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공 시절

우리나라 헌정 체제의 변천사에 대해서는 본인이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로 다룬 적이 있었다.
초대 대통령인 할배가 집권했던 최초의 1공화국 시절은.. 지금으로서는 뭐랄까 같은 나라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이질감이 심하다. 대체역사물 소설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나라이다. 태극기, 한국어, 한글만 없다면 말이다.

이때 대통령은 생전에 군대의 근처에도 안 가 본 문돌이였고 군사 정권도 분명 아니었지만, 가난한 여건에다 극렬 반공 트렌드 때문에 나라가 막 자유롭다고는 보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리고..

  • 지금과 같은 화폐 단위가 도입되고 마지막으로 화폐 개혁을 한 게 1962년,
  • 군대에 상병과 병장 계급이 추가된 게 1962년,
  • 공문서에서 서기 연호만 쓰기 시작한 게 1962년(더 옛날의 이 승만 시절 관보나 대한뉴스, 각종 법조문에서는 4천 몇백 년 하면서 단기 연호가 나온다~!)
  • 마지막으로 탈영병을 사면해 준 게 1963년
  • 부산이 전국 최초의 직할시로 승격된 게 1963년
  • 국가 차원에서 독립 유공자를 본격적으로 발굴해서 훈장을 추서한 게 1962년...

당장 떠오른 예만 나열해도 이 정도이니 지금의 우리나라 기틀이 상당수 다져진 건 확실히 박통 때부터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나저나, 대통령 관저의 이름이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바뀐 건 박통보다 미묘하게 전인 윤 보선 때 1961년..)

해방 이후 1962년 이전에 우리나라는 6· 25 전쟁을 전후한 1950년 8월과 1953년 2월에 화폐 개혁을 시행했다. 1950년이야.. 개전 직후 서울이 털리고 한국 은행에 보관돼 있던 현찰 뭉치들이 괴뢰군에게 통째로 노획돼 버렸기 때문에 그 돈은 당연히 국가 차원에서 무효화하고 유통을 금지시켜야 했다. 수능 문제지가 시험 전날에 외부로 유출된 것과 얼추 비슷한 상황이다. 새로 만든 돈은 부득이 일본에서 인쇄해서 수입해 와야 했다.

그 뒤 1953년의 화폐 개혁은 단위도 '환'으로 바뀌어서 인플레이션을 수습하는 용도로 쓰이다가, 훗날 1962년에 단위가 또 바뀌어 지금의 '원'이 정착했다. 개드립을 좀 치자면, 환에서 원으로 '환원'됐다.

할배 각하는 기본적으로야 크리스천이었지만, 자기 치적에 대한 자랑질도 했다. 남산과 탑골공원에 크고 아름다운 자기 동상을 세우고, 남한산성 근처 도로를 닦고는 자기 호를 따서 '우남로'라는 이름을 붙였다(지금은 헌릉로와 합쳐져서 없어짐). 1957년부터 하야 직전의 60년까지는 황금연휴 부근도 아닌 대통령 탄신일(3월 26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기도 했다.
이 승만은 양력 기준 1875년 5월 1일생인데, 이 날짜가 그 당시 음력으로는 3월 26일이었던 것이다. 임시 공휴일은 그냥 일관되게 매년 양력 3월 26일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할배는 생일을 기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환' 지폐에다 한복 차림의 자기 초상화를 집어넣었다(100, 500환). 처음엔 정중앙에다 집어넣었는데 지갑에 돈을 넣을 때 자기 얼굴이 접힌다는 걸 발견하고는 한쪽 끝으로 위치도 옮겼다. (그런데 소리만 '환'이지, 이때도 한자 표기는 여전히 '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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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나라 지폐가 온통 조선 시대 '이씨' 인물만 너무 많이 집어넣었다는 비판이 있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먼 옛날에 대한민국 인물, 그것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인물을 집어넣은 적이 딱 한 번 있었던 셈이다. 전무후무 1공 시절에 말이다. 지폐에다 자기 얼굴을 떡 집어넣는 건, 나중에 군인 출신 대통령도 하지 않은 짓인걸.. 반쯤은 자기 자발적인 지시이고, 반은 부하들이 알아서 아부질 하는 걸 본인도 듣기 싫지는 않고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거지 싶다. 대통령과 왕의 차이점에 대한 관념도 아직 드물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제1공화국 시절엔 남한 땅에서 미국처럼 서머타임(일광 시간 절약)이 시행되기도 했다. 미국이 단위 체계와 전압처럼 세계 규격과 달리 혼자 따로 노는 관행 중 하나인데.. 1960년대 박통 때부터는 폐지됐다. 그 서머 타임은 훗날 서울 올림픽을 하던 시절에 또 잠깐 부활했다가, 올림픽이 끝난 뒤부터는 다시 영구 봉인됐다.

2. 부산 잔혹사

우리나라 광역시들 중 대전은 공항이 없고(대전 대신 청주에..), 울산은 지하철이 없다.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대전은 포항· 울산 같은 네임드급 공장이 없는 대신(산업단지 자체가 없는 건 아님. 대덕구 대화동에..), 정부 청사와 각종 과학 연구소들이 있어서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데.. 1공화국 얘기가 나왔으니 그 시절에 특정 지역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아이템을 하나 더 늘어놓아 보겠다.

부산은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에 전국에서 제일 먼저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 노면전차가 다닌 세 도시 중 하나이다.
6· 25 때 북괴에 점령당하거나 대판 전투가 치러진 이력이 없고, 오히려 안전한 최후방인 덕분에 임시 수도 본진 역할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부산은 전쟁과 지진이 없는 대신, 피난민 목조 판잣집들이 밀집해 있던 와중에 화재 참화를 여러 번 겪었다.

1953년 1월 30일엔 영화로도 나왔던 국제시장에서 대화재가 나서 수천 채에 달하는 상가와 판짓집들이 다 타 버렸다. 하지만 이건 나중에 또 벌어졌던 화재들에 비하면 피해 규모가 약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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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27일, 전쟁이 끝난 지 정확히 3개월 뒤엔 또 판자촌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시내 중심부로까지 번져서 부산 역, 방송국, 신문사까지 몽땅 불에 탔다. 이 때문에 부산 역이 철거되고, 오리지널 부산 역보다 1km 남짓 북쪽에 있던 초량 역이 지금의 부산 역 역할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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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 10일과 26일에는 또 두 차례 대형 화재가 용두산 언덕 일대를 덮쳤다. 판잣집들 피해야 말할 것도 없고, 이번엔 휴전 뒤에도 귀차니즘에 입각하여 서울로 아직 안 옮기고 부산의 모 창고에 보관해 놓고 있던 조선시대 어진과 유물, 문화재들 수천 점이 소실돼 버렸다.
국제시장, 부산역, 용두산 등등.. 다 비슷비슷한 지역이다. 열악한 닭장 같은 곳에서 살다 불 한번 나면 이렇게 작살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다가 5년 뒤에 1959년에는 땅, 불 다음으로 바람과 물 차례였다(이젠 '마음'만 남았나?-_-). 14호 태풍 사라 때문에 일대가 또 박살이 났으니, 1950년대에 부산은 제2의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살기가 참 잔혹한 곳이었지 싶다.
그때 태풍 이름에다가 왜 뜬금없이 '호'를 붙여서 배 이름처럼 '사라호', '사라 호'라고 불렀는지는 개인적으로 잘 모르겠다.

3. 1960년, 1980년의 올림픽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과 링컨 대통령의 공통점 뭐 이런 괴담이 나돌았고, 또 1840년부터 1960년까지 20의 배수 년도에 당선됐던 대통령은 제 명에 못 살고 병사· 암살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일명 '테쿰세의 저주' 괴담이 나돌곤 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서의 역사는 아주 짧으며 정치가 아닌 스포츠 분야이긴 하다만, 20의 배수 년도에 참가했던 올림픽이 좀 뭔가 특이했다.

우리나라는 그 가난하고 열악했던 1948년 런던 올림픽 첫 참가 때, 그리고 전쟁으로 혼란스럽던 1952년도 올림픽에서도 복싱과 역도에서 메달을 따 오곤 했다. 그런데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현재까지 전무후무하게 메달을 단 하나도 못 따는 부진을 보였다. 이 때문에 올림픽 선수단 대표이던 손 기정 단장은 삭발을 하고 귀국했다.

1960년대에는 국제 대회에 선수를 선발하고 육성하는 스포츠 행정 체계가 굉장히 미개하고 막장이었던 듯하다. 밥그릇 싸움과 부정부패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때문에 뉴스 기사를 찾아보면 손 기정은 1966년 방콕 아시안 게임 때도 선수단 단장이었는데, 이때는 나름 성적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뭔가 심하게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서 삭발 귀국을 단행했던 듯하다.

게다가 로마 다음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나름 가까운 이웃 나라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수들을 파견한 것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성적은 꽤 부진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하에 박 정희 정권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스포츠 단체들을 통합하고 태릉 선수촌도 만들면서 엘리트 체육의 육성에 힘썼다.

지금 괴수들이 우글거리고 한국인 코치가 세계 곳곳에 활동하는 지경이 된 양궁조차도 처음부터 지금 같은 인프라가 갖춰진 게 절대 아니라는 점이 아주 흥미롭다. 우리나라가 건국 이후 최초로 메달을 딴 분야는 역도와 복싱이지 양궁이 아니지 않던가??

뭐, 1960년대는 그렇다 치고 그로부터 20년 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짐작하다시피 우리나라가 애초에 보이콧을 해 버리고 참가를 안 했기 때문에 메달도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산권 국가인 중국조차도 참가를 안 했다는 게 흥미롭다. 공산주의 사회주의라고 해서 반드시 친소 성향은 아니니까..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만,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 여자 양궁의 초창기 멤버이던 김 진호 선수가 커리어에서 큰 손해를 봐야 했다.
2000년대부터는 1960, 1980 같은 굴곡이나 이변이 아마 더는 없을 것이다.

4. 국민투표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라 하면 대통령, 국회의원 같은 어떤 대표자를 뽑는 선거만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국가적으로 어떤 중대한 결정을 내릴 일이 있을 때 투표를 통해 yes/no를 묻는 제도도 있다(우리나라 헌법 제72조). 이를 '국민투표'라고 한다. 마치 논문이라고 해서 학위 청구용 졸업 논문만 있는 게 아니라 학술지 논문도 있고 발표 논문도 있듯이, 투표란 것도 그렇게 성격에 따른 구분이 있는 것 같다.

보통은 이런 의사 결정을 국민이 아닌 의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게 돼 있으나,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의견을 직접 묻는 예외적인 제도도 대통령이 자기 재량껏 시행할 수 있다. 투표 결과가 대통령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나왔다면 이건 강력한 설득력을 얻게 되니 의회도 어찌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국민투표는 보통은 헌법을 고쳐야 할 때 시행되곤 했으며, 투표일은 임시공휴일로 지정되곤 했다. 이 승만 때는 시행된 적이 없고 1960년대의 군사 정권 시절이 원조이다. 우리나라는 1987년 10월, 제6공화국 수립을 위한 개헌을 앞두고 시행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북괴의 붕괴와 흡수 통일과 같은 급의 이변이 없는 한, 현 헌정 체제에서는 앞으로도 할 일이 없는 게 좋을 것이다.

5. 대통령의 초법적 권한: 계엄과 긴급명령

자고로 대통령은 왕이 아닌 관계로, 자기 멋대로 기분대로 "짐이 곧 법이다" 식으로 통치할 수 없다. 특히 무엇보다도 혼자 평생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자기 자식에게 권좌를 슬쩍 넘겨줄 수도 없다. 현대의 대통령은 국가 원수라는 지위와 예우는 동일하지만, 권한의 행사 범위는 법의 통제를 받으며, 전근대 시절의 왕에 비해 큰 제약이 걸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전쟁을 포함한 굉장히 긴박하고 불가피한 상황일 때 예외적으로 일시적으로 법과 권한, 의회의 동의 같은 절차를 씹어먹고 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 정도는 이미 법에 보장돼 있다.
대표적인 예는 계엄이다. 계엄은 나라 사정을 준전시 상태로 만들어서 바싹 긴장시키고, 국민의 기본 자유와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조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국 이래로 1948년 여순 반란(여수· 순천 일대)과 4· 3 사건(제주도)을 시작으로 제일 최근에는 1979년의 부마 항쟁(부산· 경남)과 10· 26 사건 때 계엄이 내려졌으며, 전땅크의 쿠데타의 정점인 1980년 5월 17일 내란 때 또 계엄이 내려진 것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두 계엄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내려졌었다.
뭐, 4· 19 혁명(의거), 5. 16 쿠데타(군사 혁명), 10월 유신 같은 크리티컬한 이벤트 때는 제주도까지 포함한 전국에 계엄크리가 떨어지기도 했었다.

계엄 다음으로 현행 헌법 제76조에 의거한 '긴급명령'이란 게 있다. 이건 건국 이래로 지금까지 총 16번이 내려졌는데, 그 중 13회가 6· 25 전쟁 기간 중에 내려졌다. 전시의 마지막 명령인 제13호는 1953년 2월, 100원을 1환으로 바꾸는 화폐 개혁 지시였다.
대부분의 역대 긴급명령들은 관련법이 따로 제정됨으로써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내려진 긴급명령은 1993년 8월, 금융실명제를 빵 터뜨려 실시한 김 영삼 대통령의 명령이었다.

박 정희는 긴급명령을 제3공의 말기에 단 한 번밖에 내리지 않았으며(제15호, 1972. 8. 2.), 이것도 계엄과는 달리 정치 분야는 아니었다. 그 대신 이 양반이 특별히 고안해서 1974년부터 75년, 4공 유신 시절에 1년 반 남짓 동안 무려 아홉 번이나 남발했던 더 강한 특별 명령은 바로 '긴급조치'였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로 시작하는 게 제1호였고, 제9호가 가장 길었다. 이전의 긴급조치를 해제한다는 명령도 별도의 긴급조치 호수로 올라가곤 했다.

대부분의 긴급조치들은 사실상 빨갱이들, 데모질 하는 애들을 잡아서 벌 준다는 협박이었지만, 딱 하나 제3호만은 민생과 관련된 다소 생뚱맞은 긴급조치였다. 긴급조치는 박통이 암살당하고 헌법이 업데이트 되면서 즉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국민투표 내력, 개헌 내력처럼 계엄과 긴급명령(/조치) 내력도 살펴보는 게 재미있다. 이런 게 사회 공부의 묘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23 08:36 2017/12/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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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기는 법

* 예전에 썼던 일본에 대한 생각 글 및 기업 관련 일화 글과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1. 학문· 기술 업적과 제품 시장 점유율로 이긴다. (100점)

2차 대전 이후의 국제화 세계화 자본주의 개방 경쟁 시대에 이거야말로 남의 나라를 합법적으로 제일 수준 높게 이기는 방법이다. 예전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듯이,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를 쳐바르고 기술 종속 관계를 역전시킨 현대 자동차라든가, 반도체 분야에서 이름은 모르겠다만 일본 기업들을 쳐바른 삼성전자, LG전자 등등..
이것만 알아도 되도 않은 이상한 반기업 구호들 반 이상은 필터링된다. 이공계가 세상을 바꾼다.

2. 문화 예술로 이긴다. (50점)

겨우 한류 스타 욘사마가 어떻고 하는 것만 얘기하는 게 아님. 그야말로 사람들 정신 세계 전반을 점령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100점짜리와는 분야가 굉장히 다르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그래도 중요하다. 이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경제 협력을 위한 재수교는 무려 1965년에 했어도, 대중문화 개방은 90년대 말이 다 돼서야 성사됐다.
내 한글 입력기는 비록 기술 쪽으로 최첨단 극치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나름 이 바닥을 기여하고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술은 아니지만 문화에는 해당한다.

3. 운동 경기에서 이긴다. (30점)

열심히 노오오력해서 한일전에서 일본 이겨 주는 것도 아주 합법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경기 당시에 짜릿함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외에 우리 일상생활에 딱히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또한,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에만 열혈 민족주의 애국자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자기 나라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나 태극기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 존재인 걸까?

4. 목소리와 키보드 배틀에서 이긴다. (5점)

국가관 역사관이 이상한 사람을 키배로 제압하고 산업화해 주고, 어디에 일본해가 어떻고 독도가 어떻고 하는 곳에 득달같이 달라붙고, 일본 정치인들 망언을 규탄하는 시위 벌이는 건..;; 들이는 시간에 비해서 그렇게 생산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5. 국민성, 공중도덕 등으로..

이건 이기는 법이라기보다는 지지 않는 법의 범주에 드는 것 같다.

6. 전쟁에서 이긴다? (??)

가능하지도 않고 그래야만 할 필요도 의미도 없음.
한· 일은 정치 이념 프레임이 동일한 나라이며, 예측 가능한 미래에 서로 전쟁 벌일 확률은 남북한이 전쟁 벌일 확률보다는 넘사벽급으로 낮다.

한일전 하니까 옛날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뭐, 예전에 비해 반일 감정이 많이 옅어진 편인 지금도 한일전이라 하면 일단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 있고 그야말로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진짜 한일전의 원조는 먼 옛날 1954년, 우리나라가 FIFA 월드컵에 최초로 참가하던 시절에 벌어졌다(그 당시 스위스 개최).
우리로서는 6· 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스포츠 분야에서 해방 후 최초로 앙숙 일본과 맞장을 뜨게 됐다. 1953년에 치러진 아시아 지역 예선전이다.

해방된 지 아직 10년이 채 안 되었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비장했을까?
씅만 리 할배 대통령은 승부에 대한 극심한 중압감과 부담감 때문에 처음엔 이 경기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냥 월드컵 출전을 포기하고 말지, 일본놈들과는 상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경기는 우리 홈그라운드에서 한 판, 일본으로 원정 가서 한 판씩 하는데 “쪽발이 왜놈들을 한국 땅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라는 똥고집,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이 우리를 이겨 버리기까지 했을 때 뒷감당을 할 수 없다는 걱정이 반반씩 할배의 머리를 압박했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데 가담하고 부역한 외국인은 우리나라에 입국할 수 없다고 지금까지도 출입국 관리법에 명시돼 있긴 하다. 뭐 이젠 그런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없겠지만..)

뭐 어쨌든, 일본 선수들이 한국으로 올 수 없으니 우리 선수들이 두 판 모두 일본에 가서 경기를 치르게 됐다. 출정식 때 할배 각하는 친히 선수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 졌다가는 국민 세금으로 배 탈 생각일랑 말고 대한해협을 헤엄 쳐서 귀국해라” 이런 급의 공포스러운 막말 훈화를 했다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아니면 축구 협회 대표와 선수팀 감독이 각하를 끈질기게 설득하는 과정에서 저런 맹세를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저런 처절한 배수진 하에서 스포츠계의 합법 도핑인 반일로이드가 약발이 제대로 적중했다..;; 우리나라는 1차전에서 5:1로 일본을 압도적으로 꺾었으며, 2차전에서도 2:2 무승부를 달성해서 무난히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때야 스포츠 분야의 극일 가중치가 지금 같은 30점이 아니라 당연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립 주권 국가로서 한국이 일본을 당당히 이겼으니까.

뭐, 본선 가서는 헝가리에게 9:0, 터키에게 7:0으로 지고 광탈하긴 했지만, 그건 너무나 열악한 여건 하에서 첫 출전을 하고도 정말 혼신을 다해서 얻은 결과였다. 10몇 대, 20대 0으로 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던 값진 투혼이요 성공적인 실패, 위대한 패배였다. (그리고 일본만 이겼으면 됐고 그것만으로 목표 달성이지, 나머지 결과는 어차피 아오안이었을 것이다..;; )

이 승만은 정말 쥐뿔도 힘 없는 가난한 나라 처지에서도 그래도 미국을 최대한 이용해서 일본을 상대로 갑질을 하고 반일 노선을 고집했다. 평화선에, “대마도 내놔”에, 재일 교포 북송에 결사 반대하여 일본 적십자사 테러 시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왜관 발언은 최고의 압권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전쟁 중이고 위급하다지만, 감히 일본놈들이 우리 집안 내부 싸움에 개입하려 든다면(심지어 남한을 돕는 것도 포함) 우린 일본놈들부터 죽이고 나서 괴뢰군을 쏘겠다.

하긴, 이 할배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유엔군 병참기지가 돼서 경제적으로 어부지리 덕을 보고 있는 것조차도 차마 눈꼴 시려 못 볼 지경이었을 게다.

저 때야 해방된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렇다 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 2002년 월드컵은 개최 장소도 이례적으로 한일 공동 개최로 귀착됐었다. 20여 년 전에 이거 개최지 결정하던 과정도 내 기억으로 분위기가 장난 아니게 험악했다. 둘 중 한 나라 단독 개최로 결정 났다면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래, 한국과 일본은 뭐 그런 사이이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이성적으로 분별할 건 따로 분별해야지..
까놓고 말해서 일본이 평화 헌법을 건드리거나 심지어 자위대를 군대로 승격하는 것보다, 당장 코앞에 있는 미친 또라이 국가의 핵탄두가 실험을 거듭하면서 위력이 더 강력해지고, 미사일의 사거리가 갈수록 더 길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한 일이다!

지금은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군국주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일본의 작은 또라이짓에 대해서는 난리를 치고 발광을 하면서, 바로 옆에 현존하는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고 방어 체계를 구축하지 말라고 X랄인 것은 정말 머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쟤들은 종북들을 이용해서 남조선을 살살 삥뜯거나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떼어 놓기 위해서 핵을 만들 뿐이다. 터뜨려서 자폭하거나 심지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핵을 만드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걔네들도 잘 알 것이다.

본인 역시 지금 당장 더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종북 쪽을 더 비판하고 까며 지낸다. 하지만 우파가 반일· 극일 분야도 좌향좌들보다 훨씬 더 건전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행동으로 입증하고 싶다. 사상과 행적 모든 면이 우월하다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05 08:33 2017/12/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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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초에 일본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 산업화 근대화를 이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까지 함으로써 일단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급의 강대국이라는 인증까지 해냈다.
얘들은 제국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는 (1) 대륙으로 진출하는 위치가 좋고 (2) 덩치가 적당히 작아서 만만하고, 또 (3) 정치 경제 군사가 모두 개막장을 달리고 있어서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편해 보이는 조선을 먹어서 일본으로 편입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옛날에 더 멀리 떨어져 있던 섬나라인 류쿠를 일본이 먹었듯이 말이다. 일명 '정한론'이다.

얘들은 단순히 군사력만 키운 게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타 강대국들과도 외교 로비를 벌이면서 정말 치밀하게 노력했다.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 안에서 한일협약(내정간섭), 을사조약(외교권), 정미7조약(군대 해산) 등등이 벌어지는 동안 밖에서는 일본이 뭘 했는지를 말이다.

* 제2차 영일 동맹 (1905) 일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 일부 ... 을사조약의 전신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말 것을 요구하는 정도로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타당한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 미국은 필리핀, 그리고 일본은 조선... 이렇게 각각 식민지를 나눠 갖고 서로 터치 안 하는 구도가 형성됐었다. 이렇게 입을 다 맞춰 놨는데 헤이그 밀사가 뒤늦게 나서 봤자 짜고 치는 고스톱 하에서 호소가 씨알이나 먹혔겠는가?
미국도 그때는 일본과 이미 먼저 맺은 약속이 있어서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를 방조 묵인했다. 이런 식민지 분배 중재를 잘한 공로로 어떤 미국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 and 간극)

* 카이로 선언(1943) 요지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으로 하여금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이래로 폭력으로 약탈한 일체의 지역에서(만주, 태평양 섬들 등등) 철수하고 해당 지역을 원래 국가에 반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렇게 역사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까지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헤이그 밀사가 허무하게 실패한 이후로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때는 연합국 승전국으로서 대접 받았고, 반대로 한반도의 독립 운동이라는 건 무력 노선이든 외교 노선이든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고 아무도 안 알아 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답으로 흘러갔다.
이런 시류 속에서 세워진 국제 연맹이라는 조직은 조선의 독립에는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세대가 교체돼 버리면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카이로 선언이라는 게 우리 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는 크게 두 가지 면모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아이러니하게도 영일 동맹의 당사자이던 영국,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이던 미국이 이 선언문에서는 3대국의 구성원으로 언급되었다. (나머지 마지막 하나는 중국;;) 조선의 독립에 대해 전혀 아오안이던 그 강대국들이 드디어 일제의 국제적인 악행을 인지하고 반대급부로 대한 독립을 승인하는 주역으로 바뀐 것이다.

둘째, 더구나 카이로 선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벌인 침략 행위에 대한 저지와 원상복귀, 단죄였다. 다시 말하지만 1차 대전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범국은커녕 연합국 전승국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합방은 1차 대전보다 미묘하게 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조선은 계속해서 일제의 합법적인 식민지 멀티 기지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열강은 한반도를 예외적으로 추가로 일제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고 이를 명문화까지 하게 된 것이다. 아아..

이런 역사가 있기까지 이 승만 같은 <Japan Inside Out> + 외교 노선과, 의열단 임시정부 같은 무장항쟁 노선이 모두 기여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Japan Inside Out은 1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한국인이 쓴 책 중에 북미권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 1위이고, 아직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물론, 인쇄된 책 말고도 지식과 정보, 소식을 얻을 통로가 왕창 많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책 판매 부수를 그 시절의 책 판매와 수평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태평양 건너려면 여객선 타고 몇 주를 기다려야 했던 그 시절에 저 정도의 책을 영어로 직통으로 저술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일본의 내막을 폭로한다고 해서 무슨 찌라시성 음모론 제기라든가, 일부 사회 음지에서 벌어지는 조선인 학살 인권 유린 이런 수준이 아니다. 아예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결국 일본은 미국도 침략할 거라고 예측해서 적중까지 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실체도 잘 알고 있는 사상 건전한 사람이니, 미국에서 고집쟁이 정치병 영감쟁이가 아닌 외교 정치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한국 독립도 덤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정치 성향에 따라 외교나 무력 노선 중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노선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성만 따지자면 둘 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고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무모한 삽질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승만조차도 그 교통 통신 불편하던 시절에 국제 정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는 국제 연맹에다가 젠틀하게 조선 독립을 호소했으며, 일제로부터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니들 통치를 받겠다고까지 요청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무시뿐이었다. (참고로, 이 승만의 저 탄원에 대해서도 좋게 말하면 오해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아주 쌩 헛소리 중상모략이 엄청 많이 나도는 중임..)
무장 투쟁 쪽도 뭐.. 언제까지 이렇게 젊은 투사들 희생시켜서 일제 요인들 암살하는 짓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런 발버둥과 발악이 쌓이고 쌓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는 민족성이 다르고 일본과 싸잡아 전범국 취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일제가 정말 나쁘고 쟤들이 정말로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국제 여론과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방향 제시 없이 미국이 핵만 터뜨려 준다고 조선이 독립 가능한 거 아니었다!

일본은 무슨 마약 먹었는지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지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는 처참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다 거덜나게 생겼지만 걔네들은 더욱 광기로 치달아서 전국민 옥쇄에 정신력 운운하며 난리를 쳤다. "귀축영미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서 온갖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가 같이 죽자!"
주요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다 항복한 와중에도 일본은 끝까지 gg를 치지 않고 버텼다.

미국도 처음에는 치사하게 진주만 폭격을 벌인 일본을 상대로 그저 적개심과 증오심만 표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쟤들은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돼 있고 무슨 약을 빨고 저렇게 날뛰는지 황당해하고 신기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포츠담 선언에서는 지난번 카이로 선언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곱게 항복하고 식민지들 반환하고 전쟁만 끝내라. 우리는 너희가 항복하더라도 너희가 원래 갖고 있던 영토 주권 같은 건 결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다시 friendly warning을 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선언 내용을 '묵살'로 대응했으며, 그 결과 1945년 8월에 핵폭탄을 맞고 말았다. 그것도 두 방이나 맞은 뒤에야 덴노가 번쩍 정신을 차렸으며, 전쟁에 미쳐 폭주하는 군부를 그대로 놔 뒀다가는 나라가 정말로 멸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덴노로서는 이례적으로 자기 육성을 방송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도 자기 잘못은 절대로 직접 시인하지 않고 일본의 높으신 분들 특유의 돌려 말하기 스타일로 아주 간접적으로 항복을 표현했다. "적들이 무시무시한 폭탄을 터뜨린 와중에 전쟁에 휘말려 고생하는 백성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쟁을 이쯤에서 끝낼까 하노라"..;;; 아이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다.

그런데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자국 덴노의 항복에도 동의할 수 없어서 '궁성사건'이나 '마츠에 소요' 같은 병맛스러운 항복 반대 쿠데타 및 항전 시도가 있었으며, 저 동남아 밀림에서는 자국의 항복을 믿지 않고 몇십 년째 혼자 군인 행세를 하고 다닌 소수의 미친놈도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항복함으로써 혹시 덴노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거나(전범 재판에 회부), 덴노 제도 자체가 강제로 폐지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승전국인 미국 역시 이를 의식하고 쇼와 덴노 자체를 전범으로 기소하지는 않았다. 단지 맥아더 장군의 주도 하에 인간 선언을 시키고 덴노의 신적 권위를 불식시켰을 뿐이다. 만악의 근원이었던 신선놀음 하나만 중단시켰다.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않은 덴노 제도를 훗날 옴진리교가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은 참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본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개겼으면 올림픽 작전, 몰락 작전 이런 게 몽땅 실행되었을 것이고 미국으로도 모자라서 소련까지 합세해서 일본 본토를 조졌을 것이다. 일본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거나 최악의 경우 지도에서 지워졌을 것이고, 한반도가 아니라 쟤들이 분단되고 여러 점령국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졌을 것이다. 다만, 한반도는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나온 사진 두 장을 이렇게 대조해 보는 건 굉장히 흥미롭다.
인간이 아니라 신인 덴노가 감히 자기 목소리로 방송을 한 것만으로도(옥음방송, 무조건 항복) 일본 황국신민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었는데, 하물며 맥아더가 1945년 9월, "천황이라는 작자도 한낱 인간일 뿐이고 내 갑빠와 포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냐!" 요런 사진을 의도적으로 찍은 뒤 이걸 일본 언론를 통해 일부러 내보냈다.

저 모습을 본 일부 일본인들은 멘붕에 자살을 하고, 또 더러는 이제 맥아더를 신성시하면서 집에 신사를 만들고 경배(?)하기도 했다. 딱 행 14:11-15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일본이 근대화 산업화는 동양에서 일찍 해냈어도 각 개인의 정신 세계는 딱 그러했다.

지금이야 일본은 국민성이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선진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공중도덕 매너 쪽으로 굉장히 철두철미해서 남에게 민폐· 피해를 끼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들이 불과 몇십 년 전엔 무슨 약을 잘못 먹어서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웃 나라에 온갖 민폐와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일본 사정은 그렇고..
그로부터 5년 남짓 뒤인 1950년 6월 말, 일본에 있다가 북괴의 남침 소식을 듣고 황급히 김포 비행장으로 달려온 맥아더는 씅만 리 할배하고는 저렇게 같이 얼싸안고 좋아서 난리가 났다. 히로히토하고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참고로 남조선은 일본 정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35년이나 받았으며, 미국 덕분에 해방된 지 그 당시 5년 남짓밖에 안 됐던.. 그야말로 한 주먹 쨉도 안 되는 듣보잡 약소국이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성깔이 장난 아닌 완벽주의자였고 미국 안에서 같은 백인들끼리도 대인 관계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포즈가 나올 수 있었을까?
맥아더와 할배 모두 천재에 과격파.. 하지만 사상은 지극히 건전하고 올바름.. 딱 내 취향 내 스타일이다. 존경스럽다.

물론 반대편에 있었던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정말 최악의 막장만 골라서 가면서 썩고 곪은 사례이다. 북괴가 그렇게 극단으로 치달은 것에는 그 아래의 남조선의 존재(그리고 동맹인 미국)로 인한 두려움과 부담도 분명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북 대결이 없었고 아예 남조선이 6· 25 전쟁에서 져서 처음부터 전체 적화가 돼 버렸다면 오히려 북한이 지금의 북한 같은 흉악한 괴물이 되지는 않았고 1990년대에 무너지고 개방하고 변화가 생겼을 수는 있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러나 저것도 언제까지나 가정일 뿐이고, 설령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녀서 누가 강간죄를 저질렀다면 그럼 여자 잘못인가? 은행에 돈이 많이 보관돼 있어서 은행 강도가 침입했다가 붙잡혔으면 그럼 돈을 많이 넣고 다닌 은행 잘못인가? 그거랑 완전 똑같은 논리이지 않은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북괴는 8월 종파 사건과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막나가는 미친 나라였고, 6· 25 이전부터 월남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이 전국민 옥쇄 운운하며 발악을 했던 것이 지금으로서는 북괴의 말로에 대한 좋은 예표이지 싶다. 쟤들 역시 절~대로 곱게 멸망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핵을 터뜨리고 반인륜 범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을 다 죽이고, 주민들을 인질 삼아서 별 미친 짓을 다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서 김씨 부자의 세뇌를 지우는 일은 어쩌면 일본 국민에게서 덴노에 대한 신격화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일본 대신 '북괴 정권', 한국민 대신 '북한 주민'이라고 바꿔서 카이로 선언의 북괴 타겟 버전이 국제적으로 발효되고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이행됐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주민들이 저렇게 도탄에 빠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도 어떤 전쟁이냐, 평화도 어떤 평화인지를 따지면서 옳고 그름을 논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8 08:35 2017/10/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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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모다테 2017/10/28 18:51 # M/D Reply Permalink

    철덕 입장에서 봐도 그당시 일본이 미친놈들이라는 생각이 드는게 당시 일본이 증기기관차로 시속 200km급 고속철도를 계획했다는 겁니다.

    1. 사무엘 2017/10/28 19:38 # M/D Permalink

      영국과 미국에서는 시속 200km급 증기 기관차를 개발해서 여객용으로 운용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어림도 없었겠지요. 궤간도 겨우 협궤인 주제에..
      또한, 고속 증기 기관차라면 양반이지, 일본은 1940년대에 독일과 마찬가지로 미국보다 먼저 핵무기를 만들 생각도 했었습니다. 물론 그것도 자기네 여건에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습니다. 정신세계에 똘끼가 참 넘쳤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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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손 양원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손꼽히는 의인· 위인이요 순교자이다. 단순히 자기가 믿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행실도 정말 훌륭했고(남을 위해 헌신, 봉사..) 크리스천으로서 남에게 큰 귀감이 됐던 분이다.
이분들의 생전 "주요" 행적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됐고(각각 평양 경찰서 구속, 사랑의 원자탄 등등..), 이 글에서는 이분들의 순교 당시 배경에 대해서만 추가적으로 생각을 좀 해 보았다.

1. 손 양원

6· 25 사변 발발 당시에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은 똑같이 남부 지방이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영남은 나라 사정이 제일 위급했던 1950년 9월 무렵에도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 칠곡, 영천 정도가 마지노 선이었고 거기보다 더 동남쪽은 그나마 북괴에게 함락· 점령당한 적이 없다. 6월 26일 새벽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도 거둔 덕분에 거기는 더욱 빨갱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은 전지역이 북괴에게 점령당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의 동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지만 서남쪽에는 중국이 있으니 이는 지리적으로, 군사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손 양원 목사는 부산보다도 위도가 더 낮은 최남단 후방인 여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들에 의해 순교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일제 말기의 신사 참배 때보다도 6· 25 전쟁 중에 더 많았다.
신사 참배는 오히려 교단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굴복했기 때문에 더 적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교회들이 빨갱이들 앞에서는 호락호락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게 되면 적어도 크리스천 한정으로 반공 교육은 저절로 덤으로 이뤄지게 된다.

손 양원 목사가 여수에서 순교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겨우 사흘 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데 이게 뭘 기념해서 정해진 날짜인지 아는가? 38선 돌파 북진을 기념한 거다.
그때는 인천 상륙 작전이 이제 막 성공해서 북괴 공산군이 급 후퇴를 시작했으며 9월 28일은 1차 서울 수복일이기도 했다!

UN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획기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고, 결국 낙동강 전선의 전면돌파가 아니라 적군의 중간 보급로를 차단하는 특공대의 투입을 떠올리게 됐다.
인천은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악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갯벌 뻘밭은 배로도, 차량으로도 다닐 수 없고 알보병들이 아무 엄폐물도 없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최악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평택, 군산, 심지어 남포나 동해상의 항구 도시도 같이 고려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남포는 평양과 매우 가까운 만큼 위험성이 너무 커서 배제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비록 당장 상륙 난이도는 더 낮을지 몰라도 내륙에서 곧장 북괴의 보급로를 끊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 보급로란 곧 경부선 철도를 의미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이 당첨됐다. 일단 상륙에만 성공하면 인천 시내 시가전 정도만 거친 뒤 곧장 서울에 도달할 수 있고, 서울을 먹으면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의 장악도 금방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평택과 더불어 한반도 전체에서 서쪽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가장 깊게 파인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상륙 작전의 추진과 성공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우리나라는 기사회생했다. 이 와중에 손 목사도 며칠만 더 버텼으면 살았을 텐데 인간적인 면에서는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국어학자인 최 현배 박사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 중에 1945년 8월 18일 처형 예정이었는데.. 사흘 일찍 아주 갑작스럽게 광복이 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손 목사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안 그래도 그 전의 여순 반란 사건 때 아들을 잃었는데 전쟁 때는 당사자가 희생되어 정말 고난과 순교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 주 기철 + 주 영진

1944년 주 목사의 죽음에 대해, 당시 주 목사와 가까이에서 수감되었던 안 이숙 여사는 일제가 주 목사를 약물을 주입해서 살해한 거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마치 윤 동주 시인의 죽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해당 주장 외에 다른 교차검증 가능 요소가 없고, 또 그렇잖아도 고문 때문에 몸이 극도로 망가져 있던 사람을 일제가 일부러 교묘하게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에서는 의구심이 든다. 더구나 그 당시 일제는 주 목사를 다 죽여 놓고는 면피를 위해서 오히려 보석 명목으로 풀어 주려 했는데, 오 정모 사모가 이 꼼수를 눈치채고 보석을 거부했었다.

윤 동주야 옥중에서 고문 당한 것 없고 건강한 상태로 멀쩡히 수감돼 있었는데, 이상한 주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점점 쇠약해지고 이내 죽고 말았다. 이건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여러 증언이 일치하며, 그 주사 맞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윤 동주는 반도도 아닌 일본 본토의 형무소에서 수감됐었다. 그러니 윤 동주는 생체실험 약물 주사로 인한 사망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반면, 주 기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여겨진다.

주 목사를 다룬 이전 글에서 본인이 이미 지적했듯, 주 목사는 재판 받고 형을 정식으로 선고받은 기결수가 아니었다. 윤 동주는 말할 것도 없고 유 관순, 최 현배 같은 분들과도 사정이 다르다. 그냥 경찰이 제멋대로 "너 이 셰끼 왜 신사참배 안 해?" 식으로 주 목사를 불법 구금하고 괴롭힌 것에 가깝다.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가 있을 곳은 교도소는 절대 아니고 기껏 유치장 내지 구치소(정식으로 기소라도 했을 경우) 레벨밖에 안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을 몇 년 씩이나(마지막 4차던가 5차 검속 기준) 가둬 놓는 건 말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구속 기간은 법적으로 180일로 정해져 있고, 그때까지 기소할 껀덕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피의자를 풀어 줘야 한다.

한 마디로 주 목사는 기독교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관점에서도 꽤 불법 막장 절차에 의해 구속당했던 것이다. 지금 박 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언제는 태블릿이고 뭐고 증거가 넘쳐난다더니, 그 긴 기간 동안에 혐의 하나 입증을 못 하고 구속 기간만 억지로 질질 연장해서 가둬 놓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의 법 체계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게 잘 적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가 엄밀한 구분 없이 그냥 '형무소'라는 시설 하나로 뒤죽박죽 통합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주 목사가 법적으로 기결수였는지 미결수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었다. (☞ 평양 형무소 관련 자료)

끝으로 주 목사의 장남인 주 영진 장로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목회자의 길, 그것도 평범한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가다가 끝내 순교했다.

일제의 박해가 끝나나 싶었는데 평양은 잘 알다시피 북괴 공산당의 소굴이 되었다. 이분은 뜻을 품고서 아예 월남하지도 않고 고난을 자처했으며, 거기서 종교인 반동분자로 단단히 찍혀 있다가 6· 25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이미 잡혀가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관련 자료) 본인은 저분도 순교했다는 것까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예 월남하지도 않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5 19:34 2017/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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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국내 철도 동향

1. 경부선 ITX 청춘

한동안 열차 시각표를 안 보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최신판을 받아 보니 흥미로운 변화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잘 알다시피 2010년대부터는 생소한 동력분산식 전동차들이 잔뜩 도입되어 과거의 기관차-객차 패러다임을 뒤흔들어 왔다. 경부선에는 서울-수원/천안 급행 전동차의 상위 호환인 듯한 '누리로'가 무궁화호를 조금씩 대체하고 있다. 서울-부산 풀코스는 아니고 서울-신창처럼 반쯤 광역전철 같은 고유한 노선 위주로 달리는 중이지만, 명절 때는 누리로도 대전 정도까지는 간 적이 있으며, 호남· 전라선으로는 이미 풀코스를 뛰고 있다.

누리로가 경부선 전구간을 '누빌/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경부선 본선 말고 다른 노선이나 관광 열차로 뛰는 차량이 많은지라, 누리로의 서울-신창 편도 운행 횟수는 하루 2회꼴로 크게 감소해 있다. 이것도 완전히 폐지될 뻔한 것을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넣어서 2회라도 건진 거라고 한다.

한편, 누리로와는 달리 ITX-새마을은 이미 기존 새마을호를 완전히 대체했다. 2017년 현재, 과거의 새마을호는 장항선에서나 어제 오늘 하면서 연명하는 중이다. ITX-새마을은 도입 컨셉부터가 광역전철과는 딱히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런데 이 와중에 경부선의 용산-대전 구간에 한해서 ITX-청춘이 소수 편성되었다니, 굉장히 참신하게 다가온다. 경춘선의 전유물이던 2층 객차 열차가 경부선에도 납셨다니~! 게다가 얘는 영등포에 정차하지 않는 주제에 서울의 노량진과 신도림 역에도 정차한다. 노량진이라고 해서 지금 버려진 일반열차 플랫폼을 이용하는 건 아니고, 거기서는 애초에 그냥 전철 선로와 승강장을 사용하는가 보다. 그래야 신도림에 정차가 가능할 테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경부선은 온갖 철도 차량들의 각축장이 됐다.
재래선이 이렇게 된 동안, 고속선은 잘 알다시피 기존 KTX와 수서 고속철 SRT가 섞이면서 한 선로에 둘 이상의 회사에 소속된 열차가 다니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운행 패턴은 서울 지하철과 코레일의 직통 구간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고속선이라든가 공항선 등 다양한 철도에서 흔히 보게 될 것이다. 일례로 공항선은 코레일 공항철도(기존 공철)뿐만 아니라 KTX가 다니고 있으며, 앞으로는 서울 지하철 9호선조차 직통 운행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던가?

그런데 SRT는 율현 터널 구간에 진동이 그렇게도 심한가 보다. 본인은 아직 거길 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타 본 지인들의 증언이 일치하는 편이다. 승차감이 KTX 고속선과 비교했을 때 어떤지 어서 체험해 보고 싶다.

2. 중앙선 지평 역

수도권 전철에서 차가 극도로 안 다니는 최하위권 역 내지 노선을 꼽자면 경부선 천안 급행이나 경의선 신촌, 광명 셔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역이 올해에(2017년 1월) 하나 더 생겼으니, 바로 중앙선 지평 역이다. 광역전철 역세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제외된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종점인 용문의 바로 다음 역에도 일부 전철을 운행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수도권 전철 중앙선은 궁극적으로 무려 원주(...!)까지 연장 계획이 있으므로 미리 이렇게 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어차피 나쁠 것도 없다.

다만, 현재 지평 역은 열차가 하루에 편도 4회밖에 운행하지 않으니.. 서울-천안 급행과 비슷한 급의 레어템이다. 장암이나 옛 보정(분당선), 서동탄처럼 차량 기지 안에 임시로 만든 역도 아니고 위상이 조금 독특하다.

3. 기존 서울 지하철의 연장

경전철 말고 기존 서울 지하철(+수도권 전철)들도 생각보다 많은 노선들이 연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 1호선: 지하철이나 도시철도가 아닌 광역전철의 영역이긴 하지만, 북쪽 경원선 구간이 소요산보다도 더 길어져서 연천까지 연장 예정이다. 단, 복선은 아니고 2~30분 간격으로 단선전철 형태로. 통근열차의 최후 구간까지 전동차가 쓱싹 해 버리고, 그보다 더 북쪽까지 가는 건 안보 관광 패키지 열차가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 4호선: 당고개 이북으로 산을 뚫고 남양주 진접면까지 연장 예정이다. 이 기회에 창동 차량기지도 거기로 이전하게 된다.
  • 5호선: 상일동 지선의 종점이 동쪽으로 더 연장되어 하남시 미사 신도시와 검단산 기슭까지 간다.
  • 7호선: 부평구청보다 더 서쪽으로 인천 지하철 2호선 석남 역까지 연장 공사 중임.
  • 8호선: 암사 이북으로 남양주 별내까지 연장된다. 8호선도 드디어 강을, 그것도 하저터널로 건너는 지하철이 된다.
  • 9호선: 종합운동장보다 동쪽으로 더 나가서 보훈병원, 일자산 기슭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8호선과는 1990년대의 계획이던 몽촌토성이 아니라 석촌역에서 만나게 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여전히 '인서울' 연장이다.

이들과 달리 3호선은 2010년의 오금 연장 이후로 딱히 더 연장 공사 중인 게 없다. 그리고 6호선도 봉화산에서 조금만 더 가서 그냥 자기 차량기지 안에다가 신내 역을 만들어서 경춘선과 환승시키자는 떡밥이 있지만, 주민들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지는 않고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말단이 광역전철과 연결되어 연장된 것을 제끼고, 서울 지하철이 지하철 명목으로 처음 계획되었던 구간보다 더 연장된 것은 현재 3호선(양재 이남으로 수서, 오금)과 7호선(온수 이남으로 부평구청)이 존재한다. 9호선은 신논현-종합운동장은 처음부터 계획된 게 완공된 것이고 이보다 더 동쪽이 추가 연장 구간이다. 앞으로 그런 연장 구간이 4, 5, 8, 9호선에도 생길 것이고, 7호선은 연장 구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이건 3기 지하철이라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한 박자 좀 늦은 것 같고, 서울 경전철과 더불어 3.5나 제4기에 가까운 트렌드로 봐야 할 듯하다.
서울의 동쪽으로 철도 불모지이던 하남에도 드디어 저렇게 지하철이 들어오게 됐는데, 서쪽의 철도 불모지인 김포는 사정이 어떤가 모르겠다. 거기는 9호선과 연계되는 별도의 경전철이 건설 중이라고 들었다.

4. 서울 서쪽의 신규 종축 철도

1988년에 개통한 안산선은 금정에서 한대앞 역까지는 고유한 구간이지만, 한대앞에서 오이도까지는 기존 수인선과 선형이 동일한 구간이다. 다만, 처음에 개통은 금정에서 안산까지 하고, 안산에서 오이도는 추후 2000년에 개통했다.
이 안산선이 2010년대에는 드디어 수인선과 앞뒤로 수평 연결되었으며, 미래에는 수직으로 환승역이 하나도 아닌 둘이나 생길 예정이다.

하나는 한국 철도에서 코레일 타임 티스푼 공사의 전설이 아닌 레전드인 '신안산선'이다. 얘는 안산선 '중앙' 역과 환승되며, 목감· 광명 일대를 지나서 영등포와 여의도까지 갈 예정이다. 즉, 서울 방면이다. 과거에 계획되었던 서울 지하철 10호선의 대체 노선이며, 얘의 착공과 개통이 너무 늦어졌기 때문에 광명 역의 대중교통 연계가 안습해진 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안산선보다 더 서쪽으로 지나는 소사-원시선이다. 얘는 단순 광역철도 수준을 넘어서 장거리 간선 철도이며, 초지(구 공단) 역과 환승된다. 위로는 경인선 소사 역과 만나서 대곡까지 갈 예정이며, 밑으로는 안산시 단원구 저 끝의 원시동까지 간다. 얘 덕분에 시흥시의 교통도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동해 방면으로는 경강선과 동서 고속화 철도, 동해선이 계획 중이라면, 서해 방면으로는 이런 철도가 계획되고 있다.

5. 한국 철도 차량의 등급과 유형별 도입과 퇴역 내력

끝으로, 이걸 정리해 보았다.
아래 표를 달달 외워서 머리에 다 집어넣고 의미를 이해한 분이라면 철덕의 기본적인 자질은 갖췄다고 볼 수 있겠다.

  동차형 기관차+객차형
새마을호 먼 과거 DEC: 1980년 도입되었다가 유선형 객차 도입과 함께 무궁화호로 격하, 2001년 퇴역.

가까운 과거 DHC: 1987. 7. 6. 대우중공업 제조 전후동력형 동차와 함께 도입. 동력집중+유압 변속
그 뒤 94년까지 현대· 한진중공업 차량이 추가 도입. 2013. 1. 5. 전량 퇴역함

현재 ITX-새마을 전동차
1974. 8. 15. 관광호의 후신으로 새마을호 차급 도입.
1985. 11. 16. 서울-부산 4시간 10분 증속.
1986. 7. 12. 현대정공 제조 7000호대 새마을호 견인 전용 봉고 기관차 + 유선형 객차 도입. 일부 객차는 훗날 무궁화호 특실로 격하됨.
2012. 11. 28. 봉고 기관차 천량 퇴역
2015. 4. 2. 경부선 정규 노선 퇴역. 모두 ITX-새마을 전동차로 대체되고, 재래식 객차형 새마을호는 이제 장항선에만 남아 있음.
무궁화호 먼 과거 EEC: 1980년 DEC와 함께 도입되었다가 1998. 12.부터 통일호로 격하. 2001년 퇴역.

가까운 과거 NDC: 1984년 도입되어서 시종일관 무궁화호 등급으로 운행함. 최후에는 경부선 경전선 영남 구간에서만 운행되다가 2010년 전량 퇴역. (차급 변경 없이 시종일관 무궁화호 유지)

현재 TEC 누리로: 단, 위상만 무궁화와 동급이지 기존 무궁화호를 대체하는 운행을 하지는 않고 있음
명칭 자체는 1960. 2. 21. 등장.
현재까지 비전철 구간을 다니고 있는 가장 만만하고 무난한 일반열차의 대명사.
통일호 CDC: 타 차급에서 옮겨온 것 말고 처음부터 통일호로 만들어진 동차는 이게 유일함. 1996~1999년 도입. 2008년부터 이들 차량은 RDC 무궁화호, 관광열차 등으로 개조됨.
현재 정규 노선은 '통근열차'라는 이름으로 경원선 소요산 이북 구간에만 남아 있고,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연천까지 연장되면 폐지 예정.
통일호만 유일하게 동차형이 객차형보다 더 오래 존속 중임.
명칭 자체는 1954. 8. 15. 등장.
차급 인플레로 인해 서서히 격이 낮아지다가 2004. 3. 31. 고속철 개통 바로 직전에 전량 퇴역.
최후에는 중앙선 근성열차와 경춘선에서 운행 중이었음.
비둘기호 제조사의 이름을 따 니가타/가와사키 디젤동차 등으로 불림. 경의선, 교외선 등을 다녔고, 수인선 협궤 동차도 등급상 비둘기호임.
1960년대 중후반에 두루 도입되었다가 8~90년대에 통일호 격상 등을 거친 뒤 폐차됨. 정확한 시기 불명.
여러 최하위 등급 완행열차들이 최초로 이 명칭으로 통합 정립된 것은 1984. 1. 1.
리즈 시절엔 전국을 누비기도 했으나 1998. 11. 30. 정선선만 남기고 모두 폐지.
정선선도 기관차+객차형이 다니다가 2000. 11. 14. 마지막 운행 후 폐지.

Posted by 사무엘

2017/10/19 19:36 2017/10/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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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7/10/22 19:22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7/10/22 23:14 # M/D Permalink

      그렇다? 후훗~ 거의 2010년대 초에 잠깐 있었다가 폐지됐던 특별급행..;; 그게 다시 부활하기도 했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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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원자력 발전소가 처음으로 지어지고 가동된 건 고리 원자력 발전소로, 박통 말기인 1970년대 말이다. 그게 법적 설계 수명이 다 된지라 이제 가동 중단과 해체 단계에 진입해 있다.

원자력 발전의 건설과 운영은 당연한 말이지만 엄청난 과업이며,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결코 아니다. 박통 이전에 할배 대통령부터가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저게 이렇게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반도에서 나라를 먹여 살릴 기적의 에너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자기 조국의 숙적 원수요 전쟁 미치광이였던 일본을 단번에 거꾸러뜨리고 항복시킨(결과적으로 대한민국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 준!!) 무시무시한 폭탄이 바로 원자폭탄이지 않던가? 그러니 원자력을 보는 할배의 눈빛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할배 대통령은 그 열악한 전쟁 폐허 여건에서도 서울대에 원자력 공학과를 신설할 것을 지시하고, 미국을 설득해서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했으며 원자력 연구원의 전신인 원자력 연구소(1959)를 만들었다. 박통이 70년대에 KIST와 국방 과학 연구소(ADD)를 만들었으나, 할배는 그보다도 전에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점을 밑줄 치고 외우시길 바란다.

그리고 국비 장학 유학 제도를 통해 원자력 공학 공돌이 전문가들을 양성했다. 외화 한 푼이 아까울 정도로 가난하던 시절에도 교육을 위해서는 저렇게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사전 준비가 있었기 때문에 훗날 박통 때 이 땅에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될 수 있었다. 핵무기나 만들어서 북괴처럼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깽판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먹고 살기 위해서,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 원자력 기술을 도입했다.

본인은 원자력 발전의 적극 찬성론자이다. 화석 연료는 산림 황폐화를 예방해 주고, 원자력 에너지는 화석 연료의 부담을 덜어 준다는 원리를 왜 다들 모르는 걸까? 우리나라는 그저 품종 개량하고 나무를 무작정 심기만 해서 산림 녹화에 성공한 게 아니다. 땔감용으로 나무를 벨 일을 없게 만드는 과업이 성공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녹화를 성공할 수 있었다. 바로, 런던 스모그의 주범이기도 한 그 더티한 석탄의 대규모 보급이 전국적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나라의 산림 녹화 성공 사례가 아무 못사는 민둥산 나라에나 선뜻 도입 가능하지가 않은 것이다.

이런 큰 효과에 비해 대기오염이나 방사능 위험은 각각 따로 대책을 수립해서 해결해야 할 작은 부작용일 뿐이다. 다른 대안도 없는 주제에, 석기 시대로 돌아갈 생각도 없으면서 원자력 발전을 굳이 핵 발전이라고 부르면서 정작 북핵과 미사일엔 절대 침묵하는 애들을 난 개인적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 대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도 저 트루먼 대통령처럼 껄껄 웃어 보고 싶다~!! ㅋㅋㅋㅋㅋㅋ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말은 아주 젠틀하고 부드럽게, 공손하고 댄디하게 하되, 허리춤에는 커다란 몽둥이를 들고 있으면 된다.
요즘은 저 리스트에다가 "둠가이와 존나 크고 아름다운 총" 컷도 하나 더 들어가야 할 것 같긴 하다.

(뭐, 트루먼 대통령은 실제로는 잘 알다시피 마냥 저런 대마왕이 아니었다. 미국의 너무 호전적인 장성들이 6· 25 전쟁 중에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리려는 걸 오히려 저지하기도 했다.. ㅎㅎ)

아무튼.. 원자력은 이 승만 때 이래저래 뿌려졌던 씨가 박 정희 때 결실을 거뒀다. 그런데 그 다음으로 컴퓨터는... 박통 때 뿌려졌던 씨가 그 다음 전대갈 때 결실을 거뒀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다.
물론 컴퓨터 자체야 박통 때 국내에 첫 도입됐으며, 70년대부터 각종 행정 서비스의 전산화가 찔끔찔끔 진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의 컴퓨터는 관공서와 연구소에서나 볼 수 있는 크고 아름다운 기계였지, 개인이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천공 카드, 자기 테이프.. 아직 뭐 이러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일반 서민들도 정보화 시대라는 걸 체험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터져나왔다. 1983년에는 삼성 전자에서 반 년간 공돌이들을 갈아넣은 끝에 64K디램 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했고 그와 별개로 SPC-1000이라는 8비트 컴퓨터를 만들어 냈다. 경쟁사인 금성사에서도 곧 금성 패미콤을 만들었다.

1984년에는 철도청에서 최고급 열차인 새마을호부터 승차권 전산 발매를 시행했다. 지하철 승차권 같은 딱지(에드몬슨..) 말고 일명 전산 승차권이라는 게 이때부터 최초로 발급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전산화 이전에는 열차의 좌석 배당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모르겠다. 행정 착오로 인해 한 좌석에 두 사람이 중복 배당되기도 했을 테고, 아니 옛날에는 애초에 지정석보다는 자유석 위주로 승차권이 발매됐지 싶다.

또한 이 해엔 한국 정보 올림피아드의 전신인 전국 단위의 PC 경진대회가 최초로 개최되기도 했다. 이건 대통령이 직접 관심을 갖고서 거절할 수 없는 규모의 상을 걸고 정말 성대한 규모로 치러졌었다. 이 당시에는 심지어 일반부(대학부를 초월하여!)까지 있었는데, 1990년대 중반부터 정보 올림피아드로 바뀌면서 대회의 범위가 국제 규격에 맞게 대학 미취학 연령으로 조절되었다.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뭐, 컴퓨터뿐만 아니라 자동차도.. 박 정희 때 이제 막 고속도로가 닦이고 자동차도 일정 수준 이상의 국산화율을 달성한 생산이 시작됐다. 하지만 서민이 체감할 정도의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는 잘 알다시피 1980년대에 가서나 이뤄졌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분야별로 차근차근 산업화하고 발전해 왔다. 지금이야 어디 깡촌에 고속도로가 개통하면 "또 어디 개통하나 보네~ 내비 업데이트나 해야겠네" 짤막하게 뉴스로 나오고 말지만.. 옛날에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는 임팩트와 포스가 지금과는 가히 넘사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경부 고속도로 같은 길이의 거대한 고속도로를 한번에 만들 일 자체가 없어졌기도 하고 말이다.

또한, 옛날에는 탈북자의 귀순은 대대적인 뉴스감 및 선전거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탈북자가 1년에 몇만 명씩 내려오고 체제 선전이나 경쟁 따위도 전혀 할 필요가 없으니, 이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 아닌 이상 그냥 "병사 1명 군사분계선 넘어서 귀순, 서해상으로 탈북" 한 줄 보도로 끝이다. 이름 같은 신상은 밝히지도 않는다. 63 빌딩과 서울 타워를 구경시키면서 남조선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는 관행 역시 없어진 지 오래이며, 그냥 국정원 소속의 탈북자 신문 센터와 하나원으로 직행이다.
초딩 시절에 김 만철 씨 가족의 해상 귀순과 <광호의 일기> 책을 봤던 세대로서 이것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7 08:34 2017/10/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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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딩 시절에 어렴풋이 경험했던 옛날 컴퓨터 환경의 추억을 회상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16비트 환경은 베이직 이외에 C/C++ 같은 급의 언어로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한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API 썽킹 얘기도 한번 했고, 1년 남짓 전에는 Windows 9x 시절에 악명 높던 리소스 퍼센티지를 32비트 프로그램에서 직접 구하는 방법까지 옛날 책을 뒤져가며 복습해 봤다. 이번에는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다룬 적이 없었던 다른 기술 얘기를 좀 해 보겠다.

시대를 풍미했던 Windows 9x는 왜 그리도 블루 스크린(BSOD)이 자주 뜨고 불안정했을까? 흔히 지저분한 16비트 코드 잔재 때문이라고들 그런다.
80386급 이상의 CPU에서 제공되는 보호 모드, 가상 메모리 같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굳이 그렇게 허접한 운영체제가 만들어질 일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단 하나.. CPU가 원론적으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대로 활용해서 이상적인 운영체제를 만들려면, 당시 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던 엄청난 메모리와 속도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Windows 9x는 Windows NT와 같은 최신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환경뿐만 아니라 기존 16비트 도스/Windows 프로그램과의 호환성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이런 모든 미래와 과거 이념을 Windows 3.1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1990년대 중반의 서민들 컴에서 그럭저럭 구현해야 했다. 그러니 얘는 태생적으로 아주 기괴한 방향으로 개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일 시스템이나 메모리처럼 반드시 32비트 덕을 봐야 하는 엔진 부분인 kernel은 32비트 코드 위주로 개발했지만, user나 gdi처럼 운영체제의 단순 외형과 관련된 부분은 16비트 코드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쪽 함수는 비록 32비트 프로그램에서 user32.dll, gdi32.dll을 통해 호출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argument들을 thunk 해서 16비트 user.exe와 gdi.exe로 내려가서 기능이 수행된다는 뜻이다.

개량된 트루타입 글꼴 래스터라이저처럼 GDI 계층에도 32비트 코드로 다시 작성된 게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틀은 여전히 16비트 기반이다.
Windows NT는 16비트 썽킹은커녕 훨씬 더 안정적인(하지만 속도는 좀 느려지는) 별개의 API layer가 있는 지경인데.. 9x와 NT가 서로 설계 이념과 처지가 얼마나 극과 극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설계 방식 때문에 Windows 9x는 16비트 heap 크기에 맞춰진 리소스 퍼센티지 한계가 여전히 걸려 있으며, GDI 좌표계도 기본적으로 32비트가 아닌 16비트 크기이다. 그래도 이런 건 그냥 한계와 제약일 뿐, 딱히 운영체제의 안정성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Windows 9x는 메모리 절약과 하위 호환성을 위해 (1) 16비트 코드를 많이 재활용했는데, 이걸 온전한 가상 머신 샌드박스 안에서 구동하는 게 아니라 (2) 32비트 코드와 동일한 주소 공간과 위상에서 동일한 권한으로 섞인 채 최대 성능으로 실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16비트 코드가 운영체제 차원에서 대놓고 돌아가는 부분도 있으니 저렇게 안 해 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Windows 9x는 NT와 같은 급의 (3) 엄격한 메모리 보호를 포기했다. 스레드 동기화나 가상 메모리 같은 현대적인 개념이 없이 쑤제 어셈블리어로 코딩된 레거시 코드가 한둘이 아니니, 걔네들이 있는 그대로 돌 수 있게 시스템의 안정성을 일부 희생하게 된 것이다.

32비트 프로세스가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최신식 private 메모리야 9x도 NT의 동작 방식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각 프로세스별로 동일하게 보호가 잘 된다.
그러나 9x에서는 32비트 프로세스라 해도 16비트 프로그램과의 호환을 위해 남겨놓고 있는 4MB 이내 주소대의 영역은 보호가 적용되지 않으며, 반대로 운영체제 시스템 DLL이 로딩되는 상위 영역도 성능 오버헤드 간소화를 위해 모든 프로그램들이 씨크하게 같은 주소로 공유된다. 보호 같은 거 없다.

나쁜 마음 먹은 프로그램이 이런 16비트 호환 영역이나 시스템 DLL 영역 주소를 0으로 덮어써 버린다거나 하면 운영체제를 BSOD와 함께 곧장 다운시킬 수 있다. Windows NT에서는 메모리 덮어쓰기만으로는 이런 사태가 절대로 발생하지 않고 문제의 프로그램만 강제 종료되고 운지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9x는 그 정도로 튼튼하지 못했다. 메모리 보호 강도가 반쪽짜리일 뿐이라는 뜻이다. 반쯤은 응용 프로그램이 선할 거라고 믿고 곧이곧대로 돌려 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메모리 보호 말고 Windows 9x가 안정성이 결정적으로 취약한 분야는 멀티스레드와 관련하여 또 있었다.
Windows 9x/NT는 3.1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선점형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한 프로그램이 자발적으로 CPU 자원을 반납하지 않고 무한 뺑뺑이를 돌더라도 운영체제가 강제로 CPU 자원을 뺏어서 다른 프로그램에게 골고루 분배해 줄 수 있다. 또한 한 프로그램 안에서 UI 스레드 따로, 작업 스레드 따로 운용이 가능하다. 작업 스레드가 재귀호출까지 마음대로 하는 동안 사용자의 입력에도 매끄럽게 응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가상 메모리가 메모리 주소를 잘못 건드리는 것만으로 타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를 뻗게 하지 않게 하는 공간 보호막이라면, 선점형 멀티태스킹은 한 프로그램이 CPU를 독식해서 시스템 전체의 동작을 먹통으로 만들지 않게 하는 일종의 시간 보호막이다.

선점형 멀티태스킹 환경에서는 내 스레드가 받고 있던 CPU 포커스가 싹 바뀌어서 타 스레드로 이동하는 게 정말 예고 없이 불시에 될 수 있다. 컴퓨터의 모든 코드가 자기 자신의 스택과 지역변수만 갖고 놀면서 고립된 채 돌아가는 게 아니며, 한 자원을 여러 스레드들이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코드에 둘 이상의 실행 주체가 동시에 진입했다간 프로그램 실행이 왕창 꼬여 버린다. 이건 마치 화장실에 문을 잠그는 기능이 없어서 누가 볼일이 아직 안 끝났는데 아무 예고 없이 문이 확 열리고 딴 사람이 들어오는 것과도 같다.

결국 스레드 사이에는 교통 정리 기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크리티컬 섹션, 뮤텍스 등 다양한 커널 오브젝트들이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저 16비트 레거시 코드들도 선점형 멀티태스킹 통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며, 그 코드들은 레거시답게 멀티스레드 동기화 같은 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걸 고려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개발되고 구현된 코드이니까 말이다.

이것도 메모리와 마찬가지로 16비트 코드를 완전히 자기 가상 머신에서 따로 돌게 하면 별 문제될 게 없으며, Windows NT는 실제로 ntvdm이라는 16비트 가상 머신을 돌렸다.
하지만 Windows 9x는 가상 머신을 돌릴 여력이 안 되는 PC를 대상으로 성능을 얻는 대신 안정성을 희생하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16비트 GUI 쪽 코드는 GetMessage, PeekMessage 같은 함수로 명시적으로 CPU 자원을 반납하지 않는 동안에는.. 전체를 동기화 오브젝트로 둘러싸서 어떤 경우에도 여러 스레드들의 동시 진입이 되지 않게 한 것이다. 이름하여 Win16Mutex라는 무시무시한 시스템 동기화 메커니즘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Windows 9x도 16비트 프로그램만 줄곧 돌린다면 과거의 Windows 3.x와 별 차이 없이 동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제 기능을 활용할 수 없다.
물론 32비트 코드도 16비트로 thunk하는 gdi/user 함수를 호출할 수 있다. 걔네들은 그 함수가 실행되는 동안에만 Win16Mutex 안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러나 16비트 프로그램은 Get/PeekMessage를 호출하지 않고 실행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Win16Mutex를 붙들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운영체제의 그 어떤 프로그램도 16비트 코드를 수행할 수 없으며, 앞 프로그램의 실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떤 프로그램이 창을 띄웠다가 while(true) 같은 데라도 빠져서 응답이 멎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32비트 프로그램은 ctrl+alt+del을 누른 뒤 작업 목록에서 그럭저럭 강제 종료를 할 수 있었다. 이 기능 자체는 NT뿐만 아니라 9x 계열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옛날 기억을 꺼내 보면, 16비트 프로그램은 그렇게 깔끔하게 강제 종료가 잘 되지 않았다. 16비트 프로그램이 응답 불가 상태가 되면 운영체제 전체가 실행이 불안정해졌으며, 해당 프로그램을 강제 종료한 뒤에도 매우 높은 빈도로 블루 스크린이 계속되다가 운영체제가 뻗었다. 그 이유가 바로 (4) 16비트 코드는 애초에 선점형 멀티태스킹 대상이 아니며, 16비트 코드의 실행이 32비트 코드의 gdi/user계층 기능에까지 직통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제야 퍼즐 조각이 끼워맞춰진다. 저건 메모리 보호와는 별개의 영역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ndows 95는 안정성이 더 헬게이트이던 Windows 3.x보다 많이 나아지지는 못해도 최소한 더 나쁘게 만든 건 없다. 그러니 제품으로 나와서 1990년대 중반의 PC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다.

물론 Windows 9x도 Windows API와 무관하게 완전히 분리된 환경인 도스용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샌드박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Windows NT의 ntvdm가 지원하지 못하는 더 다양한 도스용 프로그램을 직통으로 구동해 주면서도 말이다. Windows 3.x때부터 386 확장 모드가 도입되면서 Virtual 8086 모드를 이용해 도스창을 여러 개 동시에 여는 게 가능해졌다. 9x부터는 도스창을 강제 종료도 할 수 있게 됐다.

단지, 하드웨어를 너무 저수준으로 제어하는 도스용 프로그램이라면 대책 없으며, 16비트 Windows GUI 프로그램은 32비트 프로그램과 자원을 어중간하게 직통으로 공유하다 보니, 운영체제 전체에 여파가 끼치는 잠재적인 위험이 상존했던 것이다.

Windows NT, 9x, 그리고 더 과거의 win32s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Windows NT Windows 9x Windows 3.1 + Win32s
PE 방식의 32비트 EXE/DLL 실행, 32비트 메모리 접근 O O O
프로세스 별 고정되고 독립된 주소 공간 보장 O O X
DLL도 인스턴스별 독립된 공간 보장 O O X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멀티스레드 O O X
레지스트리, 32비트 파일 시스템, 최신 TTF 래스터라이저 O O X
온전한 메모리 보호 O △ (private area만. 도스 호환 영역과 커널 영역은 보호되지 않음) X
유니코드 API O △ (코드 변환, 메시지, 기본적인 문자 찍기 정도만 한정) X
유니코드 기반 O X X
user, gdi 계층이 완벽하게 32비트. 리소스 제약 없음 O X X
16비트 프로그램 가상화 O (안정적임) X (도스용 프로그램만 가상화. 느리고 메모리 적은 컴 친화적) X
하드웨어 계층 추상화 O (이식성. 하지만 느림) X (x86 전용, 저사양에서 성능 최적화) X
NTFS 파일 시스템 O X X
시스템 요구사항 압도적으로 제일 높음 win32s보다 더 높지만, NT보다는 훨씬 낮음 제일 낮음

이상.
지금 생각해 보면 컴퓨터가 성능이 정말 열악하던 시절에 어째 저런 유리몸 Windows를 어떻게 쓰고 지냈나 싶다. 특히 9x 계열 중에서도 1호인 Windows 95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안정성이 굉장히 안습했으며, 지나치게 고성능인 컴퓨터를 감당(?)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 잘 알다시피 디렉터리명에 CON 같은 예약어가 들어간 채로 파일 목록 조회 같은 요청을 하면 운영체제 전체가 뻗는다. 탐색기이든 dir 명령이든 마찬가지. 95/98에서는 별도의 버그 패치가 나왔고, ME에서야 버그가 처음부터 완전히 수정되었다.
  • 부팅 후에 밀리초 단위로 부호 없는 32비트 정수 범위를 초과하는 대략 7주(49.x일) 이상 계속 켜져 있으면 역시 뻗음. Windows 95는 알고 보면 7주짜리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게 NT도 아니고, 무려 7주가 지나기 전에 십중팔구 어차피 다른 이유로 다운되고 재부팅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문제가 별로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문제 역시 별도의 버그 패치가 추후 공개되었다.
  • 저사양 PC에서 가상 메모리를 관리하는 방식의 한계로 인해, 램이 512MB보다 더 많은 컴에서는.. 단순히 초과 잉여 영역이 인식되지 않고 무시되는 게 아니라 그냥 부팅되지 않고 뻗는다.
  • 클럭 속도가 대략 2.1GHz보다 더 높은 컴에서는 Network Driver Interface Specification라는 계층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뻗었다고 한다. 너무 빠른 컴퓨터에서 레거시 코드가 문제를 일으킨 유명한 다른 사례로는 볼랜드 파스칼의 crt 유닛이 266MHz보다 더 빠른 컴에서 오류를 일으켰던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내부적으로 시간 측정을 하다가 0으로 나누기 오류가 발생하는 형태인데, Windows의 저 문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니 옛날부터 컴덕들은 OS/2나 Windows NT 같은 신세계를 갈망하긴 했지만, 그걸 돌리려면 흙수저 가정에서는 엄두를 못 낼 정도의 비싼 고성능 컴퓨터가 필요했다. 윈95가 나왔던 시절에는 램 16MB도 돈지랄 감지덕지이던 시절이고 32~64MB는 가히 꿈의 영역이라 여겨졌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에 가정용 보급형 PC들도 램 용량이 급증하여 100수십 MB급이 되었다. 그제서야 하드디스크 스와핑/thrashing을 볼 일이 없어졌으며, 마소의 입장에서는 NT와 별개로 굳이 헝그리한 9x 커널이 존재해야 할 명분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옛날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았는데..
본인은 우리나라 역사 내지 이념을 Windows의 개발 내력에다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이 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내각은 독립 운동가· 광복군 위주로 철저하게 깨끗하게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과 말단의 군· 경 간부는 친일 부역자들도 불가피하게 그대로 재등용하여 운용되었다. 독립 운동가를 적극 무료 변론하다가 일제에게 찍혀서 면허 정지까지 당했던 애산 이 인 선생이 해방 후에 법무부 장관이 되고 나서는 오히려 반민특위의 해체에 앞장섰을 정도였다.

이게 Windows 95가 일단 겉으로는 32비트 코드 기반으로 개발되고 32비트 주소 공간과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16비트 코드를 잔뜩 재등용하고 메모리 보호가 완전하지 못했던 이유, 수시로 파란 화면 뜨고 불안정했던 이유와 정확하게 일맥상통한다.

한 마디로 그 시절에 가정용 컴퓨터에서 Windows NT 같은 운영체제를 돌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직 조선과 일제 강점기 사고방식에 쩔었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이 태반이던 시절에.. 게다가 북괴의 위협과 비열한 공작까지 횡행하던 시절에, 일제 치하에서 행정 유경험자를 재등용하지 않고서 치안을 유지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FM대로 이상적으로 세우고 굴리는 것도 동급으로 절대 불가능했다.

Windows 95의 한계에 대해서 정리해 보니 이 생각이 더욱 굳건하게 확신이 든다. 그 시절의 운영체제든, 194~50년대의 우리나라 사정이든 흑역사와 한계는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이지 악의적으로 일부러 발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폴로 17호 이후로 인간이 달에 안/못 가고 있는 이유는 다른 악의적인 거짓이나 음모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재정이 부족하고 가성비가 안 맞기 때문인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쓸데없이 자국 비하를 조장하고 사람 정신건강을 해치고 일제보다 더 나쁜 악을 정당화하고 무마하는 이 악하고 해로운 생각은 보이는 족족 반박하고 뿌리뽑아야 하며,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산업화하고 일깨워 줘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4 08:36 2017/10/1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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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7/10/19 04:0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7/10/19 12:46 # M/D Permalink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잘 지내고 계신가!
      이 2, 30년 묵은 옛날 Windows 프로그래밍 배경 얘기가 이해가 될 정도이면 대단한 한편으로 님도 슬슬 아재력이 늘어 가는 것 같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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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Basic 6은 이제 개발사로부터 지원이 중단된 지 무려 10년이 돼 가는데(나온 지는 20년..!) 아직도 현업에서 쓰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다. Visual C++ 6도 업계에서 도를 넘는 노인학대를 당해 온 물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얘는 이제는 거의 은퇴한 듯하다. 그리고 VB6과 VB .NET은 VC6과 VC .NET하고는 처지가 완전히 딴판으로 다르다.

비주얼 베이직이 오늘날까지 인류에게 남긴 독보적인 GUI 유산은 바로 property grid이지 싶다. 이거 원조가 바로 VB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운영체제의 공용 컨트롤로 제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닷넷에서는 자체 구현한 컴포넌트가 있는 듯하며, 네이티브 환경에서는 그냥 3rd-party GUI 툴킷에서 구현해 놓은 레플리카 내지 짝퉁이 쓰인다.

property grid는 오늘날까지 Visual Studio IDE에서 Alt+Enter 속성 창과 프로젝트 속성 대화상자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수십 개의 설정들이 추가되더라도 번거롭게 대화상자를 디자인할 필요 없이 설정을 뒤에다 추가만 하면 되니 참 편하다.
이에 비해 VC6의 옛날 속성 대화상자는 얼마나 추레하게 생겼는가?

단, 외형이 깔끔하긴 해도 너무 사무적이고 재미없게 생겨서 그런지, 개발툴이나 DBMS 말고 일반 사용자용 Office 제품 같은 데서는 property grid가 등장하는 걸 여전히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Visual Basic은 1991년 5월에 Windows용으로 1.0이 첫 출시됐다. 드래그 앤 드롭 방식으로 폼을 디자인하고 곧장 이벤트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코딩을 하는 굉장히 획기적인 개발툴이라고 찬사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Windows용의 호평에 힘입어 그 해 9월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스용 비베도 1.0이 나와서 QuickBasic과 MS Basic PDS의 라인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VB의 UI 엔진은 경쟁작이던 볼랜드 Turbo Vision 라이브러리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 뒤 VB 2와 3은 16비트 Windows용으로 나와서 인기를 얻다가 95년에 나온 4.0은 16비트용과 32비트용이 나란히 동시에 출시되었다. 마소에서 제품을 이런 식으로 동일 버전을 16비트용과 32비트용으로 동시에 내놓는 건 극히 드물었고 아마 VB4가 거의 유일했다. Office나 VC++는 그냥 상위 버전에서 곧장 32비트용이 나오면서 16비트 지원을 중단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VB도 5부터는 당연히 32비트 전용으로 갈아탔다. VB6 이후의 .NET에 맞춘 언어 마개조의 역사는 굳이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델파이(네이티브 코드 지원 RAD), Java(압도적으로 넓은 플랫폼 지원, 인지도, 점유율)와 C#(닷넷 지원 킹왕짱) 같은 경쟁 솔루션이 너무 쟁쟁한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 수요가 국내에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ASP도 비베와 비슷한 문법인 걸로 아는데 그건 살아 있나?
또한 비베가 .NET 으로 바뀌면서, 기존 Office와 Visual Studio IDE에서 제공되던 VBA 매크로 언어까지 반쯤 낙동강 오리알 레거시로 전락한 것도 좀 아쉬운 점이다. 덕분에 Visual Studio 201x 최신 IDE는 지금도 제대로 된 키/스크립트 기반 매크로가 없는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이런 비주얼 베이직과 달리 C/C++ 컴파일러 라인은 원래 IDE 같은 게 없다 보니 도스/Windows 플랫폼은 그리 타지 않았다. C/C++은 베이직과는 완전히 다른 저수준 고성능 시스템 프로그래밍 언어이지 않던가? Windows는 NT 이전엔 애초에 자체적인 명령 프롬프트라는 게 없던 물건이었고, C 컴파일러는 도스 환경에서 스위치만 바꿔서 도스뿐만 아니라 Windows, 그리고 그 당시 중요한 플랫폼이던 OS/2용 프로그램을 크로스 컴파일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에 이쪽은 C++ 언어 추가 → MFC 도입 → MS C/C++ 8.0 대신 Visual C++ 1.0으로 명칭 변경 같은 중요한 사건을 겪었으며, 리소스 편집기와 간단한 소스 코드 에디터가 16비트 Windows용으로 나왔다.
그리고 1993년, Windows NT가 출시되면서 NT용 32비트 Visual C++ 1.0이 별도로 나왔지만 이때는 NT는 시장 점유율이 아주 미미했으니 별 재미를 못 봤다.

그 뒤 1993~94년 사이에 Visual C++은 16비트와 32비트가 서로 약간 엇갈린 길을 갔다. 16비트용은 1.5 ~ 1.52c가 나온 뒤 지원이 중단됐고, 32비트용으로는 2.0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Windows 95도 없던 시절에 NT밖에 지원하지 않는 32비트용 VC++ 2는 정말 존재감이 없다. 이 32비트 바이너리를 Windows 3.1에서도 아쉬운 대로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 Win32s라는 런타임이 이 시기에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얘 역시 본격적으로 이름이 부각된 건 Windows 95가 나온 뒤부터였다. 요컨대 Win32s는 95의 등장 이전부터 NT 3.1과 오리지널 3.1 사이의 gap을 메우기 위해 존재해 왔던 물건이다.

그 뒤, Windows 95가 나오고 1995년 말에 출시된 Visual C++ 4가 대박을 치면서 마소의 개발툴이 볼랜드 같은 타사 컴파일러를 슬슬 제치기 시작했다. Developer Studio라는 통합 IDE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텍스트 에디터, 리소스 에디터, 디버거, 빌드 툴, 도움말 레퍼런스 모두 한데 통합). VC4 시절에는 UI상으로 생뚱맞게도 맥용 크로스 컴파일이 있었던 모양이나, 본인이 직접 써 본 적은 없다.

이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인터넷 기반 제품 업데이트가 없다 보니 소숫점 첫째나 둘째 자리가 0이 아닌 제품 버전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Win32s는 Visual C++ 4.1까지 지원되다가 96년 가을에 출시된 4.2에서부터 지원이 중단됐다. 설치할 때부터 "이 버전부터는 Win32s를 지원하지 않으니 이걸 타겟으로 개발하려면 구버전을 쓰고 이건 설치하지 마세요"라고 확인 질문이 뜬다.

비베는 4.0에서야 32비트 에디션이 등장하고 16비트와 32비트가 공존했던 반면, C++은 진작부터 32비트가 존재했고 그 대신 Win32s라는 과도기를 거쳤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비베는 21세기부터는 닷넷 기반 언어로 완전히 탈바꿈해 버린 반면, C++은 이전부터 위상이 위상이다 보니 닷넷의 공세에 영향을 받지 않있다. 차라리 C++/CLI 같은 파생형 확장이 나오면 나왔지, 네이티브 코드 개발 부분은 바뀐 게 없다.

비베는 5와 6에서 잠시 MS Office 97 기반 GUI 엔진을 사용했고, 닷넷 200x에서는 그 기반을 계승하여 Office XP 및 파생 변종 GUI를 사용했다. VC++의 4~6에서 쓰인 IDE는 MFC를 써서 Office와 비슷한 외형이 나오게 자체적으로 만든 GUI 엔진 기반이었다.
그러던 것이 Visual Studio 201x부터는 WPF 기반의 완전히 독자적인 고유한 GUI를 사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매번 외형을 바꾸던 것도 이제는 지쳤는지(?) 2013 이후쯤부터는 안 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2 08:35 2017/10/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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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7/10/19 04:10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7/10/19 12:46 # M/D Permalink

      임베디드나 그런 바닥은 기계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업그레이드란 없을 테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뭐, 인터넷 연결 같은 것도 없고 애초에 안정화돼서 잘 쓰던 프로그램만 죽도록 쓰면 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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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회사 사이의 알력 다툼 사례

서울 지하철 중에 1, 3, 4호선은 지하철에다가 일명 국철이라고 불리는 코레일 광역전철이 한데 붙어서 직통 운행한다는 것을 다들 아실 것이다. 사실, 1호선은 지하철 구간은 매우 미미하고 압도 다수가 지상 광역전철이다. 비록 그 미미한 구간이 서울의 최고 중심부 도심이긴 하지만 말이다.

1호선은 직· 교류 절연구간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지하철과 광역전철이 동시에 건설되고 개통되기라도 했다. 애초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내지 건국일(1948년)을 일부러 광복절과 동일한 8월 15일로 맞췄는데, 서울 지하철 첫 개통일(1974년)까지 거기에다 맞췄다. 그 날은 사실 서울 지하철 1호선(빨간 전동차)에다가 수도권 광역전철(파란 전동차)이 동시에 개통한 날이기도 했다. 이건 overloading이라는 단어의 적절한 예시인 것 같다.

그러나 훗날 개통한 4호선의 경우는 직결 계획이 전혀 없던 과천선을 서울 지하철과 뒤늦게 한데 연결하다 보니, 절연구간뿐만 아니라 좌측통행과 우측통행도 입체교차로 뒤바뀌는 꽈배기굴이 등장하게 됐다(남태령-선바위).
사실, 넓게 보면 1호선 지상의 노량진-대방 사이에도 꽈배기굴이 있긴 하다. 일반열차와 전동차의 선로 좌우 배치가 어느 샌가 쓱~ 바뀐다. 하지만 이건 선로를 뒤늦게 3복선화화려다 보니 주변 공간이 여의치 않아서 나중에 추가된 선로가 선형이 배배 꼬인 형태가 된 것이기 때문에 실드의 여지가 있다. 유니코드에 문자가 뒤늦게 추가되어서 코드값이 사전 순서대로 깔끔하게 배당 못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3호선도 구파발· 지축 이북으로 일산선이 건설되기로 결정됐을 때, 철도청 구간과 지하철 구간 사이에는 꽈배기굴 시즌 2가 만들어질 뻔했다. 그러다가 감사원이 개입하여 철도청 구간도 지하철처럼 우측통행 직류로 만들라고 시정 조치를 내림으로써 이런 삽질 만행은 벌어지지 않았다. 1호선 때는 지하철이 철도를 따라 좌측통행으로 통일됐지만 이때는 광역전철이 이미 만들어진 지하철을 따라 우측통행+직류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일산선의 건설이 시작됐는데, 공교롭게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 지하철 3호선은 6량에서 10량으로 증결 운행도 시작되었다. 그 당시 3호선의 사실상의 북쪽 종점은 구파발이었고, 그 다음 차량 기지 근처에 있던 지축은 10량 대비도 안 해 놓은 완전 초라한 단선 두단식 종착역이었다.

그런데 지축 이북으로 3호선이 일산선과 직결· 연장되니 지축 역도 10량 복선 승강장 형태로 확장하고 리모델링을 해야 하게 됐다. 그리고 이 일을 한 것은 지하철 공사가 아니라 철도청이었다..;;
이 때문에 지축 역은 지상 고가 형태이면서 섬식 승강장인 매우 드문 형태일 뿐만 아니라, 수도권 전철 전체를 통틀어서 환승역도 아닌 주제에 단일 역사와 승강장에 두 회사가 입주해서 알력싸움을 하는.. 이거 무슨 판문점 같은 역이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로를 3:2로 갈라서 남쪽은 지하철 구간, 북쪽은 철도청 구간..;; 양 구간에는 역명판의 글씨체도 다르고(HY울릉도 vs 초롱지하철체) 벤치의 모양도 다르다. 어느 출구로 나가느냐에 따라 승하차자 집계도 양 회사가 따로 하다가 요 몇 년 전부터 그건 그냥 코레일이 지하철에다 양보를 했다. 정말 웃긴다.

3호선은 관할 회사가 바뀌는 구간에 4호선 같은 꽈배기굴은 없지만, 이렇게 또 다른 형태의 명물이 존재하는 셈이다.
4호선의 남쪽으로 과천선은 전구간 지하이고 금정 이남의 안산선은 전구간 지상인 반면, 3호선 구파발 이북의 일산선은 단독 노선에서 지상과 지하가 꽤 섞여서 다이나믹하게 등장한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2010년쯤이던가? 3호선의 남쪽 이남 수서-오금 구간이 개통했을 때는 서울 메트로와 도철 사이의 환승역이 둘 생겼다. 바로 가락시장(8)과 오금(5)인데, 이때는 한 역에서 두 회사가 입주해서 아웅다웅 할 것 없이 한 역은 서울 메트로에게 통째로 주고, 다른 역은 도철이 통째로 맡는 식으로 운영권을 분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게 서메이고 어느 게 도철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남. 옛날에는 까치산 역이 2호선 지선 구간도 서메가 아닌 도철이 모두 관할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물론 이것들은 서메와 도철이 합쳐져서 '서울 교통 공사'가 출범한 지금에 와서는 별 의미 없는 얘기가 됐다.

예전부터 도철은 모르겠고 서메는 아무래도 철도청과 한 선로에서 자주 부대끼기도 하다 보니 철도청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잘 요리하긴 했었다.
철도청이 운영 효율화를 위해서 1990년대 초에 1호선 지하철 서울역-청량리 구간을 철도청 일산선, 과천선, 안산선(3~4호선 전체)과 서로 교환하는 거 어떻냐고 제안했을 때도 서메에서는 "분당선도 덤으로 주면 생각해 보겠음~ ㅋ" 이딴 대답으로 협상을 사실상 결렬시켰었다. 이는 또한 서울 지하철 1호선 종로 구간이 그만치 알짜 황금노선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 2월에는 철도청의 신입사원이 선로 보수 차량을 몰다가 수원역 근처에서 신호 대기 중이던 서울 메트로 1호선 전동차를 추돌하는 사고를 냈다. 철도청은 남아도는 중고 저항 전동차 몇 량이나 적당히 보상으로 주는 걸로 퉁치려 했다. 허나, 서메에서는 피해 차량 중엔 뽑은 지 몇 년 안 된 새끈한 신차도 있구만 그에 상응하는 신형 차량으로 안 주면 보상 동의 안 하겠다고 뻗튕겨서 결국 받을 건 다 받아내기도 했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하물며 지금은 서메와 도철이 합병하여 덩치가 더 커졌으니, 서울 지하철이 코레일을 상대로 목소리를 더욱 크게 낼 수 있을 듯하다.

  • 지축: 앞서 언급했듯이 지상 '고가'로서는 드물게 섬식 승강장
  • 오리: 9호선처럼 완급 결합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하에 매우 드물게 쌍섬식 승강장
  • 이매: 지하에 최초로 건설된 중간 추가역
  • 석계: 지상의 섬식 승강장이 따로 확장· 분리된 사례 (1호선 신도림 완행선과 유사)

참고로, 지축 역은 이런 식으로 특이할 뿐만 아니라 한글 명칭이 통상적인 한자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도 독특하다. 한자의 표준 한자음은 '지뉴'라는 굉장히 어색한 표기이니까..
동해북부선의 제진 역도 원래는 '저(猪)진'이다. 철도역들 중에 이렇게 한글 표기가 표준 한자음과 따로 노는 사례가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20 08:32 2017/09/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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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대사 토막 상식

* 난 우리나라 역사라 하면 알다시피 철도 또는 안보· 이념과 관계가 있는 근현대사 얘기만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고대사 얘기를 좀 꺼내고자 한다. 아, 그렇다고 근현대사도 전혀 안 나오는 건 아니다.

1. 멸망 방식

한반도와 그 주변 나라들을 보면, 단순히 전쟁에서 지거나 내부 혁명과 쿠데타가 발생하는 평범한 시나리오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망한 나라들이 역사적으로 좀 있다.

  • 신라: 왕이 백성들 이끌고 스스로 제 발로 고려로 항복· 귀순함
  • 후백제: 태조가 아들에게 밀려서 피난 간 뒤, 고려로 귀순하여 자기가 세운 나라를 스스로 침공... 꽤 독특하다.
  • 조선 또는 대한제국: 전쟁 하나 없이 야금야금 일제에게 조금씩 단계별로 각종 권리를 뺏기며 열불나는 방식으로 굴욕적으로 멸망
  • 그리고 저 훗날 일제의 괴뢰국이던 만주국: 마치 선장이 비상사태에서 배를 포기한다고 공식 선언하듯이, 황제가 피난길에 국가 셧다운 선언하고 자진 해산함

신라의 경우, 저런 이유로 인해 마지막 경순왕의 무덤은 다른 신라 왕릉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경주가 아니라 연천군 저 북쪽 끝의 민통선 안에 있다. 38도 위도에 정말 근접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남한이 수복한 지역이며, DMZ 신세도 면했다. 신라의 수도 근처가 아니라 고려의 수도 근처에 묻힌 것이다.

난 경주 출신이기도 한지라 신라 왕릉이 웬 생뚱맞은 저런 곳에 있다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독특하고 흥미롭게 느껴진다.
훗날 고려는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쿠데타에 의해 비교적 평범한(?) 방법으로 멸망했다. 그리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무덤이 아예 고양시와 삼척시에 2개로 나뉘어 있으니 신라의 마지막 왕의 경우보다 더 특이하다. (둘 중 하나는 허묘)

우리나라의 경우 6·25 전쟁 당시에 판문점과 송악산, 배수진 지형 등 여러 이유로 인해 개성시 일대를 더 점령하지 못하고 빼앗겼다. 이것 때문에 고려의 존재감이 남조선 땅에서 더욱 없어지고, 반대급부로 '조선'스러운(?) 정서가 더 강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장 오늘날의 서울도 지리적으로 조선의 한양을 계승했으니 말이다.

그 대신 그 '고려'라는 이미지는 북한이 더 적극적으로 쓰고 있다. 고려항공, 고려연방제처럼.
물론, 그래도 남조선의 경우 수도를 조선의 도읍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고, 북조선의 경우 나라 공식 명칭에 여전히 '조선'이 들어가 있긴 하다.

2. 도읍의 위치

말이 나왔으니 수도 얘기도 해 보자.
일단 신라는 경주(금성), 조선은 서울(한성)로 확고한 붙박이이다. 이들은 안 그래도 당대에 역사가 매우 길었던 왕조로 여겨지는데 천도의 내력 역시 전무하다. 신라의 경우 멸망 직전에는 세력이 경주 시내로 극도로 쪼그라들긴 했지만 그래도 왕궁이 딴 데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덕분에 여기는 각종 문화재 유물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서울이야 시기적으로 제일 가까운 왕조의 수도여서 그렇다 치지만 신라는 서기 1000년도 채 되지 않아 멸망한 엄청 옛날 왕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는 과장 좀 보태면 온통 땅만 좀 파면 유물이 나올 지경이어서 도시형 국립공원까지 조성될 정도인 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한편, 고려는 전반적으로 개성(개경)이긴 했지만 중간에 몽골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강화도로 딱 한 번 천도를 한 적이 있다. 강화도는 내륙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도 아닌데 몽골은 골수 내륙국이다 보니 해군이나 해병대가 없어서 저기로는 못 쳐들어갔던 모양이다.

후대의 조선은 임진왜란 때 왕이 피난을 갔고, 또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행궁으로 도읍을 옮겼다. 스타로 치면 본진이 옮겨진 격이다.
대한민국 역시 잘 알다시피 6· 25 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적이 있었다.

고구려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건국 직후 한동안은 더 북쪽으로 지금의 중국 땅(졸본, 국내성)에 도읍이 있었다. 하긴, 광개토왕릉비도 괜히 중국에 있는 게 아니다.
리즈 시절 이후와 멸망 때까지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가 평양이었다. 남북이 통일이 되고 나면, 정확히 말해서 북괴 정권이 사라지고 나면 도읍이 이북 땅에 있었던 옛날 한반도 왕조들의 흔적을 찾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백제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메이저 왕조들 중에 수도에 대한 존재감이 제일 없는 것 같다. 일단 지금으로 치면 서울· 하남 일대였던 시즌 1과,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더 친근한 충남 공주· 부여 일대의 시즌 2로 나뉜다. 이렇게 초점이 분산된 데다 시즌 1 도읍은 흔적이 전해지는 게 별로 없으니 존재감이 더욱 감소한다.

그래도 삼국 시대에 오늘날의 서울과 가장 가까운 곳에 도읍을 뒀던 적이 있는 왕조는 백제이다. 그렇다고 조선 같은 북악산 기슭의 사대문 안이 아니라 한강 이남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뭐 이런 지대이다. 일단 하남, 위례신도시 이런 명칭들이 다 백제의 도읍에서 유래된 것들이라니 신기한 일이다.

가야나 발해 같은 마이너한(?) 나라들의 역사도 갑자기 궁금해지긴 하는데, 고대로 갈수록 사료 자체가 너무 빈약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태양계 행성도 천왕성과 해왕성은 표면 사진 자체가 보이저 2호가 찍은 것밖에 없어서 빈약한 것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22 08:39 2017/07/2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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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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