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해서

1. 현재의 사회 풍경에서 인상적인 것

-- 체제가 안정적이다. 1947년 이래로 헌법이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으며, 공포되고 시행된 날이 둘 모두 공휴일인 게 대단하다. 그 전쟁 와중에도 화폐개혁이 20세기 이래로 없었던 거, 춘분과 추분이 공휴일인 것 역시 인상적이다.

-- 전철역 승강장에 스크린도어가 별로 없다.
-- 버스를 우리나라와는 정반대로 뒤에서 타서 앞에서 내리기도 한다. 요금이 후불인데, 승무원이 앞문 쪽에 있기 때문이다.
-- 별의별 물건을 파는 자판기가 많고, 편의점 잡화점도 아주 발달해 있다.
-- 물건에 가격은 언제나 2개가 표시되어 있다. (면세 할인 적용 여부)

-- 우리나라보다는 현금 사용이 여전히 더 활발하다. 하긴, 현금에 대한 가중치가 일본 > 한국 > 중국의 순인 듯하다. 중국은 위조지폐 문제도 있고 해서 한국보다도 더 현금 퇴출에 진심이라는데.. 거지가 동냥을 해도 계좌 QR코드를 목에 걸어 놓고 할 정도랜다.;;;
-- 학교에 수영장이 있고, 초딩들은 꼭 동그랗고 노란 모자를 쓰고 다닌다. 이것도 국가 차원에서 지급되는 학용품인지?

2. 문자

-- 한국과 중국에서는 진작에 사라지고 없는 세로쓰기가 일본에서는 여전히 현역이고 활발히 쓰인다.
-- 둥근고딕(굴림/디나루 세나루)에 정말 진심이다. 똑같은 한자라도 이 폰트로 쓰인 것만 봐도 바로 일본이 떠오를 정도이다.
하지만 이 폰트는 종전 후에 개발되고 보급됐다는 게 매우 놀랍다. 즉, 일제 시대까지만 해도 지금 우리가 아는 둥근고딕 일본어 문구 같은 건 없었다. 아니, 그때는 지금 같은 신자체 한자가 없었고 히라가나 위주의 정서법조차 없었으니 그때와 지금은 문자의 이질감이 매우 심하다.

-- 히라가나가 문자 차원에서 획이 붓글씨 계열 디자인이어서 그런지.. 일본에서는 한자가 궁서 붓글씨 폰트로 쓰인 건 보기 힘들다. 한자 궁서체는 중국에서 활발히 쓰인다.

3. 언어

-- 독일어는 Gift가 독 poison이라는 뜻이고 hell이 ‘밝은’이라는 뜻이라는데... 일본어는 hi가 잘 알다시피 '옙~ 넷!' 이런 뜻이다. 하이~!! 그래서 쟤들은 간단한 영어 인사도 hi 대신 hello를 더 선호한다고 한다. (전화 받을 때는 영어로 hello이지만 일본어는 '무시무시'~)
영화 킬 빌에서 일본 여고생 킬러인 ‘고고 유바리’가 주인공에게 의외로 “hi~~” 이렇게 인사하던 게 인상적이었다. ㄲㄲㄲㄲ

-- 일본어 소리를 한글로 표기할 때는 도요타/토요타, 가타카나처럼 유음· 탁음이 늘 헷갈리고 tsu 소리는 츠/쓰가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늘 난립하는 것 같다.
す는 일본 현지인도 모음을 길게 발음해서 '스~' 이러거나, 아니면 진짜 영어 S처럼 들릴락말락 짤막하게 '스'로 발음하거나.. 둘 다 케바케인 듯하다.

-- 영어에서 스펠링 gh의 발음이 제멋대로라면, 일본어에서는 날 생 生의 발음이 그렇게도 제멋대로 제각각이라고 그런다.;; 한국어에서는 ㅢ가 발음이 굉장히 제멋대로 불안정한 모음으로 전락하긴 했다만, 그래도 쟤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을까.

-- 지브리(Gibli), 휴렛(Hewlett) 패커드, 모토로라(Motorola) 같은 예를 생각해 보면, 우리는 외국 고유명사에서 L 소리를 덜 반영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일본어의 영향인 걸까..??
뭐, '겨우내(겨울)'. '홍도야 우지 마라' 처럼 우리말에도 자체적인 ㄹ 음운 생략이 있긴 하지만 저건 좀 다른 경우인 것 같다.

4. 건축과 인테리어 스타일

-- 일본은 옛날 목조건물들도 우리나라의 옛날 건물보다 층수가 더 많고 더 "높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목조건물들은 기둥이 적갈색· 황갈색 계통인 반면, 일본 건물의 기둥은 그냥 검다. 다 똑같은 기와 지붕 목조건물 같아도 세부 디테일은 이렇게 미묘한 차이가 있다.
-- 조선은 온돌바닥에 진심이었던 반면, 일본은 중앙 난로를 애용했댄다.

5. 옛날에 한미일의 기술 격차: 교통

-- 1960년대에 한국 경인/경부 고속도로, 일본 신칸센(세계 최초 고속철), 미국 아폴로 우주선(인간을 달나라로....)
미국이야 1920년대부터 뉴욕에서 자동차 교통체증이라는 걸 겪었던 나라이며, 1940년대의 LA 길거리가 대한민국의 한 1970년대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그 반면, 한반도는 1940년대까지 광화문과 조선총독부 바로 앞에도 아스팔트 포장이나 중앙선, 횡단보도, 신호등 같은 게 없었다.

-- 일본 신칸센은 차량과 선로 모두 100% 자체 기술과 자본만으로 만들어졌다는 것도 생각할 점.. 저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건 아니고, 1950년대에 이미 협궤에서 열차 주행 속도 150~160을 찍었었다.

-- 또한, 신칸센뿐만 아니라 세이칸 터널도 엄청난 근성의 산물이다. 그때 신칸센 규격으로 터널을 미리 만들어 놔서 250에 달하는 속도로 주행 가능하게 해놨다.
한국은 강 아래로 지하철 터널 뚫을 기술도 없었고 북괴는 두만강 평양 지하철 실패했던 시절이다.

6. 옛날에 한미일의 기술 격차: 애니메이션

-- 1980년대 말에 한국 머털도사, 일본 토토로(..!!!!), 미국 인어공주(ㄷㄷㄷㄷㄷㄷ)
미국이야 1940년대에 이미 DC 코믹스 배트맨, 슈퍼맨, 미키마우스가 있었던 나라이다;;
일본은 군국주의에 쩔어 있다가 패전 후에 글자부터 히라가나에 동글동글 굴림체로 갈아타면서 정신을 개조하더니.. 아톰이니 에디트맨부터 시작해서 어쩌다가 약 빤 만화영화 강국이 됐는지 정말 신기한 노릇이다.

-- 하긴, 옛날에 한국에서는 그냥 불량만화 추방 운동을 했지만, 일본은 과학 교양 학습만화를 잔뜩 만들었다. 이게 양국의 문화 풍토와 정서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물론 2000년대 이후부터는 한국도 그때에 비해서는 강대국들을 정말 많이 잘 따라잡았다.
오히려 저 나라 사람들이 "이러다가는 우리가 코리아한테 따라잡힌다" 살짝 걱정도 할 지경이 됐다.

7. 역사: 교통 인프라

-- 일본은 19세기 말에 근대화 산업화 잘 하긴 했지만, 서유럽이나 미국과는 달리 자동차나 도로 인프라는 미흡했다. 땅이 길쭉해서 그런지 작정하고 철도에만 완전 올인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증기 기관차가 대도시에서 고가 철교 위를 달렸고 20년대 말에 지하철까지 개통됐다. 하지만 미국의 스테이트 하이웨이, 독일의 아우토반 같은 건 없었다. 길거리에는 노면전차와 인력거만이 달릴 뿐이었고 자동차는 그 국력과 경제력 대비 극히 드물었다.

-- 현재까지도 일본은 국력과 경제력 대비 서민들 자동차는 너무 작다.;; 뭐, 경제 선진국이니 아예 이륜차 삼륜차 툭툭이가 주류는 아닌 거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하이브리드 차량을 개척하긴 했지만 그 뒤로 배터리 전기차에서 특별히 일본차가 막 부각되는 것 같지는 않다.

8. 타 국가와의 근현대사 비교

-- 1860년대에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라는 내전이 벌어졌고, 일본에서는 보신전쟁이라는 내전이 벌어졌다.
미국 껀 체제는 유지하면서 다른 이슈를 갖고 싸운 내전인 반면, 일본 껀 체제 교체 혁명형 내전에 더 가까웠다.
비슷한 시기에 조선은 병인양요니, 제너럴 셔먼 사건 같은 걸 겪었다.

-- 소련군에서 여군 저격수가 독특한 병과였다면, 일본군은 병 계급의 파일럿이 그런 독특한 병과였던 듯하다.
그리고 나치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비행선과 땅끄를 만들었다면,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전함을 만들었다.

-- 일본은 1차 세계대전 때 마이너한 연합국 승전국이었다가, 2차 때 추축국 패전국이 됐다.
--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나중엔 그걸 어기고 소련을 침략했다.
소련은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지만 나중엔 그걸 어기고 일본에 쳐들어가서 패망 직전의 일본을 확인사살했다.

-- 아주 특수한 연구 개발 분야에서는 납 성분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옛날 공기를 어디 남북극 빙하에서 찾아서 쓴다고 한다.
그것처럼 인류가 핵실험을 하기 전, 방사선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은 옛날 철을.. 태평양 전쟁 때 격침되어 바닷물에 가라앉아 있는 일본 전함으로부터 구해다 쓴다고도 한다.

9. 역사에서 명과 암

-- 19세기 말이 조선은 다 망해가던 암울한 시절이었지만 일본은 그야말로 희망이 넘치던 시기였다. 서양 열강과 맺었던 불평등 조약을 도로 개정하고, 자기들도 말석이나마 열강으로 인정받고 영국과 동맹 맺고.. 청일 러일 전쟁에서 이겼을 때 얼마나 도파민 뿜뿜했겠나?
왜군 사무라이가 갑자기 검은 군복 일본군으로 바뀌었고, 검은 군복이 또 카키색으로 바뀌었을 때가 일본의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다만.. 일본은 그렇게 과학기술과 군사만 애매하게 근대화됐지 사회 분위기나 국민 의식수준, 민주화 척도 같은 건 전혀 서구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폭주했더니 2차 대전 태평양 전쟁 때는 인외마경 급의 광기와 악행이 벌어졌다.

-- "일본 쇼와 천황에게 태평양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이 케케묵은 질문은 성경으로 치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예수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와 아주 비슷한 유형인 것 같다. (책임이 없을 리가..)

-- 우리나라는 '통일 지향'을 명시하는 문구를 헌법에서 삭제할지, 군대를 모병제로 바꾸는 날이 올지 모르겠다.
일본은 설마 평화 헌법을 개정해서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정식 승격시킬지 모르겠다.

10. 나머지 타 국가와의 비교

-- 일본은 55년 동안 자민당 장기집권기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장기간 휴전 중(사실상 종전)이고, 20년 넘게 군인 출신 대통령 집권기가 있었다. 대만은 1949년부터 1987년까지 38년 동안이나 계엄 상태였다고 한다;;
-- 1991년에 한국은 범죄와의 전쟁이 있었고, 일본은 야쿠자 특별법이 제정됐었다.

-- 한국이 전세가 발달했다면.. 일본은 사철이 발달한 것 같다. 미국은 치안이 private해졌고 일본은 철도 인프라가 많이 private해졌다.
-- 미국은 의료비가 너무 비싸서 회사 지원이 없으면 병원 한번 못 갈 거라는데.. 일본은 교통비가 너무 비싸서 회사 지원이 없으면 매일 신칸센 타고 도쿄로 출퇴근 엄두를 못 낼 거라고 그런다.

-- 한국 학교에서는 급식을 몽땅 무료로 하고 있다. 일본 학교에는 수영장이 보급돼 있다.
-- 일본은 컵라면의 원조이다. 한국은 커피믹스의 원조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10/23 08:35 2026/10/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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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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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이후 2010도 참 걸출한 작품이었다.
IDE가 MS Office 엔진이 아닌 WPF 기반으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프로젝트 파일은 현재처럼 확장자에 x자가 붙고 내부 형식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IDE와 툴체인 및 SDK 간의 분리가 가능해지고 융통성이 생겼다.
인텔리센스 엔진이 구닥다리 ncb 파일을 버리고, 전문적인 백그라운드 컴파일러와 DB 엔진을 기반으로 전면 개편됐다. 덕분에 정확도가 6.0이나 200x 시절보다 훨씬 더 향상됐다. 그리고 이제 #include 헤더 파일에 대해서도 우클릭해서 '요 파일 열기'가 가능해졌다.

CRT와 MFC DLL에 대해 side-by-side assembly 강제 정책은 철회됐으며... C++11 문법이 초보적인 수준으로나마 도입됐다. R-value 참조자 &&라든가 auto 람다 함수를 쓸 수 있게 됐다.
다만, 내 개인적으로는 시퍼런 IDE 외형이 좀 구리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UI 요소를 customize할 때 toolbar의 폭을 마우스 드래그가 아니라 픽셀수 숫자로 입력한다던가(뜨악~);; 몇몇 UI 기능은 200x시절보다 불편해졌다.
그게 오늘날 202x까지 개선 없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개발 우선순위가 낮아서 그런지 이런 것까지 살펴볼 여유가 없는가 보다.

※ 2012 (버전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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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일단 IDE의 외형이.. 그 시절 유행하던 Windows 8 metro 디자인 물을 먹었는지 아주 새끈한 은백색 풍으로 바뀌었다. 프로그램 창에서 caption이나 border 같은 non-client 영역까지 전부 운영체제의 표준 외형을 벗어난 첫 버전이 바로 2012이다.

개발툴로서는 같은 최적화 세팅에서 컴파일 속도가 2010보다 더 빨라졌고.. 정적 분석이 bundle로 제공되기 시작했다.
신택스 컬러링도 예전보다 더 컬러풀해져서 #define, typedef, num 등이 모두 구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if에 걸려서 컴파일되지 않는 부분이 흐려지기 시작한 건 2010부터인지 2012부터인지 모르겠다. 200x는 확실히 아니었음..

그리고 이 버전부터 서비스 팩이라는 게 없어지고 update N 이렇게 명칭이 바뀌었다. 마소 제품들은 2010년을 전후한 Windows 7, Office 2010, Visual Studio 2010이 서비스 팩이란 게 존재했던 마지막 버전이었다.
로컬 하드에 설치 저장되던 방대한 규모의 MSDN 레퍼런스도 이때부터 사실상 없어졌다.

※ 2013 (버전 12)

2012 이후로 겨우 1년 남짓 만에 메이저 버전이 또 올라갔다. 마치 Windows 8과 8.1의 관계인 것 같은데..

얘는 C++11 문법 지원이 더 강화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 Express 에디션 대신, 개인/인디 개발자를 위한 Community 에디션이 도입된 것이 크게 기억에 남는다.
Community 에디션은 5인 이하, 매출 얼마 이하의 소규모 인디 개발자이기만 하면 무료로 사용 가능하다. Express에서는 봉인돼 있던 MFC고 x64고 다 사용 가능하다. 2010년대의 컴퓨팅 환경에서 MFC는 몰라도 이제 x64 타겟을 만들 수 없다는 건 어불성설이 됐으니까..

뭐, Visual Studio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즘 버전들은 시리얼 번호 입력이란 게 없이 바로 설치 가능하다. 그 대신 실행 후에 마소 계정 로그인이 필요해졌을 뿐이다. 선설치, 후접속 결제인 듯..

※ 2015 (버전 14)

얘는 CRT 체계가 Windows 10 스타일로 전면 개편된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툴체인의 메이저 버전이 14, _MSC_VER 값도 19xx대로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vcruntime140, mfc140, msvcp140 말이다. Visual Studio의 버전만 올라가지, 툴체인은 메이저 버전이 올라가지 않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 시절에 전면 개편됐던 인텔리센스 겸 심벌 browse DB의 내부 구조도 2015의 어느 업데이트 때부터 야금야금 바뀌었다. 원래 *.sdf 파일을 쓰던 게 *.VC.db 라고 바뀌었으며, DB 엔진도 자기네 Microsoft SQL Server Compact edition을 쓰던 게 SQLite로 교체됐다. 이것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꽤 중요한 변화이다.
2015 이전 버전은 Visual Studio를 설치하면서 MS SQL server 2008이니 어쩌구가 야금야금 같이 설치됐던 반면, 현재는 그런 관행이 없어졌다.

※ 2017 (버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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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프로그램의 설치 및 업데이트 시스템이 현재 형태로 전면 개편된 최초의 버전이다. 소규모 업데이트도 워낙 잦아지니 지금처럼 버전 번호에 숫자를 하나 더 추가하는 형태로 바꿨다. (그러므로 Update N라는 표기는 2012부터 2015까지만 사용된 셈..)
IDE의 기본 색상도 흰색이 아니라 약간 연보라색 같은 파란색.. 지금과 비슷해졌다. 이렇게 2010년대 전반부 버전과 후반부 버전 사이의 차별화가 진행됐다.

세월이 세월이니 C++14 문법과 라이브러리도 야금야금 도입됐다. 가령, unique_ptr뿐만 아니라 make_unique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일반적인 함수뿐만 아니라 매크로 함수나 람다에다가도 가변인자를 넣을 수 있게 됐다.

※ 2019 (버전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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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E의 색상에 연보라색이 2017보다 더 가미되어 채도가 올라갔다. 2017은 제목 표시줄에 Visual Studio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2019부터는 그게 빠지고 최상단에 메뉴가 바로 표시되기 시작했다.
2019의 초창기 버전은 내 기억으로 win32 대화상자 리소스를 편집하던 중에 IDE가 잘 뻗기도 했었다. 여러 업데이트를 거치면서 그 버그는 다행히 고쳐졌다.

아 참, 이 2019 시기에.. 마소의 C++ 라이브러리에 꽤 흥미로운 변화가 생겼다.
Visual C++은 200x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Dinkumware 사의 STL을 라이선스 받아 공급해 왔으며, 이 때문에 헤더 파일의 뒷부분에 언제나 P. J. Plauger라는 제작자와 제작사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그랬는데 마소에서는 2019 하반기부로 이 라이브러리를 오픈소스화하고 자체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Dinkumware 관련 copyright 문구가 사라졌다.
사실, C++ 라이브러리는 갈수록 언어 구조에 종속적이고 내부 구현도 컴파일러 제조사의 재량에 종속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는 게 요즘 추세라고 한다.

※ 2022 (버전 17)
IDE 자체가 드디어 64비트로 포팅됐다...!! 이걸로 끝..???

※ 2026
테마가 자매품인 Visual Studio Code 급으로 엄청 다양해지고 휘황찬란해졌다는 것밖에 아직 확인을 못 했다.;;

이상이다.
개인적으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개발이나 직장 현업 용도로 진지하게 오래 써 본 버전은 6.0, 2003, 2010, 2012, 2019, 2022 정도이다.

(1) Browse info에 대해

Visual C++은 아주 초창기 시절부터, 빌드 때 겸사겸사 browse info를 같이 생성하는(.sbr, .bsc) 기능이 있었다.
물론 이건 빌드 시간과 디스크 공간을 추가로 소모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사용자가 원해서 옵션으로 지정했을 때만 수행한다. 지금도 프로젝트 설정 대화상자를 열어보면 C/C++의 아래에 Browse info라는 카테고리로 당당히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매번 빌드하지 않고도 IDE에서 소스 코드의 심벌을 실시간으로 조회하는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browse info 기능은 완전히 과거 레거시가 돼서 거의 쓰이지 않는 기능이 됐다. 다만, 업계에서 이 sbr/bsc 파일을 이용해서 다른 분석을 하는 3rd-party 툴 제품이 있기는 하다고 한다.
오늘날은 소스코드를 컴파일하는 과정에서 '덤'으로 할 만한 작업은 정적 분석인 듯하다. 허나, 이젠 그마저도 on-the-fly로 수행돼서 의심 지점을 소스코드의 밑줄로 쫙 쳐서 표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2) 버전 체계에 대해

Visual C++은 버전 관리 체계가 생각보다 복잡하다. 크게 세 가지 버전 시스템이 있다.

- Visual Studio IDE 자체의 버전: Help - About 대화상자에서 볼 수 있는 그 버전이다. 새로운 연도 브랜드가 출시될 때마다 메이저 버전 번호가 1씩 올라간다. 6.0 이후로 2010의 버전은 10이었고, 2015는 14, 2022의 버전은 17까지 올라갔다. 버전 13은 건너뛰었다.

- 툴체인의 버전: 오랫동안 Visual C++ IDE의 버전과 동일하다가(13을 skip한 것까지) 2015 및 Windows 10 때부터 14에서 멈췄다. CRT/MFC DLL의 ABI와도 버전이 연계되는지, 현재는 마이너 버전만 쭉 올라가고 있다. 프로젝트 세팅의 '플랫폼 도구 집합'에 해당한다.

- 컴파일러의 버전: cl.exe를 실행했을 때, 또는 소스 코드에서 _MSC_VER의 값을 넣어서 확인 가능한 버전이다. 얘는 Visual C++의 전신인 Microsoft C/C++의 버전값을 승계했기 때문에 Visual C++ 1.0 시절에 이미 800부터 시작됐다. MS C/C++의 마지막 버전이 7이었고, VC++ 1은 MS C/C++ 8과 같다고 간주됐기 때문이다.
다만, Visual C++ 2에서 4로 넘어갔을 때는 값이 200이 아니라 100만 늘었다. VC++ 6의 컴파일러 버전은 500이 아니라 400이 증가한 1200이었다. (12.0)

그 뒤 IDE의 버전이 14인 2015에서는 800이 아니라 700이 증가한 19.0에 도달했고(13 skip이 없으므로), 이때부터는 툴체인의 버전과 마찬가지로 메이저 버전의 번호가 오르지 않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6/10/11 08:35 2026/10/1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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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2010년쯤에, 2008 버전이 최신이었던 시절에 썼던 글을 내용을 보강하고 업데이트 하여 다시 올렸다. 심지어 분량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글을 둘로 나눴다.

※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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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샷의 출처는 Malcolm Smith (malxau)이라는 분의 유명 홈페이지)

1993년에 출시된 Visual C++ 1.0은 Microsoft C/C++ 7.0의 차기 버전 겸 Windows NT 전속 개발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 BASIC 팀에서 MS Basic PDS 7의 다음 버전이 Visual Basic이라고 선례를 남겼으니, C/C++ 팀도 비슷한 작명을 도입했던 게 아닌가 싶다. BASIC은 RAD 툴로 바뀌었고 C/C++은 32비트로 갈아탔다.

물론 이때는 16비트에서 32비트로 한창 넘어가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Win32s 타겟이 지원되기도 했다. 그리고 Win32s가 아닌 순수 16비트용 에디션도 나중에 출시되기는 했다. (VB 1도 Windows용 이후에 DOS용이 따로 출시됐듯이..) 하지만 VC++ 16비트용은 개발 계보가 32비트 에디션과는 상이했다.

32비트 환경에서는 메모리 모델 구분이 없는 대신, CRT에 링크 방식(static/DLL)과 멀티스레드 지원 여부라는 속성이 새로 도입되었다.
참고로 Visual Basic은 1996년엔가, 버전 4에서야 32비트가 도입됐다는 것도 기억할 점이다. 16/32비트 에디션이 따로 나왔으며, VB5부터는 32비트 전용으로 바뀌었다.

※ 1.52

얘는 16비트 Windows를 정식 지원하는 마지막 버전이어서 매우 중요하다.
프론트 엔드 IDE는 모두 16비트 Windows 프로그램인 반면, 커맨드 라인에서 동작하는 컴파일러, 링커 같은 주요 툴들은 도스 익스텐더 stub을 내장하고 있는 32비트 PE 포맷인 점이 무척 인상적이다.

※ 2.0

이제부터 완전히 32비트 전용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Windows 95가 나오기도 전이고 NT는 인지도와 점유율이 아주 미미했었다. 그래서 VC++ 역시 아직까지는 별 존재감이 없고 주목을 못 받았다. 아직까지는 16비트 Windows에서 볼랜드의 OWL 라이브러리도 쌩쌩히 현역이었다.

Windows 95의 워드패드가 바로 듣보잡 MFC 3.0 기반이었는데, 이게 Visual C++ 2.0의 흔적이다.
그리고 이 시절 Visual C++ RISC edition 어쩌구 하던 건 Windows CE가 아니라 NT를 염두에 둔 타겟이었다. 이건 eMbedded Visual C++과는 다른 제품군이었다.

※ 4.0

사용자 삽입 이미지

DirectX에는 4라는 버전이 없듯, Visual C++에는 3.x대 버전이 없다. 내부적으로 꾸준히 버전업이 돼 온 MFC의 버전 번호에 맞춰 곧바로 4.0으로 건너뛰게 된다.
VC++ 4.0은 Windows NT뿐만 아니라 정통 95용 32비트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이점으로 인해 인지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IE가 넷스케이프를 제쳤듯이 Visual C++이 Borland C++을 제치기 시작했다.

4.0에 와서야 비로소 IDE가 오늘날의 Visual C++과 비슷한 골격이 갖춰졌다. 즉 코딩, 리소스 편집, 클래스 마법사, 도움말 열람을 모두 한 프로그램에서 할 수 있는 진정한 통합 환경 Developer Studio가 이 버전부터 생겼다.
msdev.exe라는 프로그램 이름은 훗날 6.0까지 이어졌다. MFC ClassWizard라든가, ClassView도 이때 도입됐다.

※ 4.2

4.1을 거쳐 4.0이 마이너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제법 인지도를 얻었다. ActiveX 컨트롤, STL 같은 기능이 추가되고 MFC DLL의 이름도 이때부터 MFC42로 이름이 바뀌어 큰 뼈대의 변경 없이 훗날의 6.0까지 이어졌다. MFC42는 윈도우 98 이래로 운영체제가 이제 known DLL로 인정하는 마지막 버전 숫자이기도 하니 더욱 의미가 있다.

4.2에서부터 Win32s의 지원이 중단되었다. 오죽했으면 설치할 때 “이 버전부터 Win32s를 더 지원하지 않으니, 그 환경 개발하고 싶으면 이거 설치하지 말고 옛날 버전 쓰셈!”이란 경고문까지 나온다.

※ 5.0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얘와 6은 도구모음줄과 메뉴가 MS Office 97 스타일로 바뀌었다. 다만, 5는 도움말은 여전히 RTF 기반이고 인텔리센스도 아직 없었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 기능도.. 한번에 여러 프로젝트들을 담을 수 있는 workspace 개념이 이때 도입됐다. 단, dsw/dsp라는 파일 포맷 자체는 5와 6 두 버전에서만 쓰이고 이후 버전에서는 또 바뀌게 되었다.

몇몇 C++ 최신 표준이 반영되어 bool이 built-in type으로 지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빌드하는 EXE 파일에 PE 재배치 정보가 기본적으로 생략되었으며.. 그 유명한 Rich 시그니처가 슬쩍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이 5.0은 이듬해에 나온 6.0에 밀려 존재감을 완전히 상실했다. 뭔가 아래아한글 97이 나오기 전의 96이 묻혀 버린 것과 비슷하달까?

※ 6.0

개발툴계의 Windows XP 같은 만수장세 결정판이었다. 이 버전 이후로 거의 4년 가까이 버전업이 없었고, 다음 버전인 닷넷이 변화폭이 너무 크기도 했기 때문이다.

6에서는 인텔리센스(초보적인 수준), edit and continue, delay-loaded DLL 같은 획기적인 기능이 처음으로 추가되고 도움말이 별도의 MSDN 라이브러리로 독립함과 동시에 HTML 기반으로 모두 바뀌었다.
이 버전은 윈도우 9x에서 설치 가능한 마지막 버전임과 동시에 MSVCRT, MFC42 같은 known DLL만 사용하는 바이너리를 생성할 수 있는 마지막 버전이기도 하다. 주요 라이브러리를 DLL 링크하고도 DLL 배포 걱정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장점이 있다.

4.2 때는 ClassView에 있는 각종 클래스, 변수 정보가 소스 파일을 매번 저장할 때에만 업데이트됐다. 이것이 내용이 바뀔 때마다 실시간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5.0은 아니고 6.0부터인 걸로 기억한다.
Visual C++이 C++ 표준을 준수하지 않는다고 비판이 많긴 했지만, 라이브러리의 헤더 파일에서 .h 확장자가 없어지고 namespace std가 도입된 건 6.0부터였지 싶다.

※ 7.1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

Visual C++의 다음 버전은 처음엔, 버전 번호나 연도가 아닌 닷넷이라는 브랜드로 출시되었다.
MFC를 써서 개발된 VC 특유의 전통적인 msdev.exe는 퇴출되고 devenv라는 MS Office 내지 VB 스타일의 IDE가 등장했됐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예전에 Visual Studio에 있던 Visual InterDev와 비슷한 형태였다. 단지 거기에다 외형만 MS 오피스 XP 스타일 UI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덕분에 Visual C++과는 영 인연이 없고 VB만의 전유물인 것 같던 Property grid가 도입되어 Visual C++ IDE 특유의 납작한 등록정보 대화상자를 대체했다. 클래스 마법사도 이 형태로 대체됐다. 도움말은 5.0 시절처럼 IDE 내부에 띄울 수도 있고 6.0처럼 외부에 띄울 수도 있는 융통성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dsw/dsp 대신, sln(솔루션)과 vcproj 요렇게 프로젝트 파일의 확장자와 포맷이 바뀌었다.

이제 주류로 내세운 게 C#, 공용 언어 런타임 같은 닷넷 환경이긴 했지만 네이티브 C/C++ 쪽도 크게 향상되었다. 네이티브 wchar_t 형식이 지원되기 시작했다.
6에서 첫 도입됐던 인텔리센스도 굉장히 강력해져 특히 #define 매크로 심볼에 대해서도 동작하기 시작했다. 별도의 browse info를 만들지 않아도 선언/정의로 가기 기능을 바로 사용할 수도 있게 됐다. 닷넷 정도만 써 보면 이제 6.0은 충분히 열악함을 느끼기에 충분할 것이다.

64비트 크로스컴파일은 불가능하지는 않으나 불편하고 디버깅도 되지 않고 IDE 차원의 적극적인 보조는 못 받는 어정쩡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불완전한 면모들은 후속 버전인 8에서 보완되었다.

참고로.. 2003 이전, 2002년에 Visual Studio .NET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출시된 버전 7.0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존재감 없이 신속히 잊혀졌다.
글쎄, 6.0 이후로 오랫동안 버전업이 없다가 닷넷과 CLR이라는 걸 도입한 첫 버전이니 너무 불안정하고 버그가 많았던 걸까? 저 제품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다. 금세 .NET 2003 (7.1)으로 대체됐다.

※ 8.0 (2005)

얘도 생각해 보니 변화가 굉장히 많았다.
for 문의 변수 scope처럼 그동안 Visual C++ 컴파일러가 표준을 어기고 있던 문법을 교정했으며.. 멀티코어를 표방했는지 빌드 로그에 코어 번호가 왼쪽에 표시되기 시작했다.
CRT의 보안이 이때 크게 강화됐다. strcpy_s와 gets_s(대상 버퍼 크기), qsort_s(콜백 함수에 데이터 전달 가능), strtok_s(토큰 중복 호출 가능) 같은 함수가 새롭게 등장하고 strchr 같은 경우, C++에서는 const 포인터를 되돌리는 버전과 비const 포인터를 되돌리는 함수가 오버로딩으로 분리해 나갔다. 무척 신선한 변화라 느껴진다. STL 디버깅도 훨씬 더 편해졌다.

이 버전부터 별도의 플랫폼 SDK를 설치할 필요 없이 IDE 차원에서 x64 타겟 빌드와 디버깅이 정식 지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MSVCR80, MFC80의 배포 방식이 side-by-side assembly 방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이와 덩달아, 리소스 편집기로 수동으로 해야 하던 메니페스트 생성/편집 기능도 상당 부분 자동화됐다.
이 버전부터는 생성하는 프로젝트의 디폴트 기반 인코딩이 드디어 유니코드로 바뀌었다.

UI 상으로도 이제 MS 오피스 스타일에서 독립한 새로운 외형 비주얼을 갖기 시작했으며, 도구모음줄 아이콘도 256색으로 더 화려해졌다. 전통적으로 ClassView에 클래스와 멤버들이 한 트리에 쫙 나열되던 것이 멤버는 별도의 리스트에 뜨도록 바뀌기도 했다. 도킹 창을 드래그할 때 나타나는 도킹 다이아몬드도 2005에서 첫 도입된 물건이다.
Visual Studio의 무료 에디션인 Express 에디션이 이때 첫 도입됐다. (무료이지만 MFC 없고 64비트 타겟도 미지원)

※ 9.0 (2008)

8이 질적으로 많이 바뀌었다면 9는 Windows Vista의 등장처럼 8 출시 이후에 생긴 변화를 IDE나 MFC 라이브러리 같은 데에 적극 반영하여 양적인 향상을 꾀했다. 일단 MS Office 스타일의 GUI를 손쉽게 만들 수 있는 feature pack을 MFC에 드디어 도입했다.
그리고 2005는 설치하려면 sp1에, Vista 지원 패치.. 등 덕지덕지 땜빵을 해야 할 게 많았는데 2008은 그걸 당연히 모두 기본 접수했다.

Windows Vista에서 도입된 시작 주소 랜덤화 기능이 요 2008에서 정식 추가됐다. 2008에서는 이 보안 기능을 사용하는 EXE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10여 년 전, 5.0에서 누락되기 시작한 EXE의 재배치 정보가 2008부터는 기본적으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fixed address를 지원하지 않는 win32s와의 호환 때문에 그게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보안 기능 때문에 필요해진 것이다.

2008은 설치하기 위해 Windows XP 이상을 요구하며(2000 지원 중단), 지원하는 타겟 플랫폼에서도 Windows 9x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제외됐다. 링커 옵션에서 바이너리의 최소 요구 운영체제 버전이 4에서 5로 껑충 뛰었고, 이보다 낮은 값은 지정 자체가 안 된다.
또한 single threaded CRT 라이브러리 옵션도 없어졌다. C 라이브러리는 이제부터 무조건 multi threaded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10/07 19:35 2026/10/0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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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래식 16비트 DOS 기반 Windows: x86 하에서 여러 모드 존재

초창기 16비트 Windows는 DOS로 부팅된 컴퓨터에서 추가로 실행되던 운영환경 프로그램이었다. 자신만의 하드웨어 인식 모델, 자신만의 API, 자신만의 실행 파일 포맷이 있었지만 자체적으로 컴퓨터를 부팅시킬 능력은 없었다.
그 MS-DOS가 x86 전용이었으니 Windows도 자연스럽게 x86 전용으로 출발했다. 그 대신 그때는 x86 계열 CPU 자체가 시시각각 성장하고 변모하고 있었던지라, Windows도 그에 맞춰 다양한 실행 모드를 지원했다.

8086 real mode, 80286 standard 모드, 그리고 80386 enhanced 모드.
1.0이야 당연히 8086 real에서 시작했다. 주 메모리 최대 640KB밖에 지원을 못하는 초 열악 모드.
그러다가 Windows 2.x 시절에는 Windows/286, Windows/386 에디션이 추가로 도입됐는데.. 이거 마치 옛날에 아래아한글이 1.x 시절에 도트 프린터 에디션, 레이저 프린터 에디션을 세분화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폰트)

그러다가 Windows 3.0에서는 한 프로그램에서 세 에디션이 모두 같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286 표준 모드에서는 80286에서 추가된 보호 모드를 활용하여, 컴터의 메모리를 더 많이(최대 24비트, 16MB) 끌어다 쓸 수 있었다. 그리고 도스창을 연 상태에서도 백그라운드에서 딴 프로그램과의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
386 확장 모드에서는 그에 덧붙여 가상 메모리(스왑 파일 페이징)까지 더 끌어다 쓰고, 도스창을 여러 개 동시에 만들 수도 있게 됐다.

즉, Windows 3.x의 386 확장 모드는 여전히 16비트 코드 기반이지만 80386 CPU의 기능을 일부 활용했던 모드였다.
여기에다가 Win32s가 도입되고 커널이 통째로 Windows 9x로 바뀐 과정은 참 드라마틱하게 그지없다. DOS는 Windows를 띄워 주는 하부 인프라가 아니라, Windows 안에서 돌아가는 샌드박스로 위상이 바뀌었다.
수많은 DOS용 프로그램과의 호환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또 저사양 똥컴에서의 성능도 최대한 살리면서 DOS를 도태시키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2. 1990년대 Windows NT: x86 + MIPS, Alpha, PowerPC

저런 클래식 Windows와 달리, Windows NT는 DOS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별세계 신세계 이상향을 추구했다.
x86은 지원하는 여러 CPU 중 하나일 뿐이며, 처음부터 100% 32비트 기반으로 동작했다. 지저분한 DOS나 16비트 호환성 따위는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실행 파일 포맷도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새로 제정하고.. 노는 물이 정말 완전히 달랐다.

Windows NT는 초창기에 x86뿐만 아니라 MIPS와 DEC Alpha를 추가로 지원해서 UNIX 일색이던 워크스테이션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원래 제일 처음 계획은 인텔 i860을 지원하는 것이었으나, 이건 모종의 사정으로 인해 이뤄지지 못했다.
NT 3.51부터 4.0 sp2까지 잠깐 동안은 PowerPC까지 추가로 지원했다. 그 당시 매킨토시가 돌아가던 그 CPU가 맞다. 물론 PC와 맥은 CPU 말고도 컴퓨터 하드웨어 규격이 매우 달랐기 때문에, 저런다고 맥에서 Windows NT PPC 에디션을 돌릴 수는 없었다.

Windows가 x86과는 특성이 상극인 RISC 구조에, 심지어 big endian인 CPU에서도 이식되어 돌아간 적이 있었다니.. 지금으로서는 참 믿어지지 않는다.
Windows NT의 개발 본진은 DEC Alpha에 가까웠다. 심지어 Alpha는 64비트 CPU이기도 했으나.. NT 3~4는 그냥 32비트 ABI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 Alpha의 후대 버전은 Windows가 진짜 64비트로 포팅되던 시절에 테스트 장비로도 쓰였다고 한다.

물론 이상향을 추구한 것에는 댓가가 따랐다. 1993~95년 사이, 어지간한 가정용 컴퓨터들이 램이 2MB~8MB 이러던 시절에 NT는 이미 12~16MB 이상을 요구했다. 그것도 한글 한자 지원 없이 오리지날 영문판이 말이다.
그 시절엔 CPU와 메모리 가격이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귀하고 비쌌었다. 이러니 NT는 초창기엔 가정용 PC 생태계에서 도저히 발을 들일 수 없었다.

마소에서 개발하던 프로그래밍 언어/개발툴 중에 BASIC은 RAD로 지향점이 바뀌면서 Visual이라는 브랜드가 먼저 붙었다. (1991년) 그 반면, MS C는 7.0 버전에서 C++ 지원이 추가되면서 C/C++이 됐고, 그 다음 Windows NT용 32비트 타겟 빌드가 추가되면서 Visual C++ 1.0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기에다 IDE도 Programmer's workbench라고 언어 공용이던 게 Windows용 자체 에디터로 덤으로 바뀌었으니 겸사겸사 Visual이라는 단어를 붙인 듯하다.

이때는 크로스 컴파일이라는 개념이 약했는지 VC++이 x86용, MIPS용, Alpha용, PowerPC 용으로 제각기 따로 출시됐다.
아~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VC++ 4 시절에 PowerPC 타겟 흔적을 많이 봤던 것 같다. 그건 Windows NT를 염두에 둔 기능이지, CE용이 아니었다. 나중에 VC++ 6 IDE를 기반으로 출시됐던 eMbedded Visual C++와는 다른 제품군이었다.

3. Windows 2000: x86 단일 황금기

그 뒤.. 세기말이 되자 Windows 2000이라는 걸출한 제품이 Windows NT 5.0을 표방하며 출시됐다. 얘는 연도 숫자로나, 기술 계보로나 정말 너무 절묘한 교차점에 놓였다.
NT는 전통적으로 OpenGL이 있을지언정 DirectX 따위는 없던 운영체제였다. 그러나 2000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NT 계열과 9x 계열의 통합을 추구했다. 그래서 DirectX라든가 plug & play, USB처럼 9x에 먼저 들어갔던 기능들을 대거 수용했다.

이제는 가정용 컴터들도 많이 빨라지고 램 용량도 크게 늘어서 NT 커널을 돌릴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둘을 통합할 때가.. 아니, 구닥다리 DOS와 9x 커널을 퇴출시킬 때가 됐다.
이 참에, NT 구버전이 지원하던 타 CPU들은 미래가 없다고 여겨져서 때문에 지원을 끊었다. 그 대신 마소에서는 인텔의 새 밀레니엄 64비트 CPU로 여겨지던 Itanium을 지원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상 베이퍼웨어 나가리로 끝나 버렸다.

이런 이유로 인해 Windows 2000은 NT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9x처럼 사실상 x86 전용 운영체제로 출시됐다. 그리고 2000년대 초, 2000과 그 다음 XP 시기가 어찌 보면 32비트 x86의 황금기였다.
램은 128~256MB대.. 주소 공간이 부족하지 않고 32비트로 적당히 커버 가능해서 정수도 4바이트, 포인터도 4바이트.. 딱딱 절묘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클럭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무어의 법칙의 끝물 상태였고, CPU도 x86 only에 가까운 상황.. 얼마나 깔끔하냐? 그 와중에 구닥다리 9x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모든 게 파편화 없이 한데 집중됐었다. 새천년에 말이다.

4. 2000년대: Itanium과 x64의 명암

Windows의 역사상 어떤 형태로든 64비트 ABI라는 게 등장한 게 저 1990년대 중후반, Itanium 포팅을 할 때였다. PE 실행 파일의 포맷을 확장하고, 플랫폼 SDK에 INT_PTR이라든가 GetWindowLongPtr 이런 게 등장한 게 그 때라는 뜻이다.

하지만 IA64라고 불리는 Itanium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고, 21세기 초부터는 x64라는 x86 호환 CPU가 64비트 PC 시대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얼리어답터 컴덕이 아닌 일반인들은 컴퓨터 램의 용량이 실질적으로 4GB를 넘어선 2000년대 중후반, Windows Vista나 7쯤부터 64비트를 체감한 듯하다.

Windows는 일반인 클라이언트 제품군에서는 XP에서 딱 한 번 IA64를 지원하고는 학을 뗐다.
서버 제품군에서는 Vista에 대응하는 Server 2008까지 IA64를 조금 더 지원했고, 그 다음부터 지원을 끊었다.
그 대신 서버 제품군은 32비트 x86 전용 에디션을 클라보다 훨씬 일찍 끊었다.

클라에서는 Windows 10까지만 해도 x86 전용 에디션도 출시해 오다가 2020년대 11에 와서야 중단했다.
그러나 서버에서는 IA64를 약간 더 오래 지원한 대신, 그 Server 2008부터 x86을 끊고 x64로 완전히 갈아탔다. 클라와 서버의 컴퓨터 특성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개발툴인 Visual C++은 2005부터 x64로 크로스 컴파일을 정식 지원하기 시작했다.

5. 2010년대 말: ARM64의 추가 도입

그 뒤, 마소는 2010년대 중반엔 경영진이 싹 바뀌었다. 새 경영진은 기존 CE나 폰/모바일 제품군을 포기하고 정리했다. Android/iOS와의 경쟁에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Windows 8 시절 같은 삽질은 더 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Windows on ARM이라 해서 데스크톱용 기존 운영체제를 ARM64로 그대로 포팅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너무 자명한 얘기지만, ARM64는 클라 제품군 한정이다. 서버 제품군을 그렇게 포팅하지는 않는다.
얘는 마소에서 ARM64EC니, ARM64X니 하는 온갖 하이브리드 규격도 만들어서 x64와 최대한 같이 포용하려 애쓰는 중이다.
예전의 Itanium처럼 호환성 없는 별개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2010년대 초, Windows RT 시절에 잠깐 나돌았던 ARM32는.. 2000년대 초 IA64와는 좀 다른 의미로 낙동강 오리알로 전락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쪽이 64비트 삽질이었다면 다른 쪽은 모바일 삽질이라 하겠다.

이상이다.
한때는 온갖 CPU들이 난립하다가 x86으로 천하통일 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뒤에 x64와 ARM64가 올라타서 상황이 좀 더 복잡해졌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작업을 하다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써 보았다.

한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는 (1) 컴퓨터의 단일 코어 속도가 크게 증가했었다..
그 다음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는 (2) RAM이건 디스크건 메모리가 용량이 크게 증가하고 가격이 싸졌다. 이때쯤부터 C드라이브 디렉터리와 파일 구조를 DOS 시절처럼 몽땅 한데 조회하는 게 거의 무의미해지고 불가능해졌다.
끝으로, 2000년대부터는 (3) 인터넷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심지어 무선화까지 됐다.

이런 기술이 발달하고 저렴하게 널리 보급된 덕분에 일반 사용자들도 과거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방대한 규모의 소프트웨어를 컴퓨터로 아무렇지 않게 돌릴 수 있게 됐다.

* 덧붙임: Windows CE

1990년대 중반, 가정용 PC에서는 Windows 95가 이제 막 정착했고 NT는 아직 별나라이던 시절에.. 마소에서는 PC보다 작은 기기에다가도 win32 API를 심어서 Windows 생태계를 가꿀 생각을 했다. 이름하여 Windows CE라는 게 이때 태동했다.

CE가 지원했던 CPU 중에는 NT에서 지원했던 MIPS, PowerPC 같은 것도 있었고 심지어 ARM32에다 x86도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에 오로지 CPU만이 구성요소의 전부인 게 아니고, CE는 근본적으로 ‘임베디드’ 환경을 추구했다. CPU의 특성이나 메모리, 파일 시스템, 비디오, 소프트웨어 환경 등이 범용 컴퓨터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Windows 프로그램을 돌리지는 못한다.

Windows CE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환경은 기존 Visual C++에다가 해당 플랫폼용 툴키트를 구매해서 추가로 설치하는 형태로 세팅했다. 2000년대 초에는 eMbedded Visual C++라고 IDE가 통째로 새로 나오기도 했었으나.. 그건 얼마 못 가 단종됐다.

Windows 9x가 21세기로 진입하지 못하고 세기말에 맥이 끊겼다면.. CE는 2010년 초쯤에 명맥이 끊겼다.
CE 커널은 9x와 달리 wide char로 대표되는 유니코드 버프는 당연히 받은 채로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말의 트렌드이던 64비트 환경으로 포팅되지는 못했다. 동작 환경의 특성상, Itanium이나 DEC Alpha와도 접점이 당연히 없었다.

그 대신, 마소에서는 CE 커널을 스마트폰에다 얹을 생각을 했다. CE 커널이 한때는 PDA에도 쓰였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래서 통상적인 임베디드용 CE는 Windows Embedded Compact라는 이름으로 제품을 유지하고, CE를 기반으로 Windows Mobile을 만들고 나중엔 이름을 Windows Phone으로 대놓고 바꿨다.

나중에 마소는 Windows Phone을 CE가 아니라 NT 커널을 기반으로 다시 만드는 무리수까지 둬 봤지만.. 안드로이드나 iOS 같은 신흥 모바일 강자를 꺾을 수는 없었고 실패했다.
이런 사건을 거쳐 오늘날, 2020년대 기준으로 CE는 원래의 나와바리이던 임베디드 제품들의 유지보수 이상으로 신규 개발은 끝나고 성장이 멈춘 플랫폼이 됐다. 시장이 특수하기 때문에 무슨 Windows 9x가 사라진 것처럼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야말로 고인물로 전락한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10/03 08:35 2026/10/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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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뮤지컬 관람

본인은 지난 6월, 일본 출장을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던 시기에 아내 인맥으로 대학로에서 뮤지컬 '시데레우스'를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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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17세기 초에 망원경이라는 도구의 도움으로 목성의 위성들을 발견하고, 요하네스 케플러와 학술 교류를 하면서 지동설을 정립하던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다. 과학사를 소재로 한 이례적인 국산 창작 뮤지컬로, 2019년에 초연을 해서 올해는(2026년) 벌써 5연째였다.

아시다시피 갈릴레이 갈릴레오는.. 공기 저항이 없는 한 모든 물체는 언제나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걸 규명한 걸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진자의 등시성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요하네스 케플러를 만나면서 연구의 범위가 우주로 확장됐다.

그도 처음에는 지동설이 정말 맞을까 긴가민가 했다. 하지만 목성의 위성 등, 천동설로 설명이 안 되는 더 복잡한 천체 현상들을 발견하면서 지동설에 확신을 갖게 됐다.
이들이 관측만으로 정립한 사실들을 수십 년 뒤 뉴턴이 미적분학과 고전역학을 정립하면서 수학 이론 차원에서 쐐기를 박았다.

우리가 지금 너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천체의 운동 패러다임이 저 1600년대에는 정말 사고방식의 대격변이었겠구나 싶었다. 갈릴레이나 케플러 같은 17세기 우주덕들이 지금처럼 우주 망원경에다 현대 우주론의 연구 성과들을 본다면 놀라서 까무러치지 싶다.

여담으로는..

  • 갈릴레오의 딸은 세례명이 '마리아 첼레스테'였다고 한다. (본명은 따로 있음) 19세기 말에 악명을 떨쳤던 전설적인 유령선도 이름이 '메리 셀러스트'이다! 일단 같은 이름이란 게 공교롭게 느껴진다. 뭐, 얘도 처음엔 이름이 아마존 호였다가 나중에 저렇게 개명됐다.
  • '토리첼리'가 갈릴레이의 제자였다. 그 옛날에 수은 76cm, 물 10.3m.. 이렇게 대기압이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규명한 사람이다.
  • 천체의 운동이 수학적인 질서가 있으면서도, 그게 역설적으로 너무 카오틱하기도 해서 해석적인 일반해를 정확하게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훗세에 의해 추가로 증명되었다(삼체 문제..).

  • 천동설 vs 지동설 다음으로 천문학이 비교적 현대에(20세기 중후반) 논쟁을 벌였다가 결판이 난 분야는.. 우주의 기원과 관련하여 정상우주 vs 대폭발이었다. 이때는 갈릴레이나 뉴턴 연배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을 "우주가 팽창한다"라는 개념까지 정립된 상태였다.

  • 17세기 저 때의 물리학은 “현상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에 진심이었다. 하지만 사과가 떨어지는 운동에 대해 정확하게 기술하고 계산과 예측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 중력이란 게 본질적으로 왜 생기는지늘 규명하는 건 또 별개의 영역이다. 그걸 캐기 위해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을 개척했지만.. 여전히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 건 아니다.

  • 그러고 보니 망원경은 거시세계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작고 안 보이는 목표물(건물, 지형, 천체..!)을 확대해 보여주는 기기이고, 현미경은 그냥 크기가 절대적으로 너무 작아서 안 보이는 목표물을 확대해 보여주는 기기이다. 흠, 그럼 안경은 스케일이 둘의 중간인 건지..
    역사적으로는 망원경과 현미경 모두 1600년대 초에 비슷한 시기에 첫 등장했다. 그 뒤 둘은 자기 역할에 맞게 특화되고 따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2. 우주에 대한 성경의 서술

내가 아는 한, 성경은 천체를 분류하는 게 해와 달과 별들.. 이걸로 끝이다. 별은 집단으로 다뤄지며, 욥기 38장 같은 데서 특정 별자리 이름이나 좀 나오는 정도이다.

그런데 성경엔 영킹 기준으로 딱~~ 한 번 planet 행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왕하 23:5). 해와 달 다음으로 별들, 하늘의 군대/군상 같은 통상적인 용어가 아니라 행성이라니! 이게 뭘 의미할까? 비킹에서는 그냥 별자리, 성단 등이라고 바뀌어 번역됐다.

성경에는 참교육이나 분노의 질주 같은 개념은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이 땅(지구), 해와 달과 별 말고 '태양계'라든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같은 특정 '행성'을 암시하는 용어나 개념은 내가 알기로 전혀 없다. 그런 건 인간들이 훗날 망원경을 발명하고 로켓과 인공위성을 발명하면서 관측과 탐사를 해서 알아낸 것들이다.

물론 그 전 까마득한 옛날에도 인간은 육안으로도 목성을 넘어 무려 토성까지 어렴풋이 관측을 해냈다.
허나, 그때는 지금 우리가 아는 것 같은 항성과 행성이라는 엄밀한 구분이 없었다. 수성이니 화성이니 목성이니도 1~6등성 범주에 드는 독특한 별 중의 하나로 여겨졌을 것이다.
왕하 23:5의 planet은 "어둡지만 가까운" 수성 화성 목성 같은 천체건, "까마득히 멀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이건.. 뭔가 움직임이 독특하고 인간 눈에 띌 만한 천체 픽셀을 통틀어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비슷한 예로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elements 원소도 있다.
현대의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야 이 단어를 읽으면서 화학 원소를 떠올리겠지만.. 성경의 저 본문은 돌턴의 원자설과 원소 체계 같은 게 없던 시절에 기록되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같은 단어가 어떤 분야의 101급, '개론, 초등 원리' 비슷한 뜻으로도 쓰였다. 뭐, 화학 원소 내지는 그에 맞먹을 정도로 어떤 system의 구성원, 구성요소 같은 걸 떠올려도 될 것 같다.

3. 과학과 종교의 경계

뮤지컬에서 케플러의 대사 중에는.. "나는 신을 안 믿는 게 아니고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주는 그저 신이 창조한 미지의 안알랴줌 공간인 것이고 그걸 관찰해서 정체를 밝히는 건 자연과학 하는 사람의 별개의 영역일 뿐이다"란 요지의 말이 있었다.

과학은 자연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실험했을 때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가 재현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학문이다. 과연 그러한가, 가설이 맞는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입증하는 학문이다. 이런 정상적인 방법론만 동원했다면 부정이니 사기니 틈탈 여지가 전혀 없다. 증거 없이 일단 믿는 신앙이나 신학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야이다.

교황청은 지동설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갈릴레이를 잡아 족칠 게 아니라, 선량한 과학자들의 눈을 현혹하는 결과를 내는 망원경부터 때려부수고 망원경 제조업자부터 화형 시켰어지??? 개인적으로는 뮤지컬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뭐 아침이 오는 게 싫다고 수탉을 죽이는 것과 같은 뻘짓이지 않은가? 그런 것처럼 괜히 갈릴레이를 종교 프레임 씌워서 괴롭힌 것도 죄다 뻘짓이었다.

혹시 설마 '안알랴줌'이 불편하거나 불경스럽게 들리시는가? 하나님은 당장 우리 삶 속에서도 갑자기 이유 없는 고난을 주실 때가 있고, 예수님 재림 날짜도 안 알려주시고, 나 언제쯤 죽는지도 안 알려주신다. 우리 일상 속에서 안알랴줌이 엄청 많다. 하물며 자연과학 영역에서 안알랴줌 정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관련하여 문제될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교황청이라는 데가 오로지 성경의 문자적인 묘사에만 집착하면서 천체의 움직임을 직접 관찰할 생각이라고는 1도 안 한 고지식한 반지성주의 꼰대 집단이기만 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쟤들도 이 바닥에 굉장한 조예가 있었다. 이스터가 언제, 성모승천일이 언제, 날짜와 절기를 따지는 일에 진심이었다. 달력 역법의 이름에 괜히 교황 이름이 붙은 게 아닌 걸 생각해 보자.

1582년에 제정되어 오늘날 전세계 공통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레고리력 말이다.
"윤년을 4의 배수 연도마다 한 번씩 무조건 넣으니까 갈수록 오차가 생기더라~ 그래서 400의 배수가 아닌 100의 배수 연도에는 열외를 넣자"
거기 교황과 추기경들은 예나 지금이나 머리 하나는 최고로 날고 기는 똘똘이들이다. 전세계 종교 수장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니.. 지금으로부터 400년도 더 전에 저 정도 관찰을 하고 대안까지 생각해 낸 집단이란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세계 각국에서는 자기네 무슨 왕 재위 n년.. 이렇게 연호를 쓰다가 19세기 말이 돼서야 서구화 근대화 명목으로 서기 연도와 그레고리력을 도입한 편이었다.
그런데 저 동네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도 전에 저런 달력을 제정해서 쓰고 애초에 기준 연도도 '서력'이었다니, 이것도 굉장히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천동설 지동설 관련해서는 옛날에 이상한 ㄸ고집을 부렸던 것 같다.

4. 태양계 행성들의 주요 제원(?)

  • 자전축: 0도 부근(수성, 토성, 해왕성), 23도 부근(지구, 화성, 목성), 90도 전도(천왕), 180도 전복(금성)
  • 중력가속도: 3.7 (수성, 화성), 8~12 (금성, 천왕성, 지구, 토성, 해왕성), 25 (목성)
  • 자전 주기: 10시간(목성, 토성), 16~17시간(천왕성, 해왕성), 1일(지구, 화성), 58일(수성), 243일(금성) + 27~30일 부근(달, 태양)
  • 표면 대기압: 0 부근(수성, 화성), 1~1.x(지구), 95(금성)

수성은 태양과 워낙 가깝다 보니 공전 주기가 엄청 짧으며(각속도), 실제 공전 속도(선속도)도 혼자 초속 47km에 달할 정도로 겁나게 빠르다. 공전 궤도의 이심률도 독보적으로 가장 크다(타원에 가까움).
화성은 지구와 자전 주기가 비슷하고 자전축 기울기도 비슷하다.

지구야 뭐 표면에 물(바다)이 있고, 달이라는 이례적으로 큰 위성이 있는 게 특이하다.
금성은 지구와 크기가 비슷하고 거리도 가장 가깝지만.. 고체 땅이 있는 지구형 행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엄청난 고온 고압 불지옥이다. 자전 속도가 끔찍히 느리고 심지어 역행 자전인 것도 특이점이다. 금성만 왜 저렇게 됐을까.;;

그리고, 화성과 목성 사이에는 행성이 있을 법도 한데 왜 텅 비었고 소행성대만 있는 걸까?
수성이 공전이 빠르다면 목성과 토성은 그 큰 덩치로 자전이 왕창 빠른 게 특징이다. 특히 토성은 자전 원심력 때문에 적도 쪽이 대놓고 부푼 게 티가 날 정도이다. 그렇잖아도 가스형 행성이기도 하니..

끝으로, 하나 더 생각할 만한 건.. '태양일'(또는 회합일)이다.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도는 자전 주기는 23시간 56분 남짓이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지구가 1/365.25만치 공전을 하니, 지구가 태양을 바라보는 각도도 미세하게 더 나아가 있다. 그래서 지구도 4분만치 더 돌아야 하늘에서의 태양 위치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이를 더함으로써 지구의 태양일은 24시간이 된다.

이건 1/(자전 시간)이라는 각속도가 1/(공전 시간)이라는 각속도만큼 느려졌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앞의 값에다가 뒤의 값을 빼면 태양일에 해당하는 각속도가 나온다. 그리고 이 각속도의 역수가 곧 태양일이 된다.
지구와 화성은 이렇게 이해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데.. 자전이 매우 느린 수성과 금성은 일이 굉장히 재미있어진다.

수성은 자전(약 58.x일)을 3번 하는 동안 공전(약 88일)을 2번 하는 형태로 조석 고정이 돼 있다.
달처럼 1:1이 아니라 3:2라니.. 수성이 공전 궤도가 이심률이 크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된 듯하다.
1/x - 1/(x+1) 의 값은 1/(x*(x+1))이니, 1/2 - 1/3은 1/6이다. (6 = 2*3 = 3*2)
실제로 수성의 태양일은 자전 주기의 3배 겸 공전 주기의 2배인 약 175일이다. 수성의 태양일은 지구나 화성과는 달리, 자기 자전 주기와는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난다.

그리고 수성의 하늘에서 해가 떴다가 지는 건 단순히 지구 일출 일몰의 slow motion 겸 확대(태양이 훨씬 더 가까이 있으니) 버전이 아닐 것이다.
해가 중천까지 좀 올라가더니만 도로 내려간다. 그런데 이대로 완전히 지는 것도 아니고 다시 뜬다. 게다가 수성의 공전 궤도의 특성상, 태양의 크기 자체도 멀어지면서 작아졌다가 다시 커지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천천히 진행되니 굉장히 기괴한 모양이 될 것이다. 수성은 이 점에서 아주 특이한 행성이다.

다음으로 금성은.. 자전 방향이 역행이어서 해가 서쪽에서 뜬다. 자전 각속도에서 공전 각속도를 빼는 게 아니라 더해 주면 된다. 1/(1/243.02+1/224.70)의 역수는 약 116~117일.. 즉, 금성의 태양일은 각속도 버프를 받는 덕분에 자기 자전 주기의 절반으로 줄어들며, 수성의 태양일보다도 짧다.

금성의 하늘에서 태양의 움직임은 수성 같은 기괴한 변화 없이 지구 일출 일몰의 역주행 slow motion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너무 짙은 안개 때문에 실제 금성의 지표면에서는 태양 따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수성이나 금성의 공전 주기는 저 갈릴레이 시대에도 망원경 관측을 통해 일찌감치 알려져 있었다. 이 행성들의 복잡한 위상 변화가(커졌다 작아졌다, 초승달-보름달 등등) 천동설로는 설명하기 어려우니 지동설의 근거로도 제시될 정도였다. 그러나 자전 주기는 행성의 표면을 정밀히 관측해야 하기 때문에 알아내기 몹시 어려웠다.
무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수성은 1:1로 조석 고정되어 자전 주기도 공전 주기와 동일한 88일일 거라고 잘못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금성은 구름 때문에 완전 불명 오리무중 미스터리였고.. (하긴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금성은 마이애미 해변 같은 곳일 거라고 예상됐었다ㄲㄲㄲㄲ)

그래서 수성과 금성의 정확한 자전 주기는 1960년대에 전파 레이더가 발명된 뒤에야 알려졌다고 한다.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는 마치 지구 임의의 지점에서 위도와 경도를 측정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렇게 엄청난 난이도의 차이가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6/09/15 08:35 2026/09/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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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지금으로부터 한 달쯤 전, 지난 제헌절 무렵에 본인은 아내와 함께 매일 진행하는 성경 통독이 '에스라'에 진입해 있었다. 즉, 바빌론 포로기 종료와 예루살렘 귀환 시기이다.

에스라기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70년 만에 고향으로 귀환했다. 그래서 제단부터 만들어서 의식율법을 다시 시행하고, 뒤이어 성전도 재건하기 시작했다.
성전 기초가 놓이자 사람들이 너무 감격해서 환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참회의 통곡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 솔로몬의 성전을 어렴풋이 본 적 있었던 노인들이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그 무렵에 방영됐던 SBS 꼬꼬무 232화는 참 공교롭게도 재건과 정반대인 철거를 다뤘다. 바로 1995~96년에 진행됐던 조선총독부 청사의 철거 말이다. 이것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30여 년 전의 일이 됐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0년 가까이 건축한 끝에 1926년에 완공됐다. 그게 광복 50주년, 그리고 완공 얼추 70년 만에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철거된 것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명목으로, 1995년 광복절에 지붕 맨 꼭대기의 첨탑 하나만 먼저 크레인으로 들어서 뜯어냈다. 이게 철거의 첫단추를 끼운 퍼포먼스였다.

에스라서에서는 성전 재건의 기초가 놓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렇게 감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식민 지배의 원흉 본부 건물의 철거가 시작됐을 때 사람들이 감격하고 환호하고 난리였었다.
두 사건이 서로 굉장한 대척점? 안티테제를 형성하는 것 같다.

꼬꼬무를 보니 그 당시에 첨탑을 끌어내리기 위해 대형 크레인을 현장 부근에 미리 설치한 것, 건물의 내부에서 보관 중이던 수많은 문화재들을 미리 대피시킨 것(그 당시엔 조선총독부 청사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어서..) 등 숨겨진 비화가 많이 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경복궁과 너무 가까이 있는 관계로, 섣불리 폭파 같은 과격한 방법으로 해체하기는 어려웠다. 중장비를 동원하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한뼘 한뼘 조심해서 뜯어내다가.. 1년쯤 뒤, 마지막 남은 자그마한 벽면만 역시 상징적인 차원에서 폭파해서 무너뜨렸다고 한다.
제일 먼저 뜯어냈던 첨탑은 천안에 있는 독립기념관의 야외 전시장으로 옮겨져서 처참하게 낡아 가는 중이라고 꼬꼬무에서 언질을 줄 법도 한데.. 이에 대한 언급은 더 없었다.

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는 찬성이고 잘했다는 소신이다. 웬만하면 보존해서 다른 건물로 사용할 법도 하지만, 쟤는 용도뿐만이 아니라 위치도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에 너무 안 좋은 구도로 있었다. 옛 서울 역 건물 같은 건물이 아니다.
그나저나 조선총독부가 무슨 종로 경찰서 같은 시설도 아닌데, 지하에 웬 유치장이나 고문실 같은 방이 있었는지는 좀 의문이다. 총독부 청사의 지하엔 위급 상황에서 VIP의 피신용 패닉룸 벙커 같은 거나 있는 게 자연스럽지 않겠나?

2. 친일파(?) 금수저 가문 출신 여배우

난 누군지도 몰랐는데 최근에 참교육 드라마 때문에 얼굴 알게 된 어느 예쁘장한 여배우가 말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굉장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람은 정말 엄청난 가문 출신이었구나.;;;
별 생각 없이, 정말로 모르고 내뱉은 말 때문에 당사자도 엄청 골치 썩었고, 소속사라든가 그녀와 계약 맺었던 기업들도 "아이고 두야" 하며 뒷목 잡았지 싶다.

저 정도면 집안 조상님이 그냥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소극적으로 순응하고 부역한 수준을 넘어서기는 하는 것 같다.

  • 고종 황제도 치료했었다고? 그 신분과 능력으로 아예 고종의 암살에나 관여하지 않았으면 다행이고, 그리고 칼빵 맞고 실려왔던 이 완용 대감님한테도 당대 최고의 의술을 베풀면서 치료했었네?
  • 소록도에서 근무했었다고? 그때 거기서 일했던 의사들은 여수 애양원에서 나병 환자 섬겼던 손 양원 목사와는 영 딴판인 일을 했던 거 같은데?
  • 내선일체 모범 가정이라고 신문에 소개된 게 무슨 1940년대였으면 나도 이해한다. 근데 이거 뭐 민족말살이니 문화통치니 아무것도 없고 3· 1 운동도 일어나기 전 1916년에 벌써 대문짝만 하게 소개된 거면..

나도 반일정신병 극혐하는 소신이고, 이딴 일 갖고 미개한 연좌제는 절대 반대한다. 하지만 조상의 저 행적 자체를 "그 시절에 친일 안 한 사람 어딨냐" 그러면서 다 물타기 하기는 어렵다고 보여진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소설 "꺼삐딴 리" 이 인국 박사의 판박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가 누구건 의술을 베풀어야지, 매국노라고 치료도 하지 말아야 하냐" 이렇게 반문하는 혹자가 있는데.. 이건 좀 논점일탈이다. 이때 이 완용은 평범하게 다치거나 아픈 것도 아니었고, 의거에 의한 저격을 당한 상태였다.
의료인으로서 매국노도 치료한 것 자체를 반인륜 반민족 행위로 간주해서 후세가 단죄하는 것까지는 에바라고 쳐도, 그건 자랑스럽게 떠벌릴 이력도 절대 못 되지 않겠는가?

문 재인이 변호사 시절에 페스카마 호 흉악범들 옹호했던 것도 직업적으로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정치 성향에 따라서는 그의 그런 과거 행적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그들은 그런 견해를 가질 권리가 있다.
하물며 이 완용을 치료했다는 의사에 대해 일단 부정적인 편견을 갖는 것은  한국인으로서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이걸 반일정신병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무슨 빨간 대게 그림을 갖고 욱일기라고 트집 잡는 짓거리야 진짜 반일정신병이겠지만.. 이건 그와 다른 상황인 것이다.

아 물론 당연히.. 후손인 저 여배우 당사자가 뭘 직접적으로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다.
성형 의혹도 아니고 사생활 스캔들도 아니고, 마약 도박 음주운전 아니고, 과거 학폭 가해자 내력이 폭로된 것도 아니고 그런 부류는 전혀 아니긴 한데..

다만,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 인기로 먹고 사는 직업을 선택했는데 괜히 할 필요 없는 말을 스스로 늘어놓는 바람에 커리어에 약간 태클 걸리고 흑역사 논란거리 스크래치가 추가된 건 누구라도 실드 치기 어려워 보인다. 국민정서법의 여파를 한동안 좀 감내를 해야 할 것 같다. -_-;;;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자랑했으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하지 않은 일로 비난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이게 이번 사태의 핵심이라 하겠다.

당장 대놓고 몰락했다기보다는, 더 몸값 올라가고 더 출세할 기회가 꺾인 거지.
그래도 아까도 말했듯이 이게 무슨 활동 중단에 자숙까지 할 심각한 허물은 절대 아니니,
이 참에 어디 좋은 일 하는 단체에 기부 많이 하거나, 역사 관련 영화· 드라마에 선역으로든 악역으로든 쿨하게 출연료 안 받고 출연하거나.. 이런 걸로 얼마든지 퉁치고 넘어갈 수도 있다고 본다. 저 사람이 부디 이 상황을 지혜롭게 잘 극복했으면 좋겠다.

난 예전에도 글로 몇 차례 썼지만, 한국이 해방된 건 100% 전적으로 미국 덕분이지 국내의 독립운동가들은 하나도 기여한 게 없다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일본을 패퇴시키고 몰아낸 건 미국의 군사력, 특히 그놈의 원자폭탄이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도 그렇게 죽을 힘 다해서 독립 의지를 표출하고 호소하지 않았다면..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그게 한국의 해방· 독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을 수 있었다. 아니 최악의 경우는.. 아예 같은 추축국 진영으로 취급 받고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

반일정신병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할배를 좋아하는 우파일 텐데.. 저런 식의 '독립운동 뻘짓론'을 리 승만 할배가 들었다면.. 아마 땅을 치고 통곡하거나, 격분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났지 싶다.
할배는 미국을 상대로 그놈의 알량한 광복군 병력을 거짓말로 뻥튀기까지 하면서 "우리도 일본을 상대로 싸울 수 있다~ 우리도 연합국의 승전에 밥숟가락 얹었다" 필사적으로 호소했던 사람이었다!

3. 성경이 말하는 독립과 자유

이번 광복절의 다음날엔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설교 제목부터가 “그리스도인의 독립과 자유”였다.
성경 본문은 그 유명한 갈 5:1 “다시는 속박(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이 구절이 제일 좁은 의미에서 말하는 건.. 구원에 관한 한 다시는 할례니 안식일이니 하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하지만 이건 비유대인에게는 막 심각하게 와 닿지는 않는 주제이다. 적용 범위를 신약의 범위에서 조금 넓히면.. 기껏 구원받았더니 도로 육신의 죄악된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 까지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옛날에 할배 대통령은 “우리는 일제로부터 너무나 어렵게 힘들게 해방됐고, 공산당으로부터도 자유를 끝내 지켜냈다. 우리는 이제 문화, 경제, 군사 등 어느 분야에서든 절대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한다. 내가 우리 민족에게 남기는 유언은 갈 5:1”이다.”라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었다. 물론 이건 기독교 교리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제일 넓은 영적 적용일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배경이 있으니 본인도 오후에 준비 찬송을 인도할 때는 자유가 들어간 곡들을 쭉 검토하고 골라 봤다.
0순위로 곧바로 무조건 바로 떠오르는 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되시겠다.
“속죄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라”도 좋은 예시이다. “내게 자유 주시려고 주가 고난 당했네”가 있다.

“놀라운 주의 은혜” Wonderful grace of Jesus에는 setting my spirit free와 giving me liberty가 나란히 나온다. 우리말에는 “참 자유 주신 주” 정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놀라운 주의 은혜”와 “주 보혈로 날 구해 준”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의 가사에는 둘 다 쇠사슬이 끊어졌다는 묘사가 있다.

  • Chains have been torn asunder, giving me liberty
  • My chains fell off, my heart was free (사도행전 12장,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풀려나는 장면을 대놓고 오마주..)

하지만 우리말 번역 가사에는 이런 것들이 빠졌다.
우리말 찬송 중에 뭔가 쇠사슬이 끊기고 풀렸다는 묘사가 있는 곡은.. 찬송가라기보다는 캐주얼 복음성가 후크송(?)에 더 가까운 “나 자유 얻었네 너 자유 얻었네 우리 자유 얻었네”가 전부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6/08/17 19:35 2026/08/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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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1년, '오쓰 사건'이라고..
일본을 방문 중이었던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를 대상으로 어느 정신이상 망상장애 일본인이 칼을 휘둘러 외국 국빈 암살 미수라는 엄청난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이때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참 전이었고 일본은 대국 러시아 앞에 넙죽 엎드리고 쩔쩔매던 시절이었다. 조선에서도 일본을 견제하려고 괜히 러시아에게 붙으려 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나중에 을미사변이 1895년에..)

그랬는데.. 저 사건은 수틀리면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날 수도 있는 심각한 사항이었다.
일본에서는 사태를 수습하려고 그야말로 천황부터 신민들까지 몽땅 국가적으로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서 황태자를 문병 갔고, 전국 각지에서 "황태자님,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쾌유를 빕니다" 전보가 빗발쳤다.

가해자는 당연히 붙잡혔다.
그런데 그때 일본의 법은 "황족을 고의로 죽거나 다치게 한 자는 대역죄를 적용하여 무조건 사형에 처한다"였다. 이때 황족이란 자국의 황족을 의미했다.
러시아의 황태자는 저 법에서 가리키는 황족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 사람도 다치기만 했지 죽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일본의 법으로는 가해자를 무기징역까지는 처해도 사형에 처할 수는 없었다.

이때 일본 정부에서는 담당 판사에게 외압을 넣어서 "우린 지금 러시아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 그러니 러시아 황태자도 황족으로 간주하고 어떻게든 저놈을 사형시켜라" 이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 당시 판사는 "우리 일본은 그렇잖아도 서구 열강에게 밀리고 무시당하는 중이다. 그런데 상황이 급하다고 사법이 그렇게 일관성 없게 누구 기분 따라 들쭉날쭉으로 돌아가면..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국제 사회에서 미개한 호구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라고 반박했다. 그리고 원칙대로 무기징역까지만 때렸다.

우와 이거 영국을 상대로 법을 논하면서 항변했던 청나라 임칙서를 보는 것 같다.
일본에서는 저런 소신판결이 통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이 국가적인 사죄 운동과 가해자의 무기징역 처분으로 만족하고 사과를 받아들였다. 일본에게 더 딴지 걸거나 보복하지는 않았다.

2.
1898년엔 이웃 조선에서 자국 국왕을 상대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고종은 그 옛날에 커피를 굉장히 좋아했던 사람인데, 거기에 누군가가 치사량을 넘는 아편 마약을 탄 것이다.
고종은 커피잘알이어서 그런지 몇 모금 맛만 보더니 맛이 이상하다고 바로 뱉어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들 순종은 그걸 마셔 버리는 바람에 오랫동안 끙끙 앓고 평생 후유증 장애까지 얻게 됐다.

이 사건의 용의자로 최근에 국왕과 사이가 안 좋아진 신하 김 홍륙이 지목됐고, 공범도 몇 명 잡혔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는 함 태영이라고.. 그야말로 구한말, 일제 시대, 대한민국을 두루 아우르며 법조인, 목사, 교사, 부통령까지 역임했던 젊은 똘똘이 천재 지식인이었다.

그는 자기가 공부했던 법리로 이 사건을 조사해 보니, 김 홍륙이 진짜로 암살에 개입했는지 증거조차 아직 불확실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역모는커녕 무죄 선고를 하려 했다.
고종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저놈을 역적으로 몰아서 사형에 처하라고 외압을 넣었으나.. 함 태영은 자기 소신을 고집했다. 그러자 고종은 그 사람을 짜르고 다른 판사를 동원해서 기어이 김 홍륙 일당을 사형에 처해 버렸다.

뭐, 왕족을 암살하려 한 놈이니 당사자를 사형에 처하는 건 그 어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친다. 아까 그 일본법 기준에도 완벽히 부합한다.
근데 이번에는 그냥 죽인 게 아니라 시체를 공개 전시해서 백성들이 다 뜯고 찢게 했으며, 마누라를 포함한 가족까지 몽땅 감옥에 가둬 옥사시키거나 유배형에 처했다.

자, 1898년이면 오쓰 사건보다 나중이고 조선에서 갑오개혁도 일어난 뒤였다. 반역죄인이라도 연좌제 내지 죽은 시체한테 소급 처벌은 한참 전의 '영조' 때부터 이미 폐지· 금지 상태였다. 그랬는데 고종은 그야말로 감정적인 괘씸죄에 의거한 잔인한 형벌과 초법적인 보복을 마구 남발했었다. 서 재필, 김 옥균 때도 그랬고, 김 홍집 때도 그랬고..

이 사건은 당연히 국제적으로 지탄받았다. 일본이 남의 나라 궁궐에 무단으로 쳐들어가서 왕후를 살해한 만행이 세계에 알려져서 규탄받고 이미지가 깎이긴 했지만, 그 피해 당사자 국가의 내부에서 미개한 짓이 벌어진 것도 마찬가지다. 세계 각국 외교관들이 이 소식을 자국으로 타전했다.

뭐, 변명이나 참작의 여지는 있다. 고종은 참 좋지 않은 시국에 힘겹게 왕 노릇 하느라 정신 건강이 좋을래야 좋을 수 없던 상태였다.
안에서는 반역 쿠데타에 암살/독살 음모, 밖에서는 외세 침략..;; 오죽했으면 남의 나라 대사관으로 도망가서 목숨을 구걸할 정도였으니.. 자국의 사법과 치안이 개판이기 때문에 군주가 오히려 자국의 치외법권이고 외국 법이 통용되는 곳으로 도피한 것이다.

이러니 고종은 노이로제 수준으로 극도로 예민해졌으며.. 망상에 빠져 아무나 막 의심하고 죽이고, 누구를 사형에 처할 때 곱게 죽이지 않고.. 뭔가 궁예나 히틀러나 스탈린의 말년 같은 모습으로 얼마든지 빠질 법했다.

게다가 민씨 집안으로부터의 부추김도 있었다. 뭐, 고종은 실제로는 히틀러나 스탈린 정도로 깽판을 칠 권력 자체가 없으니 그런 스케일로 깽판 치지는 않(못)았지만 말이다.
고종에 대해서 예로부터 저런 독살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1919년에 고종이 진짜 죽었을 때는.. 일제에 의한 독살 의혹 루머가 쫙 퍼질 만도 했다. (진실은 저 너머에..)

그리고 원인이야 어쨌든, 그의 이런 행태는 "일본 정도면 조선을 지배해도 되겠다"라는 국제적인 통념에 기여를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해방 후에 "우리는 군주제는 절대 다시 하지 말고 민주공화정으로 가야 한다" 이런 생각을 식자층들이 하게 됐다.

참고로, 훗날 대한민국에서는 1980년대 대머리 땅끄 대통령도 사법부에 외압을 넣고 개입한 적이 있었다. 뭐 이런 것들..

  • "대통령 각하께서 대국민담화를 해 버렸으니 국민 앞에서 약속을 지켜야 된다. 이 윤상 군의 유괴살인범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사형에 처해라"
  • "여성들한테 독약 먹이고는 죽어가는 걸 스너프 사진을 찍었다고? 아이고 88 서울 올림픽이 코앞인데 세계가 지켜보는 와중에 동네 창피하다. 더 조사할 것도 없고 그놈은 바로 사형 때려~ 이건 명령이다"

하지만 이건 정치범이 아니라, 증거 확실하고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뒈져야 마땅한 흉악범을 처단한 것이어서 구한말 고종과는 상황이 다르다. 시체를 공개적으로 잔인하게 능멸한 것도 아니니..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정의를 구현한 사이다 같은 구석도 있었다. ㄲㄲㄲㄲㄲ

3.
자, 원래는 글을 여기까지만 쓰고 말려고 했는데, 고종과 관련하여 또 하나 흥미로운 사건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다. 바로 1896년의 치하포 사건..!!

이건 따지고 보면 조선 땅에서 무고한 일본인이 아무 면식도 없는 조선인에게 살해당한 테러이자 강력 범죄였다.
하지만 이건 을미사변 때문에 그렇잖아도 반일 감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록 애매한 사람을 죽이긴 했어도 표면적인 명분은 민비 암살에 대한 보복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일본도 이때는 이걸 명분으로 대놓고 무력 보복을 하지는 않고 몸을 사렸다. 총칼 대신 외교부가 개입해서 "범인을 꼭 체포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해라~ 사건 조사를 우리가 하겠다" 이렇게 점잖게만(?) 압박을 넣었다.

이때 고종은.. 일본의 요구에 호락호락 따르지 않고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난 김 구가 일본인을 죽이고 나서 거의 직후에 현행범으로 체포된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조선 정부는 범인을 색출하고 체포하라는 일본 측의 요구에도 일부러 영혼 없이 세월아 네월아 늑장 대응하다가.. 사건 발생 무려 3개월 후에야 그를 체포했다.

일본 측:, "너네 법을 보니 살인범은 참수를 하게 돼 있네? 저놈을 반드시 참수해 주시오"
조선 왈: "ㄴㄴ 우리도 근대화 돼서 갑오개혁 이후로 사형은 교수형으로 집행한다. 작년에 동학의 수괴 전 봉준도 교수형이었으니 김 창수(김 구의 옛 이름) 역시 교수형에 처하겠음."

이래 놓고는 김 구를 감금한 채로 또 딜레이를 시전했으며.. 고의에 가깝게 죄수들을 아주 허술하게 관리했다. 결국은 탈옥이라는 명목으로 김 구를 사실상 석방 방면해 버렸다.
글쎄, 이때 서울-인천 간에 전화가 갓 개통돼서 국왕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 명령을 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아시다시피 백범일지에는 워낙 이빨 주작도 많아서 말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고종은 김 구의 처분에 관해서는 절대로 일본 말을 호락호락 듣지 않음으로써 을미사변에 대해 아주 쪼잔 소심하게 저항하고 뒤끝을 부리긴 한 것으로 보인다. "니들이 민비 암살범(미우라 고로)을 대놓고 감싸고 풀어 줬어? 그럼 우리도 일본인을 죽인 조선 신민을 감싸 줄 거다"랄까?
이것도 위의 1, 2번과 더불어 생각할 점인 것 같다. 오쓰 사건, 독다 사건에 이어 치하포 사건이라니..!!

이렇듯, 김 구는 2년 가까이 해주와 인천 감옥에서 빵살이를 하다가 탈옥을 했다.
참고로 이 승만은 조금 나중인 1899년에 고종 폐위 음모에 휘말려서 5년 반이 넘게 옥살이를 하다가 사면을 받고 풀려났었다. 이 승만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신인 한성감옥에서 지냈기 때문에 김 구와는 장소가 달랐다.
뭐, 고종은 그로부터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헤이그 밀사 파견 내역이 발각되는 바람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 폐위됐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27 08:35 2026/07/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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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이야 x86이라는 컴퓨터 아키텍처가 세계를 완전히 평정해 버려서 PC부터 슈퍼컴까지.. 그야말로 모바일만 빼면 다 쓰이는 것 같다. 그리고 인텔은 그 x86이란 걸 최초로 개발한 본가로 너무나 유명하다.

x86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하위 호환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아주 점진적으로 진화해 온 아키텍처이다.
1970년대에 8086과 8088이라는 16비트 CPU에서 시작됐는데, 심지어 더 옛날에 8비트 시절의 8080도 x86의 전신 조상이라고 볼 수 있다. 8008이나 4004까지 가면 너무 멀어지는 것 같지만...;;;

이 x86은 1980년대 중반 80386 버전에서 32비트로 확장됐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엔 64비트로도 확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x86-64는 인텔이 아니라 AMD에서 처음으로 내놓았다는 것이 특이점이다.
이런 주류 라인인 x86 말고 인텔에서 만든 CPU라니, 뭔가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 중에서 Windows, Office, Visual Studio가 아닌 계열을 탐방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런 것들이 있었다. 다들 32비트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 iAPX 432 (1981)

인텔에서 개발한 최초의 32비트 CPU는 80386이 아니라 바로 이놈이었다.
16비트 x86이 최대한 저가 보급형에 현실 타협 컨셉으로 개발됐으니, 그 다음 32비트 CPU는 큰 포부를 갖고 실험적인 기능을 몽땅 때려박아 보자~~ 이런 목표를 갖고 개발됐던 것 같다.

x86만 해도 명령어가 아주 촘촘하고 내부 구조가 복잡한 CISC 방식이었는데, 얘는 그 이념이 더욱 극대화됐다. 운영체제나 특정 객체지향 언어 vm에서 소프트웨어적으로 담당할 일을 CPU가 회로 차원에서, 길다란 인스트럭션 하나 직통으로 최대한 지원하는 것을 추구했다.

구체적으로는 그 시절에 특수 분야에서 현역으로 쓰이고 있던 Ada 언어와 아주 찰떡궁합을 이루려 했다. 오오~ 그러면 이 CPU를 타겟으로 하는 Ada 컴파일러는 intrinsic 명령이나 구문이 많이 제공됐겠다.

글쎄, 객체지향 언어라면 RTTI 기능이나 가상 함수/메시지 테이블을 뒤지는 기능이 CPU빨로 직통 지원된다면 그건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그 시절 기술로 CPU 안에 지나치게 많은 기능을 집어넣는 건 부작용을 야기했다.
CPU 내부가 너무 복잡해졌고 제품의 생산 비용도 치솟았다. 그런 주제에 얘는 동시대의 "16비트" 프로세서인 80286보다도 속도가 훨씬 느려졌다.

그나마 이 CPU의 장점을 살릴 수 있게 코드를 잘 생성하는 컴파일러를 개발하는 것도 영 지지부진했다. 단점은 한 트럭인데 장점도 애매하고.. 총체적인 난국이었으며 결국 이 아키텍처는 실패로 끝났다.

이런 홍역을 치렀으니, 인텔에서 1985년 말에 80386은 기존 8086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고 호환성도 살리면서, 정말 바꿔야 하는 부분만 16비트에서 32비트로 확장하는 컨셉으로 만들어졌다.
32에서 64비트로 넘어갈 때 Itanium은 망하고(너무 파격적) AMD64가 살아남았었다(좀 보수적). 그런데 이와 같은 유형의 삽질이.. 옛날에 32비트로 넘어갈 때도 인텔 내부에서 이미 벌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i960 (1988)

iAPX 432의 실패 이후에 인텔에서 오랜만에 새로 만든 비x86 CPU는 바로 얘였다. 정확히는.. 처음엔 지멘스와 공동 개발을 시작했지만 지멘스 쪽이 프로젝트를 포기하고 중도 이탈하면서 최종 결과물이 인텔 것이 되었다.

i960은 CISC가 아닌 RISC 방식으로 설계됐으며, 애초에 범용 컴퓨터가 아니라 산업용 임베디드 MCU 용도로 만들어졌다. 에, 그러니까 절대적인 성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특정 분야 연산만 겁나 잘한다거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퍼지지 않고 끈질기게 잘 돌아가는 것 말이다.
얘는 처음에 군용으로 납품되었으며 초창기 F-22 전투기의 내부에도 들어갔다고 한다. 미군 전투기..?? 거기야말로 오랫동안 Ada 언어를 사용했던 곳이 아닌가? 반면교사 선배격인 iAPX 432가 관심을 가졌던 그 언어 말이다.

i960은 인텔이 만들었던 비x86 CPU 중에서는 가장 성공했다. 범용 컴퓨터가 아닌 덕분에 특정 분야에서 고정된 고인물 수요가 보장되어서 수십 년 동안 생산되고 쓰였다.
얘는 일본 SEGA에서 개발한 버추어 파이터 2의 플랫폼인 MODEL2 기판에 채택되어 쓰이기도 했다.

"게임 크리에이터 열전"이라는 20년 전의 일본 만화에서 '스즈키 유 - 버추어 파이터' 편을 보면, 그 시절 기계로 현란한 3D 그래픽 애니메이션을 구현하기 위해 전투기에 들어가는 CPU까지 구해서 기판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1편 때는 조종사 훈련용 전투기 시뮬레이터에 들어가는 CPU와 GPU를 도입했었다. (MODEL1, NEC V60) 그러다가 MODEL2는 전투기 실물에 들어가는 인텔 i960 CPU가 쓰인 것이다. 그런 차이가 있다~!

3. i860 (1989)

얘는 960과 동시기에 같은 회사의 다른 팀에서 나란히 개발되고 있던 또 다른 32비트 CPU였다. 960보다 숫자가 작지만 960보다 나중에 출시됐다.
얘는 산술· 과학 계산을 빡세게 하는 워크스테이션이나 슈퍼컴을 겨냥하여 FPU를 64비트 스케일로 내장했다. 그리고 명령의 병렬 수행을 여러 모로 의식해서 명령 체계를 RISC를 넘어 VLIW 형태로 설계했다. 사실상 32비트판 Itanium이고 Itanium의 정신적 선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i860은 컴파일러가 특정 분야의 프로그램 한정으로 이 CPU의 특성을 잘 살리는 방향으로 코드를 잘 번역하고 잘 생성해 줘야만 제 성능을 낼 수 있었으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대부분의 상황에서 얘의 성능은 기존 CPU나 동급 경쟁사의 CPU보다 뛰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얘는 얼마 못 가고 실패했다.

인텔은 그래도 이 설계 이념을 버리지 못했다. x86이 당장 현실적으로 상업적으로는 잘나가고 있지만 얘는 레거시 때문에 구조적으로 너무 지저분하긴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중에 64비트로 갈아탈 때는 iAPX 432와 i860의 이념을 계승하면서 단점을 보완은 했다고 생각하면서 Itanium을 개발했다. 하지만 Itanium은 실패한 선배의 전철을 거의 그대로 밟으면서 역시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래도 인텔 i960과 i860의 개발진은 훗날 x86 동네에서 Pentium Pro CPU를 개발했다. 멀티미디어 지원에 필요한 병렬화 고속 연산 명령인 MMX를 만들어서 그 이념을 x86에다가 실현해 냈다.

사실은 마소의 Windows NT라는 것도 맨 처음, 최초로 타겟으로 설정한 아키텍처는 놀랍게도 이 i860이었다고 한다. 마소가 전통적으로 인텔 진영과 사이가 좋기도 했으니.. 하지만 본가이던 i860이 망조가 들고, NT는 처음부터 이식성도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곧 x86, MIPS 등의 아키텍처로 포팅된 것이다.

나중에 Windows 2000은 NT 버전 5.0 급이었는데, 얘도 64비트용은 Itanium이 정식 출시되기를 기다리면서 대부분의 기간을 DEC Alpha 환경 내지 Itanium 껍데기 시뮬레이터에서 개발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도 인텔 CPU가 통수를 치는 바람에 Win 2000은 사실상 x86 전용으로, WinNT의 역사상 지원 CPU가 가장 적은 버전으로 개발돼 버렸다.

글쎄, 인텔이 구닥다리 X86을 버리려고 1990년대부터 삽질했었다면, 마소는 NT 커널을 버리려고 2000년대 중후반부터 이것저것 실험하고 노력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시도 역시 전혀 성공하지 못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6/07/10 08:35 2026/07/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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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 관순: 나는 공산당.. 아니, 왜놈이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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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관순 열사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중에는..
"유 관순은 일제 강점기 당대에는 인지도가 전혀 없는 듣보잡이었다가 해방 이후에야 뒤늦게 발굴되고 부각됐다. 3· 1 시위에서 천안 나와바리의 행동대장이었을 뿐이지, 딴 지역에도 유 관순 정도의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친일 변절 지식인들에 의해 불순한 의도로 쟤만 혼자 '너무' 신격화된 경향이 있다" 이런 부류의 평가절하가 있다.

저게 유 관순 말고도 타 지역의 여러 열사들을 같이 골고루 기억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라면 얼마든지 고려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고 유 관순이 진짜로 타 지역 시위 주동자 대비 단 1도, 추호도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이 역시 필터링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

그때 시위 가담자로서 체포되고 투옥돼서 몇 달, 또는 길어야 1~2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이야 많다. 물론 그 행적만으로도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을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겨우 여고생 신분으로 그렇게 고분고분 옥살이를 하지 않고, 서슬 퍼런 법정에서 "너희 왜놈들은 우리를 재판할 자격이 없다!"고 당당히 외쳤고, 심지어 재판정에서 의자를 던져서 가중 처벌을 받고, 형무소 안에서도 만세 시위를 추진하고.. 자기 신념에 따라 일본의 입장에서는 진짜 악바리 같이 개기다가 기어이 구타로 장살당한 사람은 정말 드문 케이스이지 않은가? 저 증언 자체가 몽땅 조작 구라가 아니라면 말이다.

당연히 그때 투옥됐던 사람들이 전부 다 유 관순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 그때 잠깐 수모를 꾹 참고 옥살이 하고 나와서는.. 공부 더 하고 교육자, 사업가 등으로 크게 성장해서 일본을 실력으로 이기는 게 민족 관점에서 "장기적으로 더 이익"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유 관순도 옥사하지 않고 살아 나왔으면 커서 무엇이 됐겠느냐 말이다.

그러나 저렇게.. 뭔가 이 승복 어린이나 신라의 관창 같은 기개를 보이면서 짧고 굵게 간 예외적인 사람도 의미가 있으며, 후세가 특별히 기억하고 기릴 가치는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만 생각해도 유 관순은 여러 3·1 운동 참가자 추진자 중의 하나 수준은 넘어서는 게 틀림없어 보인다!

2. 박 열 + 가네코 후미코: 독특한 아나키스트 계열 국제결혼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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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2 마지막 금사회 에피소드를 보고 나서 영화 '박 열'을 봤더니..
무지개 운수가 의뢰를 받아서 타임머신 타고 100년 전의 일본으로 잠입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주연 배우가 동일인물.. ㄲㄲㄲㄲㄲ)

아~ 저 시절이니까 도기가 택시가 아니라 인력거를 몰고 있는 거고,
이름이 doggy이니까 "나는 개XX로소이다"라는 시도 썼고..
가네코 후미코는 좀 똘끼어린 여성인 게 고은이하고 인상이 아주 비슷한 거 같고..;;

그렇잖아도 모범택시 2의 금사회 에피소드는 도기가 일부러 교도소로 들어가는 내용인데,
박 열도 대부분의 장면은 주인공이 감방에 갇힌 상태로 진행된다. 감방에서도 미친척 하고 똘끼 부리는 거 캐릭터가 비슷하다.
재판 1심 때 조선 예복 코스프레 한 거는.. 진짜 영락없이 부캐 분장이라도 한 것처럼 보이더라. ㅋㅋㅋ

일제 시대를 다룬 한국 영화가 과연 관동대지진을 다룰 일이 얼마나 되겠나? 이건 애초에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아닌데. 더구나 일본 판 십볼렛 색출전(삿 12:6)을 영화로 보다니.. 나름 흥미진진한 소재를 고른 것 같다.
박 열은 192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20대부터 40대까지 인생 황금기를 일본 감옥에서 무기수로 보냈지만 그래도 어째 살아서 나오기는 한 게 참 특이한 것 같다. (참고로, 조선총독부 본진에다 폭탄을 던졌던 김 익상 의사는 박 열과 비슷한 나이와 비슷한 시기대에 투옥됐지만, 일제 말기 때 결국 의문사했었다)

박 열 저 사람한테 가네코 후미코는.. 진짜 김 학준 선생에게 최 용신 같은 존재로 기억에 각인됐지 싶다(소설 상록수의 모티브를 제공한 실제 인물).
지진만 없었으면 저 두 사람 인생이 실제 역사와는 완전히 달라졌을 텐데.. 어찌 됐을지 참 궁금하다. 공교롭게도 박 열과 김 학준 모두 몰년은 1974년이었다.

* 가네코 후미코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와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 훈장이 추서돼 있는 단 둘뿐인 일본인이다.;;;
사실, '소다 가이치'라고 조선에 정말 엄청난 온정을 베푼 일본인이 더 있긴 한데.. 이 사람은 법이나 정치, 군사 쪽으로 항일을 한 게 없어서 그런지 훈장까지는 못 받았다. 그 대신 이분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3. 김 마리아 외: 엘리트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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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택시 시리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다들 기억 하시려나 모르겠다. 시즌 1의 첫 에피소드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피해자는 바로 '강 마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

'마리아'는 마치 '에스더'처럼 성경의 인물을 그대로 딴 옛날 스타일 여자 이름이다. 가톨릭에서는 이런 이름을 세례명으로만 쓰겠지만, 개신교 쪽은 그런 개념이 없으니 본명을 그대로 저렇게 짓는 경우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으로 전파됐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엔 지식인 신여성 중에 '마리아' 동명이인이 여럿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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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 마리아(1891-1944)는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인지도가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하기까지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시절에 일본과 미국에서 대학원 급 공부를 한 고학력자였던 데다, 항일 운동 쪽으로도 도쿄 2· 8 독립 선언에다 3· 1 운동까지 할 거 다 했기 때문이다.
그때 붙잡혀 끌려가서 옥고를 치르고, 심문 과정에서 왜경으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당해서 몸이 비가역적으로 상했으며, 이 때문에 지병· 후유증을 평생 달고 살았다. 독신으로 살다가 1944년에 병으로 순국한 것도.. 그 지병이 악화됐기 때문이었다.

저분은 행적과 공로가 워낙 탁월하니 1962년에 진작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유 관순 열사도 요절하지 않았으면 아마 김 마리아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단.. 저분은 전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신학은 주전공과 별개로 따로 공부한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이공계는 아니고 문과 무언가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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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 다음으로, 참 공교롭게도.. 저분과 띠동갑 후배인 동명이인 김 마리아(1903-1970)도 있다.
사진을 검색해 보면 1891년생 원조 김 마리아는 직모 단발머리의 젊은 얼굴인 반면, 1903년생 김 마리아는 더 나이든 파마머리 중년 모습이 주로 나온다.

이분은 이 범석 장군의 부인이었고 광복군 여군+공작원 커리어를 거쳤다. 사격의 귀재였다고 하니 한국의 애니 오클리 같은 느낌도 드는데..ㄷㄷㄷ 여러 모로 원조 김 마리아와는 활동 분야가 많이 달랐다. 업적의 발굴과 조명이 원조 김 마리아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에 1990년에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3) 참고로, 더 늦게 태어난 박 마리아(1906-1960)도 미국 대학원 출신의 엘리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은 세월이 흐른 덕분인지, 유 관순 같은 이화학당도 아니고 이화 전문학교를 나온지라, '이대 나온 여자'의 원조급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일제 말기 때 황국신민 내선일체 이딴 짓을 해서 친일 부역자라는 오점이 찍혔고, 해방 후에는 부통령 후보 이 기붕의 아내로서 권력욕을 뿜뿜하며 제대로 흑화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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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가 어땠는지는 다들 아시는 바와 같다.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일가족 동반 ㅈㅅ).. 그러니 박 마리아는 김 마리아와 달리 전혀 영예롭지 못한 악녀로 역사에 남았다. 이름값을 제대로 못 했다.

이 '마리아'들과 비슷한 연배와 비슷한 커리어인 임 영신(1899-1977), 김 활란(1899-1970) 같은 인물에 대해서도 알아보면 재미있지만..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니 생략하겠다.

4. 윤 형숙: 일제와 공산당 콤보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이 아니라 호남 지방에서는 ‘윤 형숙’(1900-1950)이라는 여성 열사가 있었다. 이분은 3· 1 운동 당시에 광주에서 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왼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다.
이분은 체포된 뒤에도 제대로 치료를 못 받고 열악한 곳에서 구금· 투옥돼 있다가 병으로 오른쪽 눈의 시력도 잃고 말았다.

아니, 군인이 전투 중에 부상을 당해서 팔과 눈을 하나씩 잃은 건 영국의 넬슨 제독이나, 독일의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처럼 사례가 있는데.. 윤 열사의 사례는 정말 믿기 힘들다. 사진에 찍힌 모습 중에는 대놓고 저런 신체 장애가 묘사된 게 딱히 없는 것 같다만..
허나, 당대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 행적이 가히 전설적이었는지, 저분은 '윤 혈녀'라는 별명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저분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항일뿐만 아니라 반공에도 진심이었다. 해방 후, 6· 25 사변 중엔 손 양원 목사와 동일한 날짜에 동일한 장소에서 북괴 공산군에 의해 나란히 순교하여 주님 곁으로 가게 됐다.
1950년 9월 28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했던 날, 적들은 반동 민간인들을 모두 처형하고서 퇴각했기 때문이다. 호남 지방은 영남보다 위도가 더 낮았는데도, 영남과 달리 지역이 몽땅 다 북괴에게 점령 당했었다.;;;

윤 열사는 아까 3번의 마리아 정도의 고학력 유학파는 아니었지만, 살아 생전에 지방에서 지역 교회를 묵묵히 섬기면서 전도사와 교사로 헌신했었다. 세상에 이런 '여수의 유 관순' 같은 분도 있었다. ㅠㅠㅠ

Posted by 사무엘

2026/06/18 08:35 2026/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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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5월쯤에 일제 시대 독립운동에 대해서 글을 하나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올해도 비슷한 시기에 글감이 떠올랐다.
예전에 한번씩 했던 말도 있지만 다른 형태로 다시 정리해 보고자 한다. ㄲㄲㄲ

1919년에 벌어졌던 3· 1 운동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를 기리는 삼일절은 오늘날까지도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3· 1 운동은 결과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당일이 그렇게까지 “기쁜 날”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나라 밖 소식을 접하기가 어렵던 시절에,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라고 어디서 막연히 주워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당당히 독립을 선언하면 세계에서 다 알아주고 독립을 지지하고 승인하고, 일본이 아닌 한국 편을 들어 줄 거라고 희망회로를 돌리게 됐다.
물론 민족 자결주의 하나뿐만은 아니고.. 거기에다가 고종(암군이긴 해도 미우나 고우나 일단 자국의 군주 얼굴마담이니)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한 독살 의혹, 1910년대 폭압적인 무단통치에 대한 반감, 스페인 독감과 기타 등등 생활고도 시위에 대한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완전히 시궁창이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서 말석 끄트머리로나마 승전국이었다.
승전국의 식민지는 저 희망회로의 적용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가령, 민족 자결주의는 그 시절에 무슨 인도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켜 주라고 만들어진 이론이 아니었다. 일본으로부터 조선도 마찬가지.

그러면 3· 1 운동은 아무 소득 없이 총칼 앞에서 무참히 진압당했고, 한국인들은 헛다리 짚고 뻘짓만 하다가 괜히 일제로부터 무수한 인명과 재산 피해만 당하고 아무 소득 없이 끝났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지금 같은 교통 통신 수단도 없던 시절에 식민지 피지배민들이 지배자를 상대로 전국적으로 이 정도로 대규모 비폭력 항쟁을 조직적으로 일으킨 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일본 입장에서는 저걸 총칼로 마구 찍어눌러서 당장 진압은 했지만.. 국제적 위신의 손상에다 내부적인 멘탈 대미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꽤 크게 입었다.

“니들은 식민지를 도대체 얼마나 거지같이 관리했길래 10년도 채 안 돼서 식민지에서 저 정도로 처절한 만세 시위가 벌어졌냐?”
일본은 이웃 열강들로부터 이런 갈굼을 당했고, 그 갈굼이 조선총독부로 전해졌다.
다시 말해, 서구 열강들은 일본을 향해 "당장 조선을 해방시켜 줘라" 이러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네 식민 통치 방식에 문제가 좀 있나 보다? 이번엔 좀 선 넘었네?" 정도의 눈치는 줬다.

이때부터 쟤들은 과장 좀 보태면 만세의 만 짜만 나와도 발작을 일으킬 지경이 됐다.
조선 땅에서 조금 무리수인 정책을 추진할 때면 “야, 조센징 만세 폭동을 벌써 잊었냐? 시즌 2가 벌어지는 수가 있다?” 이러면서 몸 사리는 시늉 정도는 하게 됐다.

이 때문에 조선 식민지를 관리하는 치안 비용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일제의 입장에서 식민지의 가성비 하락으로도 이어졌다.
고종 다음으로 나중에 순종이 죽었을 때만 해도 쟤들은 또 만세 시위가 벌어지지는 않으려나 진심으로 긴장했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이 넘어갔음)

솔직히 1919년 3월 1일이 지금 대한민국이 세워진 날이라고 하면 그건 좀 정신승리 보정이 개입된 생각일 것이다. 무슨 시오니즘 대회나 밸푸어 선언이 발표됐던 날이 이스라엘 건국일이기라도 하냐?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때 조선인들이 남의 전쟁에 강제로 징용되고 끌려간 건 그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기 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이라도 져야 할 사항이냐? 누구는 약간 나중에 6 25 전쟁 중에 국가가 국민을 제대로 못 지켜 줬던 건 그렇게도 욕하고 비판하던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만세 시위 하나 했다고 일제가 조선을 니에니에 독립시켜 줬을 리는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쌓이고 쌓인 게 시너지 효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일본을 물리적으로 힘으로 패퇴시킨 것이야 한국의 능력이 아니라 연합국, 특히 미국의 원자폭탄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저런 계란으로 바위 치는 시도가 없었다면 일제의 패망이 곧바로 한반도의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에 코리아의 독립이 따로 명시된 게 괜히 이뤄진 줄 아냐?
이 점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정답이 되는 건 아니다” 논리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건국 초기부터 관습적으로 삼일절을 아주 성대하게 기념해 왔다. 그리고 그 초창기, 리 승만 할배 시절엔 대한민국이 1919년부터 시작된 나라라고 대놓고 홍보하곤 했다.
특히 저 때는 북괴야말로 1947년인지 48년에 갑툭튀한 듣보잡 사생아 집단일 뿐이고, 남한은 훨씬 전부터 정통이라는 걸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념이 오늘날 우리나라 헌법의 전문에도 명시된 것이다.

이거 마치 Watcom C라는 신생 컴파일러가 볼랜드/마소 제품 대비 자기 내력을 뻥튀기하려고 첫 버전을 1.0이 아니라 무려 6.0부터 매겼던 것과 비슷한 행동 같은데.. 뭐 그랬다. 이런 내력이 있다.
본인은 삼일절과 주일이 겹쳤던 날에 교회에서 준비 찬송으로 특별히 만세, 함성, 승리 이런 단어가 들어있는 곡을 골라서 부르곤 했다.

* 흥미로운 사실

(1) 조선은 특이한 지리빨 덕분에 그 시절에 대영제국의 손아귀로 들어간 적이 없는 꽤 예외적인 나라였다. 어디 대영제국 뿐이랴? 병자호란,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에서 다 지고도 멸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건 조선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스스로 지켜낸 게 아니었다. 인간들의 과학기술과 군사력이 발달해서 지리빨이 약발이 다했을 때 조선은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다.

열강들은 조선을 먹지 않았지만, 그 대신 19세기 말에 조선이 중립을 선언한 것도 전혀 존중해 주지 않았다.
조선은 서양 식민지가 되지 않은 대신, 이웃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그러니 나중에 독립될 때도 여느 대영제국 식민지와는 좀 다른 격으로 취급받게 됐다.

(2) 1920년대에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세계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일본 편을 드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특히 전간기) 일본은 세계가 일본을 영국 미국과 대등한 열강으로 인정하지 않고 함대 제작 쿼터를 많이 주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분노했었다. ㄲㄲㄲㄲㄲ
이게 지금은 군대를 안 가면 안 되는 나라 vs 군대를 가지면 안 되는 나라의 차이로 이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인물 관련해서도 할 얘기가 있는데.. 분량이 길어지니 이건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6/06/15 08:35 2026/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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