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원초적인 성경 계보와 종교 비교 얘기를 좀 하겠다. ㄲㄲㄲ
종교 개혁 개신교 진영에 킹 제임스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면, 가톨릭(천주교) 진영에는 듀에이-림즈(Douay-Rheims)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

개신교 쪽 성경 중에 제네바 성경처럼 인명이 아니라 지명을 딴 역본이 있듯, 듀에이와 림즈는 프랑스의 지명이다. 원어인 프랑스어 스타일로 읽으면 “두에 렝스”라고 한다.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개신교 쪽의 종교 개혁이나 성경 번역과 관련해서는 언급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대신 천주교 성경이 저 동네에서 번역되었던가 보다.

공교롭게도 킹 제임스와 듀에이-림즈는 나온 시기가 굉장히 비슷하다. 전자는 어명에 의해 1604년에 번역 위원회가 조직되고 번역이 시작됐으며, 1611년에 전서가 한꺼번에 출간됐다.
한편 후자는 전자보다 약간 더 전부터 더 오랫동안 번역되어서 1582년에 신약, 1609년에 구약의 순으로 나눠서 출간됐다. 그래도 시기가 상당히 비슷한 건 사실이다.

1582년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100의 배수해의 윤년 여부) 현재까지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달력인 그레고리력이 시행된 해이기도 하다. 저 때가 교황청에서 나름 성경도 만들고 달력도 고치는 등 여러 일을 했던 때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쟤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교황의 권위를 다시 강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먼 옛날 헨리 8세 때부터 이미 교황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체 교회를 운용하였으며, 자국어로 성경 번역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출간 목적 중 하나는 성경 역본을 통합하여(비숍, 제네바) 그런 영국 교회(성공회, 청교도)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천주교에서, 특히 휘하 조직인 예수회에서 뜬금없이 영어 성경을 내놓은 목적은 개신교 진영에서 시작된 자국어 성경 번역 트렌드에 맞불을 놓고(counter-) 자기네 교리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어쩔 수 없이 한 셈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오늘날 천주교 성경에서도 수용하지 않는 오글거리는 왜곡 번역이 좀 있다. 본인이 아는 건 딱 두 가지이다.

  • 창 3:15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는 예언을 “여자”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고 바꿨다.
  • 눅 1:28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은 원래 “큰 은총을 입은 자여”(피동)라는 요지인데.. 그걸 “은혜가 가득한 자여”(능동)라고 바꿨다.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번역을 저렇게 한 것이다. 저 시절에 저렇게 뜯어고치는 건 우리로 치면 일제 시대에 손 기정 선수 사진에서 복부의 일장기를 뽀샵질로 일부러 지우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로서 천주교는 성경을 금지하고 없애고 신자들을 죽이고 성경 변개에 일조한 집단 정도로나 알고 있었다. 자기 교리를 위해서 말을 버젓이 뜯어고친 듀에이-림즈 역본이야 더 볼 것도 없는 부패한 성서이고 말이다.

지금도 그 신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총론을 넘어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런 성경에도 의외의 면모가 있다는 것을 근래에야 발견했기에 몇 가지 예를 완전성 차원에서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듀에이-림즈(DRB)는 만들어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킹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고어체이며 thou, thee, -eth 같은 대명사와 접사를 볼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는데.. 가장 먼저 골 1:14를 펴 보자.
변개된 역본에서는 “그분의 피로 through his blood”가 삭제되었다고 킹 제임스 유일주의자들이 으시대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remission of sins:

본인은 눈을 의심했다. 존재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through his blood가 DRB에서도 살아 있었다. 아니 이거, 마리아 숭배를 조장하던 그 역본이 맞나?
오히려 개신교 계열이며 천주교에서 과거에 시신을 부관참시했고 오늘날까지도 싫어하고 이단시하고 있는 위클리프.. 그 사람이 만들었던 옛날 성경(WYC)에는 through his blood가 없다.

in whom we have again-buying and remission of sins.

그건 이해가 된다. 위클리프 성경은 DRB보다 200년 가까이 전, 이 성계가 살아 있고 조선이 건국되었던 1390년대에 그 시절 여건의 한계상 ‘변개된 본문 계열’인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번역됐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요 1:18도 찾아봤다. 무려 초대 교회 시절 오리겐 때 ‘독생하신 아들(son)’이 ‘독생하신 하나님(God)’으로 바뀌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DRB)
… but the one begotten Son, that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told out. (WYC)

어라? 위클리프와 듀에이 모두 ‘아들’이라고 돼 있고 결과적으로는 KJV와도 일치한다. 오히려 개역, NIV, NASV 같은 20세기 역본들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뭔가 혼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For three be, that give witnessing in heave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be one. (WYC)
And there are Three who give testimony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DRB)

혼란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요일 5:7이었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세 분이 계시니…”라고 KJV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구절, 원래는 없었다가 후대에 첨가된 거라고 잔뜩 공격받는 그 구절이 위클리프와 듀에이에 모두 버젓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양 진영에서 각각 내놓은 성경이 진술이 이 정도로 일치한다면 이건 완벽한 교차검증 성공이지 않은가? KJV를 만들 때 성공회 팀과 청교도 팀이 눈에 불을 켜고 상호 검증하던 것을 뺨치는 수준이다.

따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DRB는 사 14:12에 루시퍼도 남아 있고 계 2:13에서 사탄의 왕좌 대신 자리라고 KJV 스타일로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DRB만 욕하기가 민망하고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래서 뭐든지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보고 팩트 확인을 꼼꼼히 해야 되는구나..

뭐 그래도 벧전 2:2에서는 서로 제 갈 길 가는지 DRB는 변개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이고, WYC는 어째 KJV에 더 가까운 스타일로 번역되었다.

As newborn babes, desire the rational milk without guile, that thereby you may grow unto salvation. (DRB)
as now born young children, reasonable, without guile, covet ye milk [of full teaching], that in it ye wax into health; (WYC)

다시 말해 골 1:14와 벧전 2:2를 비교해 보면 KJV는 OO, 개역 NIV 따위는 XX인데.. DRB는 OX요, 위클리프는 XO인 셈이다.
본인은 세상의 모든 성경은 OO 타입 아니면 XX 타입이지, OX나 XO 타입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중간형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런 사실은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5분만 관심을 갖고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뭐, 킹 제임스 지지자건 반대자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회색지대 영역이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위의 사실은 가톨릭 쪽이든 개신교 쪽이든, 성경이 필사되고 전수된 과정이 모 아니면 도 하나로 언제나 딱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그나마 긍정적인 쪽으로(OO)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건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 정립이다. 그리고 이를 대적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쪽으로(XX)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본문과 RV 역본이다.

16세기에는 요일 5:7에 실제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기록돼 있었나,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진짜로 기록돼 있었나 하는 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이래로 본문비평이라고.. 성경 변개를 학술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수작 하에서 근현대에 와서야 제기된 낭설이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심하던 16세기에 진짜 중요했던 것은 “성경에 외경--가톨릭에서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을 넣을 것인가? 넣는다면 구약의 일부로서 embed시킬 것인가 아니면 부록으로 별도로 넣을 것인가?”였다. 천주교 식이라면 토비트, 유딧, 에스드라, 마카베오 같은 책도 구약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에스더기는 10장 3절 이후로도 계속되어 무려 16장까지 있게 된다.

킹 제임스조차도 당대의 관행과 종교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나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절대 아니고 구약으로부터 분리된 부록 형태로 수록되었다. 그 시절엔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의 한 수 파격이었고 교황 추종자들로부터 밉보일 짓이었으며, 최악의 경우 번역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겪고 암살 당할 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출처) 1611년도 KJV 원판에서 외경의 한 페이지이다. 보다시피.. 에스더기만 해도 10장 4절부터 시작되는 외경 영역은 완전히 분리해서 수록하지 않았는가?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라고 말이다. 세상에 그 어떤 천주교 성경도 에스더기 뒷부분을 이딴 식으로 편집해서 수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톨릭 정신이 너무 투철한 일부 사람들은 KJV도 외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친가톨릭 성경이라고 비판하고 1611년판이 아니라 1655년인가 뭔가 외경이 완전히 제외된 KJV가 진짜 KJV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건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며, 별 영양가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으니 슬슬 정리를 하겠다.
본인은 KJV 유일주의자로서 가톨릭이 성경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기여를 한 것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독립된 분야로 요약하겠다.

1. (과거) 가장 먼저 옛날에야 일반인들에게 성경의 소지를 금하고 번역도 금하고.. 자기들 말고는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실물을 불태웠다.
차라리 이단도 생기고 온갖 교단 교파들로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수많은 지역 교회들이 잡초처럼 생겨나는 것이 성경적이지, 저기 같은 피라미드 중앙 집권 체계는 성경적인 교회 모델이 아니다. 뭐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어서 쟤들도 물리적인 박해는 못 한다.

2. 오리겐 같은 옛날 사람들이 조금씩 독소를 넣고 변개해 놓은 일명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토대로 변개된 라틴어 본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 자체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본문 변개의 여파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DRB에도 올바른 다수 사본의 영향을 받은 맞는 표현도 여럿 등장했던 것이다.

3. 구약 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해 넣고, 십계명을 고쳤다. 이건 오늘날 개신교 쪽의 변개된 성경에서도 따르지 않는 사항이니 골 1:14, 벧전 2:2 같은 변개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4. (과거) 한때 DRB 같은 마리아 숭배용 엽기적인 역본도 만들었다. 물론 오늘날은 천주교 성경에서도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지는 않으니 저건 흑역사가 되었다.

5. 그리고.. 옛날 성경에서 O를 확실하게 X로 몽땅 바꾼 개정판을 만들고, 20세기 이래로 모든 성경들의 번역 트렌드가 이걸 따라가게 만들었다. 2에다가 학문적인 근거(?)를 추가해서 그 영향력을 소위 기독교계 전체에 파급시킨 것이다.

본인은 이번 리서치를 통해서 2와 5를 더 명확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요일 5:7이 원래는 없다가 후대에 추가됐네 이딴 소리들은 2가 아니라 5의 산물인 것이다. 그놈의 후대라는 건 도대체 정확하게 언제쯤 후대를 가리키는 걸까?

사실, 논리를 더 명확하게 세우려면 천주교에서는 DRB 이후로 어떤 영어 성경을 사용해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개신교계가 KJV를 300년 가까이 사용하다가 갑자기 19세기 말부터 RV, ASV의 순으로 부패가 시작됐는데 저쪽도 DRB를 천주교계의 KJV마냥 수백 년 사용하다가 성경이 바뀌었는지?

1970년대에 나온 천주교용 NAB (New American Bible)은 이미 변개된 XX 스타일로 다 바뀌었다. 개신교가 이미 변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가톨릭에도 그런 변화가 없었을 리가 없다.
사실 본인은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기 전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무슨 성경을 사용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설마 개신교 쪽 성경을 봤을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아예 성경 없이 교리문답서만 보고 살았는가?

적장은 적장을 알아본다고 가톨릭은 오늘날도 위클리프나 루터나 틴데일이나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절대로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지금이 옛날 같은 종교 재판, 이단 심문 같은 게 존재하지는 않으며 다들 평화니 화합이니 하고 있지만.. 결국 교리와 믿음이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두 버전으로 주셨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가톨릭의 듀에이-림즈는 현재 가톨릭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골동품이지만, 기독교의 킹 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종 권위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말씀 보존 약속을 이행해 주신 바로 그 실물이다. 아멘.

  • 종교 개혁의 불모지이고 예수회의 본산지이던 스페인에도 그래도 ‘레이나-발레라’라고 바른 계보의 성경 역본이 있다. 요일 5:7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얘는 누가 언제 어떤 계기로 번역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국은 1990년대가 돼서야 바른 계보 번역 성경이 나왔는걸..;;
  • 우리 진영 교회사에서는 맨날 사악한 가해자, 거의 공산주의자 급의 종교 공작원이라고 묘사되는 예수회가 일본에서는 박해받은 ‘기리시탄’이라고 불렸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중세 일본에서 사용했던 예수쟁이 식별법 중엔.. 나 같은 사람이라면 굳이 걸려들지 않았을 방법도 있다. 형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5 08:35 2020/05/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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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어, 시력 이야기 등

1.

  • "즉시 그(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가 곧 시력을 받으니라. 그가 일어나 침례를 받고" (행 9:18)

요즘 scale이라고 하면 크기, 규모라는 뜻이 더 와닿지만 scale에는 비늘이라는 뜻도 있다. (동음이의)
구약 성경의 율법에서 포유류는 굽과 되새김질 여부가 식용 가능 여부를 결정한다면, 어류는 비늘과 지느러미의 존재 여부가 그 역할을 한다.
아울러, 사전을 찾아보면 피부병 딱지, 갑옷의 미늘, 물통 안에 낀 물때 같은 것도 다 저 scale이다.

치아 스케일링은 치아 주변에서 저런 비늘처럼 덕지덕지 붙은 치석을 떼어낸다는 뜻이다. 무슨 크기 조절과 관련된 뜻이 아니다.
그러니 사실 descale이라고 해야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컴퓨터 저장 장치에서 defragment, 비행기에서 deicing처럼 말이다. 뭔가를 제거하여 정리한다는 뜻의 단어에는 대체로 접두사 de-가 붙어 있다.
다만, void/be devoid of, press/depress 이런 관계를 생각해 보면 de-가 언제나 뒤의 어근을 없애거나 부정하는 것 같지도 않다.

2.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성경을 더 찾아보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에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되찾아 준 것이 여럿 나온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는 남이 뱉은 침을 맞는 극도의 치욕· 모욕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예수님도 침을 뱉으신 적이 있다. 두 번인데.. 모두 다 맹인의 눈을 고치실 때이다. 치과 다음으로는 안과 얘기네..

  •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고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막 8:23)
  • "이렇게 말씀하시고는 그분께서 땅에 침을 뱉고 침으로 진흙을 이겨 그 눈먼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며" (요 9:6)

모욕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정반대 일을 하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구약 외경 중에 토비트.. 개역성경식 외래어 표기법이라면 아마 '도빗' 정도 됐을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이 사람은 놀랍게도 공중에서 떨어진 새똥(정확히는 참새의..)을 눈에다가 정통으로 맞는 바람에 눈에 막 같은 게 끼고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결말부에서는 물고기의 쓸개를 환부에다 발라서 눈을 치료받는다.

눈 영양제 '토비콤'의 이름이 혹시 토비트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안국 약품의 창업주나 중역 중에 혹시 가톨릭 신자가 있나.. 라고 나만 생각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냥 추측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3 08:34 2020/05/0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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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대해서

1. 관련 용어

빨강이라는 색이 있을 때 같이 나란히 쓰일 만한 보색으로는 노랑(경고의 수위), 검정, 파랑, 초록 등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처럼 성경 용어 내지 개념으로서 faith(믿음)와 대비될 만한 관련 용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 은혜(grace): 믿음에 의한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다. 받을 자격이 없는 을에게 갑이 먼저 무료로 베풀어 주는 뭔가 좋은 것을 말한다. 엡 2:8은 saved by faith through grace라고 믿음과 은혜의 관계를 설명한다.
  • 회개(repentance): 믿기 위해서 을에게 먼저 동반되어야 하는 심경의 변화, 유턴, 반전이다. 이전 글에서 논했듯이, 꼭 물리적인 나쁜짓을 그만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믿지 않는 것도 죄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진단하고 치료하지, 증상만 없애려 하지 않는다.
  • 일, 행위(work): 정말 믿었다면 그 결과 겉으로 바뀌어 드러나는 행적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믿음 분량의 차이가 있는 이상, 믿었다고 무조건 기계적으로 행위가 당장 나타나는 건 아니다. 또한 행위가 구원의 조건인 것은 더욱 아니다.
  • 시인, 고백(confession): 자기가 믿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동작이다. 성경에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같은 말씀이 있는데, 한편으로 문맥과 관점에 따라서는 입으로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믿음의 열매인 행위나 마찬가지일 수 있다(롬 10:9-10).

2. 유사 용어

  • faith는 뭔가 을이 갑에게 의지하는 종교적인 염원이 담긴 믿음을 말한다. "P와 NP는 아마도 같지 않을 것이다, 홀수 완전수나 65537 이후의 페르마 소수는 아마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다수 수학자들의 믿음이다." 이렇게 단순 추측에 가까운 믿음은 belief라고 하지 faith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 believing과 belief의 차이는 그리기와 그림의 차이와 비슷한 그냥 언어적인 차이일 뿐이고.. 성경에서 요한복음은 believe만 나오지 faith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3. 다양한 종류와 강도의 믿음

  •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와 믿음이 존재하고, 그 뒤에도 지속적인 회개와 믿음이 필요하다.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유지하고 바람직한 크리스천으로 살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이 내 죄 사하려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건 굳건히 믿지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 먹은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만족하라"를 안/못 믿는 "구원받은 불신자"도 세상에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그건 대외적으로나 자기 자신에게나 건전한 상태는 아님)
  • 꼴랑 구원받는 회개와 믿음 하나만 갖고 평생 사는 것은 결혼한 부부가 연애와 신혼 시절의 콩깍지만 갖고 평생 사는 것과도 같은 무모하고 불가능한 짓이다.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왜 즉시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는지를 잘 생각해 봐라.
  • 그리고 믿음이 아직 작은 것하고, 믿음이 아예 없는 것, 죽은 믿음은 셋 다 다른 상태를 가리킨다. 세상에 그 어떤 고성능 자동차라도 정지 상태에서 3단, 4단 기어에서 곧장 출발할 수는 없다. 이걸 갖고 "그딴 식으로 할 거면 아예 때려쳐라" 식으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지는 않아야 한다.

4. 성경에 나오는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들

성경에는 여러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는데 그 중 신앙 고백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굉장히 대단하고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몇 개 뽑으면 다음과 같다. 이걸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1) 욥: 알몸으로 태어났다가 죽어서도 알몸으로 돌아가는 게 인간 아닙니까? 모든 것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고 도로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주의 이름이 찬송 받으옵소서.
(욥 1:21. 빌 게이츠 급의 플래티넘 수저 갑부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천재지변으로 전재산 다 풍비박산 나고 자녀 10명이 몽땅 몰살당한 뒤에..)

(2) 다니엘의 세 친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를 풀무불에서 능히 건져낼 능력이 있습니다. 설령 그분께서 “그리하지 않고” 우리에게 죽음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한 치의 고민 없이 폐하의 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황금 형상에도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 3:17-18. 노발대발한 느부갓네살 왕과 불타는 용광로 앞에서..)

(3) 백부장: 님하 같은 엄청난 분께서 굳이 누추한 저희 집에 오시겠다니요? ㅠㅠ 그럴 필요 없이 말씀만 한 마디 하시면 종의 병이 원격으로 치료될 겁니다. 저 같은 일개 중대장도 명령을 내리면 100여 명의 부하 군사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 하물며 님하이시겠습니까?
(마 8:8-9. 다시 생각해 봐도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정말 대단한 논리와 믿음에 입각한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바리에이션으로 딸의 병을 원격으로 치료받은 어느 가나안 여인의 명대사도 있다. 마 15:27-28)

(4) 베드로: 님하는 그리스도이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 16:16. 특별히 역경 속에서 나온 말은 아니지만 그냥 내용 자체가 고퀄이어서)

Posted by 사무엘

2020/04/20 08:35 2020/04/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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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받은 첫 순간에 대한 기억

구원받은 첫 순간을 기억하는지 여부는 그 사람의 현재 실질적인 구원 여부와 아무 상관 없으며,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 교단· 교파에서는 저 날짜를 챙기는 걸 굉장히 강조하는 것 같은데.. 그다지 영양가가 없는 관행이다.  성경엔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같은 말씀이 적혀 있을 뿐이다.

좀 바보 같은 예이지만.. 본인은 시내버스를 타고 멍하니 있다가 "내가 이 버스를 탈 때 카드를 찍었나? 찍었던 순간이 기억이 안 나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버스에 계속해서 탑승해 있기 위해서 내가 처음에 카드를 찍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내가 만약 카드를 찍지 않고 무단으로 쓰윽 들어갔다면 애초에 기사 아저씨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무임승차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처럼 한번 받은 구원은 내 기억이나 언행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절대적으로 안전하고 든든하게 유지된다.
본인도 철도 안에서 거듭난 날짜야 기억하지만, 내 인생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난 때는 너무 어린 시절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10대 중반, 중2~중3 사이의 기간에 언제부턴가 선행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받아들였고, 죽으면 하늘나라 간다는 확신이 생겼을 뿐이다. 구체적인 날짜는 불명이다.

정확하게 언제 구원 받았는지는 알면 더 좋지만, 몰라도 지금 신앙생활 하는 데 아무 지장 없다.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한 법이다. 정 알쏭달쏭하고 모르겠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예수님 영접을 정식으로 다시 하면 그만이다.

2. 구원 확인 질문

어떤 사람이 구원받으면 영적 신분이 크게 바뀌지만 당장 외관상으로는 별로 달라지는 게 없다. 그 사람의 기분이나 성품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는 않으며, 하루아침에 더 큰 믿음이 생겨서 곧장 성경 말씀을 모두 지키며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 경험상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구원 확인 질문을 불쾌해하지는 않는 게 상식이고 정상이라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무례한 태도로 질문받은 게 아닌 한 말이다.

우리나라의 문화 정서가 서양 문화권에 비해 "뭐야, 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 감정이 더 강한 게 사실이다. 그리고 뭔가를 기초적인 것부터 꼼꼼하게 확인하고 따지거나 가까운 사람에게 일일이 "고맙다, 사랑한다, 미안하다" 같은 말을 하는 걸 남사스러워한다.

하지만 안 그래도 사람의 구원 여부는 행실만으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운데.. 단순 구원 확인은 무슨 육신을 죽이고 헌신과 섬김을 실천하라는 어려운 명령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색출해서 잡아 가두거나 죽이겠다는 상황도 아니다. "네, 저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았고 지금 죽으면 바로 하늘나라 갈 확신이 있습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가볍게 대답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거나 부끄럽거나 자존심 상하는 일인가?

예수쟁이라면 그런 질문을 받았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마침 질문 잘 하셨습니다"와 함께 자기 구원을 간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아니.. 이상적인 경우라면 남이 그런 질문을 할 일 자체가 없는 게 제일 좋다. 옆에서 행동을 보기만 해도 쟤는 정말 구원받은 크리스천이구나.. 싶은 것 말이다.

그저 단순히 "니예 니예" 친절하고 인상 좋은 차원이 아니다. 그 정도는 꽃뱀 제비 사기꾼이라도 얼마든지 연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차원을 넘어서 어렵고 힘들 때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고, 세상에 연연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구원을 받지도 못한 채로 그냥 인맥 관리와 사교를 위해 습관적으로 교회 다니는 사람.. 그것도 각종 직분까지 받아서 수행하는 사람이 정말 숱하게 많을 것이다.

3. 양자됨, 입양

기독교에서는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게 죄를 용서받고, 죽어서 내세에 가는 장소가 바뀐다. 믿음에 대해서는 두 달 전에 썼던 글에서도 심도 있게 다룬 바 있다.

이것을 좀 더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영적 신분이 바뀐다고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는데(다들 성경에 나와 있는 지위임), 한편으로 신약의 바울 서신들을 찾아보면 하나님의 가문에 입양되어 양자가 된다는 말도 있다. (롬 8:15,23; 갈 4:5; 엡 1:4-5)

구약 경륜 시절의 유대인이 뭔가 혈통적이고 선천적인 요소가 가미된 지위라면, 구원받은 성도들의 집합인 신약 교회는 양자이고 식물로 치면 본줄기에 접붙여진.. 뭔가 후천적이고 영적이고 2차적인 지위이다. (롬 11:17, 24)
컴퓨터에다 비유하자면, 전자가 마치 매킨토시처럼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일체형이라면 후자는 소프트웨어 지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약 교회가 유대인보다 뭔가 열등한 게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이제 유대인을 완전히 버리고 끝장 내고 교회가 유대인을 대체하게 된 것도 아니다. 이건 그냥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다양한 세상 경영 방식을 허락하고 도입하신 것일 뿐이다.

친자식은 너무 마음에 안 들면 부모가 법적으로 그 녀석과 연을 끊고 족보에서 파내고 상속도 안 물려주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인가 거기 민법에 따르면, 양자는 한번 친자로 입양한 이상 파양을 할 수 없으며, 상속을 무조건 줘야 한다고 한다. 그게 성경의 원리가 담긴 법이라고 울 교회 목사님께서 줄곧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미국이 법이 그런지는 내가 딱히 확인을 못 해 봤다.

양자의 권리를 진짜 혈통상의 친자녀와 마찬가지로 보호하기 위함이기도 하고, 또 가슴으로 낳아서 일부러 데려온 특별한 아이를 좀 수틀린다고 제멋대로 도로 파양하고 상속을 안 주는 것 역시 도의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신약 교회 성도들은 옛날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던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옛날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복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유대인들도 회복되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이다.

수많은 찬송가들이 구원을 노래하면서 “나 구원 받았네 I am saved”라는 가사를 담고 있는데.. 그와 달리 “I am adopted 양자가 됐네, 입양되었네”라는 이색적인 찬양도 있다. 작사 작곡자는 Ron Hamilton. Rejoice in the Lord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의 작곡자이기도 한데, I am adopted 역시 나름 성경을 묵상하고서 지은 곡인 것 같다.
I'm adopted, hallelujah! I finally belong. I've got a brand new family overflowing with love.”

Notes:

  • 예수님은 죄에 대한 대속 헌물이라는 명목으로는 그분 자신이 어린양이라고 묘사된다(창 22:8, 계 5:6). 그러나 성도들의 인도자 명목으로는 목자(요 10:11) 또는 목자장(벧전 5:4), 이때는 반대로 우리 성도들이 어린양에 비유된다.
  • 영화 <친구>에서는 잘 알다시피 “아부지 뭐 하시노? / 그래 이 빌어먹을 놈아. 너거 아부지는 죽은 사람 염해 가면서 니 공부시키는데 니는 30점을 못 맞나?” 그런 갈굼 대사가 나온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크리스천들의 잘못된 행실로 인해 비슷한 논리와 방식으로 모독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롬 2:24)
  • 자기가 만들지도 않은 생판 남의 아이를 굳이 입양해서 키우는 건 정말 숭고한 일이다. 우리나라는 전쟁 고아 명목으로, 또 전쟁 이후에도 한동안 미국에 고아를 얼마나 많이 수출했었나 모른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은 정말 천하에 반미 할 자격이 없는 나라이다.

4. 믿지 않는 죄와 다른 악행죄의 관계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구원 교리에 따르면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는 것, 자기 죄 가운데 죽는 것, 죽어서 혼이 지옥에 가는 것, 먼 훗날 백보좌 심판 후에 불못에 던져지는 것.. 이건 다들 필요충분조건 동치이고 동일 상황을 말한다.

마치 선형대수학에서 역행렬이 존재하는 n*n 정사각행렬 A에 대해서 “Ax=O에 오로지 영벡터 trivial solution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행렬식의 값이 0이 아니다”, “rank가 자신의 크기와 같은 n이다” 등 결국 그 말이 그 말인 동일한 진술이 여럿 존재하는데, 그와 비슷한 개념이다. 아이고, 왜 하필 저런 엄한 분야가 비유 대상으로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만..

인간을 지옥으로 보내는 유일한 죄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거절한 죄, 믿지 않은 죄뿐이다. 특별히 무슨 악행을 대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안 하는 것(OMIT),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죄로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요 3:36에서 “아들을 믿지 않는 자”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로 바뀐 것은.. 언뜻 보기에 그 말이 그 말 같아도 교리적으로 굉장히 해롭고 위험하게 변개된 것이다. 요일 5:10을 같이 보면 이런 불신자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는 거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지옥 정죄를 받은 사람들이 불신죄 단 하나만으로 완전 천편일률적으로 다뤄지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라는 실드가 없는 사람들은 불신 자체 말고 자기의 행위로 지었던(COMMIT) 다른 죄들이 모조리 드러나며 그걸 근거로 심판도 받는다. 계 20:12는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어차피 구원은 물 건너갔으니까 나머지 세부 내역들은 볼 것도 없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구원받은 사람들 사이에도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의 차별이 있듯이, 그렇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에 빠진 사람들 사이에도 형벌의 등급에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은 성경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말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믿지 않은 죄와 나머지 통상적인 악행죄의 관계는 뭐랄까..
군대에서 탈영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난 뒤에도 탈영병 복귀 명령에 대한 항명죄를 빌미로 공소시효를 몇 년 더 연장하는 것과 비슷한 관계 같다.
FPS에서 로켓의 직타 대미지와 스플래시 대미지의 관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27 08:35 2020/03/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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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의 성립

기독교의 핵심 기본 교리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이 세상 법보다 훨씬 더 원론적이고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알량한 노력으로는 그 무슨 수를 써서도 죄의 고리를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걸 일깨우기 위해서 복음 설교에서는 "형제를 마음 속으로 미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살인,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도 간음" 등 여러가지 말씀 인용과 비유가 제시되는데.. 뭐 좋다. 세상 법과는 달리 마음의 동기와 근원 차원에서 죄가 성립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논리를 펴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개연성과 합리성은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기끼리 모순을 일으키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얘기는 좀 조심해서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1) 인간은 당장은 티가 안 나지만 환경이 나빠지고 여건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지금까지 착 가라앉아 있던 추악한 본성이 다시 튀어나올 거라고 한다. 이는 물론 큰 그림 차원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쁜 환경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 정당방위나 긴급피난까지 죄일까? 당장 남을 안 죽이면 내가 죽게 되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이, 혹은 패닉에 빠져서 남을 죽인 것까지 살인죄일까?

이건 세상 법리로나 성경의 법리로나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다못해 출애굽기조차도 깜깜한 데서 자기 집에 침입한 도둑을 정당방위 차원에서 때려죽인 건 무죄라고 실드 치니 말이다. (출 22:2-3)
하나님은 인간의 동기와 마음을 일일이 다 따져보시니 이런 문제를 오히려 더욱 정확하게 판결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랑의 체벌이고 어디부터가 아동학대 폭력인지, 안락사가 어디까지가 살인이고 어디부터가 하나님이 데려가시도록 놔 주는 건지.. 이런 모호한 상황 문제에 대해서는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들끼리도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남에게 복음 전할 때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동원하면서 꼬드겨서는 안 된다.

(2) "당신이 어디어디에 낸 돈은 이런이런 나쁜 일을 하는 기업이나 다른 조직의 배를 불리게 됩니다. 그러니 여기 제품을 불매합시다" 이런 부류의 보이콧 권유 문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기독교계에는 어느 기업이 무슨 이단 종교 계열이라는 식이기 때문에 당신이 그 기업의 제품을 구입한다면 그 기업의 악행에 동조하게 된다는 식으로 반쯤 팩트 내지 반쯤 루머 괴담이 나도는 게 많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기업 제품 구매를 넘어서, 세금을 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은 이미 죄에 관여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 전개를 어느 설교에서 들어서 본인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의아함을 느꼈었다. 이유인즉, 내가 낸 세금이 어차피 반성경적인 나쁜일을 조장하는 데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랜다.

허나, 기업 제품 구매는 생필품 독과점이 아닌 한 전적으로 자기 자유 의지인 반면, 납세는 마치 군 입대만큼이나 내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이다.
더구나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발언과 함께 로마 제국 식민지 휘하에서 납세를 사실상 몇 차례 실천해 보였다. 그럼 예수님도 죄에 관여한 것인가? 저건 비유에 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켄트 호빈드 같은 사람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신념에 의한 병역..이 아닌 납세 거부 혐의로 오랫동안 감방 생활함. 꽤 극렬 강경한 젊은 우주 창조론자이기도 함)

(3) 인간은 불법 중에 수태되었고 죄인으로 태어나서 죄를 짓긴 하지만(성악설),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지옥 가는 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어린아기가 죽었다고 지옥 가지는 않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고 하나님 역시 걔들에게는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애는 체벌도 불사하는 양육과 훈육이 필요한 거지, 아예 죽어 버렸을 때의 구원 걱정은 안 해도 된다. 갓 소환돼서 잠시 동안 무적 상태인 게임 캐릭터와도 같다.

내가 늘 강조하지만 인간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자유의지와 행위로 인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옥 가기로 찜해 놓고 예정했기 때문에 가는 게 아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에 대해서는 칼빈주의가 전적으로 틀렸으며 알미니안주의의 통찰이 정확하다.

난 당연히 그런 걸로 알고 있고,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 것도 인간의 그 자유 의지를 돌려 놓고 바꾸기 위해서인 것으로 알아 왔는데.. 그걸 이상하게 배배 틀어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고서 놀랐었다.
다시 말하지만.. 세종대왕과 이 순신이라 해도 자기 의지에 따라서 죄 가운데 죽어서 엄한 곳에 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럴 능력조차 없는 어린애들까지 죽어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2. 회개

이건 몇 년 전에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논하면서 다뤘던 주제이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복습하고자 한다.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 앞서 다뤘던 저런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 공의로움, 심판과 지옥 같은 불편한 진실을 전하지 않고..
무슨 종교 영업사원마냥 “하나님은 사랑이에요, 우리 교회 나오기만 하세요, 님 인생에 나쁠 거 없어요. 이 영접 기도문 따라 읊기만 하세요” 이러기만 하는 건 복음 전파가 전혀 아니다. 그건 시간과 노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전혀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거짓으로 구원의 확신까지 심어 줄 수 있는 대단히 잘못되고 위험한 짓이다.

그런데 그런 관행을 까고 비판하는 건 좋은데, 거짓 evangelism을 비판하는 진영은 대단히 높은 확률로 반대편의 잘못된 극단으로 또 빠지더라. 드러난 행실의 변화가 없는 사람은 구원도 못 받은 거라고 말이다. 폴 워셔 목사라든가..

그 진영의 최대 문제점이 뭐냐 하면..
“저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이제 술 담배 끊고 모든 세상적인 생활방식을 그만두고 예수님처럼 홀리하게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가 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니 힘만으로 그렇게 잘도 살아지는가 한번 테스트 해 봐라)

술 담배, 음란방탕, 살인 간음만 회개의 대상인 줄 알지,
지금까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 것,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한 것, 착한 일을 나쁜 짓보다 더 많이 하면 구원받는 걸로 생각한 것, 예수가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은 사대성인 출신 죄수인줄로만 안 것..

이런 건 회개의 대상이 아니거나 ‘선행’(?)에 비해 굉장히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안다. 전자가 아니라 후자야말로 성경이 규정하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진짜 회개인데도 말이다! 이 황금 만능주의 인본주의 안티개독이 횡행하는 시대에 후자처럼 믿는 또라이 별종이야말로, 당장 인간적으로 바보 같고 거칠고 서툰 구석이 많아도 하나님 눈엔 얼마나 기특하고 예쁘게 보이겠는가? 이런 믿음 체계가 아니면 성경의 기독교가 도대체 타 종교와 무슨 차이가 생기겠는가!

구원은 그냥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영적 출생이고 0차원 점이다. 그 뒤 신앙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자라서 차차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제자의 삶을 살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용 보상을 쌓는 건 1차원 선이고 축적, 적분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라고 믿어서 갓 구원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가 선뜻 믿어지고 행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니다. 구원받았다는 게 영적으로 내부적으로는 정말 대단하고 새로워진 것이지만, 한편으로 외형적으로는 정말 별것 아니고 달라진 거 없이 그대로이다.

세상에는 교회 댕긴다는 사실상의 논크리스천들도 굉장히 많다. 그 사람들은 만약 구원을 못 받았다면, 선행 안 하고 거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저런 믿음 체계도 세워지지 않은 경우가 90% 이상일 거라고 본인은 단언한다.

구원의 결과, 열매(fruit)를 구원의 조건, 근간(root)과 헷갈리지 말라. 킹 제임스 이외의 성서에서 요 3:36 (아들을 믿는 자 vs 순종하는 자)과 벧전 2:2 (말씀의 젖으로 자라라 vs 신령한 젖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가 괜히 변개된 게 아니다.
그리고 행 2:38은 비록 변개 이슈는 없지만 이게 잘못 적용되면 괜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라바를 선택한 “당대의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처방되었던 회개 조치가 행위 구원 조건으로 둔갑해 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생각만으로는..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 지옥 갈 놈을 다 미리 갈라 놨다고 생각하는 게 더 편할지 모르고(예정론), 그렇게 컴파일 타임이 아니면 런타임으로 사람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게 자기가 싫어하는 교회 내부 사람을 정죄하는 용도로 더 적합하다! 그에 비해 "구원은 확실하게 받았는데 존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영적 아기"라는 개념은 솔~직하게 말해서 별 재미가 없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내 말 틀렸나?

영이랑 혼 구분 없이 싸잡아서 생각하는 게 더 편할 수 있으며, 구원받은 죄인이랑 레알 크리스천을 한데 싸잡아서 생각하고 멋대로 판단하는 게 더 편할지 모른다. 마치 생명 자연 발생설과 지구 평면설이 당장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더 직관적인 것처럼 말이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단 그렇게 믿어서 해로울 건 없다.

하지만 답이 맞다고 해서 계산 과정이 틀려도 되는 건 아니다. 성경이 그렇게 귀걸이 코걸이 엿가락 같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그 정도로 원칙 없고 제멋대로 성품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보다 굉장히 더 고차원적이시기 때문이다.
선행을 보태서 구원받고 악행으로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 중에 평범한 행실 말고.. 기도를 안 하면, 성경을 안 읽으면 구원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그건 성경의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기 편한 대로, 자기 직관대로만 내린 결론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교리 공부를 통해 인간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어서(죽으심, 부활), 정확하게 무엇이 거듭나고(내 영)이 무엇이(내 혼) 무엇으로부터(죄의 형벌, 권능, 임재..) 무엇을 통해(은혜와 믿음) 어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3. 믿음

믿음과 순종· 행위는 일체인 걸까 별개인 걸까? 이건 거의 모든 논쟁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의문이다.
이거 갖고 서로 용어의 정의와 범위도 모른 채 쓸데없는 논쟁이 왕창 많이 오가고, 보다시피 부분적인 면모만 왕창 강조하는 이단 파당이 왕창 많이 생겨 왔다. 여러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지고서 코끼리는 뱀 같은 길쭉한 동물이다, 무슨 건물 기둥 같은 동물이다, 말 같은 안장이 달린 동물이다 등등으로 싸우는 거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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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건, 당장 가시적이고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어떤 정보· 이념을 받아들여서 그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성경이 그냥 그리스 로마 신화, 단군 설화 같은 책인 줄 알았다가 전능한 하나님의 영감으로부터 유래된 무오류한 계시라고 보기 시작한 것,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스스로 부활한 게 맞다고.. 그게 나를 위한 것이었다고 인정한 것이 '믿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건 과학으로는 증명도, 반증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이 정도로 생각을 고쳐먹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회개· 회심이며 일종의 순종이고 행위이다. 기독교가 요구하는 구원 조건은 대외적인 선행이 아니라 이런 머릿속 소프트웨어 개조가 전부이다.

구원이라는 선물을 내 돈 지불하지 않고 받기 때문에 '행위 없이 오직 믿음'이라고 말한다. 선물을 받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것, 팔에 힘을 주고 손을 내밀어서 그 선물을 받는 것조차 무슨 '자기 의'가 들어간 행위라거나, 선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거라고는 사회 통념상으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칼빈주의에서는 전적 타락이라든가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얘기를 하면서 이와 관련된 말장난을 좀 하는 모양이다.

그럼 행위란 무엇인가? 간단하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니 이를 토대로 당장 나한테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손해가 오는 상황에서도 성경의 다른 가르침을 믿고서 절제하고 헌신을 실천하고, 예수 믿는 삶을 나타내 보이는 것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증거를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땡볕에 기우제를 지내러 나가기 전에 우산을 미리 들고 가는 것과 같다.

믿음만 있고 행위가 없는 것은 기껏 내 자신과 집, 처자식을 지키려고 성능 좋은 총을 샀는데, 아니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니고 선물 받았는데.. 그 총으로 무장 강도에게 맨날 공포탄만 쏘다가 집이 털리는 것과 같다.
성능 좋은 차를 장만했는데 시동 걸어서 맨날 중립 기어에서만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다.

웅웅거리는 엔진음이 들리고 엔진이 돌아가기는 하는 것 같은데 차가 차주의 일상생활에 실제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럼 그 차나 총을 선물해 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물리학적으로 '일'이란 힘에다가 '거리/길이'를 적분한 것으로 정의됨!)
다만, 어이없고 좀 말이 안 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총이나 자동차 자체가 거짓 가짜는 아닌 셈이다. 자동차 등록증이 있고 총기 사용 허가증은 있다. 물건 자체의 존재와 진품 여부는 소유자의 저 이상한 행동과는 전적으로 별개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믿음에도 분량이 있으며, 믿으려 하지만 잘 안 믿어지는 경우가 있다. 마치 열심히 찾으려(seek) 하지만 안 찾아지는(find) 것처럼 말이다.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올 거라고 믿고 우산을 챙겨 가는 것 정도는 별 부담 없이 할 수 있다. 우산 하나 챙긴 것쯤이야 설마 비가 안 오더라도 내 신상에 큰 타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지 여부에 따라서 집 문서를 걸거나 내 손모가지를 건다면 선뜻 하겠는가? 갓 구원받은 초짜가 당장 순교가 가능할까?? 그리고 그걸 못 한다고 해서 "에라이 믿음이 부족한 놈"이라고 욕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초짜가 겁먹어서 순교를 못 하면 구원이 도로 취소될까?

그런 식이다. 믿음도 여러 종류와 강도가 있다. 구원으로 이르는 믿음 이후에는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 필요하며 그 크기도 차츰 업그레이드 해 나가야 한다. 신혼 부부에게 데이트 때 씌였던 콩깍지가 길어야 얼마나 지속되겠는가? 바로 그것처럼 갓 영접하고 구원받았을 때의 내 감격과 감정과 믿음은 절대로 무한하지 않으니 지속적인 믿음 공급과 성장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을 잘 분간하면 요 3:36 "아들을 믿지 않는 자" vs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으며, '믿음 따로 행위 따로' 같은 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옳은 내용과 전체적으로 틀린 논리 전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구원받은 뒤에 믿음의 행위가 나오는 거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벧전 2:2)는 변개된 텍스트이다. 그리고 "구원을 일하여 이루라"(빌 2:12)는 변개는 아니지만 work out을 좀 오해의 소지가 있게 번역한 대목인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17 08:33 2020/0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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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계의 파편화

본인은 지금까지 많은 글들을 통해 밝혔던 바와 같이, 조금 마이너하고 특수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

  •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믿고 주장한다. 이게 단순히 가장 우수한 번역본인 정도를 넘어서 무오한 최종 권위라고 생각한다. 영어라는 언어에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 재침례: 세례를 부정하고(특히 유아 세례는 더욱) 침례교를 표방하지만, 교단을 형성하고 있는 여느 침례교는 아니다. 그렇다고 KAC인지 뭔지, 속세를 떠나 사는 듯한 아나뱁티스트 같은 교단/단체하고도 아무 관계 없다.
  • 분리· 근본주의: 여느 기성 교회들보다는 옛날 스타일을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여자는 무조건 긴 치마, 강단에 설 때는 무조건 정장, "형제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무조건 목사님이라고".. 그 정도까지는 절대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본인의 반공 우파 성향은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으며, 신앙 노선과는 별개이고 무관함을 밝힌다. 구국 애국 운동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개인이 각자 따로 할 일이지, 지역 교회가 교회 간판을 걸고서 할 일이 아니다.
이건 심지어 일제 시대에 크리스천이 3· 1 운동에 참가할지의 여부를 판단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잣대이다.

본인은 좌독은 국가관 역사관 말고 다른 분야의 교리나 행실이 그나마 건전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일말의 일관성과 논리와 신념이 있기라도 하면.. 동의는 안 해도 인정은 해 주는 등급이다. 나와 간극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만큼이나 한 분야에 대한 생각이 다른 사람 정도로 간주한다. 그게 아니면 단순 반골기질 쩌는 여느 철없고 분별력 부족한 육신적인 신자, 구원받고도 술· 담배 못 끊고 있는 신자 급일 뿐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만날 때나 형제라고 대하고 존중해 주지, 전쟁터 내지 빨갱이들 폭동을 진압하는 내전 현장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내가 살기 위해 그에게 부득이하게 총질을 할 수밖에 없다. 마치, "나는 인간으로서 개인적으로는 피고를 동정하지만 나의 직분인 판사로서는 법에 따라 피고에게 합당한 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처럼 말이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튼 정치 얘기는 그렇다 치고 종교 분야만으로 관점을 좁히더라도,
본인의 신앙 노선은 참 안타깝게도 대외적으로 긍정적인 게 별로 없다. 본인도 이에 대해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가 이단시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세대주의, 영혼몸 삼분법, 구원의 영원한 보장, 재창조 간극까지 어쩜 이렇게 인지도가 좋지 않은지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보면 놀랄 놀 짜였다. 내가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였다.

기독교계는 왜 이렇게 교리 교파가 찢어져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왜 지금과 같은 노선을 포기하지 못하는 걸까?
성경이라는 책은 어디까지가 그냥 묻지 말고 일단 믿어야 하는 공리, 즉, 합법적으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에 속하고 어디부터가 그로부터 파생되는 논리와 일관성인지..
하나님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두 속성이나 진술을 어떤 원칙과 체계에 따라 종합하고 조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따지면서 봐야 한다. 본인의 신앙관은 이 원칙을 토대로 형성되었다.

개나 소나 하나님에 대해서 한 면모를 적당히 좋게만 포장해서 말하면 전부 "와 그런가 보다" 하고 한쪽에 자기 꿀리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예정과 섭리를 더 좋아하는 파벌, 선행을 더 좋아하는 파벌, 거룩과 공의를 좋아하는 파벌, 힐링힐링을 더 좋아하는 파벌 등등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가 벌어진다. 기독교계가 온통 파편화돼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를 하자면.. 기독교계는 절대로 깔끔 깨끗한 동네가 아니다.
일반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성경과 교리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신학계까지도 말이다.

수학· 과학 같은 곳은 진짜 닥치고 머리 좋은 사람이 이기는 곳이고, 승부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스포츠로 치면 양궁 같은 곳이다. 화살이 과녁 중심에서 시각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꽂혔는지만을 판정하는 일에 개인 주관이나 믿음이나 신념이나 양심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선수 간의 몸싸움· 반칙이나 판정 조작도 있을 수 없다.

가~끔 뭐 자기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했네, 4색 정리를 더 간단하게 증명했네, 리만 가설이나 P/NP 문제를 증명· 반증했네, 영구기관을 발명했네, 지구가 평면이네 등의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나타나긴 하지만 다 걸러진다. 거기는 철저한 관찰과 상호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류 다수의 주장이 대체로 옳다고 생각하면 안전하다.

누군가가 실적과 돈 때문에 실험 결과를 조작하고 논문을 표절하고 연구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지간해서는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고 다 적발된다. 사람이 아무리 악하고 마음 속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한다고 해도, 수학적인 엄밀함까지 판별할 능력이 없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수학 말고 관찰이 수반되는 과학 쪽도.. 지금이 옛날처럼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없고 플로지스톤이나 자연발생설이 지지받던 시절은 아니니, 지금까지의 물리 법칙이나 과학 발견이 예측 가능한 미래에 뿌리째 싹 뒤집힐 일은.. 0은 아니어도 거~의 없다.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악의적인 원인 때문은 아니다.

허나, 신학 쪽은 사정이 저렇지 않다.
신앙은 주관적이고 증명 불가능한 믿음을 수반하며, 성경 역시 무슨 수학· 과학 논문처럼 접근 가능한 책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추잡한 본성이 똥고집까지 가미되어서 자기가 꼴리는 대로 믿으면서 그야말로 별 희한한 이단 교리, 궤변, 온갖 지적 사기들이 마음껏 횡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기는 역설적으로 다수 주류만 따른다고 해서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바르게 믿고 행하던 교회나 신학교조차도 다수 주류가 되고 시간이 흐르고 나면 또 순수성을 잃고 배도하고 변질되고 타락한다. 그러니 뜻있는 사람들 일부가 분리되어 나와서 자기 조직을 또 세우고 그러다 거기마저도 타락하여 분리가 발생한다. 창세기 26장에서 이삭이 우물을 파고 또 파듯이 말이다.

이게 이 바닥이 흘러가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이 큰 그림, 패턴을 모르니까 성경도 그냥 여느 고전 텍스트처럼 학자들이 알아서 더 나은 번역을 만들어 주고 잘 개정해 주는 줄로만 알고.. 사람들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에 대해서 이상한 오해를 하고 이단시하는 것이다.

이 바닥이 정말 X나게 더럽고 지저분하고 파편화된 바닥인 건 사실이다. 창조 연대기에 대해서도, 사형 제도에 대해서도.. 뭐 하나 일치하는 걸 찾기가 몹시 어렵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여기가 조화가 아닌 생화가 있고 정말 거물급 보물이 있기 때문에 벌레들이 들끓는 것이다. 골치아프고 진입로가 더럽다고 해서 진리를 찾는 걸 포기해 버리고 때려치우면, 그것도 게임에서 지는 거다.

뭐, 다수 주류만 따라가면 최소한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는 진짜 정신나간 막장 사이비 정도는 걸러낼 수 있다. 하지만 수준이 딱 거기서 끝이다. 그냥 철도교 믿는 수준의 종교 생활까지만 가능하지, 최상의 금덩어리(?)까지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대한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고, 교리 간에 논리적으로 연결 고리가 생기는지, 나한테 당장 육신적인 탐욕 대신 영적 만족을 채워 주는지, 모든 사람이 나처럼 믿고 행했을 때 교회나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겠는지 이런 것들을 따지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을 공부하면.. 정말 어지간해서는 이상한 결론으로 빠질 일이 없다. 어린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우면서도, 한편으로 박사에 교수라도 삼천포로 훅 갈 수 있는 게 이 바닥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그러니 기독교 교리 논쟁을 할 때만큼은 "니만 맞고 나머지 많은 신자들은 다 틀렸다는 거냐?" 이런 소리는 좀 안 나왔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듣기 싫은 소리이다. 그럼 애초에 예수는 왜 믿기 시작했는지 난 그것부터가 너무 궁금하다. 불신자들도 완전히 똑같은 질문과 불평을 하는데 말이다.
난 이런 상황을 정말 많이 겪어 봤다. 이 논리가 기독교 vs 비기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동일하게 "재귀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 홈페이지의 주인장인 내가 종교관이 완강하고 고집 세다고 느껴진다면.. 99%는 그렇게 느끼는 그 당사자도 완전히 동급으로 완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다. 이는 마치 작용-반작용 법칙과도 같다.
그 사람도 남이 말하는 근거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얘기만 밀어붙이고 싶은 상태이다. 그리고 성경 구절이나 논리로 반박을 못 하면 그 다음엔 말투가 어떻네 교만하네 고집이 세네 사랑이 없네 하면서 주변의 태도나 인성 운운하며 다른 트집을 잡기 시작하는 게 사람의 심성이다. 그런 자세로는 남과 논쟁을 하고 남을 설득할 수 없다.

학교에서 애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쳐서 무신론 우생학을 주입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대안이라는 그 좋은 창조 연대기에 대한 견해가 자기들끼리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룡 발자국 화석이나 노아의 방주 흔적, 그랜드 캐니언을 찾아 다니기 전에 성경이 말하는 이전 세상 개념부터 공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경에 대해 더 잘 알고 성경을 성경으로 바르게 풀이하는 안목을 기르고,
성경의 난해 구절들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라고 신학을 하는 건데..
성경 따로 신학 따로는 마치 믿음 따로 행위 따로만큼이나 서로 굉장히 안 어울리는 모습이다.

* 추신: 내부 분열

이렇게 양심과 신념상의 이유로 인해 대세를 따르지 않는 좁은 길 마이너한 진영이 생기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다 치는데, 그럼 마이너한 걸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똘똘 잘 뭉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안 그래도 작고 좁은 진영 내부에서도 별 희한한 걸 갖고 반목이 발생해서 더 갈라지고 찢어지곤 한다.

이건 굳이 기독교계의 킹 제임스 진영만 그런 게 아니다. 안 그래도 1%도 채 안 되는 세벌식 글자판 진영이라든가, 정치 이념 쪽의 우파 애국 보수 진영이라든가.. 내가 관심을 가져 본 마이너한 진영들에서 한 치의 예외 없이 발견되더라.

교회 내에서 성경 해석의 차이 때문에 갈라지는 게 아니라, 이거 뭐 영어나 히브리어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한국어 호칭 사용이 자기 스타일이 아니고 마음에 안 든다고.. 안 그래도 좁은 진영에서 이 정도 퀄리티를 갖춘 교회를 애써 찾아왔다가 저게 그렇게 휙 돌아서고 떠날 정도의 사유인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물며 완전히 세상적인 이념 진영인 유명 우파 논객들 간의 팀킬 싸움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본인은 의사는 환자를 강압적이고 거칠게 대하더라도 돌팔이가 아니라 환자 치료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방망이 깎던 노인" 스타일을 존경하고 인정한다. 기본적인 말투가 싸가지 없고 행실이 거칠더라도, 그 껄렁껄렁한 전투력과 팩트폭력이 좌빨들을 까고 공격할 때 일관되게 발휘만 된다면 그 실력을 존중해 준다. 박 근혜, 황 교안 같은 인물에 대한 생각이나 땅굴· 5 18에 대한 생각이 나와 살짝 다르더라도 그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본인처럼 판단하지는 않던가 보다.

난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같은 편인데 우리 좀 싸우지 맙시다"만 붙들고 있을 생각도 없다. 내부 분열은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면모도 있다.
얘들은 개돼지 좀비 레밍 들쥐가 아니고, 교활한 기회주의 웰빙 타입도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기 개성과 고집이 아주 분명하고 뚜렷한 사람들인데 어찌 좌빨 홍위병 같은 급의 무식한 개떼 단결과 결집이 가능하겠는가? 한 단점이 없는 대신 다른 쪽에 한계와 단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반목과 갈등이 생겨서 평소에는 각자 찢어져서 제 갈 길 가더라도, 그래도 더 큰 공통의 적을 맞닥뜨리게 됐을 때만은 잠시 동안이라도 같이 손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다. 사람에게 너무 많이 바라다가 실망하지도 말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12/12 08:35 2019/12/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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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절, 이스터, 유월절 / 주일, 안식일

이전에도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킹 제임스 성경은 지구상의 성경 역본들 중, 행 12:4에서 유월절 대신 '이스터'라는 단어를 사용한 유일한 역본이다.

이건 성경 역본 문제에서 자주 다뤄지는 원문· 본문 계열이 아니라, 번역 단계에서의 문제이다. 말이 통째로 변개되거나 삭제된 건 아니고 똑같이 그리스어 '파스카'인데, 그냥 평범하게 유월절이냐, 아니면 이스터이냐로 번역이 갈린 것이기 때문이다.

KJV의 '이스터'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과 타 이교도들이 지키던 이스터가.. 어쩌다 보니 날짜만 좀 가까울 뿐 본질은 서로 무관한 별개의 사건임을 알려주는 "신의 한수"가 가미된 탁월한 번역이다! 내가 이런 성경을 알게 된 건 감사와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봄의 여신이니, 니므롯-세미라미스 패밀리니 뭐니 하면서 놀던 pagan 이스터가 주님의 부활하고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수인선의 복선전철 부활을 기념하는 철도교 신자이고, 아직 구원받은 크리스천은 아니라고 치자. 그런데 나중에 예수를 믿게 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수님의 부활이랑, 폐선됐던 수인선 협궤 열차의 복선전철 부활이 개념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수인선이 개통한 날짜 근처의 주일을 부활주일로 설정하고 부활 찬송 부르면서 예배 드리고.. 이스터 에그 대신 열차 장난감을 나눠 준다고 생각해 보자.

예수님의 부활을 기리는 거니 막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뭔가 짬뽕이 되고 앞뒤가 안 맞고 이상하다는 느낌이 팍팍 들 것이다. 약간 어거지 같은 비유를 동원했지만 부활절이란 게 위상과 의미가 딱 저렇다는 것이다.

사실 신약 크리스천들은 굳이 이스터니 부활절 따위가 없어도 예수님의 부활 기념은 암묵적으로 늘 해 오고 있다. 매주 첫째 날 일요일에 교회에 모이는 것 자체가 주님의 부활한 요일을 기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주일/일요일이 유대인의 안식일과도 개념적으로 다른 날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마 28:1; 막 16:2, 눅 24:1, 요 20:1도 참고)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다.

KJV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나와는 당연히 반대로 주장한다. KJV에만 들어있는 단어들은 원문에 없다가 후대에 추가된 것이고, '이스터'는 오역이라는 식으로 반박한다. 마음대로 생각하시길..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는 무교절 기간에 체포됐는데(행 12:3),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뒤의 이벤트이다. 그런데 유월절이 끝난 뒤에 베드로를 끌어내는 건.. 그럼 그건 설마 내년 유월절인 걸까? 이것도 생각할 점이다.

종교 개혁자의 신앙을 계승한다면서 정작 종교 개혁자가 전해 준 계열의 성경을 이단시하고, 차이가 나는 내용은 후대에 첨가된 것일 뿐이라고 우기는 건.. 뭐랄까 할배와 원조가카의 공은 다 누리고 편하게 살면서 그 사람들이 못한 것만 욕하는 것과 비슷하고, 고기는 좋아하면서 도축업자들은 천시하는 것과 비슷한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이다.

2. 미스터리와 씨크릿 (신비 vs 비밀)

미스터리란..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로 이해가 안 되는 엄청나게 대단한 불가사의, 미제 사건 같은 걸 가리킨다. 해결되고 풀리는 건 대체로 좋은 현상이다.
그 반면, 씨크릿은.. 그냥 아무나 알 수 없고 특정 계층만이 접근 가능한 정보를 가리킨다. (1) 몰랐을 때는 답답해서 환장하겠지만 알고 나면 별것 아님, (2) 잘못 누설되고 발설되면 누군가가 곤란해질 수 있다는 뉘앙스가 좀 담겨 있다.

물론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둘이 별 구분 없이 섞여 쓰이기도 한다.
"퀴즈 탐험 신비의 세계"라든가 "생명 영원한 신비"라는 TV 프로가 있었고,
한편으로 대전 엑스포 주제가 "그 날은"의 2절 가사에는 "우주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차근차근 벗겨 가 보면"이라는 문구도 있다.

"달 뒷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달 뒷면의 XX" 안에는 비밀도 들어가고 신비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비밀은 인간의 입장에서 무진장 궁금하다는 관점에서, 그리고 신비는 달이 지구와는 완전히 다른 경이로운 장소라는 관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성서 초등학교 개구리 소년 5명이 정확하게 어떻게 죽은 걸까, 영등포 노들길 살인 사건의 범인은 누굴까?",
이런 건 미스터리라고 하지 비밀 사건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내 컴퓨터의 로그인 패스워드를 갖고 신비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성경에는 '경건의 신비'(예수님의 성육신, 딤전 3:16), '불법의 신비'(살후 2:7), 이스라엘의 신비(롬 11:25), 큰 음녀 바빌론의 신비(계 17:5-6) 등의 여러 미스터리들이 언급돼 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경들은 이 단어가 신비 대신 비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저런 것들을 미스터리라고 읽는 사람과 씨크릿이라고 읽는 사람은 이런 어감의 차이가 쌓이면서 성경관이나 신학 노선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 몇 가지 예를 더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은 명백하게 hell이지, 스올, 하데스, 무덤 등등의 이상한 곳이 아니다.
  • 성경이 말하는 악한 마귀는 demon이 아니라 devil이다. 흥미롭게도 월트 디즈니 포카혼타스에서는 Savage 노래에 두 단어가 모두 나오더라. 원주민들은 dirty stinking devil, 백인은 pale-faced demon이라고..;;
  • 성경을 호러물처럼 읽는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성경에는 귀신이나 유령 같은 건 없고(마 14:26, 욥 4:15), 그냥 영이 있을 뿐이다. 한편으로 영과 혼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이걸 모르면 영적인 영역과, 단순히 정신적인 영역을 구분하기도 어려워진다!
  • 성경에서 단순히 피고용자(employee), 부하, 하인을 가리킬 때 사용한 용어는 노예가 아니라 그냥 종(servant)이다. 엡 6:5, 골 3:22, 딛 2:9 같은 구절 말이다.
  • 끝으로, 성경이 말하는 사색 방법론은 묵상이지, 명상이 아니다. 뉴에이지 같은 데에 너무 심취해 있으면, 창 24:63에서 이삭이 저녁에 무슨 요가나 파룬궁 수행이라도 하러 들판에 나간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_-;;

3. 나열과 인과 관계

  • "고통을 늘리고 수태를 늘리고"이다. (창 3:16)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 "물에서 나고 성령에서 나서 총 두 번 태어나고"이다. (요 3:5) be born of water and of the Spirit
  • 예수 믿으면 네가 구원받고, 그 뒤에 복음화가 진행되면 네 집안 사람들도 뒤이어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 (행 16:31) thou shalt be saved, and thy house

수태의 고통을 늘린다는 얘기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건 '합집합'이지, 이런 교집합이 아님)
물과 성령을 동시에 동원해서 태어난다는 얘기가 아니고,
네가 구원받는 덕분에 네 집도 덩달아 자동으로 싸잡아 구원받는다는 얘기도 아니다.
둘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4. 휴거 몸 부활 관련 찬송

찬송가 책을 아무거나 펴서 분류별 차례를 보면, 끄트머리에는 가사가 미래 시제인 것들.. 즉, 재림, 천국, 내세를 다룬 곡들이 꼭 있다.
사실,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찬송가 중에서도 '마지막 절'은 그런 미래를 다루는 가사가 써져 있기도 하다.

가령,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는.. 전반적으로야 명백하게 지금 현재의 '위로와 평안' 카테고리에 속하지만, 마지막 4절은 "공중 나팔 소리" 운운하면서 예수님 재림을 다룬다. 그러면서 그때도 나는 평안할 거라고 노래한다.
이런 식으로 가사가 총 n절 있는 찬송가라면, 1~n-1절은 평범한 내용이다가 마지막 n절은 그렇게 미래 시제이거나, 혹은 불신자에게 구원을 초청하는 패턴인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찬송가 가사들이 다루는 미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내가 죽어서 곧장 셋째 하늘로 가서 주님을 뵙는 것 (키워드: 새 예루살렘, 진주 문, 황금 길 등등~)
(2) 아니면 나는 관심 대상이 아니고 예수님이 그냥 공중이든 지상이든 뭉뚱그려 재림하시는 것 (키워드: 천년왕국, 다스림, 심판)

(1)은 그 특성상 기독교식 장례식 때도 즐겨 불린다. 다만, 가사가 묘사하는 장면은 계시록 21장 이후 천년왕국이 다 끝난 영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마디로 먼 미래다. 그 장면이 비주얼이 뽀대가 나기 때문이며, 안식과 소망을 노래하는데 그 전 단계인 그리스도의 심판석 같은 걸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2)에 속한 곡은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다루지만 가사가 교리적으로 맞는지 잘 분간할 필요가 있다. 가령, "오랫동안 고대하던 천년왕국 이를 때"는 시간 순서가 거꾸로 배열돼 있다. (교회는 천년왕국보다 훨씬 전에 먼저 들려 올라가는데??)

이런 것에 비해.. 살전 4와 고전 15를 근거로 (3) 성도의 몸의 부활(예수님의 부활 말고), 휴거,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곡은 드문 편이다. (키워드: 부활, 깨어남, 몸의 변화, 일어남, 나팔 소리, 공중..)

하긴, 잘못된 종말론 미혹이 야기한 각종 병크 때문에 요즘은 종말 자체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기독교계에서 매우 무뎌져 있다. 그리고 교회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 살아서 몸의 변화와 휴거를 직접 경험할 사람의 비율은 마치 예수님 동시대의 사람만큼이나 매우 미미하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본인은 지난 여름에 청년부 특송 때 특별히 (3)에 속하는 곡을 엮어서 불러 보기도 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 + "부활 아침 돌아오면" + "금빛 찬란한 아침에"의 순으로.
혼이 구원받아서 하늘로 간다는 것에 비해, 미래에 "몸도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고 변화된다" + "특히 죽음을 아예 맛보지 않고 들려 올라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까지 늘 염두에 두는 신자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9/12/04 08:35 2019/12/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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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언어' 관련 이슈들

1. 주기도문

주기도문이란 건 지금 말고 과거에 본인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가 끝났을 때 으레 습관적으로 눈 감고 기도문처럼 암송하던 텍스트였다.
주일 오전 예배는 격이 제일 높기 때문에 마지막에 무려 목사님의 축도로 인증을 꽝 찍어야 끝났다. 그때 말고 목사님이 안 계셔서 축도를 받을 수 없는 모임을 끝내는 절차는 주기도문 암송이었다.;; 끄응..

과거 한글 개역성경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눅 11:2)라고 조사가 어긋난 게 있었다.
중세 국어에 주격조사 '가'가 아직 없어서 '바다이 되어' 같은 문구가 있다는 건 옛날에 학교에서 배워서 알지만.. 성경 본문에 몇 부분만 표기 오류가 있는 건 그냥 편집상의 실수 때문이었다.
시편 23편에는 그 유명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도 있다. 이것 말고 또 조사가 어긋난 구절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개역개정판은 이게 다 바로잡혔다.

그런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써 놓으니 난 어린 시절엔 "나라에 임하옵시며"라고.. 조사가 '에'인 것으로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다. 문장의 주어가 뭔지는 모르겠고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나라에 임하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주기도문 끝에 나오는 '대개'도 오해의 소지가 아주 많은 단어였다.
저 대개는 大槪, usually, mostly, 대체로, in general이라는 뜻이 아니다..;;;
大蓋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이고, 원래 의미는 영어의 접속사 for (전치사 for 말고)... "이는 ~ 하기 때문" 정도에 대응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여기에 나오는 나라들도 그냥 country, nation이라기보다는 왕정국가 kingdom을 가리킨다. 저건 여호와의 증인들이 좋아하는 용어이기에 앞서 엄연한 성경 용어이다.

마 6:33은 산상설교 중에서 노래로도 굉장히 많이 만들어져 있는 유명한 구절인데.. "하나님의 왕국"이 "그의 나라"라고 바뀌어서 의미 왜곡이 꽤 심하다. 우리말에서 '의'는 발음하기 어렵고 생략도 잘 되는 관계로 아예 '그 나라'라고 곡해되기도 했다. "그 나라 갈 때에 우리들은 예수님과 만나 얘기해" 라는 어린이 찬양도 있으니 심상이 그리로 연결돼 버리는 것이다.

끝으로.. 이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뿐만 아니라 누가복음 11장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한번 더 등장한다. 누가복음의 "기도 요령"에서까지 나온다는 것은 주기도문의 패턴을 굳이 환란기 유대인으로 국한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킹 제임스 외의 다른 성경들은 누가복음 버전이 마태복음 버전에 비해 짤린 내용이 많다. '아버지'에 대해 "하늘에 계신 우리"라는 수식어가 빠지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같은 문구도 몽땅 짤려 있다. KJV 외의 성경을 본다면 누가복음의 기도문은 마태복음 기도문의 속성 요약본(?)처럼 읽힌다.

2. 동음이의어

사도신경 "...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
진담인데.. 난 초딩 시절에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할 때는 빨간 우체통 위에 하나님이 걸터앉아 계신 모습을 생각했었다.
이런 걸 꼼꼼히 생각하지 않으면 좀 극단적으로는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셔서"라는 문구를 보고도 messenger일까 lion일까 황당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이 21세기에 그것도 한글 같은 문자를 놔두고 굳이 구닥다리 그림문자를 쓰는 법까지 무식하게 익혀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이미 있는 동음이의어들이 도저히 대안도 없는 경우, 이것들이 무슨 그림문자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단어이고 그 그림문자를 쓰는 다른 단어로는 무엇이 있는지 같은 감 정도는 부디 익혀 놓을 필요가 있다.

신앙만큼이나 언어도.. 일단 무조건 외워야 하는 것 이후로는 체계와 원칙이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이것은 언어의 특성 중에 각각 임의성과 체계성이라고 용어까지 정립돼 있으니 말이다.

3. 주홍과 진홍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링크), 우리나라 태극기는 건국 이래로 수십 년 동안 동일한 형태가 쓰이다가 1997년 9월경에 살짝 개정된 바 있다. 태극 무늬의 청색· 홍색이 좀 더 산뜻한 색조로 바뀌었다.
옛날 태극기의 빨강은 주홍 scarlet에 더 가까웠다. 그러나 지금은 진홍 crimson에 더 가까워졌다.

개정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옛날 태극기는 우리나라가 아직 못 살던 시절 내지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을 나타내고, 새 태극기는 말석 끄트머리나마 선진국 진영에 들어간 위상을 나타내는 것 같다. OECD 가입만 해도 1년 남짓 전인 1996년 가을이지 않던가?

그리고 성경에서 이렇게 주홍과 진홍을 나열하면서 빨간색을 대비시킨 유명한 구절이 떠오른다. 바로 사 1:18이다.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4. 칭호

성경 구절을 노래로 옮긴 찬양들 중에는 예수님 내지 성도의 칭호를 다룬 것이 있다. 교리 공부와 성경 암송의 관점에서 유익해 보인다.

예수님의 칭호에 대해서는 His name is Wonderful (놀라운 그 이름)이라고 꽤 좋은 곡이 있다. Wonderful, Lord, mighty King, God, Great Shepherd, Rock 정도가 나온다. 한국어로 번역된 건 접해 보지 못한 어느 영어권 찬송에서는 Ancient of days (단 7:9)라는 칭호가 나오는 것도 본 적 있다.

하나님/예수님의 칭호 중에는 영어의 입장에서 품사 통용 중의적인 표현이 좀 있다.
앞의 칭호들 중에서도 Wonderful은 이름에 대한 수식어· 관형어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명사이다. (사 9:6)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I AM도 명사절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고유명사이다.
I AM THAT I AM(출 3:14)만 봐서는 해석을 어찌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의 I AM hath sent me unto you를 보면 저거 전체가 명사라는 걸 알 수 있다.

신의 칭호뿐만 아니라 신약 성도의 칭호도 있다.
어린이용 동요급인 "주 나의 사랑 나 주의 사랑"도 칭호가 여럿 담겨 있어서 유익하며, 일명 축복송으로 알려진 "때로는 너의 앞에"는 2절에 이례적으로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는 칭호가 나온다.

칭호를 소재로 더 창의적인 찬양이 또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참고로 가지(branch)는 예수님의 칭호(렘 33:15)와 성도의 칭호 내지 비유 대상(요 15:2,4)으로 모두 등장한다.

5. 오다/가다 문제

한국어가 영어와 다른 특징 중 하나는 1인칭 자기 자신이 '오다'의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 좀 이리 와 줄래?" / "응, 가는 중이야"(I'm coming)이지, "오는 중이야"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건 성경 번역에서도 꽤 미묘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지면 관계상 모든 예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마 8:7에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종을 치료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ㅇㅇ, 내가 가서 고쳐 주마"라고 대답하셨는데.. 이거 영어 원문은 "I will come to him"이다. 그런데 NIV를 비롯해 일부 구어체 현대어 영어 성경은 go to him이라고 써 놓기도 했다.

이것 말고 고전 4:19 "내가 곧 너희에게 가서" (But I will come to you shortly)
계 2:5 "내가 속히 네게 가서"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이런 건 괜찮은 반면..

  • 요 14:18은.. "내가 너희를 위로 없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I will come to you.)
  • 계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Behold, I come quickly)
  • 계 22:20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Surely I come quickly)

뭔가 발로 걸어서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심오하고 거창한 재림 문맥이어서 그런지.. 이런 건 흠정역도 옛날 개역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차용했다. 게다가 come을 좀 심오하고 거창하게 번역하는 단어로 '임하다'도 있다.

생각보다 골치 아픈 문제 같아 보이지 않는가?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 두려워 말라"처럼 성경에만 존재하는 시적 허용이 될지, 아니면 이로 인해 한국어도 번역투 영향 때문에 '가다/오다'의 구분이 문란해질지도 모르겠다.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은 그래도 국어 전문가가 많이 개입해서 그런지 저런 원초적인 비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6.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의 높임 관계

요한복음 2장에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즙으로 변화시키는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로는 여기서 포도즙이냐 포도주냐 하는 wine의 번역 문제가 불거지곤 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건 논의하지 않겠다.

예수님은 자라서 성인이 되면서 단순한 아기· 어린이이다가 성육신한 하나님으로.. 자신의 원래 지위가 서서히 드러났다. 육신의 모친인 마리아와의 관계도 자연스럽게 역전되었다. 쉽게 말해, 마리아가 아들을 부르는 호칭이 "얘야, 예수야"이다가 어느 샌가 "예수님, 주님"이 된 것이다. 그런 드라마틱한 전환이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느낌이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딱히 자세히 기록하지 않으며, 우리 역시 당사자의 기분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가나의 혼인 잔치가 벌어질 무렵에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의 지위와 권능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포도즙이 다 떨어지자 "지금 잔치의 흥이 다 깨지게 생겼는데 너님이 좀 어떻게 도와줄 수 없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하여, 모친인 마리아에게도 "여자여"라고.. 한국어로 치면 "자매님, 아주머니", 군대 용어로 비유하면 '아저씨' 같은 남 취급하는 호칭을 사용했다(4절). 이 호칭은 나중에 십자가에서도 다시 등장한다(요 19:26).

사실, '여자여'라는 호칭 자체가 성경 전체에서 사복음서에서만 등장하며, 그 중에 요한복음이 제일 많이 등장하는 책이라는 게 흥미롭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장면도 포함해서 말이다(요 8:10).
이런 식으로 대부분이 예수님 말씀의 인용이지만, 베드로의 말 "어허, 이 여자가 정말.. 난 진짜로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니까(요)?"에서도 동일 호칭이 한 번 쓰였다. (눅 22:57)

다시 가나의 혼인 잔치 장면으로 돌아오면.. 4절 다음으로 5절에서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그분(예수님이)이 말씀하시는 대로만 그대로 하세요"라고 지시한다. 이 기적은 구원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뤄진다는 영적 진리를 내포한다. 참조 구절로 벧전 1:23을 보시라.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들은 마리아의 말이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높임법을 사용했고, '말씀하시다'라는 용언을 꼭 살려 놓았다. 이게 맞다. 그 구닥다리 한글 개역성경도 저렇게 돼 있다.

그러나 천주교용 성서 내지, 별 생각 없이 의역 현대어 문체만 추구한 성경 역본에서는 이 상황에서 높임법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보다 서열이 더 높은데 왜 굳이 예수님에게 높임법을 사용하겠는가? 공동번역이나 표준새번역 같은 걸 직접 보시기 바란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또한, '말씀하시는 대로'(say)도 함부로 '시키는 대로'라고 바꿔 버리면 당장 이 문맥에서 본문을 읽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앞서 얘기했던 벧전 1:23 '말씀'과의 연결 고리가 깨지게 된다.

성경의 근간이 된 히브리어, 그리스어, 영어 같은 언어는 하나님조차 you라고 간단히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높임법 따위 신경 안 쓰는 언어이다. 그 반면, 하나님끼리는 존댓말을 썼을까 말을 놨을까(히 1:8; 10:5-7) 하는 문제는.. 수학에다 비유하자면 마치 ∞ - ∞의 극한과 비슷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을 위해서는 그런 데서 근본적으로 번역자의 주관과 해석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천주교와 기독교는 십계명뿐만 아니라 이런 데서도 차이가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 마리아가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곳은 행 1:14이다. 하나님의 어머니고 뭐고 그런 거 없이, 그냥 여러 신실한 여성 크리스천 중 한 명으로서 말이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나 이복(?) 형제라고 해서 딱히 특별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눅 8:20-21, 눅 11:27-28 같은 다른 구절에서도 거듭 확인 가능하다. (꼭 찾아서 확인해 보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9/11/22 08:34 2019/11/22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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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담긴 좌우 이념

(1) 성경에서 좌파적인 시각이 제법 느껴지는 책

  • 누가복음: 정치인 디스(헤롯 13:32, 3:19-20), 민생 안정 권고(3:14), 여성의 활약 부각, 시사 평론(13:1-5),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 등
  • 야고보서: 부자들 디스, 임금 착취 폭로(5:1-5), 선행 강조(2:14-24)
  • 미가서: 사회악과 진실 폭로(3:8), 귀족과 제사장들의 횡포 비판

(2) 성경에서 우파적인 책

  • 요한복음: 예수님을 외세나 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반 백성들도 믿지 않고 배척했음을 유난히 부각시킴
  • 로마서: 부자나 정치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임, 위의 권위에 순종하라. 오로지 믿음으로 구원

보다시피..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굳이 인간의 사상· 이념 성향에다 투영시켜 본다면 명백히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이 괜히 옳은쪽이 아니다.

저 좌파 우파 이념은 비행기로 치면 무슨 대등한 양 날개 관계(좌익 우익??)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우파가 주익이고 좌파는 미익(꼬리날개)에 가까운 관계"이다. 고정익이건 회전익이건 말이다.

양력을 생성해서 비행기를 뜨게 하는 것은 주익이 담당하고, 미익은 기체의 방향을 잡고 안정화시켜 주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균형도 그런 구도가 되는 게 바람직하다.
(비행에선 미익도 물론 아주 중요하다. 미익이 박살나서 조종 불가 상태가 되자 JAL123 추락 같은 사고도 났었다)

하물며 나라 정체성을 부정하고 거짓 평화 명목으로 적에게 다 갖다바치는 건 좌도 진보도 아닌 개 쓰레기 반역질일 뿐이고 말이다.

2. 크리스천과 율법의 관계

(1) 일반인 민간인이라도 군대식으로 살아서 나쁠 것은 없다.
매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모든 물건을 철저하게 각 잡고 정리정돈하고 절도 있게 살면 몸과 정신 건강에 좋다.
더구나 나라 지키느라 고생하는 군인들을 평소에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간인이 아무리 군기 빠져서 헬렐레 지내고 심지어 군대와 국방에 대해 온갖 무개념 헛소리를 내뱉는다 하더라도.. 너 그랬다가는 군대에 다시 끌려갈 거라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민간인이라도 국가 안보와 관련된 중대한 죄를 지으면 군법에 따라 처벌받는다는 황당한 소리를 해서도 안 된다.

(2) 100년 전에 3·1 운동은 고종 황제의 급사 때문에 흉흉해진 국내 분위기에다가 1차 세계 대전 종전과 '민족 자결주의'라는 일면 희망적인 국외 분위기가 맞물려서 벌어졌다.

그러나 민족 자결주의는 알고 보면 1차 세계대전 패전국들의 식민지들이나 각자 제 갈길 찾아가라는 소리였으며, 일본은 1차 대전 당시에는 연합국 승전국 진영에 속해 있었다.
고로 그 당시 조선은 일본의 아주 합법적인 식민지였으며, 국제 사회는 조선의 해방과 독립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럼 3·1 운동은 아무 의미 없이 숱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 야기한 헛된 희망고문 개뻘짓일 뿐이었는가..;; 그건 또 아니다.
조선은 국제법과 별개로 기를 쓰고 일본의 식민지 살이를 거부한다는 게 외신으로 타전됐고, 일제의 무식하고 잔학한 탄압 만행도 보도되어 대 일본 여론을 악화시켰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또라이 급의 집요하고 끈질긴 만세 시위는 안 그래도 식민 지배 노하우가 없던 일본의 입장에서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조센징들은 이렇게 무식하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게 각인됐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라고 자포자기했다면.. 나중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핵폭탄 맞고 '졌더라도' 조선은 독립이 못 됐을 수도 있었다. 조선은 1차 대전 이전부터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아 보여도 끊임없는 독립운동 자체는 필요했다. 단지, 그 사상적 근거를 민족 자결주의에다가 둘 수는 없었을 뿐이다.

위의 (1), (2) 예화에는 모두 "법적 지위"라는 개념이 들어있다.
크리스천에게 구약 율법이 지니는 의미, 효력, 관계도 이 개념을 동원해서 비유하고 설명할 수 있다. 또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설명할 때도 동일한 방법론을 동원할 수 있다.
(탈북자 비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법적으로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임. 교도소나 사형장에 갈지언정 북송은 절대 되지 않음)

마 11:11에서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침례인 요한보다 더 크니라"는.. 아주 거칠게 비유하자면.. "광나는 A급 전투복 전투화 차림의 초 S급 특등사수 모범병사보다도 차라리 전역한 껄렁껄렁 민간인이 더 낫다"와 비슷한 소리이다. 어떤 점이 더 낫다는 말인지는 알아서 상상하시고..

3. 성경과 과학· 논리와의 관계

수학· 논리적으로는 어떤 명제(p → q)에 대해서 이(~p → ~q)는 성립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논리적으로 동치라고 100% 보장되는 것은 이가 아니라 대우(~q → ~p)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어떤 주장이나 규칙이라는 명제에 이가 "대체로, 암시적으로"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짓 하면 처벌받는다"에는 "그런 짓을 안 하면 처벌도 없다"도 포함됐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고 자연스럽지 않은가? 단지, "그런 짓 대신에 다른 죄를 짓는다면 그건 여전히 처벌 대상이다"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신 18:22 "예언이 이뤄지지 않았으면 거짓 가짜 대언자이다"라는 진술에는 '이'에 해당하는 "예언이 이뤄졌다면 진짜 대언자이다"가 포함돼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21절 "진짜/가짜 말씀을 분별하는 방법이 무엇이죠?"의 완전한 답변이며, 성경의 용례가 거짓 대언자의 예언이 적중하는 경우는 고려하지 않고 기록됐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사람을 미혹하는 가짜 거짓 대언자의 예언도 아주 부분적· 제한적으로나마 적중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에도 요일 2:23 같은 구절은 "아들 부정 → 아버지 없음, 아들 인정 → 아버지 있음"처럼.. 강조를 위해서 동일 명제의 이를 꼼꼼히 친절하게 써 준 경우가 있다. 이건 KJV가 후반부를 이탤릭 처리까지 하면서 꼼꼼히 써 준 부분이기도 하다.

성경에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선에서 되도 않은 황당무계한 과학· 논리 오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오로지 과학· 논리 체계와 그 관점에만 얽매여서 기록된 책도 아니다.
그러니 "고래는 포유류인데 fish라고 묘사한 것은 오류이다, 토끼를 되새김질 하는 동물이라고 분류한 건 오류이다" 이런 식의 트집에 너무 얽매일 필요 없다. 일부는 과학적으로 반박되기도 했지만, 어떤 건 굳이 과학적으로 반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이 온전하게 보전되었다는 말이 무슨 문법 parse tree 차원에서 의미가 고지식하게 싹 보전되었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성경의 원어에도 중의성이 있다. 어휘 의미의 중의성은 말할 것도 없고, and/or/not/of로 둘러싸인 A and B and C of X 같은 논리식에서 of가 어디까지 걸리는지, not A and B는 전체 부정인지 부분 부정인지, 수식으로 치면 괄호를 어떻게 쳐야 하는지 같은 문법적 중의성도 있다.

성경이 단어 단위로 보존되고 정확하게 번역되었다는 말은 원어에 담겨 있던 그런 중의성과 함축성마저 정확하게 전수되었다는 뜻에 가깝다. 추상적인 것은 모호하다는 말이 아니다.

4. 교회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

(1) 예배, 그리고 이미 구원받은 성도를 양육시키기

성경의 최우선 기록 목적은 복음과 구원이 아니다. 기독교 음악의 주요 존재 목적도 찬양, 경배, 교리 암송이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복음 전파는 순위가 한참 낮다.
이런 것처럼 교회 역시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가 우선인 곳이다. 신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하게 만들기. 하늘나라에서의 삶을 이 땅에서 리허설 하기. 이게 교회가 수행해야 할 제~일 중요한 임무이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서 성경의 답변은 '닭'이다.

(2) 복음 전파, 선교

정말 FM대로 원칙대로라면.. 나가서 전하는 게 원칙이다. 교회로 사람들을 부르는 게 아니라. 교회는 예외적으로 초대받은 경우를 제외하면 일단 구원은 받은 사람만이 모이는 곳이다.
박해가 극심했던 옛날 초대 교회는 아무나 개나 소나 받기는커녕, 다른 교회 지도자의 보증 추천서가 있어야 새로운 사람을 받아 줬다. 끄나풀 첩자를 잡아내는 일이 급선무였다는 걸 기억하라.

(3) 세상 복지

고아원· 양로원, 벼룩시장 바자회, 노숙자 식사, 불우이웃 구제 등... 이런 건 선교를 자연스럽게 병행할 수 있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부터 한 뒤에 여력이 남아 있을 때에나 해야 한다.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바른 교리에 입각한 하나님 사랑이 이웃 사랑보다 먼저이다.

난 이들 비중이 9:3:1 정도 돼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공비가 최소한 3~4는 넘는 등비수열 급의 차이가 나야 한다.
교회라는 건 여느 세상 동호회나 비영리 단체들과 달리,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상망측(?)한 교리를 믿고 가르치고 실천하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과 순수성을 유지하는 게 그야말로 0순위 급선무가 돼야 한다.

이름· 껍데기만 남은 채 영적 생명력을 완전히 잃고 여느 NGO/자선 단체처럼 변질되는 것은 교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5. 크리스천의 정치 참여

"크리스천은 하늘나라에 소속돼 있으니 그 어떤 세상적인 일에도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매우 잘못된 극단이다. 저걸 문자적으로 실천하느라 집총까지 거부하면서 물의를 빚고 있는 유명한 이단 교파가 국내에 이미 있다. 허나 저건 "기도만 열심히 하면 공부 안 해도 시험 100점 맞는다"만큼이나 잘못된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반대로 "사탄 마귀 권세 물리치고 이 나라를 복음화하자, 반공 기독교 정당 만들자..!" 이것도.. 취지와 의도는 일면 이해가 가지만 반대편의 잘못된 극단에 근접해 있으며, 대체로 불신자들에게 간증 상실하고 병신 소리 듣는 짓으로 귀착된다.

하나님이 크리스천들끼리의 모임을 교회라는 비영리 조직으로 따로 분리시키고 한정시킨 이유를 생각해 보아라.
지금 이 상태로 크리스천들만의 정치 공동체(국가), 경제 공동체를 만들어 보자.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돈거래를 시작하고, 공통된 사업 아이템 하나 발굴해서 이윤을 내는 고용주/직원 관계를 만들어 보자. 과연 세상 불신자들이 만든 조직보다 잘 돌아갈까?

네버.. 모임만 폭파되는 걸로 끝나면 다행이고, 아마 얼마 못 가 온갖 소송에 살인도 나지 싶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진리를 다루는 본분에만 충실하면 되지, 하나님께서 그런 것까지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물론 반공은 매우 건전하고 성경적인 이념이다. 좌우 균형이라는 건 국가 정체성과 관련된 게 아닌 단순 경제· 정치 성향 수준에서나 필요한 개념이다.
크리스천은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건전한 정치인에게 표를 줘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예수쟁이들은 기본적으로 세상 권위에 순종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서 적군을 기꺼이 죽인다. 그건 "살인하지 말라" 내지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은 악한 싸움이니 하지 말라" 등등이 적용되지 "않는" 열외 영역이다.
또한, 예수쟁이도 교회 바깥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사업가나 정치인이 될 수 있고, 그 커리어를 전· 현직으로 유지하면서 목회도 할 수 있다.

단지 교회에서 따로 세상에서 따로 위선 부리지 말고, 불의한 멍에를 지지 말고(결혼, 단순 취업 이상의 사업 동업), 태극기 집회 같은 데는 그냥 개인 명의로만 가면 된다. 태극기 집회가 아니라 3· 1 운동 만세 시위라 해도 그냥 개인 명의로만 참여하면 된다.

세상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교회 명의로 하지 말고, 개인이 해야 할 일에 굳이 교회를 내세우지 않으면 된다.
반공을 하되, 북괴 정권을 아직 존속시키고 계시는 하나님이 나빠 보일 정도로 오버하지만 않으면 된다.

지금 대통령이 빨갱이인 것을 입증하려면 세상 일에서의 각종 의혹이나 팩트를 들춰야지, 성경 구절을 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태극기 집회에서 굳이 예배니 기도니 하는 말을 꺼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 게 정교분리이다.
"주여 저 새끼를 구원하소서"처럼 "저 빨갱이 대통령이라도 주께서 허락하신 권위이니 임기 중에 제발 적당히 대충만 깽판 치게 인도해 주소서" 이런 기도라도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11/19 08:36 2019/11/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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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매년 8월에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는 곳으로 2박 3일간 하계 수련회를 간다.
거기서 대부분의 교인들은 특정 주제를 두고 진행하는 담임목사님의 성경 특강을 시리즈로 듣는다. 하지만 불신자 내지 초신자들을 위한 복음 전도 집회를 따로 진행하는 분도 있고, 어린애들 주일학교를 진행하는 분도 있다. 이분들은 목사님의 특강을 못 듣는다.

그리고 본인은 언제부턴가 주일학교 강사 중 하나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주일학교 공부 주제가 "하늘나라 heaven", 즉 미래 시제였다. 그랬는데 올해는 이와 대조적으로 주제가 "교회사"로, 어째 과거 얘기가 됐다.
형제들 세 명이 번갈아가며 2, 30분 남짓 강의를 하기로 했다.

신약 교회사에서 대격변에 달하는 큰 사건은 콘스탄틴 (313), 종교 개혁 (1517)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걸 기준으로 시기를 나누면 별다른 고민할 필요 없이 세 명의 강의 구간이 딱 정확하게 갈라지게 된다.

1부는 침례인 요한, 예수님의 승천과 교회 태동, 사도행전, 네로 황제의 박해, 최근 영화 '바울'의 고증 분석, 로마 제국에 의한 맹렬한 박해, 예수님 제자들의 최후, 초기 교부들.. 이런 게 나올 것이다.
다루는 시기가 상대적으로 짧으나, 첫 타인 만큼 기본 개념을 얘기해 줘야 되는 게 많다. 유대인과 교회의 차이, 세례와 침례의 차이,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의 관계 등.

2부는 중세 암흑기, 종교 재판, 위그노· 노바티안· 왈덴시스 등 "개신교가 아닌 계통의" 기독교 크리스천들의 계보, 위클리프 이래로 틴데일 등 킹 제임스까지 영어 성경 번역 역사, 성 바돌로메 대학살,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 루터가 나올 것이고..

그리고 3부는 미국 건국, 18~19세기의 부흥, 그리고 "한국의 교회사", 성경 변개 내력, 20세기 이후의 거대한 배도의 물결이 다뤄질 것이다.

내가 강의를 전부 맡는다면 내용을 저렇게 편성할 것이다.
본인은 셋 중 하나만 하라면 제일 최근인 3부를 맡아서 어린 꿈나무들에게 특별히 반공 교육을 해 주고 싶었다.

우리나라의 1948년 5월 10일 총선거일은 주일을 피해서 일부러 월요일로 정해졌는데 북괴는 1946년 11월 3일 총선거를 일부러 일요일로 정했다는 것을 얘기하고,
제헌 국회 기도문을 북괴의 제2차 로동당 대회와 대조해서 소개하고 싶었다.

일제 말기뿐만 아니라 1950년 가을과 겨울에도 반도에 순교의 피가 얼마나 많이 흘려졌는지, 북괴가 왜 저렇게 기독교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 수밖에 없는지 본질적인 이유를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형제 중 한 분이 사정상 마지막 날 3부 시간대에만 강의가 가능하다고 해서 3부는 그 형제에게 양보하게 됐다. 나는 그 대신 2부를 맡았다.
하지만 그 형제도 나 만만찮은 반공 보수 우파이니 안심이 된다. 사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는 게 정상이지.. 특히나 요즘 같은 나라 꼬라지라면 더욱 말이다.

좀 수위가 쎈 슬라이드 몇 장만 빼고 대부분을 내 블로그에다가도 공개하도록 하겠다. 도움 되셨으면 좋겠다.
다만, 듣는 애들이 대부분 초등학생이다 보니, 강의를 하던 당시에는 문장들이 전반적으로 여전히 너무 길고 어렵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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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가 '피 흘린 발자취'인데 슬라이드 배경은 응당 어두운 색으로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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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의 강사가 모두 다르지만, 강의하는 주제와 내용과 범위를 얼추 합의했기 때문에 '지난 줄거리'를 짤 수 있었다.
교회, 박해, 침례.. 모두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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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기독교는 그저 구원 교리나 마리아나 연옥 같은 교리만 다른 게 아니라 역사관부터가 극과 극으로 다르다.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은 일제 시대 무단 통치가 문화 통치로 바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참조할 만한 다른 사건은..

  • 예수님이 받으신 사탄 마귀의 마지막 시험 "내게 절하라. 그럼 내가 이 모든 걸 너에게 주겠다."
  • 파라오가 출애굽과 관련해서 모세에게 제안했던 온갖 타협 절충안들. "애들은 놔두고 성인들만 가라", "가축들은 놔두고 가라" 등등등..
  • 사사기 후반부에서 벌어지던 온갖 성직자들의 타락, 예배의 왜곡
  • 겨자씨가 거대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가지에 앉는 사건 비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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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침례교인들은 유아 세례 반대 같은 이유로 인해, 카톨릭뿐만 아니라 장로교 같은 종교 개혁 개신교 교파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 쟤들을 가만 놔두면 자기 교리가 틀린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박해는 스페인 종교재판소 같은 것하고는 규모나 스케일이나 맥락이 좀 다른 박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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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유한 과부들이 제일 호구였다. 마 23:14 / 막 12:40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교도 마녀로 몰아서 죽여 버리고 재산 몰수하면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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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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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은 유익하고 선한 결과물도 있던 한편으로, 한계도 있었다.
성경 번역 내력과 관련된 슬라이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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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강의를 마무리 하는 퀴즈 차례이다.
처음엔 '아닌 것은'이라고 문제를 만들었다가.. 교육학적인 요소를 감안(?)하여 '옳은 것은'이라고 형태를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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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를 총망라 정리하는 마지막 문제이다. 나름 머리를 굴려서 만든 문제이긴 한데...

  1. 돌탕질 -- 율법을 어긴 죄인을 처형하는 방법으로, 유대인 동족끼리 행함. (예: 스데반의 순교)
  2. 십자가형 -- 고대 로마 제국에서 행하던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 로마 시민에게는 하지도 않았음. 그래서 로마 시민권이 있었던 바울은 로마 대화재의 주범이라는 극악 죄인으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형까지는 아니고 참수형을 당했다.
  3. 화형 -- 이건 뭐.. 종교 재판소가 1순위이고, 로마 제국도.. 인간 횃불이라는 방법으로 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만, 동족 유대인이 행한 건 절대 아니므로 오답이다.
  4. 로마 제국 시절에 콜로세움에서 행해졌으니 이게 정답이고..
  5. 로마 제국은 몽둥이질 채찍질을 하고 잔인하게 처형을 했지만, 중세 종교 재판소만치 별 희한한 변태적인 고문까지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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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음 강의자의 내용 예고도 해 줬다~ 이상.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11/07 08:31 2019/11/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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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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