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욥기는 모세오경과 더불어 가장 오래되고 먼저 기록된 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게 평범한 책이 아니다. 너무 엄청나고 극단적인 스토리와 판타스틱한 서술들, 그리고 인류의 만년 의문 떡밥인 '의인의 까닭 없는 고난'을 다룬다는 점으로 인해 욥기는 문학성 하나는 가히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물론 불신자들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만 인정할 뿐, 저게 설마 레알 실존인물 실화일 거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세상의 통념과 달리, 다른 책에서 욥을 거듭해서 실존 인물이라고 언급하고 인용하니(약 5:11 같은..), 이게 딜레마이다. 노아, 아벨만큼이나 말이다.
가령, 그 천하의 예수님이 창세기 4장 인물인 아벨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정하셨다(마 23:35). 예수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비평가라면 창세기 1~11장은 그냥 설화이고 상징 비유 묵시문학이라고 치부해도 될 것이다. 욥기 역시 마찬가지일 테고 말이다.

그 문제의 책 욥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스 땅에 욥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 그에게 아들 7명과 딸 3명이 태어나니라. 또한 그의 재산은 양이 7000마리요, 낙타가 3000마리요, 소가 500겨리요, 암나귀가 500마리이며 집안사람들도 심히 많았으므로 이 사람은 동쪽의 모든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더라." (욥 1:1-3; 가독성을 위해 성경 본문에서 수량 표기를 아라비아 숫자로 바꿈)

욥은 노아· 다니엘과 더불어 구약의 3대 의인이라고 일컬어진다(겔 14:14). 특히 노아와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내리신 perfect(창 6:9, 욥 1:1)라는 수식어까지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무슨 예수님과 동급의 완전무결이라는 얘기는 물론 아니다. 단지 구약 + 인간의 관점에서 그럭저럭 흠잡을 데 없고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만점 합격점이라는 뜻이다. 마치 all(모든)처럼 말이다. 도대체 어느 문맥과 범위에서 전체 또는 완벽인지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욥은 아시다시피 한번 쫄딱 망했다가 그래도 다음과 같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 {주}께서 그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 그는 양 14000마리와 낙타 6000마리와 소 1000겨리와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하였더라. 또 그가 아들 7명과 딸 3명을 두었더라." (욥 42:10,12,13)

욥은 고난 이후에 자기 재산에 속하는 가축들은 몽땅 다 정확히 두 배로 보상받았다. 그런데 자녀는 예나 지금이나 열 명 그대로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설명은.. 자녀는 재산과 별개이며 두 배 보상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나 보험(!!) 관점에서 보자면 대인과 대물은 엄연히 다르며, 자식은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 개념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거라면 애초에 가축 수와 자녀 수를 나란히 늘어놓은 욥기의 진술 방식 자체가 좀 문제가 있으며, 독자에게 오해와 혼동의 여지를 남기는 거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가장 성경적인 결론은.. 구원받은 자녀는 다른 가축이나 재물과 달리, 내세에서도 영원히 남아 있고 만나볼 수 있기 때문에.. 사고로 죽었어도 영원의 관점에서는 손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잠시 이 세상에서 이별하고 못 보는 기간 / 내세에서 n년간 보는 기간"의 비율은 n이 무한대로 갈 때 극한값이 0으로 가는 것이 자명하니..;;
그러므로 20명을 몽땅 새로 줄 필요 없이 새 자녀 10명만 추가로 주면 10+10 = 20이 된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가축)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낳았고 낳았고'만 잔뜩 나오는 마태복음 1장의 리스트의 진술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록에서 일부 인물이 누락된 이유도 덤으로 말이다.
또한,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삼하 12:23)라고.. 어린아이의 구원을 당당히 믿은 다윗의 말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과학과 지성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많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전히 많다. 죽음도 그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내세관은 꽤 건전하다. 죽은 사람 갖고 사기를 치는 수많은 미신, 괴담 등에 휩쓸릴 일이 없게 하며, 그 반대편 극단인 "죽으면 다 소멸하고 끝" 염세 회의 허무주의 쪽으로 빠지지도 않게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좋다.

이런 신앙이 있으니 손 양원 목사는 "미국 유학 보내려던 아들을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셔서 감사"라는 초인적인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수는 없지만..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생명 인격체를 만드는 일은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만 할 수 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인 것 같다. 구원받는 것도 그렇게 현세에서 살아 있는 동안만 가능하듯이 말이다.

한편, 이런 "현세 10+내세 10 = 20"설 말고.. 그 10명은 그냥 욥의 기존 자녀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는 분도 있다. 뭐, 그것도 욥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해피엔딩이며, 성경의 심상 면에서 일리가 있다.
성경에는 구약 성도들의 집단 부활이라든가(마 27:52-53) 모세의 부활(유 9)처럼 아주 implicit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엄청난 부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욥 당사자도 단순 내세 이상으로 육체의 부활을 믿은 와중에(욥 19:26), 욥기에 부활의 실제 사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자녀를 만드는 건 욥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것도 10명이나 다시 낳으려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와중에 욥의 기존 아내는.. 욥을 완전히 떠나 버렸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고난 후에 재배회를 했는지.. 그렇지 않고 욥이 재혼을 하기라도 했는지 성경에 언급이 전혀 없다.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욥의 아내는 막 악처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신앙이 남편만치 좋지는 못했던 그냥 예쁘장한 부잣집 사모님 스타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ㄲㄲㄲ 사탄이 욥의 아내를 괜히 살려 둔 게 아님..)

이런 시나리오에 비해, 죽었던 기존 자녀만 다시 초자연적으로 살아나는 시나리오는 기적 그 자체 말고는 주변의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생각할 필요 없이 단순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부활설은 근처에서 노골적으로 비교하며 등장하는 '2배 보상'이라는 심상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녀는 무슨 물건 같은 존재는 아니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는 명백히 주님으로부터 온 유산이요 보상이다(시 127:3-5). 하나님께서 욥에게 가축을 2배로 보상해 주셨거늘, 하물며 자녀도 2배로 보충해 주지 않으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않을까?

욥기의 도입부에서는 자녀 수부터 먼저 나온 뒤에 다음에 가축 수인데, 결말부에서는 2배로 늘어난 가축 수부터 나온 뒤에 그 다음이 자녀 수이다. 이것도 생각해 볼 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9 08:36 2019/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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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1월 중순의 어느 날, 본인은 인터넷 SNS를 통해 알게 된 어느 지인을 오프라인에서 만나러 그 지인이 다니는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른바 '제네바 개혁 교회'라고 장로교 계열인데, 기성 주류 교단보다 더 근본주의랄까, 옛날 스타일을 추구하고 교리에 따른 분리를 더 엄격하게 시행하는 곳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본인은 요즘 같은 세상에 근본주의라고 하면 일부 침례교 교파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저런 곳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니 신기했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도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를 거부하고 종교 일치 운동 거부하고 동성애 합법화 반대하는 등.. 대세를 따르지 않고 근본주의를 따르는 면모가 있다. 하지만 그걸 '남자는 무조건 정장, 여자는 무조건 긴 치마' 식으로 율법적으로 강요하지는 않는다.

특히 신기한 건 '칼빈주의'였다.
본인은 루터, 칼빈이라든가 예정론이라는 학설을 태어나서 처음 들은 곳이 교회가 아니었다. 그 대신, 아동용 세계사 만화와 중학교(세계사, 윤리)에서 최초로 접했다. 본인은 어린 시절에 장로교가 아니라 감리교 계열에 속하는 성결교를 다녀서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 못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루터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사뿐만 아니라 작곡까지 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칼빈은 이에 질세라 시편 찬송가라는 걸 만들었나 보다. 전 악보를 통틀어서 4분음표와 2분음표밖에 없고 뭔가 종잡을 수 없는 조와 음계로 시편을 1편부터 150편까지 몽땅 노래 형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글쎄, 시편에는 저주도 쓰여 있는데 그런 가사까지 곡으로 옮겼는지는 모르겠다.)

또한, 장로교 내지 개혁 교회 쪽에서는 일명 TULIP이라고 요약되는 5대 강령을 가히 신앙의 핵심· 진수로 떠받들고 있었다. 성결교에 성결 중생 신유 재림(무순)이라는 4대 강령이 있는 것과 비교된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 서슬 퍼런 교황과 맞장 뜨고 양심의 자유와 성경적 진리를 추구한 것, 엄격 진지 근엄하고 청빈 검소 고결하게 산 것은 분명 훌륭한 일이다. 성경을 독일어로 직접 번역한 루터야 말할 것도 없고, 칼빈도 제네바에서 올바른 성경이 안심하고 번역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놓은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다만, 인간이 자기 스스로 죄를 인지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능력마저 상실했을 정도로 타락했다거나, 하나님이 답정너 선택하고 '예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거나, 선물을 받으려고 단순히 손을 뻗는 동작조차도 선물에 대한 값을 치르는 행위이고 자기 의라고 우기는 주장들은 좀 말장난 궤변처럼 들린다. 난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킹왕짱 절대적이라 해도.. 그 끔찍한 죄악이 인간의 자유 의지 책임으로 귀착되지 않는 한낱 역할극에 불과한 건 절대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씁 어쩔 수 없지"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한다.
칼빈 신학이 실제로 무어라 가르치는지를 내가 직접 배운 게 아니니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주위로부터 들리는 말에 따르면 칼빈주의 내지 예정론이 그런 걸 가르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 루터와 달리,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요한) 웨슬리는 세계사· 윤리 시간에 다뤄질 정도로 유명하지는 않다. 이쪽은 반대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면서 칼빈주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존 웨슬리의 동생인 찰스 웨슬리는 O Horrible Decree라는 제목으로 TULIP 강령을 신랄하게 디스하고 극딜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뭐 그것까지는 좋은데.. 거기는 반대로 반쯤 행위로 구원 유지, 구원의 상실을 가르치는 것으로 본인은 들었다.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본인은 그게 어찌 보면 칼빈주의보다 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기본 중의 기본인 구원관이 정확하게 정립돼 있지 못하니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아주 이상한 낭설도 교회에 잔뜩 퍼진 게 아닐까?

이런 식으로.. 본인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 모두 진리도 있고 오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들도 다 교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아이고, 신학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만.. 뭔가 다른 교파에 속한 교회, 그것도 주류 대형 교회가 아니라 마이너한 성향의 교회에 가 보는 건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2.
그나저나 이 교회는 송파구 문정동에 소재해 있고, 교회 근처에는 길 옆으로 문정 근린 공원이라는 도심 속 녹지가 쭉 들어서 있었다.
이 정도로 작지 않은 폭의 공간에 건물 대신 풀밭과 벤치, 주차장이 1km가 넘게 이어지는 건.. 평범한 계획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지형이 아니다.
풍납동의 풍납토성 구간이야 유적 발굴 명목으로 개발이 봉인되고 풀밭과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긴 하지만, 문정 공원은 그런 케이스도 아닌 것 같다.

이건 90% 이상의 확률로 폐선 철도 부지일 거라고 감이 어렴풋이 왔다. 내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철령께서 내게 계시를 주셨다.
실제로 홍대 일대에는 당인리선 폐선 부지를 따라 어중간한 주차 공간과 건물, 골목이 길게 나 있다. 신촌에도 골목길이 과거 경성 순환 철도의 선형대로 형성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길이 없어지더라도 철길을 따라 형성된 건물들의 선형이 쉽게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의 구시가지가 아니라 동남부 외곽에 웬 철도가 있었다가 폐선된 적은 없다. 저 공간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저건 근처의 외곽순환 고속도로와 비슷한 선형으로 수도권 남부 순환 철도를 미래에 '만들려고' 국가에서 1980년대에 확보해 놨던 부지였다. 단선 전철로 여객보다는 화물 수송을 염두에 뒀으며, 의왕에 있는 컨테이너 화물 기지에 이르기까지 선로를 이을 계획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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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는 경부선 의왕(위의 그림에서는 '부곡')에서 분기하는 오봉 화물 기지에서 시작해서 무려 중앙선 도농까지였다.
북쪽의 교외선(능곡-의정부)과 연결하면 진짜로 그럴싸한 순환선 철도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계획은 여러 난항에 부딪혔다. 서울 외곽에 자리잡은 군부대 등 보안 시설들과 마찰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여기 일대에 분당선과 서울 지하철 8호선 같은 여객 철도가 지하로 건설하려는 대체 계획이 잡히면서.. 지상 화물 철도의 건설 계획은 1993년에 완전히 나가리 났다.
그 뒤로 이 부지는 미개발 상태로 오랫동안 놀면서 주차장 정도로나 쓰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에 여기가 문정 근린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렇게만 알면 끝인데.. 본인은 그 공원의 일부 구간에 만들다가 말았던 철길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는 정보를 뒤늦게 입수했다. 그래서 즉시 차를 끌고 달려가서 공원을 또 답사했다. 그리고 거기가 바로 공교롭게도 딱 제네바 개혁 교회 근처였다. 2km에 달하는 전체 공원 구간을 다 돌아다녀 봤는데, 레일이 있는 곳은 유일하게 저기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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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남부 순환 철도라는 게 이게 무슨 구 수인선 같은 역사 유물도 아닌데, 철길을 공원에다 일부러 깔았을 리는 없을 테고.. 저건 그 시절에 만들다가 말았던 폐선 흔적이 틀림없을 것이다.
간격은 표준궤가 맞는데 궤조가 유난히도 작고 가녀린 것 같다. 공원의 그 어느 표지판이나 구조물에도 여기가 철도 노반이었음을 암시하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상에, 철도 불모지인 서울의 동남부에서 고가나 지하가 아닌 평지에 깔린 레일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완전 좋다. ^_^ 뭐, 철길의 길이는 100미터가 채 될까 말까이니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 게 좋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도 있는 게 어디냐.
계획 당시에 땅이 얼마나 놀고 있었으면 평지에다가 대놓고 철길을 놓을 생각을 했을까? 외곽순환 고속도로와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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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도 중간에 요렇게 교차로를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다.

서울 서부 외곽의 오류동에는.. 경인선에서 분기하는 경기화학선의 폐선 잔해가 건물 뒤로 지나가는 게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동부 외곽에는 지금까지 어렴풋이 말로만 들었던 남부 순환 철도의 흔적이 철덕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강동구에 있는 한영 중· 고등학교와 인근의 큰길인 동남로 사이에 있는 큰 공간도.. 그 시절에 확보해 뒀던 철길 노반의 흔적이다. (☞ 관련 링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상이다. 모처럼 철도와 기독교· 성경을 융합한 글이 하나 완성됐다. ^__^
보라매 공원은 원래 공군 사관학교의 부지였고, 여의도 공원은 원래 여의도 공항 활주로 내지 여의도 광장의 부지였다.
또한, 강북 구도심에는 용산선 철길이 있어서 거의 폐선 상태였는데, 2010년대에 싹 걷히고 지하의 경의선· 공항 철도로 형태가 바뀌었다. 그리고 거기도 지상 구간은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식으로 대도시의 도심에 놓여 있는 공원은 제각기 사연과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제네바 개혁 교회는 이렇게 만들려다가 만 철도 폐선 부지를 활용한 공원의 근처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성도들이 쉬는 시간에 밖에서 교제하기 좋겠다.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근처에는 큰 도로의 중앙에 무슨 계기로 조성된 '거리 공원'이란 게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9/01/25 08:32 2019/01/2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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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 용태 2019/02/15 21:13 # M/D Reply Permalink

    정말 오랫만이네요.. 여전하신 모습 반갑습니다ㅠ유튜브에서 영상 하나 보다가 용묵님 생각나서 방문합니다.https://youtu.be/xEs3UcUElac요즘은 궤도교통수단(?)의 내비게이션 앱을 만들고 있습니다!

    1. 사무엘 2019/02/16 08:34 # M/D Permalink

      와~ 그러게요!! 너무 오랜만인걸요? 정 용태 님, 반갑습니다. ^^;;
      어디서 또 이런 진귀한 자료를.. 링크도 감사드리구요.
      조향 장치가 없이 앞· 뒤로만 가는 교통수단은 운전을 어떻게 하나 무척 궁금하고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여전히 같은 학교와 직장에 적을 두고 있고 근황에 별 변화가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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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trivia

1. 21년 전, 기성 교회에서의 크리스마스 성극 추억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97년 말, 본인은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때 본인이 다니던 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지도교사 선생님의 주도로 크리스마스 이브 행사 때 무려.. 뮤지컬을 공연했다. 연극을 하다가 노래가 나올 때면 MR 틀어놓고 그에 맞춰 부르는 거다.

그 뮤지컬의 맨 처음 도입부에서 불렀던 노래가.. 기억에 남아 있는 가사를 검색해 보니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는 곡이고 가사가 다음과 같다.
국내곡인 것 같지는 않은데.. 원곡의 제목과 가사는 무엇인지 정체를 알 길이 없다.

"오래 전 베들레헴에 성경 말씀 그대로
마리아의 아기 예수 오늘 탄생하셨네
천사 찬송하기를, '왕이 나셨다'
그를 믿는 모든 자는 영생을 얻으리.."


지금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라면 이런 컨텐츠는 심의상 공연 불가일 것이다.
이 진영에서는 '아기 예수' 이런 말 별로 안 좋아한다. 산타 클로스, 크리스마스 트리, 12월 25일 예수 생일 이런 거 다 생깐다.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서 '마리아의 아기 예수'라니! 이런 OO교스러운 심상이 담긴 용어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성도들 중에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조차 싫어하는 프로불편러도 있기 때문에, 저런 게 버젓이 공연되었다가는 곧장 클레임 들어온다.

뭐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성탄절이 잘못된 거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탄생 자체가 잘못된 교리는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12월 25일이라도 쉬는 나라가 안 쉬는 나라보다는 나으며, "메리 크리스마스"가 "해피 할리데이" 이딴 말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고로 본인은 트럼프 대통령의 노선을 지지한다.. =_=;;;

그 뮤지컬은.. "크리스마스 추억"이라는 주제로 그 안에서 또 세 갠가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 있었다. 어떤 에피소드에서는 주인공이 평소에 짜장면을 미치도록 너무 좋아해서 크리스마스 성극을 공연하던 중에도 "손님, 짜장면은 뭘로 드시겠습니까?"라고 NG를 낸 이야기가 있었다.

성탄절의 유래고 뭐고 교리 지식 다 제끼고 동심, 감성, 추억만 생각하면 저런 게 참 훈훈한 기억이다. 그 뮤지컬 각본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다. 허나, 그런 긍정적인 심상이 어째 이교도의 전통과 혼합되어 변질되었는지를 같이 생각하면 안타까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빨간 싼타 모자 쓰고 열심히 율동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들 동영상도 검색하면 많이 나오는데.. 착잡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ㅠ.ㅠ

주일학교라는 게, 그 당시에는 꼬마들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선생님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떠들고 놀지만, 그게 커서까지 추억으로 각인되는 효과를 노린다. 그러니 유아 교육이 유치하고 시시하고 당장 지쩍으로 드러나는 효과가 없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나의 동심, 감성, 추억 분야의 결정판은.. 더 말하자면 입만 아프겠지만 2003~04년에 접한 새마을호 Looking for you이다.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신구약 성경이 완결되었듯이 Looking for you가 그냥 영원한 종지부를 찍었다.
국영 독점 교통수단에서 이런 음악이 흘러나왔다는 것은 충격 중의 충격으로 나를 철덕의 블랙홀로 빨아들이게 했다. 이걸 능가하는 충격은 내 인생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2. 나의 사랑하는 책 비록 해어졌으나

얘는 성경을 소재로 하는 얼마 안 되는 찬송가 중 하나이다.
완전 동요풍인 "신구약 성경책 (The B-I-B-L-E oh that's the book for me)" 다음으로 조금 나이가 들면 주일학교에서도 접하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책"은 영어로 가사 첫 줄은 There's a dear and precious book..이고 원제는 My mother's bible이다.
"비록 해어졌으나"를 "비록 헤어졌으나"라고 ㅐ를 ㅔ로 잘못 기재한 책이나 사이트가 의외로 굉장히 많다. 구글 같은 검색엔진들에서 자동 완성이 '헤어졌으나'라고 제시될 정도다.
영어 가사가 Tho' it's WORN and faded now이니, 우리말로도 worn out을 뜻하는 '해지다'가 맞다. 어머님의 성경책이 다 낡은 채로 남아 있기라도 하냐, 아니면 영영 잃어버렸거나 심지어 빼앗겼냐의 차이이다. 후자라면 작사자는 젊었을 때 신앙을 잃었다가 탕자의 아들처럼 되돌아온 것일 수도 있게 된다..;;

한편, 이 찬양은 3절 가사가 "어머님이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즉, 우리말로는 어머님이 우셨다고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원래 가사는.. "Then she dried my flowing tear with her kisses as ..."
"내가 울었고" 어머니께서 내 눈물을 닦아 주셨다는 뜻이다..;;
물론 단위 음절당 들어갈 수 있는 정보량이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쨉이 안 되니, 이런 보정은 오역이나 변개는 아니다. 단지 다르다는 것이다.

2절 가사도.. 우리말은 다니엘, 다윗, 엘리야가 언급돼 있지만 원래 가사는 엘리야가 아니라.. '요셉'이 언급돼 있다. 뭐, 요셉보다는 엘리야가 더 포스가 있는 인물인 건 인정한다만..
엘리야가 "병거를 타고" 무슨 은하철도 999처럼 하늘에 올라갔다는 가사는 약간 고증 오류이다.

왕하 2:11을 보면, 불길에 활활 타는 모양의 병거가 나타났다고만 했지, 엘리야가 그 행렬에 직접 합류하거나 병거를 타고 승천했다는 말은 없다. 그냥 혼자 몸뚱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승천했다.
영어 가사는 애초에 엘리야를 언급하지 않으니 이런 오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3.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

위의 제목으로 오랫동안 방황하며 인생을 허비하다가 뒤늦게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기쁨을 노래한 찬송가가 있다.
얘는 작사· 작곡자가 따로 전해지는 외국곡인데, 원곡은 애초에 찬송가가 아니었다. 그냥 "그대를 향한 사랑 영원할 것이오"라는 내용의 일반 노래이다. 우리말 가사는 영어 가사와는 무관하며 완전히 새로운 창작이다.

그러니 이 곡은 찬송가로서는 Believe me if all those endearing young charms 같은 원제를 기재해 줄 필요가 없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 곡에다가 "존 브라운의 시체" 영어 가사를 병기할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의 마지막 2절 가사 끝부분은 "시냇물 흘러 바다에 돌아가듯 나는 주 안에 잠겨지네"이다.
이 찬송을 부르면서 본인은 늘 궁금했다. 가사를 쓴 사람이 졸업식 노래를 참고하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졸업식 노래의 3절 끝부분은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 다음에 다시 만나세"인데..
찬송가 가사에 저런 냇물-바다 비유가 들어갈 일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주 안에 잠겨지네.."는 침례도 아니고 도대체 어떤 심상을 의도한 것일까? 누가 무슨 동기를 받아서 이런 가사를 썼는지가 무척 궁금해진다.

4.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는 찬송가가 있다. 가사의 특성상 간증 집회나 연말 송구영신 때, 혹은 교회 창립 기념 예배 때 두루 부르기 좋다. 극동 방송 발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 조사에서 당당히 2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얘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와 동일한 외국곡 멜로디가 붙어 있는데, 그것 말고 박 재훈 작곡의 민요풍 멜로디 버전도 있다. 이 작곡자에 대해서는 "어서 돌아오오"의 작곡자라고 얘기해 주면 한국인이라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둘 다 3박자 계열인 건 동일하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두 곡이 모두 실려 있다.
한국곡 멜로디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과 분위기가 꽤 비슷하게 느껴진다만.. 그래도 "부름 받아..."의 작곡자는 다른 인물이다.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멜로디 말고 가사의 출처를 살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본인도 굉장히 최근에 알게 된 건데.. 얘는 한국인 작사는 당연히 아니고 그렇다고 찬송가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유럽 계열도 아니다.

이 곡의 작사자는 보통 T. Sasao라고 소개돼 있는 편인데, 일본인이다. '사사오 데쓰사부로'(笹尾鐵三郞 1868-1914)라고 메이지 시대를 주로 살았던 성결교 목사이다. 데쓰(tetsu)는 '철'의 일본어 음일 뿐이며 death하고는 당연히 무관하다.
영어 가사가 멀쩡히 기재돼 있어서 일본인 작사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 역시 일본어로부터 나중에 번역된 것이다.

이 곡의 진짜 원어 가사는 이렇다. きょうまで守られ
일본어를 모르는 본인이 보기에도.. 1절 지금(今日)까지 지내 온 것, 2절 몸과 맘도 연약하나(か弱き者を), 3절 주님 다시 뵈올 날이(主の日) 등 우리말과 일본어가 앞부분이 얼추 일치하는 것 같다.

사사오 데쓰사부로가 작사한 다른 대표적인 찬송가로는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가 전해진다. March we onward 이렇게 시작하는 영어 가사가 있지만, 외국 사이트에서 검색이 잘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옛날 가사는 '일심'도 그렇고 약간 일본어스러운 표현이 있더라. 그래도 저 사람은 "지금까지 지내 온 것"의 작사자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듯하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이다.
"My life flows on in endless song;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고 Robert Lowry 작사의 가사가 분명히 전해지는데..
우리나라 찬송가에는 동일 멜로디에 "My life flows rich in love and grace (...) How can I keep from singing?"이라는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가사와 함께 T. Sasao가 기재돼 있다. 작사자가 잘못 기재된 것 같은데 제2의 영어 가사는 정체가 뭔지 궁금해진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들의 출처와 계보, 탄생 배경들을 연구해 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성경으로 치면 주석을 같이 보는 것과 같다. 계보가 의외로 복잡하고 배배 꼬인 것, 전혀 찬송가가 아닌 멜로디에다가 번역이 아닌 창작 수준의 가사가 붙은 게 많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곡들의 출처를 구글 검색 한 번으로 바로 알 수 있지 않고, 또 저작권에 대한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나라 통일/새 찬송가에서 일본인 작사로 알려져 있는 가장 유명한 곡은 나카다 우고 작사의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이다. 내가 알기로 원어 가사까지 영어가 아닌 대놓고 일본어로 기재된(Megumi hukaki mikami yo ...) 거의 유일한 곡이다.
알고 보니 '메구미'가 은혜(惠)라는 뜻의 일본어인데.. 본인은 배틀로얄에서 미츠코에게 낫으로 목이 따여 죽는 여학생 이름으로만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ㅠㅠㅠ ^^;;

Posted by 사무엘

2018/12/24 08:35 2018/12/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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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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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베를린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실제 모델 인물인 오 길남은 월북한 뒤 재독 한인을 포섭하는 공작원 명목으로 독일로 파견됐는데.. 북한 정권의 실체를 깨달은 뒤엔 거기서 자수하고 남한으로 귀순했다.

어색한 억지 감동 유도라든가, 좀 식상하고 허무한 듯한 결말이 아쉬운 점으로 남지만, 중간 전개는 역시 찢어 죽일 종북좌빨들이 충분히 불편해하고 싫어할 만한 팩트 위주이다.
그러니 북괴의 정체와 흉악한 수작이 까발려지는 걸 원치 않는 놈들은 블랙리스트니 화이트리스트니 나발이니 딴 거 갖고 시비를 거는 것이다. 영화계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보자면 지금 솔직히 우보다는 좌편향이 훨씬 더 심하지 않은가?

북괴가 역사적으로 저지른 극악무도한 죄악 중 하나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 걸 넘어서 가족을 저렇게 하루아침에 산 채로 찢어 놓은 것이다.
6·25 이산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옛날엔 여객기 납치로도 단란하던 가정을 많이 파탄냈다.

또한, 저런 젊은 학자들을 속여서 북한으로 보내서 그 가족들의 인생을 파멸로 이끈 악마가 지금 청와대 수장에게는 민족을 사랑하는 평화통일 운동가로 보이는가 보다. 정말 같은 부류의 악마이며, 쳐죽일 반민족 반역자임이 틀림없다. 한 번 속는 건 실수이지만 두 번 속는 건 공범이다.
이런 영화가 많이 알려지고 퍼져 나갔으면 좋겠다.

2.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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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사각오, God’s not dead, 신이 보낸 사람 등 국내외의 다양한 장르의 기독교 영화를 봤지만.. 얘가 성경 고증과 작품성, 비주얼 등을 고려했을 때 제일 뛰어난 작품인 것 같다. 정말 잘 보고 왔다.
북미에서는 이스터(..)에 맞춰서 지난 봄에 개봉했지만, 국내에서는 종교 개혁 기념일에 맞춰서 10월 말에 개봉했다.

14년 전의 Passion of Christ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음침 암울하고 오로지 예수님이 잔혹하게 채찍질 당하는 장면 말고는 남는 게 별로 없어서 인상이 안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 특유의 교묘한 심상 왜곡이랄까, 그런 게 별로 없었다. 내가 느끼기엔 말이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것, 사울의 회심 등 주요 장면들 다 나온다. 대사 중에 성경 말씀 인용이 굉장히 자주 나와서 아주 마음에 든다.
사울이 회심 후에 무슨 물고문 당하듯이 물에 얼굴까지 첨벙 잠겼다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 이게 침례를 의도한 장면이었다면, 난 평가 점수를 더욱 올려 줄 생각이다. 물 뿌리는 세례는 고증 오류이다.

그리고 촛불과 온갖 신들 형상(마리아 형상도 포함)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대부분의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긍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로마인들의 잡신이라는 부정적인 심상으로 그려진다. 이것도 구도를 아주 잘 잡았다.

그러면서 허구 각색도 어색하지 않게 가미된다. 사랑하는 교회 동지가 어이없게 억울하게 살해당하자, 남자 청년들 일부가 극도로 흥분하고 분노해서 우리도 칼 들고 쳐들어가서 로마를 상대로 보복하자고 날뛴다.
바울은 회심 전에 자기가 죽이면서 눈 마주쳤던 크리스천들이 때때로 꿈에 나와서 트라우마를 안긴다면서 인간적인 고뇌를 호소하기도 한다.

누가는 직업이 의사이다 보니 교도소장인 로마 군인의 딸의 병을 극적으로 고쳐 준다. 무슨 오글거리는 기도 한 방으로 신앙 치료를 성공한 게 아니라, 자기 의술로 해낸다. 바울 역시 “자기는 소문과는 달리 아무 능력 없으며, 자기가 약함을 보일수록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셨다”라고 증언한다. 요런 식의 개연성 있고 자연스러운 허구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인간 횃불 될 사람은 되고, 사자밥이 될 사람은 그렇게 되면서 순교 행렬이 이어진다. 네로의 명령이 떨어지자 바울은 딤후 4:6-8의 유언을 남긴 뒤 예정대로 참수당한다. 그래도 교도소장은 바울과 누가의 인품에 충분히 감화됐기 때문에, 마치 옛날에 안 중근 의사를 존경하게 된 뤼순 감옥 간수처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바울을 "잘 가시오" 이렇게 공손하게 댄디하게 대해 준다.

바울은 그나마 로마 시민인 덕분에 화형 같은 더 끔찍한 방법으로 죽지는 않고 저렇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처형된 거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바울과 네로는 모두 AD 60년대 중후반에 죽은 꽤 옛날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로마 제국에 콜로세움 경기장이란 건 아직 없던 시절이었다. (약간 뒤인 AD 70년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부터 등장)

네로 시절에 크리스천들이 로마 대화재의 주범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박해받고 처형당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원형 경기장에 우루루 풀려나가서 사자밥이 되어 순교하는 것과 "네로 황제"하고는 엄밀히 말해서 시기적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러니 영화의 묘사는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이다. 하지만 뭐 심각한 오류는 아니다. 60년대건 70년대건 시기가 그렇게 심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으며, 콜로세움 안이건 아니건 크리스천들이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건 변함없으니 말이다.

신약 기독교라는 게 생겼던 당시에, 예수쟁이들은 불신자들이 보기에 도저히.. 뭐라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고 정체를 알 수 없고,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익을 노리고 왜 저런 식으로 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이상한 집단이었다.
남들이 다같이 믿는 신을 안 믿고, 황제를 반신반인으로 숭배하지 않으며, '예수'라는 웬 듣보잡 목수 출신 유대인이 죽었다가 뿅 부활했다는 황당한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는 점에서는 분명 미친놈 왕따 아싸 반동분자 그 자체였다.

그런데 대놓고 국가 권력에 반역하고 싸우려 드는 여느 독립투사나 정치범 사상범 같지는 않고, 이웃으로서 개인 단위로 만나 보면 행실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슨 마술사 초능력자도 아닌데.. 자기들의 세속적인 통념과 계산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 11:38이 말하는 것처럼 서로가 상대방을 감당할 수 없었고 무가치한 존재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신자들은 지금처럼 아무나 “우리 교회로 오세요, 예수 믿고 복 받으세요”는 개뿔.. 언제 잡혀가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 같은 처지였다.
모르는 사람이 교회 회원으로 가입하겠다고 하면 얘가 진짜 동지 형제인지, 아니면 우리를 밀고할 가짜 끄나풀 첩자인지 판별하는 게 급선무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능력이 없으니.. 이럴 때 판별을 빨리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건 믿을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서, 보증서’였다. “우리가 보내는 이 형제는 스파이가 아니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잘 대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옛날 건군 초기에 숙군 작업을 할 때도 “이 사람은 빨갱이가 아님을 내가 보증합니다”가 아주 유효했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쪼록 이 영화를 보면 신약 교회가 이렇게 시작됐고 신약 성경의 대부분은 저런 여건 속에서 기록되고 필사됐다는 것을 얼추 실감할 수 있다. 복음은 뭔가 GPL 라이선스 오픈소스 같은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이와 펜이 귀하던 시절에 감옥에 갇힌 채로 찬송가를 부르려면 가사를 평소에 다 외운 상태여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클래식 교과서적인 명작 영화는 옛날에 벤허 같은 것 말고는 이제 자본주의 논리 앞에서 완전히 멸종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긴 한다.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다.
그리스도 안의 지체로서 바울은 꼭 볼 가치가 있음을 추천하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04 08:36 2018/12/0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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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차이

  • 내가 이 일을 듣고는 내 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놀란 채 앉았더니 (스 9:3)
  • 내가 그들을 꾸짖고 그들을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으며 그들이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며 이르되 ... (느 13:25)

백성들의 잘못 때문에 빡쳤을 때 에스라는 자기를 저렇게 했고, 느헤미야는 남을 저렇게 했구나.. (참고로 뜯다/뽑다 모두 영어로는 구분 없이 pluck off임)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2. 한글 개역성경의 감성 번역 (개역개정판도 포함)

(1) 습 3:17 (하나님께서)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영어로는 rejoice over you with joy / great gladness 정도다. 그냥 "너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정도의 뉘앙스인데, 하나님이 차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노무노무 기뻐하실 거라니! 번역자가 over이라는 단어를 전치사가 아니라 접두사로 본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

(2) 시 8:1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매우 유명한 구절이다만, 내가 아는 전세계 그 어떤 성경 역본도 저기서 beautiful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없다. 개역 말고는. 그냥 excellent(KJV. 뛰어나다) vs majestic(웅장한, 장엄한) 정도로 나뉜다.
번역자가 '크고 아름다워요'라는 심상을 의도한 건가 의문이 들지만, 그때는 아직 저런 표현이 없었는데..

3. 개역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된 곳

(1) 창 37:3 채색옷/색동옷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주일학교 때부터 색동옷 입은 꿈쟁이 요셉을 보면서 자란 건, 개역성경이 비록 큰 줄기는 다르지만 저기서만은 어째 킹 제임스 성경 방식으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요즘 번역은 장신구가 잔뜩 달린 옷, 소매 긴 옷 등이 트렌드이다. 번역의 정오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않을 것이다.

(2) 엡 4:12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여(perfecting)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킹 제임스 성경만이 perfecting이고 타 역본들은 equip, prepare 그냥 '준비시키다'라고 번역되었다.
이건 구약도 아니고 신약인데, 개역성경이 딴 건 놔두고 여기서는 어떻게 KJV의 표현을 썼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4. 사흘 밤낮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부활하신 시기에 대해서 이렇게 흔히 알려져 있는 편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사흘 만에 부활한 게 아니라 매장된 지 사흗날임에 유의. 금요일에 죽어 매장된 게 첫날, 안식일인 토요일이 이튿날, 부활한 일요일이 사흗날째다. 날수로 따지면 토요일이 하룻날, 일요일이 이튿날로 48시간도 안돼서 부활한 거다. 신자들도 많이 헛갈리는 점이다."


굉장히 그럴싸해 보이는 설명이긴 하나, 문제는 성경에는 저 기간에 대해 3박 3일..
three days & THREE NIGHTS
이라고 분명하게 나와 있지 않은가? 낮도 셋, 밤도 셋을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마 12:40에서 요나의 표적 말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와 문화에 따라 날짜나 나이 계산을 할 때 당일을 포함시켜서 1부터 시작하느냐, 그렇지 않고 0부터 시작하느냐 같은 유도리와 모호성이 있을 수 있다. 게다가 영어 day는 '낮'도 되고 '날'도 되는 중의성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저 문맥에서는 내가 보기에 그런 유도리가 틈탈 여지가 없다. 금요일이 첫째 날, 일요일이 셋째 날 식으로 계산하면 밤이 "3박"이 되지 못한다. 그냥 2박 3일이 될 뿐이지.
마치 창세기 1장에서 1, 2절까지 몽땅 첫째 날에 포함시켜서 첫째 날이 "하늘과 땅과 빛을 만든 날"이라고 붙이는 격의 오류가 야기된다.

성경에서 third day와 three days가 서로 연결되어 쓰인 용례들을 쭉 찾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것들은 완전히 72시간을 꽉 채우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48시간은 확실하게 경과한 기간이다.

게다가 일요일 아침도 예수님이 딱 부활하신 시각이 아니라 빈 무덤을 사람들이 발견한 시각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확하게 얼마나 더 전에 일어나서 무덤을 탈출해 나가셨을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넉넉하게는 수요일, 또는 아무리 늦어도 목요일 정도는 돼야 한다.

본인은 이런 이유로 인해 '성 금요일'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나무위키의 설명과 성경의 진술이 서로 충돌할 때는 당연히 후자를 우선적으로 따라야 한다.

5. 세례가 아니라 침례이며, 침례는 구원 증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

(1) 침례는 '주'의 만찬과 더불어 신약 기독교회에서 성경에서 행하라고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2대 의식이다.

(2) 또한 침례는 선행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조건이 전혀, 절대 아니다. 사람을 교회에 소속시킨다거나 종교적으로 뭔가 성화· 버프 시켜 주는 효과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신앙 고백 내지 구원 간증 같은 인증일 뿐이다.
먼저 구원부터 받은 뒤에 침례를 받는 게 나중이다. 이거 순서가 꼬이면 정말 사람 피곤해지고 골치 아파진다.

물론 침례인 요한이나 초대 교회 시절에 유대인들을 대상으로는 성격과 의미가 약간 다른 회개의 침례 같은 게 존재하긴 했었다(행 2:38 같은). 하지만 그건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사항이 아니다.

침례교는 다른 교파들에 비해 (1) 성경의 용례를 따라 꼭 물에 전신이 잠겼다가 나오는 침례를 강조하며, (2) "애들은 가라"이다.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지 못한 아기, 유아들에게는 그걸 절대 주지 않는다. 행 8:37이 KJV 이외의 성경에서 삭제된 것은 교리적으로 굉장히 큰 오류를 야기했다고 본다.

애들한테 유아 세례? 영세? 전~혀 필요하지 않다! 스스로 선악을 분간하지 못하는 애들은 설령 그 상태로 병이나 사고로 죽는다 해도 특례가 적용되어 어차피 무조건 구원 받는다. 이거라도 있으니 예수님 시절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애들에 대한 최소한의 위안도 된다. 유아 세례가 이 복된 교리하고 얼마나 안 어울리는지 이해가 되시겠는가?

기독교계의 여러 종파 교파들 중에 침례교가 참 역설적이게도 침례에 다른 종교적인 의미나 주술적인(?) 능력을 일체 부정하고 침례를 제일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한다! 그냥 주님께서 명령하신 독특한 신앙 고백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주의 만찬에서 쓰인 빵과 잔이 그냥 상징 외에 다른 아무런 주술적인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이거야말로 정말 성경적이며 지극히 단순하고 건전하기 이를 데 없는 교리인데, 역사적으로 이 사소한 교리 하나 지키느라고 얼마나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나 모른다. 가해자가 누구인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밝히지 않겠다.

6. 히브리서의 저자

난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욥기의 저자는 모세라고 생각하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바울
이라고 생각한다.

욥기의 근거는 구약을 통틀어 창세기와 욥기에만 존재하는 sons of God, being old and full of days이다.
히브리서의 근거는 바울 서신서에만 존재하는 Timothy, brotherly love, Grace be with you이다. 거기에다 킹 제임스 성경에만 존재하는 제목과 끝인사도 추가적인 증거 역할을 한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사도 바울의 서신, 이탈리아에서 써서 디모데 편으로 보냄)

욥기에 대해서는 중후반부에서 등장하는 엘리후가 자신을 1인칭으로 가리킨 부분이 있다는 이유로 인해, 엘리후가 책 전체의 저자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욥 32:16이 대표적인 근거라고 한다.
현장에 있었던 당사자가 긴 대화를 채록했을 것이라는 점은 설득력 있지만, 저 구절은 3인칭 시점의 텍스트에서 엘리후의 말이 직접 인용된 것일 뿐이다. 욥기가 전반적으로 엘리후의 1인칭 주인공/관찰자 시점에서 기록된 건 아니며, 32장의 중간에 갑자기 엘리후의 말 인용이 끝나고 엘리후의 동작에 대한 서술로 시점이 바뀔 만한 문맥은 존재하지 않는다.

저 구절은 그냥 "제가 좀 기다려 봤는데 형님들이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군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마음먹었습니다. 제 의견 좀 털어놔야겠다고요."일 뿐이다. 그러니 문장에서 화자의 시점만으로 욥기의 저자를 추측하는 건 근거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성경에서 간접 인용과 직접 인용이 한 문장 안에서 갑자기 왔다갔다 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바로 행 1:4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이 구절의 역본별 번역을 한번 살펴보시기 바란다.)

다음으로 히브리서의 경우 비록 처음에는 완전 이질적인 문체로 시작해서 정체불명이지만, 뒷부분으로 갈수록 성도들의 행실 얘기가 나오면서 바울 서신 냄새가 짙어진다.
그리고 사실은 앞부분도 마찬가지다. 구약 성경의 전반적인 원리와 맥을 잡으면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저 심오하고 난해한 내용을 기록할 만한 실력자가 그 당시에 바울 말고 또 있었을까? 내가 읽어 본 느낌은 그렇다.

백범일지를 읽어 보면, 당시의 보안 때문에 처음에는 생뚱맞은 가명 불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나중에 행적을 보면 그게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으로 폭탄의 공급책이던 김 홍일 장군 말이다. 성경에도 그런 식의 표현 기법이 쓰인 게 아닐까?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본문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 예레미야일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끝부분과 열왕기하의 끝부분이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여호야긴 왕의 체포)
마치 역대기하의 끝부분과 다음 에스라기의 시작 부분이 일치하듯이 말이다. (고레스 왕의 칙령)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고 "표현의 유사성"에 최대한 의미를 둔다면, 이런 식으로 결론이 일관되게 도출된다. 창 1:2와 렘 4:23에서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가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게 우연이 아니듯이 말이다.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그 정황상 모세와 엘리야의 현신이다. 에녹이 아니며 다른 이상한 사람도 아니다.

글쎄, 히브리서의 저자를 의심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것도 모자라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게 아니고, 이사야서는 40장 이후부터 제2의 다른 이사야가 썼다는 식의 썰은 도대체 왜 나오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예수님이나 침례인 요한이나 신약 복음서의 기자는 이사야서 40장 이후의 내용 역시 아무 이질감 없이 이사야의 책, 이사야의 말이라고 버젓이 인용하는데도 말이다.

본인이(다른 모든 bible believer들도 포함) 창세기의 1~11장 내용이 다 문자적으로 사실이라고 믿고, 아담이 실존 인물이며 노아의 홍수가 실제 사건이라고 믿는 이유도 동일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굳이 지금 방주가 아라랏 산 어딘가에서 발견됐다든가 에덴 동산의 흔적이 발견됐네 하는 낭설이 없어도 된다. 예수님이 아담의 아들 아벨(마 23:35)과 노아(마 24:37-39)를 버젓이 실존 인물이라고 인증하면서 교차 검증을 하셨기 때문이다. 난 내가 예수님보다 더 똑똑하다는 모험이나 도박을 감행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24 08:37 2018/08/24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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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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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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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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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생각들

1. 기독교 기본 교리를 북한에다가 좀 엮어서 비유해 보자면..

(1)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구원의 영원한 보장.
==> 북한은 법적으로 대한민국의 미수복 영토이고, 거기 주민들은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한번 탈북에 성공해서 자유 남한에 온 이상, 그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결코 재북송되지 않는다.

탈북자가 남한 와서 그 어떤 끔찍한 사고를 치고 흉악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사형 무기징역 선고받고 남한 교도소에서 평생 썩을지언정 북송되던가? 이런 차원의 문제다. 구원받으면 사람의 신분이 근본적으로 싹 바뀌며, 그건 그 사람의 행실과는 전혀 무관하다.

(2)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과거),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현재), 죄의 임재로부터 구원(미래)
==> 북괴의 직접적인 마수를 제거(과거.. 6·25 전쟁 때 대판 싸워서), 북괴의 위협을 제거(현재.. 휴전선에서 으르렁거리고 간첩이나 잡으면서..),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미래.. 과연 가능이나 할까?

2.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때는 아니란다

무슨 엉덩국 만화에서 홍콩 행 게이바에 들어온 존슨이 아니라, 남한 땅을 일단 밟은 모든 북한 주민들에게 저 제목과 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구원의 영원한 보장과도 같은 급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또 국가 안보 차원에서도 그렇다. 남한 내부의 탈북자들의 근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북으로 돌아가서는 절대 안 된다.

좌빨 언론들이 뭐 탈북자 신문 센터에서 탈북자들이 인권유린 가혹행위를 당했네 뭐네 별 트집을 다 잡는가 보다.
거기서 탈북자들을 위장 탈북 간첩으로 너무 의심하다 보니 인권모독 발언, 구타 감금 같은 짓이 일부 벌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리 그래 봤자 그게 과연 아예 재북송보다도 더한 인권 유린일까?

그리고 사실은 반대편에서도 우리 같은 원칙을 적용해 주면 더욱 좋겠다.
북괴 좋다고 북으로 가 버린 사람들.. 거기서 영원히 다시는 안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 간절한 바람이다.
목숨 걸고 탈북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보낼 게 아니라, 돼지새끼 좋아서 안달 난 새끼들, 평양도 아주 살기 좋다고 침 질질 흘리는 빠가들이나 몽땅 북으로 보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지 않은가?

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북한 주민들 구제 이상으로, 북괴 체제가 저딴 식으로 유지되고 있는 한 통일은 결사 반대론자다.
김돼지를 재판에 회부해서 처벌하고, 국군의 손으로 정치범 수용소 문을 따고 들어가는 통일이 아니면 다른 통일 따위 1도 할 필요 없다!

북한 인권 문제에 참견하지 말라고? 응, 참견 안 할게. 단, 그 대신 네놈들도 우리랑 통일 하자고 가증스러운 수작 안 부렸으면 좋겠다.
지극히 정당한 논리와 근거를 갖고 반대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나 같은 사람을 잘도 얼마든지 반통일 적폐로 몰아붙이고 공격해 봐라.

3. 악의 무리들이 하는 짓들의 패턴

(1) 경전, 법전의 변개

  • '그분의 피' 삭제, '기도와 금식' 삭제. 성경을 야금야금 뜯어고치고 변개. 애초부터 이미 잘 번역되고 정착돼 있는 성경은 내팽개치고, "현대의 발달된 사본학과 언어학으로 잘 살펴봤더니" 그 단어는 나중에 임의로 추가된 것일 뿐이고, 원래 뜻은 그게 아니고 굳이 처녀가 아니라 그냥 젊은 여인이고, 홍해가 아니고 갈대밭이고 어쩌구 저쩌구...
  • '자유 민주주의'에서 굳이 자유 삭제. 자유라 하면 옛날 '자유당' 오로지 나쁜 심상이다.^^ 근로자 대신 노동자, 국민 대신 인민이나 그냥 사람 등등~

어떤 최종 권위 텍스트에서 단어가 하나라도 바뀌거나 빠지는 것에 대해 제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두 종류가 있다. (1) 성경이 단어 하나라도 변개돼서는 안 되는 골수 성경 신자들, 그리고 (2) 인간의 죄성에 빠삭하고 언어 교란 선전 선동술의 프로 전문가인 공산주의자 빨갱이들.

(2) 역사 왜곡

  • 역사상 기독교인들을 제일 많이 학살한 괴물 집단이 정통 기독교 타이틀을 자처하면서 피해자들의 역사는 몽땅 말살하고 부정하고 왜곡함.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을 아주 긍정적인 승리로 선전함.
  • 자기 나라 역사는 오로지 잘못된 거 부정적인 것 한계만. 적 진영의 역사는 완전 정반대로.. 입만 더 아플 것 같으니 더 말을 말자..

(3) 거짓 평화

  • 유대인들은 옛날에 진짜 메시야는 배척하고 "그의 피가 우리에게로" 이랬는데, 미래의 대환란 때 적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고 환호하고 난리를 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된통 당하고 뒤늦게 정체를 깨닫고서 개고생)
  • 저 일이 있기 전에 동아시아 어디에서는 거짓 평화 공세에 혹해서 세계 최악의 살인마 독재자보고 우리 민족이라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고 환호하고 귀엽게 생겼다고 캐 난리.

당연히 성경 자체에 무슨 남한 북한이 나오는 건 아니다. 14만 4천 명이 누구랑 관계 있고, 동방의 의인이 무슨 자기 교주이고 하는 그딴 소리는 개소리이다.
한국이고 미국이고 이런 나라들은 성경이 말하는 이방인 중의 하나일 뿐, 걔네들이 유대인 이스라엘처럼 성경의 세대적 경륜의 직접적인 선상에 있는 건 아니다.

단지 성경과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습득된 그 세계관, 성경의 사고방식,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 성경에 기록된 역사에서 반복되는 '추상적인 패턴'을 염두에 두고 세상사와 정치를 동일한 잣대로 일관되게 평론하고 전망할 수는 있다! 왜? 해 아래에 새로운 건 없으니까. 이 개념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령, 로마 교황이 미래에 나타날 성육신한 마귀 적그리스도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중세에 하던 짓거리로 봐서는 거기에 정치 종교적으로 항거했던 사람들이 저놈은 그(the) 적그리스도라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으며, 그 시절에 존 네이피어(수학 로그의 고안자)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처럼 북괴 정권은 얘 자체가 성경 교리 차원에서의 적그리스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얘들이 주민들에게 해 온 짓거리는 대환란기 때 벌어질 적그리스도의 본색 통치와 인류 역사상 가장 유사한 형태이며, 우리 입장에서는 충분히 경계할 만한 적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4. 우박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비라는 게, 관측 가능한 모습만 서술하자면 공중의 구름 속 얼음 조각(빙정)이 적당히 커지고 무거워진 뒤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상 현상이다. 녹으면 비가 되고 언 채로 내리면 눈이 될 뿐이다.
구름은 짙은 안개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물건이다. 비행기 안이나 높은 산을 오르는 중에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잠시나마 할 수 있는데, 별 거 없다. 그냥 시야가 싹 흐려지고 온통 회색 천지가 됐다가 다시 풀려난다.

본인 역시 흐리고 비 내리는 날에 등산을 갔다가 이걸 실제로 겪은 적이 있다. 구름 속에 있다고 해서 딱히 눅눅하고 축축한 느낌은 별로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때로는 하늘에서 비나 눈보다 더 더 딱딱한 얼음 덩어리인 우박이 떨어질 때가 있다. 얘는 큰놈을 맞으면 좀 아플 수가 있다. 심하면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며, 건물과 차량을 부수고 농사를 아작 내는 재앙이 된다.

우박은 눈이나 비가 되어 곧장 떨어져야 할 빙정이 그렇게 되지 못하고, 대기의 상승 기류를 타고 오르내리기를 몇 차례 반복하면서 녹지 않은 채로 비정상적으로 무거워졌을 때 생긴다. 그러니 기온이 무작정 낮을 때가 아니라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대기가 불안정할 때 더 잘 생긴다. 우박이 한겨울보다는 봄에 더 잘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성경에서 우박은 이집트의 재앙(출 9:18)부터 시작해서 계시록에 나오는 대환란 재앙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이라고 언급된다.
구름 속 얼음 조각들을 평범한 눈· 비로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마치 기 모으듯이 요리조리 만지작만지작 크기를 일부러 키워서 우박으로 개조한 뒤에 떨어뜨리는 건 신의 입장에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콩알만 한 우박은 그냥 귀여운 애교 수준이겠지만, 관측과 기록이 있는 근래에 수백 g~심지어 1kg에 달하는 우박이 떨어진 적도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검색을..) 당연히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그런데 성경은 미래의 대환란 때 무려 1 달란트 무게의 우박이 떨어질 거라고 말한다(계 16:21). 달란트는 화폐 단위일 때도 매우 큰 단위이지만, 무게 단위일 때는 거의 27~30kg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건 뭐 우박 한 덩어리가 수박을 넘어서 쌀 한 가마니나 무거운 아령, 완전군장의 무게에 맞먹는다. 일반적인 기상 현상/이변으로 발생하는 우박보다 수십 배 이상 무거운 놈이다.
얼음의 밀도만으로 우박 덩어리의 무게를 그 정도로 키우려면 우박 하나가 사람 머리통 이상으로 더 커야 할 것이고, 아니면 우박 안에 무슨 쇳덩어리라도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우박을 맞는 지역은 당연히 완전 작살이 나며, 이 재앙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왕창 욕하고 모독할 것이라고.. 그 예상까지도 성경에 친절하게 기록돼 있다. 지난 5월 초에 서울에 난데없이 천둥과 우박이 내린 걸 보고는 성경에 나오는 우박 생각이 문득 들었다.

5. 웰 다잉

요즘 웰빙뿐만 아니라 '웰 다잉'이라고 해서 죽는 것도 미리 준비해서 품위 있게 죽자.. 뭐 그런 트렌드가 있다.
이게 조금 더 엇나가면 "더 추해지기 전에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권리다"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한 윤리 논쟁까지 일으키게 된다만..

그래도 미리 장례 체험, 유서 미리 쓰기.. 이런 움직임 정도라면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군생활 하면서 KCTC 훈련 중에 적탄에 맞으면 전사로 처리되어 전장에서 열외된다. 영현빽에 산 채로 들어가고 자기 배 위로 태극기가 덮이는 체험을 해 보면, 체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죽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하면서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든다고 한다. 군대 가서 유익한 경험을 하고 온 셈이다.

물론, 내세를 가르치는 종교들은 죽음 준비 전문이니 이 분야에서 자기 교리를 따라 할 말이 무척 많을 것이다. 군대에도 군종이라는 병과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군인이란 직무 수행 중 순직할 수 있는 직업의 최고 극한 형태이니까..
다른 종교도 아니고 신약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내세와 심판, 절대자에 의한 구원과 영생이 핵심 교리이다.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복에 대해서는 구약 유대교와도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좋은 교회는 복음 전파와 구원에 충실해야겠지만, 그 뒤로 한번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서는 성장· 양육을 통해 '그리스도의 심판석'을 대비시키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죽어서 가든, 아니면 산 채로 휴거되어서 가든.. 거기서 하나님이 무슨 질문을 할지, 우리는 욥기 끝부분을 능가하는 어떤 팩트폭격을 당하게 될지 그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대학원생이 졸업을 위해 논문 심사를 받는 순간이 오고 기업가가 정기적으로 세무 조사를 받는 순간이 오며, 기업에서 인사고과 평가를 하는 날이 오는 것과 같다. 일단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행 천국행을 결정하는 심판에는 걸릴 일이 결단코 없지만,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평가를 받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이걸 늘 의식하고 산다면 크리스천의 삶이 지금 같을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7/12 08:31 2018/07/1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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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록으로서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믿음

'성(城)'이라고 하면 서양에서는 월트 디즈니 영화 인트로 화면에서 보는 것처럼, 주변에 moat라고 불리는 도랑도 있고 거대한 저택이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아무래도 만리장성 같은 긴 성벽이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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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남한산성과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돼 있다. 그러나 서울의 중심부에 있는 한양도성은 세계 유산에까지 등재될 정도의 유니크함은 부족하다는 판정을 받아 등재가 거절됐다.

수원화성은 남한산성만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없고 한양도성만치 오래되지도 않은 데다, 일제 시대와 6· 25 전쟁을 거치며 왕창 훼손됐던 것을 어차피 후대에 재건· 복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을까?
'화성 성역 의궤(儀軌)'라는 기록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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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짓는 데 동원된 기자재와 구체적인 공사 기법, 건설 당시의 꼼꼼한 일지, 건설 과정에서 중앙 정부와 주고받았던 공문들, 건설에 참여했던 석공과 목수들 명단... 이런 게 미주알고주알 몽땅 적혀 있다.

성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파괴됐다 해도 이 FM대로만 다시 이행하면 정말 1700년대 고증을 100% 반영해서 성을 똑같은 절차를 동원해서 똑같은 형태로 고스란히 다시 만들 수 있다. 쉽게 말해 프로그램 소스 코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 당시에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지 현대 고고학 지식을 동원해서 재추적해야 하는 이집트 피라미드나 이스터 섬 모아이 같은 물건과는 처지가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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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그 유명한 오사카 성만 해도, 저 정도의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재건된 건물은 그냥 외형만 얼추 닮았을 뿐, 내부는 그냥 엘리베이터까지 달린 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재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조선이 말기에 망한 과정이 워낙 추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많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실록을 포함해 기록 하나는 타 왕조나 국가들보다 신경 써서 잘 남겼다. 이런 기록 덕후 왕조에서 한글 같은 문자를 새로 창제했으니, 문자의 창제 시기와 설계 컨셉 같은 것도 꼼꼼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런 점이 큰 메리트로 작용했으며, 지금의 재건 레플리카가 1700년대 초기 원형 건물과 동급의 권위와 정통성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세계 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다.

"원형 건물과 동등한 권위"... 아마 킹 제임스 성경 빌리버들에게 귀가 솔깃하게 들릴 텐데..
그렇다. 성경도 이런 정도의 퀄리티로 전수되고 번역됐다. 그렇기 때문에 자필 원본이 진작에 소실되고 없어도 지금 읽는 역본이 자필 원본과 동등한 영감을 담고 있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작정 오래되고 낡은 채로 짱박혀 있는 소수 사본이 아니라, 끊임없이 필사되고 읽히고 닳아 없어지길 반복했으며 교차 검증도 되는 다수 사본이 진품이다.

또한 수원화성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구약 성경에 기록돼 있는 온갖 쓸데없이(?) 디테일해 보이는 사람 명단이나 숫자 목록, 물건들의 구체적인 치수들에 대해서도 관점을 달리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성경 기록이 각종 초자연적인 기적까지 포함해서 모두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2. long S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을 보면..

사용자 삽입 이미지

E를 오늘날보다 더 많이 쓰고 있고 (booke, fowle, forme, grasse, selfe, sunne, starres)
u와 v가 헷갈리는 등.. (heauen??)
완전히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단어 스펠링에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겨우 thou, thy, -eth 이런 건 그냥 약과다.

심지어 KJV의 고유한 특징이라 불리는 '이탤릭체'조차도 오리지날에서는 이탤릭이 아니었다.
보다시피 본문은 뉴욕 타임스 같은 '고딕체'이고, 이탤릭은 그 안에 작은 크기의 '로만체'로 적혀 있다. (정작 난외주에서는 이탤릭체가 쓰였는데도!)
첨가된 단어에 대한 표기는 차라리 한글 개역성경과 더 가까운 형태인 셈이다.

그런데 I와 J, U와 V, W 이런 게 오락가락 하는 건 제쳐놓고라도.. s가 f처럼 적혀 있는 건 굉장히 적응이 어렵다.
graffe, beafts, felfe, feafons, leffer, faid, firft, alfo (???)
게다가 모든 s가 저렇게 쓰인 것도 아니고 s 자체 역시 따로 있다. s와 f모두 각각 음절초와 음절말에 다 등장하기 때문에 정확한 등장 조건이나 규칙을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이건 어찌 된 영문일까?

독일어 철자법에 ß가 있는 것처럼 저 시절에는 long S라는 게 따로 있었다.
내 생각에, 한글로 치면 아래아와 비슷한 존재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처음엔 발음이 미묘하게 달랐지만 한쪽의 음가가 오래 전에 소멸하고, 영어의 철자법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결국 long S는 짤린 것이다. 그게 무려 1700년대의 일이다.
아래아가 음가를 상실한 뒤, 20세기에 와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최종적으로 짤린 것과 비슷한 과정이라 하겠다.

킹 제임스 성경이 원체 archaic한 단어와 문체로 유명하긴 하지만, 글자 자체도 archaic한 놈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게 흥미롭다.
수학에서 일명 '인테그랄'이라고 불리는 적분 기호 ∫가 바로 길게 늘어뜨린 long S의 후신이다. sum을 나타낸다.

3.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본인은 개인적인 신앙 노선을 여러 번 밝힌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이다.
구원의 길이 예수 유일이듯이, 그런 독단 배타적인 교리를 텍스트 형태로 명시하고 있는 성경도 특정 역본 유일이라는 개념은 이상하거나 어색할 것이 전혀 없다고 본다.

성경만은 번역되는 과정에서 여느 텍스트가 번역될 때와는 달리 예외적이고 특례적인 섭리와 보존이 있었다고 믿는다. 설령 KJV라는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이나 번역자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몰랐을지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기독교계가 원어 원문 운운하는 온갖 지적 사기와 말장난, 혼돈을 벗어나서 뭔가 절대 기준을 가질 수 있다. 교리의 근간과 믿음의 대상이 존속할 수 있으며 기독교가 최소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고전 텍스트들은 잘난 학자들이 점점 더 원래의 의미를 복원해 나가는지 모르겠지만, 성경은 이미 정확하게 잘 완성됐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트렌드가 반대로 타락하고 퇴화하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 왕이 아기를 둘로 쪼개서 반반씩 나눠 가지라고 명령을 내렸을 때 아이의 진짜 엄마는 완전 화들짝 멘붕했지 않던가?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읽는 성경이 변개되고 파편화돼 있다는 말을 절대로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JV 유일주의는 기독교계에서도 소수설로 취급되고 있으며,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아주 많다.
이런 사람들은 KJV에 '없음' 구절이 없는 게 정상이 아니라, 반대로 '없음'이 원래 맞고 KJV가 후대에 추가(!!)돼서 사본학 근거가 부족한 구절까지 덤으로 갖고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

또한, '없음'이 있긴 하지만 동일한 내용이 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고도 해명한다. 예를 들어 마 17:21에서 "기도와 금식"이 삭제되긴 했지만 막 9:29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해'가 삭제되긴 했지만 엡 1:7에는 동일 내용이 남아 있다. 이런 식이다.

행 12:4의 '이스터'(파스카)와 마 12:40의 '고래'(케토스)는 단골로 오르내리는 번역 이슈이다. 이건 KJV 옹호 진영에서도 다 반박이 돼 있다.
요일 5:7은 일명 '요한의 콤마'라 하여 킹 제임스 성경에서만(동일 계열의 바른 사본도 포함)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온전히 입증하는 구절인데... 이것도 원래 성경에는 없던 말이 후대에 추가된 거라고 말이 많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은 나쁜놈들이 변개하고 삭제하는 게 훨씬 더 직관적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과잉 충성분자가 첨가하는 것은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시나리오라고 본다. 계 22:18을 뻔히 믿는 사람이 설마 감히 첨가를 하겠는가?

그리고 원어· 원문뿐만 아니라 해석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구절이 있다. KJV 빌리버들은 시 12:6-7이 하나님 말씀 보존에 관한 약속이라고 본다. 7절에 나오는 preserve them은 당연히 바로 앞의 words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자들은 이마저도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존한다는 말일 뿐이라고 말한다.

성경에 이런 말을 하다가 뜬금없이 갑자기 다중적용 예언이 나오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불편해하고 굳이 가리려고 애쓰는 건, 마치 창 22:8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린양으로 예비하실 것임"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고 창 1:2와 렘 4:23을 같이 연결하여 심판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이단시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KJV 유일주의를 기를 쓰고 공격하고 반박하는 사람들은 저런 유명한 구절들을 끄집어내서 KJV가 오역을 했거나 원래 원문에 없는 문구를 추가한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이 벧전 2:2까지 거론하면서 "말씀의 젖을 사모하고 자라라"가 아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고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라는 잘못된 교리가 맞다고 자신만만하게 주장하는 것은 본인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이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성경과 관련하여 어차피 어딘가에 권위를 둬야 한다면, 현대 역본 번역자나 원어학자를 믿을 바에야 차라리 400여 년 짬밥의 안정화 내력이 있는 영어 성경에 권위를 두는 것이 훨씬 더 건전하고 현실성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지엽적으로 약간 오류(흑역사, 아쉬운 점, 단점, 나쁜 점, 부정적인 것)가 있지만 그래도 큰 그림을 보면 좋은 게(선한 것, 감사할 것, 유익한 것 등..) (훨씬) 더 많고 괜찮다."
이런 사고방식은 통계를 동원하여 공학 연구나 과학 실험 결과를 평가할 때, 혹은 우리나라 현대사 같은 걸 논할 때, 이· 박 대통령 같은 사람의 행적을 평가할 때는 적절하고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적당히 오역이나 오류도 좀 있지만 대충 요점만 들어맞으면 되는 부류의 책이 아니다. 만약 성경이 그런 부류의 책이라면 자기가 성경의 오류 감별사라고 설치면서 궤변 말장난을 늘어놓는 사기꾼들, 성경에 기록된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내용들을 제멋대로 영해하는 미친놈 이단 교주 등.. 그로부터 야기될 혼돈· 무질서와 오류, 부작용, 폐단이 가히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내가 저런 사고방식을 몰라서 KJV 유일주의를 고수하는 게 아니다. 성경이 기독교 정체성의 유지에 어떤 기여를 하는 존재이며 나에게 성경이 어떤 책인지를 제대로 알기 때문에 이런 지론을 갖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28 08:29 2018/06/28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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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는 둥글다 =_=;;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에서 가까이서 본 광안대교와, (대략 1.2km 정도 떨어짐)
저 멀리 일본 쓰시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본 광안대교(대략 50km)는 외형상 서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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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쪽에서 본 교량은 해수면 수평선의 아래로 푹 꺼지듯 내려앉아 있음이 명백하다.
굳이 이 사진 말고 어느 풍경 사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원근법 때문에 작게 보이는 게 아니라는 건 교량 위 아래의 기둥 크기 비율을 고려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망원경으로 보더라도 아래로 꺼진 건 명백하게 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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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광안리 해수욕장 해변은 말 그대로 해수면에 거의 근접하는 낮은 고도인 반면, 쓰시마 섬에 소재한 '한국 전망대'는 해발 70m에 달하는 언덕 위의 고지대이다! 그럼 상식적으로 광안대교가 밑동까지도 잘 보여야 정상일 것이다. 참고로 광안대교의 도로는 해발 45~50m 남짓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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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가 왜 발생할까?
답은 하나, 지구는 둥글기 때문이다.
배가 저 멀리 사라질 때도 그냥 중앙의 소실점 근처에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듯이 사라지는데..
그 현상만 갖고는 flat earther들이 선뜻 수긍하질 않으니, 이럴 땐 일개 선박보다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증거인 광안대교 풍경을 제시해 보자.

이 문제 갖고 고민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특히 성경 믿고 신의 창조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과학으로 검증이나 재현 불가능한 영역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세계 지도가 평면이니까 지구도 평면이다" 수준의 유체이탈이나 마찬가지인 아무말을 지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수님 부활이 사실인 것만큼이나 아폴로 승무원들이 달에 다녀 온 것도 사실이고, 지구가 둥근 구인 것도 사실이다. 그건 창조· 진화라든가 성경의 무오성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
"땅의 원"(circle of the earth - 사 40:22)이 지구가 둥글다는 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땅의 네 모퉁이"(four corners of the earth - 계 7:1)는 지구가 평면이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그 문맥에서 직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그런 게 아니다.

그리고.. 세상을 너무 음모론 괴담스럽게 볼 필요 없다. 세상이 영적으로 아무리 악해도 멀쩡히 눈과 귀로 관찰 가능하고 재현 가능한 것을 호락호락 조작하고 사기를 치지는 않는다. 지구 모양을 갖고 사기를 쳐서 도대체 누가 무슨 이득을 얼마나 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는데, 세상 다른 현상은 다 음모론적으로 접근한다 해도 최소한 (1) 전기차가 망한 것과 (2) 인간이 과거에 달이 간 적이 있는지, 갔다면 지금은 왜 달에 더 안/못(?) 가고 있느냐 하는 건 음모론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는 현상이다.

(1)은 무슨 석유 회사의 외압 로비 같은 거 전혀에 가깝게 없으며, 있다 해도 전기차 몰락의 주 요인이 결코 아니다. 그냥 전기차가 배터리의 무게와 가격, 항속 거리와 충전 시간이라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기름차의 기술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서 망했을 뿐이다. 전기차는 처음에 간단하게 만드는 게 기름차보다 쉬웠을 뿐이지 그 이후로는 실용화가 한계에 직면한 것이다. 디젤 엔진 기반의 대형 버스와 트레일러가 배터리 기반 전기차로 가능할까?? 21세기에도 어림도 없는 일이다.

(2) 역시.. 천문학적인 발사 비용 대비 효과가 없으니 더 안 보내는 것일 뿐이다. 허무하게 들리지만 현실에서 이것보다 더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우주 관련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꼭 미국 NASA만 세상 모든 정보를 움켜쥔 빅 브라더스 흑막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왜 소련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미국 최대의 경쟁자요 어떻게든 미국의 행보에서 약점 잡을 것 찾느라 목숨을 걸었던 소련조차 미국이 달에 사람을 보냈던 걸 빼박 다 ㅇㅈ했구만.. 설마 미국과 소련이 나란히 같이 짜고 조작극을 벌였다고 믿으시는가? 애초에 NASA 자체가 소련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멘붕 하고서 미국이 허겁지겁 설립한 연구 기관일 뿐인데 말이다.

지금은 그 냉전이 끝났다. 컴퓨터가 처음으로 대중화되고 정보화 시대네 뭐네 말이 나오자 이번에는 666이 어떻고 모든 것이 컴퓨터에 의해 중앙 통제되고 정보 접근성으로 인한 신분 계층 차별이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게 될 거라는 식으로 괴담이 왕창 나돌았다.
난 그 심정은 이해한다. 198, 90년대라면 나도 그런 쪽으로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2010년대의 뚜껑을 열어 보니 세상은 그렇게 막장으로 무식하고 폐쇄적이고 흉물스럽기보다는.. 훨씬 더 상업주의 자본주의적으로 돈의 논리를 따라 개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양의 기술과 정보들이 부자들의 전유물이 되기는커녕, 대중들에게 개방되고 무료로 내지 아주 저렴하게 풀렸다. CCTV, 블랙박스, 중앙집권 전산화 덕분에 치안, 행정과 금융이 정말 투명하고 깨끗해지고 신속· 공정해졌다.

남극과 달은 은폐는커녕 표면의 스트리트 뷰가 나도는 지경이다!
아폴로 우주선을 제어하던 컴퓨터 프로그램의 어셈블리어 소스가 github에 공개되어 있다. 설마 그게 다~~ 주작 조작이겠는가?

물론 그것들이 마냥 자선행위 차원에서 풀린 건 아니며, 그 투자 비용은 더 교묘한 방식과 다른 형태로 어떻게든 회수되긴 할 것이다. 좋은 취지로 만들어졌던 기술과 집중되었던 자본이 나중에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쪽으로 얼마든지 악하게 쓰일 수 있으며,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 어떤 형태로 구체적으로 실현될지 우리로서는 선뜻 추측할 수 있지 않다. 다만 한 가지, 그 엄청난 기술들이 대중들을 통제하여 고작 아폴로 계획 자작극이나 지구 평면이라는 엄청난 팩트(?)를 은폐하는 데 동원되어 쓰이고 있다고 믿는 건... 성경을 믿는 것보다 정말 엄청나게 더 큰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게 틀림없다.

고대 그리스의 에라토스테네스는 같은 날 같은 정오 시간대에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그림자 길이가 차이가 난다는 걸 발견하고는 그걸 토대로 지구의 둘레를 추측 계산해 내기까지 했다. 이 때는 성경의 구약과 신약 중간 시기이던.. 그야말로 엄청난 옛날이다. 기구 하나조차 띄울 여력이 안 되던 시절에 지구가 둥근 건 너무 당연한 귀결이고, 그 둘레를 오늘날의 측정값과 비교해 봐도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맞힌 것이다.

컴퓨터, 우주선, 휴대전화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지금으로부터 2천 몇 백 년 전의 사람보다도 통찰력이 뒤쳐져서야 되겠는가?
세상 자녀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게 머리 잘 돌아가는 분야가 있다는 건 성경도 인정한 팩트이다(눅 16:8). 그걸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8/06/07 08:33 2018/06/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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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카이 2018/07/14 01:08 # M/D Reply Permalink

    제가 이걸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았습니다
    저는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는 이과생이었고
    수학경시대회에서 상을 받은 적도 있었으며
    대학에서는 공업수학과 4대역학(열역학, 재료역학, 유체역학, 동역학)을 공부했었습니다

    initial condition :
    1)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대로
    지구는 반지름이 6377000 m인 구라고 가정
    2) 쓰지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광안대교까지 거리는 50000 m라 가정(네이버 지도에서 보면 실제는 56000 m 정도)


    1st. 쓰지마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관측자의 높이를 해발 0 m 라고 가정했을 때
    50000 m 떨어진 거리의 광안대교는 해발 몇 미터부터 보일 것인가?

    고1 수학에서 원의 접선의 방정식과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하면 이건 금방 풀 수 있습니다
    제 연습장에는 완벽하게 풀이했지만 타자로 치기 번거로운 관계로
    간단한 풀이방법과 결과만 소개하고 실제로 맞는지는 직접 계산해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저는 공학용 계산기를 사용했으며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구가 둥글면
    해발 196 m부터 보이게 됩니다
    즉 광안대교가 보여서는 안 됩니다


    2nd. 쓰지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관측자의 높이를 해발 70m라고 가정했을 때
    50000 m 떨어진 광안대교는 해발 몇 미터부터 보일 것인가?

    원 밖의 한 점에서 그은 접선의 방정식입니다
    첫번째 풀이보단 많이 복잡하지만 이것도 고1 수학 수준입니다

    지구의 중심을 xy좌표의 (0,0)으로 하고 반지름은 6377000 입니다
    쓰지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관측자의 높이(원 밖의 점)를 (0, 지구 반지름 + 해발고도)
    즉 (0, 6377070)으로 가정합니다

    연습장 3쪽 정도 나왔는데
    31.743 m부터 보여야 합니다
    광안대교 도로의 높이가 50미터라고 하면 30/50즉 해수면에서 도로까지 거의 60%에 해당하는 지점이
    안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참고로 해발 70미터에서 해수면(지구의 표면)이 보일 수 있는 최대 거리는 29879m입니다

    <풀이법>

    해발 고도를 0m라고 가정 했을 때

    "반지름 * 각도 = 호의 길이"를 이용하여 호의 각도를 구하고
    빛이 직진하며 이 각도로 반지름과 탄제토 각도를 곱하고
    피타고라스 정리를 활용하면
    쉽게 구할 수 있으며

    해발 고도를 70m라고 가정했을 때

    직선의 방정식 y = mx + 6377070
    원의 방정식 x^2 + y^2 = 6377000^2

    직선이 원의 방정식에 접하는 기울기를 찾고
    (제가 찾은 것은 m = -4.685511425 * (10^-3)
    그러므로 직선의 방정식은 y = -4.685511425 * (10^-3) x + 63377070)
    원의 중심에서 광안대교까지 그른 직선의 방정식
    Y축에서 시계방향으로 (50000/6377000) 라디안 만큼 기울어진 직선
    즉 기울기 tan(pi/2 - 50/6377)
    직선의 방정식은 y = tan(pi/2 - 50/6377) x
    를 연립하고
    (0, 0)에서 부터 거리를 구하고
    이것에 원의 반지름을 빼면 됩니다

    <사람들이 직접 계산해 보지 않는 이유>
    심리적인 건데 요즘 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필수로 극한의 개념을 배우게 되는데
    미분과 적분이나 테일러 급수전개나
    역학에서 미소 변화에서 tan a = a로 근사값으로 계산해 버리는데
    이게 지구도 그렇게 거대해서 극한의 개념이 적용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은데
    사실 지구가 크다고 해도 극한의 개념이 적용될 정도로 크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고1 수준의 수학 문제니까
    사무엘님도 충분히 계산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 신세카이 2018/07/14 02:48 # M/D Reply Permalink

    아리스토텔레스의 지구 크기 계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비친 그림자의 길이 차이로
    지구의 둘레의 길이를 측정했다는 것은 정말 유명한데요

    처음에 전제 조건을 다는 것이
    태양이 무한히 먼 거리이고 빛에 평행하게 들어온다고 가정을 하는데

    실제로 태양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멀지 않고
    빛이 직진은 하지만 평행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면
    지구가 둥글지 않아도 그림자의 길이에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구글에서 "햇살 구름"이라고 검색해서
    여러 이미지들을 보면
    구름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절대 평행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사무엘 2018/07/14 06:56 # M/D Permalink

      안녕하세요! 신세카이 님과 지금까지는 주로 정치· 종교 쪽 얘기만 나눴던 것 같은데 이 분야 얘기는 완전 처음이네요. ^^ 자세한 보충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이공계이신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이 글을 쓰면서 삼각함수 동원해서 광안대교의 예상 높이를 혼자 얼추 계산해 보기도 했습니다. 부산과 쓰시마 섬에서 계산으로 얻은 높이 차이는 님의 말씀처럼 100수십 m대의 값이 나왔었습니다. 저는 input에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196보다는 작은 값을 얻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예전에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갔을 때는 얘들은 도대체 태양열을 받는 각도가 얼마나 차이가 나서 한국보다 더운가 계산하려 '시도'한 적도 있답니다. (이건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부터 시작해서 계산에 필요한 input 값들을 정확하게 얻는 것부터가 어려워서 포기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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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7년 4월: 찬송가+CCM 메들리
https://www.youtube.com/watch?v=mvGJ4kNv99M

본인은 다니는 교회에서 수 년 동안 국내외의 여러 찬양곡들을 개척하고 메들리를 짜기도 했지만, 이때 했던 특송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본인에게 인상깊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 특별하게 확 꽂히는 곡이나 컨셉, 단서가 없이 완전 백지 자유 주제 상태였다. 덕분에 찬송가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잡듯이 뒤지면서 선곡과 편성에만 2시간 가까이 걸렸다.
  • 같은 E장조 4/4박자짜리 세 곡이 최종적으로 뽑혔는데.. 전부 그 당시엔 내가 모르던 신곡이었다. 가사와 악보를 머릿속으로만 읽고 연결해 보면서 "음 이 순서대로 부르면 좋겠다"라고 계획을 수립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맑고 밝은 날 It’s a happy day
어린이 찬송 같기도 한 짤막하고 명랑 발랄한 곡을 도입부에 넣었다.

(2)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 Sweet are the promises, kind is the word
박자가 흥겨운 곡 다음으로 본론은 화음이 아름다운 19세기 클래식 찬송가로 넣었다. (나머지 앞뒤 곡은 20세기 CCM임)
후렴의 "주님 가신 곳에~ 나도 따르겠네" 부분.. 난 이런 스타일의 합창에서 느껴지는 harmony를 짱 아주 좋아한다. 물론 교회 친구들이 잘 불러 줬다. 반주자도 마찬가지~!!

참고로 이 찬송은 <예수 나를 오라 하네>와 후렴 가사가 서로 아주 비슷하다. 똑같이 ‘나는 주님을 따르리’이다.

Where he leads I’ll follow, follow all the way (우리가 부른 곡)
Where he leads me I’ll follow, I’ll go with him all the way (예수 나를 오라 하네)


(3)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I love You, Lord; and I lift my voice
그 다음으로 워십송 스타일의 조용하고 우아한 곡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여기도 화음을 넣으면 더 멋있어졌겠지만 그러지는 않고 그 대신 조를 올려서 반복했다. 이렇게 해서 그럴싸한 메들리가 완성됐다.

2. 2017년 5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 찬송 메들리
https://www.youtube.com/watch?v=FtS15e9fsaI

(1)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원제는 <사랑의 송가>라고 하는데, Tina Benitez라고 인터넷에서 정체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여자 이름의 작곡자)
(2)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정 두영 1939-2005 작곡.)

둘은 고린도전서 13장 일명 사랑장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곡이며 꽤 유명하다. 두 곡은 제각기 가사에 포함시킨 구절도 있고 생략한 구절도 있다.
그리고 작곡자가 서로 완전히 다르나, 둘 다 3/4박자 D장조이며 박자와 분위기가 서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이 점을 착안하여 본인은 이 두 곡을 잘 취합하면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를 꽤 그럴싸하게 음악으로 '스토리텔링'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건 답이 너무 뻔히 나와 있기 때문에.. 교회 음악 한다는 전세계의 날고 기는 다른 음악 전공자들도 분명히 이렇게 생각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먼저 사랑의 송가 1절로 시작한다. 1절 가사는 성경 본문에서 1~3절을 커버한다. 아무리 거창하고 대단한 능력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사랑의 송가의 후렴인 "하나님 말씀 전한다 해도 그 무슨 소용이 있나,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는 이때 딱 한 번만 부르고 더 부르지 않는다.

그 뒤, 본론에 속하는 사랑의 속성에 대한 설명은 정 두영 곡이 더 자세히 잘 해 놨으니 그 곡으로 넘어간다.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까지 부른다. 성경 본문에서는 8절까지 나간다.

다음으로 성경 본문에는 "현재의 불완전과 미래의 완전"에 대해서 비유 설명을 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노래에서는 둘 다 빠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 간주를 하면서 간단히 9~10절을 나레이션 낭독을 했다. 곡이 바뀔 때 4마디 정도 짤막한 간주가 있는데, 간주 선율은 곡의 앞뒤 분위기를 생각해서 내가 대충 작곡해 넣었다.

간주가 끝난 뒤에는 사랑의 송가로 돌아가서 3절 앞부분을 부른다. 이게 12절에 해당하니까. "지금은 희미하게 보이나 ... 우리도 주를 알리"
이거 부르고 나서는 아까 중단했던 정 두영 곡의 클라이막스로 '간주 없이' 자연스럽게 곧장 넘어가서 곡 전체를 마무리 짓는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 북괴와 관련된 진실, 대북관과 관련된 진실· 진리를 전할 때는 내 경험상 사랑이 담기기가 정말 불가능에 가깝게 무지무지무지무지 힘들긴 하다-_-;;. 다만,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랑 인간이 흔히 생각하는 사랑은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무작정 젠틀하고 공손하고 댄디하고 부드럽고 유하기만 한 게 사랑은 아니다.

3. 2017년 12월: 성탄 찬송 메들리
https://www.youtube.com/watch?v=pbSMPEOlZHs

우리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성육신과 탄생만 믿지, 12월 25일 성탄'절'을 믿지는 않는다.
그래서 교회 안에 크리스마스 트리 같은 것을 꾸미지 않으며, 사용하는 찬송가에도 '탄생' 카테고리의 곡은 기성 교회 찬송가들보다 매우 적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조차도 별 영양가나 교리 메시지가 없고 모호하다는 이유로 제외시켰을 정도이다.

그래도 나름 2017년은 청년부 특송을 하는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이기도 하니, 조심해서 탄생 관련 곡을 골라서 불렀다.
성경적인 내용이 전혀 없는 캐롤이야 당연히 제끼고, "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 God rest ye merry gentlemen(이건 한국어 가사가 기억 안 나네.. 기성 교회 찬송가에 있는데..),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등 여러 곡들을 고려했는데, 최종적으로 뽑힌 건

(1) "천사들의 노래가"(Hark! the herald angels sing), 그 다음
(2) "참 반가운 성도여"(O come, all ye faithful)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가사에서 '베들레헴', '아기 예수' 이런 단어가 나오는 부분은 다 뺐다. 날짜와 장소는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탄생 사건과 "그분께 영광과 경배"에만 집중할 수 있게 가사를 편성했다.
'동정녀'도 '처녀'로 수정했다. 동정녀는 마리아가 평생 결혼 안 하고 살았다는 오해를 야기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곡이 바뀌는 간주 중에는 눅 2:10, 14절 암송을 하는데, 중간에는 2:11-12 대신에 사 9:6을 집어넣었다. 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스러운 묘사 대신 "놀라우신 이, 강하신 하나님, 평화의 통치자"라는 더 뽀대 나는 타이틀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타이틀이 나올 때쯤에 간주 멜로디도 제일 역동적이고 세게 이어지도록 음표에다 악센트를 넣었다.

4. 2018년 2월: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https://www.youtube.com/watch?v=-low5ichQVc

이때는 청년부 특송 역사상 최초로.. 빈손 무악보를 시도했다.

무악보이니 선곡 원칙이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길고 화려한 신곡이라든가 복잡한 메들리 같은 건 싹 잊어버리고, 그 대신 우리에게 친숙한 곡, 멜로디에 반복 많고 가사도 외우기 쉬운 곡.. 그러면서도 달달 외울 가치가 있을 정도로 가사가 아름답고 영양가도 충분하고, 심지어 박해나 순교를 앞두고도 떠오를 만한..! 그런 검증된 명곡을 찾게 됐다.

성경에서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채찍 맞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찬송을 크게 불렀다고 나온다. 발에 차꼬가 채였고, 전깃불도 없던 시절에 한밤중이었는데.. 여러 정황상 이들이 우리 찬송가 책 펴서 "100장 뭐뭐뭐 부릅시다" 이랬을 가능성은 없다. 당연히 외우고 있던 찬송을 불렀지.

그래서 단순히 구원, 찬양 이런 쪽보다는 신뢰, 인도, 동행, 사랑... 이런 카테고리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두세 곡이 경합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는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이 뽑혔다. 안 그래도 이 찬양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공감대가 금세 형성됐다. 여러 가지로 따져 봤을 때 암송용으로 정말 최적의 찬송가임이 틀림없었다.

가사를 외우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2절 부르다가 3절 가사가 튀어나오는 식으로 꼬이지 않고 자신 있게 순서를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게다가 주선율 말고 화음 파트 멜로디를 외우는 것도 꽤 어려웠다. 그래서 나만 혼자 테너를 부르고 다른 분들은 다 멜로디로 갔다.

가사 암송을 위해서 다른 음악적인 기교들을 극도로 최소화하게 됐지만.. 이것만 있으면 단조로우니 간주 중에 성경 구절 암송을 넣었다.
이 찬송의 가사는 예수님에 대해서 "골짜기(산 밑)의 백합"(아 2:1)과 "빛나는 새벽별"(계 22:16)이라는 칭호를 인용했다. 아 2:1만 인용했으면 "샤론의 장미"가 뒤따르고 계 22:16만 인용하면 "다윗의 뿌리"가 나왔을 텐데 두 구절을 부분적으로 인용했다.
그래서 간주 중엔 그 해당 구절 둘을 완전히 읽을까 생각했으나.. 아가서 5장으로 계획을 바꿨다.

후렴 끝부분의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가 영어 가사로는 "he is the fairest of ten thousand to my soul"이어서 아 5:10에서 모티브를 뒀기 때문이다(1만 명 중에서도 최고). 우리말로는 음절수를 맞출 수가 없어서 그냥 '짱'이라는 뜻으로 의역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구절로는 "그분은 모든 것이 사랑스럽도다"라고 고백하는 16절을 골랐다.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특송 중에 다른 책도 아니고 아가서를 인용하여 암송하는 기회가 이렇게 찾아왔다.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암송 첫 주자로는 목소리가 예쁜 자매님을 지정했다.

주중에 우리 청년부 내부에서는.. '친히'는 보통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한테 쓰는 말이 아니냐, "예수님이 친히 인간을 찾아오신" 거지 인간이 감히 '친히' 주님을 뵐 수 있느냐~ 높임법이 어긋난 게 아니냐는 진지한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국어사전을 찾아보고 국립국어원 말뭉치 용례까지 뒤져 본 뒤에야 꼭 높은 사람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고 '친하게, 몸소, 손수, 직접'이라는 뜻으로 쓰기에 무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런 안목과 의견도 각 개인이 가사를 글자 단위로 일일이 다 외우고 곱씹으니까 생길 수 있었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빈손으로 강단에 서다 보니.. 사람들이 손을 어떤 자세로 하고 있을지, 시선을 어디에 둘지 꽤 어색해했다. 악보를 꽉 파지(!)한 채 얼굴을 악보 속에 파묻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악보가 없이 열린 모습이 다시 봐도 너무 좋다. 곡의 난이도를 낮추더라도 진작에 이런 시도를 해 봤어야 했다.

한 주 동안 좋은 찬송의 가사를 암기해서 한 치의 실수 없이 불러 준 친구들, 그리고 코드(화음) 취향이 나랑 꼭 맞게 반주를 너무 잘 해 준 반주자 덕분에 이런 특송이 불러질 수 있었다.

5. 2018년 6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새로 추가)
https://www.youtube.com/watch?v=mW86lxk5yBg

4개월 전에는 악보를 없애는 실험을 해 봤고.. (암송) 이번에는 반주를 없애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냈다.
다른 장르도 아니고 교회 음악인데 아카펠라를 한 번쯤은 도전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는 옹기장이 아카펠라 찬송가인데..
곡들이 화음뿐만 아니라 박자도 기교가 너무 많이 들어가게 바뀌어서 어려운 건 둘째치고라도 오전 예배 특송에 적합하지 않았다.

저 곡은 그나마 굉장히 점잖고 얌전한 가운데 적당히 분위기가 미려하고, 2절에 무려 팅팅팅도 들어있고.. 아카펠라 입문용으로 아주 적합했다.
"점8분 + 32분음표 둘"을 몽땅 "8분 + 16분음표 둘"로 바꾸는 정도의 중성화를 치렀는데..
이 정도로 난이도를 낮추고 낮췄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렵다는 게 친구들의 반응이었다.

난 음악에서 박자보다 화음을 더 좋아한다. 단선율이 흑백 영상이라면 합창은 R, G, B축이 합성된 컬러 영상 정도의 공감각적 심상이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8/04/22 08:38 2018/04/22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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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경록 2018/04/26 13:31 # M/D Reply Permalink

    제가 용묵님 덕뿐에 다시 교회를 다니나 봅니다. ㅎㅎ 근데 이제 개발환경이 맥이라서 날개셋 입력기를 못쓰고 있어서 아주 안타까워요. 편하고 좋았는데 아쉬워요

    1. 사무엘 2018/04/26 17:01 # M/D Permalink

      경록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좋은 소식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_^ 저도 회사에서 macOS 및 iOS 개발을 위해서 가끔 mac을 만지고는 있는데.. 여기서도 제 입력기와 편집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느끼곤 합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비록 mac용이 나오고 있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다음 버전 개발이 진행 중입니다. 현재의 계획대로라면 다음 버전이 일단은 가까운 미래에 '최후의' 메이저 업데이트가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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