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수 년 전에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는 멘탈이 붕괴되고 매우 비참하게 몰락하긴 했지만, 근본 성품이 무슨 카인, 이세벨, 발람 같은 급의 순악질은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의 성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당히 오락가락 한 정치인이었으며, 인간적인 관점에서의 점수와 하나님 관점에서의 점수가 매우 크게 차이 나는 사람에 속한다. 요즘으로 치면 구원받고도 계속 죄 짓고 하나님과 제대로 교제하지 못하다가 간증 잃고 건강 잃고 끝내 목숨까지 잃은 불행한 신자와 비슷하다.

본인은 그래도 사울도 구원은 받았으며, 특히 삼상 28에 기록된 엔돌의 무당 씬에서 나타난 사무엘은 진짜가 틀림없다고 글을 썼다. 그는 신약의 바울과 비교되는 상징적인 인물인 데다, 명색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데 하나님이 구원도 못 받은 사람을 자신의 선민들의 왕으로 지명하셨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요 근래에는 사울의 구원 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삼상 28의 사무엘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서 논쟁을 벌였다. 가짜설을 믿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이건 마치 재창조 간극 논쟁과도 비슷하다. 저 사울이 진짜였건 가짜였건 그게 크리스천의 구원이나 행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이다. 저 사람들의 성경관이 본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하면 성경으로 성경을 풀이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성경이 정확하고 무오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서는 신· 구약의 시대 차이와 구원관 같은 것도 엉망진창인데, 그것까지 거론했다가는 얘기가 끝이 안 나고 싸움만 날 것이다.. =_=;;;

이런 논쟁을 24시간 맨날천날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는 없다. 계산 결과가 아니라 계산 과정의 검증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본인의 근거와 논리를 복습 차원에서 다시 전개하고자 한다.

문제의 인물이 진짜 사무엘인 이유는 (1) 첫째, 성경이 그냥 평이하게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걸 특별히 뒤집을 만한 문맥이 주변 어디에도 없으며 관련 참조 구절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 상징? 가짜? 도대체 무슨 근거로?

다른 유사 논쟁거리를 살펴보면..

  • 욥기에서 "네가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 같은 것이야 그냥 욥의 친구의 개똥철학 뇌피셜 문맥일 뿐이다.
  • 재창조 간극이야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넘어 베드로후서나 예레미야 같은 참조 구절들과 연계해서 약간 간접적으로 유도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6천 년 젊은 지구 덕후가 창조과학 진영에 많이 존재한다. 그리고 재창조 교리가 주장하는 바도 현 세상의 창조 6천 년 자체는 맞는 얘기이고 단지 큰 전체 그림이 6천 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6천 년이라는 문자적인 단어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 가룟 유다는.. 그놈 자체가 마귀(요 6:70)라는 말도 있고, 사탄이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고(눅 22:3, 요 13:27), 사탄이 놈의 생각을 주입하고 조종했다는 말도 있다(요 13:2). 이런 건 진짜로 인간과 사탄의 관계에 대해서 입체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표현이 다양하게 나오니까 말이다.

허나, 삼상28의 본문은 다른 참조할 만한 구절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냥 여기 문맥만 잘 살피면 된다.
15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16절 "이에 사무엘이 이르되", 20절 "사울이 사무엘의 말들로 인해..".. 그냥 성경이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사무엘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 달리, 사울 혼자만 쟤가 사무엘이라고 착각한 게 아니다.

그 와중에 저 사무엘이 페이크라면 성경이 독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자기 직관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입다의 딸은 진짜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피지배민들에게 그냥 노동만 시켰지 진짜 톱으로 사지를 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대상 20:3) 같은 온갖 못된 습관이 시작된다. 이게 발전하면 나중에는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아가씨일 것이다",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일 것이다"가 되는 것이다.

(2) 그리고 둘째.. 어찌 보면 이게 진짜 중요한 이유인데,
이전 글에도 썼듯이 저 사람의 말에 담긴 미래 예언(사울 부자의 최후)이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적중했기 때문이다.

"사무엘이 자라매 {주}께서 그와 함께하셔서 그의 말들 중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게 하시니라." (삼상 3:19)


머리털이나 참새가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성경의 다른 부분을 보면 나온다.

"... 곧 {주}께서 아합의 집에 관하여 말씀하신 {주}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 (왕하 10:10)


쉽게 말해 예언 적중이다. 그럼 저 사무엘(?)의 말은 어찌 되었는가?

"... {주}께서 왕국을 네 손에서 찢으사 네 이웃에게 곧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주}의 음성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맹렬한 진노를 아말렉에게 집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이 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또한 {주}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주}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겨주시리라" (삼상 28:17-19)


정말 빼도 박도 못하고 완벽한 적중이지 않은가?
성경에서 어둠, 누룩, 썩음이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심상이라면, 예언 성취는 정말 우선순위 0순위의 최상급 긍정적인 심상이다. 애초에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이 담긴 초자연적인 책인 주된 이유도 정확하고 구체적인 예언의 성취이다.

아합 왕을 미혹한 거짓 영이라든가, 욥이 하나님을 저주할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사탄 마귀, 예레미야와 맞장 떴던 거짓 대언자 하나냐를 생각해 보라. 성경 어디에도 나쁜놈이 부정적인 팩트 폭격과 정확하게 적중한 바른 예언을 한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예언의 적중 여부만으로 진짜 대언자와 거짓 대언자를 구분할 수 있다고 당당히 써 놓기까지 했다(신 18:21-22).

반대자들은 무당만 사무엘을 봤지 사울은 사무엘을 보지도 못했다면서 사무엘 진짜설을 부정하는데.. 사무엘을 봤건 못 봤건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무엘의 저 말이 가짜가 할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는 단일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게다가.. 너무 매정하고 잔인한(?) 말 때문에 사울을 더 낙담시키고 절망시켰다면서 저건 진짜 사무엘의 말이 아니라 그러는데..;; 그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예수님이 우셨더라"(요 11:35)가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은 게 슬퍼서 우셨다는 말만큼이나 그냥 감성 충만한 견해로 보인다.

사무엘의 말과 관련하여 하나 더 생각할 게 있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사 같지 않은가? "...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눅 23:43) 그럼 사무엘이 예수님 같은 구석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것도 심증상의 증거가 있다. 사무엘과 예수님은 성장 과정에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호의를 입었다고 기록된 유일한 트윈이다. 이것도 누가복음 구절이고,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도 누가복음 구절이다.

  • "아이 사무엘은 점점 자라면서 {주}와 사람들에게 호의를 입었더라." (삼상 2:26)
  •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호의를 입으시더라." (눅 2:52)

그러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무엘의 저 말은 거짓 대언자, 마귀 등의 나쁜놈이 내뱉었다고 성경에 기록될 만한 말은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설령 그게 참말이건 거짓말이었건 그와도 무관하게 말이다.
저 말이 마귀 내지 지옥 자식의 입장에서 참말이라면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은 지옥불에서 같이 활활 타고 있을 것이다" 정도의 의미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런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무엘 가짜설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은 건 성경의 난제를 성경으로 풀어 본 경험이 없고, 그냥 자기 직관을 여전히 성경의 관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저 단순히,

"사무엘 같은 위대한 신앙 거장이 한낱 무당의 푸닥거리에 소환되다니, 그럴 리가 없다.
진짜 사무엘은 사울과 연을 완전히 끊었으며, 아말렉 전투 이후로 평생 사울을 전혀 만나지 않았다. 사울이 사무엘 사칭 귀신을 진짜라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때가 있다"


이 정도가 전부이다. 먼저 예언 부분을 살펴보자.

물론 마귀 졸개들이 죽은 사람 흉내를 낼 수 있고, 과거 학습을 통해 인간의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도 아주 조금은 맞힐 수 있다. 정확도가 0%라면 애초에 저런 데에 사람이 현혹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허나 그런 잡스러운(??) 예언은 사무엘의 예언과 같은 퀄리티에 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성경 내부의 텍스트를 해석할 때만큼은 마귀의 예언도 적중할 수 있다는 가정은 정말로 전혀 할 필요 없다.

그리고 무당 소환이라.. 다른 성경들은 무당을 그냥 무당 medium이라고 번역했지만, 사실 KJV는 부리는 영..(familiar spirit) 지닌 사람이라고 풀어서 표현했다. 마치 동성애자라고 안 하고 남색하는 자, 남자와 더불어 자신을 욕되게 하는 남성 이렇게 길게 풀어서 표현하듯이 말이다. (내 글 <음란한 성경은 가라> 참고)

부리는 영은 familiar. 말 그대로 친숙한 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무엘이 뿅 소환되었을 때 그 무당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혀 familiar한 반응이 아니었다. 무당의 푸닥거리 타이밍에 맞춰서 사무엘이 그냥 뿅 나타나 준 거지 애초에 무당이 자기 능력으로 소환해 낸 것도 아니었다. 구약 성도들이 가 있는 지하 낙원에서 대충 이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괘씸해서 내(하나님)가 쟤(사울)에게 응답을 안 하고 가만히 있어 보니, 쟨 아예 무당까지 찾아가는 막장짓을 하는구나. 안 되겠다, 내키지는 않겠지만 네(사무엘)가 좀 가서 딱 한 번만 더 따끔한 돌직구 날려주고 오너라. 쟤한테 지은 죄를 깨닫고 죽을 준비를 하게 최소한의 아량은 베풀어 주도록 하자."


이런 상황에 가깝다.
성경대로라면,

  • 초자연적인 기적이 발생해서 사람이나 식물이 불이 붙어도 타 죽지 않을 수 있다. (출애굽기, 다니엘)
  • 동물이 말을 할 수도 있다. (발락과 발람)
  • 죽은 사람이 올라와(구약 시대 기준) 살아 있는 사람을 잠시 만난다거나, 아예 완전히 살아날 수는 있다.

하지만,

  • 거짓 대언자, 마귀 졸개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한 게 버젓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거나,
  • 하나님이 버젓이 거짓말을 성경에 써 놓는다거나,
  • 신 18:21-22 말씀이 적용되지 않는 예외가 생긴다거나 할 일은 없다!!

전자는 그냥 단순히 과학적으로만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인 반면, 후자는 아예 하나님의 성품, 성경의 무오성과 정확성을 뒤흔드는 짓거리이지 않은가?

"진짜 사무엘이 무당의 푸닥거리에 맞춰서 나타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정도는 마치 "천사는 인간과 결혼할 수 없다", "짐승에게는 영이 없다"만큼이나 그냥 인간의 편견일 뿐이다. 그 사무엘이 가짜일 때 성경에 야기될 모순과 오류보다는 훨씬 더 개연성이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도 저 사무엘이 문자 그대로 그냥 사무엘이라고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도 어렵고 납득이 안 된단 말이냐..??

결론을 내리겠다. 거듭 말하지만 성경이 사무엘이라고 말했다면 문자 그대로 사무엘이 맞다. 성경이 자체적으로 정의하는 문맥이나 참조 구절을 통해 다르게 해석하고 보정해야 할 사유가 없는 한, 6일은 문자적인 6일이요, 천 년은 문자적인 천 년, 나사로는 실존 인물, 유대인은 문자적인 유대인, 그리고 저 사무엘은 실제 사무엘이다.

이런 사무엘마저 가짜라면.. 지금 지구와 우주도 6천 년밖에 안 됐는데 하나님이 페이크로 엄청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한 거라는 어거지 논리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통할 수 있지 싶다. 이건 마치 이사야서의 뒷부분은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네 하는 소리와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18 08:33 2019/07/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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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한 주제들

1. 개고기

인간이 동물에게 행하는 수많은 비인간적인(?) 짓을 생각해 보자. 고기· 알· 가죽을 최대한 저렴하게 얻기 위한 착취, 도축, 임상실험 등등.. 그걸 놔 두고 오로지 개를 잡아먹는 것만 잔인하네 야만적이네 뭐네 호들갑을 떨 필요는 전혀 없다.

하긴, 유대인이라면 개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잔인하고 야만적이어서는 전혀 절대 아니고.. 그냥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이라고 금지했기 때문이다. 쟤들은 같은 논리로 개뿐만 아니라 그 맛있는 돼지고기도 먹을 수 없었다.
또한 식용이면 차라리 양반이지, 쟤들은 속죄 헌물이라는 명목으로도 수많은 동물들을 잡아야 했다. 유대교 제사장은 평소에 율법의 권위자로서 먹물 꼰대질(?)뿐만 아니라 푸줏간 백정 같은 궂은일도 잔뜩 해야 했다.

물론 성경에도 동물에 대한 배려와 보호를 명령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을 불가피하게 잡는 것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죄의식 가질 필요는 없다. 그 동물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면 인간의 죄가 얼마나 끔찍 잔혹한 것인지를 먼저 알고 반성해야 한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지옥에 가지 않으셨다면 내가 거기를 가야 한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본인은 필요악의 필요성을 성경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다. 고기 먹는 걸 좋아하면서 도축업자는 천시하고, 흉악 범죄를 미워하면서 사형 집행관을 천시하는 식의 위선을 매우 싫어한다.

2. 자살

인간이 저지르는 수많은 끔찍 흉악한 죄들을 제쳐놓고 오로지 자살만 아주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처럼 취급할 필요는 네버, 전혀 절대 없다.
생각을 해 봐라. 세상 비관해서 이판사판 지하철에다 불지르고 길거리에서 아무에게나 칼부림을 벌인 미친놈 싸이코들도 즐비한데, 그에 반해 혼자만 곱게 목 매달거나 옥상에서 뛰어내린 건 얼마나 양반(?)인가?

선행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듯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 게 기독교이다.
무슨 강 재구 소령처럼 산화하고 전 태일 열사처럼 죽는다 해도 그걸로는 구원 못 받는다.
그럼 그 반대편으로.. 세상 비관해서든, 내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든, 고문 당할까봐 겁나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그 개인의 구원 여부에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인간의 직관과 좀 다른 성경의 원칙이다.

"에이 그래도 자기 생명을 스스로 끊은 건데.."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든다면.. 거듭난 크리스천도 그것 말고도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간증 상실할 짓을 많이 하는지 생각을 좀 해 보아라. 구원받았다는 게.. 영적 신분은 큰 변화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겉으로 자기 성품은 하나도 바뀌는 것 없고 별 거 아니다.
자살로 구원 상실이 가능하다면, 예수쟁이들이 평소에 성경 읽는 걸 게을리하고 기도 안 하는 것으로도 구원 상실이 같은 논리로 가능해야 할 것이다.

"자살하면 지옥 가네"는 교리적으로 잘못됐고, "애초에 구원받은 게 아니었네.." 이런 소리는 그냥 궤변 말장난일 뿐이다.
그 어떤 방식으로 죽더라도 "죽음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한다"가 정답이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요 3:16이었다가 나중에는 요일 4:19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 지금은 롬 8:38에서 가슴이 탁 트여 있다.

3. 피임

기독교가 결혼한 부부 외의 모든 성관계를 교리적으로 음행이라고 규정하고 정죄하는 것은 맞다.
그런데 그건 반대로 말하면, 결혼한 부부끼리는 그 어떤 가족 계획 자녀 계획을 갖든, 밤에 무슨 짓을 하든 서로 좋아서 한 거라면 아~~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전적으로 부부 재량이고 개인 사생활이며 신이라도 전혀 터치하지 않고 존중해 준다.
다시 말해 피임을 하는 것 자체가 죄는 절대 아니다. 어떤 처지의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하느냐가 죄의 성립 여부를 결정할 뿐이다. 그걸 무조건 금기시하는 건 좀 종교적인 오지랖으로 보인다.

4. 낙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꼭 문제의 본질과 관계 없는 극단적인 예외 상황만 끄집어내면서(오판, 오· 남용) 논점을 흐리는 경향이 있다. 그것처럼 낙태에 대해서도 강간으로 인한 임신, 괴물 급의 유전병, 산모도 목숨이 위험한 경우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일단 논외로 하자.

어차피 대부분의, 내가 알기로 90%가 넘는 낙태의 사유는 그냥 (1) 철딱서니 없는 애들의 불장난이거나, 아니면 기혼 부부의 경우 (2) 단순 피임 실패 내지 (3) 딸이어서이다. 산모와 아이의 건강엔 아무 문제 없다.
이것들에 대해서 낙태는 살인과 동급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낙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원칙대로라면 애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혼전 성관계 자체가 음행이라고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이건 종교 교육과 병행하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_-;;

5. 안락사

마치 체벌이 사랑의 매와 아동 학대 사이에 간당간당 하고 살인이 흉악 범죄와 숭고한 호국 애국 사이에서 간당간당 할 수 있듯.. 안락사는 "어디까지가 살인이고 어디부터가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 가게 그냥 놔 주는 것이냐"라는 알쏭달쏭한 문제로 귀착된다.

내가 알기로 성경엔 사람을 완전히 죽이면 죽였지, 식물인간이나 뇌사 같은 게 나오지는 않는다. 내 생각은 연명 행위만 중단하는 소극적인 안락사는 윤리· 종교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애초에 전근대 시절에는 기술 부족으로 인해 그런 연명 행위 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었다.

살인만 해도 정당방위와 긴급피난이 있다. 그러니 살인에 맞먹는, 그와 준하는 죄가 될 수 있는 낙태나 안락사 같은 다른 행위에 대해서도 참작 사유는 물론 존재한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기독교 교리에는 이런 식으로 논리와 체계가 있다.
무조건 인간의 욕구를 억압하고, 인간에게 불가능한 인내나 위선을 짜내고 강요하는 게 아니다.
이걸 해서는 안 되는 대신 저건 허용되는 게 있으며, 이 교리가 성립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저게 성립해야 되는 것이 있다.

본인도 성경에 모르는 게 많고, 또 지능이나 행실이 다른 신앙의 거장들에 비해 보잘것없는 쪼렙에 지나지 않지만..
그래도 최소한 성경이 온전히 보전돼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교리에서 일말의 합리적인 체계와 맥을 발견했기 때문에 거리 설교도 할 수 있게 되고, 내 신앙 체계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글을 쓰고 변증도 할 수 있게 됐다.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간극,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사이의 균형, 어린아이의 구원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민감하고 센세이셔널한 주제에 대해서 누가 단정적으로 얘기를 하고 나면.. 당사자가 말하지도 않은 확대해석과 오해와 낭설까지 쫙 날조되어 퍼져나가는 게 인간의 습성이다. 요21:23처럼 말이다.

구약 십일조가 신약 크리스천에게 적용되는 게 아니라고 얘기하면 꼭 헌금 자체를 안 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생기고.. 자살에 대해서 성경적인 교리를 얘기하고 나면 "어, 쟤는 자살해도 괜찮다고 얘기하네?" 라고 알아듣는 사람이 생기는 것 말이다. 그건 그 사람의 독해력과 마음 상태 문제인 거고.. 성경의 사고방식은 저렇다.

Posted by 사무엘

2019/07/01 08:37 2019/07/01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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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자료 준비하느라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만들었던 그림인데.. 신기하게도 내 개인 블로그에다가는 아직까지 공개한 적이 없었구나!

성경은 안 그래도 삼위일체처럼 인간이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은 개념을 다루는 데다, 잠 26:4-5처럼 표현이 대놓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듯이 보이는 대목이 종종 나온다.
당장 몇 가지 예만 들어 봐도 "은혜와 사랑 VS 율법과 공의", "자유의지 VS 예정과 섭리" 같은 것 말이다. 편의상 "파랑 VS 빨강"이라고 하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럴 때 성경의 전체 숲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주 선택하는 방법은

  • 자기가 믿고 싶은 부분만 돌쇠같이 닥돌 해서 물의를 빚는다. (파랑 아니면 빨강. 다른 쪽은 무시)
  • 아니면 성경에서 일체의 색깔을 제거하고 비성경적인 중도로 빠진다. (회색)
  • 아예 보라, 분홍... 초록색을 내세우는 이상한 부류도 있다.

이 셋 중 하나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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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때 가장 합리적인 솔루션은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것이다. 충돌이 일어나는 경로는 평면이 아닌 입체교차로를 만들어 충돌을 해소시킨다.
빨강은 이 문맥과 대상에서 직접 적용되는 것이고, 파랑은 다른 문맥과 대상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타 문맥에서는 영적인 '적용'과 교훈, 유익 정도까지는 가능하지만 문자적인 해석은 아니다.

  • 크리스천도 살면서 많은 어려움과 환란을 겪지만(행 14:22), 그건 미래에 예고된 유대인의 대환란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창조 교리이지만, 세상의 창조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고 더 크게 현 세상 이전에는 다른 창조와 파멸, 다른 홍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식.

내가 만들었던 그림 중에서 성경 노선도는 교리 논란이 없는 평범한 부류이니 기독교계 커뮤니티들에 굉장히 많이 퍼져 나갔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도 귀하고 소중한 책이라는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고 난해한 구절, 교리적으로 모순되는 듯한 구절들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 걸까?

성경보다 똑똑해서 자기가 성경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이상한 똑똑이가 아니라, 성경 안에서 똑똑한 진짜 똑똑이가 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대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9 19:32 2019/04/2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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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 관련 개념 복습

예전에도 신앙 관련 글을 쓰면서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적으로 인간이 구원받는 길 내지 방법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는 알량한 믿음이라는 제일 바보같고 나약한 자유의지가 전부이다. 그것 말고 다른 어떤 외모나 스펙이나 능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예수 믿을 정도의 지적 능력조차도 없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자체를 할 수 없는 너무 어린 애들, 정신지체 박약아는.. 그냥 무조건 구원 받는다. 걔들도 따지고 보면 죄가 있지만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기 때문이고.. 예수님을 믿을 능력이 없지만 그분을 거부할 능력도 없어서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본인은 이 개념을 편의상 '특례 구원'이라고 일컬어 왔다. 이런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경우는 이 블로그를 찾아와서 이 글을 직접 읽을 정도의 분들에게는 해당사항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 수학에다 비유하면 방정식의 근 중에서 그냥 너무 자명한 trivial solution과 비슷한 개념이다. 생물학으로 치면 무성 호흡/생식 같은..??

이런 논리를 따라, 본인은 어린아기들이 병이나 사고로 죽으면 원죄 때문에, 혹은 유아세례를 안 받았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도 안 되는 교리를 일단 전혀 믿지 않고 부정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의 일체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선물 받으실 분?" / "저요, 저도 좀 주세요!"라고 응답하고 손 내미는 것도 자기의 의이고 선물에 대한 대가(!)인 것처럼 이상하게 몰아가는 설명도 배격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거부할 수 없는 은혜'는 앞서 언급했던 '특례 구원'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성립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그 상태를 '전적 타락'이라고까지 부르는 건 '글쎄요~' 싶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밖의 문맥에서는 인간이 얼마든지 제 발로 구원의 길을 거부하고 지옥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사랑이나 공의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현상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못하면 정말 온갖 골때리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6· 25 대한해협 해전 때의 동해상의 북괴군 600명하고, 광주 5· 18 북괴군 600명을 헷갈리듯이 말이다.

직접적으로 동일한 문맥을 다루는 구절은 아니지만 눅 14:16-21 같은 비유 얘기를 봤을 때... 그리고 인류 역사와 지금 세상 현실을 고려했을 때..
추측하건대 미래에 하늘나라에 가 보면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는 특례 구원을 받은 사람이 훨씬 더 많긴 할 것 같다.

마치 증기 기관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의 동력원으로서는 완전히 도태했지만 발전소에서 전력 생산용으로는 압도 다수인 주류이듯이(화력, 원자력이 모두 증기 터빈을 돌리므로!)...
선박이 장거리 여객에서는 비행기에 밀려 완전히 도태했지만, 일반인들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물류에서는 여전히 본좌이듯이..

그때가 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지 못했던 큰 그림을 보게 되지 싶다. 민망하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언론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어서 외면하고 있는 죽음이 이 세상의 음지에서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겠는가?

참 오랜만에 구원 기본 개념에 대해 복습해 보았다. 구원의 영원한 보장에 대해서도 얘기할 것이 많은데.. 시간과 지면 관계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구원만 받고 어리고 육신적인 신자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되지 않으니 사람들이 자꾸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의심하며, 심지어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잘못 생각하는 편이다.
자살은 인간이 저지르는 다른 끔찍하고 흉악한 죄들보다 특별히 다르게 취급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의롭게 자결했다고 구원을 얻지는 못하듯, 세상 비관해서 혹은 고문 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했다고 해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2. 성경과 세속 과학, 학문과의 관계

정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실험만 하는 과학이라면, 그 알량한 방법론을 동원해서 신의 존재를 대놓고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는 없다. 사실은 교계에서 그렇게도 정죄하는 진화론을 절대무오한 진리라고 입증하지도 못한다. 그쪽 세계에서는 실험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학설과 확률과 통계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과학과 종교?신앙?은 서로 별개의 영역인 게 맞다. 그럼 창조니 진화니 하면서 싸울 필요가 없는 건가? 마냥 안심하면 되냐? 그렇지는 않다.
과학 그 자체는 자연 계시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이기 때문에 가치 중립적이다. 잘 연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러나 거짓되이 과학이라고 불리는 학설이 대놓고 신을 부정할 수는 없더라도, 그 사고방식이나 연구 방법론· 패러다임을 잘못 적용하여 성경에 대한 믿음을 파괴할 수는 있다. 이게 파괴된 신자는 진짜 볼장 다 본다.

"성경에 어차피 요런 부분에는 오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나 성경의 존재 가치가 싹 부정되는 건 물론 아닐 거다. 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 기록돼 있는 엄청나고 극단적인 예언들도 그렇게 정밀하게 문자 그대로 믿을 게 못 된다는 거다. 비유와 교훈 등 우리에게 좋은 쪽만 재해석해서 받아들이면 된다. 히브리어를 보면 어떻게 그리스어를 보면 어떻고.."

요게 아주 위험하고 돼먹지 못한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고 특정 부분만 분별 없이 무식하게 문자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물의를 빚는 교파 종파에 대해서도 본인이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오류에 대한 대안이 저런 지적 사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성경은 세상의 여느 학문과 같은 방식으로 취급하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고 믿는다.

3. 성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

성경에는 "곡식 밟는 소의 입에다 마개를 씌우지 마라"(신 25:4, 가축이 적당히 자유롭게 먹으면서 일하게 해 줘라)가 의외로 신약에서 두 번이나 더 언급된다. (고전 9:9, 딤전 5:18) 주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의 보상과 관련된 문맥에서이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합 2:4에서 '자기'(his)가 빠진 바리에이션으로서 세 번 더 나온다. (롬 1:17, 갈 3:11, 히 10:37) 이에 덧붙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도 십계명인 출 20:12뿐만 아니라 신 5:16, 엡 6:2에서 반복되며, 복음서에서도 인용 형태로 마태· 마가· 누가에 거듭 등장한다.

그런데 이것뿐만 아니라 뭔가 좀 생뚱맞아 보이는 구절도 성경에서 톱급으로 자주 거듭 반복해서 인용된 게 있다. 바로 시 110:1이다.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세 복음서에서 연이어 copy & paste 수준이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행 2:35와 히 1:13에서 추가로 나온다. 거기에다가 히 10:13도 재차 언급이라고 볼 수 있으니.. 횟수가 가히 압도적이다.

"소의 입마개"만치 인간의 실생활과 관련이 있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만치 보편적인 인륜을 다루지 않고,
그렇다고 "믿음으로 살리라"만치 인간의 구원과 관련이 있지도 않은 저 말은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언제 왜 한 말이고 문맥이 뭘까?

시간과 지면 관계상 저 구절의 모든 문맥과 의미를 강론할 수는 없지만, 간단히만 말하자면 저건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에게 한 말이다.
성경은 도덕 경전이나 역사 기록이나 복음과 구원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건 부가적인 2순위 이하의 목표일 뿐이다. 그 전에 하나님의 주 관심사와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통치임을 알 수 있다. 세상 용어를 동원해서 표현하자면 다분히 정치적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온갖 시사· 종교 난제들을 가져와서 그분에게 질문을 했다. (부활의 때에 누구 아내? 율법에서 가장 큰 명령? 카이사르에게 납세? 등등등~) 떠보고 트집 잡으려는 불순한 의도로든, 아니면 정말 몰라서든지..

예수님은 그런 것쯤은 막힘없이 전부 즉답을 하셨고 사람들을 데꿀멍 시켰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물으신 건 단 하나였다.

"그럼 이제 내가 니들에게 하나 좀 물어 보마. 너희는 내 정체가 정확하게 무엇인 것 같냐? 시 110:1을 봐. 다윗이 자기 비속 후손을 보고 '주'라고 존대해서 부르는데 이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그 뒤로 사람들은 버로우 타 버리고 더는 예수님에게 딴지를 걸지 못했다고 성경은 말한다. 시 110:1은 그 문맥에서 인용되었으며, 그게 복음서에 3회 반복해서 기록되었다.

또한, 나중에 배반당하고 체포된 뒤의 행적도 생각할 만하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다른 온갖 쓰잘데기없는 거짓 고소들에는 하나도 대꾸하지 않았지만, "너 정체가 뭐냐? 넌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라는 물음에는 정말 솔직 담백하게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마 26:62-65, 막 14:60-63, 눅 22:66-71)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믿기만을 바라셨다. 예수의 부활조차도 곧이곧대로 믿기 싫고, 그래도 역사 팩트와 후폭풍 증거까지 송두리째 외면할 수는 없으니 제자들의 자칭 예수 부활 "체험" 사건 이 따위로 둘러대는 짓 하지 말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슨 "P와 NP는 과연 동일할까?", "리만-제타 함수의 자명하지 않은 근은 실수부가 정말 몽땅 1/2일까?", 아니면 "광주에 과연 북괴 공작원들이 잔뜩 침투되었을까?" 같은 걸 묻지 않으신다.
그런 건 관심 있는 사람들이 연구해서 답을 구하든가 말든가 하면 되고, 그 전에 정말 똑바로 알아야 하는 건 그리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너에게 예수는 어떤 분인가?" 하나이다.

요한복음은 시 110:1의 직접 인용은 없지만 기록 목적이 독자들 예수 믿게 하는 것(요 20:31)이라고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분명하게 대놓고 적어 놓았다.

4. 신앙 생활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짜여 있는 것

예수 믿고 구원받은 뒤의 신앙 생활은 인간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짜인 것도 있고 불리한 구조로 된 것도 있다.
유리한 것은.. 뭔가 좋은 것을 사람이 "먼저" 받아서 동기 부여를 받은 뒤에, 그 다음에 사람 쪽에서 베풀고 헌신하고 인내하고 희생하는 구도라는 것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고 나서 침례를 받든지 믿음의 선한 행위를 하든지 성장을 하든지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일단 쉬고 나서, 달콤한 은혜의 말씀부터 먹고 나서, 즐기는 것부터 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일을 하고 헌신한다. 일이 먼저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기업 중에 입사 후에 월급이건 일당이건 보수를 받고 나서 다음부터 일하는 곳이 있던가? 세상에서야 소득 주도 성장은 마치 "일단 서울대부터 보내 주면 나도 공부 열심히 할게요" 같은 미친 개소리이지만.. 성경적인 신앙 원리에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개념이다!

다른 대부분의 종교에서 최종 목적지, 만렙, 해탈의 경지라고 말하는 '구원' 내지 성인 성자(saint) 칭호가 이 바닥에서는 그냥 기본으로 따 놓은 당상이다. 근성 충전을 위해 일단 한 대 맞고 시작... 이 아니라 일단 구원부터 받고 시작이다.
창세기 1~2장의 천지 창조만 생각해 봐도 하나님은 6일간 일하고 나서 일곱째 날이 쉬는 날이었지만, 아담과 이브는 만들어지고 결혼하고 honeymoon부터 즐긴 뒤부터 동산 관리 일과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마르다 얘기도 있다(눅 10:38-42).

그 반면, 인간에게 불리하게 짜여 있는 것, 혹은 이것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는 사항도 있다.
신앙 생활이란 건 본질적으로 당장 보이고 들리는 대로, 편한 대로 직관적인 대로, 남들 다 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다. '바보 같아 보이고 손해 보는 듯이 보이는 좁은 길 역행'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결단과 행동은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직접 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둬서 물리적인 여건이 요 모양 요 꼴이 된 것을 하나님이 굳이 수습해 주고 undo 해 주시는 경우 역시 일반적으로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 생활이 무슨 공밀레 같은 신밀레 열정페이 착취는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본성· 성품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 단단하고 입에 쓴 말씀, 실행하기 힘든 것에 대해서는 최소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먼저 다 당하고 겪어 놓았다. 그때는 이런 믿는 구석으로 요렇게 하면 된다고 선례, 모범, 샘플이 마련돼 있다.

어려운 시험 문제나 과제에 대해 원리, 예제, 유사한 기출문제, 힌트를 듬뿍 주긴 한다. 그러나 대놓고 정답을 가르쳐 주는 일은 결코 없으며, 하물며 시험 문제를 미리 유출해 줄 리는 절대 만무하다. 모든 과제는 자신의 문장을 써서 직접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인간에게 절대로 '안알랴줌'인 것의 대표적인 예는.. 세대 경륜 급의 큰 그림 이상으로 각 개인의 구체적인 미래 예언,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 시기이다. 나에게 내일 어떤 일이 닥칠지는 완전 랜덤 케바케이다.
그것만 좀 알면 딱 죽기 직전에만 예수 믿고 구원을 먹튀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인간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꼼수 부리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겨우 그런 걸로 농락당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는 않으셨다.

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비교해 보면.. 신앙 생활 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드시는가, 어떤가?

5.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

  • 군대는 일반적으로 최악의 범죄라 여겨지는 살인이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하지만 자기 집 지키느라 불가피한 정당방위도 허용되는 마당에, 하물며 나라를 지키느라 지휘관의 명령대로 전쟁터에서 무장한 적군을 죽이는 것은 형법상의 살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정반대로 숭고하고 영예로운 일이다.
  • 국정원 같은 첩보 기관은 "악에는 악으로 맞선다, 이이제이, 목표는 수단을 정당화한다"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집단이다. 절대악을 퇴치하기 위해 필요악 역할을 맡고, 작은 악을 동원해서 더 큰 악을 예방하는 궂은일을 한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이건 나쁜짓이며, 공산주의자 빨갱이들이나 사용하는 수법(거짓말, 위장 침투..)으로 여겨진다.
  • 끝으로 종교는 겉으로 언뜻 보이는 결과만 보자면 정신승리, 진영논리,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분야이다.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라는 과학 팩트는 "그럼 최초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를 설명하지 못한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무한순환을 끊으려면 결국 처음에 한 번은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예수 믿으면 물질적인 복 받고 부자 되지 않는다. 뭐, 그렇다고 북한이나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극단적인 박해 지역이 아닌 한, 무조건 쫄딱 망하고 거지 되고 감옥에 갇히고 죽지도 않는다. 구원받아서 신분이 바뀌는 것과 개인이 물질적으로 잘 되거나 못 되는 건 별로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경적인 건전한 경제관과 시스템이 갖춰져서 잘살게 되고 중산층이 늘고 부강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게으른 개인을 일일이 다 먹여 살려 주는 게 아니다.

예수 믿어서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은 영적 복을 받고, 설령 가난하더라도 그 처지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 주님께서 내게 지금 당장 허락하신 처지에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 건 별 게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다.

"남들보다 가난하지만 난 영적으로는 부자.." 영이건 정신이건 이것도 정신승리라면 정신승리이다. 하지만 이건 아Q의 정신승리와 달리, 성경적인 근거와 보장이 돼 있는 건전한 정신승리인 것이다.
상대적 빈곤에 연연하는 사고방식부터가 달라져 있지 않으면 어차피 하나님이 물질을 아무리 많이 공급해 주셔도 인간은 절대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연연하면서 불만족 불평 악순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4/21 08:33 2019/04/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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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욥기는 모세오경과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먼저 기록된 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책이 아니다. 너무 엄청나고 극단적인 스토리와 판타스틱한 서술들, 그리고 인류의 만년 의문 떡밥인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욥기는 문학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물론 불신자들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만 인정할 뿐, 저게 설마 레알 실존인물 실화일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통념과 달리, 다른 책에서 욥을 거듭해서 실존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인용하니(약 5:11 같은..), 이게 딜레마이다. 노아, 아벨만큼이나 말이다.
가령, 그 천하의 예수님이 창세기 4장 인물인 아벨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마 23:35). 예수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비평가라면 창세기 1~11장은 그냥 설화이고 상징 비유 묵시문학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이다. 욥기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 문제의 책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그에게 아들 7명과 딸 3명이 태어나니라. 또한 그의 재산은 양이 7000마리요, 낙타가 3000마리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마리이며 집안사람들도 심히 많았으므로 이 사람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더라." (욥 1:1-3; 가독성을 위해 성경 본문에서 수량 표기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

욥은 노아·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일컬어진다(겔 14:14). 특히 노아와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perfect(창 6:9, 욥 1:1)라는 수식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과 동급의 완전무결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구약 + 인간의 관점에서 그럭저럭 흠잡을 데 없고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만점 합격점이라는 뜻이다. 마치 all(모든)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느 문맥과 범위에서 전체 또는 완벽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은 아시다시피 한번 쫄딱 망했다가 그래도 다음과 같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주}께서 그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또 그가 아들 7명과 딸 3명을 두었더라." (욥 42:10,12,13)

욥은 고난 이후에 자기 재산에 속하는 가축들은 몽땅 다 정확히 두 배로 보상받았다. 그런데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열 명 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명은.. 자녀는 재산과 별개이며 두 배 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나 보험(!!) 관점에서 보자면 대인과 대물은 엄연히 다르며, 자식은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가축 수와 자녀 수를 나란히 늘어놓은 욥기의 진술 방식 자체가 좀 문제가 있으며,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의 여지를 남기는 거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결론은.. 구원받은 자녀는 다른 가축이나 재물과 달리,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고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었어도 영원의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이별하고 못 보는 기간 / 내세에서 n년간 보는 기간"의 비율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극한값이 0으로 가는 것이 자명하니..;;
그러므로 20명을 몽땅 새로 줄 필요 없이 새 자녀 10명만 추가로 주면 10+10 = 20이 된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가축)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낳았고 낳았고'만 잔뜩 나오는 마태복음 1장의 리스트의 진술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일부 인물이 누락된 이유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라고.. 어린아이의 구원을 당당히 믿은 다윗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과학과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많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죽음도 그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꽤 건전하다. 죽은 사람 갖고 사기를 치는 수많은 미신, 괴담 등에 휩쓸릴 일이 없게 하며, 그 반대편 극단인 "죽으면 다 소멸하고 끝" 염세 회의 허무주의 쪽으로 빠지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

이런 신앙이 있으니 손 양원 목사는 "미국 유학 보내려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라는 초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생명 인격체를 만드는 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인 것 같다. 구원받는 것도 그렇게 현세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한편, 이런 "현세 10+내세 10 = 20"설 말고.. 그 10명은 그냥 욥의 기존 자녀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뭐, 그것도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피엔딩이며, 성경의 심상 면에서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성도들의 집단 부활이라든가(마 27:52-53) 모세의 부활(유 9)처럼 아주 implicit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엄청난 부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욥 당사자도 단순 내세 이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은 와중에(욥 19:26), 욥기에 부활의 실제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자녀를 만드는 건 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도 10명이나 다시 낳으려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욥의 기존 아내는.. 욥을 완전히 떠나 버렸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난 후에 재배회를 했는지.. 그렇지 않고 욥이 재혼을 하기라도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욥의 아내는 막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신앙이 남편만치 좋지는 못했던 그냥 예쁘장한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ㄲㄲㄲ 사탄이 욥의 아내를 괜히 살려 둔 게 아님..)

이런 시나리오에 비해, 죽었던 기존 자녀만 다시 초자연적으로 살아나는 시나리오는 기적 그 자체 말고는 주변의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부활설은 근처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등장하는 '2배 보상'이라는 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녀는 무슨 물건 같은 존재는 아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주님으로부터 온 유산이요 보상이다(시 127:3-5).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축을 2배로 보상해 주셨거늘, 하물며 자녀도 2배로 보충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욥기의 도입부에서는 자녀 수부터 먼저 나온 뒤에 다음에 가축 수인데, 결말부에서는 2배로 늘어난 가축 수부터 나온 뒤에 그 다음이 자녀 수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9 08:36 2019/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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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중순의 어느 날, 본인은 인터넷 SNS를 통해 알게 된 어느 지인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러 그 지인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제네바 개혁 교회'라고 장로교 계열인데, 기성 주류 교단보다 더 근본주의랄까, 옛날 스타일을 추구하고 교리에 따른 분리를 더 엄격하게 시행하는 곳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근본주의라고 하면 일부 침례교 교파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저런 곳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니 신기했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도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일치 운동 거부하고 동성애 합법화 반대하는 등.. 대세를 따르지 않고 근본주의를 따르는 면모가 있다. 하지만 그걸 '남자는 무조건 정장, 여자는 무조건 긴 치마' 식으로 율법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특히 신기한 건 '칼빈주의'였다.
본인은 루터, 칼빈이라든가 예정론이라는 학설을 태어나서 처음 들은 곳이 교회가 아니었다. 그 대신, 아동용 세계사 만화와 중학교(세계사, 윤리)에서 최초로 접했다. 본인은 어린 시절에 장로교가 아니라 감리교 계열에 속하는 성결교를 다녀서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 못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뿐만 아니라 작곡까지 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에 질세라 시편 찬송가라는 걸 만들었나 보다. 전 악보를 통틀어서 4분음표와 2분음표밖에 없고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조와 음계로 시편을 1편부터 150편까지 몽땅 노래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글쎄, 시편에는 저주도 쓰여 있는데 그런 가사까지 곡으로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장로교 내지 개혁 교회 쪽에서는 일명 TULIP이라고 요약되는 5대 강령을 가히 신앙의 핵심· 진수로 떠받들고 있었다. 성결교에 성결 중생 신유 재림(무순)이라는 4대 강령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 서슬 퍼런 교황과 맞장 뜨고 양심의 자유와 성경적 진리를 추구한 것, 엄격 진지 근엄하고 청빈 검소 고결하게 산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성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한 루터야 말할 것도 없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올바른 성경이 안심하고 번역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다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를 인지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능력마저 상실했을 정도로 타락했다거나, 하나님이 답정너 선택하고 '예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거나, 선물을 받으려고 단순히 손을 뻗는 동작조차도 선물에 대한 값을 치르는 행위이고 자기 의라고 우기는 주장들은 좀 말장난 궤변처럼 들린다. 난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킹왕짱 절대적이라 해도.. 그 끔찍한 죄악이 인간의 자유 의지 책임으로 귀착되지 않는 한낱 역할극에 불과한 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씁 어쩔 수 없지"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칼빈 신학이 실제로 무어라 가르치는지를 내가 직접 배운 게 아니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주위로부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칼빈주의 내지 예정론이 그런 걸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 루터와 달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요한) 웨슬리는 세계사· 윤리 시간에 다뤄질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이쪽은 반대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면서 칼빈주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O Horrible Decree라는 제목으로 TULIP 강령을 신랄하게 디스하고 극딜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뭐 그것까지는 좋은데.. 거기는 반대로 반쯤 행위로 구원 유지, 구원의 상실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인은 들었다.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게 어찌 보면 칼빈주의보다 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기본 중의 기본인 구원관이 정확하게 정립돼 있지 못하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아주 이상한 낭설도 교회에 잔뜩 퍼진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본인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모두 진리도 있고 오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들도 다 교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고, 신학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만.. 뭔가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 그것도 주류 대형 교회가 아니라 마이너한 성향의 교회에 가 보는 건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2.
그나저나 이 교회는 송파구 문정동에 소재해 있고, 교회 근처에는 길 옆으로 문정 근린 공원이라는 도심 속 녹지가 쭉 들어서 있었다.
이 정도로 작지 않은 폭의 공간에 건물 대신 풀밭과 벤치, 주차장이 1km가 넘게 이어지는 건.. 평범한 계획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풍납동의 풍납토성 구간이야 유적 발굴 명목으로 개발이 봉인되고 풀밭과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긴 하지만, 문정 공원은 그런 케이스도 아닌 것 같다.

이건 90% 이상의 확률로 폐선 철도 부지일 거라고 감이 어렴풋이 왔다.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철령께서 내게 계시를 주셨다.
실제로 홍대 일대에는 당인리선 폐선 부지를 따라 어중간한 주차 공간과 건물, 골목이 길게 나 있다. 신촌에도 골목길이 과거 경성 순환 철도의 선형대로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길이 없어지더라도 철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들의 선형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구시가지가 아니라 동남부 외곽에 웬 철도가 있었다가 폐선된 적은 없다. 저 공간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저건 근처의 외곽순환 고속도로와 비슷한 선형으로 수도권 남부 순환 철도를 미래에 '만들려고' 국가에서 1980년대에 확보해 놨던 부지였다. 단선 전철로 여객보다는 화물 수송을 염두에 뒀으며, 의왕에 있는 컨테이너 화물 기지에 이르기까지 선로를 이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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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경부선 의왕(위의 그림에서는 '부곡')에서 분기하는 오봉 화물 기지에서 시작해서 무려 중앙선 도농까지였다.
북쪽의 교외선(능곡-의정부)과 연결하면 진짜로 그럴싸한 순환선 철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계획은 여러 난항에 부딪혔다. 서울 외곽에 자리잡은 군부대 등 보안 시설들과 마찰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여기 일대에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 같은 여객 철도가 지하로 건설하려는 대체 계획이 잡히면서.. 지상 화물 철도의 건설 계획은 1993년에 완전히 나가리 났다.
그 뒤로 이 부지는 미개발 상태로 오랫동안 놀면서 주차장 정도로나 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에 여기가 문정 근린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렇게만 알면 끝인데.. 본인은 그 공원의 일부 구간에 만들다가 말았던 철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정보를 뒤늦게 입수했다. 그래서 즉시 차를 끌고 달려가서 공원을 또 답사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공교롭게도 딱 제네바 개혁 교회 근처였다. 2km에 달하는 전체 공원 구간을 다 돌아다녀 봤는데, 레일이 있는 곳은 유일하게 저기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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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남부 순환 철도라는 게 이게 무슨 구 수인선 같은 역사 유물도 아닌데, 철길을 공원에다 일부러 깔았을 리는 없을 테고.. 저건 그 시절에 만들다가 말았던 폐선 흔적이 틀림없을 것이다.
간격은 표준궤가 맞는데 궤조가 유난히도 작고 가녀린 것 같다. 공원의 그 어느 표지판이나 구조물에도 여기가 철도 노반이었음을 암시하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에, 철도 불모지인 서울의 동남부에서 고가나 지하가 아닌 평지에 깔린 레일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완전 좋다. ^_^ 뭐, 철길의 길이는 100미터가 채 될까 말까이니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 게 좋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있는 게 어디냐.
계획 당시에 땅이 얼마나 놀고 있었으면 평지에다가 대놓고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외곽순환 고속도로와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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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중간에 요렇게 교차로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다.

서울 서부 외곽의 오류동에는.. 경인선에서 분기하는 경기화학선의 폐선 잔해가 건물 뒤로 지나가는 게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동부 외곽에는 지금까지 어렴풋이 말로만 들었던 남부 순환 철도의 흔적이 철덕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강동구에 있는 한영 중· 고등학교와 인근의 큰길인 동남로 사이에 있는 큰 공간도.. 그 시절에 확보해 뒀던 철길 노반의 흔적이다. (☞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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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다. 모처럼 철도와 기독교· 성경을 융합한 글이 하나 완성됐다. ^__^
보라매 공원은 원래 공군 사관학교의 부지였고, 여의도 공원은 원래 여의도 공항 활주로 내지 여의도 광장의 부지였다.
또한, 강북 구도심에는 용산선 철길이 있어서 거의 폐선 상태였는데, 2010년대에 싹 걷히고 지하의 경의선· 공항 철도로 형태가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도 지상 구간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식으로 대도시의 도심에 놓여 있는 공원은 제각기 사연과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제네바 개혁 교회는 이렇게 만들려다가 만 철도 폐선 부지를 활용한 공원의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이 쉬는 시간에 밖에서 교제하기 좋겠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근처에는 큰 도로의 중앙에 무슨 계기로 조성된 '거리 공원'이란 게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1/25 08:32 2019/01/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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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trivia

1. 21년 전, 기성 교회에서의 크리스마스 성극 추억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말, 본인은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본인이 다니던 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지도교사 선생님의 주도로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 때 무려.. 뮤지컬을 공연했다. 연극을 하다가 노래가 나올 때면 MR 틀어놓고 그에 맞춰 부르는 거다.

그 뮤지컬의 맨 처음 도입부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에 남아 있는 가사를 검색해 보니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는 곡이고 가사가 다음과 같다.
국내곡인 것 같지는 않은데.. 원곡의 제목과 가사는 무엇인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오래 전 베들레헴에 성경 말씀 그대로
마리아의 아기 예수 오늘 탄생하셨네
천사 찬송하기를, '왕이 나셨다'
그를 믿는 모든 자는 영생을 얻으리.."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라면 이런 컨텐츠는 심의상 공연 불가일 것이다.
이 진영에서는 '아기 예수'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한다. 산타 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 12월 25일 예수 생일 이런 거 다 생깐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니! 이런 OO교스러운 심상이 담긴 용어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성도들 중에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조차 싫어하는 프로불편러도 있기 때문에, 저런 게 버젓이 공연되었다가는 곧장 클레임 들어온다.

뭐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성탄절이 잘못된 거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 자체가 잘못된 교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12월 25일이라도 쉬는 나라가 안 쉬는 나라보다는 나으며, "메리 크리스마스"가 "해피 할리데이" 이딴 말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고로 본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을 지지한다.. =_=;;;

그 뮤지컬은.. "크리스마스 추억"이라는 주제로 그 안에서 또 세 갠가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이 평소에 짜장면을 미치도록 너무 좋아해서 크리스마스 성극을 공연하던 중에도 "손님, 짜장면은 뭘로 드시겠습니까?"라고 NG를 낸 이야기가 있었다.

성탄절의 유래고 뭐고 교리 지식 다 제끼고 동심, 감성, 추억만 생각하면 저런 게 참 훈훈한 기억이다. 그 뮤지컬 각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허나, 그런 긍정적인 심상이 어째 이교도의 전통과 혼합되어 변질되었는지를 같이 생각하면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빨간 싼타 모자 쓰고 열심히 율동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 동영상도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데.. 착잡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ㅠ.ㅠ

주일학교라는 게, 그 당시에는 꼬마들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떠들고 놀지만, 그게 커서까지 추억으로 각인되는 효과를 노린다. 그러니 유아 교육이 유치하고 시시하고 당장 지쩍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나의 동심, 감성, 추억 분야의 결정판은.. 더 말하자면 입만 아프겠지만 2003~04년에 접한 새마을호 Looking for you이다.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신구약 성경이 완결되었듯이 Looking for you가 그냥 영원한 종지부를 찍었다.
국영 독점 교통수단에서 이런 음악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충격 중의 충격으로 나를 철덕의 블랙홀로 빨아들이게 했다. 이걸 능가하는 충격은 내 인생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2.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얘는 성경을 소재로 하는 얼마 안 되는 찬송가 중 하나이다.
완전 동요풍인 "신구약 성경책 (The B-I-B-L-E oh that's the book for me)" 다음으로 조금 나이가 들면 주일학교에서도 접하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책"은 영어로 가사 첫 줄은 There's a dear and precious book..이고 원제는 My mother's bible이다.
"비록 해어졌으나"를 "비록 헤어졌으나"라고 ㅐ를 ㅔ로 잘못 기재한 책이나 사이트가 의외로 굉장히 많다. 구글 같은 검색엔진들에서 자동 완성이 '헤어졌으나'라고 제시될 정도다.
영어 가사가 Tho' it's WORN and faded now이니, 우리말로도 worn out을 뜻하는 '해지다'가 맞다. 어머님의 성경책이 다 낡은 채로 남아 있기라도 하냐, 아니면 영영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빼앗겼냐의 차이이다. 후자라면 작사자는 젊었을 때 신앙을 잃었다가 탕자의 아들처럼 되돌아온 것일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이 찬양은 3절 가사가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즉, 우리말로는 어머님이 우셨다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가사는.. "Then she dried my flowing tear with her kisses as ..."
"내가 울었고" 어머니께서 내 눈물을 닦아 주셨다는 뜻이다..;;
물론 단위 음절당 들어갈 수 있는 정보량이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쨉이 안 되니, 이런 보정은 오역이나 변개는 아니다. 단지 다르다는 것이다.

2절 가사도.. 우리말은 다니엘, 다윗, 엘리야가 언급돼 있지만 원래 가사는 엘리야가 아니라.. '요셉'이 언급돼 있다. 뭐, 요셉보다는 엘리야가 더 포스가 있는 인물인 건 인정한다만..
엘리야가 "병거를 타고" 무슨 은하철도 999처럼 하늘에 올라갔다는 가사는 약간 고증 오류이다.

왕하 2:11을 보면, 불길에 활활 타는 모양의 병거가 나타났다고만 했지, 엘리야가 그 행렬에 직접 합류하거나 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말은 없다. 그냥 혼자 몸뚱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승천했다.
영어 가사는 애초에 엘리야를 언급하지 않으니 이런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3.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

위의 제목으로 오랫동안 방황하며 인생을 허비하다가 뒤늦게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기쁨을 노래한 찬송가가 있다.
얘는 작사· 작곡자가 따로 전해지는 외국곡인데, 원곡은 애초에 찬송가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를 향한 사랑 영원할 것이오"라는 내용의 일반 노래이다. 우리말 가사는 영어 가사와는 무관하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다.

그러니 이 곡은 찬송가로서는 Believe me if all those endearing young charms 같은 원제를 기재해 줄 필요가 없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곡에다가 "존 브라운의 시체" 영어 가사를 병기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의 마지막 2절 가사 끝부분은 "시냇물 흘러 바다에 돌아가듯 나는 주 안에 잠겨지네"이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본인은 늘 궁금했다. 가사를 쓴 사람이 졸업식 노래를 참고하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졸업식 노래의 3절 끝부분은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인데..
찬송가 가사에 저런 냇물-바다 비유가 들어갈 일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주 안에 잠겨지네.."는 침례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심상을 의도한 것일까? 누가 무슨 동기를 받아서 이런 가사를 썼는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4.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찬송가가 있다. 가사의 특성상 간증 집회나 연말 송구영신 때, 혹은 교회 창립 기념 예배 때 두루 부르기 좋다. 극동 방송 발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조사에서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얘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동일한 외국곡 멜로디가 붙어 있는데, 그것 말고 박 재훈 작곡의 민요풍 멜로디 버전도 있다. 이 작곡자에 대해서는 "어서 돌아오오"의 작곡자라고 얘기해 주면 한국인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둘 다 3박자 계열인 건 동일하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두 곡이 모두 실려 있다.
한국곡 멜로디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과 분위기가 꽤 비슷하게 느껴진다만.. 그래도 "부름 받아..."의 작곡자는 다른 인물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멜로디 말고 가사의 출처를 살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본인도 굉장히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얘는 한국인 작사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찬송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유럽 계열도 아니다.

이 곡의 작사자는 보통 T. Sasao라고 소개돼 있는 편인데, 일본인이다.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鐵三郞 1868-1914)라고 메이지 시대를 주로 살았던 성결교 목사이다. 데쓰(tetsu)는 '철'의 일본어 음일 뿐이며 death하고는 당연히 무관하다.
영어 가사가 멀쩡히 기재돼 있어서 일본인 작사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 역시 일본어로부터 나중에 번역된 것이다.

이 곡의 진짜 원어 가사는 이렇다. きょうまで守られ
일본어를 모르는 본인이 보기에도.. 1절 지금(今日)까지 지내 온 것, 2절 몸과 맘도 연약하나(か弱き者を), 3절 주님 다시 뵈올 날이(主の日) 등 우리말과 일본어가 앞부분이 얼추 일치하는 것 같다.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작사한 다른 대표적인 찬송가로는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가 전해진다. March we onward 이렇게 시작하는 영어 가사가 있지만, 외국 사이트에서 검색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옛날 가사는 '일심'도 그렇고 약간 일본어스러운 표현이 있더라. 그래도 저 사람은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작사자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듯하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이다.
"My life flows on in endless song;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고 Robert Lowry 작사의 가사가 분명히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동일 멜로디에 "My life flows rich in love and grace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가사와 함께 T. Sasao가 기재돼 있다. 작사자가 잘못 기재된 것 같은데 제2의 영어 가사는 정체가 뭔지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들의 출처와 계보, 탄생 배경들을 연구해 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성경으로 치면 주석을 같이 보는 것과 같다. 계보가 의외로 복잡하고 배배 꼬인 것, 전혀 찬송가가 아닌 멜로디에다가 번역이 아닌 창작 수준의 가사가 붙은 게 많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곡들의 출처를 구글 검색 한 번으로 바로 알 수 있지 않고, 또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통일/새 찬송가에서 일본인 작사로 알려져 있는 가장 유명한 곡은 나카다 우고 작사의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이다. 내가 알기로 원어 가사까지 영어가 아닌 대놓고 일본어로 기재된(Megumi hukaki mikami yo ...) 거의 유일한 곡이다.
알고 보니 '메구미'가 은혜(惠)라는 뜻의 일본어인데.. 본인은 배틀로얄에서 미츠코에게 낫으로 목이 따여 죽는 여학생 이름으로만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ㅠㅠㅠ ^^;;

Posted by 사무엘

2018/12/24 08:35 2018/12/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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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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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실제 모델 인물인 오 길남은 월북한 뒤 재독 한인을 포섭하는 공작원 명목으로 독일로 파견됐는데.. 북한 정권의 실체를 깨달은 뒤엔 거기서 자수하고 남한으로 귀순했다.

어색한 억지 감동 유도라든가, 좀 식상하고 허무한 듯한 결말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중간 전개는 역시 찢어 죽일 종북좌빨들이 충분히 불편해하고 싫어할 만한 팩트 위주이다.
그러니 북괴의 정체와 흉악한 수작이 까발려지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은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니 나발이니 딴 거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영화계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솔직히 우보다는 좌편향이 훨씬 더 심하지 않은가?

북괴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 중 하나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 걸 넘어서 가족을 저렇게 하루아침에 산 채로 찢어 놓은 것이다.
6·25 이산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옛날엔 여객기 납치로도 단란하던 가정을 많이 파탄냈다.

또한, 저런 젊은 학자들을 속여서 북한으로 보내서 그 가족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악마가 지금 청와대 수장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평화통일 운동가로 보이는가 보다. 정말 같은 부류의 악마이며, 쳐죽일 반민족 반역자임이 틀림없다. 한 번 속는 건 실수이지만 두 번 속는 건 공범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알려지고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2.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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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사각오, God’s not dead, 신이 보낸 사람 등 국내외의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영화를 봤지만.. 얘가 성경 고증과 작품성, 비주얼 등을 고려했을 때 제일 뛰어난 작품인 것 같다. 정말 잘 보고 왔다.
북미에서는 이스터(..)에 맞춰서 지난 봄에 개봉했지만, 국내에서는 종교 개혁 기념일에 맞춰서 10월 말에 개봉했다.

14년 전의 Passion of Christ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음침 암울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잔혹하게 채찍질 당하는 장면 말고는 남는 게 별로 없어서 인상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특유의 교묘한 심상 왜곡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말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 사울의 회심 등 주요 장면들 다 나온다. 대사 중에 성경 말씀 인용이 굉장히 자주 나와서 아주 마음에 든다.
사울이 회심 후에 무슨 물고문 당하듯이 물에 얼굴까지 첨벙 잠겼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게 침례를 의도한 장면이었다면, 난 평가 점수를 더욱 올려 줄 생각이다. 물 뿌리는 세례는 고증 오류이다.

그리고 촛불과 온갖 신들 형상(마리아 형상도 포함)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긍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로마인들의 잡신이라는 부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진다. 이것도 구도를 아주 잘 잡았다.

그러면서 허구 각색도 어색하지 않게 가미된다. 사랑하는 교회 동지가 어이없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남자 청년들 일부가 극도로 흥분하고 분노해서 우리도 칼 들고 쳐들어가서 로마를 상대로 보복하자고 날뛴다.
바울은 회심 전에 자기가 죽이면서 눈 마주쳤던 크리스천들이 때때로 꿈에 나와서 트라우마를 안긴다면서 인간적인 고뇌를 호소하기도 한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교도소장인 로마 군인의 딸의 병을 극적으로 고쳐 준다. 무슨 오글거리는 기도 한 방으로 신앙 치료를 성공한 게 아니라, 자기 의술로 해낸다. 바울 역시 “자기는 소문과는 달리 아무 능력 없으며, 자기가 약함을 보일수록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라고 증언한다. 요런 식의 개연성 있고 자연스러운 허구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 횃불 될 사람은 되고, 사자밥이 될 사람은 그렇게 되면서 순교 행렬이 이어진다. 네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울은 딤후 4:6-8의 유언을 남긴 뒤 예정대로 참수당한다. 그래도 교도소장은 바울과 누가의 인품에 충분히 감화됐기 때문에, 마치 옛날에 안 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된 뤼순 감옥 간수처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바울을 "잘 가시오" 이렇게 공손하게 댄디하게 대해 준다.

바울은 그나마 로마 시민인 덕분에 화형 같은 더 끔찍한 방법으로 죽지는 않고 저렇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형된 거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바울과 네로는 모두 AD 60년대 중후반에 죽은 꽤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로마 제국에 콜로세움 경기장이란 건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약간 뒤인 AD 70년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 등장)

네로 시절에 크리스천들이 로마 대화재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박해받고 처형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원형 경기장에 우루루 풀려나가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하는 것과 "네로 황제"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시기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러니 영화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이다. 하지만 뭐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60년대건 70년대건 시기가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으며, 콜로세움 안이건 아니건 크리스천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신약 기독교라는 게 생겼던 당시에, 예수쟁이들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도저히..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고,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익을 노리고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상한 집단이었다.
남들이 다같이 믿는 신을 안 믿고, 황제를 반신반인으로 숭배하지 않으며, '예수'라는 웬 듣보잡 목수 출신 유대인이 죽었다가 뿅 부활했다는 황당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미친놈 왕따 아싸 반동분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놓고 국가 권력에 반역하고 싸우려 드는 여느 독립투사나 정치범 사상범 같지는 않고, 이웃으로서 개인 단위로 만나 보면 행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슨 마술사 초능력자도 아닌데.. 자기들의 세속적인 통념과 계산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 11:38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지금처럼 아무나 “우리 교회로 오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는 개뿔..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처지였다.
모르는 사람이 교회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면 얘가 진짜 동지 형제인지, 아니면 우리를 밀고할 가짜 끄나풀 첩자인지 판별하는 게 급선무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으니.. 이럴 때 판별을 빨리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믿을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서, 보증서’였다. “우리가 보내는 이 형제는 스파이가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잘 대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옛날 건군 초기에 숙군 작업을 할 때도 “이 사람은 빨갱이가 아님을 내가 보증합니다”가 아주 유효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쪼록 이 영화를 보면 신약 교회가 이렇게 시작됐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저런 여건 속에서 기록되고 필사됐다는 것을 얼추 실감할 수 있다. 복음은 뭔가 GPL 라이선스 오픈소스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이 귀하던 시절에 감옥에 갇힌 채로 찬송가를 부르려면 가사를 평소에 다 외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클래식 교과서적인 명작 영화는 옛날에 벤허 같은 것 말고는 이제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긴 한다.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다.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서 바울은 꼭 볼 가치가 있음을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04 08:36 2018/12/0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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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차이

  • 내가 이 일을 듣고는 내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놀란 채 앉았더니 (스 9:3)
  • 내가 그들을 꾸짖고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이르되 ... (느 13:25)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빡쳤을 때 에스라는 자기를 저렇게 했고, 느헤미야는 남을 저렇게 했구나.. (참고로 뜯다/뽑다 모두 영어로는 구분 없이 pluck off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2. 한글 개역성경의 감성 번역 (개역개정판도 포함)

(1) 습 3:17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영어로는 rejoice over you with joy / great gladness 정도다. 그냥 "너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도의 뉘앙스인데, 하나님이 차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무노무 기뻐하실 거라니! 번역자가 over이라는 단어를 전치사가 아니라 접두사로 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2) 시 8: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만, 내가 아는 전세계 그 어떤 성경 역본도 저기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없다. 개역 말고는. 그냥 excellent(KJV. 뛰어나다) vs majestic(웅장한, 장엄한) 정도로 나뉜다.
번역자가 '크고 아름다워요'라는 심상을 의도한 건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는 아직 저런 표현이 없었는데..

3. 개역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된 곳

(1) 창 37:3 채색옷/색동옷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색동옷 입은 꿈쟁이 요셉을 보면서 자란 건, 개역성경이 비록 큰 줄기는 다르지만 저기서만은 어째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요즘 번역은 장신구가 잔뜩 달린 옷, 소매 긴 옷 등이 트렌드이다. 번역의 정오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2) 엡 4:12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여(perfecting)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킹 제임스 성경만이 perfecting이고 타 역본들은 equip, prepare 그냥 '준비시키다'라고 번역되었다.
이건 구약도 아니고 신약인데, 개역성경이 딴 건 놔두고 여기서는 어떻게 KJV의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4. 사흘 밤낮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게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튿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


굉장히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나, 문제는 성경에는 저 기간에 대해 3박 3일..
three days & THREE NIGHTS
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낮도 셋, 밤도 셋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마 12:40에서 요나의 표적 말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와 문화에 따라 날짜나 나이 계산을 할 때 당일을 포함시켜서 1부터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고 0부터 시작하느냐 같은 유도리와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 day는 '낮'도 되고 '날'도 되는 중의성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는 내가 보기에 그런 유도리가 틈탈 여지가 없다. 금요일이 첫째 날, 일요일이 셋째 날 식으로 계산하면 밤이 "3박"이 되지 못한다. 그냥 2박 3일이 될 뿐이지.
마치 창세기 1장에서 1, 2절까지 몽땅 첫째 날에 포함시켜서 첫째 날이 "하늘과 땅과 빛을 만든 날"이라고 붙이는 격의 오류가 야기된다.

성경에서 third day와 three days가 서로 연결되어 쓰인 용례들을 쭉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들은 완전히 72시간을 꽉 채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48시간은 확실하게 경과한 기간이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도 예수님이 딱 부활하신 시각이 아니라 빈 무덤을 사람들이 발견한 시각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확하게 얼마나 더 전에 일어나서 무덤을 탈출해 나가셨을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넉넉하게는 수요일, 또는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 정도는 돼야 한다.

본인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성 금요일'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나무위키의 설명과 성경의 진술이 서로 충돌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

5. 세례가 아니라 침례이며, 침례는 구원 증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1) 침례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신약 기독교회에서 성경에서 행하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2대 의식이다.

(2) 또한 침례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조건이 전혀, 절대 아니다. 사람을 교회에 소속시킨다거나 종교적으로 뭔가 성화· 버프 시켜 주는 효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앙 고백 내지 구원 간증 같은 인증일 뿐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은 뒤에 침례를 받는 게 나중이다. 이거 순서가 꼬이면 정말 사람 피곤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물론 침례인 요한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성격과 의미가 약간 다른 회개의 침례 같은 게 존재하긴 했었다(행 2:38 같은).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1) 성경의 용례를 따라 꼭 물에 전신이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강조하며, (2) "애들은 가라"이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 유아들에게는 그걸 절대 주지 않는다. 행 8:37이 KJV 이외의 성경에서 삭제된 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를 야기했다고 본다.

애들한테 유아 세례? 영세? 전~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들은 설령 그 상태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해도 특례가 적용되어 어차피 무조건 구원 받는다. 이거라도 있으니 예수님 시절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애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도 된다. 유아 세례가 이 복된 교리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시겠는가?

기독교계의 여러 종파 교파들 중에 침례교가 참 역설적이게도 침례에 다른 종교적인 의미나 주술적인(?) 능력을 일체 부정하고 침례를 제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냥 주님께서 명령하신 독특한 신앙 고백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쓰인 빵과 잔이 그냥 상징 외에 다른 아무런 주술적인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성경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교리인데, 역사적으로 이 사소한 교리 하나 지키느라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나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6. 히브리서의 저자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욥기의 저자는 모세라고 생각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의 근거는 구약을 통틀어 창세기와 욥기에만 존재하는 sons of God, being old and full of days이다.
히브리서의 근거는 바울 서신서에만 존재하는 Timothy, brotherly love, Grace be with you이다. 거기에다 킹 제임스 성경에만 존재하는 제목과 끝인사도 추가적인 증거 역할을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이탈리아에서 써서 디모데 편으로 보냄)

욥기에 대해서는 중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엘리후가 자신을 1인칭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엘리후가 책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욥 32:16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가 긴 대화를 채록했을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지만, 저 구절은 3인칭 시점의 텍스트에서 엘리후의 말이 직접 인용된 것일 뿐이다. 욥기가 전반적으로 엘리후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된 건 아니며, 32장의 중간에 갑자기 엘리후의 말 인용이 끝나고 엘리후의 동작에 대한 서술로 시점이 바뀔 만한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구절은 그냥 "제가 좀 기다려 봤는데 형님들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견 좀 털어놔야겠다고요."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에서 화자의 시점만으로 욥기의 저자를 추측하는 건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성경에서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이 한 문장 안에서 갑자기 왔다갔다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행 1:4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구절의 역본별 번역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경우 비록 처음에는 완전 이질적인 문체로 시작해서 정체불명이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성도들의 행실 얘기가 나오면서 바울 서신 냄새가 짙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앞부분도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원리와 맥을 잡으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저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을 기록할 만한 실력자가 그 당시에 바울 말고 또 있었을까? 내가 읽어 본 느낌은 그렇다.

백범일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보안 때문에 처음에는 생뚱맞은 가명 불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행적을 보면 그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폭탄의 공급책이던 김 홍일 장군 말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의 표현 기법이 쓰인 게 아닐까?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본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열왕기하의 끝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 왕의 체포)
마치 역대기하의 끝부분과 다음 에스라기의 시작 부분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표현의 유사성"에 최대한 의미를 둔다면, 이런 식으로 결론이 일관되게 도출된다. 창 1:2와 렘 4:23에서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게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 정황상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이다. 에녹이 아니며 다른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글쎄, 히브리서의 저자를 의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부터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다는 식의 썰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이나 침례인 요한이나 신약 복음서의 기자는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내용 역시 아무 이질감 없이 이사야의 책, 이사야의 말이라고 버젓이 인용하는데도 말이다.

본인이(다른 모든 bible believer들도 포함) 창세기의 1~11장 내용이 다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아담이 실존 인물이며 노아의 홍수가 실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굳이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든가 에덴 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네 하는 낭설이 없어도 된다.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 아벨(마 23:35)과 노아(마 24:37-39)를 버젓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증하면서 교차 검증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 내가 예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모험이나 도박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4 08:37 2018/08/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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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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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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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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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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