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관광 -- 下 (202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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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어디든 단풍의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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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통령 관저는.. 이렇게 담장이 둘러진 으리으리한 한옥 기와집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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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뒤로 이런 언덕 산책로가 있다.
사진으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청와대 내부엔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이라고 원래 경주에 있던 불상이 떡 옮겨져 있었다. 100여 년 전, 일제가 뜬금없이 무거운 불상을 열차에다 실어서 서울 여기까지 옮겨 온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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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본관의 뒤통수를 언덕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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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웬 농구 골대까지..?? 청와대 직원이나 대통령 자녀가 농구를 하고 놀라고 있는 시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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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에는 넓은 풀밭도 있고, 연못과 개울도 있고 오솔길도 있어서 산책하기에 아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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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유독 문 재인 대통령 부부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식수가 두 곳이나 있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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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춘추관. 건물 내부는 개방되지 않았다.

3. 촬영용 세트, 그리고 미래 전망

(1) 이제 국내의 민간 지도에 청와대는 당연히 노출되고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청와대의 더 서쪽에 청와대 직원(?? 특히 경호실)들이 거주하는 아파트인 일명 '대경빌라'를 비롯해, 청와대를 두르는 각종 군사 시설들은 여전히 비공개 상태이다.

(2) 경남 합천에는 '합천 영상 테마파크'라는 촬영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청와대 본관을 2/3 크기로 재현한 세트가 있다. 과거에 '태양의 후예'처럼 청와대 씬에서 가상의 대통령이 나오는 영상물은 이런 세트에서 촬영되었지 싶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청와대가 이렇게 떡 개방되었으니, 가짜 청와대 세트는 앞으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2020년대 이전의 '제6공화국'을 배경으로 하는 정치 드라마나 영화는 진짜 청와대를 며칠 틀어막고 그 안에서 찍으면 될 테니 말이다.

(3) 참고로 남양주 종합 촬영소에는 '판문점 세트'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판문점은 평범한 민통선 이북 마을도 아니고, 겨우 영화 촬영 '따위'의 목적으로는 절대 드나들 수 없는 극도로 민감한 곳이다. 그러니 무슨 남북 통일이라도 되지 않는 한, 가짜 세트가 반영구적으로 현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뭐, 판문점 세트가 필요한 영화나 드라마도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JSA 말고 또 있기는 했나?)
미래에 레알 판문점도 지금 청와대처럼 전면 개방되고 역사의 유물로 보존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4) 그나저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남양주 촬영소는 부산에 만들어지는 더 큰 촬영소로 대체되어서 2017~18년 사이에 문을 닫고 없어지려는 듯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 대체 촬영소가 만들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2020년대에 와서는 남양주 촬영소를 다시 존치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고 한다.
특정 소재의 영화· 드라마 촬영을 위해서는 옛날 자동차뿐만 아니라 이렇게 유명 장소의 세트가 필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5) 청와대와 판문점뿐만 아니라 국정원도 만약 가까운 미래에 더 외곽의 지방 모처로 이전한다면?? 그럼 지금 내곡동에 있는 시설 일부가 있는 그대로 개방되거나 심지어 박물관· 기념관 정도로 남지 않을까 싶다. 과거의 대공분실 일부가 역사 유물로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은 아파트가 국정원의 너무 근처까지 마구 지어지고 있고, 내가 보기엔 쟤들이 보안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국정원이 이전할 때쯤이면 대모산의 남쪽 반틈도 시민에게 돌아온다고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지 않을까? 국정원을 이전할 때쯤 가락시장 부근에 소재한 전파 관리소도 같이 이전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6) 청와대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본 건데.. 오랫동안 봉인됐던 걸로 유명한 '송현동 공터'도 요 얼마 전에 결국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됐다(열린 송현 녹지 광장). 거기는 땅값은 드럽게 비싼데 규제가 너무 심하게 걸려서 업무 건물을 제대로 올릴 수 없고, 뭔가 수익을 낼 껀덕지가 없었다. 그냥 국가가 접수해서 공공장소를 만드는 게 차라리 더 나았지 싶다.
덕수초-구세군 쪽의 공터는 아직도 문화재 발굴 측량을 하는 건지, 뭐 어찌할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

Posted by 사무엘

2022/12/21 08:35 2022/1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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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관광 -- 上 (2022/11/13)

본인은 지난 11월, 산들이 온통 단풍으로 붉게 물들고 있을 때,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청와대 관광을 가족과 함께 다녀왔다.

예전에 청와대는 정문 입구 정도가 아니라 근처 도로의 양 끝에 검문소가 있고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길거리 블록 전체가 봉쇄돼 있었기 때문에 허가받지 않은 차량이나 보행자는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할 수 없었다.
기자들이나 프레스센터 격인 저 남동쪽 외곽의 춘추관에 접근 가능했고, 아주 특별한 일로 청와대에 초청받은 민간인이라면 남서쪽 외곽의 영빈관이 마지노 선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근무하는 본관에 출입..??? 어림도 없는 일이고 더구나 대통령 가족의 사생활과 관련이 있는 관저는 더욱 접근할 길이 없었다.
민간인이 자유롭게 드나들거나 민간 지도에 표시될 일이 영원히 없을 것 같던 이 시설이 하루아침에 무슨 조선 시대 고궁 같은 관광지로 바뀌다니.. 참으로 경이롭기 그지없다.

1. 개방 내력

청와대는 초창기에는 경무대라고 불렸다가 1960년, 윤 보선 때 지금과 같은 청와대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는 건물들은 상당수가 1990년대에 지어진 거라고 한다.

청와대는 국가 원수가 상주하는 곳이니 그렇잖아도 철통같은 보안과 경비가 상시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1968년, 1· 21 사태 때 북괴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바로 앞까지 침투해 들어왔고, 생포되었던 김 신조가 "내레 박 정희 목 따러 왔수다"라고 읊기까지 하자 온 나라가 준 전시 상태로 발칵 뒤집혀 버렸다.

이땐 전군 장병들의 전역이 경계 모드가 풀릴 때까지 무기한 연기됐었고.. 좀 단축되려던 군복무 기간은 6· 25가 휴전으로 끝난 직후와 동일한 3년으로 도로 환원돼 버리고, 전국민 주민등록번호에 예비군, 5분 대기조.. 별별 불편한 조치들이 이때 생기게 됐다. (심지어 북파공작원까지 몰래 양성을 시작한 건.. 얼마 못 가 흑역사가 됐지만 말이다..;; )

이렇듯, 1· 21은 20여 년 전의 6· 25와 동급으로 우리나라의 안보에 굉장한 충격과 트라우마를 안긴 셈이다.
그런데, 그땐 이런 조치들이 마냥 엄살이 아니었다. 같은 해 말에는 또 울진· 삼척에 100수십 명에 달하는 북괴 무장공비가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침투했었기 때문이다.

북괴는 무장공비를 보내서 뭔가 당근을 제시하면서 주변 주민들을 설득하고 동화시킬 생각을 안 하고, 무식한 폭력을 동원해서 협박하고 죽이고 부술 생각만 했다. 쟤들은 자꾸 무장공비를 보내서 남한을 흔들어 주면 체제가 혼란스러워지고 대남적화가 이뤄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남한도 투철한 반공 멸공 정신으로 무장해서 힘에는 힘으로, 악과 깡과 근성으로 대응했다.
그러니 북괴의 전략은 전혀 통하지 않고 역효과만 났다. 놈들이 저러면 저럴수록 남한 사람들도 민· 관· 군이 더욱 손잡고 힘을 합쳐서 "때려잡자 공산당"이 되고 북괴에 대한 적개심만 극심해질 뿐이었다.

이 1· 21 사태를 계기로 청와대를 둘러싸는 모든 산들은 군사시설 보호 구역이 되고 거의 DMZ 급으로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꽁꽁 묶였다.
다만, 한 치의 예외 없이 몽땅 출입금지는 아니고, 북악스카이웨이 도로가 닦이고, 평창동 마을이 조성되기도 했다. 청와대 이북으로도 최소한의 주민이 좀 있어야 간첩이 침투한 걸 발견하고 신고를 할 테니 말이다.

북악스카이웨이는 개통 당시에는 톨게이트가 있는 유료 도로였다. 1970년대에 자가용을 굴리면서 이 길을 다니는 게 가능한 사람은 극소수였으며, 일반 서민들은 여기를 택시 타고 관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럭셔리한 신혼여행 코스였다. ㄲㄲㄲㄲ
그렇게 청와대 주변은 오랫동안 꽁꽁 묶여 있었는데..

1993년, 김 영삼 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청와대의 남서쪽 외곽.. 궁정동 안가가 철거되고 무궁화 동산이라는 공원이 조성되어서 대중에게 개방됐다.
그리고 청와대가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접근 금지이던 인왕산이 1주일 중 하루만 제외하고 개방됐다. 단, 청와대가 내려다보이는 포토존에는 감시 요원이 상주했다.

그러다 2007년, 북악산에서 청와대 쪽으로 더 가까이 한양도성을 따라가는 성곽 탐방로가,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는 형태로 개방됐다. 이때는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입장료 징수가 폐지되고 전면 무료화되기도 했다.
다음으로 2009년엔 북악산의 김 신조 루트가 개방되었고, 저 멀리 우이령길이 국립공원 탐방 예약 형태로 개방됐다.

201x년대, 문 재인 대통령 시절엔 어느 샌가 인왕산에 감시 요원이 없어졌다. 그리고 북악산 남쪽의 한양도성 탐방로도 목걸이를 받지 않고 출입 가능해졌다.
나중에는 그 남쪽 탐방로 구간과 북쪽의 북악스카이웨이 사이 탐방로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 뒤 2022년, 윤 석열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청와대가 통째로 개방돼 버렸다. 30여 년 전, 무궁화 동산 정도나 찔끔 개방됐던 김 영삼 시절에 비하면 얼마나 큰 변화인가?
아 참고로 2003년, 노 무현 대통령 때는 대통령 전용 '별장'이던 청남대가 민간 관광지로 완전히 개방되긴 했었다. 청와대 말고 청남대 말이다. ㅋㅋㅋ

이제는 대통령 집무실은 용산으로, 사저는 한남 쪽으로 이전했다. 그에 걸맞게 이제는 촬영 감시 요원이 인왕산이 아니라 남산 정상에 상주하게 됐다.
남쪽의 용산 둔지산 언덕에서는 미군 부대가 완전히 철수하고 나가듯(모두 평택으로..), 북악산은 수방사 군대를 동원해서 지킬 필요가 없는 평범한 야산으로 차차 바뀔 것이다.

2. 내부 구조

저기는 청와대 공식 웹사이트에서 간단히 예약만 하면 방문 가능하다. 방문 예정 날짜와 시간대, 일행 연락처와 인원수를 입력하면 되는데, 보아하니 방문 날짜 이상으로 시간대는 막 꼼꼼하게 체크하지는 않는다.

권장되는 청와대 내부 체류 시간은 1시간 반이며, 본인의 경험상으로도 이 정도면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그 시간을 초과해서 청와대 내부에 짱박혀 있는다고 해서, 많은 관광객들 중에 당신을 골라내서 내쫓거나 페널티를 줄 시스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더라.
예약 시스템은 특정 시간대와 날짜에 관광객이 너무 많이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한 정말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그리고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자가용을 끌고 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다.;;
청와대 정문까지 가장 가까이 가는 대중교통은 2022년 현재 서울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순환 버스인 01로, 남산 정상과 광화문, 청와대를 쭉 잇는다. 그거 말고는 효자동까지 가는 7212 같은 다른 버스를 타도 된다.

01은 이제는 색깔조차 2004년 버스 개편 당시에 제정됐던 노랑을 포기하고 초록이 된 듯하다. 사실, 노란 버스는 학교나 유치원 버스 같은 인상이 강하긴 하지.. =_=;; 지금은 서울 버스들 중에 노랑과 빨강은 사실상 망한 것 같다. ㄲㄲㄲㄲ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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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파악한 게 맞다면, 청와대는 서쪽의 영빈문, 중앙의 정문, 그리고 동쪽의 춘추문 셋 중 한 곳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특별히 01을 타고 정문 근처에서 내린 게 아니라면, 보통은 버스 정류장에서 가장 가까운 서쪽부터 들어가게 된다. 얘는 영빈문을 지나면 보이는 영빈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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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안은 무슨 역시 무슨 대학교 캠퍼스나 산기슭 근린공원 같은 느낌이다.
건물 내부가 개방된 건 (1) 영빈관과 본관 둘뿐이다. 거기에다 관저는 건물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지만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는 있는 정도이다.
나머지는 (2) 그냥 청와대 내부의 각종 건물들과 풀밭, 정원을 구경하고, (3) 청와대를 두르고 있는 언덕을 산책하면서 일부 옛날 문화재 유적을 구경하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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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빈관 내부. 뭔가 뉴스에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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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가장 좁은 의미에서 청와대라고 부를 수 있는 본관 되시겠다.
본관만이 나름 가장 많이 개방되어 있고, 내부에서 2층까지 올라가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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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로만 듣던 역대 대통령들 사진과 영부인 사진도 이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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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울 역 건물이 지금은 '문화역 서울 284'로 바뀐 것처럼 청와대 건물도 그런 식으로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래도 옛날 서울 역은 대한민국 시기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으니 위상이 청와대와는 좀 다르다고 하겠다.
아까도 얘기했듯, 청와대 안에서 실내 구경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다음부터는 실외 구경만이 이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2/12/18 19:35 2022/12/18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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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근황 -- 몇몇 생각, 여행 등

1. 환절기

이번 주쯤부터 날씨가 갑자기 확 급변해서 굉장히 시원해졌다.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지 않고, 밤에는 20도 초까지 기온이 내려가니.. 폭염과 열대야가 싹 사라지고 정말 천국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당연히 캠핑을 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 갖춰졌다.

자정 무렵까지만 해도 찬물을 바로 끼얹거나 냉탕에 바로 뛰어들어도 될 것 같았는데
새벽이 되니 급 싸늘해져서 텐트 창문을 닫고 얇은 이불이라도 덮어야 할 지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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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호박호~~~박~~ 행복행복행....복 ㅎㅂㅎㅂㅎㅂ~~!!
텐트 문을 여니까 곧바로 강물이 비쳐 보인다. 내 마음과 멘탈도 힐링힐링.
호박에 대해서는 별도의 근황글에서 추가로 다룰 것이다.
여름이 가는 건 좋지만.. 점차 추워져서 밖에서 호박을 키울 수 없는 시기도 다가오는 건 아쉽다.

2. 잠시 정치 얘기

우리나라가 정권이 바뀐 지 3개월, 100일이 넘었다.
나도 저 사람이 하는 일이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 정권의 씻을 수 없는 양대 죄악인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을 딱 정확히 공략하여 수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고맙고 현 정권이 선출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화이팅이다, 힘내라~!!

그 새X는 절대로 편하게 뒈지게 해서는 안 되고, 어서 국립호텔로 보내야 한다. 하루속히 정의가 구현됐으면 좋겠다. 뭉 다음으로는 찢 차례다.
현 법무부 장관은 사상 건전하고 말빨과 실력도 정말 장난이 아닌 인재이던데.. 5년 뒤에 현 대통령의 후임으로나 등극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정말 잘 뽑았다는 건 얼마 전에 북괴도 인증해 주었다. "남조선의 대북 정책을 논하기에 앞서 우리는 윤 석열 그 인간 자체가 싫다"
와~~ 개인적으로는 현웃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긴, 진짜 훌륭한 대통령이라면 북괴가 암살하려고 암살조도 보내고 폭발물도 설치하고,
역적패당이라고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붓고 자기들 선전용 그림 속에서라도 갈갈이 찢어 죽였을 텐데.. 북괴가 옛날에 비해서는 많이 점잖아진 듯하다. 아니면 윤이 아직 그 정도로 훌륭한 행적은 못 남겼거나..

10여 년 전에 MB 각하만 해도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셨는가?
그때 개척해 놓은 원전이고 천연가스고 4대강이고.. 나중에야 빛을 발하고 재평가 받고 있다.
이런 분이 아직도 감방에 가 있다니.. 우리나라는 아직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윤의 재임 중에 하루속히 사면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MB 이후로 북괴가 남한 대통령에 대해 대놓고 험악한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레카는 여자여서 선을 안 넘은 듯하고.. 다음 뭉은 만만한 개호구니까 무시와 하대만 했지, 굳이 저렇게 저주하고 싫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윤은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끝으로.. 젊은 이공계 엘리트 출신 정치인이라고 기대했던 그 사람은 왜 이렇게 추태 부리면서 몰락하고 망가졌나 모르겠다. 이 정도면 도저히 지지하거나 편 들어 줄 수 없다. 뭐 정치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고..

3. 경주 감포 해수욕장

본인은 올해 하계 휴가는 7월 말, 그리고 광복절 연휴 이렇게 두 번에 나눠서 다녀왔다.
글쎄, 직장 동료들 중엔 한여름 성수기를 피해서 9~10월 초가을에 작정하고 제주도나 외국을 다녀오는 식으로 휴가를 쓰기도 하던데.. 본인은 그냥 더울 때 물놀이를 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휴가를 쓰는 걸 선호한다.

7월 말엔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 영종도를 다녀오고, 8월엔 고향인 경주를 방문했다. 그래서 올해는 나름 황해와 동해 바다를 모두 즐길 수 있었다.
작년에는 어쩌다 보니 동해 바다에는 못 갔는데 올해 이 한을 풀었다. 그 대신, 올해는 양평· 남양주 쪽에는 못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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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포의 '나정 고운모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한 뒤, 바닷가에서 텐트 치고 하룻밤 잠도 잤다.
경주에 해수욕장이 여럿 있긴 한데, 여기가 국도 4호선의 시점 바로 옆이기 때문에 접근성이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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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도 계곡 물처럼 가슴까지 차는 깊이에서 밑바닥의 내 발등까지 다 뚜렷이 보일 수가 있다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물이 이렇게 맑다니!!
(이 사진은 가슴까지 차는 깊이는 아님. 그 깊이까지는 겁 나서 폰을 못 들고 감ㅋㅋㅋㅋㅋ)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황해 해수욕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수질이다.

거기서는 물이 초록색이고 수중에선 과장 보태면 팔을 뻗어도 손끝이 안 보일 지경이었는데.. (참고로 1950년대 런던 스모그는 물이 아닌 공기가 그런 상태였..)
또한 특유의 비리비리한 바다 냄새도 여기 동해에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해수욕장은 바닥의 재질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진흙이 아니라 자잘한 자갈 위주여서 더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바다가 아니라 계곡에 더 가까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이 괜히 저 멀리 동쪽으로 원정 가는 게 아니구나.
한번 눈이 높아지고 나면, 이젠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해수욕장에서는 물놀이를 못 할 것 같다.

이 나이가 돼도 물놀이를 하니까 노무노무 좋았다.
원래 하루는 계곡, 하루는 바다에 가려 했으나.. 그 당시에 남부 지방은 가뭄 때문에 계곡 물이 깡그리 말라 있었다. 그래서 계곡에서는 놀지 못하고 바다에만 다녀왔다.
뭐 얼마 안 있으면 추석 때문에 또 고향에 가게 될 텐데, 그때는 물이 좀 살아 있기를..

4. 양동 마을

그리고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경주 양동 마을에 이번에 드디어 처음으로 다녀왔다.
경주는 아무래도 신라와 관련된 옛날 문화재가 넘쳐나는 곳이지만, 양동 마을은 의외로 조선과 관련이 있는 양반 집성촌이다. 애초에 위치도 서라벌이니 반월성이니 오릉이니 하는 전통적인 신라 도읍 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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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조선 왕조는 이상한 유교 전통에 선비질, 노비 등 온갖 악습과 병신 무능한 관행이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나온 그나마 선한 것, 대단한 것, 유의미한 것, 한때의 구닥다리 레거시가 아니라 오늘날까지 살아서 이어지는 것, '유네스코'라는 국제 기구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을 꼽자면 다음과 같다.

(1) 고유 문자 한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으며, 유네스코에서는 1989년부터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이라는 것을 제정해서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기여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과 상금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안한 상 명칭과 취지, 권위를 저기에서 승인해 준 것이고, 상금은 우리나라 정부에서 재원을 마련해서 지급한다.

(2) 조선 왕조 실록: 쬐끄만 나라가 500여 년 동안 역사 기록 하나는 굉장히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있는 그대로' 잘 남겼다. 이건 세계 다른 나라들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덕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됐다.

(3) 수원 화성: 1700년대 말의 작품이니 별로 오래되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다 파괴된 걸 재건했을 뿐인 보잘것없는 성곽에 지나지 않는데.. '화성성역의궤'라는 건설 매뉴얼 덕분에 재건된 레플리카도 원본과 동일한 권위를 인정받았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재됐다. 기록 유산이 아니라 그냥 유산..

그리고 경주 양동 마을은 여느 민속촌이나 '육영수 여사 생가'처럼.. 당사자들은 떠나 버리고 후대에 재현해 놓은 단순 한옥 껍데기가 아니다. 현재까지도 족보 조작질 없이 진짜 조선 양반 후손들이 문화재급 한옥에서 계속 살고 있다. =_=;; 한국 민속촌이나 안동 하회 마을은 이런 조건까지 만족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양동 마을은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통째로 등재됐다. 그냥 단절된 과거 레거시가 아니라 현재까지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덕목을 잘 충족하는 세계 유산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매우 우수한 사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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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가 봤는데.. 처음엔 한옥을 보다가 나중에는 호박만 찾아 다니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밭의 곳곳에서 호박이 많이 잘 맺히고 있어서 반갑고 기뻤다.
자.. 이번엔 기승전..철이 아니라 기승전..호 기승전..박이 됐다. =_=;;

Posted by 사무엘

2022/08/26 08:35 2022/08/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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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은 한 달 내내 날씨가 지독하게 더웠다.
본인은 올해의 하계 휴가는 예전의 관행과 달리, 인천· 경기도를 벗어나지 않는 단거리 위주로 산발적으로 다녀왔다. 그리고 새로운 장소를 개척하기보다는 이미 검증된 기존 장소를 찾아갔다. 코로나19 시국과 개인적인 신상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렇게 움직이게 됐다.

먼저 을왕리 해수욕장에 당일치기로 다녀온 뒤, 다음으로는 양평 계곡에 다녀오고 거기 부근에서 캠핑을 했다. 당초 계획했던 동해 바다를 포기하는 대신, 이걸 황해 바다와 계곡으로 나눠서 퉁친 셈이었다.

방역 때문에 밤에 시원한 바다 코앞에서 텐트 치고 놀지를 못하게 한다니.. 그럼 멀리 동해까지 원정 가는 것의 의미가 없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코로나니 뭐니 해도 이 더위에 어디든 바다는 보고 와야 하니 그냥 가까운 곳을 찾아가게 됐다.

1. 첫째 날: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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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왕리는 3년 전에 다녀 온 적이 있다. 그때의 기억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주변 지리가 낯익어 보였다.
그때도 한낮에 찾아가니 물이 다 빠져 있었는데.. 나중에 용유도 일대의 만조· 간조 시간대를 찾아보니 진짜로 오후 2시 반쯤이 물이 제일 없는 시간대였다. 황해에서 물놀이를 생각하고 있다면 이런 것도 고려를 해야겠다.

그래도 만조 ↔ 간조 사이의 간격이 얼추 6시간이니, 두어 시간 정도 지나자 물이 금방 들어왔다. 한참 멀리 떨어져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던 부표들도 금세 물에 잠겼다.
워낙 폭염이 강하고 수심이 얕기도 한지라, 바닷물은 그냥 온수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미지근했다. 그리고 아래가 내려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탁한 흙탕물이었다.

동해는 시종일관 거센 파도가 휘몰아치고 거품 낀 맑은 물이 솟구치는 대신, 바닥도 급격히 깊어져서 물에 얼마 들어가지를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강원도건 부산이건 별 구분 없이 말이다.
이런 사소한 것들도 매년 꾸준히 바다에 다녀오니 차이점이 눈에 들어오고 경험과 노하우가 생긴다.;;

여기서는 발 담그고 해변 산책, 식사와 카페 휴식 정도만 했다. 방역을 빌미로 해수욕장이 폐장 상태이고, 샤워장조차 운영하고 있지 않으니 뭘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발을 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야외 수도꼭지 같은 거라도 있어야지? 그것도 없으면 사람들이 나갈 때 온통 공중 화장실로 몰릴 것이고 세면대 하수구가 모래에 막혀서 배기지를 못할 텐데.. 이미 공중 화장실 세면대는 개판이 돼 있었다.;;;

2. 둘째 날: 계곡

이튿날, 본인이 찾아간 곳은 양평의 모 계곡이었다. 여기도 수 년 전에 교회 수련회 일정에 껴서 친구들과 다녀온 적이 있어서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작년에 굉장히 시원하고 인상이 좋았던 안양 병목안 산림욕장의 계곡, 또는 양주 송추 계곡도 후보에 껴 있었다. 하지만 거기는 연계 관광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지라, 이번에도 역시 검증된 피서 휴양 코스인 양평을 선택하게 됐다. 서울을 떠나서 국도 6호선을 따라 한강 경치를 감상하는 건 나를 언제나 들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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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서는 인구 밀도 대비 수량이 부족해서 앉거나 눕는 기동밖에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하지만 이 길고 긴 폭염 와중에 이만치라도 맑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곳, 선풍기와 에어컨 없이 지낼 수 있는 곳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물이 적은 대신 퀄리티가 바닷물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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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물이 졸졸 흐르는 전용석에 기다랗게 누워서 한 30분이 넘게 컴퓨터 작업을 했다.
그늘 밑에 돗자리 깔고 거기서도 낮잠을 자고 간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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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저문 뒤에는 계곡을 나와서 근처를 방황하던 중,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어느 공터를 발견했다.
놀이터였던 곳이 방치된 것 같은데.. 차도에서 가깝지만 길에서는 공터 안이 수풀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은폐 보안성을 자랑(?)했다. 게다가 옆에 정자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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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바로 옆에 흐르거나 화장실· 수도꼭지 같은 것만 근처에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캠핑을 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여기서 텐트 치고 밤을 보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3. 셋째 날: 한강 주변 카페, 두물머리 세미원

계곡에서는 6시간을 채 있지 않았던 반면, 이 캠핑 아지트에서는 자는 시간을 포함해서 무려 12시간 가까이 있었다.
둘째 날까지 물놀이와 캠핑을 했다면 셋째 날엔 두물머리 일대에서 시각 힐링과 관광을 즐겼다. 이런 연계 코스 때문에 계곡에 갈 때도 다른 지역 대신 양평을 선택한 것이었다.
다만, 이 관광지들은 상수원 보호 구역에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관광만 가능하다. 이제 물놀이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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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교회 수련회를 다녀오면서 개척한 적이 있던 카페인데.. 예나 지금이나 주변 경치가 가히 킹왕짱이었다. 날씨도 흐릴 거라는 예보와 달리 쾌청해서 더욱 좋았다. 여기서 제대로 씻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하고 간식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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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햇볕이 내리쬐고 날씨가 많이 더워져서 야외 활동은 자제할까 생각도 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근처의 '세미원'이라는 곳을 가 봤다.
'평범한 연꽃 공원처럼 보이는데 무슨 입장료까지 받나, 옆에 있는 두물머리 공원과 차이가 뭐냐'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들어갔지만 생각이 곧 바뀌었다.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시설이 정말 잘 꾸며져 있고 볼거리가 많았다.

특히 저 사진에서 보다시피,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나무들 아래로 물이 졸졸 흐르는 징검다리길이 있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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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는 이렇게 커다란 연꽃들이 가득했다. 꽃이 피었다가 시든 자리는 무슨 샤워기 같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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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도 이렇게 잘 꾸며진 공원과 연못이 아주 넓게 갖춰져 있었다. 그저 풀숲뿐인 두물머리 공원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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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늘과 강이 참 예뻐서 한 컷 찍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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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원에서도 다리를 통해 이웃집인 두물머리 공원으로 갈 수 있었다. 단, 두물머리에서 세미원으로 재입장을 하기 위해서는 티켓을 잘 간수하고 있어야 한다.
뙤약볕 아래에서 긴 거리를 걸어 다니느라 다리가 아프고 피곤했지만 그래도 돌아다닐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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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돌아오면서 강북이 아니라 강남에서 강북 쪽을 바라보며 찍은 한강 경치이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이상이다. 본인은 이렇게 이번 휴가철엔 바다(3) - 계곡 개울(1) - 큰 강(2)의 순으로 답사를 하고 돌아왔다.
각 장소별로 물놀이는 바다(2 발만..) - 계곡 개울(3 제일 많이) - 큰 강(1 전혀 못 함)의 순으로 했다.
사진은 바다(1 별로) - 계곡 개울(2 조금) - 큰 강(3 제일 많이) 이런 순으로 많이 남겼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15 08:34 2021/08/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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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로

서울 역 북부에서 시작해서 서대문 역(5)과 독립문 역(3)을 찍고 지하철 3호선의 선형을 따라 고양· 파주 방면으로 가는 도로는 국도 1호선 구간인 한편으로 이름이 '통일로'이다.
이 길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게 고양과 파주까지 4차선 도로로 한데 뚫리고 '통일로'라는 이름까지 붙은 건 1972년 봄의 일이라고 한다. '통일호'라는 열차 이름은 1950년대 할배 때부터 있었지만, '통일로'는 박통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서 통일로의 종점에 임진각 관광지가 만들어졌으며, 통일촌이라는 민통선 마을도 생겼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7월 4일엔 우리가 학교에서도 배우는 7· 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니 그때는 온통 통일, 통일 하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진짜로 남북 통일이 이뤄질 줄 알고 많이 들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파주 임진각 방면으로 갈 때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자유로, 혹은 최근에 개통한 서울-문산 고속도로(17)가 즐겨 쓰인다.
자유로는 통일로 이후로 딱 20년이 지난 1992년에 개통했으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같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유로나 고속도로와 달리, 기존의 통일로는 자동차 전용 도로도 아닌 데다 차로도 너무 좁고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냥 그저 그런 시내 도로 내지 국도 레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각으로 가는 도로의 원조는 바로 이 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로의 고양시 북쪽 지점에는 '통일로 휴게소'라고 온갖 기념비들과 공원이 들어서 있고 공릉천이라는 하천도 가까이 있다. 본인은 북극 한파가 전국을 강타했던 새해의 첫 주말에는 거기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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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휴게소라고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바로 근처에 식당이나 가게들이 들어선 건 아니고.. 그냥 공터 광장과 공원 정도만이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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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이니, 서울 올림픽이니 하는 왕창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기념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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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들어가서 올라갈 수 있는 정자 같은 게 아니어서 아쉽다. 자유롭게 개방된 2층 정자라면 올림픽대로에 있는 청담 도로 공원 같은 느낌도 났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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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휴게소'의 길 건너편에는 6· 25 사변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에 따르면, 필리핀군은 488명이 참전했으며, 이 기념비는 1974년 10월 2일에 건립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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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 기념비의 옆에는 고양시 출신 인물 중에 6· 25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작년에 칠곡 왜관에서 봤던 애국 동산이 떠오른다. 거기서도 자기 지역 출신의 6· 25 참전 용사들을 잔뜩 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보 관광을 많이 다니고 나니, 과거에 비슷한 부류의 기념물을 봤던 것이 서로 연계가 될 지경이다.
이 기념비는 2004년 7월 27일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2011년 1월 4일부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런 볼거리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통일로라는 이름의 도로는 경상북도 경주에도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남북 통일 염원과도 오마주한다는 취지로 1977년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통일전이라는 기념비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통일전 근처의 도로 이름이 통일로이며, 심지어 '통일전 휴게소'도 있다.

내가 보기에 경주시는 박통 시절부터 관광 도시로서 특별 지원 대상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아주 많이 받았다. 1968년 12월에 국립공원 지정, 1974년에 보문 관광단지 개발, 통금에서 진작부터 열외, 호화 귀족 열차이던 새마을호 정차 따위 말이다. 게다가 도시형 국립공원이라는 건 현재까지도 경주시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끝으로.. 통일로라는 길이 닦이던 그 시절에 결의됐던 7· 4 성명이라는 건.. 우리나라가 영원히 으르렁대면서 적대할 것 같던 북괴하고도 그나마 “눈 가리고 아웅으로라도 좀 싸우지 말고 서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해 보자~”라는 제스처를 취해 봤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1 21 김 신조 사태 때문에 서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져 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통일은 개뿔.. 남북 지도자는 애초에 서로 온전히 신뢰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전근대 시절 옛날에 유럽에서는 귀족 장교들이 자국 졸병들보다 적국 장교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고 하더라만(적이지만 최소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엔 그런 거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남한은 통일은커녕 자기 내부에서도 유신 독재(ㅋㅋ)가 시작되었고, 북괴 역시 특히 74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과 함께 더욱 흑화하게 됐다. 쟤들도 겉으로는 통일 통일 거리면서 한쪽에서는 땅굴이나 파고, 공작원을 보내 남한 대통령을 암살까지 하려 했다. 그러니 통일은 더욱 물 건너가고 반공 분위기만 더 강해졌다.

2. 캠핑

통일로 휴게소를 방문하던 당시엔 서울의 낮 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며칠 동안 전국을 강타하던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파 경보가 내려졌으며, 한강이 얼고 황해 바다조차 일부 얼어서 양식업(...;; )과 비닐하우스 화훼업(치솟는 난방비)이 큰 피해를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은 평범한 산 속이나 물가가 아니라, 이번엔 아예 얼어붙은 강 위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통일로 휴게소 부근부터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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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중앙까지 100% 언 건 아니지만 주변에는 물이 흐르다가 완벽하게 얼어 버린 곳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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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텐트 치기 적합한 곳을 발견했다.
이불· 침낭 등 장비가 굉장히 많고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도보 접근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것들을 오래 들고 다니니 팔과 허리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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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통일로 IC 부근의 상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전구간이 꽁꽁 얼고 위에 눈까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공원 같은 것도 없어서 인적이 더욱 없었다. 다만, 나 역시 강물 쪽으로 가기 위해서 갈대더미들을 타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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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상에 이런 횡재가..
오도독오도독 눈 밟는 소리가 걸을 때가 아니라 누워서 몸 뒤척일 때 나는 그 느낌을 아시겠는가?
-15도도 이제 별 거 아닌 듯..^^ 아 그런데 다 좋은데 발은 좀 시렵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해서 강 중앙으로 더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숨 잘 잔 뒤 집으로 귀환했다.
그 당시엔 폰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차키의 버튼이 갑자기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키가 문제인지 차가 문제인지.. 차 문 못 열고 시동 못 걸면 어떡하나 깜짝 놀랐다. 키를 따뜻한 곳에 두니 다행히 다시 살아났다.

귀환할 때는 동부 간선 도로를 이용해 봤다.
의정부에서 서울 북부 구간이 싹 리모델링 돼서 확장되고 지하화가 된 걸 처음 봤는데.. 이게 딱 올해부터 개통한 거라고 한다.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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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천에서 야영을 한 뒤, 다음날 밤에는 중랑천 모처의 얼음판에서 또 야영을 했다.
여기는 공릉천보다도 얼음이 덜 생겨 있어서 중앙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텐트를 친 곳은 보다시피 명백하게 땅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산천 어디서든 텐트만 치면 나만의 밀실이 생긴다는 게 좋다. 그리고 밖이 아무리 추워도 장비를 충분히 챙기면 체온 에어포켓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29 08:35 2021/01/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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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가는 길.. 요게 무슨 시설인지 사진만 보고 아시는 분은 굉장한 용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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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노골적인 힌트를 드리자면, 수 년 전에 저기서 벌어진(벌어졌다는) 일보다 이번 뭉괴뢰 정부에서 저지른 탈북자 북송이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큰 죄악이다. 이건 내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항이며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은 대통령이 대놓고 종북 발언을 하기가 좀 뭣하니, 통일부 장관을 희대의 빨갱이로 임명해 놓고 그놈을 통해서 자기 심정을 대리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안산을 전철이 아닌 차로, 그리고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지방도만 이용해서 가니 무척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이 지역에서 본인이 가장 먼저 답사한 것은 반월-상록수 역 사이에서 KTX가 달리는 경부고속선 선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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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천 다음으로 반월천에도 맑은 물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낮이 되어 살짝 덥기까지 한데.. 옷 벗고 들어가서 물놀이를 하고 싶어졌다.
반월천의 물은 수리산에서 발원해서 저 멀리 시화호 쪽으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지금 이 시야에서 바로 옆이 경부고속선이며, 뒤에는 안산선 전철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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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부고속선 선로와 함께 나란히 반월 호수 부근까지 갔다.
여기까지 간 김에 일직 터널 위의 유명한 열차 촬영 명당도 다시 들러 보고 싶었다.
본인은 무려 7년 전에 가 본 적이 있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삽질만 하다가 재답사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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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터널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남쪽의 다른 산길을 잘못 올랐다. 거기도 어귀는 터널 근처의 산길과 비슷하게 생겼고, 옆으로 철조망이 처진 것까지 동일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맞는 길로 가긴 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지름길 진입로는 검찰일보인가 어디의 사유지로 바뀌고, 주변이 철망이 쳐지고 CCTV까지 생겨 있었다. 이 때문에 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나중에 여기 일대의 인터넷 지도를 보니, 터널 주변을 더 크게 우회해서 터널의 위쪽으로 접근하는 다른 길이 있긴 한 듯하다. 하지만 그 길은 7년 전에 갔던 길은 아니며, 그렇게 갔을 때 그 촬영 명당에 실제로 도달할 수 있는지도 직접 답사를 하지 않는 한 모르겠다. 7년 전에는 갈 수 있었던 길이 지금은 막혔다는 것 하나는 사실인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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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인해 KTX 명당에는 못 들렀고, 그 대신 바로 옆의 경치 좋은 반월 호수 주변을 산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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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름 없는 야산의 꼭대기에는 군사 시설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있다. 산의 이름이라든가 정상으로 가는 등산로가 궁금해지는데 인터넷 지도에는 딱히 안 나오는 것 같다. 그저 덕고개 당숲 같은 주변 산책 코스만 나올 뿐..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다닌 뒤, 한적한 반월 역에 들러서 각종 재충전과 보급을 했다. 안산 시내의 공영 주차장들은 3시간까지는 무료여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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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최 용신 기념관 및 묘지를 지난 2005년 이후 무려 15년 만에 다시 찾아갔다.
그 긴 세월 동안 샘골 공원은 싹 리모델링 되었고 최 용신 기념관이 정식으로 지어졌으며 주차장도 생겼다. 주차장엔 샘골 교회에서 굴리는 승합차도 두어 대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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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이렇게 바뀌었을 줄이야.. 길도 다 포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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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는 약혼남이던 김 학준의 약력도 소개돼 있었다. 이분도 조선어 학회 사건 때 투옥된 적이 있었나...? 저건 김 학준의 약력인지 정 태진의 약력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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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첫 답사했던 당시와는 비교도 안 되게 싹 바뀌었다. 다만, 지금은 코로나19 시국 때문에 기념관 안에는 못 들어갔다.
기념관이 여기 언덕 위에서는 단층 건물인 것 같지만, 언덕 아래쪽으로 층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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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이다.

이제 본인은 수인선의 개통에 앞서 서해선 전철부터 타 보기 위해 남쪽 종점인 원시 역 부근으로 갔다. 본인은 아직 서해선도 전혀 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초지 역 이남은 크고 한적한 도로의 양 옆에 역시 듣던 대로 공장들이 가득했다. 근처의 야산에 웬 전망대 공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지만 시간 관계상 가 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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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시 역 이남으로 도로의 끝은.. 이렇게 시화호로 흘러드는 반월천의 하류가 가로막고 있었다. 강 건너편은 화성시이다.
여기도 나름 공원이 잘 꾸며져 있었으며 강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때부터 맑고 푸르고 화창하던 하늘이 흐려지고 어두워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29 19:35 2020/09/2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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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2일을 낀 주말에 본인은 수인선의 전구간 복선전철 부활을 기념하고 경축하기 위해 답사 여행을 떠났다. 기왕 수원· 화성· 안산까지 가는 김에, 딱 수인선 열차만 타는 게 아니라 주변의 지역들까지 포함해서 아예 2박 2일짜리 경기도 서남부 종합 여행을 다녀왔다.
한 달 전에 다녀온 3박 4일짜리 여행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이번에도 짧은 시간 동안 철도와 관련된 많은 장소들을 답사하면서 좋은 경험과 추억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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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퇴근한 당일 밤에 곧장 여행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안양의 수리산 기슭에 있는 병목안 산림욕장이었다. 여기 한구석에 짱박혀서 텐트 치고 잠들었다.
조용하고 한적하고 시원하고, 계곡에 물도 졸졸 흐르고.. 여기는 정말 최고의 숙소였다. 나 말고도 큼직한 차 끌고 와서는 뒷문 열어 놓고 자는 아재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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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잘 자고 새벽에 눈을 떴다. 다음으로는 산림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목안 시민 공원'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경치가 워낙 좋으니 이른 아침부터 산책과 운동을 하는 인근 주민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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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거에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서울로 치면 용마산 채석장을 리모델링한 용마 폭포 공원 같은 곳이다.
여기서 채집한 돌이 경부선 복선화 및 수인선의 건설 공사에서 쓰였으며, 옛날에는 돌을 수월하게 나르라고 경부선 안양 역에서 여기까지 아예 철길도 깔려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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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채석장이었던 곳답게 넓은 풀밭과 거대한 바위 언덕이 일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인공 폭포도 꾸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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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내부에는 채석장 시절에 쓰였던 쬐끄만 선로와 협궤 화차 레플리카가 한구석에 전시돼 있었다. 오오~~ 표준궤와 협궤가 모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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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흔적이 있는 공원이라니 대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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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병목안'은 여기 지형의 특성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병목 현상' 할 때의 병목과 동일한 의미의 단어이다.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광명에는 폐광산을 공원화한 광명 동굴이 있는데.. 채석장도 뭔가 심상이 비슷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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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아래에도 경치 좋은 산책로가 잘 꾸며져 있었다. 집 근처에 이런 공원이 있으면 무척 좋겠다.
여기서 특별히 소개하지는 않지만 공원과 산림욕장 사이에는 캠핑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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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목안 공원 다음으로는 안양에 있는 다른 공원인 '삼덕 공원'을 찾아갔다. 얘는 도심에 가까이 있는 자그마한 근린공원이다. (공원도 많이 돌아다녀 보니 급의 차이가 있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바로 옆에 공영주차장이 있기도 해서 자가용 접근성은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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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덕 공원은 삼덕 제지라는 기업을 운영하던 업주가 지난 2003년에 은퇴하면서 공장 부지를 안양시에다 통째로 기부한 덕분에 조성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이런 훈훈한 미담만 전해지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사연이 전해진다.
업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와 음해· 파업을 남발하는 악성 노조의 갑질 횡포에 이골이 난 나머지, 거의 40년을 경영했던 공장을 에라이 싹 처분해 버리고 이민 간 거라고 한다..;; 덕분에 배은망덕한 종업원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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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쪽 구석에는 창업주의 흉상,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공장 굴뚝의 축소 레플리카가 남아 있다. 이 사람도 당연히 흙수저 개룡남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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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의 옆으로는 수암천이 시원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올여름에는 비가 많이 와서 가뭄 걱정 없고 개천마다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건 참 보기 좋았다.
얘는 먼저 봤던 수리산 병목안 계곡에서 발원해서 안양 역 건너편까지 흐른 뒤, 안양천으로 합류한다. 원래 시내에서는 대부분의 구간이 복개되었는데, 요 근래에 다시 뚜껑을 걷어내고 복원을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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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남산의 남쪽으로 용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있다. '둔지산'이라고 이름도 당당히 붙어 있지만, 그다지 높지 않고 전지역이 미군 기지로 점령되어 있기 때문에 이 이름은 인지도가 대단히 낮다.

그런데 안양에도 존재감이 서울의 둔지산 같은 산이 있다. 바로 수리산의 북쪽, 서독산의 남쪽에 있는 일명 박달산이다. 얘는 언덕 전체가 예비군 훈련장을 포함한 군부대들로 꽉 차 있다. 그러니 여기 주변엔 산책로나 등산로 따위는 일체 존재하지 않고 그냥 차량 진입로 한 곳만 있다.
서울 근교에서 예비군 훈련장이 있는 산을 따져 보자면 서북부에는 노고산, 동남부에는 인능산이 있는데.. 서남부에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산이 바로 이 산인 셈이다.

뭐, 얘도 그냥 수리산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수리산의 유명 봉우리는 저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북악산과 북한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그리고 관악산과 삼성산이 다른 산인 것처럼 여기도 뭔가 다른 산으로 취급하는 것 역시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본인은 수리산은 오른 적이 아직 한 번도 없다.;;

여기까지 온 김에 본인은 인터넷 지도 로드뷰로 볼 수 없는 풍경도 좀 염탐을 했다.
안양 구경은 오전에 이 정도로 한 뒤, 본인은 시흥을 거쳐서 더 남쪽 안산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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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27 08:36 2020/09/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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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청도 관광

짧은 시간 동안 이곳 저곳을 우산 들고 돌아다니느라 꽤 힘들었는데.. 곧장 또 청도로 이동했다. 칠곡에서 대구까지는 경부 고속도로(1), 대구에서 청도까지는 대구-부산 고속도로(55)로 답이 딱 나왔다.
경부는 차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니는 차도 그 이상으로 많고 비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만치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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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와인 터널은 남성현 역에서부터 길 안내가 잘 돼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길 곳곳에 토사와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역시 폭우로 인해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 경치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왜관에 이어서 청도까지 경부선 폐터널을 연달아 감상하는 것을 노렸는데.. 아쉽다. 어쩐지 주변에 주차된 차들이 너무 없어 보이긴 했다.
허탕 치고 돌아가는 관광객들에게 주변 상인들이 복숭아라도 팔려고 들이밀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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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 이름인지 단순 사자성어인지 알 수 없는 이 한자 문구는 경부선을 건설하던 당시에 일본인이 새겨 놓은 것인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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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터널에 못 들어간 대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빗길을 뚫고 대신 찾아간 곳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과 내부의 기념관이었다. 청도에 이런 역사적 사연이 있었구나~!
단, 놀랍게도 포항에도 기계면에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이 있으며, 두 지역이 서로 자기가 새마을 운동의 원조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이름도 참 새마을스럽게 '기계'네..;;;

다만, 두 곳의 자료를 대조해 보면, 시기적으로 원조 발상지는 청도가 맞는 듯하다. 포항 저 동네는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첫 성과가 가장 탁월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칭찬을 들은 마을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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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대대적인 마개조 사업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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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기념관은 단순히 원조가카의 치적을 자랑하는 보수 성향의 성지가 아님을 주의하라. 1957년은 아직 1공화국이지, 박통이 집권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박통의 집권 전부터 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몇몇 지도자들이 스스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힘을 합쳐서 길을 닦고 주민들 의식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코앞에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데 여기다가 열차도 세워 달라고 철도청에다 투서를 찔러 넣고 돈 모아서 철도역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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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1969년 여름, 경상도의 수해 현장 순시를 마친 박통의 눈에 이곳 신도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곳의 내력이 보고되었다.
이것을 보고 박통은 feel이 꽂혀서 그 해 11월에 농촌 근대화 촉진법을 발표했다고 한다..;; 류 태영 박사 같은 참모의 도움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우리는 할 수 있다 / 잘 살아 보세" 의식 개조 농촌 근대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외로 1960년대 3공 시절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런 것만 있었지 국가 차원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부터 자체적으로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던 마을이라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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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최고 등급 열차 이름도 새마을호가 되고... 박통의 따님은 '새마음(!!!)의 길'이라고 20대 중반의 나이로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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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가 K팝, 한류, K방역-_- 같은 것보다 더 선하고 건전한 문물을 세계에 전한 것이었다.
이웃의 중공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뻘짓을 하면서 자폭하던 동안, 한국은 그나마 제정신 박힌 건전한 운동을 하며 중흥을 이룩한 것에 그 후손들은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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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는 대통령이 되기 1년 남짓 전에 여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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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더 이상의 기념관 내부 사진 소개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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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엔 공원도 넓게 잘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맑을 때 왔으면 경치가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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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에 이어 여기서도 박 정희 대통령 동상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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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거 역은 실제 역사는 수십 년 전에 철거되고 없지만, 이 공원 내부에 레플리카가 지어져 있었다. 마치 중앙선 구 능내 역, 영동선 양원 역, 함백선 함백 역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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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은 이런 풍경의 마을 내지 펜션촌으로도 이어졌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개천은 역시 흙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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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처럼 여기도 이렇게 산의 측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구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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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이 철거되고 역명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마치 옛날 군함 백두산함이 스크랩되고 현재 마스트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을 답사한 뒤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청도 역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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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한 지 벌써 7년이 넘은.. 과거 한국 철도계의 왕자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한 편성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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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해 말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성지 순례를 이제야 하게 됐다.
새마을호 디젤 동차 실물을 만난 기쁨도 잠시.. 열차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표면 곳곳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고, 열차로 올라가는 사다리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심지어 거미줄에 큼직한 거미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고 신경을 쓰고 지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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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에는 새마을호 열차뿐만 아니라 아주 자그맣게 토속 공원이 꾸며져 있기도 하다. 예전에 중앙 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부산 방향의 테마 공원의 하위 호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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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것으로 둘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
해가 진 뒤에야 허기를 달랜 뒤, 잠은 교외의 어느 으슥한 공원 정자에다 텐트 치고 잤다. 환상적이었다. 비는 저녁쯤에 그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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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9 19:36 2020/08/2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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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일대 관광

칠곡 관광의 제1부는 전적 기념관 구경이었고, 제2부는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 소방서 앞 사거리" 일대 답사 형태로 진행됐다.
여기는 경부선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에 쓰였던 구 철교(지금 "호국의 다리")와 구 터널이 남아 있으며, 이것 말고도 아기자기한 의미를 지닌 공원들이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 걱정도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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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 경부선 왜관 터널의 입구이다. 경부선이 단선이던 시절, 1905년부터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은 철길이 여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지금은 터널 바로 옆에 식당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폐터널은 사유지의 창고로 개조되어 방치되는 편이다만.. 얘는 등록문화재로 정식으로 등재되고 터널의 양방향이 뚫려서 공원으로도 이어지게 개조되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위해 나름 노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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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나 터널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바닥에는 일부 빗물이 떨어지고 고인 곳도 있었다.
터널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 그림도 옆에 같이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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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근처의 "왜관 소공원"이라는 아담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공원은 여기 저기에 공터와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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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과 같은 열매가 열린 가로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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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소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애국 동산'이라고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으리으리한 묘비와 함께 소개돼 있는 묘지 언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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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병철(1903-1945). 유 관순과 거의 동갑내기로 10대 중반의 나이로 칠곡에서 3· 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정모 한번 했고..
그 뒤로 임시정부와 신간회에 후원, 야학 교사, 그리고 이미 다 와해되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까지 다양한 분야 계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이 때문에 3· 1 운동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뒤인 1938년에 한번 더 경찰서 정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이력만으로 그는 일제 말기에 불령선인으로 찍히기에 충분했다. 감시를 받으며 지내던 와중에 1945년 여름, 사실상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터지자 또 어거지 같은 꼬투리를 잡혀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아마 호송 열차를 타고 대구로 끌려가는 길이었지 싶은데.. 그는 열차가 낙동강 철교를 달리고 있을 때.. 비록 손은 결박 당했겠지만 경찰들을 몸으로 뿌리치고 확 뛰쳐나가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순국한 때는 8월 7일..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가 완료되어 새로운 낙동강 철교가 개통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절이었고, 저 때는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 작은 꼬마가 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1주일~열흘 남짓 동안 조금만 수모를 참고 버텼으면 조국의 광복을 보고 석방돼 나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런 바깥 소식, 게다가 일제에게 불리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총칼 폭탄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정도 행적은 사형 당할 정도의 죄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런 시기에 또 잡혀 들어가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서든 살아서 나오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영원히 행방불명된 김 익상 의사의 최후와 비슷..)
아니면 고문 당하면서 동지들의 신변까지 실토하게 될 것을 염려했거나..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일제가 원폭 맞아서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온 것은 미국에게나 우리에게나 매우 엄청난 행운이었다.
자국민한테도 1억 옥쇄 X랄하던 미친놈들이 시간이 충분했으면 나가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다 죽이고 증겨 인멸하고 파괴하고 나갔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도망칠 때도 위안부들 다 죽이고 나갔던 것처럼.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파리를 몽땅 불지르려고 했던 것처럼..
도 병철 같은 사람이 체포되던 중에 괜히 자결을 한 게 아니었다. "1주일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같은 아쉬움도.. 결말을 다 아는 후손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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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의 뒷면에는 여기에 무덤은 없지만 어쨌든 칠곡 출신의 애국지사들 수십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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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덕의 꼭대기에는 UN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왜관 지구 전승비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정식 현충원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보훈 시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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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터널, 소공원, 애국 동산 다음으로 경부선 구교량이라 할 수 있는 '호국의 다리'를 반쯤 건너 보는 것으로 칠곡 관광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고 풍경은 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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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강변 공원도 금방이라도 침수될 듯 물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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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도 중앙선의 옛 시내 관통 구간이 교량(장군교)에서 폐터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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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7 08:35 2020/08/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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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칠곡 다부동/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 호국 평화 기념관

다음으로 1시간이 좀 넘게 운전해서 칠곡에 갔다. 꼬불꼬불 해변길과 포항 시내를 거친 뒤, 20번 고속도로(포항-익산)를 처음으로 달려 봤다. 다만, 여전히 몹시 피곤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거의 30분 가까이 기절하듯이 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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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장 먼저 백 선엽 장군의 공훈이 남아 있는 다부동 전적 기념관에 도착했다. 55번 고속도로 다부 IC의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아가기 쉬웠다. 기념관의 뜰에는 탱크와 미사일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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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9월에 낙동강 전선에서는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가히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한 혈투가 벌어졌다. 여기서 물러나고 대구까지 북괴에게 빼앗기면 더 물러날 곳도, 더 확보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됐다면 남한 수뇌부는 진짜로 제주도나 외국 망명까지 고려하는 지경이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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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은 비가 내려서 온통 물바다인데 마침 비가 전혀 들어오지 않는 쉼터가 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새참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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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 경찰 추모비와 무명 용사 묘지가 있었다.
백 선엽 장군은 종북 반역 매국 세력의 패악질로 인해 자신이 현충원에 못 들어간다면 차라리 자기를 여기 다부동 전적지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던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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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기념관은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리모델링 공사 중이어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규모도 작고, 홈페이지를 보니 막 특별한 것이 전시돼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하필 백 선엽 장군의 서거로 인해서 이곳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시기에 기념관이 개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리모델링 자체는 백 장군의 서거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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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인은 서쪽으로 10여 km 정도 더 이동해서 낙동강 근처까지 갔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과 호국 평화 기념관은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데, 후자가 뭔가 전쟁 기념관의 칠곡 버전처럼 제법 규모 있게 꾸며져 있었다. 여기부터 먼저 들어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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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곳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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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편과 악의 무리들이 나란히 대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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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칠곡은 6· 25 사변 당시에 남한이 영토의 90%를 빼앗기는 위기에 처했을 때, 낙동강을 마지노 선으로 잡고 최후의 접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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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있는 분들은 이 기념관을 직접 방문해서 관람해 보시기 바란다.
일일이 사진을 소개하지는 않지만 1950년 8월 하순에 벌어졌던 유학산 전투, 수암산 전투, 가산산성 전투 이런 것도 다뤄져 있다.

이랬는데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덕분에 불과 한 달 뒤인 9월 하순엔 남북 영토가 전쟁 이전 시점으로 되돌아갔으니 정말 고맙고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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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주인공의 실제 모델 인물. 그랬구나.
다만, 내 기억으로 영화에서는 형이 중공군에 합류했고 강원도 산간의 금성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뭔가 각색이 있었던 듯하다.
중공군이 칠곡까지 남하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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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꼭대기 층에서는 아래의 낙동강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경부고속선 철길이 근처를 지나는데, 마침 주행 중인 KTX를 굉장히 괜찮은 구도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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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의 입구이다. 저 언덕 위에 자그맣게 보이는 건물이 방금 관람했던 호국 평화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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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 기념관은 평화 기념관보다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적었지만 최소한 전투 장면을 인형으로 재현해 놓은 모습은 유익했다. 김 재옥 기념관과 장사 상륙 작전 기념관에도 이런 레플리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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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유치하고 원색적인 북괴 비난 같지만..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괴의 체제가 바뀌지 않는 한, 쟤들이 전면 개방되지 않는 한 우리도 저런 놈들과 협력, 통일 같은 수작에는 절대로 응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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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야외엔 이런 전적비도 있었다. 둘째 날 오전에는 이렇게 전적 기념관들을 관람하며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4 19:34 2020/08/24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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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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