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카마 호 선상 반란 사건

1980년대생이라면 페스카마 호 선상 반란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의 딱 한 달쯤 전인 1996년 8월경에 벌어진 참극이다.

페스카마 호는 원양어선이었다. 어업, 아니 선원 생활이라는 건 정말 고되고 힘든 일이다. 그리고 저기서 하는 일은 대규모 육체 노동이 그렇듯이 정교한 팀웍이 요구되며, 누구 한 명이 실수하면 큰 영업 손해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원들 조직 내부엔 군대만큼이나 엄한 군기와 규율이 존재해 왔다.

그랬는데, 업무에 미숙하여 폭언과 인격모독--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쓴 표현--을 자주 당하던 조선족 선원들과, 한국인 선장 및 선원 사이에 마찰이 생겼다. 그들은 나중에는, 옛날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현혹되어 기업 무너뜨리려 위장 취업한 붉은 노동자들처럼, 업주가 정황상 도저히 들어 줄 수 없는 임금과 복지를 요구하면서 태업과 꾀병을 일삼고, 정상적인 조업을 지속적으로 방해했다.

아무리 구슬리고 타일러도 말이 안 통하니, 선장은 참다못해 조업을 중단하는 손해까지 감수하면서 인근의 항구에다 그들을 하선시켜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들이 그렇게도 원하던 대로 말이다. 단, 이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손해들을 걔네들에게 청구하고, 그들을 앞으로 다시는 배를 못 타게 만드는 블랙리스트 낙인까지 업계 전체에다 찍으면서 말이다.

예상 외의 강경한 조치로 인해 돈이고 일자리고 다 잃고 인생이 송두리째 꼬이게 된 그들은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7명의 한국인 선원을 한 명씩 꾀어내어 흉기로 잔인하게 살해하여 바다에 던지고, 자기네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조선족 1명, 그리고 범행을 우연히 목격한 인도네시아 선원 3명까지 추가로 살해했다. 총 11명. 그러나 항해에 필요해서 살려 둔 1등 항해사 한국인 선원이 목숨을 건 기지와 노력을 다한 덕분에 범행은 꼬리가 잡혔다.

선원들을 11명이나 살해하고 배를 탈취한 건, 오늘날의 소말리아 해적들도 차마 못 저지른 매우 극악한 범죄이기에 저 조선족 선원 6명은 전원 사형이 선고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지존파가 모조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러나 그들을 선량하고 불쌍한 동포라고 적극 변호하여 조직적이고 잔인한 살인극을 우발 범행으로 둔갑시키고,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고, 그나마 수괴 1명만 최종적으로 사형 선고된 것조차 그 미만으로 크게 감형시킨 일등공신은 바로..

'독재자의 딸'(?)을 대신하여 지난 18대 대선에서 대통령이 될 뻔했던 유력 대선 후보였다.
덕분에 이때도 피해자는 싹 묻히고, 오히려 살인범 조선족들에게 국민 성금이 가고, 중국 내부에서까지 “한국에서는 중국인이 한국인을 죽여도 무거운 처벌 안 받는구나” 하는 인식이 퍼졌을 정도였다. 훗날 어민을 빙자한 중국 해적들이 한국 공권력을 아주 우습게 여기게 되는 데에도 이 사건이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해석하는 건 좀 비약일까?

세상에 조선족 포함 외노자들이 사회적 약자이니 인권 보호하자고 외치는 배부른 사람들치고, 자기 바로 옆집에 외노자가 사는 걸 좋아할 사람이 과연 있을지 양심을 걸고 솔직하게 묻고 싶다. (오 원춘이 어디 출신이더라? ㄲㄲㄲ) 세상에 약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약자를 가장한 악인을 분간할 방법이 없으니 생기는 것이다. 주한 미군이 여성을 성폭행· 살해한 것하고 외노자가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언론에서는 절대로 동등한 비중으로 다뤄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런 와중에 피해자 인권은 없고 오로지 불쌍한 척 하는 놈, 가해자 인권만 챙기는 세상을 만드는 데만 열심인 사람이 정권을 잡아서 국정을 계속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면 이 나라는 얼마나 더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얼마나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막장으로 치달았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진다. 현 대통령이 발언한 취임사에서 언급되었던 상당수의 건전한 문장을 들을 수 없거나 정반대의 논조로 바뀐 채 듣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내 블로그의 옛날 글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본인은 정작 대선 기간 도중에는 정치 발언을 극도로 자제하고 삼가 왔다. 오히려 그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1 작업하느라 바빴다.
겨우 신변잡기· 흠집내기 식의 신문 기사 한두 개를 근거로 특정 후보의 호불호 같은 내 정치관을 표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흥분도 좀 가라앉았을 테니, 빼도 박도 못할 검증된 심성, 팩트를 기반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표출해 보련다. 이번 대선 결과는 정말로 축복이고 다행이며, 우리나라가 국운이 최소한 몇 년은 더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여당이 예쁜 구석이 있어서가 결코 아니라, 야당이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27 08:43 2013/04/27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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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철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철덕이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여객 열차의 이름의 변천사이다. 열차의 이름은 그 열차의 차종을 식별하는 동시에 등급을 식별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 위상이 조금 모호하다. 철도는 고속버스나 비행기처럼 출발지와 도착지만이 중요한 point-to-point 수송 교통수단이 아니라 중간 정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으며, 정차 빈도에 따라 속도의 편차가 큰 여러 열차 등급이 존재할 수 있다.

1899년에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하고 1905년에 경부선이 개통했을 때는 고유명사라 불릴 열차의 이름 같은 건 딱히 없었다. 그냥 빠르다는 수식어가 붙은 ‘급행열차’라는 용어만이 쓰일 뿐이었다. 프랑스의 떼제베(TGV)가 거창한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빠른 열차’가 전부이듯이 말이다. 증기 기관차로 경인선 제물포-노량진이 1시간 40분 가까이 걸렸고 지금의 서울-부산뻘인 경부선 서대문-초량이 17시간이나 걸렸지만, 그 시절엔 그것만으로도 속도 혁명이라 불리기 충분했다.

그 해 5월부터는 서울-부산이 14시간대로 단축된 특급 열차가 운행을 시작했지만, 아직 그것만을 식별하는 명칭은 없었다.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원 태우 의사에게서 짱돌을 맞아 얼굴을 크게 다친 게 1905년 11월이니, 그건 바로 이 열차의 탑승 중에 발생한 사건일 것이다. 열차의 표정 속도가 아직 시속 30km를 채 못 넘어서 지하철보다도 느리던 시절이다. (그나마 요즘 지하철은 1km를 채 못 달리고 정차를 반복하면서도 그런 표정 속도를 내는데!) 그러니 그 시절엔 열차 밖에서 돌을 던져서 열차 안의 승객을 맞히는 게 가능했다.

한국 철도에서 최초로 고유명사 이름이 붙은 열차는 1906년 4월 16일부터 경부선을 달리기 시작한 ‘융희호’이다. 이것은 망해 가던 대한제국의 연호에서 따 온 명칭이다. 서대문-초량을 11시간 만에 주파했으니 경부선 개통 직후의 열차 운행 시간인 17시간에 비하면 상당히 빨라진 것이고 사실 KTX 개통 전까지 다니던 청량리-부전 전역정차 통일호보다도 빨랐다 (12시간 반이나 걸리던 1221 열차)! 표정 속도는 30km/h를 드디어 돌파하여 지하철을 따라잡았고, 최고 속도는 60km/h 정도에 진입했다.

융희호의 중간 정차역은 KTX 개통 전에 정차를 좀 많이 하던 경부선 새마을호와 얼추 비슷한 수준(8~9개역?)이었다. 여객 취급뿐만 아니라 물과 석탄 보충을 위한 정차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가감속이 병맛인 증기 기관차로 통일호만치 정차를 많이 했다간 그 속도를 절대로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때는 ‘융희’라는 이름을 반으로 쪼개서 서울 방면 상행은 ‘융호’라고, 부산 방면 하행은 ‘희호’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때는 경인선과 경부선이 두 말할 나위가 없이 단선이고 열차 운행도 몹시 드물었기 때문에 특정 열차에 곧바로 고유한 이름이 붙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엔 물가 대비 열차 운임이 지금보다 훨씬 더 비쌌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서민들은 장거리 여행을 하려면 지금으로 치면 고속버스나 KTX가 아니라, 비행기 정도는 타는 각오를 하고 열차를 타야 했다. 박리다매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이동이 빈번한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지금도 일본은 본토의 열차 운임이 사철 위주이고 비싼 걸로 악명 높은데 그 시스템이 식민지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실제로 일제가 조선 땅에서 철도를 운영하여 벌어들인 수익은 굉장한 흑자를 냈다고 한다.

융희호가 첫 운행한 건 한강 철교가 완공되고 서울에서 신의주까지 가는 경의선이 개통한(1906년 4월 3일) 거의 직후였다. 다만, 지금과 같은 서울 역은 없었고 공덕, 서강으로 가는 오늘날의 용산선이 그때의 경의선 본선이었으니 그 길을 통해 열차는 서울 이북의 신의주로 갔다. 융희호는 1908년부터 부산-서울이 아니라 부산-신의주를 몽땅 직통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 그 후 조선이 망하고 일제 식민지가 되고부터는 열차 이름도 대놓고 하카리(빛), 노조미(소망) 같은 일본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스케일은 더 커져서 부산에서 아예 만주까지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일제는 애초에 대륙 침략의 발판을 닦으려고 철도를 놓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다 1936년 12월 1일부터는 ‘아까스키(여명)’ 호라는 특급 열차가 다니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열차였다.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되기도 전에 그것도 증기 기관차로 서울-부산 무려 6시간 45분을 달성했다는 건 사기에 가깝다. 나중엔 6시간 반으로 더 단축!

일제 강점기 때 이 정도로 인프라가 구축됐으니 그 당시엔 육지에서 철도보다 더 빠른 교통수단은 없었고, 6· 25 때도 대통령과 참모진은 열차를 타고 피난을 갔다. 자동차는 서울을 벗어나면 빠르게 달릴 만한 포장 도로가 없어서 서울-대전이 과장 좀 보태면 8시간씩 걸리는 지경이었다. (사실 지금은 북한이 평양만 벗어나면 이 지경이기도 하고. ㄲㄲ)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인 1946년 5월 27일,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해방자호’라는 이름의 증기 기관차가 경부선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해방호도 아니고 왜 ‘자’가 붙었나 하면 이건 者를 뜻하기 때문이다. 영어로는 Korean Liberator. 이 열차는 고급 컨셉을 표방하지 않았고 일본인 철도 경영자가 물러나서 그런지 서울-부산 운행 시간이 9시간으로 크게 늘었다.

그리고 한국 철도는 이 승만 정권의 말기인 1960년 초가 돼서야 ‘특급 무궁화호’를 통해 옛날 아까스키 호의 표정 속도를 회복하게 되었다. 동력원은 증기가 아닌 디젤이다.

자막: 특급 무궁화호 등장
경부선에 또 하나의 특별 급행열차가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특급열차는 우리 이 대통령 각하께서 '무궁화호'라고 명명해 주셨는데, 2월 21일 아침부터 운행했습니다.
종래의 통일호보다도 30분이나 빠른 무궁화호는 서울-부산간을 6시간 40분에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호’라는 접미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까지 열차의 명명 방식은 배의 명명 방식과 비슷했다. 경부선을 다니는 열차와 호남선을 달리는 열차의 호칭이 달랐다. 이때의 무궁화호는 지금의 무궁화호와는 전혀 관계 없는 경부선 열차였고, 호남선에는 동급의 열차인 삼천리호나 태극호가 달리는 식이었다. 마치 옛날에 타이타닉 호에도 올림픽, 브리타닉 같은 동급의 자매선이 또 있었듯이 말이다.

또한 옛날에 증기 기관차는 오늘날의 디젤이나 전기 기관차와는 달리 외형적인 차륜 배치가 동력비 변환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여객용 기관차와 화물용 기관차의 구분이 더욱 분명했으며 차륜 형태를 식별하는 이름이 존재했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미카, 901호, 파시 같은 이름이 바로 그 예이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증기 기관차는 1967년 8월 31일을 끝으로 현역 운행을 완전히 종료한다.

자, 1960년대 이후로는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재건호, 맹호호, 청룡호, 백마호처럼 호가 아니라 ‘부대’를 붙여도 될 것 같은 북한/군대스러운 명칭도 열차에 부여되었는데.. 실제로 박통 시절엔 월남전 참전 부대 이름들이 전부 열차 명칭으로도 의도적으로 쓰였다. 군사 정권 아니랄까봐. 그것 외에도 배에 이름 붙이듯이 열차에도 노선별로 다양한 이름이 난립(?)하기 시작했으니, 상록호, 풍년호, 부흥호까지. 비둘기호와 통일호도 옛날부터 명칭 자체는 존재했다. 단지 이름의 용도 내지 의미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을 뿐이다.

그러면서 열차의 속도는 특급열차를 위주로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고, 1969년 6월 10일에 등장한 초호화 특급 열차인 관광호가 드디어 서울-부산을 5시간대도 극복한 4시간 50분 주파를 달성했다. 경부 고속도로도 아직 없던 시절에 속도도 속도이거니와, 그 옛날에 객실에 천장 선풍기 대신 에어컨이 달려 있었을 정도면 얼마나 호화로웠을지 상상이 된다. 단지 관광호의 물가 대비 운임은 일본의 신칸센보다도 더 비쌌다는 점 역시 감안하시길. 진짜 돈지랄용이었다.

이 열차는 훗날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한 날부터 ‘새마을호’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이것이 그로부터 30년 뒤에 KTX가 개통할 때까지 대한민국 최고급 열차의 혈통을 이어 나갔다. 서울-대전-대구-부산만 찍는 그 고매한 열차 라인 말이다.

1977년 8월부터는 새마을호를 제외한 모든 열차들은 그냥 등급만으로 우등-특급-보통으로 바뀌게 정리되었다. 일일이 이름을 붙이기에는 열차의 운행 노선과 횟수가 크게 늘어서 이렇게 단순화가 이뤄진 셈이다. 우등열차가 오늘날의 무궁화호의 전신이며, 통일호가 특급이라고 불렸다니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1984년 1월 1일이 돼서야 드디어 새마을-무궁화-통일-비둘기 체계가 정립되어서 열차의 이름은 오로지 등급만을 나타나게 바뀌었다. 새마을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들은 국민 공모를 통해 뽑은 거라고 하지만, 결국 옛날에 한 번씩 쓰인 적이 있는 명칭들을 재사용한 셈이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새마을호는 잘 알다시피 1985년 11월 16일에 서울-부산 운행 시간이 4시간 10분으로 단축되어 표정 속도가 드디어 100km/h를 돌파하였으며, 이것이 한국 철도 역사상 기존선에서 이뤄진 최후의 표정속도 향상 기록이다. 기관차의 출력 증대를 통해 최대 시속 150km 주행 자체는 관광호 시절부터 가능했지만, 선로/선형 개량과 신호 시스템 개선을 통해서 고속 주행 가능 구간을 늘린 덕분에 가능했던 결과이다.

지금까지 과거 얘기가 길어졌으니 이제 미래 전망을 하고서 글을 맺겠다. 1984년 이래로 거의 30년간 쓰여 온 재래식 ‘-호’ 체계는 오늘날 심하게 문란해지고 의미가 퇴색해 있기 때문이다.
일단 지난 2000년 말에 비둘기호가 멸종하였으며, 고속철이 개통하면서 통일호 역시 문서상으로는 사라지고 객차형은 전량 퇴역했다. 통일호 중 통근형 디젤 동차만 통근열차라고 명맥을 잠시 유지했지만, 그나마 얘도 이제 경의선/경원선의 극소수 구간에만 남아 있지 다 멸종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KTX에 밀려 콩라인이 된 새마을호마저도 사망이 임박했다. 2013년 1월에는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가 드디어 전량 퇴역했고 2014년 말을 끝으로 지금의 새마을호는 객차형까지 죄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럼 ‘-호’ 열차는 무궁화호 하나만 남으니 기존 ‘-호’ 체계가 다 붕괴되는 셈이다.

무궁화호도 디젤 동차(NDC)는 진작에 다 퇴역하고 없기 때문에, 무궁화호는 그냥 재래식 기관차 견인형 일반열차를 총칭하는 상징적인 명칭으로만 남을 것이다. 요컨대 오로지 통일호만이 새마을호와 무궁화호와는 달리 객차형이 동차형보다 먼저 없어졌다. 등급이 등급이다 보니까 말이다.

이런 재래식 열차를 대신하여 꿰차고 들어온 것은 KTX부터 시작해 누리로, ITX-청춘 같은 신형 전동차들이다. KTX는 워낙 특별한 물건이고 누리로는 어차피 무궁화호와 거의 같은 위상과 운임 체계를 계승했다지만, ITX 청춘은 새마을호를 꿰차고 들어와서 새로운 등급을 만들어 냈다. 거기에다 새마을호의 후속 열차로는 ‘ITX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정해졌다고 한다. 1974년 이래로 40년을 이어 가는 ‘새마을’의 명줄은 참 길기도 하다!

오늘날 철도계의 높으신 분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명명 전략은, 열차 명칭을 ‘등급-차종’으로 이원화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등급으로는 고속열차를 뜻하는 KTX, 그 다음으로 장거리 특급 간선을 뜻하는 ITX가 있으며, 이보다 낮은 등급에 대한 이름도 정해져야 할 것이다.

다음 차종으로 말할 것 같으면 ‘KTX-산천’이 있으니 재래식 떼제베 열차를 나타내는 ‘KTX-TGV’ 같은 차종명 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경춘선에 ITX-청춘이라는 2층 열차가 다니듯이 기존 경부선이나 호남선에는 ITX-새마을이 다닐 것이고 중앙선에는 틸팅 열차가 다니게 될 수 있다. ‘새마을’이 이제는 등급명이 아니라 차종명으로 쓰이는 셈이다.

그보다 더 아래의 무궁화급라면 ‘누리로’는 등급명이 될지 차종명이 될지 확실치 않으나, 아마 차종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새마을(ITX)급이든 무궁화급이든 재래식 기관차-객차형 열차는 ‘클래식’(?)이나 그에 준하는 차종명이 붙지 않을까 싶다. 선박의 명명 스타일에서 유래되었던 한국 철도의 열차 명명 방식이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가 기대된다.

이렇게 열차 이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읊어 보니 참 훈훈하고 기쁘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철도가 희망과 동경, 기쁨과 평안을 주는 존재이기를 본인은 원한다. May the railroad richly bless you!

Posted by 사무엘

2013/04/22 08:33 2013/04/22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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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유괴 범죄 생각

* 어느 카테고리에다 넣어야 할지가 굉장히 모호한 글이 돼 버렸다.. -_-

1. 여성이 저지른 아동 유괴 범죄

세상에 수많은 흉악 범죄 중에서도 어린이 납치· 유괴 범죄의 죄질은 가히 톱클래스 급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 부모에게 씻을 수 없는 희망고문과 상처를 안기고 그 후유증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1991년에 개구리 소년뿐만 아니라 이 형호 군 납치· 살해 사건이 유명한 영구미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이야기는 <그놈 목소리>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용의자는 애를 납치 당일에 애초에 죽여 버렸으면서 그 후에 집요하게 집으로 낚시성 금품 요구 전화를 걸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더욱 이끌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범죄는 꼭 한눈에 보기에도 양아치+싸이코패스 기질이 충만한 젊은 남자만 저지른 게 아니라는 점이 더욱 충격적이다.
1997년, 박 초롱초롱빛나리 양을 공범도 없이 혼자 유괴· 살해한 전 현주는 당시 겨우 20대 후반의 유부녀였고 게다가 임산부였다.

한때 경찰이 용의자가 있다는 단서를 확보한 카페를 급습해서 손님들을 검문했었다. 그러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용의자인 전 씨도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임산부지, 아픈 체하지, 이 상황에서 더 조사를 하는 건 100% 공권력 남용으로 여론을 악화시킬 지경이었으니, 이때 용의자를 놓친 것은 절대로 경찰의 무능 탓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사람은 프로 범죄자가 아니었기에 범행에 여러 허점을 드러내면서 잡히긴 했다. 범행 동기는 간단히 요약하면 그냥 거짓말+허영심을 채우기 위한 돈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납치한 애가 울고불고 하면서 자기가 통제를 못 할 지경이 돼 가자 살해하게 된 것.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가해자의 인생도 완전히 끝났다.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지금까지 복역 중이다. 남편으로부터는 당연히 이혼 당하고, 배 속에 있던 아이의 양육권도 빼앗겼다.

이 사건 이후, 아이 이름을 너무 튀거나 특이하게 짓는 관행마저 사라졌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지존파 일당이 검거된 이후 그랜저의 판매량이 잠시 감소한 것과 비슷한 맥락..;; (그랜저급 이상을 굴리는 부유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고 그랬으니)

2.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

그런데 박 나리 양 사건은 1990년 6월에 벌어진 곽 재은 양 유괴· 살해 사건과 거의 똑같은 판박이였다. 가해자 홍 순영은 스펙과 직장을 거짓으로 위조해서 대학생 신세를 하고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던 20대 아가씨였다. 그랬는데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게 생기고 결혼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자, 이 상황을 돈으로 무마하려고 우연히 이름을 알게 된 어느 유치원생을 꾀어 냈다. 부모를 사칭하면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애부터 먼저 밖에 내보내 달라고 말이다.

그랬는데 공범도 없이 혼자서 애를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가 울면서 자기를 집에 보내 달라고 요구하는 등, 상황이 위급해지자 가해자에게도 뭔가 마가 씌였다. 그녀는 아무도 없던 숙명여대 모 건물 안에서 결국 아이를 목졸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아이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죽이기 전에 먼저 물어 본 연락처) 금품을 요구하였으나, 은행에서 그 돈을 인출하는 모습이 덜미를 잡히는 바람에 결국 잡혔다.

애당초 프로 범죄자들이 하는 것처럼 경찰의 추적을 피하면서 현금만을 교묘히 전달받는 꼼수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대놓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은행 거래를 할 정도로 홍 순영은 범행 수법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경찰에 잡히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 듯했고, 이제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바로 자살을 생각했다. 지하철역에서 공범을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면서 경찰에게 거짓말을 하고는 지하철역 승강장으로 진입하는 열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기관사가 필사적으로 열차를 세운 덕분에 머리를 약간 다치기만 하고 목숨을 건졌다. 이때 그녀가 죽어 버렸다면 아이의 시체도 못 찾게 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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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정아처럼 횡설수설과 거짓말을 거듭하던 전 현주와는 달리, 홍 순영의 최후는 더욱 비참했다. 그녀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멘붕과 죄책감에 사로잡혔고, 교도소에서도, 재판 받으면서도 그냥 울부짖으면서 자기를 제발 사형시켜 달라는 말밖에 안 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종교인 성직자를 통한 교화 같은 것도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때는 그렇잖아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었던 노 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그녀의 원대로 결국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그녀는 이듬해인 1991년 말에 겨우 24세의 나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유언도, 장기 기증도 없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개를 저으며 울기만 하면서 정말 고통스럽고 처절하고 허무하게 최후를 마쳤다.

본인은 인간으로서 그녀의 혼에(도) 동정과 연민을 느낀다.
거짓과 허영으로 가득찬 채 빗나간 탐욕을 채우려고 한 어린이의 생명을 빼앗고, 다른 단란하던 가정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인생을 동정할 생각은 절대 없다. 사형은 성경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정말 정당한 인과응보이긴 했다. 성경에도 있잖은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는다”고 말이다(약 1:15).

그러나 죄책감에 짓눌린 채 후회만 하는 건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고 구원을 이루지도 못한다.
저건 그냥 가룟 유다가 죽듯이 죽은 거다. 이판사판 다 끝났고 부끄러워서 세상 사람들 볼 낯이 없고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여건이 됐으니, 이제 살 이유가 없어서 죽겠다는 심정이다.
그런데 그렇게 죽고 나서는, 그럼 하나님은 무슨 낯으로 보려고?

영적으로 좀 날카롭게 진단하자면, 내가 보기에 홍 순영은 애를 유괴하고 살해할 때뿐만 아니라, 나중에 멘붕 상태에서 징징거리는 것도 줄곧 '마'에 씌인 상태에 가까웠다. 자유가 있을 때는 마음껏 나쁜짓을 하게 하다가, 그 자유를 빼앗기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됐을 때는 주체 못 할 죄책감으로 사람을 재기의 여지 없이 완전히 파멸시켜 버리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아니면 죄책감을 아예 안 느끼는 진짜 인면수심 마인으로 바꾸거나.)

둘 다 이성이 마비된 상태인 건 비슷하다. 난 그녀의 “그 상태”가 참 가련하고 불쌍하다는 것이다. 뭐,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이 어떻고, 가해자도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네 하는 개 풀 뜯어먹는 차원이 아니다. 아시겠는가?
오히려, 홍 순영 같은 일부 '서툴고 여린' 범죄자를 빌미로, 무슨 현행 사법 시스템이 너무 잔인하고 비인권적이네 하면서 사형 제도를 없애네 뭐네 하는 개드립이 일게 하는 건 마귀의 또 다른 역사이다. 이게 오늘날 영적 전투의 실상인 것이다.

민감한 얘기가 또 길어졌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이런 사건을 겪은 나라들은 어린이를 상대로 실시하는 안전 교육 매뉴얼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전혀 양아치처럼 생기지 않았고 험상궂은 아저씨도 전혀 아닌 여성조차도 얼마든지 어린이를 유괴· 살해할 수 있다는 게 입증됐기 때문이다.

3. 사형 집행의 부활을 꿈꾸며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김 영삼 정권의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에,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최후의 대규모 사형이 집행되었다. 다음 대통령에게 부담을 안 주기 위해 일부러 집행한 건데 아주 잘한 결정이다.

단, 남아 있던 사형수들을 다 죽인 건 아니고, 자기 정권 전부터 남아 있던 20여 명의 사형수들만 죽였다. 세상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1991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칼부림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승용차를 질주해서 어린이 2명을 죽게 한 김 용제도 이때 죽은 사형수 중 하나이다.

그리고 김 영삼 정권 시절에 잡힌 지존파 멤버들은 워낙 죄질이 나빠서 그 전에 이미 다 사형이 집행되어 죽었다. 오로지 살인을 목적으로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똘똘 뭉쳐 전문적인 폭력 조직을 결성한 것은 세계의 범죄 역사를 통틀어서도 드문 사례라고 한다. 중국이 아편 전쟁 때문에 마약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듯, 한국은 '반국가단체'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북한이라든가.. 북한이라든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적용하면 사실 조폭을 결성한 것만으로도 우두머리는 최고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그 시절 이후로 우리나라는 한 번도 사형이 집행되지 못하고 사법 정의는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에 반해 전툴루, 전땅크 시절은 비록 다른 흑역사도 많았을지언정 사법 정의에 관한 한은 천국이었다.

약간 인민재판 같은 사례이긴 하지만,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의 경우 아직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 확실히 밝혀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통령이 자기 직위를 걸고 항소심을 묵살시켰으며, 재판부에다 압력을 넣어 1~3심에서 모두 피의자에게 사형을 때려서 확인사살을 해 버렸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사전에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는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빨랑 자수해라.)”라고 진짜 전땅크스러운 대국민 담화를 대통령이 친히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약속을 이렇게 지켰다. -_-;;;

살인인지 감금치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대통령의 경고를 씹었다는 괘씸죄 때문에 어차피 사형이 떨어졌다. 마치 군인의 탈영이 나중엔 탈영 자체의 공소시효는 소멸하더라도, 복귀 명령 불복종죄 때문에 처벌 대상이 되듯이 말이다.
피해자 유가족은 이것 덕분에 그나마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으며 전툴루에게 개인적으로 감사하게 되었을까? 이게 1983년의 일이다.

그 5공 시절에는 흔히 생각하듯 정치범이나 사상범도 아니고, 심지어 살인을 전혀 저지르지 않은 0 kill 상태에서도 사형이 떨어져서 집행된 적이 있었다.
가정집을 털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임산부· 여대생을 강간해 온 3인조 강도 상습범(황 인규, 최 윤성, 최 성훈)은 비록 살인 혐의는 없으나 10수 차례나 저지른 강도· 강간의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는 법무부의 코멘트와 함께 1985년 11월, 얄짤없이 사형을 당했다. 이 판결에 대해 잘못됐다고 이의가 제기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없다.

이렇듯, 군사정권 시절에 벌어진 일이 다 나쁘기만 했다는 건 큰 편견이며 오산이다.
내가 광주의 학살자(?.. 뭐 이 표현 자체에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를 옹호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만큼 반대편 성향의 위정자들도 만만찮게 병크를 저지른 게 많으며, 세상 한켠에는 당신과 반대의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인도 있다는 것을 독자들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높으신 분들이 정말로 저출산을 걱정하신다면,
이 어려운 여건 속에서 애를 낳아서 키우는 부모의 권리를 정말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의 미래를 인질로 잡고 장난치고 짓밟고 가정을 파괴하는 범죄자들에게 생명은 생명으로 일벌백계를 내려 주길 간절히 바란다.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예수도, 부처도, 공자도 아닌 평범한 일반인들이다. 세상 정부는 무슨 구원이나 내세· 영생을 논하는 조직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시민들 생명을 지키고, 질서과 치안을 문란케 한 자에 대한 공공의 보복을 집행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전땅크를 비판하고 욕하고 싶으면 이런 기초적인 거 하나라도 전땅크보다 잘해 달란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4/05 08:32 2013/04/0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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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물 2013/04/09 14:41 # M/D Reply Permalink

    전직 대통령들이 잘못한 일만 있는게 아니라는건 동의합니다.(일부러 나라 말아 먹으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결과겠죠)

    하지만 비판을 하려면 그 사람보다 잘하라는건 동의하지 않습니다.

    대학교수 비판하려면 대학교수보다 공부 잘해야 할까요?


    요즘 억울하면 네가 사장해라, 네가 대통령 해라 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론적으론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론 매우 어렵고 그 위치에 올라가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하지 말라는건 발전을 가로 막는거라고 생각합니다.


    * 물론 자리에 따른 부담감이나 다른 생각해야 할 것이 있고 그 자리에 있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많기도 하지만 그걸 오해하지 않도록 잘 설득 시키는 것도 위에 계신 분들이 가져야 할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요?
    가진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사회를 위해 더 희생하는 마음을 가져야 그 사회는 더 빨리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사무엘 2013/04/10 10:03 # M/D Permalink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저 역시 전문가가 아니면 아예 나서지 말라는 식으로 비판의 기회를 극단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큰 원칙으로는 대안 없는 비판을 굉장히 싫어하며, “그럼 네가 직접 해 봐라”는 식의 논리를 기본적으로 옹호합니다. 영양가 없는 비방과 비난, 헐뜯기를 지금까지 너무 많이 봐 와서..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보다시피 좀 주술 호응이 많이 생략된 비문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흉악범을 적절히 잘 조져 주면서 다른 계층의 국민 인권도 잘 챙기는 대통령이 나오기를 바라는 제 의도는 잘 전달되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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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1906-1990).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군 장성이다. 군사, 세계사, 현대 전쟁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을 들어서 알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양반 정말 골때리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 타입으로, 닥치고 폭격기 화력 덕후였으며 그의 주특기는 쑥밭 만들기였다.
하긴, 그 당시 미국은 워낙 물자가 풍족하게 넘쳐나는 부자 나라였으니 그의 전투 이념은 나름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석기 시대'를 굉장히 좋아한 매니아였다. ㅋㅋㅋㅋㅋ
미국 앞에서 깝치는 적국들은 본진을 폭격으로 다 쑥밭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조리 '죽탕치는(?)' 것도 아니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으름장을 공석에서 입버릇처럼 뇌까렸다. 영어로는 Stone Age.
호전적이고 입이 험악한 걸로 악명 높은 북한도 공식 석상에서 석기 시대 공갈을 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르메이 장군에 대해서 이런 패러디짤이 나돌 정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의 지휘 하에 일본 도쿄는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그 이름도 유명한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미군 폭격기가 우박처럼 떨어뜨리는 소이탄에 시내 전체가 말 그대로 시뻘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듯, 목조 건물은 형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없어졌고, 일부 석조/콘크리트 건물도 새까맣게 탄 흉측한 몰골만 남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해서 사실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쿄를 그런 석기 시대로 되돌리는 데는 겨우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원폭을 성층권 고도에서 투하하는 식이 아니라 상당한 저공에서 위험한 자세로 소이탄을 떨어뜨리다 보니, 미군도 폭격기가 총 12기나 일본의 대공포로부터 반격을 받아 격추되고, 42기는 피탄 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이에 몇몇 미군 파일럿들은 권총을 들고 르메이를 직접 찾아가서 이렇게 따졌다.

“왜 이런 무모한 저공 비행 폭격 명령을 내렸는가? 귀관 때문에 우리가 전우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아는가?”

하지만 르메이는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단 하루 만에 일본 제국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놈들을 최소 10만 명이나 없앴다! (사실, 미군 전사자는 많아 봤자 수십~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이런 식으로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 1주일 동안 일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모두들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작전 자체는 르메이의 말대로 미군의 승리이긴 하지만... 저건 좀.. ^^;; 정말 그의 머리에 든 건 오로지 폭격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나서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르메이가 생각한 작전들이 모두 시행되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로 지도에서 없어지고 일본 열도는 석기 시대로 퇴화했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무자비한 작전은 훗날 6·25 때도 계속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평양 시내는 그야말로 형체가 남은 건물이 손에 꼽을 정도였을 정도로 그냥 말 그대로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오로지 미국이니까 가능한 돈지랄로 폭탄을 그냥 때려 박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북한의 내부에서는, 평양을 재건할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수도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도 오갔다고 한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습과 폭격의 악몽 때문에 지금 평양 시내는 이에 대비하느라 지하 방공망이 굉장히 깊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평양 지하철이 무지막지하게 깊게 건설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 뒤에도 르메이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월남전 땐 베트남도, 그리고 쿠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베트남이건 쿠바건 다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대통령 각하는 명령만 내려 달라”는 식으로 일관되게 나섰다.
마치 게임 해설자 김 태형 씨가 캐리어를 좋아하듯 그는 석기 시대가 자기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걸프전 때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갈을 쳤고, 나중에 9· 11이 터졌을 때는 파키스탄을 상대로도 대테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너네 나라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그랬다. 뭐, 반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협박 멘트에 심기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르메이 같은 사람도 미군에 있는데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맥아더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군인이라지만 그도 인간이고 신은 아니기에, 맨날 인천 상륙 작전 같은 성공만 한 게 아니며 실수도 저질렀다. 처음엔 북한과 중공군을 얕잡아보다가 1· 4 후퇴를 당하고 호되게 데인 뒤에야, “이 자식들 안 되겠어.”라고 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경책을 쓰려 했다.

어떻게든 빨갱이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린다거나, 전쟁을 아예 3차 세계 대전 급의 대규모 장기전으로 키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런 강경한 생각이 화근이 되어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르메이도 그 당시 “이 좋은 핵무기를 왜 안 써?” 급의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보다 더하면 더한 꼴통이지 못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호전적인 군 장성 양반들의 근성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않았다면, 과거에 소련과의 냉전이 냉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한반도가 아니어도 어디에서 핵이 한두 발 터지는 바람에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진짜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3차 세계 대전 때 인간이 무슨 신무기를 쓰고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 인간은 새총(slingshot) 같은 냉병기를 쓰고 있겠죠?”라고 얘기했겠는가. 성문 종합 영어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지문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영락없이 석기 시대 회귀-_-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기 시대 드립 말고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호전성을 또 드러낸 유명한 어록으로는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이다.
사실, 도쿄 대공습 같은 경우 미국이 연합국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저렇게 대놓고 시내를 폭격하여 비전투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건 전쟁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놓고 말해, 나치 독일이 영국이나 미국의 본토 도심지를 소이탄 폭격으로 다 불태워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면 그 후폭풍이 어찌 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에 참여했던 폴 티베트 대령은 훗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회고한 바 있다.
“난 그 당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원폭은 전쟁을 더 일찍 종결시키고 더 많은 인명의 희생을 막은 차선이며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으로서 나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다.”

허나, 르메이는 한 술 더 떠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아예 그 정도의 책임이나 죄책감마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고해 보인다고 저 민간인들을 안 죽이면, 그게 다 우리를 죽이는 병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껏 폭격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르메이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시 구조가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 업체 영역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 어록으로는 이 외에도
“전쟁이란 총알 많은 쪽이 많이 죽이면 이기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죽이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처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우악스럽고 꼴통 같은 방면으로 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때, 천조국 미국 소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최소한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고, 그러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같은 이런 진짜 미친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저건 잘 알다시피 '무다구치 렌야'라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이 남긴 훈시.. -_-
그도 그럴 것이 물량이 풍족한 곳에서 그냥 물량으로 밀면 된다는 교리가, 없는 여건 속에서 닥치고 근성과 정신력만으로 돌격하라는 교리보다는 훨씬 나은 게 자명하지 않은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으면 무한 맵에서 저그 가디언 굴리는 걸 좋아했을 것 같다. (대공 유닛으로 대지상 폭격 -_-)

뭐, 르메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다.
우방국의 장군답게 일본, 북한 등 대한민국의 적들하고만 싸웠으니 말이다.
(아 하긴, 무다구치 렌야도 자기 군대를 말아먹은 행적이 가히 대한 독립 유공자 급이니, 우리가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_-;;;)

그는 그런 호전적인 기질답지 않게 미군의 전술 체계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심지어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훗날 자위대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괜히 장성까지 진급한 게 아니다.

다만, 그 막강한 화력으로 미국이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깔끔한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 때는 재일 동포도 많이 희생된 게 사실이다. 비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
이 사람의 상징은 잘 알다시피 '석기 시대'이다. 허나 아담 이래로 6천 년 인류 역사를 믿는 크리스천은 인류에게 딱히 석기 시대라 불릴 만한 긴 원시 시대가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로의 퇴보를 언급하려 한다면, 차라리 노아의 홍수 직후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될 텐데.. 아무래도 '석기 시대'보다는 우악스러움이 덜하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3/07 19:26 2013/03/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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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지 만원 지은 <제주 4·3 반란 사건>을 읽고

난 어린 시절부터 근대로 갈수록 우리나라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민족이 뭔가를 발명하고 정복하고 성공하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식의 좋은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줄곧 고통받았으며 개혁은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좋든 나쁘든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람이 외국 침입자에게 살해당하는 희대의 치욕을 당하기까지 하고, 궁극적으로 주권이 외세에 완전히 빼앗기는 것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난다. 빼앗긴 주권을 훗날 극적으로 되찾기는 하지만 이것도 우리 힘으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며, 덕분에 이념 대립과 국토 분단, 동족상잔 같은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진다.

그래도 알고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는 비극만 있는 게 아니었고 지도자 복이 없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은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지도자가 그 가난하고 열악하고 위험하던 여건 속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반쪽만이라도 필사적으로 막고 올바른 이념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미국을 든든한 우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우리 민족은 기적적인 경제 성장까지 이뤘다. 이 정도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네 나라의 내력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있는 그대로 가르쳐지고 대대로 전수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행히도 심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공이 과를 객관적으로 월등히 압도하는 지도자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후세에 의해 저열한 중상모략과 부관참시를 당하는 꼴을 본인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피아식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민간인 오폭이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와전되고, 반역자가 소위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는 것을 보니, 이건 정치색을 떠나서 정말 뭔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거 일제의 만행에 그렇게도 분노하던 사람들이 북한이 더 최근에 저지른 잔학한 테러, 무력 도발, 민간인 학살을 왜 그토록 쉽게 잊어버리는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도덕과 정신을 무참히 파괴하는 사악한 북한의 사회 시스템을 왜 그리도 만만하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인터넷을 하면서 북한 김 정은 정권을 비웃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이고 무엇 덕분인지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정녕 없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 국민들이 사상이 글러먹어서 북한 정권을 직접 지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가슴으로만 애국을 할 뿐 머리와 시스템적인 안목으로 애국을 못 해서 극소수 불순분자가 벌이는 역사 왜곡과 선전 선동, 시체 장사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을 예전처럼 무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남한의 정신 기강부터 먼저 무너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발달된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 사회의 치부만을 편파적으로 들추고, 정부과 국민 사이에 극심한 불신풍조를 조장한다. 국가에 몸바쳐 충성한 애국자를 수구꼴통으로, 반역자를 민주투사로 바꾸는 역사 왜곡은 덤이다. 이것은 남을 교묘하게 쓰러뜨리려는 모든 '악의 무리'들이 분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취해 온 전략이다.

제주 4·3 사건도 그런 예에 속한다.
책의 저자는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한반도가 분단된 과정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들어온 배경부터 면밀히 파헤쳤다. 그 내역을 보노라면 한반도가 공산화되느니 차라리 일제 치하에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왕 먹힐 거면 소련이 아니라 일본에게 먹힌 게 오히려 축복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 일본 등 그 당시에 나름 선진국 축에 들던 나라들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던 소련 발 공산주의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마치 이단 종교 교리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기 매우 좋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을 모른 채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한반도 본토에서 떨어져 있던 제주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뒤엎으려는 계획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인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박 헌영은 6·25를 사주한 것 이상으로 4·3 사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좌익과 우익이 모두 연루된 처절한 피의 비극으로 끝난 데는 일차적으로는 '빨갱이'들의 교묘한 위장 전술과 잔학성, 피아식별의 어려움, 그리고 다음으로 상대편 진영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증오, 보복 심리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이 사건은 친북 세력이 일으킨 반란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좌편향 인사라도 감히 북한 쪽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성향의 정권 때 반란의 주동자가 명예가 회복되고 훈장이 추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건의 피해자인 당시의 제주도민들조차도 이것은 불순분자가 일으킨 무장 반란일 뿐 남북 북단을 반대하는 항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사건이 그렇게 왜곡되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덮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이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는 책을 왜 현업에 종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응용수학을 공부한 시스템공학 박사가 썼을까? 이 책을 쓰기 위해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얼마나 많은 문헌들을 읽고 공부해야 했을까?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분야에도 이런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천재인 공 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였고, 오늘날 흠정역이라고 성서 공회 성경보다 더 나은 우리말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분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 교수이다. 머리가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들이 맑은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좁은 길을 먼저 간 덕분에, 다른 국민들도 더 똑똑해지고 삶이 더 윤택해져 왔다. 어느 분야든 그 맥이 부디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비정상적인 국가인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더욱 궁금해졌다.
숙주가 완전히 죽어 버리면 바이러스 자신도 죽는데, 북한은 왜 하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 골라서 가 있을까? 북한도 처음에는 그래도 여러 당이 존재하고 주민들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주민은커녕 군인들마저 못 먹여 살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북한 수뇌부들은 지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도 남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색이 굉장히 강한 논객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고, 사람마다 사상적인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분이다. 그러나 저자의 일부 극단적인 평론이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여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어도, 친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프로필을 가진 멀쩡한 군사 평론가를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여론 조작과 선동의 결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의 비열하고 집요한 대남 도발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이것이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될 일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없을 터이며 4·3 사건에 대한 기록도 그러할 것이다. 팩트가 정치색으로 매도되지 않으면 좋겠고, 저자에 대한 편견 하나 때문에 진실까지 가려지는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만에 하나 이 책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색은 무슨 불확실한 음모나 들추고 국가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감사와 애국심을 북돋우는 건전한 정치색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직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는 것은 과거에 조선이 러시아 대신 일제에게 먹힌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축복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자부심은 충분히 생기며, 환단고기 같은 위서로 대리 만족을 얻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책이 널리 읽혀서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이 알려지고 자유와 안보의 소중함이 전파되고, 북한의 대남 도발사가 있는 그대로 폭로되며 내 조국은 이런 위태로운 와중에도 오뚝이처럼 굳게 일어선 나라라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13 19:26 2013/02/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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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uewave 2013/02/15 15:05 # M/D Reply Permalink

    씨스템클럽에서 왔습니다. 잘 쓰셨군요. 너무 자세하게 쓰셔 꼼꼼히 읽어야 했습니다.
    앞으로 실천하는 애국시민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사무엘 2013/02/15 18:42 # M/D Permalink

      아, 거기에도 글이 게재됐군요. 쑥스러워라~ 반갑습니다.
      진짜 꼼꼼하게 읽어야 할 글은 이 독후감이 아니라 책 원문이겠죠..
      저는 '애국'이라는 단어를 논하기엔 많이 미천하고 부족합니다. ^^
      인사 남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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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국토 분단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살펴보자.

1. 우선, 38선과 오늘날의 휴전선은 다르다.
38선은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눠서 지배하기 위해,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지리적인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땅을 수평 분할한 선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반면 오늘날 남한과 북한 사이의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하고 있는 휴전선은 6· 25가 휴전/정전으로 끝나면서 나중에 생겼다. 꼬불꼬불한 곡선 형태로 38선 시절에 비해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반면, 강원도 쪽 영토는 남한이 훨씬 더 많이 수복하여 속초와 고성이 남한 땅이 되었다.

휴전선은 일명 군사 분계선(MDL)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미터법이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유독 마일이라는 단위로 일컬어지는 흔치 않은 존재이다. (155마일)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2. 흔히 휴전선 하면 이런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최전방 GOP라 불리는 곳에서 근무하는 국군 병사들이 곁에 바싹 붙어서 순찰하고 정비하는 그 철조망은.. 한반도를 딱 반으로 가르는 그 '휴전선'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에서 벌인 3· 1 만세 운동과, 그 후에 유 관순이 음력 3월 1일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인 만세 운동만큼이나 서로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다.

국군 병사들이 지키는 철조망은 휴전선 이남의 '남방 한계선'을 나타내는 철조망이다. 물론 북한 쪽에는 '북방 한계선'이 있다. 이것은 실제 휴전선과는 명목상 2km정도 떨어져 있으나, 그게 칼같이 지켜지는 건 아니어서 2km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남과 북의 군인이 동일한 단일 철조망을 공유하면서 진짜 코앞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피차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진영의 철조망을 갖고서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휴전선을 포함하여 남북 양쪽의 한계선 사이의 공간이 바로 천연 자연의 보고라고 불리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비무장지대(DMZ)이다. 금강초롱과 끈끈이주걱까지 서식한다고 하나, 거기는 지뢰도 엄청 많이 묻혀 있는 위험한 지대이다. -_-

동쪽 강원도 쪽으로 갈수록 DMZ는 첩첩산중 지형이 되지만 서쪽 경기도는 DMZ가 평지이다. 판문점이 있는 공동 경비 구역(JSA)은 DMZ에 속하며, 대성동 마을도 이례적으로 JSA 인근 DMZ 내부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DMZ는 마치 뉴욕 한가운데의 UN 본사처럼 UN의 관할에 있는 땅이니, UN 본사를 판문점으로 옮기겠다는 허 경영의 공약(?)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닌 듯하다. -_-;;

남방 한계선과는 달리, 진짜 오리지널 휴전선(군사 분계선)은 극소수 육로로 월북이나 귀순을 하는 용자 말고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시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진짜 60여 년 전 휴전 당시에 만들어진 철조망이 시뻘겋게 녹슨 형태로 방치돼 있거나, 아예 애초에 철조망도 없이 낡은 표지판만이 남아서 여기가 군사 분계선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컨대 남북의 군인들이 전방에서 매일 철통같이 순찰하고 정비하는 철조망은 휴전선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생된 남방 한계선임을 기억하자. DMZ 내부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JSA에서 근무하는 권총 든 헌병이라든가 GOP보다도 안의 GP 순찰병 정도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곳에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체력 좋고 사상이 확실하게 건전한 사람만을 엄격하게 가려서 뽑는다.

3. 끝으로, 민간인은 남방 한계선까지라도 선뜻 갈 수 있는 게 당연히 아니다. 남방 한계선보다 더 수 km 남쪽으로는 드디어 민통선이라고 불리는 민간인 통제선이 있다. 민통선은 무슨 남방 한계선처럼 전구간이 살벌한 철조망이 둘러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동차 도로는 마치 청와대 근처처럼 헌병 초소로 가로막혀 있으며,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

민통선 내부 구간을 방문하려면 사전에 방문 신청을 하고 군인들로부터 신원 확인을 받는 등 여러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도라산, 제진, 월정리 역은 바로 민통선 내부에 있는 철도역이다. 그래도 여기는 DMZ와는 달리, UN 관할이 아닌 엄연히 대한민국 영토인 건 맞다. 휴전 직후에는 민통선 구간이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무려 10~20km가까이나 떨어져 있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다시 북쪽으로 많이 올라갔다. 통제가 완화되었다는 뜻이다.

※ 별첨

우리나라에는 현충원 같은 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적군 묘지'도 있다. 스펀지 같은 데에 소개될 만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에 소재한 적군 묘지에는 6·25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죽은 북한군, 중공군, 무장공비, 테러범들이 묻혀 있다. 찾아와 줄 유족이 있을 리 없는데도!
1968년 김 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공비들,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 현희의 파트너(자살)까지 다 묻혀 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자세한 건 링크 참고.

제아무리 제네바 협약 같은 게 있다지만, 적군에게까지 이런 예를 갖추는 우리나라는 정말 인심 좋은 나라이다.
하긴, 해방 직후에 일본 민간인들이 권력을 잃고 본토로 쫓겨날 때도, 한국인들이 폭동· 약탈 하나 없이 고이 보내 줘서 걔네들이 무척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그런데 저 나쁜놈들은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으로 은혜를 끝까지 원수로 갚았고..)

그런데 더욱 경악할 만한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저 적군들은 그래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나름 자기네 나라로부터 명령을 수행하다가 순직/순국한 호국영령들이다. 미국의 경우, 자국 군인이 죽으면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유해를 찾아 오는 걸로 익히 유명하며, 한국도 나름 그 원칙을 수행하려 노력 중이다.

허나 북한은 한 번도 우리나라에 자국 병사의 유해 인도를 요청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다. 특히 각종 지저분한 테러 공작의 경우, 공작원의 시신 인도를 요청했다간 그 행위를 자기가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 절대로 안 한다.

인권이고 예우고 뭐시고 없는 북한 정권은, 이용 가치가 끝난 병사나 공작원은 자기네 인력이라도 철저히 무시하고 토사구팽하는가 보다. 남과 북이 사이가 좋던 시절에 판문점을 통해 쌀과 소와 관광객이 오고 가긴 했어도, 북한군 유해가 갔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996년의 강릉 잠수함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북한군의 유해는 북한으로 송환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자기들이 벌인 만행에 대해서 “유감 표명”까지 했을 정도로 예외적인 경우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03 08:18 2013/02/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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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다물 2013/02/12 14:06 # M/D Reply Permalink

    비무장지대는 말로만 비무장지대지 실제로는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
    일단 비무장 지대 안에GP라는 초소가 있고 그 안에서 무장을 하고 있습니다.(가끔 총기 사고가 났다는 기사도 뜨죠)

    그리고 수색대 사람들이 수시로 비무장지대를 들락날락합니다.
    그러니 'DMZ 내부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JSA에서 근무하는 권총 든 헌병 정도밖에 없다. 거기는 말 그대로 소총 든 병사는 애초에 법적으로 들어갈 수 없는 '비무장 지대'이니까..!'는 글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저도 철책에서 제대했어요.)

    1. 사무엘 2013/02/12 17:24 # M/D Permalink

      음, 글을 올린 지 꽤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정보 원천에 대해 기억이 안 나서 다시 리서치를 해 보니..
      제가 GP랑 GOP를 제대로 구분을 안 하고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저 본문은 개념적으로 GOP만을 중심으로 써진 셈이군요. GP는 DMZ 내부가 맞고, 그러니 명목상 군인이 아닌 민정 경찰 완장을 단 병사가 순찰을 하고..
      거기 구조는 확실히 생각보다 복잡한 형태인 것 같습니다. 경험자의 보충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2. 주의사신 2013/03/03 14:57 # M/D Reply Permalink

    제가 그 근처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관련 근황은 청카페에 보고했습니다.

    1. 사무엘 2013/03/04 04:40 # M/D Permalink

      와, 완전 최북단 최전방을 가셨군요. 구글어스에서 사진으로만 보던 그곳이라니..!
      저는 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100% 전적으로 바빠서.. 개인 홈페이지 말고 다른 커뮤니티들(기독교 계열 포함)에는 활동할 엄두를 못 내고 지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 글도 못 봤네요.
      휴가라도 나오신 줄 알았는데, 부대내에서 간간히 인터넷을 하신 것이고..

      그래도 형제님 정도면 제가 아무리 바쁘고 형제님이 험한 곳에 계시더라도 한 번 정도는 면회라도 가고 싶네요. 이럴 때 아니면 강원도 안보 관광을 언제 가겠습니까.
      형제님의 프로그래밍/성경 관련 글을 늘 그리워하며 지내 왔습니다. 소식 알려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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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2-1949).
뼛속까지 한국덕으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진심으로 사랑한 미국인으로 아주 유명한 분이다. 2013년 새해의 첫 글은 훈훈한 이야기로 시작하겠다. ㅎㅎ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는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 한국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에다 소개하고 한반도에 신식 학교를 세우는 등 수많은 좋은 일을 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구한말 시절부터 고종 황제를 보호하고 헤이그 밀사를 직접 선발하여 조선/대한 제국의 독립 승인을 위해 적극 애썼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뼈아픈 결정을 내린 사람이었다. 그가 그냥 국제 정세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탈하는 걸 승인했을 때, 헐버트는 자국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침탈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미국으로 쫓겨난 뒤에 본토에서도 이 승만, 서 재필 등의 독립 운동을 도와 줬다.

또한 그가 무엇보다도 감화되었던 것은 한글이다. 한글을 나흘 만에 깨우친 뒤 이게 보통 문자가 아니라는 걸 직감하였으며, 어렵고 비효율적인 문자인 한자를 버리고 온 국민이 한글로 지식을 깨우쳐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한글 정서법에도 띄어쓰기가 있는 게 좋겠다고 제안하여 서 재필이나 주 시경 같은 선각자들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우수한 자기네 고유 문자를 스스로 천대하다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이런 말을 미국인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여러 애국 단체들 중에서도 특별히 한글 학회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 의사조차도 일본 경찰로부터 심문을 받던 중에 어쩌다 헐버트 얘기가 나오자, 그는 “헐버트는 한국인이라면 단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될 민족의 은인이다”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다른 위인의 눈에 보기에도 헐버트는 큰 위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45년 해방이 ‘정의와 인도주의의 승리’라고 한국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나는 죽어서도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포 한강변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우리나라의 유명 독립 유공자들은 대체로 1960년대 초에 대대적으로 조사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반면, 이분은 아예 서거 이듬해인 1950년 3월 1일에 진작부터 이 승만 정부로부터 건국 공로 훈장 태극장이 추서되었다. 그가 어떤 계기로 그렇게 여러 나라들 중에 하필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다트머스 대학 출신이라고 하는데, old timer 프로그래머라면 기억하려나? BASIC 언어를 개발한 존 케메니와 토머스 커즈가 바로 이 대학의 교수이다. 그래서 베이직 언어의 여러 방언들 중에서 특별히 오리지널을 ‘다트머스 베이직’이라고 일컫는다. 한국인이라면 다트머스 대학이 헐버트의 모교이기도 하다는 걸 덩달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한편, 헐버트에 필적하는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 외국인으로는 캐나다인인 프랭크 스코필드(귀화명 석 호필)도 있다. 그는 의사이자 제암리 학살 사건 사진을 전세계에 보도한 기자이고, 서울 현충원에 묻혔다. 옛날에 스펀지에서 이 스코필드에 대해서 소개했었는데, 내용이 워낙 훈훈하다 보니 별 다섯 개를 당당히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헐버트는 스코필드에 비해서 인지도가 많이 뒤쳐지는 것 같다. 구한말 때는 열정적으로 한반도에서 활동했지만 정작 일제 강점기를 앞두고는 추방당해서 미국에서 지낼 수밖에 없어서 그런 듯.
그래서 작년 여름, 한글 새소식(한글 학회 월간지) 2012년 8월호(통권 480호)에서는 헐버트 박사 특집이 편성된 적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 이런 분도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01 08:21 2013/01/0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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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팥알 2013/01/01 21:51 # M/D Reply Permalink

    대한제국 시절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고종 황제의 특사로 헐버트라는 이름이 눈에 익을 것 같습니다. 저도 얼핏 이름만 알고 자세한 이력은 모르고 있었는데, 한국의 광복을 보고 돌아가셨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옛 한국이 기울어 갈 적에 한국을 위해 어려운 활동을 펼친 점 때문에 더욱 고마운 분이네요.

    1. 사무엘 2013/01/01 23:04 # M/D Permalink

      네, 고종 황제의 특사로만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우리가 알고 고마워해야 할 면모가 훨씬 더 많이 있는 인물입니다.
      저도 한글 학회 쪽 소식을 모니터링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넘어갈 뻔 했습니다.
      팥알 님, 올해 첫 댓글을 환영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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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과 경원선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양대 철도이며, 국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도이기도 하다.
전자는 개성과 평양을 경유하여 중국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평안북도의 신의주까지 가고, 후자는 6· 25 당시의 원산 폭격으로 유명한 동해 항구 도시인 함경남도 원산까지 간다.

분단 이후 이들 노선의 대한민국 관할 구간은 잘 알다시피 장거리 일반열차를 운행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너무 짧아졌다. 서울-인천보다는 길지만 서울-춘천보다는 짧은 어중간한 거리가 됐다.

그래서 이곳은 전통적으로 통근형 디젤 동차가 강세이다. 세월이 흘러서 전국 각지의 디젤 동차들은 죄다 무궁화호 RDC 내지 기관차-객차형 무궁화호로 바뀌거나 심지어 전동차로 바뀌었지만, 경의선과 경원선만은 우리나라에서 최후까지 CDC(통근형 디젤 동차)가 남아 있는 노선이다. 그래서 CDC를 시승하고 안보 관광까지 덤으로 하려는 철덕들에게 좋은 여행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통근열차가 통근용이 아니라 옛 명칭인 '통일호'나 다름없게 된 셈.

지난 2006년 말엔 의정부까지만 가던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무려 동두천과 소요산까지로 연장됐고, 2009년에는 회송 열차 트래픽으로 인해 금기의 영역이던 경의선에도 수도권 전철화의 손길이 뻗쳤다. 그래서 디젤 동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대부분의 구간이 전철화가 되어 버린 경의선의 CDC는 문산-도라산 사이의 4개역만 다니는 15분짜리 셔틀 열차로 전락했다. 마치 서울 지하철 2호선 용답-신설동 지선 열차처럼 됐다.

그 반면, 경원선은 비전철 구간이 경의선보다 더 길기 때문에, CDC가 다니는 역이 아직 9개이고 전구간 완주 시간도 46분가량이다. 동두천-소요산은 단선 전철로, CDC와 전동차가 공유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경의선과 경원선의 지리적 여건에 대해서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휴전선은 한반도의 서쪽으로 갈수록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고,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는 선형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쪽이 북한과 더 가까우며, 이런 이유로 인해 경의선이 경원선보다 더 짧다. 경원선의 연천군 구간은 경의선으로 치면 이미 북한 관할로 넘어간 개성과 장단 구간이다. 38선 시절에는 남한 관할이었지만, 6· 25 때는 북으로 빼앗겼기 때문.

경의선은 북한과 더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 대중 정권 시절에 철도가 연결되었으며 임진강 역 이북의 민통선 내부에 도라산 역이 생겼다. 덕분에 통일만 되면 경의선 열차를 타고 당장 북한으로 갈 수 있다. 전기 규격이 남과 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로 같은 게 없으니, 비록 전철은 직통 운행을 못 하겠지만 말이다. 당대의 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한 다른 행적이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철도가 연결됐다는 건 정치색을 배제하고 철덕의 순수한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경의선과 관련한 유물로는, 장단 역에 있던 증기 기관차 한 량이 6· 25 때 폭격을 당해서 총알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버려진 것이 잘 알다시피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서쪽에 경의선이 있다면 동쪽에는 동해북부선(강원도 고성군. 속초보다도 더욱 북쪽 완전 끝에 소재)이 옛날에 남북 관계가 좋던 시절에 연결되었다. 경의선의 도라산에 해당하는 동해북부선의 역이 바로 제진 역이다. 하지만 거기는 연계되는 간선 철도가 없으니 인지도와 효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말이다.

일제가 포항 이북으로 건설하려다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포항, 영덕, 울진, 삼척이 철도로 연결되고 지금 영동선의 지선으로 간주되는 삼척선이 당당히 동해선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이 공사는 일제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면서 중단되었다. 일제가 한반도에 건설하던 최후의 철도인 셈이다.

이러한 경의선이나 심지어 동해북부선과는 달리, 경원선은 남북 철도 복원 같은 논의가 없었다. 그래서 철원이나 월정리처럼 위치가 영 좋지 않던 역은 그렇잖아도 전쟁 때 역사와 선로가 파괴되기도 했는데 일찌감치 시설이 철거되었으며 철도가 끊어졌다. 도라산이나 제진 같은 민통선 허브역이 이 노선에는 없다.

이 부근에서 군생활을 한 분이라면 절대 잊어버리시지 않겠지만, 경의선에 임진강이 있다면 경원선에는 한탄강이 있다.
경원선의 종점인 신탄리 역의 이북에는 그 유명한 '철도 중단점 --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념비가 있었다. 그러나 코레일에서 신탄리보다도 더 북쪽에 '철마고지'라는 옛 철원 역과 비슷한 위상의 역을 신설하면서 그 기념비는 철거된 상태이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잔여 비전철 구간에는 1시간에 1대꼴로 CDC가 다닌다. 전철을 타다가 털털거리는 트럭 엔진 소리가 나는 CDC를 타 보면, 전철이 얼마나 조용하고 우아하게 달리는 아름다운 육상 교통수단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배차 간격이 저런 이유는 수요가 없어서라기보다도, 단선 철도에서 근본적으로 1시간에 1대보다 열차를 더 자주 투입하기란 도저히 무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당 지금 같은 운임으로 별도의 디젤 동차를 굴려서 코레일의 입장에서 이윤이 남는 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밑지는 장사를 일부러 공익 차원에서 해 주는 것이다. 분단 같은 국가적인 사정만 아니었으면 이런 열차는 진작에 없어졌거나 전철 형태로 마저 바뀌었을 것이다.

CDC의 운임은 수도권 통합 요금과 연동되지 않는다. 적자를 감수하고 운행하는 걸 아니 환승 할인은 안 해 줘도 좋은데, 티머니 교통 카드로 운임 지불이라도 좀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 우진 님 같은 분이 그걸 건의하신 적도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철도는 KTX의 개통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새마을-무궁화-통일호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콩라인 새마을호는 2010년대 중반까지 차량이 모조리 퇴역하여 차종 자체가 사라질 예정이고, 통일호는 명칭 자체는 진작에 없어져서 통근열차로 대체되었으며 이마저도 사라지는 중이다. 그 대신 기존 열차의 통념을 깨는 전동차들이 여럿 도입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을 향하고 있는 경의선과 경원선의 비전철 구간은 전동차, 코레일체 유리궁전 등 21세기의 모든 철도 트렌드에서 소외된 채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국토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지금까지 나쁜 불순분자들에 의해 본디 의도가 극도로 더렵혀지고 왜곡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궁극적으로 되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래도 한국어와 한글을 쓰는 사람끼리라도 최대한 뭉쳐야 살지 않겠냐 말이다.

금강산도 백두산도 보고 싶고 개마 고원에도 가고 싶고 압록강과 대동강과 두만강도 구경 가고 싶지 않은가? 의정부 역은 북쪽의 수원 역 같은 역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색과 성북 역은 서울 북부의 영등포 같은 큰 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의선과 경원선도 서울 시내 구간은 그야말로 2복선, 3복선급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김씨 왕조에 대한 잔재를 지우고 우리나라의 체제와 정체성을 유지한 통일(흠, 그럼 흡수 통일이네-_-)이 이뤄져, 철마가 북녘 '미수복 영토'까지 마음껏 달리는 날이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뤄지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28 08:32 2012/12/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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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2/31 22:38 # M/D Reply Permalink

    제 고향이, 경기도 파주의 문산이라는 작은 도시랍니다..
    문산에는 임진각이 있지요..
    그곳은 어릴적부터 자주 방문했기에..
    오래된 기억속에서도 생생히 기억나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글과 함께 녹슨 철로와 잘린 기차..
    어릴적에 3 .8 선 가까이에도 갈수 있었고
    민통선에도 패스카드가 있기에 자주 갈수 있었지요..
    지금은,부모님께서 사시기에 패스카드로 들어가지요..
    아직은 위험한 장소가 곳곳에 있기에(지뢰)
    지금도 늘 경계하고 조심하지요..
    어릴적 기억에 지뢰 때문에 한쪽 발을 잃은 분들도 많이 알고 있었지요..
    분단의 아픔이고 전쟁의 상처지요..
    늦은 저녁 해질 무렵에..
    임진강가에서 아빠와 낚시를 할때..
    강건너 저편 위에서 북한 군의 소리도 들을 수 있었고..
    새벽 기도를 갈때..
    웅웅 거리는 방송 소리도 자주 들었지요..북한에서 보내는 대남 방송..ㅎㅎ
    위대하신 지도자~~~ 김땡땡~~~
    ㅎㅎ
    잠시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녹슨 철로를 생각하면서
    저의 기억을 들추어 보았어요..
    ^^

    1. 사무엘 2013/01/01 11:44 # M/D Permalink

      우와, 그럼 거의 대성동까지도 구경해 보셨거나 거기서 사셨나요?
      계속해서 더욱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네요. 수인선에 이어 경의선까지, 철도 얘기에서 공통 관심사가 등장하니 저도 반갑습니다.

  2. 2013/01/01 12:03 # M/D Reply Permalink

    패스카드가 있으면 군 검열시에 주민등록증을 잠시 맡기고 들어가지요..
    군내면..장단.. 연천..이쪽도 자주 다녀요..
    ㅎㅎ
    언제 날 풀리면 저희 가족과 함께 우리나라 국토의 단절된 부분을 여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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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95 이전에 전세계를 석권하며 가장 성공한 운영체제(?)로 평가받았던 최후의 16비트 버전 윈도우는 바로 1992년에 출시된 3.1이다. 물음표가 붙은 이유는 물론 이 물건이 홀로 부팅 가능한 완전한 형태의 운영체제는 아니었기 때문.

그런데 그 3.1이 있기 전에는 3.0 버전이 있었다. 3.1이 너무 히트를 쳤기 때문에 존재감이 무척 덜해졌지만, 영미권에서는 1990년에 출시된 윈도우 3.0이 먼저 대박을 터뜨렸다. 시스템 폰트가 밋밋한 불변폭 Fixedsys이다가 가변폭으로 최초로 바뀌었으며, 흰 바탕 윈도우에다가 버튼에 최초로 은색 3D 효과가 추가되었다.

윈도우 3.0은 한글화가 된 최초의 버전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2.0이던가 2.x는 한국 지사를 통해 국내에 최초로 소개된 버전이고, 3.0은 한글화까지 된 버전 되시겠다.

한글 윈도우 3.0과 한글 윈도우 3.1은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난다. 영문 윈도우 오리지널 3.0과 3.1 사이의 차이와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 그래서 이 점에 대해서 글을 좀 남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한 윈도우도 3.1이 아니라 3.0이다. 20여 년 전, 우리집 컴은 겨우 286 AT인데 이웃집 형의 컴퓨터는 386이고 아래아한글 2.0 전문용으로 화려한 윤곽선 글꼴을 찍어 내고 있었으며, Windows라는 꿈의 GUI 환경도 구동하고 있었다니, 초등학생 꼬마이던 본인은 감수성이 자극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록달록한 아이콘과 컬러 그림들!

그때 처음 본 것은 3.1이 아니라 분명 3.0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글 윈도우 3.0의 부팅 스플래시 화면이다. 영문 원판과 마찬가지로 어두운 파란 배경이며, copyright이라든가 Microsoft까지 전부 우리말로 번역이나 음차를 해서 한글로 표기했음을 알 수 있다. 저작권 경고문은 영문 원판의 스플래시 화면에는 없는데 한글판에서만 새로 추가되었다.

파란 배색 때문에 나는 윈도우 3.0의 부팅 화면과, 한메 타자 교사의 시작 화면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여러분도 동감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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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 부팅 스플래시는 3.0의 것보다야 훨씬 더 유명하니,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손으로 그린 듯한 저 동글동글한 한글 서체가 인상적이다. 3.1에서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수 있다. 3.11은 한글화되지 않았으며, 95부터 MS는 제품명은 세계 어디서나 무조건 영문 원형 그대로 표기해 오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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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3.0을 구동한 화면이다. 한글판은 한옥 문 무늬를 연상케 하는 mun.bmp가 설치 직후에 기본 배경 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영문판은 당연히 그렇지 않음. 3.1은 프로그램 제목 표시줄의 배경색이 그냥 어두운 군청색인 반면, 3.0은 옅은 파랑이고 무엇보다도 solid color가 아니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프로그램 아이콘은 완전히 모노크롬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회색 톤이 짙어서 채도가 낮다. 좋게 말하면 차분하고 가라앉은 느낌을 주고, 나쁘게 말하면 칙칙하다. 오로지 그래픽 에디터인 그림판만이 3.1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고채도 색상의 아이콘인 듯.
3.1은 메뉴의 배경색이 프로그램 제목 표시줄의 배경색과 동일하게 군청색이지만, 3.0은 검정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떠나서, 3.0 한글판의 한글 서체는 3.1 한글판의 한글 서체보다 훨씬 더 못생기고 허접해 보인다는 걸 알 수 있다.
뭐, 한글뿐만 아니라 영문 서체도 엄청 엉성하다. 영문 윈도우 3.0의 영문 서체는 3.1의 그것과 동일하지만 한글 윈도우 3.0의 영문 서체는 그렇지 않다. 3.1에 가서야 일치가 이뤄졌다.

메뉴 단축키가 영문이 아니라 한글인 게 인상적인데, 이건 제어판에서 설정을 바꾸면 된다. 한글 윈도우 3.0과 3.1은 메뉴 단축키를 한글로 바꾸는 특이한 옵션이 존재했었다. 파일 메뉴가 ㅍ에 배당되어 있으니, 두벌식 기준으로 Alt+V를 누르면 되는 식이다. 이런 옵션은 윈도우 95 이후부터는 물론 완전히 사라졌으며, 결코 다시 도입되지 않았다. 일종의 흑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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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한글 윈도우의 한글 서체 이름은 처음부터 바탕, 돋움이 아니었다. 한글화 첫 버전인 윈도우 3.0에서의 명칭은 아직 명조와 고딕이었다. 개인적으로 굉장히 놀랐다. 엄청 옛날에는 MS에서 조합형 코드를 사용한 한글 도스를 만들기도 했다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느낌이다. 궁서와 굴림은 아직 있지도 않았고 겨우 2종.

윈도우 3.0은 아직 트루타입 글꼴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New가 붙은 Courier New나 Times New Roman 같은 서체도 없었고, 글꼴 대화상자에 보다시피 볼드/이탤릭 옵션 같은 것도 없다.

한글 윈도우 3.0은 트루타입 글꼴 기술이 영문 윈도우 3.1보다 먼저 도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운영체제가 기본 제공하는 글꼴이 윤곽선 트루타입 글꼴은 아니었다. 여전히 비트맵이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 드디어 한글 IME 도구모음줄이 보이시는가? 이것이 한국 마이크로소프트가 최초로 개발한 윈도우용 한글 IME이다. 저 도구모음줄은 드래그로 위치 이동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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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더욱 놀라게 만든 건 도움말.
한글 윈도우 3.1과 한글 윈도우 95 초창기 제품들은 도움말이 해라체, 즉 반말이다. 그러나 한글 윈도우 3.0의 프로그램들의 도움말은 합쇼체, 즉 존댓말이다!
반말 도움말이 다시 존댓말로 복귀한 건 IE 4.0이 나오던 시기인 1997년쯤부터이다.

게다가 저 도트 노가다 이미지로 급조해 넣은 색인, 뒤로, 훑어보기 등의 버튼들은 도대체 뭐냐! 하긴, 영문 원판도 3.0은 저 버튼들이 이미지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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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조합 중일 때는 비록 에디트 컨트롤처럼 기술적으로 IME-aware인 환경이라 할지라도 화면 하단에 조합 중인 글자(저기서는 ‘짝’)가 따로 또 뜨곤 했다. 이것이 3.1에서는 개선되었고, 윈도우 95에서는 조합 중일 때 커서가 네모 깜빡이로 변하는 수준까지 발전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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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3.1 이래로 지금까지 운영체제의 기본 게임 중에서는 지뢰찾기가 지존의 폐인 양성 게임에 등극해 있지만, 1.0부터 3.0까지는 일명 오델로라고도 불리는 리버시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임과 마찬가지로 굳이 한글판에만 적용되는 차이는 아니겠지만..
윈도우 운영체제가 기본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은 About 대화상자가 원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다. 동일한 ShellAbout 함수에다가 아이콘과 프로그램명만 달리해서 호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운영체제가 기본으로 제공하는 About 대화상자는 프로그램의 이름, 운영체제의 이름과 버전, 남은 메모리와 리소스, 사용자와 제품 번호 같은 걸 보여준다.

하지만 윈도우 3.0은 프로그램 관리자, 파일 관리자, 제어판 같은 관리 성격이 강한 프로그램만이 공용 About을 쓰고, 메모장이나 문서작성기 같은 보조 프로그램들은 자기네 약식 About 대화상자를 출력하고 있다.

윈도우 3.0과 3.1 사이에는 생각보다 차이가 많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23 08:39 2012/12/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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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 2012/12/23 15:09 # M/D Reply Permalink

    저는 3.0과 3.1의 용량 차이가 세 배쯤 되었다는 것이 가장 먼저 기억나네요. (각각 6, 18메가 정도) 386 시절이라 3.0에 비해 3.1은 꽤 무겁게 돌아갔고요. 도스에 비해 윈도의 장점을 별로 못 느껴서 곧 지웠고 결국 윈도를 주로 쓰게 된 것은 98 시절이었어요

    1. 사무엘 2012/12/24 02:33 # M/D Permalink

      우와, 그 크기는 둘 다 한글판 기준인가요?
      한글판이라면 일단 서체 크기만으로도 10여 MB 정도의 차이는 충분히 그냥 먹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
      윤곽선 글꼴 한글 4종 + 한자 2종인 반면, 3.0은 그저 비트맵 한글/한자 글꼴 2종..

      여러 모로 3.0과 3.1의 차이는 윈95 (OSR2말고, FAT32고 USB고 다 지원 안 하던 진짜 초창기)와 윈98 SE급의 차이는 되는 것 같습니다. 하긴, 3.0 때는 아직 OLE도 없었죠 아마?

    2. 김진 2012/12/25 16:10 # M/D Permalink

      3.1은 확실하고 3.0도 아마 한글판이었을 겁니다. 3.0은 초등학생이던 옆집 동생네서 깔아봤거든요. 요즘처럼 초등학교에서 영어 하던 시대가 아니니 영문판은 엄두도 못 냈죠. 당시 제 하드가 80메가인데 3.1 깔아 보니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지뢰찾기 등만 좀 해 보고 지웠어요. 아마 3.1 쓰던 분들은 주로 486 쓰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진짜 3.1용 프로그램을 써 본 것은 대학생때 물리학 수업 실습실에서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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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말 하기가 왜 이리 힘든지!

1. 선을 악이라, 악을 선이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세상을 30년 가까이 살면서 가끔은 내 모습에 내 스스로 좀 놀랄 때가 있다. 그 면모 중 하나는, 내가 어쩌다가 사상이 6· 25를 겪은 중장년 어르신 급으로 친체제 우성향이 강해졌나 하는 것이다. 부모님하고도 정치 얘기로 다툴 일 없고, 심지어 교회 내 몇몇 어르신들하고도 아주 친하고.. ㅎㅎ

난 사회 구조 적응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적성이나 진로만 보면 절대로 친체제 쪽으로 갈 수가 없는 성향이다. 의사, 변호사 같은 기득권층 직업도 아니고(그리고 사실 요즘은 그런 직업 종사자 중에도 오히려 좌성향 많다) 상위 0.1% 이내에 드는 부자도 아닌데 도대체 내가 누구 좋으라고,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인터넷 네티즌들의 대부분이 좋아하지 않는 사회관· 정치관을 피력하는 것일까?

이미 몇 차례 수위 센 글을 통해 밝혔듯이, 본인은 “우리나라 현대사의 거의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이 쳐죽일 놈의) 북한 때문이다”에 아주 강력한 뿌리를 두고 사회관, 국가관, 역사관, 정치관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본인은 교회사를 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맥락으로 우리나라 현대사를 본다.

옛날에는 악의 세력들이 성경을 찢고 빼앗고 불태웠지만, 이제 성경을 물리적으로 없앨 수 없어졌으니 성경 자체를 변개하고 물먹이고 있다. 오늘날은 기독교를 무력과 박해로 없앨 수 없으니, 이제 기독교 자체를 교리적으로 변질시키고 정체성을 흐려 놓고 있다.

그것과 동일하다. 이북의 저 사악한 무리들은 이제 우리나라를 무력 침략으로 무너뜨릴 수 없으니 동일한 책략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네 사정이 워낙 막장이 되어서 positive를 할 수 없으니, 반대로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을 동원해서 우리나라를 정신적으로 까내린다.

그래서 북한에 비해서는 새발의 피도 안 될 몇몇 극소수 인권 침해나 부조리, 그리고 피아 식별도 제대로 안 되던 정말 어지러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공산화를 막느라 어쩔 수 없이 과거에 벌어졌던 비극만 자꾸 들춘다. 그 과정에서 앞뒤 문맥 떼어내고 닥치고 남한의 공권력만 나쁜놈으로 만든다. 무슨 되도 않은 친일 공화국 이러면서 우리나라가 아주 더럽고 나쁘게 시작했고 생기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는 식으로 몰고 간다.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안 했으면, 결국 우리나라는 북한 치하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도!

그러나 잘 들어라. 한반도가 통일이 안 되고 있는 이유는 100% 절대적으로 김씨 부자가 자기 체제를 유지하려고 주민들에게 자유를 안 주고 국가를 개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통일은커녕 북한과 외국으로서의 왕래도 자유롭게 안 되고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북한 수뇌부 때문이지 무슨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세 때문이 아니다. 내 홈페이지의 방문자라면 이 당연한 사실을 절대로 헷갈리지 말기 바란다.

분단이나 6·25의 책임도 절대적으로 소련에게 빌붙은 기회주의자 김 일성 이래로 북한 수뇌부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분단은 기독교로 치면 교리로 인한 분리와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이게 무슨 남북 공동의 책임이거나 남한 이 승만 정부의 잘못이란 말인가!

난 저런 식의 개념 없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기분이 상하고 불쾌하고 싫다. 나도 이 나라에서 '높으신 분'들이 하는 게 다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저런 인간들의 붉은 선동으로부터는 내 나라의 체제를 꼭 지켜야겠다는 굳은 결의를 하게 된다.
외국에 나가 보면 애국자가 된다고 그러던가? 난 정말 애국자가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인터넷 SNS에서 나도는 좌경화 얘기들을 보면 기분이 급 우울해지고, 애국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어지는 것 같다..

북한은 어디 무슨 친일 청산 제대로 한 줄 아나? 한 번만 더 말하겠다. 걔들이 건국 초기에 자꾸 무력으로 시비를 거니까 일제에 협력했던 경찰과 군 간부가 자꾸 다시 필요해지면서 친일 청산을 다 무마시켰다. 일본군 장교 출신 박 정희도, 김 구의 암살범 안 두희도 다 그것 덕분에 6·25 전쟁 때 사면· 복권된 거 모르나?

난 북한 때문에 우리나라에 국가보안법이라든가 일부 자유의 제약이 존재하는 것도 적극 이해하며 국가의 정책에 호응한다. 독일에서 철십자가나 나치식 경례가 절대 금지되어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경우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국민을 온통 억압하는 선군정치 병영 독재 국가와, 국가 체제가 개방된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서로 적대 관계로 이웃해 있는데, 둘이 인구와 국력이 비슷하다면 같은 조건에서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키기 더 쉬울 것이며, 상대방에게 간첩 보내고 유언비어, 거짓 선동을 퍼뜨리기가 어느 쪽이 더 유리하겠는가!

나의 이런 일관된 사고방식은 누가 험담하듯이 정교 일치 사고방식 때문이 절대 아니며, '수꼴' 기질의 어르신들의 영향을 받은 것도 절대 아니다. 가정이나 교회의 주변의 어느 누구도 내 정치관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나도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호주제, 국가보안법이 뭔지도 모르고 정치의 '정'짜도 모르던 평범한 정치 무관심형 청년이었다. 그런데 좀 적당하게 속여야 속아 주지, 정말 성경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한눈에 봐도 치우침이 심하고, 자기보다 뛰어난 위인에 대한 능멸과 국가 정체성 부정이 가히 도를 넘어서는 수준이니, 정이 확 달아나고 나는 나만의 색깔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논리의 완전성(completeness)을 위해, 현실성을 제끼고 만에 하나 극한,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이 세상이 완전히 '좌빨'이 말하는 나쁜 시나리오대로 됐다고 치자. 그래 봤자 배부르는 건 재벌? 친일파? 일본? 미국? 이런 데밖에 없다. 나는 최악의 경우 거지가 될 수는 있어도, 그들이 나를 강제로 정치범 수용소에 집어넣거나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날 고문하고 때리고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수꼴'이 말하는 나쁜 시나리오대로 되면..? ㅉㅉㅉ
이 세상엔 더 잃을 게 없어서 세상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회 구조 비관하고 통치자 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나, 나는 우리나라가 망하면 잃을 게 많은 사람임을 밝힌다. 예수 믿을 자유, <날개셋> 한글 입력기 만들 자유, 철도 오덕질 할 자유 등!

정말, 진심으로 말한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하나라도 없어졌거나 핵무기 시설이 폐쇄됐거나, 대남 적화 기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거나, 북한에 사상과 종교의 자유가 찾아왔거나, 평양 이외의 지역 출신인 탈북자의 증언이 바뀌었다거나 하면 난 이런 강경한 정치관을 언제라도 철회하겠다. 김 대중, 노 무현 욕하던 것도 다 취소하고 고인에 대해 막말한 게 있다면 사과하겠다. 햇볕정책이 성공적인 구석이 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돈이 한두 푼이 들어간 게 아닌 일을 밀어붙여서 지금까지 북이 바뀐 게 무엇이며, 이뤄진 게 도대체 뭔가? '선한 열매'가 도대체 뭐가 있는지 내게 설명할 수 있으신 분?

이걸 비판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비판해야 하겠나? 박 정희의 경제 개발을 정말 집요하게 파헤치고 폄하· 비하하는 그 근성의 10%만 여기에 좀 균형 있게 기울여 주면 어디 덧나나?
그런 팩트에는 귀를 꽉 닫고 오로지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 욕밖에 할 줄 모르면, 그건 나랑은 인연 끊고 의사소통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지 내가 무슨 해석을 더 할 수 있겠는가?

나도 한때는 남북이 계속 사이가 나빠야 자기 배가 부를 '안보 장사꾼' 집단에 대한 생각도 다 해 봤다. 북한도 남한을 사실은 호의적으로 보고 있었고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평화와 공존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그 진심이 외세 같은 다른 악의 배후에 의해 왜곡되어 감정 대립을 고조시켰다는 식의 주장.

그런데 최대한 선하게 봐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정황상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헌법을 보나, 하는 짓거리를 보나, 탈북자의 증언을 보나, 역대 대남 적화 지령들을 보나!

이제는 정말 일본군 장교 출신이 대통령이 됐다는 사실보다는, 탈북자보고 변절자라고 부르는 종북 매국노가 버젓이 정계에 올라 있는 사실에 훨씬 더 분개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주적을 주적이라 하지 않고 남침을 남침이라 하지 않고, 학살자를 학살자라 하지 않으며, 우리가 계속 갖다 바치기만 하면 북한은 언젠가 변할 거라고 거짓 평화를 외치는 정치인이 버젓이 활보하는데 왜 경각심을 갖는 사람이 없을까?

도대체 이 승만· 박 정희가 아무리 재임 중에 부패하고 잘못을 저지른 게 있기로서니, 그들이 그런 종북 인사들을 능가할 정도로 죄를 지은, 김 일성· 히틀러· 스탈린 급의 반역자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오로지 독재자의 딸(별로 나쁜 독재자도 아니었더구만)만 이유를 불문하고 낙선시키면 되지, 학살자를 학살자라 하지 않고 적을 적이라 하지 않으며 남침을 남침이라 하지 않는 인간이 대통령이 되는 건 아무 상관 없는가? 부정부패 병크, 도덕성 막장은 어디 반대편 진영엔 없는 줄 아는가?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다)

저게 무슨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며 사람 먼저인 사회인가? 저기서 사람이란 김씨 왕조를 뜻하는가 보다? 그 후보가 말하는 안보/대북 정책은 내가 보아하니 북한이 남한에 아무 군사 위협이 되지 않으면서 그냥 무슨 아프리카 국가처럼 평범하게 빈곤한 국가일 때나 말이 되고 성립하는 것들이다.

난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이 당선되는 걸 원치 않는 게 아니다.
단지 우리나라 체제를 증오하는 반역자가 정권을 잡는 걸 원치 않을 뿐이다.
밑 빠진 독에다 물 붓듯이 또다시 북에다 일방적으로 퍼 주던 시절, 미군 철수와 국가 보안법 폐지, 연방제 통일이 논의되던 시절로는 정말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정말로..

북한에서 '리명박 역적패당' 이러면서 쥐새끼 얼굴을 과녁으로 그려 놓고 사격 훈련을 하는 걸 보니,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 명박 대통령이 막장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최소한의 국가관을 갖추었고 대북 정책은 지금까지 정말 훌륭하게 잘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대통령도 제발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2. 북한사의 불편한 진실, 황해 제철소 노동자 학살 사건

지금으로부터 15년쯤 전인 1998년에 황해도 송림시에서 벌어진 황해 제철소 노동자 학살 사건은 북한에서 우리나라 같은 무슨 노동자의 인권을 위한 시위· 봉기가 일어났다간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아래의 링크를 클릭하거나 인터넷을 직접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http://news.donga.com/3/all/20110121/34273324/1

참고로 송림시는 황해도의 북쪽(북한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의 북서쪽), 그리고 평양의 서남부에 있는 작은 위성도시이다. 제철소 하나가 여기 주민들 대부분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1) 제철소가 거의 유일한 밥줄인 이곳에서 1990년대 후반의 식량난과 경제난 때문에 전기가 끊기고 기계 가동이 중단되고 식량 배급도 중단되었다. 노동자와 그들 가족은 다 굶어 죽게 생겼다. “장비를 정지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 이 때문에 참다 못한 일부 근로자는 고철이 된 제철소의 장비와 철 자재들을 중국에 몰래 팔아서 목숨을 부지하려 했으며, 아예 몇몇 “착한” 간부들이 조직적으로 이 일을 주선하여 철자재를 중국에다 팔아서 강냉이로 바꿔 와서 자기네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려 했다.

(3) 그래서 이건 위에다가는 절대 비밀로 하고 중국과 비밀 거래에까지 성공했는데, 강냉이를 실은 배가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간부들은 내부 밀고자로부터 신고를 받은 비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그들은 극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 재산 유출+반역 혐의로 현장에서 공개 총살을 당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냐 하면 그렇지 않다.
자기 배 속을 챙기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노력하다가 간부들이 저 지경이 된 건데, 노동자들이 그 공개 처형에 호응을 해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제철소에 전기 공급을 못 해 주고 노동자들을 굶긴 건 전적으로 국가 책임이지 않은가.

심지어는 노동자가 아니라 김 일성 측근 기득권 계층이던 어느 중년의 간호사조차도 양심적으로 이건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공개적으로 항변을 하다가 곧바로 구타와 총살을 당했다. 김 정일 정권은 기근 속에서 국가 기강이 흔들리고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오로지 폭력과 공포, 위협만을 선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송림시의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은 근무를 거부하고(어차피 기계가 안 돌아가니 할 일도 없지 않나?) 북한에서 보기 드물게 파업과 농성을 결의했다. 이제 더 잃을 게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끔찍한 피의 비극을 부르고 말았다. 북한 정부는 아예 탱크까지 동반된 군대를 파견하여 작은 송림시 마을 전체를 군인들로 에워싸고, 부동자세로 앉아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말 그대로 탱크의 무한궤도로 밀어 버렸다. 수십 톤짜리 탱크에 깔려서 짓이겨진 피범벅 시신과, 잘려 나간 팔다리들.. 까지만 말하겠다. 시위에 가담했던 노동자의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무슨 신세가 됐을지 역시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고.

1998년 여름이면 김 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이제 막 북으로 소와 쌀이 가던 시절이다. 그때 평양 근처에서는 저런 학살극이 벌어진 것이다. 문득 <작은 하마 이야기>가 떠오른다. “씨X 누구든 당에 개겼다가는 X되는 거예요. 아주 X되는 거야.”

생각을 해 보아라!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데 생생한 사진도, 현란한 CG도, 화가가 그린 그럴싸한 상상도도 없이 오로지 연필 스케치 그림만으로 뉴스에 묘사되는 장면치고 뭐 좋은 장면이 있던가? 파륜궁 수련자에 대한 고문 장면, 어린애가 회상하는 성폭행범의 모습, 그리고 탈북자가 회상하는 북한 정치범 수용소나 저런 학살극 모습처럼, 하나같이 사진을 남길 수조차 없고 CG로 재연하기는 너무 민망한 인권 유린 장면이다.

그림의 예 보기(혐짤 주의!)


이 엄청난 사건이 포털 사이트에는 알맹이는 쏙 다 빠진 채 완전히 왜곡되어 너무 평화롭게 소개되어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83&docId=74337&mobile&categoryId=83

북한에 왜 시위, 봉기, 혁명이 없는지 이유를 아시겠는가?
일단 일어나도 언론 매체에 보도도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목격자나 당사자는 대부분 수용소로 끌려가서 살아 나오질 못하니 소식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도 크다.

그리고 “굶주림, 폭력, 팀웍 해체를 위한 이간질(밀고, 배신)”이라는 3박자 시스템에는 당할 장사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저 글에만 해도 읽고 보면 아시겠지만 3박자가 골고루 들어가 있다.

강냉이 한 그릇에 남자는 동료를 밀고하고 여자는 간부에게 몸을 줄 정도로 사람을 육체와 멘탈까지 철저히 붕괴시키는 곳이 바로 생지옥 북한이다. 저런 곳의 실상을 알게 되면, 멘붕이란 말을 우리나라에서 장난으로는 선뜻 못 쓸 것이다. 과거 6· 25는 북녘 땅으로도 모자라 남한까지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김씨 정권의 마귀적인 야욕을 막으려 한 처절한 전쟁이었던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14 09:35 2012/12/1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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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크몬드 2012/12/17 23:54 # M/D Reply Permalink

    아직도 역사를 잘 모르는 부분이 많네요.. 우리 모두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바른 역사관을 가지는 것이 급선무인 것 같습니다.

    1. 사무엘 2012/12/18 09:44 # M/D Permalink

      민감하고 심각한 내용의 글을 오해 없이 글쓴이의 진의를 파악하며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단언하는데 종북을 논하지 않고 친일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편파적으로 이 나라의 역사를 폄하하고 왜곡하고 체제를 부정하고, 그 편파적인 역사관을 자기 혼자만 알고 지내는 게 아니라 순진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퍼뜨리고 선동하는 사람들은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반론과 반박을 읽어 보았고, 최대한 열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논리를 펴는 반면
      정치가 낀 얘기는 제 경험상 정말 그냥, 닥치고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자기가 관심이 없는 쪽으로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귀가 열리질 않습니다. 뭐, 그렇게만 해도 최소한 자기가 지지는 않을 테니.
      논리도, 감정도 안 통하면.. 서로 말을 안 꺼내는 것밖에 답이 없지요.

  2. 흠. 2012/12/22 00:15 # M/D Reply Permalink

    ㅎㅎ

    아까 민감한 글이라고 써주셔서... 이글을 찾아보고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당파이고, 진보도 좋아하고 보수도 좋아하는?? 이상한 사람인데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애국" 둘다 애국자라고 생각하거든요.

    목숨걸고.... 새누리를 비판하는..나꼼수... 이번에 박근혜 당선자를 엄청나게 비판한 표창원 교수.

    이명박 정권을 비난하는 여러 기자들. 언론인.. 일명 진보 좌파 세력들... 뭐 당연히 문제도 많은 사람들이지만.

    전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 애국자" 라고 생각하거든요.

    보수분들 중에... 빨갱이 왜치시는 분들 .. 좋아합니다.. 애국자분들이거든요..

    ..

    저는 통합의 길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통 분모가 있거든요... "애국"입니다...


    애국하시는 분들은 다 좋습니다... ㅎㅎ

  3. 흠. 2012/12/22 00:44 # M/D Reply Permalink

    전 이번에는.. 기호2번에 투표했습니다. 저는 무당파라서.... 투표할때다마 성향이 바뀌는데요.

    친일이 싫다기 보다.... 그동안 이명박 정권을 비판했던... 언론인, 예술인, 지식인들을 보호하고 싶었거든요.

    목숨걸고, 애국하시는 분들이라 생각되어서.... 과거는, 전진하기 위한 동력이 되어야지 걸림돌이 되어선 안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 미래를 위해 과거를 참고하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원론적인 견해지만

    이런말 할때마다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는 것은.... 과거에 큰 희생을 한분들에게 너무 뻔뻔한 말이라.....

    너무 죄송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 판단을 하기에도 제 지식은 너무나 부족하구요.

  4. 흠. 2012/12/22 03:23 # M/D Reply Permalink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66566.html

    댓글 도배죄송하구요... 댓글 지워주셔도 좋습니다. 한겨레 글이긴 하지만....

    꼭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저는 분명한 중도, 무당파입니다. 요즘은 약간 좌편향이긴 한데,
    아마 또 바뀔 사람입니다... 한번 보시고 좌향하라고 드리는 말씀은 절대 아니고, 그냥 한번
    시간나실때 편하게 그냥 아무 편견 없이 한번 보셨으면 합니다.

    1. 사무엘 2012/12/22 14:06 # M/D Permalink

      의견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과거에 먼저 집착한 진영은 반대편 진영이지 제가 아닙니다.
      저는 똑같이 일본이나 북한이나 과거에 우리에게 해를 끼친 나쁜 놈이고, 실력으로 그들을 이기면 된다는 정도의 생각만 했습니다.
      그랬지만 그들이 먼저 훨씬 더 심하게 과거사에 집착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날조하고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더군요. 그래서 저 역시 반격을 하는 차원에서 북한의 진실을 폭로하는 글을 올렸을 뿐입니다. 그것만 아니면 저도 얼마든지 '미래지향'입니다.. ^^

      표 창원 교수의 행보는 꽤 의외이더군요. 좀 더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선한 열매가 있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믿을 만한 '백'이 있으니 교수 자리도 선뜻 내놓을 수 있었던 거겠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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