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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쪽의 여러 생각들

1. '필요만큼 분배'의 허구성

예전에 한번 얘기했던 것이지 싶은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분배한다" 이건 보면 볼수록 절대 실현 불가능하고 잘못됐고 섬뜩한 거짓 선동 구호라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의 완벽한 예시 중 하나이다.

저런 문맥에서 '필요'라는 단어는 "하나님은 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님에게 필요한 걸 응답해 주신다" (빌 4:19)이럴 때에나 쓰인다. 마치 '복수/보복'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신의 전담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법과 공권력에 의한 형벌 집행은 제외)
인간이 무슨 하나님인가? 인간이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만치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만치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나??

하나님이 지금까지 너에게 필요한 것만치 먹을 것과 입을 것 공급해 주신 것(딤전 6:8..;; )에도 지금까지 만족해 본 적이 전혀에 가깝게 없었을 인간들이 어디 필요에 따른 아름다운 분배 운운하고 있는가?

인간이 자기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없이 남의 소유를 지 꼴리는 필요에 따라 분배했다간 무슨 꼴 나는지는.. 대학교 조별과제 해 보거나 각종 공공물품을 자율 비치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목욕탕 여탕의 수건과 비누, 비행기 기내의 담요, 양심 자전거..) 필패가 입증된 실험을 굳이 또 해 볼 필요가 없다.
마치 인류 최고의 부자 겸 천재였던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 실험을 또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 신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저건 "사람이 먼저"만큼이나 불순한 무리들의 유명한 기출 문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두고두고 잊지 말고 곱씹으면서 다음에는 쟤들이 또 무슨 문제를 낼지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2. 감언이설

  •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세금 도둑이 많은 거다:
    그런데 보통은 그런 말을 하는 놈이야말로 진짜 세금 도둑, 아니 좀도둑을 넘어 세금 대도에 나라 등골 브레이커이다.
  • 성적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구석도 있긴 하지만, 이걸 무슨 자랑인양 대놓고 떠벌리는 놈들은 대체로 성적과 인성 둘 다 엉망이고, 특히 인성은 더 쓰레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수천 년 유구한 짬밥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성이란 걸.. 같은 죄인인 일개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 순식간에 쉽게 척결 가능할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마시길. 기대했다간 반드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만 더 어려워진 게 아니라, 방망이 깎던 노인 타입의 외곬수 장인도 앞으로는 더욱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어질 것이다.

3. 파벌? 중립?

"나는 정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파다" 이러는 사람치고 진짜 중도인 사람을 나는 평생 거의, 전혀 본 적 없다.
저건 "능력만치 벌어서 필요한 만치 분배한다"처럼 그냥 아무한테나 적당히 듣기 좋으면서 현실성 없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궤변으로 오· 남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덕길에서 자기 혼자만 N으로 해 놓고 브레이크 하나 안 밟고 있으면서 "난 어디로도 치우치거나 끌려가지 않는 중립" 이러는 것과 같다.
고전 1:12 같은 일갈은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4. 그들의 진짜 관심사

"사회/공산주의자들은 사실 가난한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냥 부자와 잘난 사람들을 증오할 뿐이다."

우와 정말 최고의 팩트폭격 명언인 것 같다.
환경 단체는 사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게 전혀 아니고..
여성 단체는 사실 진짜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게 절~대 아닌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똑같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똑같이 여성을 유린해도 그 주체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서 반응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북한 vs 일본/미국? 여당 야당?

단적으로 말해 그 어떤 골수 페미나 여성 인권 단체도, 위안부 할머니 타령 늘어놓는 그 어떤 박애주의자도, 민주당 정치인이 저지른 성추행이나 중국 국경에서 처참하게 착취당하는 북한 불쌍한 여성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전혀 절대 없다.

맨날 분배니 평등이니 외치는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부의 독식을 추구하는 계급주의자일 뿐이다.
그냥 평범하게(?) 혼자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만 한 자본가 기업가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나쁜놈이다.
내가 대외 이미지 깎이는 것까지 감수하고서 가장 좋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라는 극언까지 괜히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5. 남한과 북한

북한은 자유와 개방과 사유재산과 올바른 통치 체제가 훨씬 더 먼저 절실히 필요하지, 그에 비하면 통일은 0이 몇 개쯤 더 붙을 정도로 덜 중요한 후순위의 문제이다.

마치 옛날에 남한이 북괴의 침략을 막아내고 가난을 떨쳐내는 게 억만 배 이상 더 중요했지, 그에 비하면 대통령 직선제나 민간인 출신 대통령 같은 건 훨~~~~씬 덜 중요한 후순위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것만 이뤄지면 민주화 따위는 꼭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되면 좋지만 굳이 안 돼도 상관없는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건국 초창기의 할배 시절이건, 군사정권 시절이건 북한에게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사유재산, 신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건 애초에 진작부터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관과 이념 논쟁에서 쓸데없는 소리에 '어 그런가 보다' 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통일이라는 것은 당연히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통일 따위 전혀 할 필요 없으며, 꼭 남북 통일을 해야만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 전제조건

좌빨들의 선동은 대체로

  • 북한은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체계이며, 지도자가 백성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데도 불가항적으로 불가피하게 못살고 있다
  • 자본가가 근로자들을 강제 감금하고, 때려치우고 나가려는 사람까지 해코지 하면서 부려먹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진짜 그러고 있는 곳은 따로 있는데??)

이 두 전제조건이 성립해야 말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저건 전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 선동들도 그냥 bullshit이다.

종북 무리들이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거기 가서 살아라"라는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것처럼,
악성노조들은 "악덕업주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그 직장이 그렇게 싫으면 당장 사표 쓰고 때려치우고 나와라"라는 말도 절대로 듣지 않는다. 삼성은 싫지만 삼성이 주는 월급은 좋기 때문이다.

7. 정상적인 외국부터 돼야..

5번의 연장선인 얘기인데.. 남한이 북한과 통일을 하고 싶거들랑 북한을 정상적인 외국으로 만들 생각부터 해야 한다. 정상적인 외국조차 아닌 나라/집단하고 제대로 통일해서 정상적인 한 나라 한 체제를 만든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이 생각을 어떤 논객은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갈 때와 동일하게 북한도 외국으로서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해야 한다. 인터넷도 되고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도 돼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은 켕기는 게 없이 개방돼야 한다.
"민간에서는 북한하고 이미 할 거 다 하고 있고 불편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수뇌부를 합쳐서 정치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나?" 정도가 되면 그때야말로 그놈의 우리 민족끼리 명분으로 슬슬 통일을 논의해도 괜찮다.

개방은 하나도 된 것 없이 북괴 체제는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면서 그냥 북에다 퍼주자, 무조건 오냐오냐..
이건 순도 99.99%의 간첩 역적 매국노 빨갱이이니 저러는 놈들은 몽땅 다 쳐죽여야 된다.

8. 같은 잣대

지금 사회 공산주의 친종북 정치인 패거리들이..

(1) 북한에게 무한 관용과 아량을 베풀듯이 어디 한번 "같은 민족"인 탈북자라든가 이명밝근혜 및 그 지지자들도 동일하게 대해 봤으면 좋겠다. 안 그럴 거면 민족드립 좀 집어치우든가..

(2) 맨날 재벌들 삥뜯어서 분배하자고 떠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들도 자기 사재 한번 1%라도 기증· 기부 하는 꼴 좀 봤으면 좋겠다.
니들도 왕창 부자인 거 다 알고 있다. 남의 돈을 갖고는 무슨 생색을 못 내겠냐?
자기 돈으로 분배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고, 세금으로 분배하는 건 합법인 식인 거...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9. 대북 전단

대북 전단이 아직도 굉장히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북괴 수뇌부에서 아주 무서워하고 골치아파 하고 있다는 걸 남쪽 빨갱이 정치인들의 저 히스테리한 반응을 보니 간접적으로나마 확신할 수 있다.
연체동물에다가 소금 뿌렸을 때 같은 본능적인 거부 반응 말이다.

그 전에는 솔직히 나조차도 “아이고 저래 가지고 북한으로 제대로 날아가긴 하냐? 보는 사람이 있긴 하냐?”
회의적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진짜로 가고, 보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구나.
거리설교 때 나눠주는 전도지 이상으로 효과가 있다.

물론 정치인 말고 접경지역 주민들은.. 조금만 더 애국심이 있었다면 “우리 걱정은 말고 마음껏 뿌려라. 어차피 저놈들도 재래식 병력은 와해된 지경이고 우리 위협 못 한다. 지금 좀 불편 불안을 감내하더라도 저 북괴 정권을 빨리 끝장내야지.”

그랬겠지만.. 호의를 권리로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고, 현실에서는 안 중근 아들 같은 변절자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넘어가자.

일제 시대 때도 권총이나 폭탄 의거 한 건 터지면 그거 보복으로 인근 주민들이 엄청난 불편을 겪었고.. 심지어 독립투사를 숨기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이 통째로 순삭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엔 독립투사들도 인근 주민에게 민폐 많이 끼쳤다, 그지?

10. 5 18

생일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5 18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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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관된 판단

본인은 다음 pair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동치라고 생각한다.

(1) 교리 일치 없는 종교 통합 에큐메니컬 운동
vs 이념 일치 없는 불순한 남북 화해(?) 협력 짓거리, 퍼주기

(2) 킹 제임스 성경이 소위 original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한 이유 (전자는 실물이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 없음)
vs 친중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쁜 이유 (전자는 실물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이 사실상 없음)

(3) 사탄 마귀 같은 건 없다. 지옥은 없다.
vs 종북 간첩 같은 건 없다.

(4)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vs 아가리와 주둥이로만 자기도 김 xx 싫어하고 북한 체제 싫어한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 싫다면 저놈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반일반미 친중종북 거짓 선동에 끌려가지도 마라.


아이템이 또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여기까지.
예수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종교를 믿는데.. 그 교리를 텍스트로 명시하는 성경도 단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믿는 게 이치에 맞다. 그리고...

  • 예수님께 그냥 무릎을 꿇느냐 아니면 "경배"를 하느냐, (마 8:2 등 복음서에서 여러 곳)
  •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냐 "아이"이냐, (행 4:27)
  • 사탄의 왕좌냐, 아니면 그냥 "자리"이냐 (계 2:13)

이것처럼,

  • "자유 민주주의"냐 그냥 민주주의냐(혹시 인민 민주주의??),
  •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
  • "북한 공산 괴뢰"냐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이냐

본인은 성경의 변개를 관찰했던 양심과 판단력을 완전히 일관되게 동일하게 적용했을 때, 오늘날 역사 교과서의 변개도 동급의 매우 불순하고 악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 문맥에서 기어이 '자유'를 뺐다고라..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를 삭제한 것과 같은 급의 변개가 아닌가?
6· 25 사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

난 늘 강조하지만, 이 바닥은 동일한 방법론을 재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여 판단한다. 참고로 성경과 역사를 합친 '교회사'도 진영과 관점에 따라 왜곡이 아주 심한 분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2 08:35 2020/09/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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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 관순 열사의 모습

유 관순은 겨우 100여 년 남짓 전의 근현대 사람이고 초등학교 위인전에서도 언급되는 톱 네임드급 위인인 것치고는.. 검증되지 않은 myth와 알 수 없는 mystery가 의외로 많은 인물이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정정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1904년생으로 알려졌다가 1902년생으로 정정되고, 징역 7년형이던 게 5년으로 바뀌고, 형무소에서의 정확한 사인도 2013년에야 기록을 통해 밝혀졌지 않던가?

그 뿐만이 아니다. 이분은 멀쩡히 서울에서 순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해가 남아 있지 않고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극히 드물다.
의열단 내지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벌이기 전에 근사하게 혹은 비장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을 남기곤 했지만(안 중근, 윤 봉길, 이 봉창..) 유 관순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는 학생이었고, 만세 운동 자체를 "난 오늘만 산다" 급으로 무조건 죽을 각오를 하고 벌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난 오늘만 산다" 같은 항일 투쟁 패러다임 자체가 3· 1 운동이 실패하고 이런 만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겠다 싶으니까 등장한 것이다. 또한 그때는 경제력 없는 어린 학생이 사진을 쉽게 남길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1 운동 전날 밤에 유 관순이 자기가 직접 그린 태극기 하나 들고 동지나 친구들하고 포즈를 취한 인증샷 하나 없는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사진이 없었으면 유 관순의 공신력 있는 독사진--단체로 같이 찍힌 것 말고--이랍시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일제가 찍은 죄수 머그샷밖에 없다! 이게 유일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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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맹목적인 국뽕 반일 종족주의를 배격하고 조선 시대를 극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모 진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이렇게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절에는 미혼 소녀는 댕기머리이고 기혼 여성은 비녀+쪽머리가 보편적이었는데, 미혼인 유 관순이 왜 유부녀 헤어스타일이냐는 것이다.

유 관순은 안 그래도 저렇게 온통 의혹투성이인 인물인데 저 사진은 애초에 이화학당 학생 유 관순이 아니라 아예 다른 유부녀 동명이인 아줌마가 아니냐는 극단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헐..
황당해 보이지만 완전 터무니없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다음은 유 관순의 형무소 동기이던 임 명애 열사의 머그샷이다. 이분은 1886년생으로 유 관순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더 많았고 진짜 유부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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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명애와 비슷한 연배의 유부녀인 어 윤희 열사도 머그샷이 이와 비슷한 풍이다.
그 반면, 1919년 말과 이듬해에 만세 시위 시즌 2를 일으켰다가 경찰서 정모를 했던 비슷한 연배의 여학생들 사진을 보자. 박 양순, 박 신삼은 명백하게 댕기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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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화라는 학생은 댕기를 머리 위로 감아올린 것을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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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10대 학생들은 얼굴이 명백하게 앳되어 보이는 반면, 오늘날 전해지는 유 관순의 얼굴은 꽤 노안이다. 내가 보기엔 인상으로나 헤어스타일로나 학생보다는 아줌마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_=;; 물론 우리는 그 이유가 고문과 구타를 너무 많이 당해서 얼굴이 부어 터졌기 때문이라고 배워 왔다.

그럼 학생과 아줌마의 중간에 속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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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순경 열사는 1902년생으로 유 관순과 동갑이다. 다만, 투옥되었던 당시에 학생은 아니었고, 학교를 졸업해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딱 1920년 당시에 이분이 벌써 결혼까지 한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개인사가 전해지지는 않으나, 이분의 장녀라는 사람이 1920년대 중후반생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의 결혼 생활이 아이 없이 신혼만 5~6년씩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순경의 헤어스타일은 유 관순과 비슷한 쪽머리이다. 이 정도라면 저 시절 머그샷 사진의 헤어스타일과 당사자의 결혼 여부에 딱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유 관순 사진 자체가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좀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윤 봉길의 체포 장면 사진을 갖고도 저건 진짜 윤 봉길 사진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재반박되고.. 그 정도 합리적인 의심과 의혹 제기 및 검증은 건전한 학문 발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유 관순은 10대 소녀라는 특이한 프로필로 인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유 관순의 이화학당 입학 초기 사진을 첨부하며 이 주제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 얼굴이랑 불과 몇 년 뒤의 형무소 머그샷이 동일 인물이라 간주할 수 있겠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거 무슨 광수 얼굴 찾기 게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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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 기철 목사의 일화

예전부터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는 사항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본인은 예수쟁이 신자로서 주 기철 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다섯 가지 나의 소원”이라는 그의 설교문은 오래 전부터 내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들어가 있었을 정도이다. 다만,

(1) 저 사람이 대단한 거지, 그 당시에 가족을 동반한 집요한 협박에 못 이겨서 신사참배에 타협한 다른 사람들을 ‘도를 넘게’ 욕하거나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에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윤 봉길 의사를 비난하는 보도를 냈던 국내 언론사들을 친일매국(?) 어용언론이라고 욕하는 게 아무 쓰잘데기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전설처럼 따라다니는 ‘맨발로 못 위를 걸은 일화’는 도대체 언제 어느 형무소(의성?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고 출처가 누구의 증언이며, 신빙성이 있는 사건인지 내 노력으로는 분별과 검증을 더 못 하겠다.
일본으로부터 저 정도로 비슷한 레벨의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떤 분야의 지조를 지킨 건 신라 박 제상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3) 한국의 기독교 수난사 순교사가 오로지 일제 말기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1950년 가을~겨울에 전국 각지에서 온갖 냉병기로 두들겨맞고 머리에 총알 박혀 순교한 더 많은 순교자들을 언급하는 건 무슨 정치 발언으로 매도돼 가니.. 정말 어이가 없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분별력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3· 1 운동 당시에 유 관순 말고 다른 여성 독립 운동가들도 재조명되어야 하듯, 이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3. 신념형 친일파 박 중양

세상에 유 관순이나 주 기철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구한말부터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중에는 아무 사심 없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던 친일파도 있었고, 돈과 벼슬까지 받으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놈, 마냥 생계형 부역이라고 실드 치기에는 도를 넘은 부역자 등 여러 종류의 친일파가 존재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1930년대쯤부터는 일본은 절대 망할 일이 없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다는 인식이 짙어졌다. 그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인정하고, 일본 내에서 2등 신민인 조선인의 인권과 권익을 향상시키는 운동을 하는 게 순리이겠다고 노선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박 중양(1872-1959)이라는 인물은.. 부귀영화와 개인 영달 기회주의형이 아니라 그냥 조선을 자기 신념상 너무 혐오해서 충성의 대상을 일본 정부로 바꾼 좀 이례적인 사람이었다. 김 옥균 같은 친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화파들이 잔혹하기 그지없게 가족까지 몽땅 숙청되는 걸 보고는 이놈의 X같은 야만적인 나라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지는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괴롭힌 것도 아니고..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관료로서는 아주 강직 청렴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인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로 높은 등급의 관료가 됐으니 원... 윤 치호와 비슷한 위치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한 타이밍 더 일찍 신념이 저렇게 바뀐 셈이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회부됐을 때도 이 사람은 "일제가 그렇게 폭삭 망할지 몰랐어~!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려야 했잖아!" 같은 구차한 변명 따위 없었다. "조선인들은 더 고매한 일본인의 통치를 받는 게 객관적으로 더 이익이다"라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저 팩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굳이 날 죽여야겠다면 죽여라. 난 아무 미련 없다. 하지만 나 말고 일제 시대 유능한 인재들을 친일파로 몰아서 해코지하지 말고 오히려 잘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해라. 그리고 애국자의 탈을 쓴 다른 위선자들에게 속지 마라."라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이 양반은 돈과 권력을 좇는 여느 기회주의형 악랄 친일파는 아니라는 것에 조사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저 양반은 투옥과 처벌이 아니라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였다.

뭐, 조선 정부에서(고종과 민 씨 일가..) 개화파를 완전히 박살을 내는 현실을 똑같이 보고서 박 중양은 신념형 친일로 돌아섰다. 윤 치호도 자국민의 국민성에 절망한 나머지 변절해 버렸다. 하지만 구한말 때 직접 죽을 위기를 겪었던 이 승만은 그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솔직히 할배에 대해서는 그의 독선을 욕할 게 아니라 무슨 뚝심과 근자감으로 조선이 망한 후에도 외국에서 무국적자로 살면서 줄곧 독립 운동을 했는지.. 그걸 더 대단하게 여겨야 하지 싶다.

4. 이 승만 정권 때 처형 당한 최 능진, 조 봉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첫 헌정 체제이던 이 승만 1공화국은 군사정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단과 6· 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만큼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나라 분위기가 그쪽으로는 극도로 민감하고 경직돼 있었다. 통일이라는 건 당연히 북진 멸공 통일을 해야지, 감히 화해와 평화 통일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고 잡혀갈 수 있었다.

난 개인적인 신념으로는 그게 이해가 되며 일면 옳다고도 생각한다. 김 일성 같은 사악한 저질 집단은 애초에 대화고 화해 따위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놈들의 개수작에 속지 말고, 힘으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없다면 단호하게 분리와 격리라도 하는 게 백 번 옳다. 통째로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을 온갖 개지랄 발광 발악을 한 끝에 겨우 반반으로 퉁친 것이다.

다만, 모든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할배와 같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저것들은 지금 나라의 여건상 친일 부역자 출신 군경을 동원해서라도 몽땅 제거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 능진의 경우 경찰 고위 간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친일 부역자 청산을 부르짖었고, 이 때문에 이 승만뿐만 아니라 조 병옥과도 크게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최 능진은 과거의 일제 시절부터도 안 창호 라인이었고 독불장군인 이 승만을 싫어했다.

결국 이 사람은 이 승만 정권의 눈밖에 나고 종종 체포되고 투옥되다가.. 결국 6· 25 전쟁 중에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빨갱이 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훗날 비슷한 연배의 조 봉암(1898-1959)이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통일도 대화와 평화 노선을 주장했다.

자, 지금 할배를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을 보고도 나라를 팔아먹네 뭐네 매국노네 하면서 날뛴다. 그렇지 않은가?
1950년에 조 봉암이 제안했던 "UN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은 그들이 국제연맹 위임 청원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빨갱이로 몰리기 딱 좋은 혐오 발언이었다. 두 케이스 다 발언 당사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해가 있었다.

솔직히 이 승만이 외교 노선을 아무리 펴봤자 국제 연맹 시절의 강대국들이 일본의 합법적인 식민지이던 조선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그와 완전 동급이다. 저런 민족주의자 애국자들도,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북괴가 공산 적화 흉계를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으며 남북 평화 통일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끼리 친일 청산도 다 하고 공산화도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 도대체 무슨 수로 가능하다는 건가? 이렇게 국민성 더럽고 국력은 쥐뿔도 없던 헬조선 반도 땅에서? 이 승만 없이 김 구나 여 운형만 대통령 됐으면?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그러면 김 일성도 이렇게 흑화하지 않고 개과천선했을까? 허 참.. 난 내 사고실험의 결과를 봐서는 전혀 상상이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7, 80년 전 같은 무지와 야만의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반쯤 불가피, 반쯤 지나친 오바). 그리고 빨갱이 자체가 없어진다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없어질 테니 이 나라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9 08:33 2020/09/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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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부터 세계는 제국주의와 왕정이 몰락했으며, UN을 비롯한 온갖 국제기구들이 생기고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지금과 얼추 비슷해졌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대략 반세기쯤 전이던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사이는 상황이 어땠을까?

우리나라야 아직 한양 시내 길바닥에 똥덩어리가 굴러다녔고 어설픈 친일 성향 개화파들은 고종과 민씨 일가에게 작살이 났던 때이다.
그러자 일본은 각성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경쟁자들을 쳐발랐으며, 조선을 군대 해산, 외교권 박탈 등의 순으로 차근차근 차 떼고 포 떼서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김 구가 암살 당하는 바람에 남북 사이의 온건 중재자가 없어져서 북한이 더욱 폭주하고 6 25 개전이 앞당겨졌다고 보는 주장이 있는데.. 난 그에 대한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논리라면 조선이 김 옥균에게 행한 야만적인 짓거리가 일제를 자극하고 조선을 더욱 강경하고 폭압적으로 대하게 만들었다는 견해도 동등하게 성립할 것이다.

그렇게 조선이 망해 가던 동안 바깥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꽤 의미심장한 일들이 있었다. 특히 철도와, 자동차와 증기선, 전화의 발명 덕분에 나라와 나라들이 서로 손잡고 가까워지려는 시도가 있었다.

(1) 제네바 협약이 2차까지(1864, 1906) 맺어지면서 "전쟁을 해도 최소한의 룰은 지키면서 하자. 전투력을 상실한 포로나 부상병에게는 최소한의 인도주의적인 대우를 하자" 이런 규칙이 제정됐다. 만국 우편 연합(1874)이라는 국제 기관도 생겼다.

(2) 더 나아가 만국 평화 회의라는 게 1899년과 1907년에 두 번 개최되었다. 장소는 모두 네덜란드 헤이그.. 그렇다. 2차의 경우 우리나라도 참석하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 때문에 그러지 못한 바로 그 회의이다.
이 시절의 명칭에는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만국'이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world)가 저렇게 번역된 건데, 이것도 일본에서 만든 용어인 것 같다.

(3) IPA라고 불리는 국제 음성 기호(1888)가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인공어 에스페란토(1887)도 공표되었다. 즉, 언어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가 있었다.

(4) 근대 올림픽 경기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1896, 그리스 아테네)

(5)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제 우리 땅에 돌아가서 모여 살아야겠다는 '시온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국제 시오니스트 총회는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총 5회 개최되었다. 그 전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반유대주의 드레퓌스 누명 사건이 상당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6) 한편,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빨갱이라는 것이 이때쯤 생겼다. 공산당 선언(1848, 1870~)과 인터내셔널가(1870~1880)의 유래를 생각해 보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1859), 그리고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성경 개정..을 가장한 변개(1881)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변화이다.

(7) 암울했던 조선 구한말과 달리, 이 시기는 유럽에서는 '벨 에포크'라고 불리는 과학 기술 황금기였다. 물론 거기 자국민도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건 식민지와 별 차이 없었겠지만, 나라 자체는 부강해지는 중이었다. 유럽 내부에서는 별다른 전쟁도 없이 평온하고, 각종 낭만주의 낙관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15소년 표류기, 우주 전쟁,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미지의 신세계를 갈망하는 소설이 나왔으며, 거대한 대포를 쏴서 우주로 나가는 상상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유럽 스타일로 근대화를 잘한 덕분에 저 때가 나름 잘나가던 리즈 시절이었다. "나디아"가 괜히 저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엔 아직 제국주의와 우생학이 있었다. 최첨단 과학 기술을 이룩한 백인은 우월한 반면, 유색 인종들은(일본은 제외..;;) 진화가 덜 됐고 미개하다. 그 때문에 백인들이 가서 적당히 부려먹고 산업화시키고, 기독교로 개종도 덤으로 시켜 주는 게 걔네들한테도 좋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아직 핵무기는 없었지만 기관총만으로도 충분히 인류 최강의 병기로 여겨졌으며 미개인들을 제압하는 데 충분했다.
(기관총 발명 이전 시절의 식민지 개척이나 노예 반출은 적극적인 침략과 납치보다는.. 원주민들 내부에서 이미 노예였던 사람들을 사 온 게 더 많았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치즘도 20세기 초 사람들의 관심사와 트렌드가 축적된 것들이 약간만 변조되고 응용되어 만들어졌지, 아무 뜬금없이 툭 튀어나온 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관총이 처음에는 유럽인이 미개인들을 제압할 때 쓰였지만 나중에 1차 대전 때는 결국 같은 유럽인들을 참호에 처박아 넣고 죽일 때도 쓰이게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본인은 한때는 초보 역덕들의 성지인 2차 대전 시절 역사만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반세기쯤 더 전의 20세기 초 역사에도 관심이 간다. 러일 전쟁처럼..
내가 철도에 입문했을 때도 처음에는 오로지 지하철, 새마을호 일색이다가 증기 기관차에까지 관심이 확장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것처럼 이쪽 덕력이 느니까 더 옛날까지 관심이 확장된 것 같다. -_-;;

자고로 역사라는 건 (1) 지금과 별 관계도 없는 너무 먼 고대사보다는 근현대사를 더 비중 있게 봐야 하고, (2) 국사와 세계사를 같이 연계해서 봐야 한다는 게 본인 생각이다. 유럽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역사도 말이다.
그래야 어떤 형태로든 역사왜곡 국뽕을 차단할 수 있고, 약간의 따끔한 동심파괴 팩트폭격 대신 역사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 지금이 무슨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국뽕이나 투여하면서 정신승리 대리만족을 해야 하는 암울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독일이 과거의 반인륜 전쟁 범죄를 반성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이 나라 역시 조선 말기가 얼마나 개막장으로 형편없고 병신같았는지를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130여 년 전의 삽질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걸 알고 나면 반대급부로 한민족 역사상 현재 맨 마지막으로 세워진 국가 대한민국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저절로 체득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7 08:31 2020/09/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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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청): 삼전도비와 독립문

영국에서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6· 25 설마리 전투에 참전했던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를 기념하는 전적비를 반드시 찾아간다고 한다(파주 적성면 소재). 영국은 나름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로 참전했던 나라이다. 본인은 지난 2013년에 거기를 답사한 바 있으며, 답사기가 이 블로그에도 올라와 있다.

다음으로 영국 같은 훈훈한 예는 아니겠지만, 옛날에 일본인 관광객이 서울을 들렀다가 반드시 찾아가는 관광 코스 중 하나는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에 놓여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였다고 한다. 뭐, 그 건물은 잘 알다시피 김 영삼 정권 때 헐렸다.

허나, 저것보다 더 안 좋은 예가 있다. 조선 시대에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얘들은 반드시 삼전도비부터 찾아가서 저게 잘 보존돼 있나 확인했다고 한다. -_-;; 그 이유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현장에 직접 못 가면 비석 표면의 탁본 인증이라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실감이 가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옛날에는 일체의 사대주의가 몽땅 다 지금 우리가 굉장히 부정적인 색안경을 끼고 보는.. 그저 목숨 부지하기 위해서 밸도 자존심도 다 저버리는 비굴한 굴종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옛날에는 사람과 국가 사이에 지금보다 뭔가 수직적인 위계 관계 질서가 훨씬 더 중요시되었다. 그리고 약자가 자기 팔자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인근의 강자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조공 이상의 가성비로 다른 강자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뭐 그런 공생 관계가 필요한 것도 있었다. 이는 일제 시대에 일제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따랐던 사람들을 몽땅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하는 게 위험 편협한 사고방식인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조선의 경우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어영부영 하다가 병자호란이 벌어졌는데 전쟁에서 그만 져 버렸다. 그래도 여러 나라 안팎 정세 덕분에 어째 나라가 통째로 멸망당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왕이 누구 보는 앞에서 이마를 몸소 땅바닥에 짓찧기까지 하면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유례를 찾기 힘든 모욕을 당하게 됐다(삼전도의 굴욕).

고려 시절에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몽골·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 왕도 계속해서 충짜 시리즈로 나오던 적이 있었다. 훗날 구한말 때는 아관파천 같은 민망한 흑역사도 발생하긴 했다만.. 저건 그 시절에 통용되던 사대주의의 범주도 넘는 수준이었다.
삼전도비는 지금으로 치면 독립기념관의 야외에 내팽개쳐진 채 방치돼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 지붕 첨탑을 능가하는 극도의 치욕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 근처에 놓여 있는 독립문은 바로.. 우리 조선이 드디어 황제-_-를 보유한 대한제국이 됐고 삼전도비를 애지중지 관리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걸 기념하려고 세운 것이었다!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벤트였다. 청일 전쟁 이후로 청나라는 한반도에서 완전히 아웃 당했으니까..
뭐,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간판을 바꿔 봤자 나라가 돌아가는 방식이 실질적으로 바뀐 건 별로 없었다. 애초에 자기 힘으로 청나라를 몰아낸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독립문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일 장소에 '영은문'이란 게 있었다. 이름부터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영접한다"라는 뜻이며,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이 이 문을 통과하여 개선장군처럼 들어왔었다.
그랬는데 독립협회가 주축이 되어 영은문은 헐어서 주춧돌 기둥만 남겼으며, 그 대신 독립문이란 걸 1896~97년에 걸쳐서 건립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시절에 서 재필은 독립문, 독립협회에다가 독립 신문까지.. '독립'이라는 단어를 유난히도 좋아했다. 당시에 조선의 미래를 걱정하던 개화파 지식인들이 보기에는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게 당장 최대의 과제이고 염원이었던가 보다.

이런 맥락을 모르고서 '독립문'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조형물인 줄로 아는 사람은 아마 성경에 나오는 '사자'가 lion인지 messenger인지 분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이지 싶다. (마침 위치도 서대문 형무소 근처이다 보니 일본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더욱 오해하기 쉽긴 함.ㄲㄲㄲㄲㄲㄲㄲ)

물론 옛날 개화파 사람들 중에는 중국의 대안이 오로지 일본이라고.. 일본을 과신하는 착오를 범한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친일 성향은 훗날 등장하는 매국노 반민족행위자의 친일 성향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는 훗날 조선의 주권을 침탈한 뒤에도, 과거에 조선이 영은문을 허물었던 것처럼 '독립문'을 또 철거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경성 시내의 재개발을 위해 서대문(돈의문)을 헐었을 뿐이지..

일제는 오히려 그 시절에 내팽개쳐지고 방치됐던 삼전도비를 재정비했으며, 이것도 그래도 역사 유물이라며 문화재로 등재하고 관리· 보존했다. 참으로 역설적인 노릇이다. 과장 좀 보태면, 다 부서진 채 방치돼 있던 경주 석굴암을 조사하고 어설프게나마 복원 공사를 한 것과 과정이 비슷했다.

한편, 그렇게 몰락했던 청나라는 조선이 멸망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1912) 같이 멸망했으며, 그 뒤 중화민국을 거쳤다가 나중에 공산당 중화인민공화국 & 대만로 갈라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중국은 땅덩이가 워낙 넓어서 몽땅 정복하기가 곤란했던 덕분에, 아편 전쟁이라든가 청일이고 중일이고 각종 전쟁에서 참패하고도 대놓고 멸망하고 외세 식민지가 되지는 않았다. 단지 홍콩 같은 몇몇 지역을 잃었으며, 덕분에 문화가 이질화돼 버려서 수복 후에도 반쯤 특별구역처럼 됐을 뿐이다.

2. 일본: 1980년대 초반, 1990년대 중반의 반일

우리나라야 해방 이래로 지금까지 원초적인 반일 감정이 없던 적이 없었지만.. 1980년대 5공 시절에는 유난히 더했던 것 같다.
다음은 1982~84년에 발간된 무려 30권짜리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의 화보에서 '일본'을 찾아보면 나오는 설명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는 예로부터 일본에게 선진 문물을 전해 주고 일본을 근대화(?)시켜 줬건만, 걔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우리에게 상처와 피해만 끼쳤다는 뿌리깊은 배신감과 피해의식, 투철한 반일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은 이러한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우리의 진정한 우방이 되어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코멘트 훈수까지.. ㅋㅋㅋ 관찰자가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의 극치다.
얘는 지금의 두산 세계 대백과사전, 두피디아의 전신으로, 집필진을 보면 온통 스카이 대학 교수들이 즐비하다. 나름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 모여서 편찬한 백과사전이다.

그런데 일면 이해가 된다. 동아 원색 세계 대백과사전이 출간되었던 저 때는 일본의 역사 왜곡 발언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전국적으로 극에 달했었다.

정 광태의 그 유명한 "독도는 우리땅" 노래가 발표된 게 1982년.
박 영희 할머니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된 그 일기장의 주인이었다고 늘그막의 나이로 언론에 커밍아웃을 하며 일본을 공개적으로 규탄한 때도 1982년 여름이었다.

어디 그 뿐이랴? 국민 성금을 모아서 독립기념관을 건립하기 시작한 때도 1982년이다! (87년에 완공, 개관)
그러니 이 정도면 저 시기에 편찬된 민간 백과사전에 "일본은 각성하길 바란다" 같은 말이 본문은 아니어도 화보에 들어가고도 남지 않았겠는가?

1970년대에 북괴의 연이은 도발 때문에 전국민이 북괴를 규탄했었고,
1983년에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때문에 반소 감정이 폭발했었고..
2002년에 오노 금메달 사건과 여중생 장갑차 사건 때문에 반미 감정이 치솟았던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누가 저질렀건 같은 수준의 잘못에 대해 같은 강도로만 규탄하면 된다. 그럼 문제될 것 없다. 그렇지 않고 진영을 가려가며 편파적으로 선동질 하는 놈들이 매우 불순하고 나쁜놈일 뿐이다.
저 책은 북한 쪽을 찾아봐도 역시 5공 시절답게 '북괴' 운운하면서 노골적인 경계심과 적개심을 표현한다. 일본이고 북괴고 다 공평하게 모두 깐다. 그러면 편파적이지 않고 차라리 낫다.

한편, 저 때로부터 10~15년쯤 뒤인 김 영삼 때도 유독 일본의 정치인들이 위안부나 독도와 관련해서 망언을 자주 했고, 반일 감정이 상승했던 것 같다. 그러니 대통령이 "쟤들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 발언까지 하면서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 버렸다.
정확한 근거나 출처를 찾기는 어렵지만 아마 저 때 새마을호 열차(= 국영 철도청 관할)의 안내방송에서 일본어를 잠시 빼 버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어지간히도 소심한 방법으로 저항했었다.;;

일본 문화가 정식으로 개방되지도 않았고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컴플렉스가 훨씬 쩔어 있었던 옛날이야 그럴 수도 있었다고 치지만 지금은 무려 2020년이다. 1982년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북괴로부터 6· 25 시절 같은 군사력 위협을 느끼는 건 전혀 아니듯이, 일본에 대해서도 쟤들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무슨 태평양 전쟁 시즌 2 같은 짓거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지적 수준이 일제 쇠말뚝이니 아베 노부유키의 저주(?) 나부랭이에 머물러 있는 반일은 좀 망상 정신병을 의심해야 하지 않나 싶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악성 친일파보다 더 나쁜놈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3. 한국: 꼬인 근현대사 비극의 근원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한국 현대사의 비극들 중 상당수는
과거에 자국민의 힘으로 조선 왕조를 직접 끝장내지 못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무슨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하지 못한 것? 그건 별 의미 없으며 신경 쓸 필요 없다.

19세기에 조선은 말이 좋아 고요한 아침의 나라이지, 지금으로 치면 아프리카의 어느 못 사는 나라와 비슷하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비위생적이고 다른 나라와 제대로 교류하지도 않으면서 최악의 막장 고인물 썩은물이 되어 있었다.
오죽했으면 차라리 이전의 고려가 조선보다는 더 개방적이고 국제 인지도가 더 높았기 때문에 한국의 영어 명칭조차도 ‘코리아’로 굳어지지 않았던가? 조선의 입김이 닿았다면 choose의 과거분사와 비슷한 단어가 됐을 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조선은 시작과 끝이 은근히 잔혹하고 악랄했다. 건국 초기부터(1400년 초) 특별히 반역이나 역모 혐의가 없었는데도 고려 왕씨들을 집요하게 색출해서 참수하거나 바다에 던져넣는 식으로 학살했다. 나중에 홍 경래의 난이 진압됐을 때는(1812) 수괴와 간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단순 가담자까지.. 10살 이상 남자는 전원 무려 1917명을 한 치의 자비심 없이 몽땅 처형했다.

하물며 말기에 개화파는..?? 그야말로 삼족이 멸해지는 참화를 당했다. 김 옥균은 외국 망명 중에도 왕이 직접 보낸 자객에게 암살 당한 게 마치 북한 김 정남이 암살 당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저 사람뿐만 아니라 서 재필도 가족은 조부모, 부모, 자녀, 손주 세대까지 깔끔히 순삭 당했다.
고종과 민씨 일가는 외교와 경제· 군사는 등신 같았지만, 자기 밥그릇 지키는 데는 귀신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 같은 건 외국 군대까지 끌어들여 자근자근 밟아 줬다. 그리고 그 외세는 조선의 무덤을 파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그때가 되니 조선 정부도 일본에게 내정간섭 좀 그만 하라며 뒤늦게 손사래를 치기도 했지만.. 이미 일본군이 경복궁 주위에까지 쫙 깔렸고 때는 너무 늦었다.
이걸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 쟤들은 거의 싸이코패스가 아닌가 생각이 들 법도 한데 국뽕 국사 교과서는 이 과오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특히 민비가 워낙 적절한 타이밍 때 잘 암살 당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청산리니 봉오동이니 하는 1920년대 독립군의 전과가 많이 부풀려지고 왜곡된 것으로 밝혀졌듯이, 20여 년 뒤의 광복군도 비록 취지는 훌륭하지만 그 규모와 전투력은 정말 보잘것없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는 오로지 소비밖에 안 하는 집단이다. 지금 북한이 중국 없이 못 지내는 것 이상으로 그때 임시정부니 광복군이니 다 장 제스의 지원이 없었으면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겨우 그거 갖고 당당히 일본을 무찌른 전승국 대접을 받고 미국· 소련의 입김에서도 벗어난다? 남북 분단도 안 되었을 거라고? 꿈도 참 야무지다.

내가 예전에 몇 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일본이 핵폭탄 맞고 일찍 항복하고 허겁지겁 도망간 것은 걔네들한테나 우리한테나.. 특히 우리나라 입장에서도 득이 훨씬 더 많았다.
일제가 한반도에서 뭔가를 수탈하고 망쳐 놓은 것을 논하기 전에, 구한말 때 이 헬조선 땅에 더 수탈하고 망가뜨릴 게 그렇게 많이 있기나 했는지를 이성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7/11 19:35 2020/07/1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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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이 토벌된 이후로 일제 시대에 무력을 사용한 항일 독립운동 분야의 최초 원조는 (1)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보다도 전이니 독보적인 원조이다.
그 뒤 한 10년 정도 일제의 무단 통치를 경험하고 3· 1 운동까지 진압된 걸 보니, 일제를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동원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1919년 말에는 김 원봉의 주도로 의열단이라는 게 생겼다.

아, 의열단보다 근소하게 전인 1919년 9월엔.. (2)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 우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건 실패했다. 그는 현장을 탈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나중에 같은 조선인의 밀고로 체포되어서 조선인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래도 사이토 총독의 입장에서는 3· 1 운동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었지, 게다가 부임 당일에 자기 목을 노린 폭탄 의거까지 벌어졌지.. 당장은 이빨과 발톱을 감추고 민심을 달래야만 했다. 괜히 문화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통치 양상이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열단이 벌인 최초의 거사는 (3) 부산 경찰서를 노린 박 재혁이었다. 1920년 9월, 폭탄을 터뜨려서 경찰서장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다친 채로 체포됐고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당시 경찰서장이 중국 고전 덕후라는 정보가 있어서 그는 중국인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서 들어갔었다.

그 뒤 1920년대 초중반엔 본토 밖에서는 독립군이 활동했고, 본토 안 서울에서 권총과 폭탄을 쥔 의열단의 리즈 시절이 잠깐 벌어졌다.

(4) 김 익상은 일본인 전기 기사로 변장해서 1921년에 무려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폭탄을 몇 군데 투척해서 터뜨리긴 했지만 불발탄도 있었고 유의미한 인명 살상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도 변장 잘하고 일본어를 유창히 구사한 덕분에 안 잡히고 무사히 탈출했다.

의열단에서는 거기까지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게 참으로 용한데, 이제 그만 은퇴하고 니 인생 즐기라고 그에게 권유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이듬해에 일본의 육군 대장(다나카 기이치)을 암살하러 동지 2명과 함께 상하이에 갔으나.. 여기서도 권총 사격과 폭탄 모두 지독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들은 임무에 실패한 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김 익상은 뭔가 유의미한 1차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조선총독부 내부에 대놓고 침투해서 저만치라도 타격했던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2차 의거 때도 사형은 면했지만 1943년까지 일제 시대 기간 대부분과 자기 2, 30대 나이를 몽땅 감방에서 보내게 됐다. 명목상 석방된 뒤에도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다가 또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모로 좀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5) 김 상옥이 1923년 1월, 종로 경찰서 내부에서 폭탄을 터뜨려서 주변 일본인들 여러 명을 다치게 했다. 당일에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며칠 뒤 은신처가 탄로나고 서울 시내에서 포위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체포하려는 수많은 일본 경찰들을 상대로 혼자서 권총 두 자루만 쥐고 수 시간 동안 시가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견 간부급을 사살하고 부하들에게 중상도 입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했다.

(6) 나 석주는 1926년 말, 의열단의 거의 끝물을 장식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위장해서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져서 내부 시설을 부쉈다. 다음으로는 사장이나 행장 같은 특정 타겟 없이 그냥 주변의 VIP 같아 보이는 일본인들을 권총으로 마구 사살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도 대치하게 됐다.

결말은 3년 전의 선배 김 상옥과 비슷해졌다. 그 역시 마지막에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단번에 절명하지 못하고 체포된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충분한 치명상을 입은 덕분에 다행히 일제에 의해 고문과 처형 당하지는 않고 병원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은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실패한 거사도 몇 건 더 추진한 바 있다.
몇 년간 그렇게 해 봤는데 우리 역랑이 부족한 게 느껴지고, 딱히 대세가 바뀌는 건 없는데 귀중한 대원들의 희생만 더 커지고, 임시정부와도 손발이 썩 맞지 않고..

의열단은 일제 내지 내부 배신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일망타진 와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해체되었다. 김 원봉은 무장 투쟁을 할 거면 이런 게릴라 공작원 테러리스트 급이 아니라 정규군 급의 병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1930년대 초에는 김 구가 의열단을 대신하여 임시정부 명의로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은 의열단이 아니라 바로 저기 소속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7) 이 봉창은 잘 알다시피..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하고 일본인 지인도 많고 심지어 일본 경찰과도 인맥이 있어서 김 구가 처음에 이놈은 밀정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한참을 얘기를 나눠 본 뒤에야 끄나풀이 아니고 레알 동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총독도 아니고 무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하러 1932년 1월에 본토에 갔으며, 현장까지 잘 도달해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발 없이 잘 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신이나 마찬가지인 천황이 사람들에게 호락호락 얼굴을 비춰 줄 리 없었다. 천황은 면상은커녕 항복 방송 옥음(!)을 들려준 것만으로도 신민들이 벌벌 떨었던 존재인걸..;; 그는 똑같이 생긴 여러 대의 마차 중에 어느 게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히로히토의 생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8) 윤 봉길 의사의 의거는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역대급의 대박을 터뜨렸다. 물리적인 인명 살상 실적으로나, 상징성으로나..

게다가 이런 스타일의 유의미한 거사는 훗날 해방될 때까지 저게 사실상 마지막 대단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윤 봉길 이후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김 구의 신변도 위험해졌기 때문에 한인애국단은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1933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봉창과 윤 봉길은 모두 외국에서 거사를 벌이고 외국에서 순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열단 시절과 달리, 이렇게 가입 선서식 사진까지 존재하는데.. 그런데 사진들의 태극기 배경은 다 합성인 것 같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중근과 윤 봉길만 기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게 이 분야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용한 무기(전자는 권총, 후자는 폭탄)나 처형된 방식을 헷갈리기도 한다(전자는 교수형, 후자는 총살). 이들 이후로는 김 구도 개인· 소수 단위의 테러 의거가 아니라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이상이다.
누가 만들어 낸 구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똑같이 항거하고 투쟁했더라도 무기를 들고 싸운 사람은 의사라고 부르고, 맨몸으로 싸운 사람은 열사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준(헤이그 밀사), 유 관순, 전 태일 같은 사람은 열사이고,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은 의사이다. 국어사전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는 진짜로 저 기준으로 나뉘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는 컴퓨터라든가 각종 전자 출입 카드, X선 금속 탐지기 따위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저런 방식의 무장 항일 투쟁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폭탄과 권총을 어떻게 한반도로 반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안 중근(하얼빈 역)과 윤 봉길(훙커우 공원)의 경우, 초대장 내지 입장권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해당 행사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유창한 일본어로 "아이 씨, 티켓을 깜빡 잊고 안 가져왔네.. 이런 경사스러운 행사에 자국민도 못 들어가요?"라고 유창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둘러댄 덕분에 들어간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멘탈과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무장 투쟁이건 외교건 국민 계몽이건.. 독립 운동을 위해 다 필요한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주의이다.
현실성만 따지면 어느 것도 다 비슷하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고 비효율적인 삽질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안 했으면 일본이 원폭 맞고 깨갱 하고 물러갔다 해도 한반도가 자유 독립국이 된다는 보장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으로는.. 그 시절에도 난창 폭동이라든가 자유시 참변 등,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관련하여 선한 게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일 거라는 논리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게 도움을 준 적은 결코 없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라도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역시 그런 거 없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그렇게도 임시정부가 좋으면.. 친중을 하지 말고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친대만을 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장 제스가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도와 줬지 마오 쩌둥이 도와준 적이 있었냐? 후자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 통일을 저지한 원흉일 뿐이다.
오늘날 친중종북분자들의 유체이탈 궤변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12 19:35 2020/04/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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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관련 용어 정리부터 좀 하자.

휴전선 = 군사분계선(MDL) = 6· 25 전쟁 휴전 이후의 남북간 영토 경계선

38선 = 6· 25 전쟁 전의 남북간 영토 경계선


남한 기준으로 육지에 추가적으로 존재하는 경계 계층들을 위도의 "내림차순(북→남)"으로 정리하면

군사분계선 > 비무장지대(DMZ), GP > 북방한계선(NLL) 철책, GOP > 민통선


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지형 스타일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완전 바다(인천 옹진의 서해5도)

북괴가 제해력이 없던 덕분에 이 섬들은 북한 본토와 상당히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수복할 수 있었다. 위도상으로 38보다 근소하게 이남이고 6· 25 이전부터 남한 땅이었기 때문에, 국군+UN군이 여기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여기는 육지 형태의 DMZ가 없으며, 북방한계선이 곧 군사분계선이다. 그리고 물만 건너면 바로 앞이 북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교동도 같은 민통선 안도 아니며, 여기 주민 자녀는 무슨 대성동 주민처럼 납세와 병역 면제 같은 특혜도 없다. (대학 입시 때 실향민이나 오지 특별전형 같은 것만 있는 걸로 앎..)
워낙 멀고 가기 힘든 곳이니 굳이 민통선 지정을 안 해도 일반인들이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저기는 평범한 육군이 아닌 해병대가 주둔한다.

2. 한강 하구 또는 평지(김포, 강화, 파주 일대)

본토의 서부전선은 지형상의 불리함과 판문점 근처라는 이유 때문에 크게 북진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한강 주변까지 후퇴하게 됐다.
이 지역에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하며, 서쪽 끝의 하구에는 여전히 해병대도 있다. 강화군부터는 민통선이 존재하지만 출입 검문이 동부 전선만치 빡세지는 않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군사분계선은 옛 38선 근처의 평지로 옮겨진다. 아직까지는 민통선 다음에 곧장 군사분계선이지, NLL/GOP 같은 분명한 구분은 없다.

3. 첩첩산중(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까지 대부분의 본토 전방)

이제 여기가 군사분계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최전방 지형이며, 과거에 땅을 조금이라도 더 수복하려고 처절한 고지전이 치러졌던 곳이다. 길이로나 군인 비율로나 뭐.. 주변의 1, 2, 4를 모두 합해도 이 3 하나보다 모자랄 것이다.
대부분 험한 산지이지만 철원에는 주변에 평야와 호수도 있다. 그리고 양구에는 혼자 땜통처럼 동그랗게 파인 펀치볼 지형이 있다.

4. 산과 해안(강원도 고성)

여기도 기본적으로는 첩첩산중이지만 군사분계선이 -가 아닌 / 모양으로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고위도로 간다. 그리고 뒤로는 바다도 있어서 해안경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느 내륙과는 지형이 차이가 있다. 황해가 아닌 동해의 맑고 청명한 해수욕장 백사장이 남북 분단 때문에 이렇게도 많이 봉인돼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하자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군사분계선이 물이던 것이 평지를 거쳐 산으로 바뀌며, 민통선이니 북방한계선이니 DMZ니 하는 더 세밀한 구분이 생긴다.
참고로 민통선 내부에 주민이 상시 거주하는 예외적인 마을이 교동도 말고 내륙에도 파주, 연천, 철원 정도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몇 남짓 있다. 단순 논밭이 아니라 주택 말이다. 가령, 연천의 경우 횡산리 마을이라고 임진강과 코앞의 군사분계선으로 둘러싸인 실향민 마을이 있는데.. 분위기는 거의 대성동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동의 경우 판문점이 가까이 있기도 하고 근처에 있는 철조망이 북방한계선이 아니라 진짜 군사분계선이기 때문에 DMZ 안에 있는 유니크한 마을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대성동 말고 타 민통선 마을 출신들도 각종 면제 혜택이 있다고 위키에 적혀 있는데, 정말 그러한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철원보다 더 동쪽으로는 군사분계선 주변의 지형이 워낙 험하니 민통선 마을 같은 건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다음은 우리나라 안보 관광지의 양대 산맥인 파주와 철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굉장히 오래 전에 표로 정리한 것이다.

  파주 철원
철도 교통편 경의선. 역에서 직결 가능 경원선. 추가 이동 필요
관련 철도 임진강, 그리고 민통선 안의 도라산 역 (다 영업 중) 백마고지 역.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철원 역 옛 터. 금강산선 교량 흔적
거점 관광 지역 임진각 고석정 인근의 철의 삼각 전적지
남북 철도 연결 여부 아니요. 민통선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철도중단점 있음
녹슨 증기 기관차 옛날 장단 역에 있던 것이 지금은 복원 처리 후에 임진각에 전시돼 있음 월정리 역 구내에 부서진 기관차 잔해가 있으나 상태는 안 좋음
도로 교통 강변북로+자유로+통일로. 자동차 전용 도로 연계가 좋음 동부간선+국도 3 또는 43호선. 서울 바깥부터는 자동차 전용 도로 없음
가는 길목에 강안 경계 초소를 볼 수 있음 38선 돌파 기념비가 있음
땅굴 제3 제2 (제3보다 더 긺)
지역 특징 판문점, 대성동/기정동, 개성 공단 자연 경치가 더 아름다움. 수복 전의 북한 시설이 있음 (노동당사)
인근 전망대 도라 평화, 승리
인근 하천 임진강 한탄강
민통선 안에서 식사 통일촌 또는 해마루촌. 관광 연계 가능 전선 휴게소. 개인적으로 직접 예약하고 자차로 방문해야 함
민통선 경계 대체로 임진강 선형을 따라 있음 (리비 사거리 등) 육로에 민통선 초소가 있음

이런 식으로 고성의 통일 전망대와 파주의 오두산 통일 전망대도 비교 대조 가능하다.
오두산의 경우, 고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위도에 있지만 강과 강이 합류하는 경치 좋은 곳이면서 군사분계선도 강을 따라 형성되었으니.. 고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망대를 만들기에 굉장히 좋은 입지를 갖추게 됐다. 그쪽으로 자유로 도로를 닦으면서 괜히 전망대를 만든 게 아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30 08:33 2020/03/3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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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 상묵(1916-1984)이라는 사람은 살았던 시기와 젊은 시절 행적과 프로필이 원조가카(1917-1979)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에 같이 비교해 볼 만하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해서 교사를 몇 년 하다가 그만두고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만 해도 수입 안정적이고 명예와 처우가 좋은 매우 훌륭한 직업인데..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건 이례적이었다.

물론 이건 1930년대 말 이후가 돼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전쟁을 벌이느라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조선인까지 징병제로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황족이 아닌 평민 조선인에게도 일본군 간부가 될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인에게 총을 믿고 쥐어주고 자기 군대를 맡기기 위해서는.. 내선일체와 조선 민족 정체성 말살 프로파간다를 미치도록 밀어붙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 신 상묵과 원조가카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사가 된 덕분에 또래 청년들과 달리 군대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징병제 때문에 기왕 군대에 끌려갈 거라면,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병이 아닌 간부로 다녀오자"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군 간부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세부 디테일은 좀 차이가 있었다.

신 상묵은 부사관을 지원해서 오장/조장, 지금 국군으로 치면 거의 상사· 원사급에 올랐다. 근무지도 조선의 일본군 헌병대로, 정말 대놓고 항일 인사들을 고문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경찰 같은 군인 보직을 맡았다.

1940년대 일제 말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옛날 같은 수준의 독립 운동이야 이미 씨가 마른 상태였다. 그저 일부 자잘한 비밀 결사 수준의 국지적 저항이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무궁당 사건"의 수사와 피의자 취조를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악랄하게 했다. 이런 바닥에서 조선인이 단순히 헌병 보조원 끄나풀을 넘어서 최상위 간부 계급에 짧은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은 아무래도 구린 실적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

2.
그에 비해 박 정희는?
부사관보다 더 되기 어려운 장교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도 성적 우수자여서 온갖 특혜가 주어졌지만, 최소한 조선 본토에 오지 않았으며 타지에서도 있지도 않은 동족 독립군이 아니라 중공군과 싸우러 갔다. 하긴, 한 나라의 육사까지 나온 장교에게 겨우 헌병은 완전 재능낭비의 비전투 한직 병과일 테니..

요컨대 원조가카는 신 상묵보다 더 노력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신 상묵보다 훨씬 덜 악질적으로 일본군 복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긴 칼 차고 돌아와서 교사 시절에 자기를 깔보고 무시하던 일본인 동료들에게 설욕을 했다.

이 정도면 그의 의도는.. 본인이 누차 강조하지만 그냥 현실 불만족으로 인한 출세욕, 신분 상승 욕구였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이스트 졸업하고 나서 국내 공돌이들의 처우가 불만족스러워서 로스쿨, 의전을 다시 들어갔거나,
유명 운동 선수가 여러 처우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귀화한 것 정도의 일탈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940년대에 무슨 스포츠팀처럼 한국군과 일본군을 선택 가능하기라도 했었나? (광복군은 뭐...;; 논외로 하자. -_-)
그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업종에 종사했던 모든 조선인을 싸잡아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할 게 아니라면, 이 이상의 쓸데없는 친일파 헛소리는 논할 가치가 없다.

3.
그러고 보니 이 종찬(1916-1983)도 저 두 사람과 거의 같은 연배이고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이 사람은 부역자 수준을 넘어 진짜 매국노급 친일파인.. 이 하영의 후손이어서 집이 귀족 금수저 가문이었다. 그는 그런 빽 덕분에 박 정희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일본 육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기를 쓰고 거기 들어가려고 누구처럼 멸사봉공 혈서 따위 안 써도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에 참 군인 소리 들을 개념 행적을 많이 남겼으며, 이에 대해서는 할배나 원조가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저 사람은 애초에 일본군 복무하던 시절에도 비윤리적인 명령에 대해 "본인은 천황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신껏 항명을 할 정도로 강직했다.

4.
또한, 먼저 언급했던 저 신 상묵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출신에다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 진영에서 지금도 잘나가고 있는 정치인 신 기남이다.
이 사람은 다른 건 모르겠고 지난 2000년대에 한글날의 국경일 재지정에 관심을 많이 갖고 애썼던 덕분에 한글 학회 등 관련 운동 단체로부터 애국자라고 칭송받고 상도 잔뜩 받았었다. 그랬는데 부친의 과거 이력 흑역사가 뒤늦게 알려져서 곤혹을 치렀다.

5.
두 사람 얘기만 하려다가 세 사람 얘기가 돼 버렸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한쪽에다가만 친일파 프레임 씌우는 불순하고 멍청한 수작에 속는 사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도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고 누차 강조하는 사항인데.. 우리나라가 겨우 1940년대 말 건국 초기에 일제 군경 경력자를 재등용한 것은 Windows 95가 그때 컴터 환경의 한계상 도스/16비트 코드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당장은 신 상묵 같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됐다. 항일 인사를 잡던 그 수사 기술이라도 재활용해서 일본놈보다 더 질 나쁜 빨갱이들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 상묵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에서는 원조가카 같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 간부가 됐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에 반민특위를 해체했던 법무부 장관조차도 골수 친일파이기는 개뿔, 항일인사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한글 학회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한 민족주의자였다.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망상을 30대 나이가 넘어서까지 갖고 있어서는 심히 곤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4 19:35 2020/03/0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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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6· 25 사변 때 육해공을 통틀어서 첫 승리를 거둔 전투는... 6월 25일 당일 밤에 북괴의 부산 해안 침투를 막아낸 대한해협 해전이다.
그럼 졸전과 패배와 후퇴만 거듭했던 본토에서 육군의 첫 승리로 기록된 전투는 무엇일까?
그건 충주-음성 일대의 동락리 전투라고 여겨진다. (7월 5~8일) 3~400명 남짓한 병력으로 2천 명에 달하는 연대급의 적군 병력을 무찌른 대승이었다.

비록 승리 후에도 얼마 못 가 후퇴하게 되긴 했지만 이건 노획물, 아군의 사기 진작, 그리고 훗날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 상륙 작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도 버는 매우 값진 승리였다. 특히 이때 노획한 소련제 무기들을 통해서 북괴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음이 명확히 입증됐으며, 이는 우리도 유엔군의 지원을 받는 명분이 되었다. (☞ 관련 동영상 링크 1, 링크 2)

이 전투의 승리에는 동락 국민학교 교사 김 재옥 선생(1931-1963)이 피난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다가.. 목숨을 걸고 국군을 찾아가서 공산군의 상황을 제보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기습을 유도한 것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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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는 공산군이 들어와서 진을 쳐 있고, 우리 국군은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로 한밤중에 깜깜한 시골길을 몇 시간을 헤매면서 무작정 달린 끝에, 4~5km 남짓 떨어져 있던 국군 진영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이분은 겨우 20세의 처녀였다.

큰 승전을 보고받은 할배 대통령은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동락리 전투를 치렀던 6사단 7연대 2대대 대원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으며 해당 지휘관은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김 선생 역시 민간인으로서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다는 말이 떠돌지만, 정확하게 검증 확인이 안 된다. 오히려 김 재옥 기념사업회 같은 단체에서는 나라에서 이런 대단한 영웅에게 훈장 하나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줘야 한다고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탄원을 넣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말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최종적으로는 2012년에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긴 했다. 그리고 이분의 근무지이던 동락 초등학교에 기념비와 기념관는 진작부터 세워져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본인은 공교롭게도 바로 지난주 설 명절 귀성길 때.. 동락 초등학교를 잠시 들러서 저 현충탑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자가용의 내비가 횡축 이동 경로로 혼잡한 영동 고속도로(50) 대신 평택-제천 고속도로(40)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서충주 IC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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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행적은 훗날 <전장과 여교사>(1966)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필름이 소실되어 영영 사라진 줄 알았다가 뒤늦게 발견되고 복원되어서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지난 2015년 봄에 공개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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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은 그 위기의 순간에 마주쳤던 어느 젊은 장교(이 득주 소위)와 눈이 맞아서 그 해 10월에 결혼까지 하게 됐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귀결된 것 같았으나 하지만...

이분의 생몰년을 살펴보면 굉장히 일찍 죽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병이나 사고나 북괴의 테러로 죽은 게 아니었다.
군 복무 중에 중에 자기 상관에 대해 앙심을 품었던 고 재봉이라는 이름의 어느 병사(상병)가그 상관을 죽여 버리려고 관사를 찾아갔는데, 정작 죽이고 싶은 간부는 전출 가고 없고, 하필 그 집에 김 재옥 선생 일가족이 입주해 있었다.

그 병사는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인 줄 모르는 채로 흉기(도끼...)를 휘둘러서 일가족을 몰살했다. 김 재옥 선생은 이때 허무하게 참변을 당했다. 마치 1969년에 영화 배우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 패거리에게 오인 살해당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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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아들 딱 한 명(이 훈)만이 그 당시 친척집에 가 있어서 화를 면했고, 덕분에 대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해자는 곧 붙잡혀서 당연히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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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신문 그림의 우측 하단에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우는 표정인 아이가 바로 유일한 생존자이고 사건 당시에 10대 소년이었던 이 훈 군이다. 지금이야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다. 국가 유공자의 후예인 데다 대가 끊길 수준의 일가족 몰살까지 경험한 고아 출신이니, 젊은 시절에 병역은 무조건 면제됐지 싶다.)

내 머릿속 잡학 사전에 또 거물 아이템이 하나 새로 입력됐다.
그런데 이런 엄청나고 드라마틱한 사실을 난 왜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돼서야 알게 됐을까? ㅠㅠㅠㅠ 난 6· 25 전쟁과 관련해서 조지 리비 중사, 김 재현 기관사 등 여러 마이너한 인물들에 대해 주워 들었는데, 김 재옥 선생에 대해서는 정말 난생 처음 들었다.
더구나 난 고 재봉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단지, 피해자가 저런 사람이었다는 걸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고 재봉이 당변병이며 상관으로부터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 링크) 그냥 저 병사가 처음부터 도벽도 있고 성질이 포악하고 더러운 놈이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 글에서는 김 재옥 선생이 주제이므로 가해자의 배경에 대한 판단은 하고 싶지 않지만, 가해자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능숙하게 도피 생활을 하고 체포된 뒤에도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뻔뻔스러운 걸 보면.. 정말로 그냥 처음부터 성질이 더러운 놈이 맞았던 것 같다. 원래 착하던 사람이 도를 넘는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욱해서 정신줄을 놓은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31 08:35 2020/01/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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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산업화 시절 무용담들을 살펴보면.. 경부 고속도로와 포니와 제철소 3관왕을 달성한 왕회장부터 시작해서 과감하게 반도체를 시작한 삼성 이 병철 회장, 일본으로부터 용케 스프 제조 노하우를 전수받아서 삼양 라면을 최초로 개발한 전 중윤 회장 등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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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건국 초창기, 할배가 집권해 있을 때야 김 두한의 사딸라를 능가하는 손 원일 제독의 근성의 가격 후려치기 협상(군함 도입), 그리고 홍 덕영 골키퍼의 눈물의 투혼 같은 이야기가 캐감동이다. 그건 각각 군사와 스포츠 분야이고, 경제와 기업 이야기는 아무래도 훗날 박통 때부터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분야에 더 관심이 있다면 유튜브로 '기업비사'라든가 '신화 창조의 비밀' 시리즈를 쭉 찾아보시기 바란다. 이 반기업 정서가 횡행하는 시대에 사상 무장용으로 유익하다. 뭐 굳이 옛날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극한직업' 시리즈도 좋고 말이다. (당연히 영화 말고 다큐멘터리..)
학교에서 애들한테 주식 투자나 부동산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겠지만.. 최소한 알량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공유 환상의 허구에 속지 않을 정도의 방어적인 경제관념 교육은 어릴적부터 정말 필요해 보인다.

친환경 친인간(?)에 더불어 공유하고 국유화하자고 선동하는 넘들치고 자기 사재 기부는 1원도 한 놈이 없으며, 자기들은 누구보다도 재테크에 빠삭해서 시장 경제 자본주의의 혜택을 다 입고 있다. 이건 공공연한 비밀이며 과학이다. 남의 돈 세금 갖고는 천하에 무슨 생색인들 못 내겠는가?
반공, 안보 외치는 높으신 분들치고 자기 자식새끼 군대 보낸 놈이 없는 것을 비판해 왔다면(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막장인 것도 아님), 저 분야에 대해서도 똑같이 일관된 비판이 나와야 마땅하다.

뭐 그건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이끈 위대한 거장 중 하나로,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한 한국의 철강왕 박 태준(1927-2011)을 빼놓을 수 없다. 질 좋은 강철이 있어야 그걸로 자동차도 만들고 선박도 만들고 레일도 만들 테니 제철소는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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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소는.. 뭐 이런 분위기의 장소이다. 여느 제조 공장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저 붉은 쇳물은 화산 용암이나 마그마보다 훨씬 더 뜨겁다.)

그런데 그런 거대한 시설을 맨땅에서 짓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UN 세계은행(IBRD), 국제 제철 차관단 등의 통상적인 국제 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그걸 밑천 삼아 지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한국 같은 못사는 듣보잡 나라가 뜬금없이 제철소를 짓는 게 가능할 거라고 전혀 믿지 않았으며,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때 박 정희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박 태준은 기지를 발휘해서 “아 그럼 대일 청구권 자금을 대신 투입하면 어떻겠습니까?”라는 제안을 했고, 대통령은 “오, 기막힌 생각이군. OK!” 했다.

그래서 결과만 따지고 보면 포항제철은 원래 농수산업 지원에나 사용할 돈, 그리고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보상금으로 주라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을 쓰윽 전용해서 만들어졌다. 훗날 포항제철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뒤에도 저런 사람들을 딱히 만나 주지도 챙겨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논란거리가 되었으며,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포항제철은 왜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 블랙기업 악덕기업이어서? 설립자 박 태준이 친일적폐 싸이코패스 악마여서?
아니었다. 박 태준은 그런 인륜이나 도덕이 없는 사람이 아니며, 오히려 위인전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훌륭하고 청렴한 기업인이었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야 된다면서 회사 주식을 한 주도 갖지 않고 물러났을 정도로.

더구나 그는 그 유명한 우향우 정신의 창안자였다. “이 제철소는 우리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만드는 거다. 이 돈은 절대로 부정하게나 헛되이 쓰여서는 안 된다. 실패하면 우리 다같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뛰어내려서 죽어서 속죄하자” 이랬던 분이다.

포항제철은 그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졌다. 1973년 6월 9일은 포항제철 제1고로에서 최초의 쇳물이 쏟아져나온 날이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6월 9일을 ‘철의 날’이라고 기리고 있다. 당일부터 바로 기린 건 아니고 생각보다 늦은 2000년부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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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얼마나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지를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 1978년, 중국의 덩 샤오핑이 일본에 가서 우리도 제철소를 만들고 싶다고 자문을 구하자 일본의 신일본 제철 회장(이나야마 요시히로)은 “님 나라에는 박 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니 여느 공장 정도는 지어도 제철소까지는 무리일 겁니다” 이렇게 뼈 있는 말을 남겼다.
  • 그리고 박 태준은.. 한국에 제철소는 택도 없다는 부정적인 보고서를 작성해서 세계은행으로부터 자금 대출을 무산시켰던 영국의 존 자페(Jon Jaffe) 박사를 1986년에 런던에서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존 자페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17년 전의 판단에 대해 후회가 없으며, 지금 보고서를 다시 쓰라고 해도 똑같이 쓸 것이다. 겨우 그런 나라에서 대형 제철소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인 게 맞다. 다만, 한국에서는 박 태준이라는 상식을 한참 벗어나는 인물 때문에 나의 예상이 예외적으로 빗나가게 됐을 뿐이다” ㅡ,.ㅡ;;

백 선엽(미국에서 더 예우와 존경을 받는 만렙 원로 장성)이나 차 범근(축구 선수 시절..)처럼 국내보다도 외국에서 더 전설을 넘어 레전드 평판을 받는 거인이 일부 있는데, 박 태준 역시 이에 해당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사람이 정작 훗날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할머니 같은 사람을 상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일면 이해가 된다.

그는 우향우 운운하면서 피 같은 돈으로 혼신을 다해서 노력해서 제철소를 만들었다. 만약 실패하고 돈만 날려먹었다면 진짜로 이 한몸 바다에 빠져 죽어서라도 속죄할 의향이 있었지만, 이렇게 성공한 이상 그 자체만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이고 선조들 앞에서도 이제 지극히 떳떳하다.
그 이후로 포항제철이 더 성공한 것은 “기업 경영을 잘한 덕분”이지, 더는 무슨 부당한 돈이나 착취 덕분에 부정하게 성장한 게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된 와중에 포항제철이 또 누구 후손에게 사죄를 한다거나 무슨 보상을 해 준다거나 하면.. 포항제철을 처음 만들 때 들였던 피눈물 나는 노력의 의미에 흠집이 가고 그게 떳떳하지 못한 행적이 되는 것이리라. 그렇기 때문에 그는 추후 불거진 보상 드립은 가당치 않은 요구라고 여기고 무시했음이 틀림없다. 사회 환원은 학교도 세웠고 이 정도 사내복지 수준이면 이미 충분히 하지 않았느냐 말이다.

성경에서 약간 비슷한 예가 떠오른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반석에서 물을 내는 기적을 두 번 행했는데, 처음엔 반석을 쳤으며, 한참 나중에 두 번째엔 반석에게 말만 해야 했다. 그러나 모세는 끊임없이 불신하고 반역하는 미개한 백성들에게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두 번째에서도 별 생각 없이 예전처럼 반석을 쳤다. (민 20:10-11)

그래도 물이 콸콸 나오긴 했기 때문에 모세는 백성들 앞에서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모세의 이런 행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시 두 번 못 박는 것과 같은 영적으로 굉장한 중범죄로 간주되었다. (반석은 예수님의 예표) 이 자그마한 실수 때문에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처럼.. 한번 죽을힘을 다해서 선조들 내지 일제 시대 피해자에게 justify를 받았다면 두 번 또 받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반석의 영적 의미가 중요한 것만큼이나, 포철의 창업주 입장에서는 저런 관계와 의미가 왕창 중요하기 때문이다.

포항제철의 이런 사례를 다른 과거사 청산 문제에다가도 넓게 응용하면,
(1)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인 대통령(할배)과 법무부 장관(이 인)이 왜 건국 당시에 반민특위를 해체해야만 했을까 하는 의문,

(2) 그리고 친일파 반민족주의자라고 해도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직접 받았던 재산 이상으로, 걔네들이 정당하게 노력해서 재산을 불린 것까지도 다 몰수하는 게 법적으로 타당하나 하는 문제에다가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좌빨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애국자들을 앞뒤 경황 안 따지고 몽땅 다 친일적폐로 몰고 갈 것이다.

우리나라는 너무나 절망적이고 급박하던 상황에서 결국 일제 부역 군경이라도 동원해서 왜놈보다 더 나쁜 빨갱이들을 잡아야 했으며, 나라를 망조로 몰아넣을 지경이던 사채를 몽땅 정리하기 위해서 유신 헌법을 포함한 다른 극단적이고 비민주적인 조치를 취해야 했다. (애초에 군대라는 조직 자체가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굉장히 비민주적인 조직..)
그리고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다른 돈줄이 도저히 없으니 피묻은 돈도 좀 끌어다가 산업의 근간인 제철소를 만들게 됐다.

사람이 하는 일이 완벽할 수가 없고 당연히 헛점과 부작용이 있고 그에 따른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임기응변식 조치의 가성비와 효용성에 대해서 다각도로 입체적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는 있다. 무작정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부른 투정과 그 시절에 누구도 가능하지 않았던 선비질 잣대 역시 금물이다. 그건 옳지 않다.

프로그래머로서 본인이 드는 비유이지만, 마소만 해도 초창기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시절에 그렇게 온갖 독점과 지저분한 짓까지 감내하면서 경쟁자들을 제압하고 마르지 않는 탄탄한 밥줄--운영체제, 오피스--을 만들어 놨기 때문에.. 지금의 후임 사티야 나델라 때는 옛날과는 반대로 온갖 오픈소스 진영을 여유롭게 무료 지원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그와 비슷하게 우리나라에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 같은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명백히 칭송받아야 마땅한 애국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12/29 08:35 2019/12/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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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에 개최되었던 서울 올림픽은 운동 선수들만 잘 뛰어서 성공한 게 아니었다. 마스코트 호돌이와 주제가 "손에 손잡고" 같은 예술 감성 마케팅도 완벽했다.

개인적으로는 자국의 음악가 대신 일부러 외국인에게 주제가 작곡을 맡기고, 공연도 한국인이지만 외국에서 활동한 그룹에게 맡긴 것이 선견지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음악의 퀄리티가 더욱 올라갈 수 있었다. 고유 모델 자동차를 개발할 때도 첫 단추를 끼울 때 돈 아깝다는 생각을 접고 쿨하게 외국 일류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겼으며, 이름도 군사정권이나 북한스러운 시덥잖은 국뽕물 형태로 짓지 않고, 수출을 의식해서 '포니'라고 지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벤 존슨 선수의 약물 도핑을 잡아낸 기술력, 그리고 자체 개발한 통합 전산 시스템 같은 운영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정말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저력을 세계를 상대로 보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물론 이런 노하우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고, 자국의 전국체전, 그리고 86년 아시안게임이라는 베타테스트 기회가 먼저 있긴 했다.

오늘은 본인이 서울 올림픽 개막식 동영상을 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좀 열거하고자 한다. 어쩌다 보니 기계 이야기와 사람 이야기가 하나씩 모였는데, 일단 기계 이야기부터 먼저 늘어놓겠다.

1. 전산 시스템의 디지털 서체

본인이 예전부터 강조한 바와 같이, 1953년의 휴전 협정 문서는 한글이 기계식 타자기로 찍혀서 국제적인 역사 기록이 만들어진 거의 최초의 사례이다.
알파벳을 쓰는 서양에서는 학술 논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 중에 삐라 찌라시를 만들 때도 타자기를 써서 일을 아주 신속하게 진행했지만 동양은 아직.. 심지어 펜보다도 더 느리고 불편한 붓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 뒤,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 전광판에 떴던 자막은 한글이 디지털 컴퓨터의 화면에 표시되어 국제적인 역사 기록으로 남은.. 완전 최초까지는 아니어도 충분히 초창기 축에 드는 사례이지 싶다. 특히, 내부적으로 단순무식 그림이 아니라 진짜 문자로 처리되어서 출력된 것 말이다.
(화면은 모두 대한뉴스 유튜브 영상들 캡처해서 적당히 짜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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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 숫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획을 수평 수직 45도 대각선만으로 구성한 단순한 디자인이요, 확대 계단 현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투박한 비트맵이다. 좀 허한 느낌이 드는 ㅅㄷㅈ 같은 초성의 배치를 보면.. 조합 벌수가 그리 많지도 않은 구조로 보인다.

전광판 말고도 그 시절의 대한뉴스 동영상을 열람해 보면 기자나 운영자들이 자료 입력용으로 사용한 전산 시스템의 접속 화면을 볼 수 있다. 일명 GIONS인데.. 난 1980년대의 컴퓨터 프로그래밍 환경은 어떠했을까 아는 게 없으니 신기하기 그지없다. 저 때는 PC 환경에서는 온갖 한글 코드들이 난립하고 조합형이니 완성형이니 하면서 싸우던 때였다. 한글 카드라는 하드웨어(!!)가 있었으며 소프트웨어적으로 한글 입출력을 구현하는 건 고난도 프로그래밍 테크닉이었다.

개인이 단말기 용도로 쓰던 컴은 그냥 IBM XT급인지, 아니면 다 IBM 워크스테이션급인 건지, 16비트인지 32비트인지, x86인지 아닌지(아마 아닌 듯)... 같은 것 말이다. 더구나 GIONS는 그 이름도 유명한 코볼 언어로 작성됐을 거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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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면에서 쓰인 한글 폰트는 비교적 친숙하다. 글자가 전반적으로 홀쭉하고 영문· 숫자도 전각으로 표현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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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본인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은 이 화면이다. 이건 분명 모니터 화면인데 영문· 숫자는 반각으로 표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해상도이다. 화면용 폰트가 아니라 24픽셀급의 도트 프린터 인쇄용 폰트가 쓰였다.
그 시절에 텍스트 모드 화면에서 인쇄용 폰트를 볼 일은 PC 레벨에서는 없었을 텐데.. 이건 도대체 무슨 기기인지 궁금하다.

서울 올림픽의 통합 전산 관리 시스템(모든 경기들의 진행 상황 파악, 선수들 기록 등록, 기사 전송 등...)인 이 GIONS는 순수하게 국산 기술로 개발되었고 대회 중에 한 번도 오류 없이 성공적으로 잘 돌아갔다.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성공으로 이끈 숨은 일등공신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이 솔루션은 전혀 유지보수 되지 못한 채, 완벽하게 잊혀지고 사라져 버렸다. 심지어 후대의 올림픽 개최국 중에서 GIONS를 구매해서 도입하고 싶어하는 곳이 있었는데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때 한데 모였던 개발 인력은 각자 자기 먹고 살 길을 찾아 이직하고 흩어졌다. 이거 무슨 거북선도 아니고 뭐냐..

물론 지금이야 최신 웹과 DB 기술을 이용해서 그 정도 SI를 구축하는 것은 30년 전 그 시절만치 대단하고 거창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신기술이 아직 가치가 있던 시절에 그게 더 널리 쓰이지 못한 것은 애석한 노릇이다.

2. 고등학생들의 개회식 매스게임

올림픽의 개회· 폐회식 때는 주최국에서 준비한 온갖 화려 현란한 공연들이 펼쳐져서 흥을 돋우고 관객들에게 잔치 분위기를 내는 것이 관례이다. 서울 올림픽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건 주최국에서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이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아서 컨텐츠를 만든 뒤, 전공자 전문 무용수들이 대가를 받고 공연한다. 그런데 서울 올림픽의 경우, 거기에 덤으로 '동대문 상업 고등학교', '서울 여자 상업 고등학교' 이렇게 남녀 실업계 고등학교 두 곳에서 총 1100명이나 되는 2학년 학생들이 소집되어 매스게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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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처음에 전문 무용수들이 '태초의 빛'이라는 창세기 1장스러운 공연을 할 때는 들러리로 자리 채우는 역할만 했지만, 그 다음 '어서오세요' 편에서는 자기들이 직접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구르면서 88, WELCOME, 어서오세요, 오륜기 등등 글자 픽셀을 만들고 심지어 색깔띠(?)를 펼쳐서 펄럭이기까지 했다.

아예 체조 선수나 발레리나 같은 레오타드도 아니고 반쯤 운동 선수 같은 희고 짧은 복장에, 색깔띠는 저렇게 머리에 두르고 있는 게 무척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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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게임은 그 특성상 민주· 인권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잘 안 하고 사회· 공산주의 집단· 전체주의 똥군기스러운 곳에서 체제 선전과 단결력 과시(?)를 목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다. 가령, 북한의 아리랑 공연은 그야말로 HD급 해상도를 자랑하는-_- 카드섹션을 선보이는 걸로 유명하다. 그 대가로 침해되는 북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개인 시간과 건강, 학습권 따위는 아웃 오브 안중..

우리나라는 북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옛날엔 주변에서 선진 문물이랍시고 보고 배운 게 온통 일본물밖에 없고, 또 생존을 위해서라도 멸사봉공 군대 문화와 전체주의 분위기가 오랫동안 쩔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나 대기업 같은 데서 맛보기 수준의 매스게임은 종종 행해졌다. 당장 전국체전 때만 해도 운동부 애들의 운동 경기뿐만 아니라 여학생들 집단군무가 관행이었다는 것을 옛날 대한뉴스를 보면 알 수 있다.

군대는? 제식부터가 일종의 집단군무이다. 카드섹션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대신 무릎을 안 굽히고 걷는 거위걸음 행군이 있다.
그리고 국군의 날 기념 퍼레이드 연습이 통과의례였다. 퍼레이드에 선발된 부대의 일반 보병들이야 각 잡고 광낸 군장 메고 행군만 하겠지만 사관 생도나 특전사들은 뭔가 더 특별한 걸 보여줘야 하니 연습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이야 대규모 특별 행사를 5년마다 한 번씩 대통령이 취임한 해에만 하지만, 옛날 군사 정권 시절에는 그 짓을 여의도 광장과 서울 종로에서 매년 해야 했다.

자, 그런 와중에.. 서울 올림픽 개회식의 매스게임에 참여했었다는 익명의 서울여상 졸업생의 회고 인터뷰가 어째 딴지일보에 올라와 있어서 본인은 재미있게 읽었다. 참고로 딴지일보 기사도 무려 2004년작이니, 올림픽 당시와 지금의 중간 사이인 엄청난 옛날이다.;;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은 보셨나요?"라는 인터뷰 질문에서 세월의 격차를 느낄 수 있다.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 그 아이들은 1학년 2학기에 들어갔을 무렵부터 거의 1년을 연습했다고 한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연습날은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 내내 해 떨어질 때까지.. 이 때문에 수업 시간이 펑크난 건 방학을 줄여서 메워야 했다.
  • 자기 학교가 뜬금없이 개회식 매스게임에 참여하기로 결정된 것은 자기 반이 배틀로얄 시범 학급으로 지정된 과정과 다를 바 없다. 학생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그 시절엔 세계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냥 나라와 학교에서 시키면 애국이라는 명목으로 해야 했다. 까라면 까야 했다.
  • 두 학교가 같이 모여서 연습할 때는 연습 장소로 효창 운동장이 주로 쓰였다.
  • 세 번 정도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개막식 폐막식 총연습 리허설이 있었는데, 마지막 '최종' 리허설 때는 학부모들도 공식적으로 초청받았다고 한다.
  • 조금 씁쓸한 얘기이지만, 실업계고가 선택된 이유는 일반 인문계고에서는 애들 공부하는 데 방해 된다고 학부모들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랜다. (그 전의 86년 아시안게임 때의 선례)
  • 올림픽이 끝난 뒤에 모든 참가자들은 고생했다고, 수고 많았다면서 나중에 국가로부터 자그마한 기념 훈장쪼가리를 받았다.

그래도 강제 동원된 것치고는 저 클로즈업 영상에 나오는 학생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아 보인다.
개회식 이후에 폐회식 때는 또 다른 실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매스게임을 했다. 학교명은 공주농고, 해성여상이라고 뜨는데, 지금은 두 학교 모두 특성화 고등학교를 표방하며 이름이 바뀌어 있다. 지방에 있는 학교이면 이동하느라 연습하기가 더 어려웠을 것 같은데..

정말 88 올림픽을 소재로 영화 좀 나오는 게 없으려나 모르겠다. 운동 선수, 운영 인력 등 무엇 하나를 집어도 드라마틱한 소재는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참, '태초의 빛'을 지도한 이화여대 무용학과 교수는 성명이 어째 '유 관순' 열사랑 발음이 같다..; 일부러 노린 작명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진다.

서울 올림픽은 전세계 지구촌 축제를 표방하며 개최되었고, 실제로 그 목표를 어느 정도 이뤘다. 자유 진영과 공산권 국가들이 모두 참가해서 그 전의 모스크바· LA 올림픽의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북괴는 펜대 굴리며 곰곰이 계산을 해 보니.. 결국 자기 주민들에게 미칠 여파를 생각하면 안 되겠다 싶었는지 불참했다. 불참만 한 게 아니라 KAL858편 테러나 일으키면서 남한의 올림픽 개최를 방해하고 해코지나 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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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9/11/10 08:35 2019/11/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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