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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북아시아의 반도 자리에 위치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비록 분단과 전쟁 폐허라는 최악의 조건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1) 북괴의 물리적인 군사 위협과 (2) X꾸녕 찢어지던 가난 이 두 가지는 넘치도록 극복하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 원초적인 목표를 달성한 뒤의 후속 모델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했다.

건전한 국가관과 정체성을 후세에 전해 주지 못하고 말 같지도 않은, 진짜 지랄맞은, X같은 민주화만 빨아대다가 사상, 이념, 정체성 전쟁에서 적에게 완벽하게 패배해 버렸다. 자국 기업이나 군대보다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는 적이 더 좋다고 칭송할 정도로 정신 세계가 가히.. 통일뽕 망국 마약에 집단으로 중독되기라도 했는지 송두리째 타락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맨날 빈부격차 헬조선 헬조선 그러던 녀석들이 "이야 북한 주민들도 자가용 굴리고 스마트폰 쓰고 할 거 다 하네? 많이 변했네" 이 따위 말을 뚫린 입이라고 씨부리는 걸 보면, 정말 지능과 양심이 개 돼지 수준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북한 주민이 자가용과 스마트폰을 갖고 있을 정도이면 그럼 남조선 주민들은 전부 포르쉐 람보르기니 벤츠S 굴리고, 서울 강남에 80평짜리 아파트 갖고 있겠다.

일본 싫어하는 건 자유이지만, 일본 욕하는 잣대와 북괴 욕하는 잣대가 동일하지 않은 새X는 완전 밥맛이다. 내 앞에서 얼씬도 안 했으면 좋겠다.
삼성이고 최 순실이고 이명밝근혜고 뭐고 싫어하는 건 자유이지만,
걔네들의 대안이 북괴이고 통일(무슨 통일?)이고 김 정은이다? 이런 개새X는 내가 인간 취급을 하고 싶지 않다.

진짜 이러다가 TV에서 "인간 김 정은 -- 자애롭고 매너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땡전뉴스 시즌 2가 벌어질 것 같다.
전대갈 할배, 당신은 언론을 어설프게 장악했었지, 할려면 이렇게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치명적인 실수와 과오로 남을 것이다.

난 좌향좌는 근본적으로 삐딱한 잣대와 반골기질, 남 탓 불평 불만 피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극도로 혐오스럽다. 저건 특히 예수쟁이 기독인들이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태도라고 생각한다. 작은 악, 필요악에는 완전 바락바락 대들고 달려들면서 더 큰 악, 절대악에는 무한 관대한 것이 그들의 습성이다.

고런 돼먹지 못한, 마귀적인, 저주받은 심보를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은 아주 교묘하게 잘 이용한다. 특별히 한반도 남부에 서식하는 놈들을 '종북'이라고 부르지.. 주둥이로만, 아가리는 자기도 김돼지 싫어한다지만, 실제로는 김돼지가 정확하게 원하는 대로 여론을 형성하고 행동해 주는 입진보 좀비들이 이렇게 한 트럭씩 양산된다.
오늘날은 공산주의 사상이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 사악하고 비열하고 위험한 것이다.

반도가 지금 같은 속도로 좌경화와 적화가 계속되고 딱히 기적적인 이변--북폭 내지 쿠데타, 현 청와대 수장에 대한 탄핵/급사/암살 같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정말 극단적인 기적이나 기도 응답, 전국민의 회심이 없는 한 최악의 상황은 어느 정도 예고된 수순이다.

맨날 적화통일 적화통일 그러는데.. 그럼 이 나라가 좌좀 좌빨들이 원하는 대로 몽땅 이뤄지면 한반도에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가능한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미국이 남조선 수장의 못 말리는 북괴 사랑에 질린 나머지, 결국은 남한을 포기해 버린다. 미군이 몽땅 철수한다. 그럼 북남 고려 연방제 통일 선언과 동시에 옳다구나 하면서.. 남한도 곳곳마다 1946년 당시의 북한 내부처럼 인민 위원회가 설치될까?
북괴 공산군이 전국을 통제하고 장악할까? 몰래 몰래 뚫려 있던 땅굴을 통해 북한군이 옳다구나 우르르 쏟아져 나올까? 6· 25 전쟁 중에 북괴에 점령당했던 동네처럼 인민재판 숙청과 공산화 사상 교육이 시행될까? 베트남 보트피플과 캄보디아 킬링필드 시즌 2가 벌어질까?

나라 걱정하는 애국 보수들 중에서 북괴의 물리적인 대남 공작 능력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분들이 있다. 뭐, 북괴가 워낙 폐쇄적인 나라이고 안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본인은 그럴 가능성이 아예 0이라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본인 생각에 그건 확률이 낮으며, 적화통일이 되자마자 예측 가능한 단기간에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무슨 1950년대와 "같은" 급의 유혈 사태가 당장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첫째로, 새끼돼지가 설마 그 정도로 자기 정체를 금방 드러내고서 장렬하게 자폭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북괴는 다른 건 몰라도 자기 체제 명줄을 가늘고 길게 유지하는 노하우와 잔머리 하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갖췄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 왕조가 무너지고 구소련이 붕괴하는 등,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이 몰락하는 걸 보면서 자기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결의를 했다. 그러니 9·11 테러가 터져서 미국이 최고조로 빡쳤던 시절에는 천하의 반미 집단인 북괴조차도 미국을 편들면서 테러리스트들을 비판했었다.

쟤들은 과거의 일제나 나치 독일, 지금의 ISIL처럼 세계를 정복하겠답시고 강대국 연합국 앞에서 개기다가 장렬하게 자폭하는 짓 따위는 안 한다. 제일 만만한 바로 아래의 남조선 하나만 적화시키고 자기 체제를 영원무궁토록 보장받는 것 하나만으로 족하다. 다른 욕심은 '결코' 부리지 않는다.

더구나 핵 같은 걸 실제로 터뜨릴 가능성 역시 0에 한없이 수렴한다. 그걸 터뜨리는 건 미국으로 하여금 북폭 명분을 제공하는 짓이고, 돼지 도살 문서에 싸인을 하는 짓인데 북괴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다. 핵은 전적으로 남조선의 종북 세력들을 위시한 협박용일 뿐이다.

둘째, 옛날 같은 고전적인 혁명과 유혈 사태는 우리나라의 군사력 경제력이 훨씬 낙후하고 열악해서 북괴의 입장에서 별로 뽕 뽑을 게 없고, 국민 대다수가 그냥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에다 반공 정신 투철하고 북괴에 항거하려는(= 자유를 지키려는) 의지가 있을 때...
한 마디로 말해 엄청 옛날에나 필요했고 통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더구나 자기 나라보다 2배 가까이 더 많은 남조선 사람을, 넘사벽 급의 경제적 풍요와 민주 인권, 자유라는 걸 이미 경험해 버린 사람들을 놈들이 그딴 식으로 무식하게 통제할 수는 없다. 북괴는 통상적인 잣대로 남한보다 강하고 잘 사는 나라도 애초에 절대 아니다. 그럼 북괴는 남한에 대해서 장기적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3.
북괴는 정말 남한을 집어먹고 싶다면 자기부터 정상적인 경제력, 군사력을 키우고 국민 내지 주민을 잘 먹이고 건전하게 강하게 키우고 일본 같은 강대국 강소국이 되면 됐다. 정상적인 강국에 합병되는 것은 애초에 적화통일처럼 걱정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북괴는 처음엔 공산주의의 비효율성과 통치자 우상화 뻘짓 때문에 자연스럽게 국력을 말아먹고 몰락했으며, 1970년대 이후부터는 남한에 추월 당했다(그 밑의 인민들은 그 동안 자유가 없고 개인의 개성이 일체 허용되지 않는 생지옥 속에서 얼마나 피똥 싸는 고생을 해야 했을까!). 그나마 좀 정상적인 공산주의 지도자가 북한을 다스리고 있었다면 걔네들 역시 1990년대에 개방하든지 무너지든지 해서 이웃의 중국이나 소련과 비슷한 처지로 탈바꿈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북괴는 이제 와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체제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었다. 그건 지구의 자전이 하루아침에 끼익 멈추거나, 거대한 강철 코일을 싣고 폭주하던 트레일러가 급정거하는 것에 맞먹는 짓이다.
그러니 그들은 그 지경에서도 김돼지 체제만을 유지하고 주민은 더욱 옥죄고 바보 병신 노예를 만드는 외곬만을 고집했다. 시퍼렇게 자기보다 훨씬 잘 사는 남한의 존재가 북괴 수뇌부의 입장에서는 정말 눈엣가시 그 자체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남적화를 절대로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남한의 하드웨어를 이길 수 없으면 소프트웨어부터 병신으로 만드는 공작을 시작했다.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다들 보는 바와 같다. 우리민족끼리 통일뽕 거짓 평화 공세와 함께 온갖 역사왜곡과 정체성 부정, 자국 비하들.. 그리고 이제 승산이 없는 재래식 군대 대신에 핵과 미사일과 잠수함에 목숨을 걸기 시작했다. 뭐, 어차피 남한이 먼저 쳐들어올 일은 절~대 없으니 재래식 병력은 사실 신경 꺼도 된다.

이런 전략이 대성공을 거둔 덕분에 미개한 남조선 인민들은 자국의 존재를 전혀 감사하지 않고, 반대로 북괴를 적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됐다. 북괴의 과거 도발을 언급하고 북괴의 위험에 대해 경고하는 행동은 그냥 닥치고 안보 장사꾼, 반민족 반통일  수구꼴통 적폐 세력, 일베충, 홍갱이 정신병자들의 발악 정도로 치부되게 됐다.
5~6년 전에 북 내부에서 얼굴 표적지 그려 놓고 총 갈기는 대상이던 남측 주요 인사들은.. 이제 남측에서 이미 알아서 전부 잡아들여서 구속시켜 놨다. 전직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김 관진 전 국방부 장관까지도. 이 얼마나 기특하냐?

북괴의 입장에서 자기 체제의 존속에 매우 위협이 되던 남조선이 자발적으로 자기 밑으로 기어들어왔다. 남조선 인민들 대다수가 오로지 통일 한 마디에 뿅 반해서 돼지새끼가 좋아서 미칠 지경이다. 그럼 북의 입장에서 봐도 남조선 애들을 예전 같은 정도로 살인적인 폭압과 통제로 기선제압을 할 필요 없으며, 우상화 선군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 최소한 지금 당장은 말이다.

제아무리 남북 교류 협력을 한다고 해서 깡촌에서 노예로 사는 북한 흙수저 주민들에게 바깥 소식이나 물질적인 혜택이 돌아갈 일은 없다. 애초에 지금 남과 북이 왕래하지 못하는 이유가 남한은 간첩 이적질을 막기 위해서이고 북측은 바깥 소식과 진실이 주민들 귀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서인데 그런 일이 성사될 리가 없다.

그 대신 북괴는 아주 가늘고 길게 지속적으로 남한의 부와 경제력을 세금이니, 통일 대비니 하는 명목으로 계속해서 삥뜯을 것이고 그 강도는 갈수록 더해질 것이다. 생업 현장에서 연구과 개발, 설계란 걸 안 해 보고 시위 데모질과 파괴밖에 안 해 본 빨갱이들이 머리는 좋은 덕분에 사회 각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사회 시스템을 다 말아먹고, 그 과정에서 남한의 품격과 국가 경쟁력은 곤두박질치고, 갈수록 물가 오르고 일자리 없어지고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지고, 옛날만치 수입 외제 물품을 펑펑 못 쓰고..

쉽게 말해 지금은 그냥 남한만 차근차근 "경제" 무장 해제당하는 단계다. 제일 먼저 "사상" 무장은 이미 진작에 다 해제돼서 흔적도 안 남았고.
핵 만들었던 비용, 이미 다 만든 뒤에 시설 해체하는 비용, 핵 포기하는 대신에 받는 보상과 지원.. 전~부 다 우리 국고에서 나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을 제일 큰 두려움에 빠뜨리고 걔들이 지금 같은 구제불능 우상화 독재 폐쇄 꼴통으로 전락한 주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미국을 등에 업고 넘사벽급으로 잘살게 된 남한의 존재 그 자체였다.
그러니 남한을 일단 그리스 베네수엘라처럼 만들어 놓고, 미국까지 손 떼게 만든 뒤에야 북괴의 입장에서는 더 다루기 쉬울 것이고, 그 뒤에야 더 강한 다음 적화 플랜이 나올 것이다.

북괴의 핵무기나 땅굴이나 무슨 선전용 차력쑈에 나오는 인간 흉기(?) 공작원 따위가 아니라, 바로 저렇게 야금야금 나라 말아먹는 일련의 삥뜯기 짓거리야말로 우리가 지금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적화 징조이다. 성경의 창세기 끝부분에 나오는 파라오의 꿈을 생각해 보시라. 이것이 북괴와의 불의한 연합이 야기할 미래의 우리 모습이 될 것이다.

"... 빈약하고 심히 못생기고 야윈 다른 암소(북괴) 일곱 마리가 올라왔는데 그같이 나쁜 것들은 이집트 온 땅에서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
그 야위고 못생긴 암소들이 처음의 살진 암소(남한) 일곱 마리를 먹었으며 그것들이 그것들을 먹었으나 그것들을 먹었는지 알 수 없었고 그것들이 여전히 처음과 같이 못생겼더라." (창 41:19-21)


통일은 짧고 굵게 잠시 희생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쳐들어가서 북진멸공 통일을 할 게 아니라면, 그냥 완전히 가만히 있고 북괴에 어떤 지원도 하지 않고, 도발과 헛짓도 절대 못 하게 꽉 조여매서 견디다 못해 스스로 개방하거나 붕괴하게만 만드는 게 우리에게 최소 비용 최대 효과인 방법이다. 그것 말고 다른 수작들은 전부 불순 사악한 바보짓 삽질 뻘짓이다.

제정신 박힌 북진 멸공 통일을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 지역 회복 뒷수습 통일 비용 때문에 경제가 왕창 휘청거리고 전국민이 부담 떠안고 대대로 허리띠 졸라맬 각오를 해야 된다.
그런데 하물며 북괴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통일을 하면 국부 등골 브레이킹이 이거 뭐.. 추정 불가다.

4.
빨갱이들이 접수한 남한은 이제..

(1) 미국· 일본과의 동맹은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갈 것이다.

(2) 대기업들의 부정부패 비리 갑질이 없는 대신, 공무원 관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부패 비리 갑질이 시작될 것이며, 기업이 제공하던 국제 경쟁력과 국부도 함께 영원히 빠이빠이.
삼성이고 현대고 다 못 버티고 망하거나 외국으로 뜨고, 경제가 몰락하여 베트남처럼 될 것이고 심하면 그리스나 베네수엘라처럼 파산할 수 있다.

(3) 정치는 중국 같은 정도의 사회주의 1당 독재 체제로 바뀔 것이다. 지금까지 나라를 뒤흔들 정도로 악성 유언비어들을 실어나르면서 오남용과 악용의 막장 극치를 달리던 포털 댓글 같은 표현의 자유는.. 이제 적화 완료와 함께 토사구팽 용도폐기된다.

(4) 교회도 신자들을 몽땅 수용소로 쳐넣을 필요조차 없이 생명력을 잃은 상태이니.. 단기적으로는 그냥 혼자 조용히만 다니지 거리설교는 금지를 먹이는 선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도 어떤 형태로든 예전 같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어지는 건 변함없다.

부동산 같은 건 누구 말마따나 전면 국유화될 것이며, 이때의 독재와 사상 통제에 비하면 197, 80년대의 군사정권 독재는.. 정말 애들 장난도 아니어 보일 것이다. 사실, 지금의 중국만 해도 우리나라의 군사 독재 시절보다 억압과 통제가 더 심한 건데 여기에 대해서는 군사 정권 욕해대는 친중 종북 패거리들이 절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사에서 태극기라든가 대한민국의 역사는 부정적인 면만 존나 부각되면서 철저히 부정되고 지워지고 잊혀질 것이다. 1948년에 잠깐 임시정부의 후예를 사칭하면서 세워지긴 했지만 부패한 친일파와 미 제국주의자의 결탁으로 말미암아 뿌리부터 글러 쳐먹은 괴뢰 정권일 뿐이었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통일 전쟁이 벌어졌지만, 쳐죽일 미 제국주의자 학살자들 때문에 통일 시도가 안타깝게 좌절됐다고 가르쳐질 것이다.

경제력 덕분에 좀 더 오래 존속하긴 했지만 끝내는 민중 촛불 혁명의 힘으로 수뇌부가 끌어내려졌으며, 만들어진 지 70여 년 만에 결국은 위대한 우리민족 백두혈통 조선에 흡수 합병되어 사라졌다고 반면교사로 가르쳐질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냐고? 지금도 이미 이렇게 가르치는 미친놈들이 쌔고 넘치는걸? 이런 놈들을 아무도 강단에서 끌어내리지도, 잡아 가두지도 못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정황을 종합했을 때, 적화통일 이후에 당장 심각한 유혈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한국의 미래는 최대한 잘 돼 봤자 중국, 베트남, 필리핀, 그리스, 베네수엘라로 귀착된다. 20세기 후반에 반짝 빛났던 남한의 리즈 시절 같은 건 아련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를 보호하던 모든 것들을 잃고, 머리털 밀리고 눈알 뽑힌 삼손 신세처럼 되고, 쫄쫄 굶으면서 그저 오늘 내일 생존을 위해 급급하는 노예가 된 뒤에야 일부 시민들이 뒤늦게 현실을 깨달을 무렵에는.. 그때에야 본격적으로 일제 말기 때처럼 신사 참배, 아니 돼지 참배 강요와 강제 수용소 로동교화 등등이 시작될 것이다.
김 정은에 환호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성경의 교리와 예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적그리스도를 맞이하고 환호하는 대환란기 유대인의 모습과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하다. 내가 보기엔 말이다.

이제 평양으로 수학여행 떠나고 시베리아까지 열차 타고 갈 날만 남았네요 ^_^
지금 서민들 살기 어려운 건 그냥 이명밝근혜가 싸질러 놓은 똥 때문인 거고.


논리 회로가 이렇게 형성된 저능아 빠가들이 한둘이 아니니, 뭐.. 이제 브레이크 고장난 열차가 열나게 폭주하다가 절벽 아래로 운지하는 일만 남았다. 난 정말 통일의 통 짜만 나와도 이제 진절머리가 나고 울화가 치민다.

국군이 평양 시내에 진출하여 태극기 꽂고 김돼지 부자를 생포하거나 혹은 자살한 시신을 수습하는 통일은.. 정말 0.01% 이내의 기적이 없는 한 실현 가능성이 없어졌다.
2차 세계대전 연합군이 직접 나치 수용소를 점령해서 수용자들을 구출하듯이, 국군과 북한 내부 저항 세력이 같이 정치범 수용소의 문을 따고 들어가 수감자들을 구출하는 시나리오도 현재로서는 가망이 0에 한없이 수렴하게 됐다.

쪽박 신세로 일회용 정치쑈 명목으로 평양 수학여행이나 쳐 떠나는 게 평화인지,
가끔 사고 터지고 무력 도발도 벌어지지만 남쪽에서라도 기업이 잘 돌아가고 고용이 안정되고 넘사벽급의 의료 위생, 외국 문물들 누리면서 살던 게 평화인지는 앞으로 그리 멀지 않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북괴의 대남적화 음모를 안 믿는 사람이 무슨 놈의 프리메이슨, 예수회, NASA, 백신 회사 음모 따위를 믿는지.. 나로서는 그저 코웃음을 칠 뿐이다.
부디 민족적인 회개와 함께 6·25 낙동강 전투와 인천 상륙 작전 시절과 같은 제2의 기적이 있기만을 바래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24 08:35 2018/07/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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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 중근 의사의 아들의 변절

일제 시대 얘기부터 먼저 꺼내도록 하겠다.
안 중근 의사는 주변의 일본인들까지 감화시킨 영웅이요 위인으로 칭송받는 반면, 그의 아들 (중 하나) 안 준생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차별 대우와 감시, 극심한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훗날 '변절'했다. 그래서 1939년엔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을 찾아가서 자기 부친의 죄(?)를 '사죄'까지 해서 한 자리 얻었다.
그 정도로 오글거리는 변절까지는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아직은 기록을 통해 정식으로 입증되지 못한 소수설이다.

옛날엔 마라토너 손 기정조차도 금메달 따고 나서 라디오 인터뷰에서는 "저 건너편의 일장기를 보면서 힘을 냈습니다" 이런 말을 외압에 의해 억지로 해야 했다. 그리고 청취자들은 당연히 "저런 개소리는 일제의 프로파간다일 뿐, 당사자가 진심으로 한 말이 절대 아니지"라고 그러려니 하고 보정을 하며 들었다.

또한, 윤 봉길 의사가 폭탄 의거를 벌였을 때, 동아일보 등 당시의 국내 언론들은 이를 비판하는 보도를 보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란다. 그건 그 신문사들이 악질 친일매국 언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땐 형식적으로라도 그렇게 해야만 조선 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고 신문이 출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손 기정 일장기 삭제 같은 사건이야말로 아주 예외적이고 특이한 돌발 이벤트일 뿐이었다. 그런 반항이 매일같이 벌어지고 걸렸다간 아무리 문화 통치 시기라고 해도 조선인이 경영하는 언론 같은 건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외압에 의해 어쩔 수 없는 면모까지 "감안"하더라도 안 준생의 변절은 명백히 도를 넘었고 자발적인 면모가 있었다.

이 사실을 접하고 빡친 백범 김 구는.. 배운 것, 할 줄 아는 게 테러· 암살밖에 없다 보니 역시나 저 호부견자를 암살하라고 사주를 했다. 심지어 중국 정부를 상대로도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옛날에(1922) 자기에게 밉보이고 공금 횡령 의혹이 있던 독립 운동가 김 립을 자객을 보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의혹은 입증된 게 없으며, 이건 그냥 치하포 사건 같은 김 구의 흑역사로 쉬쉬되는 중)

제아무리 안 중근이 위인이면 뭐하나? 그 사람은 1910년에 죽었지만 안 준생은 1907년생. 철 들고 보니 조선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고 이미 일제 식민지가 돼 있었으며, 얼굴을 직접 본 기억도 없는 죽은 친부 때문에 당장 얼마나 고생하면서 지내는데?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 심정이 이해가 된다.

윤 봉길 의사는 자기 아들이 저렇게 되지 말라고.. 폭탄 던지러 가기 전에 유언장을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라는 제목으로 써 놓은 것이지 싶다. 물론 훙커우 공원 폭탄 의거는 안 준생의 공개적인 변절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긴 하다만 말이다.

2. 임시정부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 이런 문구를 읽어보면 정말 비장함이 느껴진다.
의열단, 임시정부.. 이런 곳에 소속된 항일 무장 투쟁 독립투사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난 오늘만 산다" 같은 심정으로 평소에 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잘 놀면서(?) 지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건 영화에서나 비쳐지는 멋있는 모습일 뿐,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 보급과 돈줄이 필요하며, 이를 담당할 행정과 정치가 필요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절대로 마냥 깨끗하고 깔끔하게만 돌아가지 않았다. 정치질과 파벌 싸움, 삽질과 병크가 만만찮았다. 임시정부 시절에는 독립 운동가들의 사상조차 제대로 통합이 안 돼 있었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팀웍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임시정부 요원들이 무능한 사람, 백해무익 나쁜놈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한계에다가 평균 이상의 민족주의 애국심만 가미된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너무 완전무결 거룩하고 성스러워서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할 빌미가 될 정도로 환상의 영역에 있을 정도는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오죽했으면, 신흥 무관 학교 세우고 가산을 몽땅 탕진하면서 독립운동 한 이 회영 육형제 같은 엄청난 사람이 행적에 비해 별 주목을 못 받은 이유도.. 임시정부와 협력하지 않고 아나키즘 성향의(그렇다고 사회 공산주의 빨갱이 성향도 아니고) 노선을 갔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저분한 추태에 학을 뗐기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이다.

3. 진짜 임시정부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 듯

그리고.. 어떤 사람들 논리대로 그렇게도 김 구가 좋고, 임시정부 광복군만 죽어라고 빨아대고 싶으면 하다못해 임시정부를 직접적으로 도와줬던 장 제스를 치켜세워야지? 대륙이 아니라 대만이랑 친하게 지내자고 굽신거려야 하지 않는가?

마오 쩌둥은 6· 25 때 자유 통일을 저지한 원흉일 뿐이다. 걔가 일제 시대 때 임시정부를 도와 주고 우리나라 독립에 기여한 게 도대체 뭐가 있냐?
뭐 굳이 잘한 거, 우리 입장에서 일말의 고마운 게 있다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등으로 뻘짓 열심히 한 덕분에 어부지리로 한국이 경제 개발하고 세계에 물건 수출할 기회를 줬다는 것 정도?

걔네들의 역사관 잣대로 보더라도 좌좀은 일관성이 맞는 게 없다.
특히 희대의 병신짓으로 인민을 그렇게도 많이 굶겨 죽인 지도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치켜세우고 있는 주제에, 뭐 보도연맹이니 국민방위군 씨부리는 거 정말 가증스럽다.

올림픽을 계기로 남과 북이 진짜 화해를 하고 싶다고?
평창까지 온 김에 북한 관계자들이 이 승복 기념관부터나 찾아갔어야지.

통일을 하고 싶다고?
그 전에 개방부터나 조금씩 하고 검열 없는 편지 왕래, 전화, 여행부터나 허용해야지.

이 개돼지들이 일제 위안부나 강제 징용 문제에 바득바득 매달리는 것의 절반이나 1/10만치라도 북한과 중국에다가도 요구하고 과거사 청산하자고 화해하자고 사람들이 일관성을 보였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이념적으로 이렇게 위험해지고 반목 갈등할 일이 없을 것이고
성장과 분배라든가 순수하게 진짜로 좌우 균형이 필요한 분야만 여당 야당이 견제 주고받으며 정치를 하고, 평범한 부정부패 비리 척결만 하면 됐을 것이다.

4. 일제의 전격 항복은 우리 입장에서도 다행이었음

1945년 8월, 일제가 원폭을 맞고 덴노가 부랴부랴 나서서 무조건 항복했다. 이로써 태평양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됐다.
전쟁이 일찍 끝난 덕분에 일단 가장 먼저 미군· 연합군의 희생을 줄일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계획하고 있었던 정신나간 전국민 옥쇄 결사항전, 그리고 "죽어도 같이 죽자" 식으로 재일 동포 내지 투옥돼 있던 조선 애국지사 독립운동가들 몽땅 학살 같은 끔찍한 발악 계획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여러 번 언급했었지만 외솔 최 현배 박사만 해도 자기가 1945년 8월 18일에 총살 예정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또한, 조선어 학회 사건 당시에 압수 당해서 서울 역 창고에 처박혀 있던 '큰사전' 원고도 정말 기적적으로 되찾을 수 있었다.
일제가 더 오래 버텼고 자기가 저지른 악행의 증거를 은폐 말살할 시간이 충분했다면 저 원고도 과연 무사할 수 있었을까?

허겁지겁 도망가기에 바빴으니까 일제에 의한 최후의 조선인 민간인 학살 사건도 우키시마 호 폭침 의혹 정도로 그쳤지.. 전쟁이 더 오래 갔으면 한반도 본토까지 무슨 꼴 났을지 알 수 없다.

이 와중에 "우리 대한 광복군이 선전포고도 하고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서 일본군 몽땅 몰아내고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는데 미국놈들이 원폭을 터뜨려서 조선이 전승국이 될 기회를 뺏어 버렸다는!!" 이건.;;
그냥 "한국어가 너무 복잡미묘 오묘해서 영어로 번역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노벨 문학상을 못 받는다"와 동급이라고 생각하자. =_=;;;; 완전 망상일 뿐이다.

그 시절에 우리 민족이 객관적으로 도대체 뭐가 잘났고 무슨 능력이 있었던가? 1910년대에 러시아 식민지가 되지 않고 일제 식민지가 된 거, 그리고 1940년대에 몽땅 소련 공산주의 위성국이 되지 않고 반반이라도 나뉜 것을 일말의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북괴도 자기 체제의 존속이 위협받는 날이 온다면, 북한 주민이건 남한 국민이건 누구든지 인질로 잡고서, 과거의 일제와 정확하게 동일한 방식으로 최후의 발악을 할 거라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염두에 둬야 한다. 평양이 폭격을 받기 전에 일단 수용소에 있는 죄수들부터 몽땅 학살당할 것이다. 그리고 인질이 많아질수록 북괴 체제의 존속에 더 유리해질 것이다.

5. 오로지 통일만 외치지만, 무슨 통일인지는 절대 얘기 안 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50년 8~9월 사이..
우리나라가 저기(+울릉도, 제주도 정도?) 빼고 몽땅 북괴에게 점령당했던 적이 있었다.
북괴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500km를 잡고, 매일 10km씩 진군하면 거의 50일 뒤인 8월 15일이라는 뜻깊은(?) 날짜에 맞춰서 적화통일 혁명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너무 덥고 장마철까지 낀 시기에 무리하게 전쟁을 벌였다.

놈의 흉계는 비록 다행히 이뤄지지 않았지만, 1950년 8월 15일은 6· 25 사변 전체를 통틀어 남한이 영토를 제일 많이 빼앗겼고(낙동강 마지노 선!!) 제일 위험에 빠졌던 때였다. 상황 돌파를 위해 인천 상륙 작전 같은 특단의 조치가 괜히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허나, 이 그림을 보고 "저때 통일이 됐어야 하는데 미군이 훼방 놓는 바람에..." 라고 생각하거나 돌려 말하는 놈들이 있다.
아니면, 분위기상 차마 저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개새끼들이 그 대신 맨날 씨부리는 말이 국군이 못한 거, 이 승만 정부가 시행착오 저지르고 허둥대다 대처 잘못한 거, 미군이 민간인을 오인해서 죽인 것들이다.

이 승만 욕을 억만 번쯤 하면 김 일성이 착한 군자로 바뀔까? 병신 빠가사리 같으니라고. 그냥, 원숭이가 억만 년쯤 새끼를 계속 치다 보면 후손들의 유전자가 바뀌어서 사람으로 스스로 진화할 거라고 믿어라.
북괴가 죽인 민간인은 국군· 미군이 죽인 민간인 수에서 0이 한두 개쯤 더 붙을 텐데..

일단 일이 터져 버렸을 때 정부가 너무 허둥대고 대처를 잘못한 게 있긴 했다. 하지만 이 승만은 예방에 일가견이 있었다. 처음부터 강경책을 견지하면서 "북괴는 반드시 전쟁을 벌일 것이기 때문에 미국도 안일하게 군대 철수하지 말고 우리 군에게 지원 더 해 줘야 된다" 이런 고집스러운 말을 미국이 듣고 이행했으면 전쟁이 애초에 안 나거나 피해를 더욱 최소화할 수도 있었다. 이건 왜 계산에 넣지 않는가?

그리고 결정타가 하나 더 있다.
임시정부를 그렇게도 좋아하는 좌빨들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이라면서?
(글쎄, 이스라엘에서도 1948년이 건국이 아니라 밸포어 선언이 발표된 1917년이라든가, 시온주의자들이 처음으로 나라 세우자고 결의했을 때를 건국일이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만..)

1940년대에는 정부가 국민을 못 지켜 준 정도를 넘어서 자국민이 일본놈들한테 왕창 착취당하고 남의 전쟁에 강제 징집되고 성노예로 끌려갔었다. 그럼 그에 대해서는 무려 '건국'까지 해 놓으신 우리 정부는 책임이 없냐? 한강다리나 보도연맹보다는 훨씬 더 많이 욕해야 할 사항 같은걸?

6. 통일 반대 외세 배후설?

그리고 통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와 관련하여 먼 옛날에 본인도 순진하던 시절에는 진지하게 믿었다가 이제 다시 생각해 보니 굉장히 말이 안 되고 황당하게 들리는 괴담이 하나 있다.
바로, 일본이 한국의 남북 통일을 바라지 않고 훼방 놓고 이간질 한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통일이란, 완전 개방이나 흡수, 멸공 같은 올바른 방식의 통일을 말한다. 연방제나 적화 따위가 아니므로 오해 말 것)

응? 도대체.. 왜?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면 그건 말이 된다.
친미 성향의 자유 진영 국가가 압록강 두만강 코앞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건 중국의 입장에서는 고까운 일이다.
그래서 걔들은 북괴 자체는 하나도 예쁠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알음알음 지원해 주고 탈북자를 잡아서 북송도 시켜 주고 북괴 체제 존속을 지금 이 순간에도 도와주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지리적으로 위험해질 것 없다.
남북이 합쳐져서 자신을 위협하는 강국이 될까봐 통일을 싫어한다는 논리인데.. 꿈 깨라. 그럴 일은 단언하건대 없다.

최대한 바람직한 방식으로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통일을 하더라도 통일 한국은 전후 피해 복구와 비슷한 상황이 된다. 무슨 경쟁력 있는 기업간의 합병 같은 게 절대 아니다.
이상한 데 세뇌되고 자본주의 경제관 없고 영양실조에 마약 중독까지 돼 있는 다수의 북한 주민들의 생산성이 도대체 얼마가 될 거라고 보는가? 북괴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싸질러 놓은 똥을 만만하게 봤다간 큰코다친다.

통일은 동족 동포인 거기 주민들에게 자유와 인간다운 삶을 선사하기 위해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하는 거지, 경제 논리 관점에서는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엔 득 될 것 없다. 상당한 수준의 세금 폭등과 경제력 하락을 감수해야 된다.
일본이 남의 나라의 통일에 배 놔라 감 놔라 할 처지는 아닐 뿐만 아니라 통일은 일본의 국가 경쟁력에 하등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물며 연방제나 적화 통일은 경쟁국 남한이 완전히 쫄딱 망하고 거지 되는 통일인데..
그놈의 "철천지원수 일본"의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천지에 무엇이 있겠나? 뇌와 양심이 있으면 생각을 해 봐라!

우리나라가 친일 청산을 못 해서 이 꼴이라는 개소리만큼이나, "통일 반대 외세 배후설"도 알고 보면 정말 지능이 의심되는 수준의 아무말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제2 연평해전이나 천안함 폭침 배후에 일본 미국이 있겠다 그럼? 그 나라들은 사람 마인드 컨트롤이 가능한 신이구만.

사실, 이런 거 저런 거 따지면 통일은 반도에 영어 공용화가 불가능한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공산주의자들이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속이는 대상이 보통은 지상락원 "능력껏 벌어서 필요껏 쓰는 세상" 같은 경제 분야인데, 이 미개한 반도 땅에서는 적화통일도 그런 지상락원 통일로 위장되어서 프로파간다가 추가돼 있다.

하이튼 좌좀 종북좌빨은 말이 필요없고 산업화가 안 되면 내전 불사하고라도 쓸어버려야 된다. 그놈들과 이 나라가 같이 사이 좋게 공존 발전할 수가 없다. 배의 노를 젓는 사람과 배에 몰래 구멍을 뚫는 놈, 배의 벽면을 몰래 뜯어서 자기 보트를 만드는 놈들이 한 배를 같이 탈 수는 없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반역을 정당화해 주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뒤바꾸고, 절대악을 놔두고 필요악만 정죄하고, 사람 취급을 해서는 안 되는 놈들을 너무 관대하게 취급한 바람에 이제 나라가 근간이 위태로운 지경이 됐다.
그 어떤 민주 인권 정부라도 마약사범과 빨갱이는 함정 수사, 유죄 추정 등 더욱 악랄한 필요악 방법을 동원해서 잡아낸다. 그렇게 안 하면 사회 체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옛날 역사 용어들은 북괴를 어떻게든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 한편으로 놈들의 본질과 정체를 드러내기 위해서 용어를 아주 세심하게 잘 만든 편이다. '북한 공산 괴뢰 집단'처럼 말이다.
4· 3과 광주는 '사태'이며, 4· 19는 의거이다. 5· 16은 혁명이고 6· 25는 사변이다. 본인은 옛날 용어를 지지한다. 왜 고리타분한 옛날이냐고? 북괴가 참 고리타분하게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본질이 바뀐 게 전무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09 08:31 2018/07/0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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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강의 성수대교는 지금이야 빨강 도색의 8차선 교량이지만 20세기에는 하늘색 도색의 4차선 교량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일 당일 아침에 상판 하나가 그냥 뚝 무너져서 아래로 떨어지는 초유의 붕괴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똑같이 상판과 함께 밑으로 떨어진 피해자라도 추락 타이밍이 어떤지에 따라 운명이 너무, 완전히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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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경들이 타고 있던 소형 승합차는 상판과 같이 거의 동시에 꽤 자연스럽게(?) 떨어진 덕분에 전경들 전원이 착지 타이밍 때 경상 정도밖에 입지 않았고 전원 무사했다. 심지어 외관상 차량의 손상도 별로 없었다.
아무리 같이 떨어졌다고 해도 차량 자세만 전방으로 유지됐을 뿐 엄연히 자유낙하이고, 엘리베이터가 수십 미터 높이에서 줄 끊어져서 추락한 것과 동일한데.. 그래도 차의 모든 타이어, 서스펜션, 시트 등이 충격을 고르게 흡수해 준 덕분에 탑승자들이 살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2) 그 반면, 같이 나란히 추락했던 옆의 승용차는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강물로 돌진해서 침수됐다.
다른 어떤 승용차는 상판의 붕괴 직후에 다리에서 수직으로 추락해서 물에 빠졌다. 이건 차량 전방의 엔진룸이 수면 아래를 바라보는 자세이니 일종의 정면충돌 교통사고와 같은 양상이 됐다. 차량과 탑승자가 온전할 수 없었다.

(3) 최악의 경우는 잘 알다시피 16번(오늘날 145번의 전신?) 시내버스였다. 붕괴 부위와 다리 쪽으로 반반씩 걸쳐 있다가 결국은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울면서 전복된 채로.. 천장이 아래를 향하는 자세로 추락해 버렸다.
차량은 가히 성냥갑처럼 구겨졌고, 승객 대부분이 저 높이에서 머리 부분부터 땅에 부딪혔으니 몰살을 면치 못했다. 전체 사망자 32명 중 2/3인가 3/4가 이 버스 승객이었다.

이것 때문에 성수대교 붕괴가 더욱 비극적인 참사가 되었다. 훗날 2010년 7월, 인천대교 마티즈 김 여사 사고 때도 공항 리무진 버스가 뒤집힌 채로 다리 아래로 추락해서 승객이 12명이나 사망한 것이 위의 사고 형태를 재현했다.
이렇게 차량들의 추락 타이밍이 엇갈리는 편인데.. 그래도 다리 아래의 수심이 얕아서 상판이 침수되지 않고 마치 섬처럼 육지를 만든 것, 그리고 차량과 차량끼리 부딪쳤거나 심지어 저 시내버스가 아래의 다른 차량 위로 떨어졌다거나 하지는 않은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성수대교보다 더 옛날 1986년 1월,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가 폭발했을 때에도 승무원들은 그 폭발과 화재에 휘말려서 공중에서 전원 즉사한 게 아니었다. 승무원 탑승 구역은 그 와중에도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들은 성층권에 진입한 15km에 달하는 높이에서 거의 2분 30초 동안 자유 낙하하다 해수면에 부딪힘으로써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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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냐고? "이 아줌마 콧구멍에서 반점이 나왔어..."는 아니고, 일부 승무원(2명? 3명?)이 착용한 헬멧에서 비상용 산소 마스크가 사용된 정황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장이 뛰는데, 시퍼렇게 산 채로" 우주선의 잔해와 함께 지상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었다..;;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물이라 해도 그냥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거나 별 차이 없는 지경이었다. 엄청나게 크고 아름다운 낙하산 같은 게 아닌 이상, 그 어떤 어설픈 보호 장비로도 이들의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
다만, 아까 성수대교처럼 어지간한 한강 다리 높이에서 사람이 뛰어내리면 추락 자체의 충격보다는 그냥 "입수 후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로 인한 기절 + 익사"의 수순으로 죽는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고 있을 때는 이론적으로는 바닥에 누운 채로 한 손은 이마를, 한 손은 뒤통수를 받치고 있는 게 제일 안전하다. 만원 엘리베이터에서 누울 공간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게 현실적인 문제이긴 하겠지만... 추락 순간에 점프 같은 건 가능하지 않으며, 그러다 더 다치니 시도도 하지 말 것.

Posted by 사무엘

2018/06/15 08:36 2018/06/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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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공 시절

우리나라 헌정 체제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본인이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로 다룬 적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인 할배가 집권했던 최초의 1공화국 시절은.. 지금으로서는 뭐랄까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질감이 심하다. 대체역사물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나라이다. 태극기, 한국어, 한글만 없다면 말이다.

이때 대통령은 생전에 군대의 근처에도 안 가 본 문돌이였고 군사 정권도 분명 아니었지만, 가난한 여건에다 극렬 반공 트렌드 때문에 나라가 막 자유롭다고는 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 지금과 같은 화폐 단위가 도입되고 마지막으로 화폐 개혁을 한 게 1962년,
  • 군대에 상병과 병장 계급이 추가된 게 1962년,
  • 공문서에서 서기 연호만 쓰기 시작한 게 1962년(더 옛날의 이 승만 시절 관보나 대한뉴스, 각종 법조문에서는 4천 몇백 년 하면서 단기 연호가 나온다~!)
  • 마지막으로 탈영병을 사면해 준 게 1963년
  • 부산이 전국 최초의 직할시로 승격된 게 1963년
  • 국가 차원에서 독립 유공자를 본격적으로 발굴해서 훈장을 추서한 게 1962년...

당장 떠오른 예만 나열해도 이 정도이니 지금의 우리나라 기틀이 상당수 다져진 건 확실히 박통 때부터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저나, 대통령 관저의 이름이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뀐 건 박통보다 미묘하게 전인 윤 보선 때 1961년..)

해방 이후 1962년 이전에 우리나라는 6· 25 전쟁을 전후한 1950년 8월과 1953년 2월에 화폐 개혁을 시행했다. 1950년이야.. 개전 직후 서울이 털리고 한국 은행에 보관돼 있던 현찰 뭉치들이 괴뢰군에게 통째로 노획돼 버렸기 때문에 그 돈은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무효화하고 유통을 금지시켜야 했다. 수능 문제지가 시험 전날에 외부로 유출된 것과 얼추 비슷한 상황이다. 새로 만든 돈은 부득이 일본에서 인쇄해서 수입해 와야 했다.

그 뒤 1953년의 화폐 개혁은 단위도 '환'으로 바뀌어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용도로 쓰이다가, 훗날 1962년에 단위가 또 바뀌어 지금의 '원'이 정착했다. 개드립을 좀 치자면, 환에서 원으로 '환원'됐다.

할배 각하는 기본적으로야 크리스천이었지만, 자기 치적에 대한 자랑질도 했다. 남산과 탑골공원에 크고 아름다운 자기 동상을 세우고, 남한산성 근처 도로를 닦고는 자기 호를 따서 '우남로'라는 이름을 붙였다(지금은 헌릉로와 합쳐져서 없어짐). 1957년부터 하야 직전의 60년까지는 황금연휴 부근도 아닌 대통령 탄신일(3월 26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 승만은 양력 기준 1875년 5월 1일생인데, 이 날짜가 그 당시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었던 것이다. 임시 공휴일은 그냥 일관되게 매년 양력 3월 26일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할배는 생일을 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환' 지폐에다 한복 차림의 자기 초상화를 집어넣었다(100, 500환). 처음엔 정중앙에다 집어넣었는데 지갑에 돈을 넣을 때 자기 얼굴이 접힌다는 걸 발견하고는 한쪽 끝으로 위치도 옮겼다. (그런데 소리만 '환'이지, 이때도 한자 표기는 여전히 '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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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지폐가 온통 조선 시대 '이씨' 인물만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는 비판이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먼 옛날에 대한민국 인물, 그것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인물을 집어넣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셈이다. 전무후무 1공 시절에 말이다. 지폐에다 자기 얼굴을 떡 집어넣는 건, 나중에 군인 출신 대통령도 하지 않은 짓인걸.. 반쯤은 자기 자발적인 지시이고, 반은 부하들이 알아서 아부질 하는 걸 본인도 듣기 싫지는 않고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지 싶다.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에 대한 관념도 아직 드물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제1공화국 시절엔 남한 땅에서 미국처럼 서머타임(일광 시간 절약)이 시행되기도 했다. 미국이 단위 체계와 전압처럼 세계 규격과 달리 혼자 따로 노는 관행 중 하나인데.. 1960년대 박통 때부터는 폐지됐다. 그 서머 타임은 훗날 서울 올림픽을 하던 시절에 또 잠깐 부활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부터는 다시 영구 봉인됐다.

2. 부산 잔혹사

우리나라 광역시들 중 대전은 공항이 없고(대전 대신 청주에..), 울산은 지하철이 없다.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대전은 포항· 울산 같은 네임드급 공장이 없는 대신(산업단지 자체가 없는 건 아님. 대덕구 대화동에..), 정부 청사와 각종 과학 연구소들이 있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1공화국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에 특정 지역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아이템을 하나 더 늘어놓아 보겠다.

부산은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 노면전차가 다닌 세 도시 중 하나이다.
6· 25 때 북괴에 점령당하거나 대판 전투가 치러진 이력이 없고, 오히려 안전한 최후방인 덕분에 임시 수도 본진 역할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부산은 전쟁과 지진이 없는 대신, 피난민 목조 판잣집들이 밀집해 있던 와중에 화재 참화를 여러 번 겪었다.

1953년 1월 30일엔 영화로도 나왔던 국제시장에서 대화재가 나서 수천 채에 달하는 상가와 판짓집들이 다 타 버렸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또 벌어졌던 화재들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약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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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27일, 전쟁이 끝난 지 정확히 3개월 뒤엔 또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시내 중심부로까지 번져서 부산 역, 방송국, 신문사까지 몽땅 불에 탔다. 이 때문에 부산 역이 철거되고, 오리지널 부산 역보다 1km 남짓 북쪽에 있던 초량 역이 지금의 부산 역 역할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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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10일과 26일에는 또 두 차례 대형 화재가 용두산 언덕 일대를 덮쳤다. 판잣집들 피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엔 휴전 뒤에도 귀차니즘에 입각하여 서울로 아직 안 옮기고 부산의 모 창고에 보관해 놓고 있던 조선시대 어진과 유물, 문화재들 수천 점이 소실돼 버렸다.
국제시장, 부산역, 용두산 등등.. 다 비슷비슷한 지역이다. 열악한 닭장 같은 곳에서 살다 불 한번 나면 이렇게 작살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다가 5년 뒤에 1959년에는 땅, 불 다음으로 바람과 물 차례였다(이젠 '마음'만 남았나?-_-). 14호 태풍 사라 때문에 일대가 또 박살이 났으니, 1950년대에 부산은 제2의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살기가 참 잔혹한 곳이었지 싶다.
그때 태풍 이름에다가 왜 뜬금없이 '호'를 붙여서 배 이름처럼 '사라호', '사라 호'라고 불렀는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3. 1960년, 1980년의 올림픽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의 공통점 뭐 이런 괴담이 나돌았고, 또 1840년부터 1960년까지 20의 배수 년도에 당선됐던 대통령은 제 명에 못 살고 병사· 암살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일명 '테쿰세의 저주' 괴담이 나돌곤 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서의 역사는 아주 짧으며 정치가 아닌 스포츠 분야이긴 하다만, 20의 배수 년도에 참가했던 올림픽이 좀 뭔가 특이했다.

우리나라는 그 가난하고 열악했던 1948년 런던 올림픽 첫 참가 때, 그리고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1952년도 올림픽에서도 복싱과 역도에서 메달을 따 오곤 했다. 그런데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현재까지 전무후무하게 메달을 단 하나도 못 따는 부진을 보였다. 이 때문에 올림픽 선수단 대표이던 손 기정 단장은 삭발을 하고 귀국했다.

1960년대에는 국제 대회에 선수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스포츠 행정 체계가 굉장히 미개하고 막장이었던 듯하다. 밥그릇 싸움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때문에 뉴스 기사를 찾아보면 손 기정은 1966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도 선수단 단장이었는데, 이때는 나름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뭔가 심하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삭발 귀국을 단행했던 듯하다.

게다가 로마 다음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나름 가까운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수들을 파견한 것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성적은 꽤 부진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하에 박 정희 정권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스포츠 단체들을 통합하고 태릉 선수촌도 만들면서 엘리트 체육의 육성에 힘썼다.

지금 괴수들이 우글거리고 한국인 코치가 세계 곳곳에 활동하는 지경이 된 양궁조차도 처음부터 지금 같은 인프라가 갖춰진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나라가 건국 이후 최초로 메달을 딴 분야는 역도와 복싱이지 양궁이 아니지 않던가??

뭐, 1960년대는 그렇다 치고 그로부터 20년 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짐작하다시피 우리나라가 애초에 보이콧을 해 버리고 참가를 안 했기 때문에 메달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산권 국가인 중국조차도 참가를 안 했다는 게 흥미롭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해서 반드시 친소 성향은 아니니까..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만,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여자 양궁의 초창기 멤버이던 김 진호 선수가 커리어에서 큰 손해를 봐야 했다.
2000년대부터는 1960, 1980 같은 굴곡이나 이변이 아마 더는 없을 것이다.

4. 국민투표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라 하면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어떤 대표자를 뽑는 선거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국가적으로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 투표를 통해 yes/no를 묻는 제도도 있다(우리나라 헌법 제72조). 이를 '국민투표'라고 한다. 마치 논문이라고 해서 학위 청구용 졸업 논문만 있는 게 아니라 학술지 논문도 있고 발표 논문도 있듯이, 투표란 것도 그렇게 성격에 따른 구분이 있는 것 같다.

보통은 이런 의사 결정을 국민이 아닌 의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게 돼 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직접 묻는 예외적인 제도도 대통령이 자기 재량껏 시행할 수 있다. 투표 결과가 대통령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나왔다면 이건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 되니 의회도 어찌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국민투표는 보통은 헌법을 고쳐야 할 때 시행되곤 했으며, 투표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곤 했다. 이 승만 때는 시행된 적이 없고 1960년대의 군사 정권 시절이 원조이다. 우리나라는 1987년 10월, 제6공화국 수립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시행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북괴의 붕괴와 흡수 통일과 같은 급의 이변이 없는 한, 현 헌정 체제에서는 앞으로도 할 일이 없는 게 좋을 것이다.

5.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 계엄과 긴급명령

자고로 대통령은 왕이 아닌 관계로, 자기 멋대로 기분대로 "짐이 곧 법이다" 식으로 통치할 수 없다. 특히 무엇보다도 혼자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자기 자식에게 권좌를 슬쩍 넘겨줄 수도 없다. 현대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라는 지위와 예우는 동일하지만, 권한의 행사 범위는 법의 통제를 받으며, 전근대 시절의 왕에 비해 큰 제약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전쟁을 포함한 굉장히 긴박하고 불가피한 상황일 때 예외적으로 일시적으로 법과 권한, 의회의 동의 같은 절차를 씹어먹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 정도는 이미 법에 보장돼 있다.
대표적인 예는 계엄이다. 계엄은 나라 사정을 준전시 상태로 만들어서 바싹 긴장시키고, 국민의 기본 자유와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국 이래로 1948년 여순 반란(여수· 순천 일대)과 4· 3 사건(제주도)을 시작으로 제일 최근에는 1979년의 부마 항쟁(부산· 경남)과 10· 26 사건 때 계엄이 내려졌으며, 전땅크의 쿠데타의 정점인 1980년 5월 17일 내란 때 또 계엄이 내려진 것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두 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었다.
뭐, 4· 19 혁명(의거), 5. 16 쿠데타(군사 혁명), 10월 유신 같은 크리티컬한 이벤트 때는 제주도까지 포함한 전국에 계엄크리가 떨어지기도 했었다.

계엄 다음으로 현행 헌법 제76조에 의거한 '긴급명령'이란 게 있다. 이건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총 16번이 내려졌는데, 그 중 13회가 6· 25 전쟁 기간 중에 내려졌다. 전시의 마지막 명령인 제13호는 19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 지시였다.
대부분의 역대 긴급명령들은 관련법이 따로 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내려진 긴급명령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빵 터뜨려 실시한 김 영삼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박 정희는 긴급명령을 제3공의 말기에 단 한 번밖에 내리지 않았으며(제15호, 1972. 8. 2.), 이것도 계엄과는 달리 정치 분야는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양반이 특별히 고안해서 1974년부터 75년, 4공 유신 시절에 1년 반 남짓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남발했던 더 강한 특별 명령은 바로 '긴급조치'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로 시작하는 게 제1호였고, 제9호가 가장 길었다. 이전의 긴급조치를 해제한다는 명령도 별도의 긴급조치 호수로 올라가곤 했다.

대부분의 긴급조치들은 사실상 빨갱이들, 데모질 하는 애들을 잡아서 벌 준다는 협박이었지만, 딱 하나 제3호만은 민생과 관련된 다소 생뚱맞은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박통이 암살당하고 헌법이 업데이트 되면서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투표 내력, 개헌 내력처럼 계엄과 긴급명령(/조치) 내력도 살펴보는 게 재미있다. 이런 게 사회 공부의 묘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3 08:36 2017/12/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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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초에 일본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 산업화 근대화를 이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까지 함으로써 일단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급의 강대국이라는 인증까지 해냈다.
얘들은 제국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는 (1) 대륙으로 진출하는 위치가 좋고 (2) 덩치가 적당히 작아서 만만하고, 또 (3) 정치 경제 군사가 모두 개막장을 달리고 있어서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편해 보이는 조선을 먹어서 일본으로 편입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옛날에 더 멀리 떨어져 있던 섬나라인 류쿠를 일본이 먹었듯이 말이다. 일명 '정한론'이다.

얘들은 단순히 군사력만 키운 게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타 강대국들과도 외교 로비를 벌이면서 정말 치밀하게 노력했다.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 안에서 한일협약(내정간섭), 을사조약(외교권), 정미7조약(군대 해산) 등등이 벌어지는 동안 밖에서는 일본이 뭘 했는지를 말이다.

* 제2차 영일 동맹 (1905) 일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 일부 ... 을사조약의 전신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말 것을 요구하는 정도로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타당한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 미국은 필리핀, 그리고 일본은 조선... 이렇게 각각 식민지를 나눠 갖고 서로 터치 안 하는 구도가 형성됐었다. 이렇게 입을 다 맞춰 놨는데 헤이그 밀사가 뒤늦게 나서 봤자 짜고 치는 고스톱 하에서 호소가 씨알이나 먹혔겠는가?
미국도 그때는 일본과 이미 먼저 맺은 약속이 있어서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를 방조 묵인했다. 이런 식민지 분배 중재를 잘한 공로로 어떤 미국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 and 간극)

* 카이로 선언(1943) 요지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으로 하여금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이래로 폭력으로 약탈한 일체의 지역에서(만주, 태평양 섬들 등등) 철수하고 해당 지역을 원래 국가에 반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렇게 역사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까지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헤이그 밀사가 허무하게 실패한 이후로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때는 연합국 승전국으로서 대접 받았고, 반대로 한반도의 독립 운동이라는 건 무력 노선이든 외교 노선이든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고 아무도 안 알아 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답으로 흘러갔다.
이런 시류 속에서 세워진 국제 연맹이라는 조직은 조선의 독립에는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세대가 교체돼 버리면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카이로 선언이라는 게 우리 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는 크게 두 가지 면모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아이러니하게도 영일 동맹의 당사자이던 영국,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이던 미국이 이 선언문에서는 3대국의 구성원으로 언급되었다. (나머지 마지막 하나는 중국;;) 조선의 독립에 대해 전혀 아오안이던 그 강대국들이 드디어 일제의 국제적인 악행을 인지하고 반대급부로 대한 독립을 승인하는 주역으로 바뀐 것이다.

둘째, 더구나 카이로 선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벌인 침략 행위에 대한 저지와 원상복귀, 단죄였다. 다시 말하지만 1차 대전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범국은커녕 연합국 전승국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합방은 1차 대전보다 미묘하게 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조선은 계속해서 일제의 합법적인 식민지 멀티 기지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열강은 한반도를 예외적으로 추가로 일제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고 이를 명문화까지 하게 된 것이다. 아아..

이런 역사가 있기까지 이 승만 같은 <Japan Inside Out> + 외교 노선과, 의열단 임시정부 같은 무장항쟁 노선이 모두 기여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Japan Inside Out은 1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한국인이 쓴 책 중에 북미권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 1위이고, 아직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물론, 인쇄된 책 말고도 지식과 정보, 소식을 얻을 통로가 왕창 많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책 판매 부수를 그 시절의 책 판매와 수평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태평양 건너려면 여객선 타고 몇 주를 기다려야 했던 그 시절에 저 정도의 책을 영어로 직통으로 저술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일본의 내막을 폭로한다고 해서 무슨 찌라시성 음모론 제기라든가, 일부 사회 음지에서 벌어지는 조선인 학살 인권 유린 이런 수준이 아니다. 아예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결국 일본은 미국도 침략할 거라고 예측해서 적중까지 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실체도 잘 알고 있는 사상 건전한 사람이니, 미국에서 고집쟁이 정치병 영감쟁이가 아닌 외교 정치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한국 독립도 덤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정치 성향에 따라 외교나 무력 노선 중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노선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성만 따지자면 둘 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고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무모한 삽질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승만조차도 그 교통 통신 불편하던 시절에 국제 정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는 국제 연맹에다가 젠틀하게 조선 독립을 호소했으며, 일제로부터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니들 통치를 받겠다고까지 요청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무시뿐이었다. (참고로, 이 승만의 저 탄원에 대해서도 좋게 말하면 오해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아주 쌩 헛소리 중상모략이 엄청 많이 나도는 중임..)
무장 투쟁 쪽도 뭐.. 언제까지 이렇게 젊은 투사들 희생시켜서 일제 요인들 암살하는 짓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런 발버둥과 발악이 쌓이고 쌓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는 민족성이 다르고 일본과 싸잡아 전범국 취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일제가 정말 나쁘고 쟤들이 정말로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국제 여론과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방향 제시 없이 미국이 핵만 터뜨려 준다고 조선이 독립 가능한 거 아니었다!

일본은 무슨 마약 먹었는지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지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는 처참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다 거덜나게 생겼지만 걔네들은 더욱 광기로 치달아서 전국민 옥쇄에 정신력 운운하며 난리를 쳤다. "귀축영미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서 온갖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가 같이 죽자!"
주요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다 항복한 와중에도 일본은 끝까지 gg를 치지 않고 버텼다.

미국도 처음에는 치사하게 진주만 폭격을 벌인 일본을 상대로 그저 적개심과 증오심만 표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쟤들은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돼 있고 무슨 약을 빨고 저렇게 날뛰는지 황당해하고 신기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포츠담 선언에서는 지난번 카이로 선언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곱게 항복하고 식민지들 반환하고 전쟁만 끝내라. 우리는 너희가 항복하더라도 너희가 원래 갖고 있던 영토 주권 같은 건 결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다시 friendly warning을 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선언 내용을 '묵살'로 대응했으며, 그 결과 1945년 8월에 핵폭탄을 맞고 말았다. 그것도 두 방이나 맞은 뒤에야 덴노가 번쩍 정신을 차렸으며, 전쟁에 미쳐 폭주하는 군부를 그대로 놔 뒀다가는 나라가 정말로 멸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덴노로서는 이례적으로 자기 육성을 방송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도 자기 잘못은 절대로 직접 시인하지 않고 일본의 높으신 분들 특유의 돌려 말하기 스타일로 아주 간접적으로 항복을 표현했다. "적들이 무시무시한 폭탄을 터뜨린 와중에 전쟁에 휘말려 고생하는 백성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쟁을 이쯤에서 끝낼까 하노라"..;;; 아이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다.

그런데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자국 덴노의 항복에도 동의할 수 없어서 '궁성사건'이나 '마츠에 소요' 같은 병맛스러운 항복 반대 쿠데타 및 항전 시도가 있었으며, 저 동남아 밀림에서는 자국의 항복을 믿지 않고 몇십 년째 혼자 군인 행세를 하고 다닌 소수의 미친놈도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항복함으로써 혹시 덴노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거나(전범 재판에 회부), 덴노 제도 자체가 강제로 폐지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승전국인 미국 역시 이를 의식하고 쇼와 덴노 자체를 전범으로 기소하지는 않았다. 단지 맥아더 장군의 주도 하에 인간 선언을 시키고 덴노의 신적 권위를 불식시켰을 뿐이다. 만악의 근원이었던 신선놀음 하나만 중단시켰다.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않은 덴노 제도를 훗날 옴진리교가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은 참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본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개겼으면 올림픽 작전, 몰락 작전 이런 게 몽땅 실행되었을 것이고 미국으로도 모자라서 소련까지 합세해서 일본 본토를 조졌을 것이다. 일본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거나 최악의 경우 지도에서 지워졌을 것이고, 한반도가 아니라 쟤들이 분단되고 여러 점령국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졌을 것이다. 다만, 한반도는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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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나온 사진 두 장을 이렇게 대조해 보는 건 굉장히 흥미롭다.
인간이 아니라 신인 덴노가 감히 자기 목소리로 방송을 한 것만으로도(옥음방송, 무조건 항복) 일본 황국신민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었는데, 하물며 맥아더가 1945년 9월, "천황이라는 작자도 한낱 인간일 뿐이고 내 갑빠와 포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냐!" 요런 사진을 의도적으로 찍은 뒤 이걸 일본 언론를 통해 일부러 내보냈다.

저 모습을 본 일부 일본인들은 멘붕에 자살을 하고, 또 더러는 이제 맥아더를 신성시하면서 집에 신사를 만들고 경배(?)하기도 했다. 딱 행 14:11-15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일본이 근대화 산업화는 동양에서 일찍 해냈어도 각 개인의 정신 세계는 딱 그러했다.

지금이야 일본은 국민성이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선진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공중도덕 매너 쪽으로 굉장히 철두철미해서 남에게 민폐· 피해를 끼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들이 불과 몇십 년 전엔 무슨 약을 잘못 먹어서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웃 나라에 온갖 민폐와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일본 사정은 그렇고..
그로부터 5년 남짓 뒤인 1950년 6월 말, 일본에 있다가 북괴의 남침 소식을 듣고 황급히 김포 비행장으로 달려온 맥아더는 씅만 리 할배하고는 저렇게 같이 얼싸안고 좋아서 난리가 났다. 히로히토하고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참고로 남조선은 일본 정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35년이나 받았으며, 미국 덕분에 해방된 지 그 당시 5년 남짓밖에 안 됐던.. 그야말로 한 주먹 쨉도 안 되는 듣보잡 약소국이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성깔이 장난 아닌 완벽주의자였고 미국 안에서 같은 백인들끼리도 대인 관계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포즈가 나올 수 있었을까?
맥아더와 할배 모두 천재에 과격파.. 하지만 사상은 지극히 건전하고 올바름.. 딱 내 취향 내 스타일이다. 존경스럽다.

물론 반대편에 있었던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정말 최악의 막장만 골라서 가면서 썩고 곪은 사례이다. 북괴가 그렇게 극단으로 치달은 것에는 그 아래의 남조선의 존재(그리고 동맹인 미국)로 인한 두려움과 부담도 분명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북 대결이 없었고 아예 남조선이 6· 25 전쟁에서 져서 처음부터 전체 적화가 돼 버렸다면 오히려 북한이 지금의 북한 같은 흉악한 괴물이 되지는 않았고 1990년대에 무너지고 개방하고 변화가 생겼을 수는 있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러나 저것도 언제까지나 가정일 뿐이고, 설령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녀서 누가 강간죄를 저질렀다면 그럼 여자 잘못인가? 은행에 돈이 많이 보관돼 있어서 은행 강도가 침입했다가 붙잡혔으면 그럼 돈을 많이 넣고 다닌 은행 잘못인가? 그거랑 완전 똑같은 논리이지 않은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북괴는 8월 종파 사건과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막나가는 미친 나라였고, 6· 25 이전부터 월남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이 전국민 옥쇄 운운하며 발악을 했던 것이 지금으로서는 북괴의 말로에 대한 좋은 예표이지 싶다. 쟤들 역시 절~대로 곱게 멸망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핵을 터뜨리고 반인륜 범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을 다 죽이고, 주민들을 인질 삼아서 별 미친 짓을 다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서 김씨 부자의 세뇌를 지우는 일은 어쩌면 일본 국민에게서 덴노에 대한 신격화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일본 대신 '북괴 정권', 한국민 대신 '북한 주민'이라고 바꿔서 카이로 선언의 북괴 타겟 버전이 국제적으로 발효되고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이행됐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주민들이 저렇게 도탄에 빠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도 어떤 전쟁이냐, 평화도 어떤 평화인지를 따지면서 옳고 그름을 논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8 08:35 2017/10/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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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모다테 2017/10/28 18:51 # M/D Reply Permalink

    철덕 입장에서 봐도 그당시 일본이 미친놈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당시 일본이 증기기관차로 시속 200km급 고속철도를 계획했다는 겁니다.

    1. 사무엘 2017/10/28 19:38 # M/D Permalink

      영국과 미국에서는 시속 200km급 증기 기관차를 개발해서 여객용으로 운용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어림도 없었겠지요. 궤간도 겨우 협궤인 주제에..
      또한, 고속 증기 기관차라면 양반이지, 일본은 1940년대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자기네 여건에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습니다. 정신세계에 똘끼가 참 넘쳤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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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손 양원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손꼽히는 의인· 위인이요 순교자이다. 단순히 자기가 믿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행실도 정말 훌륭했고(남을 위해 헌신, 봉사..) 크리스천으로서 남에게 큰 귀감이 됐던 분이다.
이분들의 생전 "주요" 행적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됐고(각각 평양 경찰서 구속, 사랑의 원자탄 등등..), 이 글에서는 이분들의 순교 당시 배경에 대해서만 추가적으로 생각을 좀 해 보았다.

1. 손 양원

6· 25 사변 발발 당시에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은 똑같이 남부 지방이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영남은 나라 사정이 제일 위급했던 1950년 9월 무렵에도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 칠곡, 영천 정도가 마지노 선이었고 거기보다 더 동남쪽은 그나마 북괴에게 함락· 점령당한 적이 없다. 6월 26일 새벽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도 거둔 덕분에 거기는 더욱 빨갱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은 전지역이 북괴에게 점령당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의 동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지만 서남쪽에는 중국이 있으니 이는 지리적으로, 군사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손 양원 목사는 부산보다도 위도가 더 낮은 최남단 후방인 여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들에 의해 순교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일제 말기의 신사 참배 때보다도 6· 25 전쟁 중에 더 많았다.
신사 참배는 오히려 교단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굴복했기 때문에 더 적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교회들이 빨갱이들 앞에서는 호락호락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게 되면 적어도 크리스천 한정으로 반공 교육은 저절로 덤으로 이뤄지게 된다.

손 양원 목사가 여수에서 순교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겨우 사흘 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데 이게 뭘 기념해서 정해진 날짜인지 아는가? 38선 돌파 북진을 기념한 거다.
그때는 인천 상륙 작전이 이제 막 성공해서 북괴 공산군이 급 후퇴를 시작했으며 9월 28일은 1차 서울 수복일이기도 했다!

UN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획기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고, 결국 낙동강 전선의 전면돌파가 아니라 적군의 중간 보급로를 차단하는 특공대의 투입을 떠올리게 됐다.
인천은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악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갯벌 뻘밭은 배로도, 차량으로도 다닐 수 없고 알보병들이 아무 엄폐물도 없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최악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평택, 군산, 심지어 남포나 동해상의 항구 도시도 같이 고려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남포는 평양과 매우 가까운 만큼 위험성이 너무 커서 배제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비록 당장 상륙 난이도는 더 낮을지 몰라도 내륙에서 곧장 북괴의 보급로를 끊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 보급로란 곧 경부선 철도를 의미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이 당첨됐다. 일단 상륙에만 성공하면 인천 시내 시가전 정도만 거친 뒤 곧장 서울에 도달할 수 있고, 서울을 먹으면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의 장악도 금방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평택과 더불어 한반도 전체에서 서쪽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가장 깊게 파인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상륙 작전의 추진과 성공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우리나라는 기사회생했다. 이 와중에 손 목사도 며칠만 더 버텼으면 살았을 텐데 인간적인 면에서는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국어학자인 최 현배 박사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 중에 1945년 8월 18일 처형 예정이었는데.. 사흘 일찍 아주 갑작스럽게 광복이 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손 목사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안 그래도 그 전의 여순 반란 사건 때 아들을 잃었는데 전쟁 때는 당사자가 희생되어 정말 고난과 순교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 주 기철 + 주 영진

1944년 주 목사의 죽음에 대해, 당시 주 목사와 가까이에서 수감되었던 안 이숙 여사는 일제가 주 목사를 약물을 주입해서 살해한 거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마치 윤 동주 시인의 죽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해당 주장 외에 다른 교차검증 가능 요소가 없고, 또 그렇잖아도 고문 때문에 몸이 극도로 망가져 있던 사람을 일제가 일부러 교묘하게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에서는 의구심이 든다. 더구나 그 당시 일제는 주 목사를 다 죽여 놓고는 면피를 위해서 오히려 보석 명목으로 풀어 주려 했는데, 오 정모 사모가 이 꼼수를 눈치채고 보석을 거부했었다.

윤 동주야 옥중에서 고문 당한 것 없고 건강한 상태로 멀쩡히 수감돼 있었는데, 이상한 주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점점 쇠약해지고 이내 죽고 말았다. 이건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여러 증언이 일치하며, 그 주사 맞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윤 동주는 반도도 아닌 일본 본토의 형무소에서 수감됐었다. 그러니 윤 동주는 생체실험 약물 주사로 인한 사망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반면, 주 기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여겨진다.

주 목사를 다룬 이전 글에서 본인이 이미 지적했듯, 주 목사는 재판 받고 형을 정식으로 선고받은 기결수가 아니었다. 윤 동주는 말할 것도 없고 유 관순, 최 현배 같은 분들과도 사정이 다르다. 그냥 경찰이 제멋대로 "너 이 셰끼 왜 신사참배 안 해?" 식으로 주 목사를 불법 구금하고 괴롭힌 것에 가깝다.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가 있을 곳은 교도소는 절대 아니고 기껏 유치장 내지 구치소(정식으로 기소라도 했을 경우) 레벨밖에 안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을 몇 년 씩이나(마지막 4차던가 5차 검속 기준) 가둬 놓는 건 말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구속 기간은 법적으로 180일로 정해져 있고, 그때까지 기소할 껀덕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피의자를 풀어 줘야 한다.

한 마디로 주 목사는 기독교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관점에서도 꽤 불법 막장 절차에 의해 구속당했던 것이다. 지금 박 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언제는 태블릿이고 뭐고 증거가 넘쳐난다더니, 그 긴 기간 동안에 혐의 하나 입증을 못 하고 구속 기간만 억지로 질질 연장해서 가둬 놓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의 법 체계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게 잘 적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가 엄밀한 구분 없이 그냥 '형무소'라는 시설 하나로 뒤죽박죽 통합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주 목사가 법적으로 기결수였는지 미결수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었다. (☞ 평양 형무소 관련 자료)

끝으로 주 목사의 장남인 주 영진 장로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목회자의 길, 그것도 평범한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가다가 끝내 순교했다.

일제의 박해가 끝나나 싶었는데 평양은 잘 알다시피 북괴 공산당의 소굴이 되었다. 이분은 뜻을 품고서 아예 월남하지도 않고 고난을 자처했으며, 거기서 종교인 반동분자로 단단히 찍혀 있다가 6· 25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이미 잡혀가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관련 자료) 본인은 저분도 순교했다는 것까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예 월남하지도 않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5 19:34 2017/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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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원자력 발전소가 처음으로 지어지고 가동된 건 고리 원자력 발전소로, 박통 말기인 1970년대 말이다. 그게 법적 설계 수명이 다 된지라 이제 가동 중단과 해체 단계에 진입해 있다.

원자력 발전의 건설과 운영은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난 과업이며,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결코 아니다. 박통 이전에 할배 대통령부터가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저게 이렇게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반도에서 나라를 먹여 살릴 기적의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자기 조국의 숙적 원수요 전쟁 미치광이였던 일본을 단번에 거꾸러뜨리고 항복시킨(결과적으로 대한민국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 준!!) 무시무시한 폭탄이 바로 원자폭탄이지 않던가? 그러니 원자력을 보는 할배의 눈빛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할배 대통령은 그 열악한 전쟁 폐허 여건에서도 서울대에 원자력 공학과를 신설할 것을 지시하고, 미국을 설득해서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했으며 원자력 연구원의 전신인 원자력 연구소(1959)를 만들었다. 박통이 70년대에 KIST와 국방 과학 연구소(ADD)를 만들었으나, 할배는 그보다도 전에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점을 밑줄 치고 외우시길 바란다.

그리고 국비 장학 유학 제도를 통해 원자력 공학 공돌이 전문가들을 양성했다. 외화 한 푼이 아까울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에도 교육을 위해서는 저렇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전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박통 때 이 땅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될 수 있었다. 핵무기나 만들어서 북괴처럼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깽판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원자력 기술을 도입했다.

본인은 원자력 발전의 적극 찬성론자이다. 화석 연료는 산림 황폐화를 예방해 주고, 원자력 에너지는 화석 연료의 부담을 덜어 준다는 원리를 왜 다들 모르는 걸까? 우리나라는 그저 품종 개량하고 나무를 무작정 심기만 해서 산림 녹화에 성공한 게 아니다. 땔감용으로 나무를 벨 일을 없게 만드는 과업이 성공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녹화를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런던 스모그의 주범이기도 한 그 더티한 석탄의 대규모 보급이 전국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 성공 사례가 아무 못사는 민둥산 나라에나 선뜻 도입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런 큰 효과에 비해 대기오염이나 방사능 위험은 각각 따로 대책을 수립해서 해결해야 할 작은 부작용일 뿐이다. 다른 대안도 없는 주제에, 석기 시대로 돌아갈 생각도 없으면서 원자력 발전을 굳이 핵 발전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북핵과 미사일엔 절대 침묵하는 애들을 난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 대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도 저 트루먼 대통령처럼 껄껄 웃어 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말은 아주 젠틀하고 부드럽게, 공손하고 댄디하게 하되, 허리춤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으면 된다.
요즘은 저 리스트에다가 "둠가이와 존나 크고 아름다운 총" 컷도 하나 더 들어가야 할 것 같긴 하다.

(뭐, 트루먼 대통령은 실제로는 잘 알다시피 마냥 저런 대마왕이 아니었다. 미국의 너무 호전적인 장성들이 6· 25 전쟁 중에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리려는 걸 오히려 저지하기도 했다.. ㅎㅎ)

아무튼.. 원자력은 이 승만 때 이래저래 뿌려졌던 씨가 박 정희 때 결실을 거뒀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컴퓨터는... 박통 때 뿌려졌던 씨가 그 다음 전대갈 때 결실을 거뒀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물론 컴퓨터 자체야 박통 때 국내에 첫 도입됐으며, 70년대부터 각종 행정 서비스의 전산화가 찔끔찔끔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의 컴퓨터는 관공서와 연구소에서나 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기계였지, 개인이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천공 카드, 자기 테이프.. 아직 뭐 이러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일반 서민들도 정보화 시대라는 걸 체험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터져나왔다. 1983년에는 삼성 전자에서 반 년간 공돌이들을 갈아넣은 끝에 64K디램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했고 그와 별개로 SPC-1000이라는 8비트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경쟁사인 금성사에서도 곧 금성 패미콤을 만들었다.

1984년에는 철도청에서 최고급 열차인 새마을호부터 승차권 전산 발매를 시행했다. 지하철 승차권 같은 딱지(에드몬슨..) 말고 일명 전산 승차권이라는 게 이때부터 최초로 발급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전산화 이전에는 열차의 좌석 배당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모르겠다. 행정 착오로 인해 한 좌석에 두 사람이 중복 배당되기도 했을 테고, 아니 옛날에는 애초에 지정석보다는 자유석 위주로 승차권이 발매됐지 싶다.

또한 이 해엔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의 전신인 전국 단위의 PC 경진대회가 최초로 개최되기도 했다. 이건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갖고서 거절할 수 없는 규모의 상을 걸고 정말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었다. 이 당시에는 심지어 일반부(대학부를 초월하여!)까지 있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정보 올림피아드로 바뀌면서 대회의 범위가 국제 규격에 맞게 대학 미취학 연령으로 조절되었다.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뭐, 컴퓨터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박 정희 때 이제 막 고속도로가 닦이고 자동차도 일정 수준 이상의 국산화율을 달성한 생산이 시작됐다. 하지만 서민이 체감할 정도의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는 잘 알다시피 1980년대에 가서나 이뤄졌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분야별로 차근차근 산업화하고 발전해 왔다. 지금이야 어디 깡촌에 고속도로가 개통하면 "또 어디 개통하나 보네~ 내비 업데이트나 해야겠네" 짤막하게 뉴스로 나오고 말지만.. 옛날에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는 임팩트와 포스가 지금과는 가히 넘사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경부 고속도로 같은 길이의 거대한 고속도로를 한번에 만들 일 자체가 없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또한, 옛날에는 탈북자의 귀순은 대대적인 뉴스감 및 선전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탈북자가 1년에 몇만 명씩 내려오고 체제 선전이나 경쟁 따위도 전혀 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냥 "병사 1명 군사분계선 넘어서 귀순, 서해상으로 탈북" 한 줄 보도로 끝이다. 이름 같은 신상은 밝히지도 않는다. 63 빌딩과 서울 타워를 구경시키면서 남조선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관행 역시 없어진 지 오래이며, 그냥 국정원 소속의 탈북자 신문 센터와 하나원으로 직행이다.
초딩 시절에 김 만철 씨 가족의 해상 귀순과 <광호의 일기> 책을 봤던 세대로서 이것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7 08:34 2017/10/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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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25 관련 노래

6· 25 전쟁은 그로부터 40년 전의 경술국치와 거의 동급으로, 단군의 후손과 대한민국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돼 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박 두진 작사, 김 동진 작곡의 main OST가 만들어져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그 곡 말이다.

박 두진이라 하면 학교 국어 시간에 배웠듯이 “해야 솟아라 맑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시조가 떠오르지만, 동일 인물이 그로부터 겨우 2년 뒤에 6· 25 노래의 가사도 썼다. (<해>는 1949년에 발표되었으니, 아마 해방의 감격을 해에다 비유했을 것이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1.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2.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어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 온 값진 피의 원한을 풀으리
3.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이 노래는 휴전 후가 아니라 아직 전쟁 중이던 1951년에 만들어지고 발표되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전국토가 쑥밭이 되고 공산당 빨갱이들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는 꼴을 생생히 목격한 그 트라우마가 가사에 담겼다.
단순히 나와 다르니까 적군이 아니라 상대방은 도덕적으로 완전 불의하고 천벌 받아야 마땅하며 인간으로서 상종 못 할 역적패당 인간말종임을 적절하게 잘 표현해 놓았다. 2, 3절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곡도 잘 썼다. 슬프고 엄숙한 느낌이 나는 E단조풍으로 시작했다가 그래도 희망적인 G장조 분위기로 끝난다.

북괴 얘기는 쏙 빼고 6· 25가 무슨 남북 공동의 책임인양 가사를 굉장히 이상하게 바꿔 놓은 “신 6· 25 노래”가 한때 나돌았는데 본인은 그건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빼고 '지옥'을 삭제하는 변개와 동급으로 극도로 저주하고 혐오한다.

이것 말고 승리의 노래라는 것도 있다. 다만, 제목이 고유명사 같지 않으며, 요즘은 그런 문구로 검색하면 찬송가가 더 많이 튀어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가사 첫 줄로 검색하는 게 변별력이 훨씬 더 낫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 대한 남아 가는 데 초개로구나
2. 쳐부수자 공산군 몇 천만이냐 / 우리 국군 진격에 섬멸뿐이다
나아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


얘 역시 1951년작이며, 위의 그림은 작사 내지 작곡자가 1951년 1월 11일에 자필로 직접 쓴 악보의 복사 이미지라고 한다. 서울을 도로 빼앗긴 1· 4 후퇴로부터 겨우 1주일 뒤의 일이다. 이 곡은 작사자는 잘 모르겠고 작곡자 권 태호가 "나리나리 개나리 입에 따라 물고요" 동요의 작곡자이기도 하다.

위의 두 노래는 북한군을 공산군 괴뢰군을 넘어 오랑캐라고 일컬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만들어진 시기도 비슷하니 6· 25 전쟁이 벌어지던 그 시절엔 진짜 그런 표현이 쓰였는가 보다. 우리 어머니도 “무찌르자 오랑캐”에 맞춰서 고무줄 놀이 하시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시더라.
<멸공의 횃불>보다 훨씬 더 수위가 높고 적개심이 강한 군가풍의 노래가 민간에까지 널리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죽했으면 1953년 8월,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 된 거의 직후에는 반공 정신 투철한 학생들이 “이렇게 전쟁을 어영부영 끝낼 수는 없다. 반드시 멸공 북진 통일을 완수해야 한다”이러면서 행진을 했는데, 북괴 빨갱이들을 아래와 같은 징그러운 괴물로 묘사하면서 신랄하게 디스를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휴전 회담에 아예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는 걸 기억하자.

more..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짓거리가 저 괴물의 묘사만치 간악하고 비열했기도 했고, 또 전쟁이란 게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다. 지금도 북괴는 공산주의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이 문제이다. 오늘날 종북 용공분자들은 저런 괴물의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양의 탈을 쓰고 평화, 대화, 우리민족끼리 이런 타령이나 늘어놓으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불평 불신풍조 조장하면서 체제 전복 공작을 벌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매년 6월 25일엔 국가 차원에서 기념식을 열어서 6· 25 노래를 부르면서 “이 날을 죽어도 절대 잊지 말자 뿌드득” 그랬다. 그리고 70년대까지는 우리나라를 구해 준 UN도 고맙다면서 UN 창립일까지 공휴일로 지키곤 했다.

저 때에 비해 지금이야 세월이 참 많이 흘렀고 북괴로부터 적어도 재래식 병력에 의한 전쟁 도발 가능성은 0에 가깝게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통일은 무슨 외세나 반통일 수구꼴통들 때문에 못 하는 게 아니라, 99.99% 북괴의 잘못된 주체사상 대남적화 통치 이념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나라 헌법이 아무리 평화 통일을 지향한다고 규정한들, 북괴가 저런 체제인 한 평화적인 통일은 현실적으로 사실상 불가능이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난 개인적으로 빨갱이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며, 빨갱이는 빨갱이라고 적극 부를 것이다. 걔네들의 성품에 잘 어울리는 멸칭이다.
빨갱이 소리 들어서 제아무리 기분 나쁘다 한들, 그게 설마 “6· 25 남북 공동 책임론” 이딴 소리보다 사람 더 열받게 하고 기분 더 잡치게 할까?

아직도 웬 케케묵묵은 반공 타령이냐고 혀를 차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북괴가 1950년대나 지금이나 케케묵은 이념이 하나도 변함없기 때문이다.
북괴가 대남적화 이념을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입증할 생각은 안 하고 오로지 자국 정부가 반공 빌미로 잘못한 것밖에 내세울 줄 모르는 애들은 백 날 떠들어 봐도 내 생각을 절대로 반박하거나 바꾸지 못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잠자코 조용히 있기 바란다.

이상, 6월 25일을 며칠 안 남기고 든 생각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20 19:32 2017/06/2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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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체계 대통령 대수 대통령 개헌 내력 북괴
미군정 존 하지   소련정
1공 (1948) 1 이 승만 제헌헌법, 대통령 4년+1중임, 부통령, 간선 김 일성
2 1차, 대통령 직선제 (부산 정치 파동, 발췌개헌)  
3 2차, 초대에만 중임 제한 폐지 (사사오입) 8월 종파 사건 (정적 숙청)
2공 (1960) 4 윤 보선 3차, 의원내각. 최초의 졸속 아닌 합법적 개헌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4차, 1공 시절 잔재 청산??  
3공 (1962) 5 (vs 윤 보선) 박 정희 5차, 대통령 중심제로 회귀. 지방자치 사실상 사문화  
6 (vs 윤 보선)    
7 (vs 김 대중) 6차, 3선 개헌  
4공 (1972) 8 단 7차, 유신, 대통령 6년+무제한 중임, 간선 주체사상 명문화 (자가신격화)
9 독
10 출 (1979) 최 규하    
11 마 (1980) 전 두환    
5공 (1981) 12 8차, 대통령 7년 단임  
6공 (1988) 13 노 태우 9차, 대통령 5년 단임, 직선; 지방자치제 부활  
14 김 영삼   김 정일, 고난의 행군 (경제 파탄)
15 김 대중    
16 노 무현    
17 이 명박  
18 박 근혜  3공과 6공 그 어떤 선거 때보다도 많은 득표율로 당선됐지만..;; 탄핵소추 파면 김 정은

대한민국, 남한이라는 이 나라는 다음과 같은 점들로 인해 여느 나라들과 같지 않은 독특한 현대사를 보유하고 있다.

  • 20세기 중반에 주변 나라들과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공산화되지 않았다.
  • 일본의 덴노 같은 정신적인 지주나 중심점이 있지 않으며, 그나마 있던 것도 조선이 망하면서 싹 사라졌다.
  • 미국처럼 초대 대통령이 2선만 하고 깔끔하게 물러났다거나, 쿠데타 한 번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어 오지 않았다. 미국은 도중에 중임 관련 규정만이 살짝 바뀌었을 뿐, 대통령의 임기 체계 자체가 우리나라 헌정사 같은 급의 큰 변화나 굴곡을 겪은 적은 없다.

본인은 노 태우 대통령 내지 서울 올림픽 시기가 스스로 경험한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가장 먼 과거이다. 그 이전은 기록을 통해 간접 체험만을 한 선사시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5공 시절을 직접 경험한 기억이 없다. 노 태우의 바로 전임까지만 해도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 체계가 완전히 달랐다는 얘기가 대단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잖아도 그땐 도대체 선거를 어떻게 했기에 이 승만이나 박 정희는 1~3대, 5~9대로 대통령을 그렇게 오래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굳이 왜 기간과 대수를 나누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각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야 개인의 정치 성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이런 들쭉날쭉한 자국의 헌정사 자체는 역덕후에게 뭔가 유사점과 차이점을 정리하고 분석할 만한 좋은 아이템인 것 같다.

가장 먼저 미군정부터 생각해 보자. 미군정은 기간이 짧고 존재감 없는 과도기여서 잘 부각되지 않지만, 알고 보면 단군의 후손들이 거의 전무후무하게 백인(미군정 사령관인 존 하지 장군)의 통치를 받은 시절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독특하다. 마치 신미양요가 분단 이전에 단군의 후손이 무려 미국과 군사 교전을 벌인 전무후무한 사건인 것처럼 말이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가 됐을지언정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입각한 서양 백인들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전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나라이다. 영국이라든가 스페인이라든가... 대한민국 역사상의 미군정은 저런 이념에 따른 지배는 아니었다.

그 뒤 우리나라 역사상 통치 기간이 가장 길었던 대통령 톱 3(쓰리)는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이다. 이 승만은 선출은 선거를 통해 무리 없이 됐지만 훗날 장기 집권을 위한 꼼수 개헌을 했으며, 박 정희는 쿠데타에다가 장기 집권 개헌을 모두 자행한 인물이다. 마지막 전 두환은 집권을 위한 쿠데타만 저질렀으며 임기 만료 후에는 군소리 없이 물러나긴 했는데.. 이것도 전국민적 저항이 없었으면 물러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있긴 하다.

초대 제헌헌법이 규정하는 대통령 체제는 보다시피 완전 미국 스타일인 걸 알 수 있다. 이 승만은 1~3대 대통령을 역임했는데, 위의 표에서 보다시피 매번 헌법을 자신의 당선에 유리하게 약간씩 뜯어고쳤다. 직선제는 그 자체는 나쁠 것 없는 선거 제도이지만, 아마도 꼴보기 싫은 야당 의원이 아니라 무지몽매한 민중을 돈과 서커스로 꾀어서 직접 투표를 시키면 여당에게 더 유리할 것 같아서 도입한 듯하다. 그래도 2선 때는 우리나라가 아직 전쟁 중인 관계로 정서적으로 어지간해서는 집권 여당을 바꾸지 않으려고 하니 이 승만의 당선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3선 이상까지 하는 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며, 심지어 롤모델 국가인 미국에서도 대공황에서부터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경험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같은 사례 말고는 찾기 어렵다. 그러니 단순한 정치깡패 동원이나 부정선거만으로는 안 되고 또 헌법을 고쳐야 했다.

다른 대통령도 아니고 초대 대통령이 벌써 저런 짓을 하면 얼마나 안 좋은 선례가 남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그 고령에 그 검소한 구두쇠 대통령이 다른 돈과 권력, 명예를 탐해서 저런 짓을 한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내가 꽉 붙들지 않고 야당에게 정권을 선뜻 넘겨 줬다간 남조선이 또 공산당 손에 넘어갈 것 같다."라는 자격지심 똥고집 때문에 저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무 근거 없는 황당한 망상도 아닐 뿐더러 인의 장막은 그 기질을 더욱 부추겼을 테고. 게다가 신 익희(1956), 조 병옥(1960) 같은 야당 라이벌 정치인이 알아서 없어져 주기까지 한 덕분에 3선과 4선은 더욱 수월하게 넘겼다.

허나 도를 넘는 부정선거가 폭로되면서 12년 독재를 참다못한 국민들로부터 전국적인 혁명이 일어나자, 이 승만은 현실을 직시하고 하야를 선택하게 됐다. 제1 공화국은 자신은 부정부패와 독재를 저지르면서도, 참 아이러니하게 국민들에게는 국민학교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릴 만한 사상적인 기반을 듬뿍 마련해 줬다.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었을지언정 최소한 방향만은 올발랐던 셈. 이로 인해 남한과 북한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게 됐다.

이 승만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는데, 그 다음 출범한 제2 공화국은 우리나라 헌정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인 의원내각제 정부이다. 군부나 독재자의 입김이 개입하지 않고 나름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로 개헌도 이뤄 냈다. 이게 제대로 시행됐으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이 승만 시절과는 굉장히 딴판인 나라가 됐을 수도 있지만 박 정희 군사정권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집어엎어지면서 이건 정말 짧고 존재감 없는 흑역사 헌정 체제가 됐다.

2공이 계속 유지되는 배경을 설정해서 대체 역사물 소설이나 영화가 충분히 나올 법해 보이지 않는가? 아예 조선이 망하지 않아서 입헌군주제가 계속 유지되는 상황을 가정하는 것보다야 더 현실적일 것 같지만.. 그래도 현실에서는 고종· 명성황후가 장 면· 윤 보선보다 존재감이 더 크고 대중적인 인기가 더 좋다.

2공은 '장 면 내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장 면은 국무총리였고 대통령은 엄연히 윤 보선이었다. 이때 행해진 4차 개헌은 친일 반역자..는 아니고 1공 시절의 정치 깡패나 부정 선거 주동자 같은 반민주(반민족이 아님) 행위자를 처벌하고 청산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개헌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과거의 행위를 새로운 법으로 처벌하는 것이니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그때부터 있었다. 4공 시절 박통의 긴급조치 중 3호만은 그리 정치적이지 않고 생뚱맞은 민생 분야인 것과 비슷하게 4차 개헌은 나머지 개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 다음으로,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었다"의 주인공인 박 정희가 등장한다. 그는 대통령 선출은 훗날 전역 후 민간인 신분으로 된 것이고, 쿠데타 직후에 아직 군인 신분일 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도 역임했었다.
이때는 아직 나라가 워낙 못살고 사회 기강이 불안하고 6· 25 시즌 2가 또 벌어질지 모르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다 갈아엎자" 식의 군사혁명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지지를 많이 받았다. 지금처럼 길거리에 뛰쳐나와 촛불 들고 "민주주의가 죽었습니다" 이럴 상황이 아니었다. 전땅크의 쿠데타 때와는 달리 박통의 쿠데타 때는 누가 막 심하게 저항하거나 죽지도 않았다.

박통은 차근차근 자본을 유치하고 경제 개발을 해 나갔다. 경부 고속도로도 3공 시절에 완공되었다. 하지만 겨우 한두 대만으로는 임기가 너무 짧았다. 온갖 공작으로 야당 후보를 간신히 이겼는데 3선을 하자니 진짜 이 승만 시절의 사사오입 개헌과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헌법을 또 날치기로 고쳐야 하게 됐다. 그리고 나중에는 헌정 체계를 전반적으로 다 자기 독재에 맞게 뜯어고치는 유신 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4공 체제에서는 단독 후보가 혼자 출마해서 꼭둑각시 의원들의 만장일치에 의해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통령은 앞서 언급했듯이 긴급조치라는 필살기도 내릴 수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 제도가 이렇던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이건 정치적으로 엄청난 모험이었기 때문에 반발을 최소화하려면 경제 개발, 민생 안정, 굳건한 반공 안보, "우리식 민주주의" 등 뭔가 좋은 명분을 만들어서 '유신'이라는 브랜드명(?)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세뇌를 시켜야 했다.

박 정희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이 4공 체제가 도대체 얼마나 갔을지 모르겠다. 사실, 그가 9대 대통령의 예정 임기만 다 마쳤어도 이미 1984년이 되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5~8호선뿐만 아니라 3호선 양재-수서와 4호선 당고개도 시기적으로는 2기 지하철에 속하듯, 10대 최 규하와 11대 전 두환도 시기적으로는 이런 4공 체제에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박통 당사자 말고 다른 정치인들이 이런 무지막지한 독재 헌정 체제를 받아들일 리 없었으므로 이내 쿠데타가 일어났고 헌법도 업데이트 됐다. 그래서 4공 중에서 8~9대는 유신 시대이지만, 10~11대는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라는 기구 휘하에 있었다.

박통이 암살 당한 뒤에도 1980년 서울의 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독재자가 물러났다고 해서 군대가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대통령 임기와 관련된 개헌은 그 당대의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라는 가히 "신의 한 수" 소급 적용 금지 조항이 5공 시절 8차 개헌 때에야 드디어 추가되었다. 뭔가 "자백만이 형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유일한 증거라면 그 자백은 인정되지 않는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법 개정만 소급 적용되고, 불리한 것은 적용되지 않는다"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우여곡절 시행착오를 겪은 뒤, 우리나라는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6· 29 선언이 이뤄졌으며, 박 정희 유신 시절 이래로 없어졌던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하고 5년 단임제가 정착했다. (5공 12대 대통령 선거도 유신 시절 같은 노골적인 단독 출마만 아니지, 주요 야당 후보들은 감금당한 채로 관제야당 후보들이나 참여한 답정너 선거였기 때문) 당장 13대 때는 후보 단일화 실패로 인해 또 전 두환의 육사 후배인 노 태우가 당선됐지만, 14대 이후부터는 순수 민간인 대통령이 나오고 있다.

이 1987년 9차 개헌이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10년 넘게, 아니 30년 가까이 장수하고 있는 헌정 체계이다. 과연 이 상태에서 헌법이 부분 또는 전면 개정돼서 7공화국이 나올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총평

1. 본인은 위와 같은 내력을 감안하고도 이 승만과 박 정희 대통령을 매우 긍정적으로 본다. 전자는 0에서 1을 만든 사람이고 후자는 1에서 100을 만든 사람이다. 그 절망적인 가난과 시궁창인 국민 의식, 북괴의 위협 속에서 그만치라도 이룬 게 용하고, 그 정도 독재는 막 잘했다고 칭송할 수는 없어도 이해와 수긍이 된다. 지금 역으로 의회와 언론의 막장 횡포를 생각하면, 옛날에 그 상황에서 그 정도 의회· 언론의 통제와 독재 없이 적화통일을 어떻게 막고 경제 성장이고 민주주의고를 어떻게 이룰 수 있었을까? 독재 정권이 뭘 그렇게까지 망쳐 놓을 게 있었는지 이상한 피해의식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2. 물론 경제 성장을 이룬 뒤에 이 정도 국민의 희생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이룬 것 역시 그 의미와 가치를 폄하하고 싶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는 충분히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군사 정권이 잘한 것을 실드 치더라도 그들의 쿠데타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고 싶지는 않다(장 태완 같은).
하지만 오늘날은 민주화라는 게 그냥 별 명분도 없이 그저 권위에 대항하고 반역하는 걸 합리화하는 데 쓰이고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필요악을 없애자고 하고 더 심하게는 반정부 종북 세력에게 선동되고 이용당하는 추세가 명백하여 본인은 이를 경계한다. 옛날에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운동꾼들도 태극기를 들고 나오곤 했는데 요즘 어떤 사람들은 태극기와 애국가를 싫어하는 것 같다.

3. 북괴의 존재로 인해 대한민국은 무슨 분야든 천천히 여유롭게 발전을 할 수가 없어졌다. 여기서 우리나라 20세기 중후반의 대부분의 비극이 시작됐다. 또한 북괴 같은 저질이 존재함으로써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수준까지 하향평준화되었음도 명백히 사실이다. 뭔 무능과 비리를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안보관· 사상 자체가 썩었거나 대놓고 북괴에다가 퍼주고 교류하자, 말만 번드르하게 포장해서 공산주의 하자는 놈들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이건 우리나라 정치판의 고질병으로 남거나, 아니면 진짜 나라가 망해서 고생해 봐야 해결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28 08:33 2017/05/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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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산과 한글 학회

본인은 몇 년 전 한글 학회 관계자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애산 이 인 선생(1896-1979) 추모 학술대회' 초청장이었다.
저 사람은 도대체 누구? 약력을 보니 해방 초기에 우리나라에서 활동한 법조인이긴 한데, 본인은 그 당시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 시절의 관련 분야 인물로는 초대 제헌 헌법 초안을 작성한 유 진오 박사 같은 사람밖에 못 들어 본 상태였다. 저분은 진짜로 문학과 법학에 모두 통달하여 공부의 신이요 문과 먹물 계열의 가히 천재 완전체였다.

그러니 처음 보는 인물에 대해서는 "국어학자도 아닌 사람이 한글 학회와는 무슨 상관?" 이런 의문이 들었으며, 그 당시에 또 시간대도 안 맞아서 그 행사에 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 분야에서 저렇게 언급된 인물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본인의 머릿속 기억 한 구석에 각인되었다.
그 뒤 나중에 차츰 알고 보니 애산 이 인이라는 분 역시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었다. 호머 헐버트와 더불어 한글 학회를 계기로 알게 된 위인 중 한 분이다.

이분은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일제 강점기 때 피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 식민지 치하에서 변호사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동안 의열단, 안 창호 사건 등 여러 항일 운동에서 자진해서 독립 운동가들을 변호했으며, 그것도 국선이 아닌 민간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변호를 무료로 해 줬다. 일본의 국익을 대변하지 않는(?) 변호가 너무 잦고 일제 말기엔 창씨 개명조차 거부하니 조선 총독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변호사 면허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처럼 말이다.

이런 민족 인권 변호사가 이 인 말고 전국적으로 몇 명 더 있긴 했지만(허 헌, 김 병로) 그래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수였다.
그리고 이 인 선생은 여느 변호사와는 달리 한글 학회와도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역시 문과 전문직답게 자기 나라 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고서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후원회를 조직했으며, 1942년엔 조선어 학회 사건에 연루되어서 구속되기까지 했다. 다만, 이분은 옥고를 치른 다른 국어학자들과는 달리 집행유예로 끝났다.

해방 후에 이분은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건국 초기부터 우리나라에서 관련 분야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초대 법무부 장관을 맡았으며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 와중에 한글 학회가 장소가 협소하고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1976년에는 지금의 붉은 벽돌 건물인 한글 회관을 짓는 기금 3천만 원을 쾌척했다. 40년 전 물가로 3천만 원... 이건 마침 비슷한 시기에 막 출시되었던 현대 자동차 포니를 10대가 넘게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대당 약 230만 원).

그리고 이분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임종 전, 유언을 통해 자기 전재산을 한글 학회에 기증했다! 이 정도이니 한글 학회에서 두고두고 칭송할 수밖에 없겠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두루 우리나라에 끼친 업적이 워낙 출중하기 때문에 사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런데 정확한 수훈 등급이 뭔지 문헌에 따라 국민장과 독립장이 서로 난립해 있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다.

한글 학회는 전신이던 조선어 학회 시절에 최초의 국어사전을 편찬했으며, 이것을 오늘날까지 굉장히 큰 자랑거리와 자부심, 긍지로 여긴다. 특히 조선어 학회 사건을 사건이 아니라 '수난'이라고 자체적으로 의미를 더욱 부여해서 부른다.
국립 국어원의 표준 국어 대사전이 국어사전계를 평정해 버린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 표준 국어 대사전조차도 이해타산 문제로 인해 종이책으로는 더 출간되지 않으니 참 아이러니다. (유니코드 전 영역 차트도 종이책 출간이 이미 진작부터 중단됐고..)

한글 회관의 건립과 관련해서는 그 당시 박 정희 대통령도 큰 기여를 했다.
노산 이 은상 선생이 박통을 직접 찾아가서 한글 회관 건립을 위한 재정 지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대통령이 "국방 성금은 1원도 안 낸 양반이 무슨 한글 회관 같은 데에 모금 요청을?" 식으로 씨크하게 반응했으나, 다음 날엔 1억 원이라는 돈을 금일봉 형태로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 씨를 통해 전해 줬다고 한다. (한글 학회 김 종택 회장의 증언)
박통은 이것 말고도 한글 관련 단체 지원이나 어문 정책 쪽으로도 칭송 받을 행적을 여럿 남겼다. 광화문 현판조차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친필을 남겼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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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글 학회는 학술적인 성향이 절반, 한글 문화 연대처럼 운동 및 계몽적인 성향도 절반 정도 덤으로 갖추고 있다. 애국 단체라고 국내외로 후원하는 분도 적지 않다. 그리고 저런 사연을 거쳐서 1970년대에 건립된 한글 회관 건물 덕분에 서울 도심 금싸라기 지대에 좋은 부동산도 보유하고 있고, 그걸로 임대업 하면서 직원 월급도 준다.
그러나 지은 지 40년 된 건물은 딱 봐도 주변 건물들에 비해 외관이 낡았으며, 온통 임대를 주느라 정작 학회 자체의 문헌과 자료를 쌓아 둘 공간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업무용 건물의 건축 트렌드인 유리궁전과는 달리, 혼자 떡 버티고 있는 붉은 벽돌 건물은 한눈에 봐도 완전 옛날스럽다. 부산에서 봤던 동아 대학교 석당 박물관, 부산 임시 수도 청사도 다 같은 붉은 벽돌이지 않던가?
인테리어로 가면 옛날에는 가구나 복도 바닥, 문 같은 것도 요즘처럼 금속, 플라스틱,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재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옛날에는 금연에 대한 경각심도 지금보다 훨씬 덜했으니 저런 건물은 안에 들어가면 담배 냄새가 쩔어 있기도 할 것 같다. 거기에다가 각종 간판이나 표지판 글꼴까지 어설픈 둥근고딕 내지 붓글씨 부류로 넣으면 완벽한 옛날 고증 완성이다.)

2. 애산과 반민특위, 영화 <암살>

그럼 이번에는 한글 학회 말고 법조인으로서 애산 선생이 관계가 있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보겠다.
이분은 명백히 변절 없는 항일 독립 운동 노선을 갔으며, 사후에 건국훈장이 무난하게 추서되었을 정도이다. 그런 한편으로 해방 후에는 반공 우파를 표방하면서 이 승만 정권을 지지했다. 이것도 내가 보기엔 정상적이고 건전하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반민특위(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의 위원장까지 돼서는 이 위원회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린 것은 언뜻 보기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이것 때문에 이 승만 정권은 친일 청산을 안 한 정권이라고 후대로 욕을 두고두고 쳐먹게 되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이 사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관련 장면이 영화 <암살>의 결말부에 묘사돼 있다.
염 석진은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증인을 비열하게 미리 죽여 버린 덕분에 증거 불충분 → 공소권 없음 →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 이 꼴을 보니 판사조차 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는지, 원래 주려고 했던 벌은 못 주고 "단,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에 처한다"와 함께 재판봉을 부서져라 내리치고는 나가 버린다.

물론, 이 영화에 대해서 좌익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인 김 원봉을 띄우고, 남조선은 친일 청산 못/안 한 나라라는 왜곡된 시각'만' 주입한다는 이른바 '좌편향'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서 그 얘기를 더 논하지는 않겠다. 우리나라가 북괴나 구소련처럼 기록말살형이 존재하는 속좁고 옹졸한 나라는 아니며, 훗날 일제에게 변절했거나 월북한 사람이라도 흑화 전의 행적 중에 선한 게 있다면, 훈장은 안 줄지언정 팩트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있으니 말이다.

사실, <암살>의 원래 대본에는 재판 중에 이런 장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종적으로는 짤렸다.

- 검사: (와~ 재산 목록 보소~) 피고는 지금까지 도대체 독립운동을 하셨습니까 사업을 하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팔아서 번 겁니까 이거?
- 염 석진: (개빡침. 검사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다가 손찌검~) 이 친일파 아들놈의 새X가 지금 와세다 법대 나와서 꽃방석에 앉았다고 내 앞에서 떵떵거려? 니 애비도 우리 암살 리스트에 있었어 이 X꺄. 어딜 감히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내 인생을 부정축재자로 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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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 석진이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다가 종로 경찰서 지하 고문실에서 끔찍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서야 밀정으로 변절했듯, 심지어 민족정기 바로 세우기 반민특위 재판을 진행하는 법조인들조차도 사실 친일파 가문의 금수저 출신이었다는 반전이 숨어 있다. 이 지경이라면 이놈의 나라는 참 꿈도 희망도 없다.;;

영화의 작품성을 위해서는 선악 구도가 일관된 게 더 보기가 좋으며 저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 그러니 편집은 적절하게 한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저 장면이 있는 것이 1940년대 말의 완전 시궁창이던 현실의 선악 구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일제만 물러갔다고 해서 군· 경 간부가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니고, 판· 검· 변호사 같은 법조인이 필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나라가 혼란하던 시절에는 그렇게 사회 질서를 유지시키는 사람들이 특별히 노련한 경력자 위주로 더욱 필요했다. 친일 경력 없다고 해서 일자무식한테 법률 자문과 재판 판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런데 단순 생산· 기술직이 아니라 저런 전문직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결국은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 많이 한 사람 차지가 되는데, 유복한 환경이 아무래도 항일보다는 친일 쪽 집안에 더 많이 조성돼 있었음은 자명하다. 이게 참 불편하다면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일본 경찰· 헌병 출신 조선인이 훗날 반공투사로 깃발 바꿔 단 것만큼이나, 일제 치하에서 법조인으로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역설적으로 반민특위 조사관으로 변신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법조인 중에 저런 민족 인권 변호사만 있었던 게 아니니까 말이다.

그럼 애산 선생을 생각해 보자. 그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친일파 집안 출신도 아니었고 독립 운동가 출신의 법조인이요, 한글 학회의 제일 든든한 후원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반민특위 활동을 통한 친일 청산을 반대하는 소신이었을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legal mind 관점에서 봤을 때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해체시킨 게 아닐까 싶다.

당장 몇몇 악질 부역자들을 망신 주고 응징해서 감정적인 만족을 얻는 것보다 부작용이 더 커지고 있었다거나, 정확한 진상 규명과 재판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곤란했다거나, 불순분자들이 반민특위 조사관을 사칭하면서(문화혁명 당시의 가짜 홍위병 같은!) 생사람 잡는 일이 늘었다거나...

그 당시 이 승만 대통령이나 애산 선생이 반민특위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겠는지는 본인이 기회가 되고 자료를 더 접하는 대로 공부를 더 해 볼 생각이다. 다만, 결과가 무엇으로 귀착되건 그 당시에 나라가 일제 부역자 전문직들을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Windows 9x가 그 당시의 가정용 똥컴에서 돌아가고 도스 호환성을 보장하기 위해 16비트 코드를 불가피하게 재등용할 수밖에 없던 것과 정확하게 동일한 맥락의 한계이다. 우리나라의 친일파 청산을 제일 방해한 것은 사회 혼란과 체제 전복을 조장하던 북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게 절대적인 사실이다. 어떤 경우든 누가 선동하는 것처럼 친일 청산이라는 걸 악의적으로 일부러 안 한 건 아니다.

끝으로, 다시 영화 <암살> 얘기로 돌아오면,
원래 의도했던 것처럼 염 석진이 검사와 싸우는 장면이 들어가 있어야 "법정모독죄로 벌금 2만원형"이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성립하겠다.
겨우 웃통 벗고 "내 몸엔 일본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소!" 쇼 한 게 왜 지금 물가로 수백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야 할 법정모독죄인지 본인은 지금까지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역시 짤린 장면을 보니까 납득이 된다. 검사랑 현피 주먹다짐 정도는 해야 법정모독죄가 성립하지 않겠는가?

Posted by 사무엘

2017/05/19 08:34 2017/05/1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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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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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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