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에는 prophe- 이라는 형태소로 시작하는 '예언' 관련 단어 3인방이 있다.
prophecy 예언(명사), prophesy 예언하다(동사), 그리고 prophet 저걸 행하는 사람 예언자(명사). 이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는 개역성경의 표현인 '선지자'라는 번역도 익숙할 것이다.

그런데 '킹제임스 흠정역'은 저 prophe- 단어군(-sy, -cy, -t)을 한 치의 예외 없이 모두 '대언-'이라고 옮겼다. 이건 우리말 성경 중에 1990년대 중반, 안티오크 권위역에서 처음으로 시도했고 그걸 흠정역이 그대로 계승한 관행이다.

(0)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하기, 또는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대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속성은 미래 예언이다. 성경이 인간의 개똥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증거 중 하나도 바로 예언이 확률적으로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문자적으로 많이 적중했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긴 한데, 그 대언 중에 (1) 미래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prophecy에 속하는 책이라고 분류된다. 이건 당연히 예언을 말한다. 후자까지 몽땅 대언이라고 싸잡아 풀이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서도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 사도행전이 교회의 역사서라면 계시록은 미래 예언서이지 않겠는가.

흠정역이 성경 번역으로서 매우 아쉬운 점은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키워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이건 본인뿐만 아니라 여러 목사님들도 지적하며 우려하는 면모이다. 흠정역이 다른 부분에서는 완성도 높게 잘 번역된 것도 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언이라고 하면 자꾸 은사주의 점쟁이의 예언 기도... 가령, "너는 몇 월 몇 일 몇 시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고.. 이 번호의 로또를 사면 당첨될 것이다" 이런 걸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4장에다가 '예언'이라는 단어를 넣는 걸 껄끄러워한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 갖고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휴거나 종말, 예수 지상 재림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언 갖고 이상한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개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꼭 초자연적인 점쟁이급 예언이 아니더라도.. "너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된다" 같은 원론적인 얘기만으로도 이미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예언과 대언은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다.

말씀 보존 학회에서는 흠정역을 20여 년째 아주 부정적으로 까내리고 비방하는 편인데.. "우리 한킹을 도둑질한 짝퉁" 같은 영양가 없는 저질 네거티브 말고 "예언이 없는 성경" 이런 식으로 흠정역의 진짜 약점에 대한 공략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계 19:10 "...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의 경우, 옛날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대언'이었다가 나중에 나온 개역개정에서는 '예언'으로 바뀌었다~!
이는 킹 제임스 계열이 아닌 성경을 만드는 진영에서도 prophecy의 번역이 쉽지 않은 고민거리라는 걸 시사한다. "예수 믿는 증거는 말씀 선포/대언" vs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는 미래 예언 능력" 이렇게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언에 예언이라는 뜻도 있다고 풀이하고 넘기는 것보다는..
반대로 예언에 대언이라는 뜻도 있다고 간주하는 게 솔직히 훨씬 더 나은 발상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서는 '예언'이라고 하면 점쟁이 예언을 떠올리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미래 예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가 담긴 진리, 선언 등등이 다 포함된다고 뜻을 확장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게 뜻을 확장하는 데는 대언보다는 그냥 예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2.
예전에 흠정역 진영의 모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니 성경의 '예언'은 豫言(미리 예)이 아니라 預言(맡길 예)이라고 주장한 게 있었다.
엥? 그게 무슨 소리인지? 그 두 한자는 우리 국어에서는 딱히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
둘 다 '미리'라는 뜻이 있고, 預에 보조적으로 '맡기다'라는 훈이 덤으로 들어가 있는 정도이다.
잘 모르겠으면 사전 찾아보고 예+한자 한번 눌러 보시라.

옛날 국한문 혼용 개역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4장을 펴 봐도 내가 찾아보기로 다 豫言이다. 預言이 아니다.
더 옛날, 19세기 이 수정 번역본에서 預言을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내가 보기엔 그것조차도 그냥 '미리'라는 뜻에서 豫와 별 차이 없는 뉘앙스와 의도로 預를 쓴 것이다.
맨 처음에 預言으로 맞게 시작했다가 무슨 은사주의 물 먹어서 변질돼서 豫言으로 바뀐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말에서 예언, 예고, 예지, 예상.. 이런 미래의 의미일 때는 모두 豫이다.
예금, 예치, 예탁 등 금융 문맥에서나 '맡기다'라는 뜻으로 預가 들어간 게 고작이다. 그리고 이런 용례는 현대에 와서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도입됐을 뿐이다.

그럼 예언이 豫言이 아니라 預言이면, 저 조어 원리대로라면 돈이 아니라 말을 맡긴다는 뜻인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말을 남에게 맡긴다고??
그런 뉘앙스를 단어로 표현하려면 하다못해 '차력'이랑 같은 조어법으로 차언이라고 해야 한다! 借力도 자기 원래 힘이 아닌 원천을 빌려서 괴력을 발휘하는 거잖아. 차언은 이와 완전히 동일한 상황이 아니겠느냐 말이다. 이런 한자 구분은 사실도 아닐 뿐더러, '대언'의 옹호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인다.

3.
한자가 무엇이건 '예언'에는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1) 이라는 뜻이 확장되어
"신탁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또는 그런 말"(2)이라고 아주 훌륭한 뜻풀이가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표준 국어대사전을 인용했다는 네이버 사전에는 (2)가 豫言에 들어가 있고, 고려대 한국어 사전도 그러하다.
현재 표준 국어대사전의 공식 홈페이지에는 (2)가 預言로 옮겨지긴 했는데, 이건 아마 후대에 인위로 수정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네이버 사전과 결과가 다른 거겠지..
이런 차이점에서 알 수 있듯, 豫와 預는 처음부터 의미가 칼같이 딱 구분돼 있지 않았다.

이 '예언'은 고린도전서 14장 일대에서는 거의 다 말씀 선포, 설교에 가까운 의미이다. 사실, '방언'조차도 이 문맥에서는 타 외국어로 설교를 한다는 뜻이다. 종합하면 "예언이 방언보다 낫다"는 말은 "말씀 선포를 자국어로 하는 게 외국어로 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폭도들이 예수님을 결박한 뒤, 눈 가리고 죽빵 날리고서 한 말이 "누가 너 때렸게? 알아맞혀 봐라 ㅋㅋㅋ"이었다. 이 '알아맞히다'는 prophesy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메마른 뼈들을 살아나라고 선포 내지 주문을(?) 외우는 것도 prophesy였다.
계시록 19:10 예수님의 증언이 prophecy의 영.. 이건 아까 언급했었고.

이 모든 상황을 가장 잘 커버하는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진리"라는 뜻인 예언(2)이다. 그 진리 중에 "미래에 일어날 일"도 있을 수 있으며.. 그걸 인간이 전한다는 뜻에서 대언이라는 뉘앙스가 저절로 포함된다.
출 7:1 "모세는 신이고 아론은 모세의 prophet"이 될 것이다.. 요 구절이 그나마 거창한 예언자 선지자가 아니라 단순 대변인, 대언자와 가장 가까운 용례이다. 마치 히브리서 9장에서 언약과 유언(16절)이 갈리는 것 같은 미묘한 상황이 된다.

그 반면, 대언(0)에는 표준 국어 대사전 어디에도 기독교적인 의미가 공식적으로 없다. 보충 설명을 더 많이 해 줘야 된다.
겨우 은사주의 예언기도(!!!) 뻘짓을 두려워해서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개념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별자리 점쟁이들한테나 예언을 남겨두는 건(사 47:13).. 좀 많이 무리수가 아닐지?
그건 신천지들이 성경 공부 많이 한다니까 우리는 성경 공부 하지 말자는 식의 발상이다.

성경은 애초에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하는 기준부터 미래 예언이 이뤄지느냐, 빗나가느냐(신18:22)였다.
예언의 세속적인 원래 뜻 (1)을 먼저 존중하고서, 성경적으로 (2)라는 용례와 의미도 더 있다고 보조하는 쪽으로 이해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시작점은 (0) 대언보다는 (1) 예언이 더 적절하다고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6/10/19 19:35 2026/10/19 19:35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73

1. 뮤지컬 관람

본인은 지난 6월, 일본 출장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던 시기에 아내 인맥으로 대학로에서 뮤지컬 '시데레우스'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17세기 초에 망원경이라는 도구의 도움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요하네스 케플러와 학술 교류를 하면서 지동설을 정립하던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다. 과학사를 소재로 한 이례적인 국산 창작 뮤지컬로, 2019년에 초연을 해서 올해는(2026년) 벌써 5연째였다.

아시다시피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공기 저항이 없는 한 모든 물체는 언제나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걸 규명한 걸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진자의 등시성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요하네스 케플러를 만나면서 연구의 범위가 우주로 확장됐다.

그도 처음에는 지동설이 정말 맞을까 긴가민가 했다. 하지만 목성의 위성 등, 천동설로 설명이 안 되는 더 복잡한 천체 현상들을 발견하면서 지동설에 확신을 갖게 됐다.
이들이 관측만으로 정립한 사실들을 수십 년 뒤 뉴턴이 미적분학과 고전역학을 정립하면서 수학 이론 차원에서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지금 너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천체의 운동 패러다임이 저 1600년대에는 정말 사고방식의 대격변이었겠구나 싶었다. 갈릴레이나 케플러 같은 17세기 우주덕들이 지금처럼 우주 망원경에다 현대 우주론의 연구 성과들을 본다면 놀라서 까무러치지 싶다.

여담으로는..

  • 갈릴레오의 딸은 세례명이 '마리아 첼레스테'였다고 한다. (본명은 따로 있음) 19세기 말에 악명을 떨쳤던 전설적인 유령선도 이름이 '메리 셀러스트'이다! 일단 같은 이름이란 게 공교롭게 느껴진다. 뭐, 얘도 처음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가 나중에 저렇게 개명됐다.
  • '토리첼리'가 갈릴레이의 제자였다. 그 옛날에 수은 76cm, 물 10.3m.. 이렇게 대기압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규명한 사람이다.
  • 천체의 운동이 수학적인 질서가 있으면서도, 그게 역설적으로 너무 카오틱하기도 해서 해석적인 일반해를 정확하게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훗세에 의해 추가로 증명되었다(삼체 문제..).

  • 천동설 vs 지동설 다음으로 천문학이 비교적 현대에(20세기 중후반) 논쟁을 벌였다가 결판이 난 분야는..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정상우주 vs 대폭발이었다. 이때는 갈릴레이나 뉴턴 연배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우주가 팽창한다"라는 개념까지 정립된 상태였다.

  • 17세기 저 때의 물리학은 “현상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과가 떨어지는 운동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계산과 예측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 중력이란 게 본질적으로 왜 생기는지늘 규명하는 건 또 별개의 영역이다. 그걸 캐기 위해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을 개척했지만.. 여전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다.

  • 그러고 보니 망원경은 거시세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고 안 보이는 목표물(건물, 지형, 천체..!)을 확대해 보여주는 기기이고, 현미경은 그냥 크기가 절대적으로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목표물을 확대해 보여주는 기기이다. 흠, 그럼 안경은 스케일이 둘의 중간인 건지..
    역사적으로는 망원경과 현미경 모두 1600년대 초에 비슷한 시기에 첫 등장했다. 그 뒤 둘은 자기 역할에 맞게 특화되고 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 우주에 대한 성경의 서술

내가 아는 한, 성경은 천체를 분류하는 게 해와 달과 별들.. 이걸로 끝이다. 별은 집단으로 다뤄지며, 욥기 38장 같은 데서 특정 별자리 이름이나 좀 나오는 정도이다.

그런데 성경엔 영킹 기준으로 딱~~ 한 번 planet 행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왕하 23:5). 해와 달 다음으로 별들, 하늘의 군대/군상 같은 통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행성이라니! 이게 뭘 의미할까? 비킹에서는 그냥 별자리, 성단 등이라고 바뀌어 번역됐다.

성경에는 참교육이나 분노의 질주 같은 개념은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이 땅(지구), 해와 달과 별 말고 '태양계'라든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같은 특정 '행성'을 암시하는 용어나 개념은 내가 알기로 전혀 없다. 그런 건 인간들이 훗날 망원경을 발명하고 로켓과 인공위성을 발명하면서 관측과 탐사를 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물론 그 전 까마득한 옛날에도 인간은 육안으로도 목성을 넘어 무려 토성까지 어렴풋이 관측을 해냈다.
허나, 그때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 같은 항성과 행성이라는 엄밀한 구분이 없었다. 수성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도 1~6등성 범주에 드는 독특한 별 중의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다.
왕하 23:5의 planet은 "어둡지만 가까운" 수성 화성 목성 같은 천체건, "까마득히 멀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건.. 뭔가 움직임이 독특하고 인간 눈에 띌 만한 천체 픽셀을 통틀어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슷한 예로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elements 원소도 있다.
현대의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이 단어를 읽으면서 화학 원소를 떠올리겠지만.. 성경의 저 본문은 돌턴의 원자설과 원소 체계 같은 게 없던 시절에 기록되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같은 단어가 어떤 분야의 101급, '개론, 초등 원리' 비슷한 뜻으로도 쓰였다. 뭐, 화학 원소 내지는 그에 맞먹을 정도로 어떤 system의 구성원, 구성요소 같은 걸 떠올려도 될 것 같다.

3. 과학과 종교의 경계

뮤지컬에서 케플러의 대사 중에는.. "나는 신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는 그저 신이 창조한 미지의 안알랴줌 공간인 것이고 그걸 관찰해서 정체를 밝히는 건 자연과학 하는 사람의 별개의 영역일 뿐이다"란 요지의 말이 있었다.

과학은 자연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실험했을 때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가 재현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학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가설이 맞는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입증하는 학문이다. 이런 정상적인 방법론만 동원했다면 부정이니 사기니 틈탈 여지가 전혀 없다. 증거 없이 일단 믿는 신앙이나 신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교황청은 지동설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갈릴레이를 잡아 족칠 게 아니라, 선량한 과학자들의 눈을 현혹하는 결과를 내는 망원경부터 때려부수고 망원경 제조업자부터 화형 시켰어지??? 개인적으로는 뮤지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뭐 아침이 오는 게 싫다고 수탉을 죽이는 것과 같은 뻘짓이지 않은가? 그런 것처럼 괜히 갈릴레이를 종교 프레임 씌워서 괴롭힌 것도 죄다 뻘짓이었다.

혹시 설마 '안알랴줌'이 불편하거나 불경스럽게 들리시는가? 하나님은 당장 우리 삶 속에서도 갑자기 이유 없는 고난을 주실 때가 있고, 예수님 재림 날짜도 안 알려주시고, 나 언제쯤 죽는지도 안 알려주신다. 우리 일상 속에서 안알랴줌이 엄청 많다. 하물며 자연과학 영역에서 안알랴줌 정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하여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교황청이라는 데가 오로지 성경의 문자적인 묘사에만 집착하면서 천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할 생각이라고는 1도 안 한 고지식한 반지성주의 꼰대 집단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쟤들도 이 바닥에 굉장한 조예가 있었다. 이스터가 언제, 성모승천일이 언제, 날짜와 절기를 따지는 일에 진심이었다. 달력 역법의 이름에 괜히 교황 이름이 붙은 게 아닌 걸 생각해 보자.

1582년에 제정되어 오늘날 전세계 공통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력 말이다.
"윤년을 4의 배수 연도마다 한 번씩 무조건 넣으니까 갈수록 오차가 생기더라~ 그래서 400의 배수가 아닌 100의 배수 연도에는 열외를 넣자"
거기 교황과 추기경들은 예나 지금이나 머리 하나는 최고로 날고 기는 똘똘이들이다. 전세계 종교 수장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니..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에 저 정도 관찰을 하고 대안까지 생각해 낸 집단이란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세계 각국에서는 자기네 무슨 왕 재위 n년.. 이렇게 연호를 쓰다가 19세기 말이 돼서야 서구화 근대화 명목으로 서기 연도와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편이었다.
그런데 저 동네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저런 달력을 제정해서 쓰고 애초에 기준 연도도 '서력'이었다니, 이것도 굉장히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천동설 지동설 관련해서는 옛날에 이상한 ㄸ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4. 태양계 행성들의 주요 제원(?)

  • 자전축: 0도 부근(수성, 토성, 해왕성), 23도 부근(지구, 화성, 목성), 90도 전도(천왕), 180도 전복(금성)
  • 중력가속도: 3.7 (수성, 화성), 8~12 (금성, 천왕성, 지구, 토성, 해왕성), 25 (목성)
  • 자전 주기: 10시간(목성, 토성), 16~17시간(천왕성, 해왕성), 1일(지구, 화성), 58일(수성), 243일(금성) + 27~30일 부근(달, 태양)
  • 표면 대기압: 0 부근(수성, 화성), 1~1.x(지구), 95(금성)

수성은 태양과 워낙 가깝다 보니 공전 주기가 엄청 짧으며(각속도), 실제 공전 속도(선속도)도 혼자 초속 47km에 달할 정도로 겁나게 빠르다. 공전 궤도의 이심률도 독보적으로 가장 크다(타원에 가까움).
화성은 지구와 자전 주기가 비슷하고 자전축 기울기도 비슷하다.

지구야 뭐 표면에 물(바다)이 있고, 달이라는 이례적으로 큰 위성이 있는 게 특이하다.
금성은 지구와 크기가 비슷하고 거리도 가장 가깝지만.. 고체 땅이 있는 지구형 행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엄청난 고온 고압 불지옥이다. 자전 속도가 끔찍히 느리고 심지어 역행 자전인 것도 특이점이다. 금성만 왜 저렇게 됐을까.;;

그리고,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행성이 있을 법도 한데 왜 텅 비었고 소행성대만 있는 걸까?
수성이 공전이 빠르다면 목성과 토성은 그 큰 덩치로 자전이 왕창 빠른 게 특징이다. 특히 토성은 자전 원심력 때문에 적도 쪽이 대놓고 부푼 게 티가 날 정도이다. 그렇잖아도 가스형 행성이기도 하니..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할 만한 건.. '태양일'(또는 회합일)이다.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 주기는 23시간 56분 남짓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지구가 1/365.25만치 공전을 하니, 지구가 태양을 바라보는 각도도 미세하게 더 나아가 있다. 그래서 지구도 4분만치 더 돌아야 하늘에서의 태양 위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를 더함으로써 지구의 태양일은 24시간이 된다.

이건 1/(자전 시간)이라는 각속도가 1/(공전 시간)이라는 각속도만큼 느려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앞의 값에다가 뒤의 값을 빼면 태양일에 해당하는 각속도가 나온다. 그리고 이 각속도의 역수가 곧 태양일이 된다.
지구와 화성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데.. 자전이 매우 느린 수성과 금성은 일이 굉장히 재미있어진다.

수성은 자전(약 58.x일)을 3번 하는 동안 공전(약 88일)을 2번 하는 형태로 조석 고정이 돼 있다.
달처럼 1:1이 아니라 3:2라니.. 수성이 공전 궤도가 이심률이 크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된 듯하다.
1/x - 1/(x+1) 의 값은 1/(x*(x+1))이니, 1/2 - 1/3은 1/6이다. (6 = 2*3 = 3*2)
실제로 수성의 태양일은 자전 주기의 3배 겸 공전 주기의 2배인 약 175일이다. 수성의 태양일은 지구나 화성과는 달리, 자기 자전 주기와는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

그리고 수성의 하늘에서 해가 떴다가 지는 건 단순히 지구 일출 일몰의 slow motion 겸 확대(태양이 훨씬 더 가까이 있으니) 버전이 아닐 것이다.
해가 중천까지 좀 올라가더니만 도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대로 완전히 지는 것도 아니고 다시 뜬다. 게다가 수성의 공전 궤도의 특성상, 태양의 크기 자체도 멀어지면서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천천히 진행되니 굉장히 기괴한 모양이 될 것이다. 수성은 이 점에서 아주 특이한 행성이다.

다음으로 금성은.. 자전 방향이 역행이어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 자전 각속도에서 공전 각속도를 빼는 게 아니라 더해 주면 된다. 1/(1/243.02+1/224.70)의 역수는 약 116~117일.. 즉, 금성의 태양일은 각속도 버프를 받는 덕분에 자기 자전 주기의 절반으로 줄어들며, 수성의 태양일보다도 짧다.

금성의 하늘에서 태양의 움직임은 수성 같은 기괴한 변화 없이 지구 일출 일몰의 역주행 slow motion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너무 짙은 안개 때문에 실제 금성의 지표면에서는 태양 따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수성이나 금성의 공전 주기는 저 갈릴레이 시대에도 망원경 관측을 통해 일찌감치 알려져 있었다. 이 행성들의 복잡한 위상 변화가(커졌다 작아졌다, 초승달-보름달 등등) 천동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니 지동설의 근거로도 제시될 정도였다. 그러나 자전 주기는 행성의 표면을 정밀히 관측해야 하기 때문에 알아내기 몹시 어려웠다.
무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수성은 1:1로 조석 고정되어 자전 주기도 공전 주기와 동일한 88일일 거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금성은 구름 때문에 완전 불명 오리무중 미스터리였고.. (하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금성은 마이애미 해변 같은 곳일 거라고 예상됐었다ㄲㄲㄲㄲ)

그래서 수성과 금성의 정확한 자전 주기는 1960년대에 전파 레이더가 발명된 뒤에야 알려졌다고 한다.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는 마치 지구 임의의 지점에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렇게 엄청난 난이도의 차이가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6/09/15 08:35 2026/09/15 08:35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65

1.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난 “A 상황에서 이러이러한 걸 당했으니, 그럼 그와 반대인 B 상황에서는 반대로 내가 이러이러한 걸 할 수 있겠네? 그래야 공평하고 일관성 있지?”
이런 걸 매사에 진지하게 따지는 편이다. 각종 사회 시스템이나 심지어 신학에서도 말이다.

(1) 우리나라에서 핸들을 잡는 사람이라면 이 나라의 도로교통법이란 게 보행자에게 얼마나 미치도록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짜여 있는지를 알 것이다. 그러니 운전하는 동안 잠재적인 사고 유발자, 차 끌고 다니는 죄인 취급받으며 그렇게도 억압받고 몸 사렸으니..!! 내가 차에서 내린 보행자일 때는 반대로 그 권리를 막 행사한다. 차들을 보면서 절대로 쫄거나 몸을 사리지 않는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가 무조건 닥치고 왕이다. 내 모습을 운전자에게 충분히 드러내 보이고 손 들고서 건너겠다는 의사를 확 표시한 뒤부터는 일체의 망설임 없이 발을 도로로 들이민다.
갑자기 튀어나온 차 때문에 놀랐다면 확 인상 쓴다. 정지선 넘어서 멈춰선 차가 있으면 툭 치거나 신경질도 내 준다.

“닌 운전 그 따위로 했으면 신고 당해서 금융치료 먹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나쁜 마음 품은 보험사기범한테 잘못 걸렸으면 인생이 훨씬 더 꼬였을 수도 있다. 그냥 나같은 관대한 사람한테 쌍욕만 한번 먹고 넘어가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알았냐?” 이걸 각인시켜 준다.

(2) 난 혼잡한 전철에서 자리에 앉아 있고, 내 곁에 노인이 있더라도..
좀 냉정한 얘기지만 꼭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양심의 가책(?)이나 다른 불편한 생각을 느끼지 않는다.

전철에는 이미 노약자석이 갖춰져 있고 그걸로 모자라서 웬 임산부 보호석까지 생겨 있다. 그렇잖아도 일반인이 앉을 자리가 너무 부족하다.
결정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노인들은 누구나 그 많은 전철들을 10원 한 장 안 내고 다 공짜로 탄다. 요즘 같은 물가에 그 정도면 이미 도 넘치게 보상과 예우를 받고 있는 거 아니냐?
그것도 모자라서 자리까지 양보해 줘야 한다는 생각이 딱히 들지 않는다. 시내버스의 앞쪽 좌석이라면 모를까, 전철에서는 말이다. 사회 시스템이 그렇게 짜여 있다.

지금 안 그래도 사회가 험악해져서 어른들이 애들이 담배 피우는 걸 훈계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전철 노약자석이 침범 당하는 경우는 정말 극히 드물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3) 교도소에 에어컨..??? 에어컨과 전기료가 너무 싸고 흔해빠져서 달동네 독거노인 쪽방촌 방구석까지 에어컨 찬바람이 숭숭 나오는 세상이 아닌 한, 절대로 추호도 달아 줘서는 안 될 것이다.
교도소에서 열사병 걸려서 디지는 죄수가 전국에서 매주 몇십 명쯤, 농촌에서 땡볕에 밭일 하다가 안타깝게 돌아가시는 어르신 비율만큼은 좀 나왔으면 좋겠다. 세금 아끼고 교도소 공간도 좀 확보하게 말이다.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사형 집행 좀 해야 하지 않겠냐? 차라리 교수대 사형을 집행하는 게 자비롭고 인권에 여러 모로 부합할 것이다.
잔인하다고? 그러면 교도소 공간이 부족해서 난리라고 징징대지를 마시든가!!

난 용형 같은 프로에서 "어느 범죄자가 잡혀서 죄값을 정당하게 치를 생각을 안 하고, 비열하게 ㅈㅅ이나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런 놈들은 막 몰아붙여서 자살이라도 많이 해서 세금 아끼도록 나라에서 유도를 좀 했으면 좋겠다. 이 나라는 어차피 과학 수사가 충분히 발달했고, 누명 써서 억울하다고 누가 자살할 일은 없다시피하니.. 그런데 증거 충분하고 진짜 죽여야 할 놈에게 사형 선고와 집행은 안 한다. 저런 것들한테 들어가는 음식이 아깝고 산소가 아깝다.

나라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그 나라 구성원 개인이 생각이 이렇게 독해지고 모질어지는 것이다. 테이큰이나 아저씨나 모범택시 같은 장르는 앞으로 영원히 번창할 것이다.

2. 신앙 시스템에도 그런 논리와 일관성이 있음

이 다음부터는 성경/신학 얘기다.

(1) 성경의 하나님은 음행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엄히 금지한다.
결혼을 한 게 아니라면 피임을 하더라도 관계하는 것 자체가 음행이고 죄악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결혼한 부부라면? 피임을 하건 말건, 그 어떤 방식으로 놀건 서로 동의만 했다면 모조리 다 부부 재량이고 합법이다.
(법적으로, 외형적으로 혼인신고나 예식을 못 했더라도, 어디서든 서로 정말 평생 책임지겠다고 맹세하고 결혼에 준하는 동거를 한 거라면 그것도 물론 OK)

난 아내하고 같이 자기 전 기도할 때 아내가 민망해할 정도의 직설적인 얘기도 막 대놓고 털어놓는다. 그걸 못 할 이유가 논리적으로 추호도 없다.

(2) 전에도 한번 말했었지만..
이 세상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 부부가 하나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 사탄 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것 때문에 이 정도로 동반 타락하고 망가졌다. 그래서 후손들도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게 됐다.

그 정도라면 아예 하나님 자리를 대놓고 노렸던 정치범 사탄 마귀는..??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세상이 변형을 넘어 싹 멸망당했어야 마땅하다. 잡법과 내란 정치범 역적은 죄의 등급이 완전히 다르다.
간극이 없기는 뭐가 없냐..? 난 이 시나리오 없이 창세기 3장을 도대체 어떻게 문자적으로 설명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성경이 로마 제국 시절의 그 옛날부터.. 지금 우주 로켓과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있는 현대까지 건너뛰고 예수님 재림을 예언할진대...
과거에 지질 시대와 지금 정도의 넘사벽 간극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3)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수많은 어린애 아기들이 피지 못하고 죽는 걸 허락하고 계신다. 각종 질병, 사고, 굶주림,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별할 능력이 전혀 없는 애들은 죽어서 무조건 다 천당 간다. 죄성이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그 애들의 사후 영원세계는 다 보장돼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현실에서의 그런 비극적인 상황도 허락하시는 거다.
이 세상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건 뭐 성사를 받았건 그런 거 쥐뿔 하나도 상관 없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품과 맞는다.

나는 뭐 분당 ㅅㅁ 교회의 아프가니스탄 병신짓이나, 어디 교회 먹사가 돈이나 이성 관계 쪽으로 사고 쳐서 기독교계가 욕먹는 건..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건 걔네들 사정이니까.
세종대왕과 이 순신 장군이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를 지은 게 있을 수 있고,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 갈 수 있다. OK 그것도 교리적으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저런 어린애들 아기가 원죄 때문에 몽땅 다 지옥 갔다고 말한다면 그런 교리는 못 받아들이고 그런 신은 못 믿었을 것이다. 특히 남에게 믿으라고 이렇게 블로그에다 글을 쓰고 당당하게 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권이라는 명분으로 “신이 엿장수 마음대로 하기 나름”이 가능한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게 있다. 사람이 제각각 불공평한 환경에서 태어나거나 불공평한 방식으로 죽는 것이야 그럴 수 있는 영역이지만.. 사후세계가 아예 아무 기회도 없이 영원한 지옥불이라고..?? 이건 정말 아니다.

자, 그 “대신” 그 어린아이 아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리고 그런 특례구원이 적용되는 동안, 게임으로 치면 주인공 캐가 아직 깜빡거리면서 무적 상태인 동안은 부모로부터 절대적으로 의로 양육을 받아야 한다. 스스로 죄에 대한 책임능력이 생기는 때를 대비해야 한다.

단순히 애가 부모 욕심만큼의 학교 성적을 못 낸다고, 부모 마음에 안 든다고 감정적으로 패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도 넘게 사고 치고 부모 속이고 사회 질서에 반항하는 건 다리몽둥이 부러지게 패고 지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해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애 부모가 “니놈은 인간 안 되겠으니 그냥 이 애비랑 같이 한강 뛰어들어가서 죽자” 이런 마인드로라도 훈육해야 한다.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건 말건, 어디 법의 사각지대 한구석에서 흉악한 아동학대는 어차피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 와중에 진짜 정당한 훈육을 틀어막으니 온 나라가 반대로 정신나간 진상 학부모와 금쪽이 촉법이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는 것이다. 나라는 싹수가 노래지고 단단히 망조 들어 가고, 참교육 웹툰의 소재는 영원히 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이상. 난 이런 식으로 알고리즘이 짜여 있다. 너무 계산적인 건가.. ㅋㅋㅋㅋㅋ

3. 먼저 확실한 큰 약속을 받은 걸 근거로, 작은 불확실한 것에 믿음을 행사함

아 그런데..!! 기독교 교리와 하나님의 성품은 저렇게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영역만 있는 게 아니다.
저렇게 영원과 관련되고 공리, 기초에 해당하는 부분은 명료한 반면, 일상적인 것, 일시적인 영역에서는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다" 이것도 고려해야 한다.

... "여전히 모든 것이 명료해야 한다는 직선의 믿음으로 달려가는 분이 있는가. 그가 믿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닐지 모른다." (☞ 직선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링크)

굉장한 통찰이 담긴 글이군. 공감한다.
하나님은 의외로 MBTI T가 전혀 아닌 면모가 있다.
하나님께서 무슨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대를 위해 소는 좀 희생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공계나 경영공학에서 말하는 최적화 전략에 따라서 일하시는 게 전혀 아니다.

무슨 자연과학 탐구하듯이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매사에 반드시 저런 식으로 일하실 것이다~~ 요런 input을 넣었으면 저런 output이 즉시 튀어나올 것이다" 상관관계를 추론하고 예측하는 건 무의미하고 가능하지 않다. 그게 완전히 가능하다면 애초에 믿음이란 게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누가 죄 짓는다고 해서 무슨..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메모리 영역을 잘못 건드린 프로세스가 예외 날리고 강제 종료되듯이 바로 커트 당하는 게 아니다.
성경부터가 맨 처음 창세기에서 악인 카인이 벌받아 디져서 정의구현된 게 아니라, 오히려 선한 아벨이 먼저 살해당하는 걸로 시작한다. 그리고 욥기는 온통 하나님의 알 수 없는 면모에 대한 인간의 고뇌로 가득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 건 절대 아니고, 늘 하나님이 옳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먼저 입어 있다. 궁극적으로는 악은 멸망하고 선이 승리한다.
큰 그림에서 하나님은 오래 참으면서 역사를 여전히 아주 여유롭게, 좀 시쳇말로 배짱장사에 가까울 정도로 너끈히 주관하고 계신다.

괜히 인간이 선행 노력이 아니라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시스템이 짜인 게 아니다. 이 패턴을 이해하지 못하면 답답해서 신앙생활 못 한다.
신자조차 당장 닥친 고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어서 징징댈 때가 있는데 하물며 불신자는.. 뭐 "신이 존재한다면 왜 세상이 이러쿵저러쿵...하냐" 이런 불평불만 볼멘소리의 99.9%는 저걸 이해 못 하거나 공감하지 못해서 나오는 것이다. 진짜 그렇다.

세상에서는, 사회에서는 "월급부터 먼저 주면 그 다음에 일할게요"라든가 "서울대부터 입학시켜 주세요, 그 다음에 저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이건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복음은 "구원부터 먼저 공짜로 거저 주세요. 즐기고 누린 다음에 성장해서 헌신하고 인내하고 내 십자가를 질게요"로, 순서가 반대이다!

신자는 앞으로 구원이 영원히 보장돼 있는다. 요한계시록 대환란 같은 것도 절대 겪지 않는다. 최소한 "나 정말 구원받았을까? 그건 죽어 봐야 알지"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스케일이 더 작은 환난이나, 하나님 뜻을 알 수 없는 것, 직선이 아니라 곡선인 하나님의 이끄심 정도는 믿음으로 버티고 시험도 감내한다. 이 큰 그림을 이해하시겠는가?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심지 않은 걸 거두고 착취하는 갑질 악덕업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무슨 죄 마음껏 지으라는 라이선스인 것처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말도 안 되는 발상인지!! (구원 말고도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탈북자가 재북송만 안 될 뿐 대한민국 교도소에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수로 사는 건 얼마나 비참하겠느냐 말이다.
저건 어린아기, 애들은 죽어도 무조건 다 천당 가니까 마음껏 학대하고 죽여도 되고 심지어 낙태도 해도 되겠네? 그거와 완전 동급의 생각일 뿐이다.

난 이렇게 명쾌한 신앙 논리를 깨우친 곳이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어쨌든 킹 제임스 진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교리 노선을 지지한다. 말보회가 아무리 이단 소리를 듣건, 이 송오 목사가 말년에 얼마나 이상하게 흑화했건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것보다 더 깔끔하게 건전하고 성경의 법리를 문자 그대로 잘 풀이해 주는 진영이 있으면 고려하고 논쟁도 응할 의향이 있지만.. 그런 진영이 또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26/09/10 08:35 2026/09/10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64

1.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지금으로부터 한 달쯤 전, 지난 제헌절 무렵에 본인은 아내와 함께 매일 진행하는 성경 통독이 '에스라'에 진입해 있었다. 즉, 바빌론 포로기 종료와 예루살렘 귀환 시기이다.

에스라기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70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그래서 제단부터 만들어서 의식율법을 다시 시행하고, 뒤이어 성전도 재건하기 시작했다.
성전 기초가 놓이자 사람들이 너무 감격해서 환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회의 통곡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솔로몬의 성전을 어렴풋이 본 적 있었던 노인들이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그 무렵에 방영됐던 SBS 꼬꼬무 232화는 참 공교롭게도 재건과 정반대인 철거를 다뤘다. 바로 1995~96년에 진행됐던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말이다. 이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 년 전의 일이 됐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0년 가까이 건축한 끝에 1926년에 완공됐다. 그게 광복 50주년, 그리고 완공 얼추 70년 만에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철거된 것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명목으로, 1995년 광복절에 지붕 맨 꼭대기의 첨탑 하나만 먼저 크레인으로 들어서 뜯어냈다. 이게 철거의 첫단추를 끼운 퍼포먼스였다.

에스라서에서는 성전 재건의 기초가 놓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렇게 감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식민 지배의 원흉 본부 건물의 철거가 시작됐을 때 사람들이 감격하고 환호하고 난리였었다.
두 사건이 서로 굉장한 대척점? 안티테제를 형성하는 것 같다.

꼬꼬무를 보니 그 당시에 첨탑을 끌어내리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현장 부근에 미리 설치한 것, 건물의 내부에서 보관 중이던 수많은 문화재들을 미리 대피시킨 것(그 당시엔 조선총독부 청사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등 숨겨진 비화가 많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과 너무 가까이 있는 관계로, 섣불리 폭파 같은 과격한 방법으로 해체하기는 어려웠다. 중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뼘 한뼘 조심해서 뜯어내다가.. 1년쯤 뒤, 마지막 남은 자그마한 벽면만 역시 상징적인 차원에서 폭파해서 무너뜨렸다고 한다.
제일 먼저 뜯어냈던 첨탑은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의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서 처참하게 낡아 가는 중이라고 꼬꼬무에서 언질을 줄 법도 한데.. 이에 대한 언급은 더 없었다.

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찬성이고 잘했다는 소신이다. 웬만하면 보존해서 다른 건물로 사용할 법도 하지만, 쟤는 용도뿐만이 아니라 위치도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에 너무 안 좋은 구도로 있었다. 옛 서울 역 건물 같은 건물이 아니다.
그나저나 조선총독부가 무슨 종로 경찰서 같은 시설도 아닌데, 지하에 웬 유치장이나 고문실 같은 방이 있었는지는 좀 의문이다. 총독부 청사의 지하엔 위급 상황에서 VIP의 피신용 패닉룸 벙커 같은 거나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2. 친일파(?) 금수저 가문 출신 여배우

난 누군지도 몰랐는데 최근에 참교육 드라마 때문에 얼굴 알게 된 어느 예쁘장한 여배우가 말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굉장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람은 정말 엄청난 가문 출신이었구나.;;;
별 생각 없이, 정말로 모르고 내뱉은 말 때문에 당사자도 엄청 골치 썩었고, 소속사라든가 그녀와 계약 맺었던 기업들도 "아이고 두야" 하며 뒷목 잡았지 싶다.

저 정도면 집안 조상님이 그냥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소극적으로 순응하고 부역한 수준을 넘어서기는 하는 것 같다.

  • 고종 황제도 치료했었다고? 그 신분과 능력으로 아예 고종의 암살에나 관여하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그리고 칼빵 맞고 실려왔던 이 완용 대감님한테도 당대 최고의 의술을 베풀면서 치료했었네?
  • 소록도에서 근무했었다고? 그때 거기서 일했던 의사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 섬겼던 손 양원 목사와는 영 딴판인 일을 했던 거 같은데?
  • 내선일체 모범 가정이라고 신문에 소개된 게 무슨 1940년대였으면 나도 이해한다. 근데 이거 뭐 민족말살이니 문화통치니 아무것도 없고 3· 1 운동도 일어나기 전 1916년에 벌써 대문짝만 하게 소개된 거면..

나도 반일정신병 극혐하는 소신이고, 이딴 일 갖고 미개한 연좌제는 절대 반대한다. 하지만 조상의 저 행적 자체를 "그 시절에 친일 안 한 사람 어딨냐" 그러면서 다 물타기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소설 "꺼삐딴 리" 이 인국 박사의 판박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가 누구건 의술을 베풀어야지, 매국노라고 치료도 하지 말아야 하냐" 이렇게 반문하는 혹자가 있는데.. 이건 좀 논점일탈이다. 이때 이 완용은 평범하게 다치거나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의거에 의한 저격을 당한 상태였다.
의료인으로서 매국노도 치료한 것 자체를 반인륜 반민족 행위로 간주해서 후세가 단죄하는 것까지는 에바라고 쳐도, 그건 자랑스럽게 떠벌릴 이력도 절대 못 되지 않겠는가?

문 재인이 변호사 시절에 페스카마 호 흉악범들 옹호했던 것도 직업적으로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정치 성향에 따라서는 그의 그런 과거 행적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들은 그런 견해를 가질 권리가 있다.
하물며 이 완용을 치료했다는 의사에 대해 일단 부정적인 편견을 갖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이걸 반일정신병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무슨 빨간 대게 그림을 갖고 욱일기라고 트집 잡는 짓거리야 진짜 반일정신병이겠지만.. 이건 그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아 물론 당연히.. 후손인 저 여배우 당사자가 뭘 직접적으로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성형 의혹도 아니고 사생활 스캔들도 아니고, 마약 도박 음주운전 아니고, 과거 학폭 가해자 내력이 폭로된 것도 아니고 그런 부류는 전혀 아니긴 한데..

다만,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 인기로 먹고 사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괜히 할 필요 없는 말을 스스로 늘어놓는 바람에 커리어에 약간 태클 걸리고 흑역사 논란거리 스크래치가 추가된 건 누구라도 실드 치기 어려워 보인다. 국민정서법의 여파를 한동안 좀 감내를 해야 할 것 같다. -_-;;;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자랑했으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게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 하겠다.

당장 대놓고 몰락했다기보다는, 더 몸값 올라가고 더 출세할 기회가 꺾인 거지.
그래도 아까도 말했듯이 이게 무슨 활동 중단에 자숙까지 할 심각한 허물은 절대 아니니,
이 참에 어디 좋은 일 하는 단체에 기부 많이 하거나, 역사 관련 영화· 드라마에 선역으로든 악역으로든 쿨하게 출연료 안 받고 출연하거나.. 이런 걸로 얼마든지 퉁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고 본다. 저 사람이 부디 이 상황을 지혜롭게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

난 예전에도 글로 몇 차례 썼지만, 한국이 해방된 건 100% 전적으로 미국 덕분이지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하나도 기여한 게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본을 패퇴시키고 몰아낸 건 미국의 군사력, 특히 그놈의 원자폭탄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죽을 힘 다해서 독립 의지를 표출하고 호소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그게 한국의 해방·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수 있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는.. 아예 같은 추축국 진영으로 취급 받고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일정신병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할배를 좋아하는 우파일 텐데.. 저런 식의 '독립운동 뻘짓론'을 리 승만 할배가 들었다면.. 아마 땅을 치고 통곡하거나, 격분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지 싶다.
할배는 미국을 상대로 그놈의 알량한 광복군 병력을 거짓말로 뻥튀기까지 하면서 "우리도 일본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 우리도 연합국의 승전에 밥숟가락 얹었다" 필사적으로 호소했던 사람이었다!

3. 성경이 말하는 독립과 자유

이번 광복절의 다음날엔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설교 제목부터가 “그리스도인의 독립과 자유”였다.
성경 본문은 그 유명한 갈 5:1 “다시는 속박(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구절이 제일 좁은 의미에서 말하는 건.. 구원에 관한 한 다시는 할례니 안식일이니 하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건 비유대인에게는 막 심각하게 와 닿지는 않는 주제이다. 적용 범위를 신약의 범위에서 조금 넓히면.. 기껏 구원받았더니 도로 육신의 죄악된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 까지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옛날에 할배 대통령은 “우리는 일제로부터 너무나 어렵게 힘들게 해방됐고, 공산당으로부터도 자유를 끝내 지켜냈다. 우리는 이제 문화, 경제, 군사 등 어느 분야에서든 절대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내가 우리 민족에게 남기는 유언은 갈 5:1”이다.”라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건 기독교 교리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제일 넓은 영적 적용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배경이 있으니 본인도 오후에 준비 찬송을 인도할 때는 자유가 들어간 곡들을 쭉 검토하고 골라 봤다.
0순위로 곧바로 무조건 바로 떠오르는 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되시겠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라”도 좋은 예시이다. “내게 자유 주시려고 주가 고난 당했네”가 있다.

“놀라운 주의 은혜” Wonderful grace of Jesus에는 setting my spirit free와 giving me liberty가 나란히 나온다. 우리말에는 “참 자유 주신 주” 정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주의 은혜”와 “주 보혈로 날 구해 준”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의 가사에는 둘 다 쇠사슬이 끊어졌다는 묘사가 있다.

  • Chains have been torn asunder, giving me liberty
  • My chains fell off, my heart was free (사도행전 12장,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풀려나는 장면을 대놓고 오마주..)

하지만 우리말 번역 가사에는 이런 것들이 빠졌다.
우리말 찬송 중에 뭔가 쇠사슬이 끊기고 풀렸다는 묘사가 있는 곡은.. 찬송가라기보다는 캐주얼 복음성가 후크송(?)에 더 가까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가 전부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6/08/17 19:35 2026/08/17 19:35
, ,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58

내가 단순히 성경 어휘 이슈나 기본 교리 말고.. 경건, 영성 쪽으로 글을 쓰는 건 엄청 오랜만이고 이례적이지 싶다. ㄲㄲㄲㄲㄲㄲㄲ

1. 선교사 짐 엘리엇

1940년대 후반~1950년대 그 무렵에 우리나라에는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손 양원 목사가 있었다. 자기 아들들을 죽인 좌익 폭도들을 용서했는데 나중엔 자기도 공산당에게 순교한 분이다.

한국에 선교를 하고 복음 전하기 전에 먼저 6· 25 참전부터 선택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라는 엄청난 분이 있었다. "위급할 때 도와주는 친구, 자기 목숨까지 바치는 친구가 참 친구이다"를 몸으로 실천한 분이었는데 그 꿈을 다 펴지 못하고 전사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는 짐 엘리엇(1927-1956)이라는 선교사도 있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남미 에콰도르라는 나라의 내부에 있는 '아우카'라는 미접촉부족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자기 인생을 다 바쳤다. 쟤들은 외부인은 닥치고 죽이고 보는 아주 폐쇄적인 집단이었다고 한다.

짐 엘리엇은 본인 포함 5명으로 선교팀을 꾸렸다. 그리고 경비행기를 타고 쟤네 마을 상공을 날면서 선물 바구니부터 마구 떨구면서 저쪽 마음을 열어 나갔다.
그리하여 1956년 1월, 접선을 성사시켜서 부족 대표를 한번 만났다. 그러나 부족 내부에서 악의적인 오해와 이간질 같은 불상사로 인해 그들은 겨우 며칠 뒤, 원주민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그만.. 전원 살해당하고 말았다.

선교사들은 권총을 소지하고 있었고, 호신용으로 공중에 위협 사격도 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을 향해 쏘지는 않고 자기들이 죽음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화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는 죽으면 바로 천당으로 가니 걱정 없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향하고 있는 저 사람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라는 신념을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미국과 유럽 사회는 크게 술렁거렸다고 한다.
옛날 대항해시대 스페인이라든가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같았으면 "저 미개한 야만인들을 당장 토벌하고 놈들을 기독교로 강제로 개종시켜야 한다" 이랬겠지만.. 때가 20세기 중반이니 이번엔 조금 다른 관점의 반응이 나왔다. (실용주의?)

"거 봐, 쟤들은 수백 년 동안 외부와 접촉을 일절 거부하고 침입자를 죽여 온 부족이잖아.. 왜 쓸데없이 저런 데에 선교하러 가서 자기 명을 재촉했을까? 그 친구.. 공부도 잘하고 장래가 촉망되던 인재였는데??? 완전 재능낭비이구만!"

그랬으나..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짐 엘리엇 등 몇몇 선교사들의 아내(= 미망인)가 몇 년 뒤에 그 부족을 다시 찾아가자 원주민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고 사랑과 용서에 감화됐다고 한다.
원주민들 대다수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며, 부족의 외부인 살해 문화가 사라졌다. 심지어 짐 엘리엇 일행을 직접 창으로 찔러 죽였던 부족의 전사는 목사가 됐다고 전해진다.

짐 엘리엇은 20대 초반 때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사람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라고 다짐을 일기에 쓴 것으로 유명하다. 애초에 "주여, 저를 주를 위해 써 주십시오, 저를 주의 일에 정말 새하얗게 탈탈 불태워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입버릇처럼 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도 마찬가지다. 아까 저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낭비라니요? 제 남편은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인생을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이제야 그 꿈을 계획대로 이룬 건데 뭐가 낭비입니까? 다시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마세요."라고 단호히 일축했었다. (저분은 복음서에 나오는 향유 옥합 여인 이야기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었지 싶다.)

그리고 그분은 No Graven Image이라고.. 표면적으로 선한 의도이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내 뜻을 들어주고 당장 형통케 해 줘야만 한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저격한 소설도 썼다(1966년). 자기 남편을 모티브로 한 주인공을 넣어서 말이다. 하나님이 아까 그 해밀턴 쇼나 짐 엘리엇 같은 사람을 역설적으로 왜 일찍 데려가셨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뭔가 19세기 말 제국주의 시대가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 20세기 중반 현대에도 저런 선교사가 있었다는 게 개인적으로 정말 놀랍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짐 엘리엇은 친아들의 살해범을 용서한 손 양원 목사보다 더하고, 와이프는 주 기철 목사를 내조했던 오 정모 사모보다 더 강직했던 분 같다.

* 저런 일이 있고 반세기 가까이 뒤, 2018년에는 '존 앨런 차우'라는 이름의 선교사가 인도 부근의 미접촉부족인 '센티널 족'이 사는 노스센티널 섬에 무단 접근하다가.. 원주민으로부터 화살세례를 받고 죽었다. 이 사람은 그 해에 다윈 상을 받고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ㄲㄲㄲㄲ
저 사람은 과연 짐 엘리엇 정도로 기도 잔뜩 하고 준비하고 원주민들을 진짜 사랑하는 마음으로 접근했었는지..
아니면 그냥 중2병 관심병자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저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센티널 족을 상대로 뭔가 일을 하셨는지?? 나로서는 판단을 못 하겠다.

2. 주님은 나의 최고봉

오스왈드 체임버스는 우리나라에 ‘주님은 나의 최고봉’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My Utmost for His Highest라는 경건 묵상집으로 유명한 목사이다. 그야말로 “나의 최고존엄에 대해서 내 뼛속까지 진심을 다해서 생각한다, 깊이 묵상한다, 그분께 바친다, 헌신한다” 이런 뜻이다.

책이 대체로,

  • “당신은 양심을 통해 속삭이는 성령님의 권고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영이 건강한 상태입니까?”
  • “거리끼는 게 있다면, 꺼림칙하다면, 좀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야 한다면 이미 글러먹은 것입니다. 하지 마십시오”
  • “당신의 종교 행위가 신앙 생활의 본질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아무리 좋은 취지로 시작한 것이라도 죽은 껍데기로 전락하고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지의 내용이다.
제대로 예수쟁이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자기랑 너무 안 맞고 뜬구름 잡고 재미없는 얘기밖에 없어서 오래 못 읽는다.

가령, 갓 구원받은 영적 뉴비 아기들을 위한 초급 입문서에서는 “기도를 생활화하십시오”라고 말하고,
중급에서는 “자기 간구만 할 게 아니라 남을 위한 중보기도가 더 수준 높은 기도입니다” 이러는데..
최고봉에서는 그건 너무 당연한 거고 “중보기도라는 명분으로 자기 의가 교묘히 드러나지 않도록 유의하십시오” 이러는 식이다. 그러니 고급이다.
애초에 중보기도 자체를 할 줄 모르거나 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저 책이 무슨 상황을 다루는지 이해를 당연히 못 한다.

저 사람은 1874년생으로, 김 구, 이승만, 윈스턴 처칠, 앨버트 슈바이처 같은 인물과 동시대 동갑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서양은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한편으로 제국주의, 황금 만능주의, 극심한 빈부격차, 시궁창이던 노동자 인권, 기존 윤리관의 타락 등 온갖 잡음도 많았다.

그래도 한편으로 서양에서 저 정도의 영성을 자랑하는 목사도 있었으니 그 문화권이 진짜 회복 불가 막장까지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이 썩지 않게 하는 소금 역할을 한 셈이다.
저 사람은 1차 세계대전 때 종군목사 명목으로 사역하다가 1917년에 겨우 43세의 나이로 맹장염이던가 오늘날 관점에서는 별로 치명적이지 않았을 병 때문에 소천했다. 불의 전차 ‘에릭 리들’(1902-1945)과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최고봉이라는 단어는 옛날에 현대자동차 각그랜저의 광고카피이던 “고급 승용차의 최고봉” 이후로 이 책 제목에서 처음 듣는다.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난 바로 이 책을 선물로 받으면서 지금 내 와이프가 된 자매와 교제를 시작했다...!!
“책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답례를 드리고 싶은데 우리 밥 같이 좀 먹을 수 있을까요?”로 시작해서.. 뭐 그렇게 됐다.

3. 위로와 평안 찬송

모든 기독교 찬송가에는 찬양과 경배, 예수 그리스도, 사랑, 기쁨 등등등과 더불어 중후반부에 '위로와 평안'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여기에 속한 곡이 적지 않고 꽤 된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에 한 번꼴로 컨디션 조절 실패 때문에 외출 중 급ㄸ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질 때가 있었다.
그때 신속히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고 산출물을 원없이 흘러보낼 때...
농담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하늘 문이 열리고 세상이 다시 보이는 것 같았다. 땅에서는 새장 문이 열리고 하얀 비둘기들이 푸드득 파란 창공을 향해 날아가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머릿속에서 "펴어어어엉~~ 화아아아아아~~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가 자동 재생된다!! =_=;;;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는 거 실사판을 경험하게 되더라.

약간 다른 상황을 또 말하자면,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 받을 때 말이다.
기계가 드르르륵 키이이잉 쇳소리와 함께 내 잇몸 구석을 쑤시고 신경을 건드릴 때..
그땐 난 의도적으로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를 떠올린다.

이때는 자동 재생은 아니고 강제 재생을 한다.;;; ㅠㅠㅠㅠ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낫더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_-;;
찬송가라는 게, 굳이 가사 내용이 다 공감되지 않더라도, "제발 공감되게 나를 바꿔 다오"를 다짐하면서 부르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햐~ 저건 세월호 같은 사고로 가족을 다 잃은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지어진 찬송가인데.. 100년 이상 뒤에 태어난 어느 후대 사람은 그걸 치과 치료를 극복하는 용도로 써먹고 있구나~! ㅋㅋㅋㅋㅋ

내가 1번과 2번에서 너무 위대한 신앙의 선배 이야기를 하다가 3번에서 갑자기 병맛으로 컨셉을 바꾼 이유는..
예수쟁이의 신앙 생활은 홀리한 주일 따로, 세속적인 평일 따로가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심지어 화장실에서 X을 쌀 때라도(성경에 이런 직접적인 예시는 없지만 ㄲㄲㄲㄲㄲ) 무엇을 하건 하나님 영광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정말 어느 상황에서든 예수님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3번부터, 작은 것부터 생활화하고 그게 더 발전해야 나중에는 2번 같은 묵상과 1번 같은 행적도 나올 수 있다.

밥먹기 전, 자기 전, 점잖게 격식 차려서 기도할 때도 있지만 여호사밧 왕은 전쟁터에서 위험에 빠졌을 때 "으악!!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부르짖은 것조차도 일종의 긴급기도였다(대하 18:31). 그리고 그 기도는 응답됐다.

그게 살전 5:17에서 말하는 "끊김 없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의 의미일 것이다.
공부고 생업이고 다 때려치우고 CPU 사용량을 100% 기도 process에만 몰빵하라는 말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세상적인 일을 마치고 idle time이 됐을 때마다 언제든지 끊김 없이 예수님 생각하라는 뜻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감탄사도 말이다.
깜짝 놀랐을 때, 혹은 갑자기 안 좋은 상황이 닥쳤을 때.. "썅~ 젠장, X발"을 내뱉을 바에야 차라리 진지하게 "오 주여~"가 나와야 할 것이다.
주여 주여 장난으로 헛되이, 망령되이 입에 담지는 말아야겠지만, 필요할 때 진심으로 언급하는 건 오히려 바람직하고 권장된다고 하겠다.

이러면 보통은 감사와 찬송이 더 나오지, 무슨 한국인의 정서라는 서러움, 한맺힘 이런 감정은 어지간해서는 맺히지 않을 것이다. 아리랑 대신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 나올 것이다.

성령 충만한 바람직한 신앙생활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광신적인'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광신은 흔히 불신자나 개독안티들이 세상 매체에서 프레임 씌우는 그런 이상한 결과물이 나오는 광신이 절대 아닐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요즘 참교육을 너무 많이 봤나.
'여기에 모인 우리' 찬양을 부르다 보니 이 처자가 생각나더이다. 이 믿음 더욱....!!!! =_=;;;;;

Posted by 사무엘

2026/08/01 08:35 2026/08/01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54

형벌에 대해서

1. 자유형 집행할 돈과 공간이 없으면 딴 대안을 찾아야

요즘 우리나라는 교도소에서 죄수 수용할 공간이 없어서 난리이다. 한편으로 늘어나는 고령 노인 죄수들 때문에 교도소가 반쯤은 국립 무료 요양호텔로 전락해 있기도 하며, 또 더 잃을 게 없이 밥만 축내고 있는 사형수들은 제아무리 진상 부리고 깽판을 쳐도 교도관들이 어찌하질 못하는 등, 여러 문제가 많다.

사실, 징역/금고 같은 자유형 자체가 생각보다 최근에 등장한 현대적인 개념이다.
그 전, 전근대 시절의 감옥들은 판결이 날 때까지, 혹은 다른 진짜 형벌이 집행될 때까지만 죄수를 구금하는 '구치소'였을 뿐이다.
물론, 죄수를 가두고는 상부에서 죄수의 존재를 잊어버리는=_= 바람에 그 구금이 사실상 무기징역이 돼 버리는 경우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오늘날의 무기징역 확정 판결과 같은 급이 전혀 아니었다.

일정 기간 구금하는 것 자체를 형벌로 간주하는 건 옛날 행정으로는 집행하기 쉽지 않았다. 그 긴 기간 동안 죄수를 먹이고 재우고 관리하는 비용도 몽땅 다 세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도소의 과포화 문제가 심각한 지경이고 대한민국의 사법/법무부의 역량으로 이걸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면??

답은 간단하다.
자유형 대신 사형, 신체형, 재산형, 명예형의 비중을 늘려서 교도소 공간을 확보하는 수밖에. 내 말 틀렸냐?
"신상 비공개로 징역 10년 살래? 아니면 '차카게 살겠습니다' 광화문에서 조리돌림 한번 하고, 이 얼굴과 연락처 다 까발리고 사회에서 평생 고개를 못 들고 사는 대신에 교도소에서는 1년만 살래?" 딜을 제안하든지..

어떤 경우든 집행유예 남발이나 심지어 '교도소에 에어컨' 같은 더 흉악하고 사악한 해결책을 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난 극심한 저출산과 고령화 때문에 그렇잖아도 나라에서 잘 살던 시절에 내놓았던 의료· 복지 정책을 도저히 시행하지 못하는 때가 수십 년 안으로 들이닥칠 거라고 생각한다.
국민연금 고갈은 말할 것도 없고,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도 대폭 축소되거나 폐지될 것이다.

정상적인 일반 시민들 부양할 돈도 없는 지경인데 하물며 죄수들..??? 쟤들 언제까지 공짜로 먹이고 재워 줄까? 이래도 인권충들이 이길까, 아니면 뒤늦게라도 정의의 편이 이길까..?
난 지금 같은 교도소와 형벌 제도도 과연 언제까지 버틸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생각이다.

영어로 life가 생물학적인 생명이라는 뜻도 있고, 인생.. 삶이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잠 4:23 issues of life (생명의 근원, 인생의 문제)이나 약 4:14의 life가 중의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사형은 생명을 앗아가는 형벌이고, 종신형은 인생을 앗아가는 형벌이다. 단, life imprisonment는 종신형이니 life를 인생이라고 본 듯하다. 생명형을 가리키는 단어는 capital punishment라고 따로 있으니 말이다.

난 우리나라 특유의 "가해자 행세하는 피해자, 100을 피해 봤으면 이 기회에 500, 1000을 뜯어내서 신세 고치려는 짓거리" 정서를 매우 싫어한다고 예전에도 글을 썼었다.
그러나 살인에 사형을 요구하는 '생명에 생명'은 정말 정확하게 당한 만큼, 또는 오히려 그 이하를 요구하는 것일 뿐이다. 과잉보복이나 과잉보상이 절대로 추호도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 무슨 어딜 가나 머리가 되고 1등하고 복 받고 잘살고... 아이고, 그러기 전에 먼저 사회가 건강해져야 할 것이다. 경찰· 검찰이나 법원이나 교도소나 보험사가 할 일이 줄어들고, 접촉사고 하나에 아이고 뒷목 잡는 나일롱 환자 짓거리가 근절되고.. 그러면 병원이나 소방서나 군대, 사회복지사 등이 할 일도 덩달아 줄어들 것이다.

그게 정상인데 교회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자기 신자 1명 늘리는 동안 시험 들고 실족한 사람 5명과 개독안티 10명을 추가하는 식으로 움직이니 빛과 소금은커녕 사회로부터 지탄 받는 것이다.

2. 찬송가 가사와의 접점

그러고 보니 찬송가 가사에서 형벌이 아주 분명하게 언급되는 예가 딱 두 가지가 떠오른다.

먼저,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의 3절이던가 후반부.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가 있다.
Let goods and kindred go, this mortal life also; the body they may kill: God's truth abideth still; his kingdom is forever!

이건 대놓고 재산형, 명예형, 생명형에 너무 정확하게 대응하니... 앞서 형벌의 종류를 나열할 때 머리속에서 바로 떠올랐다.
저건 뒤집어 말하면 사람이 인생 살다가 박탈당할 수 있는 것,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을 분야별로 나열한 셈이다.

그리고 (2)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의 2절 전반부를 보자. "옥중에 매인 성도이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Our fathers, chained in prisons dark, Were still in heart and conscience free;
이건 신체형과 자유형을 가리킨다. 두 곡의 가사가 상호 보완적인 것 같다.

(1) 루터가 살던 1500년대 시절에는 현대적인 의미의 징역 자유형이라는 게 없었다. 그 시절에 사람이 종교 이단으로 몰려서 공권력에 의해 작살나는 방법은 전재산 몰수에 추방, 가족과 생이별, 목이 뎅겅 짤리거나 화형..이었다. 그 험악한 시대상이 가사에 간접적으로나마 담겼다.
그 반면 (2)는 1800년대 중반, 징역형이라는 게 서구권에서 도입된 뒤에 만들어졌다. 그래서 더 점잖게 옥에 갇혔다는 언급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주제별 성경 공부 시간 때 '마귀론'을 다룬 적이 있었다. (신론, 기독론, 교회론 등에 이어)
그때 맨 첫 시간에도 본인은 준비찬송으로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골랐었는데.. 이때는 끝부분이 아니라 앞부분의 가사 때문이었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 천하에 누가 당하랴 /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그야말로 마귀의 정체와 위력, 놈과 싸우는 방법 등.. 단순히 영적 전투를 넘어 마귀론에 관한 한 정말 최고의 찬송이었기 때문이다.

중간에는 "내 평생에 가는 길" (2절 “저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입 벌리고 달려와도 주 예수는 우리의 대장 되니 끝내 싸워서 이기겠네 ... 내 영혼 평안해”)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장수, 대장 소개를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 원수 마귀 모두 쫓겨가기는 예수 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 마귀 권세 감히 해치 못함”) 이걸 하고,
마지막 시간에 피날레로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영광 영광 할렐루야)”를 골랐었다.

3. 군대의 전역일과 교도소의 석방일

군대는 룰루랄라 집에 가는 만기 전역 당일도 법적으로 군복무 기간에 포함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당사자는 집에 가는 동안에도 법적으로는 여전히 군인 신분이다. 정확히는 휴가 나온 군인 내지, "전역 귀가"라는 마지막 명령을 수행하는 군인과 비슷한 신분이 된다.

그 날이 지난 자정부터 진짜 진정한 민간인으로 전환된다. 전역 신고하고 군부대 정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바로 민간인이 되는 게 절대 아니다.
그러니 너무 감격스러워서 밖으로 나가자마자 안쪽으로 쌍욕을 퍼붓는다거나 도 넘는 경거망동 일탈을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아직까지는 경찰이 아니라 헌병에게 잡혀가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말 원칙대로라면.. 혹은 전쟁· 사변 같은 급박한 상황이라면 그 날 일과까지 다 수행하고 나서 저녁에 귀가한다 해도 문제될 게 없다. 그건 너무한 조치이니 어지간해서는 당일 오전 중에 곧장 보내주는 것이다.

뭐, 진짜 급박한 상황이라면 전역이 통째로 연기돼서 그날 아예 집에 못 갈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군복무 기간이 통째로 연장될 수 있다.
지금 육군의 복무 기간인 1년 6개월은 진짜 법적인 기간이 아니라 "원래는 2년인데 그냥 편의상 6개월 깎아 주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병역법 제18조) 수틀리면 얼마든지 원래대로 되돌리고, 심지어 더 연장도 할 수 있다.

전역 당일 11시 59분 59초까지가 군인 신분인 것과 동급으로.. 입영 장정도 법적으로는, 원칙적으로는 보충대로 갓 입소하는 당일 0시 0분부터가 이미 군인 신분이다. 그것도 이병으로 말이다. 우리나라 군대에는 훈련병이라는 계급이 따로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간부는 양성 중에는 후보생이고 정식 임관을 한 뒤에야 군인인 반면, 병은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부터 곧바로 정식 군인이다. 징병제인 데다 병은 훈련소에서 짤릴 위험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이런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훈련소에 있을 때라도 극단적인 상황에서 전사· 순직이라도 하면 일병으로 추서된다.

요즘 우리나라는 군복무 기간 대비 병은 계급이 너무 많고 부사관은 계급이 너무 적은 편이다.
이등병을 그냥 훈련병으로 그대로 치환해 버리고, 훈련소를 수료하면 바로 일병부터 시작.. 이렇게 계급을 단순화시키는 게 가장 이질감 없고 현실적이지 않겠나 싶다.

갑자기 군대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이런 군대와 달리 교도소는 만기 출소일 0시 자정이 형기가 완전히 끝나는 시점이다. 이때부터는 저 사람은 수감자· 죄수가 아니라 일단 시민 신분이 된다. 단지, 전과자일 뿐인 거지.

그렇기 때문에 형기를 마친 죄수는 원래는 0시 새벽에 칼같이 석방 방면이 가능하다.
허나, 귀가 교통편이나 인근 주민들의 반응 같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실제로는 최소한 해가 뜨고 대중교통이 다니는 아침에 출소하게 된다. 물론 출소 준비는 전날 한참 전부터 시작되지만 말이다.
이런 차이가 있다.;;

예전에도 몇 번 말했듯이, 일부 나라들은 군인의 탈영은 처벌하는 반면, 죄수의 탈옥은 따로 처벌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군인이야 애초에 근무 중에 탈영은커녕 긴급피난조차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극한직업이며(경찰· 소방처럼), 모병제 국가라면 자기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이 직무를 저버려서는 더욱 안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죄수는 처지가 다르다.

죄수가 기회만 되면 최대한 탈출하고 싶어하는 건 인간의 기본 보편적인 욕망이고,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마치, 범죄자의 직계가족이 그의 도피를 도와준 건 도의적으로 형사처벌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탈옥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건 당연히 아니다. 탈옥 과정에서 교도소 시설을 파손하거나 교도관을 폭행하는 사이드이펙트...를 남겼다면 그건 여전히 처벌 대상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01 08:35 2026/07/01 08:35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47

하루는 교회에서 에스겔서 16장을 읽다가.. 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대사가 생각나서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6절, 명령어 Live를 “너는 살라”가 아니라 곧이곧대로 “살아라~~”라고 번역한 역본을 읽으니 ‘어 이거 무슨 애니 대사랑 비슷한데.. 뭐더라?’ 싶다가.. 출처를 곧 떠올린 것이다. 성경과 지브리 애니의 만남~!!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표현만 약간 비슷할 뿐, 저 말이 나온 상황과 맥락은 서로 완전히 다르고 접점이 거의 없다.
성경에서 “살아라”라고 말하는 상황은 애니에서처럼 니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남주 ‘아시타카’가 간지나게 일깨워 주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부모로부터 버려진 여주 ‘산’을 갓난아기 때 거둬들이고 키워 준 들개의 신 ‘모로’가 했을 법한 말이다.

그 뒤로도.. 성경이 말하는 건 그렇게 불우한 처지였던 네년을 먹이고 어르고 달래면서 키워 줬더니 음행이나 저지르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적 상태가 딱 그 여자와 같다는 식의 얘기 일색이다.
모노노케 히메하고는 1도 관계 없는 흐름으로 간다. 지브리 애니는 자연 파괴가 어떻고 재앙신, 사슴신이 어떻고 하는 세계관일 뿐, 우상숭배니 음행이니 따위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니까.

버려진 여아를 제3자가 거둬들여 키웠다는 맨 앞의 초창기 설정, 그리고 그놈의 “살아라” 대사 때문에 의식이 잠시 이쪽으로 흘렀다~!

이렇게 하나님과 애증(?)의 관계로 묘사되는 이스라엘 백성, 일명 유대인 말이다.
저 사람들은 저래 뵈어도 성경이 역사적으로 문자적으로 사실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걸 물증에 가까운 수준으로 입증하고 있는 민족이다. 예수를 배척하고 안 믿었으면서 정작 하나님과는 저런 관계인 게 참 특이하다.

쟤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타 민족들 대비 특혜와 보호 버프를 더 받았고, 그 대신에 죄 짓고 타락할 때 위약금 명목의 징벌도 더 빡세게 받았던 민족이다. 딱 그런 관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하나 더.. 쟤들은 비록 혹독한 징벌을 받더라도, 어떤 경우에도 민족 정체성을 잃고 완전히 멸망해 버리지는 않는다는 거.. 이거 하나는 보장됐다. 그건 하나님 차원에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성경에 언뜻 보기에 신약 크리스천의 교리 행실과 별 관련 없어 보이는 뜬구름 잡는 구약 예언의 비중이 왜 이리 큰지?
그 예언들이 다들 심판 일색에 부정적이고 절망적이고 암울해 보이지만, 최종 결말은 왜 한결같이 "회복"인지를 생각해 보시라!
일반적인 크리스천은 저 나라, 민족에 대해서 이렇게 인식하고 처신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겠다.

1. 현 세속 국가 이스라엘은 성경의 예언을 다 이룬 게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대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됐으니,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예수님 다시 오실 거임" 이러는 '반쯤' 시한부 종말론스러운 이야기를 들어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난 그 사건에다가 성경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적용을 해도 되는지.. 성경 본문에서 그 세대라는 단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세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지.. 그건 좀 조심스럽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 극단으로 가서 저 세속 국가 이스라엘은 성경의 유대인과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도 명백히 오류일 것이다.
그럼 거슬러 올라가서 나치와 히틀러는 유대인을 미워하고 죽인 게 아니었나? 진짜 유대인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혼자 뻘짓 한 거냐? 이스라엘의 사관학교 생도들은 유대인도 아니면서 맨날 맛사다 요새를 잊지 말자고 생쑈 하냐..?? 그건 그것대로 여러 모순과 문제점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2. "저것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인 저주받을 종자들이다~"

....;; 이건 진짜 최악의 멍청한 발상이니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말지어다! 심지어 옛날의 걸출한 개신교 종교개혁자 중에도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미안하지만 명백한 오류이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지 않았으면 비유대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리지 못했다. 어디 너님의 죄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기여한 게 없는 줄 아냐??? 이 주제에 관한 한은 '양비론'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성립한다고 봐야 한다.

3. 막연한 반유대주의 선동에는 가담하지 않는 게 옳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간 과정은 마치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처럼 혼란한 와중에 현실적인 이유나 강대국들의 농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혈이 발생한 것도 적지 않다.
언론에서는 이스라엘군이 민간인 학살하는 것만 보도하지만 실제로는 적들도 민간인 위장 총질 같은 비열한 짓을 많이 했다. 이런 건 한쪽 편 말만 듣고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또한, 쟤들이 쏘는 로켓 대비 그걸 요격하는 이스라엘 측의 방어 시스템은 유지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든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생존을 위해서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중동의 왈가닥 미친개처럼 처신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비록 쟤들은 신약 성경이나 예수 이런 것에 호의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슬림 광신도처럼 히잡이나 "알라후 아크바르!" 같은 짓거리를 벌이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은 나름 친서방 자유 진영에 속하면서 6 25 때 저 멀리 대한민국을 도와줬었고, 연평도 포격 때 북괴 규탄도 제일 강력하게 했었다.

4. 그렇다고 쟤들이 정말 선 넘고 범죄 저지르고 깽판 치는 것까지.. 무작정 다 옹호할 필요는 없다

두 말하면 잔소리다.
가령, 예수상 훼손과 조롱 인증샷.. 이거는 진짜 정신나간 짓이던데?? (개인적으로 물론 예수상 별로 안 좋아하는 소신이지만 이와 별개로) 괜히 총리까지 나서서 사과하고 수습한 게 아니더라.

5.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심판의 도구를 그리스도인이 "자처"하지는 말아야 한다

너 말고도 이스라엘 싫어하고 가혹하게 대해 줄 사람은 주변에 넘쳐나니까 너는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마라.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남았냐, 걔네들을 심판자 명목으로 침략하고 학살했던 주변 민족이 살아남았냐?
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다른 정상적인 소명 부르심에나 응답하고 따르시길 바란다. 육신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들어라.

6. 교회는 이스라엘이 아니다

매우 중요한 사항이니 밑줄 치시라. 교회는 교회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다. 서로 신분과 처지가 다른 집단이다.
로마서 9~11장을 읽어보아라.
막~ "유대인들이 예수를 거부하는 바람에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쟤들과는 완전히 손절이다" 뉘앙스가 절대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못 알아보고 그 일시적으로 눈먼 것까지도 하나님이 다른 기회로 활용해서 이방인 교회 시대 경륜을 열었다"로 딱 요약되지 않는가?

오히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생긴 기회가 이 정도인데, 하물며 걔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으면 세상이 얼마나 더 살기 좋아졌겠냐" 이런다. 유대인을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 정도로 본다.
이게 어딜 봐서 유대인이 교회로 대체됐다는 의미이겠는가? 유대인이 구원받고 개종하면 그냥 유대인 크리스천 교회 성도가 될 뿐이다. 우리는 돼지고기도 못 먹는 유대인이 아니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감사하면 된다.

아 물론 본인도.. 이 2000년대가 다 돼서 유대인들 혈통과 지파는 어떻게 다시 따질 것이며, 저 완강한 인간들이 도대체 언제 짠~ 예수님을 다시 알아보고 설마 민족적으로 회개하고 회복되겠는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디테일"을 생각하면 잘 이해가 안 되고 믿어지지 않는 건 있다.
그러나 유대인과 교회를 구분하면 뭐 세대주의가 어떻고 시한부 종말론이 어떻고 프레임 씌우는 건 논점 일탈이어 보인다. 뭐든 성경이 말하는 대로 최대한 그대로 믿어야 하지 않느냐 말이다.

이상이다.
우리나라 국군이 북괴의 무력 도발에 대해 처음부터 이스라엘처럼 대처했다면.. 아마 진작에 북한으로 전투기고 공작원이고 잔뜩 보내서 핵 시설 같은 건 바로 폭격했을 것이고, 연평해전?? 천안함?? 그냥 몇 배로 보복했지 싶다.
물론 그만큼 젊은이들 군생활은 더 빡세졌겠지만, 이렇게 처음에 짧고 굵게 기선제압을 확실하게 해 놓는 게 나라의 미래 관점에서는 차라리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 여담: 아시리아와 바빌론

그러고 보니 유대인들의 옛날 역사와 관련하여 인상적인 게 하나 있다.
옛날, 기원전 600~500년 무렵에 있었던 신바빌론, 일명 칼데아 왕국은 남유다 왕국을 멸망시키는 용도로 정말 잠깐 왕성했다가 신기루처럼 싹 사라져 버린 정말 특이한 나라이다.
100년도 채 유지되지 못하고 망했다는 점에서 원나라와 비슷한 것 같다. 그 전의 아시리아, 그 후의 페르시아에 비해 존재감이 없으며, 세계사에서는 별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사실, 바빌론 자체가 처음에는 아시리아의 관할에 있는 나와바리 중 하나에 불과했는데 갑자기 세력이 커져서 주종 관계가 바뀐 거라고 한다.
심지어 아시아라는 대륙 이름이 바로 아시리아 - 앗수르에서 유래된 거라고 하네.. 참고로 아시리아는 시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이니 혼동하지 말자.;;;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사항이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북왕국을 멸망시켰으며, 바빌론이 등장하기 전까지 주변의 모든 나라들을 접수했었다. 그러나 딱 하나 남왕국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했었다. (히스기야 왕 시절을 생각해 볼 것) 그리고 아시리아 이후의 바빌론이 남왕국을 접수한 것이다.

그 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 포로로 끌려가 있던 그 기원전 5xx년 기간 동안 인도에서 불교, 중국에서 유교가 태동하고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활동했었다. 동양에도 나름 그리스 철학자들 뺨치는 인문학 르네상스 같은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건 절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신바빌론은 여러 모로 신기한 나라였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22 08:35 2026/06/22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45

성경의 사무엘상 17장에는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배틀이 기록되어 있다.

골리앗은 성경에서 챔피언이라고 기록돼 있다는 것,
하지만 성경은 골리앗에 대해서 이름을 거의 언급하지 않으면서 대부분 ‘그 블레셋(필리스틴) 사람’이라고만 지칭한다는 것,
다윗은 초탄 원샷만으로 골리앗을 무조건 바로 제압하지 못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텐데 그래도 조약돌을 5개나 챙겨 갔다는 것 등..
여러 이슈들을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이미 다뤘었다.

그런데 같은 본문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이번에는 군사 디테일이 눈에 더 많이 들어온다. 본인이 근래에 밀리터리나 전쟁사 쪽으로 관심을 많이 보여서 그리 된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그쪽으로 떠오른 의식의 흐름을 논하도록 하겠다. 군사 이야기, 성경 번역 이슈 등..

1. 저격

한반도로 치면 아직 고조선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옛날이니까 저렇게 참 낭만적으로 싸우는 게 가능했다. 오늘날의 전장에서 골리앗이 매일 성큼성큼 나와서 “니놈들도 장수 한 명을 대표로 보내서 나랑 1:1 PvP 뜨자 으하하하하하!!!” 도발하고 있었다면?
저 멀리서 특전사 저격수가 숨어서 저격소총으로 골리앗의 마빡에다 바람구멍을 뚫었을 것이다. 무거운 갑옷 입고 있으면 뭐하나. 골리앗은 아마 남북전쟁 존 세지윅 장군과 비슷한 방식으로 전사했을 것이다.

옛날이니까 일당백이 가능했고 1:1 PvP만으로 전투의 승패를 결정해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저 때는 아예 왕이 군대 총대장의 역할까지 겸하면서 전쟁터에 직접 나가서 싸우곤 했다.
(요즘 용어로 치면 사울은 군령권 담당이고 아브넬은 군정권 담당인 건지?)

2. 참호 trench

성경을 보니 이스라엘군 진영, 정확히는 사울 왕이 있는 곳이 trench라고 묘사돼 있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삼상 17:20) 정확히는 킹 제임스만 그렇다.
그래서 킹을 번역한 성경들에서는 ‘참호’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현대인들이 이 구절을 보면 1차 세계대전의 서부 전선 참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엥? 기관총 따위 없고 현대전 같은 엄폐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에 이 사람들이 땅 파서 참호/진지/벙커 같은 걸 만들었나?

나중에 엘리야가 제단 주변에 도랑 파서 물 흐를 길을 만들었다고 할 때도 trench가 쓰였다(왕상 18:32). 그러니 trench는 명백하게 주변보다 낮은 지형을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눅 19:43을 보면 비킹들은 공성전을 치르기 위해 바리케이트 치거나 토성 쌓거나 투석 병기를 설치하는 걸 묘사하는데, 킹은 여기서도 주변 땅을 파는 전술이 묘사된다. 신기하지 않은가? (참고로 로마 제국이 맛사다 요새를 함락시킨 방식은 잘 알다시피 지하가 아니라 토성 + 투석기 같은 지상 공략이었음)

심지어 구약에서 킹과 비킹이 차이가 나는 대표적인 구절인 창 49:6도 킹은 “벽을 파내려갔다”이고 비킹은 “소의 힘줄을 끊었다”이다. 이 정도면 킹은 뭔가 땅 판다는 표현을 작정하고 더 선호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다른 구절에서는 ‘기뻐하다’를 더 선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분의 뜻대로 vs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나야 히브리어 헬라어를 논할 짬은 안 되니, 그냥 이 상황만 설명해 보자면 말이다.
사울 왕이 있는 곳이 지리적으로 낮아서가 아니라 영적 상태/수준이 왕창 낮아서 단순히 진지 진영이나 텐트 대신, 참호라는 단어를 쓴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여기서 낮다는 건 무슨 겸손한 낮은 마음 같은 긍정적인 뉘앙스가 전혀 아니고 부정적인 뜻이다.
일례로, 아까 삼상 17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그야말로 나라를 구한 순간에도.. 사울은 자기를 음악 치료까지 해 줬던 다윗이 누군지 전혀 못 알아보는 중증 안면 인식 장애를 앓고 있지 않던가?

나중에 삼상 26:7에서 사울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수색 작전을 펼치던 중에도 참호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다고 묘사된다.
이때 사울은 적과 싸우는 것도 아니었는데.. 간단히 천막 치고 쉬었겠지, 설마 정식으로 진지 구축하고 참호를 파지는 않았을 것이다. 쉽게 말해 국군이 탈영병을 잡는 데 무슨 무장공비 소탕 작전 같은 전술을 펼치겠느냐 말이다. 뭐, 정말 흉포한 무장 탈영병이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성경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다”라는 표현이 쓰였듯이, 또 요나가 배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잠을 퍼질러 잔 게 단순히 요나의 물리적인 위치만 내려가는 게 아니었듯이..
성경은 동일한 심상으로 사울이 머무른 곳을 참호라고 표현한 게 아니었나 싶다! 지리적인 저지대가 아닌 다른 저지대라는 것이다.

3. 목을 베어 죽인다 vs 죽이고 목을 벤다

아이고 참호 얘기가 왕창 길어졌는데..
골리앗은 다윗에게서 미간에 조약돌을 맞고는 그때 그저 기절이 아니라 완전히 절명한 것이 틀림없다.

급소를 잘 맞히면 일반인도 무릿매로 돌 던져서 사람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그러니 그것 자체는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불신자라도 선뜻 인정한다.
허나, 총알 탄두도 아니고 그 큰 돌을 사람 면상에 완전히 박아 버릴 수는 없다(삼상 17:49).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초자연적인 현상인 것 같다.

50절을 보면 “죽였는데 다윗에게는 칼은 없었다”라고 돼 있고, 그 다음 51절은 다윗이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이다. 즉, 칼로 골리앗의 목을 벤 건 그냥 확인사살용이다. 수급을 얻기 위한 시체 훼손이나 다름없다.

이걸 보니 행 5:30이 떠오르더라. 보통은 “나무에 매달아 죽인”이라고 돼 있는데.. 영어로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죽이고(죽여서) 나무에 매단 slew and hanged”이다.
시간상으로는 예수님은 당연히 십자가에 매달렸다가 나중에 죽으셨으니, 일각에서는 저건 킹의 오역이라고까지 주장하는데..

그런 식이면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내어놓고 절명하신 거지, 애초에 인간의 완력으로 살해 자체를 당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인간에게 돌에 맞거나 칼에 찔리거나 목을 뎅겅 하는 식으로 처형 당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예수님을 안 죽인 것도 아니다.

“바라바를 살려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이렇게 요구를 한 것 자체가 slew의 범주에 든다고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우리 인간들 언어에는 애초에 “문 닫고 나가!!”라는 모순? 유도리까지 존재하지 않느냐 말이다. ㅋㅋ

4. shield와 target

영어 성경에는 방패를 뜻하는 단어로 shield와 target 두 종류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등장하는 믿음의 방패는 shield (엡 6:16)인 걸 보니, 둘 중에 더 일반적인 단어는 역시 shield인 것 같다.

사무엘상 17장으로 돌아가서 골리앗의 무장을 보면, 주 방어구인 커다란 방패는 shield라고 돼 있다. 이건 워낙 크고 무거워서 부사수가 따로 들고 다녔을 정도였다(삼상 17:7).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골리앗은 상체에 보조 방어구 명목으로 target이라는 작은 방패도 차고 있었다(삼상 17:6).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윗과 골리앗은 성경에서 너무 유명한 소재이니 관련 삽화가 넘쳐난다. 하지만 저 두 종류의 방패까지 그대로 묘사한 그림은 매우 드물다.
target은 말 그대로 dart 과녁판 같은 느낌이 들고 왠지 동그랗게 생겼을 것 같다.

그런데 이건 의외로 역본들 간에 번역이 일치하지 않는다.
(1) 킹 제임스만이 삼상 17:6이 target 방패, 보조 방어구였다고 말하고 비킹들은 이 구절이 그냥 javelin.. 던지는 작은 투창이라고 표현한다.

즉, 비킹은 이걸 보조 방어구가 아니라 보조 무기라고 본 것이다. 손에 들고서 찌르는 용도로 쓰는 큰 창은 spear이고, 요런 투창은 또 따로 있었던 듯하다.
다만, 5절과 6절은 모두 투구와 갑옷, 금속 각반(정강이가리개)과 함께 계속 방어구를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 어깨에도 공격 무기보다는 킹처럼 방패 같은 방어구 얘기가 나오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2) 다음으로.. 킹의 번역에 따르면 이 구절에서는 shield가 큰 방패이고 target은 더 작은 방패이다.
그러나 왕상 10:16-17에서 솔로몬 왕이 만든 방패 얘기가 나올 때는 관계가 정반대이다. target이 큰 방패이고, 다음 shield가 작은 방패이다. 같은 킹에서도 의외로 이런 용례 차이가 존재한다.

5. 무용담

끝으로.. 다윗과 골리앗은 원수지간이지만 다윗과 요나단은 그 정반대이다. 요나단의 우정은 너무너무 훈훈하고 아름답고 눈물이 핑 돌 것 같다.

요나단도 나름 신라의 관창 같은 면모가 있었으며, 심지어 그러고도 살아서 돌아왔다. 요나단은 다윗보다 연장자인 데다 심지어 왕자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시절에 다윗에게 아마 이런 식으로 말을 했지 싶다.

“이야~ 나도 정말 다혈질이어서 바로 얼마 전에도 객기 부린 적 있어. 우리 아버지의 명령 없이 혼자 무단으로 내 부사수만 데리고 블레셋 진지로 그냥 쳐들어갔지. 그래서 블레셋(필리스틴) 놈들 20명 정도 목을 따고 돌아왔거든? (삼상 14)

그랬는데도 저 괴물 골리앗은 도저히 상대할 엄두가 안 나던데.. 너는 어떻게 그놈 앞에서도 무섭지가 않았니? 그 순간에도 오로지 하나님만 생각한 거야?
다윗, 넌 나보다도 더 또라이 같고 진정한 GOAT다. 내가 리스펙한다!! 나한텐 다나까 안 써도 되니 앞으로 편하게 말 놓아라~! 너랑 나 사이엔 뭐 금수저 흙수저니 출신 계층은 일절 따지기 없기야? 알았지?”

애비인 사울 왕은 권력에 집착하면서 다윗을 시샘하고 갈수록 흑화해 갔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자기 대신 차기 왕위를 빼앗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다윗을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 같은 우정으로 챙겨 줬다.

Posted by 사무엘

2026/05/05 08:35 2026/05/05 08:35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34

1. 레위기: 판별법

성경의 레위기에는 구약 제물들의 종류, 신체의 부정(불결) 판정 기준, 나병(문둥병) 판정 기준 등 율법의 여러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리의 굽이 갈라졌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동물은 부정하다", "비늘 지느러미가 달린 통상적인 물고기가 아닌 수중 동물은 부정하다~~" 펠리컨은 어떻고 대머리독수리가 어떻고 등등등... 얘는 먹을 수 있고 저런 건 먹어서는 안 된다는 판정도 많다.

이 부분을 읽으니 개인적으로는 쓰레기 배출 기준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귤 껍질은 음쓰이고 바나나 껍질도 음쓰인데, 파뿌리는 뭐 어찌어찌 하지 않으므로 일쓰이다.
플라스틱은 딱딱하고 형태가 있지만 뭐가 묻은 건 재활용 불가능한 일쓰이다. 그렇지 않은 건 재활용 쓰레기..ㄲㄲㄲㄲㄲㄲㄲ

이렇듯, 옛날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랐지만, 현대인들은 버릴 때.. 재활용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걸 가른다고나 할까..?? 양상이 비슷해 보인다.

대한민국은 쓰레기 분리 배출을 세계적으로 정말 엄격하고 빡세게 하는 나라이다. 페트병을 내용물을 싹 씻고 라벨까지 일일이 떼서 배출하는 나라가 여기 말고 또 있을까.;; 쓰레기 봉투를 일일이 검사해서는 귤껍질을 일쓰에다 버렸다고 과태료를 때리는 나라가 또 있을까?

물론 이건 우리나라가 땅이 매우 좁고 쓰레기를 무작정 매립 소각만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이 반영된 결과이다. 이런 절박함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쓰레기의 재활용 효율이 높으며, 관련 기술이 굉장히 발달했고 인프라도 잘 갖춰졌음이 사실이다. 얼마 전에 의성에 쌓여 있던 쓰레기산이 순식간에 싹 없어진 것도 생각해 보면 놀랍기 그지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음쓰와 일쓰의 경계에 있는 애매한 쓰레기에 대해서는 좀 유도리가 있었으면 좋겠고, 좀 더 명확하고 일관된 구분 기준이 갖춰져야 할 것이다.
플라스틱의 경우도.. 힘들게 분리배출 해 봤자 재활용이 제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며? 업체들이 수거해 가서는 도로 뒤섞는다는데.. 그래 놓고는 쓰레기 뒤처리를 소비자한테 전가하는 짓거리는 좀 멈췄으면 좋겠다.

2. 민수기: 밥 투정

민수기 11:5를 보면 말이다. 이집트를 떠나서 광야 생활 중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단으로 크게 불평과 투정을 늘어놓는다.
맨날 천날 보급 전투식량인 M-레이숀(manna)만 먹으니 맛없어 죽겠다고 징징대고, 반대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에 뭘 얼마나 잘 얻어먹었었는지 추억 보정을 막 해댔다.

(1) 먼저 생선: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얘가 아무래도 소· 돼지· 양 같은 육상 동물 고기보다는 더 저렴했을 것이다.
(2) 오이와 참외(멜론): '박'과 식물이다.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이 아니라 열매 맺히는 덩굴채소라는 공통점이 있다.
막 비싸고 희귀하고 맛있는 식재료라기보다는 가성비 좋은 서민형 과채류가 아니었을지? 저 시절 저 때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쭈글쭈글 큼직한 호박 같은 것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3) 부추와 (양)파와 마늘: 요게 핵심인 것 같다. 이것들은 자극적인 맛이 나는 향신료 조미료 용도이다. 얘들은 심지어 불교에서 말하는 오신채에도 모두 포함돼 있다!

종합하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서 그렇게 아주 거창하고 대단하게 잘 먹은 것도 아니었던 주제에 괜히 식재료 타령을 늘어놓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쟤들이 이집트에서 무슨 초호화 열대과일을 먹었겠는가? 생선이라고 하니 무슨 감성돔이나 가을 방어, 혼마구로라도 뜯었겠는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람이 인생에서 먹는 즐거움도 절대 무시 못 할 경험이니 M-레이숀이 너무 질린다는 생각 자체는 누구든지 들 수 있다.
허나,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간구를 정당한 절차대로 했어야 했다. 성경에는 슬로브핫의 딸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모세에게 이것저것 건의나 이의 제기를 하는 게 나오며, 이에 대한 주 하나님의 피드백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조건 닥치고 까라면 까'가 아니었다.

단지, "에구에구 나 죽네~~ 난 그냥 이집트로 돌아갈래~~ 이 빌어먹을 광야 생활 때려칠 거야!" 식으로 반역에 가까운 불평을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이건 애가 부모한테 "왜 이런 망할 집구석에서 날 태어나게 만들었어?" 이렇게 대드는 급이나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민수기 11장을 읽어보면 이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호소한 게 아니었다. 일부 불순분자들이 꼬드기고 선동하고 물 흐리면서 불평 불만이 터진 거라고 나온다.
그러니, 쟤들은 밥을 돼지갈비 소갈비로 먹었다 하더라도 그러면 또 다른 걸 갖고 얼마든지 불평 불만 X랄을 떨었을 가능성이 99.9%라는 것이다. M-레이숀 일괄 급식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3. 신명기: 특별 담화

신명기 내용은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모세 령도자가 퇴임 회고 연설을 하는 것 같다!! 맥아더 장군이 퇴역 연설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여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 입성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이런이런 성읍들을 정복했고 바산 왕 옥도 처치했었습니다. 놈은 침대의 길이만 소형 승용차 길이와 맞먹는 4.5미터에 달했었습니다.
(...) 그러나 우리는 그 과정에서 이런이런 비극도 겪었고 이런 부끄러운 흑역사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 여러분의 하나님을 여러분의 온 역량을 다해 사랑하십시오.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십시오. 그 길만이 살 길입니다."

"노병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단지 사라질 뿐이지요." 대신에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꼭 명심하십시오." (신 8:3)가 있는 셈이다.

신명기 원고가 라이브로 낭독 중계됐던 날은 "최고 령도자님의 특별 담화 방송" 명목으로 모든 사람들이 자기 텐트에서 텔레비전 켜 놓고 채널 고정했을 것이다.

아니면 무슨 대한뉴스 같은 프로파간다 뉴스 영화가 단체 상영됐을 것 같다. 스타크래프트에서 테란 캠페인을 다 마치면 나오던 뉴스 영화 동영상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트로는 이런 식으로 뽀대나게 나오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가 힛 족속 여부스 족속, 누구누구들 다 쳐부쉈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그래픽까지 동원해서 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도 불평하다가 벌받아 죽었을 대, 금송아지 만들어서 누구 몰살 당한 장면은 이런 식으로 녹화 영상 보여주고..

뭐 그렇다.
모세오경에서 마르고 닳도록 반복되어 나오는 말이 바로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펼치신 팔로 니들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다(해방시켰다)"이다.

우리 민족의 경우 일제가 무려 원자폭탄을 두 방이나 쳐맞은 덕분에 패망하고 그래서 해방됐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어지간한 태풍이나 지진,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만 돼도 그 위력은 TNT 몇만~수십만 톤급인 인간의 핵무기 몇 방으로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하물며 육중한 홍해 바닷물을 그 엄청난 시간 동안 양쪽으로 붙들기 위해 필요한 힘.. 내지 댐의 건설 비용은 얼마나 될까? 이게 바로 '강한 손과 펼치신 팔'의 의미이다.

그리고 성경은 이집트로부터 해방됐다고, 한 작은 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혹은 구원받았다고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책이다.
세상의 게임이나 영화, 문학에서는 주인공이 빌런을 해치우고 공주님을 구출하는 걸로 끝이다. 결혼하는 걸로 끝이고, 나치 독일이나 일본 제국이나 북괴 김 돼지를 없애는 걸로 끝이다.
그러나 그 뒤 주인공이 공주님과 평생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가? 탈북자는 대한민국 땅에 와서 잘 정착하고 살고 있는가? 구원받은 영적 아기는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잘 자라고 있는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끄집어낸 이유 역시 그 뒤의 big picture가 있기 때문이다. 성막을 만들고, 매주 꼬박꼬박 안식일 지키라고, 수많은 가축을 잡으면서 저 다양한 희생제물들을 바치면서 하나님께 경배 드리라고, 주변의 이방 민족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특이한 민족 행세를 하며 살라고 끄집어낸 것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다. 인생이라는 장기전 마라톤을 다루는 책이다.
구원받고 나서 그 뒤의 삶이 중요하고, 이집트에서 나온 뒤의 삶이 중요하고, 여자와 결혼에 성공하고 그 뒤의 삶이 중요한 그런 책이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기 12~14장 유월절과 홍해 사건 이후의 모세오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 보너스

뭐, 모세오경보다는 한참 뒤의 일이지만,
사무엘상 5장 당시에.. 블레셋(필리스티아)의 다곤 신전 안에 CCTV가 있었다면 밤새 뭐가 녹화돼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이건 아마 심야괴담회의 소재도 될 수 있지 않겠냐?
블레셋의 신전 관리인이 얼굴 흐리게 처리하고 출연해서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CCTV 녹화 영상에는 제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주변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다곤 신이 저절로 자빠지고 엎어지고 팔다리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이럴 텐데 말이다.

그리고 다음 6장의 '블레셋 식 언약궤 귀환 차량'은 비록 내연기관이 아니라 소이긴 하지만 자율주행 기술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가?
새끼를 갓 출산해서 젖이 나오는 암소가 지 새끼들을 버려두고 뭐에 홀린 듯이 똑바로 방향을 잡고 어디론가 유도를 받아서 간다니 이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아~ 성경 읽는데 자동차, 드론, 용형, 심야괴담회 같은 마구니들이 마구마구 떠오르니 매우 재미있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26/02/25 08:35 2026/02/25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27

1. '님'을 붙일 것인가

대한민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관례적으로 ‘예수’라고 안 하고 꼭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예: 기도를 끝낼 때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마 불자들은 비슷한 논리로 ‘부처’ 대신에 ‘부처님’이라고 하지 싶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렇게 접사 ‘님’이 붙지 않은 경우가 있다. 특히 개역, 한킹 같은 옛날 20세기 성경 말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예수 따라가며”,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인하여” 등 가끔은 이 접미사가 생략된 게 있다.

난 옛날에, 지금보다 권위주의 유교 사상이 더 강했을 옛날에 성경 및 찬송가 번역자가 예의를 모르고 싸가지가 없어서 ‘님’을 생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께서’를 붙인 것만으로도 높임의 의미가 들어갔다고 본 거겠지.
“예수께서 가라사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되”보다 훨씬 더 간결하고 운율 잘 맞고 매끄럽게 읽힌다.

이제 와서 익숙한 찬송가 가사의 강박/약박 내용어/기능어 배치와 운율까지 깨뜨리면서 억지로 ‘님’을 첨가해서 수정하는 것에도 개인적으론 반대 소신이다. ‘님’이 그렇게까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암튼 그건 그런데..

그래서 요즘 나오는 성경 역본들은 본문에도 ‘님’이 추가되는 추세이다. 다만, 번역 방침이 그렇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는 ‘님’을 넣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다.

(1) ‘그분’이 아니라 ‘이름’ 자체만을 가리키는 경우: 수태고지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 십자가 명패 “이 자는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 예수라는 이름 앞에 모두 무릎을..

(2) 적대진영의 대사: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들어 봤는데.. 네놈은 도대체 뭐임?” (사도행전 19장 그 유명한..)
저거는 부정한 악령의 말이다. ‘예수님’ 이렇게 해 놓으니 꽤 어색하다.

(3) ‘여호수아’의 헬라 표기인 예수. 행 7:45, 히 4:8
이거는 킹 제임스 기반 역본들에만 존재하는 특징인데.. 님 붙일 필요가 전~~혀 없다. 특히 후자 히브리서는 진짜 예수님과 달리 안식을 못 줬다는 문맥이다!
근데 모 민간 군소번역 중에는 이것도 예수님이라고 옮긴 사례가 있더라.

그러니 ‘님’을 안 붙여도 상관없고, 붙일 거면 제대로 봐 가면서 붙여야 된다는 것이다.
마치 아예 한글로만 써 놓으면 상관없는데, 한자를 병기했는데 틀려 버리면 병기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효과가 날 수 있다.. 이런 것이다.

아, 하나 더. 가나의 혼인 잔치 요 2:5의 경우, 예수님을 높이는 스타일로 번역하면 “그분께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라고 마리아도 예수님을 높여서 번역하는 편이고..
좀 인본주의적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거론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저 사람이 시키는 대로”라고 번역하는 편이다. 한국어는 이런 것도 갈린다.

2. 맞춰/맞혀

신 19:5는 산에서 벌목 중에 도끼를 잘못 놀리는 바람에 옆의 사람을 사고로 죽였을 때... 즉 과실치사와 도피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부분을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우리말 성경들은 "도끼가 자루에서 쓰윽 빠져나가 이웃을 맞춰서 죽게 하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더라. 오리지날 개역성경 이래로 개역개정, 그리고 킹 제임스 계열인 한킹과 흠정역, 표준역까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이건 도끼가 다른 사람 머리를 명중한.. 다시 말해 투사체가 목표물에 닿은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맞춰서'가 아니라 '맞혀서'가 돼야 한다. 발음은 동일할지라도 말이다.

'맞추다'와 '맞히다'는 “내가 문제를 얼마나 맞혔는지 확인하려고 답안지를 정답지와 맞춰 봤다(대조)”, “총은 영점을 잘 맞춰(세팅) 놔야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수 있다” 이런 관계이다.
다시 말해 맞추는 건 맞히기 위한 준비나 풀이 과정에 가깝다. 아니면 맞혔는지 여부를 확인해 보는 절차랄까? 비슷한 상황에서 쓰이니 헷갈리기 쉽지만, 동일한 표현은 분명 아닌 셈이다.

개역성경이야 워낙 오래됐으니 그렇다 치지만 그게 개역개정이 나올 때도.. 한킹이나 흠정역이 여러 번 교열되고 심지어 표준역이 나올 때도 이 구절은 바뀐 적이 없었다는 게 참 신기하다. 그만큼 사람들이 '맞춰'와 '맞혀'의 차이에 대해 둔감한 건지도 모르겠다. 마치 '부딪치다'와 '부딪히다'처럼 말이다.

3. 듣기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해야

본인의 오래된 지론인데 말이다.
성경은 가능한 한 동음이의어가 없게, 낭독만 들어도 알아듣는 데 99% 이상 지장이 없게,
텍스트는 한자나 아라비아 숫자 같은 타 문자의 보조 없이 한글(+ 공백, 문장부호)을 쭉 늘어쓴 것만으로도 독해하는 데 지장이 없게 번역해야 하지 않나 싶다.

가령, 사자는 그냥 lion을 나타낼 때만 쓰고, 메신저를 뜻하는 사자는 '전령' 같은 다른 말로 바꿔야 할 듯하다.
'악의'는 아기와 발음이 겹치기 때문에 '악의적' 또는 다른 유의어로 바꾸는 게 더 좋게 들린다.

그리고 '네'는 같은 문맥에서 '너의'도 되고 숫자 4도 될 수 있어서 매우 심각한 모호성이 존재하는 관형어이다. 한국어의 구조 차원의 에러, 버그, 결함이 아닐지? 안 그래도 '내'와 '네'조차 발음 구분이 안 되는 지경인데.
'내/네'는 my라는 뜻으로 굳히고, thy는 '너의'라고 풀어 써 주는 게 현실적으로 덜 어색하고 제일 자연스럽겠다.

아울러 첫날/천 날은 일천 날, 첫째 날 정도로 구분해 주고,
낫게/낮게 → 나은 걸로, 낮은 걸로.. 풀어 줘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건 한자로 해결 가능한 동음이의어도 아니다!

flying → 활용형이 그냥 '나는'이 돼 버려서 이것도 체언과 분간이 안 되고 말이 굉장히 보기 안 좋다.
'비행하는'으로 완전히 대체 가능한 것도 아니고 '날으는'을 허용하든지 뭐 어찌 대책이 나와야 할 것 같다. 심지어 '날으는'조차도 '나르는'과도 구분이 안 되어 완벽한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우리말은 한글 특유의 모아쓰기 특성 덕분에 띄어쓰기를 안 해도 어지간해서는 알아보는 데 큰 지장이 없다. 그리고 적당히 붙여 쓴 게 전체 의미를 한 덩어리 단위로 묶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가끔은 정말로 헷갈릴 때가 있다. '삶은 달걀'(boiled / life is) 같은 예도 있고, 또 '바라바라 하는', '바보'(행 13:6), '노'(렘 46:25)처럼 짧아서 헷갈리는 고유명사도 있다.

헷갈리는 한자어에 대해 괄호+한자 병기를 하기에 앞서, 헷갈리는 고유명사에 대해 별도의 표시가 훨씬 더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 같다.
옛날에는 고유명사들을 별도의 폰트로 표기하기도 했지만 컴퓨터 시대에 서식이 없는 텍스트에서는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 텐가? 이런 게 숙제라는 것이다.

저런 문제에 비해서 뭐 "강하고 담대하라"가 비표준어이니까 "마음을 강하게 먹고 담대해져라" 이렇게 늘이는 거는 훨씬 후순위의 문제이다. 그것만 물고 늘어지고는 '거룩하다'는 '거룩하라'라고 잘도 쓰더구만? 형용사· 명사 품사통용은 어차피 절대적인 답이 없는 문제이다.

예전에도 몇 번 했던 말이지만 난 인터넷, 네티즌 이런 말을 어설프게 순화하는 것보다, 장(페이지/챕터) 같은 말을 더 잘 분간되는 말로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훨~~씬 더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5/12/14 08:35 2025/12/14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22

« Previous : 1 : 2 : 3 : 4 : 5 : ... 20 : Next »

블로그 이미지

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6/10   »
일 월 화 수 목 금 토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4198257
Today:
1899
Yesterday:
2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