행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뭐, 이러고도 일본이 항복을 안 했으면 나중엔 연합군 육군까지 본토에 상륙해서 폭격이 아니라 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를린이 함락됐을 때처럼 말이다.

4. 비행기들이 출격 방식

원폭을 떨군 폭격기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발진했다. 얼추 괌 근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폭탄 투하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정찰기가 홀로 날아서 투하 지점의 날씨 같은 걸 최종 체크했다. 그 다음으로 폭격기 본체, 카메라맨이 탄 촬영 비행기, 계측기를 실은 비행기가 같이 날아갔고.. 폭탄을 투하한 뒤에는 비행기 세 대가 모두 폭발 예정지로부터 급선회· 급강하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파일럿들은 이런 기동 훈련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연습했다.

폭탄은 여객기 순항 고도에 맞먹는 거의 9km대 고도에서 떨어져서 히로시마 little boy 기준, 570m대 상공에서 터졌다. fat man도 뭐 대등소이하다.

히로시마에 간 폭격기와 나가사키에 간 폭격기는 같은 B29 기종이고 같은 지역에서 발진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기체였다. 전자의 애칭은 Enola Gay이고 후자는 Bockscar인데.. 아무래도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한 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유명하다.
두 폭격기의 승무원도 다 달랐다. 동일한 기체나 동일한 승무원이 두 도시에 원폭을 동시에 떨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원폭 재료의 수송

폭격기로 원폭을 떨어뜨리려면 그 전에 원폭을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단, 보안을 위해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와 부품만 날랐고, 조립은 출격 직전에 기지에서 행해졌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티니안 섬까지 수송한 건 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 호였다. 얘는 기밀 유지 명목으로 호위함 하나 없이 살금살금 몰래 항해하며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는 에놀라 게이 폭격기를 기억하기에 앞서 인디애나폴리스 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배는 그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항해할 때도 호위함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1945년 7월 30일, 인근의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어뢰를 맞고 격침 당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전쟁에서 다 졌고 바로 며칠 전에 포츠담 선언 최후통첩까지 나갔겠다, 우리 천조국한테 위험 요소 따위 없을 거라고 상부에서 함장의 요청까지 묵살하면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전 직전에 이렇게 순양함 한 척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 군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인디애나폴리스 측의 구조 요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서 수많은 병력을 망망대해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오히려 함장을 자기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배와 부하들을 날려먹은 패장으로 몰아붙이면서 진급을 누락시켰다. 그 함장은 말년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먼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함장이 직접 "인디애나폴리스 측은 특별히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우린 그 배가 어떤 기동을 하더라도 공격해서 격침시킬 수 있던 상태였습니다"라고 인증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더 밝혀지면서 함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아직 우라늄을 싣고 있던 상태에서 격침됐다면...? 햐~ 이건 "아폴로 13호가 달 착륙선을 분리시키고 난 뒤에 폭발했다면?" 같은 급의 비극이 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 격노해서 어떻게든 일본을 상대로 보복하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에 비해, 저 그림에서 껄껄 웃고 있는 후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한 뒤에야 원폭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원폭 사용을 지지하고 승인했었다.
허나, 그는 훗날 6· 25 때 한반도에서 원폭을 또 동원해서 북괴 중공을 몰아내자는 군부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다. 이 글의 요지는 인류 최초의 핵무기 투입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며 그 전에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조국은 이런 원폭을 떨구기 전에 핵 실험까지 미리 해 봤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모처의 사막에서 나가사키 원폭과 비슷한 규모의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려 본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자기들이 터뜨리는 폭탄이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도 아니었다.

물론 이 핵 실험은 진행 당시에는 극비로 부쳐졌고 종전 이후에야 비밀이 풀렸다. 어디서 뭐가 터졌다는 낌새가 신고된 건 모 공군 기지의 탄약고가 벼락 맞고 통째로 유폭해 버렸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로 무마시켰다.
'트리니티(삼위일체) 실험'이 바로 냉전 이전에 행해진 전무후무 유일한 핵 실험 기록이 됐다.

* 원폭을 맞은 것 갖고 굳이 죽은 일본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잘 죽었다, 쌤통이다' 이러는 거야 인간말종 짓이다.
그러나 지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입 싹 씻고 원폭 맞은 불쌍한 피해자 행세만 늘어놓는 건 더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짓일 것이다.;;

예전에 본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의 사진 기록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이 들어와서 찍은 사진 말고.. 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내부를 목숨 걸고 찍은 진귀한 사진은 딱 네 장이 전해진다고 말했었다. (☞ 이전 글 보기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그것처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찍힌 제일 따끈한(폭발 이후 겨우 3시간 남짓 경과) 현장 사진은 딱 5장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1913-2005)라는 일본인 기자가 찍은 건데.. (☞ 보기)
이건 뭐 혐짤은 전혀 없고, 평범한 전쟁 폐허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쓴 사람들이 거지꼴로 앉았거나 줄지어 선 모습이 전부이다. 훨씬 더 끔찍한 혐짤 급의 시체 사진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찍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미국에서는 원폭 피해자의 참상을 묘사한 글이나 현장 사진은 절대로 언론을 타지 못하게 아주 강압적으로 검열하고 찍어눌렀다고 한다. 반전 반핵 여론이 조성되지 않게 할 의도였지 싶다. 그래서 저 사진들도 GHQ가 일본에서 철수한 1952년쯤 돼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간지나는 버섯구름 사진만 매스컴을 잔뜩 탔을 뿐, 버섯구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버섯구름조차도 위에서 보다시피 히로시마 껀 영 별로이고 나가사키 것이 훨씬 더 멋있으니 그것만 사골이 되도록 인용되고 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2/08/05 08:35 2022/08/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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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1년

(1) 조선에서는 1871년은 무려 천조국과 맞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해이다(6월).
당연히 절대적인 군사력으로는 조선이 택도 없이 쳐발렸다. 상대방은 그 시절에 벌써 초보적인 잠수함과 철갑선과 철도와 기관총, 후장식 저격총을 굴리면서 내전을 벌였던 미친 나라이다. 어디 조선 따위가.. -_-;;

전사자 교환비는 기관총 소지한 문명국 vs 화살이나 딱총 소유한 미개국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뭔 신념이 있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급으로 탈영병 한 명 없이 사기가 충만했으며, 정말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총알이 다 떨어진 뒤엔 돌 던지고 흙을 뿌리기라도 하면서 양키 코쟁이들한테 끝까지 저항했다.
포로로 잡혀 결박당해도 밥과 물을 일체 얻어먹지 않았으며.. 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차라리 찌르라고, 자길 죽이라고 길길이 악을 쓰고 날뛰었다. 아니,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한강으로 뛰어들어 줄줄이 자결한 병사 역시 부지기수였다.

이건 어찌 보면 70여 년 뒤의 태평양 전쟁 때 세뇌된 일본군이 미군한테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음 그래도 반자이 어택까지는.. -_-;; )
남북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여기까지 온 미군 베테랑들도 조선군의 이 병맛 같지만 너무 진지하고 숙연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고 별 메리트 없지.. 자기들도 남북전쟁 폐허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여기는 천조국이 보기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어 보여서 쟤들도 그냥 철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자뻑하여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뒤로 천조국은 조선을 결코 직접 침략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이웃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걸 걍 묵인하기로 입을 맞춰 버렸을 뿐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자 다음으로, 서양에서 1871년은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해이다(5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뜯기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겼으며,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도 언급된 그 유명한 전쟁 말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흑역사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엎치락뒷치락 악연은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 반대로 독일이 져서 천문학적 배상금크리, 그러다가 2차 대전 때는 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비시 프랑스 괴뢰 정부가 등장하는 식으로 더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질서가 개편된 뒤에야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게 됐다.

1871년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더욱 특이한 시기인 이유는.. 저런 혼란스러운 패전 시국을 틈타서 '파리 코뮌'이라는 사회주의/공산당 정권이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70일 남짓 집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표방했었지만, 공산당 특유의 과격한 과거 단절 노선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래된 프랑스 문화재 건축물들이 이때 많이 박살났었다.
또한, 혁명의 나라, 미터법의 원조 나라 아니랄까 봐, 시계와 달력까지 10진법 기반으로 고쳐서 시행했던가 보다. 무엇이든 과거 레거시와는 싹 단절이었다.

하지만 얘들은 오래 못 가고 무력으로 토벌됐다. 이때도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과 자코뱅 공포정치(1794), 홍 경래의 난(1812), 갑신정변(1884),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1864), 우리나라 6 25 부역자 인민재판(195x) 따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피바다가 벌어졌다. “뒈져라 빨갱이!” 우리나라만 이념 갖고 서로 죽고 죽이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당 인터내셔널가가 이 파리 코뮌의 투쟁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니 1871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해였다.
프랑스는 아무래도 영국 독일 미국하고는 동네 물이 좀 다르고, 러시아와 비슷한 기운이 있긴 해 보인다.;;
그나저나 2024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군..

2. 1894년

그 다음으로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연대는 1894년이다.
찬송가 중에서 '내세, 천국'을 노래하는 곡들은 크게 내 인생의 끝(사후 세계) 내지 이 세상의 끝(종말)으로 세부 주제가 또 나뉜다.
그냥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만나 보겠네, 셋째 하늘에 올라가겠네' 이런 건 내 인생의 끝이지만.. '나팔 소리, 새 예루살렘, 들려 올라감, 몸이 변화됨, 예수님 다시 오심' 이런 건 명백히 후자이다.

전자는 그나마 장례 예배 때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불릴 수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야 기독교라면 이견이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교파마다 해석이 차이가 나는 민감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찬송가에 선뜻 수록하기가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드물게 종말을 다루는 곡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팔소리 James. M. Black (1856-1938) Milton
  • 오랫동안 고대하던 James. M. Kirk (1854-1945) McPherson

(주의 신부인 교회가 먼저 들려 올라갔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임하는 건데.. 왜 "천년왕국이 이를 때" 들려 올라가는 걸까?? 후자곡은 가사가 무슨 생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ㄲㄲㄲㄲ)

그런데 위의 두 곡은 작사· 작곡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비슷하고 리듬도 비슷하고, 작사· 작곡자도 이름이 묘하게 비슷한 데다 거의 동시대를 산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두 곡은 모두 189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갑오개혁, 청일 전쟁, 전 봉준의 농민군 항쟁, 우금치 전투..;;
개막장 탐관오리가 백성 등골을 빼먹지, 나라는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지, 왕이라는 작자는 외국을 끌어들여서 민란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학살했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헬게이트에 혼돈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천조국에서는 저렇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올 것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가 이 꿈도 희망도 없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 전하고 학교 짓고 병원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이다.;;;

1800년대 말은 세계 열강의 관점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벨 에포크, 한창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팽창하던 리즈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나라의 자국민이라도 로동자로 저렴하게 착취 당하던 계층이라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피식민지 사람들의 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이때는 근대화 잘해서 아주 잘나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자국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은 묘하게 서양 냄새가 많이 나고 희망적이고 몽환적이다. 찬송가 하나만 생각하다 보니 조선하고는 어쩜 이렇게 극과 극이었나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18 08:36 2022/07/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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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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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야 맹수가 전멸했고 생태계가 단순하다 보니, 야생 동물 때문에 인간이 골머리를 썩는 게 고라니나 멧돼지 정도에 불과하다. 지리산 반달곰..?? 이건 뭐 등산객에게나 해당될 것이고 실제로 잘 지내는지도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의 북부 홋카이도 지방에서는 호랑이도 아니고 곰에게, 사람이 봉변 당하는 일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근현대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개척되면서 인간의 거주지와 기존 동물의 서식지가 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농작물이나 가축만 털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공격 받아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곰에게 잡아먹히기까지 한 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 블로그가 전문적인 잡학 위키는 아니니 모든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언급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건들 중 1915년 말에 벌어진 (1)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일본 역사상 단일 맹수에 의해 발생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 링크)

불곰 한 마리가 몇 번 사람들에게 쫓겨나더니 그 다음엔 작정하고 흑화해서 주변 사람들을 몇 차례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총 6명 + 태아 1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쳤다.
이 곰은 이전에도 살인에 심지어 식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었다. 그래도 사건 현장을 계속해서 집착해서 맴도는 습성 덕분에 엽사에게 금방 발견되어 사살도 됐다.

훗날 이 지역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피해자 위령비를 세웠는데, 흥미롭게도 가해자인 곰에 대해서도 위령비를 만들어 줬다. 곰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척 때문에 서식지를 빼앗긴 피해자라는 정황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에 발생한 후쿠치야마 선 전철 탈선 사고를 생각해 보자. 이때도 사고를 낸 서투른 기관사가 같이 사망했지만, 1주기 행사 때는 기관사를 제외한 승객 사망자 106명만 공식적으로 추모했던 게 같이 떠오른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의 집단주의 국민 정서상, 가해자를 추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 사고는 기관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지나치게 빡빡한 스케줄과 가혹한 벌칙, 징벌적 똥군기를 강요했던 JR 서일본 조직의 총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법적 판단이 바뀌었다. 그러니 지금 관점에서는 이 사고 역시 기관사도 실드와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저 때 불곰이 실내에 쳐들어왔을 때, 어떤 남자는 넘어진 자기 부인을 밟고 천장 근처 대들보로 양상군자-_- 마냥 올라가서 곰을 피했던 모양이다. 아이고~~
다행히 남자도 살고 부인도 살았지만.. 그 뒤로 이들 부부 관계는 당연히 완전 파탄 나 버렸다고 한다. 무슨 대놓고 불륜 바람이 아닌 범위에서 가히 최악의 대형 사고이지 않은지?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었고, 그 다음으로 본인이 하나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은 사례는 (2) 1970년 7월 말에 벌어졌던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자연인 내지 산악활동) 동아리 불곰 습격 사건”이다. 이건 사건의 진행 과정이 굉장히 처절하고 임팩트가 크다. (☞ 링크)

일본 혼슈의 완전 남서쪽 끝인 후쿠오카 대학에 다니던 혈기왕성한 20살 남짓 남자 대학생들 5명이 홋카이도까지 원정 가서 산맥 횡단 등산을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산 중턱 공터에서 텐트를 치고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쉬기 시작했는데.. 이때 문제의 야생 불곰(암컷)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곰은 처음에는 사람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텐트 밖에 놓여 있던 배낭들을 뒤적이면서 짐 속의 음식만 털어 가려 했던 것 같다.
허나, 곰알못이던 대학생들이 어설프게 라디오 틀고 금속류를 부딪히고 모닥불을 피우면서 그 곰을 쫓아냈다. 그리고 곰이 보는 앞에서 배낭을 도로 회수했다.

그 곰은 처음에는 순순히 물러가는 듯했지만.. 해가 떨어진 당일 밤 9시쯤 다시 나타나서 텐트의 한쪽 벽면을 앞발로 툭 쳐서 구멍을 내고는 “돌아갔다.”
그리고는 이튿날 새벽 4시 반쯤에 “또” 나타나서 텐트를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가려 들었다. 결국 이 애들은 텐트를 버리고 반대쪽으로 도망가야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시작된 그 곰의 집착과 찝적거림과 뒤끝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큰 야생동물의 근처에 있으면 콧김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거나 느껴지는가 보다. “멧돼지가 쿵쿵 호박이 둥둥” 동화에도 묘사돼 있음..)

이 사람들은 일단 곰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치고 산에서 아침을 맞이하긴 했다. 이때 짐이고 산 정상이고 다 포기하고 깔끔하게 하산했으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때는 다른 대학 산악팀 일행과 마주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개인 여행 가족 여행이 아니라 동아리의 활동 실적 홍보 경쟁 중이어서 등산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여러 대학생들이 오랫동안 알바 뛰며 돈 모아서 굉장히 고생해서 홋카이도까지 원정 갔으니 말이다.

그들은 다른 곳에 가서 텐트를 수리하고 이젠 상황이 완전히 종료됐다고 생각하고 둘째 날 야영을 시작했는데.. 어제 만났던 곰이 거기까지 또 따라와서는 이번엔 1시간씩이나 텐트 곁에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라졌다.

이들은 그제서야 더는 안 되겠다는 걸 느끼고 밤길에 무리해서 하산을 시작했는데.. 어느 땐가 맨 뒤의 멤버가 등골이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보니 이런 제기랄, 그놈의 불곰이 살금살금 쭐래쭐래 따라오고 있었다!

얘들은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쳤지만, 곰에게 직접 쫓기게 된 1명, 그리고 근처의 다른 산악팀이 버리고 떠난 텐트로 홀로 도망친 1명. 총 2명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연락이 끊겼다.
이런 상태가 되니 나머지 3명도 마냥 하산할 수 없어져서 이젠 곰을 피해 근처 험준한 암벽에서 밤을 지새웠다.

셋째 날 아침엔 나머지 2명을 찾다가 포기하고 멘붕 상태에서 진짜 하산을 다시 시작했는데..
해가 떴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불량한 상태에서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또 그 곰과 마주쳐 버렸다. 꺄아악~!

1명은 곰에게 쫓기면서 아웃.. 결국 원래 멤버 5명 중 2명만이 근처의 댐 공사장에 간신히 도착해서 구조 요청을 했다.
각개격파 당하면서 곰에게 쫓긴 2명은 말할 것도 없고, 혼자 텐트에 숨어 있던 1명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텐트 안에서 한숨 잠도 자고 이튿날 아침을 맞이하긴 했지만, 사람 냄새를 감지한 곰이 거기까지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텐트 안에서 나름 시간대별 일기도 남겼는데.. 곰이 거기 반경 수십 m를 떠날 생각을 안 하고 맴돌고 있어서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었으면, 일기의 끝부분은 글씨체도 완전 날림으로 일그러졌다. JAL123 추락 사고 때 승객이 여권 쪽지에다가 남긴 유언 같은 느낌이다.

그 곰은 대학생 생존자들이 하산한 뒤에도 거기서 계속 얼쩡거리고 있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엽사에게 사살됐다. 곰의 사체를 부검해 보니 사망자들을 잡아먹지는 않았고 그냥 사지를 분지르고 공격만 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공포 영화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걸..;; ㅠㅠㅠ

저 대학생들이 새끼곰을 건드린 것도 아니었고, 곰이 배가 심하게 고픈 거나 대놓고 악한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곰의 습성을 모르는 채로 (1) 곰이 관심을 보이던 물건을 도로 회수해 간 것, (2) 곧바로 하산하지 않은 것, (3) 패닉에 빠져 등을 보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것 같은 실수가 이 정도의 참극을 만들었다.

하다못해 프랑스에서 제보당의 괴수가 날뛰던 시절엔(1765년!!) 어떤 어린애들 여섯 명이 숲속에서 그 괴수와 마주쳤는데, 정말 침착하게 대처를 잘 해서 살아 돌아온 적이 있었던 걸 생각해 보자. 겁 먹고 울고불고 도망치다가 몰살 당한 게 아니라, 다같이 손을 한데 맞잡고 간격을 넓혀서 덩치를 부풀린 뒤 한꺼번에 괴수를 똑바로 째려봤던 것이다. 그러자 놈도 한참을 움찔 하다가 꽁무니를 뺐다~! 저 불곰 사건도 바로 이런 재치와 기지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곰이 한번 집적대기 시작한 타겟은 인간이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척 하고 있으면 안전하다”가 아니라는 것은 정말 확실한 사실 같다. 등을 보이고 도망쳐서도 안 되고, 납작 엎드려서도 안 되고 참..ㅠㅠㅠ
이런 곰에 비하면 우리나라처럼 겨우 멧돼지 정도는 그냥 양반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31 08:35 2022/05/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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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일본이건(태평양 전선), 영국/소련-독일이건(서부 전선) 각색해서 영화 만들 것들이 차고 넘치는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 두 영화를 주목하며 독자 여러분께도 추천하고자 한다.

(1) 핵소 고지 Hacksaw Ridge (멜 깁슨 감독, 2016) -- 데스몬드 도스(1919-2006)의 일대기
(2) 언브로큰 Unbroken (안젤리나 졸리 감독, 2014) -- 루이스 잠페리니(1917-2014)의 일대기


보다시피 이 두 실존 인물은 거의 동갑내기였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적병이나 적함· 적기를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통상적 무공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초인적인 행적을 남기고 영웅이 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도 나름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그리고 유명한 배우 출신의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는 것, 나름 기독교 색채를 집어넣었다는 것, 평이 꽤 좋다는 것이 일치한다.

1.
핵소 고지는.. 주인공이 제칠일안식교 신자였다. 무정부 반전 평화주의자는 아니어서 진주만의 복수를 하고 싶고 군 복무는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집총은 거부하는 좀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항명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됐지만.. 여차여차 해서 의무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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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45년, 오키나와 상륙 전투에서 총 대신 구급상자를 들고 위험한 적진을 종횡무진하면서, 수십여 명의 부상병들을 혼자 구출해 냈다. 그들은 구출되지 못했으면 다들 그대로 죽거나 적의 포로가 됐을 것이다.
의무병은 전장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라 119 구급대원 같은 역할을 한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보직인지는 2002년 제2 연평해전 때 박 동혁 병장이 다쳤던 걸 생각해 보시라.

이 공로 덕분에 그는 순식간에 영웅이 됐다. 동료와 상관들이 다 너를 얕잡아 봐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죄를 했다. 나중에는.. 레알인지 각색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네 소대는 왜 아직 진격하지 않는 거냐? / 아, 도스 이병의 기도가 아직 안 끝났지 말입니다." 이렇게 신앙까지 당당히 인정받는 지경이 됐다.
이 영화에서는 일본군 측 인물이 뭔가 말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더라.

2.
다음으로 언브로큰은.. 주인공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육상 선수 출신이었다. (흠 육상 선수라니 뭔가 에릭 리들 같은 느낌이..)
그는 그 다음 1940년 도쿄 올림픽에도 출전하려 했지만 이제는 올림픽 경기 대신 전쟁터에 나가게 됐다. 게다가 올림픽 개최 예정국이 아예 적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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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폭격기 승무원으로 복무했는데.. 하루는 격추를 당한 것도 아니고 정비 불량으로 인해 기체가 태평양 망망대해에 추락했다. 구명보트에서 무려 7주를 근성으로 버티다가 구조됐지만, 운 나쁘게도 아군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구조되어서 포로로 전락했다.

그는 일본 해군 수용소에서 2년 넘게 고생했다. 일본한테도 얼굴이 알려진 유명한 운동 선수여서 더 고생했다. 특히 수용소의 간수 일본군이 그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를 아주 가혹하게 대했다.

하이라이트 장면은.. 주인공이 혹독한 노동에 기진맥진했던 상태에서 무거운 통나무를 들고 땡볕에 서 있는 가혹행위까지 감당해 낸 것이다. (통나무를 떨어뜨리면 총살이라고 위협..) 주인공은 그 상태로 무려 40분 가까이 초인적인 힘으로 버티면서 간수를 노려보며 압도해 버렸다.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라면.. 솟은 못 위를 맨발로 걸은 일화가 이 장면에 대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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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쟁이 끝난 덕분에 주인공은 해방되고 무사히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심신의 장애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적국인 일본을 용서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1998년엔 노구를 이끌고 일본을 방문도 했었다. 그러나 예전에 그를 학대했던 간수 등 일본군 출신 인물들은 짱박혀 숨어서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천조국은 "미드웨이" 같은 전투 분야에서도 짱이고, 저런 휴먼 드라마 분야에서도 그냥 짱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2/03 19:33 2022/02/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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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1) 외세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님
내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이 지구상에서 정말 중공만치 한국의 남북 통일을 온몸으로 반대하고 북괴 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악한 나라가 또 있냐..??
6 25 사변이 벌어졌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70여 년 뒤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말이다.

유엔군이 38선 넘어서 북진을 하니까 칼같이 개입해서 저지한 게 저놈들 아니었냐?
그걸 놔두고 도대체 무슨 염치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유체이탈 정신승리 화법으로.. 통일이 웬 얼어죽을 일본 미국의 반대와 방해 때문에 안/못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2) 이제는 남북 통일 한다고 해서 국력이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음
그리고 이 인간들은.. 남한 북한이 합쳐지면 한국이 순식간에 일본 미국을 능가하는 강대국 부자 나라가 될 거라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까? 허 참..

남한과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합쳐지면 일본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남한과 독일 정도가 합쳐져야 이제 일본과 맞장뜰 만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괴가 베트남· 필리핀보다 더 잘사는 나라이기라도 하나?? 어이구..

본인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드는 애들, 싫은 애들.. 그 누구든지 입이 있으면 말해 봐라. 변명이든 반박이든 해 보셔~ 도전장 날린다.
이래서 반일정신병은 정상적인 지능과 양심으로는 절대 걸릴 수 없는 병인 거다.

(3) 이제는 통일이 아니라 그냥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를 바라야 함
사실,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할 거면 쌍팔년도 이전의 할배나 원조가카 시절에 무력· 흡수통일 형태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남북 분단은 이제 사람들 세대가 바뀌어 버릴 정도로 장기화돼 버렸고, 북한 체제가 저절로 무너질 수 있던 기회까지도 다 놓쳐 버려서 이젠 때가 너무 늦었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제는 무리하게 통일을 바랄 게 아니라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부터 먼저 바라야 한다. 사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북한 주민들에게 저걸 주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없다.
북한을 평범하게 왕래할 수 있는 중국· 일본 같은 정상적인 외국으로라도 먼저 만드는 게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4) 북괴의 흉계
남조선이 멸공통일, 반공통일, 승공통일, 평화통일의 순으로 기조가 바뀌는 동안,
북괴는 전면 남침, 무장공비, 납치 폭파 테러이다가 그 다음으로 잠수함, 핵과 미사일로 기조가 바뀌었을 뿐이다!

일본은 패전 후에 GHQ한테서 교육받고 군국주의 쫙 빼내고 나라 체제가 싹 개조되기라도 했다. 그 뒤 일부 소수 또라이들이나 되도 않은 독도 갖고 트집잡고 지랄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북괴는 진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림 반푼어치도 바뀐 게 없는뎁쇼..?? 과거의 망령이랑 현재의 적을 구분할 줄도 모르냐?

우리나라한테 저지른 짓에 대해 일본이 한 것만치라도, 영혼 없는 립서비스 사죄 보상이라도 한 것조차 단 1도 없고..
그렇게 퍼주고 평화 지랄해서 지금 북한 주민이랑 검열 없는 편지 왕래, 전화 통화, 북한 내부로 개방된 인터넷..
도대체 뭐 어느 거 하나 이뤄진 게 있나..??

민주당 간첩과 북괴 체제야말로 진짜 시대착오적인 애들일 뿐..
그나마도 아주 좋게 점잖게 신사적으로 말했을 때 시대착오적인 거고, 감정대로 현실대로 말하면.. 바로 가스실로 보내고 대가리에 총알 구멍 내야 될 애들이다.
굳이 목숨은 부지하고 싶거들랑 삼청이 아니라 오청 백청교육대라도 보내서 두뇌 구조를 개조시켜야 된다.

'공산주의' 와 '공산주의자'는 같지 않으며 '좌파'와 '종북'도 전부 다른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다들 나쁜놈이거나 아니면 나쁜놈의 사상적 근간으로 오· 남용되고 있는 건 다 동일하다.

2. 사악하고 불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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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자유라는 게 왜 중요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흘려 가며 이를 지켜내야 했을까요?"


이렇게 묻는 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이고 인륜에 부합하고 올바른 질문이란다, 이 머저리 바보천치 등신아.
저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곧바로 민족 해방 항쟁이 미제 원쑤들에 의해 좌절됐다는 말 튀어나오겠지.

의병이고 독립군이고 싹 다 토벌되고 없어진 일제 식민지도 전쟁 없는 평화 상태였고,
학교에서 죄없고 약한 애가 양아치한테 고분고분 삥뜯기는 것도 싸움질 없는 평화 상태라구.. 안 그래, 이 사악한 위선자야?

3. 자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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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한두 번만 있었으면 그냥 우연일 수 있겠지만.. 줄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정권에 반대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코렁탕 먹는다거나.. 심지어 장 준하, 최 형욱처럼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하는 사건이 민주화 이전 군사 독재 시절에나 있는 줄 알았지?

반세기 전 버전은 그나마 반공과 경제 개발을 위한 선한 독재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독재이다. 진짜 지들만 해쳐먹고 나머지는 다 거지 되는 진짜 악한 독재란 말이다.

차이점을 모르겠으면..?? 니들만 책임지고 고생하면 내가 이런 글 올리지도 않는다. 정상인들까지 싸잡아서 고생하게 만들지는 말라고..!!
반대편 야당 진영에서 허구헌날 이런 자살 릴레이가 터졌어 봐라.. 무슨 난리를 쳤을까..??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쫙 돋는다.

지난 5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선의 편,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딱 인상을 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애국이 하루아침에 매국으로 뒤집힌 거라면 차라리 내가 죄인이 되고 말겠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한 부하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나는 또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동일하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딱~ 이러니 가슴이 다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사람은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너무 순진할 정도로 고매하고 도도하게 “나는 애초에 죄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결국 역사가 공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어차피 살 만치 다 산 인생인데, 구차하게 항소니 탄원이니 하는 것 자체가 적들이 짜 놓은 유죄 프레임에 말려드는 추한 짓이다” 이랬다.

그러나 그러나..
악의 편에 선 놈들은 정말 오로지 남 탓, 뭐시기 때문, 누구 때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었다. 그저 주둥아리로 말이 많고 변명이 많았다.

아니면 자살이나 싹 해서 책임 회피하고 수사를 흐지부지 시키고 혼자 도망가곤 했다. 아니면 자살 '당하거나' 말이다.
이건 정황상 결백 호소, 억울함 호소나 자기 명예 설욕을 위한 자결이라고도 절~~대로 간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각 사람들이 누군지는 차마 대놓고 얘기하지 않겠다.
올해 봄엔 대통령이 바뀔 예정이긴 한데.. 이번엔 제발 악의 무리가 아니라 정의와 선의 편에 선 사람이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
'멸공'이니 '우리의 주적은 북한' 같은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소리가 논란거리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좀 왔으면 좋겠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멸공을 외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 그럼 군대 갔다 온 대통령이 북괴를 옹호하는 건 말이 되고?
-- 그럼 일제 시대를 직접 겪지도 않은 사람이 반일 거리는 건 말이 되고?


멸공은 당연한 절대선이다.
멸공 갖고 전쟁 선동 지랄하는 건 절대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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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01/17 08:35 2022/0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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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토지 조사 같은 것만 한 게 아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조센징들이 옛날에 무슨 찬란한 문화재 유물들을 만들었는지도 아주 면밀히 조사했다.
그래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라는 총 15권짜리 방대한 도감을 1915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편찬해 냈다.

왜, 1910년대에 돌덩이가 다 무너진 폐가 흉가 수준의 불국사와 석굴암의 모습 사진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거 출처가 이 도감이다. 일본인들이 촬영해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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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제5권, 불국사는 제4권에 수록돼 있다.)

그리고 각종 역사 만화나 교과서를 보면, 북한 지역에 있는 문화재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흑백 사진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역시 일제 시대에 일본이 촬영한 저 도감의 옛날 사진을 인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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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990년대부터야 냉전이 끝나고 남북 민간 교류가 잦아지고 정보 통신 기술도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서는 북한의 현지 정보도 훨씬 더 풍부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현대에 컬러로 찍은 사진도 포함..). 하지만 그 전에는 개성의 선죽교 사진조차도 일제 시대에 찍힌 흑백 사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공권력으로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기록을 남긴 게 아니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게 1962~63년, 원조가카의 집권 초기라면,
우리나라 네임드급 문화재들이 대대적으로 조사되고 사진이 처음으로 찍힌 건 1910년대 일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저건 “식민지에 원래 이런 문화재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것들도 다 우리 일본 것이 됐다. 그러니 우리가 철저히 관리해야지” 그런 정치 행정적인 차원에서 조사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걔들도 최소한 이상한 감정--심지어 조선에 대한 열등감까지!!!--을 갖고 “다 때려부숴 버려야지, 없애서 조센징들 민족 정기를 말살해 버려야지” 이러지는 않았다.

일제 시대의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뭐시기 하는 그 아저씨는.. 정치 쪽은 가혹한 헌병 무단 통치 때문에 우리 쪽에서 썩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의외로 불상 덕후에 문화재 덕후 기질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그게 일본 본토로 무단 반출되지 않게 하는 일에 나름 애쓰기도 했다.

일례로, 그 당시의 석굴암 복원 작업은 졸속 날림으로 진행된 게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악의적인 고의 훼손은 절대 아니었다. 폭탄 맞은 듯한 폐허 상태에 비하면 그 기술과 자금 하에서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든 거지, 악화시킨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석굴암이 저런 막장 상태가 되도록 수백 년째 방치한 건 숭유억불의 조선 왕조였으니 말이다.

석굴암이 옛 신라인들의 넘사벽 lost technology를 동원해서 만들어졌는데 왜놈들이 어설프게 콘크리트를 쳐발라서 망가뜨리는 바람에 습도 조절이 안 되고 내부 상태가 꼬였네 뭐네 하는 소리는 2020년대에는 좀 안 나와야 할 것이다. 걔들은 문화재를 진짜로 다 때려부순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나 요즘 탈레반 집단보다는 정신 세계나 행정 시스템이 더 나은 애들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 6· 25 사변 중에 소실된 것, 그리고 결정타로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전부나 일부가 소실된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원본이 제대로 보존된 게 별로 없는 지경이다.
그런데 순종을 비롯해 일부 왕의 어진은 2010년대에 그림을 다시 그려서 복원이 완료되기도 했다. 이때는 소실된 부분을 무엇을 토대로 유추해 냈을까?

바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어진을 흑백으로나마 사진을 찍어 놓은 자료가 있어서 이를 참조해서 복원했다.
일부 소실인 경우, 색깔이야 불타지 않고 남은 부분으로부터 유추가 가능하니까 흑백 사진만 있으면 전체 복원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순종의 경우, 김 은호 화백이 어진을 그리는 모습까지 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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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자료인지, 아니면 다른 별개의 촬영 기록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다.

※ 여담: 문화재 관련 박물관

문화재 관리 얘기가 나왔으니, 이것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얘기도 같이 안 할 수가 없겠다.
박물관이야 워낙 분야가 다양하긴 하지만 무슨 국립 박물관이라 하면 일단은 상술했던 옛날 전근대 시절의 국보/보물 문화재를 전시해 놓은 곳을 말한다. 역사 박물관이라든가 아예 미술관하고는 영역이 약간 겹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제 시대에도 한반도엔 총독부 박물관이니, 이왕가 박물관이니 하는 전시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립 중앙 박물관’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주, 제주, 전주 등 10여 곳에 국립 박물관 에디션이 있긴 하지만.. ‘중앙’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박물관은 서울 에디션이다.

엄청 옛날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고궁 안에 있었다. 198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입주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그게 헐리면서 지금과 같은 용산 부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됐다. 전에는 거기가 미군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 여담: 과학관

다른 관련 주제를 하나만 더 열거하자면..
이런 옛날 문화재 박물관 말고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면서 여러 지역에 ‘파생 에디션’까지 존재하는 또 다른 관람 시설은.. 바로 ‘과학 박물관’, 일명 과학관이다.

얘 역시 나름 일제 시대부터 전신이 존재했었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자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기존 건물이 ‘은사 기념 과학관’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해방 후에도 이름만 ‘국립 과학 박물관’으로 바뀌어서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와룡동, 혜화 역 근처 지금의 위치에 ‘국립 서울 과학관’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부지가 너무 좁기도 하고 나중에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기도 했으니 대전에 엄청 큰 과학관이 새로 건립되면서 얘가 ‘중앙’ 타이틀을 대체하게 됐다. 즉, 국립 중앙 박물관과 달리, 국립 중앙 과학관은 대전에 있다.

지금은 수도권의 과천을 포함해 대구, 부산 같은 몇몇 대도시에 국립 과학관이 몇 곳 더 있다. 기존의 서울 과학관은 ‘어린이’ 과학관으로 리모델링 됐으며, 이와 별개로 강북에 서울 시립 과학관이 추가로 더 개관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9 19:35 2021/12/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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