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선 등 옛날 철도 역사

1. 수인선 옛 협궤와 관련된 역사 맥락

수인선은 일제 강점기의 중후반기인 1937년 7월 11일에 협궤 형태로 개통했다가 지난 1995년 12월 31일에 완전히 폐선됐다. 최후까지 운행하던 구간은 수원-한대앞이었다.

수인선이 사라진 때는 대한뉴스가 폐지되고 방위병 제도가 폐지된 때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이다(1994. 12. 31.). 그리고 에쿠스가 단종되고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잡지의 월간 발행이 중단된 때로부터 정확히 20년 전이다(2015. 12. 31.)

상록수 최 용신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샘골이 수인선의 역세권에 있었다. 하지만 이분은 수인선 개통보다 훨씬 일찍 요절했다. (1935)
그래서 신 상옥 감독의 1961년작 옛날 영화 "상록수"를 봐도.. 이분이 버스에서 내리는 걸로 영화가 시작된다! 수인선 철도가 한 10년쯤 더 일찍 개통했다면 열차에서 내리는 걸로 씬이 바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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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영균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1977년작 주 기철 목사 전기 영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보면, 주 목사 가족이 열차 타고 평양으로 이사 가는 장면에서 수인선 '혀기' 증기 기관차가 달리는 씬이 잠깐 나온다. 딱 봐도 폭이 정말 좁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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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으로 가는 경의선은 표준궤였을 텐데 자그마한 협궤 열차가 나오는 건 영락없는 고증 오류다. 하지만 그 당시에 국내에서 증기 기관차 운행을 저렴하게 컬러로 촬영할 수 있는 곳이 거기였으니 수인선이 대신 쓰였던 것이지 싶다. 증기 기관차는 달리는 모습을 컬러로 보기가 생각보다 어려운 물건이다.

1937-1995는 뭔가 사람 인생 연대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록 자연사라고 보기에는 좀 짧은 감이 있지만..
내가 아는 유명인사 중에서 수인선 협궤와 lifespan이 가장 비슷한 사람은.. 이단 연구가 탁 명환 씨이다! (1937. 7. 8. ~1994. 2. 18.) 단, 이 사람은.. 병이나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살해당했다.;;
그리고 천문학자 겸 저술가인 칼 세이건(1934-1996)도 얼추 수인선 세대라고 볼 수 있다.

1995~96년은 철도청의 입장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둥근 터널을 형상화한 Q 모양의 철도청 CI (보신 기억 있으신 분??)가 거의 30년 만에 폐지되고, 레일을 역삼각형 모양으로 형상화한 새 CI가 이때 도입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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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Q자를 형상화한 듯이 생긴 로고를 본 건.. 게임 퀘이크 로고랑 철도청 옛날 CI였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노랑-초록의 철도청 도색이 등장한 것도 이때이다. 새마을호 열차가 새 도색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서 바뀌었다.

수인선이 폐지되고 나서 얼마 안 된 96년 1월에 서울 지하철 3호선의 북쪽 연장선 격인 일산선 구파발-대화 구간이 개통했으며, 96년 3월엔 철도 기술 연구원이 창립됐다.
그리고 전철 개통식 때 대통령이 친히 참석하는 관행도 김영삼 시절 이때가 거의 끝물 마지막이었다.
아이고, 수인선 하나만 갖고 연대기 얘기가 얼마나 미주알고주알 쏟아져 나오는지~! ^^

2. 1940년 열차 시각표

어떤 철덕 용자께서 무려 1940년, 지금으로부터 딱 80년 전의 한반도(조선) 열차 시각표를 구해서 엑셀로 알아보기 쉽게 전부 입력해 놓았다. 우와~!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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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선과 수인선도 있다. 수려선은 하루에 편도 5회, 수인선은 하루 6회 열차가 운행되었다.
말로만 듣던 금강산선은 하루 7회.. 경인선은 그나마 많이 다녀서 하루 15회였다. 참고로 경인선이 선로가 꼴랑 하나밖에 없는 단선이었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지금보다야 시설이 열악하고 열차의 속도도 엄청나게 느렸겠지만.. 어쨌든 한반도 역사상 철도 노선이 제일 다양하게 뻗어 있던 시절은 일제 시대였다는 걸 부인할 수 없겠다.;

더구나 1940년은 일제 시대 중에서도 철도가 최고로 번창했던 시기이다. 건설될 노선들은 사실상 다 건설된 말기인 데다, 40년 이후부터는 전쟁 때문에 여객 열차 운행이 줄어들고 일부 비수익 노선은 레일마저 전쟁 물자로 공출돼서 없어진 악화일로이기 때문이다. 저 때는 금강산선이 종점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니 다행이다.

이런 귀한 자료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그럼 맨 앞 페이지 경부선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이야 경부선이 수도 서울과 제2의 수도 부산만을 잇는 정도이지만.. 일제 시대에 경부선은 북쪽이 경의선과 이어져서 평양과 중국으로 가고, 남쪽은 연락선과 이어져서 일본으로도 연결됐다. 그 중요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뻘밭 천지였다던 대전은 경부선 덕분에 얼마나 발전할 수 있었을지를 짐작케 된다. 경부선 주요 정차역으로도 모자라서 호남선 분기 지점까지 됐으니 말이다~!
그 외에도 시각표를 보면 우리는 여러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다.

  • 아무래도 일본의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다 보니, 시모노세키-부산 연락선의 스케줄도 같이 기재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산에서 서울(경성) 방면으로 가는 게 하행이다. 상행이 아님.
  • 그래도 일제 시절의 로망은.. 열차 타고 중국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서 안동, 봉천, 신경, 북경은 한반도의 지명이 아니다.
  •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적은 열차 운행 횟수.. 그 시절에 열차라는 건 지금 우리가 여객기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위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 그래 봤자 저 때 다녔던 열차는 전부 '증기' 기관차였다. 디젤이나 전기 따위 없었다.
  • 경성-부산이 영업거리표 상 거리가 거의 450km에 달한다. 부산 역이 지금보다 바다에 더 가까이 있어서 1.7km 정도 더 길어졌고, 또 지금보다 선형개량이 덜 되어 길고 구불구불한 구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열차로 매일 부산 7시 5분 출발, 경성 13:45 도착.. 증기 기관차로 중간에 대전과 대구에만 정차해서 서울-부산을 6시간 40분 만에 찍었던 '아카츠키' 호는 그 시절 정말 최강의 갑부 금수저만 타는 최고급 최고속 호화 사치 열차였다.
또한 이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증기 기관차를 최강의 기술과 운영 노하우로 굴려서 산출한 속도였다.

한국은 해방 후에 1960년이 돼서야 증기가 아닌 '디젤 기관차'로 서울-부산 6시간 40분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무궁화호 우등 열차). 물론 일본은 그때 이미 시속 200km짜리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자체 기술로 개발하고 있었으니 격차는 또 벌어졌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에이트맨이 1963년, 신칸센 0계 열차가 정식 개통하기 1년 전에 출시됐는데.. 이때 벌써 신칸센처럼 생긴 열차가 나온다. 신칸센은 그만큼 개통하기도 전부터 국민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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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철도가 아닌 고속도로에서는 바다 때문에 더 연장의 여지가 없는 부산 방면을 상행으로 일률적으로 정해서 시행하고 있어서 일본 방면과 얼추 비슷해졌다. 서울 방면을 상행으로 정하고 있는 철도와는 다른 관행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27 08:35 2021/02/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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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역사 사건 분석

1.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적중한 "20년 텀" 예측

(1)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1919년 6월에 열린 베르사유 조약(패전국 독일 vs 연합국)에 대해서, "이건 영구적인 평화를 이뤘다고 볼 수 없고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휴전으로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딱 20년 뒤인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2) 1956년 7월, 미국의 전기 기술 전문가 시슬러 박사는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을 만나서 너님 나라는 원자력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자력은 화석연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꿈의 에너지입니다. 땅이 아니라 머리를 캐서 만드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자원 빈국인 한국 실정에 아주 적합합니다."

할배는 이 권고를 적극 받아들여서 그 가난한 나라 살림에 국비를 들여서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국비로 유학 보내 주고 교육 파견 보내고..
시슬러는 할배에게 "지금 원자력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그 꿈이 20년쯤 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거의 정확히 20년 뒤, 1978년 4월, 원조가카의 집권 후반기가 돼서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완공됐다.

2. 나라들 비교

세계 대전 진영

  • 일본은 1차 대전 때는 말석이나마 연합국 승전국 진영에 있었지만, 2차 대전 때는 미국을 대적한 추축국 전범국으로 전락했다.
  • 이와 비슷하게 중국은 2차 대전 때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뒤 어째 연합국 승전국 쪽 줄을 섰지만, 다음 세계대전(만약 벌어진다면) 때는 얘야말로 추축국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국력과 위상의 차이

  • 미국은 자국 내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이 전혀에 가깝게 없고(남북전쟁이나 미영 전쟁은 너무 옛날이고, 진주만이나 9 11 정도나 예외?? 그리고 그걸로 끝), 현재는 세계 곳곳에 자국 군대를 파견해서 다른 나라들을 도와주는 경찰 국가이다. (늘 모범 경찰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 일본은 옛날에 너무 사고를 친 벌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됐다.
  • 그 반면, 한국은.. X도 힘이 없고 자기들끼리도 제대로 못 뭉친 대가로.. 세계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살아남았고, 현재는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3. 일제강점기 전후에 일본의 변화

일본은 일제강점기의 거의 직전부터 육군 군복이 바뀌었고..
패전(자기네)과 해방(한국) 거의 직후부터 맞춤법이 바뀌었다.
그래서 딱 러일 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군복이 검정이다가 몇 년 뒤 호남 지방 의병을 토벌하던 무렵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그 황토 내지 황록색 군복 차림을 하기 시작했다. (1905년 38식 군복 ~ 1912년 45식 군복)

그 반면, 지금 쓰이고 있는 일본어의 표기 체계는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정립됐다.
1946년부터 히라가나가 공문서에서도 쓰이기 시작했고 표기하는 방식 자체도 살짝 바뀌었다. 상용 한자를 재정립했으며, 1949년에는 신자체라 해서 우리가 ‘약자’라고 부르는 그 간소화된 한자들도 완전히 공식화됐다. 나라 국을 或이 아니라 玉을 곁들여서 쓰는 것으로 중국 간체자보다 먼저 정한 것이다. (중공은 6 25 사변이 끝나던 때까지도 아직 或이었음)

요컨대 일본은 한반도 일제강점기의 앞에 군복 개편, 뒤에 맞춤법 개편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반도에서 1900~1910년 사이에 일제 시대의 시작을 열었던 철도가 경부선· 경의선(중국 연결)이라면,
1940년대에 일제 시대의 끝을 함께하고 끝내 완성되지 못했던 철도는 동해선(러시아 연결)이다.

금강산선(관광용..)이나 경북선(적자) 같은 철도는 이미 있던 선로도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뜯어갔었지만 이런 장거리 간선은 미래를 내다보고 일제가 전쟁 중에도 굳이 애써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일제 시대에 아직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일제 시대에 아직 한반도에 없었고 해방 후나 일제 말기가 돼서야 도입된 것들을 더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 디젤 기관차: 다만, 전기 기관차는 금강산선에 있었다. 195~60년대엔 우리나라에 반대로 디젤 기관차가 있고 전기 기관차는 없었다. (기존 기관차는 금강산선의 폐선과 함께 폐차됨)
  • 명조체: 일제 시대에는 여전히 개역성경체 같은 붓글씨 서체만이 쓰였다. 오늘날의 명조 같은 서체는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 손목시계: 아직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한반도에 내려왔던 소련군 양아치들이 즐겨 약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텔레비전: 천황 옥음방송은 라디오로 송출됐었다~! 다만, 일본 말고 서양의 독일은 아무래도 텔레비전 기술의 선구자이다 보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벌써 영화 필름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를 했다.
  • 길거리에 중앙선과 신호등: 경성 시내에조차 저런 게 아직 없었다. 일제 시대엔 아직 "자동차는 사람을 피해서 도로의 중앙으로 다닐 것"이라는 단선 철도 같은 규범만이 존재했다. 자동차가 워낙 적고 넓은 도로가 없었으니까..

5. 공작원, 핵 개발

할배는 말기 때 북한이 아니라 일본으로 테러 공작을 위한 공작원을 보냈었다. 다른 반일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던 재일 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김 구 암살범인 안두희조차 그 공작원 중 하나였다.
할배는 자국이 아니라 남의 나라 영토에 있는 자국민 동포가 거짓말에 낚여서 북한으로 가는 것까지도 저지할 정도로 정말 반공 박애주의자였다.

한편, 원조가카는 말기 때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기를 몰래 개발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저 사람 최대의 고민거리는 석유 파동과 주한 미군 전면 철수였지 싶다. 이론물리학자이던 이 휘소 박사야 이것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지만, 할배 때부터 육성했던 한국의 원자력 전문가가 이 휘소만 있는 건 아니었고, 핵 개발을 주도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비공식 회고에 따르면 원조가카는 96년쯤의 올림픽 유치와 행정수도 이전, 핵무기까지 짠~ 마무리 지은 뒤에 퇴임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행정수도 이전은 요즘 같은 국토 균형 발전 따위가 아니라.. 단순히 지금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한 것 때문에 구상하던 과업이었다.

원조가카가 암살 안 당하고 유신 헌법으로 9대 임기를 만료하면 84년, 10대 임기까지 만료하면 90년까지 가긴 했을 텐데..
공작원과 핵무기 모두 수장이 하야하고 암살당하면서 백지 물거품이 돼 버렸다. 뭐 둘 다 궁극적으로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고 국제적으로 여러 후폭풍을 감내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할배와 원조가카 두 분 다 북한과 관련해서 참 엄청난 일을 하고 있긴 했던 게 사실이다.

그 뒤로 남한이 허울 좋은 민주화니 화해니 평화니 헛소리에 놀아나면서 좋은 기회들을 다 병신같이 날린 바람에, 지금은 반대로 적국이 핵무기를 만들어 버리게 된 게 안타깝다.

6. 국내 최초의 로켓 개발

6· 25 사변의 휴전 이후 딱 정확히 6년 뒤인 1959년 7월 27일.
우리나라에서 국방 과학 연구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부 과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나름 40km 고도까지 날아간 다단계(3단) 분리 로켓을 개발해서 쏘아올린 적이 있었다.

아니 그 옛날에..?? 지금으로서는 정말 믿기 힘든 소식이며, 관련 전공자들도 이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는 “엥??” 이런다. 참관한 대통령은 비교적 친숙한(?) 박통이 아니라 할배였다. 시연 장소는 인천 바닷가. (☞ 대한뉴스 제225호 보도, ☞ 관련 자료)

할배 때 나름 그 없는 살림에 원자력 연구소도 만들었고 서울대와 한양대 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했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자기 입김이 직접 개입해서 설립된 인하대에다가는 아예 ‘병기공학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소식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연구 개발을 했으면 노하우를 꼼꼼히 기록하고 전수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 그러면 예전에 애써 개발했던 걸 또 중복 개발해야 된다.
저 때 우리나라의 로켓 연구는 이듬해 할배 정권의 붕괴으로 인한 나라 혼란,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발사체 개발을 싫어하는 미국의 견제로 인해 계속되지 못했다.

할배의 로켓, 원조가카의 핵이 연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배가 더 오래 살고 4· 19 따위 안 벌어지고 4대 대통령까지 갔으면 역사가 또 어찌 됐을지 모른다. 마치 “박통이 암살 당하지 않았으면”처럼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일본 재수교가 박통 때의 1965년보다는 확실히 더 늦게 성사됐지 싶다.

7. 최초의 국립공원과 우남 역??

서울 지하철 8호선은 복정과 산성 사이에 제법 긴 지상 구간을 지나는데, 여기 일대가 개발되고 역이 하나 추가될 예정이다. 그런데 이 역은 현재 계획이나 건설 중인 전국의 여러 추가역들 중에 유일하게 이름이 정해진 게 없어서 밋밋하게 ‘8호선 추가역’이라고만 불리고 있다.

이 역의 가칭은 오랫동안 ‘우남’이었다.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할배가 어째 남한산성에 꽂혔는지 1954년경에 유적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여기 근처를 지나는 도로를 닦고, 도로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우남호’라는 여객기도 있었던 시절인 걸 감안하도록 하자)

우리나라에 국립공원이라는 게 생긴 게 1960년대 박통 시절의 일이고 지리산 국립공원이 제1호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전에 할배도 국립공원이라는 걸 만들 생각을 했으며, 남한산성을 1호로 지정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게 할배가 물러난 뒤에 싹 다 리셋돼 버렸고 관련 기록도 별로 전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우남로라는 이름도 지금은 그 도로가 인근의 헌릉로에 흡수되어서 없어졌다.

안 그래도 2010년대 초에 성남시장을 포함해 관련 정치인들은 정치적으로 할배를 매우 싫어하고 할배의 흔적과 존재를 지우고 싶어하는 좌편향이었다. 그래서 개명이 광속으로 추진되어 우남로, 우남 역 모두 금기어가 되었으며, 8호선 추가역은 가칭이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역으로 전락한 것이다. 행정구역의 이름을 감안하여 중립적인 이름을 굳이 정한다면 위례 정도가 돼야 할 것 같다.

현재는 남한산성이 다들 아시다시피 국립이 아니라 도립공원이다(since 1971). 소재지의 행성구역은 광주시 중부면이다가 2015년에 면의 이름 자체가 '남한산성면'으로 바뀌었다.

8. 중국과 북괴

  • 옛날에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운동을 도와줬던 진영은 장 제스이지 마오 쩌둥이 전혀 절대 아니다! 중공은 대한민국의 북진 멸공 통일을 저지한 원흉이다.
  • 북괴는 일본이 패전 후에 GHQ로부터 참교육 받고 체제가 바뀐 것만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북괴는 일본이 그나마 립서비스로마나 사과하고 보상한 것만치도 과거사를 사죄한 적 전무하다.

이런 와중에 아직도 친일 청산을 못 했네 하는 헛소리는 많은 말이 필요 없고 그냥 망상 정신병일 뿐이다. 온갖 악하고 삐딱하고 잘못된 사상들의 근원이 바로 존재하지도 않는 일제 잔재나 친일파 따위 탓하는 반일정신병이다.
2010년대에도 아직도 전향을 못 했을 정도이면.. 진짜로 그냥 죽어야 낫는 말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저그의 패러사이트는 메딕의 리스토어로 고칠 수라도 있지, 현실의 반일정신병은 그런 것도 없다.. 팩트로 치유되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걸로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24 08:34 2021/02/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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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밀덕 역덕에게 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선 또는 서부 전선, 독소 전쟁 따위)은 아주 친숙할 것이고 한국 한정으로 6· 25도 친숙할 것이다. 그에 비해 러일 전쟁은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일본이 1905년에 한반도에 경부선 철도를 완공하고, 을사조약까지 체결해서 조선을 완전히 병탄하던 당시에... 대외적으로는 무슨 짓을 하고 있었고 내부의 사정이 어땠을까? 이를 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이때의 일본은 훗날 1940년대의 일본과는 여러 모로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 “203고지” 같은 그 시절 영화를 보니, 러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이 군복이 검정이었다. 완전 생소하게 느껴지며 적응이 안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제 시대 황록색 군복은 공교롭게도 딱 1910년대 초반부터 도입됐다.
뭐, 19세기 말에는 심지어 대한제국군의 군복조차도 검정이었으니 그 당시에 블랙이 세계적인 유행이었나 보다. 이때가 총기의 발달로 인해, 군대에서 때깔 고운 예복과 위장 친화적인 전투복의 구분이 이제 막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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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전을 앞두고 일본군에서는 보급로 개척과 동계 전투력 테스트 명목으로 한 육군 중대를 동원해 장거리 산악 행군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산중턱에서 전례가 없던 기록적인 혹한과 눈보라를 만나 완전히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해 버렸다. 이 때문에 210여 명의 병력이 거의 다 얼어 죽고 겨우 11명만 생환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전시도 아닌데 병력을 이렇게 많이 잃다니.. 이 사고는 1902년 ‘핫코다 산 참사’라고 불린다.

러일 전쟁은 명목상 일본의 승전으로 기록됐지만 속내는 잘 알다시피.. 마침 러시아도 상황이 안 좋고 일본도 전쟁을 더 끌었다가는 쫄딱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여러 뽀록이 잘 터지고 주변 국가들이 중재도 해 준 덕분에 간신히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것에 더 가까웠다. 이 때문에 일본은 전쟁 피해 배상금도 못 받았다.

러일 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일본군 지휘관으로는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더불어 육군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있다. 이 사람은 10여 년 전 청일 전쟁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그 다음으로 맞붙은 러시아는 중국과는 급이 다른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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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조선의 고종 황제도 그렇고, 20세기 초엔 장군이나 군주 같은 높으신 분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저런 스타일의 제복을 입는 게 유행이었나 보다.)

러시아의 함대가 대양을 횡단하여 도착하기 전에 뤼순 고지를 점령하려고 대규모 육군 병력을 “반자이 어택” 시켰으나.. 이전 같은 무식한 전술이 여기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조선 동학 농민군만 일본군의 기관총에 갈려나간 줄 알았는데, 일본군도 러시아의 맥심 기관총에 엄청나게 갈려나갔다. 1차 대전 서부 전선에서 유럽 병사들이 기관총 참호를 뚫지 못해 갈려나갔던 일이 이때도 비슷하게 미리 벌어진 것이다.

저것들이 다 전술 교리가 신무기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이제 막 발명되었던 탄피와 후장식 총기만으로도 혁명 그 자체였고 전쟁의 양상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는데, 하물며 기관총은.. 오늘날로 치면 핵무기와도 비슷한 압도적인 포스를 자랑했다. 기관총이 그 시절에 괜히 세상의 모든 전쟁을 종결시킬 최종 병기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아무튼, 이 때문에 전사자 유가족들이 단체로 노기 장군에게 쌍욕 편지를 보냈으며, 집 앞에 모여서 돌 던지고 “내 아들 살려내라, 이 살인자야!”라고 항의 시위를 할 정도였다. 이런 반발과 저항도 일본이 아직 태평양 전쟁 같은 막장 시절보다야 훨씬 민주적인 분위기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노기 장군 또한 인품이 아주 고매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사죄하고 부상병들을 일일이 문병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 사재 기부도 많이 했다. 결정적으로는.. 자기도 친아들 두 명을 이 전쟁에서 잃었다!
그는 그러고도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할복 자살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끼던 메이지 천황이 명령을 내려 할복을 금지했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런 삽질과 큰 희생을 치른 뒤에야 어쨌든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에서 이기긴 했다. 일본은 이 결과만으로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선진국 열강 인증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러시아와 일제 중 어디 식민지가 되느냐의 답이 한쪽으로 확 기울게 됐다. 그리고 노기 장군은 실책은 가려지고 최종적인 공이 부각되면서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세상 정세를 잘 몰라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조선인지 대한제국인지 하는 나라는 일본과 맺은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하나 둘 빗장 풀리고 해체되고 망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일본군 역시 이때는 서양 스타일을 표방한답시고 포로 학대나 민간인 약탈을 금지하며 일말의 신사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타락하기 전이었으니 낭만도 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20세기 초에 세계 여론은 일본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 따윈 거의 없었다. 훗날 미국에서 “관동 대지진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일본을 도와줍시다” 성금 모금까지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끝으로, 러일 전쟁 때 명암을 남겼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뒤따라 자결했다..;; 자결하지 말라고 자기를 말리던 상관이 죽고 없어지자 곧바로 상관의 뒤를 따른 것이다. 이것도 참..
이 정도로 솔선수범하고 책임을 졌다면, 노기 장군에게 러일 전쟁 초기의 판단 미스와 패전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을 더 늘어놓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10 08:36 2021/01/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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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청): 삼전도비와 독립문

영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6· 25 설마리 전투에 참전했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를 기념하는 전적비를 반드시 찾아간다고 한다(파주 적성면 소재). 영국은 나름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로 참전했던 나라이다. 본인은 지난 2013년에 거기를 답사한 바 있으며, 답사기가 이 블로그에도 올라와 있다.

다음으로 영국 같은 훈훈한 예는 아니겠지만, 옛날에 일본인 관광객이 서울을 들렀다가 반드시 찾아가는 관광 코스 중 하나는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에 놓여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였다고 한다. 뭐, 그 건물은 잘 알다시피 김 영삼 정권 때 헐렸다.

허나, 저것보다 더 안 좋은 예가 있다. 조선 시대에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얘들은 반드시 삼전도비부터 찾아가서 저게 잘 보존돼 있나 확인했다고 한다. -_-;; 그 이유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현장에 직접 못 가면 비석 표면의 탁본 인증이라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실감이 가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옛날에는 일체의 사대주의가 몽땅 다 지금 우리가 굉장히 부정적인 색안경을 끼고 보는..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밸도 자존심도 다 저버리는 비굴한 굴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옛날에는 사람과 국가 사이에 지금보다 뭔가 수직적인 위계 관계 질서가 훨씬 더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약자가 자기 팔자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근의 강자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조공 이상의 가성비로 다른 강자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뭐 그런 공생 관계가 필요한 것도 있었다. 이는 일제 시대에 일제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따랐던 사람들을 몽땅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하는 게 위험 편협한 사고방식인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조선의 경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어영부영 하다가 병자호란이 벌어졌는데 전쟁에서 그만 져 버렸다. 그래도 여러 나라 안팎 정세 덕분에 어째 나라가 통째로 멸망당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왕이 누구 보는 앞에서 이마를 몸소 땅바닥에 짓찧기까지 하면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든 모욕을 당하게 됐다(삼전도의 굴욕).

고려 시절에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몽골·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왕도 계속해서 충짜 시리즈로 나오던 적이 있었다. 훗날 구한말 때는 아관파천 같은 민망한 흑역사도 발생하긴 했다만.. 저건 그 시절에 통용되던 사대주의의 범주도 넘는 수준이었다.
삼전도비는 지금으로 치면 독립기념관의 야외에 내팽개쳐진 채 방치돼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 지붕 첨탑을 능가하는 극도의 치욕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놓여 있는 독립문은 바로.. 우리 조선이 드디어 황제-_-를 보유한 대한제국이 됐고 삼전도비를 애지중지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기념하려고 세운 것이었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벤트였다. 청일 전쟁 이후로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아웃 당했으니까..
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봤자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이 실질적으로 바뀐 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청나라를 몰아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독립문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일 장소에 '영은문'이란 게 있었다. 이름부터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영접한다"라는 뜻이며,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이 이 문을 통과하여 개선장군처럼 들어왔었다.
그랬는데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영은문은 헐어서 주춧돌 기둥만 남겼으며, 그 대신 독립문이란 걸 1896~97년에 걸쳐서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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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절에 서 재필은 독립문, 독립협회에다가 독립 신문까지.. '독립'이라는 단어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당시에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던 개화파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게 당장 최대의 과제이고 염원이었던가 보다.

이런 맥락을 모르고서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조형물인 줄로 아는 사람은 아마 성경에 나오는 '사자'가 lion인지 messenger인지 분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이지 싶다. (마침 위치도 서대문 형무소 근처이다 보니 일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더욱 오해하기 쉽긴 함.ㄲㄲㄲㄲㄲㄲㄲ)

물론 옛날 개화파 사람들 중에는 중국의 대안이 오로지 일본이라고.. 일본을 과신하는 착오를 범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친일 성향은 훗날 등장하는 매국노 반민족행위자의 친일 성향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는 훗날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뒤에도, 과거에 조선이 영은문을 허물었던 것처럼 '독립문'을 또 철거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경성 시내의 재개발을 위해 서대문(돈의문)을 헐었을 뿐이지..

일제는 오히려 그 시절에 내팽개쳐지고 방치됐던 삼전도비를 재정비했으며, 이것도 그래도 역사 유물이라며 문화재로 등재하고 관리· 보존했다. 참으로 역설적인 노릇이다. 과장 좀 보태면, 다 부서진 채 방치돼 있던 경주 석굴암을 조사하고 어설프게나마 복원 공사를 한 것과 과정이 비슷했다.

한편, 그렇게 몰락했던 청나라는 조선이 멸망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1912) 같이 멸망했으며, 그 뒤 중화민국을 거쳤다가 나중에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 & 대만로 갈라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은 땅덩이가 워낙 넓어서 몽땅 정복하기가 곤란했던 덕분에, 아편 전쟁이라든가 청일이고 중일이고 각종 전쟁에서 참패하고도 대놓고 멸망하고 외세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다. 단지 홍콩 같은 몇몇 지역을 잃었으며, 덕분에 문화가 이질화돼 버려서 수복 후에도 반쯤 특별구역처럼 됐을 뿐이다.

2. 일본: 1980년대 초반, 1990년대 중반의 반일

우리나라야 해방 이래로 지금까지 원초적인 반일 감정이 없던 적이 없었지만.. 1980년대 5공 시절에는 유난히 더했던 것 같다.
다음은 1982~84년에 발간된 무려 30권짜리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의 화보에서 '일본'을 찾아보면 나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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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로부터 일본에게 선진 문물을 전해 주고 일본을 근대화(?)시켜 줬건만, 걔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우리에게 상처와 피해만 끼쳤다는 뿌리깊은 배신감과 피해의식, 투철한 반일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이러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우리의 진정한 우방이 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코멘트 훈수까지.. ㅋㅋㅋ 관찰자가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의 극치다.
얘는 지금의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 두피디아의 전신으로, 집필진을 보면 온통 스카이 대학 교수들이 즐비하다. 나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서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그런데 일면 이해가 된다.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이 출간되었던 저 때는 일본의 역사 왜곡 발언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전국적으로 극에 달했었다.

정 광태의 그 유명한 "독도는 우리땅" 노래가 발표된 게 1982년.
박 영희 할머니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된 그 일기장의 주인이었다고 늘그막의 나이로 언론에 커밍아웃을 하며 일본을 공개적으로 규탄한 때도 1982년 여름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국민 성금을 모아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기 시작한 때도 1982년이다! (87년에 완공, 개관)
그러니 이 정도면 저 시기에 편찬된 민간 백과사전에 "일본은 각성하길 바란다" 같은 말이 본문은 아니어도 화보에 들어가고도 남지 않았겠는가?

1970년대에 북괴의 연이은 도발 때문에 전국민이 북괴를 규탄했었고,
1983년에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때문에 반소 감정이 폭발했었고..
2002년에 오노 금메달 사건과 여중생 장갑차 사건 때문에 반미 감정이 치솟았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누가 저질렀건 같은 수준의 잘못에 대해 같은 강도로만 규탄하면 된다. 그럼 문제될 것 없다. 그렇지 않고 진영을 가려가며 편파적으로 선동질 하는 놈들이 매우 불순하고 나쁜놈일 뿐이다.
저 책은 북한 쪽을 찾아봐도 역시 5공 시절답게 '북괴' 운운하면서 노골적인 경계심과 적개심을 표현한다. 일본이고 북괴고 다 공평하게 모두 깐다. 그러면 편파적이지 않고 차라리 낫다.

한편, 저 때로부터 10~15년쯤 뒤인 김 영삼 때도 유독 일본의 정치인들이 위안부나 독도와 관련해서 망언을 자주 했고, 반일 감정이 상승했던 것 같다. 그러니 대통령이 "쟤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발언까지 하면서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 버렸다.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저 때 새마을호 열차(= 국영 철도청 관할)의 안내방송에서 일본어를 잠시 빼 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지간히도 소심한 방법으로 저항했었다.;;

일본 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지도 않았고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컴플렉스가 훨씬 쩔어 있었던 옛날이야 그럴 수도 있었다고 치지만 지금은 무려 2020년이다. 1982년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북괴로부터 6· 25 시절 같은 군사력 위협을 느끼는 건 전혀 아니듯이, 일본에 대해서도 쟤들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태평양 전쟁 시즌 2 같은 짓거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적 수준이 일제 쇠말뚝이니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 나부랭이에 머물러 있는 반일은 좀 망상 정신병을 의심해야 하지 않나 싶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악성 친일파보다 더 나쁜놈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3. 한국: 꼬인 근현대사 비극의 근원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 중 상당수는
과거에 자국민의 힘으로 조선 왕조를 직접 끝장내지 못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무슨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하지 못한 것? 그건 별 의미 없으며 신경 쓸 필요 없다.

19세기에 조선은 말이 좋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지,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의 어느 못 사는 나라와 비슷하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비위생적이고 다른 나라와 제대로 교류하지도 않으면서 최악의 막장 고인물 썩은물이 되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차라리 이전의 고려가 조선보다는 더 개방적이고 국제 인지도가 더 높았기 때문에 한국의 영어 명칭조차도 ‘코리아’로 굳어지지 않았던가? 조선의 입김이 닿았다면 choose의 과거분사와 비슷한 단어가 됐을 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은 시작과 끝이 은근히 잔혹하고 악랄했다. 건국 초기부터(1400년 초) 특별히 반역이나 역모 혐의가 없었는데도 고려 왕씨들을 집요하게 색출해서 참수하거나 바다에 던져넣는 식으로 학살했다. 나중에 홍 경래의 난이 진압됐을 때는(1812) 수괴와 간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단순 가담자까지.. 10살 이상 남자는 전원 무려 1917명을 한 치의 자비심 없이 몽땅 처형했다.

하물며 말기에 개화파는..?? 그야말로 삼족이 멸해지는 참화를 당했다. 김 옥균은 외국 망명 중에도 왕이 직접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한 게 마치 북한 김 정남이 암살 당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저 사람뿐만 아니라 서 재필도 가족은 조부모, 부모, 자녀, 손주 세대까지 깔끔히 순삭 당했다.
고종과 민씨 일가는 외교와 경제· 군사는 등신 같았지만, 자기 밥그릇 지키는 데는 귀신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같은 건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여 자근자근 밟아 줬다. 그리고 그 외세는 조선의 무덤을 파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가 되니 조선 정부도 일본에게 내정간섭 좀 그만 하라며 뒤늦게 손사래를 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군이 경복궁 주위에까지 쫙 깔렸고 때는 너무 늦었다.
이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 쟤들은 거의 싸이코패스가 아닌가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국뽕 국사 교과서는 이 과오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특히 민비가 워낙 적절한 타이밍 때 잘 암살 당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청산리니 봉오동이니 하는 1920년대 독립군의 전과가 많이 부풀려지고 왜곡된 것으로 밝혀졌듯이, 20여 년 뒤의 광복군도 비록 취지는 훌륭하지만 그 규모와 전투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는 오로지 소비밖에 안 하는 집단이다. 지금 북한이 중국 없이 못 지내는 것 이상으로 그때 임시정부니 광복군이니 다 장 제스의 지원이 없었으면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겨우 그거 갖고 당당히 일본을 무찌른 전승국 대접을 받고 미국· 소련의 입김에서도 벗어난다? 남북 분단도 안 되었을 거라고? 꿈도 참 야무지다.

내가 예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일본이 핵폭탄 맞고 일찍 항복하고 허겁지겁 도망간 것은 걔네들한테나 우리한테나.. 특히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득이 훨씬 더 많았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뭔가를 수탈하고 망쳐 놓은 것을 논하기 전에, 구한말 때 이 헬조선 땅에 더 수탈하고 망가뜨릴 게 그렇게 많이 있기나 했는지를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7/11 19:35 2020/07/1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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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이 토벌된 이후로 일제 시대에 무력을 사용한 항일 독립운동 분야의 최초 원조는 (1)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보다도 전이니 독보적인 원조이다.
그 뒤 한 10년 정도 일제의 무단 통치를 경험하고 3· 1 운동까지 진압된 걸 보니, 일제를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동원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1919년 말에는 김 원봉의 주도로 의열단이라는 게 생겼다.

아, 의열단보다 근소하게 전인 1919년 9월엔.. (2)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 우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건 실패했다. 그는 현장을 탈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나중에 같은 조선인의 밀고로 체포되어서 조선인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래도 사이토 총독의 입장에서는 3· 1 운동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었지, 게다가 부임 당일에 자기 목을 노린 폭탄 의거까지 벌어졌지.. 당장은 이빨과 발톱을 감추고 민심을 달래야만 했다. 괜히 문화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통치 양상이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열단이 벌인 최초의 거사는 (3) 부산 경찰서를 노린 박 재혁이었다. 1920년 9월, 폭탄을 터뜨려서 경찰서장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다친 채로 체포됐고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당시 경찰서장이 중국 고전 덕후라는 정보가 있어서 그는 중국인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서 들어갔었다.

그 뒤 1920년대 초중반엔 본토 밖에서는 독립군이 활동했고, 본토 안 서울에서 권총과 폭탄을 쥔 의열단의 리즈 시절이 잠깐 벌어졌다.

(4) 김 익상은 일본인 전기 기사로 변장해서 1921년에 무려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폭탄을 몇 군데 투척해서 터뜨리긴 했지만 불발탄도 있었고 유의미한 인명 살상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도 변장 잘하고 일본어를 유창히 구사한 덕분에 안 잡히고 무사히 탈출했다.

의열단에서는 거기까지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게 참으로 용한데, 이제 그만 은퇴하고 니 인생 즐기라고 그에게 권유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이듬해에 일본의 육군 대장(다나카 기이치)을 암살하러 동지 2명과 함께 상하이에 갔으나.. 여기서도 권총 사격과 폭탄 모두 지독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들은 임무에 실패한 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김 익상은 뭔가 유의미한 1차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조선총독부 내부에 대놓고 침투해서 저만치라도 타격했던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2차 의거 때도 사형은 면했지만 1943년까지 일제 시대 기간 대부분과 자기 2, 30대 나이를 몽땅 감방에서 보내게 됐다. 명목상 석방된 뒤에도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다가 또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모로 좀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5) 김 상옥이 1923년 1월, 종로 경찰서 내부에서 폭탄을 터뜨려서 주변 일본인들 여러 명을 다치게 했다. 당일에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며칠 뒤 은신처가 탄로나고 서울 시내에서 포위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체포하려는 수많은 일본 경찰들을 상대로 혼자서 권총 두 자루만 쥐고 수 시간 동안 시가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견 간부급을 사살하고 부하들에게 중상도 입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했다.

(6) 나 석주는 1926년 말, 의열단의 거의 끝물을 장식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위장해서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져서 내부 시설을 부쉈다. 다음으로는 사장이나 행장 같은 특정 타겟 없이 그냥 주변의 VIP 같아 보이는 일본인들을 권총으로 마구 사살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도 대치하게 됐다.

결말은 3년 전의 선배 김 상옥과 비슷해졌다. 그 역시 마지막에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단번에 절명하지 못하고 체포된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충분한 치명상을 입은 덕분에 다행히 일제에 의해 고문과 처형 당하지는 않고 병원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은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실패한 거사도 몇 건 더 추진한 바 있다.
몇 년간 그렇게 해 봤는데 우리 역랑이 부족한 게 느껴지고, 딱히 대세가 바뀌는 건 없는데 귀중한 대원들의 희생만 더 커지고, 임시정부와도 손발이 썩 맞지 않고..

의열단은 일제 내지 내부 배신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일망타진 와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해체되었다. 김 원봉은 무장 투쟁을 할 거면 이런 게릴라 공작원 테러리스트 급이 아니라 정규군 급의 병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1930년대 초에는 김 구가 의열단을 대신하여 임시정부 명의로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은 의열단이 아니라 바로 저기 소속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7) 이 봉창은 잘 알다시피..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하고 일본인 지인도 많고 심지어 일본 경찰과도 인맥이 있어서 김 구가 처음에 이놈은 밀정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한참을 얘기를 나눠 본 뒤에야 끄나풀이 아니고 레알 동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총독도 아니고 무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하러 1932년 1월에 본토에 갔으며, 현장까지 잘 도달해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발 없이 잘 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신이나 마찬가지인 천황이 사람들에게 호락호락 얼굴을 비춰 줄 리 없었다. 천황은 면상은커녕 항복 방송 옥음(!)을 들려준 것만으로도 신민들이 벌벌 떨었던 존재인걸..;; 그는 똑같이 생긴 여러 대의 마차 중에 어느 게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히로히토의 생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8) 윤 봉길 의사의 의거는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역대급의 대박을 터뜨렸다. 물리적인 인명 살상 실적으로나, 상징성으로나..

게다가 이런 스타일의 유의미한 거사는 훗날 해방될 때까지 저게 사실상 마지막 대단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윤 봉길 이후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김 구의 신변도 위험해졌기 때문에 한인애국단은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1933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봉창과 윤 봉길은 모두 외국에서 거사를 벌이고 외국에서 순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열단 시절과 달리, 이렇게 가입 선서식 사진까지 존재하는데.. 그런데 사진들의 태극기 배경은 다 합성인 것 같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중근과 윤 봉길만 기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게 이 분야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용한 무기(전자는 권총, 후자는 폭탄)나 처형된 방식을 헷갈리기도 한다(전자는 교수형, 후자는 총살). 이들 이후로는 김 구도 개인· 소수 단위의 테러 의거가 아니라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이상이다.
누가 만들어 낸 구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똑같이 항거하고 투쟁했더라도 무기를 들고 싸운 사람은 의사라고 부르고, 맨몸으로 싸운 사람은 열사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준(헤이그 밀사), 유 관순, 전 태일 같은 사람은 열사이고,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은 의사이다. 국어사전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는 진짜로 저 기준으로 나뉘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는 컴퓨터라든가 각종 전자 출입 카드, X선 금속 탐지기 따위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저런 방식의 무장 항일 투쟁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폭탄과 권총을 어떻게 한반도로 반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안 중근(하얼빈 역)과 윤 봉길(훙커우 공원)의 경우, 초대장 내지 입장권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해당 행사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유창한 일본어로 "아이 씨, 티켓을 깜빡 잊고 안 가져왔네.. 이런 경사스러운 행사에 자국민도 못 들어가요?"라고 유창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둘러댄 덕분에 들어간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멘탈과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무장 투쟁이건 외교건 국민 계몽이건.. 독립 운동을 위해 다 필요한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주의이다.
현실성만 따지면 어느 것도 다 비슷하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고 비효율적인 삽질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안 했으면 일본이 원폭 맞고 깨갱 하고 물러갔다 해도 한반도가 자유 독립국이 된다는 보장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으로는.. 그 시절에도 난창 폭동이라든가 자유시 참변 등,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관련하여 선한 게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일 거라는 논리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게 도움을 준 적은 결코 없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라도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역시 그런 거 없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그렇게도 임시정부가 좋으면.. 친중을 하지 말고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친대만을 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장 제스가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도와 줬지 마오 쩌둥이 도와준 적이 있었냐? 후자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 통일을 저지한 원흉일 뿐이다.
오늘날 친중종북분자들의 유체이탈 궤변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12 19:35 2020/04/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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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와 현대의 전쟁 방식 차이 복습

옛날 전쟁에서는 겨우 성을 하나 정복하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거나 같은 높이의 언덕을 쌓는 등 별짓을 다 해야 했다.
그리고 해전에서는 배와 배끼리 접근하여 부딪치고, 발판을 놓아서 상대편 배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였다. 적선은 완전히 부수고 침몰시키기보다는 나포해 오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뭐, 목선이었으니까 아예 불질러 없앨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 잘못하면 아군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적의 군함을 노획(!)해 오는 병사는 그야말로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포상을 받았다. 군량미 한 섬을 적군 것을 노획해도 그건 아군이 일일이 수송해 온 군량미의 10배가 넘는 전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는데 하물며 배는 뭐.. 그 정도로 보상해 줘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지금 우리나라도 단순 간첩 신고 포상금보다 "간첩선"의 신고 포상금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전과를 세우는 병사 말고 공성전에서 사다리를 제일 먼저 오르기, 전열보병(!!) 시절에 제일 앞줄에서 머스킷 주고받기.. 이렇게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누군가가 반드시 맡아야만 하는 임무에도 동기 부여를 위해 엄청난 포상과(생사 여부 무관), 반대로 도주 시 엄청난 처벌이 뒤따르곤 했다.
무기의 화력이 부족하고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하던 옛날에는 어느 분야의 조직에나 닥치고 근성 의지드립 똥군기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횡행해야만 했을지가 짐작된다.

그런데 화포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이런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갑옷이 없어지고 방탄복으로 바뀌었다. 공성전이라는 것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을 쌓는 게 아니라 참호를 잔뜩 파서 방어하는 전술이 잠시 등장했다가 그걸 뚫기 위해 탱크라는 게 발명되었다.

현대의 해전은 교전 거리가 이미 수~수십 km에 달하며, 포탄은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날아온다. 눈에 보이는 거리에서 총탄을 교환하는 건 그냥 백병전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니 제2 연평해전 때 배 옆구리를 들이대서 막던 기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하고 불리한 짓이었는지도 다시 생각을..)

이렇게 먼 거리에 포를 정확하게 쏘려면 직사가 아니라 중력과 공기 저항을 감안한 곡사 궤적은 물론이요, 심지어 지구가 둥근 것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해수면이 무한한 평면이라고만 단순하게 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쏘는 방향에 따라서는 심지어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향력도 고려 대상이 된다. 포 하나 쏘는데 오만 물리 지식이 동원된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전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중까지는 군함이 크기가 왕창 커졌다. 돛 달린 목선이 엔진 달린 철갑선으로 바뀐 데다, 배가 커지면 더 많은 사람이 타고 더 멀리 더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함포도 그에 비례해서 더 커질 수 있으며, 더 강한 화력과 더 긴 사정거리를 보장하게 된다. 큰 배 한 척이 작은 배 여러 척보다 훨씬 더 나았다.

배의 지하에 수십 명의 노꾼들이 타고, 위에서 수병들이 화살을 쏘다가 상대편 적선으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이던 시절에 비하면 상황이 얼마나 극과 극으로 달라졌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거북선만 해도 노꾼이 필요한 배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세계 대전 시절이 끝나고, 군함을 폭격기와 미사일로 잡는 시대가 되면서 군함이 한없이 더 커지는 유행도 끝났다.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자그마한 비행기들이 추락에 가까운 고각 급강하를 하면서 적국 군함에다 포탄 내지 어뢰를 떨군 뒤 튀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해야 자유 낙하만 시키는 것보다 탄의 명중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지만, 이건 비행기의 입장에서는 항공역학적으로나(실속..) 군사적으로나(대공포 피격 가능성..) 매우 위험한 기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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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폭탄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뢰도 군함이나 잠수함이 아닌 비행기가 투하하고 가는 게 이례적인데.. 아무래도 비행기가 군함의 머리 위로 위험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배의 아래에서 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비행기에서 발사하는 항공 어뢰는 더 높은 고도에서 더 고속으로 바닷물에 떨어져도 내부 부품이 손상되지 않고 곧장 추진과 격발이 가능하도록 성능과 신뢰도가 계속해서 개선되었다.

이렇듯, 군용기야 같은 비행기끼리 공중전을 벌이는 전투기가 있고, 지상이나 수면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폭격기도 있다.
그럼 전함은..?? 망망대해에서 같은 배끼리만 싸우는 것 같지만.. 적당히 큰 배는 현대전에서 의외의 역할도 한다. 바로 육지에 근접해서 내륙에다 신나게 엄호 포격을 퍼부어서 아군의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것 말이다. 얘들이 어지간한 포병 부대를 능가하는 화력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 내지 장사리 상륙 작전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포격 장면을 응당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인천의 경우, 해안이 매우 얕고 조수 간만의 차이도 심하기 때문에 군함이 한없이 안쪽으로 들어와 줄 수 없다. 해병대가 차량 지원도 없이 뻘밭을 달려서 상륙해야 되니 더욱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라고 일컬어진 것이다. 현대전에서는 옛날처럼 사다리 타고 성벽을 오른다거나 적진 참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갈려 나가는 일은 없지만(대응 전술이 개발되었으니), 이런 해병대라든가 낙하산 메고 적진에 뛰어내리는 공수부대가 성벽을 오르는 거나 다름없어 보인다.

2. 태평양 전쟁

1940년대의 태평양 전쟁 때 활약했던 일본군 장성 중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리고 나중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반인륜 범죄 같은 이슈들을 배제하고 생각할 때, 군인으로서는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소신이었다. 그저 친미나 평화주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 국력으로 미국 같은 나라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논리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틀어지고 무역로도 봉쇄되는 등 국제 정세가 계속 불리하게 흘러가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기왕 미국과 싸워야 한다면 지금 같은 여건에서 상상 밖의 통수를 치는 것밖에 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서울대를 가기 위해 수능을 무조건 만점 맞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만 잘하면 되고, 위조지폐도 무조건 완벽하게가 아니라 그저 액면가보다만 비싸지 않은 퀄리티를 투자하면 되듯.. 적당히 미국을 타격하면 쟤들로 하여금 "쟤랑 싸우면 우리가 이기기야 하겠지만 우리도 출혈이 클 테니 그건 귀찮.. 차라리 적당히 협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거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40여 년 전에 러시아를 꺾었듯이 이번에도 미국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이고 우리 민족은 야마토 정신이 깃든 대단한 민족이니까" 같은 근자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1941년 12월에 그 이름도 유명한 진주만 공습을 실행해서 처음엔 실제로 굉장한 피해를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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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은 그 뒤로도 반 년 정도, 대략 1942년 5월 정도까지는 승승장구했다. 연합국 연합군이 우왕좌왕 하던 사이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리즈 시절을 찍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그 기세에 밀려 필리핀에서 철수하면서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남긴 게 그 해 3월 11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리즈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통수에는 통수로.. 먼저 둘리틀 특공대를 보내서 일본 본토를 타격하는 깜짝쇼를 선보였다. 그 뒤 전열을 가다듬고 자기 국력을 총동원해 가히 show me the money급의 물량으로 비행기고 배고 무기고 식량이고 팍팍 찍어냈다.

일본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불굴의 정신력도 사실은 미국이 압도했다. 대공황을 버틴 깡다구에다가 일본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으로 눈이 시뻘개진 젊은이들이 "꼭 입대해서 쪽발이들을 내 손으로 때려잡고 싶습니다!"라고 줄을 서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홀시 제독이 외쳤던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는 요즘으로 치면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쑤" 내지, 둠가이의 "Rip and tear"이나 다름없는 구호였다. 그땐 물론 임프, 카코데몬 따위가 아니라 쪽발이를 성경의 왕하 2:24처럼 찢고 죽인다는 얘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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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그 뿐이랴, 미국은 정보전마저도 일본을 앞섰다. 쟤들은 일본군의 통신 암호를 쭉 해독해서 사실상 맵핵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연합군은 서부 유럽 독일군의 에니그마만 해독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놈들이(일본) AF라는 곳을 공격할 거라는데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딜까? 혹시 여기가 맞는지 우리가 낚시 무전을 평문으로 보내서 쟤들이 반응하는지 확인해 볼까?"라고 떠봤는데, 쟤들이 정확하게 거기에 낚여 준 덕분에 작전을 사전에 다 파악한 적도 있었다.

저기서 AF란 그 이름도 유명한 미드웨이였다. 일본이 미국의 통신을 도청했다고 자국으로 송신하는 메시지까지도 미국이 통째로 도청해 낸 것이다.
일본은 하와이와 가까이 있는 미드웨이 일대를 점령해서 영토를 넓히고 전세를 더 유리하게 이끌고 싶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942년 6월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대비가 단단히 돼 있었고, 전사자 수는 일본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전투에서 많이 손상을 입었던 요크타운 항공모함 한 척이 격침된 것 정도가 전부였다.

미드웨이 해전은 우리 식으로 풀이하자면 미국판 명량해전이나 마찬가지인 승전보였다. 얘는 인류의 전쟁 역사상 최초로, 해전이지만 전함의 함포가 아니라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서로 먼저 마주쳐서 싸우고 적선까지 격침시킨 전투였다.
그 뒤 1942년 11월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놓았으며, 이때부터 전세는 슬슬 미국과 연합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는 미국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동선과 스케줄을 '맵핵'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우연을 가장한 특별 작전을 펼쳐서 그 적장을 제거해 버렸다! 소수의 전투기를 출격시킨 뒤, 전선 시찰 중이던 저 사람이 탄 수송기를 벌집으로 만들어서 추락시키고 튄 것이다.
미국은 자신이 일본의 무전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번 사건도 철저하게 우연한 전과로 치부했으며, 그 뒤에 일본이 의심스러워서 낚시 역정보를 퍼뜨리는 것에는 반대로 절대 응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본을 아주 그냥 갖고 논 거나 다름없었다.

1944년의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는 회생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었고..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난 지 2년 반쯤 뒤인 1944년 10월에야 귀환해서 I have returned라고 자평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여느 전선보다는 일본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인 이오지마 섬에 미군이 상륙하게 되었다. 이때 최선임 지휘관이었던 일본군 장성이 바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이다.
그는 어차피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면 우리가 최대한 오래 살아서 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놈들을 최대한 귀찮게 하고 최대한 피해라도 끼치자고.. 지는 걸 전제로 하고 예전과 좀 색다른 전술을 폈다. 3년 전쯤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놈들은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기 때문에, 엄폐물 없는 해변에서 상륙 자체를 저지하는 것은 무의미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상륙은 허용한 뒤, 적이 깊숙이 들어왔을 때 게릴라전을 펼치며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괴롭히면서 정신을 빼 놓았다. 그는 반자이 어택 따위 하면서 절대로 허무하게 개죽음 당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적을 괴롭히라고 부하들에게 훈시했다. 해변에 방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섬 내륙 곳곳에 지하 땅굴과 동굴을 이용한 아지트 네트워크를 꾸며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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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래 봤자 섬은 끝내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궤멸을 맞이했다. 그래도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전략이 적중한 덕분에 미군은 1주일이면 끝날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땅따먹기에 1개월이나 소모해야 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의 인명 피해도 당하게 되었다. 워낙 고생해서 그런지 이모지마 섬 전투와 관련해서는 미 해병대원들이 산꼭대기에다 성조기를 꽂는 모습의 저 사진이 유명해졌다.

바로 다음 달 3월 9일과 10일에는 이제 도쿄 대공습이 펼쳐져서 일본의 수도가 불바다 잿더미로 바뀌었다. 옥쇄 항전 운운하는 정신나간 일본을 보면서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당했을 때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한편으로는 저런 또라이들의 본거지에 직접 쳐들어가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쳐들어가지 않는 대신 원자폭탄을 떨구게 됐다. 이제야 일본 천황이 직접 무조건 항복을 하고 드디어 전쟁 종결..

굽시니스트 님의 ‘본격 2차 세계 대전 만화’ 시리즈를 본 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인 진주만, 그리고 피날레인 원자폭탄 사이에도 연대기별로 다양한 사건과 전투가 있었다. 2차 대전은 전역이 워낙 넓었고 전개가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영화로도 제일 많이 만들어져 나왔다. 올해 초엔 마침 영화 ‘미드웨이’가 개봉해서 본인은 아주 재미있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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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이 전투기와 탱크가 첫 등장한 전쟁이라면 2차 대전은 로켓, 미사일, 핵무기, 컴퓨터 같은 것을 개발시킨 전쟁이다. 그래도 2차 대전을 끝으로 식민지니 제국주의니 하던 구도가 완전히 종결되었으며, 세계가 고전적인 형태의 전쟁은 없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시절에 일본은 정말 또라이 같은 나라였다. 쟤들이 어쩌다가 영국· 미국 하고도 사이가 순식간에 틀어졌는지 참 신통한 노릇이다.
물론 일본은 그 옛날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항공모함과 전투기, 잠수함을 독일로부터 기술 원조를 받아서든 어떻게든 자체 제작까지 했던 대단한 선진국인 건 사실이었다. 조선 따위 범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국력이 미국에 비하면 택도 안 되는데 육군과 해군이 대립하면서 따로 놀고, 레이더는 개발해 놓은 것을 적국이 먼저 활용하고 있는데도 정작 자기는 활용을 못 하고, 거기에다 무식한 똥군기와 의지드립으로 인한 폭주, 점령한 식민지에서 차라리 예전의 백인의 지배가 훨씬 더 나았다고 원주민들이 학을 뗄 정도의 폭압 학정 병크 등..
전반적인 행정 시스템과 정신 세계랄까.. 그런 소프트웨어들이 도저히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제국은 총체적 난국을 겪으면서 비참하게 몰락하고 전쟁에서 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07 08:34 2020/04/0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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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 상묵(1916-1984)이라는 사람은 살았던 시기와 젊은 시절 행적과 프로필이 원조가카(1917-1979)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에 같이 비교해 볼 만하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해서 교사를 몇 년 하다가 그만두고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만 해도 수입 안정적이고 명예와 처우가 좋은 매우 훌륭한 직업인데..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건 이례적이었다.

물론 이건 1930년대 말 이후가 돼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전쟁을 벌이느라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조선인까지 징병제로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황족이 아닌 평민 조선인에게도 일본군 간부가 될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인에게 총을 믿고 쥐어주고 자기 군대를 맡기기 위해서는.. 내선일체와 조선 민족 정체성 말살 프로파간다를 미치도록 밀어붙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 신 상묵과 원조가카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사가 된 덕분에 또래 청년들과 달리 군대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징병제 때문에 기왕 군대에 끌려갈 거라면,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병이 아닌 간부로 다녀오자"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군 간부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세부 디테일은 좀 차이가 있었다.

신 상묵은 부사관을 지원해서 오장/조장, 지금 국군으로 치면 거의 상사· 원사급에 올랐다. 근무지도 조선의 일본군 헌병대로, 정말 대놓고 항일 인사들을 고문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경찰 같은 군인 보직을 맡았다.

1940년대 일제 말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옛날 같은 수준의 독립 운동이야 이미 씨가 마른 상태였다. 그저 일부 자잘한 비밀 결사 수준의 국지적 저항이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무궁당 사건"의 수사와 피의자 취조를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악랄하게 했다. 이런 바닥에서 조선인이 단순히 헌병 보조원 끄나풀을 넘어서 최상위 간부 계급에 짧은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은 아무래도 구린 실적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

2.
그에 비해 박 정희는?
부사관보다 더 되기 어려운 장교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도 성적 우수자여서 온갖 특혜가 주어졌지만, 최소한 조선 본토에 오지 않았으며 타지에서도 있지도 않은 동족 독립군이 아니라 중공군과 싸우러 갔다. 하긴, 한 나라의 육사까지 나온 장교에게 겨우 헌병은 완전 재능낭비의 비전투 한직 병과일 테니..

요컨대 원조가카는 신 상묵보다 더 노력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신 상묵보다 훨씬 덜 악질적으로 일본군 복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긴 칼 차고 돌아와서 교사 시절에 자기를 깔보고 무시하던 일본인 동료들에게 설욕을 했다.

이 정도면 그의 의도는.. 본인이 누차 강조하지만 그냥 현실 불만족으로 인한 출세욕, 신분 상승 욕구였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이스트 졸업하고 나서 국내 공돌이들의 처우가 불만족스러워서 로스쿨, 의전을 다시 들어갔거나,
유명 운동 선수가 여러 처우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귀화한 것 정도의 일탈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940년대에 무슨 스포츠팀처럼 한국군과 일본군을 선택 가능하기라도 했었나? (광복군은 뭐...;; 논외로 하자. -_-)
그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업종에 종사했던 모든 조선인을 싸잡아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할 게 아니라면, 이 이상의 쓸데없는 친일파 헛소리는 논할 가치가 없다.

3.
그러고 보니 이 종찬(1916-1983)도 저 두 사람과 거의 같은 연배이고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이 사람은 부역자 수준을 넘어 진짜 매국노급 친일파인.. 이 하영의 후손이어서 집이 귀족 금수저 가문이었다. 그는 그런 빽 덕분에 박 정희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일본 육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기를 쓰고 거기 들어가려고 누구처럼 멸사봉공 혈서 따위 안 써도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에 참 군인 소리 들을 개념 행적을 많이 남겼으며, 이에 대해서는 할배나 원조가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저 사람은 애초에 일본군 복무하던 시절에도 비윤리적인 명령에 대해 "본인은 천황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신껏 항명을 할 정도로 강직했다.

4.
또한, 먼저 언급했던 저 신 상묵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출신에다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 진영에서 지금도 잘나가고 있는 정치인 신 기남이다.
이 사람은 다른 건 모르겠고 지난 2000년대에 한글날의 국경일 재지정에 관심을 많이 갖고 애썼던 덕분에 한글 학회 등 관련 운동 단체로부터 애국자라고 칭송받고 상도 잔뜩 받았었다. 그랬는데 부친의 과거 이력 흑역사가 뒤늦게 알려져서 곤혹을 치렀다.

5.
두 사람 얘기만 하려다가 세 사람 얘기가 돼 버렸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한쪽에다가만 친일파 프레임 씌우는 불순하고 멍청한 수작에 속는 사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도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고 누차 강조하는 사항인데.. 우리나라가 겨우 1940년대 말 건국 초기에 일제 군경 경력자를 재등용한 것은 Windows 95가 그때 컴터 환경의 한계상 도스/16비트 코드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당장은 신 상묵 같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됐다. 항일 인사를 잡던 그 수사 기술이라도 재활용해서 일본놈보다 더 질 나쁜 빨갱이들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 상묵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에서는 원조가카 같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 간부가 됐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에 반민특위를 해체했던 법무부 장관조차도 골수 친일파이기는 개뿔, 항일인사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한글 학회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한 민족주의자였다.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망상을 30대 나이가 넘어서까지 갖고 있어서는 심히 곤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4 19:35 2020/03/0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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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사람들 열전

1. 중국: 한어병음의 고안자

중국에서는 1950년대 말을 기해서 공식 표기 문자를 간체자로 바꿨으며, 비슷한 시기에 발음 표기도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주음부호 대신 알파벳 기반의 한어병음으로 교체했다.

간체자는 모르겠고 한어병음을 고안한 사람은 '저우 유광'(周有光)이라는 경제학자 겸 언어학자이다. 중국을 우주 개발 강국으로 터를 닦아 놓은 첸 쉐썬만큼이나 자기 나라에 큰 영향을 끼친 천재 중 하나이다. 각각 문과, 이과 버전인지..?

저우 유광은 겁나게 똑똑했을 뿐만 아니라 겁나게 장수하기도 했다. 1906년에 태어나서 바로 3년 전, 2017년에 죽었다! 이 얘기를 해 주니 중국인 지인들도 꽤 놀라더라. >_<
철덕의 예시를 든다면, 경부선이 개통해서 증기 기관차가 다니던 해에 태어난 사람이 SRT 수서 고속철이 개통하는 걸 보고 죽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자기 아들이 2015년에 80살의 나이로 먼저 죽었다..!!

남자가, 그것도 장수촌에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스트레스 없이 산 할배도 아니고, 교수 등 고위관직을 넘나들던 아저씨가 110세를 찍었다니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백 선엽 장군이 오늘 내일 100세 진입이긴 하다만..

그리고 첸 쉐썬 박사도 저우 박사만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1911년 태생, 2009년 사망으로, 100세에 근접하며 꽤 장수했다.
비슷한 연배인 타국의 로켓 과학자들과는 확연하게 비교된다. 독일-미국의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 소련의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1966) 말이다.
누구든 몸 관리는 자기가 알아서 잘 해야겠다.;;

2. 일본: LHA의 개발자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1988년에 한국에서는 어떤 겁나게 똑똑한 의사가 '백신'이라는 이름으로 안티바이러스 유틸을 만들었다.
그런데 1988년에 일본에서는 어떤 겁나게 똑똑한 의사가 파일 압축 유틸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LHA. 개발자인 요시자키 하루야스는 최근 사진과 근황을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은 아니다만, 여러 사이트들에서 1955년생의 내과의사(physician) 겸 아마추어 프로그래머라고 그럭저럭 소개돼 있다.

저 사람이 압축 알고리즘 자체를 완전히 새로 고안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 당시 외국 서적을 통해 압축 알고리즘 이론을 공부해 보고는 흥미를 느껴서 그걸 그대로 또는 자기 식으로 조금 바꿔서 어셈블리어로 코딩해 보고 lzh 파일 포맷을 만들고, 파일들을 한데 묶어 주는 유틸리티를 구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그때는 PC 통신으로 파일을 주고 받기 위해서는 압축 유틸을 다루는 게 필수였다. 소요 시간과 전화 요금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껏해야 format a: , diskcopy a: b: 이러던 시절에 압축 유틸리티는 이례적으로 명령 옵션 사용이 좀 복잡한 프로그램이었다. 그 시절에 압축 유틸리티라는 게 lha a xxx.lzh *.* (압축하기) 이런 식으로 사용되곤 했기 때문이다.

LHA는 일단 일본 내부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국민 압축 프로그램으로 등극했으며,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한국에서도 유명세를 탔다. 내 개인적으로도 집 컴이 286 AT이던 시절, 태어나서 처음으로 써 본 압축 유틸리티는 pkzip이 아니라 LHA였다.
한국· 일본뿐만 아니라 영미권에도 알려졌는지, id 소프트웨어에서 Doom 같은 게임을 배포할 때 바이너리들이 이 방식으로 압축되었다고 한다. (정작 그 시절에 도스용 아래아한글은 내 기억으로 zip 압축이었는데..)

개발자분은 pkzip의 개발자인 필 카츠와도 종종 연락하고 친목을 나누면서 90년대 초까지는 프로그램을 버전업도 했다.
그러나 그는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인지라(능덕..) 프로그래밍에서는 서서히 손을 떼게 되었고, LHA는 후임 개발자 없이 압축률과 처리 속도 면에서 ZIP을 비롯한 타 압축 파일에 밀리기 시작했다. 유니코드, 64비트, 멀티코어 지원, 보안 문제 등등에도 대응하지 못했다.

Windows의 경우 XP에선가 zip 압축 파일 내부를 탐색기에서 일반 폴더 들여다보듯이 직통으로 조회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는데, 일본어판은 LZH 파일 내부도 그렇게 들여다보는 기능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직접 확인은 못 해 봤음)

허나 2010년대에 와서는 일본 내부에서도 각종 소프트웨어에서 LZH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대를 풍미했던 압축 파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만들었는지 LHICE라는 프로그램과 *.ice라는 압축 파일도 나돌았었는데.. 이건 그냥 LHA/LZH과 동일한 클론일 뿐이다.

3. 한국: 배우 신 영균

지난해 11월엔 원로 배우 신 영균 씨가 전재산 환원을 선언하면서 언론 인터뷰에 나섰다. (☞ 링크)
기사의 제목을 "내 관엔 성경책만 넣어 달라"라고 뽑으니 이거 뭐 당사자가 오늘 내일 하는 위독한 상황이고 유언을 남기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당사자는 91세의 나이에도 쟁쟁하시다. 사진만 보면 그냥 평범한 70대 노신사 정도로나 보일 정도로 건강하다~!

이분은.. 그야말로 만능 엄찬아였다.
집안 사정 때문에 서울대 치의대를 나와서 치과 의사를 시작했지만.. 연기를 너무 좋아하던 개인적인 꿈을 떨칠 수 없어서 결국 병원 때려치우고 이미 처자식이 있는 상태에서 데뷔했다. 196~70년대에 배우 및 영화 제작자로 전격 전업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유명한 1964년의 최고 흥행작 <빨간 마후라>에서 주연 배우를 맡았다.

이분은 그러다가 사업과 부동산 투자에도 손대서 대성공을 거뒀다. 영화관을 통째로 소유하는 등 몇백억 대의 자산가가 되었고, 나중에는 교수, 정치인까지 역임했다.
인생 자체가 영화나 다름없는 입 쩍 벌어지는 ㅎㄷㄷ한 분이다. 의사부터 하다가 사업, 정치까지 다 손대고 갑부가 됐다는 점에서는 안 철수나 공 병우하고도 비슷하네..

그런데 이분은 그냥 세상적인 성공으로도 모자라서 신앙까지 완전 독실했다. 프로필 상의 종교는 침례교였다는데..
그 당시에 잘나가던 배우들이 갖은 스캔들에 이혼 이력 하나 없는 경우가 없다시피했던 반면, 이분은 그렇지 않았다. 술· 담배 안 하고, 평생 한 아내하고만 아무 트러블 없이 가정과 직업에 충실하며 살았다.

이 정도면 가히 모든 걸 완벽하게 이룬 분 같다. 완전 부럽다. 자기 인생이 자기가 연기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자서전이라도 쓴 게 없나 궁금하다.
이런 옛날 사람에 대해 내가 어떻게 아냐 하면.. 잘 알다시피 예전에 “소령 강 재구”부터 시작해서 옛날 영화 좀 뒤져보다가 프로필이 하도 인상적인 분이 있어서 기억에 남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마침 17년을 재직하다가 91세 나이로 퇴직하신 맥도널드 최고령 알바 어르신 얘기가 보도됐던데.. 그분하고 거의 같은 연배인 것도 신기하다.

4. 박사

우리나라와 관련된 근현대 인물 중에는.. 대학원에서 논문 쓰고 통과되어 정식으로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지만 관례상 박사라고 불리는 인물이 좀 있다.

가령, 서 재필은 의사이지, 박사학위 소지자는 아니다. 아마 의사 doctor와 박사 doctor가 헷갈려서 박사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옛날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여사를 보고도 '호주댁'(오스트레일리아?)이라는 별명이 통용될 정도였으니..
뭐, 서 재필은 한국인 최초로 서양의 의대 코스를 마친 사람었으며, 의사는 그 자체만으로 석· 박사에 준하는 고된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이긴 하다.

또한, 호머 헐버트 역시 다트머스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박사학위 소지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정도 공식 학력만으로도 교육자로서 거의 대학 강사급의 일을 한 똑똑한 사람이긴 했다. 언어학, 신학 등 다방면에서 말이다.
이들과 달리 이 승만 할배야 누구나 잘 알다시피 진짜 미국 대학 박사 1호였고, 프랭크 스코필드는 수의학 박사였다. 공 병우 박사도 단순 의사를 넘어 나고야 제국 대학교에서 의학 박사 학위까지 딴 사람이다.

5. 과학 분야 노벨 상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일본은 이제 일곱째도 아니고 17째도 아니고.. 무려 27째 노벨 상 수상자를 배출했다고 한다.
저 동네는 애초에 중소기업 연구원이 노벨 상을 받는 미친 나라이다. 노벨 상이 무슨 동네 똥개 이름도 아니고 뭐 저렇게 흔해 빠졌냐..

지난 2014년엔 청색 LED 관련 연구를 한 사람이 물리학상을 받았었는데 이번에는 리튬이온 전지 차례구나. 디스플레이, 그리고 2차 전지.. 다 오늘날 매우 중요하고 실용성이 높은 연구 분야이다.
일본의 저력은 알면 알수록 대단하고 무섭다. 그리고 저런 라이벌을 과거에 실력으로 꺾었던 현대와 삼성 경영주와 엔지니어들이야말로 진짜 우리나라 최고의 애국자였다.

요즘은 노벨 상 수상자들의 연령이 예전에 비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평생을 한 분야 외길만 파다가 인생 황혼기인 7, 80대 때 받는 게 보통이다.
정말 엄청난 돈지랄 인프라가 필요해서 여기 국력과 경제력으로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예외적인 분야가 아닌 한.. 노벨 상 수상자가 나오려면 방망이 깎던 노인, 독 짓는 늙은이, 은전 한 닢 같은 근성의 외곬수 과학 기술 덕후가 존중받고 예우받고 마음껏 오덕질을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저런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그냥 떼거지로 우글거려야 하고, 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는데 덤으로 따라오는 구조가 돼야 한다.

우주인이니 금메달리스트니 스타 과학자(그놈의 노벨 상 받는)니 육성하겠다고 난리법석 떨고 나라에서 멍석 깔고 전시행정 쑈 헛짓을 벌이면 벌일수록, 우리나라는 노벨 상과는 더욱 멀어지고 요원해질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01 08:32 2020/01/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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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업보다 더 악한 것

내가 나이가 들면서, 특히 20대 나이에서 30대가 되면서 생각의 패러다임이 바뀐 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탐욕스러운 신자유주의(자), 자본가, 거대 다국적기업, 재벌에 의해 조종되고 이놈들 때문에 세상이 요 모양 요 꼴 됐다고 생각하던 게 달라진 것이다.

성경적으로도 내가 믿는 전천년주의 세대주의라는 게.. 인간의 힘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서 예수님 재림을 앞당기기는... 개뿔. 세상은 갈수록 타락하고 배도하고 망가지고 교회조차도 그렇게 다 망가질 거라고 인간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본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심판으로 끝나 왔다고 말이다.

물론 그건 크게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심상에다가 인간적인 감정이 가미되니.. 나 역시 무슨 막장 시한부 종말론까지는 아니어도 세상관이 필요 이상으로 염세 회의주의적으로 가긴 했다. 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세대주의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부정적인 편견이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생각이 큰 줄기가 아닌 작은 가지 수준에서 조금 바뀌었다.
그 기업가들보다 더 부패했고, 그 기업가 같은 돈과 권력을 얻었으면 비리를 훨씬 더 저질렀을 놈들이 넘쳐난다.
그런 기업들이 생기기 전, 현대와 같은 의· 약학 체계가 등장하기 전, 근대화·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의 세상이 그렇게 깨끗하고 해피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게 됐다.

탐욕스럽고 부패한 기업보다는.. 기업만 나쁜놈으로 몰아가고 나눔 분배 복지 외치면서 정작 자기는 자본주의 잘 이용해서 떼부자 돼 있고, 그러면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기 돈"으로 적선 기부 기증 따위는 한 푼도 한 적 없는 위선자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100배 1000배 그 이상..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사악하고 나쁜놈이라는 것을 절실히 실감하게 됐다. 특히 정치 분야에 있는 놈들 말이다.

비대하고 부패한 기업보다 훨씬 더 나쁜 건 비대하고 부패한 정부라는 것을 절감한다.
기업이야 당연히 자선단체가 아니고 무슨 "믿습니다" 신앙을 실천하는 종교 단체도 아니고, 그저 이윤 추구가 최우선 순위인 조직일 뿐이다. 다 착하기만 한 게 아닐 테고, 다 해먹는데 자기만 안 해먹으면 바보 되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지저분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허나, 우리나라는 현재 정체성과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시키는 놈뿐만 아니라 작은 악과 큰 악을 교란시키는 놈과도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음이 명백하다.

2. 낙수효과

"부자가 훨씬 더 부자가 될 수 있어야 가난하던 사람도 중산층이 될 수 있다."
일명 낙수효과인데.. 이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엄연한 팩트이다.

나 역시 금수저나 부자 출신 따위는 전혀 아니며 딱히 부자들 편을 들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양심과 지능으로는 저 말을 반박할 수 없으며 다른 대안을 내놓을 수도 없다. 저 길이 아니면 그냥 다같이 거지 되고 조선시대나 석기시대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다.

물론 인간의 경제라는 건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젠가 게임을 진행하는 것 같은 위험한 면모가 있다. 무작정 시장에다가만 맡기고 가만히 놔두면 치킨 게임 무질서 막장으로 동반 타락할 수 있다.
그러니 겉으로 대놓고 사기 치는 것, 법을 지키는 착한놈만 바보 멍청이가 되는 꼴은 세상 정부가 개입해서 강제로 막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재물만이 다가 아니라고 인간의 위험한 사리사욕에 제동을 거는 건 '종교'가 해야 할 일이다. 후자는 전자와 달리 세상 정부나 정치인들이 꼰대질 오지랖 부리면서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낙수효과에 대해 얘기하면 택도 없는 소리라고, 우리나라의 악독한 재벌이 어떻고 대기업이 어떻고 하면서 발끈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꼭 그런 부류들이 한편으로는
"북괴 정부를 도와주고 지원해 줘야 되고, 군인들부터 배불리 먹여 줘야... 일반 민간인 주민들한테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 ... 이런 말을 태연히 해 댄다.

기업의 낙수효과보다 100배 1000배는 더 황당하고 말이 안 되는 이상한 낙수효과 궤변을 늘어놓는 종북 빨갱이 하수인들은 어떻게 처치해야 좋을까? 생각 같아서는 진짜 오함마로 뚝배기를 깨 버리고 싶다.

3. 일본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했을 때는 조총이라고 불리던 머스킷으로 조선군을 쳐발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300년 뒤에는 훨씬 더 발전된 자동화기인 기관총을 들고 와서 동학 농민군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 이웃 나라가 저렇게 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 국방은 300년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뭔가 바뀌고 발전한 게 있었는가?

1964년, 도쿄 올림픽에 맞춰서 일본에서는 시속 200km 이상으로 상시 운행하는 고속철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그것도 '자체 기술'로 개발해서 말이다.
참고로 1960년대 초면 한국에선 서대동부만 찍는 최고속 우등열차 재건호(since 1962)가 서울-부산 소요 시간이 아직 6시간대였다. 이제 막 순간 최대 시속 100을 넘었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일제의 아카츠키 호가 무려 증기 기관차로 달성했던 소요 시간을 디젤 기관차로 이제야 따라잡았네 마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 뒤, 도쿄 올림픽 시즌 2를 앞두고 일본에서는 시속 500을 찍는 자기부상열차를 개발· 건설하고 있다(츄오 신칸센).
물론 이건 올림픽에 맞춰서 개통은 절대 못 하고 2030년대는 돼야 볼 수 있을 물건이다. 하지만 저건 계획대로 개통된다면 세계 최초의 도시 간 장거리 초고속 자기부상열차가 될 예정이다.

두 가지 예만 들었지만 일본은 뭔가 "발전"을 한다는 저력이 느껴진다.
뭐, 우리나라도 바퀴식 고속철이 시속 400 돌파 시험 주행까지는 성공했지만, 기술적으로 일본의 도움 없이 가능한 것일까..?
이래서 경제와 기술에서 극일을 달성한 현대, 삼성 같은 기업들이야말로 정말 진심으로 진정한 애국자인 것이다.
맨날 조선 피해자 코스프레 반일 선동이나 하는 골빈 선동꾼 빨갱이들 말고!

4. 미국

(1) 이 반도의 한국이라는 나라는 민족으로 따진 역사는 4천이니 5천 년이니 할지 모르지만, 국가· 헌정 체제는 20세기 이래로 상전벽해 급으로 널뛰기를 반복하며 격변했다. 조선에서 대한제국, 일제 식민지 조선, 대한민국 1~6공화국.. 국가 건국은 겨우 70년 남짓이요, 지금과 동일한 헌정 체제가 정립된 지는 인제 30년 남짓 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700년대 말 조선 정조 무렵에 신대륙에 한번 건국된 이래로 처음부터 공화정이었으며, 쿠데타 한 번 없었고 그때의 대통령제가 지금까지 정말 곧이곧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안정적이었으면 20세기에 각종 세계 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도 달러의 화폐 개혁 이력 또한 전무했다!

(2) 반도에서는 현충일 때 맨날 이 좁은 땅덩어리를 북괴의 침략으로부터 지킨 호국영령을 기리고, 아니면 기껏해야 일제 독립운동가들만 기린다. 삼면이 바다인데도 육군이 비대하다.
그러나 천조국은 재향군인의 날 때 1, 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한국전 참전용사,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용사 분야별로..
자국의 안보는 애초에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남의 나라들을 공산주의나 추축국 등 악의 진영으로부터 지킨 영웅들을 기린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섬 나라가 전혀 아닌데도 해군과 해병대가 발달해 있다.

(3) 반도는 1945년 해방 당시에 전국에 등록된 자동차 수가 남북한 지역을 통틀어 딱 8천여 대였다. 경성 시내조차도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고 신호등 따위 없었다. 아무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미군정이 자동차 통행 방향을 좌에서 우로 곧장 변경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이카 시대는 1980년대는 돼서야 시작됐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0년대에 이미 마이카 시대가 시작됐고 뉴욕엔 고층 마천루들이 즐비했다. 1930년대엔 대공황 때문에 좀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1940년대의 LA의 길거리와 자동차가 이미 반도의 1970년대 서울 중심부와 대등할 지경이었다.

(4) 반도는 1969년 여름에 서울-인천간 몇십 km 남짓한 경인 고속도로를 전구간 개통했다. 이게 반도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그러나 천조국은 192, 30년대에 이미 경부 고속도로보다도 더 긴 freeway들이 대륙 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렸으니.. 너무 많아서 처음부터 이름 따위 없이 번호를 붙였다.

그리고 반도에서 고속도로 하나 겨우 만들어 냈던 1969년 여름에, 천조국에서는 아예 인간을 달에다 착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의 개통 소식은 완전히 묻혀 버렸다.

아 물론.. "김 태희보다 못생긴 주제에.."라든가.. "박 태환보다도 수영 못 하는 주제에..", "폰 노이만보다 머리도 나쁜 주제에.."가 딱히 욕설이나 험담은 아니잖은가? 너무 자괴감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자기보다 잘난 사람, 잘난 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배우려 하기만 해도 시간과 여건이 부족할 판에, 생 찌질하게 시샘 질투하고 험담이나 하고 같은 양아치들하고나 놀면서 정신승리 하고 자빠져서는 세상을 보는 눈높이도 평생 그 따구 레벨에 머물 것이고, 발전이나 개선 따위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절 그 여건에서 무려 "독립정신" / "Japan inside out"이랑.. 꼴랑 "백범일지"가 비교가 되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5. 조선

저런 이웃 나라들에 비해 조선은 정말 한글 말고는 대단한 것, 자랑스러운 것, 선한 게 나온 게 도대체 뭐가 있었나 싶다. 특히 말기에는 너무 치욕스럽고 남부끄럽고 민망한 사건들밖에 없어서 보는 내가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 을미사변: 한 나라의 궁궐이 외국 자객들에게 뚫리고 털려서 왕비가 암살됨.. (왕비가 그리 존경스러운 인물이 아니긴 했지만, 일단 그와 별개로 "we salute the rank, not man" 지위를 생각했을 때..)
  • 아관파천: 군주가 무서워서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피신..

이놈의 조선 왕조는 임오군란과 동학 농민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오로지 자기 체제만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 자국민을 죽이기 위해 외세의 군병력을 끌어들였다. 그러면서 결국은 자기 무덤을 파고 조선이 멸망할 빌미를 주게 됐다.
이 정도면 연산군만 폭군 암군이라고 욕할 처지가 아니다. 자, 여기에 팩트 말고 무슨 일제의 식민사관 왜곡이 담긴 게 있으면 누구든지 얼마든지 지적해 보아라! (나도 김 정호 옥사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알고 있다.)

썩은내 풀풀 나는 나라 사정이 도저히 답이 없어서 전면 개혁을 부르짖었던 개화파 지식인들은 조선 정부에 의해 어떤 험한 꼴을 당했던가? 그야말로 멸문지화를 당했다. 김 옥균이 험한 꼴 당하는 걸 보고는 자국에 정나미가 뚝 떨어져 버려서 신념형 친일파로 돌아선 사람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일본도 이걸 계기로 조선은 자신들과 대등한 방식으로 손잡을 수 없는 대상이라고 인식이 바뀌었지 싶다.

이런 조선에 비하면 그나마 국력이 다해서 역성혁명으로 깔끔하게 망한 고려가 훨씬 더 나아 보인다.
아, 그러고 보니 조선은 타 왕조들과는 달리, 건국 초기에 이전 고려 왕족에 대한 보복과 학살 말살도 꽤 잔학무도했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이것이 내가 조선을 대한민국으로 개조하려고 애썼던, 시대를 너무 앞서간 두 거인 지도자를 눈물나게 존경하는 큰 이유이다. 그 업적에 비하면 일부 불가피한 피해자 내지.. 겨우 독재자라는 오명 따위는 내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하다못해 일제 시대도 말기의 전쟁 관련 수탈과 반인륜 범죄만 아니었으면 흔히 생각하는 것 정도까지의 막장 생지옥은 아니었다. 일제만 욕하기에는 그 이전도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선 왕실은 합병 후에도 일본 왕실에 복속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잘 먹고 잘 살았으며, 국권 회복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독립 후에도 정말 아무도 왕실 복원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인들은 자기 손으로 조선 왕실을 무너뜨리지 않아서 그런지, 비정상적으로 조선 왕실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이건 올바른 분별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옛날 이 승만 정권을 생각해 봐라. 자기 손으로 직접 무너뜨린 정권에 대해서는 평가가 얼마나 가혹하고 박한데, 조선 왕조를 그 동일한 잣대로 평가했으면 무슨 결과가 나올까?

며칠 전에 유 관순에 대한 글을 썼다가 바로 다음에 곧장 "21세기에 반일은 정신병이고 종북 빨갱이이다"라고 쓴소리를 하자니 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만.. 지금은 그게 관찰과 재현 가능한 과학이고 불편한 진실이다. -_-;;
성경의 같은 챕터에서 "판단받지 아니하려거든 판단하지 말라"와 "거짓 대언자를 조심하라"가 거의 곧장 동시에 등장하는 것과 같다. (저 사람이 거짓 대언자인지 판단을 해야 함..) 둘은 서로 별개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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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는 언제쯤 나왔더라? 한 10몇 년 됐나?
지금도 변함없는 미래예언이구만.. ㄲㄲㄲㄲㄲ
내가 2, 30년쯤 전 초딩이었을 때 일본에 대해 가졌던 감정을 5, 60세 아재가 다 되도록 갖고 있고, 리얼 정치 외교판에서 그대로 표출하고 써먹는 정신병자 미치광이가 권력을 잡게 될 줄은 몰랐다.. -_-
조선 개돼지들에게 최고의 참교육 수단은 가난과 자유박탈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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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9/09/25 08:33 2019/09/2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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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우리나라에는 윤 봉춘(1902-1975)이라는 영화 배우 겸 감독을 역임한 원로급 영화인이 있었다. 역시 영화인이었던 나 운규와 고향과 나이가 동일한 완전 단짝 친구였으며, 둘 다 변절 이력이 전무한 항일 성향이었다는 것도 같이 알면 좋다.

다만, 나 운규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7년, 30대 중반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훨씬 먼저 요절했다. 역시 1937년에 결핵으로 사망한 소설가 이 상과 비슷하다. 그 시절엔 열악한 의료· 영양· 위생 여건으로 인해 결핵이 완전 불치병까지는 아니어도 난치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윤 봉춘은 일제 시대에는 그나마 평범한 소재로 영화를 만들다가 1940년대 초, 어용 영화 단체의 가입을 거절하고 낙향하여 지조를 지켰다. 대동아 전쟁을 미화하는 프로파간다 영화 따위에 기여하느니 차라리 메가폰을 내려놓고 잠적한 것이다. 훌륭하다.
그러다 나라가 독립을 되찾은 1940년대 말에는 그는 감격에 벅차서 그런지 독립 운동을 소재로 삼은 영화를 잔뜩 만들었다. <윤 봉길 의사>(1947), <애국자의 아들>(1949) 같은 것 말이다.

특히 그는 완전 유 관순 덕후였던 것 같다. 3·1 운동과 유 관순을 소재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도 무려 세 편이나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기와 거의 동갑내기인 유 관순의 삶에 대해 뒤늦게 접하고는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가 만든 유 관순 영화는 1947년작, 1959년작, 1966년작이 있는데.. 유 관순 역을 맡은 주연 배우는 각각 순서대로 고 춘희, 도 금봉, 엄 앵란으로, 그 당시로서는 날고 기는 S급 A급 여배우들이었다.
또한 1966년은 <소령 강 재구> 영화가 나왔던 해이며, 엄 앵란은 그 영화에서 강 재구 역을 맡았던 미남 배우 신 성일과 1964년에 이미 결혼하기도 했다. 이 역시 당대 톱스타끼리의 결혼이기 때문에 큰 화젯거리였다고 한다.

이렇게 동일 감독이 만든 유 관순 영화가 세 편이나 있지만, 그 시절 여건상 필름이 소실되거나 딴 용도로 재사용되지 않아서 영상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건 1959년작이 유일하다. 지금으로서는 실감이 안 가겠지만, 옛날엔 물자가 워낙 귀하고 부족했던지라 TV 방송이나 영화를 방송사나 국가에서 책임지고 영구 보존하는 인프라가 갖춰지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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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작 영화에서 유 관순이 재판을 받는 장면)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유 관순은 무슨 안 중근· 윤 봉길처럼 혼자 개인플레이로 총 쏘거나 폭탄을 던져서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국제적으로 찬사를 받은 부류가 아니었다.

그녀는 민족 대표 33인도 아니고, 만세 시위 자체를 경성 시내 한복판에서 한 것도 아니었다. 외국인이 설립한 인서울 학교의 재학생이었고, 서울에 있는 형무소(서대문)에 갇혔을 뿐이다. 일제 시대 당대에는 무슨 3· 1 운동의 원탑 아이콘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냥 지방의 만세 시위 열성 참가자 정도의 인지도밖에 되지 않았다. 쉽게 말해 수원의 유 관순이라 일컬어지는 이 선경 같은 여러 여학생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랬는데 나중에, 최하 1940년대 이후에 "자랑스러운 이화학당 동문", "항일· 반일의 아이콘", "위대한 크리스천 여성 독립 운동가" 컨셉의 수요가 맞아떨어지면서, 전 영택 목사 같은 분 등에 의해 뒤늦게 재조명되고 전국적으로 부각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유 관순의 유해가 소실되어서 현재 존재하지 않는 것도.. 그녀가 일제 당대에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치 전국구 수준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걸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일제가 기를 쓰고 여론을 통제해서 유 관순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걸 막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수는 있다. 그건 별개로 생각할 문제다.

유 관순은 무슨 안 중근처럼 외국 타지에서 처형 당하고 아무렇게나 매장되는 바람에 유해가 소실된 게 아니다. 멀쩡히 접근성 좋은 인서울의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묘지 부지가 개발을 위해 불도저로 밀리는 과정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유해가 사라진 것이다.

3·1 운동 때 그녀의 집이 불타고 가족이 몽땅 죽거나 투옥되거나 고아 신세로 흩어지는(동생들) 풍비박산이 난 건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녀가 정말 유명한 인물이라면 묘지가 어떻게든 관리는 되었을 것이며, 아무리 일제 치하라 해도 그런 사람이 딴 데로 이장되지도 못하고 유해가 허무하게 증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 오사카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흉악범(?) 윤 봉길조차도 유해가 수습되었는데 유 관순이 왜 저리 되었겠는가? 내 짐작엔 공동묘지를 밀어버린 불도저 기사조차도 그가 조선인이었건 일본인이었건, 여기에 누구 묘지가 있는지 모르는 채로 그냥 밀었지 싶다.

뭐, 본인은 유 관순이 어떤 의도로 부각되고 칭송되었건 그녀의 행적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왜경에게 두들겨 맞고 손톱이 뽑히면서도 "주동자는 나다", "애국하는 것도 죄냐, 나는 왜놈들에게 재판받아야 할 아무 명분도 없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건 팩트이며, 그건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어린 나이에 말이다. 본인이 태어나서 '주동자', '주모자'라는 단어를 최초로 접한 곳이 유 관순 전기였다.

단지, 그녀가 뒤늦게 유명해지고 교과서에 실리고 전기가 보급되고 영화가 나왔을 무렵엔 그녀의 유해가 이미 사라지고 없어진 뒤였다. 이것이 일면 안타까운 점이다.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오면..
유 관순 영화는 윤 봉춘 감독이 만든 것 세 편, 그리고 김 기덕 감독의 1974년작 컬러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여기서는 유 관순 역이 문 지현이라는 배우인데, 지금 성우로 알려진 그 사람은 아닌 다른 사람이다. 이 영화 이후로 배우 커리어를 계속 이어 나간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거 이후로 유 관순 영화가 더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난 못 들어 봤다. 그러다가 2019년이 되니 3·1 운동 100주년이랍시고 관련 영화가 <항거>, 그리고 <1919 유 관순>이라고 두 편이 더 만들어져 나온 것이다.

서양에서 타이타닉 호 침몰을 소재로 한 영화만 해도 사건 직후와 20세기 중반, 그리고 1997년의 제임스 카메론 작까지 여러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해저에서 실제 잔해를 발견하기 전, 1986년 이전에 만들어진 옛날 흑백 영화에서는 배가 일체형으로 서서히 침몰한다. 그러나 후대의 영화는 최신 고증을 반영하여 배가 두 조각으로 쪼개진다.

그것처럼 유 관순 영화도 1980년대 이전의 옛날 영화는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유 관순에 대해 1902년이 아닌 1904년생, 징역 5년이 아닌 7년형처럼.. 현재는 기록의 발견으로 인해 업데이트되고 폐기된 옛날 정보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 기록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녀에 대해서 그냥 동료 수감자의 부정확한 기억과 구전 증언만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유 관순의 최후는 만년 떡밥이었다. 겨우 고3 남짓한 나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가 인간 백정 악마 일본 헌병 개xx에게 어떤 참혹한 고문과 능욕을 당하고 죽었을지 묘사하는 건 전적으로 작가의 상상과 재량의 영역이었다. 그러니 가히 호러물 수준의 각색이 들어가곤 했다. 어린애들이 보면 트라우마 생길 정도로..;; 유튜브에서 1959년 영화와 1974년 영화를 직접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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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이 지하실로 끌려가고, 동료 죄수들은 그녀의 최후를 직감한 듯 다들 손을 뻗으며 울부짖는다. 지하실에서 간수들은 무슨 고문을 하려는지 그녀를 물이 든 통에다가 집어넣고 뚜껑을 닫으려 하며, 관순은 이를 맹렬히 저항하면서 뿌리친다. (왜 유 관순을 미리 결박하지 않고 저리도 힘들게 애쓰며 물통에다 집어넣는지는.. 묻지 말자.;; ㄲㄲㄲㄲ)
관순은 지하실을 뛰쳐나가 탈출하려 하지만 그때 간수가 그녀의 등에다 칼침을 놔 버린다..;;; 한눈에 봐도 현실성은 별로 없다만.. 벤허와 비슷한 1959년작 영화라는 걸 감안하자..

다음으로 1974년작 영화는 유튜브에 올라와 있긴 하지만 텔레비전을 카메라로 또 찍은 것이어서 화질이 대단히 좋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는 따로 소개하지 않겠다.
화면이 어둡고 불분명하지만.. 거기서는 유 관순이 열받은 간수들에 의해 바닥에 팽개쳐졌다가 상체가 일본도로 쓱싹.. 즉, 칼에 찔리는 게(stab) 아니라 베였다(slash). 어휴...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에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그녀의 사인은 그냥 간수들의 구타로 인한 '장살'이라고 기재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바락바락 악이 들어간 만세질(?)이 되풀이되니 간수들에게 얼마나 밉보였으면 총알에 맞거나 칼에 찔린 것도 아니고 둔기로 맞아 죽었나 싶다. 이것도 충분히 비참하게 죽은 것이지만 그래도 다른 생체 실험(!!)이나 사지절단 능지처참 급의 변태적인 짓을 당해 죽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생체 실험은 일제 말기에 윤 동주 같은 사람에게나 해당된다.

다만, 옛날에 독립 기념관에서 봤던 기억으로는 3· 1 운동 시기에 왜경에게 고문 당해서 코나 귀가 잘린 사람, 잡힌 독립군 중에 팔이 잘린 사람>_<도 있긴 했다. 기회가 된다면 일제의 잔인한 만행이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자행됐는지에 대해 기록· 증언의 진위 여부와 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해 볼 것이다.

끝으로... 유 관순이 방광 파열로 죽었다느니 하는 말부터 시작해, 심지어 그녀의 시신이 토막이 나 있었다는 얘기는 내가 알기로 객관적인 근거· 출처가 없다. 후대의 국내 위인전이나 영화에서 처음으로 던져진 떡밥 괴담 주작에 가깝다.
형무소의 동료 수감자가 그녀의 시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리는 만무하고, 이화학당 담임 선생? 교장? 유 관순의 친지, 가족? 어디에도 그런 증언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그들은 만에 하나 진짜로 토막 시신을 확인했더라도 고인의 명예를 생각해서 그런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더 현실적이다.

하다못해 반대편 왜놈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자. 죄수가 죽어 버렸으면 그냥 시신을 거적에다 싸서 쓰레기 버리듯이 빨랑 내보내야 하지 않았겠는가? 쟤들이 증거를 인멸해서 경찰의 추적을 피해야 하는 무슨 싸이코패스 살인마도 아닌데, 멀쩡한 시신을 굳이 토막 내고 각을 뜰 틈도 있을 정도로 그들의 근무 여건이 여유롭고 한가하지는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차라리, 아예 죄수들 다 보는 앞에서 "앞으로 또 만세질 하면서 소란 피우는 새x는 이렇게 된다!" 시범타로 공개 즉결처분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때 서대문 형무소는 유 관순만 갇혀 있던 광활한 공간이 아니며, 상황이 그와 정반대였다. 어느 영화에서나 묘사돼 있듯, 수용 가능 공간과 시설 대비 죄수들이 너무 많아서 바글바글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굳이 시신을 훼손해서 피와 내장이 철철 쏟아져 나오면 걔네들 입장에서는 청소 같은 뒤치다꺼리만 더 늘어날 것이다. (형무소 지하실 고문실은 일본인 헌병과 간수 자기네들도 근무하는 공간이다!)

이상이다.
이런 얘기를 지난번에 항거 영화 감상평과 함께 늘어놨어야 했는데.. 그때는 더 옛날 영화는 미처 떠올리지 못하고 최 은희 선생 같은 다른 사람 얘기를 같이 늘어놓았다.
유 관순은.. 군인으로 치면 신라 화랑 중의 관창처럼.. 어린 나이에 너무 용맹스럽고 애국심 투철하고 존경스럽긴 하지만 좀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더 큰 일을 하지 못하고 너무 짧고 굵게 가 버린 것 같다는 아쉬운 느낌도 든다.

참고로, 옛날 유 관순 영화들에서는 일본인 배역조차(헌병, 간수, 판사, 검사..) 다 한국어만 쓴다. 최근 영화인 "항거"에서처럼 일본인은 일본어로 말하고 조선인 죄수 중의 일부가 일본어를 알아듣는 식의 이야기 전개는 없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는 물론 모든 배역을 한국인 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저 때는 현실성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어 따위를 동원하는 게 국민 정서상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만 해도 SKY 중에 일어일문학과가 있는 학교는 K밖에 없으며, 그것도 한참 후대에 생긴 것이니 말이다. 그 이유는.. 본인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22 08:35 2019/09/2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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