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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카마 호 선상 반란 사건

1980년대생이라면 페스카마 호 선상 반란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딱 한 달쯤 전인 1996년 8월경에 벌어진 참극이다.

페스카마 호는 원양어선이었다. 어업, 아니 선원 생활이라는 건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저기서 하는 일은 대규모 육체 노동이 그렇듯이 정교한 팀웍이 요구되며, 누구 한 명이 실수하면 큰 영업 손해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원들 조직 내부엔 군대만큼이나 엄한 군기와 규율이 존재해 왔다.

그랬는데, 업무에 미숙하여 폭언과 인격모독--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쓴 표현--을 자주 당하던 조선족 선원들과, 한국인 선장 및 선원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그들은 나중에는,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현혹되어 기업 무너뜨리려 위장 취업한 붉은 노동자들처럼, 업주가 정황상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면서 태업과 꾀병을 일삼고, 정상적인 조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아무리 구슬리고 타일러도 말이 안 통하니, 선장은 참다못해 조업을 중단하는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인근의 항구에다 그들을 하선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대로 말이다. 단,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손해들을 걔네들에게 청구하고, 그들을 앞으로 다시는 배를 못 타게 만드는 블랙리스트 낙인까지 업계 전체에다 찍으면서 말이다.

예상 외의 강경한 조치로 인해 돈이고 일자리고 다 잃고 인생이 송두리째 꼬이게 된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7명의 한국인 선원을 한 명씩 꾀어내어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하여 바다에 던지고, 자기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 1명, 그리고 범행을 우연히 목격한 인도네시아 선원 3명까지 추가로 살해했다. 총 11명. 그러나 항해에 필요해서 살려 둔 1등 항해사 한국인 선원이 목숨을 건 기지와 노력을 다한 덕분에 범행은 꼬리가 잡혔다.

선원들을 11명이나 살해하고 배를 탈취한 건, 오늘날의 소말리아 해적들도 차마 못 저지른 매우 극악한 범죄이기에 저 조선족 선원 6명은 전원 사형이 선고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존파가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들을 선량하고 불쌍한 동포라고 적극 변호하여 조직적이고 잔인한 살인극을 우발 범행으로 둔갑시키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고, 그나마 수괴 1명만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된 것조차 그 미만으로 크게 감형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독재자의 딸'(?)을 대신하여 지난 18대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뻔했던 유력 대선 후보였다.
덕분에 이때도 피해자는 싹 묻히고, 오히려 살인범 조선족들에게 국민 성금이 가고, 중국 내부에서까지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한국인을 죽여도 무거운 처벌 안 받는구나” 하는 인식이 퍼졌을 정도였다. 훗날 어민을 빙자한 중국 해적들이 한국 공권력을 아주 우습게 여기게 되는 데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해석하는 건 좀 비약일까?

세상에 조선족 포함 외노자들이 사회적 약자이니 인권 보호하자고 외치는 배부른 사람들치고, 자기 바로 옆집에 외노자가 사는 걸 좋아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양심을 걸고 솔직하게 묻고 싶다. (오 원춘이 어디 출신이더라? ㄲㄲㄲ) 세상에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약자를 가장한 악인을 분간할 방법이 없으니 생기는 것이다. 주한 미군이 여성을 성폭행· 살해한 것하고 외노자가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언론에서는 절대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피해자 인권은 없고 오로지 불쌍한 척 하는 놈, 가해자 인권만 챙기는 세상을 만드는 데만 열심인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국정을 계속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얼마나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막장으로 치달았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현 대통령이 발언한 취임사에서 언급되었던 상당수의 건전한 문장을 들을 수 없거나 정반대의 논조로 바뀐 채 듣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내 블로그의 옛날 글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본인은 정작 대선 기간 도중에는 정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고 삼가 왔다. 오히려 그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1 작업하느라 바빴다.
겨우 신변잡기· 흠집내기 식의 신문 기사 한두 개를 근거로 특정 후보의 호불호 같은 내 정치관을 표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흥분도 좀 가라앉았을 테니, 빼도 박도 못할 검증된 심성, 팩트를 기반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표출해 보련다. 이번 대선 결과는 정말로 축복이고 다행이며, 우리나라가 국운이 최소한 몇 년은 더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여당이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결코 아니라, 야당이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27 08:43 2013/04/2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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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지 만원 지은 <제주 4·3 반란 사건>을 읽고

난 어린 시절부터 근대로 갈수록 우리나라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민족이 뭔가를 발명하고 정복하고 성공하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식의 좋은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줄곧 고통받았으며 개혁은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좋든 나쁘든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람이 외국 침입자에게 살해당하는 희대의 치욕을 당하기까지 하고, 궁극적으로 주권이 외세에 완전히 빼앗기는 것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난다. 빼앗긴 주권을 훗날 극적으로 되찾기는 하지만 이것도 우리 힘으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며, 덕분에 이념 대립과 국토 분단, 동족상잔 같은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진다.

그래도 알고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는 비극만 있는 게 아니었고 지도자 복이 없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은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지도자가 그 가난하고 열악하고 위험하던 여건 속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반쪽만이라도 필사적으로 막고 올바른 이념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미국을 든든한 우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우리 민족은 기적적인 경제 성장까지 이뤘다. 이 정도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네 나라의 내력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있는 그대로 가르쳐지고 대대로 전수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행히도 심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공이 과를 객관적으로 월등히 압도하는 지도자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후세에 의해 저열한 중상모략과 부관참시를 당하는 꼴을 본인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피아식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민간인 오폭이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와전되고, 반역자가 소위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는 것을 보니, 이건 정치색을 떠나서 정말 뭔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거 일제의 만행에 그렇게도 분노하던 사람들이 북한이 더 최근에 저지른 잔학한 테러, 무력 도발, 민간인 학살을 왜 그토록 쉽게 잊어버리는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도덕과 정신을 무참히 파괴하는 사악한 북한의 사회 시스템을 왜 그리도 만만하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인터넷을 하면서 북한 김 정은 정권을 비웃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이고 무엇 덕분인지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정녕 없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 국민들이 사상이 글러먹어서 북한 정권을 직접 지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가슴으로만 애국을 할 뿐 머리와 시스템적인 안목으로 애국을 못 해서 극소수 불순분자가 벌이는 역사 왜곡과 선전 선동, 시체 장사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을 예전처럼 무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남한의 정신 기강부터 먼저 무너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발달된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 사회의 치부만을 편파적으로 들추고, 정부과 국민 사이에 극심한 불신풍조를 조장한다. 국가에 몸바쳐 충성한 애국자를 수구꼴통으로, 반역자를 민주투사로 바꾸는 역사 왜곡은 덤이다. 이것은 남을 교묘하게 쓰러뜨리려는 모든 '악의 무리'들이 분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취해 온 전략이다.

제주 4·3 사건도 그런 예에 속한다.
책의 저자는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한반도가 분단된 과정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들어온 배경부터 면밀히 파헤쳤다. 그 내역을 보노라면 한반도가 공산화되느니 차라리 일제 치하에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왕 먹힐 거면 소련이 아니라 일본에게 먹힌 게 오히려 축복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 일본 등 그 당시에 나름 선진국 축에 들던 나라들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던 소련 발 공산주의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마치 이단 종교 교리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기 매우 좋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을 모른 채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한반도 본토에서 떨어져 있던 제주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뒤엎으려는 계획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인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박 헌영은 6·25를 사주한 것 이상으로 4·3 사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좌익과 우익이 모두 연루된 처절한 피의 비극으로 끝난 데는 일차적으로는 '빨갱이'들의 교묘한 위장 전술과 잔학성, 피아식별의 어려움, 그리고 다음으로 상대편 진영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증오, 보복 심리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이 사건은 친북 세력이 일으킨 반란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좌편향 인사라도 감히 북한 쪽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성향의 정권 때 반란의 주동자가 명예가 회복되고 훈장이 추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건의 피해자인 당시의 제주도민들조차도 이것은 불순분자가 일으킨 무장 반란일 뿐 남북 북단을 반대하는 항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사건이 그렇게 왜곡되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덮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이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는 책을 왜 현업에 종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응용수학을 공부한 시스템공학 박사가 썼을까? 이 책을 쓰기 위해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얼마나 많은 문헌들을 읽고 공부해야 했을까?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분야에도 이런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천재인 공 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였고, 오늘날 흠정역이라고 성서 공회 성경보다 더 나은 우리말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분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 교수이다. 머리가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들이 맑은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좁은 길을 먼저 간 덕분에, 다른 국민들도 더 똑똑해지고 삶이 더 윤택해져 왔다. 어느 분야든 그 맥이 부디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비정상적인 국가인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더욱 궁금해졌다.
숙주가 완전히 죽어 버리면 바이러스 자신도 죽는데, 북한은 왜 하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 골라서 가 있을까? 북한도 처음에는 그래도 여러 당이 존재하고 주민들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주민은커녕 군인들마저 못 먹여 살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북한 수뇌부들은 지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도 남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색이 굉장히 강한 논객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고, 사람마다 사상적인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분이다. 그러나 저자의 일부 극단적인 평론이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여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어도, 친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프로필을 가진 멀쩡한 군사 평론가를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여론 조작과 선동의 결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의 비열하고 집요한 대남 도발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이것이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될 일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없을 터이며 4·3 사건에 대한 기록도 그러할 것이다. 팩트가 정치색으로 매도되지 않으면 좋겠고, 저자에 대한 편견 하나 때문에 진실까지 가려지는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만에 하나 이 책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색은 무슨 불확실한 음모나 들추고 국가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감사와 애국심을 북돋우는 건전한 정치색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직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는 것은 과거에 조선이 러시아 대신 일제에게 먹힌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축복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자부심은 충분히 생기며, 환단고기 같은 위서로 대리 만족을 얻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책이 널리 읽혀서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이 알려지고 자유와 안보의 소중함이 전파되고, 북한의 대남 도발사가 있는 그대로 폭로되며 내 조국은 이런 위태로운 와중에도 오뚝이처럼 굳게 일어선 나라라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13 19:26 2013/02/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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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uewave 2013/02/15 15:05 # M/D Reply Permalink

    씨스템클럽에서 왔습니다. 잘 쓰셨군요. 너무 자세하게 쓰셔 꼼꼼히 읽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실천하는 애국시민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사무엘 2013/02/15 18:42 # M/D Permalink

      아, 거기에도 글이 게재됐군요. 쑥스러워라~ 반갑습니다.
      진짜 꼼꼼하게 읽어야 할 글은 이 독후감이 아니라 책 원문이겠죠..
      저는 '애국'이라는 단어를 논하기엔 많이 미천하고 부족합니다. ^^
      인사 남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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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1.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세상을 30년 가까이 살면서 가끔은 내 모습에 내 스스로 좀 놀랄 때가 있다. 그 면모 중 하나는, 내가 어쩌다가 사상이 6· 25를 겪은 중장년 어르신 급으로 친체제 우성향이 강해졌나 하는 것이다. 부모님하고도 정치 얘기로 다툴 일 없고, 심지어 교회 내 몇몇 어르신들하고도 아주 친하고.. ㅎㅎ

난 사회 구조 적응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적성이나 진로만 보면 절대로 친체제 쪽으로 갈 수가 없는 성향이다. 의사, 변호사 같은 기득권층 직업도 아니고(그리고 사실 요즘은 그런 직업 종사자 중에도 오히려 좌성향 많다) 상위 0.1% 이내에 드는 부자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누구 좋으라고,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인터넷 네티즌들의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회관· 정치관을 피력하는 것일까?

이미 몇 차례 수위 센 글을 통해 밝혔듯이, 본인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거의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이 쳐죽일 놈의) 북한 때문이다”에 아주 강력한 뿌리를 두고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정치관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본인은 교회사를 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맥락으로 우리나라 현대사를 본다.

옛날에는 악의 세력들이 성경을 찢고 빼앗고 불태웠지만, 이제 성경을 물리적으로 없앨 수 없어졌으니 성경 자체를 변개하고 물먹이고 있다. 오늘날은 기독교를 무력과 박해로 없앨 수 없으니, 이제 기독교 자체를 교리적으로 변질시키고 정체성을 흐려 놓고 있다.

그것과 동일하다. 이북의 저 사악한 무리들은 이제 우리나라를 무력 침략으로 무너뜨릴 수 없으니 동일한 책략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사정이 워낙 막장이 되어서 positive를 할 수 없으니, 반대로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 까내린다.

그래서 북한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도 안 될 몇몇 극소수 인권 침해나 부조리, 그리고 피아 식별도 제대로 안 되던 정말 어지러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공산화를 막느라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벌어졌던 비극만 자꾸 들춘다. 그 과정에서 앞뒤 문맥 떼어내고 닥치고 남한의 공권력만 나쁜놈으로 만든다. 무슨 되도 않은 친일 공화국 이러면서 우리나라가 아주 더럽고 나쁘게 시작했고 생기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식으로 몰고 간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안 했으면, 결국 우리나라는 북한 치하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러나 잘 들어라. 한반도가 통일이 안 되고 있는 이유는 100% 절대적으로 김씨 부자가 자기 체제를 유지하려고 주민들에게 자유를 안 주고 국가를 개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커녕 북한과 외국으로서의 왕래도 자유롭게 안 되고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북한 수뇌부 때문이지 무슨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세 때문이 아니다. 내 홈페이지의 방문자라면 이 당연한 사실을 절대로 헷갈리지 말기 바란다.

분단이나 6·25의 책임도 절대적으로 소련에게 빌붙은 기회주의자 김 일성 이래로 북한 수뇌부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분단은 기독교로 치면 교리로 인한 분리와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이게 무슨 남북 공동의 책임이거나 남한 이 승만 정부의 잘못이란 말인가!

난 저런 식의 개념 없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기분이 상하고 불쾌하고 싫다. 나도 이 나라에서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게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저런 인간들의 붉은 선동으로부터는 내 나라의 체제를 꼭 지켜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게 된다.
외국에 나가 보면 애국자가 된다고 그러던가? 난 정말 애국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인터넷 SNS에서 나도는 좌경화 얘기들을 보면 기분이 급 우울해지고,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지는 것 같다..

북한은 어디 무슨 친일 청산 제대로 한 줄 아나? 한 번만 더 말하겠다. 걔들이 건국 초기에 자꾸 무력으로 시비를 거니까 일제에 협력했던 경찰과 군 간부가 자꾸 다시 필요해지면서 친일 청산을 다 무마시켰다. 일본군 장교 출신 박 정희도, 김 구의 암살범 안 두희도 다 그것 덕분에 6·25 전쟁 때 사면· 복권된 거 모르나?

난 북한 때문에 우리나라에 국가보안법이라든가 일부 자유의 제약이 존재하는 것도 적극 이해하며 국가의 정책에 호응한다. 독일에서 철십자가나 나치식 경례가 절대 금지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경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국민을 온통 억압하는 선군정치 병영 독재 국가와, 국가 체제가 개방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서로 적대 관계로 이웃해 있는데, 둘이 인구와 국력이 비슷하다면 같은 조건에서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키기 더 쉬울 것이며, 상대방에게 간첩 보내고 유언비어, 거짓 선동을 퍼뜨리기가 어느 쪽이 더 유리하겠는가!

나의 이런 일관된 사고방식은 누가 험담하듯이 정교 일치 사고방식 때문이 절대 아니며, '수꼴' 기질의 어르신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절대 아니다. 가정이나 교회의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내 정치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도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호주제, 국가보안법이 뭔지도 모르고 정치의 '정'짜도 모르던 평범한 정치 무관심형 청년이었다. 그런데 좀 적당하게 속여야 속아 주지, 정말 성경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한눈에 봐도 치우침이 심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위인에 대한 능멸과 국가 정체성 부정이 가히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니, 정이 확 달아나고 나는 나만의 색깔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논리의 완전성(completeness)을 위해, 현실성을 제끼고 만에 하나 극한,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이 세상이 완전히 '좌빨'이 말하는 나쁜 시나리오대로 됐다고 치자. 그래 봤자 배부르는 건 재벌? 친일파? 일본? 미국? 이런 데밖에 없다. 나는 최악의 경우 거지가 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나를 강제로 정치범 수용소에 집어넣거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꼴'이 말하는 나쁜 시나리오대로 되면..? ㅉㅉㅉ
이 세상엔 더 잃을 게 없어서 세상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회 구조 비관하고 통치자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나는 우리나라가 망하면 잃을 게 많은 사람임을 밝힌다. 예수 믿을 자유, <날개셋> 한글 입력기 만들 자유, 철도 오덕질 할 자유 등!

정말, 진심으로 말한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하나라도 없어졌거나 핵무기 시설이 폐쇄됐거나, 대남 적화 기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거나, 북한에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거나, 평양 이외의 지역 출신인 탈북자의 증언이 바뀌었다거나 하면 난 이런 강경한 정치관을 언제라도 철회하겠다. 김 대중, 노 무현 욕하던 것도 다 취소하고 고인에 대해 막말한 게 있다면 사과하겠다. 햇볕정책이 성공적인 구석이 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돈이 한두 푼이 들어간 게 아닌 일을 밀어붙여서 지금까지 북이 바뀐 게 무엇이며, 이뤄진 게 도대체 뭔가? '선한 열매'가 도대체 뭐가 있는지 내게 설명할 수 있으신 분?

이걸 비판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비판해야 하겠나? 박 정희의 경제 개발을 정말 집요하게 파헤치고 폄하· 비하하는 그 근성의 10%만 여기에 좀 균형 있게 기울여 주면 어디 덧나나?
그런 팩트에는 귀를 꽉 닫고 오로지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 욕밖에 할 줄 모르면, 그건 나랑은 인연 끊고 의사소통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지 내가 무슨 해석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나도 한때는 남북이 계속 사이가 나빠야 자기 배가 부를 '안보 장사꾼' 집단에 대한 생각도 다 해 봤다. 북한도 남한을 사실은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고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 진심이 외세 같은 다른 악의 배후에 의해 왜곡되어 감정 대립을 고조시켰다는 식의 주장.

그런데 최대한 선하게 봐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정황상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헌법을 보나, 하는 짓거리를 보나, 탈북자의 증언을 보나, 역대 대남 적화 지령들을 보나!

이제는 정말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보다는, 탈북자보고 변절자라고 부르는 종북 매국노가 버젓이 정계에 올라 있는 사실에 훨씬 더 분개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주적을 주적이라 하지 않고 남침을 남침이라 하지 않고, 학살자를 학살자라 하지 않으며, 우리가 계속 갖다 바치기만 하면 북한은 언젠가 변할 거라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정치인이 버젓이 활보하는데 왜 경각심을 갖는 사람이 없을까?

도대체 이 승만· 박 정희가 아무리 재임 중에 부패하고 잘못을 저지른 게 있기로서니, 그들이 그런 종북 인사들을 능가할 정도로 죄를 지은, 김 일성· 히틀러· 스탈린 급의 반역자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오로지 독재자의 딸(별로 나쁜 독재자도 아니었더구만)만 이유를 불문하고 낙선시키면 되지, 학살자를 학살자라 하지 않고 적을 적이라 하지 않으며 남침을 남침이라 하지 않는 인간이 대통령이 되는 건 아무 상관 없는가? 부정부패 병크, 도덕성 막장은 어디 반대편 진영엔 없는 줄 아는가?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다)

저게 무슨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며 사람 먼저인 사회인가? 저기서 사람이란 김씨 왕조를 뜻하는가 보다? 그 후보가 말하는 안보/대북 정책은 내가 보아하니 북한이 남한에 아무 군사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그냥 무슨 아프리카 국가처럼 평범하게 빈곤한 국가일 때나 말이 되고 성립하는 것들이다.

난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이 당선되는 걸 원치 않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나라 체제를 증오하는 반역자가 정권을 잡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밑 빠진 독에다 물 붓듯이 또다시 북에다 일방적으로 퍼 주던 시절, 미군 철수와 국가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이 논의되던 시절로는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정말로..

북한에서 '리명박 역적패당' 이러면서 쥐새끼 얼굴을 과녁으로 그려 놓고 사격 훈련을 하는 걸 보니,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명박 대통령이 막장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최소한의 국가관을 갖추었고 대북 정책은 지금까지 정말 훌륭하게 잘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대통령도 제발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2. 북한사의 불편한 진실, 황해 제철소 노동자 학살 사건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인 1998년에 황해도 송림시에서 벌어진 황해 제철소 노동자 학살 사건은 북한에서 우리나라 같은 무슨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시위· 봉기가 일어났다간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거나 인터넷을 직접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http://news.donga.com/3/all/20110121/34273324/1

참고로 송림시는 황해도의 북쪽(북한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의 북서쪽), 그리고 평양의 서남부에 있는 작은 위성도시이다. 제철소 하나가 여기 주민들 대부분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1) 제철소가 거의 유일한 밥줄인 이곳에서 1990년대 후반의 식량난과 경제난 때문에 전기가 끊기고 기계 가동이 중단되고 식량 배급도 중단되었다. 노동자와 그들 가족은 다 굶어 죽게 생겼다. “장비를 정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 이 때문에 참다 못한 일부 근로자는 고철이 된 제철소의 장비와 철 자재들을 중국에 몰래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려 했으며, 아예 몇몇 “착한”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이 일을 주선하여 철자재를 중국에다 팔아서 강냉이로 바꿔 와서 자기네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려 했다.

(3) 그래서 이건 위에다가는 절대 비밀로 하고 중국과 비밀 거래에까지 성공했는데, 강냉이를 실은 배가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간부들은 내부 밀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그들은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 재산 유출+반역 혐의로 현장에서 공개 총살을 당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자기 배 속을 챙기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노력하다가 간부들이 저 지경이 된 건데, 노동자들이 그 공개 처형에 호응을 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제철소에 전기 공급을 못 해 주고 노동자들을 굶긴 건 전적으로 국가 책임이지 않은가.

심지어는 노동자가 아니라 김 일성 측근 기득권 계층이던 어느 중년의 간호사조차도 양심적으로 이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공개적으로 항변을 하다가 곧바로 구타와 총살을 당했다. 김 정일 정권은 기근 속에서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로지 폭력과 공포, 위협만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송림시의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근무를 거부하고(어차피 기계가 안 돌아가니 할 일도 없지 않나?) 북한에서 보기 드물게 파업과 농성을 결의했다. 이제 더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끔찍한 피의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북한 정부는 아예 탱크까지 동반된 군대를 파견하여 작은 송림시 마을 전체를 군인들로 에워싸고, 부동자세로 앉아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탱크의 무한궤도로 밀어 버렸다. 수십 톤짜리 탱크에 깔려서 짓이겨진 피범벅 시신과, 잘려 나간 팔다리들.. 까지만 말하겠다. 시위에 가담했던 노동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무슨 신세가 됐을지 역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1998년 여름이면 김 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이제 막 북으로 소와 쌀이 가던 시절이다. 그때 평양 근처에서는 저런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문득 <작은 하마 이야기>가 떠오른다. “씨X 누구든 당에 개겼다가는 X되는 거예요. 아주 X되는 거야.”

생각을 해 보아라!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데 생생한 사진도, 현란한 CG도, 화가가 그린 그럴싸한 상상도도 없이 오로지 연필 스케치 그림만으로 뉴스에 묘사되는 장면치고 뭐 좋은 장면이 있던가? 파륜궁 수련자에 대한 고문 장면, 어린애가 회상하는 성폭행범의 모습, 그리고 탈북자가 회상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나 저런 학살극 모습처럼, 하나같이 사진을 남길 수조차 없고 CG로 재연하기는 너무 민망한 인권 유린 장면이다.

그림의 예 보기(혐짤 주의!)


이 엄청난 사건이 포털 사이트에는 알맹이는 쏙 다 빠진 채 완전히 왜곡되어 너무 평화롭게 소개되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83&docId=74337&mobile&categoryId=83

북한에 왜 시위, 봉기, 혁명이 없는지 이유를 아시겠는가?
일단 일어나도 언론 매체에 보도도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목격자나 당사자는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가서 살아 나오질 못하니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도 크다.

그리고 “굶주림, 폭력, 팀웍 해체를 위한 이간질(밀고, 배신)”이라는 3박자 시스템에는 당할 장사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저 글에만 해도 읽고 보면 아시겠지만 3박자가 골고루 들어가 있다.

강냉이 한 그릇에 남자는 동료를 밀고하고 여자는 간부에게 몸을 줄 정도로 사람을 육체와 멘탈까지 철저히 붕괴시키는 곳이 바로 생지옥 북한이다. 저런 곳의 실상을 알게 되면, 멘붕이란 말을 우리나라에서 장난으로는 선뜻 못 쓸 것이다. 과거 6· 25는 북녘 땅으로도 모자라 남한까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김씨 정권의 마귀적인 야욕을 막으려 한 처절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14 09:35 2012/12/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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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크몬드 2012/12/17 23:54 # M/D Reply Permalink

    아직도 역사를 잘 모르는 부분이 많네요.. 우리 모두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바른 역사관을 가지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1. 사무엘 2012/12/18 09:44 # M/D Permalink

      민감하고 심각한 내용의 글을 오해 없이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단언하는데 종북을 논하지 않고 친일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편파적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하고 체제를 부정하고, 그 편파적인 역사관을 자기 혼자만 알고 지내는 게 아니라 순진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뜨리고 선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반론과 반박을 읽어 보았고, 최대한 열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논리를 펴는 반면
      정치가 낀 얘기는 제 경험상 정말 그냥, 닥치고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자기가 관심이 없는 쪽으로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귀가 열리질 않습니다. 뭐, 그렇게만 해도 최소한 자기가 지지는 않을 테니.
      논리도, 감정도 안 통하면.. 서로 말을 안 꺼내는 것밖에 답이 없지요.

  2. 흠. 2012/12/22 00:15 # M/D Reply Permalink

    ㅎㅎ

    아까 민감한 글이라고 써주셔서... 이글을 찾아보고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당파이고, 진보도 좋아하고 보수도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인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애국" 둘다 애국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목숨걸고.... 새누리를 비판하는..나꼼수... 이번에 박근혜 당선자를 엄청나게 비판한 표창원 교수.

    이명박 정권을 비난하는 여러 기자들. 언론인.. 일명 진보 좌파 세력들... 뭐 당연히 문제도 많은 사람들이지만.

    전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 애국자" 라고 생각하거든요.

    보수분들 중에... 빨갱이 왜치시는 분들 .. 좋아합니다.. 애국자분들이거든요..

    ..

    저는 통합의 길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분모가 있거든요... "애국"입니다...


    애국하시는 분들은 다 좋습니다... ㅎㅎ

  3. 흠. 2012/12/22 00:44 # M/D Reply Permalink

    전 이번에는.. 기호2번에 투표했습니다. 저는 무당파라서.... 투표할때다마 성향이 바뀌는데요.

    친일이 싫다기 보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던... 언론인, 예술인, 지식인들을 보호하고 싶었거든요.

    목숨걸고, 애국하시는 분들이라 생각되어서.... 과거는, 전진하기 위한 동력이 되어야지 걸림돌이 되어선 안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참고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원론적인 견해지만

    이런말 할때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은.... 과거에 큰 희생을 한분들에게 너무 뻔뻔한 말이라.....

    너무 죄송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 판단을 하기에도 제 지식은 너무나 부족하구요.

  4. 흠. 2012/12/22 03:23 # M/D Reply Permalink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6566.html

    댓글 도배죄송하구요... 댓글 지워주셔도 좋습니다. 한겨레 글이긴 하지만....

    꼭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분명한 중도, 무당파입니다. 요즘은 약간 좌편향이긴 한데,
    아마 또 바뀔 사람입니다... 한번 보시고 좌향하라고 드리는 말씀은 절대 아니고, 그냥 한번
    시간나실때 편하게 그냥 아무 편견 없이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1. 사무엘 2012/12/22 14:06 # M/D Permalink

      의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에 먼저 집착한 진영은 반대편 진영이지 제가 아닙니다.
      저는 똑같이 일본이나 북한이나 과거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 나쁜 놈이고, 실력으로 그들을 이기면 된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습니다.
      그랬지만 그들이 먼저 훨씬 더 심하게 과거사에 집착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날조하고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더군요. 그래서 저 역시 반격을 하는 차원에서 북한의 진실을 폭로하는 글을 올렸을 뿐입니다. 그것만 아니면 저도 얼마든지 '미래지향'입니다.. ^^

      표 창원 교수의 행보는 꽤 의외이더군요. 좀 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믿을 만한 '백'이 있으니 교수 자리도 선뜻 내놓을 수 있었던 거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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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날 박 정희 전대통령을 둘러싸고 가장 핵심적인 까임거리에 속하는 아이템에 대한 나의 단상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겠다. 먼저 아래 링크 클릭.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03696

박 정희가 20대 중· 후반 시절에 일본군 장교 입대를 선택한 배경에 대해서 사료와 증언까지 동원하며 비교적 객관적으로 잘 소개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박 정희를 안 좋아하는 성향의 사이트의 자료를 소개했음을 밝힌다.

저기서 보면 알 수 있듯, 박 정희는 공부를 잘한 덕분에 일본군에 입대하기 전부터 이미 학교 교사였다. 교사는 학생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직업이며, 이것만으로도 예나 지금이나 고생 안 하고도(농사나 공사장 노동에 비하면!) 돈 잘 벌고 유복한 가정 꾸리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일등 신랑감 직업이었다.

그러나 강제로 결혼한 가정 생활이 마음에 안 들고, 동료 교사들과(특히 일본인) 사이도 별로 안 좋고, 머리는 좋은데 세상은 마음에 안 들고.. 결국 현실에 대한 탈출구로 그는 일본군 장교 입대를 선택하게 된다. 왜냐고? 그때는 조선군 장교 모집하는 자리가 없었으니까..

그는 그 뒤 이를 악물고 노력한 끝에 긴 칼 차고 돌아오게 되어, “예전에 자신과 감정이 안 좋던 일본인들까지 물 먹이고 복수에도 성공한다.”
그의 입대의 목적은 독립군 때려잡고 동족을 괴롭히는 천황의 개가 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그냥 개인적인 야망과 출세욕의 충족에 더 가까웠다. 뭐, 일본이라는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는 식의 낯 간지러운 미화도 할 필요 없고, 그냥 딱 저 목적 때문이다.

그는 육사급 학교를 2개씩이나 이를 악물고 그렇게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치고는,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 변방의 보잘것없고 힘들고, 동족과 최대한 안 마주치는 보직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박 정희가 김 창룡, 노 덕술 같은 급의 악질 친일 군인이라면 그 우수한 성적으로 당장 조선 헌병대의 간부가 되어서, 진짜 악랄하게 동족들을 괴롭히고 독립 운동가들을 때려잡으면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도 있었다. 그 정도였으면 내가 이런 글 쓰지도 않는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지 않은 박정희의 과거사 비방은 무지나 불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다카끼 마사오라.. 그 시절에 창씨개명 한 사람이 박 정희밖에 없는 줄 아나..? -_-;;

아 물론, 그래도 어쨌거나 일본군 장교의 길을 간 것은 민족 정서상으로는 어그로를 끌 만한 행동인 건 맞다. 인정한다.
그럼 그게 어느 정도 위상에 속하는지를 내가 더 현실적인 비유를 동원해서 설명해 보이겠다. 잘 보아라.

완전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받던 이공계 인재가 있었다. 그래서 국내 일류대 공대에(K대라든가..) 거뜬히 들어갔고, 국비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공부했다.
그랬는데 이 친구, 졸업 후 기업체에 들어가면 이거 뭐 열악한 보수에 완전 공밀레이며, 진로고 결혼이고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암울한 지경이었다. 기업체 말고 학교에는 더 박봉의 포닥이나 연구교수 같은 비정규직 자리밖에 없고..;;

참다못한 그는 돈 많이 벌어서 예쁜 여친 사귀고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리고 자기를 홀대했던 사람들의 콧대를 눌러 주려고, 의대 내지 로스쿨로 진로를 다시 바꿔 버렸다.


난 이게 박 정희가 그 당시 한 행동과 거의 똑같은 차원이라고 생각한다.
공돌이가 저런 선택을 하게 된 게 그가 기회주의자 속물이어서 그런가?

그래도 저 공돌이가 그것도 국비로 공부하여 공대를 졸업해 놓고는 도로 의대로 가 버렸으니 먹튀· 매국노라고 욕하려거들랑, 그 정도 의협심이라면 박 정희 욕하는 것 안 말리겠다. 정말로.나라에서 이공계를 위해 해 주는 게 없어서 출세하려고 의대로 진로를 바꿨듯이, 그땐 나라가 아예 없었으니 출세하려고 그냥 지배국의 군대 간부를 지원한 것이다.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짓까지 하지는 않았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게다가 자기 혼자 의대로 갈아타는 건, 아예 외국의 경쟁사에 덥석 들어가서 전 직장의 기술이나 영업 기밀을 팔아넘겨 떼돈 챙기는 짓보다야 100배 이상 더 착한(?) 짓이다. 안 그래? 이 점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글은 훗날 박 정희가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 한 행적에 대한 호불호 평가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으로서 그의 과거 행적을 논한 것임을 밝힌다.
다음은 이 글과 같이 생각해 볼 만한 팩트들..

1. 진보 성향 진영에서 박 정희보다 100배, 1000배 이상 존경을 받고 있으리라 여겨지는 김 수환 추기경조차도 일본군 장교 복무 경력이 있다. 아 물론, 개인적인 출세를 위해 '멸사봉공 진충보국' 쇼(?)까지 하며 자발적으로 입대했다고 전해지는 박 정희하고는 상황이 다를지도 모르나(저 쇼도 사실이 아니며 음해 세력들의 중상모략일 뿐이라는 반박도 있음), 김 수환의 경우도 '병'으로 강제 징집이 아니라 어쨌든 엄연히 '장교'인데? 내가 보기엔 둘 다 그냥 시대 정황상 별로 문제되지 않는 수준이다.

2. 박 정희는 그나마 나라가 없던 시절에 한국군이 없으니 일본군을 선택한 거라는 궁색한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 김 대중은 뻔히 나라가 있을 때 히로히토 일왕의 영정 앞에서 고개 숙여 조문을 해서 굉장한 어그로를 일으킨 바 있다. 다른 일왕도 아니고 히로히토는 2차 세계 대전 전범이며, 이 봉창 의사가 죽이지 못하고 실패해서 거의 반세기를 덤으로 산 사람이다. 이건 김 대중의 당시 행동을 문제 삼고 정죄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박 정희의 창씨 개명과 일본군 입대만을 굳이 그렇게도 집요하게 파헤쳐서 까야겠거들랑, 저것도 같이 따라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라는 뜻이다. 잣대를 일관성 있게 공정하게 적용하라.

3.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까지 했다고 비관하고 거기에만 피해의식을 갖기에는, 지금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막장인 정치인이 종북 분야에 많~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태극기와 애국가를 수치스러워하는 놈, 탈북자를 변절자라고 부르는 놈, 6· 25가 남침인지 북침인지가 헷갈리니 나중에 말해 주겠다고 하는 놈, 적을 적이라 하지 않는 놈 등. 친일파 문제에 그 정도로 목숨을 걸 정도면 저건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이지 않은가?

이런 인간들에 비하면 차라리 나라 주권이 없던 시절에 일본군 장교를 지낸 사람이 아주 애국자로 보일 지경이다. 난 상대적인 비교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굳이 비교를 해야겠다면 그렇게 생각한다.

4. 그리고 내가 늘 강조하는 지론이지만,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을 제일 방해한 원흉은 북한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이 일으킨 6· 25 전쟁이다. 이들의 무력 도발 때문에 경찰· 군 간부 수요가 폭증하게 되고, 결국은 쓸 사람이 없으니 친일파 출신 무인들에게 적용되는 면죄부가 커질 수밖에 없어졌다. 박 정희도, 심지어 김 구의 암살범인 안 두희조차 이때 복직크리!

컴퓨터 식으로 비유하자면, 과거에 윈도우 95가 당대의 가정용 PC의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NT와는 달리, 도스와 16비트 코드를 답습하고 불안정한 운영체제가 된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MS가 기술이 없어서 OS를 그렇게 만든 게 결코 아닌 것이다.

원인은 쏙 감추고 자꾸 결과만 얘기하면서 친일 공화국 드립과 역사 왜곡 선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현혹되지 말라. 결국 그들은 그때 굳이 저항하지 말고 북한 김 일성에게 나라 갖다 바쳤어야 했다는 말을, 표현만 바꿔서 하는 것이다. “나라 내놔 새X야! / 드.. 드리겠습니다. / 필요 없어!”

Posted by 사무엘

2012/12/06 08:26 2012/12/06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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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극의 우리나라 근현대사

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나라 역사는 옛날로 갈수록 좋아하다가 나중으로 갈수록 싫어하는 편이었다.
조선 말기로 갈수록, 우리 조상들이 뭔가를 정복하고 해내고 잘 됐다는 말은 없고, 안 좋은 내용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맨날 정치인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에 민초들은 고생하고, 무슨 정책을 내놓은 것도 다 실패로 끝났다는 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부터 슬슬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한 것 같다. 침략을 막아 내긴 했지만, 그때 국가 전체가 너무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로 조선은 아주 조직적으로 야금야금 팔다리가 뚝뚝 잘렸으며 심지어 왕비가 외국의 자객에게 끔살 당하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능멸을 당했다.

그 후 1905년에 을사늑약을 계기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군대가 해산 당한 뒤, 궁극적으로는 일본을 상대로 전쟁다운 전쟁 한 번 못 해 보고 1910년에 일본의 식민지로 치욕적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세상에!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때 정말 멘붕이란 멘붕은 다 경험하지 않았을까?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를 압승은 아니지만 어쨌든 명목상으로 이겼으며, 1차 세계대전 때까지만 해도 엄연히 '연합국' 진영이었다. 미국과 유럽 같은 강대국과 어깨를 나란히 한 국제적 '갑'이었다. 일본은 그 위치에 만족하면서 자기 식민지 T.O.만 잘 관리하고 있었으면, 한반도와 조선인들을 자기 식민지 치하로 영원무궁토록 차지할 수도 있었다.

그랬는데 애초에 한반도나 대만 같은 몇몇 지역만으로는 일본 수뇌부가 만족할 수 없었던지라, 그들은 감히 세계를 정복하겠다고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을 상대로 덤볐다. 그러다가 원자폭탄까지 맞고서야 깨갱 버로우.. 이 사건을 계기로 어부지리로 조선은 해방되었다.

비록 우리나라의 몇몇 소수의 애국자와 열사들이 외국을 상대로 용감하게 목숨 바쳐 독립 의지를 표명한 사건은 있었으나, 그것만으로 대세를 본질적으로 뒤집을 수는 없었다.

요컨대 우리 민족이 근현대에 경험한 모든 불행의 원인은 나라에 힘이 없고 국제 인지도가 듣보잡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민심과 국론이 정의를 추구하는 쪽으로 선뜻 일치하지 못했고, 국가가 효율적인 시스템과 과학 기술을 존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국력을 키울 수 없었다.

2. 분단이 가져온 뼈아픈 후유증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은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이념 갈등으로 인해 한반도에 통일 정부를 세우지 못했다. 곱게 갈라지기만 한 것도 아니라, 서로 상황을 오판한 끝에 북한이 일으킨 6· 25 전쟁으로 말미암아, 남북간의 오해와 앙금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민족 단결의 가능성은 더욱 안드로메다로 가고 말았다.

이건 정말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남북 두 나라의 등골을 다 빼먹은 이 전쟁은, 뒤끝 없는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의 기회를 유야무야 시켜 버렸고, 여론을 양 극단으로 몰아 가서 오늘날의 좌빨 아니면 수꼴로 요약되는 극심한 이념 대립의 빌미를 만들었다. 요컨대 자연스러운 역사 흐름을 전쟁이 크게 왜곡해 놓았다는 뜻이다.

솔직히 남한이든 북한이든 초대 내각에는 친일파 출신이 없었다. 해방 직후에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다 나중에 남북간의 무력 충돌이 잦아지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어지고 나니, 남한이든 북한이든 모두 군과 경찰 간부가 너무나 긴급하게 많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사람을 뽑는 우선순위가 바뀔 수밖에 없어졌을 뿐이다. “독립 운동가 잡던 실력으로라도 일단 당장 공산당들부터 좀 잡아 주셈.”이 된 것이다.

어디 이 뿐이겠는가. 국력이 강했던 일본은 또 사고 치지 말라고 아예 국제법상으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된 반면, 한국은 세계 최악의 깡패 국가로부터의 도발을 예방하기 위해 남자의 20대 초반 인생의 수 년을 군대에서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징병제 국가가 되었다. 이것도 알고 보면 힘이 없는/없었던 나라의 구성원이 치르는 대가인 것이다.

3. 비극에서 희망으로

여기까지만 가면 정말 희망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희망적인 역사는 대한민국 수립 후에 다시 발견된다.
비록 일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여자애도 초등학교는 반드시 보내고, 지도자를 전국민의 투표로 뽑고, 삼권 분립과 개인 자유가 보장되고 심지어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까지 걸 수 있는 지극히 선진적인 체제로 새롭게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공산품이나 식품의 포장지에서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제품은 판매처에서 교환해 드립니다” 같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 보장 문구만 보고도 감격하며, 심지어 그걸 보고서 실제로 귀순까지 한 사람이 있을 정도이다)

다 망해 가던 조선 왕조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서 노예 의식에 절 대로 절었던 단군의 후손들에게, 이 정도면 갑자기 사회 구조와 정치 모델이 너무 급격하게 업그레이드된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사기에 가까운 이런 자유는 정말 발달되고 성숙한 시민 의식과 충분한 자금, 안정된 안보 속에서나 실현 가능한 것이다. 중간에 시행착오를 안 겪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그 과정에서 비록 민주주의의 이상향의 일부를 무시하고 독재를 저질렀지만, 독재의 잠재적 막장성치고는 그래도 그 막장성을 국민을 위하고 살리는 데 그럭저럭 쓴 지도자를 만났다. 그래서 일부 한계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고, 일명 “피똥 싸는 4천 년 가난”을 떨쳐 버렸다! 어차피 그 전엔 나라가 워낙 가난하고 불안한 지경인데, 더 잃을 민주주의가 있긴 했는지가 궁금하기도 하고. -_-

우리나라는 부강해진 덕분에 위상이 크게 높아졌고, 그나마 피해의식 별로 없이 일본을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일례로, 몽골은 옛날에 고려 전국토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었다. 견디다 못해 그 동안 나랏님이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버리고 도망 갔을 정도임. 그런데도 우리가 몽골을 별로 안 싫어하는 이유는 그게 워낙 옛날 일이기도 하고, 피해의 여파가 오늘날 별로 안 남아 있고 우리가 몽골보다 훨씬 더 잘 살기 때문이다.)

북한을 그저 증오하고 입으로 원망만 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감히 자기네 군사력으로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엄두를 못 내게 국방도 강화되었다. 그리고 경제적 풍요를 달성함으로써 훗날 실질적인 정치 민주화까지 이룰 수 있는 토대까지 마련되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4. 불평할 것보다는 감사할 것이 더 많아

지금까지 나열한 것이 나의 국가관과 역사관이다.
우리나라는 복지 좋은 북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땅 좁고 자원 부족하고 강대국들에 온통 둘러싸인 곳에서 치열하고 험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여건에 놓여 있다. 이건 뭐 지리적 여건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 우리나라는 그래도 원망하고 비관할 것보다는 감사할 게 더 많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정 사상 권좌에 제일 오래 있었던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은, 그 암울하던 옛날 여건에서 정말 객관적으로도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게 월등히 더 많은 사람이다.
이것은 정치 성향과 개인 취향을 떠나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축구 경기 응원할 때만 민족이니 애국심 운운하지는 말라.

예를 들어, 정치계의 부정부패를 욕만 할 게 아니라, 부정부패를 시민의 항거로 바로잡을 수라도 있게 투명하고 개방된 방향으로 정부를 애써 수립하고 지켜 낸 초대 대통령과 내각에게 감사해야 된다는 말이다. 그건 당연한 권리가 절대로 아니다. 북한을 생각해 보라. 북한은 저 지경이 되도록 왜 민란, 봉기, 혁명이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고 있겠는가?

“이 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칭송만 하기에는 그 과정에서 무고한 죽음이 너무 많았다. / 6· 25 때 단순히 고의성이 없다고 넘어가기에는 실책을 너무 많이 저질렀다. / 자기 휘하에 있는 부하들의 부정부패에 너무 무지했다” 정도로 비판하고 때리는 건 괜찮다. 이견으로 받아들여 주겠다.
그러나 “분단의 원흉, 친일 공화국의 원흉” 이 따위 저질스러운 개드립이 내 홈페이지에서 내 눈에 띄는 건 내 양심이 절대로 용납 못 한다.

박 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정당한 비판의 범주에 드는 디스가 있는 반면, 일고의 가치도 없이 의도의 순수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개드립도 나돈다.
흔히 옛날 정권에 대해서 잘못된 사법 살인과 인권 침해가 가장 주된 실책으로 지적되곤 하는데, 나는 지금 사형 집행 안 하면서 피해자 유족 인권을 유린하는 것도 똑같이 상쇄 가능한 인권 유린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그건 옛날 정권만 특별히 잘못한 짓이라고는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5. 친일파와 종북주의자

그놈의 친일파가 뭔지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친일 콤플렉스가 굉장히 강하다. 흔히 친일파라고 의심 받는 우익, 뉴라이트, 수꼴이라고 불리는 진영에서 어그로를 끌 만한 발언을 가끔 하는 건 사실이다. 가령, 일제 강점기에도 좋은 점이 있었다고 국민의 보편적인 정서 이상 수준으로 부각시켜서 말한다거나, 일본 국민성을 지나치게 칭송한다거나 하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딱히 일본 정부로부터 지령을 받고 활동한다거나, 일본 우익 및 진짜 친일파 후손들과 직접적인 커넥션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북한만 비난하면서 안보 걱정을 많이 하는데, 실제로 그들은 젊은 시절에 군 복무도 성실하게 잘 했다. 주요 우익 “논객”들 중에, 최소한 자신이나 자기 아들은 군대에서 불법으로--정말 몸이 아파서 합법적으로 면제받거나 대체 복무를 한 건 제외-- 빼 놓고서 맨날 전쟁 운운하고 북한 디스하는 사례는 내가 아는 한 못 봤다(있으면 알려 주기 바란다).

그에 비해 흔히 종북주의자라고 의심 받는 진영은 어떠한가? 진짜로 북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인간, 국가 보안법 사범이 아직까지 있으며 잡히고 있다. 그들도 최소한의 지능이 있으니, 남한에서 대놓고 김씨 부자를 찬양한다거나 북한 체제 선전을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네거티브로 하는 짓이 뭐냐 하면,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피해의식을 조장하고, 옛날에 공산화를 막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어쩔 수 없이 행해졌던 과잉 방어를 문맥 떼어내고 닥치고 다 나쁜짓으로 매도하며, 왜곡된 현대사를 퍼뜨리는 것이다. 전적으로 북한이 저지른 죄악과 잘못을 슬쩍 남북 공동의 책임과 과오로 떠넘기고, 심지어 외세 탓으로 돌린다.

이게 내가 제일 참을 수 없는 면모이다. 밉든 곱든, 어떻게 세운 나라이고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불과 두세 세대 만에 국민들의 역사 의식이 오염되고 이렇게 허무하게 국가 기강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미군 철수를 주장하면서 미국 욕하느라 바쁜데, 자기 자식은 다 미국으로 유학 보내고 전쟁 나면 미국으로 제일 먼저 튈 입진보들이 즐비하다. 이런 인간들을 놔 두고 왜 뉴라이트 쪽만 욕을 먹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반면, 유 관순· 김 구를 테러리스트라고 욕하고 독도를 일본에다 돌려줘야 한다고 대한민국의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악용하고 있는 진짜 악질 생계형 친일파는 스스로 자신이 진보 진영 광주 민주화 유공자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김 모 씨 말이다. (유공자증 인증샷까지 인터넷에다 공개한 적이 있다!) 이 양반이야말로 진짜 혐한 일본 우익들하고 돈독한 커넥션까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러니 내가 아무리 정치적으로 평정심과 중립을 유지하려 해도, 어느 한쪽을 편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차피 넷심이란 게 민심의 아주 작은 표본 역할밖에 하지는 못하기도 하며, 본인 역시 비록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대외 이미지 관리도 해야 할 처지이긴 하나, 양심적으로 할 말은 해야겠다는 부담감도 적지 않게 느끼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19 08:22 2012/11/1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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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각형 2012/11/22 21:49 # M/D Reply Permalink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셨네요.

    세상적으로 보면 이런저런 사건들이 있었지만 근원적으로 나라의 흥망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게 확실한 것이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기적적 성장에는 상식을 뛰어 넘는 빠른 기독교화가 있었고 그렇기에 뼈에 박혀있던 노예근성이 제거되고 성경적 가치관이 많이 사회에 뿌리 박힌 걸 겁니다. 그게 선진 사회이고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냥 기적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복음의 힘이겠죠.

    그렇기에 친일파 따위가 나라를 말아 먹는게 아니라 배교한 교회와 기복신앙, 은사주의에 빠진(혹은 유도하는) 자들일 겁니다. 세상 사람 중에서는 중대한 생명 윤리를 말아먹는 동성애자, 자유로운 성, 낙태의 권리 따위을 주장하는 사람들일거고요. 그 분들은 아마 지구 멸망을 앞당기고 계신 것 같네요.

    1. 사무엘 2012/11/22 23:24 # M/D Permalink

      맞아요, 우리나라는 정말로 하나님이 보우하신 나라입니다.
      역사가 꼬이면 아무리 땅 넓고 자원 많고 농사 잘 되는 나라라 해도 백성이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에 반해 한반도 같은 곳에서 우리 민족이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정말 기적이지요.

      경제 발전은 그나마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그에 앞서 초대 대통령이 중국, 일본, 소련이 아니라 미국을 바라보고 기독교+자유 민주주의 이념으로 나라의 첫단추를 잘 끼워 놓은 것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그 값진 자유를 값진 줄 모르고 죄악으로 더럽힐 때, 자유는 사라지고 우리에게는 다시 속박, 억압, 구속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굳이 정치적인 속박만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나라를 망치는 부류에 대해서는 이미 님께서 잘 지적해 주셨고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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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 -- 下

(上에서 계속.. 현대 자동차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포니 2에 이어 후속 모델로는 프레스토와 엑셀이 나왔고, 중형차로는 국내 최장수 자동차 브랜드인 쏘나타가 탄생했다. 쏘나타도 그 전신은 코티나 마크 V의 파생형인 '스텔라'이지만, 후속 모델로 갈수록 미국 차와의 유사성은 없어지고 독창성이 증가했다.

한편, 당대의 최고급 모델이던 (각)그랜저는 미쓰비시 사와 공동 개발하여 동일한 차량을 한일 각국에서 서로 다른 브랜드로 시판했다. 처음엔 2000cc급만 나왔다가 2400cc와 3000cc 모델도 추후에 개발되었다. 오늘날이야 그랜저는 제네시스나 에쿠스에게 기함 타이틀을 내 주고, 그냥 쏘나타보다 약간 더 비싼 중대형급에 머물러 있지만,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그랜저의 이미지는 굳건하다.

또한 철덕이라면 그랜저와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사이에 매우 유사한 심상이 느껴질 것이다. 둘 다 등장 시기(1986 vs 1987)부터가 아주 유사하며 목적도 동일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각각 최고급 승용차와 최고급 호화 열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때보다 굉장히 대중화(?)와 서민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고급 물건의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린 뒤엔 포터(1톤)와 마이티(2.5톤) 트럭을 만들어서 기아의 봉고/타이탄과 경쟁하였다. 포터는 '짐꾼'이라는 뜻이고 마이티는 왈도체의 '힘세고 강한 아침' 할 때의 '힘센'이라는 뜻이니, 다들 트럭으로서는 적절한 작명이라 여겨진다. 한편, 그레이스라는 소형 승합차는 디젤 엔진으로 휘발유 엔진에 필적하는 정숙함을 구현해 내어 그 당시로서는 꽤 발전된 기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Aero City라는 대형 버스를 만들어서 대우 버스와 경쟁하는 양대 산맥을 구축했으며, 일본 차량을 기반으로 갤로퍼라는 SUV도 만들어서 쌍용 코란도를 제쳤다. 단, 갤로퍼는 현대 자동차가 아니라 '현대 정공'에서 제작하여 '현대 자동차 써비스'라는 다른 계열사와 다른 파생 회사에서 판매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현대 자동차 라인의 제품이 아니다.

아래 그림에 나와 있듯, 현대 버스(왼쪽)는 대우 버스(오른쪽)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바퀴 위쪽의 차체 윤곽이 완전한 원호를 이루어 동그랗다는 특징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기술을 개발해 나가던 현대에서는 부품의 국산화 비율을 차츰차츰 높인 끝에, 드디어 설계부터 프레임, 엔진까지 모든 공정을 국산화하여 로얄티를 지불하지 않는 차를 내놓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엑셀의 후속 모델 소형차인 액센트(1994)이다. 포니가 자체 모델이라면, 액센트는 자체 개발이다. 자동차계의 KTX 산천 및 서울 지하철 609편성인 셈이다.

포니를 만들던 그 회사가 이제는 제네시스와 에쿠스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실을 위해 공돌이들을 얼마나 갈아 넣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존경스럽다. 비록 국내에서 워낙 독보적인 위치에 있어서 가격 횡포도 많이 부리고, 이 때문에 현대라는 기업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에쿠스야 1세대 '각진' 모델은 과거의 그랜저처럼 미쓰비시와의 공동 개발이지만, 제네시스는 현대의 독자 개발 모델이며 에쿠스도 2세대 모델은 외형이 제네시스와 더 비슷해져 있다. 제네시스와 에쿠스는 현대 차임에도 불구하고 외제차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인지 차 주변에 현대 앰블렘이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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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 자동차

신진 자동차, 동아 자동차를 거쳐서 지금의 쌍용이 된 기업이다. '더블 드래곤'은 엄밀히 말하면 '쌍룡'으로 표기하는 게 맞으나, 어차피 저건 고유명사이니 굳이 꼭 맞출 필요는 없다.
여기는 잘 알다시피 코란도라는 4WD SUV 외길 브랜드만 밀어 온 기업으로 유명하다. 물론 옛날에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때문에 쌍용에 배당된 차종 TO는 저것밖에 없어서이기도 했고. -_-;;

옛날에 4WD 차량은 “전쟁 났을 때 국가에서 군용차로 징발해 간다. 그 대신 차의 덩치에 비해 각종 세금은 파격적으로 감면”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쟁 안 날 거라 믿고 코란도를 장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됐지만.
그리고 코란도라는 이름은 “KORean cAN DO”라는 애국심 드립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혹시 아시는가? 어렸을 때 차 카탈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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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1세대 코란도.

나중에는 같은 SUV 차종 안에서도 코란도 패밀리라든가 무쏘라는 다른 차를 내놓기도 했으며, 소형 승합차 이스타나, 그리고 고급 승용차 체어맨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체 기술이 부족하여 주력 차종인 SUV에서 현대에게 추월당하고 주춤하다가, 중국 상하이 자동차에게 매각+처참한 먹튀를 당했다. 그리고 최근엔 잘 알다시피 구조조정+장기간의 파업 사태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져 있다.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할 텐데.

공장이 평택에 있는 건 파업 사태와 관련된 뉴스 보도 때문에 알게 됐다.

※ 르노 삼성 자동차

삼성은 삼성 전자를 등에 업고 있는 굴지의 대기업이지만, 이 그룹의 회장님은 롤스로이스와 마이바흐를 굴리는 굉장한 자동차 덕후였으며 자기 회사에서 자동차까지 만들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0년대 말에 자동차 계열사를 만들었지만, 이미 국내의 차 시장은 포화 상태였고 IMF까지 터지면서 삼성 자동차는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르노라는 외국 회사가 이를 인수하여 르노 삼성 자동차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처음부터 혼자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없으니 여기서도 주로 일본 닛산 자동차를 현지화하여 생산· 판매하는 형태였다. 생산되는 승용차는 잘 알다시피 SM_n이라는 형태로 작명되었으며, 특히 현대 계열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삼성 차를 선호했다고 회자된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직원들을 상대로 희망 퇴직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공장은 부산 강서구에 있음.

※ 아시아 자동차

아시아 대학교만큼이나 지금은 사라진 회사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학처럼 막장 행보를 간 회사는 물론 아니었다.
금호 그룹만큼이나 국내에 얼마 안 되는 호남 기업 중 하나이다. (그래서 공장도 광주에~!) 그러고 보니 아시아나 항공도 이쪽 계열사인데, 이 이름도 '아시아'에서 유래되었다. ㅎㅎ

197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를 판매하다가 나중에 기아 자동차에 인수되었다. 둘 다 기업 앰블렘이 비슷하게 생긴 게 이 때문인 듯하다. '록스타'라는 SUV, 콤비· 코스모스라는 버스, 타우너라는 트럭이 이 회사의 제품이며, 특히 대형 버스 그랜버드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 브랜드이다. 쌍용이 SUV라면 아시아는 버스인 듯.

내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 아시아 자동차에서 만든 시내버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차내의 선바이저(sun visor)에는 “여행은 아시아 자동차 버스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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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살펴보면 과거에는 PowerPC, Alpha, MIPS 등 여러 아키텍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닥치고 x86(-64) 아니면 ARM밖에 살아남은 게 없다. 프린터는 HP 말고 다른 제조사는 가히 듣보잡으로 전락했고, 그래픽 카드는 nVIDIA에 기껏해야 ATI나 인텔 말고 지금 생존한 물건이 있나?

그런 것처럼 자동차도 과거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제조사들이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기술과 자본줄이 탄탄한 한두 업체 말고는 다들 몰락했다. 사실은 어느 분야라도 안정화가 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 와중에 시종일관 살아남았고, 완전히 새로운 차를 밑바닥 부품부터 스스로 다 설계하고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국내 기업은 사실상 현대가 유일하다.

물론 그게 전적으로 현대의 기술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닐 것이다. 보호 무역 버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로부터 지원과 특혜도 엄청 받았을 것이며 “내수는 비싸게, 수출은 싸게” 식으로 온 국민이 간접적으로 국내 기업을 육성하는 데-_- 일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런 특혜를 입지 않고서야 이미 수십년 이상의 격차가 존재하는 외국의 넘사벽급 자동차 기술을 어떻게 따라잡겠는가? 또한 그렇게 혜택을 처묵처묵하고도 먹튀하는 막장 기업도 많은 판에, 현대 정도면 그래도 다른 기업들보다 기술을 중시하여 성장도 많이 했다. 그로 인한 막대한 양의 수출+일자리와 국부 창출은 덤이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현대를 좀 칭찬하는 논조가 되고 말았는데, 난 딱히 현대 자동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깔 건 까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라는 중립적인 시각임을 밝힌다. 철도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자동차 쪽 덕질을 오랜만에 해 보니 재미있다. ^^

Posted by 사무엘

2012/10/01 19:32 2012/10/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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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yn 2012/10/02 17:48 # M/D Reply Permalink

    지나가다 한마디 첨언 합니다

    x86, arm 의 점유율이 높긴 하지만 콘솔 시장에서는 PowerPC계열의 절대 강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Xbox, Xbox360, Ps3, Wii, 이번에 나올신형 Wii 까지 전부 PowerPC 계열의 CPU를 사용합니다 ^^;

    1. 사무엘 2012/10/02 19:54 # M/D Permalink

      헉, 게임기는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

  2. Lyn 2012/12/27 17:49 # M/D Reply Permalink

    http://www.bloter.net/archives/138706

    재밋는 기사네요. AMD가 게임기 시장에 진출할거같다는 기사입니다. 이미 고성능 컴퓨팅 시장은 완전히 뺏겼으니 인텔 대비 우위를 쥐고있는 GPU/APU 를 무기로 게임기시장 공략을 하려나보네요

    1. 사무엘 2012/12/27 19:44 # M/D Permalink

      와, 그러게요.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Lyn 님, 제 홈페이지에서 댓글로는 오랜만에 뵙네요. ^^)

  3. Lyn 2012/12/27 22:39 # M/D Reply Permalink

    전 철덕이 아니라 겜덕이고
    정치성향도 다르고
    세벌식 사용자도 아니다 보니 이런 글아니면 리플 달수가 ^^;

    1. 사무엘 2012/12/28 10:03 # M/D Permalink

      으하하.. 그런가요?
      사람이 서로 모든 면모가 일치할 수는 없겠지만, 철덕은 돼 보세요.
      인생에 낙이 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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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 -- 上

교회사에서 특별히 성경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영어 성경이란 건 위클리프 이래로 킹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아주 점진적으로 발전이 이뤄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성경전서(위클리프), 최초로 왕이 승인한 성경(커버데일/그레이트), 최초로 국내에서 인쇄(매튜), 최초로 중역이 아니라 원어에서 곧장 번역(제네바), 최초로 위원회가 조직되어 번역(비숍), 최초로 장· 절 구분 추가(제네바) 등등~~
그러다가 이 모든 장점들이 합쳐져서 성경의 종결자를 이룬 것이 킹 제임스 성경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도 그렇게 점진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가 개통한 게 잘 알다시피 1899년 경인선인데, 그 무렵에 왕이나 외국 외교관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최초로 자동차라는 기계가 다니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에 고종 황제가 탄 어차(御車)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다임러 리무진이었으며, 운전대는 오른쪽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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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때는 시보레, 포드 같은 수입 외제차가 부유층을 중심으로 도로를 누볐다. 드라마 각시탈을 보니 올드카를 애써 임대한 것까지는 좋으나, 운전대가 우측통행을 염두에 둔 왼쪽에 있는 것은 고증 오류이다. 그 시절에는 한반도에서도 차량이 일본처럼 좌측통행을 했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자동차 광고)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자동차 정비 공장까지는 있었지만, 그 불모지에서 자동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최 무성· 최 혜성· 최 순성 엔지니어 삼형제가 국제차량제작이라는 무슨 다국적 기업 같은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1955년에 '시발(始發..;;)'이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수입한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이게 바로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대한민국 땅에서 한국인이 최초로 만들어 낸 자동차이다. 해방 후의 시기이니 운전대는 왼쪽, 주유구는 오른쪽으로 우측통행 기준이다.

1960년대부터의 국내의 자동차 역사는 회사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기아

창업주가 한 근성 하는 분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부터 차근차근 자전거, 오토바이, 삼륜차를 거친 끝에 마침내 자동차까지 직접 만드는 수준으로 기업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천리 자전거가 원래 기아 산업의 계열사였다.

기아에서는 1960년대에 일본 차체를 바탕으로 삼륜차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은 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륜차가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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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차는 승용차가 아니라 트럭 형태로만 만들었던가 보다.
이런 차는 덩치가 작아서 좁은 골목길에 잘 들어가고 가격과 유지비도 저렴해서 실속이 있었다. 그래서 짐 실어 나르는 생계 수단 및 사업 밑천으로 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잉여가 된 '1종 소형' 면허가 바로 삼륜차 운전이 가능한 면허이다.

1974년에 기아는 기존 일본차(마쓰다 파밀리아) 프레임을 기반으로 '브리사'라는 소형 승용차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산 보급형 승용차라고 한다. 정부가 요구한 수준의 국산화율을 가장 먼저 달성하였으며, 배기량도 1000cc대의 소형이어서 당대 세계 경제를 강타하던 오일 쇼크에 대응하기에도 유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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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등학생 시절이던 1990년대 초에 브리사 실물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욱 애증이 교차한다. 하지만 멀쩡한 모습뿐만 아니라 사고가 나서 부서진 폐차 상태의 모습으로도 많이 봤다. 사진으로는 저 흰색 사진이 유명해서 인터넷에 많이 나돌지만, 본인은 자주색 도색을 더 자주 봤다. 그리고 브리사 2는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기아에서는 이미 브리사의 디젤 모델까지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에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승용차 생산을 못 하게 되면서 계획은 흑역사가 되고, 그 대신 봉고(1톤급 소형 승합차 및 트럭), 타이탄(2.5톤 트럭), Boxer(4.5톤 트럭) 같은 다른 차종에서 근근히 인지도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트럭으로는 유일하게 사륜구동이 가능한 영농인 최적화용 트럭인 '세레스'를 만들기도 했고, 비슷한 맥락에서 레토나나 두돈반 같은 군용차도 이 회사에서 만들어서 납품한다.

훗날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리면서 기아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고, 중형차로는 콩코드를 밀기 시작했다. 1990년대로 들어서서는 캐피탈, 세피아, 크레도스 등 다양한 차들을 만들었으나, 오늘날은 쏘나타의 경쟁 모델인 K5, 그랜저의 경쟁 모델인 K7 같은 식으로 K_n이라는 간단한 네이밍으로 자사 제품에 이름을 붙이는 듯하다.

기아 자동차 소속 공장으로는 과거의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광주 공장, 화성 공장, 그리고 광명 소하리 공장이 있다. 다만, 잘 알다시피 기아 그룹이 IMF 시절에 부도가 나면서 오늘날 기아 자동차는 현대 자동차 그룹의 계열사가 되었다. 현대 자동차 그룹 아래에 현대 자동차와 기아 자동차가 나란히 있는 셈이다. 응?? 그래서 오늘날 생산되는 현대 차와 기아 차는 일부 엔진 부품이 상호 호환되기도 한다.

※ 대우

한때는 세계 경영(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을 부르짖으며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던 대기업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브랜드로 전락했다. 안습.

대우 자동차는 현대나 기아에 비해서는 기업의 정체성을 설명하기가 다소 복잡하다. 신진 자동차 공업, 새나라 자동차, 새한 자동차 등 경영 주체가 여러 번 바뀌었던 회사가 최종적으로는 GM 코리아를 거쳐서 대우 계열사로 넘어온 형태이기 때문이다. 대우 자동차라는 정식 명칭이 붙은 회사가 생긴 건 1983년의 일이다. 물론 이 이름은 그로부터 20년 남짓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1990년대 초반에는 가끔 완전 옛날 스타일의 대형 트럭이 보였다. 요즘 국내에는 군용차를 제외하면 버스나 대형 트럭이 엔진룸과 앞바퀴가 운전석의 앞에 달린 형태가 없으며, 그런 건 미국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트럭은 미국 스타일이었고, 앞에 SMC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새한 자동차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반, 새한 자동차 시절에는 시보레 1700 프레임을 기반으로 제미니, 카미나 같은 차를 내놓았다가 최종적으로는 순우리말 명칭인 '맵시', '맵시-나'라는 소형차를 만들어서 현대 포니 및 기아 브리사와 경쟁했다. 이 차의 후속 모델이 바로 1980년대 중반에 출시된 르망이며, 현대 엑셀 및 기아 프라이드와의 경쟁 차종이다.

1980년대에 대우에서는 중· 대형차로는 로얄/살롱 브랜드를 밀었다. 로얄 XQ, 로얄 살롱, 슈퍼 살롱, 로얄 프린스 등등~ 이것은 독일의 GM 계열사인 오펠 사에서 생산한 '레코드'라는 차종의 파생형이다. 뒤이어 임페리얼이라는 희대의 기함급 차종을 내놓기도 했으나, 이것은 품질 문제로 인해 흑역사가 되었다.

이 시절에 계기판이 디지털 액정(자동차의 주행 속도가 아라비아 숫자로 뜸!)이고 헤드라이트에까지 와이퍼가 달린 차는 대우 차밖에 없었다. 그랜저에도 그런 오버스러운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우는 외제차 프레임을 우려먹기만 할 뿐 여타 토종 자동차 회사들에 비해 고유 모델과 기술의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으며, 이것이 훗날 회사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대우에서는 대우 국민차라고 대우 조선(대우 자동차가 아님!) 산하의 다른 계열사를 통해, 그 이름도 유명한 '티코'라는 경차를 만들기도 했다. '다마스'와 '라보'라고 경차형 승합차와 트럭도 만들었고 심지어 지금도 종종 굴러다니는 게 보이지만, 역시 티코의 인지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한때 대우가 쌍용 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번복되었고, 대우 그룹의 경영 악화로 인해 오히려 자기가 GM으로 다시 인수되었다. 2011년부터는 잘 알다시피 GM대우라는 이름에서 '대우'라는 단어가 아예 빠지고 그냥 '한국GM'이 되었다. 그렇게 자동차 제조사로서 대우라는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까지도 버스에서는 대우라는 브랜드가 압도 다수의 인지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우 버스'는 지금의 한국GM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기업이다.

※ 현대

현대 그룹의 창업주이고 일명 '왕 회장'이라고도 불리는 그분이 자동차 정비업에 만족하지 않고 자동차 제조업에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1967년부터 현대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공장은 울산과 아산에 있는 걸로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물론 현대라고 해서 용 빼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맨땅에서 자동차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미국 포드 사로부터 기술 협력을 받아 미국 차인 코티나(Ford Cortina)를 국내에서 면허 생산했다. 그러나 포드와는 곧 결별하고 일본 미쓰비시 사와 제휴를 했는데, 현대 차들이 이례적으로 연료 주입구가 대우 차들과는 달리 오른쪽에 아닌 왼쪽에 달려 있는 게 이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승용차 '포니'를 빼고서 현대 자동차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포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다. 비록 여전히 일제 부품으로 엔진을 만들었고 설계도 한국인이 아닌 이탈리아의 '쥬지아로'라는 디자이너가 했지만, 어쨌든 현대 자동차는 1976년 이전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모양의 자동차를 한국 땅에서 생산해 냈고 수출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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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D를 형상화한 현대 자동차의 옛 앰블렘이 참 인상적이다.
당장은 이득이 없는 것 같은 무모한 도전을 통해 경험과 기술이 쌓일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대 자동차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9/29 08:27 2012/09/2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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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下

아문센이 선택한 경로는 스콧이 선택한 경로보다 남극점에 96km 정도, 즉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만치 더 가까운 경로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가는 것이었다. 스콧의 경로는 선배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경로와 동일했다. 거기에다 아문센은 스콧보다 출발도 열흘 정도 더 일찍 했다.
아문센은 1등에 대한 압박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려 시도를 했지만 역시 맹추위와 준비 미숙 때문에 포기하고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아문센은 북극점을 먼저 정복하려 했는데 선두를 미국인에게 빼앗겨서 조바심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섀클턴은 스콧보다 먼저 남극 탐험을 갔지만, 준비 미숙과 물자로 부족으로 인한 실패를 인정하고 북극점을 약 150km 정도 앞둔 지점에서 미련 없이 진행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사람이다. 그 대신 모든 대원들이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문센은 남극점을 빨리 찍고 돌아온다는 그 목표에만 집중하여 대원들도 전부 항해 측량술을 알고 스키를 능숙하게 탈 줄 알며 혹한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이 뛰어난 베테랑들로 뽑았다. 그러나 스콧은 겸사겸사 학술 탐사에도 큰 비중을 둬서 대원 중엔 과학자들도 있었다.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선호했던 셈. 스콧은 그 힘든 와중에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극에서 채취한 광물을 16kg치나 갖고 보관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북극 원주민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대로 남극에 갈 때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두꺼운 가죽옷을 입었고, 짐을 싣는 썰매는 개들을 이용해 운반했다. 현지에서도 수시로 바다표범들을 사냥해서 식량을 비축했고, 탐험 중에도 효용이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개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잡은 개고기를 다른 개에게 사료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콧은 원주민들이나 입는 가죽옷을 저속하다고 거부하고 개고기도 안 먹었으며, 현지에서의 사냥 역시 할 생각을 않았다. 개나 말이 죽으면 잡아먹기는커녕 묻어서 장례를 치러 줬을 정도이니! 모든 물자는 대영제국에서 조달하는 것만으로 충당하려 했던가 보다. 그러나 영국제 모직물 코트는 옷이 물에 젖고 얼면서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개 대신 조랑말과 스노우모빌(설상차)을 활용했는데, 말은 평범한 환경에서야 개보다 먹는 양에 비해 큰 수송력을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별도의 사료를 챙겨 가야 하며 개들보다 추위에 훨씬 취약했고 잘못해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었다. 스노우모빌은 매서운 추위와 험악한 지형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했으며, 후원사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양의 통조림도 얼어서 안 따지거나 심지어 터지기 일쑤였다.

영국이 자랑하던 자본력과 당대의 과학 기술은 남극에서만은 그들이 한낱 피지배민 루저로 치부하던 원주민들의 생활 노하우를 앞설 수 없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부터 그 해 12월 14일까지 55일 동안 거의 1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23~24km씩 진행한 셈. 남극점 주변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었으니 그들이 1등을 한 게 확실했다.

아문센은 영국인들이 한 근성을 하기 때문에 스콧 팀도 아마 며칠 안으로 남극점에 곧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콧 팀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4일이나 지난 이듬해 1월 17일이었다. 출발 시기가 열흘이 차이가 나고 거리 차이가 100km 정도 났으니 두 주~보름 정도의 간극은 자연스럽지만 한 달이 넘게 차이가 났다는 건 스콧 팀이 시스템적인 비효율로 인해 진행도 더뎠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하루 전인 16일부터 무수한 개들과 썰매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극점에 다다르니 거기엔 역시나 노르웨이 깃발과 함께 천막이 만들어져 있었고, 약간의 물자와 쪽지가 적혀 있었다. 쪽지에 적힌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고 한다.

“존경하는 스콧 대장님,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서 귀환하지 못한다면 대장님께서 이 쪽지를 본국으로 전달해서 우리에 대한 증거로 삼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료품과 털옷을 좀 남겨 놓고 가니,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대장님의 무사 귀환을 빕니다. 아문센 올림”


아문센은 라이벌을 배려해서 정말 정중하고 대인배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었지만, 이 문구는 스콧에게는 가히 자존심을 건드리고 비수를 꽂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스콧 팀은 물자가 부족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문센이 남긴 보급 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문센 팀은 1월 25일에 자기네 베이스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갔던 길의 역순으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귀환이 42일이 걸렸으니 55일이 걸린 출발보다 기간이 두 주 정도 더 단축됐다.

그러나 개도, 말도, 설상차도 없이 터덜터덜 허탈하게 귀환하던 스콧 팀에게는 이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귀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경과한 2월 17일인데 이들은 거의 반밖에 진행을 못 했다. 그리고 이때 팀원 중 지질학자인 에드가 에반스가 가장 먼저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미 몇 번 추락 사고를 당해서 뇌진탕과 폐렴 증세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안 좋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경과하여 3월 17일이 되었다. 귀환 60일째이고 전체 경로의 70% 정도는 완주한 시점이었다. 대원 중 로렌스 오츠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서 이미 괴저가 발생하고 거의 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원들이 자신을 부축하고 자신과 보조를 맞추느라 귀환이 지체되고 있는 걸 알았으며, 제발 자기를 버리고 먼저 가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스콧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오츠는 그 날 저녁, “대장님, 밖에 좀 나갔다가 오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는 불편한 발을 이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캠프 밖으로 절뚝거리며 나갔고, 그 길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는 시신조차도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눈보라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눈에 찍힌 발자국조차 이내 사라졌던가 보다.) 스콧은 오츠가 일부러 죽음을 택했다는 걸 눈치 채고, 그가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맞이했다고 슬퍼하는 한편으로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오츠의 살신성인도 나머지 세 명을 궁극적으로 살리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악천후 때문에 3월 19일자 캠프에서 스콧 일행은 더 나아가질 못하고 1주일이 넘게 고립되었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약 200km쯤 남았기 때문에(이미 1000km를 넘게 이동했고, 다 와 감) 저 기간 동안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근처의 보급 기지에도 도착했을 것이고, 베이스 캠프에까지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했을 터이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남극에 무슨 생각으로 물을 끓여야 하는 번거로운 홍차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식료품과 연료는 이미 다 떨어졌고 홍차는 생잎을 뜯어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3월 29일, 나머지 대원인 에드워드 윌슨과 헨리 바우어즈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어둠, 절망으로 인한 기력 소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탐험대장인 스콧도 같은 캠프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기장에 죽은 두 대원에 대한 언급도 있기 때문에 스콧이 가장 나중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익사나 추락사처럼 단번에 훅 간 게 아니라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굉장히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은 셈이다. 스콧 일행의 시신은 그로부터 무려 8개월 뒤에 남극에 여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미국의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자, 다음 그림은 아문센(빨간색)과 스콧(초록색)의 남극 탐험 경로를 정리한 것이다. (출처: 영문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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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영국 신사의 기품을 지키면서 남극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콧을 애국자와 영웅으로 열렬히 치켜세우고 떠받드는 한편으로, 어쨌든 1등을 해 버린 아문센을 헐뜯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때는 아예 대놓고 역사를 왜곡하여 스콧이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고 가르치기까지 하다가, 국제 사회로부터의 조롱과 비웃음을 한몸에 받고서야 슬쩍 시정했다.

영국이 이런 데서 은근히 찌질한 짓도 좀 했다. 영국인 중에서 양심껏 소신껏 아문센을 지지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한 사람은 스콧의 롤모델 탐험가이던 섀클턴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이 글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아폴로 13호 같은 ‘성공적인 실패’를 기적적으로 이룩한 덕분에 이 양반 역시 아문센만큼이나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급인 위대한 탐험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 보기 바란다.

콩진호, 콩라인-_- 같은 예외를 빼면, 세상 역사에서 2등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지 못하는 게 통념이다. 허나, 남극에서만큼은 영국의 저런 집요한 로비로 인해 각종 시설물에 꼭 ‘스콧-아문센’ 브랜드가 심심찮게 남아 있다.

남극의 정복자 아문센은 거의 60년 뒤에 달에 갔다 온 닐 암스트롱만큼이나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하였고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노르웨이 국내에서야 물어 보면 잔소리. 지금 한국으로 치면 김 연아, 안 철수 급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듣보잡 빈곤국이던 노르웨이의 위상을 그만치 끌어올린 사람이 역사상 누가 있었겠는가?

아문센은 교통 덕후여서 이 탐사 후에도 활발히 탐험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는 항공기 기술이 개발되던 시기인지라 남극을 아예 비행선으로 횡단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8년에 비행선 사고로 인해 행방불명되는 걸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 경쟁을 할 때도 인공위성을 먼저 띄우고 달에 사람을 먼저 보내려고 기싸움이 엄청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전적으로 자본력과 기술에 의해 승패가 기울었으며, 다행히 우주 공간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도 없다. 또한, 소련은 자기네 연구 과정을 워낙 폐쇄적으로 공개를 잘 안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아문센과 스콧에 필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11 19:39 2012/06/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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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yn 2012/06/12 09:19 # M/D Reply Permalink

    섀클턴은 위대한 탐험가로 불리고있죠 ...

    1. 사무엘 2012/06/12 13:06 # M/D Permalink

      네, 그렇습니다.

  2. 왕배덕배 2012/06/20 09:41 # M/D Reply Permalink

    됐어! 개고기 섭취는 몸을 무겁게 할 뿐이야

    ...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요...

    1. 사무엘 2012/06/20 09:52 # M/D Permalink

      1. 개고기가 몸을 무겁게 하는 줄 알았으면 광물 채취야말로 진짜 몸을 무겁게 한다는 걸 알았야 했을 겁니다. 스콧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16kg짜리 돌덩어리를 사람이서 질질 끌고 갔으니 안습..;;

      2. 남극 탐험엔 생존 전문가 김 병철도 어울리지 않나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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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上

인류 역사상 인간이 지구 밖으로 제일 멀리 나간 여행은 1970년의 아폴로 13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세 명의 승무원이 모두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폭발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후 승무원과 관제 센터 직원들은 가히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승무원들은 갈증과 추위에 떨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m(현재는 더 높아져서 8850이라고도 하는데)의 높이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이며,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반 후 생환에 성공한 것은 1953년의 에드먼드 힐과 텐징 노르게이의 공동 등반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산들은 높아 봤자 대류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류권에서는 고도가 1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도 정도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높은 산들은 일년 내내 기온이 영하이고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 지대이다.
또한 해발 고도가 5천 m 정도 되면 기압도 해수면의 절반 정도로 떨어지고,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 무렵에서는 아예 1/3기압이 된다. 물은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에 밥을 지어도 쌀이 잘 익지 않으며, 산소도 덩덜아 부족하기 때문에 비숙련자는 조금 걷기만 해도 지표면에서 100미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헉헉 숨이 차게 된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도면 지형이 그렇게 험하지 않으며(특히 이웃의 콩라인 K2에 비해서) 인지도도 압도적이고, 덕분에 등산로도 개척될 대로 개척되어 있어서 찾는 사람이 연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그래서 인근의 네팔은 등산료와 관광 수입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알다시피 심지어 산소통 없이 등반한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계의 지붕인 이런 산들은 오늘날에도 만만한 곳이 아니어서 날씨가 험악할 때는 입산할 수 없으며, 해마다 최소한 국내의 철길 건널목 사망자 정도만치는 산에 오르다 죽는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한편,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필리핀의 근처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 중에서도 더욱 아래에 11034m의 깊이를 자랑하는 비티아즈 해연이다. 1957년에 이곳을 발견한 구소련의 탐사선 비티아즈 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탐사선이 그렇다고 해연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가 본 건 아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깊이부터는 그냥 초음파만으로 깊이를 측정한 거라고. 실제로 거기 밑바닥까지 내려간 건 1960년에 미국에서 트리에스테-II 호가 해냈다.

일반 비행기가 공기 때문에 성층권도 못 벗어나고 한없이 높게 뜰 수는 없듯, 일반적인 잠수함들 역시 의외로 깊게 못 들어간다. 겨우 대륙붕 정도의 깊이밖에 못 들어가고 최첨단 핵잠수함도 500~700m 정도의 수심이 한계라고 한다. 군사 목적으로도 더 깊게는 들어갈 필요도 없고, 어차피 그 깊이 안에서 더 오래 머무르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말이다. 더 깊게 들어가려면 그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심해 잠수정을 써야 한다.

1만 미터 정도의 수심에서 물체가 받는 압력은 무려 1천 기압. 1㎠당 8톤의 힘이 가해져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살인적인 압력이다. 수심이 10미터 깊어질 때마다 대략 1기압이 증가하며(참고로 금성의 표면의 대기압이 90~95기압. 덜덜~) 덩달아 빛도 적어져서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느 수심과 압력 이상부터는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된다. 태양열이 닿지 않으니 수온 역시 영하급이다.

심해 잠수정은 실용성은 포기한 채 최대한 둥글고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트리에스테 호는 무거운 추를 잡고 가라앉은 뒤, 그 추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떠 올라오는 방법을 썼는데, 그때는 기술상의 한계로 20분 남짓밖에 못 머무르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호의 제작자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거의 반세기 만에 비티아즈는 아니고 챌린저 해연이라고 만만찮게 깊은 밑바닥을 2012년 지난 3월 말에 탐사한 바 있다.

우주나 심해 탐사는 아무래도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산 등정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극소수의 연구원이 최첨단 기계에 탑승해서 탐험하는 형태가 아니라 목적지를 직접 발로 걸으면서 탐험하며, 물자를 보급하는 보조 staff의 숫자도 아주 많다. 마치 영화 한 편이 배우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오늘날은 마음만 먹으면 항공기로 금방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는 질문은, 이건 마치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면 권총을 쓰면 되는데 뭣 하러 무술을 연마하냐 하는 식의 우문우답이 될 듯하다.

지구에 저런 높은 산 말고 또 남아 있는 혹독한 미지의 환경으로는 사막과 극지방이 있다. 이 중 사막은 제끼고,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는 두 꼭지점인 북극점과 남극점은 18세기~19세기 초 사이에 탐험계의 성배로 여겨져 왔다. 그 당시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정ㅋ벅ㅋ한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로 알려져 있었다(1909년 4월. 훗날 그건 오류로 판명되긴 했지만). 그리고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다(1911년 12월).

산이나 해저나 우주 같은 다른 곳에 비해서는 비교적 일찍 정복된 영역이지만, 두 극점 중에서 남극점에는 다른 미지의 영역에는 없는 특이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때는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 팀이 남극점을 먼저 찍으려고 경쟁 중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듣보잡 빈민국에 불과했던 노르웨이가 물자가 월등히 더 풍부했던 대영제국을 누르고 압도적인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문센 팀은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개들만 약 40마리쯤 죽었음;;) 국제적인 영웅이 된 반면, 스콧 팀은 그렇잖아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우울하게 돌아오는 길에 며칠째 혹독한 눈보라 때문에 조난을 당해서 스콧 포함 5명의 팀원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두 팀의 결말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달라진 것에는 단순히 운(날씨)보다 훨씬 더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원주민들의 노하우를 받아들여 극도로 최적화와 현지화를 잘 해 간데 반해 스콧은 남극 탐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으며 쓸데없는 곳에서 괜히 명분과 품위만 따지다가 참혹한 낭패를 당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사람들 얘기를 좀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09 19:25 2012/06/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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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 2012/06/10 01:45 # M/D Reply Permalink

    피어리 북극점 도달설은 매우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90년대말에 피어리는 북극점에서 40km 떨어진 지점까지 갔을 뿐, 북극점을 밟지는 못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피어리 이외에 북극점 최초 답사자라고 주장한 사람이 둘 더 있는데, 이들이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최근에서는 이들이 측량을 잘못했거나 거짓말을 했다는 견해가 대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류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한 것이 확인된 최초의 사람들은 아문센의 비행선 탐험대입니다.(1926년 5월 12일) 남극점을 처음 밟은 그 아문센이 사실은 북극점도 최초로 갔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불과 몇 달 전에 알았습니다. 피어리가 부정된 것이 십여년 전이니 잘못된 사실이 정정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나 봅니다

    1. 사무엘 2012/06/10 14:35 # M/D Permalink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

      아 그렇군요. 하필 별로 자료 안 찾아보고(이 글의 초점은 북극이 아니라 남극이니) 제가 아는 역사 상식 기억에만 의지해서 잠깐 언급했던 대목에 하필 오류가 있었군요.. 위키백과만 찾아 보니까 곧장 나오는 얘긴데... 지적에 감사합니다.

      아문센은 북극점 선두를 피어리에게 뺏겼다고 생각하고 어쩔 수 없이 남극점으로 갔는데, 결국 북극점 공식 정ㅋ벅ㅋ 인증도 나중에 그 사람 차지가 됐다니 이것도 참 절묘한 일입니다.

  2. Lyn 2012/06/10 12:25 # M/D Reply Permalink

    아... 콩라인이어서 이름이 K2엿군요 (Kong2?!)

    1. 사무엘 2012/06/10 14:35 # M/D Permalink

      서.. 설마 그건 우연의 일치겠죠 ^^;;;

  3. 주의사신 2012/06/10 17:51 # M/D Reply Permalink

    예전 교회에서 천년왕국 때에 8000m 넘는 산 14개를 정복해 보시겠다는 교회 학교 선생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산에 무척 가고 싶은데 전에 한 번 주일에 산에 갔다가 가이드가 길을 잃는 징계를 당하신 이후로 주일날은 무서워서 산에 못 가신다고....

    그런 산들은 일주일 내로 다녀 올 수 있는 산이 아니니까, 천년왕국으로 목표 달성 시점(?)을 미루신듯 합니다.

    1. 사무엘 2012/06/10 22:26 # M/D Permalink

      산에서 살았던 엘리야가 생각나는 일화군요. ^^

  4. 김 기윤 2012/06/11 00:18 # M/D Reply Permalink

    제목만 보고 우선 유명한 그 게임이 떠올랐습니다...

    1. 사무엘 2012/06/11 11:09 # M/D Permalink

      아, 그 전설의 고전 게임도 있었죠!
      열차가 한번 역에 정차를 하면 표정 속도가 얼마나 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는 게임입니다.
      그리고 거리와 속도의 단위 뻥튀기가 무진장 심한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펭귄이 900km 거리를 80초 안에 주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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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국내에서는 일제에 항거한 여러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그 중 유명한 분들은 위인전이 만들어지고 학교에서도 그 행적이 거듭 가르쳐지고 있다. 유 관순,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거의 국부급의 존경을 받고 위인전이 만들어지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살해한 안 의사가 존경받고 떠받들여지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이념적으로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했다고 그 공로를 인정한다. 특히 삼일절에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그 날이 공휴일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고, 삼일 운동의 이념을 물려받았다고 헌법에 명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남한과는 달리 삼일절에 거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은 1919년 이 날에 무슨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유 관순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공휴일도 물론 아님. 사실, 북한이 태극기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일절을 그렇게 좋게 부각시키고 싶지 않을 법도 해 보인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해 보니, 그런 major한 독립 운동가뿐만이 아니라 다소 minor한 분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본인은 관심이 간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다니엘, 예레미야뿐만이 아니라 학개, 나훔, 요엘 같은 사람도 알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 1909년에 안 중근 의사가 하얼삔 역에서 총살하기 전에, 이미 한국 내에서도 1905년, 경부선 열차 탑승 중에 원 태우 의사에게서 짱돌 테러를 당해 매우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한 나머지 이토의 얼굴에다 깨진 유리 파편 세례를 안긴 원 의사는 그때 겨우 24세 청년이었다!

체포된 원 의사는 비록 곧바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온몸이 만신창이 불구+고자 신세가 되었고,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뒤에도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채 감시와 착취를 당하며 기구한 일생을 살았다. 그래도 다행히 일제가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생존하면서 천수에 가깝게 살긴 했다(1882~1950). 게다가 안 중근의 의거도 원 태우의 의거에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하니, 원 의사는 비록 안 의사만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공적이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틴데일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의 관계처럼?

(여담이다만, 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양반은 열차 여행 중에 저렇게 크게 다치고 나중엔 아예 역 플랫폼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하니, 개인적으로는 철도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해 보인다.)

오늘은 이분 말고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하겠다.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당한 적이 있는 독립 운동가 중 최연소자는 흔히 유 관순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더 어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주 재년(1929~1944). 요절하지 않았다면 지금 80대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 출신이다.

그는 일제 말기를 산 사람이었다. 전쟁 때문에 일제의 식민 통치는 그야말로 막장 of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제는 식량을 포함해 온갖 물자를 수탈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꼬투리를 잡아 체포· 구금하고 노동자나 군인으로 강제 징용해 갔다. 조선어의 교육은 이미 금지되었고, 학교에서는 조선인들도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쳐서 대동아 공영권에 이바지하라는 개드립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 재년은 저것들은 다 헛소리일 뿐이고 일제는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발악을 해 봤자 물자가 곧 바닥나고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우리 조선은 그 기회를 타고 미국 같은 연합국의 힘을 이용해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통· 통신이 안습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에 이 정도로 앞서간 생각을 했다는 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물론 일본 헌병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나 죽여 달라는 소리와 동급이었지만 말이다.

1943년 9월 23일,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일본 디스 문구를 집 근처 돌담장에다가 공개적으로 새겨 적고 말았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다른 나라이다. 일본 섬놈들은 반드시 패망한다. 조선 만세!”
실제로 쓰기는 한문으로 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이 문구가 일본 헌병들의 눈에 띈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100여 명에 달하는 경찰과 헌병들이 동원되어 이런 말을 씨부린 놈이 누구냐고 마을을 샅샅이 뒤지면서 주민들을 다그쳤다. 자수하는 놈이 없으면 마을을 다 불질러 버리겠다고 공갈까지 했다. 그랬는데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수하는 사람은 겨우 10대 중반의 중학생(오늘날로 치면)이었으니 왜경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수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뒤에 당한 건 유 관순 때와 똑같았다. “이런 짓을 네놈 혼자 저질렀을 리가 없다. 공범· 배후가 누구냐? 누가 이런 사실을 알려 줬는지 어서 대라!”라는 심문과 함께, 그는 구타,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이건 자신만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개념으로 치면 내란 선동에 의한 치안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44년 1월에 풀려나긴 했다. 나이가 너무 어리고 물리적으로 누굴 죽이고 부순 것도 아니니 실형을 곧바로 집행하지는 않았지만, 집행유예 기간을 보아라. 상당히 긴 기간 동안 네놈을 블랙리스트 인물로 여기고 계속 감시하겠다는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유 관순이 징역 3년이었고, 의자 집어 던진 것 때문에 법정 모독죄 4년 추가였다)

그러나 그는 15~16살의 나이에 당한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이미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으며, 결국 그 해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교회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날짜를 보고 뭔가 패턴이 보일 것이다. 최 권능 목사라고 불리던 최 봉석 목사의 소천일이 1944년 4월 15일이요, 주 기철 목사가 4월 21일(혹은 22일)이니, 그야말로 1주 간격이다. 어째 이 시기에 유명한 항일 인사가 많이 세상을 떠났다.

유 관순에 비해 주 재년 열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못했다. 메이저급 독립 운동가나 항일 열사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인 196, 70년대에 이미 훈장이 추서되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회주의· 좌파 계열 독립 운동가들까지도 공적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그 반면, 주 열사에 대해서는 유족들이 끈질기게 국가를 상대로 청원을 한 끝에야 재조명을 받았으며 2006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일제로부터 독립 운동을 하다 투옥 당하고 형벌을 받았다는 판결 문헌 기록이 발견된 덕분이다.

그 시절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여 신문을 내고 선생질을 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의협심이 충만한 사람이 아닌 이상, 비록 진심은 그게 아니더라도 윤 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 규탄(?)하는 기사를 내고 디스를 해야 했으며, 강단에서는 천황 폐하께 충성하라고 징병 독려를 해야 했다. 맨날 손 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같은 짓만 했다간 신문사고 학교고 다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프로파간다를 듣는 사람들은, 쟤도 입에 풀칠하려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개소리로 여기고 재해석을 해서 받아들였다. 그땐 그랬다.

그런데 그 와중에 겨우 10대 소년이 목숨을 걸고 저렇게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까발렸다니 정말 타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춘천에 김유정 역이 있고 안산에 상록수 역이 있는 것처럼 주 재년 열사는 여수가 자랑하는 위인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주 열사에 대해 더 관심 있으신 분은 오마이뉴스 기사를 참고하라.

Posted by 사무엘

2012/05/11 08:28 2012/05/1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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