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 관순: 나는 공산당.. 아니, 왜놈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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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 열사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중에는..
"유 관순은 일제 강점기 당대에는 인지도가 전혀 없는 듣보잡이었다가 해방 이후에야 뒤늦게 발굴되고 부각됐다. 3· 1 시위에서 천안 나와바리의 행동대장이었을 뿐이지, 딴 지역에도 유 관순 정도의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친일 변절 지식인들에 의해 불순한 의도로 쟤만 혼자 '너무' 신격화된 경향이 있다" 이런 부류의 평가절하가 있다.

저게 유 관순 말고도 타 지역의 여러 열사들을 같이 골고루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면 얼마든지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유 관순이 진짜로 타 지역 시위 주동자 대비 단 1도, 추호도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이 역시 필터링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때 시위 가담자로서 체포되고 투옥돼서 몇 달, 또는 길어야 1~2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야 많다. 물론 그 행적만으로도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겨우 여고생 신분으로 그렇게 고분고분 옥살이를 하지 않고, 서슬 퍼런 법정에서 "너희 왜놈들은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당당히 외쳤고, 심지어 재판정에서 의자를 던져서 가중 처벌을 받고, 형무소 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추진하고.. 자기 신념에 따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짜 악바리 같이 개기다가 기어이 구타로 장살당한 사람은 정말 드문 케이스이지 않은가? 저 증언 자체가 몽땅 조작 구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연히 그때 투옥됐던 사람들이 전부 다 유 관순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때 잠깐 수모를 꾹 참고 옥살이 하고 나와서는.. 공부 더 하고 교육자, 사업가 등으로 크게 성장해서 일본을 실력으로 이기는 게 민족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더 이익"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유 관순도 옥사하지 않고 살아 나왔으면 커서 무엇이 됐겠느냐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뭔가 이 승복 어린이나 신라의 관창 같은 기개를 보이면서 짧고 굵게 간 예외적인 사람도 의미가 있으며, 후세가 특별히 기억하고 기릴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생각해도 유 관순은 여러 3·1 운동 참가자 추진자 중의 하나 수준은 넘어서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2. 박 열 + 가네코 후미코: 독특한 아나키스트 계열 국제결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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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2 마지막 금사회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영화 '박 열'을 봤더니..
무지개 운수가 의뢰를 받아서 타임머신 타고 100년 전의 일본으로 잠입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연 배우가 동일인물.. ㄲㄲㄲㄲㄲ)

아~ 저 시절이니까 도기가 택시가 아니라 인력거를 몰고 있는 거고,
이름이 doggy이니까 "나는 개XX로소이다"라는 시도 썼고..
가네코 후미코는 좀 똘끼어린 여성인 게 고은이하고 인상이 아주 비슷한 거 같고..;;

그렇잖아도 모범택시 2의 금사회 에피소드는 도기가 일부러 교도소로 들어가는 내용인데,
박 열도 대부분의 장면은 주인공이 감방에 갇힌 상태로 진행된다. 감방에서도 미친척 하고 똘끼 부리는 거 캐릭터가 비슷하다.
재판 1심 때 조선 예복 코스프레 한 거는.. 진짜 영락없이 부캐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더라. ㅋㅋㅋ

일제 시대를 다룬 한국 영화가 과연 관동대지진을 다룰 일이 얼마나 되겠나? 이건 애초에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닌데. 더구나 일본 판 십볼렛 색출전(삿 12:6)을 영화로 보다니.. 나름 흥미진진한 소재를 고른 것 같다.
박 열은 192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20대부터 40대까지 인생 황금기를 일본 감옥에서 무기수로 보냈지만 그래도 어째 살아서 나오기는 한 게 참 특이한 것 같다. (참고로, 조선총독부 본진에다 폭탄을 던졌던 김 익상 의사는 박 열과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시기대에 투옥됐지만, 일제 말기 때 결국 의문사했었다)

박 열 저 사람한테 가네코 후미코는.. 진짜 김 학준 선생에게 최 용신 같은 존재로 기억에 각인됐지 싶다(소설 상록수의 모티브를 제공한 실제 인물).
지진만 없었으면 저 두 사람 인생이 실제 역사와는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어찌 됐을지 참 궁금하다. 공교롭게도 박 열과 김 학준 모두 몰년은 1974년이었다.

* 가네코 후미코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돼 있는 단 둘뿐인 일본인이다.;;;
사실, '소다 가이치'라고 조선에 정말 엄청난 온정을 베푼 일본인이 더 있긴 한데.. 이 사람은 법이나 정치, 군사 쪽으로 항일을 한 게 없어서 그런지 훈장까지는 못 받았다. 그 대신 이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3. 김 마리아 외: 엘리트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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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시리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들 기억 하시려나 모르겠다. 시즌 1의 첫 에피소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피해자는 바로 '강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마리아'는 마치 '에스더'처럼 성경의 인물을 그대로 딴 옛날 스타일 여자 이름이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이름을 세례명으로만 쓰겠지만, 개신교 쪽은 그런 개념이 없으니 본명을 그대로 저렇게 짓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됐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엔 지식인 신여성 중에 '마리아' 동명이인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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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마리아(1891-1944)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기까지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시절에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원 급 공부를 한 고학력자였던 데다, 항일 운동 쪽으로도 도쿄 2· 8 독립 선언에다 3· 1 운동까지 할 거 다 했기 때문이다.
그때 붙잡혀 끌려가서 옥고를 치르고, 심문 과정에서 왜경으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해서 몸이 비가역적으로 상했으며, 이 때문에 지병· 후유증을 평생 달고 살았다. 독신으로 살다가 1944년에 병으로 순국한 것도.. 그 지병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저분은 행적과 공로가 워낙 탁월하니 1962년에 진작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유 관순 열사도 요절하지 않았으면 아마 김 마리아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단.. 저분은 전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학은 주전공과 별개로 따로 공부한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이공계는 아니고 문과 무언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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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다음으로, 참 공교롭게도.. 저분과 띠동갑 후배인 동명이인 김 마리아(1903-1970)도 있다.
사진을 검색해 보면 1891년생 원조 김 마리아는 직모 단발머리의 젊은 얼굴인 반면, 1903년생 김 마리아는 더 나이든 파마머리 중년 모습이 주로 나온다.

이분은 이 범석 장군의 부인이었고 광복군 여군+공작원 커리어를 거쳤다. 사격의 귀재였다고 하니 한국의 애니 오클리 같은 느낌도 드는데..ㄷㄷㄷ 여러 모로 원조 김 마리아와는 활동 분야가 많이 달랐다. 업적의 발굴과 조명이 원조 김 마리아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에 1990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3) 참고로, 더 늦게 태어난 박 마리아(1906-1960)도 미국 대학원 출신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은 세월이 흐른 덕분인지, 유 관순 같은 이화학당도 아니고 이화 전문학교를 나온지라, '이대 나온 여자'의 원조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제 말기 때 황국신민 내선일체 이딴 짓을 해서 친일 부역자라는 오점이 찍혔고, 해방 후에는 부통령 후보 이 기붕의 아내로서 권력욕을 뿜뿜하며 제대로 흑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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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가 어땠는지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일가족 동반 ㅈㅅ).. 그러니 박 마리아는 김 마리아와 달리 전혀 영예롭지 못한 악녀로 역사에 남았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 했다.

이 '마리아'들과 비슷한 연배와 비슷한 커리어인 임 영신(1899-1977), 김 활란(1899-1970)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재미있지만..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니 생략하겠다.

4. 윤 형숙: 일제와 공산당 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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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아니라 호남 지방에서는 ‘윤 형숙’(1900-1950)이라는 여성 열사가 있었다. 이분은 3· 1 운동 당시에 광주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왼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분은 체포된 뒤에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열악한 곳에서 구금· 투옥돼 있다가 병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도 잃고 말았다.

아니, 군인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서 팔과 눈을 하나씩 잃은 건 영국의 넬슨 제독이나,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처럼 사례가 있는데.. 윤 열사의 사례는 정말 믿기 힘들다. 사진에 찍힌 모습 중에는 대놓고 저런 신체 장애가 묘사된 게 딱히 없는 것 같다만..
허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행적이 가히 전설적이었는지, 저분은 '윤 혈녀'라는 별명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저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항일뿐만 아니라 반공에도 진심이었다. 해방 후, 6· 25 사변 중엔 손 양원 목사와 동일한 날짜에 동일한 장소에서 북괴 공산군에 의해 나란히 순교하여 주님 곁으로 가게 됐다.
1950년 9월 28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했던 날, 적들은 반동 민간인들을 모두 처형하고서 퇴각했기 때문이다. 호남 지방은 영남보다 위도가 더 낮았는데도, 영남과 달리 지역이 몽땅 다 북괴에게 점령 당했었다.;;;

윤 열사는 아까 3번의 마리아 정도의 고학력 유학파는 아니었지만, 살아 생전에 지방에서 지역 교회를 묵묵히 섬기면서 전도사와 교사로 헌신했었다. 세상에 이런 '여수의 유 관순' 같은 분도 있었다. ㅠㅠㅠ

Posted by 사무엘

2026/06/18 08:35 2026/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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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5월쯤에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 대해서 글을 하나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도 비슷한 시기에 글감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도 있지만 다른 형태로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ㄲㄲㄲ

1919년에 벌어졌던 3· 1 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를 기리는 삼일절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3· 1 운동은 결과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당일이 그렇게까지 “기쁜 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라 밖 소식을 접하기가 어렵던 시절에,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라고 어디서 막연히 주워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면 세계에서 다 알아주고 독립을 지지하고 승인하고, 일본이 아닌 한국 편을 들어 줄 거라고 희망회로를 돌리게 됐다.
물론 민족 자결주의 하나뿐만은 아니고.. 거기에다가 고종(암군이긴 해도 미우나 고우나 일단 자국의 군주 얼굴마담이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한 독살 의혹, 1910년대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 스페인 독감과 기타 등등 생활고도 시위에 대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시궁창이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말석 끄트머리로나마 승전국이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는 저 희망회로의 적용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가령, 민족 자결주의는 그 시절에 무슨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라고 만들어진 이론이 아니었다. 일본으로부터 조선도 마찬가지.

그러면 3· 1 운동은 아무 소득 없이 총칼 앞에서 무참히 진압당했고, 한국인들은 헛다리 짚고 뻘짓만 하다가 괜히 일제로부터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 당하고 아무 소득 없이 끝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같은 교통 통신 수단도 없던 시절에 식민지 피지배민들이 지배자를 상대로 전국적으로 이 정도로 대규모 비폭력 항쟁을 조직적으로 일으킨 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일본 입장에서는 저걸 총칼로 마구 찍어눌러서 당장 진압은 했지만.. 국제적 위신의 손상에다 내부적인 멘탈 대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크게 입었다.

니들은 식민지를 도대체 얼마나 거지같이 관리했길래 10년도 채 안 돼서 식민지에서 저 정도로 처절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냐?”
일본은 이웃 열강들로부터 이런 갈굼을 당했고, 그 갈굼이 조선총독부로 전해졌다.
다시 말해,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향해 "당장 조선을 해방시켜 줘라" 이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네 식민 통치 방식에 문제가 좀 있나 보다? 이번엔 좀 선 넘었네?" 정도의 눈치는 줬다.

이때부터 쟤들은 과장 좀 보태면 만세의 만 짜만 나와도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 됐다.
조선 땅에서 조금 무리수인 정책을 추진할 때면 “야, 조센징 만세 폭동을 벌써 잊었냐? 시즌 2가 벌어지는 수가 있다?” 이러면서 몸 사리는 시늉 정도는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조선 식민지를 관리하는 치안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일제의 입장에서 식민지의 가성비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고종 다음으로 나중에 순종이 죽었을 때만 해도 쟤들은 또 만세 시위가 벌어지지는 않으려나 진심으로 긴장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이 넘어갔음)

솔직히 1919년 3월 1일이 지금 대한민국이 세워진 날이라고 하면 그건 좀 정신승리 보정이 개입된 생각일 것이다. 무슨 시오니즘 대회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됐던 날이 이스라엘 건국일이기라도 하냐?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들이 남의 전쟁에 강제로 징용되고 끌려간 건 그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라도 져야 할 사항이냐? 누구는 약간 나중에 6 25 전쟁 중에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못 지켜 줬던 건 그렇게도 욕하고 비판하던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세 시위 하나 했다고 일제가 조선을 니에니에 독립시켜 줬을 리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쌓이고 쌓인 게 시너지 효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일본을 물리적으로 힘으로 패퇴시킨 것이야 한국의 능력이 아니라 연합국, 특히 미국의 원자폭탄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저런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없었다면 일제의 패망이 곧바로 한반도의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에 코리아의 독립이 따로 명시된 게 괜히 이뤄진 줄 아냐?
이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정답이 되는 건 아니다”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건국 초기부터 관습적으로 삼일절을 아주 성대하게 기념해 왔다. 그리고 그 초창기, 리 승만 할배 시절엔 대한민국이 1919년부터 시작된 나라라고 대놓고 홍보하곤 했다.
특히 저 때는 북괴야말로 1947년인지 48년에 갑툭튀한 듣보잡 사생아 집단일 뿐이고, 남한은 훨씬 전부터 정통이라는 걸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념이 오늘날 우리나라 헌법의 전문에도 명시된 것이다.

이거 마치 Watcom C라는 신생 컴파일러가 볼랜드/마소 제품 대비 자기 내력을 뻥튀기하려고 첫 버전을 1.0이 아니라 무려 6.0부터 매겼던 것과 비슷한 행동 같은데.. 뭐 그랬다. 이런 내력이 있다.
본인은 삼일절과 주일이 겹쳤던 날에 교회에서 준비 찬송으로 특별히 만세, 함성, 승리 이런 단어가 들어있는 곡을 골라서 부르곤 했다.

* 흥미로운 사실

(1) 조선은 특이한 지리빨 덕분에 그 시절에 대영제국의 손아귀로 들어간 적이 없는 꽤 예외적인 나라였다. 어디 대영제국 뿐이랴? 병자호란,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에서 다 지고도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조선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낸 게 아니었다. 인간들의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발달해서 지리빨이 약발이 다했을 때 조선은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열강들은 조선을 먹지 않았지만, 그 대신 19세기 말에 조선이 중립을 선언한 것도 전혀 존중해 주지 않았다.
조선은 서양 식민지가 되지 않은 대신, 이웃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니 나중에 독립될 때도 여느 대영제국 식민지와는 좀 다른 격으로 취급받게 됐다.

(2) 1920년대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세계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편을 드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특히 전간기) 일본은 세계가 일본을 영국 미국과 대등한 열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함대 제작 쿼터를 많이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었다. ㄲㄲㄲㄲㄲ
이게 지금은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 vs 군대를 가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로 이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인물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있는데.. 분량이 길어지니 이건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15 08:35 2026/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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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과 일본: 절대 잊지 않는다

본인이 개인적으로 미국에 대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치욕은 무슨 수를 써서든 무조건 갚아 온 근성이다.

(1) 태평양 전쟁 시절, 진주만 공습을 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맨 먼저 둘리틀 특공대를 보냈다. (카미카제 특공대가 아니라..)
치사하게 비무장 민간인들이나 학살하면서 화풀이를 한 게 아니다. “저놈들도 우리와 똑같이 예상치 못한 데서 뒤통수를 맞는 기분을 느끼게 해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해야 한다” 이렇게 정말 고차원적으로 보복을 했다는 게 포인트이다!

그 뒤, 미쿡은 진주만 공습에 참여했던 일본 항모를 미드웨이에서 기어이 다 격침시켜 없앴다. 그리고 이듬해엔 진주만 공습을 기획했던 적장인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끈질기게 추적해서 끝내 제거해 버렸다. 이런 게 천조국의 저력이었다.

(2) 냉전 시대에 스푸트니크 쇼크를 한번 당한 뒤에는 달에 인간을 보내 버려서 결국 소련을 꺾었다.
(3) 9· 11 테러를 당한 뒤에는 무려 10년 가까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복수의 칼을 간 끝에 빈 라덴도 없애 버렸다.

미국도 인간이 사는 곳이니 언제나 완벽하지는 않다. 누구와 경쟁하거나 싸울 때 방심하다 실수하고 병크를 저지르고 선빵도 맞곤 했다.
그러나 미쿡은 그 실수로부터 반드시 배우고 교훈을 얻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절대 반복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에 정말 무서울 정도로 진심이었다. 예로부터 미쿡의 초월적인 저력은 이런 데서 발휘되곤 했다.

그리고 미국은 자국의 이름을 걸고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한 군인이라면 그야말로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유해를 추적해서 무조건 찾아 오는 걸로도 유명하다. 소방관이나 군인을 예우하는 관행 역시 대단하고 부럽기 그지없다.

다음으로 일본은..?? 미국과 같은 분야는 아니지만
(1) JAL123편 추락(비행기, 1985)이라든가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전철, 2005)를 잊지 않는다
(2) 한국의 이 수현 씨(2001)를 잊지 않는다~~!!!
처럼 중요한 사건 사고를 골수까지 새기고 영원히 간직하는 쪽으로 진심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

일본 항공에서는 JAL123 사고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던 새파랗게 젊은 신입 사원들한테도 사고기의 잔해를 보여주고 희생자 묘비를 참배 시키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자고 정훈(?) 교육을 시킨댄다.
JR 서일본의 자국어 홈페이지에는 후쿠치야마 선 사고에 대한 사과문이 현재까지도 그냥 영구박제돼 있다.

의사자 이 수현 씨야.. 이제 한국에서도 잊혀져 가지만 일본에서 더 기억하고 계속 추모하고 있다. 이 사람 덕분에 한일 관계가 개선됐고 이 씨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쏟아져 돌아오는 감사 격려 편지를 읽으려고 일본어를 독학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런 거 보면 일본인들이 정말 선진적이고 의식이 깨어 있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 더 옛날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나 기억은 좀 별개의 영역인 것 같다. 특히 정치인들의 처신과 반응은 더욱 말이다.;;;

2. 일본(+ 미국)의 선진적이고 부러운 사회 관행

(1) 한국에서는 시내버스가 파업을 하면 버스가 운행을 중단하고 멈춰서 버려서 일반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는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시내버스가 파업을 하면 버스가 운행을 하는데.. 운임을 안 받고 아무나 공짜로 버스를 태워 준다고 한다. 즉, 시민들에겐 아무 피해를 주지 않고 버스 회사 경영진들만 엿먹인다!

(2) 한국에서는 범죄자 놈들 얼굴을 가려 주고 경찰· 형사들은 생얼을 노출시킨다.
일본인지 미국인지 진짜 선진국은 그 반대다. 경찰· 형사들 얼굴을 가리고 범죄자 놈 얼굴은 그대로 노출시킨다.
일본과 미국은 선진국+민주 국가이면서 사형 집행을 활발하게 하는 나라이기도 하다.

(3) 일본은 매정할 정도로 책임감이랄까~~ 그런 의식을 밀어붙이는 성향이 강하다.
누가 전철로 투신 자살을 하면.. 그것 때문에 발생한 무수한 철도 운영상의 손실 비용이 유족에게 청구돼 넘어간다. "어차피 가해자도 죽고 없는데 공소권 없음" 끝~~ 이렇게 어물쩡 넘어가지는 않는 모양이다.

(4) 무료 생계 지원이 있기는 하지만.. 오프라인 대면으로 아주 번거롭고 불편하게 신청해야 하고 심하면 직원이 "아이구 국민 세금으로 공짜로 먹고 사는 주제에 부끄러운 줄 아쇼" 거의 면박까지 주는 분위기라고 한다.
일본도 처음에는 이쪽 인심이 이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멀쩡히 일할 수 있는데도 이 제도를 악용하고 공짜로 놀고 먹는 인간들이 생기자 정책이 바뀐 거라고 한다.

(5) 한국에서는 대형 해양 사고가 한 건 벌어져서 학생들이 많이 죽자, ... 그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미친 짓거리가 벌어졌었다.
일본에서는 대형 해양 사고가 한 건 벌어지자 학교에 수영장이 설치되고 생존수영부터 열심히 가르치기 시작했다.
미친 근성의 산물인 세이칸 터널도 따지고 보면 해양 사고를 계기로 만들어졌다.

일본이 노벨 상을 30명이나 배출하고 그것도 문학이니 평화니가 아니라 알짜배기 과학 분야가 수두룩한 것엔 코리아와 다른 저런 선진적인 의식도 큰 기여를 했지 싶다. 쟤들은 그렇잖아도 춘분과 추분이 공휴일이고(이과), 헌법 제정과 반포일이 모두 공휴일(문과)인 나라이기도 하다.

3. 일본의 바람직한 욕조 수도꼭지

개인적으로는 일본 호텔에서 욕조를 이용해 보고는 다음 두 가지 면모에서 개인적으로 크게 놀랐다.

(1) 물 온도 레버와 수압(수량, 물 세기) 레버가 분리돼 있다.
개인적으로 x, y축으로 모두 돌아가면서 단일 레버만으로 수온과 수량을 모두 조정하게 돼 있는 "조이스틱형" 레버를 싫어한다.
저렇게 해 놓으면.. 샤워 중에 나는 수량만 조절하고 싶은데, 기껏 최적으로 맞춰 놓은 수온까지 더 뜨겁거나 차갑게 바꿔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일본의 수도꼭지는 수온과 수량 게이지가 분리돼 있어서 저런 불편이 없었다. 그리고..

(2) 수압 레버의 상하 방향으로 물 분출 타겟을(샤워기 or 욕조 수도꼭지) 곧장 지정한다.
보통은 별도의 버튼이나 레버 자체의 '눌림 여부'로 타겟을 지정하게 돼 있다. 즉, 수도꼭지라는 장치에 별도의 state가 존재한다.

이러면.. 사용자는 수돗물을 틀기 전에 이 수도꼭지의 상태부터 먼저 확인을 해야 한다.
그걸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수돗물을 틀면 나는 이쪽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기대하는데 별안간 위의 샤워기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서 옷 적시고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열도의 수도꼭지는.. 그냥 수량 레버를 '위로' 돌리면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고, '아래로' 돌리면 욕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온다.
즉, 수도꼭지의 자체 상태를 확인할 필요 없이 내가 직접 타겟과 수량을 동시에 지정할 수 있다. 아주 직관적이고 합리적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바람직한 디자인이 아닐 수 없다. 동일한 수압을 유지하면서 샤워기와 수도꼭지로 번갈아가면서 물을 분출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에다 비유하자면 수도꼭지라는 클래스에다가 물 분출이라는 메소드를 호출하는데, 타겟을 객체 멤버가 아니라 메소드의 인자로 지정하는 것과 비슷하다.

역시 일본이구나..! 이런 수도꼭지 하나에도 디자인의 세심함과 센스가 들어가 있구나 싶었다.
이런 건 코리아도 좀 배우고 본받아야 하지 않겠나?

4. 일본의 미국 행 똘끼

끝으로, 일본은 미국에 가거나 미국에다 뭔가를 보내는 일에 오래 전부터 특별한 로망이 있었던 것 같다. ㄲㄲㄲㄲㄲ

(1) 1926~1927년 사이, 료에이마루 호 조난 사건.
이건 배수량 42톤짜리 자그마한 어선 통통배였는데.. 조업 중에 엔진이 현장 수리 불가능한 고장이 발생해서 자력 주행이 불가능해졌다. 배는 구조되지도 못하고 해류에 이끌려 망망대해를 무려 10여 개월 동안 항해했다. 배가 저렇게 태평양을 건너던 동안 자국에서는 천황이 다이쇼에서 쇼와로 바뀌었다.

그 배는 좌초나 침몰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 연안까지 무사히 갔다. 하지만 선원 12명은 다 굶어 죽었다.;;;

(2)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1945년 사이에 나치 독일은 영국으로 V1이니 V2니 하는 초보적인 수준의 로켓? 미사일?을 개발해서 포탄을 날려 댔다.
일본은 그런 짓까지 할 여력은 안 됐고 또 미국이 워낙 너무 멀기도 했으니 뭘 했느냐 하면.. 풍선에다가 폭탄을 실어서 미국으로 떨궜다. 그 방향으로는 제트 기류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뱅기 타고 동아시아에서 북미로 날아갈 때가 돌아올 때보다 더 빨리 감)

9000여 개 중에서 300개 정도가 실제로 미국까지 갔고, 그 중에 또 아주 소수가 미국 여기저기서 산불을 일으키고 집을 부수고 집적거리는 피해를 입혔다. 이런 테러가 언제 어디서 또 벌어질지 모르니 미국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정치인과 군인을 약간 귀찮게 하는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이건 독일 로켓과 마찬가지로 정확도가 너무 처참했다. 물리적인 피해 규모가 미미하기도 하니 미국에서는 이건 종전 때까지 보도하지도 않고 넘겼다. 이런 허접한 눈먼 폭탄이 정확하게 어디에 떨어져서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를 적국에다 피드백 주지 않기 위해서다.

(3) 그리고 끝으로 지난 1992년 11월경엔 일본에서 ‘스즈키 요시카즈’라고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 진 워렌버핏 같은 똘끼도 있어 보이던 아저씨가 풍선에다 의자를 매달아서 앉고는 바다 건너 미국을 가겠다고 나섰다.

처자식 있는 유부남이었는데 사업이 잘 안 돼서 힘들었던 듯.. 그래서 기구나 비행선을 정식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헬륨 풍선 수십 개를 달아서 그거 타고 멋지게 미국에 가면.. 자기가 유명해지고 후원도 들어오고 돈과 명예를 얻게 될 거라고 굳게 믿게 됐다.;;; 지인과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고 비행을 강행했다.

그는 그렇게 3~4km 정도의 고도를 시속 70km 남짓한 속도로 날면서 출발지에서 나름 1600km 가까이 수평비행을 이틀 동안 했다. 하지만 해상보안청의 수색기에 의해 마지막으로 관측된 뒤에는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그 뒤 영원히 종적을 감췄다.
미국에 가지도 못했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가다가 풍선의 부력이 다해 버려서 망망대해 어딘가에 추락한 듯.

요즘처럼 날렵한 고프로 카메라에다 유튜브와 인터넷 방송이라도 있을 때 저런 기행을 했으면 더 빨리 더 많이 주목받았을지도 모른다만.. 저 때는 방송 매체라고는 아직 큼직한 VHS 테이프와 쏘니 캠코더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아깝네그려~
그래도 풍선에다 폭탄을 실어 나르던 시절에 비해서는 일본이 많이 평화로워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5/10/18 08:35 2025/10/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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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 차원에서의 역린, 트라우마

- 우리나라는 초대 대통령 시절부터 강렬한 선례가 있었다 보니 부정선거에 아주 민감하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유권자에게 조금이라도 향응을 주는 걸 엄격하게 단속하고 단칼에 처벌한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른 채 향응 접대를 덥석 받은 쪽에도 어떤 형태로든 불이익이 가해진다.

- 잦은 북괴 도발 때문에 반국가단체 내지 범죄 집단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우리나라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은 처벌이 이례적으로 꽤 엄하게 규정되어 있다. 이론적으로는 조폭을 결성한 우두머리는 뭔가 실제로 강도, 절도, 폭행 등의 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 그렇게 조직을 만든 것만으로도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제4조1항)

- 비행기 납치에 대한 트라우마도 있다. 창랑호와 YS-11기 납북 사건.. 이 때문에 미국에서 9· 11을 겪은 뒤에야 적용된 보안 정책이(기장실 절대 봉인) 우리나라에서는 훨씬 더 일찌감치 적용된 경우가 있었다.

- 뭐, 북괴뿐만 아니라 반일 트라우마도 있다. 우리나라는 출입국관리법 차원에서 일제강점기(1910~1945) 때 일본 편에 서서 반인륜 행위에 부역했던 외국인은 입국을 금지시키고 있다. 물론 지금은 사실상 사문이 됐다.

- 대구 지하철 참사와 세월호 때문에 민간 차원에서는 교통수단 승무원에 대한 불신 트라우마도 쪼금 생겨 있다. 하지만 다른 교통수단은 몰라도 비행기는 정말로 미우나 고우나 승무원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이런 우리나라 말고 일본은...? 쟤들은 전쟁 때 적군이 땅끄 몰고 쳐들어온다거나(6 25), 적들이 새까맣게 배 타고 상륙하는(임진왜란) 걸 경험한 적이 민족 차원에서 전무하다.
그 대신 쟤들은 도쿄 대공습 때 폭격기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면서 폭탄 떨군 것, 즉 공습에 대한 트라우마가 진심이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서 만드는 만화영화에도 괴물이 폭격 공습을 퍼붓는 묘사가 많다.

- 중국은 아편전쟁 이래로 마약에 진절머리 트라우마가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천안문 사태'를 입에 담는 걸 불편해한다. 하다못해 중국에서 개발한 언어 AI조차도 이 주제는 절대 함구한다.
중국은 20세기 초에 서구 열강과 일본한테 좀 짓밟혔던 역사가 있는지라 아직도 "다시는 우리 중국을 무시하지 마라, 우리도 한다면 한다" 이런 자격지심이 있다.

- 독일과 이스라엘은 나치에 극심한 트라우마가 있다. 팔 하나 잘못 뻗치는 것만으로도 린치 당하거나 경찰에게 잡혀 갈 수 있다.

- 미국은 워낙 강대국이다 보니 울나라처럼 특정 나라· 민족에 대한 지엽적인(?) 트라우마는 사실상 없는 것 같다. 뭐 굳이 찾자면 9· 11 테러에 대한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있는 정도.. 그래서 항공 보안 쪽은 여전히 아주 깐깐· 까칠하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2. 약했던 나라와 강했던 나라

- 한국은 힘이 없는 상태에서 내전이나 치르면서 어렵게 어렵게 독립을 얻었다 보니, 군대에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징병제)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세계를 상대로 너무 큰 사고를 쳤다 보니, 군대를 보유하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자위대) 서로 처지가 완전히 극과 극이다.

- 20세기 초에 한국은 일제 통치의 부당함과 조선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했지만 무시당했다.
일본은 자기도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이니, 서구 열강과 대등한 대우를 받고 떡고물도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국제 사회에 호소했지만(해군 전함 배수량 TO 같은..).. 무시당했다. 이것도 서로 처지가 완전히 극과 극이긴 했다.

- 우리나라는 그냥 광복절이라고 기린다. 일제로부터 해방됐으니 기쁘다는 관점이다. 그리고 현충일은 북괴와 맞서 싸우든, 일제와 맞서 싸우든 어쨌든 오로지 자국을 위해서 목숨 바친 분들을 기리는 날이다.
그 반면, 미국은 VJ.. 태평양 전쟁 때 자력으로 싸워서 일본을 꺾고 쟤들로부터 항복을 받아 낸 날을 기린다. 그리고 미국 ‘재향군인의 날’은 그야말로 세계 각지에서 파병 가서 세계 평화를 위해 싸운 자국 군인들을 기린다. 2차 세계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 등등.. 스케일이 한국과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3. 한미일의 교통 문화

(1) 미국이야 1920~30년대에 이미 초고층 마천루라는 걸 만들어냈고 대도시엔 자동차들 때문에 극심한 교통체증이라는 게 있었다.
일본 도쿄는 저 시절에 동아시아답지 않게 엄청나게 번화한 대도시이긴 했다. 증기 기관차가 고가 선로 위를 달리고 있기도 했고.. 다만, 자동차가 미국처럼 보급되지는 못했으니 인력거는 일본에서만 볼 수 있었다.
그 반면, 한반도는 일제 시대까지는 경성 한복판에서도 아스팔트 포장이나 차선, 중앙선, 신호등 같은 게 아직 전혀 없었다.

(2) 1960년대 말에 우리나라는 시속 100km짜리 경부 고속도로 하나를 국가 차원에서 겨우 만들어서 낑낑댔던 반면..
일본은 그때 시속 200km짜리 고속철 신칸센을 100% 자체 기술과 자본으로 만들어냈고.. 미국은 그때 이미 인간을 달에 보내고 있었다. 이것도 참 전설적인 예화이다.
일제가 1930년대에 경부선 단선에서 증기 기관차로 달성했던 최고 속도(아카츠키, 서울-부산 6시간 반)를 우리나라는 1960년쯤 돼서야 디젤 기관차(특급 무궁화호)로 겨우 따라잡기도 했었다.

(3) 미국은 의료비가 비싸고,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고, 한국은 식비가 비싸다고 여겨진다(우유, 소고기 등등..). 허나, 일본도 식당 밥값이 너무 비싸서 직장인들이 돈 아끼려고 도시락 혼밥하는 게 유행이 됐다고는 하던데..

우리나라는 근대화 산업화 타이밍이 열강들에 비해서는 한 박자 늦었다. 그래서 고속도로나 철도의 건설은 국가 주도로 하는 게 너무 당연시됐고, 2000년대가 다 돼서야 민자 고속도로가 찔끔 등장한 정도이다.
그 반면, 미국과 일본은 철도는 일찌감치 민영 사철이 발달했다. 이 때문에 운임이 왕창 비싸고 운영 시스템의 파편화가 심하지만.. 열차가 엄청 빠르고 서비스가 좋은 면모도 있다.

4. 전통의 계승과 단절

(1) 한국은 20세기에 조선에서 일제 시대, 일제 시대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가던 시기가 그야말로 극심한 넘사벽 대격변기였다. 일례로, ‘국악’이라는 건 1910년 일제 시대 이전까지의 고전 음악을 다루며, 그 이후부터는 현대 음악으로 간주한다.
중국은 청나라가 멸망한 1911년 신해혁명을 엄청난 대격변기로 보니 한국과 사정이 비슷하다. 그 뒤에 중공과 대만이 갈라져나간 것도 비슷하다.

한편,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과 1947년 일본국 리뉴얼이 격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이나 중국과 같은 급으로 헌정 체제가 근본적으로 싹 바뀐 시기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2) 우리나라는 화폐개혁은 1962년에 한 게 마지막이고, 개헌은 1987년이 마지막이다. 맞춤법의 개정은 1988년이 마지막이고 로마자 표기법이 2000년에 개정됐었다. (요 근래까지 계속 추가되고 업데이트되고 있는 건 표준어이지, 맞춤법이 아님)
중공은 1956년에 간체자가 제정되고 1958년에 한어병음이 제정되어 어문 규정이 크게 바뀌었다. 글자를 바꾸지 않고 주음부호를 계속 쓰고 있는 대만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일본은 패전 후 1949년에 신자체가 제정됐고 1946~47년 사이에 새 헌법이 제정됐으니 이런 것도 한국이나 중국을 앞섰다. 그리고 일본은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화폐개혁이나 개헌은 전혀 없었다.

(3) 미국 역시 지난 2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대통령의 암살은 있었을지언정 쿠데타나 헌정 체제의 단절적인 변화가 전혀 없었다. 어쩌다 보니 FDR 루스벨트만이 대공황부터 2차 세계 대전까지 4선 집권을 하긴 했지만 이조차도 불법적인 장기 집권은 아니었다. (후대부터 3선 이상 연임 금지가 법으로 명시)
미국 달러는 화폐개혁도 20세기 이후로 전혀 없었다. 아니, 있으면 안 될 것이다.;;

(4) 한국은 1953년 이후로 전쟁이 무기한 휴전 상태이며, 20세기 중후반에 수십 년 동안 군사정권을 경험했었다.
대만은 신기하게도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38년 동안이나 계엄이 내려져 있었다고 한다.

(5) 가까운 미래에 우리나라는 모병제로 전환한다거나, “통일을 지향한다” 같은 문구가 헌법에서 삭제될지도 모르겠다. 남한과 북한 간에 영구분단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우리나라가 통일 지향 이념을 부정할 정도라면 일본도 자위대를 아예 정식 군대로 승격시켜 버리려나? 하지만 무려 100년 가까이 한 번도 개정한 적 없었던 헌법을 겨우 저걸 위해서 고친다? (평화헌법) 국민 정서와 법 정서상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와일드 서부 개척 시대의 흔적인 민병대나 총기 소지 관련 법을 고치려나 모르겠는데.. 이것도 220V 승압만큼이나 매우 매우 힘들고 어렵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25/08/08 19:35 2025/08/0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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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1592-98)과 6 25 사변(1950-53).

1. 공통점

  •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국제 전쟁이다. 대리전 같은 양상도 띠었다.
  • 적국으로부터 전쟁 준비 정황이 여럿 포착됐지만 그에 대비를 제대로 못 했다.
  • 초기에는 신무기 때문에 맥을 못추고 털렸었다. (조총, 땅끄)
  • 우리나라가 멸망할 뻔했지만 어쨌든 기적적인 계기로 방어에 성공했다. (이순신, 맥아더 / 한산도 대첩, 인천 상륙작전 등) 그래도 나라가 멸망만 당하지 않았지, 몽땅 쑥대밭이 되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 우리나라 쪽 대표가 없이 남들끼리 종전(정전) 협정이 진행됐고 오랫동안 질질 끌었다. (일본 vs 명, 북괴 vs UN)
  • 저 전쟁 기간의 대부분은 종전(정전) 협상이 오랫동안 질질 끌리는 동안 벌어졌던 소모전 기간이다.
  • 저 전쟁의 말기 때 적국 진영의 수장이 죽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스탈린)

2. 비슷한 점

(1) 임진왜란은 그 전까지 수시로 한반도를 집적대던 왜구들 국지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6 25는 그 전까지 38선 부근에서 수시로 툭탁툭탁 벌어지던 국지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쟁이었다.

(2) 임진왜란 때 왜군은 자기들이 성읍을 점령하던 방식처럼 조선의 왕만 빨랑 사로잡으면 전쟁이 바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은 잽싸게 피난 가고 없었고, 왕이 부재 중인데도 동네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서 왜군을 당황케 했다. 조선과 일본은 사회관과 국민 정서가 서로 많이 달랐다.
6· 25 때 북괴 측에서는 자기들이 쳐들어오면 20만 빨치산들이 자기를 반겨 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쳐들어가 보니 그런 거 없었고 남조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3)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 왕이던 선조는 사람 보는 안목이 거의 트롤러 수준이었다.
원 균과 이순신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든가.. 한국 역사상 최악의 개망나니 미친놈이던 아들 순화군을 기를 쓰고 감싸던 걸 생각하면 말이다.
순화군이 함경도에서 깽판 치고 있자, 도저히 견디다 못한 거기 백성들이 서로 짜고 순화군을 왜군에다 넘겨 줬을 정도였다.
6 25때는? 뭐 리 승만 할배의 정치적 과오 중 상당수가 인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거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 차이점

(1) 6 25 때 전황이 제일 안 좋았을 때는 경상도 동남부만 빼고 남한 땅이 다 함락당하고 북괴에게 넘어갔었다.
임진왜란 때는 반대로 전라도 빼고 다 함락당한... 정도는 아니었다. 부산 일대, 그리고 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영남대로 길목 좌우를 제외하면 왜군이 조선 땅을 몽땅 다 점령할 재간은 없었다.

(2)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 자체가 완전히 망하고 멸절당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는 자기는 전대 정권과 전혀 무관하다면서 고개를 숙였고, 조선과 일본은 다시 수교를 맺었다.
그 반면, 6 25가 휴전으로 끝난 뒤, 남한과 북괴는 완전히 단절되고 최악의 적대 관계로 전락했다.

(3) 6 25 때 월북한 남한 지식인들은 다들 좋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은.. 끝까지 잘 대접받고 잘 살았다.

※ 나머지 이야기들

(1)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과 일본(왜)이 벌였던 해전의 양상을 공부해 보면 흥미로운 게 많다. 가령, 조선의 판옥선은 단면이 U자형이어서 평평한 바닥이 있는 반면, 일본의 전투함은 V자형이었다고..
일본 배는 더 빠르게 이동이 가능한 반면, 조선 배는 안정적이며 제자리에서 변침(조향, 회전)까지 가능할 정도로 최대속도 말고 다른 기동성이 좋았다고 한다.

어찌 보면 군함의 설계 이념부터가 조선은 방어 지향이고 일본은 공격 지향이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배는 닥치고 상대방에게 달려들어서 다리를 놓은 뒤, 자기 수병들이 그리로 건너가서 백병전을 벌이고 상대방 배를 점령하는 것에 최적화돼 있었다. 옛날에 해전이 진행되는 게 이런 식이긴 했다.

그러나 이 순신은 일본 배의 이런 장점 내지 특성을 봉쇄하는 쪽으로 기가 막히게 작전을 짰다.
지형 특성과 조수 간만 물때를 잘 활용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판옥선의 강화판이던 거북선은 저렇게 남의 배로 건너와서 백병전 벌이는 걸 봉쇄하려고 등짝을 온통 고슴도치처럼 만들었다.

(2)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들은 자기 전술이 통하지 않는 거북선을 ‘장님배’(메쿠라부네)라고 부르면서 두려워했다고 한다. 눈에 뵈는 게 없이 달려드는 깡패 같은 배라는 뜻에서 장님이라는 별명을 붙인 듯..

그 다음으로 1850년대에 일본은 서양의 시꺼먼 철갑선 ‘쿠로후네’를 보고는 단단히 쫄게 된다. 이때는 얘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 했다.
그래서 임진왜란으로부터 300년쯤 뒤엔 지들도 군함 끌고 조선을 상대로 똑같은 짓을 했다. 운요 호 사건 이후로 조선을 겁 주고 차근차근 무장해제 시키고 이것 빼앗고 저것 빼앗은 뒤, 외교적으로도 고립시키고 끝내는 자기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이런 내력이 있고, 또 러시아를 기적적으로 명목상으로는 승리도 했다 보니 큰 군함을 만드는 일에 진심이 됐다. 그래서 결국은 야마토까지 온갖 삽질 끝에 만들었지만.. 결국 그들에게 20세기 쿠로후네 같은 존재는 바로 미주리 전함이 됐다.
21세기엔 일본이 크고 아름다운 군함과 관련하여 또 무슨 일을 겪게 될지 궁금해진다.

(3) 일제 시대 독립군의 전과 같은 이야기 중엔 과장 주작이 들어가거나 잘못 알려진 것도 적지 않았다. 허나, 일제 이후에 북괴와 싸웠다는 이야기 중에도 그런 예가 있는가 보다.

6 25가 터지기도 전, 육탄 10용사야 한참 전부터 자잘한 논란이 많이 불거졌기 때문에 요즘은 무용담을 신격화하고 띄워 주는 트렌드가 많이 줄었다.
철도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김 재현 기관사는? 전시에 열차 운행을 하다가 피격 당해 전사한 것은 팩트이지만, 일반적인 보급 수송 임무였지 무슨 윌리엄 딘 소장 구출 임무는 아니었다고 하네..;; 이게 왜 지금까지 오랫동안 잘못 알려졌는지 모르겠다.

심지어 6 25 개전 초기의 대한해협 해전도.. 뭔가 정체불명 괴선박을 격침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진짜로 북괴 공작원들을 수송한 배였는지는 오리무중이라고 한다. 정확한 전과 보고를 위해서라도 우리측에서 사건 현장 주변을 정밀 수색했지만, 북괴군 시신 같은 거라도 도무지 발견된 게 없었다고 하니..

오히려 6 25보다 수백 년 전의 일을 기록한 난중일기가 단순 일기를 넘어서 정확한 사료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그 일기에서 언급하는 인물이나 사건이 당대의 외국 사료와 일치하고 교차검증이 됐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난중일기가 백범일지보다 더 신뢰할 만한 사료라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23 19:35 2025/07/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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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야세노바츠 수용소

나치 독일이 점령지에서 인종 청소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운용했던 수용소로는 아우슈비츠가 독보적인 인지도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만 있었던 게 아니다. 마치 북괴에서 운용하는 정치범 수용소가 요덕만 있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저 시절에 일본이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듯, 나치 독일은 자기 점령지에다가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수립했다.
크로아티아가 어떻고 유고슬라비아가 어떻고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어떻고 등등.. 저기도 나라 사정이 엄청나게 복잡하긴 한데, 내가 그런 걸 다 알지는 못한다. 핵심만 말하자면 저기에는 정치 쪽은 골수 크로아티아 인, 종교 쪽은 골수 가톨릭인 '우스타샤'라는 열성당원이 있었다. 근데 걔들이 파시즘에 물들어서 나치 독일과 손잡았다.

나치 독일은 걔들에게 완장을 채워 주면서 이 점령지의 통치를 맡겼다. 그리고 수용소도 떡 지어서 불순 반동분자들을 마음껏 가두거나 죽일 수 있게 했는데.. 이 우스타샤라는 놈들은 나치 독일도 학을 뗄 정도로 또라이들이었다. 상전인 나치로부터 살인 면허를 받자, 얼마 못 가 오히려 나치 측에서 기겁하고 뜯어말릴 정도로 더 미쳐 날뛰었다.

얘네들은 나치의 주적이던 유대인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과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이웃 세르비아 인들을 더 집중적으로 괴롭히고 조졌다. 쟤들은 혈통도 다르고, 또 종교도 정교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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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 링크)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거나, 성모 마리아나 유아 세례에 대한 교리적 입장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인 게 아니다. 정교회는 개신교· 침례교보다는 가톨릭과 교리가 훨씬 더 가깝고 호환되는 종파일 텐데..
이거 뭐 성호를 긋는 순서가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다니 이건 중세 종교 재판보다도 더 막장인 것 같다. -_-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사람을 극한까지 부려먹으면서 천천히 죽이는 시설이지, 사람을 바로 죽이는 시설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같은 가스실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스타샤 놈들이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차라리 가스실을 구비하는 게 더 자비롭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 또라이들은 절대로 사람을 급소에다 총알 박아서 단번에 죽이지 않았다.
냉병기로 목을 치거나 눈알을 뽑고 사지를 짜르고, 산 채로 배를 갈라서 내장을 끄집어내거나 불지르는 등..
난징 대학살이나 캄보디아 킬링필드 이상의 잔혹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게다가 아기나 어린애들한테도 이런 짓을 했다.

쟤들은 세르비아 인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뭐, 목숨이 붙어 있더라도 수용소 내부 환경이 얼마나 끔찍하고 열악했는지는.. 그건 아우슈비츠와 호각이었을 테니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더 자세한 설명: 링크1 / 링크2

로마 가톨릭은 무려 교황청 차원에서 이런 극악무도한 만행에 대해 침묵을 넘어 은폐했으며, 우스타샤를 그저 애국 민족주의 독립운동 진영 정도로 미화해 왔다고 한다. 이건 로마 가톨릭의 엄청난 과오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4. 악당들의 최후

2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나치 전범들은 다음과 같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1) 가장 먼저, 수괴인 히틀러는 자살했다. 자기는 죽으면 죽었지 베를린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못을 박았으며, 한편으로 패자 루저는 더 존재할 가치가 없다면서 주변을 몽땅 다 부수고 불지르라는 광기어린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건 자국(알베르트 슈페어)이든 프랑스 점령지이든(콜티츠 장군) 해당 나와바리 담당자들이 히틀러의 지시를 거부하고 이행하지 않았다.

(2) 히틀러의 심복 나팔수였던 요제프 괴벨스도 순사라도 하듯이 자살했는데.. 히 총통님이 없는 세상에서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본인만 자살한 게 아니라 가족을 몽땅 동반 살해했다!!
출산이 애국이라면서 애를 6명이나 낳고 애들 이름도 다 히틀러를 따라 ㅎ(H)로 시작하게 지었는데.. 그 애들을 다 수면제와 독약을 먹여서 죽인 것이다. 저 사람은 정말 상상 이상의 또라이 미치광이였다.

(3) 하인리히 힘러는 친위대 SS와 게슈타포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다. 이 사람은 체포되고 나서 자기 정체가 드러나게 되자.. 즉시 청산가리 앰플을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재판 받고 교수대에 서는 비굴한 꼴은 어떻게든 안 당하려고 발악을 했다.

(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도 힘러 못지않은 SS와 게슈타포 쪽의 고위 간부였으며, 유대인들을 국가 차원에서 씨를 말려 버려야 한다고 결정한 주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나치 독일이 점령했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총독의 권한대행을 역임했다. 능력이 좋았는지 겨우 30대 나이에 엄청난 고관대작이 됐으나..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이 손잡고 일으킨 암살 작전에 말려들어 밥숟가락을 놓았다. 수류탄 파편을 많이 맞은 것이 패혈증을 일으켰고, 이것 때문에 1주일 뒤에 쇼크사한 것이다. 1942년 6월,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 비교적 일찍 죽었다.

저 사람은 윤 봉길 의사의 의거로 인해 죽은 일본군 장성인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처지가 비슷해 보인다.
후자의 경우, 폭탄 파편을 맞은 당일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100여 군데나 생긴 상처에서 패혈증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결국 당일로부터 딱 1개월 뒤에 사망했다.

(5) 아돌프 아이히만은 수뇌부인 저 하이드리히의 명령(전략)을 정말 성실히 수행하면서 유대인들을 아주 조직적으로 대량 학살한 실무(전술) 책임자였다. 전자가 기업 임원· 회장급이라면 후자는 공장장 정도 되는 듯?
이 사람은 나치의 패망 이후에 자기 신분을 숨기고 아르헨티나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배신자의 밀고가 아니라 아들이 입을 잘못 놀리는 바람에 인생이 꼬였다.

장남이 여친에게 자기 아버지 자랑을 실컷 했기 때문이다. 여친이 유대인 출신이며 심지어 여친의 부친부터가 당장 홀로코스트 피해자인 걸 정말 까~~맣게 모르고 말이다..;;;
아이히만 저 인간은 자기 행적을 전혀 후회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떠벌려 왔으며, 자신의 반유대주의 신념을 전수받은 후학을 양성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기 아들에게는 평소에 밥상머리 세뇌 교육을 어떻게 했겠는가? 이건 100% 자업자득이었다.

여친은 속으로 기겁을 하면서 남친을 신고했고, 이 소식은 여친 쪽의 아버지를 거쳐 무려 이스라엘 총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결국 모사드 요원까지 동원해서 1960년 5월, 현지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사냥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를 기어이 이스라엘에서 재판에 넘기고 처형해 버렸다.

쟤들은 유대인 학살 전범이라면 그야말로 지옥까지 쫓아가서라도 제거하려고 눈에 불을 켠 복수귀 상태였다. 감정 같아서는 모사드 요원이 곧바로 그놈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고문해서 한 100번은 죽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허나, 최고 상관인 총리가 절~~대로 그러지 말고 놈을 멀쩡하게 생포해서 반드시 재판정에 보내라고 엄명을 내렸다. 사적 보복을 그렇게 간신히 막았다.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무려 9개월이나 걸렸으며, 주요 장면이 전파를 타고 전세계로 모조리 중계됐다고 한다. 이 사람의 배배 꼬이고 뒤틀린 심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아이고 아이히만 얘기가 너무 길어졌네.. 암튼 이 사람은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피해 갔지만 훗날 잡혀서 더 험한 꼴을 당하고 이스라엘 법정으로부터 단죄를 받은 유일한 사람이다.

(6) 다음으로 '요제프 멩겔레'. 이 사람은 일본 731 부대의 사령관이었던 '이시이 시로'의 독일판이었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을 마루타 취급하면서 자기 꼴리는 대로 온갖 잔혹한 생체실험을 벌였던 인간백정인데.. 전후엔 그 아이히만처럼 남미로 도주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안 잡히고 천수를 누렸다!!

기록에 따르면 1970년대 말에 브라질에서 수영을 하던 중에 심장마비로 60대 후반의 나이에 급사했다고 하는데.. 행적에 비하면 정말 편안한 최후였다.
다만, 이 사람도 아이히만이 덜컥 잡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정말 엄청나게 쫄고 겁 먹고 멘탈이 약해지기는 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생체실험에 관여한 나치의 악마 의사는 멩겔레 말고도 '카를 브란트'라든가 '카를 게프하르트' 같은 사람이 더 있었다. 얘들은 다행히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회부돼서 사형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7) 하인리히 뮐러는 히틀러 친위대의 간부에다 게슈타포 국장을 역임했던 나치의 핵심 간부였다.
저 아돌프 아이히만의 상관이었으며.. "아이히만 같은 일꾼이 우리 독일에 50명만 더 있었으면 유대인들은 금세 씨가 말랐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전쟁을 이겼을 것이다~"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독일의 패전이 임박했고 히틀러가 자살한 직후~~ 싹 증발해 버렸다. 나치 고위 간부 전범들 중에 유일하게 '실종'돼서 전후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남미로 도망쳐서 완벽하게 잠적하고 자연사했다기보다는 아마 실종 당시에 폭격을 맞아서 죽고 시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싶다.
참고로 나치당의 우두머리에다 히틀러의 개인 비서까지 역임했던 '마르틴 보어만'도 베를린 포위전 이후로 실종 상태였다.. 허나, 이 사람은 1972년에야 시신이 발견되면서 사망이 확인됐다.

(8) 헤르만 괴링은.. 히틀러빠 광신도에 유대인 혐오로 똘똘 뭉친 뚱뚱한 아저씨였다. 자세한 행적은 잘 기억이 안 난다만 이 아저씨는 체포돼서 전범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총살형을 내려 달라는 요청이 소련 측에 의해 묵살되고 교수형이라는 통보를 받자 매우 실망=_=, 낙담하여 몰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살이라는 점은 힘러와 동일하지만, 그 타이밍이 다르다.
한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 출신인 '루돌프 회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동일한 수용소에 세팅된 전용 교수대에서 처형 당했다.

(9) 회스 말고 '루돌프 헤스'는..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을 받아 적은 이력이 있을 정도로 히 총통의 오래된 최측근이었다. 허나, 1941년에 일찌감치 연합군에게 체포돼 버리는 바람에 전쟁 중에 대놓고 사고를 치고 전쟁 범죄를 저지른 건 없었다. 그는 이 점이 감안되어 전범 재판에서 사형까지는 안 당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는 다른 여러 나치 전범들과 함께 '슈판다우 교도소'에 수감됐는데.. 어쩌다 보니 무려 1980년대까지 살아남으면서 넓은 교도소를 혼자 전세 내어 사는 처지가 돼 버렸다. 다른 죄수들은 만기 출소하거나 건강이 너무 나빠져서 죽거나 가석방 됐는데 이 사람만 그 어떤 조건에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나치에게 제일 치를 떨던 소련조차도 "쟤는 이제 그만 풀어 주자"에 동의할 지경이 됐으나.. 그는 1987년에 무려 93세의 나이로 굳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사람이 죽으면서 슈판다우 교도소는 통째로 철거됐다.
나치 전범들 중에 이런 식으로 감옥에서 죽은 사람은 헤스가 유일했다.

5. 뒤끝

(1) 독소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던 1941년 11월, 나치 독일은 흑해에서 소련의 병원선 아르메니아 호를 폭격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배에는 5000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모조리 몰살당해 버렸고, 생존자는 단 8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 뒤 전쟁이 끝나 가던 1945년 1월에는 반대로 소련 잠수함이 독일의 유람선 ‘빌헬름 구스타프 호’를 어뢰로 공격해서 격침시켰다. 이때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피난민과 상이 군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그 중 9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케이스 모두 엄밀히 따지면 군함이 병원선이나 민간 선박을 공격한 것이기 때문에 제네바 협약 위반이고 전쟁범죄였다. 특히 빌헬름 구스타프의 경우, 이건 인류 역사상 단일 선박에서 사람이 제일 많이 죽은 침몰 사고였다. 우리나라의 우키시마 호? 대한항공 007 격추? 그것들 희생자를 아득히 능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자기 배를 격침시킨 소련에다가 항의하고 따질 수 없었다. 자기들이 먼저 한 짓이 정상적인 짓이 아니었으니까.. 공론화하지 않고 그냥 쉬쉬 하고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2)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2차 대전이 끝난 직후에..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유대인들, 가족과 친지를 나치에 의해 잃은 사람들은 당연히 독일이 죽이고 싶도록 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건 한국인들이 해방 직후에 가졌을 반일 감정보다도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트라우마로 인해 더 극단적인 신념을 갖게 됐다. 나치 전범 윗대가리 겨우 수십 명만 감방에 가두거나 죽이는 걸로는 텍도 없으니 니들도 우리와 똑같이 죽어 보라고.. 독일놈들이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600만 명 죽였으니까 이젠 우리도 독일인들을 신분 지위 불문하고 똑같이 600만 명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그걸 시도했던 유대인이 있었다. ㄷㄷㄷ

이들은 ‘나캄’(히브리어로 ‘복수’!!)이라는 이름의 비밀 결사를 만들어서 독일 내부의 상수원에다가 독을 타고 수용소에 납품되는 식료품에다가 독을 집어넣는 식으로 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공작이 허술했는지 금세 잡혔다.

독일 경찰은 나캄 조직원들을 체포하기는 했지만.. 이제 막 나치가 패망했던 와중에 이 사람들을 도저히 단죄하고 처벌할 수 없었다. 저들의 원한과 빡침을 생각하면 그들을 잘못 건드렸다간 독일의 이미지만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니 독일 측에서는 그들을 기소하지 않고 이건 서로 없던 일로 하고 유야무야 넘겼다.;

이상이다.
원래 연합국 진영에서는 일본이나 독일 같은 패전· 전범국들을 국가와 민족을 유지는 시켜 주지만 차 떼고 포 떼고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는 나라로.. 앞으로 전쟁의 전 짜도 입에 담지 못하는 약소국으로 거세시키고 싶어했다. 쟤들이 워낙 크고 끔찍한 사고를 쳤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

같은 연합국 진영에서 미국과 소련이 이념 차이로 갈라졌다. 그러니 미국은 공산주의를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이런 전범국들을 슬그머니 다시 소생시켜 주게 됐다. 나라가 너무 못 살고 백성들이 굶주리면 사상적으로도 그만큼 취약해지며, 적화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저런 나라들은 전쟁에서 지고 인프라가 다 파괴됐어도, 고급 인재들 머릿속에 있는 지식과 노하우는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금방 다시 일어나서 강대국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전쟁 폐허 상태이던 1947년에 최초로 노벨 상 수상자까지 배출했고 말이다.

뭐, 일본은 헌법에다가 군대 미보유와 전쟁 포기를 명시했고, 독일은 탈나치화를 워낙 빡세게 했더니 통상적인 애국심 민족주의조차 없어지고 밍밍해져서 난리일 지경...이다.
특히 이 두 나라들은 핵 무장은 일~~절 안 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다. 걔들이 전범국 주제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핵을 개발하겠다고 깝친다면.. 이건 국제 어그로를 제대로 끌면서 진짜 작살이 났을 테니 말이다.;;

오늘날의 UN 상임이사국을 제외하면 오히려 인도, 중국 등 신흥 강국들, 2차 대전 이전에는 식민 지배도 받고 약골이었던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려 난리를 치는 편이다.
그 대신 독일은 몰라도 일본은 상임이사국 자리를 아주 오래 전부터 탐내고 있다. 하지만 과거의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의 견제와 뒤끝 때문에 그건 쉽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5/07/11 08:35 2025/07/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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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엔 예로부터 무시무시하고 끔찍하고 일본에 대한 증오 적개심이 풀풀 생길 전시물이 좀 있었다.

일본은 일제시대의 시작과 끝 시기에 서로 다른 양상으로 반인륜적인 짓을 저질렀다. ‘끝’은 731 부대처럼 중일/태평양 전쟁 때 이판사판 인간이기를 포기한 짓거리이고..
‘시작’은 초기 헌병 무단통치 시기에 누구든 말 안들으면 닥치고 무식하게 다 총칼 휘두르면서 위협하고 찍어누르고 고문도 하던 걸 말한다. 둘의 차이는 ‘흉악’과 ‘흉포’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독립기념관은 3· 1 운동이나 독립군을 성역화하고 띄워주는 곳이라는 특성상, 일본에 대한 포커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 흉포 쪽에 맞춰져 있다. 옛날에는 전용 전시관의 이름부터가 ‘일제침략관’이었는데 지금은 ‘겨레의 함성’(제3관)이라고 바뀐 듯하다.
“3· 1 운동 당시에 만세 시위에 참여하던 사람이 잡혀가서 이런 일을 당했다~~”와 관련해서 개인적으로는 이게 기억에 남아 있다.

(1) 남자는 팔 하나 짤린 모습 사진.
(2) 여자는 머리는 다 풀어헤쳐지고 양팔 묶인 채 매달려서 상반신이 인두로 지져지는 모습 인형 모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코렁탕 물고문이나 손톱 뽑기, 길다란 벽관에다 며칠 세워 놓는 비교적 평범한(?) 케이스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봤던 것 같다. 그러나 저거는 진짜 독립기념관 ONLY 전유물인 것 같다.

자고로 고문이라는 것의 목적은 “혐의를 인정해! 자백해!” 아니면 “니 동료들 있는 곳을 불어!” 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저 때 일제 왜경· 헌병이 자행한 고문의 의도는 그냥 “너 이 X끼 이래도 만세질 할 테냐? 오냐 오늘 누가 이기나 보자!”였다. 법대로 집행하는 형벌이 아니라, 조폭 양아치마냥 그냥 해코지· 가혹행위를 동반한 공갈협박일 뿐이었다. 여자한테는 성희롱 추행 폭행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고문 하는 놈도 “이런 독한 연놈을 봤나!” 하면서 악에 받쳤겠지만, 당하는 쪽은 더 악에 받쳐서 “내가 죽으면 죽었지 네놈한테는 절대로 고개 안 숙인다 이 천추의 원쑤놈아!!”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유 관순 정도는 워낙 예외적이니까 “이런 짓을 여고생 혼자서 벌였을 리가 없다~ 진짜 주동자를 불어!”도 추가됐겠지만 말이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백이나 정보를 받아내려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대한 독립 만세 외쳤다고 무장도 안 한 생사람 사지를 짜르고 인두로 지지나? 그건 좀 이해가 안 된다.

(1) 남자는 나도 먼 옛날 학창 시절에 학교 수학여행 때 어렴풋이 봤던 기억이 난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2) 여자는 본인이 직접 본 기억은 남아 있지 않고.. ‘콩숙이의 일기’에서 독립기념관 관람 에피소드에 저 고문 장면 사진이 있는 걸 봤던 기억이 있다. 1~3편 중 뭐더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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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에피소드에서는 콩숙이도 울고불고 하면서 “너무 끔찍하고 잔인해~~ 저 쳐죽일 일본 나쁜놈” 한다. 그리고 친구 중에 온통 일제(일본산) 전자기기를 쓰던 애가 자기 잘못을 반성(?)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더라. 1990년대 초엔 아동용 개그 수필집에도 저런 반일 코드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ㄲㄲㄲㄲㄲㄲㄲ
심지어 내가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라는 일본어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문헌이 바로 이 책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세월이 흐르니 이젠 유 관순뿐만 아니라 노 순경, 어 윤희, 임 명애 같은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실 동료들에 대해서도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 제법 알려졌다.
천안 말고 수원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여학생인 이 선경 같은 사람도 발굴됐다.
그러나 먼 옛날부터 독립기념관에서 저렇게 인두로 지져지는 고문을 당하는 걸로 묘사된 여성은 누구로부터 모티브를 딴 걸까..??

3· 1 운동 때 누구누구가 일제로부터 온갖 참혹한 고문, 폭행, 가혹행위를 당했다~~ 요렇게 독자에게 빡침을 유발하는 기록들은 대체로 박 은식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가 출처이다. 거의 기독교회사 “피 흘린 발자취” 같은 냄새가 나지 않는가?
이 문헌을 훗날 국가기록원에서 발간한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2016)에서도 많이 인용했다.

거기 기록에 따르면(pp. 90~93)..
출신과 나이가 불명인 노 영렬이라는 여성이 저 모형에서 묘사된 것을 포함해 그보다 더한 악형을 당했던 사례라고 나온다. 소속은 학교인데 정확한 명칭도 불명이고 그냥 '여자고등보통학교'(여고!) 소속이라고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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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안 먹이고 며칠 간격으로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악에 바친 노 열사가 "독립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죽어서라도 다시 태어나서도 끝까지 만세를 부를 것이다~ 너희 왜놈은 물러가라!" 이런 식으로 소리질렀다고 한다. 결국은 일본 경찰인지 헌병인지 걔들도 기세에 질려서 풀어는 줬다.

그 뒤 저 노 영렬이라는 사람이 어찌 되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심지어 학생으로 소개됐다가 나중에.. 1946년도 신문 보도 자료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교사였다고 신분이 정정됐다(!!). 그만큼 베일에 싸인 인물이고, 훈장 추서 같은 것도 당연히 전무하다.

노 열사는 3· 1 운동 참여로 인해 경찰서인지 헌병대인지 끌려가서 잠깐, 어설프게 린치만 당하다 풀려났을 뿐, 정식으로 투옥돼서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울나라에서 보상을 해 주고 싶어도 못 한다.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요즘 독립기념관 제3관엔 저 열사의 모습을 포함해서 고문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모형들이 없어진 것 같다. 최소한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터 말이다. 끔찍하고 섬뜩한 수위에 비해 당사자에 대한 '물증'이  불분명하기 때문인 듯?

제3관을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 있는 VR 디지털 관람 기능으로 쭉 살펴봤는데.. 앞서 언급했던 팔 짤린 남자 사진이 제일 잔혹한 모습이다. 안타깝지만 이분도 정확한 신원은 불명이다.
요즘은 항일 관련 전시관에도 애들 트라우마 생길 고문 장면 묘사, 심지어 고문 체험(!!) 시설은 빼는 추세인 것 같다. 비슷한 변화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도 있었다고 한다. (고문 신음소리 재생, 벽관 고문 체험 등등..)

이상이다. 갑자기 하나 꽂혀서 별 걸 다 찾아봤네. +_+;;
아무쪼록.. 1910년대 무단 통치 치하에서 일제가 한국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엔 저런 것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고 싶다. 3· 1 운동 시위대에다가 총질하고, 붙잡아서 투옥만 시킨 게 아니다.
한편으로 기록이 없어서 발굴되지 못하고 잊혀져 버린 무명의 독립운동 참여자 기여자들은 저 때 얼마나 있었을까~ 이것도 대단하게 느껴진다.

조선/대한제국의 말기도 서민들에게 절대로 살기 좋은 시절이 아니었다. 동족의 무능한 암군과 탐관오리들이 자행한 트롤짓도 절대 무시 못 할 수준이었는데.. 그 뒤의 일제도 통치를 얼마나 등신같이 했으면 차라리 조선 왕조가 더 나았다고 저런 대규모 저항이 발생했겠는가? (2등 신민이라고 차별은 차별대로 하면서 비슷하게 억압, 수탈..) 이 또한 생각할 점이다.

(1)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오늘날 일본은 헌법 차원에서 공무원에 의한 고문과 잔학한 형벌은 그냥 금지가 아니라 "절대 금지한다"라고 적혀 있다(제36조).

(2) 3· 1 운동은 비록 표면적으로는 일제의 총칼에 완전히 제압되고 진압되는 걸로 끝났지만 이건 일본의 국제 위상을 실추시키고 걔네들에게 멘탈 대미지를 꽤 크게 입혔다. 코리언인지 누군지 어디 듣보잡인지는 모르겠지만, 쟤들이 일본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가 세계로 전파됐다.

(3) 오늘날 한국을 찾아온 일본인 관광객이 서대문 형무소 같은 델 들어가면.. “에에에에? 이런 잔인한 시설을 우리 선조가 만들었다고요? 그럴 리가!” 기겁을 하면서 당장 관광 가이드한테 무릎 꿇고 사죄를 하고 난리 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물론 국가 간의 관계와 개인 간의 관계는 서로 별개로 봐야 할 것이고, 선조의 잘못을 굳이 후손이 도의적인 것 이상으로 심각하게 연연하면서 난리 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옛날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헐린다고 하니까 그건 놓치지 않고 꼭 보러 일본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이 잠시 크게 증가한 적도 있었고 말이다.

(4) 콩숙이라는 사람은 지금은 어디서 뭘 하며 살려나?? 문득 궁금하다. 근황올림픽 같은 데서 취재 가능하면 좋겠다!

지금은 일본 대중 문화도 다 개방되고, 반일 감정도 콩숙이의 일기가 출간됐던 저 시절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반중 감정이 저때보다 훨씬 더 강해졌으니.. 격세지감이다. 세월 앞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5/05/20 08:35 2025/05/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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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마츠 관광 (2024/12/9~11)

본인은 지난 11월에 결혼한 직후에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로부터 1개월쯤 뒤에 새 직장 취업을 앞두고는..
백수 생활 졸업을 기념하여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시즌 2격인 외국 여행을 한번 더 다녀왔다.
가까운 일본을 딱 2박 3일 동안 방문해서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1.
이건 관광 가이드 없이 여행사 측에서 왕복 항공권과 숙소만 잡아 준 자유 일정 여행이었다.
본인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모든 외국 여행은 (1) 도착지에서 작정하고 만날 사람과 용무가 있는 여행이거나, 아니면 (2)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패키지 관광이었다. 심지어 신혼여행조차도 숙소만이 부부 단위로 private이지, 관광은 4개의 커플이 가이드와 함께 다닌 (2)번 형태였다.

그런데 도착지 공항에서 나를(우리 부부) 맞이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외국 여행은 이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후속 교통수단을 알아보고 이동하는 걸 전적으로 관광객이 직접 해결해야 한다.
일본 문화와 일본 여행 잘알인 아내가 없이 나 혼자 이런 걸 시도할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2.
본인은 비행기 타고 일본 가는 게 이게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옛날에 쓰시마(대마도) 섬 관광은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다녀온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일본의 진짜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혼슈' 땅은 아직 한 번도 못 가 봤다.
타카마츠는 일본 우동의 본고장이라고 불리는 중소도시인데, 한국으로 치면 뭐 나주, 곡성, 임실 정도의 규모와 인지도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쓰시마는 한국으로 치면 아예 울릉도 정도의 시골이었을 테니, 그때보다는 좀 더 발전(?)한 셈이다. 앞으로는 혼슈에 있는 교토, 오사카 같은 대도시를 거쳐 도쿄도 방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 =_=;;

3.
아울러, 본인은 인천 공항에서 서쪽(동남아, 유럽..)이 아니라 동쪽(일본,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 것도 이번이 정말 엄청나게 오랜만이었다. 2008년 미국 방문 이후로 처음이었을 테니.
서울/인천에서 국토를 동남쪽 대각선으로 내려가서 일본으로 가는 항로는 G585라고 명명되어 있다. 얘는 정확하게는 포항 영일만 일대에서 우리나라 영토를 빠져나가서 일본으로 간다.

이런 드문 항로로 비행을 밤이 아닌 낮에 할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한 달쯤 전 신혼여행은 왕복 모두 밤 비행기여서 경치는 꽝이었음)
여담이지만, 50여 년 전 박 정희 시절에 포항 영일만 바닷가 부근의 언덕에서 사방 공사(= 나무 심기)가 대대적으로 진행됐던 이유도.. 여기가 비행기 항로와 가깝기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있다.

한국과 일본을 비행기로 오가는데 일본 영토는 산들이 온통 초록색 수풀로 뒤덮인 반면, 한국은 처음으로 마주치는 포항부터가 시뻘건 민둥산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서로 비교되고 국제적으로 창피하니까 저기부터 먼저 나무를 심고 정비했다는 것이다. 뭐 설득력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4.
끝으로, 본인은 신혼여행과 이번 일본 여행이 인천 공항 2터미널을 구경하고 이용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본진이라 할 수 있는 1텀은 마지막으로 이용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지경이고.. 2009년부터 지금까지는 오로지 탑승동만 이용했기 때문이다.

탑승동의 내부는 정말 겁나게 길쭉하기만 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2텀은 출국 심사를 받고 들어간 대기 공간 안에도 거대한 홀(?)이 있고 마냥 기존 건물의 대칭 버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인천 공항은 건물과 비행기가 무조건 탑승교로 연결돼 있었던 것 같던데, 2텀은 꼭 그렇지 않은 듯했다. 인천 공항에서도 비행기 타러 갈 때 램프 버스가 등장한 건 내 경험상 2텀이 최초였다.

글쎄, 2024년 11월쯤부터 인천 공항이 인력 부족에다 새로 도입한 보안 검색 장비의 장애 때문에 여행객들 처리 속도가 미치도록 느려졌다고 원성이 자자했다. 뉴스에서도 이게 대대적으로 보도됐을 정도이다.
하지만 우리는 비수기 때 공항을 이용해서 그런지.. 아니면 1텀+탑승동이 아니라 2텀을 이용해서 그런 불편을 딱히 겪지는 않았다. 탑승 수속과 보안 검색을 싹 마치고는 면세 대기 공간에서 탱자탱자 놀다가 비행기를 탔다.

다만, 비행기가 문 닫고 출발과 택싱을 시작한 뒤부터 인천 공항 활주로 안에서 삽질하고 기다리는 시간이 15~20년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너무 길어졌다. 이것도 만만찮게 답답하고 불편한 사항이다.
200x년대에는 내 경험상 비행기가 택싱부터 이륙까지 15분이 국룰이었으나.. 오랜만에 비행기를 다시 타 보니 이젠 15분은 텍도 없다. 진짜 30분씩은 걸리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워낙 너무 많이 드나들어서 저러나..? 그 광활한 활주로를 이리 저리 꼬불꼬불 돌아다니면서 뭘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는지 모르겠다.

암튼 잡소리가 너무 많아졌는데.. 본인은 이번 여행을 계기로 공항과 비행기에 대해서 오래된 경험 기록들을 여럿 갱신할 수 있었다. 타카마츠에 가서 사진은 음식, 몇몇 풍경, 열차, 리츠린 공원 위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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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륙하고서 얼마 후의 풍경이다. 그 광활하고 방대한 인천 공항이 1텀과 탑승동, 2텀까지 모두 이렇게 한눈에 들어오다니 매우 신기했다.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나니 이미 일본 영공에 들어갔다. 낮이긴 했지만 이제는 구름에 가려서 아래 경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인천 공항에서 타카마츠 공항까지는 1시간 20분이면 갔다.
이 노선은 저비용 항공사들의 나와바리인 듯하던데, 그래도 수요 많고 장사 잘 되는지 내가 탔던 비행기도 승객들로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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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마츠 공항은 2층(출국)에 우동 국물이 흘러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는 걸로 유명하댄다. 오뎅 국물도 아니고 우동 국물이라니..!
하지만 우리 부부가 갔을 때는 국물이 제공되지 않아서 이걸 실제로 맛볼 수는 없었다. 일본 도착 직후, 그리고 한국 귀국 직전에 모두 살펴봤지만 헛수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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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안에 우동 전문 식당이 있어서 곧바로 일본 우동의 세계를 탐험해 봤다. 확실히 한국 우동은 얘네들 우동과는 좀 다른 쪽으로 분화가 진행된 것 같다. 심지어 용어조차도 왜색 추방한답시고 ‘가락국수’라고 바꾸네 마네 하는 지경이니.. 마치 오뎅과 어묵의 관계처럼 말이다.

모밀, 라멘, 우동이 일본의 3대 면 요리인 듯? 그에 비해 잔치국수, 칼국수는 한국의 전통 면 요리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동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빨리 먹는 간편식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하지만 본동네는 그렇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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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는 숙소에 도착하고 나서 다른 유명 맛집에서 맛본 카레 우동이다. 와이프가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한국에서 우동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 먹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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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일본..!! 인구 40만 남짓인 이 타카마츠에도 광역전철 배차간격으로 다니는 도시철도가 있다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역들은 1~2km 간격으로 놓여 였으니 딱 도시철도 수준이다.
차량은 2량 1편성짜리 전철이고, 무엇보다도 선로가 협궤가 아니라 표준궤였다.
대도시가 아니다 보니 타 전철에서 퇴역한 낡은 차량이 싸게 싸게 투입되는 듯했다. 차내에는 심지어 천장 선풍기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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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지에서 두 노선이 선로를 잠시 공유하는 곳은 복선이고, 그렇지 않고 한산한 곳은 단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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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와 함께 타카마츠에 있는 '나카노 우동학교'라는 델 찾아갔다.
'엔자' 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갔다. 주변 풍경이 참 전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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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12시 반, 우동 면을 뽑아서 열심히 누르고 밟고, 이걸 직접 끓는 물에 넣어서 불리고는 간장에 찍어 먹는 프로그램까지 참여했다..!
주변에 한국인은 없는 듯했고 설명도 다 일본어로만 진행됐지만, 그래도 옆 사람을 보고 눈치껏 얼마든지 따라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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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으로 소개돼 있던 시내의 어느 회전초밥집에서.. 정말 최고로 만족스러웠다.
일본은 엄연히 한국보다 더 잘 살고 소득이 더 높은 나라일 텐데.. 교통비는 X랄맞을지 몰라도 밥값은 일본이 한국보다 절대 더 비싸지 않았다. 게다가 맛과 양과 메뉴 종류도~~
하다못해 제일 싼 계란초밥도 노른자가 더 큼직하고 울나라 것보다 훨씬 더 맛있었다. 물론 한국처럼 초장, 김치, 구운 김을 구경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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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당일 마지막 일정으로 오전에 리츠린 공원을 산책했다.
서울로 치면 서울숲이나 북서울 꿈의 숲 같은 느낌이었는데.. 정말 방대하고 숲과 호수가 어우러져 경치가 아름다웠다. 모든 산책로들을 천천히 탐방하는 데 1시간 반이 넘게 걸렸던 걸로 기억한다.

대외 공개 가능한 컨텐츠는 이 정도?
시간이 더 충분했으면 3박 4일 이상 일정을 잡아서 붓쇼잔 온천도 가고 고토히라 신사라든가, 주변의 섬도 둘러봤을 텐데~~ 그렇게는 못 해서 아쉬웠다.

Posted by 사무엘

2025/01/30 12:00 2025/01/3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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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의 "까라면 까"

1. 까라면 까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공밀레 "까라면 까"는 이 둘이지 싶다. -_-;;

(1) "흠~~~ 엔진이랑(정확히는 보일러) 엘리베이터가 큰 이상 없다니 그럼 됐다. 이 정도 대미지는 사흘이면 충분하다. 요크타운을 이 기한 안에 수리를 마치도록. 우린 지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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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절, 배수량이 2만 톤을 넘는 큰 항모가 갑판에 이전 전투(산호해 해전) 폭탄을 맞고 다 부서져서 함재기를 적재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전문가들이 보니 이건 제대로 수리하는 데 3개월은 잡아야 할 큰 대미지였는데.. 우리의 제독님이 3주도 아니고 3일로 기간을 일방적으로 후려쳤다.

군에서는 화들짝 놀라서 SCV들을 싹싹 긁어모아서 밤새도록 갈아넣고 특근을 시켰다. 무려 1400명에 달하는 정비공들이 달라붙어서 사흘 만에 간신히 외형을 복원하고, 함재기 적재와 항해가 가능한 상태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모든 수리가 제대로 끝난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 요크타운이 일본놈들과 싸우러 출항할 때, 공구를 바리바리 싣고 수리공들을 같이 태우고 갔다. 항해하면서도 계속 내부를 땜질하고 수리해야 했다.

이 조치 덕분에 나중에 일본군도 놀랐다. "어, 코쟁이들한테 항모가 하나 더 있었나? 요크타운은 우리가 분명 박살을 냈는데..???"
이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뒤, 이번엔 완전히 격침되어 침몰하는 걸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우리나라 손 원일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군함을 사 올 때 미친 협상력으로 가격을 말도 안 되게 후려쳤었는데... 니미츠는 이렇게 전시에 군함의 수리 일정을 후려쳤다는 차이가 있다.

(2) "우리는 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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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이렇게 선언을 덜컥 해 버리니 그 당시 NASA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든 게 소련에게 뒤쳐져 있었고 아무 기술이고 노하우가 없었는데.. 도대체 어쩌라고?

근데 천조국의 돈지랄과 미친 공밀레가 기적을 만들어 냈다.
1968년 말의 아폴로 8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들을 여러 단계 한꺼번에 밀어붙여서 사람이 기어이 달을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뭐 하나 삐끗 잘못했으면 사람이 지구로 못 돌아오고 우주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10호는 달에 내려가는 시늉만 잠깐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승무원이 자기는 달에 뼈를 묻고 말겠다고 객기 일탈을 부렸으면.. 큰일날 수도 있었다. =_=;; 아직 지구로 귀환하는 시스템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는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정말 가까스로 인간을 달에 무사히 착륙시키고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
자기가 직접 글을 썼는지, 아니면 참모진이 대필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역설의 진리로 독자들을 불끈 울컥 하도록 글을 잘 쓴 것 같다. 저 연설도 그렇고, "나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하기 전에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취임사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_=;;

2. 우리나라의 사례

(1) 우리나라에서 6 25가 터져서 한국 은행이 삽시간에 북괴한테 넘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울나라는 돈을 황급히 다시 만들어서 찍고 뿌려야 했는데.. 그걸 맥아더에게 부탁했고 맥아더는 "일본을 상대로 까라면 까"를 시전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이었고 패전국 일본은 이 기회에 무조건 미국한테 잘 보여야 했으니... 조폐국(?? 그 당시 대장성) 인쇄부 근로자들을 무기한 야근 철야 명령과 함께 갈아넣었다. 나중엔 GHQ 병사들이 총 들고 인쇄 공장을 찾아와서 직원들을 호위 겸 감시· 재촉했대나..
새 돈 도안 마스터판은 단 이틀 만에 완성됐으며, 돈 한 트럭 분량을 열흘 만에 찍어서 비행기로 실어 날랐댄다. 이거 통상적으로 최대 6개월 가까이 걸릴 일이었다고 한다. =_=;;

(2) 미국이 인간을 달에 보내려고 용 쓰던 동안 우리나라는 경부 고속도로 닦겠다고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으며 용쓰고 있었다. 당재 터널 하나 못 뚫어서 사람 10여 명이 죽고 난리였었다. =_=;;;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인부들이 며칠 씻거나 옷을 못 갈아입으면서 일했고, 도로 포장을 하던 롤러 운전사는 작업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용변을 그냥 자리에서 지릴 정도였다. =_=;.

3. 태평양 전쟁 시절의 미국 대통령

사실, 태평양 전쟁 시절엔 니미츠 제독 이전에 미국 대통령부터가 노발대발해서 내리갈굼을 제일 먼저 시전했었다.
영화 진주만에서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대사. "Do not tell me it cannot be done"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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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인 나도 이렇게 벌떡 일어섰는데 당신들 내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는 일체 말고 까라면 까시오.
우리 조국의 아들들이 불의의 기습을 당해서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됐는데 뭐? 폭격기 항속거리가 부족하다고? 무리하다간 항공모함마저 털릴 위험이 있다고?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왜놈들한테 무조건 당장 보복하도록 하시오! =_=;;"

천조국은 이때부터 한 근성 했던 것 같다.
쟤들은 일본에게 천 배 만 배 보복한답시고 처음부터 일본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 버린다거나, 일본 민간인까지 몽땅 잔인하게 학살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쟤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기습 당하고 허를 찔리고 뒤통수 얻어맞게 해야 된다고..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단순히 평범하게 전투에서 힘으로 밀어서 패배시키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항공모함에서 자그마한 함재기(프로펠러가 중앙에)가 아니라.. 육중한 육군 폭격기를 발진시킨(프로펠러가 양 날개에) 둘리틀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병맛스러운 일본 카미카제 특공대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멋있지 않은가?

4. 통계와 숫자

영화 미드웨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 레이튼: 일본군의 현재 동태는 이러한데, 첩보에 따르면 아마 요 때쯤에 요기 일대에서 요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어쩌구저쩌구 브리핑)
- 니미츠: 그래서 결론이 뭐지? 그 추측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한데? 어렵겠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라. 그래야 작전을 짤 수 있겠다.
- 레이튼: (하... 나더러 어쩌라고~ 자포자기하듯) 일본군은 오는 6월 4일 현지 시각 아침 7시 정각에 북서쪽 325도 방향으로부터 러쉬를 와서 미드웨이로부터 17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될 예정입니다.
- 니미츠: 좋아~ 난 내 부하의 말을 믿는다. 참모진은 저 정보를 바탕으로 곧바로 작전을 짜도록 해라.

(나중에 실전 당일에)

- 아무개: 적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북서쪽 320도 방향, 1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됐습니다~!
- 니미츠: (시계를 보더니) 오~ 레이튼. 오차가 딱 5분, 5마일, 5도밖에 나지 않았군?
- 레이튼: 충성! 다음번엔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상황에서나 저렇게 레이튼 소령 같은 뽀록을 만들 수야 없겠지만.. =_=;;윗사람,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거, 숫자, 통계, 데이터를 좋아한다. 저게 뭔가 군대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 잘하는 요령이고,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할 때 좋은 인상을 주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요령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이었다. (미드웨이는 거의 2019년 말 개봉이었고 저거는 2020년 초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 미쿡이 지난 반세기 이래 제일 낮은 실업률.
  • 700만 개의 일자리 창출, 지난 3년 동안 경제활동인구 350만 명 증가. 공장이 12000개 증설.
  • 어디 여성 취업률 72%..;;
  • 주식 시장 70% 성장, 국부 창줄 12조 달러.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우리민족끼리 평화, 착한 경제, 사람이 먼저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따박따박 무언가가 얼마만큼 생기고 경제가 살아난 걸 입증해 보이는 게.. 일단 말만 들어도 시원시원하다.

물론 숫자와 통계에도 속임수와 말장난과 조작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저것만 너무 집착하면 또 전시행정 같은 다른 부작용 폐단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와 통계는 두리뭉실하지 않고 일단 객관적이다. 하다못해 그걸 까고 반박하는 거라도 정확하게 공략해서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고, 최소한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담겨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란 말도 있잖느냐 말이다. (by 마크 트웨인 ㄲㄲㄲ)

우리나라도 근로자건 정치인이건 저런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우대했으면 좋겠다.
자매품으로 '협상 잘하는 요령'은..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와 있다고 여겨진다. 민병대 대장인 마틴이 적진에 홀로 찾아가서 구라까지 쳐서 포로들을 무사히 데리고 온 거 말이다.

5. 미국의 인내심의 한계

미국은 복수귀로 돌변하여 일본을 차근차근 쳐발랐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길어지고, 일본은 제 살 깎아먹으면서도 도무지 항복을 안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미국에 출혈을 강요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트라우마까지 추가되니 미국도 점점 지치고 악이 받쳤다.

병사들은 일본군 skull trophy를 챙기는 지경이 됐고, 수뇌부들은 핵폭탄 등 온갖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게 됐다.
핵 투하는 정말 인내심이 한계 중의 한계에 도달한 뒤에야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미국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쪽발이들은 이래도 항복을 안 할 것이다", "소련이라도 끌어들여서 힘을 합쳐 일본을 조져야 된다" 이런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리 승만 할배는 미국에게 그러지 말라고.. "니 혼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은 항복할 거다. 소련을 끌어들이지 마라. 전후에 한반도엔 미국만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 이렇게 독려했었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봤던 선견지명이었는데..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에 신탁통치조차도 반대하고 남북분단을 선택했으며.. 그게 이제 반영구적으로 굳어져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28 08:35 2024/04/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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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뒷북이긴 하다만.. 본인은 요 근래에 <건국전쟁>을 보면서 국뽕을 한 사발 잘~~ 흡입하고 왔다.
제목이 뭔가 낯익어 보이던데? 10여 년 전 옛날에 정반대 성향의 진영에서 만들었던 좌빨 다큐 영화는 <백년전쟁>이었구나. 그걸 의식해서 저 영화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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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나라는 딴 게 국뽕이 아니라 리 승만 보유국이었다는 거, 초대 국부가 할배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과분한 국뽕이었다.
SNS에서는 애국우파 네티즌들이 자기도 이 영화를 봤다면서 티켓 인증샷을 막 올리더라만.. 난 그런 릴레이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내용 요약 내지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관련 생각을 올리련다. ㄲㄲㄲㄲㄲ

1. 패턴

  • 조선은 말기에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이게 훗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화근이 됐다.

미국은 저 끈질긴 쪽발이 일본놈한테 학을 떼 버려서 진짜 될 대로 돼라~ 핵도 터뜨리고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제3자가 보기에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리 할배는 아무리 그래도 소련은 끌어들이지 말고 한반도에 미국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당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 때문에 미국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됐다.
하긴, 미국은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경고했던 할배의 선견지명도 업신여겼다가 된통 당했었다. ㄲㄲㄲㄲ

  • 박 정희는 기업을 육성하려고 민간 사채를 싸그리 정리하려다 보니(1972년 8 3 사채 동결 조치) 시간이 부족해서 유신 독재를 감행했다.
  • 그것처럼 리 승만은 재일 교포 북송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일본으로 공작원도 보내고(1959년).. 이걸 결판 내려는 욕심이 이듬해에 무리해서까지 4선 출마를 강행하는 데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오~~ 둘이 요렇게 연결된다니 신기하다.

2. 할배의 업적

  • 혁명적이었던 농촌 토지 개혁 -- 단군의 후손들을 단순히 나라 있는 백성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자기 땅도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 그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에도 교육에 투자하고 쓸데없이 민주주의 정신을 너무 많이 함양시킴
  •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50여 년 전에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걸 겪었으니.. 울나라는 이젠 두 번 다시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외교 역사상 최고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맺어 버렸다.

3. 누명

(1) 한강 다리 폭파 관련 거짓 날조 누명은 이제는 최초로 거짓말이 유포된 배후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다 까발려야 하지 않나 싶다.
건국전쟁 영화를 싫어하고 내용을 반박한 사람들 글을 검색해 보니 맹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 봉암, 최 능진.. 이런 사람들 사형 당한 것만 거론할 뿐, 이 런승만 날조의 반박에 대해 또 재반박을 하지는 않더라.

(2) 말단의 군경 간부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초대 내각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출신이 개뿔 절대 아니었다. 이 시영 가문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애산 이 인??
이 사람은 독립운동가 변호하고 한글학회에 재산 엄청 기부했던 애국자 법조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식의 친일파 단죄는 비현실적이고 무리라고 생각해서 반민특위의 해체에도 앞장섰었다!

(3) 리 승만 할배는 4 19 시국을 뒤늦게 파악하고는 "내가 맞아야 했을 총을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맞았구나" 그러면서 4 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갔다.
선뜻 하야하겠다고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며 시민들도 도로 같이 울었고 "리 박사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랬다. 세상에 참 이상한 바보같은 독재자다.
오히려 그 시절 언론 기레기들이 할배와 시민 사이를 마구 이간질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짤막한 여행을 무슨 죄 짓고 도피 망명이라도 가는 양 부풀려서 조작 보도를 했다.

4. 어처구니없는 현실

(1) 김 구는 단순히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 간 오해를 풀러 북한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쏘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조만간 남조선에 쳐들어갈 거고, 그러면 쟤들은 꼼짝없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는 이런 소리까지 뻔히 들어서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남한에 돌아와서는 "북한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미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 구는 우리가 아는 그 애국자 김 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을 10만원 지폐 도안에 넣겠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할배가 아니라 서 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딴 나라들은 간디 등 정상적인 자기 국부들 동상)

(3) 하와이에서 리 승만의 날 기념일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본토 조선인들이 하도 분노하고 반발· 반대하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됐다고.. 허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았다.

건국전쟁은 정말 국뽕 충만하면서 울컥하면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큐 영화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오고 상영관 불이 켜지자..  누가 시작했는지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이었는지 착석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곧장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이 거의 5초~10초는 박수를 치고는 나갔다.
할배가 1953년인가 54년인가 미국 상원 연설을 해서 열혈 기립박수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수 정도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옳소!” “아멘!” 이럴 뻔했다.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로 격한 공감을 대신 표현했다.

왜, "세상을 바꿔 놓은 책" 킹 제임스 성경 400주년 다큐와도 오버랩됐다.
그 위대한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은 정작 유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보잘것없이 어디 쳐박혀 있던데..
우리나라 국부도 저렇게 존재감 없는 취급을 받고 있구나..

이 조선?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처럼 쪽수 많은 대국도 아니고, 일본처럼 일찌감치 근대화 잘해서 열강 반열에 든 나라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식민지가 되든 공산화가 되든 이상할 게 없었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국력의 나라로 남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듣보잡 한구석에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미국의 이념을 적극 따르는 지도자를 둔 ‘깨어 있는 나라’가 있으니 “미국 니들도 여기를 다시는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마라~~ 니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다”이걸 각인시켜 놓은 주역이 바로 그 할배다. 이 능력을 겨우 킬구 아재랑 비교하냐? 허 참~~~

이런 영화 보는 것엔 돈 아깝지 않다. 다들 보고 그냥 파일 소장해라. 누구든지 꼭 봐라 두 번 봐라.
그야말로 할배가 잘한 것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거.. 진짜 정신병이다.
외국 나가서 교양과 상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배를 비하하고 부정하면 그냥 남한이라는 나라 품격 자체가 그냥 통째로 폄하되고 깎일 것이다.

크리스천인 가수 나얼이 이 영화 포스터를 개인 SNS에 올렸는데 그걸 갖고도 미친놈들이 욕하고 악플 달고 난리를 쳤었다. 기도 안 차서 원..
하지만 그 대신, 나얼이 누군지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얼?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자군. 음반을 구매해야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겼다. =_=;;; 팩트만 늘어놓은 다큐가 도대체 왜 정치색 논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건국전쟁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할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국에서 매년 국경일에 틀어 줘야 한다.
실제로 옛날에(2015~2016년) KBS TV에서는 주 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일사각오' 다큐를 무려 전국구로 방영한 뒤에 이듬해에 증보판(?) 영화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안 이숙 여사 얘기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난 그때 솔직히 놀랐다. 어떻게 KBS에서 CBS 같은 성향의 다큐를 저렇게 방영할 수 있었지?

아무리 일제에 의해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지만, 주 목사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항일 독립운동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가 국교가 있는 나라가 아니거늘, 광고 없는 국· 공영방송 급이라면 솔직히 주 목사 얘기보다는 리 박사 할배 얘기를 더 우선적으로 방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사각오와 비슷한 시기에(2016) 울산 MBC에서는 '마지막 간수'라는 안 중근 다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배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애국 다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1 08:35 2024/0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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