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 자료 준비하느라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그림인데.. 신기하게도 내 개인 블로그에다가는 아직까지 공개한 적이 없었구나!

성경은 안 그래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이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을 다루는 데다, 잠 26:4-5처럼 표현이 대놓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당장 몇 가지 예만 들어 봐도 "은혜와 사랑 VS 율법과 공의", "자유의지 VS 예정과 섭리" 같은 것 말이다. 편의상 "파랑 VS 빨강"이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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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성경의 전체 숲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선택하는 방법은

  • 자기가 믿고 싶은 부분만 돌쇠같이 닥돌 해서 물의를 빚는다. (파랑 아니면 빨강. 다른 쪽은 무시)
  • 아니면 성경에서 일체의 색깔을 제거하고 비성경적인 중도로 빠진다. (회색)
  • 아예 보라, 분홍... 초록색을 내세우는 이상한 부류도 있다.

이 셋 중 하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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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가장 합리적인 솔루션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충돌이 일어나는 경로는 평면이 아닌 입체교차로를 만들어 충돌을 해소시킨다.
빨강은 이 문맥과 대상에서 직접 적용되는 것이고, 파랑은 다른 문맥과 대상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타 문맥에서는 영적인 '적용'과 교훈, 유익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문자적인 해석은 아니다.

  • 크리스천도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환란을 겪지만(행 14:22), 그건 미래에 예고된 유대인의 대환란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창조 교리이지만, 세상의 창조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더 크게 현 세상 이전에는 다른 창조와 파멸, 다른 홍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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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

내가 만들었던 그림 중에서 성경 노선도는 교리 논란이 없는 평범한 부류이니 기독교계 커뮤니티들에 굉장히 많이 퍼져 나갔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도 귀하고 소중한 책이라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고 난해한 구절, 교리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구절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걸까?

성경보다 똑똑해서 자기가 성경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이상한 똑똑이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 똑똑한 진짜 똑똑이가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9 19:32 2019/04/2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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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 관련 개념 복습

예전에도 신앙 관련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 내지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믿음이라는 제일 바보같고 나약한 자유의지가 전부이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외모나 스펙이나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믿을 정도의 지적 능력조차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자체를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애들, 정신지체 박약아는.. 그냥 무조건 구원 받는다. 걔들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지만 그분을 거부할 능력도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본인은 이 개념을 편의상 '특례 구원'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이 블로그를 찾아와서 이 글을 직접 읽을 정도의 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학에다 비유하면 방정식의 근 중에서 그냥 너무 자명한 trivial solution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물학으로 치면 무성 호흡/생식 같은..??

이런 논리를 따라, 본인은 어린아기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원죄 때문에, 혹은 유아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일단 전혀 믿지 않고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선물 받으실 분?" / "저요, 저도 좀 주세요!"라고 응답하고 손 내미는 것도 자기의 의이고 선물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이상하게 몰아가는 설명도 배격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앞서 언급했던 '특례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립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까지 부르는 건 '글쎄요~'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밖의 문맥에서는 인간이 얼마든지 제 발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지옥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사랑이나 공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못하면 정말 온갖 골때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6· 25 대한해협 해전 때의 동해상의 북괴군 600명하고, 광주 5· 18 북괴군 600명을 헷갈리듯이 말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한 문맥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지만 눅 14:16-21 같은 비유 얘기를 봤을 때... 그리고 인류 역사와 지금 세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추측하건대 미래에 하늘나라에 가 보면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특례 구원을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할 것 같다.

마치 증기 기관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서는 완전히 도태했지만 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용으로는 압도 다수인 주류이듯이(화력, 원자력이 모두 증기 터빈을 돌리므로!)...
선박이 장거리 여객에서는 비행기에 밀려 완전히 도태했지만, 일반인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물류에서는 여전히 본좌이듯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을 보게 되지 싶다. 민망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는 죽음이 이 세상의 음지에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겠는가?

참 오랜만에 구원 기본 개념에 대해 복습해 보았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 많은데.. 시간과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구원만 받고 어리고 육신적인 신자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편이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르는 다른 끔찍하고 흉악한 죄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롭게 자결했다고 구원을 얻지는 못하듯, 세상 비관해서 혹은 고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2. 성경과 세속 과학, 학문과의 관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만 하는 과학이라면, 그 알량한 방법론을 동원해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사실은 교계에서 그렇게도 정죄하는 진화론을 절대무오한 진리라고 입증하지도 못한다. 그쪽 세계에서는 실험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학설과 확률과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과학과 종교?신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게 맞다. 그럼 창조니 진화니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건가? 마냥 안심하면 되냐? 그렇지는 않다.
과학 그 자체는 자연 계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이다. 잘 연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거짓되이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설이 대놓고 신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고방식이나 연구 방법론· 패러다임을 잘못 적용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할 수는 있다. 이게 파괴된 신자는 진짜 볼장 다 본다.

"성경에 어차피 요런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성경의 존재 가치가 싹 부정되는 건 물론 아닐 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기록돼 있는 엄청나고 극단적인 예언들도 그렇게 정밀하게 문자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다. 비유와 교훈 등 우리에게 좋은 쪽만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어떻게 그리스어를 보면 어떻고.."

요게 아주 위험하고 돼먹지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특정 부분만 분별 없이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물의를 빚는 교파 종파에 대해서도 본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대안이 저런 지적 사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성경은 세상의 여느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3.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

성경에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다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 25:4, 가축이 적당히 자유롭게 먹으면서 일하게 해 줘라)가 의외로 신약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고전 9:9, 딤전 5:18)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문맥에서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합 2:4에서 '자기'(his)가 빠진 바리에이션으로서 세 번 더 나온다. (롬 1:17, 갈 3:11, 히 10:37) 이에 덧붙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도 십계명인 출 20:12뿐만 아니라 신 5:16, 엡 6:2에서 반복되며, 복음서에서도 인용 형태로 마태· 마가· 누가에 거듭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뭔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구절도 성경에서 톱급으로 자주 거듭 반복해서 인용된 게 있다. 바로 시 110:1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 연이어 copy & paste 수준이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행 2:35와 히 1:13에서 추가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히 10:13도 재차 언급이라고 볼 수 있으니.. 횟수가 가히 압도적이다.

"소의 입마개"만치 인간의 실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만치 보편적인 인륜을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리라"만치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지도 않은 저 말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이고 문맥이 뭘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저 구절의 모든 문맥과 의미를 강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성경은 도덕 경전이나 역사 기록이나 복음과 구원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2순위 이하의 목표일 뿐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주 관심사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통치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용어를 동원해서 표현하자면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온갖 시사· 종교 난제들을 가져와서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 (부활의 때에 누구 아내? 율법에서 가장 큰 명령? 카이사르에게 납세? 등등등~) 떠보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든, 아니면 정말 몰라서든지..

예수님은 그런 것쯤은 막힘없이 전부 즉답을 하셨고 사람들을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물으신 건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내가 니들에게 하나 좀 물어 보마. 너희는 내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 것 같냐? 시 110:1을 봐. 다윗이 자기 비속 후손을 보고 '주'라고 존대해서 부르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뒤로 사람들은 버로우 타 버리고 더는 예수님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시 110:1은 그 문맥에서 인용되었으며, 그게 복음서에 3회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또한, 나중에 배반당하고 체포된 뒤의 행적도 생각할 만하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다른 온갖 쓰잘데기없는 거짓 고소들에는 하나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냐? 넌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는 정말 솔직 담백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마 26:62-65, 막 14:60-63, 눅 22:66-71)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기만을 바라셨다. 예수의 부활조차도 곧이곧대로 믿기 싫고, 그래도 역사 팩트와 후폭풍 증거까지 송두리째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제자들의 자칭 예수 부활 "체험" 사건 이 따위로 둘러대는 짓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P와 NP는 과연 동일할까?", "리만-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은 실수부가 정말 몽땅 1/2일까?", 아니면 "광주에 과연 북괴 공작원들이 잔뜩 침투되었을까?" 같은 걸 묻지 않으신다.
그런 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답을 구하든가 말든가 하면 되고,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그리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너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시 110:1의 직접 인용은 없지만 기록 목적이 독자들 예수 믿게 하는 것(요 20:31)이라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분명하게 대놓고 적어 놓았다.

4. 신앙 생활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뒤의 신앙 생활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짜인 것도 있고 불리한 구조로 된 것도 있다.
유리한 것은.. 뭔가 좋은 것을 사람이 "먼저" 받아서 동기 부여를 받은 뒤에, 그 다음에 사람 쪽에서 베풀고 헌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구도라는 것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나서 침례를 받든지 믿음의 선한 행위를 하든지 성장을 하든지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일단 쉬고 나서, 달콤한 은혜의 말씀부터 먹고 나서, 즐기는 것부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을 하고 헌신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기업 중에 입사 후에 월급이건 일당이건 보수를 받고 나서 다음부터 일하는 곳이 있던가? 세상에서야 소득 주도 성장은 마치 "일단 서울대부터 보내 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같은 미친 개소리이지만.. 성경적인 신앙 원리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종 목적지, 만렙,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구원' 내지 성인 성자(saint) 칭호가 이 바닥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따 놓은 당상이다. 근성 충전을 위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 이 아니라 일단 구원부터 받고 시작이다.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만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6일간 일하고 나서 일곱째 날이 쉬는 날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만들어지고 결혼하고 honeymoon부터 즐긴 뒤부터 동산 관리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얘기도 있다(눅 10:38-42).

그 반면, 인간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는 것, 혹은 이것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 사항도 있다.
신앙 생활이란 건 본질적으로 당장 보이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직관적인 대로, 남들 다 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바보 같아 보이고 손해 보는 듯이 보이는 좁은 길 역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단과 행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둬서 물리적인 여건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을 하나님이 굳이 수습해 주고 undo 해 주시는 경우 역시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생활이 무슨 공밀레 같은 신밀레 열정페이 착취는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성· 성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단단하고 입에 쓴 말씀, 실행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 당하고 겪어 놓았다. 그때는 이런 믿는 구석으로 요렇게 하면 된다고 선례, 모범, 샘플이 마련돼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나 과제에 대해 원리, 예제, 유사한 기출문제, 힌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러나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물며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해 줄 리는 절대 만무하다. 모든 과제는 자신의 문장을 써서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절대로 '안알랴줌'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세대 경륜 급의 큰 그림 이상으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미래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이다. 나에게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는 완전 랜덤 케바케이다.
그것만 좀 알면 딱 죽기 직전에만 예수 믿고 구원을 먹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꼼수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걸로 농락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신앙 생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어떤가?

5.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

  • 군대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범죄라 여겨지는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하지만 자기 집 지키느라 불가피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 마당에, 하물며 나라를 지키느라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형법상의 살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숭고하고 영예로운 일이다.
  • 국정원 같은 첩보 기관은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이이제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절대악을 퇴치하기 위해 필요악 역할을 맡고, 작은 악을 동원해서 더 큰 악을 예방하는 궂은일을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건 나쁜짓이며,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이나 사용하는 수법(거짓말, 위장 침투..)으로 여겨진다.
  • 끝으로 종교는 겉으로 언뜻 보이는 결과만 보자면 정신승리, 진영논리,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분야이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라는 과학 팩트는 "그럼 최초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무한순환을 끊으려면 결국 처음에 한 번은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 받고 부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적인 박해 지역이 아닌 한, 무조건 쫄딱 망하고 거지 되고 감옥에 갇히고 죽지도 않는다. 구원받아서 신분이 바뀌는 것과 개인이 물질적으로 잘 되거나 못 되는 건 별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경제관과 시스템이 갖춰져서 잘살게 되고 중산층이 늘고 부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게으른 개인을 일일이 다 먹여 살려 주는 게 아니다.

예수 믿어서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영적 복을 받고, 설령 가난하더라도 그 처지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 주님께서 내게 지금 당장 허락하신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건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남들보다 가난하지만 난 영적으로는 부자.." 영이건 정신이건 이것도 정신승리라면 정신승리이다. 하지만 이건 아Q의 정신승리와 달리, 성경적인 근거와 보장이 돼 있는 건전한 정신승리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에 연연하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져 있지 않으면 어차피 하나님이 물질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 주셔도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면서 불만족 불평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1 08:33 2019/04/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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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카이 2019/05/12 22:44 # M/D Reply Permalink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

    예전에 사울 얘기가 잠깐 나왔었는데
    님께서 사울이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도 결국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그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사울이 천국에 갔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무당을 통해 불러들인 사무엘의 영이 너도 나와 같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전부인데
    그때 사무엘의 영은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 거짓의 영이 분명합니다
    무당이 부른 영이 진짜 영일 수 없고 여호와의 영이 떠난 자에게 절대자가 사무엘의 영을 보낼 이유가 없고
    단지 사울이 죽을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고 그게 맞았다고 해도 그때는 사울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것을 예언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결과였죠
    그는 불순종했었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모든 걸 해결할려고만 했었기에 지옥에 간 게 확실합니다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의 예정이나 영원한 보장은 주님께서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미리 아심이기에
    주님의 입장에서는 창세 전에 택한 것이 맞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런데 시간 개념의 틀에서 억지로 해석할려고 하기에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칼뱅의 예정론이나 영원한 보장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자기가 믿는다고 머리로 생각만 하면 되는 것인지

    사람들이 행위와 믿음을 나눠서 생각하는데 믿음이 있어야만 행위를 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한 끝까지 견딜 수 있는 것이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믿지 않기 때문에 행위를 할 수 없는 거죠
    예수님께서 직접 말하시지 않았나요
    마태복음 5장 20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마태복음7장21절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13장에 씨뿌는 자의 비유

    구약시대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다른 믿음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최대한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다른 믿음으로도 어차피 구원을 받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면
    귀류법으로 일단 맞다고 가정을 해보면
    도대체 예수님은 이 땅에 내려오셔서 그 고생을 왜 하신 걸까요?
    구원을 편하게 받게 해줄려고 그러셨을까요?

    이것은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믿는 것과 본질은 똑같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사무엘님은 구원을 편하게 받는 것으로 믿는 거 같습니다만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사람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이게 쉬울까요?

    갈라디아서2장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후략)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게
    누구에게는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고 자기우월감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등불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또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종들처럼
    한평생을 성실하게 또 주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1. 사무엘 2019/05/12 07:44 # M/D Permalink

      1. 예언이 "적중"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너무 너무 긍정적인" 심상인데요? (신 18:21-22)
      아합 왕을 미혹한 거짓 영들의 예언이 적중했습니까? (왕상 22:12)
      마귀가 욥의 행동에 대해서 예측했던 게 어디 적중했습니까? (욥 1:11, 2:5)
      그거도 인간적인 감정과 정황상으로는 아주 쉽게 예상 가능한 것이고 무슨 예수님 초림/재림 급의 아주 멀고 어려운 예언도 아닌데?

      성경이 인간이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주된 이유 중 하나도 예언 성취 아닙니까?
      "했다는 것이 전부인데" --> 그 언급이 '전부인데' 급으로 매도할 만한 사소한 증거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그 전에 무당이 화들짝 놀라고 사울 왕의 정체까지 알아챈 것은 자신이 평소에 소환하던 거짓 영과는 생판 다른 결과물이 튀어나왔기 때문입니다. (삼상 28:12)
      그러고도 이게 진짜 사무엘이 아니라면.. 세상에 믿을 게 없습니다. 연대기 논쟁에서 무슨 "6천 년 전에 창조된 우주를 하나님이 일부러 페이크 쳐서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이다"... 급의 말장난밖에 나오지 않으니, 소모적인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칼뱅의 예정론이나 영원한 보장" --> 별 차이 없어 보이는 게 맞습니다. 칼빈주의 5대 튤립 강령 중의 P가 나름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산 과정은 틀렸지만 결과가 일부 맞는 것이 저 교리입니다.
      계산 과정이 틀렸고 결과만 아쉬운 대로 맞는 대표적인 다른 예로는 "자살하면 지옥 가니까 자살하면 안 된다"가 있습니다.

      2. 사람도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거 맞습니다.
      단지 그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의 제자로 살고 성령의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보상을 받고, 구원의 목적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이지..
      자기 노력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구출받기 위해서가 아닐 뿐입니다.

      "도로 지옥으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도 당연히 포함이구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은 "남한에 온 탈북자는 그 어떤 죄를 지어도 남한의 교도소나 사형장에는 끌려갈지언정, 어떤 경우에도 재북송되지는 않는다"와 같은 급의 명제입니다.

      이 기독교계라는 바닥이 얼마나 지저분한 곳인가 하면, 십일조가 신약 교회에 적용되는 교리가 아니라고 얘기하면 꼭.. 헌금을 할 필요가 없다고 궤변 늘어놓는 사람이 생기고,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얘기하면 꼭..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생기더군요.
      신사카이 님은 똑똑하시니 저 개념도 구분 못 하지는 않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2. 사무엘 2019/05/12 07:44 # M/D Permalink

      하나 더.. "끝까지 견디는 자 곧 그는 구원을 받으리라." (마 10:22, 마 24:13, 막 13:13)
      주변 문맥을 보세요. 온통 대환란 때의 생존, 구출, 구조에 가까운 얘기입니다. 혼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는 통상적인 복음 얘기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be saved라고 해서 전부 행 16:31 같은 지옥으로부터의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잠 28:18만 하나 뚝 떼어 와서 "성실하게 살면 구원받네?"도 가능하답니다.

  2. 신세카이 2019/05/12 09:55 # M/D Reply Permalink

    그 문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환란이 무엇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느끼기에 진리를 추구하는 제3자의 입장에서 구약과 신약을 나누고 또 대환란으로 시간대를 나누는 것은
    이것은 어떤 믿음이든 어떤 종교든 간에 진리의 속성에 그 자체로 위배된다고 판단됩니다
    진정 진리라면 영원불변해야 합니다 시간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라면
    철학적인 판단으로 그것은 진리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1. 사무엘 2019/05/12 13:24 # M/D Permalink

      성경의 총체적인 그림과 체계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할 생각은 없으면서 한두 예외적인 구절, 그것도 자기가 직접 찾아서 읽고 생각해 보지도 않고 안티 사이트에서 펀 알쏭달쏭한 구절만 문맥 무시하고 뚝 떼어 와서 뭐 성경이 모순이니, 성경이 장애인을 비하하네, 잔인하네 어쩌네 이상한 소리 한다든가..

      엡 2:8-9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 행위 아님) 같은 더 자주 더 분명하게 제시돼 있는 신약 교리는 무시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답변이 없으면 끝까지 트집 잡고 늘어지는 건 진리를 찾는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 것입니다. (님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니 오해 없으시길. 저는 저런 부류의 사람을 많이 봐 왔어요.)

      성경에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이랬다 저랬다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이 굉장히 많습니다. 당장 잠 26:4-5 "안돼 / 돼!" 같은 이랬다 저랬다 극단적인 쌍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당연히 시기와 문맥을 따라 바르게 분간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http://moogi.new21.org/tc/1613 의 그림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민족 자결주의는 1차 대전 승전국 식민지에나 적용될 뿐, 일제 식민지 조선에다가는 영적으로 교훈만 되지 당장 국제법적으로 문자적으로 적용되는 거 아님.. 이런 식으로 분간하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대를 나누지 않으면 더 큰 무질서와 혼란이 야기되고, 옳다구나 개독안티들의 성경 공격도 더 심해집니다.

      글쎄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교회 시대와 환란기 등.. 그런 시대 구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성품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처한 상황과 계시의 분량은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인 구원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는 하나님의 고유 재량 영역인데.. 무엇이 그렇게 불만이신지 개인적으로 궁금합니다.

      진리라는 게 무슨 강박관념 수준의 수학적인 동등이어야만 한다면, 그 사고방식으로는 마 20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일한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 동일한 임금)이라든가 눅 16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 같은 것도 도저히 납득이 안 될 겁니다.
      (정말 진지하게 답을 구하고 싶으면.. 제가 제시하는 성경 구절들은 전부 직접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3. 신세카이 2019/05/12 17:45 # M/D Reply Permalink

    저는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다른 믿음으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해석이 충격적입니다

    게임이나 만화에서 성스러운 것을 찾기 위해 주인공이 여행을 하죠
    이게 무한한 힘을 주는 성검 랑그릿사일 수도 있고 소원을 들어주는 드래곤볼일 수도 있죠

    생명이란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피조물의 유한한 사랑이 반응하면 육체를 가진 유한한 생명이 탄생하고
    오직 절대자의 무한한 사랑에 반응한 자에게만이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며
    이 사랑이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피와 물을 바친 제사입니다
    사람의 삶의 목적이란 절대자의 무한한 사랑에 반응하는 여행이라고 봅니다

    포도원 일꾼은 일을 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일당을 일꾼에게 주는 게 목적이고
    불의한 청지기도 절대자에게 부여받은 것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것
    둘 다 본질은 이웃사랑이며 이것 또한 절대자의 무한한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겠죠

    구원을 쉽게 받는다는 해석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게 아닌 것은 맞지만
    믿음이 있는 자만이 행위로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행위와 믿음이 전혀 모순되지 않고 동일하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절대자 앞에 겸손하고
    성실히 자기 달란트를 잘 활용해 선한 열매를 맺어야겠죠

    1. 사무엘 2019/05/12 21:45 # M/D Permalink

      1.
      그렇게도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원을 너무 쉽게 받는다는 걸(?) 동의하시지 않는 게 저로서는 좀 이해가 안 됩니다. 평생 신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 욕하고 저주하던 사람이 갑자기 신념이 확 바뀌어서 회개하고 예수를 내 구주로 믿은 거..
      저런 믿음 행사가 당장 선행이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말 만만하고 쉬운 싸구려 구원을 얻은 거 같습니까? 저는 이 점을 제일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냥 천주교 행위 구원, 행위로 구원 유지가 더 합리적이어 보인다는 얘기인가요? 그건 좀 모순인데요?

      2.
      그리고 약 1900여 년 전 이래로 지금이야 신약 성경까지 다 완성됐고 계시도 나올 게 다 나왔으니 당연히 오직 예수로 구원받지요.
      그러나 문제는 그 전, 또는 그 후라도 극동 아시아처럼 복음의 발상지로부터 극단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던 곳입니다. 그때/거기서는 예수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나마 간접적인 예언이라도 있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양심 말고는 말씀 계시 자체가 없었는데 어떻게 그 예수를 알고서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게 초월적인 방법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살기가 참 편하기는 하겠네요. "세종대왕, 이 순신, 조선시대 구원" 갖고 시비 거는 사람들 대처하기는 훨씬 더 편리하겠네요.

      최소한 자연 계시라도 따르면서 양심을 따라 절대자를 찾았고, 구약 성도의 경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예수 계시가 직접 주어지기만 했다면 그분을 곧장 믿었을 사람.. 그 마음 상태가 구원 여부를 결정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스스로 빛을 찾아가서 구원받았을 사람은 매우 극소수.. 선교사 파송 필요함) 저로서는 그게 하나님의 입장에서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조치입니다.

      이걸 무슨 '딴 믿음, 별개의 믿음'이라고 계속해서 오해하신다면 이 평행선은 더 좁힐 방법이 도저히 없습니다. 저는 이 문제 갖고 님과 더 논쟁이나 토론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4. 신세카이 2019/05/14 19:11 # M/D Reply Permalink

    인간은 유한하기에 모든 걸을 다 알 수는 없겠죠
    중요한 것은 아기와 같은 마음과 태도일 것입니다
    절대자는 진리를 지혜로운 자에게는 숨기고 아기들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이 함께 한다면 필요에 따라 알려주실 것이고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게 중요하겠죠

    마지막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얘기하고 있던 주제가 구원관에 대해서였고 사울과 무당이 부른 사무엘의 영에 대한 얘기는 곁가지라고 생각해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서 그냥 답변을 안 했었는데

    신명기 18장22절 만일 대언자가 주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 일이 뒤따라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성취되지도 아니하면 그것은 주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신 것이요, 오직 그 대언자가 자기 뜻대로 그것을 말하였나니 너는 그를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이것은 "틀린 예언을 하면 거짓의 영"이라는 겁니다
    (틀린 예언 -> 거짓의 영)

    명제가 참일 때는 "대우"도 항상 참이 성립하죠
    그러므로 진리의 영은 항상 맞는 예언만 하죠
    (진리의 영 -> 맞는 예언)

    명제가 참일 때 "이"는 항상 참이 성립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맞는 예언을 하면 항상 진리의 영인가?
    (맞는 예언 -> 진리의 영)?

    명제가 참일 때 "역"도 항상 참이 성립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거짓의 영은 항상 틀린 예언을 하는가?
    (거짓의 영 -> 틀린 예언)?

    거짓의 영은 맞는 예언과 틀린 예언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습니다
    틀린 예언의 경우 거짓의 영이라고 단정할 수 있지만
    맞는 예언의 경우는 거짓의 영인지 진리의 영인지 알 수 없습니다

    무당이 부른 영이 맞는 예언을 했다고 그것으로는 판단할 수 없습니다

    거짓의 영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말할 수 있겠죠
    사울을 더욱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악한 목적을 위해서
    또 그때는 사울이 주님의 도우심도 받지 못하고 패배하고 죽을 게 명백한 상황이었기에

    님이 그걸 예언에 관한 것이라고 제시했지만
    신명기의 그 구절은 틀린 예언의 경우이죠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쉽고 사소한 것에 실수를 한 이유는
    자신이 진리를 안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편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사기꾼이 항상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참말을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거짓말을 하죠
    언제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니까 위험하죠
    만약에 누가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명제에 대하여
    항상 거짓말만 해 준다면 정말 고마운 일이겠죠
    그것을 역으로 이용해서 참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구약 시대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절대자가 직접 예수님에 대해 알려줬다고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풀리는데
    저는 그렇게 믿는데 왜 그렇게 믿지 못하는지를 모르겠네요 꼭 텍스트로 기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 맞냐 틀리냐에 있지 않습니다!
    마음과 태도가 중요하죠!

    저는 카스텔리오가 칼뱅에게 보낸 편지가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학설과 다른 학설을 가진 사람들이 항상 잘못을 범한다고 믿지 말고,
    언제나 그들을 즉시 이단으로 몰아붙이지 말라.
    내가 당신과 다르게 성서를 해석하여도
    나는 내 모든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한다.
    우리 둘 중 한 쪽이 잘못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서로 사랑해야 한다!
    주님께서 언젠가는 잘못 생각하는 사람에게 진리를 보여주실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아는 것은, 기독교도에게는 사랑의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실천하자.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적들의 입을 다물게 하자.
    당신은 당신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들도 자기의 의견을 그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교만한 자를 꺽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큰 사랑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한다.
    당신에게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제안하는 바이다.
    나는 당신에게 사랑을 촉구하며, 나 자신이 온 영혼을 다하여 그것을 행할 것임을
    하나님과 살아 있는 성령 앞에서 맹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미움으로 나와 싸우기를 계속하겠다면,
    당신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촉구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겠다면, 나는 오직 침묵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판자가 되셔서
    우리가 그분께 충성한 정도에 따라서 결정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자기만이 옳다는 교만으로 남을 평가하고 정죄했던 칼뱅과
    성서를 다르게 해석하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얘기한 카스텔리오를 떠올리며
    어떤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태도인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또 겸손하고 온유하니 나를 따르라 했던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럼 이만

    1. 사무엘 2019/05/14 20:53 # M/D Permalink

      저는 최선을 다해서 성의 있게 답변을 드려 왔는데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예전 댓글을 고치기까지 하면서 제 말투와 태도를 문제삼는 듯한 얘기를 하시는지요? 이번엔 중학교 명제 강의까지.. 설마 제가 모르거나 실수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러셨나요..ㅠㅠ

      1.
      음란한 성경은 가라 글에 대해서도 답변을 드린 바와 같이, 저는 자명하고 문제의 대세가 바뀔 일이 없는 문맥에서 일일이 그 정도까지 엄밀함을 챙기면서 글을 쓰지는 않았습니다. 성경부터가 그런 식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과학 논문이나 lemma, definition, proof 형태로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요일 2:23처럼 "아들을 인정 -> 아버지를 소유"에 대해 본명제와 '이' 정도까지는 대구법으로 같이 적힌 구절이 있습니다.
      신 18:21-22는 그와 달리 "틀린 예언 -> 거짓의 영"이라는 명제 하나만이 적혀 있지요. 허나, 성경의 다른 용례들과 하나님의 성품을 감안했을 때, 성경 내부에서는 저 명제가 역과 이도 다 성립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저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이 "너는 머리가 나빠서 저 명제가 논리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까지 싸잡아 잘못 믿었구나" 그러실 일은 없습니다.

      왜냐고요? 아합 왕을 미혹한 거짓 영이라든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사탄 마귀, 예레미야와 맞장 떴던 거짓 대언자 하나냐 등... 성경 어디에도 나쁜놈이 부정적인 팩트 폭격과 정확하게 적중한 바른 예언을 한 경우는 전혀 절대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나쁜놈'의 예언이 아주 일부 맞는 경우는 있겠죠. 적중하는 경우도 있어야 사람이 미혹될 테니까.. 하지만 그게 저런 사무엘의 예언과 같은 급일 수도 없을 뿐더러,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할 때는 그런 건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의 말은 하나도 남김없이 적중했다는 삼상 3:19 같은 말씀을 훨씬 더 감안해야 합니다. 저 구절도 꼭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 그리고 구약 시대에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라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절대자가 직접 예수님에 대해 알려줬다고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풀리는데
      >> 저는 그렇게 믿는데 왜 그렇게 믿지 못하는지를 모르겠네요 꼭 텍스트로 기록이 되어야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런 식으로 예수에 대해 알게 되어서 구원받고 교회까지 세워졌다는 역사 기록이 없습니다. 이건 사소하고 간접적인 정황 근거이고..

      결정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성골, 본진인 구약 성경에서조차도 '여자의 씨'(창세기),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이사야)처럼 수백 년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말 간접적으로 찔끔찔끔 예언되고 계시돼 왔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계획에 대해 사전유출을 했어야 하겠습니까? 그런 편리한 뒷구멍이 있으면 애초에 성경은 왜 기록됐겠습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데, 성경 자체도 인류의 구원을 1순위 목적으로 두고 기록된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논리대로라면.. 절대자가 지옥에 대해서도 직접 알려주기만 하면 만사해결일 텐데 굳이 지긋지긋한 옛날 텍스트를 참고하라는 눅 16:29-31 같은 비효율적인 구절은 왜 기록돼 있겠습니까? 이건 좀 비약하면 하나님이 왜 하필 선악과 만들었냐 같은 급의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충돌이 생기는 이유는 신세카이 님은 하나님의 역사 방식, 성경의 중요성, 기록 방식, 절대무오성, 예언 성취의 의미 등에 대해서 정확한 관념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님과 저의 이런 계산 방법의 차이를 인지하지 않으면.. 계산 결과의 차이만 갖고 앞으로도 계속 소모적인 논쟁과 감정 손상밖에 오가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문제에 대해서 계속해서 저를 믿고 문의해 주신 것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고집이 센 걸 상대방만 고집 세다고 욕한다거나.. 더 할 말이 없으니 말을 바꿔서 상대방의 말투나 태도를 문제삼고 교만하다는 식으로 유치하게 도발하는 건 신세카이 님 정도의 지성과 교양으로는 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오로지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입니다.

  5. 신세카이 2019/05/15 11:42 # M/D Reply Permalink

    내용을 바꾼 게 아니라 촛불을 등불로 바꾸고
    답변이 없는 댓글에 미확인일 가능성 또는 방명록에 차단으로
    마지막으로 얘기하겠습니다부터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태도는 방명록 차단때문입니다

    더이상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1. 사무엘 2019/05/15 11:46 # M/D Permalink

      네? 저는 님을 차단한 적 없습니다.
      무슨 내용으로 어디에 글을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몇몇 단어 때문에 스팸 광고글로 오인된 듯합니다.
      관리자 페이지의 휴지통에는 차단된 글이 나타나긴 하지만, 하루에 수백, 수천 건씩 쏟아지는 쓰레기 스팸글들에 가려져서 제가 제대로 못 보고 그냥 비워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신앙관이 특이하고 과격할 수는 있어도 남에게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비열한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길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차라리 메일을 이용해 주십시오.
      불편을 끼친 것은 유감스럽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촛불 등불은 뭐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닙니다. 흠정역은 그 시절에 고체 파라핀 양초라는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candlestick도 다 등잔대라고 번역하긴 했는데.. 그건 그냥 우리말 번역 문제이고 성경 외부의 고고학 고증 문제이죠.)

  6. 신세카이 2019/05/15 23:17 # M/D Reply Permalink

    전산오류가 있어서 오해가 있었다고 치고
    촛불을 등불로 바꾼 거 말고는 내용을 바꾼 게 없는데
    조언을 해주는 것도 유치한 도발이라 받아들이니;;;

    그러면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를 해야겠죠

    처음부터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구원관에 대해서 그 곁가지로 삼손과 사울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사무엘의 영이 진짜냐 가짜냐는 곁가지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었는데
    님은 완전히 이거에 포커스가 맞춰진 거 같네요;;
    욥이나 아합왕이나 그 정도는 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이미 말했다시피 신명기의 구절도 님의 주장에 대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데
    모르지 않으면서 기록된 대로 믿지 않고 자기 생각에 끼워맞추니까 문제가 되는 거에요ㅜㅜ
    제가 느끼기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의지 같네요
    근거를 대고 싶으면 최소한 악한 영과 접하는 이가 천국에 있는 다른 사람의 영을 불러온 사례를 제시한다든지 해야죠

    KJV에 대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했어도 전수조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사실 저는 이미 KJV보다 더 잘 번역된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진리의 말씀을 알고 있고
    선악과가 왜 있었는지 이건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이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만
    말해주고 싶지는 않네요
    님에게 진리의 영이 함께한다면 가르쳐주실 거에요
    저는 저의 삶 속에서 진리의 영이 함께함을 느낍니다

    삼손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도 제대로 답변을 못할 걸 예상하고 있었고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믿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왜냐하면 님의 해석은 님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해석을 공부한 것일 뿐이고 그런 공부는 자료를 찾으면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님은 KJV를 믿는 것도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해석을 믿는 거 뿐이에요

    시간대별로 구원의 방식이 다르고 그것이 절대자의 재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자의 속성과 진리를 푸는 열쇠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구원을 받는데 절대자 본인의 피가 필요한 이유는
    절대자는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여 그 자체로 절대선이데 만약에 악을 행했던 죄인인 인간을
    품어버리면 마치 간음한 사람과 결혼하면 그도 간음한 게 되는 거처럼
    절대자의 피흘림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을 절대자가 품으면 절대선이 깨지게 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이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의 피흘림이 필요하죠 그 피만이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겁니다
    절대자가 악을 행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흘림을 믿지 않는 자를 품을 수는 없어요
    이것에 대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또 사람의 시간개념의 틀에서 억지로 이해할려고 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는 거에요
    그리고 주님과 구원받은 사람들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에 비유하죠
    사람이 사랑하고 존경하면 닮게 되는 것처럼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자는 주님을 닮게 됩니다
    그 방향으로 본인이 가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7. 신세카이 2019/05/15 23:19 # M/D Reply Permalink

    욥은 텍스트를 보지도 않았는데 유대인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절대자와 소통하고 구원을 받았을까요?
    저의 답은 간단합니다 욥은 온전한 마음으로 절대자를 갈망하고 사랑했기에 절대자가 직접 알려주었으니까요

    태도에 대해서 얘기한 것은 평소 쓰는 글에서 지식을 통해 남보다 위에 서고자하는 자기우월감 pride 자존심 또는 교만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이런 마음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아니고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죠

    시간대별로 나눠서 구원받는 방법이 다르다는 해석은 거짓말입니다
    You don't know truth
    그리고 님은 예수님의 말씀이 본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짓된 해석을 믿고 있다는 것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님이 이대로 계속 살다가 죽으면 구원을 못 받습니다
    정말로 구원을 받고 싶으면 그 잘못된 교리를 버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사도 바울이 자기의 지식을 배설물로 여겼던 것처럼 님도 그렇게 자기 지식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 지식으로 자신을 남보다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고 지극히 낮은 자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에게 하는 게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길 바랍니다

    앞으로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더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님의 해석은 이미 다 알고 있었고 그 전에 몇가지 얘기를 했던 것도
    이 말을 해주고 싶어서였으니까요

    주님께서 님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계세요

    1. 사무엘 2019/05/16 05:40 # M/D Permalink

      허허 역시나.. 전산 오류가 전부가 아니었군요.
      저는 명백한 오해와 실수는 인정하고 사과를 드렸는데.. 그랬더니 저에 대한 진짜 불만은 인제 나오는군요.
      저를 아예 구원도 못 받은 사람 급으로 정죄하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ㅎㅎ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
      >>님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해석을 공부한 것

      뭐, 저도 그런 오류를 답습할 가능성이 0이라고는 감히 말하지 않겠습니다만..
      한때 불경 열심히 공부하셨고 카스텔리오와 칼뱅도 아는 신세카이 님에게도 95% 이상 거의 똑같이 적용될 것 같은데요.

      님도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긴 마찬가지잖아요. 제가 님의 논리나 근거보다 저걸 우선적으로 판단하는 정당한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드렸는데도 그건 귓등으로도 안 듣고서, 자기가 잘 모르는 부분은 긍정이나 부정 없이 어물쩡 그냥 넘어가고.. 제가 님의 말을 안 받아들이는 걸 갖고 이젠 교만이니 태도드립으로 나오고 계시니 말이죠.
      저는 님께 성경에 대한 믿음부터 가지라고 권면드렸는데 님은 저보고 웬 뜬금없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자기를 낮추라느니 그런 말씀만 하시고.. 에휴.. ㅎㅎ

      >> 욥이나 아합왕이나 그 정도는 저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스토리야 님도 모르실 리가 없지요. 단지 그걸 진지하게 믿고 성경의 다른 유사 사례들과 종합해서 문제를 푸는 데 활용을 안 할 뿐인 거죠.

      >>욥은 텍스트를 보지도 않았는데 유대인도 아니었는데

      욥기 자체가 아예 최초의 구약성경이라 여겨지는 책이고, 이때는 당연히 유대인이고 율법이고도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극단적인 초창기 상황에는 하나님께서 직접 알려주셔야 했겠죠. 네 그건 저도 쿨하게 인정! 꿈에서 말씀해 주시는 경우도 있고, 성경에 기록된 사례만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에녹 정도도 아예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다가 하늘로 들려 올라겠겠죠.

      그러나 그게 님이 말씀하시는 것만치 흔한 사례가 아니고요, 어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도착한 뒤에도 만나가 계속 내렸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설령 직접 들었다 해도 그 당시에 계시의 수준은 "그 하나님이 언젠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정도입니다. 욥이 그 시절에 무슨 갈보리 십자가를 알 길이란 전무했습니다. 하나님도 그 시절에 벌써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고요. 이 점은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니 귀가 있으면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본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거짓된 해석

      어디서 세대주의 이단이라는 소리 많이 들으셨나 보네요. ㅎㅎ 남의 것을 보고 들은 게 있어야 그 정도로 강한 발언을 할 수 있습니다.
      님은 무슨 책을 보시고 어디서 신학을 하셨는지가 어렴풋이 그려집니다만, 정체를 숨기고 계시면 제 입장에서는 심증만 있지 물증을 입증할 방법이 없으니 추측은 여기까지만 하죠.

      저는 성경 말씀을 시대와 적용 대상별로 바르게 나눠 분간하고, 문자적 해석과 영적 적용을 하는 패러다임이야말로 성경에서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구절들을 잘 풀이하고, 믿음의 영역과 논리· 이성 영역을 모두 충족시키며, 가장 건전하다는 생각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습니다. 그걸 능가하는 대안을 지금까지 접한 적이 없습니다.

      성경이 스스로 규정하는 성경 공부 방법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님이 '잘못된 교리'라고 말씀하시는 그 교리 노선을 버릴 생각이 1도 없습니다.

      신세카이 님은 한편으로는 그렇게도 시대와 장소를 불문한 예수님의 피를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을 너무 쉽게 받는 걸 수긍하지 않고 구원의 영원한 보장도 안 믿는 입장이니 그거야말로 성경을 총체적으로 제대로 이해는 한 건지 저로서는 굉장히 미심쩍고 이상합니다. 이쯤이면 각자 서로 믿고 싶은 대로 갈 길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신학 노선은 신념일 뿐이지 행실이니 태도니 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도 말씀드립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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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욥기는 모세오경과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먼저 기록된 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책이 아니다. 너무 엄청나고 극단적인 스토리와 판타스틱한 서술들, 그리고 인류의 만년 의문 떡밥인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욥기는 문학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물론 불신자들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만 인정할 뿐, 저게 설마 레알 실존인물 실화일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통념과 달리, 다른 책에서 욥을 거듭해서 실존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인용하니(약 5:11 같은..), 이게 딜레마이다. 노아, 아벨만큼이나 말이다.
가령, 그 천하의 예수님이 창세기 4장 인물인 아벨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마 23:35). 예수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비평가라면 창세기 1~11장은 그냥 설화이고 상징 비유 묵시문학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이다. 욥기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 문제의 책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그에게 아들 7명과 딸 3명이 태어나니라. 또한 그의 재산은 양이 7000마리요, 낙타가 3000마리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마리이며 집안사람들도 심히 많았으므로 이 사람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더라." (욥 1:1-3; 가독성을 위해 성경 본문에서 수량 표기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

욥은 노아·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일컬어진다(겔 14:14). 특히 노아와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perfect(창 6:9, 욥 1:1)라는 수식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과 동급의 완전무결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구약 + 인간의 관점에서 그럭저럭 흠잡을 데 없고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만점 합격점이라는 뜻이다. 마치 all(모든)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느 문맥과 범위에서 전체 또는 완벽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은 아시다시피 한번 쫄딱 망했다가 그래도 다음과 같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주}께서 그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또 그가 아들 7명과 딸 3명을 두었더라." (욥 42:10,12,13)

욥은 고난 이후에 자기 재산에 속하는 가축들은 몽땅 다 정확히 두 배로 보상받았다. 그런데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열 명 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명은.. 자녀는 재산과 별개이며 두 배 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나 보험(!!) 관점에서 보자면 대인과 대물은 엄연히 다르며, 자식은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가축 수와 자녀 수를 나란히 늘어놓은 욥기의 진술 방식 자체가 좀 문제가 있으며,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의 여지를 남기는 거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결론은.. 구원받은 자녀는 다른 가축이나 재물과 달리,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고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었어도 영원의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이별하고 못 보는 기간 / 내세에서 n년간 보는 기간"의 비율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극한값이 0으로 가는 것이 자명하니..;;
그러므로 20명을 몽땅 새로 줄 필요 없이 새 자녀 10명만 추가로 주면 10+10 = 20이 된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가축)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낳았고 낳았고'만 잔뜩 나오는 마태복음 1장의 리스트의 진술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일부 인물이 누락된 이유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라고.. 어린아이의 구원을 당당히 믿은 다윗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과학과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많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죽음도 그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꽤 건전하다. 죽은 사람 갖고 사기를 치는 수많은 미신, 괴담 등에 휩쓸릴 일이 없게 하며, 그 반대편 극단인 "죽으면 다 소멸하고 끝" 염세 회의 허무주의 쪽으로 빠지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

이런 신앙이 있으니 손 양원 목사는 "미국 유학 보내려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라는 초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생명 인격체를 만드는 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인 것 같다. 구원받는 것도 그렇게 현세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한편, 이런 "현세 10+내세 10 = 20"설 말고.. 그 10명은 그냥 욥의 기존 자녀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뭐, 그것도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피엔딩이며, 성경의 심상 면에서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성도들의 집단 부활이라든가(마 27:52-53) 모세의 부활(유 9)처럼 아주 implicit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엄청난 부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욥 당사자도 단순 내세 이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은 와중에(욥 19:26), 욥기에 부활의 실제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자녀를 만드는 건 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도 10명이나 다시 낳으려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욥의 기존 아내는.. 욥을 완전히 떠나 버렸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난 후에 재배회를 했는지.. 그렇지 않고 욥이 재혼을 하기라도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욥의 아내는 막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신앙이 남편만치 좋지는 못했던 그냥 예쁘장한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ㄲㄲㄲ 사탄이 욥의 아내를 괜히 살려 둔 게 아님..)

이런 시나리오에 비해, 죽었던 기존 자녀만 다시 초자연적으로 살아나는 시나리오는 기적 그 자체 말고는 주변의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부활설은 근처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등장하는 '2배 보상'이라는 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녀는 무슨 물건 같은 존재는 아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주님으로부터 온 유산이요 보상이다(시 127:3-5).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축을 2배로 보상해 주셨거늘, 하물며 자녀도 2배로 보충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욥기의 도입부에서는 자녀 수부터 먼저 나온 뒤에 다음에 가축 수인데, 결말부에서는 2배로 늘어난 가축 수부터 나온 뒤에 그 다음이 자녀 수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9 08:36 2019/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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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의 어느 날, 본인은 인터넷 SNS를 통해 알게 된 어느 지인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러 그 지인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제네바 개혁 교회'라고 장로교 계열인데, 기성 주류 교단보다 더 근본주의랄까, 옛날 스타일을 추구하고 교리에 따른 분리를 더 엄격하게 시행하는 곳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근본주의라고 하면 일부 침례교 교파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저런 곳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니 신기했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도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일치 운동 거부하고 동성애 합법화 반대하는 등.. 대세를 따르지 않고 근본주의를 따르는 면모가 있다. 하지만 그걸 '남자는 무조건 정장, 여자는 무조건 긴 치마' 식으로 율법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특히 신기한 건 '칼빈주의'였다.
본인은 루터, 칼빈이라든가 예정론이라는 학설을 태어나서 처음 들은 곳이 교회가 아니었다. 그 대신, 아동용 세계사 만화와 중학교(세계사, 윤리)에서 최초로 접했다. 본인은 어린 시절에 장로교가 아니라 감리교 계열에 속하는 성결교를 다녀서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 못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뿐만 아니라 작곡까지 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에 질세라 시편 찬송가라는 걸 만들었나 보다. 전 악보를 통틀어서 4분음표와 2분음표밖에 없고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조와 음계로 시편을 1편부터 150편까지 몽땅 노래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글쎄, 시편에는 저주도 쓰여 있는데 그런 가사까지 곡으로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장로교 내지 개혁 교회 쪽에서는 일명 TULIP이라고 요약되는 5대 강령을 가히 신앙의 핵심· 진수로 떠받들고 있었다. 성결교에 성결 중생 신유 재림(무순)이라는 4대 강령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 서슬 퍼런 교황과 맞장 뜨고 양심의 자유와 성경적 진리를 추구한 것, 엄격 진지 근엄하고 청빈 검소 고결하게 산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성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한 루터야 말할 것도 없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올바른 성경이 안심하고 번역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다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를 인지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능력마저 상실했을 정도로 타락했다거나, 하나님이 답정너 선택하고 '예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거나, 선물을 받으려고 단순히 손을 뻗는 동작조차도 선물에 대한 값을 치르는 행위이고 자기 의라고 우기는 주장들은 좀 말장난 궤변처럼 들린다. 난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킹왕짱 절대적이라 해도.. 그 끔찍한 죄악이 인간의 자유 의지 책임으로 귀착되지 않는 한낱 역할극에 불과한 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씁 어쩔 수 없지"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칼빈 신학이 실제로 무어라 가르치는지를 내가 직접 배운 게 아니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주위로부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칼빈주의 내지 예정론이 그런 걸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 루터와 달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요한) 웨슬리는 세계사· 윤리 시간에 다뤄질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이쪽은 반대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면서 칼빈주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O Horrible Decree라는 제목으로 TULIP 강령을 신랄하게 디스하고 극딜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뭐 그것까지는 좋은데.. 거기는 반대로 반쯤 행위로 구원 유지, 구원의 상실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인은 들었다.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게 어찌 보면 칼빈주의보다 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기본 중의 기본인 구원관이 정확하게 정립돼 있지 못하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아주 이상한 낭설도 교회에 잔뜩 퍼진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본인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모두 진리도 있고 오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들도 다 교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고, 신학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만.. 뭔가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 그것도 주류 대형 교회가 아니라 마이너한 성향의 교회에 가 보는 건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2.
그나저나 이 교회는 송파구 문정동에 소재해 있고, 교회 근처에는 길 옆으로 문정 근린 공원이라는 도심 속 녹지가 쭉 들어서 있었다.
이 정도로 작지 않은 폭의 공간에 건물 대신 풀밭과 벤치, 주차장이 1km가 넘게 이어지는 건.. 평범한 계획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풍납동의 풍납토성 구간이야 유적 발굴 명목으로 개발이 봉인되고 풀밭과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긴 하지만, 문정 공원은 그런 케이스도 아닌 것 같다.

이건 90% 이상의 확률로 폐선 철도 부지일 거라고 감이 어렴풋이 왔다.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철령께서 내게 계시를 주셨다.
실제로 홍대 일대에는 당인리선 폐선 부지를 따라 어중간한 주차 공간과 건물, 골목이 길게 나 있다. 신촌에도 골목길이 과거 경성 순환 철도의 선형대로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길이 없어지더라도 철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들의 선형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구시가지가 아니라 동남부 외곽에 웬 철도가 있었다가 폐선된 적은 없다. 저 공간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저건 근처의 외곽순환 고속도로와 비슷한 선형으로 수도권 남부 순환 철도를 미래에 '만들려고' 국가에서 1980년대에 확보해 놨던 부지였다. 단선 전철로 여객보다는 화물 수송을 염두에 뒀으며, 의왕에 있는 컨테이너 화물 기지에 이르기까지 선로를 이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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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경부선 의왕(위의 그림에서는 '부곡')에서 분기하는 오봉 화물 기지에서 시작해서 무려 중앙선 도농까지였다.
북쪽의 교외선(능곡-의정부)과 연결하면 진짜로 그럴싸한 순환선 철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계획은 여러 난항에 부딪혔다. 서울 외곽에 자리잡은 군부대 등 보안 시설들과 마찰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여기 일대에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 같은 여객 철도가 지하로 건설하려는 대체 계획이 잡히면서.. 지상 화물 철도의 건설 계획은 1993년에 완전히 나가리 났다.
그 뒤로 이 부지는 미개발 상태로 오랫동안 놀면서 주차장 정도로나 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에 여기가 문정 근린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렇게만 알면 끝인데.. 본인은 그 공원의 일부 구간에 만들다가 말았던 철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정보를 뒤늦게 입수했다. 그래서 즉시 차를 끌고 달려가서 공원을 또 답사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공교롭게도 딱 제네바 개혁 교회 근처였다. 2km에 달하는 전체 공원 구간을 다 돌아다녀 봤는데, 레일이 있는 곳은 유일하게 저기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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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남부 순환 철도라는 게 이게 무슨 구 수인선 같은 역사 유물도 아닌데, 철길을 공원에다 일부러 깔았을 리는 없을 테고.. 저건 그 시절에 만들다가 말았던 폐선 흔적이 틀림없을 것이다.
간격은 표준궤가 맞는데 궤조가 유난히도 작고 가녀린 것 같다. 공원의 그 어느 표지판이나 구조물에도 여기가 철도 노반이었음을 암시하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에, 철도 불모지인 서울의 동남부에서 고가나 지하가 아닌 평지에 깔린 레일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완전 좋다. ^_^ 뭐, 철길의 길이는 100미터가 채 될까 말까이니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 게 좋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있는 게 어디냐.
계획 당시에 땅이 얼마나 놀고 있었으면 평지에다가 대놓고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외곽순환 고속도로와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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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중간에 요렇게 교차로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다.

서울 서부 외곽의 오류동에는.. 경인선에서 분기하는 경기화학선의 폐선 잔해가 건물 뒤로 지나가는 게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동부 외곽에는 지금까지 어렴풋이 말로만 들었던 남부 순환 철도의 흔적이 철덕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강동구에 있는 한영 중· 고등학교와 인근의 큰길인 동남로 사이에 있는 큰 공간도.. 그 시절에 확보해 뒀던 철길 노반의 흔적이다. (☞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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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다. 모처럼 철도와 기독교· 성경을 융합한 글이 하나 완성됐다. ^__^
보라매 공원은 원래 공군 사관학교의 부지였고, 여의도 공원은 원래 여의도 공항 활주로 내지 여의도 광장의 부지였다.
또한, 강북 구도심에는 용산선 철길이 있어서 거의 폐선 상태였는데, 2010년대에 싹 걷히고 지하의 경의선· 공항 철도로 형태가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도 지상 구간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식으로 대도시의 도심에 놓여 있는 공원은 제각기 사연과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제네바 개혁 교회는 이렇게 만들려다가 만 철도 폐선 부지를 활용한 공원의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이 쉬는 시간에 밖에서 교제하기 좋겠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근처에는 큰 도로의 중앙에 무슨 계기로 조성된 '거리 공원'이란 게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1/25 08:32 2019/01/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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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 용태 2019/02/15 21:13 # M/D Reply Permalink

    정말 오랫만이네요.. 여전하신 모습 반갑습니다ㅠ유튜브에서 영상 하나 보다가 용묵님 생각나서 방문합니다.https://youtu.be/xEs3UcUElac요즘은 궤도교통수단(?)의 내비게이션 앱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사무엘 2019/02/16 08:34 # M/D Permalink

      와~ 그러게요!! 너무 오랜만인걸요? 정 용태 님, 반갑습니다. ^^;;
      어디서 또 이런 진귀한 자료를.. 링크도 감사드리구요.
      조향 장치가 없이 앞· 뒤로만 가는 교통수단은 운전을 어떻게 하나 무척 궁금하고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여전히 같은 학교와 직장에 적을 두고 있고 근황에 별 변화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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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trivia

1. 21년 전, 기성 교회에서의 크리스마스 성극 추억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말, 본인은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본인이 다니던 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지도교사 선생님의 주도로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 때 무려.. 뮤지컬을 공연했다. 연극을 하다가 노래가 나올 때면 MR 틀어놓고 그에 맞춰 부르는 거다.

그 뮤지컬의 맨 처음 도입부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에 남아 있는 가사를 검색해 보니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는 곡이고 가사가 다음과 같다.
국내곡인 것 같지는 않은데.. 원곡의 제목과 가사는 무엇인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오래 전 베들레헴에 성경 말씀 그대로
마리아의 아기 예수 오늘 탄생하셨네
천사 찬송하기를, '왕이 나셨다'
그를 믿는 모든 자는 영생을 얻으리.."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라면 이런 컨텐츠는 심의상 공연 불가일 것이다.
이 진영에서는 '아기 예수'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한다. 산타 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 12월 25일 예수 생일 이런 거 다 생깐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니! 이런 OO교스러운 심상이 담긴 용어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성도들 중에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조차 싫어하는 프로불편러도 있기 때문에, 저런 게 버젓이 공연되었다가는 곧장 클레임 들어온다.

뭐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성탄절이 잘못된 거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 자체가 잘못된 교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12월 25일이라도 쉬는 나라가 안 쉬는 나라보다는 나으며, "메리 크리스마스"가 "해피 할리데이" 이딴 말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고로 본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을 지지한다.. =_=;;;

그 뮤지컬은.. "크리스마스 추억"이라는 주제로 그 안에서 또 세 갠가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이 평소에 짜장면을 미치도록 너무 좋아해서 크리스마스 성극을 공연하던 중에도 "손님, 짜장면은 뭘로 드시겠습니까?"라고 NG를 낸 이야기가 있었다.

성탄절의 유래고 뭐고 교리 지식 다 제끼고 동심, 감성, 추억만 생각하면 저런 게 참 훈훈한 기억이다. 그 뮤지컬 각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허나, 그런 긍정적인 심상이 어째 이교도의 전통과 혼합되어 변질되었는지를 같이 생각하면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빨간 싼타 모자 쓰고 열심히 율동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 동영상도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데.. 착잡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ㅠ.ㅠ

주일학교라는 게, 그 당시에는 꼬마들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떠들고 놀지만, 그게 커서까지 추억으로 각인되는 효과를 노린다. 그러니 유아 교육이 유치하고 시시하고 당장 지쩍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나의 동심, 감성, 추억 분야의 결정판은.. 더 말하자면 입만 아프겠지만 2003~04년에 접한 새마을호 Looking for you이다.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신구약 성경이 완결되었듯이 Looking for you가 그냥 영원한 종지부를 찍었다.
국영 독점 교통수단에서 이런 음악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충격 중의 충격으로 나를 철덕의 블랙홀로 빨아들이게 했다. 이걸 능가하는 충격은 내 인생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2.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얘는 성경을 소재로 하는 얼마 안 되는 찬송가 중 하나이다.
완전 동요풍인 "신구약 성경책 (The B-I-B-L-E oh that's the book for me)" 다음으로 조금 나이가 들면 주일학교에서도 접하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책"은 영어로 가사 첫 줄은 There's a dear and precious book..이고 원제는 My mother's bible이다.
"비록 해어졌으나"를 "비록 헤어졌으나"라고 ㅐ를 ㅔ로 잘못 기재한 책이나 사이트가 의외로 굉장히 많다. 구글 같은 검색엔진들에서 자동 완성이 '헤어졌으나'라고 제시될 정도다.
영어 가사가 Tho' it's WORN and faded now이니, 우리말로도 worn out을 뜻하는 '해지다'가 맞다. 어머님의 성경책이 다 낡은 채로 남아 있기라도 하냐, 아니면 영영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빼앗겼냐의 차이이다. 후자라면 작사자는 젊었을 때 신앙을 잃었다가 탕자의 아들처럼 되돌아온 것일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이 찬양은 3절 가사가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즉, 우리말로는 어머님이 우셨다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가사는.. "Then she dried my flowing tear with her kisses as ..."
"내가 울었고" 어머니께서 내 눈물을 닦아 주셨다는 뜻이다..;;
물론 단위 음절당 들어갈 수 있는 정보량이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쨉이 안 되니, 이런 보정은 오역이나 변개는 아니다. 단지 다르다는 것이다.

2절 가사도.. 우리말은 다니엘, 다윗, 엘리야가 언급돼 있지만 원래 가사는 엘리야가 아니라.. '요셉'이 언급돼 있다. 뭐, 요셉보다는 엘리야가 더 포스가 있는 인물인 건 인정한다만..
엘리야가 "병거를 타고" 무슨 은하철도 999처럼 하늘에 올라갔다는 가사는 약간 고증 오류이다.

왕하 2:11을 보면, 불길에 활활 타는 모양의 병거가 나타났다고만 했지, 엘리야가 그 행렬에 직접 합류하거나 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말은 없다. 그냥 혼자 몸뚱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승천했다.
영어 가사는 애초에 엘리야를 언급하지 않으니 이런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3.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

위의 제목으로 오랫동안 방황하며 인생을 허비하다가 뒤늦게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기쁨을 노래한 찬송가가 있다.
얘는 작사· 작곡자가 따로 전해지는 외국곡인데, 원곡은 애초에 찬송가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를 향한 사랑 영원할 것이오"라는 내용의 일반 노래이다. 우리말 가사는 영어 가사와는 무관하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다.

그러니 이 곡은 찬송가로서는 Believe me if all those endearing young charms 같은 원제를 기재해 줄 필요가 없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곡에다가 "존 브라운의 시체" 영어 가사를 병기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의 마지막 2절 가사 끝부분은 "시냇물 흘러 바다에 돌아가듯 나는 주 안에 잠겨지네"이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본인은 늘 궁금했다. 가사를 쓴 사람이 졸업식 노래를 참고하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졸업식 노래의 3절 끝부분은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인데..
찬송가 가사에 저런 냇물-바다 비유가 들어갈 일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주 안에 잠겨지네.."는 침례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심상을 의도한 것일까? 누가 무슨 동기를 받아서 이런 가사를 썼는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4.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찬송가가 있다. 가사의 특성상 간증 집회나 연말 송구영신 때, 혹은 교회 창립 기념 예배 때 두루 부르기 좋다. 극동 방송 발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조사에서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얘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동일한 외국곡 멜로디가 붙어 있는데, 그것 말고 박 재훈 작곡의 민요풍 멜로디 버전도 있다. 이 작곡자에 대해서는 "어서 돌아오오"의 작곡자라고 얘기해 주면 한국인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둘 다 3박자 계열인 건 동일하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두 곡이 모두 실려 있다.
한국곡 멜로디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과 분위기가 꽤 비슷하게 느껴진다만.. 그래도 "부름 받아..."의 작곡자는 다른 인물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멜로디 말고 가사의 출처를 살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본인도 굉장히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얘는 한국인 작사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찬송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유럽 계열도 아니다.

이 곡의 작사자는 보통 T. Sasao라고 소개돼 있는 편인데, 일본인이다.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鐵三郞 1868-1914)라고 메이지 시대를 주로 살았던 성결교 목사이다. 데쓰(tetsu)는 '철'의 일본어 음일 뿐이며 death하고는 당연히 무관하다.
영어 가사가 멀쩡히 기재돼 있어서 일본인 작사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 역시 일본어로부터 나중에 번역된 것이다.

이 곡의 진짜 원어 가사는 이렇다. きょうまで守られ
일본어를 모르는 본인이 보기에도.. 1절 지금(今日)까지 지내 온 것, 2절 몸과 맘도 연약하나(か弱き者を), 3절 주님 다시 뵈올 날이(主の日) 등 우리말과 일본어가 앞부분이 얼추 일치하는 것 같다.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작사한 다른 대표적인 찬송가로는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가 전해진다. March we onward 이렇게 시작하는 영어 가사가 있지만, 외국 사이트에서 검색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옛날 가사는 '일심'도 그렇고 약간 일본어스러운 표현이 있더라. 그래도 저 사람은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작사자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듯하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이다.
"My life flows on in endless song;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고 Robert Lowry 작사의 가사가 분명히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동일 멜로디에 "My life flows rich in love and grace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가사와 함께 T. Sasao가 기재돼 있다. 작사자가 잘못 기재된 것 같은데 제2의 영어 가사는 정체가 뭔지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들의 출처와 계보, 탄생 배경들을 연구해 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성경으로 치면 주석을 같이 보는 것과 같다. 계보가 의외로 복잡하고 배배 꼬인 것, 전혀 찬송가가 아닌 멜로디에다가 번역이 아닌 창작 수준의 가사가 붙은 게 많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곡들의 출처를 구글 검색 한 번으로 바로 알 수 있지 않고, 또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통일/새 찬송가에서 일본인 작사로 알려져 있는 가장 유명한 곡은 나카다 우고 작사의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이다. 내가 알기로 원어 가사까지 영어가 아닌 대놓고 일본어로 기재된(Megumi hukaki mikami yo ...) 거의 유일한 곡이다.
알고 보니 '메구미'가 은혜(惠)라는 뜻의 일본어인데.. 본인은 배틀로얄에서 미츠코에게 낫으로 목이 따여 죽는 여학생 이름으로만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ㅠㅠㅠ ^^;;

Posted by 사무엘

2018/12/24 08:35 2018/12/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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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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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실제 모델 인물인 오 길남은 월북한 뒤 재독 한인을 포섭하는 공작원 명목으로 독일로 파견됐는데.. 북한 정권의 실체를 깨달은 뒤엔 거기서 자수하고 남한으로 귀순했다.

어색한 억지 감동 유도라든가, 좀 식상하고 허무한 듯한 결말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중간 전개는 역시 찢어 죽일 종북좌빨들이 충분히 불편해하고 싫어할 만한 팩트 위주이다.
그러니 북괴의 정체와 흉악한 수작이 까발려지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은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니 나발이니 딴 거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영화계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솔직히 우보다는 좌편향이 훨씬 더 심하지 않은가?

북괴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 중 하나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 걸 넘어서 가족을 저렇게 하루아침에 산 채로 찢어 놓은 것이다.
6·25 이산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옛날엔 여객기 납치로도 단란하던 가정을 많이 파탄냈다.

또한, 저런 젊은 학자들을 속여서 북한으로 보내서 그 가족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악마가 지금 청와대 수장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평화통일 운동가로 보이는가 보다. 정말 같은 부류의 악마이며, 쳐죽일 반민족 반역자임이 틀림없다. 한 번 속는 건 실수이지만 두 번 속는 건 공범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알려지고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2.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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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사각오, God’s not dead, 신이 보낸 사람 등 국내외의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영화를 봤지만.. 얘가 성경 고증과 작품성, 비주얼 등을 고려했을 때 제일 뛰어난 작품인 것 같다. 정말 잘 보고 왔다.
북미에서는 이스터(..)에 맞춰서 지난 봄에 개봉했지만, 국내에서는 종교 개혁 기념일에 맞춰서 10월 말에 개봉했다.

14년 전의 Passion of Christ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음침 암울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잔혹하게 채찍질 당하는 장면 말고는 남는 게 별로 없어서 인상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특유의 교묘한 심상 왜곡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말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 사울의 회심 등 주요 장면들 다 나온다. 대사 중에 성경 말씀 인용이 굉장히 자주 나와서 아주 마음에 든다.
사울이 회심 후에 무슨 물고문 당하듯이 물에 얼굴까지 첨벙 잠겼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게 침례를 의도한 장면이었다면, 난 평가 점수를 더욱 올려 줄 생각이다. 물 뿌리는 세례는 고증 오류이다.

그리고 촛불과 온갖 신들 형상(마리아 형상도 포함)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긍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로마인들의 잡신이라는 부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진다. 이것도 구도를 아주 잘 잡았다.

그러면서 허구 각색도 어색하지 않게 가미된다. 사랑하는 교회 동지가 어이없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남자 청년들 일부가 극도로 흥분하고 분노해서 우리도 칼 들고 쳐들어가서 로마를 상대로 보복하자고 날뛴다.
바울은 회심 전에 자기가 죽이면서 눈 마주쳤던 크리스천들이 때때로 꿈에 나와서 트라우마를 안긴다면서 인간적인 고뇌를 호소하기도 한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교도소장인 로마 군인의 딸의 병을 극적으로 고쳐 준다. 무슨 오글거리는 기도 한 방으로 신앙 치료를 성공한 게 아니라, 자기 의술로 해낸다. 바울 역시 “자기는 소문과는 달리 아무 능력 없으며, 자기가 약함을 보일수록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라고 증언한다. 요런 식의 개연성 있고 자연스러운 허구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 횃불 될 사람은 되고, 사자밥이 될 사람은 그렇게 되면서 순교 행렬이 이어진다. 네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울은 딤후 4:6-8의 유언을 남긴 뒤 예정대로 참수당한다. 그래도 교도소장은 바울과 누가의 인품에 충분히 감화됐기 때문에, 마치 옛날에 안 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된 뤼순 감옥 간수처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바울을 "잘 가시오" 이렇게 공손하게 댄디하게 대해 준다.

바울은 그나마 로마 시민인 덕분에 화형 같은 더 끔찍한 방법으로 죽지는 않고 저렇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형된 거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바울과 네로는 모두 AD 60년대 중후반에 죽은 꽤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로마 제국에 콜로세움 경기장이란 건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약간 뒤인 AD 70년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 등장)

네로 시절에 크리스천들이 로마 대화재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박해받고 처형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원형 경기장에 우루루 풀려나가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하는 것과 "네로 황제"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시기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러니 영화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이다. 하지만 뭐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60년대건 70년대건 시기가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으며, 콜로세움 안이건 아니건 크리스천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신약 기독교라는 게 생겼던 당시에, 예수쟁이들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도저히..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고,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익을 노리고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상한 집단이었다.
남들이 다같이 믿는 신을 안 믿고, 황제를 반신반인으로 숭배하지 않으며, '예수'라는 웬 듣보잡 목수 출신 유대인이 죽었다가 뿅 부활했다는 황당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미친놈 왕따 아싸 반동분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놓고 국가 권력에 반역하고 싸우려 드는 여느 독립투사나 정치범 사상범 같지는 않고, 이웃으로서 개인 단위로 만나 보면 행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슨 마술사 초능력자도 아닌데.. 자기들의 세속적인 통념과 계산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 11:38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지금처럼 아무나 “우리 교회로 오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는 개뿔..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처지였다.
모르는 사람이 교회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면 얘가 진짜 동지 형제인지, 아니면 우리를 밀고할 가짜 끄나풀 첩자인지 판별하는 게 급선무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으니.. 이럴 때 판별을 빨리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믿을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서, 보증서’였다. “우리가 보내는 이 형제는 스파이가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잘 대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옛날 건군 초기에 숙군 작업을 할 때도 “이 사람은 빨갱이가 아님을 내가 보증합니다”가 아주 유효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쪼록 이 영화를 보면 신약 교회가 이렇게 시작됐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저런 여건 속에서 기록되고 필사됐다는 것을 얼추 실감할 수 있다. 복음은 뭔가 GPL 라이선스 오픈소스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이 귀하던 시절에 감옥에 갇힌 채로 찬송가를 부르려면 가사를 평소에 다 외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클래식 교과서적인 명작 영화는 옛날에 벤허 같은 것 말고는 이제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긴 한다.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다.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서 바울은 꼭 볼 가치가 있음을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04 08:36 2018/12/0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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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차이

  • 내가 이 일을 듣고는 내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놀란 채 앉았더니 (스 9:3)
  • 내가 그들을 꾸짖고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이르되 ... (느 13:25)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빡쳤을 때 에스라는 자기를 저렇게 했고, 느헤미야는 남을 저렇게 했구나.. (참고로 뜯다/뽑다 모두 영어로는 구분 없이 pluck off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2. 한글 개역성경의 감성 번역 (개역개정판도 포함)

(1) 습 3:17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영어로는 rejoice over you with joy / great gladness 정도다. 그냥 "너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도의 뉘앙스인데, 하나님이 차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무노무 기뻐하실 거라니! 번역자가 over이라는 단어를 전치사가 아니라 접두사로 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2) 시 8: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만, 내가 아는 전세계 그 어떤 성경 역본도 저기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없다. 개역 말고는. 그냥 excellent(KJV. 뛰어나다) vs majestic(웅장한, 장엄한) 정도로 나뉜다.
번역자가 '크고 아름다워요'라는 심상을 의도한 건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는 아직 저런 표현이 없었는데..

3. 개역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된 곳

(1) 창 37:3 채색옷/색동옷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색동옷 입은 꿈쟁이 요셉을 보면서 자란 건, 개역성경이 비록 큰 줄기는 다르지만 저기서만은 어째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요즘 번역은 장신구가 잔뜩 달린 옷, 소매 긴 옷 등이 트렌드이다. 번역의 정오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2) 엡 4:12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여(perfecting)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킹 제임스 성경만이 perfecting이고 타 역본들은 equip, prepare 그냥 '준비시키다'라고 번역되었다.
이건 구약도 아니고 신약인데, 개역성경이 딴 건 놔두고 여기서는 어떻게 KJV의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4. 사흘 밤낮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게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튿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


굉장히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나, 문제는 성경에는 저 기간에 대해 3박 3일..
three days & THREE NIGHTS
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낮도 셋, 밤도 셋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마 12:40에서 요나의 표적 말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와 문화에 따라 날짜나 나이 계산을 할 때 당일을 포함시켜서 1부터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고 0부터 시작하느냐 같은 유도리와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 day는 '낮'도 되고 '날'도 되는 중의성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는 내가 보기에 그런 유도리가 틈탈 여지가 없다. 금요일이 첫째 날, 일요일이 셋째 날 식으로 계산하면 밤이 "3박"이 되지 못한다. 그냥 2박 3일이 될 뿐이지.
마치 창세기 1장에서 1, 2절까지 몽땅 첫째 날에 포함시켜서 첫째 날이 "하늘과 땅과 빛을 만든 날"이라고 붙이는 격의 오류가 야기된다.

성경에서 third day와 three days가 서로 연결되어 쓰인 용례들을 쭉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들은 완전히 72시간을 꽉 채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48시간은 확실하게 경과한 기간이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도 예수님이 딱 부활하신 시각이 아니라 빈 무덤을 사람들이 발견한 시각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확하게 얼마나 더 전에 일어나서 무덤을 탈출해 나가셨을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넉넉하게는 수요일, 또는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 정도는 돼야 한다.

본인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성 금요일'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나무위키의 설명과 성경의 진술이 서로 충돌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

5. 세례가 아니라 침례이며, 침례는 구원 증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1) 침례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신약 기독교회에서 성경에서 행하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2대 의식이다.

(2) 또한 침례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조건이 전혀, 절대 아니다. 사람을 교회에 소속시킨다거나 종교적으로 뭔가 성화· 버프 시켜 주는 효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앙 고백 내지 구원 간증 같은 인증일 뿐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은 뒤에 침례를 받는 게 나중이다. 이거 순서가 꼬이면 정말 사람 피곤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물론 침례인 요한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성격과 의미가 약간 다른 회개의 침례 같은 게 존재하긴 했었다(행 2:38 같은).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1) 성경의 용례를 따라 꼭 물에 전신이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강조하며, (2) "애들은 가라"이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 유아들에게는 그걸 절대 주지 않는다. 행 8:37이 KJV 이외의 성경에서 삭제된 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를 야기했다고 본다.

애들한테 유아 세례? 영세? 전~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들은 설령 그 상태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해도 특례가 적용되어 어차피 무조건 구원 받는다. 이거라도 있으니 예수님 시절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애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도 된다. 유아 세례가 이 복된 교리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시겠는가?

기독교계의 여러 종파 교파들 중에 침례교가 참 역설적이게도 침례에 다른 종교적인 의미나 주술적인(?) 능력을 일체 부정하고 침례를 제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냥 주님께서 명령하신 독특한 신앙 고백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쓰인 빵과 잔이 그냥 상징 외에 다른 아무런 주술적인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성경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교리인데, 역사적으로 이 사소한 교리 하나 지키느라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나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6. 히브리서의 저자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욥기의 저자는 모세라고 생각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의 근거는 구약을 통틀어 창세기와 욥기에만 존재하는 sons of God, being old and full of days이다.
히브리서의 근거는 바울 서신서에만 존재하는 Timothy, brotherly love, Grace be with you이다. 거기에다 킹 제임스 성경에만 존재하는 제목과 끝인사도 추가적인 증거 역할을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이탈리아에서 써서 디모데 편으로 보냄)

욥기에 대해서는 중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엘리후가 자신을 1인칭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엘리후가 책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욥 32:16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가 긴 대화를 채록했을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지만, 저 구절은 3인칭 시점의 텍스트에서 엘리후의 말이 직접 인용된 것일 뿐이다. 욥기가 전반적으로 엘리후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된 건 아니며, 32장의 중간에 갑자기 엘리후의 말 인용이 끝나고 엘리후의 동작에 대한 서술로 시점이 바뀔 만한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구절은 그냥 "제가 좀 기다려 봤는데 형님들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견 좀 털어놔야겠다고요."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에서 화자의 시점만으로 욥기의 저자를 추측하는 건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성경에서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이 한 문장 안에서 갑자기 왔다갔다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행 1:4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구절의 역본별 번역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경우 비록 처음에는 완전 이질적인 문체로 시작해서 정체불명이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성도들의 행실 얘기가 나오면서 바울 서신 냄새가 짙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앞부분도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원리와 맥을 잡으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저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을 기록할 만한 실력자가 그 당시에 바울 말고 또 있었을까? 내가 읽어 본 느낌은 그렇다.

백범일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보안 때문에 처음에는 생뚱맞은 가명 불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행적을 보면 그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폭탄의 공급책이던 김 홍일 장군 말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의 표현 기법이 쓰인 게 아닐까?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본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열왕기하의 끝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 왕의 체포)
마치 역대기하의 끝부분과 다음 에스라기의 시작 부분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표현의 유사성"에 최대한 의미를 둔다면, 이런 식으로 결론이 일관되게 도출된다. 창 1:2와 렘 4:23에서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게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 정황상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이다. 에녹이 아니며 다른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글쎄, 히브리서의 저자를 의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부터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다는 식의 썰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이나 침례인 요한이나 신약 복음서의 기자는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내용 역시 아무 이질감 없이 이사야의 책, 이사야의 말이라고 버젓이 인용하는데도 말이다.

본인이(다른 모든 bible believer들도 포함) 창세기의 1~11장 내용이 다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아담이 실존 인물이며 노아의 홍수가 실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굳이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든가 에덴 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네 하는 낭설이 없어도 된다.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 아벨(마 23:35)과 노아(마 24:37-39)를 버젓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증하면서 교차 검증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 내가 예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모험이나 도박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4 08:37 2018/08/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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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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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생각들

1.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북한에다가 좀 엮어서 비유해 보자면..

(1)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구원의 영원한 보장.
==> 북한은 법적으로 대한민국의 미수복 영토이고, 거기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번 탈북에 성공해서 자유 남한에 온 이상,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결코 재북송되지 않는다.

탈북자가 남한 와서 그 어떤 끔찍한 사고를 치고 흉악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사형 무기징역 선고받고 남한 교도소에서 평생 썩을지언정 북송되던가? 이런 차원의 문제다. 구원받으면 사람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싹 바뀌며, 그건 그 사람의 행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2)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과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현재), 죄의 임재로부터 구원(미래)
==> 북괴의 직접적인 마수를 제거(과거.. 6·25 전쟁 때 대판 싸워서), 북괴의 위협을 제거(현재.. 휴전선에서 으르렁거리고 간첩이나 잡으면서..),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미래.. 과연 가능이나 할까?

2.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무슨 엉덩국 만화에서 홍콩 행 게이바에 들어온 존슨이 아니라, 남한 땅을 일단 밟은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저 제목과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도 같은 급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남한 내부의 탈북자들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북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좌빨 언론들이 뭐 탈북자 신문 센터에서 탈북자들이 인권유린 가혹행위를 당했네 뭐네 별 트집을 다 잡는가 보다.
거기서 탈북자들을 위장 탈북 간첩으로 너무 의심하다 보니 인권모독 발언, 구타 감금 같은 짓이 일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게 과연 아예 재북송보다도 더한 인권 유린일까?

그리고 사실은 반대편에서도 우리 같은 원칙을 적용해 주면 더욱 좋겠다.
북괴 좋다고 북으로 가 버린 사람들.. 거기서 영원히 다시는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 간절한 바람이다.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보낼 게 아니라, 돼지새끼 좋아서 안달 난 새끼들, 평양도 아주 살기 좋다고 침 질질 흘리는 빠가들이나 몽땅 북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은가?

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북한 주민들 구제 이상으로, 북괴 체제가 저딴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 통일은 결사 반대론자다.
김돼지를 재판에 회부해서 처벌하고, 국군의 손으로 정치범 수용소 문을 따고 들어가는 통일이 아니면 다른 통일 따위 1도 할 필요 없다!

북한 인권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고? 응, 참견 안 할게. 단, 그 대신 네놈들도 우리랑 통일 하자고 가증스러운 수작 안 부렸으면 좋겠다.
지극히 정당한 논리와 근거를 갖고 반대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나 같은 사람을 잘도 얼마든지 반통일 적폐로 몰아붙이고 공격해 봐라.

3. 악의 무리들이 하는 짓들의 패턴

(1) 경전, 법전의 변개

  • '그분의 피' 삭제, '기도와 금식' 삭제. 성경을 야금야금 뜯어고치고 변개. 애초부터 이미 잘 번역되고 정착돼 있는 성경은 내팽개치고, "현대의 발달된 사본학과 언어학으로 잘 살펴봤더니" 그 단어는 나중에 임의로 추가된 것일 뿐이고, 원래 뜻은 그게 아니고 굳이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인이고, 홍해가 아니고 갈대밭이고 어쩌구 저쩌구...
  • '자유 민주주의'에서 굳이 자유 삭제. 자유라 하면 옛날 '자유당' 오로지 나쁜 심상이다.^^ 근로자 대신 노동자, 국민 대신 인민이나 그냥 사람 등등~

어떤 최종 권위 텍스트에서 단어가 하나라도 바뀌거나 빠지는 것에 대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 (1) 성경이 단어 하나라도 변개돼서는 안 되는 골수 성경 신자들, 그리고 (2) 인간의 죄성에 빠삭하고 언어 교란 선전 선동술의 프로 전문가인 공산주의자 빨갱이들.

(2) 역사 왜곡

  • 역사상 기독교인들을 제일 많이 학살한 괴물 집단이 정통 기독교 타이틀을 자처하면서 피해자들의 역사는 몽땅 말살하고 부정하고 왜곡함.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아주 긍정적인 승리로 선전함.
  • 자기 나라 역사는 오로지 잘못된 거 부정적인 것 한계만. 적 진영의 역사는 완전 정반대로.. 입만 더 아플 것 같으니 더 말을 말자..

(3) 거짓 평화

  • 유대인들은 옛날에 진짜 메시야는 배척하고 "그의 피가 우리에게로" 이랬는데, 미래의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환호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된통 당하고 뒤늦게 정체를 깨닫고서 개고생)
  • 저 일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어디에서는 거짓 평화 공세에 혹해서 세계 최악의 살인마 독재자보고 우리 민족이라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환호하고 귀엽게 생겼다고 캐 난리.

당연히 성경 자체에 무슨 남한 북한이 나오는 건 아니다. 14만 4천 명이 누구랑 관계 있고, 동방의 의인이 무슨 자기 교주이고 하는 그딴 소리는 개소리이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이런 나라들은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 중의 하나일 뿐, 걔네들이 유대인 이스라엘처럼 성경의 세대적 경륜의 직접적인 선상에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성경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습득된 그 세계관, 성경의 사고방식,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반복되는 '추상적인 패턴'을 염두에 두고 세상사와 정치를 동일한 잣대로 일관되게 평론하고 전망할 수는 있다! 왜? 해 아래에 새로운 건 없으니까. 이 개념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로마 교황이 미래에 나타날 성육신한 마귀 적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 하던 짓거리로 봐서는 거기에 정치 종교적으로 항거했던 사람들이 저놈은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으며, 그 시절에 존 네이피어(수학 로그의 고안자)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처럼 북괴 정권은 얘 자체가 성경 교리 차원에서의 적그리스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얘들이 주민들에게 해 온 짓거리는 대환란기 때 벌어질 적그리스도의 본색 통치와 인류 역사상 가장 유사한 형태이며,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4. 우박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라는 게, 관측 가능한 모습만 서술하자면 공중의 구름 속 얼음 조각(빙정)이 적당히 커지고 무거워진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상 현상이다. 녹으면 비가 되고 언 채로 내리면 눈이 될 뿐이다.
구름은 짙은 안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건이다. 비행기 안이나 높은 산을 오르는 중에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잠시나마 할 수 있는데, 별 거 없다. 그냥 시야가 싹 흐려지고 온통 회색 천지가 됐다가 다시 풀려난다.

본인 역시 흐리고 비 내리는 날에 등산을 갔다가 이걸 실제로 겪은 적이 있다. 구름 속에 있다고 해서 딱히 눅눅하고 축축한 느낌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때로는 하늘에서 비나 눈보다 더 더 딱딱한 얼음 덩어리인 우박이 떨어질 때가 있다. 얘는 큰놈을 맞으면 좀 아플 수가 있다. 심하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며, 건물과 차량을 부수고 농사를 아작 내는 재앙이 된다.

우박은 눈이나 비가 되어 곧장 떨어져야 할 빙정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대기의 상승 기류를 타고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녹지 않은 채로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을 때 생긴다. 그러니 기온이 무작정 낮을 때가 아니라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대기가 불안정할 때 더 잘 생긴다. 우박이 한겨울보다는 봄에 더 잘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우박은 이집트의 재앙(출 9:18)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나오는 대환란 재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라고 언급된다.
구름 속 얼음 조각들을 평범한 눈· 비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마치 기 모으듯이 요리조리 만지작만지작 크기를 일부러 키워서 우박으로 개조한 뒤에 떨어뜨리는 건 신의 입장에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콩알만 한 우박은 그냥 귀여운 애교 수준이겠지만, 관측과 기록이 있는 근래에 수백 g~심지어 1kg에 달하는 우박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검색을..) 당연히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런데 성경은 미래의 대환란 때 무려 1 달란트 무게의 우박이 떨어질 거라고 말한다(계 16:21). 달란트는 화폐 단위일 때도 매우 큰 단위이지만, 무게 단위일 때는 거의 27~30kg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 뭐 우박 한 덩어리가 수박을 넘어서 쌀 한 가마니나 무거운 아령, 완전군장의 무게에 맞먹는다. 일반적인 기상 현상/이변으로 발생하는 우박보다 수십 배 이상 무거운 놈이다.
얼음의 밀도만으로 우박 덩어리의 무게를 그 정도로 키우려면 우박 하나가 사람 머리통 이상으로 더 커야 할 것이고, 아니면 우박 안에 무슨 쇳덩어리라도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우박을 맞는 지역은 당연히 완전 작살이 나며, 이 재앙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창 욕하고 모독할 것이라고.. 그 예상까지도 성경에 친절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5월 초에 서울에 난데없이 천둥과 우박이 내린 걸 보고는 성경에 나오는 우박 생각이 문득 들었다.

5. 웰 다잉

요즘 웰빙뿐만 아니라 '웰 다잉'이라고 해서 죽는 것도 미리 준비해서 품위 있게 죽자.. 뭐 그런 트렌드가 있다.
이게 조금 더 엇나가면 "더 추해지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다"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윤리 논쟁까지 일으키게 된다만..

그래도 미리 장례 체험, 유서 미리 쓰기.. 이런 움직임 정도라면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군생활 하면서 KCTC 훈련 중에 적탄에 맞으면 전사로 처리되어 전장에서 열외된다. 영현빽에 산 채로 들어가고 자기 배 위로 태극기가 덮이는 체험을 해 보면, 체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고 한다. 군대 가서 유익한 경험을 하고 온 셈이다.

물론,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들은 죽음 준비 전문이니 이 분야에서 자기 교리를 따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이다. 군대에도 군종이라는 병과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군인이란 직무 수행 중 순직할 수 있는 직업의 최고 극한 형태이니까..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약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내세와 심판, 절대자에 의한 구원과 영생이 핵심 교리이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에 대해서는 구약 유대교와도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좋은 교회는 복음 전파와 구원에 충실해야겠지만, 그 뒤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성장·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시키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든, 아니면 산 채로 휴거되어서 가든.. 거기서 하나님이 무슨 질문을 할지, 우리는 욥기 끝부분을 능가하는 어떤 팩트폭격을 당하게 될지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학원생이 졸업을 위해 논문 심사를 받는 순간이 오고 기업가가 정기적으로 세무 조사를 받는 순간이 오며, 기업에서 인사고과 평가를 하는 날이 오는 것과 같다. 일단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행 천국행을 결정하는 심판에는 걸릴 일이 결단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평가를 받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걸 늘 의식하고 산다면 크리스천의 삶이 지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12 08:31 2018/07/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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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으로서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

'성(城)'이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 인트로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주변에 moat라고 불리는 도랑도 있고 거대한 저택이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래도 만리장성 같은 긴 성벽이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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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남한산성과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양도성은 세계 유산에까지 등재될 정도의 유니크함은 부족하다는 판정을 받아 등재가 거절됐다.

수원화성은 남한산성만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없고 한양도성만치 오래되지도 않은 데다, 일제 시대와 6· 25 전쟁을 거치며 왕창 훼손됐던 것을 어차피 후대에 재건· 복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화성 성역 의궤(儀軌)'라는 기록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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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짓는 데 동원된 기자재와 구체적인 공사 기법, 건설 당시의 꼼꼼한 일지, 건설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 주고받았던 공문들, 건설에 참여했던 석공과 목수들 명단... 이런 게 미주알고주알 몽땅 적혀 있다.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파괴됐다 해도 이 FM대로만 다시 이행하면 정말 1700년대 고증을 100% 반영해서 성을 똑같은 절차를 동원해서 똑같은 형태로 고스란히 다시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 소스 코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지 현대 고고학 지식을 동원해서 재추적해야 하는 이집트 피라미드나 이스터 섬 모아이 같은 물건과는 처지가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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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그 유명한 오사카 성만 해도, 저 정도의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건된 건물은 그냥 외형만 얼추 닮았을 뿐, 내부는 그냥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재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조선이 말기에 망한 과정이 워낙 추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실록을 포함해 기록 하나는 타 왕조나 국가들보다 신경 써서 잘 남겼다. 이런 기록 덕후 왕조에서 한글 같은 문자를 새로 창제했으니, 문자의 창제 시기와 설계 컨셉 같은 것도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런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으며, 지금의 재건 레플리카가 1700년대 초기 원형 건물과 동급의 권위와 정통성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원형 건물과 동등한 권위"... 아마 킹 제임스 성경 빌리버들에게 귀가 솔깃하게 들릴 텐데..
그렇다. 성경도 이런 정도의 퀄리티로 전수되고 번역됐다. 그렇기 때문에 자필 원본이 진작에 소실되고 없어도 지금 읽는 역본이 자필 원본과 동등한 영감을 담고 있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오래되고 낡은 채로 짱박혀 있는 소수 사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필사되고 읽히고 닳아 없어지길 반복했으며 교차 검증도 되는 다수 사본이 진품이다.

또한 수원화성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 기록돼 있는 온갖 쓸데없이(?) 디테일해 보이는 사람 명단이나 숫자 목록, 물건들의 구체적인 치수들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성경 기록이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까지 포함해서 모두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2. long S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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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를 오늘날보다 더 많이 쓰고 있고 (booke, fowle, forme, grasse, selfe, sunne, starres)
u와 v가 헷갈리는 등.. (heauen??)
완전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단어 스펠링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겨우 thou, thy, -eth 이런 건 그냥 약과다.

심지어 KJV의 고유한 특징이라 불리는 '이탤릭체'조차도 오리지날에서는 이탤릭이 아니었다.
보다시피 본문은 뉴욕 타임스 같은 '고딕체'이고, 이탤릭은 그 안에 작은 크기의 '로만체'로 적혀 있다. (정작 난외주에서는 이탤릭체가 쓰였는데도!)
첨가된 단어에 대한 표기는 차라리 한글 개역성경과 더 가까운 형태인 셈이다.

그런데 I와 J, U와 V, W 이런 게 오락가락 하는 건 제쳐놓고라도.. s가 f처럼 적혀 있는 건 굉장히 적응이 어렵다.
graffe, beafts, felfe, feafons, leffer, faid, firft, alfo (???)
게다가 모든 s가 저렇게 쓰인 것도 아니고 s 자체 역시 따로 있다. s와 f모두 각각 음절초와 음절말에 다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등장 조건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

독일어 철자법에 ß가 있는 것처럼 저 시절에는 long S라는 게 따로 있었다.
내 생각에, 한글로 치면 아래아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처음엔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한쪽의 음가가 오래 전에 소멸하고, 영어의 철자법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결국 long S는 짤린 것이다. 그게 무려 1700년대의 일이다.
아래아가 음가를 상실한 뒤, 20세기에 와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짤린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 하겠다.

킹 제임스 성경이 원체 archaic한 단어와 문체로 유명하긴 하지만, 글자 자체도 archaic한 놈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수학에서 일명 '인테그랄'이라고 불리는 적분 기호 ∫가 바로 길게 늘어뜨린 long S의 후신이다. sum을 나타낸다.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본인은 개인적인 신앙 노선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이다.
구원의 길이 예수 유일이듯이, 그런 독단 배타적인 교리를 텍스트 형태로 명시하고 있는 성경도 특정 역본 유일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거나 어색할 것이 전혀 없다고 본다.

성경만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느 텍스트가 번역될 때와는 달리 예외적이고 특례적인 섭리와 보존이 있었다고 믿는다. 설령 KJV라는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이나 번역자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기독교계가 원어 원문 운운하는 온갖 지적 사기와 말장난, 혼돈을 벗어나서 뭔가 절대 기준을 가질 수 있다. 교리의 근간과 믿음의 대상이 존속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고전 텍스트들은 잘난 학자들이 점점 더 원래의 의미를 복원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이미 정확하게 잘 완성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트렌드가 반대로 타락하고 퇴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 왕이 아기를 둘로 쪼개서 반반씩 나눠 가지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아이의 진짜 엄마는 완전 화들짝 멘붕했지 않던가?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읽는 성경이 변개되고 파편화돼 있다는 말을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JV 유일주의는 기독교계에서도 소수설로 취급되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다.
이런 사람들은 KJV에 '없음' 구절이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 반대로 '없음'이 원래 맞고 KJV가 후대에 추가(!!)돼서 사본학 근거가 부족한 구절까지 덤으로 갖고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없음'이 있긴 하지만 동일한 내용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도 해명한다. 예를 들어 마 17:21에서 "기도와 금식"이 삭제되긴 했지만 막 9:29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가 삭제되긴 했지만 엡 1:7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이다.

행 12:4의 '이스터'(파스카)와 마 12:40의 '고래'(케토스)는 단골로 오르내리는 번역 이슈이다. 이건 KJV 옹호 진영에서도 다 반박이 돼 있다.
요일 5:7은 일명 '요한의 콤마'라 하여 킹 제임스 성경에서만(동일 계열의 바른 사본도 포함)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온전히 입증하는 구절인데... 이것도 원래 성경에는 없던 말이 후대에 추가된 거라고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은 나쁜놈들이 변개하고 삭제하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과잉 충성분자가 첨가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본다. 계 22:18을 뻔히 믿는 사람이 설마 감히 첨가를 하겠는가?

그리고 원어· 원문뿐만 아니라 해석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구절이 있다. KJV 빌리버들은 시 12:6-7이 하나님 말씀 보존에 관한 약속이라고 본다. 7절에 나오는 preserve them은 당연히 바로 앞의 words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이마저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한다는 말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이런 말을 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다중적용 예언이 나오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불편해하고 굳이 가리려고 애쓰는 건, 마치 창 22:8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것임"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고 창 1:2와 렘 4:23을 같이 연결하여 심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단시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KJV 유일주의를 기를 쓰고 공격하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저런 유명한 구절들을 끄집어내서 KJV가 오역을 했거나 원래 원문에 없는 문구를 추가한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벧전 2:2까지 거론하면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자라라"가 아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라는 잘못된 교리가 맞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성경과 관련하여 어차피 어딘가에 권위를 둬야 한다면, 현대 역본 번역자나 원어학자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400여 년 짬밥의 안정화 내력이 있는 영어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하고 현실성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지엽적으로 약간 오류(흑역사, 아쉬운 점, 단점, 나쁜 점, 부정적인 것)가 있지만 그래도 큰 그림을 보면 좋은 게(선한 것, 감사할 것, 유익한 것 등..) (훨씬) 더 많고 괜찮다."
이런 사고방식은 통계를 동원하여 공학 연구나 과학 실험 결과를 평가할 때, 혹은 우리나라 현대사 같은 걸 논할 때, 이·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의 행적을 평가할 때는 적절하고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적당히 오역이나 오류도 좀 있지만 대충 요점만 들어맞으면 되는 부류의 책이 아니다. 만약 성경이 그런 부류의 책이라면 자기가 성경의 오류 감별사라고 설치면서 궤변 말장난을 늘어놓는 사기꾼들, 성경에 기록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내용들을 제멋대로 영해하는 미친놈 이단 교주 등.. 그로부터 야기될 혼돈· 무질서와 오류, 부작용, 폐단이 가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내가 저런 사고방식을 몰라서 KJV 유일주의를 고수하는 게 아니다. 성경이 기독교 정체성의 유지에 어떤 기여를 하는 존재이며 나에게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지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28 08:29 2018/06/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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