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부르는 찬양곡 중에 "찬양하라 내 영혼아"라는 짤막한 곡이 있다.
국내외로 모두 대체로 작곡자 미상이라고 적혀 있고, 국내에서는 '예수전도단 번역'이라고 소개돼 있다. CCM 앨범 중에는 1991년에 나온 주찬양 7집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성경 좀 읽은 분들은 이 곡의 가사가 기본적으로 시 103:1에서 착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절은 시편 구절대로 "찬양하라"인데, 2절은 "감사하라", 3절은 "기뻐하라"라고 뭔가 다른 좋은 동사들로 바리에이션이 있다. 이것은 살전 5:16-18의 3대 권면에서 '기도하라'만 빼고 적당히 가져와서 가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사실, '기뻐하라'(시 33:1 등), '감사하라'(시 106:1, 107:1, 136:1 등)는 시편 다른 곳에서도 많이 나오기도 하고 말이다.

단, 가사의 번역에는 아쉬운 점이 좀 있다. 먼저 1절의 동사는 원래 praise가 아니라 bless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우리말 성경의 번역 관행에 따라 단어를 구분하자면 찬양보다는 찬미, 찬송이 더 적합하다.
그리고 한국어 찬송가 특유의 영/혼 혼동도 아쉽다. "내 영혼아"가 아니라 "오 내 혼아"가 되면 음절수가 딱 맞다. 성경 구절에는 감탄사 O가 실제로 있기도 하니까 말이다.
<내 평생에 가는 길>(It is well with my soul) 찬송도 후렴이 "내 영혼 평안해" 대신 "내 혼이 평안해"라고 고쳐 주면 교리적으로 더 정확해진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내 속에 있는 것들'의 정체는 뭘까? 내 자아? 내 세포? 내 장기? 혹은 병균? 박테리아? '그들의 벌레'만큼(막 9:44, 46, 48)이나 알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성경은 성경으로 풀면 된다. 성경에서 within me에 속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오 내 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내 속에서 불안해하느냐?" (시 43:5, 시 42:11) 등.

사람의 자아 내지 인격, '나 자신'을 구성하는 것은 혼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몸이라는 껍데기 안에 '혼'이 들어있어서 나 자신이 나의 혼을 제3자 대면하듯이 "내 혼아" 이런 형태로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구약 시절에는 교리적으로 몸과 혼이 완전히 밀착해 있었다고 함) 내 속에는 혼도 있고 영도 있고 마음, 생각 등도 있다. 한편, '내 속중심'(bowel)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건 문자적인 신체 장기와 마음(창 43:30, 왕상 3:26)을 모두 가리키더라.

이런 심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내 속에 있는 것들아"가 내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결국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명령처럼 혼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찬양 악보집에 따라서는 "내 속에 있는 것들아"라는 표현이 생소하다고 가사 자체를 "온 맘과 정성 다하여"라고 고친 물건도 있다.

또한 그냥 in이 아니라 within이기 때문에 '안'이 아닌 특별히 '속'이라고 번역한 듯하다. 둘은 구분이 굉장히 헷갈리기 쉬운 단어이긴 한데, '안'의 반의어는 '밖'이고 '속'의 반의어는 '겉'이다. 이런 관점의 차이가 있다.

준비 찬송으로 이거 부르면서 '내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해 주니 아주 도움 됐다면서 반응이 좋았다.
나 역시 나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찬송을 회중들에게 같이 부르자고 주문할 수는 없으니 곡들의 배경과 의미에 대한 공부가 필수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이번 기회에 성경이 말하는 몸, 혼(soul), 영(spirit)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겠다.
한글 글자판에만 두벌식과 세벌식이 있는 게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2분법(몸 / 영혼)과 3분법(몸 / 혼 / 영)으로 해석 노선이 대립하는가 보다.
하지만 본인은 언어· 단어 차원에서 명백하게 다른 개념을 자기가 당장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왜 한데 싸잡아서 일컫는지 모르겠다.

물론 혼과 영은 단순한 언어 직관만으로는 엄밀한 구분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평소에 엄밀하게 구분해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성경적으로 혼이라고 부르는 존재는 대충 영혼이라고 싸잡아서 말하고,
성경에서 영이라는 일컫는 더 추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성령' 말고는 나머지는 다 그냥 정신, 기운 정도로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Q정전에서 유래된 그 이름도 유명한 병맛 용어인 '정신승리'도 영어로는 spiritual victory이다.

혼, 영에 해당하는 '가장' 가까운 순우리말을 굳이 찾자면 내 생각엔 각각 넋, 얼 정도라고 본다. '넋을 잃다/넋이 나가다/얼이 빠지다/넋을 위로하다' 이런 데에만 쓰기에는 아까운 단어이지만, 지금은 좀 국뽕(우리얼! 말과 글과 얼 ㅋㅋ)이나 동양철학스러운 느낌이 너무 짙어져 버린 것도 사실이다. 정서상 당장 성경 번역에다 반영하자는 말은 아니다.
반도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고 성경이 처음으로 번역됐을 때 성경의 표현이 언어의 용례를 주도해서 정착시켰다면 모를까 지금은 좀 늦은 감이 있다.

단순 어학 사전에서는 이를 엄밀하게 구분하는 용례를 찾을 수 없다. soul을 찾아도, spirit을 찾아도 다 비슷하게 정신, 영혼 따위의 풀이가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넋, 얼을 찾아도 마찬가지이고. 마치 heart-mind, 생각-마음 같은 미묘한 유의어 관계이다.

이런 전문용어들의 엄밀한 구분을 위해서는 어학사전이 아니라 해당 업계의 전문 용어사전을 참조해야 한다.
가령, 국어/영한사전에서 철도 용어인 궤조/궤도/선로, rail/railway/track의 엄밀한 차이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 뒤섞여서 제시돼 나오지. 이런 예가 한둘이 아닐 것이며 성경· 신학 용어도 예외가 아니다.

성경엔 spirit이 비인격적인 '정신' 같은 용례가 없지는 않다.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보고는 너무 놀라서 멘탈이 붕괴되었다고 할 때 "there was no more spirit in her"이 딱 한 번 있다. 어쩌면 저 숙어 자체가 그냥 관용구인 것일지도..
언행에서 어떤 영이 나왔느냐는 물음(욥 26:4)에서의 영(사람의 영, 짐승의 영, 마귀의 영, 하나님의 영..)도 영 자체에 어떤 인격적인 의미를 부여한 용례는 아니다.

하지만 아합 왕을 꾀어내어 죽이겠다고 말한 것은 독립된 인격체로서 어떤 영이다(왕상 22:21). 이게 이해가 안 되니 평범한 공포물을 많이 본 현대인들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 장면(마 14:26)이나 욥 4:15 같은 장면에서 ghost 같은 '귀신, 유령'을 떠올리며, 심지어 성경조차 그렇게 번역된 경우가 있다.

성경의 표현은 여기서도 그냥 a spirit이다. 영은 살과 뼈가 없는 존재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다(눅 24:39). 이건 사람이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ghost는 성령님을 나타내는 Holy Ghost가 아니면 다 give/yield up the ghost라고 해서 말 그대로 '숨지다/죽다'에서 '숨'을 의미하는 용도로만 쓰였다. 그 이상 wraith, phantom, spectre 같은 개념은 성경에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저런 영들이 사람의 관점에서 gods(신들)라고 일컬어지긴 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굳이 콧구멍 두 개, 손발가락 5개 같은 외형뿐만 아니라 사람도 몸· 혼· 영으로 하나님의 삼위일체 계층을 이어받았다는 뜻도 있다. 한글 개역성경은 영과 혼 구분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지만 사람의 창조를 설명하는 창 2:7에서 혼을 영으로 뒤바꿔서 번역했고, 짐승에게도 영이 있음을 말하는 전 3:21에서는 영을 혼으로 뒤바꿔 번역한 흑역사가 있다.

복음을 전해서 다른 사람을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하는 행위를 영어로 soul-winning이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말로는 번역이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여기서도 멀쩡한 혼을 영으로 바꿔서 흔히 '구령'(口令 말고)이라고 하는데, 동음이의어는 둘째치고라도 명백히 오역이다. 개역성경이 창 2:7의 'living soul'을 '생령'으로 엉뚱하게 번역한 것과 동급의 오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을 혼이라만 바로잡으면 우리말은 婚과 동음이의어가 되어서 매우 생뚱맞은 결혼 프러포즈처럼 들리게 된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어느 동네에서는 win을 문자적으로 번역해서 '혼을 이김/이겨 옴'이라고 자체적으로 말을 만들어 쓴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뜻을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저건 더 이상한 번역이 아닐 수 없다.
상을 탔다고 할 때 상을 이겨 왔다고 말하지는 않잖아(win a prize)..;; 트로피나 상장을 발로 잘근잘근 짓이기기라도 하나?

상대편을 무슨 승부를 벌여서 이겼다고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 형태로 영어로 말할 때는 beat를 쓴다. win은 대회 이름(win the game)이나 보상을 목적어로 받을 때에나 '이기다'라는 뜻이지, 적군이나 경쟁자를 받는 단어가 아니다. Doom 게임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은 아래의 1994년도 어느 PC 잡지의 문구가 두 단어의 용례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해의 게임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고(win) 싶은 신작 게임이 있는가? 그렇다면 Doom부터 제치고(beat) 올라와라." 대~~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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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win에 beat 같은 인격체 목적어가 들어갔다면 그건 남의 마음을 얻어서 내 편으로 끌어들였다고, '승리하다'와는 완전히 별개의 의미와 용례가 있다고 봐야 한다. 아무튼 이런 것도 영· 혼과 관란하여 언어에 존재하는 혼동의 카오스의 한 예이다.

개인적으로 spirit이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최초로 본 곳은 페르시아의 왕자 2 게임의 부제 the spirit and the flame이었다.
soul이라는 단어는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서울시가 '아시아의 혼(심장, 눈동자?)' 이라고 자화자찬 홍보를 하는 듯하다. 이거 아니면 쏘울메이트 같은 거.

둠 2의 몬스터 중에는 대놓고 '(구원받지 못하고) 잃어버려진 혼'이 있다(lost soul). 그런데 lost soul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곳은 pain elemental(고통의 근원?)이라는 몬스터이다. 이것도 그냥 아무 의미 없는 작명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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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기독교 카테고리에 넣을지 언어 카테고리에 넣을지 꽤 고민되는 내용이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7/06/03 08:33 2017/06/0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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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로남불 이중잣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중잣대.
이래도 X랄, 저래도 지X. 어떻게 대답을 하든 꼬투리 잡아 불평불만 욕하기.
이건 성경에도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종특이다. 정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마귀 들렸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매 그들이 말하기를, 보라, 음식을 탐하는 자요, 포도즙을 많이 마시는 자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다, 하는도다. ... (마 11:18,19; 눅 7:33,34)

이솝 우화에 아주 비슷한 예가 있다. 나귀를 끌고 가는 부자 이야기 말이다.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각각 나귀를 타거나 타지 않는 2*2 = 4가지 경우를 어떻게 조합하건 주변 사람들은 욕을 했다. 이건 뭐 답이 없다.

마녀사냥이 괜히 천하의 개쌍놈 짓이라고 지탄받는 게 아니다. 멀쩡한 여성을 물에 쳐박아 넣었는데 안 죽고 버티면 레알 마녀 괴물이니 화형에 처한다. 꼬르륵 익사해 버렸으면 사람이니 마녀 누명은 벗지만, 당사자는 이미 죽고 없다. 뭘 해도 걸린다. 뭐 이런 식의 논리이니까.. -_-;;
destructive testing을 무슨 양산형 제품 중 하나를 무작위로 추출해서 시행하는 게 아니라 사람한테 시행하는 거다.

“난 이 승만은 보도연맹 학살과 국민방위군 사건 때문에 극혐하지만, 마오 쩌둥은 아무래도 좋고 대약진운동이건 제사해 운동이건 상관 안해요.” 같은 부류도 넓은 의미에서는 이런 범주에 속한다.
김씨 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흉악 범죄자,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 731 부대장,히틀러나 도조 히데키 같은 전쟁광 인간 쓰레기들 한테도 안 쓸 욕과 저주와 악담을.. 좀 희생과 부작용 감수하고라도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조선이 적화되지 않게 막은 잘못밖에 없는 자국 초대 대통령에게 도대체 무슨 의도로 퍼붓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 시절에 그 욕 안 쳐먹고 곧이곧대로 신사적으로만 일 추진했으면 그냥 대한민국 간판 내리고 김 일성에게 정권 갖다바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뭐, 자기도 김 일성 싫어는 한댄다. 그러나 눈빛만 보면 안다. 똑같이 싫어한대도 이 승만을 욕할 때와 같은 혼과 진심은 절대 담겨 있지 않다. 이건 정상적인 분별력과 판단력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남조선 일부 대통령의 독재랑 북괴의 독재가 아무 차이가 없다는 망발도 사상에 이상한 데에 지독하게 오염된 중증 정신병이다.

그러니 이 정도면.. 그냥 “난 논리고 팩트고 뭐고 아무 필요 없고 특정 정치인은 그냥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싫어요”가 차라리 솔직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인 대답이다. 그건 최소한 거짓말은 아니거든. 그러면 나라도 “아~ 그러세요?” 하면서 그 사람 앞에서는 정치 얘기 더 안 꺼낸다. 취향이야 존중해 줘야지?

그렇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건 얼마든지 자유이고, 심지어 그 주장을 자기 개인 사이버 공간에다 올리는 것 역시 자유다. 단지 그 따위 논리 체계를 갖고서 남의 사이버 공간을 더럽히고 오지랖을 놓는다거나, 남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려고 하지만 않으면 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직업은 몰라도 정치인, 외교관, 법조인, 문과 계열 교사 같은 직업은 안 갖고 살면 된다 -_-;; )

애초에 저런 성향의 사람들은 미국 같은 인권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면서 자기 나라를 욕하고 비관하지만, 정작 추종하고 모델로 삼고 친해지려는 나라는 북한이나 중국처럼 인권이나 민주 따윈 있지도 않은 나라들이다. 똑같이 외국이고 비슷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도 비판하는 잣대가 같지가 않다. 쟤들은 원래 저렇다. 그러니 종북 빨갱이라고 백 날 욕 먹어도 할 말 없다.

2. 악마의 편집, 기레기 기질

그때에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이 말씀이 형제들 가운데 널리 퍼졌으나 예수님은 그에게,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머물 것을 내가 원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셨더라. (요 21:23)

이것도 완전 대박이다.
본문이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은 “요한은 설령 순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게 너(베드로)랑은 무슨 상관이니? 오지랖 부리지 마라”라고만, 즉 “안알랴줌” 노코멘트라고 대답을 하셨다. 그런데 그게 곧장 “요한은 순교 안 하고 천수를 누릴 거래!”라는 루머로 변한 채로 커뮤니티에 쫙 퍼졌다.

이게 인간의 심성이다. 다른 예로, 구약의 십일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신약에서는 성경에 약속된 보상 자체가 영적인 것이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는 그 취지나 정신을 빼면 교리적으로 신약 교회와 무관하긴 한데, 그 얘기를 하면 "어 그럼 아예 헌금을 안 내도 되네, 내 물질 안 바쳐도 되네"처럼 원문이 의도하지 않은 내용까지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슬그머니 넘겨짚는 사람이 꼭 있다.

성경 얘기 말고 더 선정적인 예로는, 15년도 더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결혼하고 나서도 너무 바빠서 자녀계획 같은 거 생각할 겨를이 없네요”라는 인터뷰가 어느 찌라시에서 “최 진실 임신 못 한다”라는 제목으로 한 줄 요약되기도 했다. ㅠㅠㅠㅠ 저건 거짓말은 안 한 건가..?? -_-

그러니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온대도 언론은 얼마든지 천하에 죽일놈 개쌍놈으로 조작할 수 있다. 전혀 이상한 일도, 놀랄 일도 아니다.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처형하라고 날뛰던 백성들 하나도 욕할 자격 없음. 오늘날까지 괴벨스의 후예들이 워낙 많이 날뛰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내로남불 이중잣대 테크닉이 합해지면 삼인성호 같은 건 일도 아니다.

성경을 보면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습니까?”(마 22:17), “간음하다 붙잡힌 이 여인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요 8:4-5)처럼 겉으로는 평범한 정치· 종교 질문 같지만 결국은 Yes/No 뭐라고 대답하든 앞뒤 문맥 짤라서 사람을 매장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불순한 함정 질문도 있다.

그러니, 하물며 “성전 헐고 사흘 만에 재건” 운운은 기레기· 선동꾼들이 앞뒤 문맥 떼어내고 집어물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떡밥이었다.
원전은 요한복음(요 2:19)에 있는데 사람들이 나중에 써먹는 건 다른 책인 마태복음(마 26:61)에서 나온다는 게 흥미롭다.

3. 극단적인 것, 예외적인 것만 부각시켜서 큰 진실 왜곡

(1) 큰 그림: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세다.
작은 그림: 그런데 장 미란은 어지간한 남자들보다 훨씬 더 힘이 세다.

(2) 큰 그림: 미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정~말 많이 도와줬고 물자 원조도 하고 고아들도 왕창 많이 받아줬다.
작은 그림: 근래에 주한미군에 그렇게 질 좋은 사람이 오질 않다 보니 윤 금이 살해 사건에, 이태원 살인 사건 같은 범죄가 가끔 발생했다. 장갑차 교통사고 때는 가해자가 실실 쪼개고 앉아 있었다.

(3) 큰 그림: 88 서울 올림픽을 우리 민족의 저력으로 아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작은 그림: 그런데 개막식 때 성화 점화와 비둘기 날리기가 서로 아귀가 안 맞아서 "세계가 지켜보던" 중에 비둘기 몇 마리가 산 채로 통구이가 돼 버리긴 했다. 그리고 미관에 안 좋다고 동선상의 판잣집들이 강제로 철거당하고 개고기는 더욱 음지화하게 됐다.

(4) 큰 그림: 북괴는 끊임없이 남한에 무력 도발을 하고 테러 저지르고 간첩 보내고 땅굴도 팠다. 악랄함의 수위로 따지자면 일제를 능가한다.
작은 그림: 그렇게도 반공 강조하던 박 정희도 김 일성으로부터 선물 받은 적 있고, 그 딸은 한때 평양 가서 김 정일한테 공손히 인사도 하고 온 적 있다.

(5) 큰 그림: 일제는 조선 땅의 물자를 가혹히 수탈했으며, 말기로 갈수록 전쟁 준비와 민족 말살 정책으로 조선인들을 매우 괴롭혔다.
작은 그림: 그런데 조선 말기가 워낙 너무 막장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본이 아니게 한반도에다 철도 도로 전기 등 각종 인프라를 설치하고 근대화(?)를 시켜 주기도 했다. 초기엔 일제 순사가 마을 집집마다 파리채를 나눠주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대체로 여자보다 힘이 더 세며,
미국은 한국의 매우 고마운 우방국이다. 다른 나라라면 몰라도 반도는 반미 할 자격 천하에 없는 나라다.
88 서울 올림픽은 전반적으로 매우 잘 치러서 한국의 리즈 시절 추억을 남겼고,
북괴는 오히려 그렇게 화해하는 척하면서도 호박씨 까면서 더욱 비열하게 도발을 했을 뿐이다.

일제 역시 조선을 조금 근대화시켜 준 건 돼지를 잡아먹기 직전까지 잘 먹이고 살찌우는 것과 같은 목적으로 한 것일 뿐이다. 쟤들이 말기엔 단군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아예 싹 없애려고 창씨개명, 한국어 사용 금지, 신사 참배와 궁성요배 강요 짓거리를 한 걸 생각해 보아라.
이건 사람을 대놓고 독가스실로 보낸 것만 아닐 뿐이지 몸이 아닌 정신에 대해서는 거의 나치 유대인 학살 급의 죄질이다. 이 엄청난 만행이 겨우 1920년대 리즈 시절에 알량한 인구 증가와 식량 생산 증가, 철도와 공장 건설 산업화 따위로 실드 쳐지겠는가?

작은 그림을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은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작은 그림에 "만" 꽂혀서 큰 그림을 부정하려 하는 외눈박이 이단들로부터는 반드시 도망쳐 나와라. 그런 애들은 순진하고 멍청하기보다는 사악하고 불순한 경우가 더 많더라.

기독교계에 이런 방식으로 넘어진 이단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수두룩하다.
진리의 성경 말씀을 올바로 나눠야 하지만(딤후 2:15), 한편으로 역사 팩트도 올바로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divide란 분할, 구분, 분간..을 의미한다.

4. 결론

이것 말고 또 무슨 예가 더 있을까?
성경에는 마태복음의 끝부분처럼 로마 정부가 “예수 시체 도난”이라고 여론 조작과 매수를 시도하는 장면도 나오고,
또 고라 일당처럼 자기가 권력욕 대통령병에 걸려 있으면서 말은 “성직 계급 반대, 만민 제사장론” 드립을 치면서 모세를 상대로 반역을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사회·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쓰는 세상,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이런 것도 다~ 저런 케케묵은 전략의 후신일 것이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전해도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인간이 그래도 뇌가 있고 일말의 지능이 있다면 최소한 옛날 사람들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또 겪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실수를 하더라도 주토피아 OST 가사처럼 새로운 실수를 계속 만들면서 발전이나 변화를 해야지 뻔히 실패가 검증된 길을 또 가서는 꿈도 희망도 없다.

내가 늘 말하듯이 성경은 신약 크리스천의 행실 차원에서는 정교 분리를 명시하며, 기본적으로 정치 중립적인 책이다. 예수님이 재림해서 지구를 직접 다스리기 전까지는 인간이 만드는 완벽한 세상 정부와 지상락원 유토피아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위의 권위와 주인과 갑에게 순종하라" 같은 보수적인 이념 위주이지만, 누가복음이나 야고보서 같은 매우 좌파스러운 책도 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다는 데는 유대인, 로마인, 백성과 지도자와 외세가 공평하게 똑같이 기여했다.

이런 기본적인 균형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소위 좌와 우 중에서 누가 더 크게 잘못하고 있고 더 반역적이고, 더 반성경적인 방법론을 즐겨 사용하는지는 정말 답이 이미 나와 있는 문제인 것 같다. 모두가 공평하게 잘사는 세상 따위야 인간의 힘으로 결코 이룩할 수 없지만 북괴에 안 퍼 주는 세상 정도는 인간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으며, 반드시 이룩해야만 한다!

물론 사람이란 게 성장 배경과 관심분야가 제각각이고, 보고 듣고 정보를 입수하는 경로가 제한돼 있다 보니 삼라만상을 보는 관점이 편파적이 될 수는 있다.
누구는 일본이 더 싫지만 누구는 북한이 더 싫고.. 누구는 경제와 안보에 더 관심이 많지만 누구는 약자 인권과 복지에 더 관심이 많을 수는 있다.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 일기장이나 SNS에다가만 끄적거리는 거면 그건 아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감히 대통령을 물러나라고 요구할 정도의 강한 결론이 담긴 주장을 하거나, 남의 주장을 반박하고 남의 SNS에다가 오지랖을 부리거나 남을 설득해서 논쟁에서 이기고 내 편을 만들려면 논리가 편파적이어서는 결코 안 된다. 아예 법조인, 정치인, 또는 문과 계열의 교사· 교수처럼 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 하고 남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처지의 사람이 사상 체계가 그따구여서는 절대 안 된다.

일관성이 없으려면 차라리 일관성 없게, 랜덤하게 일관성이 없어야(?) 그건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정말로 그 사람이 생각이 짧거나 식견이 부족했거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서 편파적으로 생각한 것일 수 있다. 그건 개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인권을 얘기하고 나라의 비극과 흑역사를 얘기하면서 오로지 북괴에 대해서만 절~~~대 침묵하고, 꼭 그쪽으로만 "일관되게 일관성이 없는 것"은 우연일 수 없다. 일부러 작정하고 그러는 것이며 매우 불순하고 사악한 태도이다.

그래 가지고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설득을 못 할 것이고 내가 쓰는 글의 논조를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얻다대고 비겁하게 팩트나 끄집어오다니? 인권 민주 복지 평화 통일 팔아서 거짓 날조와 선동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 이러려는 것 같은데, 그런 속 뻔히 보이는 전술은 나한테는 절대로 안 통할 거다.

Posted by 사무엘

2017/05/07 08:32 2017/05/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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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본인은 과거에 수능을 안 쳤으며 군 자대 생활을 한 적이 없다. 모태신앙인 관계로 딱히 구원 순간에 대한 기억도 없고, 사소한 사항이다만 평생 안경을 쓴 적 역시 없다.
어지간한 사람들이 겪는 코스들을 많이 건너뛰었는데.. 이런 skip의 궁극의 완전체는 나중에 육신의 죽음조차도 경험하지 않고 건너뛰는 것이리라. 내가 아직 살아 있는 가까운 미래에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서" 내가 바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다면 그것만 한 꿀잼이 없을 것이다. (살전 5:16-17 등)

성경 스토리를 Doom 2 게임에다 비유하자면 IDDQD 치트키도 있고(무적. 욜 2:8 등), IDNOCLIP도 있고(닫힌 문 통과. 터미네이터 영화에도 나옴. 요 20:26) IDKFA(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 생략)도 있다. 심지어 순간이동 transform도 있다(행 8:39).
무적 모드를 god mode라고 부르는 거.. 일단 상당한 근거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결혼까지도 skip한 채로 변화될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결혼도 이 세상에서 육신을 입은 삶이 끝난 뒤부터는 결코 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마 22:30).

2.
무슨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음향 차원에서 끔찍한 소리 말고, 사람들이 정서 차원에서 천하에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로는 잠에서 강제로 깨어야 하는 알람, 또는 군대 기상 나팔 소리 같은 부류를 1위로 꼽는다.
또한, 일본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불시에 "띠링띠링~ 띠링띠링~" 하며 튀어나오는 긴급 지진 경보에 거의 트라우마가 있다고 본인은 들었다. 아무 존재감 없는 한국의 민방위 경보 내지, 오동작이 너무 잦아서 신뢰도가 양치기 소년 급이 돼 버린 건물 화재 경보 같은 것과는 급이 완전히 다르다. (저러다 진짜 불 나거나 전쟁 났을 때가 걱정된다)

비행기 조종사 한정으로는 "웽웽~ pull up!" 이러는 GPWS 경보음도 가히 저승사자의 음성이다. 누가 지금 비행기 기수를 올려야 한다는 걸 몰라서 안 올리는 줄 아나..;; 저 소리를 조종실에서 실제로 들은 뒤에 생존한 조종사는 세계를 통틀어도 별로 없다.

이런 점을 감안했을 때 예수님의 공중 재림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소리처럼 들릴까? (고전 15:51, 살전 5:16-17)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에"라는 찬송가를 기억해 보라.
이건 그야말로 2천 년에 가깝게 떡밥이었다. 예수님이 언제라도 오실 수 있다는 대비를 제대로 하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시한부 종말론'처럼 개막장으로 살지 않는다. 그렇게 건전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하늘의 나팔 소리는 가장 반가운 소리가 될 것이다.
"난 하늘나라에서 예수님 얼굴을 제일 먼저 볼 거니까 이 세상에서는 맹인으로 살아도 괜찮아요" 급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테고.

하지만 구원은 받았지만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인드로 살았던 사람이라면 갑작스러운 재림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가 될 것이고 저런 나팔 소리는 군대 기상 나팔이나 지진 경보음처럼 들리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고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건 인간의 입장에서는 불리한 정보 접근성이지만 그게 그나마 인간의 삶을 건전하게 유지시켜 준다.

3.
'별'이라고 하면 (1) 지구의 밤 하늘에서 볼 수 있는 반짝이는 작은 점들을 가리키지만 (2) 그냥 천체를 다 싸잡아 가리키기도 한다. 심지어 지구도 '초록별'이라고 하니까.
그래서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을 항성이라 하며, 그렇지 않은 별은 궤도를 도는 고체덩어리라는 점만 부각시켜서 행성이라고 한다. 일본식 한자어로는 '혹성'이라고도 했던 것 같다.
항성과 행성은 철도로 치면 마치 기관차와 객차의 관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객차는 자기 동력이 없으니 기관차와 연결되어 끌려가기만 한다. 그것처럼 행성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게 아니라 다른 항성의 빛을 반사해서 빛나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비유 대박이다~)

성경은 천체들을 논할 때 해, 달, 별(복수 개의 집합)이라는 세 그룹으로 분류해서 말한다. 이게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일관된 심상이요 진술 방식이다. 특히 해와 달은 서로 나타나는 시기만 다를 뿐 거의 동급의 대등한 관계로 즐겨 묘사된다.
6일 창조의 넷째 날 설명부터 시작해서(창 1:16) 요셉의 꿈에서도 해와 달과 별(창 37:9)이 등장하고, 욜 3:15과 마 24:29 같은 구절을 거쳐서 계 12:1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다. 특히 계 12에 나오는 여인의 정체는 다른 듣보잡 이단 교주가 아니라 요셉의 꿈과 연결하여 그냥 유대인/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성경을 성경으로 풀고 해석하는 좋은 예이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성경에는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이라는 개념은 있어도,
태양과 달은 실제 크기와 거리가 넘사벽급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 태양도 10파섹 거리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4.8등성짜리 별이며 우주엔 태양보다 더 크고 밝은 항성도 있다는 것, 태양계에 금성이나 화성 같은 행성도 있다는 것.. 같은 정보는 성경으로부터 얻을 수 있지 않다. 애초에 성경이 인간에게 그런 정보를 주려고 기록된 책도 아니다.

물론 성경은 6일 창조라든가 인류의 역사, 레위기에 나오는 의학· 위생 관련 진술은 같은 건 문자적으로 정확하며 시대를 앞서간 기록이라는 것이 본인의 믿음이다.
허나, 성경 율법에는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라는 보편적인 명령만 있는 게 아니라 오늘날 세속 관점에서는 영적 교훈 말고는 별다른 의미가 없고 적용 가능하지 않은 계명도 있다. 그런 것처럼 자연과학 쪽에도 성경의 진술이 의도적으로 세속 과학의 관점에서 차이를 보이는 부분 역시 응당 존재한다.

가령, 고래는 포유류이지만 요나서에서 '큰 물고기'라고 적어 놓았다(욘 1:17, 마 12:40).
하나님은 새끼를 낳는 고래라는 특이한 생물을 특별히 창조까지 하신 분인데 어류와 포유류를 구분할 줄 몰라서 고래를 '큰 물고기'라고 적어 놓으신 것일까? 그럴 리는 없잖아.
그냥 지느러미 달렸고 인간이 보기에 물고기처럼 생기기도 했으니 쓸데없이 이런 데에서 괜히 '문법 나치'처럼 굴 필요가 없이 저렇게 적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것처럼 천체에 대한 진술도 그냥 당대 인간이 편하게 읽으라고 해와 달과 별을 보이는 대로 심상과 예표를 부여해서 묘사했을 뿐이다.

성경이 지극히 지구 중심적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우주 개발을 막지는 않지만 적극 권하지도 않는다는 심상이 담긴 것일 수도 있다. 예수님은 지구의 이스라엘 땅에 재림하시지 달이나 화성에 재림하시지는 않을 테니까.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지구 외에 다른 공간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거라고 믿지 않으며, 인간의 기술과 비용만으로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해서 살 수 있을 거라고도 믿지 않는다. (뭐, 나와 다른 견해를 갖는 거야 얼마든지 자유이고, 시도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지만)

어떻게 지구만이 달 같은 커다란 위성이 존재해서 인력을 주고받고 있으며, 내부에 액체 금속이 있는 채로 비교적 빠르게 자전과 공전을 해서 자기장도 발생하며, 끊임없이 물질이 순환하는 살아 있는 행성이 될 수 있었는지..
다른 행성은 아무리 돈과 시간을 투입해도 왜 테라포밍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지, 지구는 밑에 지옥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다른 행성과 어떤 다른 특징이 있는지.. 굳이 창조 과학회 같은 단체가 있다면 그런 걸 규명해도 좋을 듯하다. 괜히 지구· 우주 나이 6천 년에만 매달려서 뻘짓 하지 말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3/04 08:39 2017/03/04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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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간에 이종교배를 하면 예전에 없던 새로운 종(종간잡종) 자체는 나올 수 있다. 동물의 경우 노새나 라이거가 대표적인 예이고 식물도 그런 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교배했다고 원하는 형태의 잡종이 툭툭 튀어나오는 건 아니다. 가령, 감자와 토마토가 지상과 지하에서 동시에 열리는 포메이토 같은 건 SF 수준의 유전자 조작이 필요해 보이는데 만드는 게 이론적으로 가능한지, 그리고 감자와 토마토 정도야 그냥 따로 키우면 되지, 왜 그런 이상한 생물을 가성비 차원에서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는지 필요성 자체조차 난 잘 모르겠다. 이런 거라도 만드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돼지를 채찍질 하는 게 유전공학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또한 잡종은 일반적으로 번식 가능하지 않다. 노새와 라이거는 유전자가 서로 맞지 않기 때문에 이대로 대를 잇는 자손을 남길 수는 없다. 유전과 관련하여 나름 금도의 벽이 있는 셈이다. 이 분야에 대해 비전공자로서 본인이 아는 건 이 정도까지가 전부이다.

그런데 동물을 성질을 죽이기 위해 화학적으로 거세시켰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식물에다 특수한 처리를 해서 씨 없는 포도나 씨 없는 수박을 만든 건 정말 대단해 보인다.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치밀한 API 훅킹이나 문서화되지 않은 꼼수 기능을 동원해 불법복제 크랙을 만들거나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든 것과 비슷해 보인다.

씨 없는 수박의 경우 씨가 아예 안 만들어지는 건 아니며, 검고 딱딱한 진짜 씨가 생기기 전에 하얗고 물렁물렁한 초기 단계의 씨 흔적 정도는 남아 있다고 한다. 이건 '뼈 없는 닭갈비' 같은 급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그런 씨의 잔재는 수박을 먹는 데 불쾌함을 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동식물을 막론하고 그 자그맣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씨에서 엄청난 동식물 성체가 자라난다는 건 손톱만 한 SD카드에 수 GB에 달하는 정보가 저장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자연 창조 섭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 열매 안에 씨가 안 생기도록 유전적인 제어는 또 어떻게 하는지 이 역시 신기한 영역에 속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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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이말년 본좌님의 압박..!! ㅋㅋㅋㅋㅋㅋ
단, 우 장춘 박사는 이미 일본인 학자에 의해 발명된 씨 없는 수박을 국내에 처음으로 들여와서 소개했을 뿐이지, 통념과는 달리 그걸 최초로 발명한 분은 아니다.

우 박사가 업적을 남긴 분야는 따로 있다.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서 얻은 잡종이... '유채'라는 이미 존재하는 다른 제3의 종과 유전자 차원에서 완전히 동일함을 입증했다. 라이거와는 달리 번식에도 아무 문제 없다. 그게 유채에서만 어떻게 가능한지는 잘 모르겠음. 어떻게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했는데 배추와는 별 관계 없어 보이는 유채가 나오지?

유채는 공교롭게도 한국어와 영어에서 모두 이름과 관련된 우여곡절이 존재한다.
'유채'라는 단어는 한자어인데, 얘의 순우리말 이름은 웬 뜬금없는 '평지'이다. 물론 지금은 plain / flat land라는 한자어에게 소리를 완전히 빼앗겨서 유채를 저렇게 부르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 듯하다.

영어로는 더 골때리게도 rape여서 흉악 범죄와 완전히 동음이의어이다! 욕설과 동음이의어인 ‘시발 자동차’가 차라리 덜 민망할 지경. 그래서 유채씨를 짜서 만든 식용유를 과거에는 rapeseed oil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캐나다’라는 나라 이름을 일부 집어넣어서 ‘카놀라유’라는 새로운 마케팅 명칭이 통용된다.

우 박사는 이 유채를 연구해서 1930년대에 유전학적으로 '종의 합성'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다. 이 덕택에 종의 분화를 설명하는 다윈의 진화론이 일부 수정되고 보강됐다고 한다.
여느 외국인도 아니고 무려 한국인 과학자가 종과 종 사이의 변화를 실험으로 입증해서 U's triangle이라고 자기 이름을 학계에 남겼을 정도인데 이건 창조 진화 논쟁에서 꽤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특히 대진화를 믿지 않는 진영에서 인정할 건 인정하고 해명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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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 진영의 아젠다는 진화란 소진화와 대진화로 나뉘며, 종과 종이 바뀌는 대진화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면 안티들은 대진화도 얼마든지 관찰되고 실험으로 입증되었는데 창조좀비들이 스스로 귀를 막고 눈을 막아서 반박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깐다.

창조 진영에서 말하는 "종과 종 사이의 변화는 관찰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화학으로 치면 원소가 다른 원소와의 화학 반응을 통해서 다른 원소로 변하는 일은 없다는.. 그러니까 싼 물질에다 마술을 부려서 금을 짠~ 만들겠다는 연금술은 그저 떡밥일 뿐 그런 기술은 존재 불가능하다는 것과 비슷한 맥락의 주장으로 보인다.

오늘날이야 원자보다 더 작은 단위(원자핵, 전자 등등)의 관찰과 조작을 해서 동일 원소의 동위원소도 논하며, 무슨 방사능 가속 실험실에서 새로운 원소를 너끈히 만들어 내고 심지어 이런 원소가 존재한다면 이런 특성을 갖고 있을 거라고 예측까지 가능한 세상이 됐다. 그러니 원소야말로 절대불변의 물질의 본질을 나타내는 경계 단위라는 통념은 엄밀히 말해 진작부터 깨져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기술 덕분에 원래의 목표이던 구리를 초원자 단위로 조작해서 금을 뚝딱 만드는 게 가능해지고 저렴하게 실용화됐나? 금값이 구리값과 대등하게 폭락하고 금융계에 일대격변이 일어났나? 그렇지는 않다는 거다. 극한의 환경에서 잠깐만 존재 가능하다가 0.1초 만에 원자핵이 붕괴해서 다른 원소로 변해 버리는 그런 불안정한 방사성 원소를 하나 만들어 낸 게 학술적인 의미 이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당장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인조 다이아몬드는 있어도 인조 금 같은 건 없다는 얘기다. 또한 인조 다이아몬드조차도 퀄리티나 제조 원가가 다이아몬드의 가격을 흑연의 가격과 동등하게 낮출 정도의 물건은 결코 아니다.

그러니 생물 쪽으로 가서 종을 원소에다 비유해 보자. 유채건 뭐건 그런 종간변화가 관찰된 것 자체야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종의 기원' 진화 이론이 바뀌었다고 해서, 원숭이건 뭐건 미지의 공통 조상이 진화해서 지적 생명체인 인간이 되었다는 그 비현실적인 확률을 설명하는 데 그게 실질적인 기여를 한 건 여전히 거의 없다.
그러니 창조 진화 논쟁은 서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고 서로 핀트가 어긋난 쪽만 공략하면서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으며, 여전히 생명의 기원과 분화에 신의 창조가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물론 신의 개입이라는 건 과학으로 재연이나 설명 가능하지는 않다. 과학은 천체들이 뉴턴의 법칙대로 돈다는 것만 설명할 뿐, 처음에 누가 그 천체들을 만들어서 언제 그렇게 힘을 가해서 뺑뺑이 돌리기 시작했는지에 대해 답을 주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달은 그 외형이나 특징이 너무 특이해서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지 아무래도 우연히 저렇게 만들어진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격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다.
성경의 하나님은 생물, 생리, 천문 등 여러 분야에서 사람에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지 말라는 법칙을 정해 놓았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들을 거스르고 금기의 벽을 깨고, 자신에게 당장 불편하다 싶은 건 안 불편하게 하는 기술을 그 좋은 머리로 꾸준히 개발해 왔다(전 7:29).

간단한 예부터 들자면..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창 3:19)에 반대하여 땀 안 흘리고 편하게 일하려고 에어컨 같은 엄청난 냉방 기술을 개발했으며, '고통 중에 자식을 낳을 것이요'(창 3:16)를 무효화하려고 무통 분만 기술을 개발했다.
'땅을 일정 주기로 쉬게 하라'라는 명령을 어기려고 질소 합성법을 개발하여 식량 생산에 치트키를 입력해 넣었다.
인간은 땅과 첫째 하늘까지만 영역을 두고 사는 게 원칙이지만.. 알다시피 우주 개발도 진행해서 왕년에는 인간이 달에까지 갔다 왔다.

분야를 불문하고 이런 엄청난 일들을 벌여 온 인간인데 하물며 유전공학 쪽은 어련하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잡종· 이종교배를 통해 생명의 본디 프로토타입인 유전자가 교란되는 것을 명백히 싫어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레 19:19가 대표적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노새'라는 가축이 가성비가 뛰어나고 좋으니 잡종을 만들며, 그 밖에 어느 동식물이든 필요하다면 유전자 조작도 얼마든지 일삼을 것이다.

자, 그런데.. 이런 일체의 시도 자체가 다 나쁘기만 할 것일까? 그걸로 인해 무슨 성경이나 하나님의 권위가 깎이기라도 하는 걸까?

하나님의 법칙을 자꾸 거슬러서 인간이 나중에 어떤 형태로든 보이지 않는 대가를 치르고 삽질하는 것이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이고 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 더운 여름에 에어컨이 발명된 것 자체를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주 개발을 하느라 돈지랄 하는 걸로 다른 사회 복지에나 좀 투자할 것이지!" 뭐 정치적으로 이런 이견이 제기된다면야 그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우주 개발 덕분에 월석의 특징이 밝혀지고 천왕성과 명왕성 사진이 공개된 것 자체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법에 도전하는 영역일지언정 과학 기술 자체는 거대한 칼과 같아서 기본적으로 가치 중립적이다.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뿐이다. 크리스천이 전쟁 무기를 생산하는 회사에 다니는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듯, 유전공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내지 NASA에서 근무하는 항공 우주공학자가 되지 말라는 법은 전혀 없다.

기독교 변증법 중에서 좀 구차하다면 구차하지만, "인간이 지금까지 밝혀 낸 지식이 이것밖에 안 되는데 그 영역의 밖에 있는 신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게 있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대상을 외계인으로 바꿔도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며, 난 둘 다 말이 된다고 본다. 몇백억 광년에 달하는 방대한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인간밖에 없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니 SETI 프로젝트도 하고 옛날에 외행성 탐사선에다가 외계인들 있으면 보라고 금속판도 집어넣는 쇼를 한 것이다.

물론 본인은 크리스천으로서 이 방대한 우주에 지적 생명체는 인간밖에 없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여긴다. 허나 그건 내 믿음일 뿐이니,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큼이나 외계인을 찾는 그 심정은 동의하진 않더라도 동일하게 기회를 보장해 주고 존중해 줘야 한다고 본다. 그 시도 자체를 종교의 힘으로 봉쇄하고 강제로 찍어누르는 건 옛날 갈릴레오 재판 같은 병신짓을 재연하는 것일 테고.

말이 길어졌는데, 결론을 내리자면 이렇다.
다른 분야들도 그렇겠지만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을 보면 양 진영들이 진실을 서로 다른 쪽에서 부분적으로만 갖고 있으며, 상대방을 향해서 뭔가 헛발질만 일삼는 게 눈에 많이 띈다. 원거리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말이 안 통하니, 서로 빡치고 감정만 상해서 결국은 인신공격을 일삼는 백병전으로 논쟁의 양상이 바뀐다.

본인은 창조과학(?) 쪽이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목숨 걸고 사수하는 것 하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창 1~3이 허구 설화라고 매도하고 하루가 원어로는 어떻고 헛소리 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허나 예전부터 내가 우려해 왔듯이 창조과학 진영도 다른 데서 쓸데없는 적을 만들고 삽질하는 게 너무 많아서 역효과가 크다. 과학과 성경 어느 하나도 확실하게 방어를 못 한 채 쓸데없이 저격당하고 털릴 구실을 많이 주고 있다.
자기들이 삽질해 놓고는 감당 못 하겠으면 딤전 6:20 "거짓으로 과학이라 불리는 것"이라는 실드 뒤에서 정신 승리하고 쏙 숨어 버리는 식이니 누가 인정해 주겠는가? 아무리 목적이 선하다고 해도 그럼 창조 과학조차도 "거짓으로 과학으로 불리는 것"일 가능성은 없을 줄 아는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지금 기독교회들은 진화론 걱정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아의 홍수의 과학적 증거가 발견됐네 그딴 걸 한가하게 논할 때가 아니다. 과학에 앞서 자기들 본업인 성경 해석 노선부터가 진영별로 다 찢어지고 파편화돼 있다. 이게 해결되지 않는 한 창조과학회 식의 문제 접근 방식은 세속 과학계를 절대로 설득할 수 없고 논쟁을 이길 수 없다고 난 장담한다. 자기 코가 석 자라는 것부터 알고 정신 차려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성경과 과학 논쟁의 핵심에 있는 '간극'이고 말이다. 이전 세상의 멸망을 지질학· 천문학과 결부지어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에 성경 용어와 루시퍼의 타락 같은 자기네 교리 체계부터 정립하는 게 선행돼야 할 것이다.

제발 쓸데없는 논쟁 헛발질은 하지 말고... 상대방의 의견을 반대하더라도 그 의견이 정확하게 뭔지는 알고서 반대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창조 진화 논쟁은 여느 정치· 종교 분야 논쟁만큼이나 서로 덕 될 게 없어 보인다.
신자들은 인간이 저렇게 도발적인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무슨 하나님이나 성경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거라는 속좁은 생각은 하지 말고, 오히려 걔네들 위에서 여유롭게 "그래 종과 종 경계도 얼마든지 그렇게 흔들릴 수 있지. 하지만 그래 봤자 부처님..은 아니고 하나님 손바닥 안일 뿐이야" 이렇게 상대하려면 과학 지식과 성경 지식이 모두 균형 있게 갖춰져 있어야 할 텐데.. 쉬운 일은 분명 아닐 것이다.

이상, 지난 여름에 수박 먹으면서 문득 들었던 잡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았다.

* 여담 1: 우 장춘, 석 주명, 공 병우 박사

우 장춘 박사는 일본에서 고생 잔뜩 하고 자라면서도 공부 엄청 열심히 해서 과학자로서 성공했고, 또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서도 일체의 물욕과 명예욕 없이 너무 우직하게 학자의 길, 농학자 외길만 고집한 존경스러운 분이다.
사적으로 쓰라고 준 돈도 몽땅 영농 선진화 연구를 위해 종자를 구입하는 데 쓰거나, 연구소에 물을 대기 위해 우물을 파는 작업을 발주하는 비용으로 써 버린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그 와중에 그래도 자식 농사도 잘 지어서 딸은 미국에서 저명한 대학 교수가 돼 있다. (영문학자+수필가인 피 천득의 딸도 외국에서 대학 교수인데.. 그것도 부친 같은 문과가 아니라 물리학과로!)

나비 박사 석 주명은 6· 25 전쟁 때 표본 데이터도 날리고 서울에서 아군의 오인 사격으로 인해 참 원통하고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지만, 우 장춘은 생활권이 일본과 부산 사이여서 그런지 6· 25의 포화도 직접적으로 맞지 않고 잘 생존한 듯하다. 농작물뿐만 아니라 수목 쪽으로도(산림 녹화) 공헌한 숨은 과학자들이 여럿 있는데, 언젠가 이런 분들에 대해서도 다룰 일이 있으면 좋겠다.

한편, 공 병우 박사는 애초부터 한반도 북부의 실향민이기도 하고 6· 25 때 이북에 끌려가기까지 했다가 월남했다.

* 여담 2: 당신은 어느 레벨인가?

(1) 이 세상은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게 아니라 신에 의해 창조된 거다.
이 정도야 뭐 물증이 없더라도 심증상으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증명도 반증도 가능하지 않은 신념의 영역이니 누가 뭐라 할 사람 없다.

(2)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지금으로부터 6천여 년 전에 엿새 만에 창조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입장은 “지금 현 세상이 그때 그렇게 창조된 거지 그게 우주 전체의 완전 첫 기원을 말하는 것은 아님”이다. 6일 창조만 이용해서 모든 기원을 갖다붙이고 노아의 홍수만으로 모든 지질 시대 격변을 설명하다 보면, 결국은 어거지가 등장하고 생물학뿐만 아니라 지질학 천문학까지 여러 분야와 적을 만들게 된다.
많고 많은 크리스천 과학자들이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유신론적 진화론을 동원하거나 '하루'의 문자적 해석을 부정하게 된다. 성경의 용어 정의는 놔두고 관점을 바꿔서 "세상들"을 분리할 생각은 왜 안 하는 걸까? 성경을 바르게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다.

(3) 지구는 가만히 있고 태양 포함 다른 행성과 별들이 지구를 돈다. 일명 천동설.
성경에는 여호수아와 히스기야 시대에 그림자의 회전이 잠시 멈추었다는 기록이 있긴 한데, 내가 보기엔 그것도 차라리 지구의 자전을 중단시키는 게 태양의 공전(?)을 중단시키는 것보다는 구현하기 더 쉬울 거 같다. -_-;;

(4) 지구는 납작 평평하다.
설마 '땅의 원 위에 앉으신 이'(사 40:22) 내지 '땅의 네 모퉁이'(계 7:1) 같은 걸 flat earth의 근거로 갖다붙인 건 아니겠지.. 3~4 때문에 1이나 2(부분)까지 도매급으로 비웃음과 조롱 당할까 심히 두렵다.
1~4를 두고 생각나는 한자성어와 속담이 있다. ‘화사첨족’. 잘 그린다고 하니까 뱀 발까지 그린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16 08:28 2016/11/1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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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허국현 2016/11/16 12:06 # M/D Reply Permalink

    1. 군에 있을 때, 근무지가 지휘통제실이다 보니 "다음 주에 훈련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대답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기다려 봐. 주일날이나 월요일 되서 짐 싸고 있으면 훈련 가는 거고 아님 마는 거지. 내일 일도 자주 바뀌는데 어떻게 일주일 뒤를 알겠니."라고 답했습니다. 사실 제 근무지의 특성상 대대장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는데, 함부로 노출시키면 실제로 제 생각이 대대장님 말씀이 되어 버릴 수도 있어서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대할 때마다 개인적인 생각도 비슷합니다. "그냥 기다렸다가 하나님을 만나면 다 해결될 일"이라고 여깁니다. 코드랑 로그를 읽을 수 없어서 어셈블리 코드 읽느라고 고생하느니 나중에 코드랑 로그 접근 가능할 때 마음껏 읽어 봐도 되니까요. 투자하는 시간에 비해 얻을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영역이 이 부분이더라고요. (그런데 재미는 있어서 가끔 찾아 보게 되긴 합니다.)

    2. 누군가가 기를 쓰고 진화에 대해 변론하려고 하면 이렇게 답변해 주곤 했습니다. "진화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영역이 많아. 지금 너는 '그것이 다 밝혀지면, 신이 없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은 서글프게도 우리가 죽을 때까지 증명이 안 돼. 너나 나나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같아. 진화론 역시도 그런 종교적인 성격을 띄고 있어. 결국 너의 선택이야.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그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을 믿을지, 아니면 과학이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언젠가 증명해 줄 것을 믿을지."

    1. 사무엘 2016/11/16 13:46 # M/D Permalink

      사실, 진화론이 주로 다루는 건 종의 분화이지 아예 무에서 유로 ‘기원’은 애초에 큰 관심사도 아니지요. 그냥 단백질 같은 생명체의 구성 물질이 이렇게 합성이 가능하더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는 기원에 대한 시나리오는 그냥 뭘 믿건 그냥 신념의 영역이지요.

      진화론도 생물학의 한 분야이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입증된 사실을 다루고는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팩트의 전부인 줄 알고서 어차피 과학적인 관찰과 재현이 불가능하고, 신의 창조를 믿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해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도 있는 건 사실이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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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글은 지난번 글과는 달리 성경과 신앙관을 곁들인 아이템들 위주이다.

1.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거기서도 거의 끝부분인 백보좌 심판 쪽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또 내가 보매 죽은 자들이 작은 자나 큰 자나 할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져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져 있었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들에 따라 책들에 기록된 그것들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았더라. (...)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는 불 호수에 던져졌더라." (계 20:12, 15)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모든 인생 행적이 기록되고 저장돼 있는 방대한 매체가.. 무슨 거대한 IDC(데이터센터) 서버 컴퓨터라든가, 데이터베이스 백업용 자기 테이프 형태로 표현되어 있지 않은 게 무척 신기하다.
영원에서 영원까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은 제일 오래 가는 정보 저장 매체는 '책'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책이라는 정보 저장 매체와 관련하여 이런 엄청난 끝판왕 말씀도 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다른 일들도 많으므로 만일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심지어 이 세상이라도 기록된 책들을 담지 못할 줄로 나는 생각하노라. 아멘." (요 21:25)
(당연히..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냥 평범한 30대 청년의 일거수일투족 인생 로그만 덤프 뜨는 거라면, 이 세상이라도 책들을 다 담지 못할 거라는 말은 과장일 수밖에 없지.)

2.
'테크노피아'라는 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 '테크놀러지 + 유토피아'의 합성어이다. 전자를 통해 후자를 이룬다는 말. 이건 전혀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다. 어느 정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다.

과학 기술은 수많은 인간(시장경제 논리의 특성상 모든 인간까지는 아니더라도!)을 질병과 굶주림으로부터 구했으며, 단순노동 노가다로부터 해방시켜 줬다. 인간을 돌도끼 들고 야생을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게 해 줬다. 생존본능 지향적인 욕구를 충족시킨 뒤, 더 창의적이고 고차원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줬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슬로건인 Your potential, our passion처럼 말이다.

그러니 이걸 경제 제도와도 결부지어서 생각해 보면, 본인은 그저 다국적 기업의 음모, 유대인 재벌의 음모 이러면서 일방적으로 자본주의만을 마귀적으로 몰고 가는 식의 선전 선동에 공감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 황금 만능주의가 아무리 부작용과 폐단, 병크가 있다 해도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그보다 훨씬 더 사악하기 때문이다. 기업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보다 국가가 개인을 착취하는 게 훨씬 더 악하다. 신앙은 있는데 선악 구도에 대한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지 못한 채 어설픈 정의감만 있으면 흔히 말하는 '좌독' 성향이 되기 쉽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뭐 그런 그렇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국내에서 '테크노피아'라는 말은 지금으로부터 한 30여 년쯤 전에 금성사가 회사 이미지 광고를 내보내면서 썼다. 금성사 하면 국내에서 최초로 흑백 텔레비전을 만들어 낸 업체가 아니던가. LG 전자로 바뀐 뒤 2010년경에 얇은 대형 TV 광고에다가는 "기술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동일한 이념의 광고 카피를 내보내기도 했다.

LG 말고 삼성의 경우는 '휴먼테크'라는 말을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자기네 논문 공모전에다가 쓰고 있다. 그리고 현대 자동차에서도 옛날에 엘란트라를 웬 '휴먼터치 세단'이라는 수식어로 광고했는데.. 어감이 좀 이상했는지 얼마 못 가 '고성능 엘란트라'라고 바꿨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뭘 터치한다는 거지? 사람의 감성?

전세계에 테크노피아에 대한 환상이 처음으로 개발살이 난 때는 1차 세계 대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과학기술 무용론, 문명의 이기 거부 쪽으로 갈 필요는 없다. 이 자연에는 애초에 선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본인은 유사의학, 친환경, 백신 반대 이런 거 공감하지 않으며, 원자력 발전도 적극 찬성론자이고.. 뭐 그렇다.

단지 과학 기술은 마치 칼이나 돈처럼 가치 중립적인 도구일 뿐이다. 마치 "총칼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거다"라는 말이 있듯, 과학 기술도 저렇게 사람을 살릴 수 있지만, 반대로 사람을 온통 타락시키고 죄 짓게 만드는 데 쓰이는 것 역시 가능하다. 단순히 원자력처럼 물리적으로 위험한 기술만 위험한 게 아니다.

또한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인간의 죄 문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고 타락 이래로 세상에 내려진 저주와 엔트로피 증가 자체를 거꾸로 돌리지는 못할 것이다. 모 성경 구절이 제아무리 패러디 되더라도, 인간에게 진짜로 자유를 선사할 수 있는 건 기술이나 노동이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진리'라는 사실도 변함없을 것이다.

3.
그러고 보니, "총칼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일 뿐이다"
이건 특히 미국에서 총기 규제/금지를 반대하고 개인 총기 소유를 옹호하는.. 전미 라이플 협회(NRA) 같은 단체에서 들이대는 논리이기도 하다.
이제 와서 총기를 금지한다고 해서 금지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결국 진짜 총을 뺏어야 할 나쁜놈들에게서 총을 완전히 없애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니 너라도 총을 구입해서 이 험악한 세상에서 네 목숨 지켜야 한다.. 뭐 이런 논리.

개인적으로는 그 논리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난 크리스천으로서 절대악을 놔두고서 필요악만 나쁘다고 없애자는 식의 논리에는 어떤 형태로든 전혀 찬성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거지, 총칼이 사람을 죽이는 거 아니다.
무기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적으로 볼 때 시민들이 무장을 강제로 해제당한 뒤에 악당들에게 더 참혹한 꼴 험한 꼴을 많이 당했다.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가 되는 과정에서 군인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백성들 역시 사냥용 무기나 위험물은 압수 당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의 지배를 받을 때 무장해제 차원에서 쇠붙이를 몽땅 빼앗겨서 농기구조차 빌려 쓸 지경이 됐었다. 같은 맥락으로, 미국 같은 나라에서 크리스천들이 "총을 빼앗긴 다음에는 성경을 빼앗길 거다" 식으로 생각하는 거 공감한다.

무기를 동원해서 내 집을 내가 지키는 건 부부관계 사생활만큼이나 정말 신성한 권리이며, 그 어떤 이유로든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는 행위는 정말 목숨을 거는 위험한 짓이 돼야 하는 게 마땅하다. 어쩌다 싸이코 미친놈 때문에 발생하는 총기 사고 같은 건 저 자유라는 대전제 하에서 일부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법 차원에서 논의돼야 할 뿐이다.

옛날에 영화 배우 찰턴 헤스턴이 한때는 월남전 반전 시위도 했을 정도로 그쪽으로 진보 성향이었으나, 총기 소유에 관한 한은 꼴보수 스탯을 유지해서 NRA 회장으로 활동했던 것 유명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영화 <연평해전>에서는 어째 된 일인지 저 말과는 정반대 심상의 말이 있다.. 총기 소유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쪽으로 반대다.

"약이 사람 살리는 거 아니다. 사람이 사람 살리는 거다." (한 상국 중사. 배 위에서 야식 먹으면서 신참 박 동혁에게)
사람을 살리는 것도 사람, 죽이는 것도 사람. 이게 문득 생각이 났다.
난 영화를 많이 보지는 않지만.. 일단 인상깊게 보는 영화는 대사를 다 외운다.

4.
프로그래머의 최종 테크는 치킨집 사장이고, 억만장자의 최종 테크는 건물주 임대업자라고 한다. (☞ 관련 링크)

오죽했으면 대한민국 땅에서 조물주보다 더 위대한 건 건물주랜다. "의느님", "천당 위에 분당" 이래로 내가 무릎을 쳤을 정도로 기발한 신조어다. =_=;;
"건물은 내가 직접 벌어서는 살 수가 없어요. 받아야죠. 그 방법밖에 없어요." (모 자산 관리소장 인터뷰 중)

난 누구처럼 뭐 지금 사회 구조가 엿같네, 금수저 은수저 계급론 그딴 거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돈으로 돈 버는 건 정도의 문제이지 그 자체를 나쁘다고 죄악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나도 그놈의 임대업인지 뭔지 하면서 생업 걱정 없이 날개셋 한글 입력기 코딩이나 평생 펑펑 하고 싶긴 하다.

외제 명품 호화 사치 유흥 음주가무 주색잡기 같은 건 정말 하나도 눈꼽만치도 관심 없음. 그리고 돈 너무 많아서 에쿠스만 굴리고 다니느라 새마을호에서 Looking for you도 못 들어본 사람들은 난 교통 분야에 한해서는 전혀 부럽지 않다.
부러운 건 딱 하나. 돈 자체가 아니라 코딩할 시간이 있다는 게 부러울 뿐이다.

물론 아무 부동산이나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100% 돈 놓고 돈 먹기가 보장되는 건 아니다. 아무 건물이나 공실률이 없이 빵빵 입주자가 들어오는 게 아님. 이거도 여느 자영업만큼이나, 투자 잘못해서 본전도 못 뽑고 망한 사람이 역시 당연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는 어디에든 땅 내지 집이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인 건 사실이다.
구약에 나오는 "땅을 상속 받으리라"가 얼마나 큰 복인지, 그리고 한국 교회가 어째서 물질주의 기복신앙으로 빠져들었고 왜 걸핏하면 땅, 건물에 목숨을 거는지, 왜 "성전 건축 헌금"이 있는지가 이해가 된다.

그에 반해 신약 성도는 세상에서 알박은 거처가 없이, 복은 일단 영적인 형태이며 이 세상에서 순례자(pilgrim)라고만 표현돼 있다. 이것만 생각해도 소위 십일조 헌금이라는 건 교회와 얼마나 안 어울리는 이상한 관행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성경은 의식주 중에서 의식에 비해 '주'는 상대적으로 덜 강조한다(딤전 6:8, 눅 3:11, 마 6:25 등).

부동산 정책과 관련해서 성경에는 요셉이 흉년을 빌미로 전국의 모든 농토를 국유화해 버린 게 나온다(창 47). 이때에 요셉이 취한 정책은 일종의 무상 몰수 유상 분배였는데 성경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룻기도 부동산 상속과 관계가 있는 책이고. 언젠가 이 주제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 봤으면 싶다.

끝으로 중요한 것. "건물은 내 힘으로 돈 벌어서는 절대로 살 수 없어요. 받아야죠. 그 방법밖에 없어요"에는 의외로 굉장한 성경적인 진리가 담겨 있다.
칭의와 '구원'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저런 관념이 박혔으면 좋겠다. -_-;;

5.
오늘날 인간은 채식만 해서는 제대로 영양 공급을 받을 수 없다. 몸 관리를 위해서는 육류를 통한 단백질 공급이 필요하다. 성경에서 다니엘의 시험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또한, 소림사에서도 한창 성장을 해야 하는 동자승 내지 무술 수련을 하는 승려들은 고기를 부득이하게 먹는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정작 인간에게 단백질을 공급해 주는 소는 어째서 풀만 먹어도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걸까? 인간 중에서는 거의 최 배달 같은 전문 파이터-_-나 소를 상대했네 뭐네 그러지 않던가?

생물학적으로 간단히만 말하면, 소는 풀로부터 인간이 소화할 수 없는 성분도 몽땅 소화해서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뽕'을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염소만 해도 셀룰로오스를 소화할 수 있어서 종이를 먹을 수 있는 반면,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동물은 원래 이론적으로는 풀만 먹어도 저렇게 크고 힘센 개체로 성장이 가능하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커 보인다.

성경에도 풀을 뜯어 먹는 모습을 유독 소에다 비유한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욥기에서 베헤못이라는 영적 괴물이 소처럼 우적우적 풀을 뜯어 먹는댄다. (욥 40:15)
미래에 천년왕국 때는 땅의 저주가 풀려서 사자도 소처럼 풀만 먹는 초식동물로 바뀔 거랜다. (사 11:7, 65:25) 어렸을 때 교회 댕긴 애들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노래 기억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서에서도 느부갓네살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 미쳐 버렸을 때 "소처럼" 풀을 뜯어먹으며 지내게 될 거라고 경고하는 게 나오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한다. (단 4~5)

사람은 소처럼 아무 풀이나 짚을 먹을 수는 없다. 그러니 옛날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딱히 식량 보급이 없더라도) 길가의 풀을 알아서 뜯어먹으며 진격하라"라는 미친 명령을 내렸던 일본의 졸장 무다구치 렌야 장군이 더욱 병맛스럽게 느껴진다.

뭐, 사람은 풀뿐만이 아니라 고기도 아무렇게나는 못 먹는다. 다른 육식 동물은 야생에서 초식 동물의 생살과 내장을 생으로 뜯어먹고, 반쯤 썩거나 상한 것까지도 막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반드시 익혀서 먹어야 한다. 사람이 기생충 같은 거 오염에 더 취약한 듯하다.

6.
미국의 유명한 찬송시 작사자인 패니 크로스비(1820-1915) 여사는 선천성 기형이 아니라 의료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생후 몇 주 만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평생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력을 얻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해도 여전히 맹인으로 살 겁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예수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 테니까요!"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저 말은 크로스비 여사가 아직 살아 있던 190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주일학교 교재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저 정도 영성은 돼야 평생 8~9000편에 달하는 찬송시를 쓸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득 이와 대조되는 <아저씨> 대사가 떠올랐다. 그러니 "걔(소미)가 천당으로 엄마 찾으러 갔어. 근데, 눈깔이 없어서 못 찾아. 넌 사람 잘못 건드렸어."라는 대사는 교리적으로 사실이 아님을 크리스천들은 분간할 수 있다.

7.
아이고, 골치아픈 잡생각을 많이 늘어놓았는데, 끝으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스타일의 위대한 성경 목록가 오케스트라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창세기, 생명의 호흡
출애굽기, 유월절 어린양
레위기, 우리의 대제사장
(...)
잠언, 외치는 지혜
(...)
마태 마가 누가 요한, 하나님, 사람, 메시야
(...)
계시록, 왕들의 왕, 주들의 주


이게 단순히 성경 각 책들의 요약 소개가 아니라, 각 책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나타내고 있다.
First Assembly of God라는 곳에서 공연한 걸로 보이는데.. 정말 웅장하고 훌륭한 찬양이다. 가사는 다 외워 버릴 가치가 있다.

처음엔 조용한 단조풍으로 시작하다가 스케일이 갈수록 커진다. He is. (그분은 계신다, 모든 것이 되신다~~)
난 이미 음성 추출해서 차에서 듣고 있다.
S. M. Lockeridge라는 목사가 1976년에 했다는 "그분은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엄청난 설교를 떠올리게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들어 보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6/05/10 19:36 2016/05/1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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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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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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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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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에 대한 논의 외

*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항이니 다시 정리하겠다.

1. 언어의 기원

기원을 알기가 제일 난감한 분야이다. 화석이고 뭐고 물리적인 형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문자 기록으로는 음운 계층에서의 통시적인 변화만을 추적할 수 있을 뿐, 그 문자의 저변이 되는 그 시절의 실제 음성 기록을 100% 정확하게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시절에 녹음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중세 국어에서 옛한글 자모의 음가조차도 여러 학자들의 추정만이 존재할 뿐 실제 발음이 딱 부러지게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음운뿐만이 아니라 형태· 어휘· 문법 쪽으로 간다 해도, 동물적인 꽥꽥 끼릭끼릭 의성 의태어로부터 추상적인 개념에다 복잡하고 재귀적인(안은 문장, 이어진 문장) 문법이 저절로 등장한다는 건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실현 불가능이다. 그건 아메바로부터 원숭이를 거쳐서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이다.

고대까지는 몰라도 중세급의 과거 언어는 현대의 언어보다 더 음운이 다양하고 복잡하면 복잡했지, 오늘날보다 더 단순한 구조는 아니었다는 게 통론이다. 한국어만 해도 과거에는 '여덟'에서 ㅂ이 실제로 발음되었고 받침 ㅎ도 발음되었고 자음이 두 개, 세 개씩 있는 등 지금보다 스케일이 더 컸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저것 탈락하고 생략되고 중화되고 제약이 생기는 쪽으로 변하는데 그럼 처음에 그 복잡한 시스템은 언제 어떻게 갖춰질 수 있었겠는가? 통상적인 진화론과는 정반대 경향이 아닐 수 없다.

언어야말로 걍 GG 치고 신수설을 주장한대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가장 난감한 분야이다. 그냥 신앙· 신념의 영역일 뿐이다. 언어에서 기원은 언어학계에서도 불가지론으로 간주되며 더 구체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연구할 거리 자체가 없다.

2. 생명의 기원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스스로 유전자 차원에서 더 고등한 종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이건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자.
유기물· 단백질처럼 생명을 담는 껍데기 그릇을 일부 겨우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거기에 생명이 생기는 것 역시 아니다. 다른 무생물 기계는 부품들의 상호 연결이 끊어지면 곧바로 작동이 멈춰 버리는 반면, 생명은 세포 단위로 쪼개도 각각의 단위들이 다 생명이 있어서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한다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 중 이런 고증을 반영한 것이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와 테란의 대미지 컨트롤 능력이 아닌가 한다. 저그는 건물과 유닛 공히 체력이 1만 남아도 아주 천천히라도 자동 회복되는 반면, 테란은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 서플라이가 없는 건물은 체력을 2/3 이상 잃은 뒤부터는 스스로 파괴돼 버리기까지 한다.

이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겠는가? 지구 안에서는 빛도 산소도 없고 도저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척박한 수천 m 아래 초고압 해저에도 심해어가 존재하지만, 반대로 지구 밖의 광활한 우주에는 생명이란 게 일단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이건 뭔가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다음으로 연대기 문제로 넘어가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를 거듭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에서 딱 끝난다고 일단 본인은 믿는다. 세속 역사에서도 인간의 문명이라는 건 천 자리 범위를 넘어서는 연도의 과거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단, 그 전의 엄청 옛날, 이전 세상에서도 생명체가 있긴 했다. 그러다 이전 세상이 멸망한 뒤 대부분의 품종은 원래 있던 종류대로 다시 창조되긴 했는데(after his kind), 다만 고래나 인간 같은 일부 종은 예전에 없었다가 6천 여 년 전에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이전 세상의 멸망은 지질 시대에서 다루는 '대멸종'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3. 지구의 기원

방사성 원소· 탄소 원소 측정법 등 다양하게 교차 검증되는 방법을 통해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간이 달에 실제로 간 적이 없다고 믿는 아폴로 계획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 미션이 오로지 아폴로 11호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이 오로지 한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루는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해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데 이상하게 실험 진행이 잘 안 돼서 원인을 찾다 보니, 공기 중에 납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이게 자동차의 배기가스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이런 과정에서 20세기 후반에 무연휘발유가 발명될 수 있었다. 납은 인체에 몹시 해로운 중금속이기 때문이다. 연대 측정법이라는 게 저런 사소한 변인까지도 찾아낼 정도로 정밀하니, 창조 과학회의 주장만치 그렇게 호락호락 허술한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류 이전에도 죽음 자체는 지구상에 존재했다. 이전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지만, 그 시절의 흔적은 화석이나 지층에 남아 있다고 본인은 믿는다. 노아의 홍수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로 말이다.

4. 우주의 기원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우주의 기원은 화석이나 지층 같은 '흔적'만으로 추론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닥은 수십억 년 전에 출발하여 수십억 광년 거리를 달려서 우리 눈에 도달하여 2차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는 빛을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하면서 현상을 해석한다! 방법론이 다른 기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관측 가능한 우주"라는 개념이 있으며 대폭발설 내지 130억 년~200억 년 같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전산학에서 계산 가능한 문제, 과학에서 재연 가능한 현상, 철학에서 반증 가능한 명제처럼..)

이 연구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부정되려면 (1) 예전에는 우주의 본질 자체가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빛의 속도 자체가 지금과는 넘사벽급으로 달라질 수가 있어야 하거나, (2) 아니면 저 옛날 별빛의 모습이 실제 별빛이 아닌 페이크 가짜여야 한다. 허나 (1)은 과학적으로 가능성이 없으며, 과거라 해도 광속의 변화는 무시할 수 있는 아주 미미한 수준일 뿐이다.
그리고 (2)는 과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 계시를 설마 그렇게까지 속임수를 동원해서 남기셨을까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리 아담도 성년으로 창조됐고 닭과 달걀 중에 닭이 먼저라 해도, 저건 성년 창조설이라는 명목으로 실드 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여겨진다.

덧붙이는 말

0.
기원과 관련된 기독교계와 세속 과학계의 논쟁은 가장 먼저 잘 알다시피 "2.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되었다. 언어의 기원은 양쪽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 보니 별로 이슈가 되지도 않는 것 같고(걍 서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말자), 생명에 비해서는 지구나 우주의 기원은 비록 서로 전혀 무관한 건 아니지만 일단 부가적인 문제이다.
각각의 기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건, 일단 언어, 생명, 지구, 우주의 기원은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르고 연구하는 방법론이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듯하다.

창조 과학회는 진화론만 반박하다가 "젊은 우주"를 주장하면서 생명 영역뿐만 아니라 지구와 우주 영역에까지 주변에 온통 적을 만들었다. 자기 학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이비 유사과학 취급을 받는 게 온통 진리를 일부러 거부하는 부패한 무신론자 학계의 음모 때문이라는데... 진실은? 과연 글쎄다.

이들은 6천 년 전 문자적인 24시간 6일을 사수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성경과 과학에서 모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병크로 인해서 오류를 저지른 것도 적지 않다. 결국은 이전 세상과 현 세상을 구분하고 6천 년 전 문자적인 6일 창조도 인정하되, 창 1:1-2 사이에 간극을 설정하는 것이 성경 교리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사수하고(특히 물과 어둠, 사탄 마귀의 기원) 세속 과학의 관찰과도 조화를 이루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젊은 생물(현 세상의), 오래 된 지구"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1.
성인 형태로 어제 갓 창조된 따끈한(?) 아담을 생각해 보자. 그는 덩치와 지능, 떡대만이 30대 청년이지 피부 표면은 가히 갓난아기처럼 뽀송뽀송하고 노화의 징조는 통상적인 30대 성인 수준으로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활성 산소나 각종 해로운 찌꺼기 같은 것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응가를 해도 우리와 같은 끔찍한 악취 없이 태변과 비슷한 분비물이 나왔을 것이다. (동안· 꽃미남· 미소년 이런 것과는 별개의 얘기임!) 그러니 생물학적 나이라는 것도 무슨 관점에서의 나이인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30대 성년의 형태로 갓 창조됐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겪지도 않은 유년기, 10· 20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거짓으로 주입해 넣으셨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요 성품 중 하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딛 1:2).

비록 기술적으로야 가능은 하겠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저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를 하셨겠지"라고 기원에 대해 넘겨짚기 전에 이런 면모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장에서 갓 생산된 따끈한 새 자동차에 적산거리계만 한 10만~20만 km로 조작해 놨다고 해서 그 차가 진짜 오래 된 차인 것처럼 보일까?

2.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거기에 나름 우주를 논하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심바· 품바· 티몬 일행이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한 뒤 풀밭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데, 품바가 티몬에게 "야, 넌 저 밤하늘에 빛나는 점(별)들이 정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냐?" 라고 묻는다.
티몬은 자기는 답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다고 의기양양하면서, 저것들은 시꺼먼 표면에 달라붙은 반딧불이라고 얘기한다. 휴.. 시골에서 반딧불이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품바는 "아 그래? 난 저것들은 수십억 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가스 불덩어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렇게 얘기함.
품바의 말이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티몬은 "ㄲㄲㄲ 넌 그냥 모든 게 가스인 것처럼 보이지?" 이렇게 면박을 준다. 이전의 하쿠나 마타타 씬을 보면 품바는 배 속에 가스가 가득찬 지독한 방귀쟁이여서 어린 시절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나오니까..;;

이 대화에서 심바는 어린 시절에 부친에게서 언뜻 들은 종교 주술적인 대답을 했는데(돌아가신 선왕들이 별이 돼서 우리를 지켜본다) 이건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폭풍처럼 까인다.
그런데 영화 전체를 보면, 티몬의 말은 실제로 맞아서 적중한 게 별로 없었다. 오버와 허세가 좀 쩌는 듯..

  • 처음에 사막 한복판에서 쓰러진 심바를 발견했을 때 "사자를 키우면 위험하니 얘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 → 심바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으며 품바· 티몬 일행과 잘만 친한 사이가 됨
  • "저 별들은 반딧불이다" → 네버.
  • 극중에서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노래가 끝나고 결말부. "심바와 날라가 서로 상봉했으니 우리 우정은 이제 끝장났다" 엉엉 ㅠㅠ → 그 뒤에도 전혀 끝장나지 않음.

콜?

Posted by 사무엘

2016/02/24 08:36 2016/02/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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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와 금식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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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 17:21 흠정역.

벌써 9년이 훌쩍 넘은 옛날 일이 되긴 했다만.. 저건 2006년 5월 13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에스더 코리아라는 단체의 금식 기도회 광고이다.
평소에는 개역성경을 보지만 자기 행사의 성경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득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인용한 센스가 참 웃프다.

성경에서 저기 문맥은 이러하다.
예수님이 핵심 제자 세 명(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변모하신 뒤, 돌아와 보니 다른 제자들은 그 동안 부정한 영이 들린 어느 소년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허나 그들은 스승만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꽤 실망하신 듯.. "어휴..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터치를 해 줘야 하냐? 아이를 데리고 와 봐라." 하신 뒤 아이를 바로 고쳐 내셨다.
제자들이 나중에 "우리는 왜 부정한 영을 내쫓지 못했습니까?"라고 슬쩍 묻자 이때 예수님은 "일차적으로는 너희의 불신 때문이다. 그러나 저번 건 좀 쉽지 않은 일이고 간절한 금식과 기도로 약발을 올릴 필요가 있다"는 요지로 대답을 하셨다. 그리고 이 '금식과 기도'를 언급한 마 17:21이 KJV 이외의 다른 역본들에서는 '없음' 삭제된 것이다.

다만, 이와 동일한 '금식과 기도' 말씀이 막 9:29에도 있는데 굳이 '흠정역'이라는 단어까지 거론하면서 마 17:21을 인용한 이유는 본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말은 '킹제임스 흠정역'이나 '한글 킹제임스' 같은 기존 한국어 역본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창작한 문장이다.

뭐, 마가복음 9장이면 29절 '금식과 기도'는 남아 있지만, 그 뒤의 46과 48절에서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지옥 경고문이 무단으로 삭제되었다는 점을 참고로 알아 두도록 하자.

2. sky와 heaven

한국어로는 이 두 단어가 별 구분 없이 똑같이 '하늘'로 번역되어서 차이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이 신학· 성경 용어로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완전 반성경 반기독교적인 옛날 팝송인 Imagine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서, 의외로 금방 실감할 수 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heaven이고 hell 그딴 건 없고 우리 머리 위로는 오로지 sky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아요)


이걸 생각하니 개인적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느껴졌다.
바로 저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은 성경 역본들조차도 heaven과 hell이라는 단어가 본문에서 갈수록 줄어들고 sky로, 그리고 반의어는 grave, hades, sheol 등 이상한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크리스천이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얘기하지, 하데스나 스올이나 저승에 간다고 얘기하던가? 이런 단어의 변개는 그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정체성을 공격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3.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으시고

먼 옛날에 본인은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기독교 역사 소설을 만화 형태로 각색한 책을 우연히 접한 적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 끔찍한 박해를 피해서 크리스천들은 지하 무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무슨 도사처럼 생긴 백발 노인이 성경 두루마리를 펼쳐서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같은 난해하지만 감격스러운 말씀을 낭독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는 인간들이 믿는 해괴망측한 교리가 도대체 뭔지 알고나 싶어서 어느 로마 군인이 모임에 몰래 합류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첩자 내지 배신자의 밀고로 붙잡힌 신자들은 콜로세움에서 인간 횃불이나 사자밥이 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순교 컷의 하단에는 많고 많은 관련 성경 구절들 중에 계 1:5-6이 자막으로 적혀 있었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으시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께 즉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5는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를 씻어 주셨다고 wash라는 단어까지 써서 문자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 이외의 다른 모든 성경 역본들은 wash가 loose 내지 free로 바뀌어서 '죄들에서 해방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루시퍼나 이스터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벧전 2:2)만치 유명한 변개 구절은 아니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다음 영문 사이트의 내용을 참고하시라.

'죄를 씻었다'라는 표현이 없으면 당장 찬송가 가사부터가 근거 구절을 잃는 직격탄을 받을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를 찬송가에서 찾아 보면, 참고 구절은 다들 요일 1:7을 제시한다. 이건 그나마 계시록과 동일하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cleanse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의미 자체는 통한다. 그러나 깨끗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속하는 wash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다.

그 카타콤의 순교자 책에서도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적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순교자

내가 앞에서 성경 변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카타콤이니 순교자 같은 이야기를 많이 꺼낸 이유는.. '순교자'(martyr)라는 엄청난 단어가 존재하는 성경 자체도 킹 제임스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자였다고 인증하였고(행 22:20), 주님은 계시록에서 안디바라는 어느 성도가 순교자였다고(계 2:13) 증언하셨다. 끝으로, 음녀 바빌론이 바로 순교자들의 피에 만취했다고 나온다(계 17:6).

킹 제임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역본들은 순교자 대신 그냥 '증인'이다. 증인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얼마든지 쓰인 단어인데?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을 비롯해서 고난의 증인(벧전 5:1), 신실한 증인(계 1:5) 등..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무수히 많은 순교자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악의 무리들은 '순교자'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을 절대로 좋아할 리가 없을 거라는 점이다. 가령, 로마 가톨릭의 과거 만행을 은유적으로 폭로하는 계 17:6 같은 경우는 그냥 증인이라고 썼을 때는 표현의 수위가 상당수 희석될 수밖에 없다.

5. 예수님은 은근히 낮추고 사탄을 높임

그 뿐만이 아니다. 계 2:13은 순교자/증인 말고도 충격적인 차이점이 더 있다. 킹 제임스는 간단하게 '사탄의 자리'(seat, 좌석)라고 번역한 반면, 다른 역본들은 대적인 사탄을 지위를 대놓고 높여서 '사탄의 왕좌'(throne)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건 마치 우리로 치면 '일왕· 덴노/김 정일' vs '천황/김 정일 국방위원장' 정도와 비슷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분께 먼저 경배(worship)를 한 뒤에 애원과 간청을 했는데, non-KJV들은 그 부분을 상당수 그냥 무릎을 꿇었거나 절했다고만(bow / kneel down)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역본들도 계시록 13장에서 사람들이 짐승 적그리스도에게 홀딱 반하는 장면에서는 곧이곧대로 경배했다고 번역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막가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KJV에도 그냥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은 따로 있다. 막 15:19만 봐도 두 표현이 병렬로 모두 등장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상호 혼용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6. 보혜사 vs 위로자

본인은 예전에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를 소개했고, 거기 엔딩 크레딧 중엔 어느 북한 지하 교회 할머니의 기도를 몰래 녹취한 음성이 흘러나온다고도 얘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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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가 나타나심을 (나는)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보혜사'(redeemer)라는 단어를 보고도 왜 나의 직업병이 발동하지 못했던 걸까?
보혜사는 요한복음 14~16장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성령님을 가리키며 등장하는 단어이다. 허나 저 무명의 어르신이 킹 제임스 성경을 봤다면 기도에도 막연한 보혜사가 아니라 '위로자'(comforter)라는 단어가 쓰였을 것이다.

병맛 개그 차원에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 아니라, 저기는 순전히 끔찍한 박해 때문에 교회가 문자 그대로 무너지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다 피흘려 순교한 너무 처절하고 절박한 상황인데.. 위로자가 없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말씀하는 전 4:1과 동일하게 연결되는 단어인 것이다.

7. 사람이 구원받는 장면에서의 변개

십자가에 매달렸던 한 강도가 구원받는 누가복음 장면에서(눅 23:42).. 강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서 구원받았지(롬 10:13, 행 2:21), 변개된 성경에서처럼 '예수여~, 예수 씨' 이러지 않았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게 대단하지, '그 사람/그분'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딤전 3:16).

선천성 맹인이 시력을 얻고 구원받는 장면에서(요 9:35)도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물었지 "네가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하시지 않았다.

또한, 행 8:37이 변개된 성경에서 모조리 삭제된 것은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장면에서 적절한 신앙 고백의 필요성과 물침례의 조건을 명시한 구절인데 이게 없어짐으로써 비성경적인 유아 세례가 횡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다 커서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줄 아는 신자에게만 침례를 주는 교회가 오히려 유별난 교파인양 '침례교'라고 따로 불리게 되었다. 그게 성경적으로 당연하고 그것만 유일하게 맞는데도 말이다.

교회사에서 진짜 기독교회들은 노바티안, 왈덴시스 등 모임 인도자의 이름을 딴 이상한 듣보잡 집단으로 명명되고 정작 '기독교회'라는 이름은 이상한 집단이 도둑질해 간 것과 비슷한 역설이다.

이런 것 말고도 뭐..;;
이스터, 루시퍼, 갈보리, 총 13군데에 달하는 '없음' 구절 같은 건 더 말하면 입만 아프니 또 거론하지 않겠다.
예전에 본인이 쓴 <음란한 성경은 가라>라는 글은 이런 차이점들 중에서 특별히 제목이 암시하는 분야에서의 차이점을 다루었다.

게다가 성경의 맨 첫 구절인 창 1:1도 다르고(KJV는 heaven, 나머지는 heavens 복수), 맨 마지막 구절인 계 22:21도 다르다(non-KJV는 '주 예수'만 있고 '그리스도' 빠짐). 이런 팩트 속에서 KJV는 그저 개역성경의 영문판 같은 성경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시중에 나온 성경들이 그냥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신앙에서 교과서, 계약서, 법전 이상인 크리티컬하고 중요한 그 텍스트가 말이다.

애초에 기독교는 예수 유일주의를 주장하는 곳인데, 그런 교리를 내세우는 근간인 텍스트 또한 하나만 옳고 그 하나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것들은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하지 않겠는가? 성경 역본 문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바로 답이 보인다.

개독안티들이야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믿을 리 없으며 말씀이 보존되어 있으면 "안 되는" 처지이기 때문에 KJV를 얼마든지, 기를 쓰고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논리에 끌려가면 이건 뭐 이적행위인지 팀킬인지 참 곤란한 상황이 된다. 본인은 특정 집단의 이익은 개뿔, 내 신앙의 근간과 정체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옹호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31 08:35 2015/12/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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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디가 홀수 개만 있는 3박자 계열 곡

대표적인 예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 따라가며>(Trust and obey)에서 "..." 부분,
그리고 <구주를 생각만 해도>(Jesus, the very thought of thee)에서 "..." 부분,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에서 "..." 부분이다. 생각보다 예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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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적절한 용어를 몰라서 묶음 단위를 편의상 그냥 '단'이라고만 부르겠다.
대부분의 찬송가들은 못갖춘마디를 감안하더라도 한 절이 보통 기승전결 4개의 단으로 구성되고 각 단은 4개의 마디로 이뤄져서 총 16마디로 돼 있다.

그러나 위의 곡들은 무슨 이유인지 둘째 단은 마디가 4개가 아니라 3개만 있다.
그래서 마지막 마디를 한 마디만 부르고 곧장 다음 단으로 넘어가는 게 심리적으로 굉장히 불안하고 어색하다. 반주자도, 찬양 인도자도, 회중들도 여기서는 좀 멈칫 한다. 마디를 하나 더 추가하고 싶어진다.
실제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경우, 21세기 새찬송가에서는 마디를 하나 더 추가해 버리기도 했다. 찬송가 편찬자들이 보기에도 홀수 마디는 너무 어색했는가 보다. 아래 두 악보를 대조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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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곡의 작곡자는 무엇을 의도하고 둘째 단에는 마디를 홀수 개만 넣었는지 모르겠다.
이건 6박자 계열도 아니고(6/4 또는 6/8) 엄연히 3박자인데 굳이 마디 수를 반드시 짝수 개로 맞춰야만 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반론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래도 홀수 마디는 영 아닌 것 같다.

2. 못갖춘마디의 박자 구획

<날 위하여 십자가의>(How can I keep from singing)는 보다시피 '어찌 찬양 안 할까'라고 번역된 맨 마지막 단 가사가 원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찬송가들이 고유 제목 대신, 닥치고 가사 첫 줄을 곧 곡을 식별하는 제목으로 취급하는 게 관행이 돼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찬송가들이 외국곡 번역이다 보니 원제목이 무엇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국내 창작곡에 대해서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당신을 향한 노래>를 <아주 먼 옛날 하늘에서는>으로 바꿔서 적는다는 얘기니까 말이다.

뭐, 제목은 그렇고.. 내가 이 곡에 굉장히 불만인 것은, 박자가 굉장히 이상해지는 형태로 못갖춘마디의 구분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찬송가 책들을 보면 얘는 다음 그림에서 A 형태로 기보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부르면서 강약약 박자를 느끼는 건 B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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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 이 곡은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 자매 한 자리에>의 전반부 3/2박자 부분하고 리듬과 박자가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이다. 못갖춘마디를 저렇게 적어야 할 이유는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끼워 맞춰 보면 악보대로 박자를 맞추는 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으며, 한국어 번역 기준으로 기능어가 아닌 내용어에 강박이 더 걸리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멜로디의 흐름은 그 박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애국가의 앞부분처럼 박자가 어색하고 연상거부가 심하다.

저렇게 우리나라 애국가 스타일로 박자가 아주 이상한 예가 하나 더 떠오른다. 바로 <예수가 거느리시니>(He leadeth me; O blessed thought)의 후렴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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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약박이고 '날 항상 돌'이 '강 약 중강 약'이 들어가야 하지만, 실제 멜로디는 홀수 박자가 아니라 짝수 박자가 음높이가 높고 영락없이 강박이다. 그래서 쓰기는 A처럼 써졌지만 부르기는 B처럼 불러지며, 이 때문에 뒷부분에 박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게 된다. 교회 다니는 분이라면 정말 그런지 한번 직접 불러 보시라.

찬송가도 가끔은 이렇게 비판적인 안목으로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굳이 찬송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외국곡의 가사를 번역할 때는 가능한 한 내용어는 강박에, 기능어는 약박에 배치해서 부르기 자연스럽고 쉽게 했으면 좋겠다.

* 잡설

1.
악보에서 스타카토 같은 꾸밈음 기호는 C/C++로 치면 매크로와 같은 구석이 있다고 본인은 옛날에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음악 시간에 '적기' / '내기'라고 기보법을 배우는 건 영락없이
#define STACCATO(pitch, interval)  play(pitch, interval/2); pause(interval/2) 이런 꼴이니까 말이다.
그럼 페르마타(늘임표)는 C/C++로 치면 register나 inline와 비슷해 보인다. 늘이는 것이 권장 사항이지만 그래도 연주자의 재량껏 무시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2.
군대에서 유격 훈련을 정신없이 받다 보면 <어머니의 마음>을 부르다가 후렴은 <스승의 은혜>로 넘어가기 쉽다고 한다. 둘은 동일한 3/4박자에 조와 분위기도 비슷한 편이다.
그런 것처럼 찬송가에도 분위기가 비슷하고 메들리로 엮기 좋은 pair가 몇 쌍 있다.

  • 내 죄 사함 받고서 →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구원 + 성령 동행. 둘 다 경쾌하고 명랑하다.
  •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위로와 평안, 간구 쪽으로 좋은 조합이다.
  •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성경 카테고리. 내가 교회 청년부 찬양 때 실제로 메들리를 시도하기도 했다. 작사· 작곡자가 동일하고 굉장히 좋은 조합임. (단, 전자곡은 극초반만 빼면 나머지 가사는 성경이라기보다는 구원 카테고리에 더 가까운 내용이다.)
  • 내 주의 보혈은 → 이 세상 험하고: 서로 다른 작곡자의 곡이지만 리듬과 멜로디가 아주 비슷하며, 구원에서 신뢰와 확신 카테고리로 주제가 잘 넘어간다.

3.
끝으로, 이건 멜로디가 아닌 가사 얘기이며, 번역도 아니라 영어 원가사 얘기이다.
찬송가 가사 중에는 영어로는 "예수님은 내 꺼"라는 표현이 있다. 그것도 옛날 클래식 찬송가에 말이다.

  • My Jesus, I love Thee, I know Thou art mine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 Blessed assurance, Jesus is mine!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무슨 말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높임법이 존재하고 소유에 대한 개념이 보수적인 한국 및 한국어 문화로는 직역하기가 영 곤란한 대목이다. 사실, 성경적인 용례를 봐도 A is mine은 하나님이 "모든 혼은 내 것이다"(겔 18:4), "금과 은도 내 것이다"(학 2:8), "보복은 내 것이다"(롬 12:19), "첫 열매는 모두 내 것이다"(출 13:2)처럼 '갑'의 소유를 명시하는 게 전부이지.. 을이 갑을 보고 내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권에서 찬송가 가사를 Jesus is mine이라고 가끔 쓴 것은 다른 서정적인 의미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my Lord, my God, my savior, 심지어 my love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본인으로 하여금 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긴, 아 6:3가 있으니(나는 내 애인 것이고, 내 애인도 내 것이다) 이런 용례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1/25 08:36 2015/11/2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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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기 2015/11/28 17:54 # M/D Reply Permalink

    '아무 흠도 없고'도 3+3+4+3=13마디인 홀수 마디의 3박자 곡이지요.
    말씀해 주신 부분처럼 저도 이 노래는 4+4+4+4=16마디로 편곡하고 싶은 강한 열망을 느끼곤 합니다...
    올려주신 글이 정말 공감되네요.

    1. 사무엘 2015/11/28 19:07 # M/D Permalink

      "아무 흠도 없고"는 한술 더 뜬 구조군요 정말.. ㅠㅠ
      마디 수는 그렇고 박자도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은 흔한 기보 형태인 갖춘마디가 아니라 못갖춘마디가 더 정확한 기보라고 하죠. 찬송가가 아니라 다른 싸제(?) 복음성가나 악보집에서는 못갖춘마디로 적혀 있기도 합니다.
      다른 전문 반주자/기독교 음악 전문가분과 얘기를 나눠 보면 저런 것들에 대해 오래 전부터 문제 의식을 느끼고 계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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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 청년부 찬양

본인이 다니는 진리 침례 교회에서는 오전 예배 때 평소엔 중· 장년층 위주로 구성된 찬양대가 설교 직전에 특별 찬양을 한다. 그러나 매월 넷째 주에는 청년부가 특별 찬양을 한다.

수 년 동안 청년부는 중· 장년부 찬양대 중 하나를 지휘하는 음대 유학파 출신의 전문가 자매님에게서 지휘를 덤으로 받았다. 그러던 것이 약 2~3년쯤 전부터 선곡을 청년부에서 독자적으로 하기 시작했고, 지금으로부터 1년쯤 전부터는 완전히 독립(?)을 했다. 외부 인사의 개입 없이 청년부 지체들의 재량만으로 완전히 독자적으로 선곡과 연습, 지휘까지 해서 매달 강단에 서게 되었다. 원래 계시던 지휘자분의 일신상의 이유가 있었고, 또 청년 중에도 작곡까지 할 줄 아는 걸출한 다른 음악 전문가가 등장한 덕분이었다.

독립을 앞두고 이미 이것저것 다양한 시도를 했다. 피아노와 플룻에 능숙하고 영어권 교회에서 사용하는 old-style 찬송가를 많이 아는 자매가 있어서 새로운 곡을 가사를 같이 번역해서 불러 보기도 했다. 한편, 작곡가인 그 형제는 우리 교회의 표어인 고후 13:8, 그리고 KJV 성경 공부 모토인 딤후 2:15 구절에다가 곡을 붙여 부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래서 완전히 독립을 한 뒤부터는 본인과 그 작곡가 형제가 격월 교대로 친구들을 모아 놓고 선곡· 지휘를 하게 되었다. 그 형제도 매달 꼬박꼬박 청년부 찬양을 책임지는 건 부담스러워했고 격월 정도 간격이면 괜찮겠다고 동의를 했다. 사실, 청년부에서 피아노를 잘 치고 음악 쪽으로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중· 장년부 찬양 연습을 할 때 반주자로 동원되기도 하고 주일학교 어린이 찬양을 지휘하기도 한다. 즉, 청년부 자체의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위 아래 연령의 다른 부서로 지원 가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직분에 대한 부담감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

본인은 음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기악과 성악 어느 것도 전문적으로 깊게 배운 경험이 없다. 피아노는 다른 프로페셔널한 반주자들이 모두 부재 상태일 때 최하 우선순위로나 가끔 투입되는 "예비/스페어" 반주자 수준밖에 안 된다. 노래도 오로지 악보에 있는 대로 기계적으로 크고 정확하게 부를 줄만 알지 다른 기교나 감정 이입 테크닉, 성대 관리 같은 건 모른다. (그런데 내 경험상, 회중 찬양 인도는 그 정도만 돼도 할 만하긴 했다.. 지구력만 뛰어나면 되지 너무 잘 부를 필요는 없으니까. ㅎㅎ)

지난 1년 동안 본인 차례 때 우리 청년부가 부른 찬양은 다음과 같다.

1. 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2014년 8월, 자체적으로 찬양을 준비한 첫 시간이었다. 이 때는 딴생각 할 것 없이 그냥 주찬양 6집에 있는 송 명희 작사· 최 덕신 작곡 CCM을 4성부 원곡 악보로 구해서 하나도 안 바꾸고 그대로 불렀다. 가사가 좋고(사랑과 고백 카테고리) 곡이 그리 어렵지 않고, 길이도 2분 50초 남짓으로 짧아서 모든 면에서 적절했다. 간주 중에는 악보에 있는 대로 플룻 연주를 넣었다. 첫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2. CCM 메들리 (나의 사랑 나의 생명 +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 보라 그 날이)

짤막한 노래들을 여럿 묶어서 멀티테마 메들리를 시도했다. 앞으로 또 다른 창의적인 메들리를 편성해서 부를 일이 있으면 좋겠다.
<나의 사랑 나의 생명>은 위에 여자 파트와 밑에 남자 파트가 돌림노래 하듯이 달라지는 노래이고, 이런 스타일의 곡이 <보라 그 날이>라고 하나 더 있음을 주목했다. 전자는 사랑과 고백이고 후자는 재림 내용이니, 중간에는 경쾌하고 뭔가 청년스러운 젊음과 열정, 헌신이 담긴 가사의 곡을 넣었다. 1곡과 2곡 사이에는 전주가 있지만, 2곡과 3곡은 전주 없이 곧바로 이어지게 했다. 그리고 각 곡의 권장 템포까지 미리 정해서 반주자에게 알려 줬다.

3. 주 임재 안에 늘 살아갈 동안 (Lord Jesus, I long in thy presence to live)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선곡했다. 첫째, 멜로디가 Away in a manger(그 어린 주 예수)라고 성탄 찬송곡과 동일하기 때문에 12월 말이던 당시 분위기와 "기분상" 잘 어울린다.
둘째, 곡과는 달리 가사는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주님의 임재를 회고하고 앞으로도 보호를 간구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연말에 부르기에 적절하다.

성탄 찬송 Away in a manger는 같은 가사에 비슷한 분위기의 곡이 두 개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 역시 곡의 시작, 중간, 끝에 두 곡을 적절히 섞어서 변화를 넣었으며, 중간에 조가 반음 올라가는 것도 악보를 일일이 따로 만들어서 시도해 봤다. 이렇게 비슷한 스타일로 편곡을 한 외국의 다른 성탄 찬양 음반에서 컨셉을 착안했다.

4. 말씀 찬송 메들리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주 말씀 동산 안에는)

우리 교회가 특별히 킹 제임스 성경을 쓰는 교회이다 보니 특별히 이 분야를 공략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은 작사· 작곡자가 동일하고 조와 박자도 비슷하니 당연히 한데 엮었다. 다만, 전자는 1절 앞부분만 말씀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그냥 구원 카테고리에 가까운 가사이므로 전자를 앞에 넣고 후자가 뒤를 잇게 했다.

그 다음으로 무엇으로 뒤를 이을까 고민하다가, 침례교 찬송가를 참고해서 <주 말씀 동산 안에는>이라는 신곡을 넣었다.
중간 간주로 <신구약 성경 목록가>를 넣은 뒤 다음으로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를 부르는 것도 생각했으나, 여건상 실행되지 않았다.

5. CCM 메들리 (자기를 위하여 +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복음서에 기록돼 있는 예수님 말씀, 특별히 역설의 진리를 담고 있는 말씀이 컨셉이었다. 찬양이라기보다는 영적 노래에 가깝고 찬송가가 아닌 CCM 스타일.
그래서 이번 메들리에 동원된 두 곡은 음악 구조가 아니라 가사의 유사성 때문에 선택됐다. 또한, 전반부는 "자기를 위해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요" 요런 진지한 내용으로 시작해서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먼저 구하라"뿐만 아니라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는 균형을 추구하기도 했다.

1곡은 주찬양 6집 앨범의 곡이다. 다음 2곡은 Karen Lafferty의 유명한 돌림노래이니 우리 역시 돌림노래 형태로 명랑하게 잘 불렀다. 단, 킹 제임스 성경에 따르면 마 6:33을 인용한 부분에서 he를 God로 바꿔 줘야 하는데 한국어로는 음절수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6.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죄사함, 보혈, 십자가가 나오는 아주 베이직하고 클래식한 구원 찬송. 멜로디는 A A B A B A 패턴으로 정~말 단순하기 그지없고 쉽다. 그러나 가사는 그 이상으로 굉장한 고퀄이고 정확한 교리가 담겨 있고 애절하고 감동적이다.

가사를 살펴보면 누가복음을 인용하여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가 2절에서 나오고, 보통 찬송가 책들은 요일 1:7을 참고 구절로 써 놓곤 했다. 그러나 나는 요 9:35-38의 맹인 이야기를 이 찬송과 특별히 연결하고 싶었다. 후렴에 "나 믿노라"가 나오니까. 그래서 간주 중에 이 구절을 형제 두 명이서 교독시켰다. "그가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그분께 경배하니라."

아울러, 곡의 시작 부분('그 참혹한 십자가에')이 <찬양하라 내 영혼아>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부분과 멜로디· 박자가 비슷하기 때문에 본곡을 시작하기 전에 <찬양하라 내 영혼아>를 끼워 넣을까 생각도 했다.

7. 왕이 오신다

가장 최근에 불렀던 곡으로, 이번에는 재림· 소망 카테고리를 다뤘다.
이건 국내의 킹 제임스 독립 침례교회 진영에 있는 임 동선 목사님이 작사· 작곡한 창작곡이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씩씩한 분위기의 곡에 세 절의 가사가 지상· 공중 재림을 차례로 다루고, 다음 결론으로 세상의 끝이 오기 전까지 혼을 구원하는 일에 애쓰라는 권면으로 끝나서 좋았다. 가사가 다루는 타이밍이 뒤로 갈수록 미래에서 현재로 가까워지는 셈이다. 아울러, 후렴 가사가 계 22:20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으로 끝나는 것은 덤.

휴가를 떠나고 없는 인원이 많아서 참여자가 평소보다 적고 연습 시간도 부족했던지라 딱히 기교나 변화를 많이 넣지는 못했지만, 녹화된 걸 들어 보니 발성과 화음이 잘 배분되었고 들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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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또는 다다음 달에는 어떤 곡을 부르게 될지는 현재로서는 나도 전혀 모른다. 리서치를 해 봐야 안다.
스타일은 클래식 찬송가, 국내외 CCM, 테마별 메들리 등이고,
소재는 찬양, 예수님, 구원, 십자가, 위로와 평안, 재림과 소망 등~~ 최대한 다양한 곡을 골고루 선곡하고 있다.
메들리도 가사를 중심으로 엮을 수 있고 곡의 스타일을 중심으로 엮을 수 있다.

내가 저런 곡들을 멋들어지게 손수 연주하거나 심지어 작곡을 하지는 못한다. 작곡? 정확하게는.. 하라면 한다. 단지 아무 감흥이 없이 박자와 화음만 맞는 멜로디 나열만 생성될 뿐 가성비가 전혀 수지맞지 않으니 안 하는 것이지. =_=;;

그러나 지난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회중 찬송 선곡과 인도를 하느라 찬송가 책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지고 연구하다 보니.. 많은 기존 찬양곡들이 연관 검색이 되는 게 좋다. 성경을 성경으로 이것저것 대조하는 것만큼이나 찬양곡들도 이것저것 대조하고 분류하고 종합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우리 교회에서 쓰는 찬송가 책엔 내가 아는 곡뿐만이 아니라 아직 미개척 상태인 곡들도 차고 넘친다. 현재로서는 가까운 미래에 선곡 아이디어가 고갈될 것 같지는 않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정확하게 언제 구원받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모태신앙이다. 하지만 지난 수 년 동안 내 마음에 맞는 애창곡은 수 년째 구원 카테고리에서 배출되었다. 하지만 다른 친구 중엔 위로와 평안, 신뢰와 확신 카테고리를 가장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난 내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공예배 때 다같이 부를 찬양곡은 앞서 얘기했듯이 최대한 골고루 균형 있게 선곡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작곡가 형제는 자기 차례일 때는 역시나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스타일로 선곡을 하곤 했다. 그러니 음악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고 무궁무진함을 느꼈다. 자유도가 너무 높아서 컴퓨터가 사람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걸로 알려져 있는 게임인 바둑처럼.

음악이 인간의 심리와 정서에 많은 영향을 주는 물건이다. 찬양을 꼭 음악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주로 쓰이는 매체가 음악인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좋은 음악, 영양가 있는 노래만 듣거나 부르고 지내기에도 인생은 너무 짧다. 본인은 이것을 이용해 감히 하나님을 찬양할 특권을 받고 그럴 자유가 있는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분야는 몰라도 찬양 내지 영적 노래는 그야말로 내 음악 감각과 재능, 성량을 총동원해서 최고의 예우를 해서 부른다.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하는 것만큼이나 이런 찬양도 아무 데서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가사 내용을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공감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삶의 간증을 통해 이런 가사를 직접 쓰고 멜로디를 무에서 창조해 낸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물며 줘도 못 먹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아무쪼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좋은 찬양, 건전한 영적 노래들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많이 만들어지고 불리고 노하우가 전수되었으면 좋겠다. 저 북쪽 동네에 있는 지하 교회 성도들은 마음 놓고 찬송 한 곡 좀 불러 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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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5/11/08 08:33 2015/11/0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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