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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들은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인 1611년에 출간됐던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이 무오하고 완전하다고 그렇게도 의미 부여를 하며 떠받든다.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유일주의자들이 그렇게도 떠받드는 킹 제임스 성경 원판은 실제로 어떤 모양이었을까? 그 성경이 정말로 단 한 치의 오류도 없었고 내용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걸까?

요즘은 인터넷에 몇백 년 전의 옛날 영어 성경도 본문이 다 올라와 있고, 1611년도 KJV 종이책의 스캔 이미지까지 몽땅 살펴볼 수 있다. (☞ 관련 링크) 그러니 저 의문에 대한 객관적인 검증도 아주 간편하게 할 수 있다.

1. 철자법의 변화

오늘날 우리가 읽는 1611년도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건 1611 version(역)의 1769 edition(판)이다.
KJV는 영단어 스펠링 체계의 변화 때문에 단어 표기를 몇 차례 기계적으로 치환하여 판이 바뀐 것이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용을 개정하고 변개한 게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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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NKJV(뉴 킹 제임스)가 한 것처럼 thou ye thee 따위를 you라고 바꾼 건 '하느니라 / 하노라'를 '합니다'라고 고친 것과 비슷하다. 하물며 devil을 demon으로 바꾸고 hell을 hades라고 바꾼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정도면 말의 의미와 뉘앙스가 달라진 개정· 변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sunne, moone, booke를 sun moon book으로 바꾸고 heauen을 heaven으로 바꾸고, conteyn을 contain으로 바꾼 건..??? 그냥 '읍니다'를 '습니다'로, '홍당무우'를 '홍당무'라고 고친 것에 불과하다. 말이나 발음은 달라진 게 전혀 없고 오로지 표기만 바뀌었을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나라가 임하옵시며"로 고쳤다거나, "어린 백성"을 "어리석은 백성"으로 고친 정도의 변화조차도 아니다.

f처럼 길게 늘어뜨린 s 변종이 s와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진 건.. 한국어의 역사로 치면 아래아가 없어지고 ㅏ/ㅡ로 통합된 것과 거의 같다.
KJV의 우리말 번역본인 흠정역의 경우, 5판(400주년 기념판, 2011), 6판(마제스티판, 2021)처럼 edition의 변화가 오· 탈자 교정뿐만 아니라 드물게 오역 교정을 포함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영어 KJV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2. 오· 탈자

그럼 KJV 1611 초판은 스펠링 변화 말고 일체의 오· 탈자가 없었느냐..?? 그렇지는 않았다.
저 때는 자동차도 없고 컴퓨터는커녕 타자기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원고를 마차에다 실어서 가져와서는 식자와 조판에도 정말 지루하고 고된 쌩 노가다를 거쳐야 했다.

설령 작가 내지 번역자가 완벽하게 원고를 내어 줬다 해도, 성경 정도로 방대하고 빡빡 두툼한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삐끗 실수가 전혀 안 들어간다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일일이 베껴 쓰는 것보다는 나았으며, 인쇄공이 더 옛날의 서기관 필경사보다 처지가 더 나았다. 그게 문자를 기계로 다루면서 최첨단 지식과 정보 문물을 접하는 직업이었으니 말이다.

KJV 1611 초판이 출간되고 나서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대략 20여 군데의 오· 탈자가 책에서 발견되었으며, 이는 수 년~10수 년 이래로 시정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명사 he/she/it이 헷갈렸거나 a/the 같은 관사가 빠지는 등의 자잘한 실수였다.

그나마 내용이 유의미하게 바뀌는 변개에 가까운 크리티컬한 녀석이 이거.. 시 69:32이었다. God이 good으로 잘못 찍혔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을 찾는 너희의 마음이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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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과 good은 스펠링이 비슷하고, 비슷하게 '좋은' 심상의 단어이고 God is good이라는 관용구까지 있다. 실수로 잘못 식자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농후했다.
게다가 이 typo는 출간된 지 2년 만에.. 그야말로 제일 먼저 발견되어 시정된 축에 든다.

이런 오탈자나 철자법 변경은 개정· 변개가 아니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건 인쇄 단계에서의 실수를 바로잡은 것일 뿐, 처음 원고를 작성한 번역자가 원고의 컨텐츠를 수정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키백과를 편집할 때도 "사소한(trivial) 수정"이라고 표시하는 게 있지 않던가? 딱 그런 격이다.

이건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요인이 전혀 아니며, 오히려 부족하고 실수하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역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당연히 KJV 1611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본문 자체는 1611년 이후로 정말로 유의미한 개정 없이 정착됐다.

흠.. 글을 써 놓고 보니 이번 1번과 2번 아이템은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책의 부록에 실려 있는 "킹 제임스 성경 본문 개정 의혹에 대한 전면 반박" 이야기의 판박이가 됐다. 이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그걸 참고하시기 바란다.

3. 외경 관련 루머

철자법, 오· 탈자 다음으로.. 심지어 외경 수록 여부를 갖고 1611년 KJV 원판에 대해 이상한 얘기를 퍼뜨리는 진영이 있(었)다.
"1611년판은 비성경적인 가톨릭 외경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하고 오점이 있다~~ 1655년판이니 17xx년판이니 그게 외경이 제외된 진짜 KJV 원조다.." 이런 요지의 얘기 들어 보신 분 계신가?

아예 대놓고 KJV 유일주의를 반대하고 원문비평 사본학 운운하면서 변개된 현대 역본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얘기는 누가 무슨 의도로 퍼뜨리는지 모르겠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저런 부류의 얘기엔 전혀 현혹될 필요가 없다.

종교 개혁자와 개신교 동네에서는 가톨릭과 달리, 외경이 성경이 아니라는 인식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은 성경만 아닐 뿐, 성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제2류 교양 텍스트 내지 종교 문학 정도로는 인정했다.

당장 KJV 1611 책의 앞부분에 들어간 "역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을 보면 외경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어거스틴을 포함해 가톨릭 성인(??)이나 초대 교회 교부들의 말을 인용한 게 종종 나온다. 그게 그 당시 종교계 석학들의 지쩍 밑천이고 성장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오로지 반가톨릭 반개신교(!!!)에만 충실한 오늘날의 bible baptist들이 보면 살짝 문화 충격 동심파괴를 경험할 수도 있다. 한킹이건 흠정역이건 저 텍스트가 번역되어 수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모를 것이다.

그러니 KJV는 본문이 명백한 반가톨릭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관행에 따라 외경이 들어갔었다. 단지, 본문이 아니라 부록으로 들어갔을 뿐..!
KJV가 가톨릭 성경이었다면 구약이 39권이 아니라 52권이 됐을 것이다. 에스더기가 10장 3절에서 끝나지 않고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KJV는 외경을 싣되, 외경을 성경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세상에 그 어떤 가톨릭 성경도 에스더기의 외경 부분을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 .. 이렇게 별도로 처리하지 않았다.

그때는 성경책을 이렇게 편성하는 것만으로도 번역자가 교황 추종자들한테 해코지· 암살을 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십 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개신교 바닥에서는 외경을 읽지 않게 되었고, 외경이 성경책에서도 자연스럽게 완전히 제외되었다.

정확한 역사 맥락을 모르면 아폴로 달 착륙 자작극 음모론 같은 데에 속듯, 비슷하게 KJV 본문 관련 음모론에도 속기 쉽다.
KJV 1611에 외경이 들어가 있었던 건 당시 관행에 따른 부록 명목이었을 뿐, 본문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무슨 예수회의 농간 같은 급으로 확대 해석을 할 필요가 없다.

4. 인쇄공 로버트 바커

끝으로, 옛날 사람을 한 명 소개하고 글을 맺도록 하겠다. 17세기 잉글랜드 사람이었던 로버트 바커. (Robert Barker)
제임스 1세 왕에게 직통 고용돼서 킹 제임스 성경 1611년도 종이책 초판을 조판· 인쇄한.. 역사에 길이 남을 인쇄공 내지 출판 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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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왕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서 평생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러나 1611 이래로 딱 20년 뒤 1631년, 제임스 1세 이후로 아들 찰스 1세 시절에 새로 편집된 킹 제임스 성경을 인쇄하던 중에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십계명 구절에서 NOT을 빼먹어서 '너는 간음할지니라' wicked bible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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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KJV 초판 시절에 발견됐던 여느 자잘한 오· 탈자와는 차원이 다른 너무 큰 사고였다.
사악한 성경책은 전량 리콜· 회수되어 폐기 처분됐지만, 몇 권은 살아남아서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그는 무슨 투옥· 사형까지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거액의 벌금형을 선고받았으며, 그 뒤로는 몰락해서 그에 대해 근황 기록이 딱히 전해지는 게 없다. 1645년에 사망했다고만 전해질 뿐.

조선의 장 영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왕에 의해 고용된 특정 분야 기술자였고, 역사에 기억될 업적을 남기기도 했는데..
장 영실은 왕의 가마가 부서지는 초대형 사고가 나는 바람에 리타이어 당하고 기록도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성경 신자라면 킹 제임스 성경이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비록 이 성경의 외형이 우리가 지금 보는 성경책과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1611 KJV라는 타이틀에 본질적인 영향을 주는 차이점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1) 하루는 성경 역본을 비교하느라 똑같이 NIV로 동일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내용이 서로 같지 않아서 본인과 상대방이 놀란 적이 있었다. (무슨 구절이었는지는 기억이 잘..) 알고 보니 NIV도 1984년판 이후에 2011년경에 개정됐더라.. 이럴 수가..!!
TNIV 같은 바리에이션이 아니라 NIV 자체가 또 개정된 것이다. KJV는 이런 식으로 쓱 바뀐 게 없다~!!

(2) 글쎄, 이 문제에 대해 덕질을 더 깊게 들어가면 KJV의 캠브리지 판과 옥스퍼드 판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룻 3:15의 끝부분에서 도시로 들어간 사람이 룻(she)인지 보아스(he)인지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인은 정답만 알지 더 구체적인 내력이나 사연은 아직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나중에 더 다룰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3) 하나님은 민족과 언어를 나누어서 인간들의 생활권에 '구획/파티션'을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한 성경과 한 믿음으로 인간들이 무질서에 빠지지 않고 하나가 될 수도 있게도 해 놓으셨다.
꼭 학교에서 가까이 사는 집 애가 성적 우수 모범생이 아니듯.. 예수님과 동시대 같은 지역을 살았다고 해서, 영어가 모국어라고 해서 특별히 신앙 생활을 더 잘하는 게 아니다.

다만, 세계 선교와 복음화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접근성이 훨씬 더 좋은 게 사실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에게 더 많은 책임이 요구된다는 것이 성경의 합리적인 법칙일진대(눅 12:48), 우리 주님도 한국어 화자보다는 KJV 같은 성경을 직통으로 읽을 수 있는 영어 화자에게 저런 사명에 대한 책임을 더 '많이' 묻기는 하실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19 08:35 2023/03/1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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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본 간의 차이들

1. 변개 유형 (신약)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가 타 성경에서 변개됐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뉜다.

(1) A형 오리겐 변개(원문)
요한복음 "독생하신 하나님", "아들을 순종치 하니하는 자는"
벧전 2:2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 골로새서 "그분의 피로" 삭제 같은 것들.
내용이 차이가 나는 것은 대체로 이 유형에 속한다.

(2) B형 번역 이슈(원어)
이사야서 루시퍼, 사도행전 이스터, 누가복음 갈보리, 요나가 '고래' 배 속, 증인이냐 순교자냐, 지옥이냐 음부냐 등..
같은 원어가 서로 다르게 번역된 것들이다.

(3) C형 후대 본문비평에 의한 변개(원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이야기, 요한의 콤마 따위
이건 옛날 사람보다는 웨스트코트-호르트의 기여도가 더 높은 변개이다.
수백 년 전의 옛날 성경에는 심지어 가톨릭용이라고 해도 이 C형 변개가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2. 변개 유형 (구약)

사실, KJV 옹호자/유일주의자들은 구약보다는 신약의 차이점에 관심이 더 많다. 신약이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위주로 전수되어 왔으며, 본문 계보가 명백하게 이분화돼 있어서 번역의 차이에 앞서 내용의 차이가 더 많기 때문이다.

허나, 구약도.. 맛소라 본문 덕분에 본문의 변개 문제는 덜한 편이지만.. 원어의 미스터리함이 아무래도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보다 더 심하다. 그래서 번역의 차이로 인한 잡음이 더 많고, 원어 말장난이 틈탈 여지도 더 많은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당장 기억하고 있는 예시 몇 가지일 뿐이다. 보다시피 숫자가 막 대놓고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다.

  • 4년 뒤 / 40년 뒤에 압살롬의 반역 (삼하 15:7)
  • 3년 뒤에 십일조 / 3일마다 십일조 (암 4:4)
  • 온천 / 노새 (창 36:24)
  • 엘하난이 골리앗? 골리앗의 동생?을 죽임 (삼하 21:19)
  • 요셉에게 색동옷 / 소매 긴 옷 (창 37:3)
  • 그들을 톱으로 잘라서 끔살시켰다 /톱으로 강제 노역을 시켰다 (대상 20:3)

그러니 내가 주장하는 건.. 이게 다 맞을 수는 없고, 그래도 어느 것 하나가 정답이긴 할 거라는 점이다.

3. 의외로 KJV처럼 번역된 구절

한글 개역성경(개역개정 포함)이나 심지어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공동번역 성서는 KJV 유일주의자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아쉽지만 부패한 본문에서 만들어진 변개된 역본이다.
그런데 얘들은 아주 극소수 예외적으로 KJV 스타일로 옮겨진 표현도 있긴 하다.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지만.. 복습해 본다.

(1) 개역성경의 경우, 창세기 요셉의 옷이 색동옷/채색옷, 어쨌든 무지개 같은 컬러풀한(창 37:3) 옷이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KJV와 일치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현대의 역본들은 장신구 치장이 잔뜩 달린 화려한 옷, 소매 긴 옷 등으로 표현이 바뀌는 추세이다.

(2) 엡 4:12에서 KJV는 “각종 은사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perfecting) 한다”고 말하지만, 타 역본들은 성도들을 “준비시킨다”(equip, prepare)고 되어 있다.
이건 마치 마태복음 28:19에서 “가르치는”(KJV) 것과 “제자 삼는”(나머지) 것하고 비슷한 차이점 같다. 의미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엡 4:12의 경우, 개역성경도 의외로 ‘준비시켜’ 대신 ‘온전케’ 한다고 KJV와 동일하게 번역되었다. 이건 원문의 차이점인지, 아니면 색동옷 같은 번역 스타일의 차이점인지 잘 모르겠다.

(3) 다음으로 요 3:36은 “아들을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KJV)가 “아들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고 바뀐 걸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런데 얘는 의외로 공동번역 성서도 “아들을 믿지 않는 자”라고 KJV와 동일한 워딩을 했다.

(4) 고후 13:11의 끝인사가 KJV만이 “굿빠이, 잘 있으라, 안녕히 계시오” 등의 작별인사인 farewell이다. 나머지 역본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의 다 “기뻐하라”(rejoice)라고 바뀌었다.
우리말 역본 중에서는 심지어 말보회의 한킹조차도 ‘기뻐하라’라고 번역했는데(왜???).. 그런데 공동번역 성서는 “안녕히 계십시오”라고 farewell이라는 의미로 KJV처럼 번역되었다.

공동번역 성서는 막 원어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기보다는.. 흐름상 의역을 하느라고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게 아닌가 싶다. ‘믿는 자’ 다음에 논리적으로 ‘믿지 않는 자’가 나오는 게 맞고, 그리고 서신이 다 끝나는 문맥이니 뜬금없이 ‘기뻐하라’보다는 ‘굿바이’가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4. 진짜 어려운 것

유경험자로서 말할는데, KJV는 겨우 -eth, thou thee ye, gay clothing, prevent 같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고어가 어려운 건 절대 아니다. 그건 그냥 며칠이면 적응되고 익숙해지니 하나도 문제될 것 없고..

진짜 어려운 건 대명사와 도치이다. 길고 복잡한 문장에서 개나 소나 it he 대명사가 너무 많아서 뭘 가리키는지 분간이 안 될 때.. 그리고 복잡한 도치에서 주/객 관계 따지는 게 좀 어려울 수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왕상 3:27 솔로몬의 재판에서도 "저 여자가 진짜 애엄마다" 할 때도 KJV는 그냥 평범하게 her이다.
두 여자 중 누구를 가리키는 her인지를 기계적인 어휘 통사 구조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에 비해, 다른 역본들은 약간 해석을 추가해서 the first woman이라고 써 놓은 편이다.

솔로몬의 재판이야 워낙 유명하고 문맥이 뻔하기 때문에 "아이를 차라리 저 여자에게 주고, 죽이지는 말아 주세요!"가 진짜 엄마인 걸 모를 사람이 없을 것이다. 허나, 그런 유명한 얘기 말고 더 어려운 문맥에서는 대명사 포인터를 역참조할 때 머리에서 쥐가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데 KJV가 그렇게 자비심 없게 번역된 이유는 애초에 원어 원문의 표현이 그렇게 자비심 없고 모호했었기 때문이다. KJV는 표현 추가나 윤문을 극~~도로 꺼리면서, 불가피하게 단어 하나를 추가하더라도 이탤릭체로 티를 내면서 아주 보수적으로 정직하게 번역됐다는 걸 생각해 보자.

5.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목재는 무슨 나무일까..??
성경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가 등장한다. 나는 당연히 전나무, X나무, 포플러나무 같은 친근한 나무 내지 레바논의 백향목, 아니면 출애굽기에서 성막 제조용으로 죽어라고 나오는 시팀나무 이런 걸 떠올렸는데.. 노아의 방주는 그렇지 않더라.

창 6:14에 따르면 고펠나무 gopher wood라고 한다.
그러나 gopher라는 단어는 고유명사 대문자가 아닌 소문자이면서 여기 말고 성경 다른 데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내장 사전을 이용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는--특히 킹 제임스 유일주의 진영에서 좋아하는 방식-- 이 나무의 정체를 밝히는 게 불가능하다.

심지어 킹제임스 흠정역을 출간한 '그리스도 예수안에'에서 편찬한 성경 용어 사전에서도 "노아의 방주를 지을 때 사용한 나무" 이상으로 설명이 더 없다. 다른 표제어들 대비 이상하리만치 풀이가 부실하다.
이건 그냥 통상적인 성서고고학이나 원어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옛날 한글개역 성경은 그냥 '잣나무'라고 했다가 개역개정에서는 '고페르 나무'라고..;;; 음역으로 바뀌었다.
영어는 뉴 킹 제임스에서는 gopher가 단독으로 생산성이 없는 사어라고 간주하고.. gopherwood 한 단어로 붙이는 기지를 발휘했다.;;
현대에는 이게 사이프러스 나무가 아닐까 하는 해석이 등장해 있다(NIV 등). 이건 본문 변개하고는 관계 없고 후대에 와서 등장한 견해이다.

심지어 "노아의 홍수 이후로 멸종하고 현존하지 않는 나무 품종일 것이다",
"애초에 나무 품종 명칭이 아니라 나무를 가공하는 방식의 명칭일 것이다. 혹시 이건 비슷하게 생긴 다른 히브리어 글자의 오기가 아닐까..?? '고페르'가 아니고 '코페르'이면 pitched tree (역청 바른 나무..??)가 된다는데?"

이런 낭설까지 있는가 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건 뇌피셜이 지나친 것 같다. 나는 성경 본문을 교정하는 정도로까지 선을 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도 킹 제임스 킹왕짱을 주장해 온 럭크만의 주석서에는 이 구절에 대해 뭐라 해설하고 있는지 있는지 문득 궁금하다.

참고로 이 gopher는 북미 다람쥐 동물이나 컴퓨터 고퍼 프로토콜과 스펠링이 우연히 같지만 이들과는 어원상 서로 전혀 무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5 08:35 2023/03/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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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목에는 KJV 유일주의라는 단어가 들어갔지만, 특정 역본을 옹호한다기보다는.. 무오류한 역본 하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더 원론적인 사실"에 대한 변증 위주이다.

1. 언어 관련

과거에 하나님은 친히 인류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언어와 문화, 민족 구분을 만들었다. 인간들을 강제로 찢어 놓고 파편화시켰다. 인류가 한꺼번에 동반 타락하는 것을 막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심판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훗날, 언어와 민족의 구분 없이 한 가족인 교회라는 것이 태동할 때는 하나님께서 제일 드라마틱한 기적이면서 사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하기도 했던 외국어 구사 표적을 주셨다.
그리고 알아듣지 못하는 타 언어 때문에 교회에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절대로 아니라고 고린도전서에서 거듭 강조하셨다. 세례/침례 문제와 비교하면 대략 이런 관계이다.

  • 스스로 자기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유아나 어린아이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침례도 아닌 세례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 통역 없이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할 외국어가 공석에서 남발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물며 외국어도 아닌 날랄랄따따 잡소리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원어'에 대한 동경, 환상이 있다. 하나님께 다이뤡트로 내리꽂혀진다는 하늘의 신비로운 언어, 천상의 기계어 어셈블리어뻘..???? C/C++ 고급 언어 짜끄레기나 구사하는 자기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언어라고 말이다.

그게 말은 방언 기도(하나님에게 직통 전달되는 =_=;; )요, 글은 도대체 실체는 모르겠지만 original 원어 원문 성경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이 hoax, myth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기독교는 "죽은 사람 갖고 장난치지 않으며 일체의 뒤끝이 없다(하늘 아니면 지옥.. 끝!)." 그리고 비슷한 차원에서, 무슨 신비로운 언어 주술 주문 말장난질이 없다.

하나님이 언어와 민족 구분을 만드신 것은 인간을 '배려해서'이지, 그런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을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정말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이고 인간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지 않는가?

이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유대인에게는 성문법인 율법을 주시고 이방인에게 양심의 법을 주셨다고 해서 이게 민족별로 개인 구원 접근성에 대한 차별은 절대 아닌 것과 같다. 유대인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소통하는 큰 특권을 받은 대신에, 법을 어겼을 때의 처벌과 책임도 더 컸다. 마음속에만 있는 양심의 법의 물리적인 근거· 실체가 율법이라는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논리로.. 하나님께서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다음으로 영어로 된 최종 권위 성경을 하나 남겨 주셨다고 해서 이것이 영어 모국어 화자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제공한 게 아니다. 관점을 좀 달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기왕 이렇게 민족과 언어가 다양하게 찢어진 와중에, 총체적인 무질서를 막기 위해서 기준 하나를 제정하신 것 자체를 나쁜 조치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만에 하나 불공평한 특혜라고 해도.. 지금 죽은 언어인 원어 공부한 신학자들에게만 불공평한 특혜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제일 접근하기 쉽고 대중적인 외국어인 영어에다가 특혜를 주는 게 훨씬 낫고 '덜' 불공평하다.

2. 비유

(1) 죽어서 지옥 간 사람이 지옥에서 살아 나와서 막 증언을 하고 "지옥은 정말 있어!! 니들은 정말로 지옥 가면 안 돼!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돼..!!" 이렇게 증언을 하면 사람들이 말을 좀 들을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눅 16장 끝부분

(2)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나고 신자들의 휴거까지 목격하고.. 반대로 초자연적인 재앙까지 겪으니 그때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성경 읽고 왕국 복음에라도 순종할 생각을 할 것이다.
→ 그러나 성경의 답은? 계 9:20

(3) 옛날의 히브리어 그리스어 쓰던 사람이 살아나서 우리에게 "어 이건 이런 뜻인데?" 교통정리를 해 주면 성경 번역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될 것이다. 현지인이 깡패 아니겠나?
→ 과연?? 성경의 답은??? @@@

(4)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왜 내게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이렇게 따지느냐?
→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원어 원문 성경을 보았거늘.. (이하생략)

(5) 계시의 확대

  • 예수님이 사도들이 죽기 전에 다시 오실까? (초대 교회 시절)
    → 예수님이 일곱 교회 경륜까지 다 찍고 나서 21~22세기쯤엔 오실까? (현재)
  • 교황은 바로 그 적그리스도일까? (중세 유럽 종교개혁자들의 생각)
    → 교황은 미래 진짜 적그리스도의 짝퉁 예시 모형인 걸까? (현재)
  • 영국에서 성공회와 청교도를 중재하기 위한 단일 성경 (1600년대 당시)
    → 영어로 완벽하게 보존된 최종권위 성경 (현재)

성경 역본 문제에 대해서 성경의 비유를 적용해서 생각하면 이렇다는 뜻이다.

3. 임의성

성경 기록이란 건 증명 없이, 정말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토 달지 말고 신자가 맞춰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고 민감한 텍스트이다.

가령,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진술 중 둘째 날엔 다들 아시다시피 "보기 좋았더라"가 유일하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둘째 날에는 뭔가 안 좋은 게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기 좋았다는 말을 넌지시 생략하셨구나, 저 바닥엔 여전히 사탄 마귀 잔당이 있고 악이 있구나" 이렇게 유추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변개되고 삭제되어서 없는 거면 논리가 정반대로 바뀌어야 된다~!!
"변개된 성서에서는 이 구절에서 '보기 좋았더라'를 고의로 삭제함으로써 재창조니 어쩌구니 하는 이단 교리가 들어올 빌미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풀이해야 된다. 어느 게 맞는지를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

성경에 원래 어떻게 기록돼 있는지에 따라 우리가 까라면 까로 논리를 맞춰야 된다는 거다. 성경 말씀은 전적으로 하나님 마음대로 "임의적"이기 때문에..
그런데 성경이 내용이 다르고 표현이 제멋대로인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그저 "여기서는 삭제됐지만 다른 구절에는 유사 내용이 있으니 상관없다", "아 그건 후대에 추가된 거고 오래된(???) 사본에는 없다", "원래 인간이 기록한 것이다 보니 오류가 좀 있을 수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이건 내 성질 같았으면 너무 답답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죽빵이라도 날리고 싶은 사항이다.. ㅡ,.ㅡ;;

세상에서는 인간이 제정한 법조문을 갖고도 "자유 민주주의"에서 '자유'가 삭제되는 걸 반대하고 투쟁한다.
"A와 B 중"이 "A와 B 등"으로 바뀌어서 뉘앙스가 달라진 걸 귀신같이 간파해서 반대파를 반박하고 버로우 태운다.
그런데 성경은 큰 뜻만 통하게 대충 아무렇게나 만들어져도 괜찮다?

세상에서 맛집을 고르고 물건을 살 때도 같은 값이면 무조건 상태가 더 좋은 걸 고르는데.. 성경에 대한 관념이 무덤덤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사람에게 성경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 굳이 최선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물건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4. 불신자에게도 100% 동일하게 적용 가능한 논리

뭐~~ "킹 제임스 떠드는 신자들도 행실이 개판이더라, 말보회가 이단이더라, KJV 쓰는 교회들 중에도 이단 많다"
이런 쓰잘데기없는 소리들이 도대체 왜 나오는 건지 난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킹 제임스 성경을 거부하는 논리들을 보면.. "기성교회 vs KJV" 대신에 "불신자 vs 기독교/교회/예수"라고 치환만 하면 완벽하게 동일한 패턴이 많다.

예: 조선 시대 사람들은 다 지옥 갔나, 이 순신, 세종대왕도 다 지옥 갔나
→ 킹 제임스 이전엔 무슨 성경 썼는데? 한킹 나오기 이전에 주 기철 목사도 다 잘못됐나

지금 도대체 옛날 사람 얘기가 왜 나오는데?
난 그런 사람들이 애초에 예수 왜 믿는지, 교회는 왜 다니기 시작했는지 진지하게 궁금하다.
예수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종교(편의상의 표현)에서..
그렇게 쓰여 있는 성경이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노라"
  • "부활의 날에는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부활의 날에 **그들이 다 깨어나면** 그 여자는 칠형제 중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 "형제에게 **이유 없이** 화내는 자마다"

아멘???

당연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무인도나 감옥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아무 성경이라도 선택의 여지 없이 봐야 한다면 개역이니 NIV니 심지어 메시지니.. 따질 때가 아니다.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지경이라면 풀뿌리라도 뜯어먹고 쥐나 벌레라도 먹어야 하지 않는가?
옛날에 그 가난하고 열악한 여건에서 개역이라도 열심히 읽었던 선조들은 그 사람 사정이 따로 있고 우리는 처지가 그때와 다르다.

하지만.. 변개된 성경과 변개되지 않은 성경을 대놓고 한 자리에서 비교할 수 있고 팩트와 정보가 다 마련돼 있는데 굳이 변개된 성경을 고의로 선택할 필요는 없다.
본인은 위쪽 같은 성경을 보기 싫고 아래쪽의 온전한 말씀을 보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둘 다 옳을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멘~! ^^ 대한민국이 아무리 물가가 올라서 먹고 살기 힘들기로서니, 풀뿌리나 쥐나 벌레를 찾아 먹어야 할 지경은 아니니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02 08:35 2023/03/0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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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실수한 이유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베드로의 인생일대 흑역사가 기록돼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님하와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는..
정작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타이밍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는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린 사건 말이다.

게다가 부인할 때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아 ㅆㅂ, 내가 저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니까? 성을 간다! 내가 할복이라도 해야 내 말 믿어 줄 거야?” 급의 극언까지 불사했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건 인간의 멘탈의 한계를 너무나 강렬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저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꼴 좋다 졸장부 찌질이 등신"이라는 비난보다는 동정과 공감의 시각이 더 강한 편이다.
"평소에 허세 똥군기만 잔뜩 부리던 녀석일수록 정작 실전에서는 총소리만 나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거다. 천하의 베드로조차 저랬는데 하물며 너 같은 쪼렙 X밥은?"과 같은 패턴으로 아주 즐겨 거론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베드로는 천성이 저돌적이며, 저 정도로 찌질한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언장담 맹세 자체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적 진영의 똘마니에게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서 귀 한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요 18:10)
예수님이 베드로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로마 병정들을 그렇게 온몸으로 저지하다가 혼자 또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여 열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허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선의의 대응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뜯어말리셨다. “야, 내가 어디 무력이 부족해서 잡혀 가는 줄 아니? 지금은 성경 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 아니냐?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잘 하라고..”
그리고 그분은 베드로를 말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격을 받아 귀가 짤린 그 똘마니를 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눅 22:51)

이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급 ‘시무룩~’ 무기력 모드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모세의 소싯적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는 나름 동족을 위한답시고 어느 노예 감독을 몰래 죽여서 없애 줬는데, 동족은 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날 “허 참, 당신은 노예 감독 다음으로는 우리도 때려죽일 거야?”라고 모세에게 따진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급 당황하고 멘붕하여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치게 된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최악의 취약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당부처럼 딱히 믿음의 강건을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전한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느냐 하면 그리하지도 않고, 위험한 적진 내부를 혼자 계속 맴돌면서 염탐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 저 작자도 예수랑 한 패였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런 말이 들리니 허를 완벽하게 제대로 찔린 것이다. 갑자기 겁에 사로잡혔는지, 멘탈이 나갔는지, 아니면 고의로 삐딱서니를 타고 싶었는지.. 이때 베드로는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태도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거듭해서 부인하게 됐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이 베드로의 심경 변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비겁한 허세 겁쟁이는 아니었을 수 있다.
설마.. 의기탱천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괜히 쿠사리를 먹여서 의욕을 꺾는 바람에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겠는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내면의 두려움을 그저 알량한 혈과 육과 객기로 찍어누르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분은 베드로의 본질적인 상태를 간파하고서 그러지 말라고, 영에 속한 싸움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물 위를 걷기 시작했는데 '어어..' 딴 생각을 하다가 불안해지고 물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요 11의 "예수께서 우시니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 것이다(창 50에서 요셉이 운 이유도 같이 참고를..).
그것처럼 베드로의 흑역사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신앙생활이 단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인 투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을 죽이는 의사 투사든, 자기를 죽이는 열사든 무엇이건 말이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제자들이 모두 성경을 잘 알고 성령 충만하게 FM대로 대처했다면 어찌 됐을까?
“스승님을 잡아갈 거면 우리도 다같이 잡아 가시오! / 우리부터 먼저 죽이시오~” 이렇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들러리 도적 대신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가 같이 달리게 됐을 수도 있다.

혹은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만 잡아들이고 제자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체포됐을 때처럼 골방에서 열심히 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 싶다.
뭐, 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낭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베드로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실컷 배반하고 나서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또 바뀐 걸까? 뭔 바람이 들어서 뒤늦게 돈을 반환하고 난리를 치다가 자살을 했겠는지도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9 08:35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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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은사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형태와 위상이 비교적 명확한 아버지와 아들 말고 성령(..!!)은 존재감이 제일 없고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분이다. 그래서 번역도 성령 이전의 초창기엔 성신, 성숨(..!!) 등 난립하는 편이었다.

'신'자가 들어간 번역은 옛날 한글 개역성경에 ‘하나님의 신, 신령과 진정’ 같은 표현에서 남아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바뀌었지만..
성경에서 '신들'(gods)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면서 인간보다는 능력이 우월한 천사, 그룹 등 다른 영적 존재에 대한 총칭으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가리키는 명칭에 '신'자가 또 들어기는 좀 난감해지는 구석이 있다. ㄲㄲㄲㄲ

다음으로 '숨'은 웬 말인가 싶은데 Spirit 말고 Holy Ghost의 번역을 말한다. 영어 성경에서 ghost는 '숨지다/숨을 거두다'를 뜻하는 yield/give up the ghost 아니면 Holy Ghost.. 딱 두 용례에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치 testament를 '유언'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 실험적인 시도인 셈이다.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떨며 한 말은 "앗.. 영이다(spirit)!! ㄷㄷㄷ"였다. 그걸 보고 흐물흐물 동양 귀신이나 서양 유령(ghost??)을 떠올렸다는 워딩은 현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이다.

일부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듯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냥 무슨 기, 에너지, 버프 아이템인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 그런 것 같은 묘사가 있긴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이나 삼손 같은 사람이 초인으로 바뀌었다. 신약에서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온갖 이적이 터졌다. 하지만 그게 그림의 전부가 아니다.

본인이 아는 성령은 이 시대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임한다. 그걸 성경 용어로는 '성령 침례'(요 1:33, 행 1:5)라고 부른다. 침례 시술사(!!) 요한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 게 이것이었다. "나는 맛보기로 이렇게 물을 끼얹는 침례를 주는데, 나 뒤에 오실 분은 니들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거나 불로 침례를 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눅 11:13, 요 20:22)

한번 거주한 성령님은 우리를 아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통해 느껴지는 성령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죄 짓고 육신적으로 살면 약해지고 식고 역사하지 못하게 된다.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 강림을 매번 간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수시로 간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성경 교리 논란까지 일으키는 주제이긴 하다만..
성령님은 초대 교회가 태동한 직후에 잠시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던 초자연적 이적을 지금까지 매번 또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적이 그렇게 끊임없이 흔하게 발생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 교회라는 게 갓 태어났고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사도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한번 더 예수님을 증언하고 믿을 기회를 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표적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바벨 탑 앞에서 인간들의 언어를 헤집어 놓으셨던 것과 반대로,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라고 언어 장벽을 잠시 없애 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기적이 필요한 예외적인 사유가 없어지고 나면 하나님 역시 기적을 중단하시고 사람들을 평범한 일반적인 여건에다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부터 만나의 공급이 끝났듯이 말이다.
그 뒤에는 기적적인 병 고침이나 직통 계시 같은 건.. 정말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예외적인 사람 또는 아주 특수한 기도 응답이 아니면 일반적으로는 없다. 가능성이 0은 아니지만, 있더라도 개인의 간증 수준일 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교리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도들의 이적 표적을 재현한다는 사람들은 재현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남이 알아듣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막 16:17-18이 말하는 것처럼 독극물(poison)을 먹거나 독사(venom)에게 물려도 괜찮다거나 하지도 않다.

진짜로 옛날 사도들처럼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다면, 지금 우리처럼 병원 치료와 기도를 병행한다거나..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셔도 감사.. 이렇게 어정쩡한(?) 케바케 같은 게 없는 게 정상이다. 특히 환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안 고쳐지네 같은 개소리 구라 야바위 따위 없다!!

환자가 신자건 불신자건, 사도가 손만 얹으면 테란 메딕 실사판처럼 heal이나 restore가 짠~ 일어났다.
그러니 나더러 성령님의 사역을 감히 부정하네, 성령을 모독/훼방하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대들 필요 없다. 일단 성령님의 사역대로, 계약서대로 100% 똑같이 하기는 하고서 내게 태클 거시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사도들의 표적을 재현하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일반인들이 그렇게 직싸게 고생하며 공부해서 의대를 갈 필요가 없고, 대학 병원 중환자실이나 암 병동 따위가 없어도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전국의 병원부터 순회해야 되지, 무슨 부흥회 따위를 하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_- 아무튼..

기독교계에서 "우리도 뜨겁던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 이런 거 강조하다가 "성령님이여 오소서, 불 같이 뜨겁게 임하소서"가 와전되어 "불 받아라~!!"가 된 걸까..?? 이런 트렌드가 언제 무슨 계기로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다.

부흥회(?)라는 건 내 경험에 비춰 풀이하자면, 일반적인 설교나 성경 공부 모임보다 새신자 초청 복음 전도나 성령 간구(?)의 비중이 더 큰 집회이다.
그런 곳에서 더 즐겨 불리는 찬송가도 있다. 외국곡인 "불길 같은 주 성령" (...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이라든가,
국산곡인 "참참참 피 흘리신" ... (성령의 불길 성령불이야)

아~ 참 2~30년 전 추억 돋는다. 템포 올려 가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박수 치며 부르면 분위기가 진짜 뜨거워진다. =_=;; ㅋㅋㅋ
그리고 고 형원 "부흥"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도.. 얘는 뽕짝 느낌은 위의 곡들보다 좀 덜한 것 같다.

이런 곡들의 가사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묘사가 있다. 불에 그렇게도 집착한다는 거..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일단 행 2:3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가 원조가 아닐까 한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흠정역) 개역성경 계열의 워딩도 이와 그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흔한 통념과 달리,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물체가 임했다는 건지 이 구절의 묘사는 의외로 분명하지가 않다.
오히려 통사 구조상으로는 불꽃처럼 낼름 갈라진 '혀', 단순히 '혀'에 가깝다. 불은 그저 비유 대상일 뿐이다.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니가 진짜 문자적으로 식물 꽃이라는 얘기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 장면을 게임 아이템이나 쿵 퓨리 각성 모습을 떠올리면서 최대한 불에 가깝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번갯불 같은 게 번쩍 하더니 버프 효과가 남았다.."이다. 본인은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지만, 저 혀가 곱게 머리 위에 앉은 거야말로 세례에 가까운 묘사인 것 같다.
저 행 2:3만 읽어서는 무슨 거대한 화염이 사람을 삼키고 감싸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구약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이나 불 병거 승천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_-;; 아니면 페르시아의 왕자 2에서 불 먹은 왕자 모습을 떠올렸거나..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순절 구절이 아니면, 설마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짬뽕 시킨 걸까? 그건 제발 아니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만큼이나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 불 침례는 형벌이며,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침례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마 3:12) 처럼 대구 대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긍정적인 심상이라고 해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돼서 공중의 새들이 앉았다"가 긍정적인 심상일 수는 없다. 그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이 싹 앉았다" 이런 간접적인 묘사가 어쩌다가 "성령의 불 받아라~!"로 바뀌었는지 나로서는 성경만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아, 뜨거운 체험과 기분 각성이 가끔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 생활에서 그게 '주 main'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그냥 사우나에 들어가면 된다. 방언 받고 희열을 체험하고 싶으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철도교를 믿어도 된다. 겨우 그런 것만 하기 위해서 무려 성경을 믿고 예수 믿을 필요까지는 없다.

진짜 성령이 임해서 충만해지면 무슨 병 고침 쪽의 기적 이적보다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처럼 평범한 자기 자아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지 싶다. 이런 게 이적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도 1차적인 의미는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반면, 그렇게 불타는 체험을 하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직통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바탕 눈물 콧물 빼고 나서
길거리에서 신들린 듯이 전도지 뿌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가?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했는가?
갑자기 예수님의 성품이 행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는가? 세상적인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던 습성이 바뀌고 진짜 성령 충만해졌는가...???
내가 아는 한, 아무것도 없다..;;;;;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저런 건 진짜 성령으로부터 유래된 표적이 아니다.

아무쪼록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진짜로 성령 충만한 게 뭔지를 많이 잘 보여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찬송가는 너무 뽕짝보다는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같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런데 실로암은 딱히 성령 장르의 가사가 아니고 곡이 뽕짝 스타일도 아닌데 어째 어지간한 은사주의 부흥회 이상으로 군대 교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지.. 얘는 멜로디에 무슨 마성이 들어있는지 이 역시 개인적인 미스터리이다. "왼발! 왼발! GOP!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아마 작곡자가 보면 까무러치지 싶다.;;

말이 나왔으니.. 찬송가 중에서 부르기가 좀 조심스러워지는 장르들을 좀 정리하고 글을 맺겠다.

  • 성탄: 아기 예수 묘사는 교리적으로 큰 영양가가 없음. 휴..
  • 성령: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소서ㅠㅠㅠㅠㅠ
  • 열심과 헌신: 행위 구원이 들어갈 수 있음
  • 선교: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 나라 이뤄 간다ㄲㄲㄲㄲㄲ

이들 장르 자체가 잘못된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하지만 이런 장르는 가사에 누룩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내 경험상 높다. 더구나 영어 원래 가사는 그렇지 않았는데 번역이 이상하게 되는 편이다.

성령이야 이 글에서 많이 다뤘으니 더 언급을 생략하겠다. 그런데 다음으로 후천년· 무천년주의에 입각한 선교 이념도 참 난감하다. 하나님 나라 이루고 확장해 간다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_=;;
하긴, 성경도 다 소실되고 훼손된 걸 학자들이 '불쌍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복원하고 복구하고 있는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복음화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 확장한다는 발상과 제일 비슷하게 세계에 복음이 확 전파됐던 때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뭐, 그 덕분에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건 "일면" 고마운 일이지만.. 이때는 여전히 우생학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의 끝은 세계대전 생지옥이었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개뿔..

복음 전파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왕국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두 눈을 직시하고 역사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30 08:35 2023/01/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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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찬송가, 새찬송가, 복음찬송가, 영광을 주께 등...
뭔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선곡하고 편찬된 찬송가라면 아무 거나 가져와도 작사자 색인을 보면 '패니 크로스비'(1820-1915)라는 사람의 곡이 최상위급으로 많이 수록돼 있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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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니 크로스비는 인류 역사상 찬송시를 제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무려 8000개에 달하며, 문헌에 따라서는 9000개에 달한다고도  한다.
참고로, 2등은 6500여 편 남짓인 찰스 웨슬리(만 입이 내게 있으면, 주 보혈로 날 구해 준...)이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솔로몬의 문학 업적이 잠언 3000개, 노래 1005편이었다고 성경에 쓰여 있음을 생각해 보자. (왕상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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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해야 평생에 걸쳐 동일한 주제만으로 시를 8000개가 넘게 쓸 수 있을까?
그냥 1년 365일 24시간 맨날 예수 생각만 하면서 요즘으로 치면.. 트위터/페북에 뻘글 올리는 그 빈도로 찬송시를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분은 우리 같은 사람과는 세상을 인지하고 인생을 사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맨날 아침에 일어나고 하늘을 보면서도, 비구름을 보면서도, 정원의 호박밭 호박꽃을 보면서도 1순위로 늘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 생각을 하고 지냈다는 뜻이다. 아~~ 아니지 저 사람은 맹인이었잖아;;; ㅠㅠㅠ

저분은 각종 찬송가나 시집에 자기 이름만 너무 많이 뜨는 게 부담스러워서 거의 100개에 달하는 가명 필명을 돌려가며 쓰면서 찬송시를 많이 발표했다고 한다.
가령,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불러서"(원제: 노래하라, 즐거운 순례자여)는 작사자가 오랫동안 C. M. Wilson이라고 기재되었지만, 현재는 이것도 이분의 가사라는 것이 다 알려져 있다.

3.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인 존 뉴턴은 에서 "한때 내가 눈 멀었지만 지금은 본다 was blind, but now I see"라고 가사를 썼다. 이건 뭐 영적인 안목 얘기겠지..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레알 맹인이었다.
선천성 기형이 아니라 의료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생후 몇 주 만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래서 평생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 멀었어도 행복하고, 오히려 눈 멀어서 더 행복하다. 앞으로 하늘나라 가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예수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무슨 자학개그로 "안 본 눈 삽니다" 개드립이 유행인데, 이분은 제일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안/못 본 눈"을 천성적으로 보유한 셈이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저 말은 크로스비 여사가 아직 살아 있던 190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주일학교 교재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아저씨> 중에 나오는 대사 "걔(소미)가 천당으로 엄마 찾으러 갔어. 근데, 눈깔이 없어서 못 찾아."는 성경 교리의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4.
패니 크로스비는 영국의 간호사 겸 보건 행정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완전 동갑 동시대 인물이었다. 이건 매우 인상적인 공통점인 것 같다. 둘 다 1820년생이고, 둘 다 90+세까지 장수한 여인이기도 했다. (각각 1915년, 1910년 사망)
앨버트 슈바이처와 우리나라 리 승만 할배가 생년과 몰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동갑인 것처럼 말이다.

5.
끝으로.. 이분의 묘지에는 "이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She hath done what she could라고 당당히 새겨져 있다~! 이건 아무 문구가 아니라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적을 언급한 막 14:8 구절인데.. 싱크로율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이분은 앞 못 보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과 처지 비관을 일체 하지 않고 그 여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성실히 수행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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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거창하게 벌이려 하지 말고 제일 기본적인 것 본질적인 것부터, 당장 니 여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생활화해라~~ better late than never 이런 사고방식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성경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1)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싶으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삼라만상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니 참으로 캄~~사하무니다.." 찬양과 감사와 회개와 간구의 순으로 FM대로 하라느니 말라느니..;;
아이고 이딴 복잡한 거 생각하기 전에, "주님, 제가 뭘 기도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오늘은 좀 기도하고 싶지 않네요" 이런 말부터 기도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2)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아 씨X 이게 영어로 뭐더라? 말이 퍼뜩 안 떠오르네.. 영어가 술술 튀어나오지 않아서 답답하네" 이런 말부터 영어로 표현할 생각을 해라. -_-;;
(신앙과 관련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으면 영어 찬송 → 영어 성경 → 영어 기도...의 순으로 난이도를 올리면 될 듯하다.;;)

(3) 기우제를 지내서 진짜로 비가 내릴 거라고 믿는다면.. "비가 반드시 온다"에 손모가지를 걸지는 않더라도, 기우제 지내러 나갈 때 최소한 우산이라도 챙겨서 나가는 걸로 니 믿음을 행위로 입증해 보여라.

(4) 저출산이 그렇게도 심각한 문제이면.. 자꾸 새로운 애들 만들라고 독촉하고 삽질하기 전에, 이미 낳은 애들이나 잘 지켜 주고 자살 안 하게 하고 범죄자놈들은 반 쥑여 놓아라~~

* 이런 게 그다지 비논리 비합리적인 생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 중에도 Brighten the corner where you are (거창하게 큰 일 벌일 생각 하지 말고 니 주변부터나 빛을 비춰라) 라는 곡이 있다. 다만 이건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가사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안 창호 선생뿐만 아니라 저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작은 것부터" 정신이 있었다는 것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0 08:35 2023/0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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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으로도 못 가요 + 울어도 못 하네

위 두 곡은 내 행위나 스펙, 재물 따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기초적인 복음을 전하는 찬양 내지 영적 노래이다.
작사· 작곡자는 서로 다르지만 가사 비슷하고 조와 박자가 비슷해서 한데 이어서 부르기 아주 좋다.

2.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 주님 품에 새 생활

영어로 life라는 건 생물학적인 생명도 되고, 그냥 인생· 생활· 삶이라는 뜻도 된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찬송이 개인적으로는 위의 저 두 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과 "주님 품에 새 생활하네"(Ron Hamilton)이라고 생각한다.

구원받아서 새 생명을 얻었으면 새 생활을 해야 한다.. 굉장히 적절한 메시지인 것 같은데..
허나, 위의 두 곡은 3박자 계열이긴 하지만 각각 3/4와 6/8이라는 차이가 있고 음악적인 느낌과 구조는 많이 달라서 바로 연결하기에는 어색해 보인다. 가사는 정말 딱인데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아쉽다.

3. 삼위일체 메들리

찬송가 중에는 1,2,3 각 절이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하는 형태인 게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마치 군가 '멸공의 횃불'이 각 절마다 육해공군을 언급하듯이 말이다.
이런 곡들만 모아서 메들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공교롭게도 이런 곡들은 박자도 3박자 계열(3/4)인 편이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상극인 곡을 아무렇게나 연결할 수는 없으니..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정 종원)"와 "아버지 큰 사랑 감사해요(Father, I thank you)"을 묶는 걸 생각해 봤다. 특히 선발곡은 솔로로 선창하고, 그 다음에 후발곡을 합창으로 부르는 식으로 한 절을 다 부르고, 2절과 3절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앞뒤에 적절한 도입· 결말부를 더 생각해 봐야 한다.

4. 기도 관련

기도와 관련해서 한데 이어 부르기 좋은 찬양 세트는 셋 정도 있다. 공교롭게도 각 세트들이 다들 국산곡과 외국곡으로 편성돼 있다.

(1) 주님의 시간에(in his time)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선발곡은 다 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심상인 반면, 후속곡은 요일 5:14에 근거해서 주님 뜻대로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좀 능동적인(?) 심상이다.
같은 C장조이고 이어서 부르기 좋다.

(2)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첫 마디의 계이름 “미~미 파미레도”가 일치하고 박자도 아주 비슷하다.
선발곡에서 “아무 염려 하지 말라”산상설교 내용을 묵상한 뒤, 후속곡에서 “기도했나요 용서했나요”를 권면하는 구조가 된다.
물론 후속곡을 이어서 부르기 위해서는 선발곡에서 조가 올라가고 마무리를 짓는 클라이막스 부분은 건너뛰어야 한다.

(3)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김 문영 사/최 덕신 곡) +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못갖춘마디의 3/4박자 곡이고 우울할 때 부르기 좋은 비슷한 가사이다.
단, 선발곡은 이럴 때 나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다짐이고, 후속곡은 너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일종의 위로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발곡의 가사가 영적으로 수준이 더 높다.

5.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우선, 앞곡은 쌍팔년도를 풍미했던 찬양집 “찬미예수 시리즈”의 편저자가 지은 명곡이다. 가사가 내 진심을 담아 차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심오하다.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이거 부르다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울 시내 아파트 값이 어떻고 삼성 전자 주식이 어떻고, 비트코인 뭐가 어떻고 금리가 어떻고..” 이러면 완전 현타가 작렬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
요즘은 유혹과 박해라는 게 무식하게 빼앗고 죽이는 형태가 아니라, 너 혼자 뒤쳐지고 박탈감 느끼게 하는 식으로 임한다.

그리고 이 곡은 “예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로 끝나니,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와 가사 내용과 분위기, 박자가 아주 비슷하다. 같이 이어서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

6.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작사· 작곡자가 서로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Ab)에 같은 박자(3/4), 동일한 길이의 못갖춘마디이다.
앞곡은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는 내용이고 후속곡은 그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지금 내 앞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구이다.

서로 연계하기 굉장히 좋은 조합인 것 같다. 앞곡을 부르다가 간주 없이 곧장 뒷곡으로 넘어간 뒤, 다시 간주 후에 앞곡으로 돌아와서 끌내는 형태도 괜찮을 것 같다.

7. 내가 하늘에 들어가 (I saw Jesus in you / When I enter heaven's glory)

Ron Hamilton이 작사· 작곡한 이 찬양은.. 자기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다른 구원받은 지체들을 만나서는 “아.. 당신이 살아 생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줘서 그게 저한테도 선한 영향을 끼쳤어요” 이렇게 회고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게다가 저건 1절 내용이고, 2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한테서 그런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사람과 예수님이 후렴에서 동일하게 I saw Jesus in you라고 말한다는 게 핵심이다.

일반 기성 교회보다는 침례교 계열에서 더 유명하지 싶다. 이 곡을 모르시는 분은 유튜브에서 먼저 들어 보시라. (☞ 링크)
(화면에서 볼 수 있듯, 이 아저씨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어쨌든 애꾸이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일부러 해적 코스프레도 종종 하는 것임..)

얘는 뭐.. 다른 곡을 짜깁기 하거나 메들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 가사에 화자가 딱 정확하게 나, 다른 사람, 예수님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메들리나 합창이 아니라 그냥 뮤지컬을 만들면 된다. 유튜브를 뒤져 봐도 이 곡을 이런 형태로 부른 영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ㅡ,.ㅡ;;

아 참.. 이거 가사가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간 뒤의 시점을 다루고 있으니.. 프리퀄 격으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내용이면서 박자나 멜로디가 이 곡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적절한 찬송을 미리 부르면 효과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국, 소망'카테고리의 찬송가들은 내 인생이 끝난 관점 버전이랑 이 세상 전체가 끝난 관점 버전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이 곡은 명백하게 인생 종말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2/12/23 19:35 2022/12/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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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프레임

내가 기독교 신앙, 특히 이단과 관련해서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예를 좀 들면 다음과 같다.

(1) 창세기의 간극 얘기를 들으면 뭔 듣도 보도 못한 김 기동이니 귀신이니 아담 이전 인류(?) 이런 거 떠올리지 말고, “왜 둘째 날에는 ‘보기 좋았더라’가 없을까? 그러게, 물과 땅은 언제 창조됐고 루시퍼는 언제 타락했을까? 예레미야서에도 without form and void가 나오는구나!”를 좀 생각해 보자.

(2) 구원의 영원한 보장 얘기가 나오면 뭔 구원파 생각 좀 하지 말고, 바울 서신서가 실제로 뭘 말하며, 모순되는 듯한 히브리서 야고보서가 뭘 말하는 것이겠는지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해 보라.

(3) 왕국 얘기가 나오면 여호와의 증인 왕국회관 따위 생각하지 말고, 성경 용어가 kingdom이고 예수님이 왕 중 왕이며 통치 형태가 왕국이라는 걸 좀 생각하자.

(4) 휴거 얘기가 나오면 다미선교회니 뭐니부터 생각하지 말고, 살전 4:16-17을 제발 좀 먼저 떠올려 보자~!

하.. 이런 분들은 정말 오로지 이단 소리 안 듣는 것에만 목숨을 거는 것 같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ㅡ,.ㅡ;;; 세상으로부터의 편견이 그렇게도 두렵나?
이런 사고방식이니까 요한계시록을 읽는 게 통째로 금기시되고, 교회들이 대문 앞에다가 “신천지 출입금지”라고 써 붙이는 것 같다.

이단들이 “우리도 성경 믿어요, 성경 공부해요~!” 이러면 이분들은 아예 성경 읽고 공부하는 걸 그만두지 싶다. =_=;;
거리설교를 이상하게 보고, 구원 확인 질문을 불쾌히 여기는 것도 이런 사고방식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아니, 예수 믿어서 은혜로 구원이 없으면 그건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잖아..!!!

그리고.. 신천지 추수꾼이 교회에 쳐들어와서 집기를 부수고 폭력을 쓰고 난동을 부리면서 예배를 방해한다면야 그러면 경찰에 신고하고 세상 공권력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저건 좀..;; 성경의 비유를 이상하게 갖다붙여서 이단 교리 펴는 것까지도 경찰에다 신고해서 강제로 찍어누르고 금지시킬 생각인가?? ㅡ,.ㅡ;;
무슨 무한리필 부페 식당 입구에 “운동부 회식 금지”라고 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좀 민망하다.;;

그래서 본인은 제안한다.
“나는 저 이단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쪼잔하게 지내지 말고,
이렇게 단순하고 상식적으로 건전하게 성경대로 믿는 게 이단이면 난 그냥 이단 소리 듣고 말겠다” 같은 대인배 마인드를 가져 보면 어떨까? 자기가 믿는 것, 자기가 가는 신앙 노선에 대한 확신을 좀 가져 보시라.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을 따라 내 조상들의 하나님께 그렇게 경배하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믿나이다.” (행 24:14)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가슴 펴고 통 크게 살아 보시라~!!

난 자동차, 철도, 컴퓨터, 호박, 멧돼지, 군사, 역사 등 이것저것 온갖 잡학에 관심이 많은 편이긴 한데..
저런 미주알고주알 진짜 이단(?)들 교리는 거의 모른다. 정답만 알면 되지 오답을 일부러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정답의 일부가 오답이랑 비슷해 보이는 건 정답의 잘못/탓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비슷해 보여도 실상은 전혀 같지 않은데 같은 줄로 착각하는 건 당사자의 잘못일 뿐이다.;;

※ 보너스: 후대 드립

내 경험상, 자신들이 지지하지 않는 교리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그 theory의 내용 본질을 저격하는 게 아니라 출처· 기원· 계보를 따지고 트집 잡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요일 5:7 삼위일체 요한의 콤마는 원래 성경 본문에 없었고 후대에 추가된 것이다.
  • 젊은 지구 창조론은 웬 안식교에서 만들어낸 산물이다.
  • 반대로 간극 이론은 토머스 캘머와 넬슨 다비 같은 19세기 최근 사람들이 세대주의에 입각해서 진화론에 대항하려고 따로 만들어 낸 것이다.
  • 또 간극 얘기인데, replenish는 처음에 ‘다시’라는 뜻이 절대 절대 없었다. 후대에 진화론에 대항하려고 이런 의미가 재조명되고 추가됐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것도 교리를 직접 파고드는 게 아니라 진영논리 이단 프레임에 입각한 좀 비합리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안식교가 주장하건 몰몬 교가 주장하건, 성경이 6일이라고 말한 것을 6일이라고 그대로 믿고, 1천 년이라고 말한 것을 1천 년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고 잘하는 것이지 않는가?

더구나 그렇게 기원· 출처를 따진 것이 정확하게 맞는 팩트조차도 아닌 경우가 왕왕 있다.
요한의 콤마는 피터 럭크만 박사의 반박 자료에 따르면, 이미 고대 로마 제국 교부 시절부터 멀쩡하게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방어하는 데 잘만 쓰였다.

간극 역시 19세기보다야 훨씬 전부터 사람들이 간파했다. 사탄 마귀의 타락과 이전 세상의 멸망이라는 개념 자체를 깨우치기 위해서 무슨 대단한 지성이나 과학 발견이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토머스 캘머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의 출간보다 수십 년 이상 먼저 간극을 주장했었다.

replenish는.. 더 말을 하지 않겠다. 멀쩡히 중세부터 쓰였던 단어이고 더 강조해서 반복해서 채우고, 소모되어서 없어진 것을 다시 보충한다는 뜻이다. 애초부터 단순 fill과 동일한 단어가 아니었는데 이것도 무슨 재창조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의미가 왜곡된 거라는 소설은 어쩌다가 튀어나왔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10/04 08:35 2022/10/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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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네로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세계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긴 폭군이었으며, 특히 마가 씌인 듯한 잔인한 기독교 박해로 인해 교회사의 관점에서는 더욱 악평을 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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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장발 노안인 인상에 걸맞지 않게, 나이가 아주 젊었다.
겨우 30 초반의 나이에 부하들의 신임을 잃고 폐위당한 뒤,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참고로 조선에서 손꼽히는 폭군이었던 연산군도 겨우 20대 때 흥청망청 놀면서 나라를 말아먹은 뒤, 30이 될까말까인 나이에 죽었다.

네로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로마 대화재 배후설이다.
부하들을 시켜 시내를 일부러 불질러 놓고는 불 구경 하면서 띵까띵까 악기 연주하고 시를 지었다..???
(꼴도 보기 싫던 낡고 흉측한 건물들이 다 사라지니 속이 다 시원하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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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9 11 테러 자작극설 음모론이라든가, "할배가 일부러 다리를 폭파하고 먼저 튀었다", "빵이 없다고? 그럼 과자/고기를 쳐먹으면 되지"(마리 앙투아네트) 급의 악성 루머로 여겨진다. 정황상 네로가 그 정도까지 악마 싸이코패스는 아니었다.

그는 불 구경은커녕, 외지로 휴가를 가 있었다. 그 와중에 화재 소식을 듣고는 기겁하여 전차를 몰고 수십 km를 달려서 현장에 헐레벌떡 돌아왔다.
황제가 직접 발로 뛰며 화재 진압을 지휘하고, 자기 사재를 털어서 구호 물자를 마련하고, 심지어 궁궐의 일부를 개방해서 이재민들 임시 거처도 마련했다.
재난에 정말 최선을 다해 대처했다는 건 제아무리 네로를 싫어하고 혹평하는 역사가라도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한다.

하지만 네로가 선정을 베푼 건 거기까지가 끝이었던 것 같다.
화재 발원지에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다른 건물을 올리려 해서 "이거 너무 노골적인데? 혹시 저 건물 올리려고 일부러 불지른 거 아냐?" 의혹을 본격적으로 살 짓을 하긴 했다. 그리고 무리한 토목 공사 때문에 나라 경제를 말아먹기도 했다.

그리고 자기 평판이 깎이고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는 것 같자, 그는 그제서야 예수쟁이들에게 방화범 누명을 씌워서 화풀이를 시작했다. 이건 명백한 팩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집단이란 게 등장한 지 30년 남짓밖에 안 됐던 시절인데.. 이때 이들의 대외 이미지는 막 나쁜놈 사회악이라기보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 아싸 정도였다.

남들 다 믿는 걸 로마 잡신들을 섬기지 않고, 국가 공권력 자체는 인정하는 것 같지만 황제를 신성시하지 않고 웬 듣보잡 예수라는 교주가 부활했다며 설치고 다닌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얘기를 나눠보면 천성은 착하고 성품도 훌륭해 보이고.. 쟤들이 도대체 무슨 믿는 구석이 있는지,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신비로운 부류였다.

그랬는데 민심이 흉흉할 때 과거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이나 '중세 유럽 페스트 창궐 후의 종교 재판'처럼 누구 아싸 한 놈 희생양 삼아 조져야겠다는 여론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그리고 이때는 크리스천들이 걸려들었다. "이게 다 저 예수 믿는 이상한 놈들 때문이다. / 저놈들은 이번 화재 피해를 별로 입지 않았다 / 사실 쟤들이 방화범이다 / 쟤들은 로마 제국의 반역자다" 이런 식으로..

네로는 이 사람들을 그냥 곱게 죽인 게 아니라 동물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나서 맹수들에게 던져넣기, 십자가형, 길거리 인간 횃불(= 화형-_-) 급으로 정말 가학적이고 잔혹하게 죽였다.
어떤 방식이건, 이런 잔인한 양민 학살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 이어지자 다른 비기독교인들조차 "쟤들이 아무리 나쁜놈들이라지만 이건 너무했다, 선 넘었다"라고 이의 제기를 할 정도가 됐다고 한다.

게다가 이때는 거짓으로 신자 행세를 하다가 조직을 밀고하는 가짜 끄나풀 간첩 배신자까지 들끓었다. 그러니 이때는 어중이떠중이 다 교회로 전도 초청 따위는 꿈도 꿀 수 없고, 진짜 신자 형제를 가려내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사람 마음속을 알 수가 없으니 신뢰할 만한 이웃 교회 지도자의 추천과 보증이 아주 중요한 변별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도 바울이 바로 이때 네로를 대면한 뒤, 참수형을 당해 순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AD 67년경. 신약 성경 데모데후서는 이런 배경에서 기록되었다.

(죄수를 사형에 처하라는 어명까지 악기를 띵띵 연주하면서 내리는 개싸이코패스 네로의 기백.ㄲㄲㄲㄲㄲㄲㄲ
저 아저씨가 현대인이었으면 락 같은 데에 심취해서 아마 일본 환타 CF에 나오는 DJ 선생이나 가죽점퍼(록커) 선생처럼 코스프레를 했지 싶다. ㅋㅋㅋㅋㅋㅋㅋ)

바울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와 같이 어째 로마 시민이었다.
로마 시민은 (1) 범죄 혐의가 있더라도 채찍질 같은 고문을 동반한 심문을 받지 않으며, (2) 반역죄가 아닌 한 사형을 당하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난 특권층이었다.
그리고 로마 시민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로마로 가서 지역구가 아닌 전국구 재판을 청구할 권리까지 있었는가 보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로마 행을 고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소원대로 로마에 가서 사도행전 28장 이후의 연대기부터는 노이즈 마케팅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복음을 널리 전했다. 최신 학문 유행 문화의 원산지였고 지금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와도 같은 대도시였던 로마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정부로부터도 예수 믿고 전하는 것에 대해서 처음엔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로마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다시 체포되었으며, 이때는 결국 반역죄로 사형을 당하게 됐다. 네로가 바울을 어떻게든 죽여 없애 버리려고 안달이 났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그는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때도 십자가형 같은 잔인한 형벌을 받지 않고 곱게(?) 참수만 당했다.

참고로, 네로 시절엔 아직 콜로세움 경기장은 없었다. 그건 AD 80년 이후에나 등장했기 때문이다. 네로 때의 순교랑, 원형 경기장에서 양민들이 맨손 무방비로 굶주린 사자 떼와 맞닥뜨리는 장면을 동시에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초대 교회의 입장에서 네로에 의한 박해는 정말 엄청나고 혹독한 환란이었다. 베드로전서 역시 제일 가깝게는 이런 시국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저 네로놈이 적그리스도이고, 이 순간만 잘 넘기면 예수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 생각했다.

뭐, 예수님이 곧장 다시 오시지는 않았고 로마 제국에 의한 기독교 박해는 그 뒤로도 수백 년 동안 잊을 만하면 간헐적으로 또 계속되었다.
이게 횟수를 따져 보니 총 열 번이었다. (☞ 관련 링크) 계 2:10에서 말하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가 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의미한다고 분석하는 해석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네로의 깽판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이 황제 역시 AD 68년에 쿠데타로 인해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세상 역사에서 네로는 처음엔 통치를 잘 하다가 말년에 궁예처럼 흑화해서 광기어린 실책을 저지른 폭군이다. 히틀러처럼 그냥 예술만 했으면 좋았을 걸 괜히 정치를 하다가 돌아 버린 사람 정도?
뭐, 폭군으로서는 평범한(?) 범주에 들지, 무슨 공산주의나 파시즘이 가미됐던 20세기 최악의 싸이코패스들.. 히틀러, 김 일성, 폴 포트, 이디 아민 정도까지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니 죽은 뒤의 장례도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 지워 버리는 정도는 아니라, 평범한 왕보다만 약간 덜 예우하는 수준으로 그쳤다고 한다.

물론 아무리 실드를 친다 해도 폭군은 폭군이며,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 박해의 첫 포문을 열었던 악역이 네로인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기독교인들만 왜 그리 잔인하게 죽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9/26 08:35 2022/09/2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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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성경 이야기들 -- 下

7. 부분적인 순종

  • 아브라함: 혼자만 나온 게 아니라 사고뭉치 룻도 같이 데리고 와서 쓸데없이 전쟁에도 연루되고 두고두고 고생했다.
  • 출 3~4에서 모세: 혼자서는 도저히 일을 못 하겠다고 뒤로 빼서 결국 형 아론까지 붙긴 했지만.. 그게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 베드로는 영혼 없이 "네에~ (참 잘도 잡히겠네요.) 그래도 일단 님하 말대로 그물을 하나 던져는 보겠습니다": 그 뒤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뒤집힐 뻔함.
  • 아말렉을 몽땅 다 진멸하지 않고 살진 짐승을 '선의로' 살려서 데리고 온 사울: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울러, 출5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파라오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주라는 명령을 전하기는 했지만 너무 쫄아서 선포와 경고가 아니라 애원, 타협, 협상하는 말투가 돼 버렸다.

말 안 들으면 니들이 재앙 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재앙 당한다.. 노예가 줄어들면 너희들도 좋을 거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물 잔뜩 탔다.
그러니 파라오의 반응은? 더욱 기고만장해서 꿈쩍도 안 하고 "이것들 너무 편하게 해 줬더니  안 되겠어? 앞으로는 일을 더 시키겠다"로 맞받아친 것이다.

부분적인 순종, 불완전한 순종은 대놓고 불순종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 역시 100점짜리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는 걸 성경은 거듭 가르쳐 주는 듯하다. 꼭 사울처럼 마음 상태가 처음부터 글러먹은 게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건 크리스천이 복음을 전할 때도 염두에 둬야 할 원칙인 것 같다.
죄, 심판, 복음 얘기를 제대로 안 하면서 "예수 믿어서 나쁠 거 없다, 손해볼 것 없다~ 너한테도 좋다" 이런 걸 너무 강조하는 건.. 듣는 사람의 기분도 못 잡으면서 잃어버려진 혼을 제대로 구하지도 못할 것이다.
이건 그냥 종교 영업 행위나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8. 게으르다, 목이 뻣뻣하다

출애굽기에서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 보고 '게으르다' (idle)라고 평했고, (5:17 노예 시절)
하나님은 '목이 뻣뻣하다~~~~' (stiffnecked) 라고 평하시었다. (32:9 금송아지 사건)

파라오야.. 좀 편하게 대해 줬더니 노예 주제에 뱃대지 불러서 헬렐레 빠져 가지고 힘들다고 징징댄다고.. 먹고 살 만하니까 그 다음으로 신이나 찾아 댕기고 종교 활동이나 쳐 한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하나님은.. 10대 재앙과 홍해 기적까지 베풀면서 가련한 이 군상들을 비참한 노예 신세에서 구출해 줬는데..
광야 생활이 쪼~금 힘든 거 갖고 금세 불평 불만 터뜨리고, 심지어 도로 이집트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고 정말 마음이 완악하고 바른 믿음이 없다고 그걸 질타하셨다.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 vs 지극히 영적인 관점.
같은 인간 집단을 보는 관점이 서로 극과 극으로 정말 다르다. =_=;;

9. 에스더기: 왕권의 상징

세상에서 보안을 상징하는 물건은 열쇠요,(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물건이나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은 도장(이 명령이나 메시지가 진짜 당사자 본인의 것)인 것 같다. 유언 같은 건 주작되지 않고 진짜 당사자가 살아 생전에 정신이 멀쩡할 때 자의로 남긴 게 맞음을 입증하는 체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재산 상속이나 어느 조직의 후계자와 관련된 분쟁이 어찌나 많은지!!)

인감은 도장을 지문처럼 활용할 수 있게 등록해 놓은 체계이다.
동양은 모르겠다만, 서양에서는 왕이 끼는 반지가 옥새를 겸하게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다. 성경에서도 에 3:12..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절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절이 이에 대해서 언급한다.

에스더기는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것과 '주, 하나님, 여호와' 같은 단어가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이색적인데, 유난히 왕의 권위와 관련된 언급이 많은 것 같다. 전 8:4 "왕의 말씀이 있는 곳에 권능이 있나니...", 더 나아가 마 8:9(권위 아래에 있는 사람)의 제일 실질적인 사례가 이 책인 것이다. 하필 그 권능을 이용해서 license to kill the Jews가 전파됐으니 문제지..

왕이 내린 명령이 옥새로 날인되고, 그게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파발들을 통해 방방곡곡으로 전파된다. 한번 내린 어명은 워낙 최고존엄급 절대 권위가 있기 때문에 왕 자신이라도 쉽게 식언· 번복할 수 없다. 그 대신 그걸 다른 명령을 추가로 내려서 대체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에스더 같은 이질적인 책이 어째 성경에 포함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편, 현대의 암호학은 수학 이론과 컴퓨터의 계산빨을 이용해서 디지털 세계에서 보안과 권위/권한이라는 분야를 모두 담당하는 도구인 셈이다.

10. 혼전 임신에 대한 화형 응징

옛날에 신라의 김 유신은 여동생 문희를 혼전임신 죄목으로 불태워 죽이려 했고, 이거 보고는 김 춘추가 그녀와 일종의 shotgun marriage를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건 창세기 38장에서 야곱의 아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을 혼외임신 죄목으로 불태워 죽이려 한 것과(창 38:24-25)... 심상이 아주아주 아주 비슷하게 느껴진다. =_=

물론 서로 완전히 같은 상황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본인이 김 유신 장군 묘를 종종 구경하면서 동시에 교회도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더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ㅋㅋㅋㅋ

한반도는 역사를 통틀어서 화형이란 게 없다시피했다.
신라가 존재하던 시절에 내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화형이라는 단어를 본 건 박 제상이 일본에서 고문 당하다가 화형 당해 순국했다는 얘기밖에 없다. (왜놈들이야말로 그때부터 왕창 잔혹.. -_-)

성경도 마찬가지다. 목을 조르거나 짜르거나 그냥 몸통에다가 칼을 쑤셔넣어서 죽이는 건 자주 나오지만, 홀랑 불태우는 거.. 특히 초자연적인 불 말고 저런 식의 화형은 등장이 역시 거의 없다. 그런데 대놓고 let her be burned는 이례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것도 둘 다 아녀자를.. 부정한 임신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이러니..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마리아도 예수님을 초자연적으로 수태했던 당시에 처신을 잘못했으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었겠다. 나름 약혼남이 자기 아이가 아닌 아기를 속도위반 임신으로 잘 덮어 준 셈이다.

11. 빤스런(..)

그리고 성경에는 나름 빤스런이라는 것도 나온다.
아니, 빤스 정도가 아니라 몸에 걸치고 있던 걸 홀랑 버리고(붙잡히니까) 발가벗은 채로 줄행랑을 쳤다고 나온다. 도마뱀이 자기 꼬리 끊고 도망치듯이 말이다.

  • 막 14:51-52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당시에, 성경에 이런 민망한 장면이 왜 기록됐을까, 이 청년은 누구일까 참 궁금해진다.
  • 행 19:15-16 그 유명한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에 대해서도 들어서 아는데, 닌 도대체 누구냐?" 역관광 장면이다.;;
  • 그리고 암 2:16도 이런 빤스런 장면을 언급한 예언이다.

12. 양비론

"진실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 함께 모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주의 거룩한 아이 예수님을 대적하며" (행 4:27)

본인은 오래 전부터 다른 주제는 몰라도 인간이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에는 좌우 구분이 없고 정말 피장파장이라는 말을 해 왔다. 서민이건 기득권 정치· 종교 지도자건, 심지어 외세건 똑같이 말이다. 진정한 양비론이다.

빌라도는 그냥 세속적이고 보신주의적인 정치인이었을 뿐, 사도신경에까지 거론될 정도로 독보적인 악역은 아니었다.
진리가 무엇인지 죄와 심판은 무엇인지 같은 건 관심 없고, 그저 유대인의 왕을 참칭하는 내란 수괴 정치범만 아니라면 누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국내 교회들이 한때는 "예배 때 사도신경 암송 안 하는 교회는 이단" 이러는 편이었지 싶은데.. 그래도 세월이 흘러서 요즘은 사도신경을 절대시하는 비중이 예전에 비해 줄어든 듯하다.

여담으로, 기독교라고 불리는 여러 교파들 중엔 가톨릭이나 개신교 말고 어디어디 지역 '정교회'라는 게 있다. 여기는 하나님 예수님 이러기는 하지만 교리 바리에이션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다.
세계 지리에서 중부·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의 종교는 상당수가 가톨릭도 이슬람도 아닌 기독교라고 분류돼 있다. 그러나 그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개신교 같은 기독교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 중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분명 사도행전 8장에 뿌리를 둔 역사적인 교회이지만.. 에녹서 같은 위경도 같이 정경으로 인정하고, 특히 빌라도와 그의 아내까지.. 부부를 반쯤 선한 인물, 성인으로 취급한다. 예수님을 처형하는 것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롯???) 훗날 회개하고 크리스천이 됐고 순교까지 했다고 말이다.;;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9/21 08:35 2022/09/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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