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철도

192~30년대에 일본 도쿄 시내 모습을 보면.. 1920년대의 뉴욕처럼 벌써부터 마천루에다 자동차가 길거리를 가득 메운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빽빽한 건물들에다 길거리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노면전차들이 다니고 인력거들이 분주히 오간다.

그런데 그 중에서 본인이 보고 굉장히 놀란 광경은 바로.. 그때 이미 도시 한복판을 고가로 지나는 철도가 있었고 그 위로 증기 기관차가 칙칙폭폭 다니더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일제 시대 전체를 통틀어 경성에서도 철길이 고가로 입체교차 하며 다니는 구간이 만들어진 적은 전혀 없었으니 매우 신기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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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풍경은 아닌데.. 교량 말고, 시내에서 증기 기관차가 고가 위를 달리는 것 말이다)

증기 기관차가 다니는 시절이라면 다른 철도 시설도 단선 비전철화에 평면교차가 당연시될 텐데, 쟤들은 증기 기관차로도 열차를 벌써부터 저렇게 빡세게 굴렸는가 보다.
그러니 1930년대에 경부선 서울-부산을 증기 기관차만으로 무려 6시간 40분을 찍었던 것이다. 그것도 단선으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저 정도 철도 시설은 해방 이후 할배를 넘어 박통 때에나 구경할 수 있었는데, 박통 시절에 일본은 아예 신칸센을..;;; 뭐 그랬다.

2. 기업

일본에는 도요타, SONY, 미쓰비시, 히타치, 혼다, 이스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동차, 게임기, 철도 쪽 기업이 있다. 이들만치 유명하지는 않지만 본인이 들어 본 적이 있는 특이한 기업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일본전산: 모터 제작 전문이라고 한다. 선풍기, 세탁기, 심지어 교통수단 안에 들어가는 큼직한 녀석뿐만 아니라 하드디스크를 동작시키는 모터, 휴대전화에서 진동 모드를 구현하는 모터처럼 엄청 섬세하고 작은 것까지도 만든다.
얘는 창립 초창기부터 직원 채용 방식과 경영 방침이 아주 독특한 걸로 유명했다. 지원자들에게 아무 예고 없이 도시락을 달랑 준 뒤, 밥을 제일 빨리 먹은 사람을 합격시켰다거나, 목소리 큰 사람, 오래달리기 깡다구가 있는 사람을 뽑기도 했다.

어설프게 시험 점수 좋은 거 하나만 믿고 고자세인 사람이 아니라, 당장 좀 어눌해도 자기를 뽑아 준 회사에 고마워하고 끈기와 집념이 있고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을 뽑았다. 그 뒤 회사에서 필요할 때는 물론 "안 되면 되게 하라" 불굴의 공밀레 근성으로 직원을 갈아넣을 땐 갈아넣더라도, 그들에게 최고의 복지와 종신 고용을 보장했다. 그렇게 해서 세계의 정밀 전자기기에 들어가는 모터들을 석권했다고 한다.

(2) 화낙(FANUC): 얘는 공작 기계, 산업용 로봇.. 다시 말해 물건을 만드는 게 아니라 물건을 만드는 로봇을 만드는 회사이며, 역시 이 바닥에서 독보적인 기술과 시장 점유율을 자랑한다. 일본 제조업의 상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기술에 목숨 걸면서 보안에 극도로 민감해서 본사와 공장은 외진 후지 산 숲속에다 같이 꿍쳐 놨다. 추가적인 공장도 외국에는 절대로 만들지 않고 사내 통신도 종이와 팩시밀리에 의존한다고 한다.

위의 두 회사 모두 1970년대에 창립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가 무슨 기계류를 자체 개발하려 하는데 "n% 이내의 핵심 부품과 무슨무슨 공정을 국산화하지 못해서 아직 일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일본의 이런 회사가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참 강렬해서 기억에 남아 있는데, 나치..!! (3) 나치-후지코시라는 일본 회사도 산업용 로봇, 공작 기계 제조이니 화낙이랑 업종이 비슷한 것 같다. NAZI..는 아니고 NACHI인데, 이름이 일본어로 무슨 뜻인지, 아니면 다른 단어의 이니셜인지는 잘 모르겠다. =_=;
하긴, 일본은 1930년대에 나치 독일 청소년들과 친교 맺으면서 "반자이~ 힛토라 유겐토~~ 반자이 나치스!!" 이런 가사의 노래도 만들어서 불렀던 나라이다. 끼리 끼리 논다고~;;

3. 삼청교육대의 학교 버전

세계 어디에서나 옛날에는 지금보다 닥치고 근성, 정신력, 끈기, 의지를 강요하고.. 좀 나쁘게 말하면 약육강식에 무식한 똥군기와 까라면 까, 폭력적인 생명 경시 성향이 사회 분위기에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 정도가 세계 평균보다 더했던 것 같다.

그게 지금의 일류 선진국 일본을 만드는 저력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런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골병 들게 만들기도 했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까지는 공중도덕 미덕인데, 그게 지나쳐서 남과 다르면 그냥 곧바로 비국민 왕따 이지메.. 이건 좀 아니지 않은가?
우리나라도 그런 일본을 벤치마킹 하면서 단기간에 성장했으니, 순기능과 역기능이 둘 다 일본의 7~80%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5공 시절에 삼청교육대가 있었다지만 일본은 10대 애들이 다니는 교육기관이 삼청교육대 같은 곳이 있었다. =_=;;
대표적인 예가 쌍팔년도 시절의 '닛세이가쿠엔' 고등학교..;; 여기는 다른 학교에서 감당이 안 되는 양아치들을 교화한다는 명목으로 일체의 자유 시간이 없고 라디오· TV· 신문 금지.. 남자애들은 거의 삭발 수준으로 머리 밀고 입학.

사소한 규율을 어기면 혹독한 체벌에다 걸핏하면 단체 기합..
특히 압권인 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전교생이 청소 명목으로 고래고래 고함 지르면서 걸레질을 미친 듯이 하고, 심지어 변기를 맨손으로 닦아야 했다. 자세한 건 이런 유튜브 동영상을 참고하시길..

교장이 "인간은 생활 방식을 개조해야만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땀흘리며 일해야지 인생의 참맛 의미를 알 수 있다.." 이런 신념의 추종자였다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 캄보디아의 인간 백정 폴 포트도 거의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면서 생사람을 잡았다.;;;;
심지어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 로동이 자유를 선사한다"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지 않던가..?? 다들 근로· 노동의 의미를 심각하게 모욕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저기서 못 견디고 탈출하거나 자살하는 애도 있었다. 그리고 애들 저렇게 굴려 봤자 어차피 학업 성적이나 대학 진학률은 개판이었다.
저긴 정말 삼청교육대나 소년원이나.. 아니면 옛날 PC통신 소설 "구타교실"에 나오던 M고 같은 학교였다만..
1980년대 말, 설립자가 죽고 일본 천황이 바뀌었을 즈음엔 저기도 그래도 평범한 일반 사립 고등학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리고 '토츠카 요트 스쿨'이라는 곳도 요트 선수 교육을 빙자해서 문제아를 줘 패면서 더 잡는 시설로 악명을 떨쳤다. 여기도 요트 선수 출신인 설립자가 "애새끼는 닥치고 빡세게 굴려야 잡생각 하지 않고 나태해지지 않고 강하게 큰다" 이런 사고방식을.. 교육생 중에 사망· 부상· 실종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굽히지 않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9/06 08:35 2023/09/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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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한테 이토 히로부미야 뭐.. 을사조약을 밀어붙인 민족의 침략자 원쑤이며 악당이다.
원 태우 의사가 암살하려다 실패했지만, 나중에 안 중근 의사가 쏜 권총에 맞아 골로 갔다. 죽어서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로 인과응보를 받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놈은 “남자는 배꼽 아래부터는 인격이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뒤지는 순간에도 女짜 포즈를 그리며 쓰러졌다는 풍자가 나돌 정도의 호색한이었다.
과연 악당 캐릭터에 걸맞은 성품이다. 울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이다. 코 옆에 점이나 있는 사악한 흰 수염 꼰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반면, 이 사람을 암살한 안 중근 의사는 울나라에서 뭐.. 그야말로 초딩용 위인전에도 수록돼 있는 애국자에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 업계에서 개인 테러 분야의 원조 ‘알파’이다. 피날레 ‘오메가’는 윤 봉길 의사이고. ㄲㄲㄲㄲㄲ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니 관련 영상물도 당연히 여럿 만들어져 나왔다.
바로 떠오르는 건 "도마 안 중근"... 아 이건 좀 작품성이나 감독의 자질에 논란이 많고..
검색을 해 보니 애시당초 해방되자마자 1946년에 바로 "의사 안 중근"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나왔다. 하지만 얘는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1972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영화가 그나마 더 유명하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천추의 한이었으면 1940년대 말에는 열차 이름도 '해방자'호였으며, 유 관순이고 윤 봉길이고 안 중근이고 항일 독립운동가 전기 영화부터 먼저 잔뜩 만들어졌었다. 그나마 "검사와 여선생"이 그 시절에 비정치 순수 픽션 분야에서 흥행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신파 영화였다고도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유 관순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 중근 영화도 1959년에 "고종 황제와 의사 안 중근"이 하나 더 나왔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안 중근, 이등 박문을 쏘다"(1979)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유 관순은 북한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반면, 안 중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알고 보니 지난 2016년에는 "마지막 간수"라고 울산 MBC에서 다큐 반, 영화 반쯤 되는 성격의 TV 프로를 방영했었다. (☞ 보기)
마치 "조피 숄의 최후의 날"처럼 안 중근이 거사 이후 체포되고 취조받는 장면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공교롭게도 KBS에서 주 기철 목사 다큐 겸 전기 영화인 "일사각오"를 만든 때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저거는 중앙도 아닌 지방 방송에서 전기 드라마를 자체적으로 만든 거라니 무척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2022년 말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또 21세기 안 중근 전기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 ㄲㄲㄲㄲ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안 중근과 이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위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반면, 한국에서 이토를 그냥 외국 정치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만, 이토는 그 당시 일본의 진짜 제국주의 정한론 침략자들에 비해서는 '온건한' 편이었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만 두면서 둘이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고 있었다면서 이토에게 최소한의 실드를 치는 시각은 국내에도 일부 있다. 이 영상에서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구나. (☞ 보기)

  • “조선 정도의 전통과 규모가 있는 나라를 일본이 완전히 합병해 버리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를 1천 년 이상 가진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을 만들게 됩니다”

  • “일본인 교사는 여가 시간에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하십시오” (참고로, 이토 본인은 영국 유학파였고 영어를 아주 잘한 사람이었음)
  • “종교는 조선인들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니 이렇다 저렇다 평론하지 마십시오”

근현대에 일본은 어느 때건 온건파와 강경파가 늘 대립했던 것 같다.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나중에는 천황에 대한 생각(황도파 vs 통제파), 더 나중엔 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 대한 생각에서도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으로야 살아 생전에 한복 코스프레 즐기고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정도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토가 진짜로 저런 생각을 갖고 저렇게 말했는데 울나라 국사에서 일부러 누락시키고 안 가르친 것인가?

이토가 한국의 잠재성을 믿었다느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오바 같다.
을사조약의 제5항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라고 적혀는 있다. 나무위키에서는 여기에 밑줄 치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로 링크가 걸려 있다. -_-

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먼저 만들고 나서 천천히.. 그래도 영국이나 로마 제국을 흉내라도 내면서 조선을 온건하게 일본과 동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국 유학파답게..
이렇게 비유를 해 보니 이토한테서 뭔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후자는 미국 유학파이군..

그러니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몰래 보내면서 허튼수작 부린 것에 대해서는 이토도 강제 퇴위로 대응하면서 칼같이 응징했다.
그 시절에 고종은 아무리 봐도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친일과 항일 사이에서 오락가락 여기저기 양다리 걸치다가 죽도 밥도 못 쑨 것 같다. ㄲㄲㄲㄲ

안 중근 의사는 이토가 한국을 배신하고 동양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사살해 버렸다. 그러면서 이토의 구체적인 죄목 15가지를 법정에서 주장했다. 아무리 온건파니 뭐니 해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이토가 완전 죽일놈이라는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일야방성대곡'만 봐도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을사조약 결과를 보니 전혀 아니었구나~ 저놈이 우릴 낚았구나!! 아이고 우리 어이할꼬"라는 내용이 전부이지 않던가..?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안 중근이 주장한 아이템들이 100% 다 팩트이고 맞는 얘기는 아니었던 걸로 난 알고 있다. 집필 중이던 "동양 평화론"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의 생각을 다 알 수 없게 된 것이 일면 안타깝다.

안 의사는 체포된 뒤에는 자기를 적장을 사살하고 잡힌 군 장성급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살이 아닌 교수형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작 윤 봉길 의사는 그런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로까지 압송돼서는 군 교도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이토와 안 중근에 대해 어지간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객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1) 이토는 일본 자국에서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안 중근이 존경받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 것 같은 유치한 행적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일본 자체를 개조하고 근대화시킨 아버지 정도로 추앙받는다. 거의 울나라의 박 정희 수준? 괜히 지폐에까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김 옥균 암살과 효수(시즌 1), 거기에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시즌 2)..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더 부정적인 인식을 심고, (2) 조선을 더 강하게 병탄하고 더 험악하게 취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건 분명하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는 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대만의 일제 통치에 비해 한반도의 일제 통치가 더 가혹했던 것, 처음부터 무단 통치에 헌병이고 고문이고가 횡행했던 것에 이런 사건이 직· 간접적으로 기여했지 싶다.
해방 이후에 김 구가 갑자기 암살 당하는 바람에 1940년대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남북 관계가 더 싸늘해지고, 6 25 같은 전쟁이 더 빨리 벌어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의 다른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물론 을미사변이라든가(시즌 1)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시즌 2) 때문에 조선 쪽에서도 감정이 빡돈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이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군사력 국력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국지적인 저항과 도발만 하는 건 그냥 일본을 빡돌게만 할 뿐, "곱게 식민지 될래, 맞고 식민지 될래"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마치 진주만 공격이 그때 당시에는 일본의 대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천조국을 빡돌게 해서 그 뒤로...!!@#@!#@! 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은 그로부터 10년쯤 뒤, 3· 1 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하면서 크게 벌어지니 그제서야 일제도 발톱을 쓱 감추고 좀 고삐를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하게 됐다.

안 중근이 1910년대 국제 정세를 얼마나 크게 바꿔 놓았는지는 반대로 안 중근의 거사가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쓰여진 대체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 같은 걸 읽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이 저렇게 무식하게 가혹하게 통치를 했으니 반일 항일 감정도 강해지고 강한 독립 열망이 형성되고 그게 실제로 이뤄지기도 한 것이다. 이토 같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조선을 반발심 없이 교묘하게 잘 다스렸으면.. 한국이 진짜로 일본과 동화돼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나머지 관련 잡학들

  •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성이 이름 급으로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이토'는 그래도 그나마 흔한 축에 드는 성씨라고 한다.
  • 휴먼버그 대학교에 고정 출연하는 주인공 중에 불사신의 직장인 ‘사타케 히로부미(박문!!)’가 있다. 이 사람 이름도 좀 다시 보게 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ㄲ

  • 안 중근 의사가 거사를 벌이던 당시에는 하얼삔 역에 일본군보다는 러시아군이 훨씬 더 많았다. 안 의사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제압 당하고 체포됐다.

  • 이토가 마지막으로 "나를 쏜 자가 누군가? 조센징이라고? 이런 빠가야로.." 이런 말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후손의 증언에 의해 부정된 바 있다. 또한, 이토를 쏜 사람이 러시아 저격수라고 따로 있다는 황당한 낭설이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주작이다.

  • 우리나라는 35년에 달하는 일제 식민지 트라우마로 인해, 훗날 UN이 제안하는 신탁통치조차도 극렬 반대하고 차라리 이대로 미군정-소련군정을 거쳐 분단을 선택한 것에 가깝다.;; 신탁통치 오보 같은 황당한 사건도 울나라의 미래에 영원한 쐐기를 박아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7/31 08:35 2023/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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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는 1942년 6월 13일, 리 승만 할배가 워싱턴 D.C.에서 Voice of America 단파 라디오를 통해 고국으로 내보냈던 7분 남짓한 길이의 항일 독립 투쟁 격려 선전 방송이다.

“나는 이 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외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하노니, 누구든지 귀가 있는 자는 듣고 주변 동포에게도 이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시오~ 일제의 학정에 신음 중인 우리 동포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시오. 철창 감옥에 갇히고 형틀에 묶여서 죽어가는 우리 동포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시오…” (약간 요약하고 각색)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송이 있다는 건.. 지난 2007년 말에 출간된, “일본 그 가면의 실체”(청미디어) 책에 별첨돼 있던 음원 CD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 방송이 나갔던 때는 할배가 Japan Inside Out 책을 저술해서 출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1942년 6월이라는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때는 이제 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겨우 승기를 잡았던 시점이었다. 아직 카이로고 포츠담이고 그런 선언이 나오기도 1년 이상 전이었다.

하지만 할배는 배짱 장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반 년 이상 일찍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망도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예상하고 확신했던 것이다.

“저 악독한 왜적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제 무덤을 팠으니 미국은 잊지 않고 보복할 것입니다.
왜적들은 지금은 의기양양해 있지만 이내 혹독한 불벼락으로 응징당하고 패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일황 히로히토는 필히 파멸당할 것이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이치입니다.”

“우리 독립군이 중국 및 영국 미국과 더불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왜적을 타파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이 순신의 후예로서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이 세계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아~~ 전시에 선전 선동은 이런 식으로 피끓는 말투로 하는 게 정석이구나 싶다. 전쟁에서 사기라는 게 기여하는 바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저 따위로 했으니.. 할배가 나중에 미국을 상대로도 광복군 규모를 말도 안 되게 부풀리고 개 뻥카를 쳤겠구나 싶다. 이제 이해가 된다.

1940년대 정도면 일제의 악랄 집요한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였다. 본인이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제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건 영원히 물 건너갔구나, 이대로 세대가 교체되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진짜 씨가 마르겠구나. 물론 최후의 발악을 하는 소수의 불령선인 민족주의자가 있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일 뿐 대세를 뒤바꾸지는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30년을 애썼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걸 보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미 이런 생각이 퍼져 있었다.

항일 독립 운동은 무의미하고, 이제는 2등 신민 조선인의 권익 향상, 차별 철폐, 일본 내에서의 참정권 쟁취 운동이나 해야겠다는 게 그 당시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는 민족주의 지식인 상류층의 주된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단파에 실려 태평양 너머로 울려 퍼진 리 승만 할배의 독려 메시지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엥, 이건 뭐지..?? 울나라 임시정부인지 뭔지는 중국에 있는 걸로 들었는데 본부가 언제 미국으로 이사 갔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할배의 선전 방송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불순불온 삐라를 훨씬 능가하는 최악의 불온 유언비어였다. 그들은 자국민이건 조선인이건, 전쟁 중에 외국 단파 라디오의 청취를 엄금했다. 요즘으로 치면 서버가 외국에 있는 불법 도박이나 마약을 단속하듯이 단속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 조선인 중에서 엄청난 고가였던 단파 라디오에 접근 가능해서 외국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방송국 기술자와 언론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혼자만 이 소식을 들은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방송 내용을 주변에 퍼뜨리다가 결국 1942년 하반기부터 줄줄이 걸렸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렁탕을 먹고 투옥됐다. 이것은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 전파 통신 기술이 미약하던 시절에는 전파 거리가 적당히 길고 지구 전리층에 반사되고 산란성 투과성도 적당하고.. 취급하는 기술 난이도도 아예 초단파 FM 방식보다는 낮던 ‘단파’ 라디오가 장거리 통신용으로 즐겨 쓰였다. 음질이야 메롱이기 때문에 천상 음성용이지, 음악은 안 된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모스 부호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지금 인터넷 기반 스트리밍은 대륙 간 전송은 거의 다 해저 케이블이 담당하고, 지역 내에서 무선 전송용으로는 곳곳에 기지국을 도배해 줘야 하는 극초단파가 쓰인다. 이런 기술의 변화도 참 격세지감이다.

* 여담: 반일 감정

요즘 본인은 채널 A도 아니고 채널 W라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랄까 분위기가 지난 쌍팔년도 이후로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 왔다.
위성 방송 같은 걸로 외국 방송을 쌩으로 그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정식으로 수입돼서 우리말 자막까지 붙은 일본 드라마와 다큐를 그대로 보다니..

거기에다 일본어 학습(한국인 화자 입장에서)이라든가 일본 연예인 얘기도 나온다.
노인과 바다처럼 망망대해로 나가서 낚싯대로 '마구로' 잡는 어부가 울나라로 치면 무슨 인간극장 다큐의 소재이다.
아무리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이라지만 저게 제도적으로 가능한가 궁금했다. 검색을 해 보니 채널 W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 컨텐츠의 직수입 방영이 허가된 케이블 방송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던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는 SKY 명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아.. 내가 알기로, 그나마 셋 중 한국대에만 1980년대가 돼서야 일어일문 비스무리한 학과가 유일하게 추가됐다.

최근에 만들어진 '항거' 영화에서야 형무소장이나 간수, 헌병뿐만 아니라 조선인 죄수인 유 관순 본인까지도 현장에서는 현실 고증을 반영해서 일본어를 쓰는 걸로 나온다. 그러나 옛날 1950, 70년대에 만들어진 국내의 유 관순 영화들은 반대로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와 검사까지도 편하게 한국어를 쓴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배우를 구하지 못해서일 리는 절대 만무하고, 당연히 그냥 "왜색을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고증을 무시한 것이었다.

찬송가조차 일본인이 작사한 건 슬쩍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넘기기도 했었다.
가라데?? 당연히 태권도라고 바뀌어서 소개됐다.
국어에 별 희한한 단어까지 다 일본식 한자어라고 추방해야 된다느니 마느니 그랬다.

역사, 지리, 언어 등 온갖 분야에서 "원래 잘 될 수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로비와 방해 때문에 못 된 거다" 식의 피해망상이..
적당하거나 그나마 동정하거나 이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병적으로 치달으려 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비례해서 일본한테 너무 쫄아 있기도 했다.
나 학생 시절에 정신력 강조하는 선생들의 훈화 말씀만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군기가 개 빠져 갖고는 얼마 못 가 우리나라가 쫄딱 망해서 다시 일제 식민지가 될 것만 같았다. -_- 일제 식민지가 아니면 다시 북괴가 남침해서 적화통일 되거나.. =_=

과장 좀 보태면 쓰레기 하나 없는 일본 길거리가 우리집 안방보다 더 깨끗할 것 같았다.
일본인은 진흙처럼 잘 뭉치고, 조선인은 엽전까지는 아니어도 모래알처럼 제 팔 흔들면서 안 뭉치다가 각개격파 당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이러니 1990년대 말까지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같은 선정적인 책이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그러던 게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하고, 울나라도 일본의 경제와 과학기술을 많이 따라잡고, 다이쥬 대통령 때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됐고 월드컵은 어쩌다 보니 한일 공동 개최로 치렀고..
또 요즘은 일본보다도 중공이 훨씬 더 많이 깽판 치고 망언 어그로를 끌고 있기도 하니 원색적인 반일감정이 상대적으로 누그러졌다.

뭐, 아직도 반일 정신병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과거사 정도면 "일본이 이만치 유감이니 사과니 보상이니 했으면 많이 한 거다, 더 논하지 않고 퉁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더 문제"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요즘은 많이 눈에 띈다.
아직까지 일본이랑 대놓고 갈등하는 티라도 나는 아이템은 독도 하나만 남은 것 같다.

허나, 역대 울나라 대통령 중에 리 승만 할배만치 편집증적으로, 거의 트라우마 급으로 일본 싫어하고 반일 반일거린 지도자는 없었다. 북괴와 전쟁을 치르던 중에도 “어디 우리 집안 싸움에 개입하기만 해 봐라, 우린 왜놈부터 죽여 버린 다음에 괴뢰군을 쏘겠다” 이랬었다.

세상에 저런 방송을 했던 당사자가 대통령이 됐는데 반일을 안 하고 배기겠는가? 이건 당연한 귀결이니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이런 반일 대통령 밑에서조차 노 덕술이니 김 창룡 같은 간부가 있어야 했겠는지도.. 자세한 맥락을 살펴보고 이해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교류하며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하고는 독특한 과거사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외교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할배가 양자 이 인수에게 남긴 유언 중 일부

이건 성경으로 치면 마치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유대인에게만은 행 2:38 같은 회개의 침례를 추가로 요구하고, 베드로에게는 뭔가 특별한 회개· 회복 절차를 요구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고, 또 베드로야.. 이와 관련해서 인생 최악의 사고를 한번 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지키고 울창한 산림 환경을 지켜 준 것은 고래기름의 대체제와 화석연료 원자력을 개발해 준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라고 믿는다. 알량한 환경팔이 파이터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고 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반일 항일 극일을 제일 잘 실현해 준 것은 횬다이 쌤숭 같은 기업이라고 믿는다. 국부를 창출하고 실력으로 일본을 이긴 주역들이 아닌가? 어설픈 반일정신병자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

아무쪼록,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대놓고 로비 한다거나, 일본 기업에다가 횬다이 쌤숭 기업의 기술 기밀을 팔아넘기는 간첩이 없는 한... 지금 우리나라는 친일파가 문제인 나라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이 아니라 중공이나 북괴에다가 팔아넘기겠지!!)
과학기술과 팩트와 개방을 통해 양 나라가 과거의 앙금을 극복하고 털어냈으면 좋겠다. 침략한 쪽이든 침략당한 쪽이든 죄악이나 병크를 반복하지 말고 서로 손잡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 옛 중앙청 건물은 그 위치에 있지만 않았어도 개인적으로 더 강하게 존치를 주장했겠지만.. 광화문과 경복궁과 청와대를 다 틀어막는 건 좀 아니어서 철거 쪽 입장도 이해를 한다. 할배 대통령도 당연히 그 건물을 없애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2 08:36 2023/04/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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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본공수 61편 납치 사건"은 지난 1999년 7월 23일, 우리나라로서는 아직 씨랜드 화재 참사(6월 30일)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던 시절에 일본 국내선으로 뛰던 보잉 747 대형 여객기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얘는 지역만 생각하자면 우리나라와 별 관계 없어 보이지만, 사건의 발생 배경을 생각하면 본인 같은 사람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가해자는 1970년생으로 나름 똑똑하고 고등학교 시절부터 철덕이었는데.. 대학교 시절에 스케일이 더 큰 항덕으로 전향(!!!)했다. 흐~ 난 대학 말년 때 겨우 철덕에 입문한 케이스인데 말이다. (물론 그 뒤로 무늬만 쬐끄맣게, 명함 내밀기도 민망한 실력이지만 약간 항덕/밀덕 표방을..)

하지만 그 사람도.. 그렇게 늦깎이로 입문했다고 항공사에 승무원이나 사무직, 지상 조업도 아니고 여객기 조종사로 당장 입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비행 시간을 뭘로 어떻게 채우려고? 취미와 직업은 엄연히 서로 다른 영역이다.

결국 그는 대학 졸업 후엔 철도 회사에.. 그것도 열차 운전도 아니고 JR화물에서 상하차 관련 초라한 단순노동 직군에 입사했다. 허나, 음침한 우울증 증세로 인해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며, 업무 실수도 잦았다. 이 때문에 근속연수 2년을 못 채우고 무단결근 잠적하면서 회사를 뛰쳐나와 버렸다. (1994~96)

이 사람은 점점 더 사회성이 오그라들었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혔다. 한때는 자살 시도도 했고.. 집에 틀어박혀서 플심 게임에만 심취해서 살았다.
게임으로는 비행기를 기막히게 조종하면서 아무 사고 없이 사뿐히 이착륙을 시켰다고 한다. 그는 “자기는 똑똑하고 철도/항공에 빠삭한 전문가인데 사회에서 안 알아 준다”는 쪽의 망상에 빠지게 됐다.

그래도 이 사람은 진짜 똑똑하기는 했는지, 컴퓨터 해킹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짓을 현실의 항공업계를 상대로 해냈다~!!
인터넷으로 접한 하네다 공항 내부 구조를 보고는.. 보안 취약점을 발견한 것이다.

“환승을 가장해서 요렇게 요렇게 슬며시 이동해서 출국장으로 들어가면 검사받지 않은 짐을 기내에 반입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걸 착하게 공항과 항공사 측에다가 신고도 하고 “나 잘했죠? 그러니 공항 보안요원으로라도 채용해 주세용~” 라고 제안을 했다. 그러나 이 제안마저도 전부 무시 당했다.

결국 이 사람은 폭주해서 사고를 치고 말았다. 자기가 찾아낸 그 방법대로 기내에다 흉기를 실제로 반입했고, 이륙이 끝나자마자 그 흉기로 여객기를 탈취해 버렸다.
승무원을 위협해서 조종실로 어째어째 들어갔다. 부기장은 내쫓는 데 성공했지만, 기장은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 부득이하게 흉기로 찔러서 살해하게 됐다.

이 사람은 플심으로만 보던 여객기 조종실을 실제로 구경하고 이것저것 조작하는 소원을 이뤘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예비 열쇠로 조종실 문을 따고 다시 들어온 승무원과 승객에 의해 곧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이때는 가해자가 흉기를 내려놓고 조종실 감상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무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저 사람은 악의적인 “다같이 죽자” 자살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문적인 베테랑 747 조종사도 아니었다. 그냥 놔 뒀으면 자기 망상대로 비행기의 성능 한계를 시험한답시고 각종 기기들을 마구 건드리다가 기체를 통째로 추락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다행히 부기장이 다시 비행기를 접수해서 상황을 복구했다. 그 덕분에 비행기가 추락한다거나, 승객이 더 죽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장이 사망한 관계로 비행기는 목적지로 가지 못하고 도로 회항하게 됐다.

가해자는 2킬 이상이 아닌 only(?) 1킬인 점, 그리고 정신병 정황이 감안되어 사형까지는 아니고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살인에다가 500명이 넘게 탔던 여객기를 상대로 하이재킹이니, 평생 감방에서 썩기에 부족함이 없는 너무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
그는 현재까지도 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다. 이 사람의 범행 수법이 알려진 뒤에야 하네다 공항의 내부 구조는 당연히 보안 패치가 행해졌다.

저 사람을 보안 요원 특채까지는 안 시키더라도, 항공 당국이 취약점 신고를 받아들이고 간단히 포상이라도 해 줬으면.. 저렇게 기장이 순직하고 저 청년 인생 쫑나고, 수많은 승객들이 당일 스케줄이 아작나는 불편을 겪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참 재능이 아깝다. 일본은 국가적인 손해를 당하게 됐다.

“안에서 잠그면 밖에서는 절대 못 열죠” -- 영화 <라이터를 켜라> 승객 대사가 문득 생각난다. 이거는 여객기가 아니라 열차 버전이다만..
이 때문에 주인공 허 봉구는 열차 지붕 위를 기어가서 운전실로 잠입하는 미친 짓을 한다. 이때는 경부선 철길이 전구간 전철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설정이 가능했다.

저 사건에서는 쫓겨난 승무원들이 비상용 예비 열쇠를 갖고 있어서 조종실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9· 11 테러 이후에 비행기들이 안에서 열어 주지 않으면 어떤 경우에도 조종실 잠입이 진짜로 절대 안 되게 구조가 바뀌어 있다. 이게 비행기의 한쪽 보안은 강화시켰지만, 반대로 조종사 자체의 일탈 같은 다른 상황에 대한 보안은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끝으로, 이 납치 사건을 보니 먼 옛날 1971년, 우리나라의 F27기 납북 미수 사건도 같이 떠오른다.
이 사건에서는 항덕은 아니고--그 나라 울나라 여건상 강원도 깡촌에서 항덕이 되기란 불가능..-- 그냥 사회 불만 니트처럼 살고 있던 어느 20대 청년이 괜히 북한 가서 팔자 펴고 싶어서(???) 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제 폭탄을 만들어서 국내선 비행기 안에서 난동을 부렸다. 이때는 부기장이 폭탄을 껴안고 자폭하는 바람에 이 사람 한 명만 순직하고 희생됐었다. 범인은 체포가 아니라 그냥 현장에서 사살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16 08:35 2023/02/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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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쪽 얘기 참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네..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며칠 동안 버퍼에 차곡차곡 쌓여서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말이다.. 뭐, 옛날 레퍼토리들도 많이 재탕했다. =_=;;

1.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권리?'랑, 금남로 한복판에서 전 대갈 만세 외칠 '자유?권리?'는 똑같이 보장하거나 똑같이 금지했으면 좋겠다. 회고록의 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파적 적용은 결사반대.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5· 18은 상대방을 오인한 민-군-관 쌍방과실에 가까운 비극이다. 그러니 5 18을 기념하려면 시민과 군경 희생자를 같이 기리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 5· 18 모독죄를 만들고 싶거들랑 천안함 모독죄와 리 승만 할배 허위비방 모독죄까지 같이 넣었으면 좋겠다.

6· 25에 대해서 쌍방과실, 남침 유도, 심지어 북침설까지 주장하며 국가유공자들을 모독하는 건 괜찮은데.. 5· 18은 어떤 이견도 용납 못한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최근에 지 만원 박사가 징역 2년형이 확정된 것도.. 그 사람 말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 천부당만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광주에 북괴군이 아니라 외계인이 침투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어도 실형을 때렸을 건가? 저게 감방 갈 죄이면 광우뻥, 세월호, 천안함 패잔병, 이 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 등등도 전부 처벌했어야 한다.

2. 병적인 집착

  • 별 희한한 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갖고 편집증적이고 변태적인 욱일기 논란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페미년들이 별걸 갖고 성차별이니 여혐이니 시비 거는 것과 비슷하다.
  • 소녀상에다가 옷 입히는 짓도 제발 좀..
  • 멀쩡한 6 25 노래, 멸공의 횃불 노래를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악한 반일 장사꾼들은 하루속히 정체가 탄로나고 X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군의 날 포스터나 행사에 웬 중공군 무기가 등장하고, 국내 철도 개통 포스터나 현수막에 웬 신칸센 그림이 등장하는 꼴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괜히 멀쩡한 일제 시대 대신에 ‘일제 강점기’, 을사조약 대신에 ‘을사늑약’, 한일합방 대신 ‘한일병탄’처럼 피해의식을 더 부추기는 말을 일부러 쓸데없이 만들고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조약 대신에 늑약이라고 바꿔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게 있나? 민족 정신이 고취되고 구한말 선조들의 행적에 실드가 쳐지고 자부심이 생기고 하다못해 국뽕이 생기는 거라도 있나? 일본이 더 나쁜놈이 되고  속이 더 후련해지나?

6 25 사변은 자꾸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라고 바꾸려 하고, 북괴라는 칭호를 안 쓰고.. 그쪽으로는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한없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일본 쪽은 왜 저러는데? 그 삐딱한 잣대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

3. 자유는 좋지만 자유주의는 좀..

나는 닥치고 시장 만능 방임주의는 경계하며, 지나친 자유뽕 성향도 극혐까지는 아니지만 싫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 싫으면 그냥 니가 때려치우고 나가던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 봐 가면서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자기가 제발로 종교 계열 고등학교-대학교에 지원하고 거기 방침에 동의를 하고 입학해 놓고는 거기서 채플 반대, 종교 강요 반대 짓거리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자기가 나가든지 해야지?
그러나 기업들이 다같이 비열한 담합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냥 파업만 욕하면서 귀족 노조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진짜 조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소수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한테 저딴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4. 윤석 열차

그림 한번 잘 그렸네. 고등학생이 벌써 머리에 뭐가 들어가서 저렇게 정치에 세뇌됐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고 치자.
저 열차는 물 먹고 석탄 먹고 칙칙폭폭 더 폭주해서 이전 정권의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 죄악을 다 까발리고 나쁜놈들 죄를 묻고 잡아 쳐넣었으면 좋겠다. 놈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 다음으로 지금 법무부 장관이 바톤 터치를 해서 정권을 물려받으면 우리나라는 21세기 최고의 황금기 중흥기가 찾아올 것 같은데.. 과연 국운이 거기까지 따라 줄지 잘 모르겠다.

5. 북한을 제대로 도우려면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돕고 싶으면 당장 굶지는 않게 밥을 주거나, 중독 치료를 받게 병원에 보내 주든가.. 어쨌든 당장 필요한 현물 서비스를 줘야 한다. 정상적인 경제 관념이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생돈을 덥석 쥐어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개인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의 원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돕고 싶다면.. 그 도움이 주민들에게 직접 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핵이니 미사일 같은 쓸데없는 도발 따위는 꿈에서라도 엄두를 못 내게 해 놓고 도와줘야 된다.
쌀이나 의약품을 줄 건 주더라도 핵 시설 같은 거 짓는 기미가 보이면 드론 날려서라도 폭격으로 조져 버리면서 도와야지..

저 동네는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수괴들 자기만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교통· 통신 인프라조차 없어서 주민들을 돕고 싶어도 물자가 그리로 가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 원문)


그러니 옛날에 원조가카가 괜히 고속도로부터 먼저 닦은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야 제철소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거 바탕으로 자동차나 조선소 만들고.. 할배 때 준비해 놓은 원자력 전문가를 이용해서 한참 뒤에야 원전까지 만들고..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프라가 없으면 만년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새마을 운동도 1960년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늦은 70년대 이후에 시작된 걸 알고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유신 독재 하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6.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

내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북한 컨텐츠도 그냥 있는 그대로 노출해도 되지 않나 싶다. 울나라가 물리적인 경제력 군사력이 북괴한테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로동신문이나 고려항공 웹사이트를 warning.or.kr로 틀어막지 말고 개방하라는 거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여전히 틀어막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까 김 일성 회고록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거 자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 개방되고 풀려나올 필요가 있다.
세월이 흐르니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히틀러 "나의 투쟁"이 해금돼서 서서히 풀려나오니 말이다. 물론 책 내용을 오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많이 달고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는 대신, 북한에다가는 성경이나 전 두환 회고록, 리 승만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을 보급하는 거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이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남한에다가만 북한 방송? 그것도 북한에다가 중계료 왕창 주고 사 와서? 그런 짓거리라면 이건 완전 종북 이적행위이니 나로서는 목숨 걸고 결사반대다.

신앙에서도 주변으로 복음 전파, 전도를 못 하게 하고 너 혼자만 조용히 믿으라는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출애굽기, 다니엘서)
이와 비슷하게.. 남북이 서로 똑같이 선전방송을 안 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남한(+북한 주민)에게 손해인 거래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소위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던 것에 분노하고 그게 정치쑈 사기극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퍼주기만 하고서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 실제로 개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을 진짜로 제대로 도와주고 북한 체제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한 게 없다.

그냥 정치쑈만 벌이다가 연평해전이나 박 왕자 피살 사건으로 뒤통수만 맞았으며, 그 뒤에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0년대 이후로는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만 하는 중..

제발 저것들이랑 통일 수작 벌이지 말고, 그냥 지원 끊고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는 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 안 해도 된다.
이 와중에 "우리 북한은 안 물어요" / "남측이 북한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 "이건 좀 더 도와 달라는 신호" 이러는 정신병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든가, 추방 아니면 공개 처형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쟤들은 "나는 너희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너희는 우리나라에서 포교 금지"를 고수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상호주의를 제일 안 지키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의 무슬림들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필요 이상의 편의는 절대 봐 주지 말고, 세력이 절대로 커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5 08:35 2023/01/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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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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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시아 국가들

서유럽에서 영-프-독이 참 독특한 강대국인 것처럼 동북아시아의 한중일도 참 만만찮게 서로 극과 극이다. 먼저 올림픽 개최 내역을 비교하면..

  • 일본은 수도 도쿄에서 하계 올림픽을 두 번 치렀다(1964, 2020). 동계는 삿포로(1972)와 나가노(1998)에서 총 두 번 치렀다.
  • 중국은 수도 베이징에서 하계와 동계 올림픽을 모두 한 번씩(2008, 2022) 치렀다.
  • 한국은 수도 서울에서 하계(1988), 평창에서 동계(2018) 이렇게 한 번씩 치렀다.

정치-외교 구도

  • 대한민국만이 직접 선거를 통해 유의미한 정권(= 집권 여당) 교체까지 이뤄지는 민주주의 국가이다. 북한, 중국, 러시아야 뭐.. 일본은 저런 동네 정도의 비민주 독재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므흣하고 특이한 면이 있다(자민당)..
  • 한때 러시아는 소련이라고, 중국은 중공이라고, 몽골은 몽고라고 표기하던 시절이 있었다. 다들 1990년대 초에 우리나라와 정식 수교하면서 표기가 바뀌었다. 이때 북한과 나란히 UN 가입도 했고.. ‘북괴’라는 표기가 공식 용어에서 사라졌다.
  • 러시아-우크라이나하고 중국-대만이 뭔가 비슷한 사이인 것 같다.

2. 기념일

  • 일본은 참 신기하게도 1년 중에 낮과 밤 길이가 같아지는 두 날인 춘분이랑 추분을 일부러 공휴일로 만들어 놨다. 오~ 참신한데? 뭔가 이꽈 감성이 느껴진다.
  • 그리고 히로히토 천황의 탄신일인 4월 29일도 '쇼와의 날'이라고 해서 논다. 나름 20세기가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그리운 리즈 시절이라고 이때의 천황의 생일을 공휴일로 정해 놓고 노는 듯하다.
  • 그 반면, 우리나라는 한글날, 즉 자국 문자를 창제한 날을 공휴일로 기린다. 무척 독특하다.
  • 그리고 성탄절이 공휴일. 동북아시아에서 성탄절이 빨간날인 나라도 대한민국 남한밖에 없다.

  • 어린이날이 5월 5일로 우리나라와 같지만, 일본에서는 더 정확하게는 '남자 어린이날'이다. 여자 어린이날은 3월 3일인데, 그래도 공휴일은 남자 버전뿐이다. 신기한 노릇.. 하긴, 외국에서는 어린이날이 아니라 어버이날이 아버지의 날과 어머니의 날로 나뉜 경우도 드물지 않다.
  • 그 반면, 우리나라는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이 세분화된 게 아니라 종교 공휴일이 성탄절과 석가탄신일 모두 존재하는.. 특이한 나라이다.

4월 29일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윤 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터뜨렸던 날이다.
윤 봉길은 천황의 생일에 맞춰 치러진 일제의 전쟁 승리 기념 행사 때 의거를 일으켰다. 그 반면, 그 천황 자체를 암살하려 했던 사람은 이 봉창 의사이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일본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잊지 않는 근성이 개인적으로 정말 대단하고 부럽게 느껴진다. 꼭 달력에 표시하는 날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의사자 이 수현 씨를 20년째 계속 추모하고 있고.. 2005년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 사죄한다는 말이 JR서일본 홈페이지에 아직까지도 박제돼 있고..

이것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일본 항공도 신입사원들한테 JAL123 추락 사고 현장을 방문시키고 사고 잔해를 보여주고 희생자 위령비 참배를 시킨댄다. 1985년에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사고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젊은 세대들한테도 자기 회사의 과거 흑역사 치부를 숨김 없이 보여준다.

우리나라도 저렇게 사고를 친 회사에서 직접 사죄하는 모습을 좀 볼 수 없을까..?? 글쎄, 세월호나 삼풍의 경우, 그 회사가 통째로 망해서 없어져 버리긴 했다만.. 씨랜드 화재 참사는 다시 생각해도 정말 답이 없는 막장 사례인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은 해상 사고를 한번 겪고 나서 전국의 초-중등학교들에 수영장을 설치했다고 그러는데.. 최소한 세월호 난동이나 민식이법보다는 훨씬 더 모범적인 대처인 것 같다.

물론, 걔들도 다 완벽한 건 아니다. 이 수현 씨 사고를 겪었다고 해서 그 많은 역에다 스크린도어를 다 도배하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무리인 듯.. 그리고 후쿠치야마 선 사고 이후로 일본 특유의 그 가혹한 똥군기 이지메 문화가 좀 개선되기는 했나 모르겠다.

글쎄, 저렇게 과거를 잊지 않고 반성하는 것처럼 태평양 전쟁도 좀 반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한다.
허나, 그렇게도 목이 뻣뻣한 일본 정치인들이 그 정도로 애매한 표현으로나마 유감 표명하고 보상해 줬으면.. 반성을 전혀 안 한 것 역시 아니다. 최소한 북괴보다는 훨씬 더 사죄와 보상을 많이 했다.

또한, 정치가 아닌 민간에서는 "침략 전쟁을 사죄합니다. 제암리 학살을 사죄합니다. 우리 일본이 저지른 죄악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만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저희가 머리 박고 있겠습니다" 이러는 양심적인 일본인도 실제로 있다.

독일은 일본과 달리 나치의 죄악을 그렇게도 반성(?)하고 청산했다지만, 걔들도 이스라엘 같은 빽 있는 나라 말고 다른 듣보잡 민족에게 저지른 학살이나 전쟁 범죄는 나몰라라 하고 보상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 결국 이런 건 여전히 힘의 논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영역인 셈이다.

이웃 미국은 "스푸트니크를 잊지 말자, 진주만을 잊지 말자" 그러면서 당했던 것 이상의 설욕을 했었다.
우리나라는? 물론 기술이 발달하고 안전 의식이 발달하면서 사회 시스템이 나아진 건 있지만.. 일제 식민지 이후로, 그리고 "잊지 말자 6 25, 때려잡자 공산당" 이후로 그렇게까지 절대로 잊지 말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이를 악물었던 계기가 별로 없는 것 같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미국은 군인과 소방관을 극진히 존중하고 예우하는 그 특유의 문화도 정말 부럽기 그지없다. 선진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고 분위기가 선진적이다.

3. 일본의 매체

일본은 1980~90년대에 어째 그리도 창의적이고 천재적이고 장인 정신 근성이 담긴(비록 성경적인 배경의 소재는 아니지만=_=) 만화와 영상물, 게임들을 많이 쏟아내면서 문화 산업에서 세계를 석권했는지 경이롭기 그지없다. 내가 일본 토박이었어도 이런 건 좀 국뽕을 해도 될 것 같다.
물론 지금은 우리나라도 역량이 굉장히 많이 향상돼서 일본의 위상이 옛날 정도로 절대 지존이지는 않다. 허나, 저런 걸 옛날에 최초로 만들어냈다는 건 보통일이 아니다.

(1) 모 일본 AV의 BGM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TOKYO-HOT (☞ 듣기), =_= 그리고 모탈 컴뱃 OST BGM은 뭔가 비슷한 성격의 음악 같다. =_=;; 병맛스럽지만 그래도 완성도 높고 잘 만들어진 경쾌한 테크노-_- 음악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일본이 성에 대한 묘사가 그렇게도 개방적이고 야동 AV가 엄청 발달(...)했다지만.. 정작 일본 내부는 가정이나 결혼, 성 관련 관념이 아주 보수적이다. 듣기로는 일본 여자가 한국 여자보다 훨씬 더 다소곳하고 예의 바르고 착하고 신부감으로 더 좋다고 그럴 정도랜다.;;

(2) 한동안 에네르기파와 파동권..;;이 헷갈렸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전자는 드래곤볼의 장풍이고 후자는 스트리트 파이터의 장풍이었다. 다들 1980~90년대를 풍미했던 명작 일본 만화와 일본 게임이었다. ㅋㅋㅋㅋㅋ

(3)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기록 영화. (☞ 보기)
작년에도 한번 소개한 적이 있었지만 보면 볼수록 대단하고 감격스럽고 부러우니 복습 차원에서 또 소개한다. 누군가가 우리말 자막을 넣어 주셨다.
도쿄는 1963년에 이미 저런 대도시가 돼 있었구나..;; 우리나라 서울은 아무리 일러도 1970~80년대는 돼야 저런 모양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같았으면 '6 25 사변의 참화를 극복하고'라고 말했을 텐데.. 일본이니까 '2차 세계 대전의 참화를 극복하고'라고 말한다. 역시 이런 게 문화 역사 배경의 차이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량 개발과 선로 건설을 전부 100% 자체 기술로 해냈다니.. 그것도 그 까마득한 옛날에? 그리고 개발 과정을 이런 고화질 컬러 영상으로 남겼다니.. 저때 이미 열차 집중 제어 장치(CTC)와 장대 레일을 취급했다니..

컴퓨터나 화면 장비, 각종 글자와 계기판을 봐야만 완전 옛날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아울러, 1960년대이니 비록 고속철도이지만 저 때는 아직 전부 콘크리트 노반은 아니고 재래식 목재 침목과 자갈 노반이 쓰였다.

(4) 도쿄 올림픽 픽토그램 (☞ 보기)
일본은 2020 올림픽 예고편? 티저 영상에서부터 약 빤 티를 철철 내더니, 올림픽이 개막한 뒤에는 50여 개에 달하는 운동 종목들의 픽토그램을 실사 재현한 근성 영상을 선보여서 또 세계를 놀라게 했다.

컴퓨터 아이콘이라는 게 없던 1964년 올림픽 때 저렇게 특징만 간소화된 그림으로 어떤 운동 경기나 장소를 나타낼 생각을 했다니, 쟤들은 디자인 내지 UX 쪽으로도 그때부터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저 영상도 보면 애니메이션, CG, 실사가 마구 뒤섞이면서 정말 현란하고 정교하기 그지없다.;;.

4. 20세기 초중반의 항일물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국뽕 항일물이라고 하면 으레 1920년대 초중.. 그나마 독립군이 있고 의열단 투사들이 활동하던 시절이 제일 때깔 나고 간지 나고 영화를 만들 소재가 제일 많다. 그래서 2010년대 중후반에 쏟아져 나왔던 암살, 밀정, 봉오동 전투, 심지어 엄복동도 다 이 시기를 다룬다.

그 반면, 중국에서 만들어지는 국뽕 항일물은 상하이 사변에 중일 전쟁 어쩌구가 배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1930년대이고 넉넉하게는 1940년대 초까지 가야 된다.

이때는 정작 우리나라는 윤봉길 이후로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이 거의 전멸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거리가 별로 없는 시기이다. 말모이(1940년대의 조선어 학회)처럼 성격이 많이 다른 영화가 하나 나왔을 뿐이며, 얘는 역사왜곡 각색이 엄청 많다. 실제 역사 다큐가 순수 쏘고기라면, 얘는 스팸도 아니고 거의 혼합 소시지 정도의 위치밖에 못 된다.

그리고.. 중국 국뽕 항일물에는 쿵푸 무협지가 꼭 들어간다. 일본군이 쳐들어왔다가 무림의 고수 한 명에게 쳐발리는 오글거리는 판타지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문화 배경의 차이가 있구나..!!

요즘 들어 유튜브 자동 완성에 왜 자꾸 이런 영상들이 뜨는지 모르겠다. ㄲㄲㄲㄲ 일본이 스시를 세계에 퍼뜨렸듯, 중국은 소림사니 어쩌니 하면서 자기가 모든 동양 무술의 원조라는 식의 이미지메이킹을 꾸준히 한 모양이다.

한국과 중국이 저렇게 유치하게 열폭하는 동안, 정작 원쑤 나라 일본은 자기들의 1920년~1930년대를 매체에서 어떻게 묘사할까?
2 26 쿠데타를 영화로 만들기는 했다고 들었는데, 그것 말고 뭐 영화화할 만한 소재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대동아 공영권에 덴노 헤이카 반자이" 이러는 극우 국뽕물이 당연히 있겠지만,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주류는 절대 아니라고 들었다.

5. 차이점

(1) 일본은 국력이 너무 강해서 사고를 단단히 쳐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자위대)
그러나 한국은 국력이 약한 주제에 자기들끼리도 갈라졌고,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되었다. (징병제)

(2) 그리고 미국에서는 개인의 총기 소지와 관련된 헌법을 고치겠다고 난리인 반면,
일본은 국가의 군대 소유와 관련된 헌법을 고치겠다고 난리이구나~!

(3) 일본의 철도는 기존선이 협궤이고 고속철(신칸센)은 표준궤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철도는 기존선이 광궤이고 고속철(AVE)은 표준궤이다.

과거에는 군사 안보상의 이유로 인해 철도 궤간을 이웃 나라와 일부러 호환되지 않게 만들 정도였지만.. 오늘날은 이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담배에 대한 인식이 극과 극으로 바뀐 것과 비슷하다.
증기 기관이 발명되고 산업 혁명 근대화가 막 진행되던 시절의 철도와, 20세기 중후반의 철도는 위상과 역할과 기술 수준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4) 일본은 궤간의 차이 때문에 신칸센과 일반열차가 완전히 분리됐다. 고속선이 대도시의 도심 구간까지 고가 형태로 놓였다. 기존선은 화물이나 단거리 완행 연계로 싹 개편되었다.
그러나 한국과 프랑스는 모든 철도가 표준궤이기 때문에 고속철이 기존선과 직통 운행을 많이 한다. 그리고 기존선 일반열차도 서울-부산 장거리를 뛰는 게 여전히 남아 있고, 장거리 고속버스도 장사 잘 되고 있다.

역할 분담이 엄밀하게 되지 않은 것은 서울 시내버스들이 파랑-초록-노랑 역할 구분이 개편 당시에 의도했던 것만치 갈리지 않은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2/11/20 08:36 2022/11/2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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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잘 알다시피 현재까지 지구의 전 인류 역사를 통틀어 자국민 거주지에 핵폭탄을 쳐맞아 본 유일한 나라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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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기란 엄청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일인데 1945년 8월경의 일본은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단순히 침략 전쟁을 벌이고 점령지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평범한(?) 악행만으로는 절대 그렇게 되지 못한다.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제때 항복 안 하고, 총체적으로 멍청하고 병신같은 뻘짓만 골라서 하면서 천조국한테 개겼기 때문에 저 지경으로 참교육을 당한 것이었다. 지 무덤을 파면서 매를 벌었다.

1. 원폭이 떨어진 곳

잘 알다시피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였다. 모두 후쿠오카 일대에 있으며 일본 본토의 완전 남서쪽 끝 지방이다. 수없이 많은 소이탄 폭격을 당해서 먼저 잿더미가 됐던 도쿄하고는 위치와 방법이 딴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거기 근처에 있는 고쿠라, 그리고 좀 더 동부의 교토도 목표물 후보로 거론됐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비껴 가게 됐다.

2. 원폭의 위력

원폭 이전에 인류 역사상 가장 대규모 폭발 사고였다고 여겨지는 건 1917년의 캐나다 핼리팩스 대폭발이었다.
거대한 화물선 한 척에 실려 있던 화약이 화재로 인해 몽땅 폭발하면서 TNT 2.9kt 정도의 위력이 발생했다고 추정된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으며, 바닷가에서 불구경 하러 모였던 사람들이 파편과 잔해에 맞아서 사망자만 2천여 명이 발생했다.

그랬는데 우라늄235 기반의 히로시마 원폭의 폭발력이 TNT 16kt, 플루토늄238 기반의 나가사키 원폭의 폭발력은 TNT 21kt 정도로 여겨진다. 두 원폭 모두 무게는 그냥 4톤에서 4.5톤 사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그 뒤에 0이 3개가 추가되고도 남는 사기적인 에너지가 나온 셈이다.

배수량 3000여 톤급 화물선에 가득 실린 일반 폭약 vs 대형 폭격기에 실린 4.5톤짜리 핵탄두 달랑 하나의 위력 차이가 이 정도이니.. 원폭이 떨어졌던 당시에는 "이 폭탄은 30여 년 전, 핼리팩스 대폭발 위력의 수 배.." 이런 식으로 기사가 나갔었다. 지금이야 어디서 핵실험을 하면 "히로시마 원폭의 n배" 이렇게 비교 기사가 나가겠지만, 저 때는 헬리팩스가 기준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핼리팩스는 타이타닉 호의 침몰 지점과 꽤 가까이 있어서 5년 전엔 구조 본부가 설치되었으며, 사망자의 일부가 여기에 매장되기도 했다. 어째 1910년대에 굵직한 사건 두 건과 연루되면서 유명해졌다.

3. 원폭이 떨어진 방식

1940년대에는 아직 지금 같은 미사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음속 왕복 엔진 폭격기가 적진의 상공까지 직접 날아가서 폭탄을 떨궜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조국은 일본과 더 가까운 태평양의 섬들을 점령했으며, 1944년엔 B29라는 걸출한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까지 개발되어 드디어 일본 본토를 직접 폭격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열악하던 둘리틀 특공대 시절처럼 깜짝쇼만 한 뒤에 비행기를 버리고 불시착하는 게 아니고, 살을 많이 뺀 함재기들이 평타 정도 폭격을 하다가 근처의 항공모함으로 허겁지겁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더 크고 묵직한 폭격기가 장거리 원정을 가서 왕창 폭격을 퍼부은 뒤에 공간 넉넉한 섬 비행장으로 귀환한다는 것이다.

뭐, 이러고도 일본이 항복을 안 했으면 나중엔 연합군 육군까지 본토에 상륙해서 폭격이 아니라 포격을 퍼부었을 것이다. 나치 독일의 베를린이 함락됐을 때처럼 말이다.

4. 비행기들이 출격 방식

원폭을 떨군 폭격기는 북마리아나 제도의 '티니안 섬'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발진했다. 얼추 괌 근처라고 생각하면 된다.

폭탄 투하 한 시간쯤 전에 먼저 정찰기가 홀로 날아서 투하 지점의 날씨 같은 걸 최종 체크했다. 그 다음으로 폭격기 본체, 카메라맨이 탄 촬영 비행기, 계측기를 실은 비행기가 같이 날아갔고.. 폭탄을 투하한 뒤에는 비행기 세 대가 모두 폭발 예정지로부터 급선회· 급강하하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파일럿들은 이런 기동 훈련을 반복해서 받으면서 연습했다.

폭탄은 여객기 순항 고도에 맞먹는 거의 9km대 고도에서 떨어져서 히로시마 little boy 기준, 570m대 상공에서 터졌다. fat man도 뭐 대등소이하다.

히로시마에 간 폭격기와 나가사키에 간 폭격기는 같은 B29 기종이고 같은 지역에서 발진하긴 했지만 서로 다른 기체였다. 전자의 애칭은 Enola Gay이고 후자는 Bockscar인데.. 아무래도 '최초'의 타이틀을 획득한 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유명하다.
두 폭격기의 승무원도 다 달랐다. 동일한 기체나 동일한 승무원이 두 도시에 원폭을 동시에 떨구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5. 원폭 재료의 수송

폭격기로 원폭을 떨어뜨리려면 그 전에 원폭을 폭격기의 발진 기지로 실어나르기도 해야 했다. 단, 보안을 위해 완제품(?)이 아니라 재료와 부품만 날랐고, 조립은 출격 직전에 기지에서 행해졌다.

고농축 우라늄을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티니안 섬까지 수송한 건 순양함 USS 인디애나폴리스 호였다. 얘는 기밀 유지 명목으로 호위함 하나 없이 살금살금 몰래 항해하며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 우리는 에놀라 게이 폭격기를 기억하기에 앞서 인디애나폴리스 함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배는 그 다음 임무 수행을 위해 필리핀 레이테 섬으로 항해할 때도 호위함 없이 위험하게 다니다가.. 1945년 7월 30일, 인근의 일본 잠수함으로부터 어뢰를 맞고 격침 당해 버렸다.

이제 일본은 전쟁에서 다 졌고 바로 며칠 전에 포츠담 선언 최후통첩까지 나갔겠다, 우리 천조국한테 위험 요소 따위 없을 거라고 상부에서 함장의 요청까지 묵살하면서 너무 방심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종전 직전에 이렇게 순양함 한 척을 허무하게 잃고 말았다.

그런데도 미 군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인디애나폴리스 측의 구조 요청에도 제대로 대처하지 않아서 수많은 병력을 망망대해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래 놓고는 오히려 함장을 자기 책임을 온전히 수행하지 않고 배와 부하들을 날려먹은 패장으로 몰아붙이면서 진급을 누락시켰다. 그 함장은 말년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하고 말았다.

먼 훗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잠수함 함장이 직접 "인디애나폴리스 측은 특별히 부주의하거나 잘못한 게 없습니다. 우린 그 배가 어떤 기동을 하더라도 공격해서 격침시킬 수 있던 상태였습니다"라고 인증했다. 그리고 여러 증거들이 더 밝혀지면서 함장은 클린턴 대통령 시절이 돼서야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인디애나폴리스가 아직 우라늄을 싣고 있던 상태에서 격침됐다면...? 햐~ 이건 "아폴로 13호가 달 착륙선을 분리시키고 난 뒤에 폭발했다면?" 같은 급의 비극이 됐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루스벨트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을 당한 뒤에 격노해서 어떻게든 일본을 상대로 보복하라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원폭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그에 비해, 저 그림에서 껄껄 웃고 있는 후임 트루먼 대통령은 취임한 뒤에야 원폭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루스벨트보다 더 적극적으로 원폭 사용을 지지하고 승인했었다.
허나, 그는 훗날 6· 25 때 한반도에서 원폭을 또 동원해서 북괴 중공을 몰아내자는 군부의 제안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상이다. 이 글의 요지는 인류 최초의 핵무기 투입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일이 아니며 그 전에 치밀한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천조국은 이런 원폭을 떨구기 전에 핵 실험까지 미리 해 봤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 주 모처의 사막에서 나가사키 원폭과 비슷한 규모의 플루토늄 폭탄을 터뜨려 본 것이다. 그러니 쟤들은 자기들이 터뜨리는 폭탄이 위력이 얼마나 사기적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도 아니었다.

물론 이 핵 실험은 진행 당시에는 극비로 부쳐졌고 종전 이후에야 비밀이 풀렸다. 어디서 뭐가 터졌다는 낌새가 신고된 건 모 공군 기지의 탄약고가 벼락 맞고 통째로 유폭해 버렸는데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는 식의 거짓말로 무마시켰다.
'트리니티(삼위일체) 실험'이 바로 냉전 이전에 행해진 전무후무 유일한 핵 실험 기록이 됐다.

* 원폭을 맞은 것 갖고 굳이 죽은 일본 사람들을 희화화하면서 '잘 죽었다, 쌤통이다' 이러는 거야 인간말종 짓이다.
그러나 지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입 싹 씻고 원폭 맞은 불쌍한 피해자 행세만 늘어놓는 건 더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짓일 것이다.;;

예전에 본인은 나치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의 사진 기록에 대해 소개했던 적이 있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이 들어와서 찍은 사진 말고.. 쟤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 내부를 목숨 걸고 찍은 진귀한 사진은 딱 네 장이 전해진다고 말했었다. (☞ 이전 글 보기 )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그것처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나서 찍힌 제일 따끈한(폭발 이후 겨우 3시간 남짓 경과) 현장 사진은 딱 5장이 전해진다고 한다. 마츠시게 요시토(1913-2005)라는 일본인 기자가 찍은 건데.. (☞ 보기)
이건 뭐 혐짤은 전혀 없고, 평범한 전쟁 폐허 속에서 흙먼지 뒤집어쓴 사람들이 거지꼴로 앉았거나 줄지어 선 모습이 전부이다. 훨씬 더 끔찍한 혐짤 급의 시체 사진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찍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일본을 접수한 미국에서는 원폭 피해자의 참상을 묘사한 글이나 현장 사진은 절대로 언론을 타지 못하게 아주 강압적으로 검열하고 찍어눌렀다고 한다. 반전 반핵 여론이 조성되지 않게 할 의도였지 싶다. 그래서 저 사진들도 GHQ가 일본에서 철수한 1952년쯤 돼서야 공개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간지나는 버섯구름 사진만 매스컴을 잔뜩 탔을 뿐, 버섯구름 아래에서 벌어진 일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버섯구름조차도 위에서 보다시피 히로시마 껀 영 별로이고 나가사키 것이 훨씬 더 멋있으니 그것만 사골이 되도록 인용되고 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2/08/05 08:35 2022/08/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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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71년

(1) 조선에서는 1871년은 무려 천조국과 맞서 전투를 벌인 '신미양요'가 벌어졌던 해이다(6월).
당연히 절대적인 군사력으로는 조선이 택도 없이 쳐발렸다. 상대방은 그 시절에 벌써 초보적인 잠수함과 철갑선과 철도와 기관총, 후장식 저격총을 굴리면서 내전을 벌였던 미친 나라이다. 어디 조선 따위가.. -_-;;

전사자 교환비는 기관총 소지한 문명국 vs 화살이나 딱총 소유한 미개국 같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조선 병사들은 뭔 신념이 있었는지, 무식하면 용감하다 급으로 탈영병 한 명 없이 사기가 충만했으며, 정말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총알이 다 떨어진 뒤엔 돌 던지고 흙을 뿌리기라도 하면서 양키 코쟁이들한테 끝까지 저항했다.
포로로 잡혀 결박당해도 밥과 물을 일체 얻어먹지 않았으며.. 목을 드러내 보이면서 차라리 찌르라고, 자길 죽이라고 길길이 악을 쓰고 날뛰었다. 아니, 포로로 잡히기도 전에 한강으로 뛰어들어 줄줄이 자결한 병사 역시 부지기수였다.

이건 어찌 보면 70여 년 뒤의 태평양 전쟁 때 세뇌된 일본군이 미군한테 한 행동과도 비슷했다. (음 그래도 반자이 어택까지는.. -_-;; )
남북전쟁에서 죽을 고생을 하다 여기까지 온 미군 베테랑들도 조선군의 이 병맛 같지만 너무 진지하고 숙연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렇게 맹렬히 저항하지, 지정학적으로 너무 멀고 별 메리트 없지.. 자기들도 남북전쟁 폐허를 수습하느라 정신없지..
여기는 천조국이 보기에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어 보여서 쟤들도 그냥 철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자뻑하여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하게 된다.

그 뒤로 천조국은 조선을 결코 직접 침략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침략할 가치를 느끼지 않으니 그냥 이웃의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걸 걍 묵인하기로 입을 맞춰 버렸을 뿐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2) 자 다음으로, 서양에서 1871년은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서 패배한 해이다(5월).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뜯기고 알자스· 로렌 지방을 빼앗겼으며, 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으로도 언급된 그 유명한 전쟁 말이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치욕적인 흑역사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엎치락뒷치락 악연은 훗날 1차 세계 대전 때 반대로 독일이 져서 천문학적 배상금크리, 그러다가 2차 대전 때는 또 반대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서 비시 프랑스 괴뢰 정부가 등장하는 식으로 더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에 세계 질서가 개편된 뒤에야 두 나라는 표면적으로 화해하고 협력하게 됐다.

1871년이 프랑스의 역사에서 더욱 특이한 시기인 이유는.. 저런 혼란스러운 패전 시국을 틈타서 '파리 코뮌'이라는 사회주의/공산당 정권이 수도 파리를 점령하고 70일 남짓 집권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그 당시로서는 굉장히 진보적인 정책을 많이 표방했었지만, 공산당 특유의 과격한 과거 단절 노선은 어딜 가지 않았다. 오래된 프랑스 문화재 건축물들이 이때 많이 박살났었다.
또한, 혁명의 나라, 미터법의 원조 나라 아니랄까 봐, 시계와 달력까지 10진법 기반으로 고쳐서 시행했던가 보다. 무엇이든 과거 레거시와는 싹 단절이었다.

하지만 얘들은 오래 못 가고 무력으로 토벌됐다. 이때도 과거의 프랑스 대혁명과 자코뱅 공포정치(1794), 홍 경래의 난(1812), 갑신정변(1884), 청나라 태평천국의 난(1864), 우리나라 6 25 부역자 인민재판(195x) 따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잔혹하고 야만적이고 끔찍한 피바다가 벌어졌다. “뒈져라 빨갱이!” 우리나라만 이념 갖고 서로 죽고 죽이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공산당 인터내셔널가가 이 파리 코뮌의 투쟁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니 1871년은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관점에서 꽤 흥미로운 해였다.
프랑스는 아무래도 영국 독일 미국하고는 동네 물이 좀 다르고, 러시아와 비슷한 기운이 있긴 해 보인다.;;
그나저나 2024년 올림픽이 파리에서 열릴 예정이군..

2. 1894년

그 다음으로 본인이 주목하고자 하는 연대는 1894년이다.
찬송가 중에서 '내세, 천국'을 노래하는 곡들은 크게 내 인생의 끝(사후 세계) 내지 이 세상의 끝(종말)으로 세부 주제가 또 나뉜다.
그냥 '육신의 장막을 벗고 주님 만나 보겠네, 셋째 하늘에 올라가겠네' 이런 건 내 인생의 끝이지만.. '나팔 소리, 새 예루살렘, 들려 올라감, 몸이 변화됨, 예수님 다시 오심' 이런 건 명백히 후자이다.

전자는 그나마 장례 예배 때도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불릴 수 있다. "예수 믿어서 구원받고 죽어서 천당 간다" 이거야 기독교라면 이견이 없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는.. 교파마다 해석이 차이가 나는 민감한 분야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교파 찬송가에 선뜻 수록하기가 참 난감하다.

우리나라 찬송가에서 드물게 종말을 다루는 곡의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나님의 나팔소리 James. M. Black (1856-1938) Milton
  • 오랫동안 고대하던 James. M. Kirk (1854-1945) McPherson

(주의 신부인 교회가 먼저 들려 올라갔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천년왕국이 임하는 건데.. 왜 "천년왕국이 이를 때" 들려 올라가는 걸까?? 후자곡은 가사가 무슨 생각으로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ㄲㄲㄲㄲ)

그런데 위의 두 곡은 작사· 작곡자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가사가 비슷하고 리듬도 비슷하고, 작사· 작곡자도 이름이 묘하게 비슷한 데다 거의 동시대를 산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이 두 곡은 모두 1894년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 시기에 우리 조선의 사정은 어땠는가??
갑오개혁, 청일 전쟁, 전 봉준의 농민군 항쟁, 우금치 전투..;;
개막장 탐관오리가 백성 등골을 빼먹지, 나라는 남의 나라 전쟁터가 됐지, 왕이라는 작자는 외국을 끌어들여서 민란을 진압하고 자국민을 학살했지..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끔찍한 헬게이트에 혼돈과 환란 그 자체였다.

그 동안 천조국에서는 저렇게 성도들이 변화될 것이고 예수님이 다시 올 것임을 노래하는 찬송가가 만들어지고 발표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선교사가 이 꿈도 희망도 없던 조선 땅에 와서 복음 전하고 학교 짓고 병원을 만들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누와 성경이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말이다.;;;

1800년대 말은 세계 열강의 관점에서는 잘 아시다시피 벨 에포크, 한창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팽창하던 리즈 시절이었다. 물론 그런 나라의 자국민이라도 로동자로 저렴하게 착취 당하던 계층이라면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피식민지 사람들의 처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일본만 해도 이때는 근대화 잘해서 아주 잘나가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자국 모습을 묘사한 작품들은 묘하게 서양 냄새가 많이 나고 희망적이고 몽환적이다. 찬송가 하나만 생각하다 보니 조선하고는 어쩜 이렇게 극과 극이었나 하는 생각이 덩달아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7/18 08:36 2022/07/1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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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일 전쟁과 경부선 건설 시절

1900년대 초의 경부선 철도 건설은 러일 전쟁과 거의 같은 타임라인이다.
그런데 일본군 군복이 아직 블랙이었고-_- 러시아를 완전히 쫓아내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기 전이던 이 시절엔..
미래 판도가 어찌 될지 모르니 쟤들도 조선을 생각보다는 신사적으로 대했다.

애초에 이때의 일본군은 40여 년 뒤 태평양 전쟁 때의 그런 미쳐 폭주하던 일본군이 아니었다.
조선 땅을 거쳐 진군할 때도 민폐 안 끼치고 보급품을 꼬박꼬박 제값 주고 사 먹었다!
러일 전쟁 때 여러 조선 지배층 및 지식인들이 **괜히 일본을 응원했던 게 아니다**. 이건 팩트다.
이 인간들이 반민족 친일파 매국노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러시안스키들보다는 인종적으로 더 가까운 일본 편" 같은 논리일 뿐이었던 거다.

그러나 1905년, 경부선 완공되고 러일 전쟁이 끝나거나 최소한 일본의 승기로 기울고, 을사조약까지 맺어진 뒤에야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인)을 하대하기 시작했다.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생기고, 일본이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는 현타가 뒤늦게 전해진다.
을사/정미의병이 조직돼서 최후의 발악을 해 보지만 끝내 다 토벌되고 무장해제됐다.

오죽했으면 몇 년 뒤에 안 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동기· 배경도 한 줄로 요약하면 딱 이거다.
"일본이 우리의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네, 이토 이 비열한 자식~!" 더 말이 필요한가?

"조선총독부 토지 조사 사업"이라 하면 곧바로
홍보도 제대로 안 한 채 눈곱만치 짧은 기간 동안에 절차대로 신고 안 한 땅은 몽땅 날강도처럼 몰수 국유화 → 농민들 몽땅 땅 뺏기고 소작농으로 전락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다.

그런 것처럼 흔히 경부선 철도 건설이라고 하면 곧바로
"대대로 전해지던 땅을 강제로 헐값 처분 → 조선인 노동자를 저렴하게 강제(!!) 징용해서 착취 → 철도 건설 반대 사보타주 하던 항일분자들 총살 처형.." 이런 게 떠오르는데..

과연 그게 그림의 전부일까..??
경부선 철도 건설 여건이 벌써부터 무슨 40년 뒤에 일본 탄광이나 남태평양 섬에서 교량/비행장 건설과 같은 여건이었을까?
그건 일단 물음표로 남겨 두고 자료를 더 찾아 봐야겠다.

2. 관동 대지진 학살

일제 시대 때..
항일 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가 지배자로서 그에 상응하는 탄압· 응징이나 보복을 한 거,
전쟁 때문에 조선인을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고 뻘짓 한 거, 물자 착취한 거,
이런 정치· 군사· 경제적인 요인을 싹 빼고도 제일 실드의 여지가 없이 일본이 치명적인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고 욕 쳐먹어야 하고 사죄하고 유족 후손에게라도 배상해야 하는 건 관동대지진 대학살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지들이 자연재해를 겪은 걸 갖고, 또 조선인들한테 켕기는 게 있어 놓으니 "지진 시국을 이용해서 조선인들이 반정부 폭동을 일으킨다, 우물에 독을 탄다" 이런 유언비어 정도는 그나마 일말의 현실성이라도 있고 양반이다. 그런데..
"조센징들이 일본에 지진 좀 일어나라고 매일 축시의 참배를 벌였다, 조센징들이 모두 우리 혼슈 땅을 영차영차 밀고 흔들어서 지진을 일으켰다.."

이건 뭐.. 세월호 7시간이나 닭근혜 굿판, 광우뻥 미친소, 천안함 자침설을 능가하는 미친 짓거리 아닌가?
그때 자경단 폭도들은 항일 운동도 안 하고 그저 평범하게 먹고 살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붙잡아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한 방법으로 학살극을 벌였다. 죽창으로 찌르고 사지 자르고 불태우고..

근처의 강이 며칠 동안 시뻘건 피로 물들었고, 조선인들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일본 경찰서에 제 발로 도망쳐 와서 제발 유치장 안에라도 집어넣어서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부탁을 했을 정도였다.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미약한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는 전무하다. 이것들이 정신력이 부족하고 군기가 빠져 놓으니 그딴 황당한 유언비어 선동에 넘어가는 것이다. 너희 일본인들은 정신 차려라잉~" 그렇게 훈시하는 장군도 있긴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권력은 정작 이런 상황에서는 조선인들을 그닥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정말 심각한 사항인데 그 어떤 반일 장사꾼도 이걸 진지하게 재조명 거론한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정치색이 너무 없어서 별로 선동할 거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반일정신병을 매우 혐오하고 공격하지만, 한편으로 과거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도 어지간한 반일정신병자들보다 더 많이 정확하게 자세히 알고 있다. ㄲㄲㄲㄲㄲ

3. 2 26 쿠데타

1936년, 일본의 2. 26 쿠데타에 대해 들어보니 꽤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국사나 심지어 세계사에서는 접할 일이 없었던 사건이니 말이다.
구 일본제국에서 육군과 해군이 사이가 극히 안 좋았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만, 육군 안에서도 황도파와 통제파라는 두 파벌이 나뉘어서 서로 사이가 안 좋았다.

쉽게 비유하면 통제파는 좀 기득권 수구 세력에 가까웠다. 그러나 황도파는 진보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썩어빠진 것들 다 갈아엎자, 우리도 잘 살아 보자. 특히 천황 폐하께서 얼굴마담만 하면서 간신배에게 놀아나지 말고, 용단을 내려서 우리를 직접 통치해 달라” 이런 걸 주장했다. 그 당시 일본 사회도 모든 계층이 마냥 행복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황도는 누런 복숭아가 아니라 황제의 길을 뜻하는 皇道.. ㄲㄲㄲ

그랬는데 여차여차 하다 보니 황도파 장교들은 자기 뜻을 펴고 실현하려면 좀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항일 독립 운동을 하듯이 일제히 궐기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녹치 않았으며, 심지어 천황조차도 그들의 기대와 달리 쿠데타 진영에게 전혀 협조해 주지 않았다.
“아무리 짐에게 충성을 바치네 어쩌네 하더라도, 명령 없이 군이 움직인 것부터가 짐에 대한 하극상 반역이다. 더구나 고관대작들을 살해까지 해?? 역적노무 색히들 당장 꺼져”라고 응수하면서 군부에다가도 강경 진압을 명령했다. 히로히토 천황도 이럴 때는 꽤 단호박 같은 구석이 있었다.;;

황도파는 이상은 좋았을지 모르지만 방법론이 너무 서툴렀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장렬히 자폭하고 와해되고 소멸해 버렸다.
덕분에 군부는 통제파가 아무 경쟁자 없이 완전히 접수하게 됐는데, 통제파의 수장이 바로 도조 히데키.. 일본은 그때부터 더욱 군국주의로 브레이크 고장 난 내리막길 버스처럼 폭주하게 됐다. 이거 뭐 일본판 8월 종파 사건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강 우규 의사가 1919년 가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던 ‘사이토 마코토’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었다. 3. 1 운동 이후로 문화 정책을 폈다는 그 사람 말이다.
사이토는 훗날 일본 내각총리대신으로 영전을 받아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강 의사의 의거 이후로 17년이나 뒤, 바로 저 2. 26 쿠데타 때 총을 수십 발 맞고 벌집이 되어 죽었다. 그래도 이미 70대 후반의 나이였으니 요절은 아니었다.

일제 시절 동안 맨날 일제가 조선인을 탄압했네 착취했네 어쩌구뿐만 아니라, 적들의 소굴/본부 내부에서는 어떤 변화와 갈등이 벌어지고 있었는지를 아는 것도 역사의 전체 그림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일본군 위안부 문제

우니나라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거론한다면 다음 세 가지만 집중적으로 공략하면 될 것이다.

  •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납치해서 끌고 갔는가? 혹은 공장 취업, 취학 등으로 속이고 사기를 쳐서 모집했는가?
  • 미리 계약했던 정당한 화대를 주지 않고 착취했는가? 위생 보건 복지가 심각한 막장이었는가?
  • 패전으로 인해 철수· 후퇴할 때 증거 인멸을 위해서 여인들을 집단 학살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인멸하려 한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중일/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국민과 아군한테도 반인륜 범죄를 잔뜩 저지른 미친 집단이었다는 걸 본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위안부의 처우도 극악이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 것 자체는 정당한 가설이다. 그 가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든가 아니면 부정 반박하면 된다.

허나,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방식만 문제삼으면 되지, 무슨 위안부 자체가 인류의 전쟁 역사상 일제만의 최초· 독보적인 죄악인양 헛소리를 해댈 필요는 전혀 없다.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인간의 유구한 역사가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위안부 할머니한테 빨대 꽂아 있는 사악한 반일 장사꾼 위선자 사기꾼도 당연히 걸러내고 쳐내야 한다. 걔 주변에 있다가 자살 당했다는 어떤 사람의 사인도 철저하게 진상 규명해야 한다. 걔야말로 생계형 친일파 김 뭐시기보다 더 나쁜 놈이다.

일제 초기의 토지 조사 사업도 그렇고, 말기의 강제 징용(?) 노동자도 그렇고..
불법 갈취 착취가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 착취나 피해의 정도, 강압/강제성은 우리가 쌍팔년도 반일 항일 국뽕 패러다임대로 배웠던 것보다는 덜했다는 것이 여러 정황상 차츰 입증되는 추세이다.

이런 걸 남이 바로잡기 전에 우리가 먼저 바로잡아야 다른 팩트까지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식인 호랑이를 동물 보호 운동가들이 앞장서서 사냥하고 제거해 줘야 다른 야생 맹수들을 보호하자는 명분이 설 수 있듯이 말이다.

5. 6 25 때 일본의 기여

징병제를 시행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자에게 집총 대신 시킬 만한 대안 작업으로 지뢰 제거가 즐겨 거론되곤 한다. 엄연히 군사 활동이지만 남을 죽이는 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자기만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어렵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 25 사변 중에 일본이 딱 정확하게 그런 일을 했다는 건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일본이야 그 당시엔 UN 회원국도 아니고, 한창 연합군(=미군) GHQ로부터 참교육을 받으며 자숙과 반성 중이던 일개 패전국일 뿐이었다.
그러니 UN군 명목으로 전투병 파병 같은 건 정말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이라면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부터가 “우리는 괴뢰군과 싸우기 전에 왜놈부터 먼저 쏴 죽여 버릴 것이다”라고 맹렬한 거부감과 적개심을 표현한 바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한국과 적당히 가까운 섬나라로서 UN군의 병참 기지 역할을 하기에 너무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냥 놔 둘 수만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일본을 적당히 구슬리며 투입시킨 일 중 하나가 기뢰 제거였다. 동해 바다에서 북괴가 매설한 것들 말이다. 굉장히 적절한 활용이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과 일본 모두 인정하기를 민망해하고 꺼리지만, 일본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6 25 때 우리나라를 전혀 안 도와 준 건 아니었다. 당장 개전 초기에 은행을 털린 뒤에 돈을 다시 만들어서 찍어내는 시급한 임무도 일본에서 진행됐다.
쟤들이 남의 전쟁 덕분에 물자 많이 팔아서 자기만 일방적으로 부자가 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6 25는 8월 15일을 광복절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도 아닌 적화 혁명 과업 완수일로 만들려고 50일쯤 전의 더운 초여름에 일부러 침략을 벌인 '김 일성의 난'이었다. 동시에 인류 역사상 거의 전무후무하게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이 이 작고 좁은 한 나라를 도와준 전쟁이기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2/06/27 08:35 2022/06/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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