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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ife 생명 or 삶

life라는 영어 단어는 잘 알다시피 생명· 목숨뿐만 아니라 삶· 인생이라는 뜻까지 포함하고 있다. 마치 heart의 의미가 심장에서 더 나아가 마음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동사 live vs 명사 life"는 한국어로 치면 "그리다 vs 그림"과 비슷한 호응 관계인데, 같은 맥락에서 "살다 vs 삶, 일생, (한)살이"가 대응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는 "배추흰나비의 한살이"처럼 '한살이'라는 단어도 있었는데 요즘도 쓰이나 모르겠다. 사전을 찾아 보니 아예 곤충의 일생 변태 과정만을 일컫는 전문 용어처럼 기재돼 있네..

생명을 갖고 있는 동안 누리게 되는 것이 삶· 인생이니 둘은 분명 별개의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도 동일 개념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 용어임이 틀림없다.
본인의 언어 직관이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목숨· 생명은 '하나'뿐이라고 말하고(개체, 개수), 인생은 '한 번'뿐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기간, 횟수).

기독교는 사후 세계와 혼의 불멸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 아니면 지옥에서 시작되는 life after death라는 말도 있다. life가 오로지 이 세상에서의 생물학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기 때문에 저런 용어가 모순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잠 4:23 issues of life를 좀 의학· 생물학적인 편견을 갖고 접근하면 지금 흠정역 성경 번역처럼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이 들어온다. 그러나 인문· 사회학적 편견을 갖고 접근하면 '인생의 온갖 얘깃거리 이슈들'...;;이라는 뜻도 들어오게 된다. 뭐, 그래도 저건 다의어 관계이지, 무슨 동물 염소와 원소 염소 같은 동음이의어까지는 아니겠다.

약 4:14에서 말하는 '한낱 수증기나 다름없는 너희 life'도 그런 중의성을 지닌다. 일단 저기 문맥은 "실컷 잘 먹고 잘 살아도 죽어 버리면 말짱 헛일이다"라는 마 16:26, 눅 12:19-20과 비슷하다. 혼과 직접 대응하는 건 생명이지만, 정말 수증기· 이슬처럼 짧고 덧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대상으로는 인생이 적합해 보인다.

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거듭나고 새로운 life를 얻는다고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대조를 이루는 찬송가 쌍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 유명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다. 얘는 life를 생명· 목숨이라고 봤다. 작사자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작사자이기도 한 이 호운이며.. 작곡자는 오빠 생각, 제헌절 노래 등의 작곡자이고 포항제철 초대 회장과는 동명이인인 박 태준이다.

다른 하나는 “주님 품에 새 생활 하네”(John W. Peterson)이다. 얘는 아까 전자와 달리 외국곡 번역인데, 가사 내용을 보니 어째 life의 대응으로 '생활'이 쓰였다. 두 곡 다 과거의 죄악된 삶을 청산했다는 말과, "옛 것은 지나고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인용이 들어있다.
하지만 전자는 관점이 관점이어서 멜로디가 좀 웅장하고 감격스럽고 씩씩한 느낌인 반면, 후자는 그 뒤의 지속적인 생활(지구력)을 강조해서 그런지 평안하고 조용한 분위기이다.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2. 순우리말

뭍(육지 land), 얼개(structure), 고장(기계 고장 말고, 지역 region), 연모(도구), 까닭(이유), 미련하다, 미쁘다...
내가 초딩 꼬맹이였을 때 책에서 봤던 단어들인데, 21세기에 태어난 애들은 저런 단어를 들어 본 적이 있을까?
이런 식으로 안 쓰이고 사라지는 순우리말이 좀 더 있는 것 같다. 멸종 위기 동물처럼..

한국어에서 '짜장'은 짜장면의 재료가 아니라.. 원래 지금으로 치면 'indeed, 레알'에 가까운 부사였다! {... 그것은 짜장 그 손에 넘는 짓이니, “아 웬 궐련은 이래.” 하고 슬쩍 눙치며, “성냥 있겠나?” 일부러 불까지 거 대게 하였다.} 김 유정의 소설 <만무방>(1935) 중에서..
하지만 이제 짜장은 '자장면'의 현실화 표기로 바뀌었다. 부사 '짜장'은 '바이'(전혀 never)만큼이나 사어가 된 셈이다.

'물매'는... 내 기억이 맞다면 정말 의외로.. 정석 책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걸로 끝.. 다시는 출판물에서 저 단어를 접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일본 책 베꼈다는 논란이 있는 교재에서 만약 그 의혹이 사실이라면, 그래도 번역 로컬라이징은 최소한의 신경을 썼다는 뜻이 되겠다.

참고로 '거리'도 순우리말은 street이고 한자어는 distance이다. 뭐, '거리'는 멸종 위기는 아니다.
'구조'는 structure과 rescue 모두 한자어임.
한편, '지레', '도르래' 같은 물리 장치는 어째 한자어 없이 순우리말이 정착해 있다.

3. 땀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남긴 말 중에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가 있다.
이 말의 진짜 의미가 대외적으로 심하게 왜곡됐다는 식으로 얘기가 많은데.. 이 글에서는 그런 뉘앙스 말고 단어와 관련된 얘기만 좀 늘어놓도록 하겠다.
위의 말의 영어 원문은 1% inspiration과 99% perspiration이라고 한다. 즉, 1%가 99%보다 먼저 언급되며, 후자도 직접적인 의미는 노오오력이라기보다는 땀이다. (뭐,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지만)

또한, 한국어 번역으로는 전혀 느낄 수 없지만 두 단어가 -spiration이라는 라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땀이라 하면 sweat밖에 모르는 본인 같은 사람에게 perspiration은 좀 생소한 단어이다.

말이 나온 김에 관련 썰을 좀 더 풀자면..

  • : ‘포카리스웨트’는 마치 애니콜처럼 영어권 본토인이 들으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작명이라고 한다. 맑고 시원한 이온 음료의 이름에다가 하필 더럽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 땀이라는 단어를 넣었으니 말이다. 교회의 이름이 누룩 교회, 소프트웨어 개발사의 이름이 버그 소프트, 블루스크린 시스템즈인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ㅡ,.ㅡ;;
  • 영감: 내가 지금까지 들은 영감이라는 단어를 들은 곳은 (1) 저 에디슨의 격언, (2)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 우사미짱이 눈깔 모양이 변하면서 쿠마키치를 범죄 용의자로 잡아내는 영감, 그리고 (3) 딤후 3:16이 말하는 성경의 영감 정도이다. ㄲㄲㄲㄲ

4. 영어 어휘

다음으로, 영어에서 좀 므흣하게 느끼는 면모를 개인적으로 발견한 걸 더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 학창 시절 이래로 지금까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toward와 towards의 차이는 과연 뭘까? 신기하다. 하는 일은 거의 같고 어감상의 차이만 존재하며, 비슷한 예로는 upstair / upstairs 쌍도 있다! 마치 한국어에서 도트와 닷이 나뉘는 것 같은 현상이 영어에서 저런 게 아닐까 싶다.
  • gold는 그 자체가 금속 명사와 금색/금 재질이라는 형용사가 되지만, golden이라는 말이 또 따로 있다. silver는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황금도끼 고전 게임이 golden이라는 단어를 크게 대중화시켰다. 방향에도 east+ern, north+ern 같은 형용사 바리에이션 쌍이 존재하는 게 인상적이다.
  • behalf, sake 같은 단어는 for the sake of, for one's sake 이런 식으로만 쓰이는 게 한국어 문법 용어로 표현하자면 영어의 의존명사나 다름없는 물건으로 보인다.
  • shall은 뭐.. should/will과 비교했을 때 고어체로 치부되면서 거의 죽어가는 게 확실하고.. 현재로서는 shall I/we 같은 의문문에서나 쓰이는 불완전동사처럼 돼 간다.
  • behind는 '바하인드'라고 읽히는 경우가 굉장히 잦은 것 같은데 사전에 딱히 반영돼 있지는 않아 보인다. 정관사 the는 굳이 모음이 아니어도 '더'가 아닌 '디'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다른 언어를 공부해 보면 영어처럼 정관사가 더/디 바리에이션 정도밖에 없는 건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양반이란 걸 알 수 있다.

5. company

영어로 '기업, 회사'를 나타내는 단어 company는 "빵(pany) 을 함께 나누다(com-)"라는 어원에서 유래되었다는 것..
알 만한 분들은 아실 것이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이스트 인디아 컴퍼니 등..

쉽게 말해 저 com은.. 공산주의를 가리키는 코뮤니스트, 베트'콩',
경성 '콤'그룹(일제 말기 때 만들어졌던 공산주의 성향 항일 비밀결사 단체) 할 때 그 '콤'과도 같은 어원이다.

난 컴퍼니의 어원이 저렇다는 것을 먼 옛날에 오 성식 생활영어 교재에서 처음 접했다.
'빵'은 포르투갈어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저분이 원래 외대 포르투갈어 전공 출신이기도 하니 어원이 더욱 쉽게 눈에 들어왔지 싶다.
지금처럼 지식과 정보가 인터넷으로 넘쳐나지 않던 옛날엔 그런 소소한 팁이나 유래 잡학, 외국 경험담도 희귀했었다.

상표명인 '꼼빠니아'는 동일 어원의 단어를 스페인어식으로 읽은 것인데, 회사뿐만 아니라 영어로 companion에 가까운 '동반자'라는 뜻도 있다. 저 상표가 의도한 의미는 '동반자'이다.

성경에 행 2:42,46을 보면 회사가 아니라 초대 교회 지체들이 company의 정의에 완벽하게 부합하게 한 빵을 떼어서 같이 나눠 먹었다고 나온다. 본문의 주변 문맥을 보면, 이때는 공교롭게도 교회도 일면 사회· 공산주의스럽게 재산을 전부 한데 공유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이건 체제 전복 혁명 과업, 인민 해방 이러는 흉악한 공산주의와는 아무 상관 없는 사건이었다.

아무튼, 인류 역사에서 회사· 기업이라는 조직의 첫 시작과 취지· 이념은 교회나 공산주의 만만찮게 "함께 빵을 나누는 조직"이었다. ㅎㅎ 한국어의 '식구'와 비슷한 개념이다.

6. 세부적으로 구분하는 것과 구분하지 않는 것

  • give vs 줘/내놔: 강도가 피해자를 털 때는 "돈 내놔"라고 하지, "돈 줘"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 전자는 더 적극적으로 강압적으로 빼앗겠다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 wear vs 입다 쓰다 신다 끼다 착용하다: 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한국어로는 다 똑같지만 영어로는 먹는 독 poison과 동물에게 물려서 주입된 독 venom을 구분해서 표현한다. 그리고 화상을 입어도 불에 데이는 burn과 물에 데이는 scald를 구분해서 표현한다.

7. 외래어

집에서 바깥과의 경계가 벽이 아닌 난간으로 구성돼 있고, 장판이 아닌 타일이 깔려 있고 집안이라기보다는 반쯤 바깥인 그 공간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베란다와 발코니가 정말 별 구분 없이 섞여 쓰이는 것 같다. 원래는 둘은 어묵과 오뎅만큼이나 서로 다른 개념을 가리키는데 말이다. 발코니가 더 영어에 충실한 단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베란다가 더 자주 들었고 더 친숙하다.

하긴, 가방· 담배· 구두조차도 원래는 외래어라는 게 놀랍기 그지없다. 껌은 영어 어원이 분명하니 외래어라는 인식이 있지만, 비슷한 단어인 빵은 외래어라는 인식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대적으로 덜하다. 이렇게 생각하면 외래어라는 것도 의외로 별것 아니고 정하기 나름인 개념일 뿐인 건지도 모르겠다.

8. 틀리기 쉬운, 혹은 틀린 채로 굳어져 버린 외래어 표기

  • algorithm: 어쩌다가 '-듬'이 '-즘'이라고 바뀌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음악 용어 리듬을... 리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데..
  • basic: 원어 발음엔 Z 소리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스펠링 그대로 '-식'이 맞는데 현실에서는 '-직'으로 굳어져 버린 것 같다.
  • message, sausage: 스펠링이 A여서 좀 혼동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만.. '-세-'가 절대 아니고 '-시-'가 맞다. 메시지, 소시지.
  • super-: 원어 발음엔 반모음이 들어있지 않다. 슈퍼마켓, 슈퍼맨..이 아니라 원래는 그냥 수퍼마켓, 수퍼맨이 맞는데 저건 흠..
    비슷한 예로 비젼이 아니라 비전, 캡쳐가 아니라 캡처, 쥬스가 아니라 주스(juice), 죠스가 아니라 조스(jaws)이다.

자음이 ㅈ 소리로 바뀌는 구개음화라는 건 한국어에만 존재하는 현상은 아니다. 일본어는 더해서 TR 소리조차 츄리닝 츄레라 같은 식으로 바뀌어 왔다.
쿵 퓨리에서 히틀러가 "전화기 내놔" 이럴 때 give me the phone을 "더 폰"이 아니라 "저(ze!!) 폰"이라고 발음하던 게 생각난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20/05/20 08:35 2020/05/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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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어, 시력 이야기 등

1.

  • "즉시 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 9:18)

요즘 scale이라고 하면 크기, 규모라는 뜻이 더 와닿지만 scale에는 비늘이라는 뜻도 있다. (동음이의)
구약 성경의 율법에서 포유류는 굽과 되새김질 여부가 식용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면, 어류는 비늘과 지느러미의 존재 여부가 그 역할을 한다.
아울러, 사전을 찾아보면 피부병 딱지, 갑옷의 미늘, 물통 안에 낀 물때 같은 것도 다 저 scale이다.

치아 스케일링은 치아 주변에서 저런 비늘처럼 덕지덕지 붙은 치석을 떼어낸다는 뜻이다. 무슨 크기 조절과 관련된 뜻이 아니다.
그러니 사실 descale이라고 해야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컴퓨터 저장 장치에서 defragment, 비행기에서 deicing처럼 말이다. 뭔가를 제거하여 정리한다는 뜻의 단어에는 대체로 접두사 de-가 붙어 있다.
다만, void/be devoid of, press/depress 이런 관계를 생각해 보면 de-가 언제나 뒤의 어근을 없애거나 부정하는 것 같지도 않다.

2.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성경을 더 찾아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준 것이 여럿 나온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는 남이 뱉은 침을 맞는 극도의 치욕· 모욕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도 침을 뱉으신 적이 있다. 두 번인데.. 모두 다 맹인의 눈을 고치실 때이다. 치과 다음으로는 안과 얘기네..

  •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막 8:23)
  •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요 9:6)

모욕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정반대 일을 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구약 외경 중에 토비트.. 개역성경식 외래어 표기법이라면 아마 '도빗' 정도 됐을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은 놀랍게도 공중에서 떨어진 새똥(정확히는 참새의..)을 눈에다가 정통으로 맞는 바람에 눈에 막 같은 게 끼고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말부에서는 물고기의 쓸개를 환부에다 발라서 눈을 치료받는다.

눈 영양제 '토비콤'의 이름이 혹시 토비트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안국 약품의 창업주나 중역 중에 혹시 가톨릭 신자가 있나.. 라고 나만 생각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추측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3 08:34 2020/05/0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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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에서 ‘만’은 굉장히 요주의 품사통용어이다. 다음 예문을 통해서 구체적인 용례와 띄어쓰기 요령을 익혀 보자. 국어 정서법에서 띄어쓰기는 한자 없이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잘 숙지해야 하는 개념이니 말이다.

  1. 시간을 사흘만 주십시오.
  2. 사흘 만에 일을 다 끝내겠습니다. (이거 얼마 만인가!)
  3. 그건 충분히 할 만한 일입니다.
  4. 소일거리로 이것만 한 게 없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 짐승만도 못한..)

해설.
1. 주격 또는 목적격으로 only, just의 뜻을 담고 있는 보조사이다. 제일 쉽다.

2. 이때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띄어 쓴다. 괄호 안의 문장처럼 쓰이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명사라는 게 감이 올 것이다. 접사인 '쯤'하고는 상황이 다르며(이제 얼마쯤 왔지?), '오래간만/오랜만'도 그 자체가 한 단어 명사이다.

3. ‘만하다’가 보조형용사이다. “할 만하지?”처럼 활용도 된다.
참고로, 중간에 ‘도’가 붙어서 “그럴 만도 하다”라고 쓰면 이때 ‘만’은 의존명사이다. 사실상 ‘도’밖에 붙는 게 없는 어정쩡한 의존명사인데, 아까 2번 의존명사와는 별개인 다른 의존명사이다.. ㅡ,.ㅡ;;

4. 이 ‘만’은 1번과 마찬가지로 다시 보조사이다. 다만, ‘-하다/-못하다’와 연결됐을 때는 do ONLY this가 아니라 뭔가 no/nothing more than 같은 비교의 뜻이 될 뿐이다.
심리적으로는 자꾸 ‘만하다’가 한 단어인 것 같이 느껴지는데, 솔직히 나도 그렇다. 하지만 일단 규정상으로는 ‘만하다’는 3번처럼 용언이 이어질 때에만 허용되고, 체언 뒤에서는 ‘하다’뿐만 아니라 ‘못하다’도 올 수 있다는 점이 감안되어 둘을 띄우게 되었다.

끝으로, 위의 모든 규정에도 불구하고 형용사 ‘볼만하다, 이만하다, 쥐방울만하다, (고만)고만하다, 웬만하다’ 같은 단어는 용례가 굳어진 한 단어로 간주되어서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고, 몽땅 붙여 쓴다. ㅡ,.ㅡ;;

그러므로 한 단어가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 대해서 총정리를 하자면..

  • 기간 한도를 나타내는 체언 뒤에서는 띄우고(2번)
  • ‘-ㄹ’로 끝나는 용언 뒤에서도 띄운다(3번).
  • 그 밖에 한정이나 비교의 뜻으로 체언 뒤에 나올 때는 보조사이기 때문에 붙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1, 4번).

그러고 보니 '뿐'도 조사(너뿐..)도 되고 의존명사도 돼서(그럴 뿐) 띄어쓰기를 아주 복잡하게 만드는 단어이며, '한', '못' 이런 것도 어디서는 각각 독립적인 관형사와 부사였다가 어디서는 그냥 한 단어의 어근/어간이어서 사람 헷갈리게 하기 딱 좋은 단어이다.
글이 좀 짧은 것 같으니, 보너스로 이런 문법 놀이를 몇 가지 좀 더 하고 글을 맺겠다.

(1) 가량: 접미사이다. '쯤'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명사가 아님.

  • 사람이 열 명쯤 모였다.
  • 사람이 열 명가량 모였다.
  • 사람이 열 명 정도 모였다. (정도程度: 일반명사)
  • 사람이 열 명 남짓 모였다. (남짓: 의존명사 겸 형용사! '남짓한'일 때는 형용사이지만 '남짓 되는'일 때는 명사이다.)

(2) 커녕: 이것 자체가 조사(보조사)이다. 부사가 아님.

  • 사람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원래 이렇게 쓰는 단어임.)
  •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강조의 의미로 앞에 은/는이 붙었음)
  • 사람은 물론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물론: 부사)
  • 사람은 고사하고 쥐새끼 한 마리 안 보인다. (고사하고: 부사. 학교 문법에서는 이건 불완전동사도 아니고, 통째로 단독으로 부사로 친다.)

오늘날은 '막론'도 '막론하고'의 형태로만 쓰이는 것 같지만 이건 '고사하고'처럼 완전히 이 형태만으로 굳어졌다고 보지는 않는 듯하다.

그리고 기왕 생각난 김에 보너스로...
언어학에는 구(phrase)와 절(clause)처럼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르고 헷갈리는 용어 pair가 있다. 어근과 어간도 그런 예에 속하는데..

어근(뿌리 root)
단어에서 접사를 제외한 핵심 부분을 말한다. 어근은 단독으로도 쓰일 수 있지만 접사는 그렇지 않다. 접사는 붙는 위치에 따라 접두사(un-, de-, en-) 또는 접미사(-less, -ness)로 나뉘며, 접사가 붙은 단어를 흔히 파생어라고 부른다.
영어의 경우, 화자가 생소한 파생어를 일부러 필요에 따라 창조해 냈다면 접사와 어근을 하이픈으로 연결하거나, 둘 중 하나를 대문자로 쓰곤 한다. 이게 한국어 관행으로 치면 한자를 괄호 안에 병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간(줄기 stem)
얘는 한국어에서 동일 용언(동사와 형용사)이라면 온갖 활용 형태와 무관하게 변함없이 고정돼 있는 앞부분을 말한다. 어절에서 어미를 제외한 핵심 부분이다. 가령, ‘먹으면, 먹어서, 먹다’에서 ‘먹’ 부분이다.
어간은 그 자체가 접사과 어근으로 더 쪼개지는 파생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간은 어근보다 더 큰 구분 단위이다.

근이니 간이니 하니까 소리도 비슷하게 들리고 헷갈린다. 하지만 용어가 모두 식물의 외형을 본따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하면 곧바로 직관적으로 이해가 될 것이다. 지하의 뿌리에서 지상의 줄기가 자라고, 줄기로부터 가지들이 뻗어 나가는 걸 떠올려 보라.

어근과 어간은 말 그대로 언어의 ‘근간’을 형성하는 구성요소이다. 내장 간(肝)도 아니고 줄기 간(幹)은 좀 생소한 한자 같지만 우리 주변에서 생각보다 자주 볼 수 있다. 뿌리-줄기뿐만 아니라 줄기-가지 관계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교통에서 얘기하는 간선-지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2 08:35 2020/03/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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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입으로 만들어 낸 창작물 내지 정보 중에, 말은 문자를 통해서 글의 형태로 보존되곤 했다. 그러나 말은 노래라는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거기서 말을 감싸던 음악, 멜로디, 선율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 적지 않다.

먼 옛날(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이상 전)에는 아시다시피 물자가 몹시 비싸고 귀했으며, 종이와 필기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선율은커녕 말을 받아 적는 것조차 아무나 함부로 하기 어려웠으며 아예 글을 모르는 문맹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시절에 모든 사람이 알고 대대로 전수해야 하는 텍스트는 전수 방법이 '구전'밖에 없으니, 최대한 규칙성을 띠고 외우기 쉬운 형태로 텍스트를 마개조해야만 했다. 그래서 운율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운문이 등장했다.

그리고 운문을 넘어 아예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를 기억하면서 가사도 덤으로 기억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유전자 차원에서 음악을 즐기는 본성이 새겨져 있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옛날에는 음반이란 게 없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단순히 길거리 악사 이상 수준의 프로페셔널한 음악을 접할 일이 그닥 없었다. 그러니 싸제 야메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에 대한 자괴감도 현대인보다는 적었으리라 여겨진다.
지금처럼 트루타입 윤곽선 글꼴이 널리 쓰이기 전의 도스 시절엔 싸제 야메 비트맵 글꼴들이 수십 종 이상 만들어져 쓰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옛날 사람들은 암기용이든 단순 감정 분출 한풀이용이든.. 음악이라는 걸 스스로 더 창의적으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부른 노래는 역사적으로 귀한 자료가 됐을 텐데, 정작 그 귀한 자료들은 등장을 촉진했던 이유(기록 수단 부재)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소실도 많이 됐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노래들을 전수받은 마지막 세대들은 그게 그렇게도 귀한 자료라는 걸 전혀 인지하지 않고 있었는데.. 시대가 바뀌면서 그런 노래를 부를 일이 없어졌고(산업화, 정권 교체 등),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전수자가 죽고 생존한 피전수자도 당시 기억을 망각하면서 음악 정보가 사라진 것이다.
문학 시간에 배울 정도인 구지가(龜旨歌), 청산별곡(!!) 등의 진짜 옛날 노래들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까지 다음과 같은 예가 있었다.

1.
3· 1 운동 때는 유 관순처럼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됐던 어린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심 명철(1896-1983)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감옥에서 동지들과 이런 노래를 숨죽여 지어서 불렀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분의 아들인 문 수일 씨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그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적어 놨다. 그러나 멜로디는 콩나물로 미처 그려 놓지도, 녹음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소실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이미 35년이 훌쩍 넘었고..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이런 가사인데.. 이게 최근에 알려져셔 가수 박 정현이 그 가사에다가 곡을 자기 스타일로 새로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돼 있다.

가사를 구성하는 어절들이 전반적으로 3글자 단위인 걸 보니 원래 멜로디도 3박자 계열이었지 싶다.
물론 이론적으로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4/4박자에다가도 ♪♪♪가 아니라 ♪♪♩ 같은 식으로 3글자 단위는 얼마든지 집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민요풍 박자들이 전반적으로 6/8 같은 3박자 계열인 것까지 감안하면 원래 멜로디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박 정현의 리메이크곡도 들어 보면 아시겠지만 응당 3박자 계열이다.

옛날에는 '대한'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익숙하지 않아서 "대한 독립 만세"가 아니라 "조선 독립 만세"라고 외쳤다는 말도 어디선가 들었는데.. 정말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 가사에도 멀쩡히 '대한'이라는 단어가 쓰이긴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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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징역 3년으로 형량이 유난히 무거웠으며, 매우 단명하기까지 해서 겨우 1920년에 순국한 것을 알 수 있다. 유 열사가 법정에서나 형무소에서 간수나 법조인들에게 굉장히 많이 저항하고 밉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몰년이 미상인 사람도 둘 있지만 그들은 유 관순이 죽기 전에 이미 만기 출소했을 정도로 형량이 가벼웠다.

참고로 심 명철 여사는 맹인이었다! 저 유튜브 영상에서 그 사실이 직접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저분은 사진에서도 검은 안경을 쓴 걸 볼 수 있다. 평생을 점자 아니면 기억에만 의지해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으니 수십 년 전에 불렀던 노래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
자, 다음으로는 엄격 진지 근엄한 시절 말고 해방 이후 1955년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시발 자동차라는 게 나왔을 때.. 믿기 어렵지만 이런 CM쏭까지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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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발, 시발, 우리의 시~발 자동차를 타고 삼천리를 달리자"


195, 60년대에 이런 CM쏭을 대중적으로 퍼뜨릴 매체는 텔레비전은 어림도 없고, 라디오 아니면 극장 영화 상영 전 광고에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이거 멜로디가 전해졌다면 인터넷 시대에 병맛 개그로 재조명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리라 여겨지나..
아쉽지만 악보도, 음반도, 증언자의 기억에서도 몽땅 다 소실됐다고 한다. 아마 팬암 CM쏭의 "You can't beat the experience -- Pan Am!"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이상이다.
수십 년 전에 본인의 외할머니께서 사용하시던 찬송가 책이 문득 떠오른다. 거기에는 가사만 세로쓰기로 쭉~ 적혀 있고 악보가 인쇄돼 있지도 않았다. 복잡한 악보는 아무래도 저렴하게 인쇄하기 어려울 테니.. 가격 문제 때문에 옛날엔 가사만 적힌 책도 쓰였던가 보다.

멜로디는? 당연히 구전이었다. 보존의 우선순위가 아무래도 가사보다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원래 조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4부 합창 파트 같은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도 북한의 지하 교회에서는 성경과 찬송가 가사를 급히 베끼고 찬송가 멜로디 정도는 그냥 외워 와서 몰래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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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만 해도 열악하던 시절엔 이런 식으로 전해졌으니, 하물며 민중에 의해 만들어진 노래는 더 격식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만들어지고 전수되다가 잊혀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을 것 같다.

끝으로, 성경도..
홍해 바다를 건넌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른 노래를 포함해 시편까지 전부 원래는 곡이 붙어 있는 노래였다! 허나, 하나님은 말씀을 보존해 주신다고 했지 멜로디를 보존해 주신다고 약속하시지 않은 관계로... 후손들이 접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가사뿐이다. 곡을 붙이는 건 전적으로 후대 작곡자들의 재량 영역이 됐다.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 (계 14:3)


이것도 도대체 무엇을 들은 것일지 굉장히 궁금해진다. 뭔가 새마을호 로고송이나 Looking for you에 근접하는 멜로디였을 것이다.

이번 기회에 무슨 마음에 드는 시, 짤막한 문구, 표어 같은 거 놓고 곡을 붙이는 연습을 스스로 해 보자. 생각보다 재미있다. 심지어 저 시발자동차 광고카피라도 말이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0/01/28 08:36 2020/01/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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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언어' 관련 이슈들

1. 주기도문

주기도문이란 건 지금 말고 과거에 본인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가 끝났을 때 으레 습관적으로 눈 감고 기도문처럼 암송하던 텍스트였다.
주일 오전 예배는 격이 제일 높기 때문에 마지막에 무려 목사님의 축도로 인증을 꽝 찍어야 끝났다. 그때 말고 목사님이 안 계셔서 축도를 받을 수 없는 모임을 끝내는 절차는 주기도문 암송이었다.;; 끄응..

과거 한글 개역성경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눅 11:2)라고 조사가 어긋난 게 있었다.
중세 국어에 주격조사 '가'가 아직 없어서 '바다이 되어' 같은 문구가 있다는 건 옛날에 학교에서 배워서 알지만.. 성경 본문에 몇 부분만 표기 오류가 있는 건 그냥 편집상의 실수 때문이었다.
시편 23편에는 그 유명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도 있다. 이것 말고 또 조사가 어긋난 구절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개역개정판은 이게 다 바로잡혔다.

그런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써 놓으니 난 어린 시절엔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조사가 '에'인 것으로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문장의 주어가 뭔지는 모르겠고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나라에 임하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주기도문 끝에 나오는 '대개'도 오해의 소지가 아주 많은 단어였다.
저 대개는 大槪, usually, mostly, 대체로, in general이라는 뜻이 아니다..;;;
大蓋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이고, 원래 의미는 영어의 접속사 for (전치사 for 말고)... "이는 ~ 하기 때문" 정도에 대응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나라들도 그냥 country, nation이라기보다는 왕정국가 kingdom을 가리킨다. 저건 여호와의 증인들이 좋아하는 용어이기에 앞서 엄연한 성경 용어이다.

마 6:33은 산상설교 중에서 노래로도 굉장히 많이 만들어져 있는 유명한 구절인데.. "하나님의 왕국"이 "그의 나라"라고 바뀌어서 의미 왜곡이 꽤 심하다. 우리말에서 '의'는 발음하기 어렵고 생략도 잘 되는 관계로 아예 '그 나라'라고 곡해되기도 했다. "그 나라 갈 때에 우리들은 예수님과 만나 얘기해" 라는 어린이 찬양도 있으니 심상이 그리로 연결돼 버리는 것이다.

끝으로..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한번 더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기도 요령"에서까지 나온다는 것은 주기도문의 패턴을 굳이 환란기 유대인으로 국한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킹 제임스 외의 다른 성경들은 누가복음 버전이 마태복음 버전에 비해 짤린 내용이 많다. '아버지'에 대해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가 빠지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같은 문구도 몽땅 짤려 있다. KJV 외의 성경을 본다면 누가복음의 기도문은 마태복음 기도문의 속성 요약본(?)처럼 읽힌다.

2. 동음이의어

사도신경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진담인데.. 난 초딩 시절에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는 빨간 우체통 위에 하나님이 걸터앉아 계신 모습을 생각했었다.
이런 걸 꼼꼼히 생각하지 않으면 좀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셔서"라는 문구를 보고도 messenger일까 lion일까 황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이 21세기에 그것도 한글 같은 문자를 놔두고 굳이 구닥다리 그림문자를 쓰는 법까지 무식하게 익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미 있는 동음이의어들이 도저히 대안도 없는 경우, 이것들이 무슨 그림문자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단어이고 그 그림문자를 쓰는 다른 단어로는 무엇이 있는지 같은 감 정도는 부디 익혀 놓을 필요가 있다.

신앙만큼이나 언어도.. 일단 무조건 외워야 하는 것 이후로는 체계와 원칙이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것은 언어의 특성 중에 각각 임의성과 체계성이라고 용어까지 정립돼 있으니 말이다.

3. 주홍과 진홍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링크), 우리나라 태극기는 건국 이래로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형태가 쓰이다가 1997년 9월경에 살짝 개정된 바 있다. 태극 무늬의 청색· 홍색이 좀 더 산뜻한 색조로 바뀌었다.
옛날 태극기의 빨강은 주홍 scarlet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진홍 crimson에 더 가까워졌다.

개정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옛날 태극기는 우리나라가 아직 못 살던 시절 내지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을 나타내고, 새 태극기는 말석 끄트머리나마 선진국 진영에 들어간 위상을 나타내는 것 같다. OECD 가입만 해도 1년 남짓 전인 1996년 가을이지 않던가?

그리고 성경에서 이렇게 주홍과 진홍을 나열하면서 빨간색을 대비시킨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바로 사 1:18이다.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4. 칭호

성경 구절을 노래로 옮긴 찬양들 중에는 예수님 내지 성도의 칭호를 다룬 것이 있다. 교리 공부와 성경 암송의 관점에서 유익해 보인다.

예수님의 칭호에 대해서는 His name is Wonderful (놀라운 그 이름)이라고 꽤 좋은 곡이 있다. Wonderful, Lord, mighty King, God, Great Shepherd, Rock 정도가 나온다. 한국어로 번역된 건 접해 보지 못한 어느 영어권 찬송에서는 Ancient of days (단 7:9)라는 칭호가 나오는 것도 본 적 있다.

하나님/예수님의 칭호 중에는 영어의 입장에서 품사 통용 중의적인 표현이 좀 있다.
앞의 칭호들 중에서도 Wonderful은 이름에 대한 수식어· 관형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명사이다. (사 9:6)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I AM도 명사절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고유명사이다.
I AM THAT I AM(출 3:14)만 봐서는 해석을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의 I AM hath sent me unto you를 보면 저거 전체가 명사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의 칭호뿐만 아니라 신약 성도의 칭호도 있다.
어린이용 동요급인 "주 나의 사랑 나 주의 사랑"도 칭호가 여럿 담겨 있어서 유익하며, 일명 축복송으로 알려진 "때로는 너의 앞에"는 2절에 이례적으로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칭호가 나온다.

칭호를 소재로 더 창의적인 찬양이 또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참고로 가지(branch)는 예수님의 칭호(렘 33:15)와 성도의 칭호 내지 비유 대상(요 15:2,4)으로 모두 등장한다.

5. 오다/가다 문제

한국어가 영어와 다른 특징 중 하나는 1인칭 자기 자신이 '오다'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 좀 이리 와 줄래?" / "응, 가는 중이야"(I'm coming)이지, "오는 중이야"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건 성경 번역에서도 꽤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지면 관계상 모든 예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마 8:7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ㅇㅇ, 내가 가서 고쳐 주마"라고 대답하셨는데.. 이거 영어 원문은 "I will come to him"이다. 그런데 NIV를 비롯해 일부 구어체 현대어 영어 성경은 go to him이라고 써 놓기도 했다.

이것 말고 고전 4:19 "내가 곧 너희에게 가서" (But I will come to you shortly)
계 2:5 "내가 속히 네게 가서"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이런 건 괜찮은 반면..

  • 요 14:18은..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I will come to you.)
  •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Behold, I come quickly)
  • 계 22:20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Surely I come quickly)

뭔가 발로 걸어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심오하고 거창한 재림 문맥이어서 그런지.. 이런 건 흠정역도 옛날 개역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차용했다. 게다가 come을 좀 심오하고 거창하게 번역하는 단어로 '임하다'도 있다.

생각보다 골치 아픈 문제 같아 보이지 않는가?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 두려워 말라"처럼 성경에만 존재하는 시적 허용이 될지, 아니면 이로 인해 한국어도 번역투 영향 때문에 '가다/오다'의 구분이 문란해질지도 모르겠다.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은 그래도 국어 전문가가 많이 개입해서 그런지 저런 원초적인 비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6.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의 높임 관계

요한복음 2장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로는 여기서 포도즙이냐 포도주냐 하는 wine의 번역 문제가 불거지곤 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건 논의하지 않겠다.

예수님은 자라서 성인이 되면서 단순한 아기· 어린이이다가 성육신한 하나님으로.. 자신의 원래 지위가 서서히 드러났다.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역전되었다. 쉽게 말해, 마리아가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얘야, 예수야"이다가 어느 샌가 "예수님, 주님"이 된 것이다.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느낌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딱히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며, 우리 역시 당사자의 기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질 무렵에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의 지위와 권능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포도즙이 다 떨어지자 "지금 잔치의 흥이 다 깨지게 생겼는데 너님이 좀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모친인 마리아에게도 "여자여"라고.. 한국어로 치면 "자매님, 아주머니", 군대 용어로 비유하면 '아저씨' 같은 남 취급하는 호칭을 사용했다(4절). 이 호칭은 나중에 십자가에서도 다시 등장한다(요 19:26).

사실, '여자여'라는 호칭 자체가 성경 전체에서 사복음서에서만 등장하며, 그 중에 요한복음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게 흥미롭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장면도 포함해서 말이다(요 8:10).
이런 식으로 대부분이 예수님 말씀의 인용이지만, 베드로의 말 "어허, 이 여자가 정말.. 난 진짜로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니까(요)?"에서도 동일 호칭이 한 번 쓰였다. (눅 22:57)

다시 가나의 혼인 잔치 장면으로 돌아오면.. 4절 다음으로 5절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그분(예수님이)이 말씀하시는 대로만 그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한다. 이 기적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뤄진다는 영적 진리를 내포한다. 참조 구절로 벧전 1:23을 보시라.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들은 마리아의 말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높임법을 사용했고, '말씀하시다'라는 용언을 꼭 살려 놓았다. 이게 맞다. 그 구닥다리 한글 개역성경도 저렇게 돼 있다.

그러나 천주교용 성서 내지, 별 생각 없이 의역 현대어 문체만 추구한 성경 역본에서는 이 상황에서 높임법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보다 서열이 더 높은데 왜 굳이 예수님에게 높임법을 사용하겠는가?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 같은 걸 직접 보시기 바란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또한, '말씀하시는 대로'(say)도 함부로 '시키는 대로'라고 바꿔 버리면 당장 이 문맥에서 본문을 읽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앞서 얘기했던 벧전 1:23 '말씀'과의 연결 고리가 깨지게 된다.

성경의 근간이 된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 같은 언어는 하나님조차 you라고 간단히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높임법 따위 신경 안 쓰는 언어이다. 그 반면, 하나님끼리는 존댓말을 썼을까 말을 놨을까(히 1:8; 10:5-7) 하는 문제는.. 수학에다 비유하자면 마치 ∞ - ∞의 극한과 비슷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을 위해서는 그런 데서 근본적으로 번역자의 주관과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천주교와 기독교는 십계명뿐만 아니라 이런 데서도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 마리아가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곳은 행 1:14이다. 하나님의 어머니고 뭐고 그런 거 없이, 그냥 여러 신실한 여성 크리스천 중 한 명으로서 말이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나 이복(?) 형제라고 해서 딱히 특별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눅 8:20-21, 눅 11:27-28 같은 다른 구절에서도 거듭 확인 가능하다. (꼭 찾아서 확인해 보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9/11/22 08:34 2019/11/2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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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숫자

전세계가 말과 글은 서로 달라도 숫자만은 아라비아 숫자로 사실상 완전히 통일되어 있다. 문자도 아닌 숫자야 무슨 민족 정체성이니 뭐니를 논할 여지 없이, 편리한 것만 냉큼 받아들여서 쓰면 그만이다. 자릿수마다 번거롭게 일일이 새로운 기호를 도입하지 않고 숫자 자체만 쭉 늘어놓는다는 점, 그리고 0을 사용한다는 점이 정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아라비아 숫자 없이 수학이란 학문이 지금처럼 발전하기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전에 동양에서 쓰이던 한자 숫자, 그리고 서양에서 쓰이던 로마 숫자는 실용적인 용도로는 완전히 도태했다. 하지만 예스럽고 간지 나고 권위 있어 보인다는 점 덕분에 책에서 제일 큰 단원(챕터)의 번호, 그리고 아날로그 시계의 숫자 같은 용도 정도로는 아직도 쓰이고 있다. 또한 저작권 문구 같은 데서 MCM 어쩌구 하는 것도 19xx하는 연도 숫자이더라. 로마 숫자 자체가 사실상 천 자리까지만 표현 가능하기도 하니까..

로마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 사이를 상호 변환하는 알고리즘은 꽤 재미있는 코딩 주제이다. 뭔가 100원, 500원, 1000원 등 다양한 화폐로 특정 액수를 표현하는 문제 같기도 하다. 그리고 로마 숫자와 한자 숫자를 비교해 보면 이런 표기법조차 동양과 서양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게 느껴진다.

가령, 동양은 세로쓰기, 서양은 가로쓰기이다. 이 때문인지 1~3도 한자는 가로줄이지만 로마 숫자는 I가 반복되는 세로줄이다. 그리고 동양은 10000 단위로 끊지만 서양은 언어 차원에서 1000 단위가 보편적이다.

2. 숫자: 수량 또는 번호

숫자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기계에서 똑같이 숫자를 입력하는데 계산기와 컴퓨터 키패드는 글쇠배열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789 456 123 순인 반면, 전화기나 도어록의 버튼은 123 456 789의 순이다.

이런 차이는 역사적인 사연 때문에 생기긴 했지만 나름 일리가 있다. 숫자라는 게 사칙연산의 대상인 수량을 표기할 때 쓰이지만, 그런 의미가 전혀 없이 그냥 문자의 연장선으로서 식별 번호를 표기할 때도 쓰이기 때문이다.
789 456 123은 전자용이고 123 456 789는 후자용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전자는 0과 1이 가까이 있는 반면, 후자는 9와 0이 가까이 있다.

컴퓨터는 계산기의 연장선으로서 발명된 기계이다 보니, 키패드의 숫자 배열은 응당 계산기 방식을 따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반대 방식의 숫자 배열이 혼재해 있으니 좌측· 우측통행만큼이나 사용자에게 혼동을 주는 것 같다.
더구나 컴퓨터도 키보드의 1줄짜리 숫자 배열은 수학 친화적이고 문자 코드의 배당 순서와도 일치하는 012..789가 아니라, 번호 지향적인 123..890이다! 엄밀히 말하면 키보드와 키패드의 배열 원칙이 서로 다른 셈이다.

회계· 경리처럼 다량의 숫자를 취급하는 업종에 종사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전자 숫자보다는 후자 숫자를 취급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내 타자연습 연습글 중에도 원주율 소수점을 입력하는 숫자 전용 연습글이 있는데.. 이걸 숫자 전용 패드로 입력한다면 123 방식이 더 익숙할지, 789 방식이 더 자연스러울지 궁금해진다.

요즘은 안 그러는 것 같다만.. 옛날에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외래어를 순명조 같은 별도의 튀는 글꼴로 표기하고, 성경에서도 인명· 지명 고유명사는 고딕 같은 별도의 글꼴로 표기하곤 했다.
그 정도의 관행이라면 숫자도.. 산술 연산 수량용 숫자와 번호용 숫자를 글꼴을 달리하여 구분 표기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번호용 숫자는 숫자계의 고유명사나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수 666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영어 nuumber는 두 의미가 모두 포함돼 있다.

하긴, 숫자 단독 나열에 대해서는 고유명사라는 관념이 희박하다 보니 과거에 80486 같은 CPU 이름은 상표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인텔에서는 펜티엄, 코어 같은 별도의 작명을 하게 되기도 했다. 영화 제목인 300이나 1987은 또 어떨까?
고유명사 기능을 하는 숫자는 여느 숫자와 달리, 억· 만 같은 자리수를 일일이 따지지 않고, 한 자리나 두 자리씩(특히 영어) 각 숫자를 끊어서 읽는 경향이 있다.

그 외에..

  • 라틴 알파벳이야 W와 I 같은 글자의 특성 차이로 인해 가변폭 글꼴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런 글꼴도 숫자까지 0과 1의 폭을 달리하는 가변폭으로 만드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적어도 본문용 글꼴이라면 말이다. 숫자도 가변폭인 글꼴은 아주 특이한 장식용 한정인 것 같다.
  • 3579 같은 홀수는 아래로 삐치고, 2468 짝수는 위로 삐치게 만든 글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위 아래로 들쭉날쭉 삐침이 있는 라틴 알파벳 소문자와 그럭저럭 어울리는 참신한(?) 시도인 것 같다. Constantia라는 글꼴은 모든 56789만 저런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3. 수사(數詞): 명사 또는 관형사

숫자 말고 언어의 수사 얘기를 하자면.. 영어는 한 숫자를 읽는 방법이 정말 오로지 원 투 쓰리 등 한 가지밖에 없어서 매우 단순하고 편리하고 직관적이다. 파생형으로는 몇 째를 나타내는 1st, 2nd, 3rd, -nth 바리에이션이 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 반면, 한국어는 숫자를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모두 읽을 수 있으며 그 원칙에 일관성이 없다(두 시 삼십오 분). 게다가 순우리말은 모든 숫자에 대한 대응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1~4는 명사일 때(하나, 둘, 셋)와 관형사일 때(한, 두, 세) 형태가 달라지기까지 한다.

어디 그 뿐이랴? 뒤에 붙는 의존명사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서/석/세' 같은 쓸데없는 바리에이션도 있다.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지저분한 난장판이 따로 없다.
저건 '다르다/틀리다' 같은 유의미한 구분도 아니고.. 종이가 세 장이건, 석 장이건 세상이 달라질 게 무엇인가? 구분이 문란해져도 아무 상관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4. 사병

군대에서 장교나 부사관 같은 간부가 아니고, 수가 제일 많고 계급이 제일 낮고, 명령을 내리는 게 아니라 받기만 해서(what) 훈련받은 대로(how) 수행하는 군인을 병(兵)이라고 한다. 그런데 한 글자로만 써 놓으면 질병(病)과 구분이 잘 안 되니, 앞뒤에 다른 글자를 붙여서 사병, 병사, 졸병 등으로 부르는 편이다.

이들에 비해 '병'이 들어가지 않은 '군사'는 좀 옛스러운 말 같다. "군사 정권", "그리스도의 군사" 이런 말밖에 안 떠오른다.
soldier를 가리키는 한자어에서 '사'는 모두 士이다. 장기에서는 兵과 卒이 한 칸씩밖에 못 움직이고 후퇴는 못 하는데, 士는 한 칸씩밖에 못 움직이고 궁궐 안만 돌아다닐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병이건 사건 졸이건 이동 능력은 비슷하게 최하이고 말이다..;;

그런데 '사병' 같은 단어에서 私가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이건 오늘날의 PMC 내지 일부 막장 국가에서 존재하는 군벌, 혹은 과거의 지방 호족, 영주들이 거느리는 싸제 군대에 소속된 병사를 가리킬 때에나 쓰일 법하다. 국가 소속의 정규 상비군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연의 일치이기라도 한지, 영어로도 이병/일병은 private이다. 그래서 私가 더욱 잘 연상되는 것 같다.
같은 일을 하는 조직이어도(기업, 학교 등..) '사'보다는 '공'이 붙은 게 더 안정적이고 뽀대 나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래서 영어의 private은 public과 반대로 '사사로운, 사적인'뿐만 아니라 '평민 양민인, 급이 제일 바닥인'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편으로 common은 '공통의, 공공의'라는 아주 public스러운 뜻이 있는데 거기서 부정적인 뉘앙스가 가미되어 '속된, 품위 없는, 졸렬한'이라는 뜻도 있다. private하고는 방향은 다르게 시작했는데 파생 의미가 비슷한 방식으로 꼬여서 형성된 것 같다.

5. 영어 이니셜

세상엔 영어 이니셜들이 굉장히 많이 쓰이고 있는데...
(1) 먼저, 영어 단어들로 구성되었지만 영어 어순대로 배열되지는 않은 이니셜도 있다. 어째 표준과 관련된 이니셜들이 그런 편인데.. ISO와 UTC가 대표적인 예이다. 영어 어순대로라면 각각 IOS와 CUT가 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ISO는 그나마 국제 표준화 기구라는 한국어 어순과 맞는 편이지만, UTC는.. 조금 므흣하다.

(2) 명칭의 이니셜을 구성하는 단어들이 훗날 바뀌었지만, 이니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오히려 새 단어를 이니셜에 맞춰 어거지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영상 매체의 이름인 VHS, DVD처럼 말이다.

(3) 또한, 이니셜이 자음-모음 순으로 어째 읽기 쉽게 배열되어서 그 자체가 연달아 읽는 단어처럼 되어 버리기도 한다. UNICEF, UNESCO 같은 국제 기구 명칭, 그리고 레이저, 레이더 같은 과학 기술 용어가 그 예이다.

6. 기관과 기관장의 명칭

동사무소는 한때 주민센터이다가 행정복지센터라고 더 복잡하게 이름이 바뀌었는데, 여기를 대표하는 최고 수장은 동장 또는 읍장, 면장이다.
시청/군청부터는 건물 뒤에 '청'이 붙기 시작한다. 시를 대표하는 최고 수장은 비교적 직관적인 '시장'이지만, 군의 최고 수장은 군장이 아니라 '군수'이다. 어감상 말을 따로 저렇게 만들었는가 보다.

그리고 도청의 최고 수장은 '장'도 '수'도 붙지 않고 '도지사'이다. 다들 어디서 유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관성 없고 참 제멋대로라는 생각이 든다.;;
국회의원과 대통령이 전국구라면 시 의원과 시장은 지역구 개념인 거겠지? (지방자치)
그럼 국무총리는 뭐고 의전 서열이 어떻게 되는 건지.. 중학교 사회 공부를 다시 해 보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12 08:32 2019/07/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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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언어의 간결함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세상에 생명의 기원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게 바로 언어의 기원이다.
먼 옛날, 최초의 언어가 어떠했는지는 문헌 기록도 음성 녹음도 없고, 아예 문자조차 없으니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이런 게 저절로 우연히 생겨날 수는 없다고 믿어 버리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고 그냥 개인 신념의 영역이 된다.

언어별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고대 언어는 현대의 언어보다 문법이 더 복잡하고 불규칙도 더 많고, 사용되는 음운도 더 다양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반대로 옛날 언어가 어휘나 표현이 더 간결한 것도 있었다.

(1) 예를 들어.. 영어 고어에는 before보다 더 짧은 ere(air, heir와 같은 '에어')가 있고.. enemy보다 더 짧은 foe가 있다. 그리고 뻔한 문맥에서 목적어 같은 걸 생략도 많이 했다. 아래의 KJV 구절을 살펴보자.

  •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창 20:2)
  • Bring these men home, and slay, and make ready. (창 43:16)

'사람을 보내어'인데 그냥 sent를 자동사인 듯이 썼으며
'가축을 잡아서'인데 그냥 slay 한 단어로만 씨크하게 표현했다.

(2) 그런데 영어 이전의 성경의 언어였던 히브리어· 그리스어 레벨에서는 이런 자비심 없는 축약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KJV 영어 본문에서 이탤릭체 처리된 단어들을 찾아보면.. 없으면 단순히 문법적으로만 어색하거나, 아까 사람 내지 가축처럼 어렴풋이 유추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들도 있다.

시 12:5 끝부분의 "I will set [him] in safety [from him that] puffeth at him."에서 []로 둘러싸인 부분이 전부 이탤릭이다. 도대체 히브리어 원어 원문은 얼마나 암호처럼 짧게 기록됐길래 영어에서 저런 목적어와 수식어를 창작해서 집어넣어 줘야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KJV 외의 타 성경들도 동일하게 저렇게 번역했음)

(3) KJV는 they라는 짤막한 단어를 3인칭 복수 대명사로도 쓰고, people 같은 '일반적인 사람' 용도로도 쓴다. 이것 자체는 현대 영어에서도 존재하는 관행이지만, KJV는 중의성· 모호성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they를 즐겨 쓰는 감이 있다.
왕하 19:35를 보면.. "they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they는 모두 죽은 송장이 되어 있었더라"처럼..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they가 쓰인다.

출 20:13 "살인하지 말라"도 타 성경들은 murder 정도를 넣었지만 KJV만은 그냥 짧은 kill이다.

(4) 영어를 비롯한 성경 언어 쪽 얘기가 길어졌는데, 반대편의 한국어도 마찬가지이다. 훈민정음 서문이라든가 이 윤탁 한글 영비 같은 걸 보면.. "영한 비라. 거운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말이 굉장히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요즘 같으면 못해도 "이것은 신령한 비입니다. 이 비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정도로는 풀어서 쓸 텐데? 띄어쓰기가 없는 고어체를 감안하더라도 주어 생략에다 '거우다?'라는 짤막한 단어.. 뭔가 현대 한국어의 화자는 알지 못하는 옛 한국어의 면모인 것 같다.

2. 의존명사

한국어에는 의존명사라는 게 있다. '리', '수' 같은 건 분명 고유한 뜻과 뉘앙스가 있긴 한데,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난감하다. 얘들은 '-ㄹ' 꼴로 활용된 용언으로부터 수식을 받은 바로 다음에만 등장하며(그럴 리, 할 수..), 특히 '리' 다음에는 '없다'만 쓰인다.

어처구니, 어이 같은 단어는 그런 통상적인 의존명사에 속하지는 않지만.. 뒤에 붙는 용언이 답정너 너무 뻔하고 다른 형태로 쓰이는 일이 없다시피하다. 그래서 '어이없다, 어처구니없다'가 그냥 한 단어로 인정될 지경이다. '쓸데없다'처럼 말이다.

한국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너무 어렵고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원성이 자자하지만.. 한국어가 단어와 형태소의 경계를 구분하는 게 그만치 어렵다. 이것 때문에 사전 편찬자와 국어 문법학자들도 고충이 많다. 용언에 극도로 제한된 뻔한 형태로만 활용되는 불완전동사가 있는 것만큼이나(더불다, 가로다, 달다) 체언에는 아주 제한된 형태로만 쓰이는 의존명사 같은 물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형태, 관용구 형태로만 쓰이는 명사가 영어에도 있는 것 같다. 유익· 편의라는 뜻인 sake 내지 behalf 같은 단어 말이다. 얘들은 오로지 one's sake, ?n behalf of .., for the sake of 형태로만 쓰이고 단독 내지 다른 형태로 쓰이는 일이 없다. 이것 말고 다른 예도 있지 싶다.

3.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

(1) 외래어 표기법의 노답 문제

  • 자음 음절 경계: 플룻 플루트 로보트 백 태그..;; 답이 없다. ㅡ는 음가가 참 불분명한 모음이다.
  • 장모음: 윈도우 보우 리모트 보트 스노우.. [ou]라는 영어 장모음은 u를 무시하고 '오'로만 표기하는 게 원칙이지만 snow나 window 같은 단어는 여전히 '우'까지 표기한 형태가 더 익숙하다.
  • 모음 경계: washer는 와셔일까, 워셔일까? ㅏ~ㅓ, ㅗ~ㅓ 경계가 의외로 헷갈린다.

(2) 한글 맞춤법 및 발음에서 노답 문제

  • 사잇소리와 사이시옷: 비빔밥/볶음밥 중에서 왜 전자만 밥이 '빱'으로 바뀔까? 물고기/불고기 중에서 왜 전자만 '꼬' 소리가 날까? '김밥'의 발음은 밥과 빱 중에 무엇이 더 바람직할까?
  • 띄어쓰기: 한자어 복합명사들의 띄어쓰기부터가 아주 모호하다. 또한, 순우리말 중에도 '잘 만 듯 못' 요런 어절들은 단어도 되고 접사도 되기 때문에, 뒤에 '+하다' 같은 게 이어질 때 띄어쓰기 여부가 아주 구리다.

4. ㅐ와 ㅔ의 발음

이건 한국어 음운 체계에 남아 있는 희대의 미스터리이다.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만큼이나, I와 you를 구분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소리였는데 어쩌다가 요즘 사람들이 절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소리의 쌍으로 전락했나 모르겠다. 서로 다르게 발음도 못 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장음· 단음 구분이 망가진 것처럼 말이다.

요즘 통용되는 그 소리는 원래의 ㅐ도, ㅔ도 아닌 중간의 소리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영어나 일본어에서도 쓰이는 보편적인(?) 소리인 건지도 모르겠다.
ㅐ/ㅔ뿐만 아니라 ㅒ와 ㅖ의 구분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ㅙ/ㅞ/ㅚ도 서로 변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덕분에 재련과 제련, 결재와 결제, 제제와 제재 같은 한자어의 표기도 굉장히 헷갈리게 되었다.

한글이 처음 창제되던 당시에는 저 모음들이 어떻게 구분되어 발음되었는지.. 몇백 년 전 사람을 만나서 물어 보고 싶기라도 한 심정이다.

5. 사라져 가는 순우리말

까닭(이유), 달걀(계란), 뭍(육지, 땅) 같은 순우리말 단어는 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방송과 도서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단어였는데 갈수록 용례가 줄어들고 있는 게 보인다. 특히 '뭍'의 경우, 옛날에 전래동화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제는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로 전락했다.

이런 식으로 '미덥다, 미쁘다, 미련하다' 같은 단어도 사라지는 것 같다. 어째 다 '미'짜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콩팥은 신장에 밀려서, 허파도 폐에 밀려서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금 세대는 알아듣기라도 하지만 다음 세대 애들한테는 완전히 듣보잡이 되겠지?

Posted by 사무엘

2019/04/03 08:35 2019/04/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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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대화 수단

한국어는 체언보다 용언을 좋아하는 언어이고, 수식도 형용사보다 부사 위주로 하는 걸 좋아하는 언어이다. 어색한 번역투라는 건 대체로 영어의 문장 구조를 따라 체언의 주변에다 자꾸 무리해서 수식어를 붙이다 보니 생긴다.
간단한 예로 "많은 사람이 있다" vs "사람이 많이 있다"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된다. 더구나 한국어에 more, no 같은 단어는 부사(더)나 형용사(없다)로만 있지, 영어와 대등한 관형사 같은 품사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얼마나 동사를 좋아하면.. '모르다'조차도 동사 한 단어로 딱 존재한다. 이게 보통일이 아니다. '모르다'와 동일한 의미의 타동사가 존재하는 언어는 내가 아는 언어 중에는 모국어인 한국어가 유일하다.

영어(do not know)· 독일어(kennen nicht)· 중국어(不知)는 물론이요, 한국어와 그나마 구조적으로 비슷하다는 일본어도 '知らない'(알지 않는다)로 우회해서 표현하고.. 그렇지 않은가? 동사 한 단어로 존재하는 게 편할 때도 물론 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모른다! / 전쟁을 모르는 세대"처럼..
'모르다'는 '없다, 아니다'와 더불어 '너무, 전혀' 같은 부정 담당 부사가 직통으로 붙을 수 있는 소수의 용언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렇듯, 한국어는 부사와 서술어를 좋아하는 언어여서 그런지 체언인 명사의 쓰임이 까다롭지 않고 아주 단순하다. 그냥 그 명칭 자체만 들었으면 장땡이지 그게 단수냐 복수냐, 아무 물건이냐 그 특정 물건이냐(부정관사 정관사) 같은 건 별로 엄밀하게 따지지 않는다.
이건 존재에 대한 인지 방식 자체가 한국어 사고방식과 영어 같은 서양 언어의 사고방식은 서로 매우 다르다는 걸 시사한다. 솔직히 어떤 개체의 개수가 0(없음)이냐 1(유니크)이냐 다수(* 양산형)냐 하는 것은 차이가 꽤 크긴 하다.

영어를 기준으로 고유명사는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도 하니, 이건 외국어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단어이더라도 딱히 번역을 할 필요 없고 음역만 하면 된다는 게 시각적으로 보장된다. 무척 편리하다.

다만, 표기를 넘어 언어 차원에서 명사의 종류를 매번 꼬박꼬박 구분해하는 게 다 좋기만 한 건 아니다. 그게 더 복잡하고 피곤하고 헷갈리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어떤 명사가 일반-보통명사냐 고유명사냐 하는 기준은 굉장히 주관적이며, 우리 생각만치 절대불변으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

고유명사라도 너무 흔해지고 의미가 확장되면 보통명사로 바뀌기도 한다.  영어도 특이한 문맥에서는 고유명사 앞에서 부정관사(!!)를 잘만 붙여 쓰고 심지어 복수형도 만든다.
가령, 자동차 이름인 쏘나타, 그랜저, 아반떼 같은 것은 명백히 첫 글자를 대문자로 적는 고유명사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차가 아니며, 같은 종류의 차가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 "그랜저 네 대, 쏘나타 다섯 대"랑 "사과 네 개, 귤 다섯 개"에서 각 명칭들이 서로 완전히 다르게 취급되어야 할 이유는 별로 없을 것이다.

아울러, 한국어는 명사에 성 구분도 없다. 유럽 언어에 존재하는 성 구분은 동양 철학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는 음양설의 서양 버전이 아닌가 싶다. 국가나 선박을 she로 가리키는 거, 혹은 성경에서 지혜까지 she로 가리키는 것은 동양권 언어의 화자로서는 선뜻 이해하기 어렵고 곧이곧대로 번역하기도 난감해 보인다.

그 대신 한국어가 상당히 꼼꼼하게 구분하는 건 사람이냐 물건이냐, 혹은 생물이냐 무생물이냐 하는 것이다. 솔직히 한국인은 마우스라는 컴퓨터 장치를 발명했어도 거기에다가 생쥐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었을 것이며, 크레인이라는 기계를 발명했어도 거기에다가 학이나 두루미라는 이름을 선뜻 붙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예로, 영어의 명사화 접미사 -er, -or는 그 동작을 담당하는 사람이나 물건, 추상명사를 아무 구분 없이 모두 가리킬 수 있는 굉장히 요긴한 형태소이다. speaker는 기계 스피커도 되고 연설자도 되며, printer는 기계 프린터도 되고 옛날 인쇄공도 된다.

하지만 이는 한국어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고방식이다. 한국어에서는 물건일 때는 -개, -기 등으로, 사람일 때는 -꾼, -장이/쟁이, -자, -사 따위로 꼭 구분해서 번역돼야 한다. 포괄적인 대명사 one의 번역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인해 좀 난감해진다.
이게 불편해서 그런지 저 영어 접미사가 인터넷 통신체 위주로 국어에 이미 많이 유입된 것도 현실이다. 악플러, 갤러, 불편러 등~

둠 코믹스에서 "아 전기톱! 훌륭한 대화수단이지!"가 원문으로 the great communicator인데.. 이게 원전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별칭이었다고 한다. '위대한 소통가'라고.. 이건 정치인으로서 정말 영광스러운 타이틀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커뮤니케이터'가 사람도 가리키고 물건 도구도 가리킬 수 있으니 저런 패러디가 가능하다.

Allow me to communicate to you my desire to have your guns!
너희 총을 원한다는 갈망을 담소 나누고 싶구나!
C'mere boys, I got somethin' to say!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저 만화에서 둠가이는 말 대신 주먹... 아니, 말 대신 전기톱으로 좀비맨들을 썰어 버리는 게 담소이고 의사소통이다. ㅡ,.ㅡ;; 뭐, 현실에서도 좋은 말이 안 통하고 꼭 폭력을 동원하고 힘으로 찍어눌러야 말귀 알아듣고 버로우 타는 부류들도 없지는 않다.

국민이나 의회와 그렇게도 소통을 잘 했다던 레이건 대통령도 공산주의자 같은 악의 무리와는 일체의 대화도, 타협도 없었다.
그는 굉장히 독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사상 건전하고 성경관 쪽으로도 당장 기억은 안 나지만 명언을 남겼던 사람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때는 소련을 맹비난하면서 악의 제국 드립까지 구사하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무척 마음에 든다.

좌파들은 그걸 '포용정책'이라고 부르더군요.
우리가 적을 적대시하지 않기만 하면, 그 잔인한 독재자가 반인륜적 범죄를 멈추고 평화를 사랑할 거라고 말입니다.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은 다 전쟁광이고 말이죠.
... 전쟁만은 피하기 위해 우리의 자유를 팔아넘기는 것은 전체주의의 내리막길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적에 대한 순진한 포용 정책이나 대책 없이 희망적인 사고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을 배신하는 짓이고, 우리의 자유를 탕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폭탄이 무섭다고 우리의 안전과 자유를 팔아넘기는 비윤리적인 짓을 저지를 순 없습니다.
그건 공산국가의 철의 장막 뒤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희망을 버리세요. 우린 우리가 무사하기 위해서라면 당신들의 지배자와도 타협할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험보다 치욕을 택하는 나라는 지배당하기 딱 좋은 마음 상태이며, 지배 당해야 마땅하다"


1964년 10월 27일, 월남전이 진행 중이고 일본에서는 신칸센이 갓 개통했던 시절에 했던 A time for choosing이라는 연설에다가 1982년 6월 8일자 대국민 담화가 섞여 있긴 한데.. 완전 아멘 사이다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청와대에 서식하고 있는 누가 보기에는 완전 자기 저격이고, 엄청 거슬리고 불편한 내용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05 08:33 2019/02/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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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1. 말모이

독자 여러분은 '말모이'라는 단어를 혹시 들어 보셨는가?
이건 word + collection을 직역한 합성어로, 구한말-일제 시대 급의 과거에 일부 국어학자들이 사전(dictionary)을 순우리말로 옮겨서 표현했던 단어이다.

코퍼스를 뜻하는 '말뭉치'도 어쩌면 ‘말모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연세대인지 고려대인지 어디 교수가 처음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용어이다. 그 최초 제안자가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물론 현대에 만들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업계에서 활발히 쓰이는 용어이다.

다만, 명사로만 이뤄진 합성어인 말뭉치와 달리, 말모이에서 '모이'는 '먹다'(eat)로부터 '먹이'(food)를 만들듯이 '모으다'의 어간에다가 명사화 접미사 '-이'를 붙인 파생어이다.
결합 과정에서 모음 음운이 하나 탈락하긴 했지만(모으다 ≠ 모다) 그건 별로 어색하지 않으며, 저건 ‘해돋이’, ‘한살이’만큼이나 아무 문제 없는 조어이다. 하지만 어감이 이상하다고 까는 사람도 있다. horse + food (for birds to peck up)가 떠오른다고 말이다. =_=;;

뭐, 그건 우연의 일치일 뿐이다. 동음이의어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옛날에는 ‘시발’이라는 자동차도 있었다. 어감이라는 걸 판단하는 기준이 옛날과 지금이 서로 같지 않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2. 동명의 최근 영화

세월이 흘러서 조선어 학회가 영화의 소재로 등장하고 ‘말모이’라는 단어가 영화 제목이 되는 날이 왔다. 그놈의 좌편향 반일 프레임이 지긋지긋하다고 싫어하는 분들의 심정을 본인 역시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나, 언어와 신앙 분야(과거에 일사각오..)는 내가 특별 관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요런 영화는 찾아서.. ‘혼영’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만, 얘는 여느 전쟁 영화 같은 본격적인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일제 말기에 저런 단체가 있어서 국어사전을 만들려고 했고, 그러다가 왜놈들에게 잡혀서 회원들이 고초를 겪었다. 원고를 빼앗기기까지 했지만 다행히 해방 후에 서울역 창고에서 되찾았고, 사전은 마침내 성공적으로 출간돼 나왔다.”
라는 기본 배경만이 팩트이다. 아, 그 당시에 저기서 ‘한글’이라는 제목의 기관지를 발간했다는 것도 추가적인 팩트이고..

허나, 그것 이후로 세부적인 주인공, 조선어 학회 구성원, 중간에 일어난 사건 등등등은 순도 99%에 가까운 허구 창작이라는 점을 감안하도록 하자. 세상에, 조선어 학회의 대표가 친일파로 변절한 중학교 이사장의 아들 부잣집 도련님이라니, 완전 충격이다. ㅡ,.ㅡ;; ㅠ_ㅠ

더구나 영화에는 어설픈 첩보전까지 나온다. 조선어 학회가 일제의 어용 학술단체로 변절한 듯이 간판을 바꿔 달고, 조선총독부가 허가해 준 합법 집회에서는 대표가 일제 부역 독려 연설까지 하며 페이크를 친다. 그 뒤 그들은 야밤에 극장에서 진짜 동지들을 몰래 모아서 지방 방언을 수집한다.;;; 작가의 상상력과 창의력이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런 건 그냥 드라마틱한 효과를 내려고 일부러 만든 설정이다. 이 영화의 등장 인물 중에는 조선어 학회 대표는 물론이고 일반 회원 중에서도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딴 인물이 없다. 그러니 <말모이>는 어찌 보면 과거의 <밀정>이나 <암살> 같은 부류보다도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

3. 실제 조선어 학회의 대표

그 당시에 조선어 학회 ‘대표’의 직함명은 ‘간사장(간사+장)’이었다. 193, 40년대에 조선어 학회의 간사장을 역임한 핵심 간부로는 이 극로, 신 명균 같은 사람이 있다.
이 극로는 이 미륵(압록강은 흐른다)처럼 그 시절에 극소수이던 독일 유학 박사이고, 독일의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걸출한 학자로서 조선어 학회에서는 최 현배보다도 중요도가 더 높은 인물이었다.

이 사람이 남긴 매우 긍정적인 행적이 하나 전해진다. 근무 중에 눈병을 앓아서 근처 병원을 찾아갔는데(1938년경) 거기가 바로 개업한 지 얼마 안 됐던 공안과였다. 그는 거기서 자기를 치료해 준 원장 선생에게 대뜸 한글뽕(?)을 주입시켰다. 그리고 그 의사양반은 거기서 큰 감화를 받은 나머지, 훗날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하게 되었다!
뭐, 말모이 같은 영화에는 들어갈 만한 문맥이 없었겠지만, 이런 일화가 영화 같은 매체에서 소개될 기회가 없는 건 아쉬운 점이다.

다만, 이 극로는 해방 후에는 월북을 하는 바람에 남한에서 존재감이 묻혀 버렸다. (사후에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됨) 오죽했으면 해방 후에 조선어 학회가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꾼 이유(1949) 중 하나도.. 대표의 월북으로 인한 빨갱이 누명을 조금이라도 벗기 위해서였다.

다음으로 신 명균은 나도 대학 시절 내내 전혀 몰랐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인물인데.. 1941년쯤에 일제의 한국어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에 항의하여 ‘자결’을 해 버렸다. 그러니,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지도 않았고 투옥 기록도 없고.. 존재도 한참 뒤에야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런 분들과 달리, 해방 이후 남한에서 그럭저럭 오래 살았던 최 현배 선생은 조선어 학회 간사이긴 했지만 간사장까지 맡은 적은 없었다.

4. 조선어 학회 사건이 발생한 진짜 이유

사실, 조선어 학회는 조선어 국어사전 편찬과 출간 자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1940년에 허가를 받았다. 총칼 무장 독립 운동이 아닌 학술 활동일 뿐인데, 일제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탄압할 정도로 야박하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국어사전의 편찬에 관심을 가질 정도의 인물이라면 항일 성향도 강하다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으니, 놈들이 예의주시하고 감시를 하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선어 학회가 1942년에 뒤늦게 조선 시대 사화를 당하듯이 화를 입은 이유는.. 잘 알다시피 여학생 일기장 사건 때문이다. “국어(=일본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선생이 혼내 줬다” → 어라? 국가 정책을 무시하고 왜 일본어 쓰는 애를 혼내지? → 그 교사를 뒷조사 해 보니 전교조.. 아니 조선어 학회 소속 → 이거 알고 보니 골수 불령선인 악질 반동이구만? → 안 그래도 요주의 인물이었는데 그럼 그렇지, 요놈 잘 걸렸다.

일제의 고등 경찰인지 특별 고등 경찰인지 거기서 실적 껀수 하나 올리려고 요렇게 시나리오를 만들어서 학자들을 잡아들이고 투옥시킨 것이다. 그리고 만들던 사전 원고도 빼앗겼다. 다만, 이건 피의자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참고하려고 증거물 차원에서 압수한 것이지, 그게 무슨 일제의 입장에서 나쁜.. 이를테면 일본의 국가기밀 누설, 조선총독부 폭파 음모, 총독 내지 덴노 암살 음모, 본토 테러 지령 같은 것이어서 압수당한 건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금지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어 사전 원고를 작성한 것 자체까지 법적으로 죄는 아니었다. 애초에 조선어 학회도 무슨 광복군 의열단 같은 단체가 아니니까 말이다. 굳이 그 사전 편찬자들을 해코지 하려면 명목상으로 다른 정치적이고 더 큰 죄를 뒤집어씌워야 했다.

애매한 학자들을 골수 반동분자로 조작하기 위해 잔인한 고문에 의한 자백 강요가 되풀이되었으며, 거기에다 춥고 비위생적인 형무소 수감이 장기화되면서 이 윤재, 한 징 선생 두 분이 결국 옥사했다.
그때 그 일기를 썼던 여학생은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를 졸업했는데, 자기 일기로 인해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을 뒤늦게 전해 듣고는 큰 충격을 받고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을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

그러다가 저분은 1982년 여름, 일본의 역사 왜곡 때문에 전국적인 반일 정서가 강해졌던 시절에 환갑을 앞둔 나이가 돼서야 “내가 그때의 영생여고보 학생 박 영희였습니다”라고 선언하고 중앙일보 인터뷰를 했다. “그때 일기장을 빼앗기고 은사가 지금 어디 있는지 대라는 협박과 함께 온갖 불법 감금과 폭행을 당했던 피해자가 바로 본인이고 아직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오리발 내밀고 발뺌하고 부정한다니, 왜놈들은 정말 인간도 아닙니다!”라고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인터뷰 내용은 한국일보에도 실렸던 모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0년쯤 전에 옛날엔 “내가 소설과 영화 상록수의 실제 주인공이고 최 용신의 옛 약혼자인 김 학준이오!” 커밍아웃이 나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쯤 뒤 1990년대 초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의 증언이 처음으로 나왔으니.. 이런 식으로 옛날 역사의 증인들이 하나 둘 나타난 듯하다.

그러니 <말모이> 같은 소재의 영화가 좀 더 진지하게 역사 고증과 사실성을 추구한다면, 저런 사람의 회상으로 시작하는 액자식 구성을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그 대신, 그랬으면 또 월북한 빨갱이 학자를 미화한다는 색깔 논란에 휩싸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 극로는 깨끗이 잊고 최 현배를 대신 부각시키거나..

5. 그들은 왜 그렇게 사전 편찬에 목숨을 걸었는가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한국어에 이런 단어가 있었나 싶은 듣보잡 어휘가 의외로 많이 잠들어 있다. 가령, 미혼 해녀를 '비바리'라고 하고, 돌싱 여성을 '되모시'라고 한다.
한자어 합성이긴 하지만, 1/n 더치페이를 나타내는 '각추렴'이라는 말도 있다.

호칭과 높임법이 너무 불편해서 영어로 대화하는 거, 정말 어휘가 없어서 외래어 쓰는 것을 뭐라할 수는 없다. 그런 걸 어설프게 순화어 만드는 건 별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당장 멀쩡하게 이미 있는 말부터 제대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쓰여서 사어가 됐다면 그걸 고유명사화해서 브랜드명으로 써먹는 방법도 있을 테고 말이다.

더구나 한국어는 체언보다 용언을, 형용사보다 부사를 훨씬 더 좋아하는 언어이지 않던가. 순우리말도 저런 지엽적인 명사보다는 동사 같은 용언을 더 많이 찾아서 살려 써야 된다.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긴 하다만.. 영어로는 reliable이라고 한 단어로 간단하게 표현하는 걸 우리는 맨날 '믿을 만한, 신뢰할 수 있는'이라고 길게 풀어서 번역해야 한다면 몹시 불편하고 비경제적이다. 이런 예가 한두 개가 아니라 수백 수천 개로 늘어난다면 한국어의 사고 체계는 영어의 사고 체계와 비교했을 때 결코 편리하다고 볼 수 없게 된다.

그런데 그걸 '미덥다'라고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믿음직하다'보다도 더 짧다. 한국어에 원래 그런 어휘가 있다는 증언을 바로 국어사전이 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faithful에는 '신실하다'뿐만 아니라 '미쁘다'도 들어가 있어야 한다. throw는 그냥 '던지다'이지만, hurl에는 '내박치다'라는 뜻풀이가 실려 있어야 한다.

영일 사전을 그대로 베끼기만 해서는 진짜 우리말다운 표현이 반영된 영한 사전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국어 사전과의 적절한 연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어 최초의 사전이라 일컬어지는 조선어 학회 큰사전의 존재 의의였다.

6. Aftermath

이렇듯, 조선어 학회는 일제 시대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내놓고 사전 편찬 작업을 했다. 영화에서는 맞춤법이라기보다는 방언 수집· 분류와 표준어 제정처럼 묘사되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사전을 편찬하려면 실제로 저런 식으로 온갖 어휘들을 수집하기도 해야 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해방 후에는 이 학회 출신의 학자들이 미군정 하에서 거의 즉시 한국어 교과서를 편찬하고 사전을 실제로 출간하는 과업까지 이뤘다.
한글 학회 큰사전 이후로 나중에는 신 기철· 신 용철이 편찬한 '새우리말 큰사전'도 민간 국어사전의 양대 산맥을 구성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부터는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나오면서 민간에서 국어사전을 또 편찬할 일은 사실상 없어졌다.

그런데 이때는 대세가 이미 인터넷으로 기울고 있었던지라, 국가 기관에서 편찬한 국어사전조차도 초판 종이책이 많이 팔리지 않아 출판사가 적자를 봤다고 한다. 그 뒤로 사전이 수차례 개정되고 증보되었지만 종이책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참 격세지감이다.

이상이다.
영화가 배경 말고 이야기의 주 뼈대가 거의 다 허구인 것은 아쉬운 점이다. 햄· 소시지 같은 가공육인 것을 처음부터 감안하고 먹긴 했지만, 성분 분포를 보니 싸구려 잡육과 밀가루가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다.

그래도 맨날 뻔한 무장 항일 투쟁 말고 조선어 학회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온 것은 나름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아저씨>의 오 명규 사장과 <범죄도시>의 장 첸을 한데 만나니 반갑기도 했다.
국내에 있는 영화 소품용 1930년대 올드카 대여 업체들은 다 좌핸들 차량만 보유 중인가 보다. 그 시절 배경 드라마나 영화들을 봐도 다 그런 것 같다. 진짜 일제 시대에는 일본을 따라 다 좌측통행 우핸들이었을 텐데 말이다.

* 이 글은 한글 학회 홈페이지에 공식 기재된 학회 연혁을 상당수 참고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내 기억에만 의지해서 쓴 게 아니다.
아울러, 관심 있으신 분은 조선어 학회 사건의 전말에 대해 잘 소개해 놓은 다음 사이트의 자료도 추가로 참고하시기 바란다. #1 / #2

Posted by 사무엘

2019/01/19 08:33 2019/01/1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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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문체, 어문 정책 등

1. 교과서의 문체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 싶은데..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형· 누나(가족, 사촌 등)의 교과서를 미리 보니, 교과서가 갈수록 글자 크기가 작아지고, 컬러이던 것이 흑백으로 바뀌는(중등 이상) 것에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느꼈고 심리적으로 겁을 먹었었다.

특히 말투가 반말로 바뀌는 게 싫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990년대엔 초1~2에서는 '해요체'였고, 과도기인 초3에서 좀 더 격식을 차린 '하오체', 그 다음 초4부터 '해라체' 반말로 바뀌었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다.
그냥 반말도 모자라서 '하여라(해라)/써라'에서 연결어미가 더 생략되어 '하라/쓰라'라고만 하면.. 더 건조하고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 하십시오: 아주 높임
  • 하시오: 약간 높임
  • 하세요: 두루 높임
  • 해요: 두루 낮춤
  • 하게: 약간 낮춤
  • 해라: 아주 낮춤

이게 바로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어의 문체이다. 군대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요'로 끝나는 비격식체 '두루 높임/낮춤'이다.
학교 교과서는 맨 처음엔 두루 높임으로 시작했다가(계산하세요), 약간 높임을 보여준 뒤(계산하시오) 곧장 아주 낮춤으로 바뀐 셈이다(계산하여라).

물론 한국어의 글에서는 존댓말보다 이런 반말이 훨씬 더 보편적이다. 그리고 간결하기 때문에 쓰는 것일 뿐, 굳이 독자를 낮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사실 한국어는 제일 짧은 반말을 쓰더라도 용언 뒤에 각종 어미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느라 여전히 좀 거추장스러운 구석이 있다. (예: 프로그래밍 언어를 한국어로 설계해 보면?)
하지만 저런 말투의 변화조차도 어린 동심의 입장에서는 병아리가 알을 깨는 것과 같은 큰 변화였던 것이다.

한국과 달리 서양 내지 영어권 애들은 그런 거 고민이 필요 없는 언어를 쓴다. 부모님 하나님도 그냥 you라고 부르고.. 나이 꼰대질 없이 누구든 그냥 통성명부터 한 뒤, you 아니면 이름으로 부르면 되니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에서도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sir을 앞뒤에 덧붙이는 것만 빼면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된다.

이런 의사소통에서의 효율이 더 멀리 나아가 학문과 기술의 발달 깊이, 그리고 업무 프로세스의 효율 차이까지 가져온 건지도 모른다.
1990년대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 같은 극단적인 예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2. 옛날 한글 개역성경의 이색 문체

오늘날 우리말에서 성경 같은 경전은 '-느니라, -도다, -노라, -소서' 같은 엄격 진지 근엄한 고어 문체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전근대적인 절대권위라는 게 몽땅 무너진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에서 저런 말투를 사용하거나 접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야 오래 전부터 현대어 스타일로 번역된 공동번역을 사용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독교회 쪽은 사정이 달라서 개역성경의 문체를 하루아침에 탈피하는 건 신자들의 정서상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 2000년대에 와서도 교회에서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성경의 주류는 여전히 개역성경을 약간만 고친 개역개정판에 머무르고 있다.

심지어 킹 제임스 성경 진영에서도 본문 내용이 변개되고 삭제된 것들을 논할 뿐, 문체는 개역성경의 고어 문체를 별 이의 없이 그대로 수용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편이다. 아니, KJV도 고어체이니 한국어 역시 의도적으로 고어체로 번역하는 게 더 어울릴 지경이다.

본인은 어린 시절에 성경의 이런 문체가 신기하게 느껴졌으며, 또 맨 끝에 있던 계 22:18-19.. 그 유명한 성경 변개 금지 경고문(말씀에다 더하거나 빼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본인을 훗날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로 이끈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아직 한글 개역성경만 보던 옛날에..
본인은 한글 개역성경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시는 부분만이 이례적으로 고어체 대신 평범한 '-다'로 끝나는 것을 일찍부터 주목했다. 이것도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0)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7)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46)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

요한복음만 빼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저렇다.
동사 용언이 ㄴ이나 '았' 같은 시제 선어말 어미 없이 으뜸꼴 형태 그대로 쓰이는 건 무슨 제목이나 자막 같은 데서.. "누구누구 죽다", "어디에 가다"처럼 드물게 쓰이기는 한다.
그런데 존대 선어말 어미 '시'는 붙어서 '떠나시다, 운명하시다'는 어린 동심에 굉장히 특이한 심상을 만들어 냈다.

개역성경에서 '-시다'라고 끝나는 구절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만 딱 10군데가 나온다. 마 16:4 "떠나가시다"부터 요 18:1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까지..
하지만 이것들은 별 의미는 없고, 단순히 이 부분을 맡은 번역자의 번역 스타일 때문에 들어간 특이한 일탈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개역개정판에서는 다들 '떠나시니라'(마 27:50), '숨지시니라'(막 15:37, 눅 23:46) 같은 '-시니라' 꼴로 바뀌었다.

3. 여담: 한중일의 언어 정책 변화

동북아시아 삼국은 20세기가 가히 격변의 시대였다.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자 언어 쪽도 큰 변화를 겪었다.

(1) 중국: 1956~1964년에 걸쳐 공산당 마오의 령도력으로 한자들의 획을 대폭 줄인 '간체자'를 제정했다. 1953년, 6· 25 휴전 협정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나라 국'을 國이라고 쓰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부터는 그렇지 않게 됐다.
또한 보조 표음용으로 알파벳 기반의 한어병음도 1958년에 전격 시행하여 기존 주음부호를 대체했다. 오늘날은 '대만'만 옛날 정체(번체)와 주음부호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2) 일본: 1949년, 아직 미군정 하에 있을 때 '신자체'를 만들었다.
이런 글자의 변화 말고도 지금처럼 히라가나를 고유어의 표기에 활용하는 일본어 정서법 역시 해방(한국의)/패전(일본의) 이후에 도입되고 정착했다. 그 전에는 지금은 히라가나로 표기했을 말도 다 가타카나로 표기했다.

(3) 한국: 아직 일제 시대이던 1933년에 초안이 나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업적이었다. 이때 아래아 같은 잉여 옛한글은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한국어 정서법이 지금과 얼추 비슷하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서법을 바탕으로 한국어 성경(개역성경전서 1938)과 국어사전(조선어 학회 큰사전 1947~57)이 출간될 수 있었다. 저 1938년도 성경을 또 개정하여 1961년에 나온 것이 바로 개역개정판 이전까지 국내에서 널리 쓰였던 그 개역성경이다.

한국은 중· 일과 달리, 국가 차원에서 한자를 손본 적은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그냥 정자체를 그대로 쓰고 있고, 그냥 조금 한자깨나 아는 사람들이 중국보다는 일본식 약자를 무단으로 쓰는 편이었다.

4. 여담: 소나기

자고로 옛날에 이 승만은 지금 본인과 비슷한 나이 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소설가 황 순원은 지금 본인과 비슷한 나이 때 일생일대의 명작 걸작인 단편소설 <소나기>를 지었다.

소나기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아니 그 전에 한메 같은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신물나도록 봤다. 내가 알기로 이 소설은 발표된 이래로 자국의 국어 교과서에서 누락된 적이 없다. 영화와 애니로도 이미 실컷 만들어져 나왔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직 6· 25 전쟁도 안 끝났고 나라가 온통 박살이 나 있었을 때..
쉽게 말해 그 암울하던 이 범선의 <학마을 사람들>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을 시절에 어째 저런 전원적이고 낭만적이고 아기자기 예쁜 소설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놀랍기 그지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초 중딩 시절에는 소나기 정도만 해도 텍스트가 상당히 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안 든다.
  • 남자애는.. 정말 숙맥이다.;;
  • 한편으로는 단선 철길 폐색 구간의 양방향에서 잘못 진입한 열차가 떠오르기도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5 08:34 2018/10/2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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