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국 여행 이력

올해 본인은 지난 추석 때 가족과 함께 쓰시마 섬 패키지 관광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을 가 봤으며, 한반도를 통틀어서 가장 가까운 외국을 다녀오게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으니, 본인의 여행 이력과 관련해 여러 분야에서 신기록이 세워졌다.

그런데 본인은 외국 여행을 갈 때마다 뭔가 아귀가 공교롭게 안 맞아서 필요 이상의 손해와 삽질을 감수하곤 했다.
10년 전에 군필 기념으로 미국 여행을 갔을 때는 국내의 휘발유 1리터 가격이 지금과 비슷한 1600원 초중반이었는데, 1$의 환율은 1400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달러 환율은 현재까지 다시는 그만치 오른 적이 없었고 말이다.

게다가 거의 130$ 가까이 주고 비자 신청 인터뷰까지 또 해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2009년쯤부터는 단기 관광 비자가 면제되었다. 그러니 2008년 가을에 미국 다녀온 건 최악의 바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제주도보다도 가까운 곳을 다녀 오지만 그래도 외국이니까 여권이 필요한데.. 병특 만료 기념으로 10년 전에 만들었던 여권은 딱 올해 추석 연휴 기간에 맞춰서 기한 만료 예정이었다. 뭐, 유효 기간이 6개월 이내로 줄어든 여권은 신규 출국용으로는 사실상 못 쓰는 여권이긴 하다만..

이것만 아니면 본인은 앞으로 수 년간 외국 나갈 일이 없을 사람이다. 여권이 무슨 면허 갱신도 아니고 몇 년간 여권 없이 살아도 되는 처지인데 결국은 단절 기간 없이 또 새 여권을 만들게 됐다.
요즘은 출입국 때 일일이 도장을 찍지도 않고 사증란이 소모될 일이 더욱 없으니, 본인은 면수가 절반인 알뜰 여권을 신청했다. 다만, 그래 봤자 할인되는 금액은 3000원 남짓으로, 5만 원에 가까운 전체 발급 수수료에 비해서 그렇게 많이 저렴해지는 건 아니었다.

2. 고속도로

외국 여행을 가는데 인천 공항이 아니라 반대편의 부산항으로 가는 게 무척 이색적이었다. 부산에도 서울로 치면 내부순환로 같은 고가 형태의 시내 고속화도로가 응당 있다. 그러니 부산 중에서도 최남단인 부산항까지 가는 게 생각만치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거기를 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본인은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동안 차의 성능 테스트도 같이 진행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50~160km씩은 흔히 밟았으며, 차 없고 탁 트인 곳에서는 잠시나마 180~185까지도 밟는 데 성공함으로써 과속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긴... 건 아니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끝까지 꽉~ 밟았다.

내 경험상 속도가 100~110을 넘어가면 계기판의 초록색 경제 운전 ECO 표시등이 꺼졌다. 이 이상 속도부터는 차도 점점 힘이 부치고 연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120~140 정도의 속도는 페달을 약간만 밟아도 어렵지 않게 나오는데.. 150 이상이 자동차의 내부 상태가 확 달라지는 경계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가속 페달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게 밟아야 했다. 차가 힘들어하는 게 느껴지고 가속이 눈에 띄게 잘 안 되기 시작했다. 이게 100마일의 장벽이기라도 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1년에 많아야 두세 번 장거리 고속도로를 뛸 때가 아니면 저 페달을 자전거 페달 밟듯이 힘 줘서 밟을 일이 언제 있겠으며, 엔진 회전수 타코미터가 4~5000까지 치솟는 걸 언제 보겠는가? KTX는 200을 넘어서 300도 가는데, 승용차로 이 정도는 밟아 봐야지..

뭐, 본인 역시 추월을 하기만 한 게 아니라 추월을 당하기도 했다. 나 같으면 어지간해서는 저기서 이 좁은 틈으로 끼어들지는 않았을 텐데, 나보다 더 위험한 칼치기를 감행하며 추월하는 간 큰 차들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치기를 하는 차보다는 엄연히 추월 차로인 1차로에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저속으로 세월아 네월아, 그것도 2차로의 차와 거의 나란히 가고 있는 차들이 훨씬 더 민폐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 장애물이 없다시피하고 지금 속도로도 얼마든지 커브를 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것도 뒷차 운전자를 긴장시키고 유령 정체를 유발하는 주범이다. 애써 얻은 속도를 헛되이 허공으로 날리는 짓이니 차의 연비에 안 좋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3.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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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외국으로 가는 건 아무래도 인천항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으로 가는 게 개인적으로 더 쉽게 떠오른다. <아저씨>, <공모자들> 같은 범죄 영화를 너무 강렬하게 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인천뿐만 아니라 부산도 항구 도시로서 아주 중요하며,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무려 110년 전부터 경부선 열차와(부산 역) 부산항이 서로 딱 연계되게 만들어 놨다.

비행기가 아니라 배이니 캐리어를 따로 부치지 않아도 되고 무게 제약이 없는 건 약간 좋았다. 물론 망망대해로 나가는 만큼 기본적인 짐 검사를 하지만, 비행기처럼 액체 반입까지 제한할 정도로 빡세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객기는 출발 후 활주로로 갈 때는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반면, 배는 비행기보다 훨씬 커도 자력 택싱이 가능할 것이다.

기체 내지 선체의 왼쪽에서 탑승하는 건 비행기와 배가 공통인 것 같다. 비행기가 배의 관행을 물려받았겠지..
하지만 각각의 교통수단에 '-호'라는 고유한 명칭이 붙어 있는 건 비행기에는 없는 선박만의 관행이다. 비행기는 그냥 운행편 번호가 있고, 똑같이 찍어 낸 기체 자체의 모델명(보잉 747, 에어버스 380..)만이 있을 뿐이다.

장거리를 좀 오랫동안 가는 여객선이라면 선실이 반쯤 호텔 방처럼 꾸며져 있고 승객이 누울 곳도 있다. 하지만 쓰시마 섬을 오가는 배는 운행에 한두 시간밖에 안 걸리고 주행 속도도 제법 빠른(시속 6~70km!) 고속정이다 보니, 내부가 좀 더 버스나 비행기에 가깝게 꾸며져 있었다. 승객은 고정된 자기 좌석에만 앉아 있어야 하며, 항해 중엔 바깥 갑판으로 나갈 수도 없다. 좌석엔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있었다.

옆에 시모노세키로 가는 성희호 여객선을 보니 크기도 우리 배(니나호)보다 더 크고 뭔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주거성을 갖춘 배처럼 보였다. 더 장거리를 다녀서 그런 듯한데, 저런 큰 배를 굴릴 정도로 수요가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여러 차이점들을 생각하며 일본을 다녀왔다. 갈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돌아올 때는 2m가 넘는 높은 대한 해협의 파도로 인해 평생 겪어 보지 못한 배멀미를 경험하게 됐다.
배가 그야말로 사방으로 들썩이며 요동쳤으며, 파도를 타고 내려갈 때는 쿵쿵 진동까지 느껴졌다. 그냥 놀이기구 탄 듯이 들썩거리는 걸 즐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느 샌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평소에 그렇게도 뜨끈뜨끈하던 손발은 힘과 열기가 쫙 빠졌으며, 얼굴이 노래지고 속이 어지러워졌다. 이 와중에도 남을 챙기기까지 해야 하는 승무원은 어떻게 배에서 근무를 할 수 있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부산항에서 쓰시마 섬 히타카츠(히타카쓰) 항까지 갈 때는 80분 남짓 걸렸지만, 돌아올 때는 파도 때문에 2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자동차로 치면 고속도로에서 비포장 오프로드로 바뀐 거나 마찬가지다.
선박은 고속버스와 마찬가지로 탑승권에 도착 예정 시각이 공식적으로 기재되지 않는 교통수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도로 사정이 아니라 바다 사정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항해를 절반이나 2/3 정도 한 뒤에야 선장이 예상 도착 시각을 방송으로 얘기했다.

4. 일본 - 작다!

과연 일본은 (거의) 모든 게 작고 아기자기하고 아담하더라. 이 말부터 해야겠다. 좋게 말하면 알뜰 검소하고 실속 있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고 짠돌이스럽다.

(1) 먼저 음식 얘기부터.. 음식값이 환율을 감안해도 한국과 비슷해 보이길래.. 그리 비싸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 같은 양과 서비스로 그 가격인 건 아니다. ㄲㄲ 양이 뭐 이렇게 적은지? 음식물 쓰레기가 나올 수가 없다. 과일과 생선회를 이렇게 작은 덩어리로 썰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 음식은 한없이 기름진 중국 음식보다는 일본 음식에 더 가까운지라 전반적인 입맛은 한일 양국이 서로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 음식에 한국 같은 벌건 김치가 곁들여 나오지는 않는다. 또한 회는 언제나 고추냉이 넣은 간장에 찍어 먹지, 한국 같은 고추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 같은 소금과 참기름에 구운 김도 일본에는 없다.

(2) 다음으로 숙소를 살펴보면.. 우리가 그리 비싼 호텔에서 투숙하지 않은 건 감안하더라도.. 한국이라면 지방의 그냥 허름한 여관에도 있을 법한 냉장고와 침대가 없더라. 객실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는 어찌나 아담한지 건물 화장실이 아니라 유아용 내지 교통수단 안의 화장실 같았다.

(3) 일본의 서민들은 살아서도 이렇게 작게 사는데, 하물며 죽은 뒤에는 더 얄짤없다. 황족 말고는 누구든 매장 자체를 못 하며, 무조건 화장 후 납골당 행이라고 한다. 하긴, 후손들이 일일이 다 관리하지도 못하는 묘지만 자꾸 늘어 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고 모든 시신을 저렇게 처리하는 건 일면 합리적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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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끝으로, 일본 하면 역시 경차다. 미국은 깡촌 시골에 온통 SUV급의 커다란 다용도 픽업 트럭이 다닌다지만 일본은 차들이 온통 작다. 베트남 같은 나라이면 얄짤없이 툭툭이 삼륜차였을 텐데, 그래도 일본 정도의 기술 있고 잘 사는 나라이니까 경차인 것이다.

5. 일본 - 차량과 교통

(1) 그래도 택시까지 경차는 아니더라. 그 대신, 딱 1990년대 디자인의 옛날 차들이 많이 다녔다. 일본이 아무리 자동차를 튼튼하게 잘 만든다 해도, 자가용도 아닌 영업용 자동차를 내구연한 없이 설마 20년이 넘게 굴릴 정도로 지독한 구두쇠인가 궁금했는데.. 그건 아니다. '도요타 크라운'의 택시 전용 모델이 1995년부터 2017년까지 외형 변경 없이 그대로 생산된 거라고 한다.

국내 현대차의 경우, YF 쏘나타가 생산되던 동안에도 직전의 NF 쏘나타가 택시용으로는 생산됐다. (LF가 나오면서 단종) NF가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쏘나타의 전신인 1980년대의 완전 옛날 중형차인 스텔라도 택시는 무려 1997년까지 생산됐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도요타 크라운 택시는 정말 오래된 것 같다. 과거의 살아 있는 화석이던 미쓰비시 데보네어 초기형(1960~1980년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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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일행이 패키지 관광을 다니면서 탑승한 차량은 요런 25인승 크기의 마이크로버스였다. 한국이라면 그런 버스는 현대 카운티 같은 "전방 엔진+중간문" 형태만 있을 텐데, 크기가 저렇게 작으면서 대형 버스처럼 "후방 엔진+앞문"인 물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했다.

(3) 차들이 좌측통행인 것이야 익히 들었고, 지구상에 좌측통행 우핸들인 나라가 일본만 있는 게 아니니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중앙선이 흰색 실선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신기했다. 그리고 일부 구간은 황색 실선 중앙선도 있긴 하던데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6. 일본 - 그 밖에

  • 일본은 한국과 시간대가 동일한 드문 외국 중 하나이다. 시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은근히 좋았다.
  • 생뚱맞은 오지에 공중전화도 아니고 음료수 자판기가 눈에 자주 띄었다. 지진 같은 재난에 대비해서 일정 간격으로 의무적으로 배치한 것이며, 불가피한 비상 상황일 때는 자판기를 부수고 물품을 털어서(!) 연명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도 별별 물건을 파는 자판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 자판기까지는 일본에서밖에 못 봤다.
  • 전압이 110볼트이고 옛날 스타일 플러그가 필요하다는 점은 의외로 미국과 비슷한 면모이다.
  • 일본이 집과 차는 작고 음식은 적지만, 지폐는 한국 지폐보다 세로가 약간 더 크다. 1000엔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져 있는 걸 봤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아직까지도 먼 옛날 조선 시대 사람밖에 없는데 나름 근현대의 인물, 그것도 정치인이 아닌 자국의 과학자가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비록 노구치 히데요 자체는 행적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 쓰레기 분리 배출/수거를 한국만치 꼼꼼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에 봉지를 1~2엔 가격에 따로 판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한국보다 미묘하게 더 관대하고 후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07 08:37 2018/10/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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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4 (2018/7/24)

통일관 안에는 북한의 실상, 북한의 대남 도발사 같은 자료들이 전시돼 있었다. 뭐 그렇다고 마냥 북괴의 만행 비난에 반공 멸공만 강조하는 분위기는 아니고, 말 그대로 통일 통일 거리는 프로파간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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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포로에게는 탄광 맞벌이 일을 시킵니다. 아무리 충실하게 일을 해도 국군 포로의 집은 확실하게 3대까지 반동 낙인을 찍습니다. (그래서 아오지 탄광 같은 특별히 더 힘든 곳으로 배치를..)"
저건 옛날에 국군 포로 귀환자로 잘 알려진 조 창호 중위가 정확하게 당했던 대우이기도 하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싸우다가 자기 의지에 반하여 생지옥으로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있었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은 2016년 10월경, 한창 레카가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탄핵 당하고 매장 당하던 시절의 북괴 로동 신문이다. 역시 윗동네에서도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느라 정신 없었다.
국정농단이 어떻고 하는 건 쟤들이 알 바 아니고, 북괴가 원하는 대로 안 해 주는 남조선의 애국 대통령이니까 싫다고 몰아내라고 선동하는 것일 뿐이었지.
쟤들은 '외치다'도 '웨치다'라고 표기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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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수봉 공원 내부에 있는 현충탑의 주변 모습이다. 원래 자유 공원에 충혼탑이라는 것도 있었는데, 그걸 1972년에 수봉 공원 현충탑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여기 주변으로는 나무 그늘과 산책로, 정자, 간단한 운동 시설도 있어서 쉬러 나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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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재일 학도 의용군 참전비이다. 아까 자유 공원에 있던 참전비는 자국 "인천" 학도병의 것이니 헷갈리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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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은 인천 지구 전적비이다.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옆에는 UN 참전 기념탑도 있다.
이건 특정 집단의 참전 기념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투와 승전 자체를 기념하는 것이 목적이다.

나라가 전반적인 분위기가 정상이라면, 필요 이상으로 옛날에만 집착하고 군대 얘기 전쟁 얘기만 꺼내는 건 군국주의 전체주의 수꼴 냄새가 풀풀 나는 발상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나라 분위기가 정상이 아니다. 본인은 온갖 악의적인 역사 왜곡과 나라 정체성 부정, 악의 무리에게 굴종하는 불의한 거짓 평화가 횡행하는 꼴을 견딜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과 반발 심리로 우리나라가 악의 무리로부터 자신을 지켜 온 역사를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고 주변에 알릴 것이다.

이렇게 공원을 쭉 돌아다녀 봤다. 지도상으로는 산 속에 어린이용 놀이공원과 양궁장, 그리고 인공 폭포 광장도 있는 모양이던데, 본인은 거기에는 들르지 못했다. 밖이 너무 더워서 공원을 꼼꼼히 돌아다닐 여건이 못 됐기 때문이다.
또한, 인천에 거주하는 실향민들의 염원을 전하는 망배단(望拜壇)이라는 비석도 있었는데, 이건 사진 소개를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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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본인이 인천에서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오랫동안 말로만 들어 왔던 '국제 성서 박물관'이었다. 인천 주안 감리교회에서 자기 예배당 바로 옆에 부설한 별관인데, 실제로 박물관은 그 건물의 5층에만 놓여 있다. 하지만 한 층만으로도 생각보다 넓고 볼 게 많았다. 자기 신앙의 뿌리와 정체성에 일말의 관심이 있는 교인이라면 꼭 가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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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종교 개혁과 성경의 보급에 끼친 영향,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 우리나라 교회사 등 여러 주제를 다루면서 소장 자료도 굉장히 고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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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셩교젼서. 말은 들어 봤다. 옛날에는 한자음을 표기할 때 y가 가미된 모음이 지금보다 더 많이 쓰였던가 보다.
존 로스는 킹 제임스 성경을 대본으로 삼아 한국어 성경 번역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왜 지금 우리나라는 변개된 성경이 주류가 됐나 모르겠다. 하긴, 개역성경에도 KJV 표현이 일부 전해지는 게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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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경의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부분은 아니지만..
장로교가 주류가 된 현재와는 달리, 우리나라 초창기에는 감리교가 더 우세했다. 또한 이 승만, 김 구, 유 관순, 최 용신, 이 준, 남궁 억 등 한국의 주요 크리스천 독립 운동가들은 대부분 감리교 출신이다. 이것은 국내의 감리교회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점이기도 하다.

장로교는 하나님의 전지전능 섭리를 굉장히 강조해서 칼빈주의 예정론을 지지하는데, 너무 오버해서 하나님께서 죄악까지 다 설계하고 예정하고 지옥 갈 사람도 미리 다 찍어 놓으셨다고 얘기하니 그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반면, 감리교는 존 웨슬리 이래로 알미니안주의에 입각하여 신자의 행실을 더 강조하는데.. 악행이 계속되면 아예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까지 우기니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뭐 그건 그렇고, 참고로 주 기철은 감리교가 아닌 장로교 목사였다는 점을 덧붙이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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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서양으로 넘어간다.
옛날에는 성경전서 책이 어지간한 사전이나 도록 연감 이상으로 정말 거대하고 부피가 컸다. 그레이트 성경만 거대했던 게 아니다.

이건 충분히 수긍이 가능한 일이다. 옛날에는 기계만 해도 요즘의 물건보다 기능과 성능이 뒤쳐지면서도 더 크고 무거웠다. 하물며 지금으로부터 몇백 년 전에 깨알같은 글자를 정교하게 찍는 인쇄술이 발달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지금 같은 얇디얇으면서 튼튼한 종이를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옛날에는 성경의 여백 곳곳에 온갖 삽화들이 많이 들어갔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그야말로 장인 정신이 깃든 예술 작품처럼 꾸민 셈이다. 오늘날 같은 경제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관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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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bible과 she bible 이런 얘기는 처음 듣는다. 킹 제임스 성경이 출간 당시에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케임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으로 갈려서 sin/sins 같은 극소수 미묘한 차이가 발생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있는데, 혹시 그걸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케임브리지 판이 맞음)

킹 제임스 성경 유일무오설을 공격하는 유치한 수법 중 하나는 이렇게 시기와 장소에 따른 KJV edition들의 파편화를 거론하면서 "그럼 도대체 어느 edition이 유일무오한 건가요? ㅋㅋㅋ"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답 내지 반박은 다 마련돼 있다.

KJV는 출간되는 과정에서 저런 파편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의 실수 때문에 vintage와 vinegar를 헷갈린 일명 '식초 성경', 그리고 not을 빼먹어 버려서 아예 "너는 간음할지니라"가 된 '사악한 성경'이 만들어져 나온 적도 있었다. 저 때는 컴퓨터가 없었으며, 인쇄는 여전히 노동 집약적인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번역자의 실수가 아니라 인쇄소 식자공의 실수가 들어갈 여지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룻 3:15의 경우, 심지어 NASV와 NIV처럼 non-KJV 역본들간에도 끝부분의 주어가(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이냐 보아스냐 차이가 있긴 하다.

이 외에 사진을 일일이 소개하지는 않지만..

북한 성경: "조선기독교도련맹중앙위원회 1983"라는 소속과 연대가 붙어 있었다. 문체는 현대어이고 공동번역 스타일이었다. 종교 쪽으로 에큐메니컬한 사람들이 대체로 정치 쪽으로도 에큐메니컬한 편이니.. 그래도 야훼가 아니라 여호와 표기이긴 했다.

에티오피아어 성경: 유니코드 문자표에서나 봤던 희한한 문자가 책의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걸 난생 처음 봤다. 마치 이과생들이 그리스 문자를 수식에서 기호 용도로만 실컷 봐 왔다가 그걸로 그리스어 자연어 텍스트를 써 놓은 걸 보고 놀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에티오피아 문자는 영역이 U+12?? ~ U+13??이어서 U+11??대인 한글 자모의 바로 다음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 문자를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듯하다.

필사 성경: 박물관에는 국내의 여러 신자들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그냥 읽는 것도 아니고, 손수 타이핑도 아니고.. 종이에다 펜으로 다 베껴 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정말 어지간한 근성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이것으로.. 본인은 2018년 개인 하계 휴가를 마무리 했다.
다시 말하지만 날씨 타이밍 하나는 완벽했다. 이런 날씨에 피서 휴가를 안 가면 도대체 언제 가겠는가?
다만, 2박 3일을 차와 텐트에만 의지하며 숙소를 따로 안 잡았는데, 그러기에는 밤에 너무 덥긴 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여파가 휴가를 마친 뒤에도 며칠간 계속되었으며, 직장에 출근해서까지 한동안 고생했다.

미리 말하는데, 내년 하계휴가로는 군인 없는 양구· 인제라 불리는 경북의 대표적인 오지들 "봉화-영양-울진"을 답사하고자 한다. 철도고 군사 이슈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계곡과 바다만 즐기고 올까 한다.
그 뒤 내후년은 남해 일대를 생각하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8/08/06 19:35 2018/08/06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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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3 (2018/7/24)

박물관 관람을 계속했다.
말 제대로 안 통하고 아무 생활 기반도 없던 억만 리 타지에 가서 3D 업종에 종사하며 억척같이 일하고 돈 모으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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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면 양반이지, 멕시코로 이민 간 사람들은 알로에인지 에네켄인지 손을 다치기 쉬운 더 이상하게 생긴 작물을 키우는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리고 멕시코 라인은 미국 라인과 달리 이민자가 막 많지도 않았으며, 후세들은 그냥 현지와 동화되면서 한국 정체성을 상실해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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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야.. 예전에 도산 공원에 갔을 때도 봤지만 그야말로 "애국이란 게 뭐 거창한 게 절대 아니다. 당신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하고 있습니까?"주의자였다.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신실해야 큰일을 맡을 수 있게 된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 이게 굉장히 성경적인 심상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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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KBS 해외동포상이란 게 있긴 했다.
서 남표 교수는 카이스트 총장 재임 시절의 행적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인 커리어 자체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미 1995년에 저런 데에도 뽑힌 적이 있고..
2002년에는 김 진우 교수가 뽑혔는데 이분은 언어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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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 대학교의 교명은 '인천+하와이'의 줄임말이다. 설립 배경에 국내의 타 대학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사연이 있다.

이민사 박물관을 관람한 뒤, 월미도에서의 마지막 코스로는 테마파크에서 놀이 기구를 타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별다른 예고나 안내 없이 정비를 이유로 테마파크가 휴관 상태였다. 그래서 놀이기구를 타 보지는 못했다. 그 대신 근처에 있던 등대를 찾아가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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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인천 상륙 작전 당일에 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한 등대는 팔미도라고 월미도보다 훨씬 더 작은 다른 무인도의 등대이다.
본인은 월미도 등대로 착각하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미국 여행 갔을 때 서부 UC 버클리와 동부 버클리 음대를 헷갈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월미도 관광을 마친 뒤, 본인은 동쪽으로 쭉쭉 관광을 시작했다.
영종도, 월미도는 모두 행정구역상 인천 중구이다. (신도와 장봉도는 인천 옹진군) 그 반면, 앞으로 경유하게 되는 곳들은 '미추홀구'이다.
미추홀? 완전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도대체 뭔가 싶었는데.. '남구'가 무려 2018년 7월부로 이름이 저렇게 바뀐 거라고 한다. 바뀐 지 한 달도 안 된 따끈한 새 이름이다.

처음에는 구가 다 동서남북 평범한 이름으로 붙기 시작했는데 인천도 도시의 외형이 바뀌면서 그 이름이 도시의 실질적인 방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됐다.
가령, 서울 남산은 오늘날 서울의 완전 중심부에 있을 뿐 남쪽 끝에 있는 산이 전혀 아니며, 동인천 역도 부평구에 소재하지도 않고 인천의 동부에 있는 역이 절대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남구라는 구 이름이 다른 역사적 근거가 있는 명칭을 사용하여 개명됐다고 한다.

이제 본인은 인하 공전을 찾아가서 대한민국 수준 원점, 교육용 보잉 727기를, 그리고 옆에 인하 대학교에서 우남호 여객기를 찾아가서 인증샷을 찍었다.
인하대는 캠퍼스 안의 차도가 온통 일방통행 위주로 만들어진 게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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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준원점은 설명을 해 놓은 안내판을 모두 촬영했다. 나도 지금까지 배경을 잘 몰랐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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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27은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레어템인 삼발기이며, 엔진이 주날개 아래에 달려 있지 않다.
이 기체는 1991년에 동체 착륙 사고를 겪고 나서는 비행 불가 판정을 받고 인하 공전에 교보재로 기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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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DC-3 여객기는 대한 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사(KNA)'에서 '우남호'라는 이름으로 1954년에 도입한 기체를 훗날 대한 항공이 인수한 것이다. 얘는 그로부터 15년 뒤인 1969년에 만기 퇴역하고 1974년에 인하 대학교로 기증되었다.
KNA는 DC-3 여객기 달랑 세 대를 운용했는데... (창랑호, 만송호, 우남호) 창랑은 납북 테러를 당했고 만송은 사고로 날려먹었기 때문에 유일하게 우남호만이 살아남아서 만기 퇴역했다. 이 때문에 KNA는 경영난과 빚에 허덕이게 되었고, 창업주가 자살하는 참극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와이 교포 1세들이 비행기를 타고 1955년에 모국을 방문한 것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항기의 태평양 횡단이었다고 한다. 교통수단이 배에서 비행기로 바뀐 것이다.
아까 전에 관람했던 이민사 박물관과 잘 연계되는 내용이다.

인하대 구경을 마친 뒤에는 여기서 동쪽으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또 다른 공원인 수봉 공원을 찾아갔다. 수봉산이라고 월미산과 비슷한 높이의 아담한 언덕에 자리잡아 있다.
얘는 언제 무슨 계기로 만들어진 공원인지 모르겠지만, 현충탑과 각종 전적비들이 자유 공원 만만찮게 여럿 있었으며 통일· 안보 전시관도 있었다. 산 중턱까지 차를 몰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일인 덕분에 한산하고 주차 걱정도 없어서 좋았다.

부산으로 치면 뭔가 보수산 공원과 비슷한 곳 같았다.
그래도 보수산은 4· 19니 민주 운동이니 하는 것을 기념하는 시설도 있는 반면, 수봉산에는 온통 주적 북한과 맞서 싸운 것에 대한 기념물만 있었다. 뭐, 보수산에도 대한해협 전승비가 있긴 하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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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봉 공원은 길의 토폴로지가 T자와 비슷했다. 세로줄 I 모양 경로는 자동차로 접근 가능하다. 그래서 가로줄과 만나는 끝까지 올라가면 그 교점에 한국 자유 총연맹이라는 우파 단체에서 운영하는 '인천광역시 통일관'이 있다. 여기가 자가용으로 다닐 수 있는 한계 지점이었다.

거기서 ─자 모양의 좌우로는 도보로만 진행할 수 있는데(차도는 공원 관리 차량 전용), 한쪽 끝으로 가면 광장과 함께 현충탑이 나오고, 다른 쪽 끝으로 가면 차도를 다리로 건넌 뒤에 인천 지구 전적비가 나왔다. 그 양 끝도 막힌 게 아니라 공원을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었다. 단지 거기는 자가용으로는 진입할 수 없을 뿐.

Posted by 사무엘

2018/08/04 08:32 2018/08/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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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2 (2018/7/23)

카페와 카페리, 장봉도 식당을 거치면서 폰과 노트북은 배터리를 꽉 채웠다. 다음 보급이 어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폰은 이 상태로 아예 꺼 버렸다.
고속 충전이 되는 전용 어댑터를 챙기지 않고 그냥 일반 USB 케이블만 챙긴 바람에 폰의 충전 속도가 발목을 잡았다. 이거 무슨 원주율을 arctan(x)의 x=0 부근 급수 전개로부터 유도된 왕창 수렴 느린 공식으로 구하는 것 같은(pi/4 = arctan(1) = 1 - 1/3 + 1/5 - 1/7 ...).. 그런 답답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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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도, 아니 삼목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저녁 7시 무렵이었다. 아직 해가 떠 있고 여전히 더운 것을 감안하면, 을왕리나 왕산 해수욕장으로 또 돌아가서 물놀이를 계속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러지는 않고, 곧장 인천대교를 건너서 본토로 돌아왔다.

이제 휴가의 컨셉이 피서에서 인천 시내 관광으로 바뀌었으니 다음 목적지인 인천 자유 공원을 찾아갔다. 인천대교도 구간 단속 때문에 과속을 거의 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폭주는 비트코인과도 같아서 사패산 터널이든, 강남 순환로든 무엇이든 어떤 도로가 처음 생겨서 단속이 강화되기 전에 일찍, 미리 해야 한다는 걸 느꼈다.

자유 공원은 고맙게도 전면 무료이고 혼잡하지도 않은 공영 주차장이 근처에 있어서 주차 걱정이 전혀 없었다.
공원 한구석의 으슥한 모퉁이에 텐트를 치고 거기서 잠들었는데, 밤에도 시원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너무 더워서 웃통 벗고 물에 적신 수건을 등에 걸쳐야 했다. 아침에 시원한 바닷물과 함께 신선놀음을 했던 경험이 무색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휴가 날짜 자체는 이렇게 왕창 더운 날에 절묘하게 잘 잡았다. 기껏 휴가를 떠났는데 비가 쏟아진 것보다는 나으니 말이다. 또한 텐트 안에서 노숙하는 동안에도 코딩을 계속하여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버그를 두 개나 잡았다.

3. 셋째 날: 월미도와 인천 시내 명소 관광

해가 뜨자마자 자유 공원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이 공원은 '응봉산'이라고 불리는 최대 높이 70m 남짓한 언덕에 자리잡아 있는데, 이른 새벽부터 산책과 운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라고 하고, 산책과 운동과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아주 잘 꾸며져 있었다.
또한 인천 자유 공원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매카써 장군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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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은인인 더글러스 맥아더(최종 계급은.. 오성장군 원수!). 이 동상은 무려 1957년에 세워졌다고 하니, 지금은 그로부터 무려 60년이 훌쩍 넘었다. 내가 이 명물을 직접 보러 물놀이도 동해 대신 황해를 택하면서 인천 러쉬를 갔다.
시간대의 한계(역광...) 때문에 그리 좋은 구도와 색감으로 사진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리고 위에 새는 날아가거나 내려올 생각을 안 해서 사진에도 그대로 찍혔다.

맥아더는 부친부터가 별 단 장군이었고, 거기에 개인 노력을 가미하여 1,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한 최연소 장군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6· 25 사변 때 그가 입안했던 인천 상륙 작전은 전쟁사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천재적인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전선이 교착된 채로 휴전을 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 않는가?

다만, 맥아더는 상륙 작전의 대성공을 계기로 좀 자만에 빠졌는지, 이후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는 오판을 거듭하며 수세에 몰렸다. 수틀리면 또 핵 터뜨리지 같은 생각으로 트루먼 대통령과도 대립하다가 예편하게 된 것 역시 아쉬운 점이다.

맥아더는 컨셉이었는지 파이프 담배를 무는 걸 좋아했으며, 공식 석상에서는 반드시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모자를 벗어서 정수리가 드러난 모습은 히로히토 일왕이라든가 이 승만 할배와 함께 찍은 사진 같은 일부 소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카리스마 넘치고 콧대 높고 기세등등 오만방자(?)해서 아무하고나 서글서글 친하게 지내지 않고 적도 많은 타입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이 승만 대통령이 이런 맥아더와 완전 사이 좋은 절친 관계였다. 아무나.. 그것도 미국인도 아닌 가난한 듣보잡 신흥 국가 사람이 맥아더 같은 깐깐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둘 다 비슷한 고집쟁이 괴짜 꼴통인 한편으로 엄청난 천재형이다 보니,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아무튼, 이 사람 동상의 존재를 불편해하는 악질 빨갱이들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인간 쓰레기들이다. 사회 정의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원래는 놈들을 대한민국 국적 박탈하고 외국으로 추방해서 한국 땅 영원히 못 밟게 만들든가, 정신병원· 수용소 내지 사형장으로 보내야 된다. 그리하지 않고 정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자비롭고 관대하게 처분한다 해도 이런 놈들이 최소한 교육자, 법조인, 정치인, 군· 경 공무원 같은 직업은 네버, 절대, 결코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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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 인천 자유 공원에는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탑(1882-1982)과 6· 25 당시의 인천 학도 의용대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먼 옛날에는 심지어 자유의 여신상의 축소판 레플리카까지 놓여 있었다고 한다. 똑같이 자유, 자유 하니까 유사성이 있어서 건립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맥아더와는 관계가 없으며 다른 논란의 여지도 많았기 때문에 20년 남짓 만에 철거되었다(1976-1997).

이렇게 자유 공원의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더 서쪽에 있는 월미도를 찾아갔다.
월미도는 한때 '월미산'이라는 해발 108m 남짓한 언덕으로 구성된 섬이었다. 하지만 일제 시대 때 간척을 통해 육지와 연결되어서 사전적인 의미의 섬은 아니게 되었다. 그때는 부유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관광 내지 휴양 시설이 들어섰으며, 심지어 바닷가에 '월미 해수욕장'도 들어섰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해수욕장 피서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자가용 승용차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철도가 등장해서 여가를 위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해진 뒤부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에 해수욕장이라는 것이 도입된 것도 일제 시대 때이다. (1913년의 부산 송도 해수욕장이 최초)
오늘날 인천은 그 시절과 달리, 본토에는 해수욕장이 없다. 본토에서 떨어진 섬으로 가야 간척되지 않은 갯벌이 있고 물도 그나마 더 맑은 해수욕장이 나온다는 것이 부산과의 차이점이다.

해방 후에는 월미도 일대는 각종 공장, 항만, 군사 시설이 잔뜩 들어서면서 민간인 접근 금지 구역이 되었다. 심지어 해군 제2함대까지 주둔해서 '수방사의 해군 버전' 역할을 했으며, 연안뿐만 아니라 월미산 전체도 입산 금지였다. 그러다가 제2함대는 평택으로 이전하고 2001년이 돼서야 월미산은 공원으로 탈바꿈하여 개방되었다고 한다.
다만, 월미도 말고 그 남쪽에 있는 일명 소월미도는 지금도 인천 해양 경비 안전서, 인천 해상 교통 관제 센터 등..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코렁 시설들이 가득한 보안 통제 구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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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안 그래도 너무 더워서 등산을 못 한 지 몇 달째 됐는데, 월미산을 정상까지 올라 봤다.
둘레길은 저렇게 큼직하게 잘 닦여 있고, 거기서 계단을 오르면 정상 쪽으로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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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면 먼저 큼직한 광장에 도달하는데, 거기서 (1) 진짜 산 정상, (2) 구식 대포가 놓인 옛 성곽, (3) 전망대 타워를 골라서 갈 수 있었다. 그 세 곳의 모습은 위의 사진으로 보는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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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은 대략 이러하다.
월미산을 다녀온 뒤엔 산기슭에 있는 한국 이민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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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수교 이래로 단군의 후손들의 첫 이민이라 할 수 있는 1900년대 초의 하와이 이민, 멕시코-쿠바 이민 등.. 가끔 TV 다큐멘터리에서나 봤을 법한 근현대사 이야기들을 시기와 지역별로 일목요연하게 접할 수 있어서 아주 유익했다. 부산에서 봤던 '부산 근대 역사관'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8/08/01 19:31 2018/08/0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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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여행기: PART 1 (2018/7/22)

본인은 재작년과 작년(2017) 여름에 강원도를 다녀왔다.
재작년에는 영동 고속도로 이북으로 안보 관광 위주로, 작년에 그 이남으로 철도 답사 위주로 나눠서 바다와 산을 즐기며 힐링 잘 하고 왔다.

그 뒤 본인은 올해의 하계휴가 때는 인천을 다녀왔다. 올해의 피서 장소는 작년 말 겨울에 미리 정했으며, 심지어 내년 여름에 갈 곳도 정해 놨다.
비록 바다의 퀄리티만 따지자면 황해가 동해보다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반도에서 내륙에 제일 깊숙이 붙어 있고 서울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바닷가에 한 번쯤 가 보는 것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인천 시내 관광도 계획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반공 우파 시민으로서 아직 맥아더 장군 동상 구경을 못 해 봤다. 인천 상륙 작전 현장은 강원도 첩첩산중 오지에 있는 어지간한 안보 박물관이나 전적비 이상으로 역사 교육에 유익할 것이다.
강원도의 동부 전선 고지전은 최소한 1951년과 그 이후에 벌어진 전투인 반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개전 초기인 1950년 9월에 벌어진 사건이니 시기가 서로 다르고 분위기도 다르다.

이런 여러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광과 물놀이를 위해서 영종도를, 그것도 대중교통 대신 자차를 몰고 방문하게 되었다.
원래는 시기를 지금 7월 말 내지 8월 초쯤으로 생각했지만, 지난 7월 중· 하순이 날씨가 어떠했던가? 1994년을 능가하는 살인적인 무더위가 전국을 강타했던지라, 결국 시기를 좀 더 앞당겨서 휴가를 떠났다. 일요일 교회 예배를 마친 뒤 오후부터 화요일까지로 일정을 잡았다.

1. 첫째 날: 비행기 촬영과 저녁 물놀이, 해변에서 외박

이번 휴가의 첫 목적지는 인천 공항 전망대였다. 하지만 전망대 자체는 너무 일찍(무려 오후 4시!) 문을 닫아서 운영하지 않는 상태였으며, 언덕도 그렇게 막 높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포 공항으로 치면 오쇠 삼거리 정도에 해당하는 공항 남쪽 착륙 경로를 추가로 찾아가서 거기서도 저공 비행 착륙 중인 비행기들을 근접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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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가는 길에 공항 고속도로에서 원없이 밟고 싶었지만 제대로 그러지 못했다. 과속 단속 카메라가 악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많았던 데다(구간 단속 포함), 1차로의 저속 차량까지 피하다 보니 끽해야 최대 140km/h 남짓밖에는 밟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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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는 대한 항공 로고가, 뒤에는 스카이팀 로고가 그려져 있는 여객기이다. 기종은 보잉 777.
이게 본인이 찍은 비행기 사진 중에 비행기가 제일 크게 잘 나온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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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었는데, 여객기들은 날개 아래에 마치 자동차로 치면 번호판처럼 무선 통신 호출 부호가 그려져 있는가 보다. HL 7783, HL 8067처럼 말이다.
비행기가 아예 땅에 있거나 반대로 너무 높게 떠 버리면 날개 아래를 볼 수가 없을 텐데, 착륙을 앞두고 저공 비행 중인 모습을 가까이서 관찰한 덕분에 이런 것도 볼 수 있었다.

공항 근처에서 비행기 출사를 그럭저럭 한 뒤, 이제 공항 남서쪽의 용유도 구간으로 들어갔다.
영종도와 용유도의 분위기 차이는 마치 제주도 북부 시내와 남부의 서귀포시, 그리고 경부 고속도로 동쪽의 분당과 서쪽의 산기슭 주택가들 사이의 차이와 비슷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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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마주친 마시안과 용유 해수욕장은, 그 당시 시간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6시~7시쯤) 온통 갯벌밖에 없었고, 사람도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을왕리 해수욕장은 입구부터가 사람과 차들로 북적대고 온갖 민박과 식당이 들어서 있어서 제대로 돌아가는 중인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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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차를 세우자마자 바닷물에 들어가서 30분 정도 놀았다. 이제 좀 무더위를 날려 버리고 살 것 같았다. "해수욕도 식후경"이 아니라, 반대로 해수욕부터 한 뒤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물회 냠냠..
식사까지 마치고 나니 밤 9시 무렵이었다. 이제 모래밭에 텐트를 치고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여기는 동해가 아니라 황해이고, 더구나 썰물이어서 그런지 파도와 바람이 없다시피했다. 바다가 아니라 그냥 커다란 호수에 온 것 같았다. 파도가 역동적으로 휘몰아치는 곳을 원한다면 멀어도 동해로 가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도 물은 그렇게 더럽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충분히 해수욕을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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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과 새벽에도 막 시원한 건 아니어서 텐트 안에서는 이불 없이 옷통도 벗고 잤다. 뭐 그래도 열대야에 시달리는 서울 시내보다는 여기가 더 시원했다. 바다에 또 뛰어 들어가고 싶었지만 텐트 안을 바닷물과 모래로 더럽히고 싶지는 않으니 여기서 제동이 걸렸다.
밤에는 주변에서 온통 폭죽을 터뜨려서 시끄러웠다. 하지만 본인은 워낙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는 데 지장이 없었다.

2. 둘째 날: 한낮 물놀이, 장봉도

새벽 5시 반쯤 눈을 뜨니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한밤중엔 물이 들어오는 것 같았는데 이때는 다시 물이 빠져 있었다.
간밤에 텐트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실컷 했기 때문에 아침에는 배터리가 남아 있지 않았으며, 8시 무렵부터는 이미 햇볕의 열기가 느껴지면서 텐트 안에서 지내기 힘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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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할 것이 없으니 이때부터 오전 내내 3시간이 넘게 물놀이를 즐겼다. 평일 아침이어서 그런지 어제 저녁보다는 바다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빠져나갔던 물도 다시 들어오고 있었다. 늘 드는 생각이지만 밀물과 썰물은 마치 교류 전기를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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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중일 때는 물이 차가운 것과 별개로 폭염 자체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물 밖으로 나오니 차와 폰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져 있고, 신체도 물기가 마르자마자 곧장 따가운 뙤약볕이 느껴졌다.
그만큼 바닷물이 지금까지 더위를 잊게 하는 데 혁혁한 기여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물은 더위는 막아도 자외선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 =_=;;; 옷과 신발이 막아 주는 것은 물과 정반대이다.
덕분에 얼굴과 팔은 자외선 차단제를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더 검어졌으며(tanning), 아예 무방비이던 발등과 목덜미 등의 노출 부위는 벌겋게 타서(sunburn..) 내가 샌달을 신었고 U자형으로 파인 셔츠를 입었다는 것을 표시해 주었다. =_=;;

12시가 넘어서야 아쉬움을 뒤로 하고 텐트를 걷고 짐을 쌌다. 그리고 근처 카페에 들러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2시간 남짓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고, 물을 보충하고 옷 정리 등 여러 작업을 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개발 작업도 했다. 물놀이를 오래 해서 그런지 슬슬 피곤하고 졸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후에는 차를 몰고 영종· 용유도의 북부를 돌아다니면서 어제와는 달리 이륙하는 비행기들을 구경했다. 그 뒤 삼목 선착장으로 가서 장봉도로 가는 카페리를 탔다(신도 경유). 여기는 인천 공항을 만드느라 간척을 하기 전에는 삼목도라는 또 다른 섬이었다고 한다.
영종도 근처의 신도는 아주 가깝기 때문에 배 탄 지 10분이면 도착하고, 거기를 거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장봉도까지는 삼목에서 총 3~40분이 걸린다. 차를 실을 수도 있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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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바다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까 이제 좀 해수욕장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바다 바람이 느껴졌다.
배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고 콘센트도 쓸 수 있어서 아주 좋았다. 밤에 숙소를 따로 안 잡으니 다른 건 몰라도 폰과 노트북의 충전 문제가 골칫거리였다. 전적으로 식당과 카페에서만 보급을 받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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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봉도에서는 주변의 바위섬과 해변을 구경했으며, 오늘의 특식 겸 유일한 단백질 섭취 명목으로 2~3인분 n만원짜리 매운탕을 혼자서 다 먹어 치웠다.
여기도 해수욕장(옹암)이 있다. 영종· 용유도보다 더 깊숙한 오지로 갔으니 더 한산하고 더 맑은 해변을 구경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이 시간대엔 갯벌만 펼쳐져 있고 제대로 물놀이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어서 허탕 쳤다. 뭐, 어차피 본인 역시 여벌옷 등 물놀이 채비를 하지 않은 채로(나머지 짐은 차에다 두고) 배를 타 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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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7/30 08:36 2018/07/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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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 전망대와 행주산성

본인은 작년에 강화도에 나들이를 다녀와서 이 블로그에다가도 여행기를 올린 바 있다.
그때 본인은 고인돌이나 마니산, 고려 행궁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전망대도 보고 왔다. 남한과 북한이 첩첩산중의 육지가 아니라 거대한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여기는 DMZ 같은 건 없으며, 강 건너편에는 의외로 북한의 마을이 곧바로 보이고(선전용으로 일부러 때깔 곱게 꾸며 놓은 것이지만..) 군인이 아닌 평범한 주민들도 보인다. 이런 광경은 한반도의 서부인 한강 하구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본인은 이렇게 강 건너편의 북한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강화도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도를 찾아보니 '오두산 통일 전망대'라는 게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오두산은 높이가 100m 남짓한 낮은 산이며 백제 시대에 '오두산성'이라는 성곽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가 임진강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서 경관이 아주 좋으며, 자연스럽게 강 건너편의 북한 땅을 보기에도 좋다. 게다가 그 어느 전망대보다도 서울과 가까이 있고 자유로 도로의 바로 옆이기까지 하니 접근성도 훌륭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92년 9월, 노 태우 정권 시절에 여기에 통일 전망대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자유로와 거의 동시에 완공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서 차를 몰고 여기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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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을 올라서 아래의 자유로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반대로 자유로를 저렇게 달리는 도중에도 이 전망대가 차창 밖으로 보인다.
자가용이 없더라도 셔틀버스가 평지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전망대를 찾아갈 수 있다. 자세한 건 해당 기관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근성의 자덕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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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의 입구 모습이다. 여기는 위도가 가장 높고 바다를 옆에 낀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정반대이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오두산 전망대는 북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전망대들과는 달리 "민통선 안에 있지 않다!" 여기 주변의 지형과 군사분계선의 특이한 선형 덕분에 가능한 전국 유일의 예외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이 전망대는 드나들기 위해서 신분증을 까고 차량 번호를 적고 출입 허가증을 받는 식의 난리를 칠 필요가 없다.

군부대 내부에 있는 전망대들은 북측 방면 사진 촬영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엄격한 통제가 걸리는 편이지만, 이 전망대는 그런 게 전혀 없이 아주 관대한 분위기였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전망대 주변에 일제의 군사 시설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여기 일대는 국내의 인터넷 지도 사이트들이 항공 사진을 제공하지 않는 엄연한 전방 보안 지역이다.

전망대 안에는 실향민들을 위해 북한의 주요 도시들 내부를 3D 그래픽으로 재현해 놓은 동영상 상영관이 있고, 북한의 도발 역사와 통일의 필요성, 남과 북이 추구하는 통일 이념 같은 원론적인 얘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남한이 서부 지방도 땅을 좀 더 많이, 송악산 정도까지만 수복했으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고려 시대 유적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경의선 전철이 개성까지도 뚫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 오두산 전망대 같은 전망대도 이곳이 아니라 송악산 정도로 더 북상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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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주된 풍경은 이것이다.
저~~멀리 보이는 땅은 북한 개풍군이다.
그리고 왼쪽 중간에 있는 땅은 남한 김포시 하성면이다. 북한 땅과 남한 땅 사이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과 합류한 한강으로, 반쯤 이미 서해 바다이다.
김포시 하성면과 내가 있는 곳 사이에 있는 물길은 한강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이다. 지리 구도가 대략 이렇게 된다. 이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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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안에 들어가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와 함께 잘 설명되어 있다. 한강 하구 정도로 가면 강폭이 거의 2km에 달한다.
여기도 나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셈인데, 남양주 두물머리나 정선 아우라지와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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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망대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북한의 마을과 주민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망원경으로 봐도 매우 자그마해서 식별이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논밭에서 농삿일을 하는 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여기 주변에는 선전 구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두산 전망대가 또 아주 좋은 건 여느 전망대들과 달리 망원경이 무료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망원경을 비교적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면서 망원경으로 비치는 상을 카메라로 찍는 시도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원하는 각도를 맞추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색깔도 뿌옇긴 하지만, 그래도 사물 자체는 카메라의 줌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찍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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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남한 쪽(김포 하성면)을 보고 찍은 모습이다. 흐리던 하늘이 맑고 파래져서 경치 구경하기에 적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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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폭(=거리)이 좀 압박스럽긴 해도 수심이 막 깊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밀물 썰물까지도 있다는데.. 누가 미친척 하고 근성으로 헤엄쳐서 월북이나 탈북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긴,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도 했다.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는 부산 낙동강 하구와는 달리, 군사적으로 완전히 봉인되어 버린 한강 하구의 안습한 현실을 이렇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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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에서 남한 내륙 쪽을 둘러보니, 맞은편 언덕 위에는 웬 거대한 한옥 건물이 보였다. 저건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고려 통일 대전'이라고 고려의 종묘뻘 되는 행사를 치르는 '고려 역사 선양회'라는 단체 소속의 사유지라고 한다. 헐... 저기서 1년에 한 번 '대제'를 지낸다고..

이렇게 본인은 오두산 통일 전망대 구경을 잘 마쳤다. 이런 걸 보면 맨날 뉴스에서 핵 만들고 미사일 쏘는 그 또라이 북괴라는 나라가 내가 사는 곳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실존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파주에서 데이트 코스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헤이리 예술 마을, 프로방스 마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고 북한과도 불과 4~5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방이라는 것에 놀랐다. 거기도 보안 문제 때문에 국내 인터넷 지도에서 항공 사진이 제공도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좀 정치적인 이슈 얘기를 하자면, 본인은 인제 와서 남북이 뭔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건 거의 '영어 공용어화'만큼이나 가능하지 않으며 타이밍이 물 건너 갔다고 상당히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북괴 체제를 붕괴시킬 기회를 다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통일만 되면 한국이 인구가 7500만이 되고 탄탄한 내수 시장을 갖춘 동북아시아 강국이 되고 어쩌구 희망적으로 나불거리는 건, 북한 주민들이 굶주린 약골· 마약 중독자가 아니고 남조선 인민들에 준하는 체력과 생산성이 있으며, 김씨 정권에 세뇌되지 않은 정상적인 정치관 종교관 국가관을 갖고 있을 때에나 성립하는 얘기이다. 지금 그 전제조건이 성립하는가? 전혀, 네버..

그러니 지금은 정말 통일을 외칠 때가 아니라, 통일이 안 되고 설령 북한 땅을 다른 세력이 다스려도 좋으니 전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소말리아 아이티 캄보디아보다도 못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고, 북괴 정권을 고립하고 압박시키고 무너뜨리는 일에 신경써야 할 때이다. 지금은 우리가 힘이 충분치 못해서 휴전선 전방에서 '북괴의 위협'만 제거하고 예방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걸 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영구분단만 유지해도 중간은 간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북괴랑 대화하자네 퍼주자네 하는 놈들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다 쳐죽이고 씨를 말려야 된다. 이놈들은 일제 시대 친일파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나쁜 악마들이기 때문이다. 악마를 상대로는 전기톱이 훌륭한 대화수단이거늘 무슨 달러 현찰이 대화수단이란 말인가?
꼭 이런 애들이 북괴를 좋게 말할 수는 없으니 오로지 남한만 정체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며, 맨날 민족 민족 들먹이지만 동족이 자유를 빼앗긴 굶주린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두산 전망대 다음으로 본인은 동일하게 자유로와 아주 가까이 있는 행주산성을 덤으로 들렀다. 언덕의 높이가 서로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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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이 자리잡았던 덕양산은 서울 봉화산만큼이나 산맥 없이 혼자 우뚝 솟은 독립구릉이다. 강 쪽으로는 거의 절벽이고 육지에서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요새화에 유리하고 군사적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언덕의 특성상 경사의 압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낮기 때문에 성인 남자의 체력 기준으로는 슬금슬금 오르면 정말 금방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예전에 서울 응봉산을 오르던 정도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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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도달하니 역시 자유로+강변북로와 한강, 마곡철교(공항 철도), 방화대교 등의 다리가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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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정자도 있었다.
행주산성 안에 있는 각종 건물들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들 후대에 새로 건설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간판이 '덕양정', '대첩비각', '충의정' 등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로 적혀 있었다.

행주대첩(권 율)은 진주성 대첩(김 시민), 한산도 대첩(이 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이 순신은 임팩트가 독보적으로 너무 크고, 진주성은 그래도 2차 전투 때는 함락되어 버리기라도 했다만, 행주대첩에 대해서는 본인이 지금까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주산성 안에는 적당히 나무 아래에서 쉴 공간이 많이 있었으며, 그 당시 전투를 기리는 기념관도 드문드문 자리잡아 있어서 휴식과 힐링용으로 좋았다. 단, 본인의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여기는 돌로 쌓은 성벽 같은 건 없었다. 토성 비스무리한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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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본인은 이 정도로 서울 서부까지 온 김에 행주대교를 건넜으며, 인천 계양 역 근처의 경인 아라뱃길 공원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는 정작 배의 통행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오히려 양 옆 둑길이 훌륭한 자전거 라이딩 코스가 되었을 뿐이다. =_=;; 이러려고 괜히 운하를 팠나 자괴감이 충분히 들 만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7 08:29 2018/01/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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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9월의 짤막한 활동 일지

1. 뚝섬 한강 공원에서의 외박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밤엔, 아예 돗자리와 노트북 PC, 밤참 간식거리를 몽땅 싸들고 자전거를 몰고 여기서 외박을 했다. 여기는 아무래도 집 근처보다는 확실히 더 시원했고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것도 지금 다시 회상해 보니 재미있는 추억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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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가 아니라 풀밭에다 아예 텐트를 친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1인용 작은 텐트라도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너무 작은 건 침낭이나 영현빽(..!!) 같은 느낌도 들긴 한다만.. 하긴, 잠도 생물학적으로는 일시적인 죽음이긴 하지.

2. 경기화학선의 흔적 추가 답사

본인은 2년 전에 오류동 역에서 분기해 나가는 전설의 지선 철도이던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뒤 근래에는 거기보다 더 남부인 부천 옥길동 일대에서 같은 선로가 이어지는 곳을 추가로 답사했다. (☞ 예전 글) 거기에 일종의 선로 분기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선로는 진짜 경기화학 공장 내부의 역(명목상)으로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시흥시 방면으로 10여 km 남짓 더 경기 자동차 과학 고등학교 근처까지 내려가서는 군부대에 도달했다. (제3 군수 지원 사령부 소속의 모 부대임)
그리고 이 분기점 일대는 마치 그린벨트처럼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는 곳이며, 이런 기막힌 위치에 '은빛 전원 교회'라는 예배당도 있었다.

본인은 이런 지리 여건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여기도 싹 다 개발되고 아파트가 지어질 거라는 소리에 하루 날잡아서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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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일단 은빛 전원 교회부터가 건물이 통째로 흔적도 없이 싹 철거되어 사라져 있었다. 몇 달쯤 전의 일이고 이 교회 예배당은 딴 데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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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으로 경기화학 공장 공터의 화물 하역장인 곳에도 그런 거 없다. 공장 방면 선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도로를 만들려는지 터가 닦이고 있었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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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군부대 방면 선로와 공장 방면 선로가 분기하는 지점이다. 인터넷 지도 로드뷰 내지, 이곳을 나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 기록과 대비해 봐도, 선로 상태는 더 안 좋아졌으며 잡초는 더욱 무성해져 있었다. 오른쪽이 공장 방면인데, 선로가 저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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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군부대 방면으로 내려가는 선로도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 이상 더 접근을 사실상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또 선로의 흔적을 추적해야 한다.
여기는 그래도 간간이 군용 화물을 실은 열차가 오간다고도 들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열차가 다닐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수인선 폐선 부지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이런 상태의 선로를 볼 수 있는 나날도 얼마 안 남았고 조만간 다 없어질 것 같다.

재작년에는 본인은 이천에 가서 수려선 오천 역 역사로 쓰였던 옛 폐건물을 답사하고 촬영하고 오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건물 역시 주변 지역의 재개발로 인해 철거하네 마네 하던 상황이었는데, 내가 다녀간 뒤 거의 정확히 한 달 뒤에 실제로 철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화학선 분기점 주변은 내가 한 발 늦었다. better late than never 차원에서 지금 같은 사진을 건진 거라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만, 상태가 더 좋던 시절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3. 도산 공원· 도산 안 창호 기념관

서울 강북에는 지리학자 김 정호를 기리는 명칭인 '고산자로'라는 도로가 있다. 그런데 강남 압구정 일대에는 '도산대로'라는 도로도 있는 것을 언젠가 버스 차창 밖으로 어렴풋이 봤다.
도산? 검색해 보니 안 창호의 호를 가리키는 게 맞았다. 게다가 이분의 묘지와 기념관까지 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건 신사동 가로수길에 비해 굉장히 인지도가 없고 너무 생소하게 들렸다.

이런 곳이 있다는 제보를 입수한 본인은 도산 공원을 다녀왔다. 하긴, 근처의 전철역들과는 1km 가까이 골고루 어설프게 멀리 떨어져 있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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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는 순국 후에 처음에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박통이 무슨 필이 꽂혔는지 안 창호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와 승격을 지시했으며, 1971년에는 이 부지에 기념관과 근린공원의 건립을 지시하고 묘지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안 창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며, 미국에도 이 사람을 기리는 이름이 붙은 도로 내지 건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는 안 창호가 실제로 활동하고 지낸 곳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남 금싸라기 땅을 당당히 점유하고 있는 공원과 기념관이 됐다. 시설이 완공되고 개장한 때는 1973년. 건설 당시에는 여기 주변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이었다.
안 창호 기념관은 1988년에 더 남쪽에 개장한 윤 봉길 의사 기념관보다도 건립 시기가 훨씬 더 이르다. 하긴, 윤 의사 기념관 역시 당사자의 고향이나 거처와는 무관한 곳에 있긴 하다.

나중에 이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여행기가 올라오겠지만, 본인은 다산 정 약용 선생의 묘지와 기념관도 다녀왔다. 왠지 안 창호와 비슷한 성향의 인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건 당사자의 출생지인 물 좋은 남양주 두물머리 시골 마을에 있기 때문에 부지가 훨씬 더 넓으며, 반쯤 강변 유원지 + 테마파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어떤 인물을 기리는 공간을 이렇게 교외에 거창하게 만들지, 아니면 소박하지만 접근하기 아주 편한 인서울에 만들지.. 이건 제각기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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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은 이렇게 온통 나무들로 울창해서 직사광선이 바로 내리쬐는 곳이 거의 없었다. 중간 중간 운동 기구와 의자, 정자도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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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중간에는 안 창호 선생의 동상도 커다랗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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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안 창호는 사상 세계가 굉장히 심오했으며, 남 탓 사회 탓 정치인 탓 외세 탓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은 가장 먼저 나 자신 개인에게서"를 통한 의식 개조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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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 기념관은 한 층의 넓은 방 한 칸에 이런 분위기로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정도였다. 정 약용 기념관보다는 훨씬 더 조촐하다. 이분에 대해서는 보통 콧수염 난 미중년 아저씨의 모습으로만 기억하는데, 생애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으로 여겨지는 1937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사진에서는 수염이 더부룩하고 젊은 시절보다 다소 초췌해져 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는 김 구로 치면 '나의 소원'과 같은 급의 발언인데.. 안 창호는 같은 말을 그래도 훨씬 더 실천주의적으로 멋있게 했다.
또한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했으니, 아마 고전 10:31을 염두에 두고 저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vs 대한 독립을 위해서..)

이 정도 구경을 했다.

4. 우이 경전철

그리고 지난 2017년 9월 2일엔.. 드디어 서울에서도 경전철 시대가 개막됐다.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서울 시내에, 그것도 서울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그 낡은 신설동 역을 기점으로 신분당선처럼 전방이 보이는 무인 운전 전철이 새로 개통하다니 느낌이 대단히 새롭다. 1974년에 최초로 생긴 역과 2017년에 새로 생긴 역이 이렇게 한데 연결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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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역들의 건설 시기가 너무 차이가 나는 만큼, 분당선 왕십리 역은 아무래도 북쪽으로 더 이어질 가능성이 없으며, 우이 경전철 신설동 역은 남쪽으로 더 내려갈 가능성이 없다. 신설동에서 경전철과 2호선 성수 지선 사이의 환승은 내가 직접 해 보니 굉장한 막장 환승인 것을 감안해야겠다.

열차의 구동음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형 전동차와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 다만, 차량 편성은 듣던 대로 겨우 2량이다. 승강장이 정말 짧긴 하더라.
인구 수에 비해 전철 수가 너무 부족하던(4호선이 유일) 성북구 일대가 이 전철의 혜택을 많이 입겠다. 또한 130번 같은 시내버스가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겠다.

도봉산에 이어 북한산도 궤도 교통수단으로 가는 날이 오다니 감개무량하다. 산으로 가는 전철답게 노선색도 산뜻한 연두색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25 08:37 2017/09/2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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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전 역이다. 얘는 무슨 등록문화재처럼 작정하고 옛날역 스타일로 꾸며 놓고 보존을 하고 있었다.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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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학교 건물도 목재로 된 문이나 창틀에 저렇게 에메랄드 도색을 한 게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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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선은 중간에 저런 터널을 통과하는 구간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본인은 차량으로 동일 구간을 방문한 뒤 그 터널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도로의 양 옆에는 저렇게 철길과 강이 지난다. 2006년에 찍었던 옛날 사진과 비교해 보면, 그때는 강 쪽의 가드레일이 좀 연약한(?) 평범한 가드레일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중앙분리대처럼 견고한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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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와 철길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었던 덕분에 여기서는 잠시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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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로는 그냥 한 정거장 거리이지만, 동일 구간을 자동차로 지나기 위해서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정선선 선로를 이렇게 내려다보는 풍경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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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평 역은 시골 마을에 들어가서 뒤쪽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냥 문이 굳게 닫힌 채 휴업 상태였다.
그래도 코레일체의 '맞이방' 간판도 있는 걸 보니 완전히 버림받은 신세는 아닌 것 같다.

정선 역은 그나마 정선 시내에 자리잡고 있고, 아우라지와 더불어 승무원이 상주하는 역이기 때문에 사진 첨부는 생략한다.
그리고 별어곡 역은 유일하게 지방도 길가에 바로 놓여 있긴 하던데, 자그마한 억새 박물관으로 탈바꿈했고 본인의 방문 당시에는 역시 폐쇄돼 있었다. 역시 사진 첨부는 생략한다.

뭐 이렇게 정선선의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민둥산 역이 아닌 함백선 구간으로 달려갔다. 정선군을 나름 북쪽에서 남쪽으로 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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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무슨 창자처럼 꼬불꼬불 배배 뒤틀려 있다. 산을 하나 넘느라 경사가 정말 가파르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 일대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태백선)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급경사가 펼쳐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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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면 저렇고 실제로 주변 풍경을 보면 이런 곳이었다~! portrait와 landscape 구도로 각각 한 장씩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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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는 비가 와서 강과 개울이 흙색으로 변한 대신, 그 다음날 가을 같은 파란 하늘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뭐, 강원도뿐만 아니라 서울도 모처럼 하늘이 파랗고 좋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 강원도도 뭔가 알프스 산맥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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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과 함백선이 합류하는 조동 역은 애초부터 여객 취급을 하지 않는 신호장 격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접근하기 힘든 오지에 있었다. 언덕을 한참을 올라가서 무슨 절이나 암자가 있을 법한 곳에 철도역이 떡 놓여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선로가 놓인 고가 아래에도 말발굽 모양의 명백한 단선 철도용 터널이 있었다. 그건 태백선과 함백선이 지금처럼 연결되기 전에 놓였던 옛 선로의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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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 역에서 분기하는 태백선과 함백선의 선형 구도를 보면, 태백선은 시종일관 쭉쭉 높게 올라간다. 그러나 함백선은 처음에는 고도가 낮다가 나중에 똬리굴 부분에서 고도가 올라가는 편이다.
그래서 함백선에 있는 함백 역은 아까 정선선의 별어곡 역과 마찬가지로 길가에서 쉽게 접근 가능한 곳에 있었다. 물론 여객 취급을 하지는 않으며, 이 역도 그냥 등록문화재처럼 보존만 해 놓은 것이다.

참고로 오리지널이 아님. 2006년에 철거됐다가 주민들의 요구로 레플리카를 재건해서 복원한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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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봐 왔던 조동철교 라멘교 성지에 본인도 드디어 도달했다.
여기 일대를 스스로 답사해 보니까 지리 구조가 어떻고 주변 지형이 어떤 형태로 돼 있는지 감이 잡혔다. 정말 유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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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 역 부근에서 분기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태백선과 함백선 선로이다. 멀리 작게 보이는 선로가 태백선이다.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을 그럭저럭 마쳤다. 삼척 바다에서 계획했던 것만치 오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일정이 당겨졌다.
강원랜드라든가 과거의 스위치백 선로 구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했지만, 체력과 보급, 도로 정체 등을 감안하여 거기까지 가 보지는 않고 그냥 돌아왔다.

정선에서 영월을 거쳐 제천까지 가는 구간은 철도로 치면 태백선에 대응할 텐데, 비록 고속도로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국도가 잘 닦여 있었다.
거기서 중앙 고속도로(55)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간 뒤, 강원도로 갈 때와는 역순으로 광주-원주 고속도로와 제2 중부 고속도로를 거쳐 집에 돌아왔다. 주말 낮이다 보니 상행은 그럭저럭 원활한 편인 반면 하행은 굉장히 막히고 있었다.

이렇게 북부와 남부로 나눠서 강원도를 다녀왔으니 다음에는 또 어디를 갈지가 고민된다.
예전에 철원을 갔을 때는 철도와 안보가 적당히 섞여 있었고, 작년에는 100% 안보 컨셉이었다. 그 반면 올해는 100% 철도 컨셉이 됐다. 자연 경치 감상은 어느 여행에서나 당연한 공통이었고 말이다.

그럼 관광 도시로서 본인의 고향인 경주는 어떤가 뜬금없는 생각을 늘어놓으며 글을 맺고자 한다.
사실, 남한 지역 전체를 통틀어서 경주는 관광 도시의 독보적인 본좌급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 왔다. 오죽했으면 그 옛날 1960년대에 야간 통금으로부터도 특례를 받아 제주도와 충북 내륙에 이어 1966년에 진작에 해제됐으며(시내만.. 외곽의 월성군 지역은 제외), 국립공원 승격도 1968년 12월 말, 이제 막 아폴로 8호 미션이 끝났을 무렵에 지리산에 이어 제2타로 받았다. 그것도 전국 유일의 '도시형 국립공원' 형태로 말이다.

물론 국립공원인 게 특혜만은 아니니, 부동산 주인의 입장에서는 개발 제한 고도 제한이 잔뜩 걸려서 속천불이 났을 수 있다. 작년 가을에 지진 피해를 많이 입었던 황남동 일대는 '역사 문화 미관 지구'라는 명목으로 주택들 지붕을 기와 형태로만 올리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말에 그 전기 먹는 하마요 사치품이던 에어컨이 거의 최초로 가동된 장소는 경주 석굴암이었다. 일제와 남한 정부가 복원을 어설프게 잘못하는 바람에 내부의 온도와 습기를 도저히 자연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뭐, 지금과 같은 복원도 당대로서는 악의적인 훼손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해서 한 것이었으며, 석굴암은 우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수백 년간 잊혀진 유물이었기 때문에 딱히 남을 욕하고 탓할 처지는 못 된다. 하지만 해체했다가 도로 조립을 못 해서 밖에 버려진 석재 부품들을 보면 좀 안습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주는 문화재 유적지빨이지, 자연 경치가 관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강원도보다야 작다. 하지만 경주도 포항이나 부산과 마찬가지로 행정구역상으로 바다를 끼고 있으며, 나름 해수욕장도 몇 군데 보유하고 있다. 시내에서 굉장히 멀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경주가 전방 지역인 강원도와 크게 다른 점은 안보 배경이지 싶다. 경주는 울릉도나 부산 등과 더불어 6· 25 사변 중에 북괴에게 점령당하거나 전투가 벌어진 이력이 없는 지극히 조용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8/28 08:33 2017/08/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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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과 식사, 삼척선 구간을 답사가 이렇게 끝났다. 물놀이를 더 했으면 삼척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었겠지만 계획했던 것보다 더 일찍 이곳을 떠나서 이제 정선으로 향했다. 정선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꼬불꼬불 산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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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방 저수지'라고 경치가 아름다운 호수와 쉼터가 있어서 여기에 잠시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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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산 아래의 공터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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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선 아우라지 역에 도착했다. 11년 전에 열차를 타고 가서 1시간 남짓 구경했던 곳을 자가용을 몰고 다시 방문하게 됐다.
승강장의 역명판 뒤로 아리랑 관광 열차의 측면이 보인다. 사진을 따로 찍지는 않았지만 이 열차는 나름 최신 7600호대 디젤 기관차가 견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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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바로 옆에는 11년 전에는 없던 어름치 모양의 열차 개조 카페가 놓여 있었다. 정선에서 자기 지역을 관광지로 기를 쓰고 홍보한다는 게 느껴졌다.
본인은 날이 밝을 때는 주변 지역을 더 돌아다니다가 카페에는 해가 진 뒤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기는 마지막 레일바이크 관광객 팀이 셔틀버스를 타고 떠난 저녁 6시 무렵에 칼같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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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서는 레일바이크를 타고 구절리까지 갔던 관광객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레일바이크가 최초로 도입된 건 2004년에 문경선 구간이고 정선선은 2타이다. 하지만 레일바이크라는 용어 자체를 최초로 만들고 더 적극적으로 마케팅과 홍보를 한 건 그 이듬해에 문을 연 정선선 지역이다. 정규 열차 운행이 중단된 북쪽 말단의 아우라지-구절리 구간을 이용해서 말이다.

본인도 언젠가 레일바이크를 몰 기회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고무 바퀴가 아스팔트· 시멘트 위를 굴러가는 것에 비해 쇠 바퀴가 레일 위를 굴러가는 게 역학적으로 얼마나 더 효율적인지 감을 익히는 차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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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과 골지천이 합류하는 일명 '아우라지 강변'에 찾아갔다. 양평 두물머리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라면, 여기는 남한강의 먼 상류가 하나 형성되는 지점이다.
아우라지 시비와 강 건너편의 정자는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잘 있었다. 단, 강을 건너는 다리가 새로 생겨 있었고, 보아하니 북쪽의 구절리까지 차도뿐만 아니라 산책로가 만들어진 듯했다.
비의 여파 때문인지 11년 전에 비해 물이 꽤 불어나고 색깔도 탁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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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뒤엔 본인은 저 강 건너편의 넓은 공터로 가서 밤을 보냈다. 작년에는 거진항 근처의 공터에서 잤는데(바닷가) 올해는 나름 강변에서 잔 셈이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야영· 외박용으로 가히 최적의 장소였다. 차가 몇 대 세워져 있긴 하지만 딱히 사람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차에다 자전거도 싣고 갔으면 정선 시내를 더 광범위하게 정찰? 관광?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폴로 달 탐사 로켓에다 월면차를 실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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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동이 트자 본인은 북쪽으로 차를 몰고 구절리 역으로 향했다.
자동차 도로와 철길과 강물이 나란히 지나고 멀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풍경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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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리 역과 주변 분위기는 이러했다. 이미 레일바이크 승하차장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이고 광장에는 넓은 주차장과 식당, 여치 한 쌍이 교미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열차 카페, 그리고 말로만 듣던 기차 펜션이 있었다.
정선선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만들어진 철도이다. 석탄 산업 하나 때문에 이런 깊은 산속에다 힘들게 철도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건 망하고 관광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상태가 됐구나.

여기를 들른 뒤부터 본인은 다시 태백선 방면으로 내려가면서 정선선의 모든 역들에 방문했다.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7/08/25 08:35 2017/08/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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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본인은 1박 2일 강원도 종합 여행을 추진했다. 이게 기대 이상으로 쏠쏠하고 아주 좋았다.

  • 갈 때는 새벽에 널널한 고속도로에서 원없이 밟으며 쾌속 주행
  • 동해 바다에서 해수욕
  • 회 코스 요리로 혼밥
  • 바다를 즐긴 뒤에는 꼬불꼬불 산 타는 국도를 달리며 경치 감상
  • 내륙의 강과 계곡에서 물놀이

본인은 더위에 약하고 바다에 대한 로망이 크다.
언제 어디서나 눈만 감으면 정말 잘 자고 불면이라고는 도무지 모르고 지내는 타입이지만.. 이것도 무더위 앞에서는 답이 없다.
알람 안 맞춰 놓고도 새벽 2~3시에 저절로 깨는 게 가능하구나. 잠 자는 것조차도 중간에 시동이 꺼져 버린다. 지금은 "이게 나라냐?" 할 때가 아니고.. "이게 날씨냐?"가 목구멍 위로 올라오곤 했다.

하도 답답해서 하루는 냅다 컴퓨터를 켰다. 그러자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해수욕장"이 머리보다 먼저 손가락이 움직이며 검색란에 쳐졌다. 모든 일과를 중단하고 그냥 영종도든 강화도든 차 끌고 달려가서 바닷물에 반신욕 한 채로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김 성모 만화를 보면 "벼.. 병원에 가면 돼.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병원에 가면 금방 회복될 수 있지"라고 굉장한 현대의학 병원 만능주의가 담긴 대사가 있는데.. 나는 "바.. 바다로 가면 돼. 아무리 습하고 더워서 땀이 쩔어도 바닷물에만 들어가면 금방 회복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본인은 그때 돌아온 직후부터 내년 여름을 기약했으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여름에 강원도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녀왔다.
단, 작년에는 영동 고속도로 이북으로 '안보 관광'이 테마였던 반면, 올해는 영동 고속도로 이남으로 '철도 답사'를 테마로 삼았다. 덕분에 공통 테마인 자연 경치 감상 말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행 분위기가 작년과는 사뭇 달라졌다. 올해는 반공 이데올로기 자가주입 이벤트는 없었다.

미리 결론부터 누설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는 삼척선(동해 관광 열차), 정선선(아리랑 관광 열차), 그리고 함백선(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화물용 지선) 이렇게 정규 여객 열차로 가기 힘든 마이너한 철도들의 모든 역과 주변 지역을 차로 직접 답사함으로써 개인 철덕력을 강화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또한 작년 말에 개통한 광주-원주 고속도로(52. 일명 '제2 영동')의 혜택도 바로 입을 수 있었다. 중간에 나들목이나 분기점 따위가 없는 제2중부(37) 고속도로에도 저기를 드나드는 분기점이 하나 생겼다. 올해 여름부터는 주말에 영동 고속도로도 경기도 구간에는 버스 전용 차선이 시행된다고 그러던데, 강원도를 가는 게 목적이라면 그걸 볼 일은 더 없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딱 하나 아쉬웠던 건 날씨였다. 동해 바닷가에 도착하던 당시에 강원도 전역에는 그냥 비를 넘어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뭐, 그래도 바닷물은 어지간해서는 따뜻한 편이고(나는 10월에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 잘만 했음..) 나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입수할 수는 있다. 파도가 강하면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땡볕이 내리쬘 때에 비해서야 해수욕으로부터 얻는 쾌감과 성취감, 가성비가 감소하는 건 어쩔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해변의 바닷물이 온통 흙탕물로 변하고, 고체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건 좀 문제였다.
이 때문에 황해보다 맑다는 동해 바닷물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해수욕은 그냥 하반신 정도만 잠시 담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맑은 날씨에 맑은 바다를 구경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나머지는 다 좋은 편이었다.
긍정적인 점을 떠올리자면, 이 더운 8월에 밖이 쌀쌀하고 차가 따뜻한 곳에 가서 빗소리 들으면서 차 안에서 쉰 것도 피서라면 피서이다. 밖이 더웠으면 차 안에서는 도저히 지낼 수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해가 안 난 덕분에 피부가 탈 일이 없었던 것도 좋은 점이다. 예전에 맑은 날씨에 해수욕을 했을 때는 심지어 맨 밑바닥의 발등조차도 슬리퍼에 가려진 부분은 흰데 발가락 같은 노출 부위는 새까매지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물은 온도만 낮춰 줄 뿐, 자외선은 전혀 차단하지 않고 수심 1m를 넘게도 그대로 투과시켜 주는가 보다. 그 정도 수심이면 이미 총에 맞을 걱정조차도 거의 할 필요 없어지는데도 말이다.

자, 말이 길어져서 지겨우실 테니 이제부터는 사진을 투척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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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려서 강릉· 정동진을 열차가 아닌 자가용으로 난생 처음으로 찾아갔다. 게다가 해수욕장 개장 기간 끝물에 맞춰 간신히 찾아갔는데 입구부터가 벌써 물난리가 나 있었다. 안습..

하긴, 비 소식 자체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던 것이었다. 강릉과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복병은 해변뿐만 아니라 도로에도 있었다. 바다를 따라 꼬불꼬불 달리는 도로들은 자연히 해발 고도가 낮은 편이고, 곳곳이 침수되어 흙탕물 웅덩이가 생겨 있곤 했다. 차로 지나가다가 몇 번 아슬아슬한 상황을 겪었으며, 급기야 망상 해수욕장 이남의 길은 진입 통제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런 건 다음부터 바다에 갈 일 있으면 참고해야 할 변수이고 시행착오였다.

뭐, 강릉은 고속도로의 경로 때문에 그냥 잠시 들른 것이고, 본인의 진짜 목적지는 삼척이었다. 여기 상황을 이렇게 확인한 뒤, 본인은 거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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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선은 영동선의 지선으로 취급되며, 무궁화호 같은 정규 여객 열차가 아니라 동해 바다열차라는 관광 열차만이 다닌다. 영동선의 정동진처럼 열차 안과 승강장에서 해변이 곧장 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요 구간이 해수욕장과 충분히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추암 역은 지붕도 없고 높은 곳에 놓인 선로 옆에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임시 승강장' 형태였다. 그런데 역 진입 계단의 바로 아래에는 공교롭게도 쓰레기장(...)이 있어서 미관상 별로 안 좋은 관계로.. 진입로의 사진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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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추암 해수욕장의 모습이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 동해선은 참 묘하게도 고속도로와 철도 모두 남쪽과 북쪽 구간이 서로 끊어지고 단절돼 있다. 얼추 포항-삼척 사이가 말이다.
일제는 1940년대에 태평양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해서 한반도에서 이미 놓여 있던 철도의 선로를 막 뜯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해북부선은 어째 새로 건설 중이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물론 거기도 그 당시에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동해 고속도로(65)와 철도 동해선이 전구간 완공되어서 삼척선이 간선으로 승격되고, 삼척에도 정규 여객 열차가 다녔으면 좋겠다. 서쪽의 황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쯤 전엔 군산선과 장항선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지선이 본선으로 승격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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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 다음으로 '삼척해변'이라는 역에도 이렇게 땅밟기를 했다.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바다열차가 도착하고 관광객들이 탑승하는 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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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해수욕장 부근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잡았다. 바다는 뭐.. 이런 상태였다. 하지만 물이 보기만치 심하게 더럽거나 차갑거나 파도가 살인적으로 강한 건 아니어서 마음만 먹으면 해수욕을 할 수는 있었다. 내 경험상 한여름에 바다는 계곡에 비하면 오히려 더 따뜻한 편이다.

하지만 이 날씨에 옷을 다 적시면서 해수욕을 했다가 전신 샤워를 하기에는 귀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는 30분 남짓 하반신만 담그는 걸로 만족하고 나왔다.
바다 코앞에 저렇게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이 있으니 좋았다. 그리고 빗줄기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빗물을 잔뜩 뒤집어쓴 내 애마는 상부 한정으로 아주 깨끗해졌다. 비를 어설프게 맞거나 비 자체가 흙먼지가 섞여서 지저분하면.. 잘 알다시피 흙먼지 얼룩이 빗방울 모양으로 생기면서 차 표면이 아주 더러워지는데.. 비 맞고 나서 차가 더 깨끗해지는지 혹은 더러워지는지는 좀 케바케인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세차를 한 다음날에 비가 오는 건 차주의 입장에서는 머피의 법칙 같은 악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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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시 횟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본인은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반찬까지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비웠으며, 다음에 나온 매운탕도 혼자 다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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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해변을 나서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삼척선의 종점인 삼척 역도 입구와 승강장 선로 사진을 남겼다. 이 역은 영업 중이었으며, 바다열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안에 좀 있었다.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7/08/22 19:23 2017/08/2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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