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수 년 전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멘탈이 붕괴되고 매우 비참하게 몰락하긴 했지만, 근본 성품이 무슨 카인, 이세벨, 발람 같은 급의 순악질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당히 오락가락 한 정치인이었으며,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점수와 하나님 관점에서의 점수가 매우 크게 차이 나는 사람에 속한다. 요즘으로 치면 구원받고도 계속 죄 짓고 하나님과 제대로 교제하지 못하다가 간증 잃고 건강 잃고 끝내 목숨까지 잃은 불행한 신자와 비슷하다.

본인은 그래도 사울도 구원은 받았으며, 특히 삼상 28에 기록된 엔돌의 무당 씬에서 나타난 사무엘은 진짜가 틀림없다고 글을 썼다. 그는 신약의 바울과 비교되는 상징적인 인물인 데다, 명색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데 하나님이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을 자신의 선민들의 왕으로 지명하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요 근래에는 사울의 구원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삼상 28의 사무엘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서 논쟁을 벌였다. 가짜설을 믿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이건 마치 재창조 간극 논쟁과도 비슷하다. 저 사울이 진짜였건 가짜였건 그게 크리스천의 구원이나 행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이다. 저 사람들의 성경관이 본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경이 정확하고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신· 구약의 시대 차이와 구원관 같은 것도 엉망진창인데, 그것까지 거론했다가는 얘기가 끝이 안 나고 싸움만 날 것이다.. =_=;;;

이런 논쟁을 24시간 맨날천날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의 검증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본인의 근거와 논리를 복습 차원에서 다시 전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인물이 진짜 사무엘인 이유는 (1) 첫째, 성경이 그냥 평이하게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걸 특별히 뒤집을 만한 문맥이 주변 어디에도 없으며 관련 참조 구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 상징? 가짜?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유사 논쟁거리를 살펴보면..

  • 욥기에서 "네가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것이야 그냥 욥의 친구의 개똥철학 뇌피셜 문맥일 뿐이다.
  • 재창조 간극이야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넘어 베드로후서나 예레미야 같은 참조 구절들과 연계해서 약간 간접적으로 유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6천 년 젊은 지구 덕후가 창조과학 진영에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재창조 교리가 주장하는 바도 현 세상의 창조 6천 년 자체는 맞는 얘기이고 단지 큰 전체 그림이 6천 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6천 년이라는 문자적인 단어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 가룟 유다는.. 그놈 자체가 마귀(요 6:70)라는 말도 있고, 사탄이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눅 22:3, 요 13:27), 사탄이 놈의 생각을 주입하고 조종했다는 말도 있다(요 13:2). 이런 건 진짜로 인간과 사탄의 관계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표현이 다양하게 나오니까 말이다.

허나, 삼상28의 본문은 다른 참조할 만한 구절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냥 여기 문맥만 잘 살피면 된다.
15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16절 "이에 사무엘이 이르되", 20절 "사울이 사무엘의 말들로 인해..".. 그냥 성경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사울 혼자만 쟤가 사무엘이라고 착각한 게 아니다.

그 와중에 저 사무엘이 페이크라면 성경이 독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자기 직관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입다의 딸은 진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피지배민들에게 그냥 노동만 시켰지 진짜 톱으로 사지를 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대상 20:3) 같은 온갖 못된 습관이 시작된다. 이게 발전하면 나중에는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아가씨일 것이다",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일 것이다"가 되는 것이다.

(2) 그리고 둘째.. 어찌 보면 이게 진짜 중요한 이유인데,
이전 글에도 썼듯이 저 사람의 말에 담긴 미래 예언(사울 부자의 최후)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적중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자라매 {주}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삼상 3:19)


머리털이나 참새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나온다.

"... 곧 {주}께서 아합의 집에 관하여 말씀하신 {주}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왕하 10:10)


쉽게 말해 예언 적중이다. 그럼 저 사무엘(?)의 말은 어찌 되었는가?

"... {주}께서 왕국을 네 손에서 찢으사 네 이웃에게 곧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주}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맹렬한 진노를 아말렉에게 집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라" (삼상 28:17-19)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완벽한 적중이지 않은가?
성경에서 어둠, 누룩, 썩음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심상이라면, 예언 성취는 정말 우선순위 0순위의 최상급 긍정적인 심상이다. 애초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초자연적인 책인 주된 이유도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이다.

아합 왕을 미혹한 거짓 영이라든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사탄 마귀, 예레미야와 맞장 떴던 거짓 대언자 하나냐를 생각해 보라. 성경 어디에도 나쁜놈이 부정적인 팩트 폭격과 정확하게 적중한 바른 예언을 한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예언의 적중 여부만으로 진짜 대언자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당당히 써 놓기까지 했다(신 18:21-22).

반대자들은 무당만 사무엘을 봤지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도 못했다면서 사무엘 진짜설을 부정하는데.. 사무엘을 봤건 못 봤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무엘의 저 말이 가짜가 할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단일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너무 매정하고 잔인한(?) 말 때문에 사울을 더 낙담시키고 절망시켰다면서 저건 진짜 사무엘의 말이 아니라 그러는데..;; 그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예수님이 우셨더라"(요 11:35)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게 슬퍼서 우셨다는 말만큼이나 그냥 감성 충만한 견해로 보인다.

사무엘의 말과 관련하여 하나 더 생각할 게 있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 같지 않은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눅 23:43) 그럼 사무엘이 예수님 같은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도 심증상의 증거가 있다. 사무엘과 예수님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의를 입었다고 기록된 유일한 트윈이다. 이것도 누가복음 구절이고,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누가복음 구절이다.

  •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라면서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 (삼상 2:26)
  •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호의를 입으시더라." (눅 2:52)

그러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무엘의 저 말은 거짓 대언자, 마귀 등의 나쁜놈이 내뱉었다고 성경에 기록될 만한 말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게 참말이건 거짓말이었건 그와도 무관하게 말이다.
저 말이 마귀 내지 지옥 자식의 입장에서 참말이라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은 지옥불에서 같이 활활 타고 있을 것이다" 정도의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가짜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건 성경의 난제를 성경으로 풀어 본 경험이 없고, 그냥 자기 직관을 여전히 성경의 관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히,

"사무엘 같은 위대한 신앙 거장이 한낱 무당의 푸닥거리에 소환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짜 사무엘은 사울과 연을 완전히 끊었으며, 아말렉 전투 이후로 평생 사울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 사울이 사무엘 사칭 귀신을 진짜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때가 있다"


이 정도가 전부이다. 먼저 예언 부분을 살펴보자.

물론 마귀 졸개들이 죽은 사람 흉내를 낼 수 있고, 과거 학습을 통해 인간의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도 아주 조금은 맞힐 수 있다. 정확도가 0%라면 애초에 저런 데에 사람이 현혹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허나 그런 잡스러운(??) 예언은 사무엘의 예언과 같은 퀄리티에 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성경 내부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만큼은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수 있다는 가정은 정말로 전혀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무당 소환이라.. 다른 성경들은 무당을 그냥 무당 medium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KJV는 부리는 영..(familiar spirit) 지닌 사람이라고 풀어서 표현했다. 마치 동성애자라고 안 하고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성 이렇게 길게 풀어서 표현하듯이 말이다. (내 글 <음란한 성경은 가라> 참고)

부리는 영은 familiar. 말 그대로 친숙한 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뿅 소환되었을 때 그 무당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혀 familiar한 반응이 아니었다. 무당의 푸닥거리 타이밍에 맞춰서 사무엘이 그냥 뿅 나타나 준 거지 애초에 무당이 자기 능력으로 소환해 낸 것도 아니었다. 구약 성도들이 가 있는 지하 낙원에서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괘씸해서 내(하나님)가 쟤(사울)에게 응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 보니, 쟨 아예 무당까지 찾아가는 막장짓을 하는구나. 안 되겠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네(사무엘)가 좀 가서 딱 한 번만 더 따끔한 돌직구 날려주고 오너라. 쟤한테 지은 죄를 깨닫고 죽을 준비를 하게 최소한의 아량은 베풀어 주도록 하자."


이런 상황에 가깝다.
성경대로라면,

  • 초자연적인 기적이 발생해서 사람이나 식물이 불이 붙어도 타 죽지 않을 수 있다. (출애굽기, 다니엘)
  • 동물이 말을 할 수도 있다. (발락과 발람)
  • 죽은 사람이 올라와(구약 시대 기준) 살아 있는 사람을 잠시 만난다거나, 아예 완전히 살아날 수는 있다.

하지만,

  • 거짓 대언자, 마귀 졸개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한 게 버젓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거나,
  • 하나님이 버젓이 거짓말을 성경에 써 놓는다거나,
  • 신 18:21-22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가 생긴다거나 할 일은 없다!!

전자는 그냥 단순히 과학적으로만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인 반면, 후자는 아예 하나님의 성품,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을 뒤흔드는 짓거리이지 않은가?

"진짜 사무엘이 무당의 푸닥거리에 맞춰서 나타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도는 마치 "천사는 인간과 결혼할 수 없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다"만큼이나 그냥 인간의 편견일 뿐이다. 그 사무엘이 가짜일 때 성경에 야기될 모순과 오류보다는 훨씬 더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저 사무엘이 문자 그대로 그냥 사무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도 어렵고 납득이 안 된단 말이냐..??

결론을 내리겠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사무엘이라고 말했다면 문자 그대로 사무엘이 맞다. 성경이 자체적으로 정의하는 문맥이나 참조 구절을 통해 다르게 해석하고 보정해야 할 사유가 없는 한, 6일은 문자적인 6일이요,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 나사로는 실존 인물, 유대인은 문자적인 유대인, 그리고 저 사무엘은 실제 사무엘이다.

이런 사무엘마저 가짜라면.. 지금 지구와 우주도 6천 년밖에 안 됐는데 하나님이 페이크로 엄청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 거라는 어거지 논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통할 수 있지 싶다. 이건 마치 이사야서의 뒷부분은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네 하는 소리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18 08:33 2019/07/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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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주제들

1. 개고기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짓을 생각해 보자. 고기· 알· 가죽을 최대한 저렴하게 얻기 위한 착취, 도축, 임상실험 등등.. 그걸 놔 두고 오로지 개를 잡아먹는 것만 잔인하네 야만적이네 뭐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전혀 없다.

하긴, 유대인이라면 개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잔인하고 야만적이어서는 전혀 절대 아니고.. 그냥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이라고 금지했기 때문이다. 쟤들은 같은 논리로 개뿐만 아니라 그 맛있는 돼지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또한 식용이면 차라리 양반이지, 쟤들은 속죄 헌물이라는 명목으로도 수많은 동물들을 잡아야 했다. 유대교 제사장은 평소에 율법의 권위자로서 먹물 꼰대질(?)뿐만 아니라 푸줏간 백정 같은 궂은일도 잔뜩 해야 했다.

물론 성경에도 동물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명령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을 불가피하게 잡는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죄의식 가질 필요는 없다. 그 동물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면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 잔혹한 것인지를 먼저 알고 반성해야 한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지옥에 가지 않으셨다면 내가 거기를 가야 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본인은 필요악의 필요성을 성경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고기 먹는 걸 좋아하면서 도축업자는 천시하고, 흉악 범죄를 미워하면서 사형 집행관을 천시하는 식의 위선을 매우 싫어한다.

2. 자살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끔찍 흉악한 죄들을 제쳐놓고 오로지 자살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처럼 취급할 필요는 네버, 전혀 절대 없다.
생각을 해 봐라. 세상 비관해서 이판사판 지하철에다 불지르고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칼부림을 벌인 미친놈 싸이코들도 즐비한데, 그에 반해 혼자만 곱게 목 매달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린 건 얼마나 양반(?)인가?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듯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 게 기독교이다.
무슨 강 재구 소령처럼 산화하고 전 태일 열사처럼 죽는다 해도 그걸로는 구원 못 받는다.
그럼 그 반대편으로.. 세상 비관해서든,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든, 고문 당할까봐 겁나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그 개인의 구원 여부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인간의 직관과 좀 다른 성경의 원칙이다.

"에이 그래도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은 건데.."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거듭난 크리스천도 그것 말고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간증 상실할 짓을 많이 하는지 생각을 좀 해 보아라. 구원받았다는 게.. 영적 신분은 큰 변화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겉으로 자기 성품은 하나도 바뀌는 것 없고 별 거 아니다.
자살로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예수쟁이들이 평소에 성경 읽는 걸 게을리하고 기도 안 하는 것으로도 구원 상실이 같은 논리로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 가네"는 교리적으로 잘못됐고, "애초에 구원받은 게 아니었네.." 이런 소리는 그냥 궤변 말장난일 뿐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 죽더라도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가 정답이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요 3:16이었다가 나중에는 요일 4:19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 지금은 롬 8:38에서 가슴이 탁 트여 있다.

3. 피임

기독교가 결혼한 부부 외의 모든 성관계를 교리적으로 음행이라고 규정하고 정죄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건 반대로 말하면, 결혼한 부부끼리는 그 어떤 가족 계획 자녀 계획을 갖든, 밤에 무슨 짓을 하든 서로 좋아서 한 거라면 아~~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전적으로 부부 재량이고 개인 사생활이며 신이라도 전혀 터치하지 않고 존중해 준다.
다시 말해 피임을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절대 아니다. 어떤 처지의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가 죄의 성립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걸 무조건 금기시하는 건 좀 종교적인 오지랖으로 보인다.

4. 낙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꼭 문제의 본질과 관계 없는 극단적인 예외 상황만 끄집어내면서(오판, 오· 남용) 논점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처럼 낙태에 대해서도 강간으로 인한 임신, 괴물 급의 유전병, 산모도 목숨이 위험한 경우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일단 논외로 하자.

어차피 대부분의, 내가 알기로 90%가 넘는 낙태의 사유는 그냥 (1) 철딱서니 없는 애들의 불장난이거나, 아니면 기혼 부부의 경우 (2) 단순 피임 실패 내지 (3) 딸이어서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엔 아무 문제 없다.
이것들에 대해서 낙태는 살인과 동급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원칙대로라면 애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혼전 성관계 자체가 음행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이건 종교 교육과 병행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_-;;

5. 안락사

마치 체벌이 사랑의 매와 아동 학대 사이에 간당간당 하고 살인이 흉악 범죄와 숭고한 호국 애국 사이에서 간당간당 할 수 있듯.. 안락사는 "어디까지가 살인이고 어디부터가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 가게 그냥 놔 주는 것이냐"라는 알쏭달쏭한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알기로 성경엔 사람을 완전히 죽이면 죽였지, 식물인간이나 뇌사 같은 게 나오지는 않는다. 내 생각은 연명 행위만 중단하는 소극적인 안락사는 윤리· 종교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애초에 전근대 시절에는 기술 부족으로 인해 그런 연명 행위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었다.

살인만 해도 정당방위와 긴급피난이 있다. 그러니 살인에 맞먹는, 그와 준하는 죄가 될 수 있는 낙태나 안락사 같은 다른 행위에 대해서도 참작 사유는 물론 존재한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기독교 교리에는 이런 식으로 논리와 체계가 있다.
무조건 인간의 욕구를 억압하고, 인간에게 불가능한 인내나 위선을 짜내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이걸 해서는 안 되는 대신 저건 허용되는 게 있으며, 이 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저게 성립해야 되는 것이 있다.

본인도 성경에 모르는 게 많고, 또 지능이나 행실이 다른 신앙의 거장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쪼렙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성경이 온전히 보전돼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교리에서 일말의 합리적인 체계와 맥을 발견했기 때문에 거리 설교도 할 수 있게 되고, 내 신앙 체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변증도 할 수 있게 됐다.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간극,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균형, 어린아이의 구원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민감하고 센세이셔널한 주제에 대해서 누가 단정적으로 얘기를 하고 나면.. 당사자가 말하지도 않은 확대해석과 오해와 낭설까지 쫙 날조되어 퍼져나가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요21:23처럼 말이다.

구약 십일조가 신약 크리스천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하면 꼭 헌금 자체를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고.. 자살에 대해서 성경적인 교리를 얘기하고 나면 "어, 쟤는 자살해도 괜찮다고 얘기하네?" 라고 알아듣는 사람이 생기는 것 말이다. 그건 그 사람의 독해력과 마음 상태 문제인 거고.. 성경의 사고방식은 저렇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01 08:37 2019/07/0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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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자료 준비하느라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그림인데.. 신기하게도 내 개인 블로그에다가는 아직까지 공개한 적이 없었구나!

성경은 안 그래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이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을 다루는 데다, 잠 26:4-5처럼 표현이 대놓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당장 몇 가지 예만 들어 봐도 "은혜와 사랑 VS 율법과 공의", "자유의지 VS 예정과 섭리" 같은 것 말이다. 편의상 "파랑 VS 빨강"이라고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럴 때 성경의 전체 숲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선택하는 방법은

  • 자기가 믿고 싶은 부분만 돌쇠같이 닥돌 해서 물의를 빚는다. (파랑 아니면 빨강. 다른 쪽은 무시)
  • 아니면 성경에서 일체의 색깔을 제거하고 비성경적인 중도로 빠진다. (회색)
  • 아예 보라, 분홍... 초록색을 내세우는 이상한 부류도 있다.

이 셋 중 하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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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가장 합리적인 솔루션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충돌이 일어나는 경로는 평면이 아닌 입체교차로를 만들어 충돌을 해소시킨다.
빨강은 이 문맥과 대상에서 직접 적용되는 것이고, 파랑은 다른 문맥과 대상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타 문맥에서는 영적인 '적용'과 교훈, 유익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문자적인 해석은 아니다.

  • 크리스천도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환란을 겪지만(행 14:22), 그건 미래에 예고된 유대인의 대환란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창조 교리이지만, 세상의 창조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더 크게 현 세상 이전에는 다른 창조와 파멸, 다른 홍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식.

내가 만들었던 그림 중에서 성경 노선도는 교리 논란이 없는 평범한 부류이니 기독교계 커뮤니티들에 굉장히 많이 퍼져 나갔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도 귀하고 소중한 책이라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고 난해한 구절, 교리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구절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걸까?

성경보다 똑똑해서 자기가 성경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이상한 똑똑이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 똑똑한 진짜 똑똑이가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9 19:32 2019/04/2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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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 관련 개념 복습

예전에도 신앙 관련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 내지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믿음이라는 제일 바보같고 나약한 자유의지가 전부이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외모나 스펙이나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믿을 정도의 지적 능력조차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자체를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애들, 정신지체 박약아는.. 그냥 무조건 구원 받는다. 걔들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지만 그분을 거부할 능력도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본인은 이 개념을 편의상 '특례 구원'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이 블로그를 찾아와서 이 글을 직접 읽을 정도의 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학에다 비유하면 방정식의 근 중에서 그냥 너무 자명한 trivial solution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물학으로 치면 무성 호흡/생식 같은..??

이런 논리를 따라, 본인은 어린아기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원죄 때문에, 혹은 유아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일단 전혀 믿지 않고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선물 받으실 분?" / "저요, 저도 좀 주세요!"라고 응답하고 손 내미는 것도 자기의 의이고 선물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이상하게 몰아가는 설명도 배격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앞서 언급했던 '특례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립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까지 부르는 건 '글쎄요~'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밖의 문맥에서는 인간이 얼마든지 제 발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지옥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사랑이나 공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못하면 정말 온갖 골때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6· 25 대한해협 해전 때의 동해상의 북괴군 600명하고, 광주 5· 18 북괴군 600명을 헷갈리듯이 말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한 문맥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지만 눅 14:16-21 같은 비유 얘기를 봤을 때... 그리고 인류 역사와 지금 세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추측하건대 미래에 하늘나라에 가 보면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특례 구원을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할 것 같다.

마치 증기 기관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서는 완전히 도태했지만 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용으로는 압도 다수인 주류이듯이(화력, 원자력이 모두 증기 터빈을 돌리므로!)...
선박이 장거리 여객에서는 비행기에 밀려 완전히 도태했지만, 일반인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물류에서는 여전히 본좌이듯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을 보게 되지 싶다. 민망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는 죽음이 이 세상의 음지에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겠는가?

참 오랜만에 구원 기본 개념에 대해 복습해 보았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 많은데.. 시간과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구원만 받고 어리고 육신적인 신자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편이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르는 다른 끔찍하고 흉악한 죄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롭게 자결했다고 구원을 얻지는 못하듯, 세상 비관해서 혹은 고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2. 성경과 세속 과학, 학문과의 관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만 하는 과학이라면, 그 알량한 방법론을 동원해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사실은 교계에서 그렇게도 정죄하는 진화론을 절대무오한 진리라고 입증하지도 못한다. 그쪽 세계에서는 실험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학설과 확률과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과학과 종교?신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게 맞다. 그럼 창조니 진화니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건가? 마냥 안심하면 되냐? 그렇지는 않다.
과학 그 자체는 자연 계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이다. 잘 연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거짓되이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설이 대놓고 신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고방식이나 연구 방법론· 패러다임을 잘못 적용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할 수는 있다. 이게 파괴된 신자는 진짜 볼장 다 본다.

"성경에 어차피 요런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성경의 존재 가치가 싹 부정되는 건 물론 아닐 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기록돼 있는 엄청나고 극단적인 예언들도 그렇게 정밀하게 문자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다. 비유와 교훈 등 우리에게 좋은 쪽만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어떻게 그리스어를 보면 어떻고.."

요게 아주 위험하고 돼먹지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특정 부분만 분별 없이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물의를 빚는 교파 종파에 대해서도 본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대안이 저런 지적 사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성경은 세상의 여느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3.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

성경에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다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 25:4, 가축이 적당히 자유롭게 먹으면서 일하게 해 줘라)가 의외로 신약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고전 9:9, 딤전 5:18)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문맥에서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합 2:4에서 '자기'(his)가 빠진 바리에이션으로서 세 번 더 나온다. (롬 1:17, 갈 3:11, 히 10:37) 이에 덧붙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도 십계명인 출 20:12뿐만 아니라 신 5:16, 엡 6:2에서 반복되며, 복음서에서도 인용 형태로 마태· 마가· 누가에 거듭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뭔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구절도 성경에서 톱급으로 자주 거듭 반복해서 인용된 게 있다. 바로 시 110:1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 연이어 copy & paste 수준이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행 2:35와 히 1:13에서 추가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히 10:13도 재차 언급이라고 볼 수 있으니.. 횟수가 가히 압도적이다.

"소의 입마개"만치 인간의 실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만치 보편적인 인륜을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리라"만치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지도 않은 저 말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이고 문맥이 뭘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저 구절의 모든 문맥과 의미를 강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성경은 도덕 경전이나 역사 기록이나 복음과 구원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2순위 이하의 목표일 뿐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주 관심사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통치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용어를 동원해서 표현하자면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온갖 시사· 종교 난제들을 가져와서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 (부활의 때에 누구 아내? 율법에서 가장 큰 명령? 카이사르에게 납세? 등등등~) 떠보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든, 아니면 정말 몰라서든지..

예수님은 그런 것쯤은 막힘없이 전부 즉답을 하셨고 사람들을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물으신 건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내가 니들에게 하나 좀 물어 보마. 너희는 내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 것 같냐? 시 110:1을 봐. 다윗이 자기 비속 후손을 보고 '주'라고 존대해서 부르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뒤로 사람들은 버로우 타 버리고 더는 예수님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시 110:1은 그 문맥에서 인용되었으며, 그게 복음서에 3회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또한, 나중에 배반당하고 체포된 뒤의 행적도 생각할 만하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다른 온갖 쓰잘데기없는 거짓 고소들에는 하나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냐? 넌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는 정말 솔직 담백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마 26:62-65, 막 14:60-63, 눅 22:66-71)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기만을 바라셨다. 예수의 부활조차도 곧이곧대로 믿기 싫고, 그래도 역사 팩트와 후폭풍 증거까지 송두리째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제자들의 자칭 예수 부활 "체험" 사건 이 따위로 둘러대는 짓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P와 NP는 과연 동일할까?", "리만-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은 실수부가 정말 몽땅 1/2일까?", 아니면 "광주에 과연 북괴 공작원들이 잔뜩 침투되었을까?" 같은 걸 묻지 않으신다.
그런 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답을 구하든가 말든가 하면 되고,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그리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너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시 110:1의 직접 인용은 없지만 기록 목적이 독자들 예수 믿게 하는 것(요 20:31)이라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분명하게 대놓고 적어 놓았다.

4. 신앙 생활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뒤의 신앙 생활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짜인 것도 있고 불리한 구조로 된 것도 있다.
유리한 것은.. 뭔가 좋은 것을 사람이 "먼저" 받아서 동기 부여를 받은 뒤에, 그 다음에 사람 쪽에서 베풀고 헌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구도라는 것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나서 침례를 받든지 믿음의 선한 행위를 하든지 성장을 하든지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일단 쉬고 나서, 달콤한 은혜의 말씀부터 먹고 나서, 즐기는 것부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을 하고 헌신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기업 중에 입사 후에 월급이건 일당이건 보수를 받고 나서 다음부터 일하는 곳이 있던가? 세상에서야 소득 주도 성장은 마치 "일단 서울대부터 보내 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같은 미친 개소리이지만.. 성경적인 신앙 원리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종 목적지, 만렙,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구원' 내지 성인 성자(saint) 칭호가 이 바닥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따 놓은 당상이다. 근성 충전을 위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 이 아니라 일단 구원부터 받고 시작이다.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만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6일간 일하고 나서 일곱째 날이 쉬는 날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만들어지고 결혼하고 honeymoon부터 즐긴 뒤부터 동산 관리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얘기도 있다(눅 10:38-42).

그 반면, 인간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는 것, 혹은 이것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 사항도 있다.
신앙 생활이란 건 본질적으로 당장 보이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직관적인 대로, 남들 다 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바보 같아 보이고 손해 보는 듯이 보이는 좁은 길 역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단과 행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둬서 물리적인 여건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을 하나님이 굳이 수습해 주고 undo 해 주시는 경우 역시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생활이 무슨 공밀레 같은 신밀레 열정페이 착취는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성· 성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단단하고 입에 쓴 말씀, 실행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 당하고 겪어 놓았다. 그때는 이런 믿는 구석으로 요렇게 하면 된다고 선례, 모범, 샘플이 마련돼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나 과제에 대해 원리, 예제, 유사한 기출문제, 힌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러나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물며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해 줄 리는 절대 만무하다. 모든 과제는 자신의 문장을 써서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절대로 '안알랴줌'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세대 경륜 급의 큰 그림 이상으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미래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이다. 나에게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는 완전 랜덤 케바케이다.
그것만 좀 알면 딱 죽기 직전에만 예수 믿고 구원을 먹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꼼수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걸로 농락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신앙 생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어떤가?

5.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

  • 군대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범죄라 여겨지는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하지만 자기 집 지키느라 불가피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 마당에, 하물며 나라를 지키느라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형법상의 살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숭고하고 영예로운 일이다.
  • 국정원 같은 첩보 기관은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이이제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절대악을 퇴치하기 위해 필요악 역할을 맡고, 작은 악을 동원해서 더 큰 악을 예방하는 궂은일을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건 나쁜짓이며,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이나 사용하는 수법(거짓말, 위장 침투..)으로 여겨진다.
  • 끝으로 종교는 겉으로 언뜻 보이는 결과만 보자면 정신승리, 진영논리,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분야이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라는 과학 팩트는 "그럼 최초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무한순환을 끊으려면 결국 처음에 한 번은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 받고 부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적인 박해 지역이 아닌 한, 무조건 쫄딱 망하고 거지 되고 감옥에 갇히고 죽지도 않는다. 구원받아서 신분이 바뀌는 것과 개인이 물질적으로 잘 되거나 못 되는 건 별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경제관과 시스템이 갖춰져서 잘살게 되고 중산층이 늘고 부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게으른 개인을 일일이 다 먹여 살려 주는 게 아니다.

예수 믿어서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영적 복을 받고, 설령 가난하더라도 그 처지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 주님께서 내게 지금 당장 허락하신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건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남들보다 가난하지만 난 영적으로는 부자.." 영이건 정신이건 이것도 정신승리라면 정신승리이다. 하지만 이건 아Q의 정신승리와 달리, 성경적인 근거와 보장이 돼 있는 건전한 정신승리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에 연연하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져 있지 않으면 어차피 하나님이 물질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 주셔도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면서 불만족 불평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1 08:33 2019/04/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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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욥기는 모세오경과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먼저 기록된 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책이 아니다. 너무 엄청나고 극단적인 스토리와 판타스틱한 서술들, 그리고 인류의 만년 의문 떡밥인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욥기는 문학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물론 불신자들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만 인정할 뿐, 저게 설마 레알 실존인물 실화일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통념과 달리, 다른 책에서 욥을 거듭해서 실존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인용하니(약 5:11 같은..), 이게 딜레마이다. 노아, 아벨만큼이나 말이다.
가령, 그 천하의 예수님이 창세기 4장 인물인 아벨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마 23:35). 예수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비평가라면 창세기 1~11장은 그냥 설화이고 상징 비유 묵시문학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이다. 욥기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 문제의 책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그에게 아들 7명과 딸 3명이 태어나니라. 또한 그의 재산은 양이 7000마리요, 낙타가 3000마리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마리이며 집안사람들도 심히 많았으므로 이 사람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더라." (욥 1:1-3; 가독성을 위해 성경 본문에서 수량 표기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

욥은 노아·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일컬어진다(겔 14:14). 특히 노아와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perfect(창 6:9, 욥 1:1)라는 수식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과 동급의 완전무결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구약 + 인간의 관점에서 그럭저럭 흠잡을 데 없고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만점 합격점이라는 뜻이다. 마치 all(모든)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느 문맥과 범위에서 전체 또는 완벽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은 아시다시피 한번 쫄딱 망했다가 그래도 다음과 같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주}께서 그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또 그가 아들 7명과 딸 3명을 두었더라." (욥 42:10,12,13)

욥은 고난 이후에 자기 재산에 속하는 가축들은 몽땅 다 정확히 두 배로 보상받았다. 그런데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열 명 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명은.. 자녀는 재산과 별개이며 두 배 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나 보험(!!) 관점에서 보자면 대인과 대물은 엄연히 다르며, 자식은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가축 수와 자녀 수를 나란히 늘어놓은 욥기의 진술 방식 자체가 좀 문제가 있으며,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의 여지를 남기는 거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결론은.. 구원받은 자녀는 다른 가축이나 재물과 달리,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고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었어도 영원의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이별하고 못 보는 기간 / 내세에서 n년간 보는 기간"의 비율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극한값이 0으로 가는 것이 자명하니..;;
그러므로 20명을 몽땅 새로 줄 필요 없이 새 자녀 10명만 추가로 주면 10+10 = 20이 된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가축)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낳았고 낳았고'만 잔뜩 나오는 마태복음 1장의 리스트의 진술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일부 인물이 누락된 이유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라고.. 어린아이의 구원을 당당히 믿은 다윗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과학과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많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죽음도 그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꽤 건전하다. 죽은 사람 갖고 사기를 치는 수많은 미신, 괴담 등에 휩쓸릴 일이 없게 하며, 그 반대편 극단인 "죽으면 다 소멸하고 끝" 염세 회의 허무주의 쪽으로 빠지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

이런 신앙이 있으니 손 양원 목사는 "미국 유학 보내려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라는 초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생명 인격체를 만드는 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인 것 같다. 구원받는 것도 그렇게 현세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한편, 이런 "현세 10+내세 10 = 20"설 말고.. 그 10명은 그냥 욥의 기존 자녀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뭐, 그것도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피엔딩이며, 성경의 심상 면에서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성도들의 집단 부활이라든가(마 27:52-53) 모세의 부활(유 9)처럼 아주 implicit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엄청난 부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욥 당사자도 단순 내세 이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은 와중에(욥 19:26), 욥기에 부활의 실제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자녀를 만드는 건 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도 10명이나 다시 낳으려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욥의 기존 아내는.. 욥을 완전히 떠나 버렸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난 후에 재배회를 했는지.. 그렇지 않고 욥이 재혼을 하기라도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욥의 아내는 막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신앙이 남편만치 좋지는 못했던 그냥 예쁘장한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ㄲㄲㄲ 사탄이 욥의 아내를 괜히 살려 둔 게 아님..)

이런 시나리오에 비해, 죽었던 기존 자녀만 다시 초자연적으로 살아나는 시나리오는 기적 그 자체 말고는 주변의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부활설은 근처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등장하는 '2배 보상'이라는 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녀는 무슨 물건 같은 존재는 아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주님으로부터 온 유산이요 보상이다(시 127:3-5).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축을 2배로 보상해 주셨거늘, 하물며 자녀도 2배로 보충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욥기의 도입부에서는 자녀 수부터 먼저 나온 뒤에 다음에 가축 수인데, 결말부에서는 2배로 늘어난 가축 수부터 나온 뒤에 그 다음이 자녀 수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9 08:36 2019/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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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차이

  • 내가 이 일을 듣고는 내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놀란 채 앉았더니 (스 9:3)
  • 내가 그들을 꾸짖고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이르되 ... (느 13:25)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빡쳤을 때 에스라는 자기를 저렇게 했고, 느헤미야는 남을 저렇게 했구나.. (참고로 뜯다/뽑다 모두 영어로는 구분 없이 pluck off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2. 한글 개역성경의 감성 번역 (개역개정판도 포함)

(1) 습 3:17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영어로는 rejoice over you with joy / great gladness 정도다. 그냥 "너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도의 뉘앙스인데, 하나님이 차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무노무 기뻐하실 거라니! 번역자가 over이라는 단어를 전치사가 아니라 접두사로 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2) 시 8: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만, 내가 아는 전세계 그 어떤 성경 역본도 저기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없다. 개역 말고는. 그냥 excellent(KJV. 뛰어나다) vs majestic(웅장한, 장엄한) 정도로 나뉜다.
번역자가 '크고 아름다워요'라는 심상을 의도한 건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는 아직 저런 표현이 없었는데..

3. 개역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된 곳

(1) 창 37:3 채색옷/색동옷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색동옷 입은 꿈쟁이 요셉을 보면서 자란 건, 개역성경이 비록 큰 줄기는 다르지만 저기서만은 어째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요즘 번역은 장신구가 잔뜩 달린 옷, 소매 긴 옷 등이 트렌드이다. 번역의 정오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2) 엡 4:12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여(perfecting)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킹 제임스 성경만이 perfecting이고 타 역본들은 equip, prepare 그냥 '준비시키다'라고 번역되었다.
이건 구약도 아니고 신약인데, 개역성경이 딴 건 놔두고 여기서는 어떻게 KJV의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4. 사흘 밤낮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게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튿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


굉장히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나, 문제는 성경에는 저 기간에 대해 3박 3일..
three days & THREE NIGHTS
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낮도 셋, 밤도 셋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마 12:40에서 요나의 표적 말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와 문화에 따라 날짜나 나이 계산을 할 때 당일을 포함시켜서 1부터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고 0부터 시작하느냐 같은 유도리와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 day는 '낮'도 되고 '날'도 되는 중의성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는 내가 보기에 그런 유도리가 틈탈 여지가 없다. 금요일이 첫째 날, 일요일이 셋째 날 식으로 계산하면 밤이 "3박"이 되지 못한다. 그냥 2박 3일이 될 뿐이지.
마치 창세기 1장에서 1, 2절까지 몽땅 첫째 날에 포함시켜서 첫째 날이 "하늘과 땅과 빛을 만든 날"이라고 붙이는 격의 오류가 야기된다.

성경에서 third day와 three days가 서로 연결되어 쓰인 용례들을 쭉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들은 완전히 72시간을 꽉 채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48시간은 확실하게 경과한 기간이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도 예수님이 딱 부활하신 시각이 아니라 빈 무덤을 사람들이 발견한 시각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확하게 얼마나 더 전에 일어나서 무덤을 탈출해 나가셨을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넉넉하게는 수요일, 또는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 정도는 돼야 한다.

본인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성 금요일'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나무위키의 설명과 성경의 진술이 서로 충돌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

5. 세례가 아니라 침례이며, 침례는 구원 증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1) 침례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신약 기독교회에서 성경에서 행하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2대 의식이다.

(2) 또한 침례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조건이 전혀, 절대 아니다. 사람을 교회에 소속시킨다거나 종교적으로 뭔가 성화· 버프 시켜 주는 효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앙 고백 내지 구원 간증 같은 인증일 뿐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은 뒤에 침례를 받는 게 나중이다. 이거 순서가 꼬이면 정말 사람 피곤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물론 침례인 요한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성격과 의미가 약간 다른 회개의 침례 같은 게 존재하긴 했었다(행 2:38 같은).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1) 성경의 용례를 따라 꼭 물에 전신이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강조하며, (2) "애들은 가라"이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 유아들에게는 그걸 절대 주지 않는다. 행 8:37이 KJV 이외의 성경에서 삭제된 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를 야기했다고 본다.

애들한테 유아 세례? 영세? 전~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들은 설령 그 상태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해도 특례가 적용되어 어차피 무조건 구원 받는다. 이거라도 있으니 예수님 시절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애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도 된다. 유아 세례가 이 복된 교리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시겠는가?

기독교계의 여러 종파 교파들 중에 침례교가 참 역설적이게도 침례에 다른 종교적인 의미나 주술적인(?) 능력을 일체 부정하고 침례를 제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냥 주님께서 명령하신 독특한 신앙 고백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쓰인 빵과 잔이 그냥 상징 외에 다른 아무런 주술적인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성경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교리인데, 역사적으로 이 사소한 교리 하나 지키느라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나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6. 히브리서의 저자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욥기의 저자는 모세라고 생각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의 근거는 구약을 통틀어 창세기와 욥기에만 존재하는 sons of God, being old and full of days이다.
히브리서의 근거는 바울 서신서에만 존재하는 Timothy, brotherly love, Grace be with you이다. 거기에다 킹 제임스 성경에만 존재하는 제목과 끝인사도 추가적인 증거 역할을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이탈리아에서 써서 디모데 편으로 보냄)

욥기에 대해서는 중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엘리후가 자신을 1인칭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엘리후가 책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욥 32:16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가 긴 대화를 채록했을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지만, 저 구절은 3인칭 시점의 텍스트에서 엘리후의 말이 직접 인용된 것일 뿐이다. 욥기가 전반적으로 엘리후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된 건 아니며, 32장의 중간에 갑자기 엘리후의 말 인용이 끝나고 엘리후의 동작에 대한 서술로 시점이 바뀔 만한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구절은 그냥 "제가 좀 기다려 봤는데 형님들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견 좀 털어놔야겠다고요."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에서 화자의 시점만으로 욥기의 저자를 추측하는 건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성경에서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이 한 문장 안에서 갑자기 왔다갔다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행 1:4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구절의 역본별 번역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경우 비록 처음에는 완전 이질적인 문체로 시작해서 정체불명이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성도들의 행실 얘기가 나오면서 바울 서신 냄새가 짙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앞부분도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원리와 맥을 잡으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저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을 기록할 만한 실력자가 그 당시에 바울 말고 또 있었을까? 내가 읽어 본 느낌은 그렇다.

백범일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보안 때문에 처음에는 생뚱맞은 가명 불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행적을 보면 그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폭탄의 공급책이던 김 홍일 장군 말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의 표현 기법이 쓰인 게 아닐까?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본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열왕기하의 끝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 왕의 체포)
마치 역대기하의 끝부분과 다음 에스라기의 시작 부분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표현의 유사성"에 최대한 의미를 둔다면, 이런 식으로 결론이 일관되게 도출된다. 창 1:2와 렘 4:23에서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게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 정황상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이다. 에녹이 아니며 다른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글쎄, 히브리서의 저자를 의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부터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다는 식의 썰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이나 침례인 요한이나 신약 복음서의 기자는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내용 역시 아무 이질감 없이 이사야의 책, 이사야의 말이라고 버젓이 인용하는데도 말이다.

본인이(다른 모든 bible believer들도 포함) 창세기의 1~11장 내용이 다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아담이 실존 인물이며 노아의 홍수가 실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굳이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든가 에덴 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네 하는 낭설이 없어도 된다.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 아벨(마 23:35)과 노아(마 24:37-39)를 버젓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증하면서 교차 검증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 내가 예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모험이나 도박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4 08:37 2018/08/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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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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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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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생각들

1.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북한에다가 좀 엮어서 비유해 보자면..

(1)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구원의 영원한 보장.
==> 북한은 법적으로 대한민국의 미수복 영토이고, 거기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번 탈북에 성공해서 자유 남한에 온 이상,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결코 재북송되지 않는다.

탈북자가 남한 와서 그 어떤 끔찍한 사고를 치고 흉악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사형 무기징역 선고받고 남한 교도소에서 평생 썩을지언정 북송되던가? 이런 차원의 문제다. 구원받으면 사람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싹 바뀌며, 그건 그 사람의 행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2)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과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현재), 죄의 임재로부터 구원(미래)
==> 북괴의 직접적인 마수를 제거(과거.. 6·25 전쟁 때 대판 싸워서), 북괴의 위협을 제거(현재.. 휴전선에서 으르렁거리고 간첩이나 잡으면서..),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미래.. 과연 가능이나 할까?

2.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무슨 엉덩국 만화에서 홍콩 행 게이바에 들어온 존슨이 아니라, 남한 땅을 일단 밟은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저 제목과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도 같은 급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남한 내부의 탈북자들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북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좌빨 언론들이 뭐 탈북자 신문 센터에서 탈북자들이 인권유린 가혹행위를 당했네 뭐네 별 트집을 다 잡는가 보다.
거기서 탈북자들을 위장 탈북 간첩으로 너무 의심하다 보니 인권모독 발언, 구타 감금 같은 짓이 일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게 과연 아예 재북송보다도 더한 인권 유린일까?

그리고 사실은 반대편에서도 우리 같은 원칙을 적용해 주면 더욱 좋겠다.
북괴 좋다고 북으로 가 버린 사람들.. 거기서 영원히 다시는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 간절한 바람이다.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보낼 게 아니라, 돼지새끼 좋아서 안달 난 새끼들, 평양도 아주 살기 좋다고 침 질질 흘리는 빠가들이나 몽땅 북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은가?

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북한 주민들 구제 이상으로, 북괴 체제가 저딴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 통일은 결사 반대론자다.
김돼지를 재판에 회부해서 처벌하고, 국군의 손으로 정치범 수용소 문을 따고 들어가는 통일이 아니면 다른 통일 따위 1도 할 필요 없다!

북한 인권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고? 응, 참견 안 할게. 단, 그 대신 네놈들도 우리랑 통일 하자고 가증스러운 수작 안 부렸으면 좋겠다.
지극히 정당한 논리와 근거를 갖고 반대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나 같은 사람을 잘도 얼마든지 반통일 적폐로 몰아붙이고 공격해 봐라.

3. 악의 무리들이 하는 짓들의 패턴

(1) 경전, 법전의 변개

  • '그분의 피' 삭제, '기도와 금식' 삭제. 성경을 야금야금 뜯어고치고 변개. 애초부터 이미 잘 번역되고 정착돼 있는 성경은 내팽개치고, "현대의 발달된 사본학과 언어학으로 잘 살펴봤더니" 그 단어는 나중에 임의로 추가된 것일 뿐이고, 원래 뜻은 그게 아니고 굳이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인이고, 홍해가 아니고 갈대밭이고 어쩌구 저쩌구...
  • '자유 민주주의'에서 굳이 자유 삭제. 자유라 하면 옛날 '자유당' 오로지 나쁜 심상이다.^^ 근로자 대신 노동자, 국민 대신 인민이나 그냥 사람 등등~

어떤 최종 권위 텍스트에서 단어가 하나라도 바뀌거나 빠지는 것에 대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 (1) 성경이 단어 하나라도 변개돼서는 안 되는 골수 성경 신자들, 그리고 (2) 인간의 죄성에 빠삭하고 언어 교란 선전 선동술의 프로 전문가인 공산주의자 빨갱이들.

(2) 역사 왜곡

  • 역사상 기독교인들을 제일 많이 학살한 괴물 집단이 정통 기독교 타이틀을 자처하면서 피해자들의 역사는 몽땅 말살하고 부정하고 왜곡함.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아주 긍정적인 승리로 선전함.
  • 자기 나라 역사는 오로지 잘못된 거 부정적인 것 한계만. 적 진영의 역사는 완전 정반대로.. 입만 더 아플 것 같으니 더 말을 말자..

(3) 거짓 평화

  • 유대인들은 옛날에 진짜 메시야는 배척하고 "그의 피가 우리에게로" 이랬는데, 미래의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환호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된통 당하고 뒤늦게 정체를 깨닫고서 개고생)
  • 저 일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어디에서는 거짓 평화 공세에 혹해서 세계 최악의 살인마 독재자보고 우리 민족이라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환호하고 귀엽게 생겼다고 캐 난리.

당연히 성경 자체에 무슨 남한 북한이 나오는 건 아니다. 14만 4천 명이 누구랑 관계 있고, 동방의 의인이 무슨 자기 교주이고 하는 그딴 소리는 개소리이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이런 나라들은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 중의 하나일 뿐, 걔네들이 유대인 이스라엘처럼 성경의 세대적 경륜의 직접적인 선상에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성경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습득된 그 세계관, 성경의 사고방식,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반복되는 '추상적인 패턴'을 염두에 두고 세상사와 정치를 동일한 잣대로 일관되게 평론하고 전망할 수는 있다! 왜? 해 아래에 새로운 건 없으니까. 이 개념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로마 교황이 미래에 나타날 성육신한 마귀 적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 하던 짓거리로 봐서는 거기에 정치 종교적으로 항거했던 사람들이 저놈은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으며, 그 시절에 존 네이피어(수학 로그의 고안자)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처럼 북괴 정권은 얘 자체가 성경 교리 차원에서의 적그리스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얘들이 주민들에게 해 온 짓거리는 대환란기 때 벌어질 적그리스도의 본색 통치와 인류 역사상 가장 유사한 형태이며,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4. 우박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라는 게, 관측 가능한 모습만 서술하자면 공중의 구름 속 얼음 조각(빙정)이 적당히 커지고 무거워진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상 현상이다. 녹으면 비가 되고 언 채로 내리면 눈이 될 뿐이다.
구름은 짙은 안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건이다. 비행기 안이나 높은 산을 오르는 중에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잠시나마 할 수 있는데, 별 거 없다. 그냥 시야가 싹 흐려지고 온통 회색 천지가 됐다가 다시 풀려난다.

본인 역시 흐리고 비 내리는 날에 등산을 갔다가 이걸 실제로 겪은 적이 있다. 구름 속에 있다고 해서 딱히 눅눅하고 축축한 느낌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때로는 하늘에서 비나 눈보다 더 더 딱딱한 얼음 덩어리인 우박이 떨어질 때가 있다. 얘는 큰놈을 맞으면 좀 아플 수가 있다. 심하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며, 건물과 차량을 부수고 농사를 아작 내는 재앙이 된다.

우박은 눈이나 비가 되어 곧장 떨어져야 할 빙정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대기의 상승 기류를 타고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녹지 않은 채로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을 때 생긴다. 그러니 기온이 무작정 낮을 때가 아니라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대기가 불안정할 때 더 잘 생긴다. 우박이 한겨울보다는 봄에 더 잘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우박은 이집트의 재앙(출 9:18)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나오는 대환란 재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라고 언급된다.
구름 속 얼음 조각들을 평범한 눈· 비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마치 기 모으듯이 요리조리 만지작만지작 크기를 일부러 키워서 우박으로 개조한 뒤에 떨어뜨리는 건 신의 입장에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콩알만 한 우박은 그냥 귀여운 애교 수준이겠지만, 관측과 기록이 있는 근래에 수백 g~심지어 1kg에 달하는 우박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검색을..) 당연히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런데 성경은 미래의 대환란 때 무려 1 달란트 무게의 우박이 떨어질 거라고 말한다(계 16:21). 달란트는 화폐 단위일 때도 매우 큰 단위이지만, 무게 단위일 때는 거의 27~30kg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 뭐 우박 한 덩어리가 수박을 넘어서 쌀 한 가마니나 무거운 아령, 완전군장의 무게에 맞먹는다. 일반적인 기상 현상/이변으로 발생하는 우박보다 수십 배 이상 무거운 놈이다.
얼음의 밀도만으로 우박 덩어리의 무게를 그 정도로 키우려면 우박 하나가 사람 머리통 이상으로 더 커야 할 것이고, 아니면 우박 안에 무슨 쇳덩어리라도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우박을 맞는 지역은 당연히 완전 작살이 나며, 이 재앙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창 욕하고 모독할 것이라고.. 그 예상까지도 성경에 친절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5월 초에 서울에 난데없이 천둥과 우박이 내린 걸 보고는 성경에 나오는 우박 생각이 문득 들었다.

5. 웰 다잉

요즘 웰빙뿐만 아니라 '웰 다잉'이라고 해서 죽는 것도 미리 준비해서 품위 있게 죽자.. 뭐 그런 트렌드가 있다.
이게 조금 더 엇나가면 "더 추해지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다"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윤리 논쟁까지 일으키게 된다만..

그래도 미리 장례 체험, 유서 미리 쓰기.. 이런 움직임 정도라면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군생활 하면서 KCTC 훈련 중에 적탄에 맞으면 전사로 처리되어 전장에서 열외된다. 영현빽에 산 채로 들어가고 자기 배 위로 태극기가 덮이는 체험을 해 보면, 체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고 한다. 군대 가서 유익한 경험을 하고 온 셈이다.

물론,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들은 죽음 준비 전문이니 이 분야에서 자기 교리를 따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이다. 군대에도 군종이라는 병과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군인이란 직무 수행 중 순직할 수 있는 직업의 최고 극한 형태이니까..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약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내세와 심판, 절대자에 의한 구원과 영생이 핵심 교리이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에 대해서는 구약 유대교와도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좋은 교회는 복음 전파와 구원에 충실해야겠지만, 그 뒤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성장·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시키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든, 아니면 산 채로 휴거되어서 가든.. 거기서 하나님이 무슨 질문을 할지, 우리는 욥기 끝부분을 능가하는 어떤 팩트폭격을 당하게 될지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학원생이 졸업을 위해 논문 심사를 받는 순간이 오고 기업가가 정기적으로 세무 조사를 받는 순간이 오며, 기업에서 인사고과 평가를 하는 날이 오는 것과 같다. 일단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행 천국행을 결정하는 심판에는 걸릴 일이 결단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평가를 받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걸 늘 의식하고 산다면 크리스천의 삶이 지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12 08:31 2018/07/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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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으로서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

'성(城)'이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 인트로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주변에 moat라고 불리는 도랑도 있고 거대한 저택이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래도 만리장성 같은 긴 성벽이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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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남한산성과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양도성은 세계 유산에까지 등재될 정도의 유니크함은 부족하다는 판정을 받아 등재가 거절됐다.

수원화성은 남한산성만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없고 한양도성만치 오래되지도 않은 데다, 일제 시대와 6· 25 전쟁을 거치며 왕창 훼손됐던 것을 어차피 후대에 재건· 복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화성 성역 의궤(儀軌)'라는 기록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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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짓는 데 동원된 기자재와 구체적인 공사 기법, 건설 당시의 꼼꼼한 일지, 건설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 주고받았던 공문들, 건설에 참여했던 석공과 목수들 명단... 이런 게 미주알고주알 몽땅 적혀 있다.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파괴됐다 해도 이 FM대로만 다시 이행하면 정말 1700년대 고증을 100% 반영해서 성을 똑같은 절차를 동원해서 똑같은 형태로 고스란히 다시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 소스 코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지 현대 고고학 지식을 동원해서 재추적해야 하는 이집트 피라미드나 이스터 섬 모아이 같은 물건과는 처지가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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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그 유명한 오사카 성만 해도, 저 정도의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건된 건물은 그냥 외형만 얼추 닮았을 뿐, 내부는 그냥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재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조선이 말기에 망한 과정이 워낙 추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실록을 포함해 기록 하나는 타 왕조나 국가들보다 신경 써서 잘 남겼다. 이런 기록 덕후 왕조에서 한글 같은 문자를 새로 창제했으니, 문자의 창제 시기와 설계 컨셉 같은 것도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런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으며, 지금의 재건 레플리카가 1700년대 초기 원형 건물과 동급의 권위와 정통성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원형 건물과 동등한 권위"... 아마 킹 제임스 성경 빌리버들에게 귀가 솔깃하게 들릴 텐데..
그렇다. 성경도 이런 정도의 퀄리티로 전수되고 번역됐다. 그렇기 때문에 자필 원본이 진작에 소실되고 없어도 지금 읽는 역본이 자필 원본과 동등한 영감을 담고 있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오래되고 낡은 채로 짱박혀 있는 소수 사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필사되고 읽히고 닳아 없어지길 반복했으며 교차 검증도 되는 다수 사본이 진품이다.

또한 수원화성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 기록돼 있는 온갖 쓸데없이(?) 디테일해 보이는 사람 명단이나 숫자 목록, 물건들의 구체적인 치수들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성경 기록이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까지 포함해서 모두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2. long S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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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를 오늘날보다 더 많이 쓰고 있고 (booke, fowle, forme, grasse, selfe, sunne, starres)
u와 v가 헷갈리는 등.. (heauen??)
완전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단어 스펠링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겨우 thou, thy, -eth 이런 건 그냥 약과다.

심지어 KJV의 고유한 특징이라 불리는 '이탤릭체'조차도 오리지날에서는 이탤릭이 아니었다.
보다시피 본문은 뉴욕 타임스 같은 '고딕체'이고, 이탤릭은 그 안에 작은 크기의 '로만체'로 적혀 있다. (정작 난외주에서는 이탤릭체가 쓰였는데도!)
첨가된 단어에 대한 표기는 차라리 한글 개역성경과 더 가까운 형태인 셈이다.

그런데 I와 J, U와 V, W 이런 게 오락가락 하는 건 제쳐놓고라도.. s가 f처럼 적혀 있는 건 굉장히 적응이 어렵다.
graffe, beafts, felfe, feafons, leffer, faid, firft, alfo (???)
게다가 모든 s가 저렇게 쓰인 것도 아니고 s 자체 역시 따로 있다. s와 f모두 각각 음절초와 음절말에 다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등장 조건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

독일어 철자법에 ß가 있는 것처럼 저 시절에는 long S라는 게 따로 있었다.
내 생각에, 한글로 치면 아래아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처음엔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한쪽의 음가가 오래 전에 소멸하고, 영어의 철자법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결국 long S는 짤린 것이다. 그게 무려 1700년대의 일이다.
아래아가 음가를 상실한 뒤, 20세기에 와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짤린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 하겠다.

킹 제임스 성경이 원체 archaic한 단어와 문체로 유명하긴 하지만, 글자 자체도 archaic한 놈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수학에서 일명 '인테그랄'이라고 불리는 적분 기호 ∫가 바로 길게 늘어뜨린 long S의 후신이다. sum을 나타낸다.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본인은 개인적인 신앙 노선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이다.
구원의 길이 예수 유일이듯이, 그런 독단 배타적인 교리를 텍스트 형태로 명시하고 있는 성경도 특정 역본 유일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거나 어색할 것이 전혀 없다고 본다.

성경만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느 텍스트가 번역될 때와는 달리 예외적이고 특례적인 섭리와 보존이 있었다고 믿는다. 설령 KJV라는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이나 번역자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기독교계가 원어 원문 운운하는 온갖 지적 사기와 말장난, 혼돈을 벗어나서 뭔가 절대 기준을 가질 수 있다. 교리의 근간과 믿음의 대상이 존속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고전 텍스트들은 잘난 학자들이 점점 더 원래의 의미를 복원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이미 정확하게 잘 완성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트렌드가 반대로 타락하고 퇴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 왕이 아기를 둘로 쪼개서 반반씩 나눠 가지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아이의 진짜 엄마는 완전 화들짝 멘붕했지 않던가?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읽는 성경이 변개되고 파편화돼 있다는 말을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JV 유일주의는 기독교계에서도 소수설로 취급되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다.
이런 사람들은 KJV에 '없음' 구절이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 반대로 '없음'이 원래 맞고 KJV가 후대에 추가(!!)돼서 사본학 근거가 부족한 구절까지 덤으로 갖고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없음'이 있긴 하지만 동일한 내용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도 해명한다. 예를 들어 마 17:21에서 "기도와 금식"이 삭제되긴 했지만 막 9:29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가 삭제되긴 했지만 엡 1:7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이다.

행 12:4의 '이스터'(파스카)와 마 12:40의 '고래'(케토스)는 단골로 오르내리는 번역 이슈이다. 이건 KJV 옹호 진영에서도 다 반박이 돼 있다.
요일 5:7은 일명 '요한의 콤마'라 하여 킹 제임스 성경에서만(동일 계열의 바른 사본도 포함)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온전히 입증하는 구절인데... 이것도 원래 성경에는 없던 말이 후대에 추가된 거라고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은 나쁜놈들이 변개하고 삭제하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과잉 충성분자가 첨가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본다. 계 22:18을 뻔히 믿는 사람이 설마 감히 첨가를 하겠는가?

그리고 원어· 원문뿐만 아니라 해석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구절이 있다. KJV 빌리버들은 시 12:6-7이 하나님 말씀 보존에 관한 약속이라고 본다. 7절에 나오는 preserve them은 당연히 바로 앞의 words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이마저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한다는 말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이런 말을 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다중적용 예언이 나오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불편해하고 굳이 가리려고 애쓰는 건, 마치 창 22:8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것임"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고 창 1:2와 렘 4:23을 같이 연결하여 심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단시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KJV 유일주의를 기를 쓰고 공격하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저런 유명한 구절들을 끄집어내서 KJV가 오역을 했거나 원래 원문에 없는 문구를 추가한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벧전 2:2까지 거론하면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자라라"가 아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라는 잘못된 교리가 맞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성경과 관련하여 어차피 어딘가에 권위를 둬야 한다면, 현대 역본 번역자나 원어학자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400여 년 짬밥의 안정화 내력이 있는 영어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하고 현실성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지엽적으로 약간 오류(흑역사, 아쉬운 점, 단점, 나쁜 점, 부정적인 것)가 있지만 그래도 큰 그림을 보면 좋은 게(선한 것, 감사할 것, 유익한 것 등..) (훨씬) 더 많고 괜찮다."
이런 사고방식은 통계를 동원하여 공학 연구나 과학 실험 결과를 평가할 때, 혹은 우리나라 현대사 같은 걸 논할 때, 이·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의 행적을 평가할 때는 적절하고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적당히 오역이나 오류도 좀 있지만 대충 요점만 들어맞으면 되는 부류의 책이 아니다. 만약 성경이 그런 부류의 책이라면 자기가 성경의 오류 감별사라고 설치면서 궤변 말장난을 늘어놓는 사기꾼들, 성경에 기록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내용들을 제멋대로 영해하는 미친놈 이단 교주 등.. 그로부터 야기될 혼돈· 무질서와 오류, 부작용, 폐단이 가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내가 저런 사고방식을 몰라서 KJV 유일주의를 고수하는 게 아니다. 성경이 기독교 정체성의 유지에 어떤 기여를 하는 존재이며 나에게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지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28 08:29 2018/06/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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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다 =_=;;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에서 가까이서 본 광안대교와, (대략 1.2km 정도 떨어짐)
저 멀리 일본 쓰시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본 광안대교(대략 50km)는 외형상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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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쪽에서 본 교량은 해수면 수평선의 아래로 푹 꺼지듯 내려앉아 있음이 명백하다.
굳이 이 사진 말고 어느 풍경 사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원근법 때문에 작게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건 교량 위 아래의 기둥 크기 비율을 고려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래로 꺼진 건 명백하게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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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은 말 그대로 해수면에 거의 근접하는 낮은 고도인 반면, 쓰시마 섬에 소재한 '한국 전망대'는 해발 70m에 달하는 언덕 위의 고지대이다! 그럼 상식적으로 광안대교가 밑동까지도 잘 보여야 정상일 것이다. 참고로 광안대교의 도로는 해발 45~50m 남짓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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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가 왜 발생할까?
답은 하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이다.
배가 저 멀리 사라질 때도 그냥 중앙의 소실점 근처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듯이 사라지는데..
그 현상만 갖고는 flat earther들이 선뜻 수긍하질 않으니, 이럴 땐 일개 선박보다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증거인 광안대교 풍경을 제시해 보자.

이 문제 갖고 고민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특히 성경 믿고 신의 창조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과학으로 검증이나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 지도가 평면이니까 지구도 평면이다" 수준의 유체이탈이나 마찬가지인 아무말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수님 부활이 사실인 것만큼이나 아폴로 승무원들이 달에 다녀 온 것도 사실이고, 지구가 둥근 구인 것도 사실이다. 그건 창조· 진화라든가 성경의 무오성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
"땅의 원"(circle of the earth - 사 40:22)이 지구가 둥글다는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땅의 네 모퉁이"(four corners of the earth - 계 7:1)는 지구가 평면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그 문맥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세상을 너무 음모론 괴담스럽게 볼 필요 없다. 세상이 영적으로 아무리 악해도 멀쩡히 눈과 귀로 관찰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것을 호락호락 조작하고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지구 모양을 갖고 사기를 쳐서 도대체 누가 무슨 이득을 얼마나 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는데, 세상 다른 현상은 다 음모론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최소한 (1) 전기차가 망한 것과 (2) 인간이 과거에 달이 간 적이 있는지, 갔다면 지금은 왜 달에 더 안/못(?) 가고 있느냐 하는 건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현상이다.

(1)은 무슨 석유 회사의 외압 로비 같은 거 전혀에 가깝게 없으며, 있다 해도 전기차 몰락의 주 요인이 결코 아니다. 그냥 전기차가 배터리의 무게와 가격, 항속 거리와 충전 시간이라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기름차의 기술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서 망했을 뿐이다. 전기차는 처음에 간단하게 만드는 게 기름차보다 쉬웠을 뿐이지 그 이후로는 실용화가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디젤 엔진 기반의 대형 버스와 트레일러가 배터리 기반 전기차로 가능할까?? 21세기에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2) 역시.. 천문학적인 발사 비용 대비 효과가 없으니 더 안 보내는 것일 뿐이다. 허무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서 이것보다 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우주 관련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꼭 미국 NASA만 세상 모든 정보를 움켜쥔 빅 브라더스 흑막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왜 소련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미국 최대의 경쟁자요 어떻게든 미국의 행보에서 약점 잡을 것 찾느라 목숨을 걸었던 소련조차 미국이 달에 사람을 보냈던 걸 빼박 다 ㅇㅈ했구만.. 설마 미국과 소련이 나란히 같이 짜고 조작극을 벌였다고 믿으시는가? 애초에 NASA 자체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멘붕 하고서 미국이 허겁지겁 설립한 연구 기관일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그 냉전이 끝났다. 컴퓨터가 처음으로 대중화되고 정보화 시대네 뭐네 말이 나오자 이번에는 666이 어떻고 모든 것이 컴퓨터에 의해 중앙 통제되고 정보 접근성으로 인한 신분 계층 차별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게 될 거라는 식으로 괴담이 왕창 나돌았다.
난 그 심정은 이해한다. 198, 90년대라면 나도 그런 쪽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의 뚜껑을 열어 보니 세상은 그렇게 막장으로 무식하고 폐쇄적이고 흉물스럽기보다는.. 훨씬 더 상업주의 자본주의적으로 돈의 논리를 따라 개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기술과 정보들이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기는커녕, 대중들에게 개방되고 무료로 내지 아주 저렴하게 풀렸다. CCTV, 블랙박스, 중앙집권 전산화 덕분에 치안, 행정과 금융이 정말 투명하고 깨끗해지고 신속· 공정해졌다.

남극과 달은 은폐는커녕 표면의 스트리트 뷰가 나도는 지경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제어하던 컴퓨터 프로그램의 어셈블리어 소스가 github에 공개되어 있다. 설마 그게 다~~ 주작 조작이겠는가?

물론 그것들이 마냥 자선행위 차원에서 풀린 건 아니며, 그 투자 비용은 더 교묘한 방식과 다른 형태로 어떻게든 회수되긴 할 것이다.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던 기술과 집중되었던 자본이 나중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악하게 쓰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 어떤 형태로 구체적으로 실현될지 우리로서는 선뜻 추측할 수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그 엄청난 기술들이 대중들을 통제하여 고작 아폴로 계획 자작극이나 지구 평면이라는 엄청난 팩트(?)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어 쓰이고 있다고 믿는 건... 성경을 믿는 것보다 정말 엄청나게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게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같은 날 같은 정오 시간대에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그림자 길이가 차이가 난다는 걸 발견하고는 그걸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추측 계산해 내기까지 했다. 이 때는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 시기이던.. 그야말로 엄청난 옛날이다. 기구 하나조차 띄울 여력이 안 되던 시절에 지구가 둥근 건 너무 당연한 귀결이고, 그 둘레를 오늘날의 측정값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맞힌 것이다.

컴퓨터, 우주선, 휴대전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2천 몇 백 년 전의 사람보다도 통찰력이 뒤쳐져서야 되겠는가?
세상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게 머리 잘 돌아가는 분야가 있다는 건 성경도 인정한 팩트이다(눅 16:8). 그걸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07 08:33 2018/06/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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