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육해공 교통수단에는 뭔가 인도주의와 관련된 법적 의무라는 게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 자동차: 뒤에서 긴급자동차(구급차,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면 반드시 양보하고 길을 트고 비켜 줘야 한다.
- 비행기: 비상 착륙 요청은 국적 불문하고 근처에 있는 어느 공항에서나 최우선적으로 받아 줘야 한다.
- 선박: 망망대해에서 어떤 선박이 조난/구조 요청 신호를 보낼 경우, 근처에서 이 신호를 받은 선박은 의무적으로 반드시 달려가서 도와줘야 한다. 이것 때문에 그 배의 원래 스케줄이 꼬여서 손해 본 것에 대한 보상은 사람부터 구하고 나서 다음에 보험사에서 해 준다. 현장 근처에 있는데도 이를 정당한 사유 없이 씹은 것으로 드러난 선박은 처벌 받는다.
비행기는 다른 교통수단과 달리, 비상 착륙을 위해서 부득이하게 연료까지 버리는 상황도 발생한다.. 그리고 비상구 좌석에 앉은 승객은 승무원과 함께 다른 승객들의 대피를 도와야 한다는 규정도 타 교통수단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관행이다.
그에 비해 철도는 워낙 꼼꼼하게 통제된 선로에서 정규 노선 차량만 다니다 보니, 타 교통수단과 같은 예외적인 규정 같은 게 존재할 여지가 없다. 대통령이 탄 전용 열차가 몰래 지나가게 되면 걔를 0순위로 먼저 보내 주느라 근처의 정규 열차들의 스케줄이 몽땅 작살 나긴 하지만.. 이건 흔히 발생하는 일이 아니다.
요즘은 우리나라가 교통 관련 법 집행이 쬐끔은 선진화돼서 긴급자동차를 고의로 비켜 주지 않으면 처벌하고, 또 출동 중인 소방차는 불가피한 경우 불법주차 민폐 길막 차량을 강제로 밀어 버려도 되게 바뀌고 있다.
오죽했으면 일부 지역에서는 이렇게 소방차가 길막 차량을 밀어버리는 훈련까지 공개적으로 하게 됐다. 소화전 근처에 차가 불법으로 세워져서 공간 확보가 안 되면 그 차를 부수고 호스를 끄집어 낸다. 다음은 지난 4월 말에 경남 김해시에서 시행됐던 소방 훈련에 대한 보도 자료이다. (☞ 링크)
이걸 보니 난 옛날에 철도청에서 건널목 사고 공개 시연을 주기적으로 했던 게 생각나더라.
건널목 사고가 하도 많이 나자 철도청에서는 "제발 건널목을 무리해서 통과하지 마세요~ 열차는 자동차 같은 급제동을 절대로 못 합니다~!! 무거운 열차에 스치기만 해도 차고 사람이고 다 박살 납니다!"라고 홍보하고 또 홍보했는데.. 나중에는 고육지책으로 시청각 교보재를 직접 만들게 됐다.
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1996년, 97년,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는 KTX의 개통을 앞두고 2003년에 했다.
교외선 일영 역 근처의 선로에다가 폐승용차를 한 대 세워 놓고.. 열차가 200미터쯤 앞에서 급제동 걸지만 그래도 승용차를 밀고 100미터 이상 나아가는 걸 촬영해서 보도자료로 만들었다. 승용차는 당연히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안의 사람 마네킹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때 현장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비 법조인인 사법연수원 연수생들을 잔뜩 초청했다고 한다. 이런 사고는 철도 쪽에 법적으로 잘못이 없다는 걸 특별히 내세우고 싶었던가 보다.
이게 새마을호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오던 시절에 대한민국 철도청에서 하던 행사 중 하나였다.;;
* 주요 건널목 사고 일지
(1) 지난 2011년엔 서울-대전 구간을 기존선으로 달리던 KTX가 지금의 세종시 부근 모 건널목에서 승용차와 충돌해서 어느 중년 여성 운전자가 사망했다. 믿을 수 없지만.. 이 사람은 차단기를 들이받아서라도 건널목을 빠져나갈 생각을 안 하고, 하다못해 차를 버리고 몸만이라도 빠져나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정말 어리석게도 꼼짝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가만히 있으면 열차가 알아서 자기 앞에서 정지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2) 2019년 가을엔 동해시 망상 해수욕장 부근의 영동선 건널목에서.. 어느 승용차가 열차가 뻔히 달려오고 있는데도 자기가 먼저 통과하겠다고 차단기가 없는 차로로 역주행 객기까지 부리다가 와장창..! 운전자인 아들과 동승자 노모가 모두 나란히 사망했다.
(3) 2002년 5월 초에 전라선 상행 새마을호에서 발생했던 건널목 사고 콤보는.. 이 바닥의 전설을 넘어 가히 레전드 급이다. 한 열차가 여수, 완주, 익산에서 3연속으로 건널목을 무단횡단하는 노인을 치는 사망 사고를 냈기 때문이다.
* 여담: 특수한 차량
대통령 전용 자동차는 시꺼먼 방탄 리무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고, 열차는 자주 쓰이지는 않지만 우리나라 기준으로 경복호라는 게 있다. 비행기는 air force one이 있는 반면, 선박 버전은 딱히 그런 게 없는 듯하다. 인도네시아처럼 왕창 많은 섬으로 이뤄진 나라 형태가 아닌 한 별로 필요 없기 때문인지도..??
이런 VIP가 업무를 위해 이용하는 육상 교통수단들은 모든 기존 교통 신호들을 씹어먹으며 어쩌면 타 긴급자동차들보다도 우선순위가 높은 0순위이다. 아니, 아예 사전에 길을 몽땅 틀어막는다. 이런 차가 신호에 갇혀서 멈춰 서 버리면 스케줄에 지장이 생길 뿐만 아니라 보안에도 굉장히 취약해지기 때문이다.
경복호도 ITX 새마을 도색(빨강+검정)으로 칠을 한 걸 보니, 쟤도 지금까지 계속 관리는 하는가 보다.
한때는 KTX의 개통 초기엔 모 편성 열차의 어느 객실이 VIP용으로 예약되어 있어서 일반인에게 발매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이 사실이 언론에 왕창 공개되어 버리고 그게 VIP의 업무에 크게 유용하지도 않았던지라, 이런 관행은 없어지고 그 객차도 몽땅 일반실로 공개되었다.
한편, 다른 차량/기체를 끌어서 이동시켜 주는 물건도 자동차에는 견인차나 카캐리어, 철도에는 입환기, 비행기는 토잉카, 선박은 예인선.. 종류별로 다 있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