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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의 "까라면 까"

1. 까라면 까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공밀레 "까라면 까"는 이 둘이지 싶다. -_-;;

(1) "흠~~~ 엔진이랑(정확히는 보일러) 엘리베이터가 큰 이상 없다니 그럼 됐다. 이 정도 대미지는 사흘이면 충분하다. 요크타운을 이 기한 안에 수리를 마치도록. 우린 지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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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절, 배수량이 2만 톤을 넘는 큰 항모가 갑판에 이전 전투(산호해 해전) 폭탄을 맞고 다 부서져서 함재기를 적재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전문가들이 보니 이건 제대로 수리하는 데 3개월은 잡아야 할 큰 대미지였는데.. 우리의 제독님이 3주도 아니고 3일로 기간을 일방적으로 후려쳤다.

군에서는 화들짝 놀라서 SCV들을 싹싹 긁어모아서 밤새도록 갈아넣고 특근을 시켰다. 무려 1400명에 달하는 정비공들이 달라붙어서 사흘 만에 간신히 외형을 복원하고, 함재기 적재와 항해가 가능한 상태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모든 수리가 제대로 끝난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 요크타운이 일본놈들과 싸우러 출항할 때, 공구를 바리바리 싣고 수리공들을 같이 태우고 갔다. 항해하면서도 계속 내부를 땜질하고 수리해야 했다.

이 조치 덕분에 나중에 일본군도 놀랐다. "어, 코쟁이들한테 항모가 하나 더 있었나? 요크타운은 우리가 분명 박살을 냈는데..???"
이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뒤, 이번엔 완전히 격침되어 침몰하는 걸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우리나라 손 원일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군함을 사 올 때 미친 협상력으로 가격을 말도 안 되게 후려쳤었는데... 니미츠는 이렇게 전시에 군함의 수리 일정을 후려쳤다는 차이가 있다.

(2) "우리는 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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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이렇게 선언을 덜컥 해 버리니 그 당시 NASA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든 게 소련에게 뒤쳐져 있었고 아무 기술이고 노하우가 없었는데.. 도대체 어쩌라고?

근데 천조국의 돈지랄과 미친 공밀레가 기적을 만들어 냈다.
1968년 말의 아폴로 8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들을 여러 단계 한꺼번에 밀어붙여서 사람이 기어이 달을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뭐 하나 삐끗 잘못했으면 사람이 지구로 못 돌아오고 우주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10호는 달에 내려가는 시늉만 잠깐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승무원이 자기는 달에 뼈를 묻고 말겠다고 객기 일탈을 부렸으면.. 큰일날 수도 있었다. =_=;; 아직 지구로 귀환하는 시스템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는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정말 가까스로 인간을 달에 무사히 착륙시키고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
자기가 직접 글을 썼는지, 아니면 참모진이 대필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역설의 진리로 독자들을 불끈 울컥 하도록 글을 잘 쓴 것 같다. 저 연설도 그렇고, "나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하기 전에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취임사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_=;;

2. 우리나라의 사례

(1) 우리나라에서 6 25가 터져서 한국 은행이 삽시간에 북괴한테 넘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울나라는 돈을 황급히 다시 만들어서 찍고 뿌려야 했는데.. 그걸 맥아더에게 부탁했고 맥아더는 "일본을 상대로 까라면 까"를 시전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이었고 패전국 일본은 이 기회에 무조건 미국한테 잘 보여야 했으니... 조폐국(?? 그 당시 대장성) 인쇄부 근로자들을 무기한 야근 철야 명령과 함께 갈아넣었다. 나중엔 GHQ 병사들이 총 들고 인쇄 공장을 찾아와서 직원들을 호위 겸 감시· 재촉했대나..
새 돈 도안 마스터판은 단 이틀 만에 완성됐으며, 돈 한 트럭 분량을 열흘 만에 찍어서 비행기로 실어 날랐댄다. 이거 통상적으로 최대 6개월 가까이 걸릴 일이었다고 한다. =_=;;

(2) 미국이 인간을 달에 보내려고 용 쓰던 동안 우리나라는 경부 고속도로 닦겠다고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으며 용쓰고 있었다. 당재 터널 하나 못 뚫어서 사람 10여 명이 죽고 난리였었다. =_=;;;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인부들이 며칠 씻거나 옷을 못 갈아입으면서 일했고, 도로 포장을 하던 롤러 운전사는 작업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용변을 그냥 자리에서 지릴 정도였다. =_=;.

3. 태평양 전쟁 시절의 미국 대통령

사실, 태평양 전쟁 시절엔 니미츠 제독 이전에 미국 대통령부터가 노발대발해서 내리갈굼을 제일 먼저 시전했었다.
영화 진주만에서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대사. "Do not tell me it cannot be done"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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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인 나도 이렇게 벌떡 일어섰는데 당신들 내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는 일체 말고 까라면 까시오.
우리 조국의 아들들이 불의의 기습을 당해서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됐는데 뭐? 폭격기 항속거리가 부족하다고? 무리하다간 항공모함마저 털릴 위험이 있다고?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왜놈들한테 무조건 당장 보복하도록 하시오! =_=;;"

천조국은 이때부터 한 근성 했던 것 같다.
쟤들은 일본에게 천 배 만 배 보복한답시고 처음부터 일본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 버린다거나, 일본 민간인까지 몽땅 잔인하게 학살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쟤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기습 당하고 허를 찔리고 뒤통수 얻어맞게 해야 된다고..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단순히 평범하게 전투에서 힘으로 밀어서 패배시키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항공모함에서 자그마한 함재기(프로펠러가 중앙에)가 아니라.. 육중한 육군 폭격기를 발진시킨(프로펠러가 양 날개에) 둘리틀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병맛스러운 일본 카미카제 특공대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멋있지 않은가?

4. 통계와 숫자

영화 미드웨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 레이튼: 일본군의 현재 동태는 이러한데, 첩보에 따르면 아마 요 때쯤에 요기 일대에서 요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어쩌구저쩌구 브리핑)
- 니미츠: 그래서 결론이 뭐지? 그 추측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한데? 어렵겠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라. 그래야 작전을 짤 수 있겠다.
- 레이튼: (하... 나더러 어쩌라고~ 자포자기하듯) 일본군은 오는 6월 4일 현지 시각 아침 7시 정각에 북서쪽 325도 방향으로부터 러쉬를 와서 미드웨이로부터 17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될 예정입니다.
- 니미츠: 좋아~ 난 내 부하의 말을 믿는다. 참모진은 저 정보를 바탕으로 곧바로 작전을 짜도록 해라.

(나중에 실전 당일에)

- 아무개: 적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북서쪽 320도 방향, 1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됐습니다~!
- 니미츠: (시계를 보더니) 오~ 레이튼. 오차가 딱 5분, 5마일, 5도밖에 나지 않았군?
- 레이튼: 충성! 다음번엔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상황에서나 저렇게 레이튼 소령 같은 뽀록을 만들 수야 없겠지만.. =_=;;윗사람,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거, 숫자, 통계, 데이터를 좋아한다. 저게 뭔가 군대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 잘하는 요령이고,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할 때 좋은 인상을 주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요령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이었다. (미드웨이는 거의 2019년 말 개봉이었고 저거는 2020년 초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 미쿡이 지난 반세기 이래 제일 낮은 실업률.
  • 700만 개의 일자리 창출, 지난 3년 동안 경제활동인구 350만 명 증가. 공장이 12000개 증설.
  • 어디 여성 취업률 72%..;;
  • 주식 시장 70% 성장, 국부 창줄 12조 달러.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우리민족끼리 평화, 착한 경제, 사람이 먼저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따박따박 무언가가 얼마만큼 생기고 경제가 살아난 걸 입증해 보이는 게.. 일단 말만 들어도 시원시원하다.

물론 숫자와 통계에도 속임수와 말장난과 조작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저것만 너무 집착하면 또 전시행정 같은 다른 부작용 폐단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와 통계는 두리뭉실하지 않고 일단 객관적이다. 하다못해 그걸 까고 반박하는 거라도 정확하게 공략해서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고, 최소한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담겨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란 말도 있잖느냐 말이다. (by 마크 트웨인 ㄲㄲㄲ)

우리나라도 근로자건 정치인이건 저런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우대했으면 좋겠다.
자매품으로 '협상 잘하는 요령'은..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와 있다고 여겨진다. 민병대 대장인 마틴이 적진에 홀로 찾아가서 구라까지 쳐서 포로들을 무사히 데리고 온 거 말이다.

5. 미국의 인내심의 한계

미국은 복수귀로 돌변하여 일본을 차근차근 쳐발랐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길어지고, 일본은 제 살 깎아먹으면서도 도무지 항복을 안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미국에 출혈을 강요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트라우마까지 추가되니 미국도 점점 지치고 악이 받쳤다.

병사들은 일본군 skull trophy를 챙기는 지경이 됐고, 수뇌부들은 핵폭탄 등 온갖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게 됐다.
핵 투하는 정말 인내심이 한계 중의 한계에 도달한 뒤에야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미국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쪽발이들은 이래도 항복을 안 할 것이다", "소련이라도 끌어들여서 힘을 합쳐 일본을 조져야 된다" 이런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리 승만 할배는 미국에게 그러지 말라고.. "니 혼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은 항복할 거다. 소련을 끌어들이지 마라. 전후에 한반도엔 미국만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 이렇게 독려했었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봤던 선견지명이었는데..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에 신탁통치조차도 반대하고 남북분단을 선택했으며.. 그게 이제 반영구적으로 굳어져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28 08:35 2024/04/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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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남 도발 내력

이 글에서는 일단 100% 확실한 팩트부터 늘어놓은 뒤, 논란이 있는 분야로 화제를 차차 옮기도록 하겠다.
쟤들은..

  • 대놓고 전면전을 벌인 건 1950년 6· 25 사변이 3년쯤 뒤 휴전으로 끝난 이래로 두 번 다시 엄두를 못 냈다.
  • 여객기 납치 내지 테러는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가 마지막이다. (그 전엔 창랑호, YS-11기 납북)
  • 남침 땅굴이 발견된 건 공식적으로는 1990년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70년대 중후반에 1~3땅굴)
  • 전투기를 몰고 온 귀순은 1996년 이 철수가 마지막이다. (그 전에는 1983년, 이 웅평)
  • 고전적인 방식의 무장공비 침투는 1996년 강릉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68년 서울 청와대 부근 습격과, 울진-삼척이 아주 유명)
  • 수상함을 이용한 해상 무력 도발은 2009년 대청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2002년 제2 연평해전이 유명) 이 방식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쟤들은 이듬해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일으켰다.
  • 핵실험은 2017년 제6차가 마지막이다. (2009년에 첫 시도)
  • 그리고 미사일 도발은 지금까지도 간간이 하고 있다.

북괴는 도발하는 방식만을 바꿨을 뿐, 본질적인 전략은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쟤들이 도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된 건 국군이 기존 알려진 도발 방식을 꾸준히 차단· 저지하고 가성비를 떨어뜨리고 봉쇄해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2. 관련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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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 (잠입)" (2020)이라는 독립 영화가 있던데..
나름 "태양 아래"(2016)를 능가하는 엄청난 근성의 산물인 것 같다.
주인공이 북한에 단순 외국인 관광객 신분이 아니라 아예 무기 밀매상으로 위장하고 들어가서 북한의 치부를 아주 오랫동안 몰래 촬영해 온 것이다.
20여 년 전에 '기 들릴'이라는 외국인 만화가가 공개했던 평양 체류기 만화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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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엔 영화의 배경부터가 이해가 잘 안 됐다.
"엥 KFA? 유럽에 사는 교포 빨갱이가 아니라 유럽 백인들 중에 위수김동 거리는 미친놈이 있다고? 구소련이 있던 쌍팔년도 시절 얘기 아냐?" 출국(2018) 같은 배경이 떠올랐는데.. 전혀 아니구나.
2010년대, 심지어 "태양 아래"와 동시대 얘기이다.

북괴가 대북제재를 어떻게 회피하고 먹고 살려고 몸부림쳐 왔는지, 쟤들이 얼마나 세계 평화에 도움이 안 되는 민폐 짓거리만 일삼고 있는지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접했던 그 어떤 북한 고발 매체· 컨텐츠와도 겹치지 않는 참신한 내용이더라.

국정원 1급 요원도 못 할 일을 제3국 평범한 소시민이 해내서 북한 체제를 엿먹였다. 이런 영화가 국내에 더 많이 알려지기를..
북괴에서는 이 영화 내용에 대해 당연히 다 조작이라고 반발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실제 북한 미사일 TEL 같은 디테일을 일개 밀덕이나 영화 감독이 뽀샵으로 주작 가능하지는 않다.

이게 '락스퍼 국제영화제'의 앙코르 상영 명목으로 작년 가을에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CGV피카디리에서 재상영됐다.
나름 상영관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주연배우 간담회 때 질문도 많았다.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교회 댕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많이 퍼진 듯했다.

본인은 여기서 일하시고 영화 포스터를 제작도 하신 분의 초청으로 뒤풀이 저녁 식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한테 방명록을 돌리고 있던 게 나한테도 왔다.
앞을 보니 누군가가 이름인지 소속인지를 '오이박사'라고 써 놨더라.
오오~~ 오이라고? 난 '호박박사'라고 쓸려고 하다가... 관뒀다. ^^

오이박사는 알고 보니 '오직 이 승만 박 정희 사랑'의 이니셜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이와 호박 모두 박과 채소인데... 저분은 농사 짓는 분이 아니었군. ^^
사실 난 그냥 호박소년이지, 호박박사까지는 과분하기도 하다.

이제 다음부터는 글이 다루는 소재와 분위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앞의 1, 2번 확실한 팩트를 염두에 두고서 판단을 해 보시기 바란다.

3. 극단적인 성향

우리나라의 지 만원 박사, 그리고 미국의 게일 리플링거라는 저술가는 다 1940년대생이다. 지금은 무려 80 부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지 박사는 자기가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 정리인지 알고리즘인지를 6개나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는 미 해군대학원과 육사에서 잠시 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었다.

리플링거는 건축 디자인, 인테리어 분야를 전공했고, 대학교 전공 서적 급의 교과서를 6권이나 집필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켄트 주립대에서 수 년간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었고, 테뉴어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다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랬는데 지 박사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우리나라 현대사와 이념 쪽에 꽂혔고, 나중에는 광주 사태 연구를 계기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렸다. 땅굴이나 부정선거 말고 저쪽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폭동, 군대 의문사 등등의 배후에는 어지간해서는 다 북괴가 있고, 내 말에 동의 안 하면 다들 빨갱이. ㅠㅠㅠ

이 바닥을 제일 음모론스럽게 강경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적이 많이 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우파 보수 사람과도 많이 척졌다. 급기야는 말년에 기어이 구치소에 가게 됐다.

다음으로 리플링거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성경 역본 이슈에 꽂히더니, New Age Bible Versions라는 책을 써서 이 바닥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냥 "KJV가 가장 우수한 성경 역본이다" 정도가 아니라 "원래 히브리/그리스어 본문을 언어적으로 압도하고 능가하는 성경이다~" 그리고 나머지 현대 역본들은 변개된 정도가 아니라, 용어와 번역 방식 자체부터가 아주 불순한 뉴에이지(??) 음모론 영향을 받았다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학계부터가 다 부패하고 썩었다고 제일 과격하고 수위 쎈 주장을 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에 반대자와 적이 많이 생겼으며, 심지어 일부 온건(?) 킹 옹호자조차도 "저건 선 넘었지" 이럴 정도이다. 그렇잖아도 스스로 공개하는 프로필이나 개인사에 불분명한 것, 주작 과장 의심 사항도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세상에 지 만원 박사와 게일 리플링거를 비교하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뜬금없군.. -_-;; 활동한 분야 자체 what은 완전 극과 극이고 접점이 1도 없는 사람이다만, how에서는 일말의 동질감이 있는 것 같다. 똑똑한 것 같긴 한데 중년에 생뚱맞은 분야에서 큰 어그로와 논란을 일으키고 강경 파이터가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정치 쪽이든 종교 쪽이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장 자체의 사실 여부, 논리적 타당성만 보면서 판단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비판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정확히 알기는 하고서 비판하자. 그리고 인신공격을 하지는 말자."
이 주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나도 5 18 항쟁을 무슨 6 25 참전이나 심지어 4 19보다도 더 위대한 듯이 미화하고 무슨 벼슬처럼 나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한다. 폭동이라고 비하까지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광주 사태라고 계속 부르고 싶다.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광주 사태는 민군경 간의 쌍방과실이다. (민간인 사격이나 반대로 군경 희생자 발생 같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화해니 과거 청산이니 하려면 양측을 다 추모해야 한다.

  •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부 지방 해안까지 북괴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침투하긴 했었다. 저 때 광주에도 소수의 정체불명의 양측 이간질 선동꾼 공작원이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슨 600명씩은 아니며, 시민군이 빨갱이였던 건 더욱 아니다. 600명 침투는 6 25 대한해협 해전 때 있었을 뿐이다. (얼굴 매칭 광수놀이는 제발 좀 ㅠㅠㅠ)

  • 허나,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 아저씨를 무슨 징역 2년씩이나 매기는 것도 매우 잘못됐다. 광주 왜곡을 처벌하려면 이 승만 대통령 왜곡도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
  •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를 허용하려면 "금남로에서 전 땅크 만세"도 똑같이 허용해라.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려거든 전 두환 회고록도 출간 허용해라.

4. 다른 우파 인사

(1) 조 갑제: 한때 엄청난 극우 수꼴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과격 극단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 종북은 친일보다 더 나쁘다,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넘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사라져야 된다" 정도... 이 당연한 말이 뭐 어때서?? 더구나 젊은 시절, 이 사람이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 기자로서 남긴 행적은 그 누가 보기에도 훌륭하고 대단했으니 말이다.

이 사람은 "내가 그때 현장에 직접 취재를 가 봐서 아는데.. 광주에 북한군 따윈 없었다" 이것 때문에 지 박사와 견원지간이 됐다. 다만, 겨우 저런 주장은 "니가 취재한 것만이 전부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라는 카운터에 취약해 보인다.

(2) 서 정갑: 옛날에 노 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분향소에서 깽판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군복 차림에 전형적인 아스팔트 까스통 수꼴 우파스러운=_=;;; 인상이 짙은 분이다만.. 이 사람도 광주 북한군 개입은 단호히 부인한다. 그 시절에 광주 취재는 아니지만.. 계엄사에서 실제로 근무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개미 새끼 하나 틈타지 못할 정도로 우리 기관에서 샅샅이 다 뒤졌슴다. 그런데 북괴군 600여 명 중에 한 놈도 안 걸렸다..?? 그건 말이 안 돼요."

그는 5 18뿐만 아니라 무슨 이상한 땅굴 음모론도 단호히 일축하고, 530 GP가 단순 아군 팀킬 총기 난사가 아니라 북괴와의 교전 중 전사라는 음모론 역시 부인한다. 이것들이 아예 대한민국 우파 진영을 좀먹는 3대 거짓말이라고까지 선을 긋는다.
근데 이건 최대한 의심하면서 삐딱하게 보면.. 단순히 군의 명예 위신을 위해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에 타이타닉 호 생존 승무원이.. 배는 절대로 두 동강 나지 않았다고 입을 맞춰 증언했던 것처럼 말이다.

(3) 이 진삼: 이 사람은 예편 후의 이빨 까는 행적은 좀 똥군기 똥별스러워서 인상이 별로 안 좋지만.. 그래도 1960년대 말에 전방에서 북괴 무장공비와 여러 차례 교전하면서 적을 때려잡고 도발 시도를 저지한 적이 있다. 20여 년 뒤 지휘관 시절엔 제4 땅굴을 찾아내기도 했고.. 그러니 왕년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게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그건 인정해 주자.

이 사람은 "내가 땅굴에 대해서는 좀 아는데... 무슨 내륙 지방까지 땅굴은 개뿔.. 북괴 입장에서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게 가능하다 쳐도, 그렇게 긴 땅굴을 하나 파느니 그냥 전방에 짧은 땅굴 수십 개를 파고 만다" 이런 식으로 제법 디테일한 논리를 동원해서 땅굴 음모론을 부정한다.

지 만원, 서 정갑 모두 최종 계급이 대령인 반면, 이 진삼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포스타 대장=_=;; 출신이다. 군에서의 레벨이 까마득히 다르다. (뭐,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대령만으로도 대기업 부장 급의 아득한 고위직이지만.)
하긴, 지 박사는 5 18과 530 GP에 대해서는 좀 무리수스러운 북괴군 개입을 주장하긴 해도, 땅굴 음모론은 주장하지 않는 걸로 난 알고 있다. 글쎄, 전자는 천동설이지만 후자는 아예 지구 평평이 아닌가 우려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14 08:35 2024/04/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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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20세기에 외세로부터 침략 받아서 주권을 빼앗긴 적 없고, 공산화된 적 없고, 쿠데타나 비민주 군사 독재를 겪은 적 없고, 헌정 체제가 널뛰기 하듯 바뀐 적도 없고.. 대공황 때문에 고생했던 것만 빼면 정치적으로는 큰 트러블 없이 살기가 참 좋았을 것 같다. 전쟁 참전은 다 남의 나라를 지켜 주러 했지, 자기 나라를 구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천하의 미국도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니니 사법 흑역사가 몇 건 있었다. 그것도 공교롭게도 굉장히 비슷한 시기에 말이다.

1. Joe Arridy (1915-1939) -- 가스실

이 사람은 15세 소녀를 강간하고 손도끼로 찍어 살해한 혐의를 받고 처형됐다. 그러나 문제는.. 그는 20대 청년이지만 지능이 5세 어린이 수준밖에 안 되는 정신지체아였다는 것이다. 저런 끔찍한 흉악 범죄를 저지를 능력 따위는 1도 없는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사건 현장 곁에 얼쩡대다가 붙잡혀 가서는.. 실적 올리고 싶은 형사와 검사에게서 집요하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시키는 대로만 하다 보니, 뜻도 모르는 조서에다 지문 찍고 “그 아이 내가 죽였어요”라고 거짓 자백을 하게 됐다.

이 사람은 교도관한테는 “우와~ 근육빵빵 아저씨다~!” 이러면서 교도소에서도 기차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작은 하마 이야기’에도 나오는 그 유서깊은 장난감 말이다!!
이런 사람이 “범행을 언제 어떻게 저질렀습니까” 같은 질문에 일관성 있게 제대로 대답도 할 리가 만무했다.

지금이야 미국에서 사형이 교수형, 전기의자, 아니면 약물 주사인데.. 저 때는 미국도 무슨 나치 독일처럼 가스실을 운용했는가 보다. 그는 gas chamber이라는 게 무슨 장소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심지어 해맑은 표정으로 사형장으로 들어갈 때도 기차 장난감을 갖고 들어갔다. 교도관들이 그건 허용해 줬는가 보다.

천하의 미국에서 그때 경찰과 검사, 판사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살인이고 사형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이어서 무슨 행복한 왕자도 아니고 행복한 사형수 the happiest prisoner on death row라는 역설적인 별명까지 붙었다. 모파상의 소설 ‘행복한 사형수’하고는 관계 없다.

이 사건은 정작 진범이 딴 지역에서 잡혀서 그놈도 처형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통 통신이 열악해서 소식 업데이트가 더뎠는지, 한번 내린 사법 결정을 호락호락 번복할 수 없다는 똥고집이 작용했는지, 아니면 세뇌당한 저 사람도 자기가 진범인 듯 거짓 자백을 너무 진지하게(ㅠㅠ) 해 버렸는지.. 그래도 저 사람도 같이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2011년에야 주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사면을 받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4년 12월에 부산에서 어느 발달장애 1급 청년이 아주 잠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2살짜리 아기를 창 밖으로 휙 던져서 바닥으로 떨어뜨려 죽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가해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죽음이 뭔지 모르고 경찰이나 검사의 질문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사리분별과 판별이라고는 단 1도 못 하는 말 그대로 저능아였다.

자기가 저지른 짓에 대한 자각이 없고 형사 책임을 질 능력도 전무했으니.. 피해자 집안의 입장에서는 정말 분통 터지겠지만 가해자는 아무 처벌 없이 무죄 방면되고 그 대신 치료 감호 판정만 내려졌다.
이랬는데 미국에서 저 때 저런 분위기 속에서 같은 사건이 터졌으면 가해자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2. George Stinney Jr. (1929-1944) -- 전기의자

이건 앞의 1번보다도 더 뼈아픈 흑역사인 것 같다. 집 주변에서 7세· 11세 소녀 2명이 끔찍하게 살해 당했는데, 마침 곁에 있던 '만만한 흑인 소년'이 졸지에 용의자로 몰려 체포되고 범인으로 몰렸다. 이 소년은 오히려 경찰에게 그 당시의 주변 상황에 대해 증언을 하고 수색 작업을 도와 주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피해자 가족, 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한 경찰과 검사, 배심원들은 모조리 백인이었다. 이들이 모두 짜고 입을 모아서 “보나마나 추잡한 검둥이놈이 사고 쳤구만”으로 몰고 갔다. 재판은 거의 나치 인민재판 급으로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피고인 측은 제대로 변호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내가 죽였어요”라는 자백을 얻기 위해.. 비록 대놓고 물· 전기 고문이나 몽둥이 찜질까지는 아니지만, 오랫동안 굶겨 놓고는 “배고프지? 자백하면 밥 줄게~!” 정도는 시전했다고 한다. 중학생짜리 애한테.

결국 이 소년은 유죄 판결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겨우 15세의 나이로 전기의자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체격이 너무 작아서 엉덩이 부분에다가 두꺼운 성경책을 몇 권 올려놓고 애를 앉혔다니 말이 되는 소리냐.. 게다가 이 친구도 학교에서 싸움박질이 잦긴 했지만 명목상 교회 댕기는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그는 근현대 이래로 미국 역사상 최연소 사형수라는 타이틀까지 차지하게 됐다. 이 기록은 앞으로 깨질 일이 없을 것이다. 머리가 좋아서 저 나이에 대학교를 입학한 것도 아니고, 저 나이에 사형을 당했다니.. 그것도 누명을 쓰고..

이 사건은 어째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져서 2014년에야 무죄 판결이 났다. 1번은 '사면'이라고 하고 2번은 '재심 결과 무죄'.. 법적 처분이 왜 서로 달라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사건은 정황상 의심되는 진범(백인..!)이 있긴 하지만, 이놈은 빽이 있어서 법의 심판을 피해 갔다. 심지어 그놈의 부모가 배심원으로 들어가서 애꿎은 흑인을 범인으로 조작해서 사형장으로 보내는 추악한 짓을 저질렀다고 한다.

미국은 프랑스나 독일처럼 유대인을 괴롭히는 건 없었지만 저기 특유의 인종 차별이 있었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근절된 건 아니라 여겨진다. 특히 남부 텍사스 같은 레드넥 동네 말이다.. -_-;;
요즘도 경찰들이 과격한 범죄 현장에서 흑인을 더 줘 패거나 심지어 권총 쏴서 사살해서 과잉 진압이라고 욕 먹기는 하는데.. 이 사건은 법적으로 사람을 누명 씌우고 사형장으로 보내 버린 거니 사건의 막장성이 차원이 다르다고 하겠다.

심지어 이렇게 흑인에게 누명 씌우기가 그 뒤에도 몇 건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행히 사형까지 가지는 않고 교도소에서 몇 년 썩다가 누명이 풀렸을 뿐..

  • 이 소년은 우리나라 여수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일제는 패망한다” 이런 낙서를 한 게 들통나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주 재년 열사와 동갑이다. 역시 1929-1944.

  • 이렇게 인종 차별이 쩔었으니 미국에서는 n**** 이 단어가 f*** 급의 금기어 트라우마로 남았고, 치킨과 수박이라는 맛있는 음식조차 금기시되어버린 것 같다.
  • 그래도 그 미국에서도 흑인 남자(1870)가 백인 여자(1920)보다는 훨씬 더 먼저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전근대 시절엔 세상 어디에나 가부장적 이념이 강했으니 일면 이해는 된다.

  • 근데 평등은 평등이지만, 반대로 멀쩡한 기존 '인어공주'나 '미녀와 야수'에다가 쓸데없이 유색인종 주인공 집어넣는 PC 리메이크짓은 좀 안 했으면 좋겠다. 같은 유색인종이 보기에도 안 좋다. -_-;;

3. Edward Donald Slovik (1920-1945) -- 총살

이 사람은 군인이었고, 위의 두 사례 같은 막장 사법 살인을 당한 정도는 아니다. 결과만 따지자면 군생활에 적응을 못 하고 전시 탈영을 저질렀고, 이에 대한 벌을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안 좋은 타이밍에 굉장히 운 나쁘게 일벌백계 시범 케이스로 걸려서 사형 당했기 때문에 좀 억울하다면 억울한 사례가 됐다.

그는 성장 배경이 불우했는지 좀 질이 안 좋게 컸고, 10대 소년 시절부터 각종 기계에 자동차까지.. 온갖 절도죄로 잡범 전과가 주렁주렁했다.
저 사람은 소년원인지 교도소인지를 실컷 드나들다가 1942년에야 겨우 석방됐다. 출소 후엔 직장 잡고 연애에 성공해서 결혼도 하고, 이제 좀 마음 고쳐먹고 바르게 살려고 했다. 근데 결혼 생활 1년을 못 채운 타이밍 때 군 징집 영장이 날아왔다.

평시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라면 저 사람 정도로 전과가 화려한 사람은 군대에서도 필요 없다고 안 받아 줬다. (무공 전과가 아니라 범죄 전과..ㄲㄲㄲㄲ)
그러나 저 때는 2차 세계 대전 시국이었다. 병력이 많이 필요하니, 캐 싸이코패스 흉악범만 아니면 어지간히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도 데려갈 정도로 징집 기준이 아주 낮아졌다.

그는 성장 배경의 특성상 단체 생활 잘 하고 군대에 적합한 체질이 아니었다. 각종 훈련이나 작전에서 수시로 낙오를 빙자해 전선을 이탈해 버리면서 전우들을 엿먹이고 고문관 신세를 면치 못했다. 심지어는 6주 동안이나 짱박혀 잠적하기도 했다고.. 그는 “나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 앞으로 또 탈영하겠다”라고 상관에게 항명을 예고하는 편지를 보내서 결국 찍혔다.

그의 상관들은 이런 편지는 그냥 없는 걸로 하고, 얘를 전투 스트레스가 덜한 부대로 전출이라도 시켜 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이판사판인데 군사 재판을 받아서 교도소에서 몇 년 썩는 걸로 군생활을 통째로 퉁치고 싶어했다.
사실, 미국 역사상 사형 선고를 받은 탈영병은 탈영 후에 살인· 강간 같은 흉악 범죄까지 저지른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단순 탈영이나 병역 거부 자체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적은 옛날 남북 전쟁 이래로 전무했다. 그러니 이 사람도 그걸 노렸는데..

그때는 2차 세계 대전 시국이었다는 것이 역시 문제였다. 천조국도 지긋지긋한 전쟁에 어지간히 이골이 나 있었고, 군복무 부적격자의 인권을 챙기는 것보다는.. 다른 멀쩡한 군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군기 빠진 꾀병 의심 탈영을 일벌백계 하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땐 한 집안 출신의 5형제가 몽땅 한 군함에서 성실히 근무하다가 다섯 명이 한 날 한 시에 몽땅 전사해 버린... '설리번 5형제'(1942) 같은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이 때문에 이 '에디 슬로빅'의 죄질은 정말 불행히도 예상보다 훨씬 더 나쁘게 평가되었으며, 그는 미국의 역사상 탈영죄 단 하나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유일한 사례가 되어 버렸다. 그의 선택은 자기 무덤을 파는 결과를 야기한 것이다.
그의 아내와 친척들이 대통령에게 수차례 감형 탄원서를 냈지만 전시이다 보니 별 공감대를 얻지 못하고 요청이 받아들여지지도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 탈영병이 21000여 명이나 발생했는데 순수 탈영만으로 사형 선고는 49건, 그게 실제로 집행된 건 이 사람 혼자뿐이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02 08:35 2024/04/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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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뒷북이긴 하다만.. 본인은 요 근래에 <건국전쟁>을 보면서 국뽕을 한 사발 잘~~ 흡입하고 왔다.
제목이 뭔가 낯익어 보이던데? 10여 년 전 옛날에 정반대 성향의 진영에서 만들었던 좌빨 다큐 영화는 <백년전쟁>이었구나. 그걸 의식해서 저 영화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게 아닐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울나라는 딴 게 국뽕이 아니라 리 승만 보유국이었다는 거, 초대 국부가 할배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과분한 국뽕이었다.
SNS에서는 애국우파 네티즌들이 자기도 이 영화를 봤다면서 티켓 인증샷을 막 올리더라만.. 난 그런 릴레이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내용 요약 내지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관련 생각을 올리련다. ㄲㄲㄲㄲㄲ

1. 패턴

  • 조선은 말기에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이게 훗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화근이 됐다.

미국은 저 끈질긴 쪽발이 일본놈한테 학을 떼 버려서 진짜 될 대로 돼라~ 핵도 터뜨리고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제3자가 보기에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리 할배는 아무리 그래도 소련은 끌어들이지 말고 한반도에 미국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당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 때문에 미국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됐다.
하긴, 미국은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경고했던 할배의 선견지명도 업신여겼다가 된통 당했었다. ㄲㄲㄲㄲ

  • 박 정희는 기업을 육성하려고 민간 사채를 싸그리 정리하려다 보니(1972년 8 3 사채 동결 조치) 시간이 부족해서 유신 독재를 감행했다.
  • 그것처럼 리 승만은 재일 교포 북송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일본으로 공작원도 보내고(1959년).. 이걸 결판 내려는 욕심이 이듬해에 무리해서까지 4선 출마를 강행하는 데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오~~ 둘이 요렇게 연결된다니 신기하다.

2. 할배의 업적

  • 혁명적이었던 농촌 토지 개혁 -- 단군의 후손들을 단순히 나라 있는 백성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자기 땅도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 그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에도 교육에 투자하고 쓸데없이 민주주의 정신을 너무 많이 함양시킴
  •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50여 년 전에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걸 겪었으니.. 울나라는 이젠 두 번 다시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외교 역사상 최고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맺어 버렸다.

3. 누명

(1) 한강 다리 폭파 관련 거짓 날조 누명은 이제는 최초로 거짓말이 유포된 배후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다 까발려야 하지 않나 싶다.
건국전쟁 영화를 싫어하고 내용을 반박한 사람들 글을 검색해 보니 맹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 봉암, 최 능진.. 이런 사람들 사형 당한 것만 거론할 뿐, 이 런승만 날조의 반박에 대해 또 재반박을 하지는 않더라.

(2) 말단의 군경 간부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초대 내각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출신이 개뿔 절대 아니었다. 이 시영 가문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애산 이 인??
이 사람은 독립운동가 변호하고 한글학회에 재산 엄청 기부했던 애국자 법조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식의 친일파 단죄는 비현실적이고 무리라고 생각해서 반민특위의 해체에도 앞장섰었다!

(3) 리 승만 할배는 4 19 시국을 뒤늦게 파악하고는 "내가 맞아야 했을 총을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맞았구나" 그러면서 4 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갔다.
선뜻 하야하겠다고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며 시민들도 도로 같이 울었고 "리 박사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랬다. 세상에 참 이상한 바보같은 독재자다.
오히려 그 시절 언론 기레기들이 할배와 시민 사이를 마구 이간질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짤막한 여행을 무슨 죄 짓고 도피 망명이라도 가는 양 부풀려서 조작 보도를 했다.

4. 어처구니없는 현실

(1) 김 구는 단순히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 간 오해를 풀러 북한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쏘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조만간 남조선에 쳐들어갈 거고, 그러면 쟤들은 꼼짝없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는 이런 소리까지 뻔히 들어서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남한에 돌아와서는 "북한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미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 구는 우리가 아는 그 애국자 김 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을 10만원 지폐 도안에 넣겠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할배가 아니라 서 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딴 나라들은 간디 등 정상적인 자기 국부들 동상)

(3) 하와이에서 리 승만의 날 기념일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본토 조선인들이 하도 분노하고 반발· 반대하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됐다고.. 허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았다.

건국전쟁은 정말 국뽕 충만하면서 울컥하면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큐 영화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오고 상영관 불이 켜지자..  누가 시작했는지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이었는지 착석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곧장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이 거의 5초~10초는 박수를 치고는 나갔다.
할배가 1953년인가 54년인가 미국 상원 연설을 해서 열혈 기립박수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수 정도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옳소!” “아멘!” 이럴 뻔했다.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로 격한 공감을 대신 표현했다.

왜, "세상을 바꿔 놓은 책" 킹 제임스 성경 400주년 다큐와도 오버랩됐다.
그 위대한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은 정작 유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보잘것없이 어디 쳐박혀 있던데..
우리나라 국부도 저렇게 존재감 없는 취급을 받고 있구나..

이 조선?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처럼 쪽수 많은 대국도 아니고, 일본처럼 일찌감치 근대화 잘해서 열강 반열에 든 나라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식민지가 되든 공산화가 되든 이상할 게 없었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국력의 나라로 남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듣보잡 한구석에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미국의 이념을 적극 따르는 지도자를 둔 ‘깨어 있는 나라’가 있으니 “미국 니들도 여기를 다시는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마라~~ 니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다”이걸 각인시켜 놓은 주역이 바로 그 할배다. 이 능력을 겨우 킬구 아재랑 비교하냐? 허 참~~~

이런 영화 보는 것엔 돈 아깝지 않다. 다들 보고 그냥 파일 소장해라. 누구든지 꼭 봐라 두 번 봐라.
그야말로 할배가 잘한 것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거.. 진짜 정신병이다.
외국 나가서 교양과 상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배를 비하하고 부정하면 그냥 남한이라는 나라 품격 자체가 그냥 통째로 폄하되고 깎일 것이다.

크리스천인 가수 나얼이 이 영화 포스터를 개인 SNS에 올렸는데 그걸 갖고도 미친놈들이 욕하고 악플 달고 난리를 쳤었다. 기도 안 차서 원..
하지만 그 대신, 나얼이 누군지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얼?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자군. 음반을 구매해야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겼다. =_=;;; 팩트만 늘어놓은 다큐가 도대체 왜 정치색 논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건국전쟁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할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국에서 매년 국경일에 틀어 줘야 한다.
실제로 옛날에(2015~2016년) KBS TV에서는 주 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일사각오' 다큐를 무려 전국구로 방영한 뒤에 이듬해에 증보판(?) 영화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안 이숙 여사 얘기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난 그때 솔직히 놀랐다. 어떻게 KBS에서 CBS 같은 성향의 다큐를 저렇게 방영할 수 있었지?

아무리 일제에 의해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지만, 주 목사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항일 독립운동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가 국교가 있는 나라가 아니거늘, 광고 없는 국· 공영방송 급이라면 솔직히 주 목사 얘기보다는 리 박사 할배 얘기를 더 우선적으로 방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사각오와 비슷한 시기에(2016) 울산 MBC에서는 '마지막 간수'라는 안 중근 다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배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애국 다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1 08:35 2024/0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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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 계층간 갈등이라는 게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건 아무래도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에 공산주의라는 게 생긴 뒤부터인 것 같다. 구호부터가 “만국의 로동자여 단결하라~~ 기존 체제를 다 뒤집어엎고 브루주아들을 다 타도하고 혁명 과업 완수하자” 이랬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왕부터 시작해서 귀족, 지주/영주 같은 계급만 떵떵거리며 살았다. 나머지 대다수 평민들은 농업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비슷하게 평등하게 못 살았다. 자기 신분과 출신이 원래 그렇고, 이웃들도 처지가 대동소이하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농사가 풍년이어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소출의 대부분을 삥뜯기는 게 참 뼈아팠다. 옛날에 노동력이 부족하고 백성들의 진짜 소득을 정확하게 측정할 행정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머릿수에만 비례해서 너무 단순무식하게 세금이 부과된다면 어떨까? 출산이 진정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인간이 법과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 혼자 떠나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진정한 딜레마였다.

사실, 중앙 정부에서 법으로 정한 세금 자체는 그렇게까지 살인적인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론과 이상은 그러하지만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날리고 잃는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더 걷는 것, 그리고 세리 같은 중간 관리들이 횡령· 착복하는 게 장난이 아니니 최하위 납세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청에 하청을 거치면서 실제 작업자에게 지급되는 보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금 착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버틸 지경이 되면 죽창 들고 민란이 발생하고 '의적'이라는 게 나타나기도 했다. 로빈 후드, 임 꺽정, 홍 길동, 윌리엄 텔.. 이런 거 말이다.
그래도 이건 국가 체제 전복을 의도하는 건 아니었으며 그럴 재량도 없었다. 단순히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랬는데.. 산업 혁명 물류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기계와 인간의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또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격차도 정말 아득히 벌어졌다. 이거 덕분에 2차와 3차 산업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농산물과 공산품이 싸게 많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평균적인’ 삶은 크게 올라가긴 했지만.. 이건 다른 방면에서 큰 부작용도 야기했다.

산업화 초기에 영국 같은 나라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복지가 참혹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아니고 나름 자국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서 농업 대부분에 가내수공업 약간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었는데.. 삶의 질이 크게 좋아질 리가 없었다.

뭐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초기엔 그랬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격차는.. 과거의 통상적인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빈부격차와는 성격이 좀 다른 부류였다.
그리고 이런 초창기의 경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방임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극치였다. 오늘날과 같은 인권 관념이라든가 취약 계층 복지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살벌했겠는지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쪼기 서양은 문화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돈 많은 상류층들 중에도 교회 댕기는 신자가 대다수 주류였다. 그러나 이때 유럽의 기독교회들은 뭐 해외로 선교를 하기도 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많이 했다. 그리고 자국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보다못해 영국에서 자선 냄비 이러면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런 인간성 상실 동심파괴 시대상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작가는 기억이 안 난다만 <플랜더스의 개> 말이다.
스크루지 꼰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뭔가 옹고집전의 외국판 같기도 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명작 소설도 이런 시국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 저 때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극혐한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결국은 참다못해 마음 독하게 먹고 악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부자는 한없이 자기 배만 불리면서 더 부자가 되고, 로동자들은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면서 부자들의 노예로 대대로 비참하게 살다 갈 거라고 말이다.

이런 현실은 로동자들끼리 단결해서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고 싸우고 투쟁해야 바꿀 수 있댄다. 그래서 노조에 파업, 사보타주, 붉은 머리띠, 꽹과리 등 살벌한 구호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을 타도해서 부를 다같이 강제 분배하자, 사람이 먼저이고 로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 능력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체제를 만들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저런 걸 부추기고 추진하는 정치 단체를 흔히 '공산당'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 모순과 고뇌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년에 가까운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와 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도 똑같이 고민했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떨치고 혼자 열심히 수련해서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돌파구를 뚫은 듯하다.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이런 아저씨들이 이 바닥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현실 역사에서야 공산 혁명이 성공한 구소련과 그 주변 중국과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여겨지지만, 더 과거인 1871년엔 프랑스에서도 단 70일 남짓이지만 공산 혁명 정부가 집권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가 뭔가 혁명, 저항 이런 쪽으로 영국· 독일보다 더 쎈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게 과격했다.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들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폐로 몰아 척결하고 뜯어고치고 지워 버리려 했다.
종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 심지어 1주일의 길이도 7일은 종교색이 느껴진다면서 바꿔 버렸다. 파리 코뮌은 10진법을 존중해서 한 주의 길이를 아예 10일로 바꿨고, 나중에 소련은 약수가 더 많은 8일로 바꾸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_=;; 이런 반골 기질이 있으니 나중에 중공은 그 보수적인 정서법을 다 뜯어고치고 간체자와 한어병음을 과감히 도입했다.

일본은 나라가 잘 살고 철저하게 자유 진영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서구화 근대화를 잘 해서 그런지, 대놓고 공산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사회 혁명분자야 당연히 있었고, 그건 심지어 한반도니 만주니 하는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1925)가 딱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산주의 진영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리즈 시절을 찍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악역이 패망해서 고꾸라졌고, 소련은 엄연히 전승국으로 예우받으며 국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같은 소련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도 많이 공산화됐다.

그리고 소련의 반대편에서는 어쩌다 보니 미국.. 20세기에 서유럽을 제치고 승전국에다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됐다. 2차 대전 추축국을 상대로는 총 쏘고 포 쏘면서 대놓고 싸웠는데, 공산 진영과는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 대신 고삐 풀린 듯이 군비 경쟁 우주 개발 전쟁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붙였다.

아프리카라든가,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같은 남반구 지역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을 제3세계라고 부르나??
하지만 쿠바가 무슨 계기가 있는지 골수 반미 국가였고(카스트로??), 그 아래 중남미도 몇몇 친미 노선 국가를 제외하면 '체 게바라'가 어떻고 해방신학에 종속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게 반미는 물론이고 공산혁명 냄새가 좀 난다. 그쪽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걔들도 분명 자기 국익대로 몰래 비열한 짓 삽질 X신짓을 한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메리카가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농산물에 풍부한 자원이라는 잠재성 대비 그다지 잘살지 못하는 건.. 모든 걸 미국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뭔가 통치 체제나 이념, 개인의 가치관 세계관에 문제가 있긴 했다.

체 게바라는 골수 반미 반자본주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슈퍼스타처럼 이미지가 조작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청난 고인드립이 아닐 수 없다. =_=;; 마치 니콜라 테슬라가 아주 뛰어난 과학자 공학자였지만 훗날 음모론 오컬트계의 교주뻘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 장사꾼들은 돈만 된다면 정말 뭐든지 만들어 팔긴 하는가 보다. 하긴, 반미 시위 때 불태우는 용도의 성조기 내지, 성조기가 그려진 속옷· 걸레조차 다 미국에서 만들어서 판다고 하지 않는가? =_=;

우리나라, 남한, 대한민국이야 처음부터 할배의 영도력 덕분에 골수 미국 편에 붙어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 반면, 우리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한 저 악의 무리들이 처음에 소련 편 공산주의를 밀었으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뼛속까지 반공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과격 좌익 시위를 단속하는 정도하고는 레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상이다. 세계사나 인문학 따위 알못인 본인이 그냥 주워 들은 기억만 주섬주섬 늘어놓아 보았다. =_=;;
글쎄, 계급 갈등 투쟁 덕분에 진짜 적폐를 청산하고,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가 크게 향상된 긍정적인 결과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이념이 '수정 자본주의'에 많이 반영되어 들어갔다. 이게 양심적인 업주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건 그쪽 편에 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는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착취되고 빼돌려진 근로자 인건비가 울부짖는다, 부자들에게 화 있을지어다”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기능은 약간 조금이 끝이었다. 이 혁명가 운동꾼들은 오로지 광기와 선동만 있을 뿐, 이성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저 음해하고 까내리고 부수고 죽이고 파괴할 줄만 알지, 어려운 걸 만들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건 몰랐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도 비판하고 '총괄'하고 '타도'하고.. 어제의 동지도 바로 스파이로 몰아서 고발하고 죽여 버리고..;; 총체적인 무질서와 팀킬에 빠졌다. 한 구악을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똑같은 짓을 하거나, 예전만도 못한 더 큰 신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런 사고방식의 열매가 바로 소련의 대숙청,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과 대약진운동,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것들이다.
쟤들은 옛날 문화재도 엄청 많이 때려부수고 박살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장 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가면서 싹싹 긁어간 문화재들이 문혁의 피바람을 피해서 살아남았을 정도이다. 인류가 20세기의 이런 참극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저런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추잡한 성추행이라든가 프락치 오인 린치 같은 사건이 당연히 있었다. 보고 배우고 하는 짓이 저런 것밖에 없는 애들이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타도 대상보다 우월할 리는 절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내로남불 위선이다. 남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노동의 가치를 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절~~대로 자기 부를 남에게 분배하면서 자기 이념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의 수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소신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가령,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공유했던 것은 결과만 보자면 공산주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 전복 선동을 한 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초대 교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 온 주 이유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만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군국주의 1당 독재, 통치자 우상화, 전체주의, 닥치고 숙청 같은 건 공산주의와 무관했던 구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도 동원했었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도 통치자 1인 우상화만 없을 뿐, 조금 저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저런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없어지고 최소한 주류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니 이제 저런 공산혁명 어쩌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0년대 이후엔 북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최소한 경제만은 개방했다. 세계는 다시는 저런 미친 혁명 실험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같은 시장 경제에다가 세금으로 복지 보정만 하는 체제로 다들 수렴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를 개방했고 민주주의를 흉내만 낼 뿐,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는 한국·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도.. 저런 숨막히는 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과거의 상명하복 똥군기 문화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게 많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단순히 크고 땅 넓고 자원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정교분리, 삼권분립, 자유 민주주의와 현대적인 인권 이념을 퍼뜨린 정말 위대한 나라인 것 같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평범한 영연방 국가로 그치지 않고, 덕분에 인구도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많아져 있다.

아무쪼록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경제나 정치 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에야 진짜로 근로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은 진짜 내로남불 귀족 노조를 더 비판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부와 세금에는 똑같이 낙수효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멀쩡한 역할 분담을 쓸데없는 계급 갈등으로 비화하는 이간질과 반기업 프레임 따위에 속지 말고.. 옛날에 실패가 진작에 입증된 실험을 또 하겠다고 덤비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 게임 '혁명적인 개X끼'가 얼마나 끔찍한 욕설인지가  얼추 이해가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09 08:35 2024/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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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1. 기원전 500년대 부근

유대인 바빌론 포로기 때 갑자기 불교와 유교가 생겼고, 중국 대륙에서는 제자백가 어쩌구 하면서 사상계가 리즈 시절을 찍었다.
이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트렌드였으며,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여담이지만, 지구 연대기에서 다뤄지는 선캄브리아 시대랑,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가 뭔가 좀 비슷하게 느껴진다. ㅋㅋㅋ

2. 고대의 여성 군주

어째 서기 600년대에..

  • 당나라 측천무후(690-705).. 물론 황제로 정식 등극하기 전, 황태후 시절에도 사실상 여왕 포스였음
  • 신라 선덕여왕(632-647), 진덕여왕(647-654)
  • 일본 천황 스이코, 고교쿠(642-645), 사이메이(655-661), 지토(690-697)

한중일 모두 군주 내지 통치자에 여풍이 강하게 불었던 것 같다!!! 신기하지 않냐? 더구나 한중일 중에서 일본의 여성 천황이 최초이고 원조였다고 한다. 일본은 에도 시대에 예외적으로 잠깐 배출된 예외 2명을 말고는, 여성 천황이 600~700년대에 집중적으로 배출됐었다!
우리나라는 전 역사를 통틀어 여왕은 신라 시대에 3명만 나왔고, 800년대 말의 진성여왕이 마지막이다.

측천무후는 자기 아들도 죽였고, 남편의 첩인가 다른 여자도 정치적 라이벌이라고 사지를 짤라서 항아리.. 아, 그냥 항아리도 아니지. 술독에다 담아서 죽였었다.;;; 라이벌들한테는 악마 그 자체였지만 백성들 통치는 그리 나쁘지 않게 했댄다.
그리고는 죽을 때 다 돼서는 인생무상을 느꼈는지 자기를 황제라고 부르지 말고 황태후라고만 부르고, 묘비에 글 남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특이한 여자다.;;

여왕이라 하니 성경에서 솔로몬을 알현했다는 스바의 여왕이 생각난다. 마치 제사장 멜기세덱만큼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인물인 것 같은데.. 이게 웬걸, 예수님이 저 사람을 실존 인물로 언급하면서 "심판의 날 때 스바의 여왕이 너희를 책망할 것이다"라고 인증을 하셨다. 이는 그녀가 가공의 허구 인물이 절대 아님을 시사한다.

3. 전간기와 2차 세계대전

1933년부터 1945년은 일제의 폭주 흑화와 중일 전쟁,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집권기, 나치 독일의 집권기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참 암울하던 시기였네.. 일본에 2· 26 쿠데타가 있었다면 독일에는 수정의 밤, 장검의 밤 같은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경제 대공황을 뉴딜 같은 자체적인 공공 근로 일자리 창출을 통해서 그럭저럭 건전하게 극복했다. 그러나 추축국 전범국들은 이 시국을 남의 나라 침략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면서 세계를 지옥의 불구덩이 나락으로 빠뜨렸다.

그 뒤 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걸로 시작됐다. 여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얽히고 소련이 얽히고 일본과 미국 태평양 전선까지 얽히면서 캐 난장판이 돼 버린 거다. 폭탄만 유폭하는 게 아니라 전쟁 양상 자체도 확전으로 치닫기 쉽다.

이런 전훈 때문에 훗날 우리나라 6· 25 때도 트루먼 대통령은 너무 호전적인 장성들을 찍어누르면서 전쟁이 세계 대전급으로 번지는 걸 막으려 했다.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도 세계 각국이 확전 우려 때문에 우크라이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일본 항복이 1945년 9월 2일이었으니.. 2차 세계 대전은 진짜 딱 6년 걸렸다. 8월 15일 이후에도 일부 전선에서는 짜끄레기 전투가 있었는데, 이때 전사한 군인은 정~~~말 운 없고 안타까운 사람이긴 하다. >_<
단, 2차 대전의 실질적인 시작에 대해서는 태평양 전쟁과 독소 전쟁까지 시작된 1941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고, 더 이전 1937년 중일 전쟁까지 포함시키는 견해도 있다.

4. 전쟁의 종결과 지도자의 사망

  • 임진왜란의 말기엔 침략자이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
  • 2차 세계 대전의 말기엔 연합국 지도자인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죽었다.
  • 6· 25 전쟁의 말기엔 침략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해 준 쏘련 스탈린이 죽었다.

5. 20세기 후반에 한중일의 정치 행태

  •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25년이 넘게 군사 정권을 경험했다.
  •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계엄 상태였다.
  • 일본은 1955년부터 1993년까지 자민당이 38년 동안 독주했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1955년은 원조 쌍팔년도(단기 4288)라고 불리면서 뭔가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니 흥미롭다.

※ 우리나라 -- 20세기

6. 20년 텀

20세기에 기가 막히게 정확하게 적중한 “20년 텀 예상/예언”이 둘 정도 있다.

(1) 먼저, “이 베르사유 조약은 영원한 평화는 개뿔이고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시간밖에 못 벌어 줄 것이다” (by 페르디낭 포슈)
양 세계 대전 사이의 전간기는 정말로 20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1918~1938) 저 사람은 예언이 성취되는 걸 못 보고 1929년에 죽었다.

(2) 그리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개발이다.
'워커 리 시슬러'(1897-1994) 박사는 1956년, 한국을 찾아와서 할배에게 "우라늄 1g이 석탄 3톤을 태운 것과 맞먹는 열량을 낼 수 있다. 이 자원 없는 나라에서 에너지 걱정 없이 사는 길은 원자력 육성뿐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인재를 육성하면 된다. 지금 시작하면 한 20년 뒤에는 결실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예측했는데... 그 말이 진짜 씨가 되었다.

이 말을 들은 리 승만 할배는 서울대와 인하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고, 없는 나라 살림으로도 국비 유학생을 보내서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했다.
1959년 7월 14일에는 지금의 서울 과학기술대, 그 당시엔 행정구역상 경기도 양주이고 서울대 공대가 있던 자리에 한국식 원자로의 건설을 시작했다.
(거의 두 주 뒤인 7월 27일엔 인천-안산 앞바다에서 3단 로켓 발사 시험까지 한 건 덤.. 1959년 7월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 기념비적인 시기였다)

이런 투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거의 20년 뒤인 1978년에 부산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건설에 거의 6년이 걸렸으니 박통의 제8대 유신 임기 내내 건설된 거다.
경부 고속도로나 포철과 달리, 원자력 발전은 전임 대통령의 인재 육성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아무튼 이것도 전간기만큼이나 기막힌 20년이었다는 거다.

7. 1982년의 반일 트렌드

이때 일본에서 고등학교의 역사 교과서에서 동아시아 근현대사 설명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형태로 잔뜩 변개를 했는가 보다. 침략을 진출이라고 바꾸고 자기들이 한국과 중국을 근대화시켰다고 쓰기라도 했는지?
아무튼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난리가 났고, 오죽했으면 다음과 같은 일이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벌어졌다~!

  • 독립기념관 건립 시작
  • 조선어 학회 사건의 당사자였던 박 영희 여사가 커밍아웃하여 일본를 공개 규탄
  • 독도는 우리땅 노래 발표

물론, 82년에는 반일이었고, 이듬해 83년에는 아웅 산 테러와 007 피격 사건 때문에 반공으로 트렌드가 금세 바뀌었다. -_-;;

8. 1994~1996년 사이에

  • 1995년 1월부로 방위병 제도가 폐지되고, 대한뉴스가 없어졌다.
  • 그리고 이때부터 지금 당연시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어서 유료 쓰레기 봉투라는 게 보편화됐다.
  •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직할시가 광역시로 바뀌었고.. 서울에 광진구, 금천구, 강북구가 신설되었다.
  • 1996년부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고..
  • 우리나라는 WTO(세계 무역 기구, 1995)와 OECD(1996)에 가입했다.

9. 1999~2000년 세기말에 잠깐 불었던 이집트 트렌드

  • 만화영화 이집트의 왕자
  • 게임 툼 레이더 4
  • 영화 미이라 시리즈
  • 이 정현 3집 '너'

이건 우리나라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신기하지 않은가? 옛날 추억 돋는다. ^^

※ 우리나라 -- 21세기

10. 2002년의 IT 업계

2002년은 월드컵과 제2 연평해전뿐만 아니라, 국내 컴퓨터 업계에서 이런 흑역사가 만들어졌다.

  • 이스트소프트에서 alz 포맷 도입 (정확히는 01년 말)
  • '다음'에서 온라인 우표(4월) 도입. 엄청난 반발과 부작용 끝에 3년쯤 뒤에 폐지
  • 프리챌 유료화 선언(11월).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프리챌은 유료화를 잘못 밀어붙였다가 완전히 망했다.
한때 우리나라 압축 유틸을 선점했던 이스트소프트의 알집은 주도권을 반디소프트 반디집에게 완전히 빼앗겼다.
슬그머니 유료화해 놓고는 기업· 관공서를 상대로 불법복제 고소질=_=, 거기에다 알집과 알FTP는 한때 사용자의 데이터를 날려먹는 치명적인 안정성 버그까지 있어서 컴터 매니아들로부터 호감을 완전히 잃었다. 뭐, 이것도 다 10수 년 전 과거의 일이지만 말이다.
이스트는 이제 알툴즈 브랜드를 버리고, 온라인 게임이나 AI로 먹고 살려고 노력 중이다.

다음도 온라인 우표 때문 '만'은 아니지만 검색, 카페, 블로그까지 차례차례 경쟁사 네이버에게 점유율을 빼앗기고 현재는 2류 포털 정도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반면, 네이버는 저 2002년 10월경에 지식인이라는 걸 최초로 도입하면서 도약· 약진을 시작했다. 자연어 검색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은 저 서비스가 벌써 20+n주년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저건 서포카 출신의 컴공 병특 엔지니어들을 갈아넣으면서 개발한 거라고 전해진다. 그 전엔 자연어 검색은 엠파스가 강자였었는데.. ㅎㅎ
다만, 네이버도 세계구 급의 영원한 강자는 절대 아닌지라, 구글과의 검색 결과 격차는 이미 너무 벌어진 듯하다. ㅠㅠㅠㅠ "아래아한글 vs 마소 워드"이던 게 지금은 "네이버 vs 구글"처럼 돼 간다.

11. 나머지 2000년대 국내 전반

2003년은 국내 과학기술인의 부고 소식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카이스트 풍동 실험실 폭발 사고, 그리고 그 해 말, 남극에서 전 재규 대원의 조난과 순직.

2005년에는 박 정희 대통령과 관련된 이념 논쟁이 갑자기 좀 불거졌다.
민문연에서 펴낸 "만화 박 정희", 시스템클럽 지 만원· 진 중권 토론,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다.

2002~05년은 뭔가 우리나라 영화의 중흥기였던 것 같다. 본인의 대학 시절과도 일치하는데, "태극기 휘날리며",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등, 명작 영화가 유난히 많았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 영화 중흥기는 1966년 부근과 저 2004년 부근이다.

2004~08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는 주40시간 근무, 일명 주5일제가 시행되고 정착했다. 그 전 44시간 시절에는 격주로 일토· 놀토 이러는 과도기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대학 졸업 후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시기와 딱 일치한다.

2007년에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개정됐다. 악명 높던(?)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이 '그냥 충성'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5000원부터 시작해 신권 지폐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2009~2010년 무렵엔 우리나라의 보행자 통행 방향이 우측통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자전거의 핸들 브레이크도 오른손이 앞바퀴, 왼손이 뒷바퀴에 대응하다가 이때부터 반대로.. 오른손이 뒷바퀴로 바뀌었다.

2010~2011년엔 국군 전투복이 지금 형태로 싹 바뀌었다.
그리고 2010대 동안은 IE6 퇴출, 주민등록번호 수집 폐지, 플래시 퇴출, 도로명 주소 시행, 대체공휴일 도입 같은 일이 있었다. 2020년대에 와서는 IE 자체가 퇴출됐고 말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23/12/25 08:35 2023/12/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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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흑백 사진, 흑백 화면만이 더 옛날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컬러여도 4:3 종횡비에 저화질, JPG 깍두기 artifact, 아날로그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은 까마득한 옛날 역사의 흔적이 돼 간다. 오늘날의 초고화질 와이드 동영상에 비하면 저런 영상들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게 보인다.

차라리 순 아날로그 영화 필름이면 재질 차원에서 리마스터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TV 신호나 VHS 신호는 정보가 저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없는 주사선 수를 무슨 수로 더 늘리겠는가? AI를 동원해서 소실된 정보를 인위로 창작해서 재구성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2002년 월드컵조차 유튜브가 없던 시절, TV가 아직 아날로그이던 시절, 20년도 더 전의 아련한 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이던 6월 29일 아침 10시 25분, 황해 연평도 부근에서는 남북 해군 간에 군인들이 피흘리고 배가 부서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 당시 명칭으로는 서해교전, 현재 정정된 공식 명칭으로는 제2 연평해전이다.

1987년 6월 29일엔 민주화 선언이 있었고, 1995년 6월 29일엔 삼풍 백화점이 붕괴됐다. 그리고 2002년 6월 29일엔 저 사건이..;; 간격도 비슷하고 참 절묘하다.
제2 연평해전 때 보였던 북괴의 공격 패턴은 이랬다.

1.
모두들 잘 알다시피 우리 쪽에서 상대방을 정말 선의적으로 보고 배 옆구리까지 노출하면서 저지(차단) 기동을 했는데, 저놈들은 그때 비열하게 허를 찌르고 선빵을 날렸다.
이 일을 겪은 뒤에야 우리 측의 교전수칙이 개정되어 차단 기동이 삭제됐다.

이런 번거로운 기동 자체가 무슨 그 당시 대통령 때 처음으로 도입된 건 아니다. 하지만 1999년에 "NLL을 지키되, 우리 쪽에서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마라(강조), 나머지는 (그 번거로운) 교전수칙대로 해라" 이걸 골자로 하는 대통령 발 지시가 내려오기는 했었다.

2.
전투가 시작되자, 놈들은 기회가 되자마자 적장부터 바로 사살했다.
참수리 고속정 357의 정장이었던 윤 영하 소령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무슨 이 순신이나 넬슨 제독처럼 전투가 다 끝난 타이밍에 전사한 게 아니었다. 전투 초반에 몇 분 못 가 "저격"을 당해서 전사했다.

그는 처음엔 포탄 파편에 맞아서 다쳤고, 이때는 다시 일어나서 지휘를 계속했다. 허나, 함교가 부서지면서 자기 모습이 외부로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조준 사격을 받고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단순히 눈 먼 총알이나 파편에 맞은 게 아니었다.
정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교전 중에 실질적인 지휘는 부정장인 이 희완 중위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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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총탄들 때문에 만신창이가 돼서 한참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의무병인 박 동혁 병장이었다. 의무병은 여느 전투원들처럼 엄폐물 뒤에 숨어서 발포만 하는 게 아니라, 부상병을 나르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헤드샷 맞아 즉사했건, 나중에 부상 후유증 때문에 사망했건, 이것도 평범한 사고사나 순직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전사이다.

(참고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때도 무려 육군 대령이 공비에게 저격을 당해 전사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전투복의 계급장도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선명한 색이 아니라 눈에 잘 안 띄는 검정 계열로 바뀌었다.
물론 공비 입장에서는 아무 보급도 없이 적진에서 총알을 최대한 아끼면서 최대한 중요한 인물부터 제거하는 게 마땅했을 것이다.)

3.
우리 357 고속정이 이렇게 기습 공격을 당하자, 근처의 358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북괴 684를 향해 사정없이 불벼락을 내렸다.
그러나 놈들은 배가 너덜너덜 박살나고 수십 명의 승조원들이 죽거나 다치는 와중에도 358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짜 끝까지 집요하게 357만 때리다가 자기 배가 다 박살난 걸레짝이 된 뒤에야 간신히 예인을 받으며 퇴각했다.

이런 집념 때문인지, 우리 357 고속정은 손상과 누수가 너무 심해서 예인 도중에 결국 침몰해 버렸고, 나중에 다시 인양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 위의 1~3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북괴놈들은 자기들이 피지컬이 딸리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치고 빠진다. 기습하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적장의 목을 날리고, 한 놈만 집중적으로. 모든 공격을 최고의 가성비를 뽑을 수 있게.. 모든 타격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한다는 거다. 제1 연평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제2를, 제2에 대한 보복으로 천안함을.. 이런 식으로 우연이란 없다. 아랫것들의 돌발 일탈 따위는 더욱 없다! 알겠는가?

제2 연평해전 이후로 북괴는 잠수함 어뢰나 지뢰, 아니면 아예 미사일로 신경 거슬리고 있지, 저렇게 가까이 대면해서 총포 쏘는 방식으로 도발하지는 않고 있다.
저런 전투를 겪었기 때문에 북괴는 이런 식으로 바다에서 배로 찝쩍대서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다친다는 걸 알게 됐고, 더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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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리 357의 영웅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북괴는 계속 NLL 넘어 오고, 그 부근에서 조업하는 울나라 어선들을 수시로 나포하고 바다의 일진 양아치 짓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씨 대통령 시절에만 해도 울나라 어선이 일본에 나포되기도 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그런 소식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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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평해전"은 너무 엄근진한 소재를 다루는 것 대비 영화로서의 연출력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평이 있었다. 클리셰가 너무 뻔하고 진부한 채 애국심만 억지로 주입한다고 말이다.
허나, 딴 얘기는 접고.. 다 끝나서 결말부에, 살짝 하얗게 밝아진 배경으로 "그때 교전이 없었고 357 승조원들이 평소처럼 임무 마치고 복귀했다면 그 날 밤은?"을 상상한 장면은.. 정말 울컥스러웠다.

평소에 주인공을 괴롭히고 가혹행위 비스무리한 것도 저지르던 고참도, 평소에 아주 엄격하고 깐깐하게 굴던 함장도.. 다같이 TV로 축구 경기 보면서 얼싸안고 응원하는 거.. 영화로서 굉장히 적절한 연출이자 마무리였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와 터키의 무려 4강전 경기가 당일 저녁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때는 양국의 선수 모두 제2 연평해전 전사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한 뒤에 경기가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 수호의 날'이라고 제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날짜는 천안함 피격에서 유래되었다. 제1, 제2 연평해전에 이어 이 사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2 연평해전 때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가 천안함 때 전사한 분도 있으니 말이다. (박 경수 상사~!!! 1981-2010)

북괴가 황해에서 얼마나 많이 찝적댔으면 이런 기념일까지 따로 제정될 정도였겠나?
10여 년 전 박 근혜 시절엔 국군의 날 기념식이 정말 웅장하고 좋았는데, 올해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이 완전 마음에 들었다.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천안함, 연평도 포격 때 전사한 분들의 이름을 직접 다 불렀고, "댓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북괴가 도발하는 한 1원도 원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언급을 했으니 완전 사이다 아닌가? 이건 진정 대통령 잘 뽑은 덕분이다.

우리나라 국군은 엄연한 정규군임에도 불구하고 북괴의 도발에는 거의 일본 자위대 수준으로 왕창 소극적인 최소한의 대응밖에 못 하고 있다. 선빵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언제나 우리가 먼저 맞은 뒤에 대응하며, 찍소리 못 하게 만들 보복도 못 한다. 여기에는 확전 예방이라든가 미국 눈치 같은 여러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도 핸디캡을 감수하고 불리한 여건에서 너무 신사적으로 대해 주고 있는데 천안함이고 연평해전이고 간에 뭔 패잔병이라느니 군이 무능하다느니 이딴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일본과 북괴에 대한 잣대가 같지 않은 걸 정말 눈 뜨고 못 보며 싫어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10/28 08:36 2023/10/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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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한테 이토 히로부미야 뭐.. 을사조약을 밀어붙인 민족의 침략자 원쑤이며 악당이다.
원 태우 의사가 암살하려다 실패했지만, 나중에 안 중근 의사가 쏜 권총에 맞아 골로 갔다. 죽어서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로 인과응보를 받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놈은 “남자는 배꼽 아래부터는 인격이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뒤지는 순간에도 女짜 포즈를 그리며 쓰러졌다는 풍자가 나돌 정도의 호색한이었다.
과연 악당 캐릭터에 걸맞은 성품이다. 울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이다. 코 옆에 점이나 있는 사악한 흰 수염 꼰대.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반면, 이 사람을 암살한 안 중근 의사는 울나라에서 뭐.. 그야말로 초딩용 위인전에도 수록돼 있는 애국자에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 업계에서 개인 테러 분야의 원조 ‘알파’이다. 피날레 ‘오메가’는 윤 봉길 의사이고. ㄲㄲㄲㄲㄲ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니 관련 영상물도 당연히 여럿 만들어져 나왔다.
바로 떠오르는 건 "도마 안 중근"... 아 이건 좀 작품성이나 감독의 자질에 논란이 많고..
검색을 해 보니 애시당초 해방되자마자 1946년에 바로 "의사 안 중근"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나왔다. 하지만 얘는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1972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영화가 그나마 더 유명하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천추의 한이었으면 1940년대 말에는 열차 이름도 '해방자'호였으며, 유 관순이고 윤 봉길이고 안 중근이고 항일 독립운동가 전기 영화부터 먼저 잔뜩 만들어졌었다. 그나마 "검사와 여선생"이 그 시절에 비정치 순수 픽션 분야에서 흥행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신파 영화였다고도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유 관순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 중근 영화도 1959년에 "고종 황제와 의사 안 중근"이 하나 더 나왔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안 중근, 이등 박문을 쏘다"(1979)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유 관순은 북한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반면, 안 중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알고 보니 지난 2016년에는 "마지막 간수"라고 울산 MBC에서 다큐 반, 영화 반쯤 되는 성격의 TV 프로를 방영했었다. (☞ 보기)
마치 "조피 숄의 최후의 날"처럼 안 중근이 거사 이후 체포되고 취조받는 장면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공교롭게도 KBS에서 주 기철 목사 다큐 겸 전기 영화인 "일사각오"를 만든 때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저거는 중앙도 아닌 지방 방송에서 전기 드라마를 자체적으로 만든 거라니 무척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2022년 말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또 21세기 안 중근 전기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 ㄲㄲㄲㄲ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안 중근과 이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위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반면, 한국에서 이토를 그냥 외국 정치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만, 이토는 그 당시 일본의 진짜 제국주의 정한론 침략자들에 비해서는 '온건한' 편이었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만 두면서 둘이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고 있었다면서 이토에게 최소한의 실드를 치는 시각은 국내에도 일부 있다. 이 영상에서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구나. (☞ 보기)

  • “조선 정도의 전통과 규모가 있는 나라를 일본이 완전히 합병해 버리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를 1천 년 이상 가진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을 만들게 됩니다”

  • “일본인 교사는 여가 시간에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하십시오” (참고로, 이토 본인은 영국 유학파였고 영어를 아주 잘한 사람이었음)
  • “종교는 조선인들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니 이렇다 저렇다 평론하지 마십시오”

근현대에 일본은 어느 때건 온건파와 강경파가 늘 대립했던 것 같다.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나중에는 천황에 대한 생각(황도파 vs 통제파), 더 나중엔 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 대한 생각에서도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으로야 살아 생전에 한복 코스프레 즐기고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정도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토가 진짜로 저런 생각을 갖고 저렇게 말했는데 울나라 국사에서 일부러 누락시키고 안 가르친 것인가?

이토가 한국의 잠재성을 믿었다느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오바 같다.
을사조약의 제5항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라고 적혀는 있다. 나무위키에서는 여기에 밑줄 치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로 링크가 걸려 있다. -_-

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먼저 만들고 나서 천천히.. 그래도 영국이나 로마 제국을 흉내라도 내면서 조선을 온건하게 일본과 동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국 유학파답게..
이렇게 비유를 해 보니 이토한테서 뭔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후자는 미국 유학파이군..

그러니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몰래 보내면서 허튼수작 부린 것에 대해서는 이토도 강제 퇴위로 대응하면서 칼같이 응징했다.
그 시절에 고종은 아무리 봐도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친일과 항일 사이에서 오락가락 여기저기 양다리 걸치다가 죽도 밥도 못 쑨 것 같다. ㄲㄲㄲㄲ

안 중근 의사는 이토가 한국을 배신하고 동양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사살해 버렸다. 그러면서 이토의 구체적인 죄목 15가지를 법정에서 주장했다. 아무리 온건파니 뭐니 해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이토가 완전 죽일놈이라는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일야방성대곡'만 봐도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을사조약 결과를 보니 전혀 아니었구나~ 저놈이 우릴 낚았구나!! 아이고 우리 어이할꼬"라는 내용이 전부이지 않던가..?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안 중근이 주장한 아이템들이 100% 다 팩트이고 맞는 얘기는 아니었던 걸로 난 알고 있다. 집필 중이던 "동양 평화론"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의 생각을 다 알 수 없게 된 것이 일면 안타깝다.

안 의사는 체포된 뒤에는 자기를 적장을 사살하고 잡힌 군 장성급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살이 아닌 교수형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작 윤 봉길 의사는 그런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로까지 압송돼서는 군 교도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이토와 안 중근에 대해 어지간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객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1) 이토는 일본 자국에서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안 중근이 존경받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 것 같은 유치한 행적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일본 자체를 개조하고 근대화시킨 아버지 정도로 추앙받는다. 거의 울나라의 박 정희 수준? 괜히 지폐에까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김 옥균 암살과 효수(시즌 1), 거기에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시즌 2)..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더 부정적인 인식을 심고, (2) 조선을 더 강하게 병탄하고 더 험악하게 취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건 분명하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는 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대만의 일제 통치에 비해 한반도의 일제 통치가 더 가혹했던 것, 처음부터 무단 통치에 헌병이고 고문이고가 횡행했던 것에 이런 사건이 직· 간접적으로 기여했지 싶다.
해방 이후에 김 구가 갑자기 암살 당하는 바람에 1940년대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남북 관계가 더 싸늘해지고, 6 25 같은 전쟁이 더 빨리 벌어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의 다른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물론 을미사변이라든가(시즌 1)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시즌 2) 때문에 조선 쪽에서도 감정이 빡돈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이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군사력 국력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국지적인 저항과 도발만 하는 건 그냥 일본을 빡돌게만 할 뿐, "곱게 식민지 될래, 맞고 식민지 될래"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마치 진주만 공격이 그때 당시에는 일본의 대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천조국을 빡돌게 해서 그 뒤로...!!@#@!#@! 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은 그로부터 10년쯤 뒤, 3· 1 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하면서 크게 벌어지니 그제서야 일제도 발톱을 쓱 감추고 좀 고삐를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하게 됐다.

안 중근이 1910년대 국제 정세를 얼마나 크게 바꿔 놓았는지는 반대로 안 중근의 거사가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쓰여진 대체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 같은 걸 읽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이 저렇게 무식하게 가혹하게 통치를 했으니 반일 항일 감정도 강해지고 강한 독립 열망이 형성되고 그게 실제로 이뤄지기도 한 것이다. 이토 같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조선을 반발심 없이 교묘하게 잘 다스렸으면.. 한국이 진짜로 일본과 동화돼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나머지 관련 잡학들

  •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성이 이름 급으로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이토'는 그래도 그나마 흔한 축에 드는 성씨라고 한다.
  • 휴먼버그 대학교에 고정 출연하는 주인공 중에 불사신의 직장인 ‘사타케 히로부미(박문!!)’가 있다. 이 사람 이름도 좀 다시 보게 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ㄲ

  • 안 중근 의사가 거사를 벌이던 당시에는 하얼삔 역에 일본군보다는 러시아군이 훨씬 더 많았다. 안 의사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제압 당하고 체포됐다.

  • 이토가 마지막으로 "나를 쏜 자가 누군가? 조센징이라고? 이런 빠가야로.." 이런 말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후손의 증언에 의해 부정된 바 있다. 또한, 이토를 쏜 사람이 러시아 저격수라고 따로 있다는 황당한 낭설이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주작이다.

  • 우리나라는 35년에 달하는 일제 식민지 트라우마로 인해, 훗날 UN이 제안하는 신탁통치조차도 극렬 반대하고 차라리 이대로 미군정-소련군정을 거쳐 분단을 선택한 것에 가깝다.;; 신탁통치 오보 같은 황당한 사건도 울나라의 미래에 영원한 쐐기를 박아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7/31 08:35 2023/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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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는 1942년 6월 13일, 리 승만 할배가 워싱턴 D.C.에서 Voice of America 단파 라디오를 통해 고국으로 내보냈던 7분 남짓한 길이의 항일 독립 투쟁 격려 선전 방송이다.

“나는 이 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외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하노니, 누구든지 귀가 있는 자는 듣고 주변 동포에게도 이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시오~ 일제의 학정에 신음 중인 우리 동포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시오. 철창 감옥에 갇히고 형틀에 묶여서 죽어가는 우리 동포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시오…” (약간 요약하고 각색)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송이 있다는 건.. 지난 2007년 말에 출간된, “일본 그 가면의 실체”(청미디어) 책에 별첨돼 있던 음원 CD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 방송이 나갔던 때는 할배가 Japan Inside Out 책을 저술해서 출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1942년 6월이라는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때는 이제 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겨우 승기를 잡았던 시점이었다. 아직 카이로고 포츠담이고 그런 선언이 나오기도 1년 이상 전이었다.

하지만 할배는 배짱 장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반 년 이상 일찍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망도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예상하고 확신했던 것이다.

“저 악독한 왜적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제 무덤을 팠으니 미국은 잊지 않고 보복할 것입니다.
왜적들은 지금은 의기양양해 있지만 이내 혹독한 불벼락으로 응징당하고 패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일황 히로히토는 필히 파멸당할 것이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이치입니다.”

“우리 독립군이 중국 및 영국 미국과 더불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왜적을 타파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이 순신의 후예로서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이 세계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아~~ 전시에 선전 선동은 이런 식으로 피끓는 말투로 하는 게 정석이구나 싶다. 전쟁에서 사기라는 게 기여하는 바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저 따위로 했으니.. 할배가 나중에 미국을 상대로도 광복군 규모를 말도 안 되게 부풀리고 개 뻥카를 쳤겠구나 싶다. 이제 이해가 된다.

1940년대 정도면 일제의 악랄 집요한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였다. 본인이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제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건 영원히 물 건너갔구나, 이대로 세대가 교체되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진짜 씨가 마르겠구나. 물론 최후의 발악을 하는 소수의 불령선인 민족주의자가 있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일 뿐 대세를 뒤바꾸지는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30년을 애썼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걸 보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미 이런 생각이 퍼져 있었다.

항일 독립 운동은 무의미하고, 이제는 2등 신민 조선인의 권익 향상, 차별 철폐, 일본 내에서의 참정권 쟁취 운동이나 해야겠다는 게 그 당시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는 민족주의 지식인 상류층의 주된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단파에 실려 태평양 너머로 울려 퍼진 리 승만 할배의 독려 메시지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엥, 이건 뭐지..?? 울나라 임시정부인지 뭔지는 중국에 있는 걸로 들었는데 본부가 언제 미국으로 이사 갔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할배의 선전 방송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불순불온 삐라를 훨씬 능가하는 최악의 불온 유언비어였다. 그들은 자국민이건 조선인이건, 전쟁 중에 외국 단파 라디오의 청취를 엄금했다. 요즘으로 치면 서버가 외국에 있는 불법 도박이나 마약을 단속하듯이 단속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 조선인 중에서 엄청난 고가였던 단파 라디오에 접근 가능해서 외국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방송국 기술자와 언론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혼자만 이 소식을 들은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방송 내용을 주변에 퍼뜨리다가 결국 1942년 하반기부터 줄줄이 걸렸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렁탕을 먹고 투옥됐다. 이것은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 전파 통신 기술이 미약하던 시절에는 전파 거리가 적당히 길고 지구 전리층에 반사되고 산란성 투과성도 적당하고.. 취급하는 기술 난이도도 아예 초단파 FM 방식보다는 낮던 ‘단파’ 라디오가 장거리 통신용으로 즐겨 쓰였다. 음질이야 메롱이기 때문에 천상 음성용이지, 음악은 안 된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모스 부호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지금 인터넷 기반 스트리밍은 대륙 간 전송은 거의 다 해저 케이블이 담당하고, 지역 내에서 무선 전송용으로는 곳곳에 기지국을 도배해 줘야 하는 극초단파가 쓰인다. 이런 기술의 변화도 참 격세지감이다.

* 여담: 반일 감정

요즘 본인은 채널 A도 아니고 채널 W라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랄까 분위기가 지난 쌍팔년도 이후로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 왔다.
위성 방송 같은 걸로 외국 방송을 쌩으로 그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정식으로 수입돼서 우리말 자막까지 붙은 일본 드라마와 다큐를 그대로 보다니..

거기에다 일본어 학습(한국인 화자 입장에서)이라든가 일본 연예인 얘기도 나온다.
노인과 바다처럼 망망대해로 나가서 낚싯대로 '마구로' 잡는 어부가 울나라로 치면 무슨 인간극장 다큐의 소재이다.
아무리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이라지만 저게 제도적으로 가능한가 궁금했다. 검색을 해 보니 채널 W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 컨텐츠의 직수입 방영이 허가된 케이블 방송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던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는 SKY 명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아.. 내가 알기로, 그나마 셋 중 한국대에만 1980년대가 돼서야 일어일문 비스무리한 학과가 유일하게 추가됐다.

최근에 만들어진 '항거' 영화에서야 형무소장이나 간수, 헌병뿐만 아니라 조선인 죄수인 유 관순 본인까지도 현장에서는 현실 고증을 반영해서 일본어를 쓰는 걸로 나온다. 그러나 옛날 1950, 70년대에 만들어진 국내의 유 관순 영화들은 반대로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와 검사까지도 편하게 한국어를 쓴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배우를 구하지 못해서일 리는 절대 만무하고, 당연히 그냥 "왜색을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고증을 무시한 것이었다.

찬송가조차 일본인이 작사한 건 슬쩍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넘기기도 했었다.
가라데?? 당연히 태권도라고 바뀌어서 소개됐다.
국어에 별 희한한 단어까지 다 일본식 한자어라고 추방해야 된다느니 마느니 그랬다.

역사, 지리, 언어 등 온갖 분야에서 "원래 잘 될 수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로비와 방해 때문에 못 된 거다" 식의 피해망상이..
적당하거나 그나마 동정하거나 이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병적으로 치달으려 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비례해서 일본한테 너무 쫄아 있기도 했다.
나 학생 시절에 정신력 강조하는 선생들의 훈화 말씀만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군기가 개 빠져 갖고는 얼마 못 가 우리나라가 쫄딱 망해서 다시 일제 식민지가 될 것만 같았다. -_- 일제 식민지가 아니면 다시 북괴가 남침해서 적화통일 되거나.. =_=

과장 좀 보태면 쓰레기 하나 없는 일본 길거리가 우리집 안방보다 더 깨끗할 것 같았다.
일본인은 진흙처럼 잘 뭉치고, 조선인은 엽전까지는 아니어도 모래알처럼 제 팔 흔들면서 안 뭉치다가 각개격파 당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이러니 1990년대 말까지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같은 선정적인 책이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그러던 게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하고, 울나라도 일본의 경제와 과학기술을 많이 따라잡고, 다이쥬 대통령 때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됐고 월드컵은 어쩌다 보니 한일 공동 개최로 치렀고..
또 요즘은 일본보다도 중공이 훨씬 더 많이 깽판 치고 망언 어그로를 끌고 있기도 하니 원색적인 반일감정이 상대적으로 누그러졌다.

뭐, 아직도 반일 정신병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과거사 정도면 "일본이 이만치 유감이니 사과니 보상이니 했으면 많이 한 거다, 더 논하지 않고 퉁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더 문제"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요즘은 많이 눈에 띈다.
아직까지 일본이랑 대놓고 갈등하는 티라도 나는 아이템은 독도 하나만 남은 것 같다.

허나, 역대 울나라 대통령 중에 리 승만 할배만치 편집증적으로, 거의 트라우마 급으로 일본 싫어하고 반일 반일거린 지도자는 없었다. 북괴와 전쟁을 치르던 중에도 “어디 우리 집안 싸움에 개입하기만 해 봐라, 우린 왜놈부터 죽여 버린 다음에 괴뢰군을 쏘겠다” 이랬었다.

세상에 저런 방송을 했던 당사자가 대통령이 됐는데 반일을 안 하고 배기겠는가? 이건 당연한 귀결이니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이런 반일 대통령 밑에서조차 노 덕술이니 김 창룡 같은 간부가 있어야 했겠는지도.. 자세한 맥락을 살펴보고 이해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교류하며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하고는 독특한 과거사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외교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할배가 양자 이 인수에게 남긴 유언 중 일부

이건 성경으로 치면 마치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유대인에게만은 행 2:38 같은 회개의 침례를 추가로 요구하고, 베드로에게는 뭔가 특별한 회개· 회복 절차를 요구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고, 또 베드로야.. 이와 관련해서 인생 최악의 사고를 한번 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지키고 울창한 산림 환경을 지켜 준 것은 고래기름의 대체제와 화석연료 원자력을 개발해 준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라고 믿는다. 알량한 환경팔이 파이터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고 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반일 항일 극일을 제일 잘 실현해 준 것은 횬다이 쌤숭 같은 기업이라고 믿는다. 국부를 창출하고 실력으로 일본을 이긴 주역들이 아닌가? 어설픈 반일정신병자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

아무쪼록,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대놓고 로비 한다거나, 일본 기업에다가 횬다이 쌤숭 기업의 기술 기밀을 팔아넘기는 간첩이 없는 한... 지금 우리나라는 친일파가 문제인 나라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이 아니라 중공이나 북괴에다가 팔아넘기겠지!!)
과학기술과 팩트와 개방을 통해 양 나라가 과거의 앙금을 극복하고 털어냈으면 좋겠다. 침략한 쪽이든 침략당한 쪽이든 죄악이나 병크를 반복하지 말고 서로 손잡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 옛 중앙청 건물은 그 위치에 있지만 않았어도 개인적으로 더 강하게 존치를 주장했겠지만.. 광화문과 경복궁과 청와대를 다 틀어막는 건 좀 아니어서 철거 쪽 입장도 이해를 한다. 할배 대통령도 당연히 그 건물을 없애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2 08:36 2023/04/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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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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