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에 계층간 갈등이라는 게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건 아무래도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에 공산주의라는 게 생긴 뒤부터인 것 같다. 구호부터가 “만국의 로동자여 단결하라~~ 기존 체제를 다 뒤집어엎고 브루주아들을 다 타도하고 혁명 과업 완수하자” 이랬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왕부터 시작해서 귀족, 지주/영주 같은 계급만 떵떵거리며 살았다. 나머지 대다수 평민들은 농업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비슷하게 평등하게 못 살았다. 자기 신분과 출신이 원래 그렇고, 이웃들도 처지가 대동소이하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농사가 풍년이어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소출의 대부분을 삥뜯기는 게 참 뼈아팠다. 옛날에 노동력이 부족하고 백성들의 진짜 소득을 정확하게 측정할 행정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머릿수에만 비례해서 너무 단순무식하게 세금이 부과된다면 어떨까? 출산이 진정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인간이 법과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 혼자 떠나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진정한 딜레마였다.

사실, 중앙 정부에서 법으로 정한 세금 자체는 그렇게까지 살인적인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론과 이상은 그러하지만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날리고 잃는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더 걷는 것, 그리고 세리 같은 중간 관리들이 횡령· 착복하는 게 장난이 아니니 최하위 납세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청에 하청을 거치면서 실제 작업자에게 지급되는 보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금 착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버틸 지경이 되면 죽창 들고 민란이 발생하고 '의적'이라는 게 나타나기도 했다. 로빈 후드, 임 꺽정, 홍 길동, 윌리엄 텔.. 이런 거 말이다.
그래도 이건 국가 체제 전복을 의도하는 건 아니었으며 그럴 재량도 없었다. 단순히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랬는데.. 산업 혁명 물류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기계와 인간의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또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격차도 정말 아득히 벌어졌다. 이거 덕분에 2차와 3차 산업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농산물과 공산품이 싸게 많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평균적인’ 삶은 크게 올라가긴 했지만.. 이건 다른 방면에서 큰 부작용도 야기했다.

산업화 초기에 영국 같은 나라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복지가 참혹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아니고 나름 자국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서 농업 대부분에 가내수공업 약간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었는데.. 삶의 질이 크게 좋아질 리가 없었다.

뭐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초기엔 그랬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격차는.. 과거의 통상적인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빈부격차와는 성격이 좀 다른 부류였다.
그리고 이런 초창기의 경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방임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극치였다. 오늘날과 같은 인권 관념이라든가 취약 계층 복지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살벌했겠는지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쪼기 서양은 문화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돈 많은 상류층들 중에도 교회 댕기는 신자가 대다수 주류였다. 그러나 이때 유럽의 기독교회들은 뭐 해외로 선교를 하기도 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많이 했다. 그리고 자국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보다못해 영국에서 자선 냄비 이러면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런 인간성 상실 동심파괴 시대상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작가는 기억이 안 난다만 <플랜더스의 개> 말이다.
스크루지 꼰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뭔가 옹고집전의 외국판 같기도 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명작 소설도 이런 시국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 저 때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극혐한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결국은 참다못해 마음 독하게 먹고 악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부자는 한없이 자기 배만 불리면서 더 부자가 되고, 로동자들은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면서 부자들의 노예로 대대로 비참하게 살다 갈 거라고 말이다.

이런 현실은 로동자들끼리 단결해서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고 싸우고 투쟁해야 바꿀 수 있댄다. 그래서 노조에 파업, 사보타주, 붉은 머리띠, 꽹과리 등 살벌한 구호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을 타도해서 부를 다같이 강제 분배하자, 사람이 먼저이고 로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 능력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체제를 만들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저런 걸 부추기고 추진하는 정치 단체를 흔히 '공산당'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 모순과 고뇌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년에 가까운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와 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도 똑같이 고민했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떨치고 혼자 열심히 수련해서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돌파구를 뚫은 듯하다.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이런 아저씨들이 이 바닥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현실 역사에서야 공산 혁명이 성공한 구소련과 그 주변 중국과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여겨지지만, 더 과거인 1871년엔 프랑스에서도 단 70일 남짓이지만 공산 혁명 정부가 집권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가 뭔가 혁명, 저항 이런 쪽으로 영국· 독일보다 더 쎈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게 과격했다.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들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폐로 몰아 척결하고 뜯어고치고 지워 버리려 했다.
종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 심지어 1주일의 길이도 7일은 종교색이 느껴진다면서 바꿔 버렸다. 파리 코뮌은 10진법을 존중해서 한 주의 길이를 아예 10일로 바꿨고, 나중에 소련은 약수가 더 많은 8일로 바꾸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_=;; 이런 반골 기질이 있으니 나중에 중공은 그 보수적인 정서법을 다 뜯어고치고 간체자와 한어병음을 과감히 도입했다.

일본은 나라가 잘 살고 철저하게 자유 진영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서구화 근대화를 잘 해서 그런지, 대놓고 공산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사회 혁명분자야 당연히 있었고, 그건 심지어 한반도니 만주니 하는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1925)가 딱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산주의 진영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리즈 시절을 찍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악역이 패망해서 고꾸라졌고, 소련은 엄연히 전승국으로 예우받으며 국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같은 소련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도 많이 공산화됐다.

그리고 소련의 반대편에서는 어쩌다 보니 미국.. 20세기에 서유럽을 제치고 승전국에다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됐다. 2차 대전 추축국을 상대로는 총 쏘고 포 쏘면서 대놓고 싸웠는데, 공산 진영과는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 대신 고삐 풀린 듯이 군비 경쟁 우주 개발 전쟁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붙였다.

아프리카라든가,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같은 남반구 지역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을 제3세계라고 부르나??
하지만 쿠바가 무슨 계기가 있는지 골수 반미 국가였고(카스트로??), 그 아래 중남미도 몇몇 친미 노선 국가를 제외하면 '체 게바라'가 어떻고 해방신학에 종속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게 반미는 물론이고 공산혁명 냄새가 좀 난다. 그쪽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걔들도 분명 자기 국익대로 몰래 비열한 짓 삽질 X신짓을 한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메리카가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농산물에 풍부한 자원이라는 잠재성 대비 그다지 잘살지 못하는 건.. 모든 걸 미국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뭔가 통치 체제나 이념, 개인의 가치관 세계관에 문제가 있긴 했다.

체 게바라는 골수 반미 반자본주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슈퍼스타처럼 이미지가 조작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청난 고인드립이 아닐 수 없다. =_=;; 마치 니콜라 테슬라가 아주 뛰어난 과학자 공학자였지만 훗날 음모론 오컬트계의 교주뻘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 장사꾼들은 돈만 된다면 정말 뭐든지 만들어 팔긴 하는가 보다. 하긴, 반미 시위 때 불태우는 용도의 성조기 내지, 성조기가 그려진 속옷· 걸레조차 다 미국에서 만들어서 판다고 하지 않는가? =_=;

우리나라, 남한, 대한민국이야 처음부터 할배의 영도력 덕분에 골수 미국 편에 붙어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 반면, 우리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한 저 악의 무리들이 처음에 소련 편 공산주의를 밀었으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뼛속까지 반공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과격 좌익 시위를 단속하는 정도하고는 레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상이다. 세계사나 인문학 따위 알못인 본인이 그냥 주워 들은 기억만 주섬주섬 늘어놓아 보았다. =_=;;
글쎄, 계급 갈등 투쟁 덕분에 진짜 적폐를 청산하고,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가 크게 향상된 긍정적인 결과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이념이 '수정 자본주의'에 많이 반영되어 들어갔다. 이게 양심적인 업주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건 그쪽 편에 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는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착취되고 빼돌려진 근로자 인건비가 울부짖는다, 부자들에게 화 있을지어다”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기능은 약간 조금이 끝이었다. 이 혁명가 운동꾼들은 오로지 광기와 선동만 있을 뿐, 이성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저 음해하고 까내리고 부수고 죽이고 파괴할 줄만 알지, 어려운 걸 만들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건 몰랐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도 비판하고 '총괄'하고 '타도'하고.. 어제의 동지도 바로 스파이로 몰아서 고발하고 죽여 버리고..;; 총체적인 무질서와 팀킬에 빠졌다. 한 구악을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똑같은 짓을 하거나, 예전만도 못한 더 큰 신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런 사고방식의 열매가 바로 소련의 대숙청,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과 대약진운동,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것들이다.
쟤들은 옛날 문화재도 엄청 많이 때려부수고 박살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장 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가면서 싹싹 긁어간 문화재들이 문혁의 피바람을 피해서 살아남았을 정도이다. 인류가 20세기의 이런 참극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저런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추잡한 성추행이라든가 프락치 오인 린치 같은 사건이 당연히 있었다. 보고 배우고 하는 짓이 저런 것밖에 없는 애들이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타도 대상보다 우월할 리는 절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내로남불 위선이다. 남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노동의 가치를 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절~~대로 자기 부를 남에게 분배하면서 자기 이념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의 수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소신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가령,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공유했던 것은 결과만 보자면 공산주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 전복 선동을 한 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초대 교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 온 주 이유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만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군국주의 1당 독재, 통치자 우상화, 전체주의, 닥치고 숙청 같은 건 공산주의와 무관했던 구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도 동원했었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도 통치자 1인 우상화만 없을 뿐, 조금 저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저런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없어지고 최소한 주류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니 이제 저런 공산혁명 어쩌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0년대 이후엔 북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최소한 경제만은 개방했다. 세계는 다시는 저런 미친 혁명 실험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같은 시장 경제에다가 세금으로 복지 보정만 하는 체제로 다들 수렴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를 개방했고 민주주의를 흉내만 낼 뿐,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는 한국·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도.. 저런 숨막히는 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과거의 상명하복 똥군기 문화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게 많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단순히 크고 땅 넓고 자원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정교분리, 삼권분립, 자유 민주주의와 현대적인 인권 이념을 퍼뜨린 정말 위대한 나라인 것 같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평범한 영연방 국가로 그치지 않고, 덕분에 인구도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많아져 있다.

아무쪼록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경제나 정치 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에야 진짜로 근로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은 진짜 내로남불 귀족 노조를 더 비판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부와 세금에는 똑같이 낙수효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멀쩡한 역할 분담을 쓸데없는 계급 갈등으로 비화하는 이간질과 반기업 프레임 따위에 속지 말고.. 옛날에 실패가 진작에 입증된 실험을 또 하겠다고 덤비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 게임 '혁명적인 개X끼'가 얼마나 끔찍한 욕설인지가  얼추 이해가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09 08:35 2024/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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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흑백 사진, 흑백 화면만이 더 옛날의 모습인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컬러여도 4:3 종횡비에 저화질, JPG 깍두기 artifact, 아날로그 노이즈가 가득한 영상은 까마득한 옛날 역사의 흔적이 돼 간다. 오늘날의 초고화질 와이드 동영상에 비하면 저런 영상들이 너무나 초라하기 그지없게 보인다.

차라리 순 아날로그 영화 필름이면 재질 차원에서 리마스터링이라도 할 수 있지만, TV 신호나 VHS 신호는 정보가 저게 전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없는 주사선 수를 무슨 수로 더 늘리겠는가? AI를 동원해서 소실된 정보를 인위로 창작해서 재구성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2002년 월드컵조차 유튜브가 없던 시절, TV가 아직 아날로그이던 시절, 20년도 더 전의 아련한 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이던 6월 29일 아침 10시 25분, 황해 연평도 부근에서는 남북 해군 간에 군인들이 피흘리고 배가 부서지는 전투가 벌어졌다. 그 당시 명칭으로는 서해교전, 현재 정정된 공식 명칭으로는 제2 연평해전이다.

1987년 6월 29일엔 민주화 선언이 있었고, 1995년 6월 29일엔 삼풍 백화점이 붕괴됐다. 그리고 2002년 6월 29일엔 저 사건이..;; 간격도 비슷하고 참 절묘하다.
제2 연평해전 때 보였던 북괴의 공격 패턴은 이랬다.

1.
모두들 잘 알다시피 우리 쪽에서 상대방을 정말 선의적으로 보고 배 옆구리까지 노출하면서 저지(차단) 기동을 했는데, 저놈들은 그때 비열하게 허를 찌르고 선빵을 날렸다.
이 일을 겪은 뒤에야 우리 측의 교전수칙이 개정되어 차단 기동이 삭제됐다.

이런 번거로운 기동 자체가 무슨 그 당시 대통령 때 처음으로 도입된 건 아니다. 하지만 1999년에 "NLL을 지키되, 우리 쪽에서 절대 먼저 공격하지 마라(강조), 나머지는 (그 번거로운) 교전수칙대로 해라" 이걸 골자로 하는 대통령 발 지시가 내려오기는 했었다.

2.
전투가 시작되자, 놈들은 기회가 되자마자 적장부터 바로 사살했다.
참수리 고속정 357의 정장이었던 윤 영하 소령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무슨 이 순신이나 넬슨 제독처럼 전투가 다 끝난 타이밍에 전사한 게 아니었다. 전투 초반에 몇 분 못 가 "저격"을 당해서 전사했다.

그는 처음엔 포탄 파편에 맞아서 다쳤고, 이때는 다시 일어나서 지휘를 계속했다. 허나, 함교가 부서지면서 자기 모습이 외부로 노출되었고, 이 때문에 조준 사격을 받고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단순히 눈 먼 총알이나 파편에 맞은 게 아니었다.
정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교전 중에 실질적인 지휘는 부정장인 이 희완 중위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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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총탄들 때문에 만신창이가 돼서 한참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의무병인 박 동혁 병장이었다. 의무병은 여느 전투원들처럼 엄폐물 뒤에 숨어서 발포만 하는 게 아니라, 부상병을 나르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기 때문이다. 전투 중에 헤드샷 맞아 즉사했건, 나중에 부상 후유증 때문에 사망했건, 이것도 평범한 사고사나 순직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전사이다.

(참고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 때도 무려 육군 대령이 공비에게 저격을 당해 전사한 적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전투복의 계급장도 멀리서도 잘 보이는 선명한 색이 아니라 눈에 잘 안 띄는 검정 계열로 바뀌었다.
물론 공비 입장에서는 아무 보급도 없이 적진에서 총알을 최대한 아끼면서 최대한 중요한 인물부터 제거하는 게 마땅했을 것이다.)

3.
우리 357 고속정이 이렇게 기습 공격을 당하자, 근처의 358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북괴 684를 향해 사정없이 불벼락을 내렸다.
그러나 놈들은 배가 너덜너덜 박살나고 수십 명의 승조원들이 죽거나 다치는 와중에도 358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진짜 끝까지 집요하게 357만 때리다가 자기 배가 다 박살난 걸레짝이 된 뒤에야 간신히 예인을 받으며 퇴각했다.

이런 집념 때문인지, 우리 357 고속정은 손상과 누수가 너무 심해서 예인 도중에 결국 침몰해 버렸고, 나중에 다시 인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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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위의 1~3을 한 줄로 요약하면??
북괴놈들은 자기들이 피지컬이 딸리는 걸 알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효율적으로 치고 빠진다. 기습하고, 기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적장의 목을 날리고, 한 놈만 집중적으로. 모든 공격을 최고의 가성비를 뽑을 수 있게.. 모든 타격을 철저히 계획적으로 한다는 거다. 제1 연평해전에 대한 보복으로 제2를, 제2에 대한 보복으로 천안함을.. 이런 식으로 우연이란 없다. 아랫것들의 돌발 일탈 따위는 더욱 없다! 알겠는가?

제2 연평해전 이후로 북괴는 잠수함 어뢰나 지뢰, 아니면 아예 미사일로 신경 거슬리고 있지, 저렇게 가까이 대면해서 총포 쏘는 방식으로 도발하지는 않고 있다.
저런 전투를 겪었기 때문에 북괴는 이런 식으로 바다에서 배로 찝쩍대서는 자기들이 더 크게 다친다는 걸 알게 됐고, 더는 그런 짓을 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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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수리 357의 영웅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북괴는 계속 NLL 넘어 오고, 그 부근에서 조업하는 울나라 어선들을 수시로 나포하고 바다의 일진 양아치 짓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씨 대통령 시절에만 해도 울나라 어선이 일본에 나포되기도 했던 거 같은데 요즘은 그런 소식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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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평해전"은 너무 엄근진한 소재를 다루는 것 대비 영화로서의 연출력 완성도는 떨어진다는 평이 있었다. 클리셰가 너무 뻔하고 진부한 채 애국심만 억지로 주입한다고 말이다.
허나, 딴 얘기는 접고.. 다 끝나서 결말부에, 살짝 하얗게 밝아진 배경으로 "그때 교전이 없었고 357 승조원들이 평소처럼 임무 마치고 복귀했다면 그 날 밤은?"을 상상한 장면은.. 정말 울컥스러웠다.

평소에 주인공을 괴롭히고 가혹행위 비스무리한 것도 저지르던 고참도, 평소에 아주 엄격하고 깐깐하게 굴던 함장도.. 다같이 TV로 축구 경기 보면서 얼싸안고 응원하는 거.. 영화로서 굉장히 적절한 연출이자 마무리였던 것 같다.
실제로 우리나라와 터키의 무려 4강전 경기가 당일 저녁에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때는 양국의 선수 모두 제2 연평해전 전사자를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한 뒤에 경기가 시작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2016년부터 3월 넷째 금요일을 '서해 수호의 날'이라고 제정해서 기념하고 있다. 날짜는 천안함 피격에서 유래되었다. 제1, 제2 연평해전에 이어 이 사건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2 연평해전 때 부상만 입고 살아남았다가 천안함 때 전사한 분도 있으니 말이다. (박 경수 상사~!!! 1981-2010)

북괴가 황해에서 얼마나 많이 찝적댔으면 이런 기념일까지 따로 제정될 정도였겠나?
10여 년 전 박 근혜 시절엔 국군의 날 기념식이 정말 웅장하고 좋았는데, 올해는 서해 수호의 날 기념식이 완전 마음에 들었다.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천안함, 연평도 포격 때 전사한 분들의 이름을 직접 다 불렀고, "댓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 북괴가 도발하는 한 1원도 원조해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언급을 했으니 완전 사이다 아닌가? 이건 진정 대통령 잘 뽑은 덕분이다.

우리나라 국군은 엄연한 정규군임에도 불구하고 북괴의 도발에는 거의 일본 자위대 수준으로 왕창 소극적인 최소한의 대응밖에 못 하고 있다. 선빵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언제나 우리가 먼저 맞은 뒤에 대응하며, 찍소리 못 하게 만들 보복도 못 한다. 여기에는 확전 예방이라든가 미국 눈치 같은 여러 정치적으로 불가피한 이유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도 핸디캡을 감수하고 불리한 여건에서 너무 신사적으로 대해 주고 있는데 천안함이고 연평해전이고 간에 뭔 패잔병이라느니 군이 무능하다느니 이딴 소리는 안 했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 일본과 북괴에 대한 잣대가 같지 않은 걸 정말 눈 뜨고 못 보며 싫어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10/28 08:36 2023/10/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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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쪽 얘기 참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네..
하고 싶었던 얘기들이 며칠 동안 버퍼에 차곡차곡 쌓여서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올라와서 말이다.. 뭐, 옛날 레퍼토리들도 많이 재탕했다. =_=;;

1. 표현의 자유와 형평성

  • 광화문 한복판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권리?'랑, 금남로 한복판에서 전 대갈 만세 외칠 '자유?권리?'는 똑같이 보장하거나 똑같이 금지했으면 좋겠다. 회고록의 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편파적 적용은 결사반대.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5· 18은 상대방을 오인한 민-군-관 쌍방과실에 가까운 비극이다. 그러니 5 18을 기념하려면 시민과 군경 희생자를 같이 기리고 서로 화해하게 해야 한다.
  • 5· 18 모독죄를 만들고 싶거들랑 천안함 모독죄와 리 승만 할배 허위비방 모독죄까지 같이 넣었으면 좋겠다.

6· 25에 대해서 쌍방과실, 남침 유도, 심지어 북침설까지 주장하며 국가유공자들을 모독하는 건 괜찮은데.. 5· 18은 어떤 이견도 용납 못한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 정말 가소롭기 그지없다.

최근에 지 만원 박사가 징역 2년형이 확정된 것도.. 그 사람 말의 진위 여부와 무관하게 정말 천부당만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다. 광주에 북괴군이 아니라 외계인이 침투했다고 개소리를 퍼부었어도 실형을 때렸을 건가? 저게 감방 갈 죄이면 광우뻥, 세월호, 천안함 패잔병, 이 승복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 등등도 전부 처벌했어야 한다.

2. 병적인 집착

  • 별 희한한 거, 아무 상관도 없는 걸 갖고 편집증적이고 변태적인 욱일기 논란은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페미년들이 별걸 갖고 성차별이니 여혐이니 시비 거는 것과 비슷하다.
  • 소녀상에다가 옷 입히는 짓도 제발 좀..
  • 멀쩡한 6 25 노래, 멸공의 횃불 노래를 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악한 반일 장사꾼들은 하루속히 정체가 탄로나고 X졌으면 좋겠다.
아울러, 국군의 날 포스터나 행사에 웬 중공군 무기가 등장하고, 국내 철도 개통 포스터나 현수막에 웬 신칸센 그림이 등장하는 꼴도 좀 없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건 강경하게 주장하는 사항은 아니지만 괜히 멀쩡한 일제 시대 대신에 ‘일제 강점기’, 을사조약 대신에 ‘을사늑약’, 한일합방 대신 ‘한일병탄’처럼 피해의식을 더 부추기는 말을 일부러 쓸데없이 만들고 바꾸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괜히 조약 대신에 늑약이라고 바꿔서 상황이 더 나아지는 게 있나? 민족 정신이 고취되고 구한말 선조들의 행적에 실드가 쳐지고 자부심이 생기고 하다못해 국뽕이 생기는 거라도 있나? 일본이 더 나쁜놈이 되고  속이 더 후련해지나?

6 25 사변은 자꾸 전쟁이나 한국 전쟁이라고 바꾸려 하고, 북괴라는 칭호를 안 쓰고.. 그쪽으로는 감정이나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한없이 ‘중립적인’ 용어를 쓰면서 일본 쪽은 왜 저러는데? 그 삐딱한 잣대가 몹시 거슬리고 마음에 안 든다.

3. 자유는 좋지만 자유주의는 좀..

나는 닥치고 시장 만능 방임주의는 경계하며, 지나친 자유뽕 성향도 극혐까지는 아니지만 싫어한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지 / 싫으면 그냥 니가 때려치우고 나가던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상황 봐 가면서 적용해야 된다고 본다.

가령, 자기가 제발로 종교 계열 고등학교-대학교에 지원하고 거기 방침에 동의를 하고 입학해 놓고는 거기서 채플 반대, 종교 강요 반대 짓거리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자기가 나가든지 해야지?
그러나 기업들이 다같이 비열한 담합을 하고 있는 와중에 마냥 파업만 욕하면서 귀족 노조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진짜 조직이 미쳐 돌아가는 중인데 소수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한테 저딴 논리를 들이대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다.

4. 윤석 열차

그림 한번 잘 그렸네. 고등학생이 벌써 머리에 뭐가 들어가서 저렇게 정치에 세뇌됐는지는 모르겠다만, 뭐 표현의 자유로 인정한다고 치자.
저 열차는 물 먹고 석탄 먹고 칙칙폭폭 더 폭주해서 이전 정권의 탈원전과 탈북자 북송 죄악을 다 까발리고 나쁜놈들 죄를 묻고 잡아 쳐넣었으면 좋겠다. 놈들이 예전에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줬으면 좋겠다.

이 사람 다음으로 지금 법무부 장관이 바톤 터치를 해서 정권을 물려받으면 우리나라는 21세기 최고의 황금기 중흥기가 찾아올 것 같은데.. 과연 국운이 거기까지 따라 줄지 잘 모르겠다.

5. 북한을 제대로 도우려면

구제불능 알코올 중독자나 도박 중독자를 돕고 싶으면 당장 굶지는 않게 밥을 주거나, 중독 치료를 받게 병원에 보내 주든가.. 어쨌든 당장 필요한 현물 서비스를 줘야 한다. 정상적인 경제 관념이나 분별력이 없는 사람에게 생돈을 덥석 쥐어 줘서는 절대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이다.

개인을 돕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차원의 원조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북한 주민들이 굶주리고 있으니 돕고 싶다면.. 그 도움이 주민들에게 직접 가게 해야 한다. 그리고 핵이니 미사일 같은 쓸데없는 도발 따위는 꿈에서라도 엄두를 못 내게 해 놓고 도와줘야 된다.
쌀이나 의약품을 줄 건 주더라도 핵 시설 같은 거 짓는 기미가 보이면 드론 날려서라도 폭격으로 조져 버리면서 도와야지..

저 동네는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수괴들 자기만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교통· 통신 인프라조차 없어서 주민들을 돕고 싶어도 물자가 그리로 가지를 못하는 지경이다.

북한에 백신 지원 사업을 벌였던 재미 한국인 과학자가 얼마 전 자신의 실패담을 들려줬다.
“백신을 주겠다니 북한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백신을 실어 나를 트럭이 없다고 했다. 트럭을 사주니까 이번엔 백신을 보관할 냉장고가 없다며 사달라고 했다. 트럭에 냉장고를 싣고 북한의 백신 접종 현장에 갔더니 이번엔 냉장고를 돌릴 전기가 없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 포기하고 돌아왔다.” (☞ 원문)


그러니 옛날에 원조가카가 괜히 고속도로부터 먼저 닦은 게 아니었다. 그 다음에야 제철소를 만들고, 그 다음에 그거 바탕으로 자동차나 조선소 만들고.. 할배 때 준비해 놓은 원자력 전문가를 이용해서 한참 뒤에야 원전까지 만들고..
다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이런 인프라가 없으면 만년 농업이나 경공업밖에 못 하기 때문이다.

본인은 새마을 운동도 1960년대가 아니라 생각보다 늦은 70년대 이후에 시작된 걸 알고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유신 독재 하던 심정이 이해가 된다.

6.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

내 개인적으로는 이제는 북한 컨텐츠도 그냥 있는 그대로 노출해도 되지 않나 싶다. 울나라가 물리적인 경제력 군사력이 북괴한테 딸리는 것도 아니고, 아무 거리낄 게 없지 않은가?
로동신문이나 고려항공 웹사이트를 warning.or.kr로 틀어막지 말고 개방하라는 거다. 뭐,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어른들의 사정이 있어서 여전히 틀어막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까 김 일성 회고록 얘기가 나왔었는데.. 이거 자체는 북한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다 개방되고 풀려나올 필요가 있다.
세월이 흐르니 하다못해 독일에서도 히틀러 "나의 투쟁"이 해금돼서 서서히 풀려나오니 말이다. 물론 책 내용을 오해하지 말라는 단서를 많이 달고서...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는 대신, 북한에다가는 성경이나 전 두환 회고록, 리 승만 Japan inside out 같은 책을 보급하는 거다. 상호주의에 입각한 개방이라면 나쁠 게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남한에다가만 북한 방송? 그것도 북한에다가 중계료 왕창 주고 사 와서? 그런 짓거리라면 이건 완전 종북 이적행위이니 나로서는 목숨 걸고 결사반대다.

신앙에서도 주변으로 복음 전파, 전도를 못 하게 하고 너 혼자만 조용히 믿으라는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다. (출애굽기, 다니엘서)
이와 비슷하게.. 남북이 서로 똑같이 선전방송을 안 하는 건 공평한 게 아니라 남한(+북한 주민)에게 손해인 거래라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내가 소위 햇볕정책이니 뭐니 하던 것에 분노하고 그게 정치쑈 사기극이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퍼주기만 하고서 정말 기본적인 것 하나 실제로 개방된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을 진짜로 제대로 도와주고 북한 체제를 개방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준비조차 한 게 없다.

그냥 정치쑈만 벌이다가 연평해전이나 박 왕자 피살 사건으로 뒤통수만 맞았으며, 그 뒤에 천안함이나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사건이 줄줄이 이어졌다. 2010년대 이후로는 계속 핵과 미사일 도발만 하는 중..

제발 저것들이랑 통일 수작 벌이지 말고, 그냥 지원 끊고 고립시키고 굶겨 죽이는 거라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전쟁 따위 안 해도 된다.
이 와중에 "우리 북한은 안 물어요" / "남측이 북한을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 "이건 좀 더 도와 달라는 신호" 이러는 정신병자 미친 새끼들은 정말 인도주의 차원에서 북으로 송환하든가, 추방 아니면 공개 처형에 삼족을 멸해도 시원찮을 것이다.

더 나아가, 북괴뿐만 아니라 이슬람 애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 수 있다. 쟤들은 "나는 너희 나라에서 포교 가능하지만 너희는 우리나라에서 포교 금지"를 고수하면서 세계 어디를 가나 상호주의를 제일 안 지키는 집단이다. 그러니 우리도 국내의 무슬림들에 대해 철저히 경계하고 필요 이상의 편의는 절대 봐 주지 말고, 세력이 절대로 커지지 못하게 감시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5 08:35 2023/01/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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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피난

작년 8월 여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나라 전체가 탈레반 집단에게 점령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50여 년 전, 남베트남이 망할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뒤에도 역사가 참 파란만장했다. 한때는 여기에 웬 소련 공산당 빨갱이들이 들어와서 1980년 무렵엔 전쟁이 벌어졌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등의 자유 진영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대거 보이콧 했던 이유가 이 전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여기는 이슬람 꼴통들 천지로 전락했다.
1970년대에 나라가 잘 살고 여성도 자유로운 복장으로 길거리를 활보했는데, 2010년대가 되니 옛날에 건물이 있던 곳은 폐허가 되고 여성은 부르카인지 히잡인지를 뒤집어쓴 답답한 복장으로 바뀌어서 혼자 함부로 길거리를 다니지도 못하게 됐다. 둘을 비교한 사진을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약소국 신생 독립국들이 2차 대전 이후로 무작정 강대국으로부터 해방만 되는 게 장땡이 아니었겠다 싶다. 그럼 이제 식민지 착취나 인종 차별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뒤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동족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식민 통치보다 더 악랄한 싸이코 폭군이 등장해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당장 이북이 저 지경이 돼 있다. 그 반면 우리나라의 건국과 역사 흐름은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아무리 천하의 미국 천조국이 쬐끄만 자유 진영 국가를 지원하고 도와준다 해도.. 그 지원 대상 국가가 도를 넘게 부패해 있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 무기를 지원해 봤자 그 무기가 빼돌려지거나 심지어 적에게 넘어간다면 미국이라도 미쳤다고 그 나라를 도와주겠는가.

이 패턴은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6 25의 극초반에는 군기가 잔뜩 빠져서 허겁지겁 후퇴만 하는 오합지졸 국군을 보고는 미국의 반응은 “이 자식들 노답~~”이었다. 후퇴 금지 즉결처분이라든가 제주도 망명 정부 계획이 최후의 수단 차원에서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그랬는데 서울 한강 이남에서는 어느 무명 용사가 “저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이 자리를 절대 뜨지 않고 지킬 것입니다. 부디 탄약을 더 주십시오”라는 명대사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는 무려 사단장이라는 백 선엽 장군이 야전에서 직접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날 쏴 죽여도 좋다”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미국도 다시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고, 얘기가 또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얘기로 돌아오면..
알고 보니 저 나라는 영해라는 게 없는 내륙국이더라. 어쩐지 그래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배가 아니라 수송기를 타려고 난리를 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박보다 수송 능력이 훨씬 부족하다.
그런 데다, 비행기는 타 교통수단과 달리 외벽 같은 데에 껴서/붙어서/몰래 짱박혀서 탑승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은 피난민에게는 굉장한 악재이다. 그래서 어디 못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몰래 탔는지 “여객기의 랜딩기어 수납 공간에 어느 밀입국자가 숨진 채 발견”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비행기의 외벽에 끼어 탔다가 비행 중에 떨어져서 죽는 건.. 정말 희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9 11 테러 때 창 밖으로 뛰어내린 희생자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처음 봤다.

2.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 화물기 추락 사고

지금 저 동네의 정치 시국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긴 하지만..
9년 전, 2013년 4월에는 무거운 미군 장갑차를 싣고 아프가니스탄 소재의 미 공군 기지를 이륙했던 보잉 747-400 개조 화물기가 갑자기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났었다. (내셔널 항공 102편 추락 사고) 원인은 화물 적재 불량이었다. (☞ 사고 영상)

육상 교통수단은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가다가 짐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변 차”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나 선박은 엄청 무거운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비행/항해 중에 짐이 한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져서 자기가 추락이나 침몰 같은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저 사고의 경우, 비행기가 이륙해서 기수가 살짝 위로 들렸을 때.. 화물칸 장갑차의 결박이 풀려 버렸다.
15톤이 넘는 무거운 장갑차는 뒤로 굴러가서 벌크헤드를 쳐 버렸고, 이 때문에 비행기의 미익을 조종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무게중심이 기체의 뒤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기체의 받음각이 치솟고, 이로 인한 항력도 엔진의 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그 화물기는 이륙한 지 얼마 되지도 못해서 실속에 빠진 채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승무원 7인 전원 사망.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조종을 못 하니 1985년의 JAL123편 같은 꼴 나서 언젠가는 자세가 어긋나고 추락했지 싶다.
에.. 자동차에다 비유하자면 몇십 톤짜리 강철 코일을 실은 트레일러가 겁도 없이 교차로에서 고속 급선회를 하다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 코일 따라 차량이 통째로 옆으로 뒤집힌(전도) 걸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뒤집히는 걸로 끝나지만,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추락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군용기 또는 미군에서 외주 준 민항기가 뜰 일은 없어지는 건가..?? 문득 저 사고 생각이 났다.

3. 전투기의 호위

지난 2018년에는 6· 25 사변 장진호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들 유해를 하와이에까지 가져가서 신원 확인 후, 다시 우리나라로 송환한 일이 있었다.
유해를 실은 수송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진입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맞춰 전투기들을 무슨 보디가드처럼 출격시켜 수송기의 양쪽을 엄호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수송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이렇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먼 길 거쳐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 영상)

이게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니..

태양의 후예에서 “성공한 인질 구출 작전에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정치와 외교는 제 책임입니다.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사처럼 사이다이고..
현충원에 있는 할배 묘지에 새겨져 있는 헌시 “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처럼 감동적이다. 그리고 2013년 레카 시절 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처럼 뭉클하다.

지난 8월에 모종의 계기로 홍 범도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도 전투기들이 똑같이 수송기를 호위했다. 이때는 3년 전에는 안 했던 섬광탄까지 폭죽처럼 쏴 줬다. (☞ 영상)
홍 범도는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그 뒤엔 소련 인민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헤이그 밀사 중 하나였던 이 위종처럼 말이다. 소련으로 가긴 했지만 딱히 한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나 북한의 건국과 연루된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독립운동가나 6· 25 참전 용사의 유해가 귀환할 때 전투기 호위를 했는데, 지난 도쿄 올림픽 때 대만에서는 선수들이 귀국할 때 이런 이벤트를 시행했었다.
대륙을 꺾고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너무 기특하다면서, 귀국하는 선수들이 탄 여객기의 주위에 미라주2000 전투기를 네 대 띄워서 호위해 준 것이다. 총통 각하가 특별 지시를 내린 거라고 한다. 공군이 이런 의전에도 동원될 때가 있는 셈이다.

4. 세계에서 제일 큰 비행기의 최후

인류가 만들어 낸 역대 가장 거대한 비행체야 나치 독일 시절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다. 허나, 부력이 아닌 양력으로 날면서 가장 많은 payload를 싣고 이륙 가능한 세계 최대 비행기는 바로.. 구소련에서 지난 1988년에 개발했던 An-225였다. 여객기가 아니라 화물기 겸 군 수송기 용도로 만들어졌다.

얘는 그 큰 보잉 747은 말할 것도 없고, A380보다도 더 컸다. 요즘은 저런 4발(엔진 수) 비행기조차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단종되는 추세이지만 An-225는 무려 6발이었다. 그리고 예비용 자매기가 구소련의 붕괴 시국으로 인해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지라, 얘는 동형의 다른 기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유일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부란 우주왕복선도 실어 나르고 다른 여객기의 벌크헤드 같은 대형 부품도 수송하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30년 넘은 낡은 비행기이다 보니 내부 기기들이 지금 관점에서는 낙후했으며, 조종을 위한 승무원이 좀 많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세계의 항덕들이 주목해 온 이 역사적인 비행기가 그만 소실되었다. 다른 사고도 아니고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수리 불가능한 손상을 입고 대파 당했다. 비행 중 격추는 아니고, 공항 격납고에 가만히 주기 중이었는데 공습을 받아 같이 박살 난 것이다. 전쟁이 야기한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최대 항공 사고

그나저나.. 우리나라 국적의 여객기가 옛날에 겪었던 네임드급 사건· 사고로는 북괴가 저지른 대한항공 858편 폭파(1987), 소련에 의한 007편 격추(1983), 괌에서 801편 착륙 실패 추락(1997) 등 여럿 있다. 이것들은 사고 장소는 다들 외국이었다.
정작 대한민국 내부에서 벌어진 역대 최대 규모 항공 사고는.. 의외로 국적기의 사고가 아니어서 인지도가 별로 높지 않다. 바로 2002년 4월 15일에 악천후 속에서 부산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하고 인근 야산에 추락한 중국 국제항공 129편 사고이다.

이 사고로 승객 155+승무원 11명 중에 130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승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건 1993년에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보다 더 큰 사고였다(68명 사망, 48명 생존).
이 두 사고는 지형 때문에 착륙 난이도가 높은 공항에다, 악천후와 조종사 과실까지.. 발생 원인이 서로 좀 비슷하다. 하지만 아시아나 733은 추락 후에 다행히 화재와 폭발이 없었던 반면, 저건 그렇지 않아서 더 처참한 사고가 되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여객기 한 대의 추락만으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몰살 당했다거나..=_=, 천조국처럼 여객기가 납치 당해서 고층 건물과 충돌하는 엽기적인 일을 자국 내부에서 당한 적은 없다.
본인조차도 2002년 5월 25일, 대만의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추락 사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저 사고는 한참 뒤 나중에야 뒷북으로 접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부산에서는 김해 공항을 대체할 더 크고 안전한 동남권 공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게다가 김해는 군 공용이기까지 한 관계로, 민항기의 운용에 제약이 더 크다.
굉장히 오랫동안 진통이 많았는데 결국은 가덕도에 신공항의 건설이 확정되었는가 보다.
서울에 공항이 여의도-김포-인천의 순으로 확장되었다면, 부산은 공항이 수영-김해-가덕도의 순으로 확장되는 모양새이다.

한편, 우리나라 국적기에서 사망자가 수십 명 이상 발생한 심각한 대형 사고는 저 801편 사고 이후로 현재까지 20년이 넘게 전무하다.
메롱 상태인 나라 말고, 세계를 통틀어 나름 선진국의 플래그십 항공사가 낸 '마지막' 대형 사고 기록은 현재로서는 2009년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16 08:35 2022/03/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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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

(1) 외세 때문에 못 하고 있는 게 절대 아님
내가 정말 양심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이 지구상에서 정말 중공만치 한국의 남북 통일을 온몸으로 반대하고 북괴 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악한 나라가 또 있냐..??
6 25 사변이 벌어졌던 시절이나, 그로부터 70여 년 뒤의 지금이나 한결같이 말이다.

유엔군이 38선 넘어서 북진을 하니까 칼같이 개입해서 저지한 게 저놈들 아니었냐?
그걸 놔두고 도대체 무슨 염치로, 무슨 양심으로, 무슨 유체이탈 정신승리 화법으로.. 통일이 웬 얼어죽을 일본 미국의 반대와 방해 때문에 안/못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2) 이제는 남북 통일 한다고 해서 국력이 더 강해질 수 있지 않음
그리고 이 인간들은.. 남한 북한이 합쳐지면 한국이 순식간에 일본 미국을 능가하는 강대국 부자 나라가 될 거라고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는 걸까? 허 참..

남한과 베트남이나 필리핀이 합쳐지면 일본을 능가하는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남한과 독일 정도가 합쳐져야 이제 일본과 맞장뜰 만할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괴가 베트남· 필리핀보다 더 잘사는 나라이기라도 하나?? 어이구..

본인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드는 애들, 싫은 애들.. 그 누구든지 입이 있으면 말해 봐라. 변명이든 반박이든 해 보셔~ 도전장 날린다.
이래서 반일정신병은 정상적인 지능과 양심으로는 절대 걸릴 수 없는 병인 거다.

(3) 이제는 통일이 아니라 그냥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를 바라야 함
사실, 우리나라가 남북통일을 할 거면 쌍팔년도 이전의 할배나 원조가카 시절에 무력· 흡수통일 형태로 했어야 했다.
그러나 남북 분단은 이제 사람들 세대가 바뀌어 버릴 정도로 장기화돼 버렸고, 북한 체제가 저절로 무너질 수 있던 기회까지도 다 놓쳐 버려서 이젠 때가 너무 늦었다. 골든타임을 놓쳤다.

이제는 무리하게 통일을 바랄 게 아니라 북한의 개방과 민주화부터 먼저 바라야 한다. 사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북한 주민들에게 저걸 주는 것 말고 다른 의도가 없다.
북한을 평범하게 왕래할 수 있는 중국· 일본 같은 정상적인 외국으로라도 먼저 만드는 게 절대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4) 북괴의 흉계
남조선이 멸공통일, 반공통일, 승공통일, 평화통일의 순으로 기조가 바뀌는 동안,
북괴는 전면 남침, 무장공비, 납치 폭파 테러이다가 그 다음으로 잠수함, 핵과 미사일로 기조가 바뀌었을 뿐이다!

일본은 패전 후에 GHQ한테서 교육받고 군국주의 쫙 빼내고 나라 체제가 싹 개조되기라도 했다. 그 뒤 일부 소수 또라이들이나 되도 않은 독도 갖고 트집잡고 지랄하는 정도이다.
하지만 북괴는 진짜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어림 반푼어치도 바뀐 게 없는뎁쇼..?? 과거의 망령이랑 현재의 적을 구분할 줄도 모르냐?

우리나라한테 저지른 짓에 대해 일본이 한 것만치라도, 영혼 없는 립서비스 사죄 보상이라도 한 것조차 단 1도 없고..
그렇게 퍼주고 평화 지랄해서 지금 북한 주민이랑 검열 없는 편지 왕래, 전화 통화, 북한 내부로 개방된 인터넷..
도대체 뭐 어느 거 하나 이뤄진 게 있나..??

민주당 간첩과 북괴 체제야말로 진짜 시대착오적인 애들일 뿐..
그나마도 아주 좋게 점잖게 신사적으로 말했을 때 시대착오적인 거고, 감정대로 현실대로 말하면.. 바로 가스실로 보내고 대가리에 총알 구멍 내야 될 애들이다.
굳이 목숨은 부지하고 싶거들랑 삼청이 아니라 오청 백청교육대라도 보내서 두뇌 구조를 개조시켜야 된다.

'공산주의' 와 '공산주의자'는 같지 않으며 '좌파'와 '종북'도 전부 다른 개념이긴 하다. 하지만 어쨌든 다들 나쁜놈이거나 아니면 나쁜놈의 사상적 근간으로 오· 남용되고 있는 건 다 동일하다.

2. 사악하고 불순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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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저런 상황에서

"자유라는 게 왜 중요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왜 피흘려 가며 이를 지켜내야 했을까요?"


이렇게 묻는 게 정상적이고 도덕적이고 인륜에 부합하고 올바른 질문이란다, 이 머저리 바보천치 등신아.
저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곧바로 민족 해방 항쟁이 미제 원쑤들에 의해 좌절됐다는 말 튀어나오겠지.

의병이고 독립군이고 싹 다 토벌되고 없어진 일제 식민지도 전쟁 없는 평화 상태였고,
학교에서 죄없고 약한 애가 양아치한테 고분고분 삥뜯기는 것도 싸움질 없는 평화 상태라구.. 안 그래, 이 사악한 위선자야?

3. 자살 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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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한두 번만 있었으면 그냥 우연일 수 있겠지만.. 줄줄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건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정권에 반대했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코렁탕 먹는다거나.. 심지어 장 준하, 최 형욱처럼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하는 사건이 민주화 이전 군사 독재 시절에나 있는 줄 알았지?

반세기 전 버전은 그나마 반공과 경제 개발을 위한 선한 독재이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건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독재이다. 진짜 지들만 해쳐먹고 나머지는 다 거지 되는 진짜 악한 독재란 말이다.

차이점을 모르겠으면..?? 니들만 책임지고 고생하면 내가 이런 글 올리지도 않는다. 정상인들까지 싸잡아서 고생하게 만들지는 말라고..!!
반대편 야당 진영에서 허구헌날 이런 자살 릴레이가 터졌어 봐라.. 무슨 난리를 쳤을까..?? 이걸 생각하면 소름이 쫙 돋는다.

지난 5년? 10년? 남짓한 시간 동안 내가 지켜본 바로는..
선의 편, 정의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딱 인상을 보면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떳떳하고 당당하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애국이 하루아침에 매국으로 뒤집힌 거라면 차라리 내가 죄인이 되고 말겠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내 명령에 따르기만 한 부하들은 아무 잘못 없으니 건드리지 마라. 나는 또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동일하게 행동하고 처신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딱~ 이러니 가슴이 다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다른 어떤 사람은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너무 순진할 정도로 고매하고 도도하게 “나는 애초에 죄가 없다. 세월이 흐르면 결국 역사가 공정하게 평가해 줄 것이다. 어차피 살 만치 다 산 인생인데, 구차하게 항소니 탄원이니 하는 것 자체가 적들이 짜 놓은 유죄 프레임에 말려드는 추한 짓이다” 이랬다.

그러나 그러나..
악의 편에 선 놈들은 정말 오로지 남 탓, 뭐시기 때문, 누구 때문.. 왜 나만 갖고 그래... 이었다. 그저 주둥아리로 말이 많고 변명이 많았다.

아니면 자살이나 싹 해서 책임 회피하고 수사를 흐지부지 시키고 혼자 도망가곤 했다. 아니면 자살 '당하거나' 말이다.
이건 정황상 결백 호소, 억울함 호소나 자기 명예 설욕을 위한 자결이라고도 절~~대로 간주할 수 없는 죽음이었다.

각 사람들이 누군지는 차마 대놓고 얘기하지 않겠다.
올해 봄엔 대통령이 바뀔 예정이긴 한데.. 이번엔 제발 악의 무리가 아니라 정의와 선의 편에 선 사람이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면 좋겠다.
'멸공'이니 '우리의 주적은 북한' 같은 너무 상식적이고 당연한 소리가 논란거리 조롱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이 좀 왔으면 좋겠다.

군대도 안 갔다 온 사람이 멸공을 외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 그럼 군대 갔다 온 대통령이 북괴를 옹호하는 건 말이 되고?
-- 그럼 일제 시대를 직접 겪지도 않은 사람이 반일 거리는 건 말이 되고?


멸공은 당연한 절대선이다.
멸공 갖고 전쟁 선동 지랄하는 건 절대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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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2/01/17 08:35 2022/01/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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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 일본 제국, 차우세스쿠의 몰락

1945년 4월 말,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처형 당하고 처참하게 시신 능욕을 당하는 걸 보고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절대로 저렇게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으며, 자살한 자기 시신을 철저히 화장해 없애서 적에게 신원 확인이 안 되게 하라고 부하들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못했으며, 치열 대조를 통해 히틀러의 시신이 확인됨)
무솔리니가 죽은 지 겨우 이틀 뒤에 히틀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그 뒤 1989년 12월 말, 루마니아의 공산 독재자 니콜라 차우세스쿠가 시민 혁명에 의해 축출되고 처형 당했다. 20세기의 독재자 중에서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엔, 이 사건을 접하고는 평소에 켕기던 게 많아서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 되는 거 아냐?”라고 와들와들 떨고 당황했던 인간들 중 하나는 북괴 김씨 일가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당연히 주민들이고 군인이고 서로 더욱 감시하고 밀고하게 만들고, 그런 비생산적인 짓거리에 세금과 공권력을 더욱 투입하고..
북한은 그야말로 역대급으로 폐쇄적이고 내부에서 항쟁, 혁명, 쿠데타 같은 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형태로 사회 구조가 더욱 썩고 곪아 버렸다.

영화 “Downfall/몰락”(2004)은 히틀러가 전쟁에서의 패색이 짙어지자 부하들을 탓하며 광분하다가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행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음으로 “일본 패망 하루 전”(2016)은 역시 항복 열흘쯤 전부터 원자폭탄 두 방 맞은 것 하며, 히로히토 천황은 어린 신민들을 위하야 어엿비 너겨 항복을 결단하는데 밑에서 또라이 같은 장교들이 항명하여 쿠데타를 벌이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일본에서 스스로 ‘일본 패망’ 이딴 식으로 영화 제목을 붙인 건 당연히 절대 아니다.. ㅋㅋ 저건 우리나라 개봉 때 붙은 로컬라이즈된 제목이다.
이 둘은 동양과 서양에서 제각기 2차 세계 대전의 추축국 전범국이었던 두 나라가 말기에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영화들이라 하겠다.
독일의 히틀러는 총통으로서 국가 원수와 군 사령관 역할을 겸한 반면, 일본 천황은 신민들에게 얼굴조차 안 비치는 신이고 밑에 육군과 해군이 제멋대로 놀면서 폭주했다는 차이가 있다.;;

독일이 패망하는 영화가 제목이 Downfall인데.. 일본이 원폭 두 방을 맞고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을 때 일본을 상대로 시행되려 했던 특급 전면전 작전의 이름도 Downfall이었다.
북괴 정권이 일제나 나치 독일처럼 멸망하지 못하고 김씨 일가가 차우세스쿠 같은 최후를 맞이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2. 중요한 개념 정리

(1) 남한과 북한이 이산가족들의 눈물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서로 왕래를 금지하는 이유는..

  • : 간첩, 공작원들이 지령 받고 와서 불순한 짓을 할까 봐 두려워서
  • : 자기 주민들이 바깥 사정을 알게 되고 자기 체제의 치부도 알게 될까 봐 두려워서

그렇기 때문에 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고 이념 앞에서 가족도 없고, 남한 체제에 동화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강제 개조된 인간흉기만을 남한에 공작원으로 보낸다.
그리고 반대로 남한에서는 그 어떤 종북분자들도 아예 북으로 가서 눌러앉아 살라는 말은 절~~~대로 안 듣는다. OK???

이게 반박불가인 팩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디 반박할 테면 반박해 보셔~)
그러니 이 본질적인 방해 요인을 해소하지 않고서 남북 교류니 협력이니 개방이니 헛짓 하는 건 전부 그냥 돈지랄 정치 쑈 사기극일 뿐이다. 정권이 바뀌거나 국제 정세가 바뀌면 언제라도 파토 날 수 있다.
자유로운 서신 왕래나 전화 통화 하나 없이 무슨 개방이여 미친..

(2) 종북과 좌빨은 엄밀히 말하면 서로 다른 속성이다.

  • 좌빨: 북괴에 대한 호감도나 충성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경제 구조를 증세, 공유 위주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바꾸고 싶어함. 부자들 증오하면서 자기는 부자가 되고 싶어함.
  • 종북: 우리나라 정치 경제 구도와는 무관하게 그냥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고 북괴 수뇌에게 충성하고 저쪽에 못 퍼 줘서 안달. 미국/일본 잣대와 중국/북괴 잣대가 심각하게 일관성 없음.

그러니 서로 다르긴 하다. 종북은 아니고 좌빨만 강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둘이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만 해당하고 다른 하나가 완전 강경하게 정반대인 사람은 거의 없다. 미사일 아니면 발사체, 간첩 아니면 활동가(!!)라는 차이밖에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3) 오늘날의 북괴는 무슨 스탈린, 레닌이 어떻고 하는 공산주의 집단은 아님.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공산주의자의 수법'만 그대로 계승해서 자기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이다. 이게 핵심..

3. 현실 직시

(1) 고래잡이를 근절시켜 준 것은 그린피스의 무식 과격한 시위가 아니라 고래기름 대체재의 개발이었다.

(2) 고문과 강압수사를 이만치라도 없앤 건 DNA감식, CCTV 등의 과학수사이지, 민주팔이 데모꾼들의 깽판 시위가 절대 아님.
민주화를 골백 번 한다 해도 고문과 강압수사를 동원해서라도 용의자를 잡아내야 할 강력 범죄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3) 산의 나무를 베지 않아도 되게 하고 벌거숭이 민둥산을 푸르게 지키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은.. 무슨 자연 보호 운동 따위가 아니라 화석연료이다(땔감의 역할 대체). 그리고 그 더티한 화석연료조차 쓰지 않아도 되게 해 준 것은 정말 역설적이게도 원자력이다!!

(4) 1940년대의 일제를 굴복시킨 것은 사랑의 원자탄 fat man과 little boy이지, 무슨 아가리 파이팅이나 맨주먹 항쟁 따위가 아니었다.
(아 물론, 일제를 굴복 항복시켰다고 해서 한반도가 100% 자동으로 해방되지는 않을 수 있었고, 일제만 물러난다고 해서 거기가 자동으로 한국인 소유로 돌아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거기부터는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기여한 것도 약간 있음)

(5)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잘 정착한 건 그나마 독재 흉내나 좀 냈다는 대통령들부터가 사실은 민주주의를 적극 추구했으며, 호구에 가깝게 너무 착하고 선량하고 순진해 빠졌던 덕분이다. 세상에 어느 정신나간 바보 등신 독재자가.. 자기더러 물러나라고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다치자 문병을 갔으며, 너희들이 장하다고 칭찬을 했느냐 말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선량하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데모질 좀 해 봤자 옛날의 북한, 중공, 헝가리, 캄보디아처럼, 요즘 미얀마처럼 총칼과 탱크에 진작에 싹 다 진압되고 갈려 나갔을 것이다.

아이고 이런 예가 얼마나 더 있을까? 현실을 좀 똑바로 직시하도록 하자.
현실을 직시할 줄 모르니까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오로지 "일제와 독재에 항쟁"밖에 없는 줄 안다.
그리고 북한 주민들은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부족해서 김씨 왕조를 무너뜨리지 못했다느니, 열심히 일하지 않고 게을러서 남한보다 못살게 됐다느니(혹은 미국놈들이 경제 봉쇄를 해서-_-) 같은 개 헛소리가 찍찍 나오는 것이다. 이건 사상과 분별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뜻한다.

4. 사상 단속

본인의 지인 중에는 현역 군 장교도 있고 국· 공립대의 교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보아하니 이분들은 소속의 특성상 개인 SNS에서 정치· 종교 분야의 자기 사상과 견해를 표현하는 것에도 좀 제약을 받는 것 같다. 상부에서 자기들의 SNS 계정까지 모니터링이라도 하는지, 몸을 사리시는 게 느껴진다.

내가 알기로 공무원은 타 영리 활동 겸직(사교육 교사, 대리운전, 알바 등..)이나 노조 설립, 정당 활동 정도가 금지이다. 비영리로는 시인 등단까지도 가능한 걸로 아는데.. 왜 업무 외의 영역인 사생활에 저런 제약이 가해지는지 난 잘 모르겠다.

그리고, 저런 지엽적인 사상 단속은 그리도 꼼꼼히 하면서..
지금 공립 학교에서 어린애들한테 철저하게 정치 이념을, 그것도 매우 해롭고 악하고 불순하고 잘못된 쪽으로 주입해 넣고 있는 전교조 교사들 단속은 교육계에서 제대로 하고 있는가? 난 이에 대해 깊은 회의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교사를 뽑을 때 인성 면접에서 다같이 “김XX 개XX”를 소리내어 복창하고 동의시키든가, 그게 민망하고 남사스러우면 임용 시험에서 필적 확인 문구로라도 저걸 필사시켜야 하지 않나 싶다.
민망하고 남사스럽다고 최소한의 인증을 안 하다 보니 지금은 교육계가 정말 심각한 수준으로 적화됐기 때문이다.

사상이 저쪽으로 불량한 놈들은 사형, 추방, 삼청 교육대, 정신병원 중 하나가 마땅하겠지만, 사정상 그럴 수 없다면 최소한 법조인, 성직자, 정치인, 교육자 같은 직업은 절대로 가질 수 없게 해야 한다. 그냥 사기업 월급쟁이나 자영업 장사로 자기 전공 기술만 이용해서 밥벌이를 할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권위와 영향을 행사하는 직업은 절대로 넘볼 수 없게 해야 한다.

5. 죄책감??

또한 본인은 군인(특히 일개 병사가 아니라 사관생도나 장교)이나 사형 집행관이라는 사람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쓸데없이 죄책감 운운하는 게 굉장히 싫고 마음에 안 든다.
그건 의대생이나 현업 의사가 무섭거나 비위 상한다고 해부 실습 내지 수술을 못 하는 것과 비슷한 꼴이다. 그럼 애초에 그 업계로 가질 말았어야지..

사형수한테 밧줄 씌우고 교수대 버튼 누르는 교정직 공무원은 자기 감정이 아니라 불쌍한 피해자 유족을 대변하는 심정으로 일을 해야 한다. 어디 뱃대지가 불러서 갑자기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남북 통일이니 협력이니 하기 전에, 먼저 북한에 올바른 통치 체제를 이식하고 개방을 시키고 서신과 통신 왕래라도 시켜야 된다. 그게 억만 배는 더 중요한 일이다.
인과관계와 우선순위를 이렇게 따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나?? 이런 게 정치 성향이나 종교관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질 수 있는 사항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비정상인가..?? ㅡ,.ㅡ;;;

내 경험상 필요악을 없애자고 선동하는 놈들은 그놈들이야말로 진짜 절대악이 아닌 적이 없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8/18 08:35 2021/08/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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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십용사

본인은 작년 말쯤에 본인과 같은 진영에 속한 이웃 교회 형제들과 교제할 일이 있어서 화성 동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원 모양의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시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외곽의 도로에는 웬 '십용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흠, 육탄 십용사 멤버 중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기라도 했나 보다.

3년쯤 전에 도로명을 통해서 우연히 이 윤탁 한글 영비를 알게 된 것처럼.. 도로명을 잘 지은 게 나름 지역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저기는 아예 육탄 10용사 기념 공원까지 길목에 있는 걸 봤다. 다만, 시간과 동선 관계상 개인적으로 들러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정훈 차원에서 기리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 육탄 10용사는 극히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6 25 사변 "이전"의 굉장한 옛날이 배경이어서 이질적이다. 1년 남짓 전이던 1949년 5월, 지금 같은 휴전선이 아니라 38선이 아직 유효했고 개성 시내가 남한 땅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38선에 따르면 개성 시내는 남한이지만, 바로 북쪽의 고지대인 송악산 중턱과 정상이 북한 땅이어서 남한이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했다는 것이다. 북괴는 6· 25를 벌이기 전부터 여기에서 수시로 툭탁거리고 국지전 시비를 걸면서 남한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그걸 견제하려면 북괴가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벙커라도 파괴해야 했다.
(뭐, 그 시절 용어로는 벙커 대신 러시아어 '토치카'가 더 즐겨 쓰인다. 휴전선의 길이도 킬로미터가 아니라 꼭 155 '마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해서 혈혈단신으로 괴뢰의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까 버리고 전세를 뒤집고 송악산 고지의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 열 명이었고 '육탄 10용사'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적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군인 애국자라고 아주 성대하게 기념했다. 동상 만들고 노래 만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름을 딴 군부대와 상 등도 제정하고 별 짓을 다 했다.

전쟁터라는 게 한 사람의 뻘짓 때문에 수십 명이 몰살당할 수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 덕분에 수십 명이 목숨 건질 수도 있는 동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보다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으며, "이기든지 죽든지", 멸사봉공 진충보국 같은 관념이 더 강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송악산 기슭과 개성 시내는 6 25 전쟁 때 결국 지못미가 돼서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저 사람들도 죽은 게 아니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전부나 일부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도 육탄 10용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병사가 출연해서 자기 고향과 가족 인증을 했댄다..;;

너무 옛날 일인지라 이제 와서 정확한 진실을 알기는 난감하다.
다만, 북한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언급한다고 해서 걔네들 말이 언제나 다 맞는 건 아니다.
북한에서 뜬금없이 효순이 미선이 자리를 만들고 추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무슨 대공 안보 관련 사건에 휘말렸거나 미군의 '악질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무슨 광주에 투입됐던 대남 공작원의 묘지인지 위령비인지를 만들었다면서 5 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걔들은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4 19 의거나 6 29 민주항쟁 등도 자기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제멋대로 기념하고 선동 자료로 써먹는다.
그리고는 정작 진짜로 침투했던 대남 공작원이나 6 25 공산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존재를 부정하고 유해를 가져가지 않는다.

즉, 이런 쪽으로는 북괴의 대처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반응만을 직접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육탄 10용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황상 그 시절에 10명의 특공대가 조직돼서 폭탄을 들고 송악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는 팩트이지만.. 그 이상 정확한 사건의 결말을 알기는 어려워 보인다. 거기가 무슨 철원 백마고지마냥 6 25 때 피로써 수복해 내서 지금 전해지는 영토인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이 옛날처럼 카미카제 같은 전술이 마냥 미화되는 시기인 것도 아니니..

그러니 육탄 십용사는 문자적 적용보다는 '영적 교훈'이 더 의미를 갖는 영역인 것 같다. 북괴 몰아내고 개성 시내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해당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재조사 발굴이 대대적으로 필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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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있는 육탄 10용사 현충비. 굉장히 옛날(2007년!)에 찍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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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1/07/05 08:35 2021/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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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의 마을들

우리나라 영토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휴전선이라고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이 중앙에 있고, 거기 곁을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 구역이 감싸고 있다. 여기 주변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행 금지 구역임은 물론, 지리 정보가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간 지도란,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자는 원칙적으로 군인과 민간인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가끔 GP를 지키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경찰처럼 둔갑해서 몰래 들어간다. 그 반면, 후자는 민간인만 출입 금지이다. 거기에 조상 대대로 밭이나 묘소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농사나 성묘 같은 정당한 볼일이 있을 때만 인근 군부대의 허가를 받고 낮 시간대에 한해 드나들 수 있다.

그럼 전국의 모든 민통선 안(= 민통선 이북)은 밤엔 군인을 제외하면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암흑 지대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주민이 상주하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그 원조 1호는 판문점에서 제일 가까이 있고 휴전 직후부터 조성됐던 대성동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부터 이 근처에 존재했던 마을이며, 6· 25 정전(휴전) 협정에 따라 존재를 인정받고 보장받았다.
여기는 휴전 회담이 진행된 판문점의 근처인 덕분에, 1951년 하반기부터는 전쟁의 포화에 휘말릴 일이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대신 여기는 우리나라가 땅을 수복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방어하기 불리한 곳을 포기하게 됐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해주 반도와 개성 시내를 내어주고 북한이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사실 대성동 마을 일대는 민통선과 남방한계선의 구분도 아직 없어서 코앞이 군사분계선이며, 강원도 전방에다 비유하자면 아예 비무장지대 안이나 마찬가지이다. GOP도 아니고 GP가 있을 곳에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그만치 엄청나게 위험하고 거주민들의 행동과 이동에 제약이 크다.

한때 우리나라 대성동과 건너편 북한의 기정동에서 국기 높이 달기 병림픽(?)을 벌인 적이 있었고, 그게 초등인가 중인가 도덕/윤리의 마지막 단원 북한 통일 문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나중엔 남한이 그냥 gg 치고 손 떼서 북괴의 160m짜리 깃대가 한동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몇 년대에 벌어진 일인지는 아무리 찾아 봐도 정확한 기록이 나오는 게 없다. 팩트 확인이 잘 안 된다.

나중에는 저기 말고도 통일촌, 해마루촌, 횡산리 등 민통선 안 마을들이 몇 곳 더 조성됐다. 아래 그림을 보시라. (☞ 출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민통선 마을은 출입이 까다롭긴 하지만, 대성동만치 군사분계선과 북한이 코앞이고 위험하고 유엔군의 통제를 받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곳은 아니다. 그림에서도 대성동은 다른 마을들과는 성격이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통일촌이나 해마루촌은 파주의 도라 전망대 및 제3 땅굴 임진각 안보 관광 패키지에도 포함돼 있어서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성동을 아무 연고 없는 일반인이 단순 호기심 차원에서 관광..??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쪽의 관광 난이도는 판문점의 관광 난이도와 대등하다.

이런 마을들은 전쟁 때 원주민들이 다 피난 가면서 폐허가 되고, 그 상태로 민통선 구역으로 봉인됐다가 뒤늦게 마을로 재건되었다. 사람을 받아들일 거면, 밭은 몰라도 주택이 있는 곳은 그냥 민통선에서 해제해 주지 싶은 생각도 든다만.. 지형상의 한계나 군사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그리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원에 이런 마을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저기가 넓은 평야를 낀 천혜의 곡창 지대이기 때문이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해 냈고 김일성이 빼앗긴 걸 통탄했을 정도인 금싸라기 땅이다. 그 유명한 민통선 안 메기 매운탕 식당인 '전선 휴게소'도 이 지대(정연리-유곡리) 사이에 있다.

그 반면, 철원보다 더 동쪽부터는 산세가 더욱 험해지고 지형이 너무 메롱이 되는 관계로, 민통선 마을 같은 게 없으며 거주민도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그림에 표시된 마을들 중에서 마현1리는 혼자 조성 시기가 1959년인 게 이색적이다. 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라의 동남부 지방을 깡그리 삭제해 버린 태풍 ‘사라’의 피해 이재민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냐 하면 부산이 아니라 무려 울진이다. 1963년 이전엔 울진이 경북이 아니라 강원도 소속이었던 관계로, 강원도 도지사가 이재민들에게 이 참에 정부 지원금도 받아서 같은 강원도인 철원으로 이주를 주선했다..;;

그렇게 66세대 359명의 주민들이 군용 트럭 23대를 나눠 타고 저 마을로 가는 데만 3박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울진에서 철원까지 가는 경로에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군용 텐트에서 살면서 근성으로 황무지를 일궈서 밭을 만들었다. 여기가 한때 격전지였던 관계로 땅 조금 파면 탄피들이 무슨 광물처럼 튀어나왔나 보다. 그걸 주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랬는데 이듬해 봄엔 이 승만 정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마을에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강원도 도지사와 철원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이 사람들이 마현1리에 정착한 때가 1960년 4월 7일이니 4 19 의거로부터 겨우 두 주 전... 말 다 했다. =_=;;
그리고 기껏 고생해서 밭을 일궈 놨더니 여기에 진짜 원래부터 살았던 원주민이 찾아와서 땅 내놓으라면서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입주민은 여기서도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마현1리 이주민촌은 30년전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사라호 (59년9월17일)에 가옥과 전담을 모두 떠내려보낸 경북 울진군 일대의 농민 66가구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시작한 곳이다.
(...)
조국강토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동족상잔의 흔적만을 안은채 갈가리 찢겨버려져 있던 민통선 안쪽 황무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름진 철원 평야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우거진 잡초더미와 6·25가 남겨준 온갖 잔재들만 눈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국군과 인민군의 훈련 포성에 몸을 떨며 군용 천막을 치고 개간의 삽질을 시작했다.
부르튼 손으로 잡목과 온갖 무기 파편·돌등을 제거하고 우거진 싸리숲을 없애기 위해 몸에는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곳곳에 처박혀있는 불발포탄의 위험 속에서도 『이 땅을 일구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개척의 삽질은 끝없이 이어졌다.
눈앞의 황무지가 옥탑으로 변할 생각을 하며1인당 2·5홉씩의 배급잡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 출처)


이때 선조들이 얼마나 고생했으면..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989년, 마현리 주민의 세대가 바뀔 즈음에 건립된 입주기념비에는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괭이와 호미로 6·25 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 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는.. 정말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하고 처절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핵심은 대성동 말고도 민통선 안에 자리잡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현리 주민들은 실제 이곳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진짜 여기 원주민들과 분쟁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더 관심 있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존 보도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링크 1, 링크 2, 링크 3, 링크 4)

그리고 요즘은 마현리는 주변의 밭은 몰라도 마을 자체는 민통선 안이 아닌 것 같다. 국도 5호선에서 멀쩡히 진입할 수 있고 마을 내부도 버젓이 로드뷰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이길리에 소재한 마을은 민통선 안이다. 72~73년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들, 특히 이름이 대놓고 통일촌이라고 지어진 저 마을은 임진각이 건립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해마루촌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김 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내지 경의선 연결과 같은 맥락에서 조성된 실향민 마을이다. 상공에서 보면 마을 도로가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져 있는 걸로 유명하다.

끝으로, 철원도 아니고 서쪽 끝도 아닌 중간(연천)에 마을이 딱 하나 있는 게 연천의 횡산리이다. 시기도 혼자 1977년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데.. 얘는 임진강과 군사분계선의 선형이 굉장히 교묘하게 꼬이는 곳에 있어서 뭔가 섬 같은 느낌이 들며, 제2의 대성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는 특별한 사연 없이 원래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나중에 민통선 마을이 조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77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서이다.

이상이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는 건 이제 다들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는 거기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민통선 마을 거주민에게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법적 근거를 잘 모르겠다.

병역법이나 병역법 시행령 등 관련 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장애인이나 탈북자가 면제이지, 저 지역 출신에 대한 언급은 딱히 안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육지 말고 바다 쪽 민통선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동도는 통제가 아주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민통선에 속한 곳이며, 백령도나 연평도 같은 서해5도도 개념적으로 대성동 및 타 민통선 마을에 준하는 특이한 오지이다. 그러니 면제 혜택을 주려면 그쪽과의 형평성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저 정도로 특이하게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한테, 부정 수급의 가능성도 전무한 혜택을 주는 것 자체야 형평성 불만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민통선 마을들과 대성동을 완전히 같은 급에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지난 2019년경엔 대성동 마을 토박이인 어느 친자매(유 수빈· 유 정빈)가 대학 졸업 후에 무려 여군 장교를 같이 나란히 지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 관련 링크)
남자였어도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신분인데 여자가 그것도 언니와 동생 둘 다 군대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니 매우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맨날 군인들을 보고 살았는데 자기도 그런 군인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세상엔 이런 일도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09 08:33 2021/05/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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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역사 사건 분석

1.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하게 적중한 "20년 텀" 예측

(1)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 원수는 1919년 6월에 열린 베르사유 조약(패전국 독일 vs 연합국)에 대해서, "이건 영구적인 평화를 이뤘다고 볼 수 없고 기껏해야 20년 정도의 휴전으로 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 딱 20년 뒤인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여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2) 1956년 7월, 미국의 전기 기술 전문가 시슬러 박사는 우리나라의 할배 대통령을 만나서 너님 나라는 원자력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자력은 화석연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낼 수 있는 꿈의 에너지입니다. 땅이 아니라 머리를 캐서 만드는 에너지이기 때문에 자원 빈국인 한국 실정에 아주 적합합니다."

할배는 이 권고를 적극 받아들여서 그 가난한 나라 살림에 국비를 들여서 원자력 전문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국비로 유학 보내 주고 교육 파견 보내고..
시슬러는 할배에게 "지금 원자력 프로그램을 시작하면 그 꿈이 20년쯤 뒤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거의 정확히 20년 뒤, 1978년 4월, 원조가카의 집권 후반기가 돼서야 우리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가 완공됐다.

2. 나라들 비교

세계 대전 진영

  • 일본은 1차 대전 때는 말석이나마 연합국 승전국 진영에 있었지만, 2차 대전 때는 미국을 대적한 추축국 전범국으로 전락했다.
  • 이와 비슷하게 중국은 2차 대전 때는 일본에게 침략을 당한 뒤 어째 연합국 승전국 쪽 줄을 섰지만, 다음 세계대전(만약 벌어진다면) 때는 얘야말로 추축국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인다.;;

국력과 위상의 차이

  • 미국은 자국 내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이 전혀에 가깝게 없고(남북전쟁이나 미영 전쟁은 너무 옛날이고, 진주만이나 9 11 정도나 예외?? 그리고 그걸로 끝), 현재는 세계 곳곳에 자국 군대를 파견해서 다른 나라들을 도와주는 경찰 국가이다. (늘 모범 경찰이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 일본은 옛날에 너무 사고를 친 벌로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됐다.
  • 그 반면, 한국은.. X도 힘이 없고 자기들끼리도 제대로 못 뭉친 대가로.. 세계 수많은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간신히 살아남았고, 현재는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3. 일제강점기 전후에 일본의 변화

일본은 일제강점기의 거의 직전부터 육군 군복이 바뀌었고..
패전(자기네)과 해방(한국) 거의 직후부터 맞춤법이 바뀌었다.
그래서 딱 러일 전쟁까지만 해도 일본군은 군복이 검정이다가 몇 년 뒤 호남 지방 의병을 토벌하던 무렵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그 황토 내지 황록색 군복 차림을 하기 시작했다. (1905년 38식 군복 ~ 1912년 45식 군복)

그 반면, 지금 쓰이고 있는 일본어의 표기 체계는 일제강점기가 끝나면서 정립됐다.
1946년부터 히라가나가 공문서에서도 쓰이기 시작했고 표기하는 방식 자체도 살짝 바뀌었다. 상용 한자를 재정립했으며, 1949년에는 신자체라 해서 우리가 ‘약자’라고 부르는 그 간소화된 한자들도 완전히 공식화됐다. 나라 국을 或이 아니라 玉을 곁들여서 쓰는 것으로 중국 간체자보다 먼저 정한 것이다. (중공은 6 25 사변이 끝나던 때까지도 아직 或이었음)

요컨대 일본은 한반도 일제강점기의 앞에 군복 개편, 뒤에 맞춤법 개편이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한반도에서 1900~1910년 사이에 일제 시대의 시작을 열었던 철도가 경부선· 경의선(중국 연결)이라면,
1940년대에 일제 시대의 끝을 함께하고 끝내 완성되지 못했던 철도는 동해선(러시아 연결)이다.

금강산선(관광용..)이나 경북선(적자) 같은 철도는 이미 있던 선로도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뜯어갔었지만 이런 장거리 간선은 미래를 내다보고 일제가 전쟁 중에도 굳이 애써 건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일제 시대에 아직 우리나라에 없었던 것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일제 시대에 아직 한반도에 없었고 해방 후나 일제 말기가 돼서야 도입된 것들을 더 늘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 디젤 기관차: 다만, 전기 기관차는 금강산선에 있었다. 195~60년대엔 우리나라에 반대로 디젤 기관차가 있고 전기 기관차는 없었다. (기존 기관차는 금강산선의 폐선과 함께 폐차됨)
  • 명조체: 일제 시대에는 여전히 개역성경체 같은 붓글씨 서체만이 쓰였다. 오늘날의 명조 같은 서체는 해방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 손목시계: 아직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한반도에 내려왔던 소련군 양아치들이 즐겨 약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 텔레비전: 천황 옥음방송은 라디오로 송출됐었다~! 다만, 일본 말고 서양의 독일은 아무래도 텔레비전 기술의 선구자이다 보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벌써 영화 필름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를 했다.
  • 길거리에 중앙선과 신호등: 경성 시내에조차 저런 게 아직 없었다. 일제 시대엔 아직 "자동차는 사람을 피해서 도로의 중앙으로 다닐 것"이라는 단선 철도 같은 규범만이 존재했다. 자동차가 워낙 적고 넓은 도로가 없었으니까..

5. 공작원, 핵 개발

할배는 말기 때 북한이 아니라 일본으로 테러 공작을 위한 공작원을 보냈었다. 다른 반일 감정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던 재일 교포 북송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김 구 암살범인 안두희조차 그 공작원 중 하나였다.
할배는 자국이 아니라 남의 나라 영토에 있는 자국민 동포가 거짓말에 낚여서 북한으로 가는 것까지도 저지할 정도로 정말 반공 박애주의자였다.

한편, 원조가카는 말기 때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기를 몰래 개발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저 사람 최대의 고민거리는 석유 파동과 주한 미군 전면 철수였지 싶다. 이론물리학자이던 이 휘소 박사야 이것과 전혀 무관한 인물이지만, 할배 때부터 육성했던 한국의 원자력 전문가가 이 휘소만 있는 건 아니었고, 핵 개발을 주도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비공식 회고에 따르면 원조가카는 96년쯤의 올림픽 유치와 행정수도 이전, 핵무기까지 짠~ 마무리 지은 뒤에 퇴임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행정수도 이전은 요즘 같은 국토 균형 발전 따위가 아니라.. 단순히 지금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한 것 때문에 구상하던 과업이었다.

원조가카가 암살 안 당하고 유신 헌법으로 9대 임기를 만료하면 84년, 10대 임기까지 만료하면 90년까지 가긴 했을 텐데..
공작원과 핵무기 모두 수장이 하야하고 암살당하면서 백지 물거품이 돼 버렸다. 뭐 둘 다 궁극적으로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을 것이고 국제적으로 여러 후폭풍을 감내하는 위험한 일이었지만.. 할배와 원조가카 두 분 다 북한과 관련해서 참 엄청난 일을 하고 있긴 했던 게 사실이다.

그 뒤로 남한이 허울 좋은 민주화니 화해니 평화니 헛소리에 놀아나면서 좋은 기회들을 다 병신같이 날린 바람에, 지금은 반대로 적국이 핵무기를 만들어 버리게 된 게 안타깝다.

6. 국내 최초의 로켓 개발

6· 25 사변의 휴전 이후 딱 정확히 6년 뒤인 1959년 7월 27일.
우리나라에서 국방 과학 연구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방부 과학 연구소’의 주관으로 나름 40km 고도까지 날아간 다단계(3단) 분리 로켓을 개발해서 쏘아올린 적이 있었다.

아니 그 옛날에..?? 지금으로서는 정말 믿기 힘든 소식이며, 관련 전공자들도 이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는 “엥??” 이런다. 참관한 대통령은 비교적 친숙한(?) 박통이 아니라 할배였다. 시연 장소는 인천 바닷가. (☞ 대한뉴스 제225호 보도, ☞ 관련 자료)

할배 때 나름 그 없는 살림에 원자력 연구소도 만들었고 서울대와 한양대 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했다는 얘기는 들었다만, 자기 입김이 직접 개입해서 설립된 인하대에다가는 아예 ‘병기공학과’를 만들었다고 한다.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소식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뭔가 느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연구 개발을 했으면 노하우를 꼼꼼히 기록하고 전수하는 것도 중요하다. 안 그러면 예전에 애써 개발했던 걸 또 중복 개발해야 된다.
저 때 우리나라의 로켓 연구는 이듬해 할배 정권의 붕괴으로 인한 나라 혼란, 그리고 한반도에서의 발사체 개발을 싫어하는 미국의 견제로 인해 계속되지 못했다.

할배의 로켓, 원조가카의 핵이 연계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할배가 더 오래 살고 4· 19 따위 안 벌어지고 4대 대통령까지 갔으면 역사가 또 어찌 됐을지 모른다. 마치 “박통이 암살 당하지 않았으면”처럼 말이다.
다른 건 몰라도 한국-일본 재수교가 박통 때의 1965년보다는 확실히 더 늦게 성사됐지 싶다.

7. 중국과 북괴

  • 옛날에 우리나라 임시정부의 항일 독립운동을 도와줬던 진영은 장 제스이지 마오 쩌둥이 전혀 절대 아니다! 중공은 대한민국의 북진 멸공 통일을 저지한 원흉이다.
  • 북괴는 일본이 패전 후에 GHQ로부터 참교육 받고 체제가 바뀐 것만치도 달라진 것이 없다. 북괴는 일본이 그나마 립서비스로마나 사과하고 보상한 것만치도 과거사를 사죄한 적 전무하다.

이런 와중에 아직도 친일 청산을 못 했네 하는 헛소리는 많은 말이 필요 없고 그냥 망상 정신병일 뿐이다. 온갖 악하고 삐딱하고 잘못된 사상들의 근원이 바로 존재하지도 않는 일제 잔재나 친일파 따위 탓하는 반일정신병이다.
2010년대에도 아직도 전향을 못 했을 정도이면.. 진짜로 그냥 죽어야 낫는 말기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저그의 패러사이트는 메딕의 리스토어로 고칠 수라도 있지, 현실의 반일정신병은 그런 것도 없다.. 팩트로 치유되지 않으면 다른 그 어떤 걸로도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24 08:34 2021/02/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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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로

서울 역 북부에서 시작해서 서대문 역(5)과 독립문 역(3)을 찍고 지하철 3호선의 선형을 따라 고양· 파주 방면으로 가는 도로는 국도 1호선 구간인 한편으로 이름이 '통일로'이다.
이 길 자체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그게 고양과 파주까지 4차선 도로로 한데 뚫리고 '통일로'라는 이름까지 붙은 건 1972년 봄의 일이라고 한다. '통일호'라는 열차 이름은 1950년대 할배 때부터 있었지만, '통일로'는 박통이 붙인 이름이다.

그리고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서 통일로의 종점에 임진각 관광지가 만들어졌으며, 통일촌이라는 민통선 마을도 생겼다. 그로부터 몇 달 뒤인 7월 4일엔 우리가 학교에서도 배우는 7· 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됐다.
그러니 그때는 온통 통일, 통일 하던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진짜로 남북 통일이 이뤄질 줄 알고 많이 들떴었다.

지금이야 서울에서 파주 임진각 방면으로 갈 때 강변북로에서 이어지는 자동차 전용 도로인 자유로, 혹은 최근에 개통한 서울-문산 고속도로(17)가 즐겨 쓰인다.
자유로는 통일로 이후로 딱 20년이 지난 1992년에 개통했으며,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오두산 통일 전망대가 같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유로나 고속도로와 달리, 기존의 통일로는 자동차 전용 도로도 아닌 데다 차로도 너무 좁고 확장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그냥 그저 그런 시내 도로 내지 국도 레벨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임진각으로 가는 도로의 원조는 바로 이 길이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로의 고양시 북쪽 지점에는 '통일로 휴게소'라고 온갖 기념비들과 공원이 들어서 있고 공릉천이라는 하천도 가까이 있다. 본인은 북극 한파가 전국을 강타했던 새해의 첫 주말에는 거기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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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휴게소라고 해서 고속도로 휴게소처럼 바로 근처에 식당이나 가게들이 들어선 건 아니고.. 그냥 공터 광장과 공원 정도만이 꾸며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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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이니, 서울 올림픽이니 하는 왕창 옛날 냄새가 진동하는 기념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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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들어가서 올라갈 수 있는 정자 같은 게 아니어서 아쉽다. 자유롭게 개방된 2층 정자라면 올림픽대로에 있는 청담 도로 공원 같은 느낌도 났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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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휴게소'의 길 건너편에는 6· 25 사변 필리핀군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에 따르면, 필리핀군은 488명이 참전했으며, 이 기념비는 1974년 10월 2일에 건립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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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군 기념비의 옆에는 고양시 출신 인물 중에 6· 25 참전 용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있었다.
작년에 칠곡 왜관에서 봤던 애국 동산이 떠오른다. 거기서도 자기 지역 출신의 6· 25 참전 용사들을 잔뜩 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안보 관광을 많이 다니고 나니, 과거에 비슷한 부류의 기념물을 봤던 것이 서로 연계가 될 지경이다.
이 기념비는 2004년 7월 27일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2011년 1월 4일부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통일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런 볼거리도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통일로라는 이름의 도로는 경상북도 경주에도 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남북 통일 염원과도 오마주한다는 취지로 1977년엔 경주 남산의 동쪽 기슭에 통일전이라는 기념비가 건립됐기 때문이다. 통일전 근처의 도로 이름이 통일로이며, 심지어 '통일전 휴게소'도 있다.

내가 보기에 경주시는 박통 시절부터 관광 도시로서 특별 지원 대상으로 지정되어 혜택을 아주 많이 받았다. 1968년 12월에 국립공원 지정, 1974년에 보문 관광단지 개발, 통금에서 진작부터 열외, 호화 귀족 열차이던 새마을호 정차 따위 말이다. 게다가 도시형 국립공원이라는 건 현재까지도 경주시가 전국에서 유일하다.

끝으로.. 통일로라는 길이 닦이던 그 시절에 결의됐던 7· 4 성명이라는 건.. 우리나라가 영원히 으르렁대면서 적대할 것 같던 북괴하고도 그나마 “눈 가리고 아웅으로라도 좀 싸우지 말고 서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을 모색해 보자~”라는 제스처를 취해 봤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특히 1 21 김 신조 사태 때문에 서로 분위기가 얼마나 험악해져 있었던가?)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통일은 개뿔.. 남북 지도자는 애초에 서로 온전히 신뢰 가능한 대상이 아니었다.
전근대 시절 옛날에 유럽에서는 귀족 장교들이 자국 졸병들보다 적국 장교를 더 신뢰할 정도였다고 하더라만(적이지만 최소한 약속을 어기지는 않는다)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엔 그런 거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못 가 남한은 통일은커녕 자기 내부에서도 유신 독재(ㅋㅋ)가 시작되었고, 북괴 역시 특히 74년을 기점으로 주체사상과 함께 더욱 흑화하게 됐다. 쟤들도 겉으로는 통일 통일 거리면서 한쪽에서는 땅굴이나 파고, 공작원을 보내 남한 대통령을 암살까지 하려 했다. 그러니 통일은 더욱 물 건너가고 반공 분위기만 더 강해졌다.

2. 캠핑

통일로 휴게소를 방문하던 당시엔 서울의 낮 기온이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강추위가 며칠 동안 전국을 강타하던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최남단의 제주도까지 한파 경보가 내려졌으며, 한강이 얼고 황해 바다조차 일부 얼어서 양식업(...;; )과 비닐하우스 화훼업(치솟는 난방비)이 큰 피해를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본인은 평범한 산 속이나 물가가 아니라, 이번엔 아예 얼어붙은 강 위에서 텐트 치고 자는 것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통일로 휴게소 부근부터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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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중앙까지 100% 언 건 아니지만 주변에는 물이 흐르다가 완벽하게 얼어 버린 곳이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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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호~! 주차장에서 그리 멀지 않으면서 텐트 치기 적합한 곳을 발견했다.
이불· 침낭 등 장비가 굉장히 많고 무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도보 접근성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다.;; 이것들을 오래 들고 다니니 팔과 허리가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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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에는 통일로 IC 부근의 상류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는 전구간이 꽁꽁 얼고 위에 눈까지 쌓였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 공원 같은 것도 없어서 인적이 더욱 없었다. 다만, 나 역시 강물 쪽으로 가기 위해서 갈대더미들을 타넘는 수고를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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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세상에 이런 횡재가..
오도독오도독 눈 밟는 소리가 걸을 때가 아니라 누워서 몸 뒤척일 때 나는 그 느낌을 아시겠는가?
-15도도 이제 별 거 아닌 듯..^^ 아 그런데 다 좋은데 발은 좀 시렵다.. 이건 어쩔 수 없다..
믿음이 부족해서 강 중앙으로 더 가까이 가지 못했던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한숨 잘 잔 뒤 집으로 귀환했다.
그 당시엔 폰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차키의 버튼이 갑자기 먹히지 않기 시작했다. 키가 문제인지 차가 문제인지.. 차 문 못 열고 시동 못 걸면 어떡하나 깜짝 놀랐다. 키를 따뜻한 곳에 두니 다행히 다시 살아났다.

귀환할 때는 동부 간선 도로를 이용해 봤다.
의정부에서 서울 북부 구간이 싹 리모델링 돼서 확장되고 지하화가 된 걸 처음 봤는데.. 이게 딱 올해부터 개통한 거라고 한다.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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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천에서 야영을 한 뒤, 다음날 밤에는 중랑천 모처의 얼음판에서 또 야영을 했다.
여기는 공릉천보다도 얼음이 덜 생겨 있어서 중앙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텐트를 친 곳은 보다시피 명백하게 땅이 아니라 얼음이었다.

산천 어디서든 텐트만 치면 나만의 밀실이 생긴다는 게 좋다. 그리고 밖이 아무리 추워도 장비를 충분히 챙기면 체온 에어포켓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렇게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29 08:35 2021/01/2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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