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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수락산 #2

본인은 올해 가을엔 어쩌다 보니 등산 야영을 시리즈로 계속하게 됐다. (1) 예빈산(남양주), (2) 청계산 국사봉+발화산(의왕+성남) 다음으로는 (3) 수락산을 다시 찾아갔다. 한강 근처의 예빈산· 예봉산 일대도 남양주이고 서울 북동부의 수락산 근처도 남양주라니.. 실감이 잘 가지 않았다. 세부 행정구역이 별내면과 와부읍으로 서로 다르긴 하다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쯤 전, 겨울에 장암 역 근처에서 수락산을 올라서 주봉 정상에 도달한 뒤, 남양주의 청학리 수락산 유원지 방면으로 하산한 적이 있었다. 산을 서에서 동으로 횡단한 것이다. 이번에는 차를 가져가서 수락산 유원지에서 등산을 시작한 뒤, 하산도 동일 지점으로 했다.

그러니 등산 경로의 관점에서 보면 이번 산행은 새로운 산이나 등산로를 개척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3년에 가깝게 지나니 기존 경로도 충분히 새롭게 느껴졌으며, 수락산은 재방문만으로도 예빈산이나 청계산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선사했다. 암반이 많은 돌산이며,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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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산로는 꽤 높은 곳까지 자동차 접근성이 좋았으며, 이렇게 차를 댈 만한 곳도 곳곳에 있었다. 내가 굳이 이 경로를 택한 주 이유 중 하나 역시 이것이었다.

경치 좋은 계곡의 주변 공간을 어디선가 무단 점유하고는 방문객에게 바가지 요금을 물리는 식당들의 불법 영업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올해는 이 관행을 근절하겠다고 경기도에서 주도적으로 칼을 뽑고 나섰다. 언제까지나 생계형 범죄랍시고 오냐 오냐 봐 주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여기도 식당들이 상당수 박살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한강 공원들만 해도 텐트와 야식 광고 찌라시, 쓰레기 때문에 몸살을 앓다가 지금은 질서를 많이 되찾았듯이.. 저것도 공권력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금방 바로잡을 수 있었던 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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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올라간 뒤에야 드디어 차도가 끝나고 사람만이 접근 가능한 돌계단과 비좁은 등산로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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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금류 폭포'이며, 요런 게 바로 여느 흙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흙바닥이 아닌 바위 위로 물이 줄줄..
이렇게 높은 곳에서도 아주 가늘게나마 물이 흐르는 산은 본인은 지금까지 수락산밖에 못 봤다. 이 정도면 물을 그냥 인위로 끌어올리기라도 한 건가 궁금해진다. 수락산 계곡에서 발원한 이 물은 평지에서 청학천으로 이어진다.

금류 폭포의 바로 옆엔 산장이라고 해야 하나 휴게소라고 해야 하나 자그마한 간이 식당까지 있었다.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지만, 여기는 국립공원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민간 산장이 들어서는 게 가능하다. 북한산 같은 곳이라면 등산로를 벗어난 계곡 근처는 몽땅 울타리가 쳐지고, 무단 침입 시 과태료가 부과되었을 것이다.

여기서 정상을 향해 더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원암'이라는 바위와 함께 절인지 암자인지가 있다. 차량이 들어올 수 없는 높고 험한 곳치고는 건물과 마당을 포함한 부지가 꽤 넓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다가 '해우소'라고 불리는 공중 화장실도 있었다. 실제로 이용해 보지는 않았지만 생긴 형태는 마치 수돗물이 여기까지 들어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수세식이었다.

하긴, 나중에 집에서 지도를 확인해 보니 금류 폭포와 내원암 정도는 해발 고도가 아직 300~350m밖에 안 되었다.
지금까지 올랐던 200여 m 고도는 경사가 여전히 굉장히 완만한 편이었고, 내원함 이후부터가 급격히 가팔라졌다. 실제로 빽빽한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야 하는 곳이 계속해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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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정상이 보일 기미가 안 보이는데 날은 계속해서 어두워져 갔다. 하긴, 오늘은 등산 자체를 오후 5시가 돼서야 시작했다.
정상에 거의 다 와서야 그 이름도 유명한 '수락 산장'과 함께 약수터도 등장했다. 1리터짜리 통을 다 채우는 데 내 기억으로 거의 1분 가까이 걸릴 정도로 수압이 낮았지만, 그래도 이 높이에서 맑은 물이 나오는 것만으로 어디냐.. 마시는 용도와 씻는 용도로 모두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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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가 다 떨어진 뒤에야 주봉 정상에 도착했다. 1시간 반쯤 걸렸다.
수락산엔 여기 말고도 능선에 온갖 이름의 기암괴석 봉우리들이 더 있고 다른 등산로도 있는데, 거기는 아직 가 보지 못한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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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반석 위에 지은 집'에서 착안하여 '반석 위에 친 텐트' 정도 되겠다. ㄲㄲㄲㄲㄲ
따뜻한 간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도시락을 먹었다.
산을 오를 때까지만 해도 힘들어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고 물을 다 마실 정도였지만, 날씨는 이내 급격히 추워지고 땀이 식었으며, 바람도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전에 예영을 했던 산들은 한밤중에 정말 아무도 없었지만 이 산은 달랐다. 새벽 1시쯤에 야간 산행을 하는 일행이 수락산 정상에 왔다가 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산 정상 근처 바위에 텐트가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그 사람들도 좀 놀랐을 것 같다. =_=;;
"웬 텐트? 허걱~" 하는 소리를 본인도 듣긴 했지만.. 서로 마주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아까 전에 저녁을 먹고 있던 중에 텐트 문을 열었을 때는 근처에 웬 고양이 한 마리와 마주치기도 했다.
옛날에 인왕산 정상 부근과 북한산 정상에서도 고양이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야생일 텐데 어디서 어떻게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시끄러워서 결국은 숙소를 정상 아래의 숲 속 공터로 옮겼다. 여기가 훨씬 더 조용하고 자기 편했다.
달빛이 밝았던 덕분에 주변도 한 치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암흑천지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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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을 감았다 뜨니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처음에 텐트를 쳤던 곳의 낮과 밤 풍경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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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트인 정상 주변 풍경은 몹시 멋졌다. 근처의 불암산도 수락산보다 약간 더 낮고 작은 축소판일 뿐, 내부 제원(?)은 수락산의 판박이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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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깜깜할 때 지나갔던 길이 낮에는 이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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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고 차가 세워진 공터로 돌아오니, 이제야 여기에 차를 몰고 와서 주차 자리를 찾는 등산객들 일행을 여럿 볼 수 있었다.
본인은 여기 올 때는 용마 터널과 구리-포천 고속도로(29) 같은 유료 도로를 적극 활용해서 갔지만, 귀가할 때는 그냥 순화궁로, 덕릉로, 동부 간선 도로 등의 기존 종축 도로만 타고 갔다. 글쎄, 서울 동쪽의 구리와 남양주 쪽으로는 유료 도로와 관련 진출입로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는 것 같다.

  • 산을 관통하는 유료 터널: 용마(아차산), 별내(불암산)
  • 서울-양양 고속도로(60): 남양주*, 덕소삼패
  • 외곽순환 고속도로(100): 구리남양주, 불암산, 토평
  • 구리(세종)-포천 고속도로(29): 갈매동구릉*, 남별내
  • 수석-호평 도시고속화도로: 이패

서울의 남쪽이야 서해안(서서울), 경부(서울), 중부(동서울)라는 3대 '종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요금소가 있으며, 좀 더 생각하면 관악산 아래를 지나는 유료 도로인 남부순환로, 그리고 유료 터널인 우면산 터널 정도가 떠오른다.

그런데 서울의 동쪽에는 서울-춘천-양양이라는 '횡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된다. 남양주는 마치 경부의 서울, 서해안의 서서울처럼 폐쇄식과 개방식을 전환하는 톨게이트이다. 그리고 덕소삼패는 남양주보다 전인 개방식 구간에 있지만 경부의 판교 톨게이트처럼 고정된 요금을 징수하는 톨게이트이다.

그리고 서울의 북동쪽으로는 구리(세종)-포천이라는 '종축' 간선 고속도로가 시작된다. 공식 명칭은 세종이지만 과연 그 길고 먼 구간이 모두 개통하는 때는 과연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얘는 갈매동구릉 톨게이트가 폐쇄식과 개방식이 전환되는 곳이며, 여기 근처에서는 북중랑 톨게이트를 통해 고속도로를 드나들 수 있다.
폐쇄식 요금소와 개방식 요금소가 뒤섞여 있으니 구조가 더욱 복잡하게 느껴진다. 폐쇄식과 개방식 요금제는 열차로 치면 지정석과 자유석의 관계와도 비슷해 보인다.

서울 북쪽 외곽의 노고산, 사패산, 수락산, 불암산은 모두 터널이 뚫려 있다. 그 중 수락산 아래를 지나는 덕릉 터널만이 무료이고, 나머지는 다들 유료 터널이거나 유료 도로인 외곽순환 고속도로 구간에 포함돼 있다.
이에 덧붙여 수석-호평 고속화도로는 고속도로도, 터널도 아닌 마치 제3 경인 고속화도로와 비슷한 급의 유료 도로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11/04 08:32 2019/11/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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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의 예빈산과 더불어 본인이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등산 코스는 청계산에서 아직 미개척(?) 지역으로 남아 있는 남쪽 구간이었다. 거기는 상수도 보호 구역은 아니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온통 개발 제한 구역이다. 그래서 경치가 좋으며 뭔가 오지 탐험을 한다는 느낌이 난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남양주와 성남 중 어디부터 먼저 갈지도 꽤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였다. 둘 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의식의 흐름에 따라 예빈산을 먼저 가게 됐고, 청계산은 그 다음 주에 찾아갔다.
처음에는 성남시 금토동에 있는 완만한 등산로(능안골)를 생각했다. 그러나 청계산을 갔다가 근처 길 건너편 남쪽의 발화산도 오랜만에 다시 가 보기 위해.. 계획을 변경했다.

남북으로는 청계산과 발화산 사이에, 그리고 동서로는 성남과 의왕 사이에는 외곽순환 고속도로,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생긴 제2경인 고속도로의 연장 구간(안양-성남 고속도로.. 터널로 지나니 밖에서는 보이지 않음), 지방도 57호선이 지난다. 이것들 말고 아마 가장 먼저 처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길은 '하오개로'라고 불리는 2차로짜리 꼬불꼬불 산길이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달리면 자연스럽게 이 길로 진입할 수 있다.

한국학 중앙 연구원은 속세와 기막히게 단절된 곳에 자리잡은 것 같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학교 주변에 들어선 온갖 식당들과, 그리고 서판교의 으리으리한 고급 아파트 단지 때문에 전원적인 느낌은 없어진다.
본인이야 전공이 다르니 딱히 인연이 없지만, 한국학 중앙 연구원은 나름 인문계의 카이스트 같은 급의 국립 특성화 연구소 겸 대학원대학교이다. 학부 과정이 없고 석· 박사 대학원만 있는데, 카이스트도 1970년대에 처음 설립됐을 때는 학부 과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본인은 바로 저 길을 따라 '하오 고개'의 꼭대기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성남과 광주 사이에 이배재 고개가 있다면, 성남과 의왕 사이에는 하오 고개라는 게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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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 중앙 연구원을 지나서 고개를 오르는 길이다. 단, 담장의 방향을 보면 알 수 있듯, 이건 고개 쪽이 아닌 연구원 쪽을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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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곧고 넓게 잘 뚫린 고속도로나 57번 지방도와는 너무 대조되는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이다. 그 대신 차량 통행이 매우 뜸하며, 종종 갓길 공터가 나오기 때문에 중간에 차를 세우는 것에도 여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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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오 고개의 정상에는 이렇게 발화산과 청계산을 잇는 육교가 설치돼 있다. 이 육교를 통해 보행자는 하오개로와 지방도와 고속도로를 몽땅 횡단하여 두 산을 왕래할 수 있다.
이배재 고개의 정상에도 망덕산과 고불산(+영장산)을 잇는 육교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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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를 올라서 청계산부터 오르기 시작했다. 금토동 등산로보다 수평 이동이 적기 때문에 등산로가 가파를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길은 좁은 편이지만 성남 누비길 구간이다 보니 울타리로 안내가 잘 돼 있었다. 여기는 안양 시민 묘지의 근처이기도 하기 때문에 무덤도 종종 보였다. 그리고 송전선 철탑과 두 번 마주쳤다.
산은 역시 잎이 초록색일 때 오르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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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오른 끝에 현 산등성이의 능선에 도달했다. 약간 넓은 공터와 의자가 있었는데, 여기서 국사봉으로 가려면 약간 하강해서 산등성이를 옮겨야 했다. 하지만 수직 이동이 막 심한 삽질 수준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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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이런 좁은 길 아니면 울타리 계단의 순으로 계속되었으며, 정상과 가까워지니까 바위도 슬슬 등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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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 정상에 거의 다 오니 갈림길이 있었다. 그 갈림길에서 국사봉이 아닌 쪽의 바위를 오르니 이렇게 자그마한 바위 꼭대기가 나왔다.
여기는 아무 표지석이 없고 바깥 전망도 썩 좋지 않았지만.. 의외로 건너편 발화산의 능선 바깥이 어렴풋이 보였다. 나름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시설의 산 속 잔디밭 부지가 눈에 들어오니 놀랍고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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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국사봉 정상에도 도달했다. 여기도 막 썩 경치 좋은 전망대가 있는 건 아니어서 고속도로 말고는 딱히 내려다볼 만한 게 없었다.
성남시 운중동 주변에는 보안 시설이 의외로 좀 있기 때문이다. 괜히 개발 제한 구역인 게 아니다. 아까 그 모종의 바위 꼭대기에서 봤던 것들은 이 정상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이로써 본인은 청계산의 망경대, 서울(성남?) 매봉, 과천 매봉, 이수봉에 이어서 국사봉까지 정상을 모두 올라 보게 됐다.

예봉산이야 주변의 예빈산, 운길산, 갑산 따위가 몽땅 깔끔하게 남양주 소속이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청계산은 지역 파편화가 꽤 심한 산에 속한다. 시계에 걸친 산들도 기껏해야 서울-구리(아차산), 성남-광주 같은 둘 정도가 보통인 반면, 청계산은 뭐 각 사분면별로 서울-과천-성남-의왕 4개로 찢어졌으니까..
경부 고속도로가 관할 구간이 달라지고(양재 IC 이남 이북으로 도로 공사 vs 서울시), 지하철의 관할 구간(서울역-청량리 서울 메트로 vs 코레일)이 달라지는 것과 같은 개념이 산에도 존재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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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후에는 운종 저수지 근처의 어느 경치 좋은 카페에서 음료와 전기 보급을 받으며 쉬고 컴퓨터 작업을 했다. 그 뒤, 오후에는 다시 육교로 돌아와서 발화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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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교에서는 이렇게 57번 지방도(왼쪽), 하오개로(오른쪽), 그리고 외곽순환 고속도로까지(저 앞쪽.. 청계 톨게이트 근처) 세 도로를 한데 내려다볼 수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경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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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 왔던 육교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제는 육교의 저쪽 건너편이 청계산이다.
이 발화산도 성남 누비길 구간이다. 하지만 표지판을 보니 발화산이 아닌 '태봉산' 구간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이 언덕은 사실 발화산 정상의 주봉이 아니며, 발화산 정상은 행정구역상 성남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누비길은 더 동남쪽으로 응달산을 거쳐서 태봉산 쪽으로 이어진다. 그쪽은 본인이 예전에 가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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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비좁고 가파르며 딱히 볼 것이 없었다. 다 이런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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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다 올라서 능선에 도달하니 드디어 재작년에 봤던 그 송신탑이 나왔다.
재작년에는 여기보다 더 서쪽인 청계 톨게이트 쪽에서 길 없는 곳에 잘못 들어가서 밀림을 헤치면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어째 이쪽으로 합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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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신탑을 지나가면 약간의 내리막이 이런 식으로 펼쳐지며.. 길을 따라 더 진행하면 코렁탕 제조 시설, 응달산, 대장동 등으로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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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하오고개 쪽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한없이 더 진행하지는 않았다. 중간 길목에서 텐트를 치고 밤을 보내고 돌아왔다. 여기는 청계산보다는 덜 유명하고 교통 불편한 곳이다 보니 사람 한 명 얼씬하지 않아서 좋았다.

깜깜한 밤에 높은 산 깊은 숲 속에 혼자 있으면 일면 으스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어디라도 텐트를 치고 안에 들어가면.. 이 얇고 연약한 텐트가 나를 바깥과 격리시켜 주고 추위와 바람과 각종 야생 벌레들을 차단해 준다. 넓은 산 속에 나를 위한 호텔 방이 짠~ 생기는 듯한 느낌?

그냥 돗자리나 침낭만 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 느낌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텐트까지 들고 이동하는 수고를 감내하고라도 등산에다 야영을 겸하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9/10/21 08:35 2019/10/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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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예빈산 견우봉

지난 9월 중순엔 전반적으로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이렇게 날이 맑고 단풍도 들기 전에 꼭 등산을 가서 산 정상에서 야영도 하고 말겠다는 다짐을 진작부터 했다. 지난 5월의 이성산 이후로 등산이란 걸 굉장히 오랜만에 다시 해 보게 됐다.

어느 산부터 갈지 고민하다가 남양주 예봉산 옆의 예빈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예봉산은 예전에 두 번이나 가 봤고, 요즘 양 예빈 선수가 우리나라 육상의 에이스로 뜨고 있기도 하니까.. 미리 봐 뒀던 예봉 산장 근처에다 차를 세우고, 팔당 유원지에서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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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 장비를 추가로 들고 오르느라 안 그래도 힘든데 이 등산로는 웬걸, 굉장히 가파르고 험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온몸이 흠뻑 젖었다.
뭐 그렇다고 서울의 북한산, 관악산처럼 로프를 잡고 바위를 오른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고.. 내려갈 때 스틱이나 주변 나무를 붙잡아야 되는 정도.. 그냥 흙산인 것치고는 가파르다.

그런 데다 최소한의 좁은 길 흔적만 있지 울타리나 이정표 같은 안내 시설이 아무것도 없다시피했다. 종종 등장하는 벤치나 평상도 없고, 정말 일체의 인공물이란 게 없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얼마나 더 올라야 하는지 아무 기약이 없으니 심리적으로 힘든 정도를 더욱 가중시켰다. 온통 숲과 나무에 가려서 경치가 보이는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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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양 예빈 선수와 달리 저질 체력을 자랑하는 관계로..-_-;; 너무 덥고 숨 차고 힘들어서 몇 번씩 돗자리 깔고 한참을 쉬다 가야 했다. 오르는 동안 1리터에 가까운 음료수를 다 마셔 버렸으며 이걸로도 부족했다. 그래도 나뭇잎들이 아직 싱싱한 초록색이어서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고, 하늘도 맑고 적당히 더우니 이런 날이 등산 자체는 하기 아주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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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한참을 오르고 또 오른 뒤에야 견우봉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있는 것은 이렇게 아주 좁은 공터에다 돌무더기와 간단한 이정표가 전부였다.
예빈산은 주봉이 견우봉과 직녀봉 둘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직녀봉(588m)이 견우봉(581m)보다 미세하게 더 높고, 인터넷 사진으로 본 '예빈산 정상' 표지석도 직녀봉에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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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해서는 저 앞의 직녀봉도 가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그냥 보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체력은 둘째치고 물이 고갈된 관계로.. 산을 한참 내려갔다가 또 오르면서 땀을 빼는 동작을 더 추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상태로 7미터만 더 오르면 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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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 예봉산 정상에 건축된 기상 관측 레이더를 이렇게 멀리서 보게 될 줄이야.. 몇 년째 공사하던 게 드디어 다 완공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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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정상 자체에는 별로 볼 게 없었지만 주변을 조금만 살펴보니 팔당호.. 즉 한강과 남한강, 북한강, 경안천, 양평 두물머리와 남양주 다산 유원지가 다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정말 일품이었다. 힘들게 예빈산 견우봉 정상까지 올라간 것에 대한 보상을 이제야 받을 수 있었다. 예봉산에서는 이런 걸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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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각각 두물머리와 다산 유원지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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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검단산 기슭의 배알미 마을 쪽으로 확대한 모습이다. 수돗물 취수? 정수장이 있는 거기 말이다.
경치 좋기로 소문난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 지점을 이렇게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은 예빈산 견우봉의 큰 매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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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를 앞두고 바닥이 비교적 평평한 곳이 있어서 거기에다 텐트를 치고 밤을 보냈다.
5시가 넘어가니 슬슬 어두워지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했으며, 7시쯤부터는 주변이 암흑천지가 됐다. 춥고 어둡고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는 산 정상에서 혼자 야영을 하니 아늑하고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밖은 추워도 텐트와 침낭 안은 따뜻했다. 새벽엔 텐트 안도 꽤 쌀쌀해졌지만 텐트 밖은 바람까지 불고 더 추웠다.

하산은 이튿날 아침 6시쯤부터 시작했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었지만 어둠이 적당히 걷혀서 앞을 보고 길을 찾을 수는 있었다.
처음에는 추워서 침낭을 점퍼처럼 두른 채 산을 내려갔다. 하지만 이게 웬걸, 길이 험해서 그런지 하산도 생각보다 꽤 길고 힘들었으며, 덕분에 체감상의 추위도 금방 없어졌다. 기온이 20도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아침에도 여전히 더워서 땀을 잔뜩 흘렸다.

내가 어제는 이런 험한 길을 도대체 어떻게 올라왔었나 싶은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이 길이 정말 맞나 의문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길을 전혀 잃지 않았으며, 어제 올랐던 경로를 정확히 역순으로 거쳐서 차를 세워 뒀던 곳으로 잘 하산했다.
그리고 어제 산기슭에서 마주쳤던 계곡에서 세수를 하고 땀을 씻어내고, 물을 받아서 마시기까지 했다. 계곡물이 있으니 정말 좋았으며, 이렇게라도 하니 살 것 같았다.

예빈산에서 이렇게 좋은 추억을 하나 추가한 뒤, 집에는 딱 아침 8시 무렵에 잘 도착했다. 정작 이때는 선선하고 시원했는데 아까 산에 있을 때만 유난히 덥게 느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9/10/18 08:34 2019/10/1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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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풍경

오늘은 지난 추석 때의 고향 풍경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비가 한바탕 내린 뒤부터 전국이 날씨 하나는 참 기막히게 좋았던 것 같다. 낮에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 좋게 더운 수준이며, 하늘은 아주 맑고 파랬다. 밤에는 기온이 20도 초반까지 내려가면서 환절기 기분이 났다.

1. 황성 공원

경주 시내에는 형산강이라는 강이 세로로 지난다. 강 서쪽에는 동국 대학교 경주 캠퍼스와 김 유신 장군 묘 등이 있고, 시가지는 동쪽에 발달해 있다.
그런데 그 동쪽에는 북천, 혹은 알천이라고 지금은 물이 거의 말라 버린 가느다란 개천도 흐르다가 형산강으로 합류한다. 교차하는 각도는 +라기보다는 X에 더 가깝다만..

이 북천 이남과 이북이 경주에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얼추 가른다고 볼 수 있는데, 북천 이북으로 형산강 합류 지점 근처의 넓은 공간에는 황성 공원이라는 인공 소나무숲을 비롯해 운동장 경기장, 체육관, 궁도장 등 별별 시설이 다 있다. 인근 주민들의 아침 산책과 운동 코스로 사랑받는 건 두 말할 나위도 없고, 각종 행사나 콘서트, 축제 같은 게 열리기도 딱 좋다.
그야말로 거대한 복합 여가 문화 테마 공간처럼 됐다. 심지어 시립 도서관 내지 주민센터도 이 영역 끝자락에 자리잡아 있다.

황성 공원 자체가 생긴 건 1975년이라고 한다. 여기도 무슨 군부대가 있다가 이전하기라도 한 건지, 신라 시대 유물과 관계가 없는 공원이 어떤 계기로 들어서게 되었나 모르겠다. 자그마한 광명시가 광명 동굴 하나로 유명해졌듯, 황성 공원은 경주시의 명물임이 틀림없다.
이 글에서는 숲길 풍경 사진만 좀 소개하도록 하겠다. 흐리고 어둡고 비가 오기 직전이던 때에 찍어서 분위기가 좀 우중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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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는 유명 문학인의 시비도 있고, 현충 시설도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요렇게 생긴 충혼탑이 대표적인 예이고.. 무공 수훈자 전공비라는 것도 있다. 본인은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시립 도서관 근처에는 참전자 명예선양비라는 것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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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명예선양비는 6· 25 버전만 자그맣게 있었는데, 지난 2017년에는 월남전 버전까지 추가하고 참전용사의 동상까지 만들어서 컨텐츠를 대폭 보강(?)했다. 들고 있는 총이 각각 카빈과 M16으로.. 이런 고증까지 신경 썼다.
이거 뭐 누가 보면 경주가 양구· 인제· 철원 같은 전방 도시인 줄 알겠다.;; 여기는 공산군에게 점령 당한 적도 없는 후방 지역인걸, 시장이 강한 애국 보수 성향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2. 금장대와 암각화, 주변

형산강과 중앙선 철길을 끼고 있는 동국 대학교 캠퍼스 내지 병원의 모습이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날씨가 좋고 경치가 워낙 좋아서 사진을 찍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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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보문호

유원지와 호텔들이 밀집해 있는 보문 관광 단지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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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가뭄이 심해서 보문호가 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까지 갔지만.. 지금은 다시 물이 출렁거리고 있으니 보기 좋았다.
다 말라 가는 와중에 "수심이 깊어 위험하오니 들어가지 마시오" 표지판이 덩그러니 놓인 모습도 어디선가 봤는데.. 마치 잔뜩 막히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멀쩡히 돌아가고 있는 과속 단속 카메라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말로만 들은 드라켄 익스프레스가 돌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멀리서나마 봤다.

4. 감포 해수욕장

그리고.. 오랜만에 감포 나정 해수욕장에 들러서 바다 바로 코앞에 텐트를 치고 파도와 바닷바람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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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행정구역만으로 따지자면 엄연히 바다와 접하고 항구와 해수욕장이 있는 도시이다. 하지만 해안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고 대외 이미지가 완전히 내륙 관광 도시이다 보니, 바다의 존재감이 덜 느껴지는 것이다. 경주는 불국사, 석굴암, 보문 관광 단지가 유명하지, 감포 해수욕장이 무슨 해운대나 대천이나 송지호처럼 유명하지는 않다.

한때는 경주 시내에서 감포로 가려면 꼬불꼬불 산길을 타야 했지만 이것도 이젠 옛말이다. 산을 정면 관통하는 토함산 터널을 따라 국도 4호선이 아주 넓고 길고 곧게 잘 뚫렸기 때문이다. (2014년 말)
더 남쪽에는 더 긴 양북1터널도 역시 토함산을 정면 돌파한다. 얘는 더 나중에 생겼으며(2016년) 훨씬 더 길다. 얘는 65번 동해 고속도로 구간이다.

경주의 해수욕장은 경주의 신라 유적지만치 유명하지는 않다. 나정 해수욕장도 위키 같은 데에 항목이 별도로 개설돼 있지도 않을 정도로 인지도가 듣보잡인 것 같다.
그래도 본인이 찾아갔던 당시에는 물은 아주 맑고 깨끗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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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감포 해수욕장은 바다와 육지가 접하는 바닥이 모래가 아니라 온통 자갈인 게 특징이다. 본인은 동해· 서해의 타 해수욕장들 중에서 이런 자갈 바닥인 곳을 딱히 접해 보지 못했다.
덕분에 맨발로 다니기는 좀 애로사항이 있지만, 그래도 흙이 덕지덕지 묻지 않아서 깔끔하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여기는 동해의 해수욕장치고는 바닥의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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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도 있긴 하지만 퀄리티가 아무래도 해운대나 대천 같은 전국구 해수욕장에 비할 바는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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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피서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공식적으로는 폐장했지만 바닷가에서 텐트 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보였다. 이런 데서 고기가 잡히기는 하는지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고, 드물게 물에 들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감포 해수욕장 근처에는 소나무숲과 함께 전문적인 캠핑장도 있는데, 거기도 텐트 친 사람들이 드글드글했다. 바닷가라는 곳을 굳이 한여름에만 가는 곳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본인은.. 폐장한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금지시키고 위반 시 과태료까지 물게 하는 건 과도한 규제라고 생각하고 반대한다.
아예 처음부터 수질이나 지형 문제로 인해서 1년 내내 물놀이 금지인 곳이라면 그렇게 해도 된다. 하지만 원래 물놀이가 가능한 곳인데 단순히 기간상으로 해수욕장이 폐장해서 안전요원이 상주하지 않는 거라면, "사고가 나도 100% 들어간 사람 책임. 알아서 하셈"이라는 조건으로 방문객이 전신을 물에 담그는 것 정도는 법을 어기는 일 없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

계곡에서도 가능한 물놀이를 바다에서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더구나 바닷물은 계곡물보다 수온이 훨씬 더 높고 따뜻하기 때문에 나 같은 사람은 9월, 심지어 10월 초까지도 한낮에 물놀이가 가능할 정도이다. 그걸 그냥 못 하게 하는 것은 과도한 규제 만능 행정 편의주의로 여겨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9/10/15 08:36 2019/10/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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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억의 복원

(1) 옛날에.. A장조에 가사가 아무 내용 없고 애들이 '아에이오우'만 반복하는 좀 이상한?? 노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모음 삼각도에 입각한 발음 연습용 동요인지? 저건 공교롭게도 라틴 알파벳의 모음 5개에 순서대로 대응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 정도쯤이야 검색만 하면 출처가 곧바로 나온다. 예민(김 태업)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의 첫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더라. 발표 시기도 1990년으로 생각보다 오래됐다. 뭔가 '파란 나라'나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느낌의 동요 같다. 들어 보면 알겠지만 주선율에 온통 당김음· 엇박자가 이어지는 게 특징이다.

저렇게.. 사람이 부르는 가사가 있긴 하나 언어적인 의미가 없는 글자 나열에 불과한 노래가 드물게나마 있다. 과거에 MBC 베스트극장 주제가인 "바라밥 바라밥 빠라 바라바라밥.."처럼 말이다.

아카펠라야 든든든 두두두 팝팝 팅팅~ 유후 같은 말소리로 악기 비트를 흉내 내는 게 일종의 테크닉인데.. 악기 반주가 따로 있으면서 가사도 의성어인 건? 바라바라밥 말고 나나나 라라라도 있고.. 이것도 몇 가지 패턴이 있는 것 같다. 아~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도 있었다! ㅋㅋㅋ 사람들이 이런 데서도 참신함을 느끼기 때문에 옛날에 뚫훍쏭 같은 외국곡도 인기를 끌었던 것이지 싶다..

예민 저분은 아에이오우 이후에도 자연이 어떻고 하면서 성인용 동요 풍의 노래를 계속해서 작곡하며 지내 온 듯하다.

(2) 그리고 또 옛날에.. C장조 3박자 계열이고 어떤 남자가 꽤 느끼한 목소리로 "oh my love... for/fall" 이런 가사 정도를 부른 영화 주제가 같은 노래가 있었다.
오디오 CD라든가 비디오 테이프에서 깔끔한 음질을 홍보할 때 샘플로 이 노래가 꼭 나왔던 것 같다.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가사가 매우 소수여서 찾기 어려울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우리의 구글신은 그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읽어냈다. 무슨 '우아한 형제들'도 아니고 '의로운 형제들' Righteous brothers라는 그룹에서 부른 Unchained melody였다..;; 이건 1965년작으로 내 생각보다도 굉장히 오래됐다..

(3) Dolly Parton의 Nine to Five.
나 초딩 시절 진~~짜 왕창 옛날에 '모나리자'라고 웬 화장지 상표가 있었다.
티슈형 화장지 CF에서 배경음악으로 들었던 게 기억으로 남고 나서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접할 일이 없었는데... 최근에 우연히 곡의 정확한 출처를 알게 됐다.

1980년대 어느 미드의 주제곡이었던 듯??
"빰빰빰빰 빰빰빰빰" 이렇게 시작하는 리듬이 강렬해서 장기 기억에 금방 각인된 것 같다.

리스닝이 전혀 안 되다 보니 가사 내용은 알 길이 없었는데..
그냥 전형적인 커리어우먼 직딩의 일상을 노래한 가사이구나.
Gb (또는 F#) 장조에 속하는 곡이 하나 더 추가됐다.

옛날에 "곰을 잡으러 갑시다 좋아 좋아서 / 땡큐" 이건 모나리자 상표의 두루마리 화장지 CF였다.;;
"찾아보자 스모프, 숲 속으로 들판으로, 날아보자 스모프, 맛있는 양념통닭"이랑 비슷한 타이밍이 아니었나 싶다.

2. 노래로 듣는 아프리카 언어

라이온 킹 맨 처음 시작할 때 나오는.. "나~주평야! 발발이 치와와..."라고 무슨 판소리 같은 도입부 말이다.
이건 무의미한 음향효과 성대모사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였구나.. 2019년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아이고~~ ㅋㅋㅋㅋㅋㅋ

아프리카어의 양대 산맥인 스와힐리어 다음으로.. '줄루' 어라고 한다.
저 노래에서는 "잉오야마 ..." 어쩌구 저쩌구가 굉장히 자주 반복되는데.. '잉오야마' 이게.. 사자라는 뜻이랜다.
주인공의 이름인 '심바'는 스와힐리어로 '사자'이니.. 라이온 킹은 두 언어를 골고루 사용한 셈이다.

Nants ingonyama bagithi Baba
"아빠, 여기 사자가 와요~" Here comes a lion, Father
Sithi uhm ingonyama
"ㅇㅇ 그래 사자 맞네" Oh yes, it's a lion


아빠라고 말하는 부분 부근이 '치와와'처럼 들렸구나. -_-;;
진짜.. 별것 아닌 내용이고 "새가 날아든다, 왠갖 잡새가 날아든다" 새타령 대신 아프리카 버전으로 사자타령이나 마찬가지인데
모르고 들을 때와 25년 만에 알고 들을 때의 느낌 차이가 장난이 아니다...!! ㅋㅋㅋ

(1) 옛날에 최 덕신의 CCM 앨범 <갈망>(1998)의 1번 트랙 "오 놀라워라"가... 라이온 킹 같은 시도를 했는지.. 시작과 끝에 "니아자부 사나~~ 뭄부 무움바~~" 하이튼 뜻은 기억 안 나는 스와힐리어 챈트를 넣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느낌이 좀 어설펐다.

(2) 1997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던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에서는 첫째 날 3번 문제가.. 독충 '이숑고로로'의 움직임을 소재로 집어넣은 내용이었는데.. 저것도 줄루 어로 노래기 벌레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자나 독충이나 다 i 모음으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네.. 진짜 그런 뜻인지는 모르겠다.

(3) 한편, 이집트의 왕자 When you believe 중간에 나오던 어린애들 코러스는.. 히브리어였다. "아쉬라 알 아도나이 어쩌구" (주께 노래하리라) 이런다. 이집트에서 이제 막 해방되어 빠져나가는 장면이지만 가사 모티브는 홍해까지 건넌 뒤에 부른 노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얘들이 사자음어를 눈으로만 보고, 읽기는 다 그냥 '주'라고 읽었다는 걸 알 수 있다.

3. 큰 악기

집도 큰 거, 차도 큰 거, 총도 큰 것... 같은 논리로 악기도 큰 것에 갑자기 마음이 끌린다.
채로 켜는 현악기 중에서 제일 큰놈은 더블베이스 또는 콘트라베이스라고 불리는 물건이다. 바이올린처럼 들고 목에 얹을 수 없으며 그냥 아래에다 받쳐 놓고 켜야 한다. 그 크기와 이름에 걸맞게 음역은 매우 낮다.

한편, 금관악기 중에서 제일 큰놈은 튜바의 파생형인 '수자폰'이다. 관이 무슨 나팔꽃처럼 연주자의 몸통을 둥글게 감싸 올라가며 나팔 부위가 머리 위로 커다랗게 돌출돼 있다. 간지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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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자폰은 선 채로, 심지어 실외에서 걸으면서도 불기 편한 형태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아주 군대 친화적이다. 이 악기를 발명한 존 필립 수자는 미군에서 오늘날까지 불리는 행진곡들의 상당수를 태반을 작곡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자폰은 군악대에서 엄청 많이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연주자에게 의자가 다 구비돼 있는 실내 오케스트라에서는 볼 일이 없다.

공교롭게도 이렇게 큼직한 두 악기만 갖고 공연을 하는 2인조 악사가 외국에 있다. 검색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다. 위의 사진도 거기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 링크)

4. 찬양곡 중에 비슷한 곡들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과 "달고 오묘한 그 말씀"은 가사의 주제(성경)와 멜로디 구성(6/8박자 G장조), 분위기가 굉장히 비슷하다. 이어서 부르기 좋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서 청년부 특송 때 말씀 찬송 메들리로 써먹기도 했다.
아니나다를까 이 두 곡은 Philip P. Bliss이라는 동일 인물이 1870년대의 비슷한 시기에 작사· 작곡한 찬송가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와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네"는 왠지 좀 비슷하게 흥겨운 느낌이 나고 동일 한국인의 곡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 감이 맞다.
작곡자는 지금도 김천에 개원해 있는 정신과 의사 겸 교회 장로이다(최 영택).

최근에는 "하나님이시여 나의 모든 죄를"(시 51)이라는 곡을 접해서 처음으로 들어 봤는데..
한 박 쉬고 시작하는 것, 전반적인 박자라든가 뒷부분에 조옮김이 일어나는 구성이 "나의 영혼이 잠잠히"와 비슷하게 들렸다.
둘 다 이 유정 작곡이다. 좋은 씨앗이라는 CCM 밴드를 만들어서 음반을 냈고 지금은 목사까지 된 분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그 찬양을 작곡하기도 했다.

한 사람이 여러 곡을 작곡하다 보면 결국은 비슷한 스타일이 묻어 나기는 하는 것 같다. 난 그 정도로 작곡을 한 경험도, 그럴 능력도 없어서 잘 모르겠다만..

Posted by 사무엘

2019/10/12 08:35 2019/10/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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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박물관 입구에서 본관까지 쫙 펼쳐진 풍경이다. 본관으로 가는 중간 길목에서 "물과 환경 전시관"에 들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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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전시된 것은 애들 눈높이에 맞춰서 그냥 물의 소중함, 숲과 자연과 환경의 소중함 같은 것들이어서 따로 사진을 소개하지 않겠다. 상수도 시설보다는 더 포괄적인 주제이다. 그렇다고 "물은 답을 알고 있다" 급의 황당한 낭설이 버젓이 소개된 건 아니었다. ㅎㅎ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을 때도 계곡에 어떻게 물이 흐를 수 있을까?"는 성인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의문인 것 같다. 짐작하다시피 숲에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식물이 광합성을 해서 산소를 만들어 내는데, 이 산소의 출처조차도 물 분자를 구성하던 산소 원자라는 것을 이과 출신이라면 익히 잘 알 것이다.

다만, 한국이 물 부족 국가라는 얘기는 1990년대에 어디선가 UN 통계를 인용하면서 언론에서 한창 떠들어댔었던 이슈인데, 지금은 그게 상당수 근거 없는 루머일 뿐이라는 반박도 나와 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난리였었는데 말이다. 특히 폭염과 가뭄을 몇 번 겪고 나서는 도시에서도 제한급수 운운했었으며, 공중 목욕탕에서는 물이 훨씬 더 빨리 끊기고 매번 수동 재조작을 해야 물이 나오는 불편한 "절수기"가 장착된 샤워기를 의무적으로 운용해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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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수도 정수장 내부에 위치한 수도 박물관답게.. 서울 아리수를 직접 시음해 보라고 음수대가 실외에 비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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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이 수도 박물관 본관이다.
하수도 과학관은 시설들을 지하화해서 확보한 지상 부지에다가 최신 스타일로 지은 새 건물인 반면, 수도 박물관 본관은 문화재급의 옛날 건물이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저건 구한말에 우리나라 서울? 한양에 처음으로 상수도 시설이 구축될 때 지어졌던 바로 그 건물 원판이며, 실제로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중 하나이기도 하다.

1899년 9월이 한국의 철도 원년이라면 1908년 9월은 한국의 상수도 원년이다. 그리고 여기가 한반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상수도 정수장이었으며, 박물관이 개관한 2008년은 상수도 개통 100주년이었던 셈이다.
'송수실'이라는 단어 자체가 친근하고 자주 쓰이는 게 아니다 보니, 구글에서는 이 단어로만 검색해도 곧장 수도 박물관 본관이 바로 검색되고 사진이 쭈루룩 걸려 나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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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본관에서는 드디어 우리나라 수도 시설의 역사에 대한 자료를 많이 열람할 수 있었다. 수도꼭지를 돌리면 언제 어디서나 맑은 물이 콸콸 흘러 나오는 게 그냥 된 일이 절대 아니다.

옛날에는 '물장수'라고 신문이나 우유, 연탄을 배달하듯이 마시는 물과 씻는 물을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가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서울처럼 인구가 많은 곳은 겨우 우물 몇 곳만으로는 물 수요가 감당이 안 됐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가뭄이나 환경 오염이 없어도 맹물조차도 얼마나 단가가 높고 귀했을지 상상이 된다. 지금은 그나마 저런 물장수와 제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정수기 위쪽에다 꽂는 그 물탱크에 담긴 생수를 나르는 인부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지금처럼 합성 세제나 공장 폐수에 의한 물 오염만이 없을 뿐이지, 당장 인간의 배설물이나 기생충에 의한 오염과 수인성 전염병(콜레라 같은..)은 오히려 더 만연해 있었다. 무식하게 친환경 친자연만 추구한다고 인체 건강에 좋은 게 절대 아니다.

개인적으로 학창 시절에 문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업을 겸사겸사 들어 놓은 게 평생 교양(?)의 밑천으로 쓰이는 것 같다. 서울 지리 쥐뿔도 모르던 시절에 접했던 <성북동 비둘기>만큼이나.. <북청 물장수>라는 시도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드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 굉장히 고된 직업 내지 알바를 굉장히 시원하고 낭만적인 느낌으로 묘사했지만.. 물장수에게서 물을 사야 하는 세상이라면 정말 갑갑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등 양쪽으로 물동이를 이고 낑낑대는 게.. 영화에서는 <킬 빌>에서 키도 누님이 파이 메이 밑에서 수련 받을 때...
그리고 아예 엄 복동에서도 주인공이 자전거를 타기 전에 물장수 일을 하는 장면 정도가 기억에 남아 있다. ㄲ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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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림을 시작으로 수도 박물관 본관 내부는 구획 구분 없이 커다란 방 하나에 이런 게 전시되어 있는 게 전부였다.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기존 마차 사업자들이 반발했듯이, 상수도가 개통하면서 물장수들도 많이 반발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1908년부터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에 수돗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아니고, 물장수라는 직업 자체가 신속하게 없어진 것 역시 아니다. 그러니 <북청 물장수> 같은 시가 무려 1924년에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이지 싶다.

지금은 한강에서 수돗물 공급을 위한 취수는 저 멀리 팔당댐부터 시작해서 잠실대교(정확히는 잠실 수중보) 이북까지의 상류 구간 몇 군데에서 한다. 하지만 정수장은 이런 뚝도를 포함해 하류에도 존재하며, 지금의 선유도 공원도 과거에는 수돗물 정수장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래의 그림은 2000년대 중반의 옛날 보도 자료이긴 하지만, 취수장과 정수장의 관계를 보여준다. 수도 박물관이 있는 곳이 바로 '뚝도 정수장'이다.
취수장이건 정수장이건 상수도와 관련된 시설은 군부대 내지 발전소에 준하는 보안 시설로 간주되어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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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한강에 상수도가 처음으로 건설됐던 시절에는 취수 시설도 지금만치 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박물관 내부의 설명을 보면 "취수정은 송수실로부터 166m(고작!!) 떨어진 한강 중류 2.4m 수심 강바닥을 3m 정도 판 후 ..... 이런 크기의 콘크리트 정수정을 설치하고, 바닥에서 높이 30cm 되는 곳에 개구부를 설치하였다"라고 돼 있다.
쉽게 말해, 지금처럼 저 멀리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그냥 정수장 근처에서 적당히 물을 끌어다 썼던 것이다.

수돗물은 "취수 → 침전 → 여과(필터링..) → 정수"의 순으로 세균과 불순물을 걸러낸 뒤, 수도관을 타고 최종 수요지에 도달했다. 후대 절차로 갈수록 걸러내는 불순물의 규모가 더 작아진다. 흔히 알려져 있는 염소 소독은 정수 단계에 속한다.
상수도 정수장에서는 그럭저럭 깨끗하거나 약간 더러운 물을 음용 가능할 정도의 깨끗한 물로 바꾸는 반면(90점을 97점 정도?), 하수 처리 시설에서는 최악의 더러운 물을 그래도 적당히 더럽고 자연 회복 가능할 정도의 수질로 바꾼다는 차이가 있다(0~10점을 4, 50점대로?).

아무튼, 물이 이렇게 만들어지고 나면 옛날에는 펌프를 돌려서 여기서 3km 남짓 떨어진 중랑천 건너편의 '대현산'이라는 언덕 꼭대기의 배수지로 끌어올렸다고 한다. 지금은 꼭대기까지 온통 건물이 지어져서 별 존재감이 없는.. 신금호-행당 일대의 그 해발 80m짜리 언덕 말이다. 거기까지 올라간 물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사대문 안과 용산까지 공급됐다. 오오...

지금도 거기에 송수· 배수 관련 시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다 지하화됐기 때문에 기존 시설과 부지는 '응봉 공원'이라는 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신금호 역 2번 출구와도 아주 가깝기 때문에 찾아가기 쉽다. 여담이지만, 아차산-광나루 사이에도 '아차산 배수지'가 있다.

이렇듯, 서울 상수도의 원리와 역사를 소개해 놓은 본관이 제일 흥미로웠다. 옆의 별관은 기획 전시용인 모양이었으나,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컨텐츠가 없었다.
근처에는 과거에 수돗물을 지금에 비해서 느리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여과하던 거대한 지하실(?)이 개방되어 있었다. 일명 '완속여과지'이다. 여기서 지는 池, basi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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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완속 여과'라고 해서 물을 깨끗한 모래에다 투과시켜서 불순물을 걸러냈다고 한다. 모래 자체도 주기적으로 청소하거나(주 1회) 교체(연 1회 이상)하고 말이다.
여과 진행 속도는 하루에 4m에 불과할 정도로 느리기 때문에 '완속'이다. 다만, 지금은 그렇게 여과하기에는 공급해야 할 물이 너무 많고, 또 취수한 원수의 수질도 예전보다 좋지 않기 때문에 화학 약품을 동원한 급속 여과 방식이 쓰인다. 급속 여과가 완속 여과보다 30배 이상 속도가 빠르다고 한다. (진행 속도가 120~150m/일)

완속 여과지가 현역이던 시절에는 이 모래 위로 물이 출렁출렁 넘쳐 흘렀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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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뒷쪽은 휴식 공간 위주였다. 현대식 상수도가 등장하기 전에 쓰였던 물레방아, 공동 수도, 우물, 펌프가 전시되어 있었고, 테이블과 평상도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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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인공 폭포도 구경하면서..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

Posted by 사무엘

2019/10/01 08:33 2019/10/0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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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봄에 중랑 물 재생 센터와 서울 하수도 과학관에 다녀 온 것에서 착안하여, 올가을엔 말로만 듣던 수도 박물관을 다녀왔다.
수도 박물관은 서울숲의 근처에 있는 '뚝도 아리수 정수 센터', 쉽게 말해 상수도 정수장이라는 보안 시설의 내부에 있다. 즉, 서울숲의 내부에 있는 시설이 아니며, 강변북로 근처에 있는 고유한 출입구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건 당연히.. 정수장 자체와도 별도로 개설된 출입구이다.

여기를 어떤 교통편으로 찾아갈까 망설였는데..
이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성수대교 참사 희생자 위령비도 이 기회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작정했다.
이 위령비는 자동차 전용 도로의 진출입로 옆이라는 좀 엄한 곳에 있는 관계로.. 차가 없이는 접근할 수가 없다. 그러니 전체 교통편은 자연스럽게 자가용으로 결정됐다. =_=;;;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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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옆의 중랑천은 한강으로 합류하고 이 길 역시 자연스럽게 강변북로로 합류하게 된다. 다만, 합류 직전에 성수대교 방면으로 빠져나가는 나들목이 나온다.
이 나들목의 접속 도로는 '뚝섬로'이다. 뚝섬로와 고산자로가 만나는 '성수대교 북단 교차로'에서 계속 직진하면 서울숲 쪽으로 가게 되며, 오른쪽으로 꺾으면 그제서야 성수대교로 가게 된다.

단, 이때 예각으로 더 깊게 오른쪽으로 꺾으면 여기서도 지하도를 거쳐서 강변북로 동쪽 구리 방면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위령비은 설마 그 광활한 강변북로 본선에 있는 건 아니고, 강변북로와 뚝섬로를 잇는 진출입로, 철도로 치면 연결선에 속하는 좁은 도로 사이에 있다. 그나마 여기는 차들이 본선 구간만치 빠르게 달리지는 않으니 드나드는 게 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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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진출입로의 상행과 하행 사이의 공간에.. 위령비 참배객을 위한 주차장이 있다. 상· 하행 모두 어느 방향으로나 진출입 가능하다.
이 위령비 때문에 자동차 전용 도로 구간 내부에.. 무슨 휴게소도 아니면서 사고· 고장이 아닌 일반적인 명분으로 차를 세우고 사람이 머무를 수 있는 공터가 생겼다는 것이 무척 이색적이다.
위령비는 저 전방의 도로를 횡단하면 바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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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성수대교는 1979년 10월 16일에 완공됐다. 별 관련은 없지만, 이건 당시 대통령이던 원조가카가 암살 당하기 열흘 전의 일이었으며, 원조가카 역시 준공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5년 만인 199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 기념일 아침에 구 성수대교는 상판이 하나 무너져 떨어지는 대형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32명이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부상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상자가 이런 형태로 발생한 이유는 시내버스 한 대가 거꾸로 뒤집혀서 천장을 아래로 향한 채로 바닥에 수직 낙하했기 때문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이 그 버스의 승객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물론 부실공사였지만, 얘는 그래도 훗날 무너진 삼풍 백화점만치 악질적인 부실공사와 막장 운영의 산물은 아니었다. 또한, 성수대교도 외관상 아무 문제 없이 멀쩡하다가 무슨 지뢰 터지듯이 무너진 게 아니며, 당일에 차가 원활하게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이음매 사이의 균열이 심하게 벌어져 있기도 했다. (백화점은 아예 당일 5층의 영업과 출입이 금지되고 에어컨 가동이 중단되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원..)

이 위령비는 보다시피 사고 3주기인 1997년 10월에 만들어졌는데, 이때는 이미 성수대교가 다시 만들어져서 개통된 뒤였다(1997년 7월). 단지, 그 당시는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가 다니던 구 당산철교가 상태가 매우 안 좋다는 진단을 받아 헐렸으며, 다시 건설되던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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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령비 주변은 이렇게 생겼다.
경부 고속도로 관련 기념탑과 위령비는 다 고속도로 나들목을 형상화한 모양이던데.. 저 비석은 뭘 형상화한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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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비석 뒤에는 희생자 32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명단이 공개되어 있지 않은 경부 고속도로 순직자 위령비와는 대조적이다.
이 중 무학여고 학생이 9명이고, 나머지 인원 중에는 필리핀 사람 1인, 그리고 서울교대 학생 1인도 포함돼 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양재 시민의 숲에 있고, 거기엔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고 희생자 위령비도 근처에 같이 있다.
그것처럼 성수대교 위령비 역시 아예 근처의 서울숲 내부로 옮기면 사람들이 찾아가기는 훨씬 더 편해질 것이다. 하지만 유족들이 한강과 더 가깝고 성수대교가 같이 보이는 여기가 더 낫다는 의견을 피력했기 때문에.. 그냥 지금 위치로 정해졌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20년 전인 1999년 8월 18일 밤엔 딸을 사고로 잃은 어느 아버지가 위령비 옆에서 음독 자살하여 주변을 한없이 안타깝게 했다.
다른 언론 보도를 검색해 보면 그분은 희생자 유족 대표 명목으로 위령비의 건립도 주도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극도의 슬픔과 정신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직장도 그만뒀으며.. 나중에는 딸 생각만 하며 거의 매일 위령비 곁을 떠나질 않는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잃어도 보통 사람은 저렇게 멘탈이 견디질 못할 텐데,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때는 더 극단적인 예도 있었다.
정 광진이라는 변호사는 딸만 넷이었는데 세 명을 저 사고로 잃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욥 실사판이 따로 없다. "집이 무너져서"(욥 1:19) 대신에 "백화점이 무너져서"로 치환하면 된다.

그래도 유가족이 이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신앙의 힘으로라도 극복했다면.. 피해 보상금으로 장학 재단을 만들고 자기보다 더 어려운 후학들을 후원하는 초인적인 대인배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재단의 이름에다가는 물론 죽은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말이다.

성수대교 희생자 중에는 서울교대 재학생이던 이 승영 씨의 유가족이 그렇게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거기는 아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세 딸을 잃은 정 변호사도 재단을 만들었으며, 관련 보도 자료를 보면 "딸들이 살아 생전에 다니던 교회" 얘기가 나온다.

종교의 순기능이란 게 이런 데서 나오는 것이지 싶다. 굳이 기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라도 말이다. 이건 성경이 배타적으로 규정하는 죄와 심판, 복음, 구원, 성령의 열매 같은 '영적인 영역'과는 별개인 '정신적인 영역' 얘기이다.
그에 비해 세월호 사고 유족 중에서는 정치 선동꾼 말고 저렇게 뜻있는 결단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일반인 유족 말고 단원고 유족 중에서 말이다. 난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 같은 처참한 대형 참사들을 겪고도 "아직까지도 달라진 게 없네" 운운하면서 한탄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소를 잃은 뒤에라도 외양간을 많이 고쳤으며, 그때에 비해서는 시스템이 보이지 않게 많이 개선되고 나아졌고 투명· 청렴해지고 안전해졌다.
비록 지금도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옛날엔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 헬이었는지, 법과 FM 대신 미개한 편법과 꼼수, 무식한 "까라면 까" 똥군기와 의지드립이 얼마나 더 만연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때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이다.

옛날에 그 여건에서는 그런 방법론이 불가피했던 점도 있긴 했다. 마치 지금 한국과 일본이 명목상 동맹이라고 해서 과거에 일제에 대항했던 독립 운동가들이 무의미한 뻘짓을 한 게 아니며.. 지금 마소가 오픈소스 진영과 친해졌다고 해서 과거 빌 게이츠와 발머 시절의 독점 정책이 삽질이 전혀 아니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6· 25 개전 초기에 야만적인 즉결처분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에 그렇게 독하게 나가면서 기업의 힘을 키우고 나라를 구한 덕분에 후대 사람들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지내고 과거의 적(?)과도 열등감 없이 우호 관계를 맺고 있고, 과거의 관행과 방법론의 한계를 비판할 여유조차도 생긴 셈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이 복잡한 현대 문명에서 대형 사고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외국 선진국도 먼 옛날엔 건물이나 다리가 무너지는 급은 아니지만, 멀쩡히 날던 비행기가 공중분해 되거나 출입문이 확 뜯어져서 승객들이 밖으로 튕겨 나가서 죽는 황당한 사고도 난 적이 있다. 그런 사고를 겪고서야 안전 시스템이 보강되었으며 동일한 사고가 재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이고, 무거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옆길로 너무 많이 샜다. 이제 본론으로 되돌아가 수도 박물관 얘기를 하도록 하겠다. 성수대교 위령비 구경을 마친 뒤, 본인은 차를 몰고 수도 박물관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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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로 된 길다란 간판이 방문객을 반겨 주었다.
주차는 근처에 있는 서울숲 주차장에다 하면 됐다. 요금은 저렴한 편이지만 수요 대비 주차 공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다. 여기는 주말에는 차를 가져오지 않는 게 상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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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지도는 온통 흐리게 처리돼 있어서 본인도 직접 방문하기 전까지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수도 박물관은 달랑 건물 한 채(저 지도에서 4번 본관)가 전부인 형태가 아니고, 생각보다 넓었다.
옛날에 현역이다가 지금은(대략 1990년대부터) 더 쓰이지 않게 된 낡은 정수 시설들이 다 박물관으로 개조되었으며, 최신 보안 시설은 옆에 따로 만들어져서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다. 옛 서울 역과 지금 서울 역 건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 뒤, 수도 박물관 자체는 2008년에 만들어졌다.

인근의 서울숲 내부엔 강변북로를 횡단해서 한강 쪽으로 가는 육교가 하나 뻗어 있는데.. 이와 비슷하게 수도 박물관 내부에도 한강으로 가는 육교가 이어져 있다. 즉, 이 부근에 육교가 총 2개 있는 셈이다.
뭐, 그렇게 가도 강변의 자전거 도로나 산책로에 도달하지, 무슨 한강 공원이 나오지는 않는다. 인근의 뚝섬 한강 공원 쪽으로 1km가 넘게 한참을 가야 된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9/09/28 08:33 2019/09/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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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튿날 아침에는 계속해서 봉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새벽에는 계절이 바뀌기라도 했나 싶을 정도로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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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엔 계속해서 이런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고 보니 옛날 도로는 가드레일 말고 저렇게 노란 경계석이 쓰였던 것 같은데 요즘은 어느 샌가 보기 힘든 풍경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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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마을 어귀를 흐르는 요런 맑은 개울을 발견해서 차를 세우고 물놀이를 했다.
이럴 때 햇볕이 쨍쨍하고 날씨가 더 더웠으면 물놀이의 효과가 더 커졌겠지만, 폭염과 가뭄 때문에 개울이 말라 버리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물에 들어가는 게 훨씬 더 낫다. 비 덕분에 여기 모든 개천· 개울들은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어서 참 보기 좋았다.
그렇잖아도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몸이 온통 끈적거리는 상태였는데 싹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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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월산 자생화 공원이라는 곳을 발견해서 들렀다가 갔다. 주변에 나밖에 없는 오지에서 자연을 즐긴다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지구가 금성 화성과 달리 초록별이라는 사실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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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서 봉화로 가려면 역시 산을 하나 넘어야 하더라. 길은 어느 샌가 꼬불꼬불한 산길로 바뀌었다.
터널 안에 들어갈 때는 일반적으로는 헤드라이트를 켜는 게 맞는데, 현실에서는 '끄시오'라고 안내된 표지판도 많이 보인다. 화장실에서 휴지는 변기에 "넣으시오/넣지 마시오"만큼이나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사항인 것 같다.

저 영양 터널을 지난 다음에는 행정구역이 봉화로 바뀌고, 봉화 터널과 어느 공군 부대가 뒤이어 등장했다. 그리고 오르막이 끝나고 내리막이 시작됐다.

6. 봉화군 탐험기

본인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봉화에서 영동선 양원 역을 답사하고 봉화 시가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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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하행 합쳐도 차가 몇 분에 한 대 다닐까말까인 이 꼬불꼬불 산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시로 정차하고 사진 찍고 시동 끄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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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하나 넘어서 내려오니 또 강이 펼쳐졌다. 이 강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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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영동선 철길 위를 지나갔다. 참 공교롭게도 본인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타이밍에 맞춰서 여객도 아니고 화물 열차가 하나 지나갔다. 얼마나 무거운 짐을 끄는지, 전기 기관차 중련에다가 보조 중형 디젤 기관차까지 편성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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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양원 역이 자리잡고 있다는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 앞에도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양원 역은 행정구역상 봉화이지만 동쪽 맨 끝이기 때문에 거의 울진 근처이며, 가는 길에 울진의 서쪽 끝을 경유하기도 했다. 봉화 시가지와는 수십 km 이상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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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마을에 도착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양원 역으로 가려면 거기서도 산을 하나 타넘어야 했다~!
엔진 회전수 4000rpm을 고속도로에서 고속으로 밟을 때도 찍고, 여기서 2단 엔진 브레이크로도 찍었다. 1단 말고 2단으로 말이다.
그렇게 산을 넘은 뒤에도 저 길로 들어가야 했는데.. 차가 지나갈 수는 있지만 거기서 주민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딱히 차를 세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차는 이 부근에서 세우고 여기서부터 몇백 m 남짓은 걸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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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니 이 강은 낙동강 상류라고 한다. 물이 콸콸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저 교각은 무슨 옛날에 있었던 다리의 흔적 같다.
양원 역이 이 정도로 답 없는 오지에 있는지는 미처 몰랐다. 저기를 건너간 다음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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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얘를 실물로 보게 되었다.
예전에 태백선· 함백선 부근에서 조동 역과 함백 역을 보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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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 역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지역 주민들이 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현기증이 나니 제발 열차 좀 정차시켜 달라고 아우성 치고 정부에 청원 넣고, 아무 국고 지원 없이 스스로 돈을 모아서 역 건물을 지어서 승인 받은 역이다. 진정한 의미의 민자역사인 셈이다. 단지, 자본주의 논리가 아니라 지역 주민 복지를 위한 민자역사인 것이고.. 그게 지금으로부터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전날 옥천에서 정 지용 시인 관련 안내문에서도 1988이라는 숫자를 봤는데, 양원 역의 개업 시기도 1988년 4월이라니 우연 치고는 절묘하다. (지용회: 1988년 3월)

얼마나 한이 서렸으면 양원 역에 첫 열차가 정차하던 날 사람도 감격하고 산과 강도 감격했댄다.
옛날엔 열차가 여기 마을을 통과할 때 짐보따리부터 미리 던져 놓은 뒤 더 먼 승부 역에서 여기까지 걸어서 돌아와서 그 짐을 챙겼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옛날에는 열차에 화장실이 비산식이었고(오물이 선로로 그대로...; ), 주행 중일 때 차량의 출입문이나 창문을 수동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그럼 근성 있는 사람이라면 짐만 미리 던져 놓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훌쩍 뛰어내릴 법도 해 보이는데.. 그러기에는 아무리 젊고 민첩한 사람이라도 좀 위험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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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없이 컨테이너 가건물 같은 규모이지만 컨테이너가 아니다. 시멘트를 얹어서 정식으로 지은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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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궁서체 안내판까지도 주민들이 직접 만든 거라고 한다.
현재는 여기가 유명세를 타면서 정규 여객열차뿐만 아니라 V-train(백두대간 협곡)과 O-train(중부내륙 순환)이라는 관광 열차도 정차하는 곳이 되었다. 그러니 역 건물과 안내판 말고 저 승강장은 코레일에서 만들었다는 티가 난다.
순환선이기 때문에 O이고, 그리고 계곡 모양을 형상화해서 V라니.. 코레일 수뇌부에서 머리 좀 쓴 것 같다. 이름을 참 기발하게 지었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마침 저기에 열차가 정차하는 것을 봤다.
이번 여행 동안 경부선과 영동선을 지나는 열차를 종종 목격했는데, 모두 전기 기관차 기반이었다. 디젤 기관차는 전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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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의 봉화 시가지로 가는 길에 또 절경을 발견하여 풍경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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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후가 돼서야 봉화 시가지에 도착했다. 이 강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보급을 받는 것으로 2일간의 여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는 3년 주기로 남해안, 서해안, 동해안을 한 번씩 가는 것으로 어렴풋이 계획을 잡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3 08:33 2019/09/1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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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부 고속도로 최후 유일의 4차로 구간과 추풍령

이제 본인은 구도로가 아니라 실제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옥천에서 추풍령까지 이동했다. 옥천 휴게소 이후부터 영동1 터널까지, 2019년 현재 경부 고속도로 416.1km 전체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4차로로 남아 있는 마지막 구간을 쭉 달려 봤다. 영천-경주-울산 구간도 오랫동안 4차로였지만, 거기는 2010년대 내내 지겹게 공사를 한 끝에 바로 작년 말에야 전구간이 6차로로 간신히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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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옥천 근처에는 이렇게 확장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갓길이 없어지고 속도 제한이 80으로 내려간 위험 구간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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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딱히 그런 기미가 안 보인다. 특히 금강 휴게소 인근의 금강을 건너는 구간은 높은 교량, 그것도 2000년대가 돼서야 완공된 교량이기 때문에 거기가 또 가까운 미래에 확장될 것 같지는 않다. 천하의 경부 고속도로에도 이렇게 차로가 적고 좁은 구간이 있다는 게 실감이 안 간다.
차에 동승자가 없었던 관계로, 이 사진들은 다 본인이 고속도로에서 운전을 하던 중에 잠시 핸들을 놓고 좀 위태롭게 찍은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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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경부선 추풍령 역의 승강장이다. 추풍령 IC와 철도역은 역시 몇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가까운 편이다.
추풍령 역은 경부선에서 해발 고도가 가장 높은 역이다. 물론 경부선 구간이 높아 봤자 220m대에서 노는데, 진짜 산악 철도인 태백선· 영동선 역들의 고도(7~800m대!)하고는 비교하는 게 실례이지만, 그래도 철도는 오르막에 매우 취약하니 저 정도만으로도 열차가 오르기 버겁긴 하다.

과거 초창기에 경부선은 김천 이전의 구미에서도 지금의 국도 4호선처럼 금오산 고개를 올라가는 형태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길을 만들었더니 20세기 초의 증기 기관차가 오르막을 도저히 끝까지 오르질 못하고 중간에 픽픽 퍼졌다.
그렇다고 거기에다 스위치백 같은 걸 만들 여건은 못 됐으니 그 구간에서만 열차의 뒤에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형태로 매우 불편한 운행을 해야 했는데..

결국 1910년대에 구미 시내를 삥 둘러서 평지를 우회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그 덕분에 새로 생긴 구간에서 구미 역이 1916년에 개업했으며, 구미 출신인 원조가카는 집을 떠나 장거리를 이동할 때 그 구미 역을 잘 이용했을 것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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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이 휴게소는 경부 고속도로 전구간의 거의 정중앙 지점에 위치하면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금강과는 달리 상· 하행이 분리돼 있지만, 금강처럼 자체 나들목(추풍령 IC)을 갖췄다는 공통점도 있다.

다만, 얘도 1971년 1월 1일부로 개업했으니 고속도로 개통과 동시에 영업을 시작한 건 아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당시에는 길을 닦는 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없는 지경인데 휴게소까지 같이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 말인즉슨, 1970년 하반기에 경부 고속도로에는 휴게소 같은 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ㄷㄷㄷ 그러다가 금강 휴게소가 경부 고속도로의 개통 1주년에 맞춰 같은 해 7월에 뒤이어 개업했다.

추풍령 휴게소 부근은 강을 끼고 있는 금장 휴게소보다 고도가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4차로가 아닌 6차로이다. 구도로는 선형이 꼬불꼬불 굽었고 매우 불량했으며, 여기 일대에서 실제로 큰 사고가 나기도 했다.

경부 고속도로에서 개통 이래 최초로 발생한 대형 교통사고는 1970년 8월 21일 발생한 고속버스 추락 사고(25명 사망, 22명 부상)였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00년 7월 14일에도 수학여행 전세 버스의 연쇄 추돌 사고(18명 사망, 70여 명 부상)가 나서 그야말로 대형 사고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둘 다 사고 지점이 동일하게 추풍령 휴게소 부근의 고갯길이었다!

문제의 구간은 2006년 말에 대대적인 선형 개량과 6차로 확장이 완료됐다. 그에 비해 옥천-영동 구간은 2003년에 선형 개량만 됐고 여전히 4차로이다. 옥천-영동 쪽은 구도로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 반면에 추풍령 쪽의 구도로는 완전히 흑역사가 된 것 같다. 일부 구간은 기존 국도 4호선의 확장 영역으로 흡수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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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 휴게소의 근처의 언덕에는 경부 고속도로 준공 기념탑이 있다. 순직자 위령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높으며, 주변에 넓은 풀밭도 꾸며져 있다.
상행 방면 휴게소와 더 가까이 있긴 하지만, 양 휴게소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행 방면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도 도보로 준공 기념탑에 갈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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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풀밭도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에 풍경 사진을 남겨 봤다.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길이며 국토 통일에의 길이다. -- 1970년 7월 7일 대통령 박 정희"
"이 고속도로는 ... 우리 자체 재원과 기술과 역량만으로 최단 시간에 이뤄낸 우리의 영광스러운 자랑이다. -- 1970년 7월 7일 건설부 장관 이 한림"


기념탑 아래 벽면에는 뭐 이런 문구들이 새겨져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고속도로 건설을 치하하는 감격의 덕담을 한 마디씩 남겼다.

참고로 이 한림 당시 건설부 장관은 아까 봤던 옥천 터널을 빨리 뚫어 내라고, 개통식 날짜를 못 맞추면 너희들 국물도 없을 거라고 건설사들을 무진장 갈구고 쪼아댔던 그 당사자이기도 했다. =_=;;;;
딱 같은 시기에 김 현옥 서울 시장도 군인 출신의 정말 못 말리는 지독한 "까라면 까" 불도저였으니.. 군사 정권 시절에 나라 분위기가 그렇게 군대식으로 극도로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뭔가 역사적인 사건에다 기념을 한 문구는 대부분 이 은상 시인이 작성한 것 같던데.. 아까 순직자 위령비뿐만 아니라 준공 기념탑에도 글이 있었던가..??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서 모르겠다.

여담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는 첫 개통 당시에는 공식 명칭이 지금과 같지 않았다. 그때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다! 그래서 준공 기념탑과 순직자 위령탑에도 저 긴 이름이 새겨진 걸 볼 수 있다.
옛날에도 '경부'라는 이름이 쓰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비격식 약칭이었다. 그런데 그게 공식 명칭으로 바뀐 것은 1981년 11월 7일, 고속국도 노선지정령이 개정되고부터이다.

아이고 글이 왕창 길어져 버렸는데..
여기까지가 옥천과 추풍령, 경부 고속도로와 관련된 테마 답사였다. 이제 본인은 제2부로 자연을 즐기기 위해 경북 영양으로 향했다.

5. 영양군에서 외박

(1) 김천에서 영양으로 갈 때는 내비의 안내대로 중부내륙(45)과 당진-영덕(30)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후자가 워낙 한산했던 덕분에 차량 성능 테스트를 빙자한 폭주 시험/실험을 거기서 시행할 수 있었다.
전방에 시야가 탁 트였고 다른 차도 없는 절호의 기회가 종종 찾아왔다. "복동아 지금이야!"-_- 같은 소리가 뇌리에 전해지는 듯할 때 필사적으로 확 밟았다. 주행 당시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악셀 페달이 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풀로 꽉 밟았는데도 이상하게 차가 더 가속이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엔진 회전수와 속도가 더 올라가지 않았다. 당연히 레드 존 상태 따위가 전혀 아닌데도... 더 오래 밟고 있으면 가속이 됐을지 모르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그렇게까지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번 휴가 때는 예전에 수립했던 185km/h를 간신히 재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더 성능이 좋은 차였다면 그 정도로 밟았으면 190~200은 분명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2) 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를 모두 달려 보니, 표지판에 표기된 각 지역까지의 거리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고속도로야 입체교차 진출입로가 존재하고 자기 영역이 명확하다. "대전 xx km" 이러는 것은 대전 IC로 진출하는 갈림길까지의 거리이다. 그러나 다른 국도· 지방도에서 "영양 xx km" 이러는 것은 해당 지역의 도로 원표까지의 거리인데.. 시청이나 군청 같은 대표 행정기관이 있는 곳과도 비슷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는 그 지역 내부에 이미 진입했지만 킬로 수가 아직 한참 더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럼 국도 중에도 입체교차 진출입로와 중앙분리대까지 있어서 반쯤 고속도로인 물건이 있는데.. 얘는 그럼 지역의 중심부까지의 거리와 IC까지의 거리가 혼재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나중에 지방 국도를 운전할 일이 또 생겼을 때 눈여겨보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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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에는 저녁이 다 돼서야 도착했다. 시가지는 정말 작았으며 2차선 도로가 전부이고, 교차로에도 황색 신호밖에 없었다.
영업을 하는 카페를 용케 찾아서 거기서 2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목을 축이고 인터넷을 확인하고 폰과 컴퓨터를 충전하며 쉬었다. 오아시스가 따로 없었다. 이 보급으로 오늘 밤을 보내고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버텨야 하니, 전자 기기들은 무조건 꽉 충전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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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벗어나면 주변은 온통 이렇게 산과 강과 들밖에 없었다.
얼마 안 가 날이 저물었으며 주변은 암흑천지가 됐다. 흐리고 비가 계속해서 내렸지만 습하고 몹시 더웠다.
본인은 국도 31호선을 따라 봉화 방면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적당히 으슥하고 인적이 없고 캠핑을 하기에 적합한 곳 탐색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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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적당한 곳을 발견하여 주변에 차를 대고 텐트를 쳤다. 안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잠들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 오지에서도 iptime 와이파이가 잡히다니 신통한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10 08:34 2019/09/1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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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강 휴게소

경부 고속도로 옥천 구간에는 금강 휴게소라고 말 그대로 금강을 끼고 있는 매우 경치 좋은 휴게소가 있다.
처음에 해당 부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직원들의 숙소로 개발되었다가 나중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고속도로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개통 후 만 1년 만인 1971년 7월 7일부로 영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얘는 여느 휴게소들과는 다른 특징들이 여럿 있다. 그러니 가 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요즘 관행처럼 상· 하행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휴게소를 공유한다. 그러면서 방면별로 차량들이 완벽하게 분리돼 있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유턴· 회차가 가능하다.
  • 인근에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이 있다.
  • 금강 IC라고 유원지 방면으로 나가는 자체 나들목이 있다(금강 IC).
  • 그리고.. 조령리 마을이라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폐쇄식 고속도로 구간의 내부에 자리잡은 마을이 있다. 마치 전국에서 유일하게 DMZ 내부에 자리잡은 대성동 마을이 있듯이 말이다.

지하철이야 한번 카드를 찍고 개표 구간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아무 열차나 마음대로 탈 수 있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천 공항의 경우, 보안· 면세 구역 안에서 다른 탑승동으로 이동하는 지하 셔틀열차를 탔다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출국 승객과 입국 승객을 엄격하게 분리해야 한다는 동선 특성 때문에 그렇다.

그럼 고속도로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고속도로는 전통적으로 한번 진입한 차량의 유턴· 회차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였다. 휴게소도 상· 하행별로 꼭 따로 만들곤 했다.
일반적인 고속도로 이용 차량들이 굳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갈 일은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또한 상· 하행 운전자가 한 휴게소에서 만날 수 있다면 서로 짜고 통행권을 바꿔치기 하는 수법으로 톨비를 실제 이용 거리보다 훨씬 적게 조작해서 낼 수도 있다.

이 고전적인 수법을 봉쇄하기 위해 도로 공사 측에서는 통행권에다가도 차량 식별 정보를 기재하고, 휴게소를 상· 하가 분리된 형태로 만드는 등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제는 하이패스 덕분에 저런 꼼수 걱정 없이 고속도로 이용 차량의 동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 고속도로도 워낙 촘촘하게 많이 건설되어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우회 경로도 얼마든지 있다. (그래프 내부에 사이클 많음) 단지 귀찮냐 덜 귀찮냐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니 앞으로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100% 하이패스 기반으로 바뀌고 재래식 통행권이 완전히 없어지는 날이 온다면, 가장 먼저 (1) 고속도로 시· 종점의 넓은 톨게이트들의 폭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차들을 번거롭게 세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톨게이트 직원이라는 직업도 마치 과거의 버스 안내양이나 타자수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질 테고..
이와 더불어 (2) 휴게소도 상· 하행 공용이고 방향 전환이 자유롭게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게 새로운 유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서해안 고속도로의 행담도 휴게소도 얼마 안 되는 상· 하행 공용이긴 한데 오랫동안 상· 하행 차량이 서로 격리 수용되었으며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지금은 '모다 아울렛' 시설을 통해서 사실상 방향 전환이 가능해졌다.
여담이 길어졌는데.. 아무튼 금강 휴게소는 옛날에 상· 하행 공용으로 만들어졌던 휴게소라는 것을 언급하고자 한다. 직원 숙소 내지 유원지 시설이 고속도로 휴게소로 개조된 것이니 상· 하행 따로 같은 건 고려 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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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 순직자 위령탑이 있긴 하지만, 차도를 횡단해야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막 수월하지는 않다. 현재의 고속도로가 아니라 아까 답사했던 구도로에서 더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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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의 건설 과정에서 순직한 사람이 공식적으로는 77명이라고 집계돼 있지만, 정확한 순직자 명단이 공개된 적은 없다. 정말 77명뿐이고 이 숫자가 맞는지는 이제 와서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무슨 국정원 청사에 새겨진 n개의 별도 아니고 말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데 7월 7일에 맞춰서 일부러 77명이라고 북한스럽게 주작한 거라는 낭설까지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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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휴게소의 남쪽으로 금강 유원지 근처의 모습은 위와 같다. 보아하니 물을 저렇게 가둬 놓고 수력 발전 같은 것도 하는 모양이었다.
또한, 금강 IC라고 휴게소의 고유한 나들목/톨게이트가 있어서 저 유원지 방면으로 차량이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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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휴게소 자체의 내부 모습은 별로 소개하지 않은 것 같아서 사진을 하나 남긴다. 저 건물 자체는 간판의 윤고딕 서체만큼이나 200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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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여행을 통틀어서 내 독사진은 여기서 딱 한 장만 남겼다. 금강을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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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끝으로.. 이것이 금강 휴게소에서 조령리 마을로 들어가는 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이다. 저기 안엔 민가, 식당, 펜션 정도가 있다. 안에 들어가면 대충 저런 분위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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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저기 있는 어느 식당에 들러서 이번 하계 휴가 특식을 먹었다. 메기 매운탕과 향어회. 민물고기 요리인데 바다 생선 요리만큼이나 맛있었다.

3. 옥천 시내에서 생가 두 곳

본인은 정 지용 시인과 육 영수 여사가 옥천 출신이라는 것을 현장에 가서 도로 표지판을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계획에 없었지만 이분들의 생가를 들러 봤다. 차로 금방 갈 수 있었으며, 두 생가도 서로 직선 거리 700m 남짓으로 가까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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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있는 정 약용 생가와 비슷한 인상이었다. 생가 옆에는 고인의 동상과 문학 기념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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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지용은 잘 알다시피 <향수>라고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시의 저자로 유명하다. 윤 동주 하면 <서시>가 떠오르듯이 말이다. 아, 실제로 정 지용은 윤 동주의 선배 겸 스승으로서 그에게 영향을 줬다고 한다.
저 안내판은 글꼴의 스타일로부터 추측하건대 21세기 작품은 절대 아니고 90년대에 만들어진 것 같다. 1988년에 대한 언급이 있으니 그보다는 나중이다.

안내판에는 정 지용의 최후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는 6· 25 사변 중에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모든 교과서와 전기에서 생몰년도가 "1902 ~ ?" 라고 기재되었다. 그 와중에 월북 가능성이 점쳐지는 바람에 민주화 이전에는 그의 존재와 작품까지 몽땅 흑역사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8년부터 그런 금기가 해제되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추가적인 기록과 증언이 발견된 덕분에 그가 1950년을 넘기기 전에 폭격을 맞아 죽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졌다. 납북 당하던 중이긴 했지만 북한에서 어차피 제대로 활동도 못 하고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빨갱이 누명도 확실하게 벗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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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육 영수 여사 생가이다.
평범한 초가집이던 정 지용의 생가와 달리, 저분의 생가는.. 무슨 으리으리한 대궐 같았다. 방금 전까지 흥부의 집을 보다가 놀부의 집을 보는 느낌?
집안이 대대로 지주였으며, 일제 시대에 이미 자가용을 굴리고 다녔을 정도로 옥천 지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금수저 부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육 여사의 부친이 처음에 사위를 깔보고 무시할 만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는데 그 사위가 나라를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돼 버렸으니.. 참 어지간히도 대형 사고를 쳤다.
육 여사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로 어질고 훌륭한 대통령 영부인이었다고 추앙받는다. 본인은 뜻하지 않게 이분의 기일에 맞춰서 생가를 구경하게 됐다.
생가는 재건 복원된 레플리카이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23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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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뭐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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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는 육 여사의 어린 시절 사진과 유작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원조가카가 부인을 잃은 후에 남긴 시 몇 편이 놓여 있다.
원조가카는 포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씨와 그림, 악기 연주와 문학에도 능통한 수재였다. 특정 분야에서 완전 넘사벽급 기상천외 비상한 창의성을 발휘한 천재는 아닌 것 같지만, 리더십과 보편적인 지적 능력이 남들 평균보다 더 뛰어난 영재였던 건 확실하다.

지도자에게는 영재가 천재보다 더 어울리는 자질이기도 하다. 지도자는 세부 실무에 천재들을 잘 배치해서 맡기고 관리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니들이 일하는 데 필요한 돈줄은 내가 대 주고 책임도 내가 지겠다. 니들은 좋은 실적 결과물만 내놓아라" 이렇게 말이다.

거기에다.. 소싯적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 당한 건 대놓고 호랑이 굴에 들어가서 긴 칼 찬 군인이 돼서 돌아와서 설욕하고.. 장인에게 무시 당했던 것은 아예 대통령이 돼서 설욕했으니 이 사람의 승부욕과 집념과 끈기도 참 비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허나,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은 것은 원조가카에게 매우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겼으며, 그게 원조가카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불행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공식 석상에서는 장녀인 레카가 영부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아무래도 원래 영부인만 한 포스는 부족했을 것이고, 이때부터 원조가카도 예전 같은 자제력을 잃고 좀 폭주하려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부인이 없으니까 여자 연애인과 여대생에게도 더 관심이 생겼을 것이다. 암살 당하던 당시처럼 말이다. 이건 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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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은 이렇게 넓은 풀밭과 정자(사진엔 안 나왔지만)도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나들이 하기에 좋았다.
옥천에서 경부 고속도로 외에도 이런 답사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9/09/07 08:35 2019/09/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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