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항공모함

군대라는 게 작전 방식의 특수성과 차이로 인해 육해공 3군으로 나뉘곤 한다. 하지만 타 영역을 살짝 걸치는 병과도 조금씩 존재한다.
가령, 해병대는 육군과 해군의 조합처럼 보인다. 법적으로는 해군에 소속돼 있고 병도 지원자만 받지만.. 병의 의무 복무 기간은 육군과 동일하다. (우리나라 기준)
그리고 육군에서도 헬기 정도는 육군 항공대 명목으로 운용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 것처럼 항공모함은 바다 위의 공군 기지이니 해군과 공군의 조합 같다. 항공모함은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2~30년대 전간기 때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존재 가능성과 필요성이 논의되었으며.. 덕분에 2차 대전의 태평양 전쟁에서 제대로 활약하게 되었다.

항공모함은 그 특성상 덩치가 정말 거대하며, 건조 비용이 억소리 나게 비싸고 운영하는 비용도 나라 등골 브레이커 수준이다. 하지만 이게 있으면 망망대해에서 전투기를 출격시켜서 억만 리 타지에서 깜짝 타격을 가할 수 있다. 잠수함이 몰래 쏘는 어뢰하고는 다른 차원으로 전투력의 레벨이 올라간다는 것이다.

옛날에 타이타닉 여객선은 내부에 별 시설이 다 있는 그냥 작은 도시, 작은 사회나 마찬가지였는데.. 오늘날은 대형 항공모함이 그러하다. 천조국의 기상이 깃든 니미츠 급을 예로 들면, 수천 명이 먼 바다에 나가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곳이니 안에 수영장도 있고 극장도 있고.. 내부에 별도의 번지수 주소가 있고 우편번호가 할당돼 있다. 항공모함 안에서 길을 잃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그 안에서 잘 짱박혀서 탈영하는 것조차도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작은 도시 안에 작은 원자력 발전소도 없으란 법이 없으니.. 이런 거대한 항공모함은 무식한 디젤 엔진 대신 원자력으로 움직인다.
다만, 항공모함은 배로서는 그렇게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지상 공항에 비할 바는 못 되니.. 활주로의 길이가 부족하고 환경이 열악한 관계로 아무 군용기나 다 띄우지는 못한다. 그 항공모함의 규격에 맞게 제작된 함재기만이 이· 착함 가능하다. 이함할 때는 양력을 얻는 데 도움이 되라고 모선도 전속력으로 같이 전진해 주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재기가 항공모함의 활주로를 벗어나서 뜨는 걸 보면, 잠시 배 밑으로 추락하는 듯하다가 아슬아슬하게 다시 붕~ 뜨는 게 다반사이고.. 아예 못 뜨고 바다에 떨어지는 사고도 종종 난다. 배의 앞부분의 수면에 추락한 함재기는 같이 전진하던 모선과 부딪혀서 으스러진다.

함재기가 임무를 마치고 착함하는 것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이다. 아니, 착함이 더 어렵다.
한 직후에도 활주로를 오버런해서 도로 바다로 빠지지 않으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배와 함재기가 힘을 합쳐서 필사적으로 감속을 해야 한다. 이 정도면 공군과는 약간 다른 방식의 노하우가 필요해 보인다.

글쎄, 소말리아 해적이나 알 카에다, ISIL 같은 조무래기(?)들을 토벌하는 데 딱히 항공모함이 투입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앞으로 태평양 전쟁 시즌 2 같은 사건이 벌어질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사실, 그 옛날의 2차 대전 중에도 선진국들의 군 수뇌부와 군수업체에서는 선박이 아니라 잠수함이나 타 수송기를 기반으로 하는 항공모함(?)까지 구상한 적이 있다고 한다.

물론 그건 너무 무리수이니 실현되지는 않았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잠수함에서 그냥 미사일만 쏘면 되지 굳이 인터셉터를 날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자동차 캐리어도 아니고 비행기 캐리어는.. 아직은 스타크래프트 캐리어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프로토스는 우주 항공모함을 굴리고, 테란은 우주 전함을 굴린다니.. 흥미롭다.

6. 아이스크림

천조국은 무려 1940년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저 멀리 태평양 전장에 가 있는 병사들한테까지 아이스크림을 보급으로 챙겨 줄 수 있던 유일한 나라였다. 아이스크림 제조 공장선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시원하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은 병사들의 사기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줬으며, 다른 유럽군에서도 이걸 부러워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투기와 전함을 팍팍 찍어내고 원자폭탄 만들어 내고 적군의 암호를 몽땅 해독했다는 얘기뿐만 아니라 저런 소소한 병사 복지마저도.. 정~~말 대단하고 경악스럽지다. 천조국은 다른 나라들보다 몇십 년 더 앞서 갔다.

7. 인종 차별

1941년 말의 진주만 공습 때 '도리스 밀러'(1919-1943)라는 한 흑인 병사는.. 기습을 당해 죽거나 다친 사수들을 대신하여 즉석에서 전함에 비치된 대공용 중기관총을 조종하며 용감하게 응사했다. 심지어 일본 적기를 격추시키기까지 했다.

이게 대단한 이유는.. 저 사람은 취사병이었고, 지금까지 총 쏘는 훈련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저 정도의 무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2001) 영화에도 이 장면이 괜히 들어간 게 아니다.
마치 <15소년 표류기> 소설에서 흑인 견습 선원인 모코가 요리사 일을 하고 있다가 끝부분에서 침입자 악당을 대포 한 방에 때려잡는 장면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병사들에게 아이스크림까지 나눠 주던 천하의 천조국도 1940년대에는 아직 인종 차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하게 존재했다. 군대에서 흑인과 백인은 훈련을 따로 받았으며, 흑인 병사는 감히 전함의 기관총 사수 같은 보직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도리스 밀러와 같은 사례가 생기면서 그런 유리천장은 차츰 없어지게 됐다. 그는 명예 훈장까지는 아니지만 해군 십자장을 받았고.. 올해 초엔 미국에서 새로 취역한 핵 항공모함에 이름도 붙었다.

6· 25 사변을 거친 뒤 베트남전 타이밍이 되자, 미군에서는 흑인이 백인 신병을 가르치는 훈련소 교관도 맡으며(검프! 입대한 동기가 무엇인가!! 네놈 IQ는 160은 되는가 보다!).. 풀 메탈 자켓에서는 교관이 대놓고 "나는 검둥이건 유대인이건 집시건 아무 차별 안 한다. 여기서는 네놈들은 다 똑같이 쓸모없기 때문이지!"라고 능력 위주의 평등을 표방한다. 그 정도로 분위기와 방침이 바뀌었다.

1970년대 말에 중국에서는 마오 쩌둥이 '흑묘백묘' 운운하면서 "고양이는 색깔 불문하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논리를 펴는 지경이 되었다. 이건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체제를 가리지 않겠다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말이었다.
미국은 체제는 이미 건전하니까 걱정할 필요 없고, 인종에 대해서 '흑묘백묘'가 아니라 아예 '흑인백인 인종무관' 실용주의가 나중에 등장하게 된 듯하다. "흰둥이건 검둥이건 적군만 잘 잡으면 된다"라고..

8. 대테러부대

경찰과 군대에는 정규전(경찰은 일반적인 시위 진압이나 범죄자 검거. 군인은 일반적인 야전 전투)을 수행하는 대다수의 일반적인 경력· 병력이 있는 한편으로, 뭔가 마이너하고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는 부서도 있다.
가령, 일반 경찰이 담당하기에는 어려운 규모의 무장 테러리스트를 잡는 부대 말이다. 이런 애들을 잡기 위해서 무슨 탱크나 대포나 전투기를 동원할 필요는 없음이 명확하다.

이럴 때는 이런 임무를 위해 시꺼먼 복장을 하고 별도의 훈련을 받은 경찰 내지 군대 소속의 대테러부대가 투입된다. 이런 부대는 정체성이 경찰과 군대 어느 것에 딱 정확하게 떨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아예 대놓고 특전사나 UDT 같은 급도 아니기 때문이다. 경찰특공대, 미국 SWAT.. 그런 쪽이다. (뭐, 그렇다고 군 특전사에서도 대테러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대테러부대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은 생각만치 오래되지 않았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독일(서독) 정부가 괜히 허둥대고 삽질한 게 아니었으며, 인질들이 전원 죽는 비극이 괜히 벌어진 게 아니었다. 법적 문제 때문에 정규군을 함부로 투입할 수 없었으며, 반대로 독일 경찰은 이런 상황에 대한 대처 매뉴얼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북괴의 연이은 테러에 이골이 나 있던 한국 같은 나라나 극도의 통제된 분위기 하에서 치안이 덤으로 갖춰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경찰 소속의 대테러부대는 무력만 강화한 '경찰'이기 때문에 자국민을 최대한 보호해야 하고, 악당들도 사살보다는 생포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작전 지역이 국내가 아니거나 악당이 수가 많고 화력이 강하거나.. 아예 자국민이 아니다거나 하면 이들을 상대하는 공권력도 경찰이 아닌 군대 소속으로 바뀌게 된다.

참고로 지난 2009년 용산 철거 현장 참사 때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됐다가 순직한 사람들은 경찰특공대 소속이었다. 시위대가 무슨 전문적인 무장 테러리스트는 아니고, 그렇다고 통상적인 시위 현장 같은 전투경찰을 투입하기에는 장소가 위험하니 경찰특공대가 적절한 대응이었지만.. 그래도 안타깝게도 화재로 인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9. 토크멘터리 전쟁사

개인적으로 유튜브에서 연재되었던 토크멘터리 전쟁사 시리즈를 재미있게 봐 왔다.
국방부에서 유치한 애국심(?) 고취용으로 오글거리는 어용 관제 군대 홍보물만 만들 줄 알았더니 의외로 이런 재미있고 유익하고 수준 높고 건전한 교양 프로도 만들어 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종영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배후 음모 없이 정말로 단순한 소재 고갈 때문일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놈의 친중종북 좌익 빨갱이 정권의 마음에 안 드는 너무 건전한 애국 메시지 때문에 짤린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6/17 08:35 2020/06/17 08:35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63

1. 종이, 현금, 베리칩

옛날에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사무 자동화(OA)라는 말이 등장하고 재택 근무, 그리고 종이 없는 사무실이 대세가 될 거라는 전망이 나왔었다.
2020년대가 된 지금 생각해 보면, 기업의 분위기가 그 정도로 파격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또한 많은 서류와 문건들이 전산화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와 별개로 종이는 여전히 건재하며, 소모가 오히려 더 늘었다고 한다.

다만, 그런 종이 말고 현금은 옛날에 비해 확실히 보기 힘들어진 것 같다. 카드로도 모자라서 스마트폰으로 금전 거래가 곧장 되니 평소에 아예 지갑조차 갖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런 신분증과 카드 따위가 궁극적으로는 신체 내부에 통째로 이식될 것이고, 그것이 짐승의 수 666에 이마의 표 베리칩이 될 것이고 어쩌구...는 이미 1980년대 정보화 시대 운운할 때부터 일각에서 많이 떠들던 사항이었다. 바코드 음모론하고 같이 덩달아서 말이다.

글쎄, 저것들이 정말로 신체에까지 들어갈까? 난 단정적으로 예측하지는 못하겠지만 좀 회의적이다.
물론 난 과거에 "블로그가 있는데 굳이 SNS가 필요할까? 디지털 카메라를 쓰면 되지 왜 휴대전화에다가 어설프게 카메라를 달아?" 이랬을 정도로 극도로 고지식한 사람이기 때문에 미래를 보는 안목은 별로 없다. 그러니 내 예측이 딱히 믿을 건 못 되겠지만, 난 겨우 저런 게 성경이 말하는 짐승의 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게 실제로 등장할 가능성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2. 삐삐와 팩스

난 지금은 주류에서 밀려난 1990년대의 과도기적 문명의 이기(?)들 중에 삐삐와 팩시밀리는 제대로 접한 적이 없다.
삐삐는 그 당시에도 좀 노는 애들(?)은 10대 나이에도 썼던 것 같은데 본인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물건이었다.

팩스는 그 시절에 직장 생활을 안 했으면 더욱 접할 일이 없고.. 요즘은 스캐너, 프린터, 복사기 복합기가 많지만 그 시절에 사무용 복합기에는 프린터와 팩스 복합기도 응당 포함돼 있었다. 아래아한글 도스용에는 문서를 팩스 발송용으로 인쇄하는 기능이 전화번호부 기능과 연계하여 존재했었다.

일본에서는 가정에도 팩스가 많이 보급돼 있었다고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아서 어디로 팩스를 보내려면 동사무소 같은 데라도 가야 했다. 요즘이야 이메일로 pdf를 보내면 끝이지만.. 전화선 기반의 올드 아날로그 레거시인 팩스도 마치 모스 부호 전신· 전보만큼이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고 있다.

3. 과거의 문명의 이기

(1) 요즘은 군대 내무반에서조차 에어컨이 설치된다고 하지만, 본인은 학교 교실과 기숙사 수준에서 딱히 에어컨 구경을 못 하고 학창 시절을 마쳤다. 교실 천장에서 뱅글뱅글 돌아가던 천장 설치형 선풍기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다만, 혼자서 대중교통을 활발히 이용한 것은 21세기의 대학교 입학 이후이다. 버스와 열차, 지하철 따위에는 모두 에어컨이 장착되어 있었다.

(2) 대학교 기숙사의 경우, 내가 딱 졸업하고 난 뒤 이듬해부터 조금씩 에어컨이 설치됐다고 들었다. 그리고 10Mbps이던 네트워크 속도가 연구실부터 100으로 증속됐는데, 이 역시 기숙사에는 본인이 졸업한 뒤부터 소급 적용되었다.

(3) 본인은 컬러 레이저 프린터라는 걸 가정에서 실물로 보는 날이 올 거라고 감히 생각하지 않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레이저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기계들이 얼마나 비쌌던가? 레이저 프린터, CD writer 따위.. 그랬는데 2000년대 이후부터 이것들이 경이로울 정도로 가격이 내려가고 흔한 물건이 됐다.

4.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공간의 확장

21세기에 들어서면서..

  • 유니코드 문자 영역은 16비트 공간이 부족해져서 대략 21비트 남짓한 크기의 확장 평면이 등장했다. 확장 평면 영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문자는 한자와 이모지이다.
  • 컴퓨터 메모리는 4GB라는 32비트 공간이 부족해졌고 64비트 CPU로 물갈이됐다.
  • 인터넷 주소는 역시 IPv4라는 약 40억 개에 달하는 32비트 공간이 부족해져서 이를 대체하는 128비트짜리 IPv6가 등장했다. 하지만 IPv6는 등장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PC에서는 보급이 더디며(그냥 공유기로 기존 주소를 유동적으로 쪼개서 쓰는 편법..), 모바일에서나 주로 쓰이는 중이다.

IPv6의 도입은 마치 유니코드의 도입만큼이나 매우 fundamental한 변화이며, 15년쯤 전의 x64 CPU와 비슷한 물건처럼 느껴진다. IPv6의 지원을 위해 재래식 소켓 API에서 각종 구조체나 함수가 바뀐 부분들은 마치 64비트 지원을 위해 PE 실행 파일 포맷의 각종 필드가 확장된 것, Windows API가 일부 확장된 것을 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님하의 브라우저는 HTML5를 모두 지원합니까?" 테스트 사이트가 있는 것처럼 "님하의 컴퓨터와 인터넷 서비스 사업자는 IPv6을 지원합니까?" 테스트 사이트도 있다.

IPv4 시절엔 주소를 구성하는 숫자를 무조건 10진법으로 적었던 반면, IPv6에서는 그런 것 없고 16진법으로 적는다.;; 그런데 원래 포트 번호를 구분할 때 쓰던 콜론을 왜 주소 번호의 구분자에다가 도입해서 괜히 사람 헷갈리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약간 분야가 다르긴 하지만 사람이 직접 취급하는 번호인 자동차 번호나 휴대전화 번호도 공간이 부족해서 난리이다. 자동차 번호의 경우, 자가용 승용차에 지역 표기가 생략되면서 공간이 더욱 부족해졌는데, 결국 앞자리 번호가 3자리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휴대전화 번호는 일명 국번이라고 불렸던 앞자리 번호가 진작부터 4자리였지만, 접두사가 010으로 몽땅 통합되면서 공간이 더욱 부족해져 있다.

5. 인터넷 속도와 동영상의 화질 향상

오늘날은 컴퓨터의 속도가 1990년대만치 급격하게 빨라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터넷은 무선화 후에도 무슨 약을 빨고 이렇게 속도가 사기적으로 빨라져 왔는지 경악할 지경이다. 물론 이런 속도는 로컬 말단에 있는 컴퓨터의 CPU, 램, 디스크의 속도도 받쳐 준 덕분에 실현 가능해진 것이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에 요즘 노트북들은 광학 드라이브를 기본 장착하지 않고 있는데, 심지어 유선 이더넷 단자조차 생략하는 추세이다. 그냥 무선 와이파이만으로 충분하다고.. 요즘 승용차들이 스페어 타이어를 생략하는 것과 비슷한 현상 같다.

가로 해상도가 1000을 넘어가는 고화질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보는 날이 올 줄 감히 상상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요즘은 해상도만 올라간 게 아니라 초당 프레임 수까지 모니터의 주사율에 근접하는 60hz에 달하는 동영상도 올라오고 있는데.. 화면이 아주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게 곧바로 티가 난다. 심리적으로 좋은 인상을 준다.

사운드에다 비유하면 해상도가 올라가는 건 단위 시간당 sampling rate가 올라가는 것이고, 프레임 수가 올라가는 건 샘플링의 정밀도 자체가 겨우 8비트이던 것이 16비트나 그 이상으로 올라간 것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옛날에 아날로그 필름 기반의 영화는 100여 년 전에 정해졌던 초당 24프레임을 벗어난 적이 있었다는 얘기를 난 들어 본 적이 없다.

6. 켈빈의 빗나간 추측들

오늘날 '켈빈 경(남작?)'이라고 불리는 윌리엄 톰슨(1824-1907)은 전기와 열역학 쪽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영국의 수리물리학자이다. 절대온도의 단위인 켈빈(K)이 바로 이 사람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본명이 아닌 작위의 이름이 단위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훗날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오류 내지 단견으로 판명된 비관적인(?) 어록을 유난히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 제일 유명한 건 "공기보다 무거우면서 하늘을 나는 기계라는 건 절대로 존재 불가능하다"이지 싶은데, 알고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다.

왕년에 맬서스라는 사람이 인류가 앞으로 식량 부족에 허덕일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켈빈 경은 아예 인류가 산소 부족으로 인해 멸망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물리학이라는 학문은 이제 나올 게 다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 실험 측정값의 소수점 아래를 다듬는 보정밖에 할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산소 부족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머지 어록들은 딱 20세기 초에 비행기가 발명되고 양자역학이란 게 태동하면서 전부 버로우 타게 됐다. 마치 생물학이 분자생물학이란 게 등장하면서.. 예전처럼 생물들 생태를 관찰하고 종류 분류나 하던 시절하고는 완전히 딴판의 학문으로 변모했듯이 말이다.

나중에 비행기나 텔레비전이나 컴퓨터에 대해서도 발전 전망과 활용 가능성에 대해 굉장한 단견(..)을 남긴 유명인사들이 등장했지만 켈빈은 그런 것까지 보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그런 것 관련 어록은 없다.
아, 비행기의 경우, 아까 같은 존재 가능성 말고.. 그 다음으로 "그게 군사용으로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냐" 같은 거 말이다.

그렇게 단견을 남긴 사람들도 그 시절에는 다 왕창 똑똑하고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켈빈은 여느 과학자 이상으로 유난히도 "내가 나루토를 보고 있는데 느낀 게...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스러운 포스가 느껴진다.;; =_=;;

7. 창작물

지금까지는 인류가 이룩한 무시무시한 기술 문명에 대한 회고와 찬사 위주로 글을 썼는데, 그럼 다음으로 그 기술을 기반으로 인류가 만들어 낸 각종 문화 컨텐츠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겠다. 영화, 게임, 음반 같은 것 말이다.
과학 기술에 대해 이제 나올 거 다 나왔다는 회의적인 전망이 나돌았던 것만큼이나, 일각에서는 문화 컨텐츠에 대해서도 그 이상으로 이제 나올 것 다 나왔다는 회의론을 제기한다.

본인은 그 관점에 어느 정도 조심스럽게 동의한다.
1990년대, 그리고 길어야 2000년대까지가 뭔가 중흥기였고, 그때 이후로는 분야 불문하고 이렇다 할 명작이란 게 나오지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기존 명작 히트작의 리메이크만 할 뿐이다.

게임은 딱 세기말에 나왔던 스타(RTS), 둠과 퀘이크(FPS)를 능가할 작품은 나올 것 같지 않고 이젠 나올 수도 없어 보인다. 그 장르 자체가 많이 쇠락했으며, 고인물 썩은물이 됐다.

SEGA, id, 블리자드 등 어느 개발사들을 살펴봐도 8-90년대를 풍미했던 왕년의 스타 개발자가 2010년대 이후까지 계속해서 스타인 경우는 없다. 특히 요즘 블리자드가 이렇게도 많이 망가지고 몰락할 줄은 몰랐고 개인적으로 놀랐다.
이 업계는 그만큼 기술의 상향 평준화 속도와 컨텐츠의 소모 속도가 너무 빨라서 가히 개발자의 무덤이 된 것 같다. 이 교착 상태를 어찌 돌파할지 게임 개발사의 경영자들의 고민이 클 것 같다.

앞으로 타이타닉, 라이온 킹,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급의 명작 영화가 또 나올 가능성이 있을까? 여명의 눈동자, 태조 왕 건 같은 명작 드라마가 또 나올 수 있을까?
특별히 우리나라는 2000년대가 국산 영화의 중흥기였다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일반 음반은 잘 모르겠지만 CCM 분야는 딱 90년대가 중흥기였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1990년대가 완전 리즈 시절이었고(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이런 거 저런 거 다 따져 보면, 1800년대 말~1900년대 초에 유럽이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 덕분에 빅토리아 시대니, 벨 에포크, 스팀펑크 세계관이 하는 말이 나돌았는데.. 그로부터 100년 뒤인 1900년대 말~2000년대 초에 대해서도 비슷한 향수와 회상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약간 옛날인 1980년대에 대한 회상은 이미 ‘쿵 퓨리’가 너무 병맛스럽게 해 놓았고 말이다.

8. 미래에 대한 불가지론

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직접 겪었던 사건들 중 가장 임팩트 있었던 것, 사람들의 고정관념과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아서 never be the same again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은 것은 다음 셋이라고 본다.

  • IMF(1997~98): 정리해고, 구조조정, 노숙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9· 11 테러(2001): 온통 장밋빛 꿈으로 가득하던 21세기가 이렇게 시작될 줄 누가 예상했겠나? 그 뒤 이라크 전쟁, 전세계적으로 급격히 강화된 항공 보안..
  • 코로나바이러스(2020): 올림픽 연기, 오프라인 예배 반토막.. 가히 전무후무하다.

저 셋보다는 임팩트가 덜하지만 개인적으로 굉장히 인상적이라고 느꼈던 사건들은 2010년대에 있었다.

  • 일본 천황과 로마 교황의 이례적인 생전 퇴위 선언: 20세기 히로히토(쇼와)의 존재감을 능가하는 천황이라든가, 요한 바오로 2세의 임팩트를 능가하는 교황은 앞으로 글쎄.. 가까운 미래엔 나오지 않을 것 같다.
  •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 시기를 거의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바꿔 버린 대통령 탄핵 소추 파면 사건
  • 2차 세계 대전 이후 거의 처음으로 강대국들의 군사력을 한데 단결시켰던 ISIL 집단. 그래도 얘들은 허세 부리던 것과 달리 다행히 다 소탕· 토벌된 모양이다.

“인간이 달에 갔다가 돌아오는 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같은 말은 반박되었다. 그러나 “21세기쯤에 인류는 달이나 화성에 우주 식민지를 건설해 있을 것이다”는 아직까지도 이뤄지지 않았으며, 이거야말로 소설에서나 가능한 요원한 일이다.
그것처럼 세상일은 정말 알 수 없고 인간은 한 치 앞날을 내다볼 수 없는 것 같다. 198, 90년대에 2020년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소설을 썼던 사람들, 세기말에 온갖 종말 음모론을 주장했던 정치 진영 종교 진영들이 이런 상황을 과연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앞으로 또 무슨 기막힌 과학 연구 성과가 나오고 무슨 발명품이 등장할지, 코로나바이러스의 기세가 궁극적으로 어찌 될지, 북한 김 정은이 언제 죽을지, 도쿄 올림픽이 내년에라도 개최 가능할지 아니면 질질 끌다가 결국 제일 안습하게 취소로 귀착될지, 그것도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견해를 골자로 하는 '불가지론'이라는 종교관이 있다.
뭐, 본인이야 성경을 믿기 때문에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두고 고민하지는 않는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야말로 확실하게 불가지론이 성립하는 영역인 듯하다.

그러니 세상 소식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말세다 말세"라든가 "요즘 젊은것들은 말야"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지 말고(저런 말은 무려 몇천 년 전부터 나돌았던 드립!) 그 대신,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 맞아,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땐 정말 그랬어. 세상이 다 끝나는 줄로만 알았어~!" 같은 영원의 관점에서 큰 그림을 떠올리며 사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성경적인 기독교 세계관은 그런 관점의 형성에 도움을 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31 08:33 2020/05/31 08:33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57

오늘은 오랜만에 원초적인 성경 계보와 종교 비교 얘기를 좀 하겠다. ㄲㄲㄲ
종교 개혁 개신교 진영에 킹 제임스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면, 가톨릭(천주교) 진영에는 듀에이-림즈(Douay-Rheims)라는 고전 영어 성경이 있다.

개신교 쪽 성경 중에 제네바 성경처럼 인명이 아니라 지명을 딴 역본이 있듯, 듀에이와 림즈는 프랑스의 지명이다. 원어인 프랑스어 스타일로 읽으면 “두에 렝스”라고 한다.
프랑스는 영국이나 독일과 달리 개신교 쪽의 종교 개혁이나 성경 번역과 관련해서는 언급되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대신 천주교 성경이 저 동네에서 번역되었던가 보다.

공교롭게도 킹 제임스와 듀에이-림즈는 나온 시기가 굉장히 비슷하다. 전자는 어명에 의해 1604년에 번역 위원회가 조직되고 번역이 시작됐으며, 1611년에 전서가 한꺼번에 출간됐다.
한편 후자는 전자보다 약간 더 전부터 더 오랫동안 번역되어서 1582년에 신약, 1609년에 구약의 순으로 나눠서 출간됐다. 그래도 시기가 상당히 비슷한 건 사실이다.

1582년은 율리우스력을 개정하여(100의 배수해의 윤년 여부) 현재까지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달력인 그레고리력이 시행된 해이기도 하다. 저 때가 교황청에서 나름 성경도 만들고 달력도 고치는 등 여러 일을 했던 때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 쟤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교황의 권위를 다시 강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먼 옛날 헨리 8세 때부터 이미 교황으로부터 결별하고 자체 교회를 운용하였으며, 자국어로 성경 번역도 진작부터 하고 있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출간 목적 중 하나는 성경 역본을 통합하여(비숍, 제네바) 그런 영국 교회(성공회, 청교도)를 하나로 단결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천주교에서, 특히 휘하 조직인 예수회에서 뜬금없이 영어 성경을 내놓은 목적은 개신교 진영에서 시작된 자국어 성경 번역 트렌드에 맞불을 놓고(counter-) 자기네 교리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안 하던 짓을 어쩔 수 없이 한 셈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오늘날 천주교 성경에서도 수용하지 않는 오글거리는 왜곡 번역이 좀 있다. 본인이 아는 건 딱 두 가지이다.

  • 창 3:15에서 여자의 씨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는 예언을 “여자”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라고 바꿨다.
  • 눅 1:28에서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말은 원래 “큰 은총을 입은 자여”(피동)라는 요지인데.. 그걸 “은혜가 가득한 자여”(능동)라고 바꿨다.

마리아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번역을 저렇게 한 것이다. 저 시절에 저렇게 뜯어고치는 건 우리로 치면 일제 시대에 손 기정 선수 사진에서 복부의 일장기를 뽀샵질로 일부러 지우는 것과 비슷한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자로서 천주교는 성경을 금지하고 없애고 신자들을 죽이고 성경 변개에 일조한 집단 정도로나 알고 있었다. 자기 교리를 위해서 말을 버젓이 뜯어고친 듀에이-림즈 역본이야 더 볼 것도 없는 부패한 성서이고 말이다.

지금도 그 신념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총론을 넘어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런 성경에도 의외의 면모가 있다는 것을 근래에야 발견했기에 몇 가지 예를 완전성 차원에서 이 글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듀에이-림즈(DRB)는 만들어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킹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고어체이며 thou, thee, -eth 같은 대명사와 접사를 볼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는데.. 가장 먼저 골 1:14를 펴 보자.
변개된 역본에서는 “그분의 피로 through his blood”가 삭제되었다고 킹 제임스 유일주의자들이 으시대는 구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In who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remission of sins:

본인은 눈을 의심했다. 존재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through his blood가 DRB에서도 살아 있었다. 아니 이거, 마리아 숭배를 조장하던 그 역본이 맞나?
오히려 개신교 계열이며 천주교에서 과거에 시신을 부관참시했고 오늘날까지도 싫어하고 이단시하고 있는 위클리프.. 그 사람이 만들었던 옛날 성경(WYC)에는 through his blood가 없다.

in whom we have again-buying and remission of sins.

그건 이해가 된다. 위클리프 성경은 DRB보다 200년 가까이 전, 이 성계가 살아 있고 조선이 건국되었던 1390년대에 그 시절 여건의 한계상 ‘변개된 본문 계열’인 제롬의 라틴 벌게이트에서 번역됐기 때문이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요 1:18도 찾아봤다. 무려 초대 교회 시절 오리겐 때 ‘독생하신 아들(son)’이 ‘독생하신 하나님(God)’으로 바뀌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 the only begotten Son who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declared him. (DRB)
… but the one begotten Son, that is in the bosom of the Father, he hath told out. (WYC)

어라? 위클리프와 듀에이 모두 ‘아들’이라고 돼 있고 결과적으로는 KJV와도 일치한다. 오히려 개역, NIV, NASV 같은 20세기 역본들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뭔가 혼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For three be, that give witnessing in heaven,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be one. (WYC)
And there are Three who give testimony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DRB)

혼란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요일 5:7이었다. “하늘에서 증거하는 세 분이 계시니…”라고 KJV의 우수성을 입증하는 구절, 원래는 없었다가 후대에 첨가된 거라고 잔뜩 공격받는 그 구절이 위클리프와 듀에이에 모두 버젓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다.

서로 죽고 죽이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양 진영에서 각각 내놓은 성경이 진술이 이 정도로 일치한다면 이건 완벽한 교차검증 성공이지 않은가? KJV를 만들 때 성공회 팀과 청교도 팀이 눈에 불을 켜고 상호 검증하던 것을 뺨치는 수준이다.

따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DRB는 사 14:12에 루시퍼도 남아 있고 계 2:13에서 사탄의 왕좌 대신 자리라고 KJV 스타일로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DRB만 욕하기가 민망하고 미안해질 정도였다. 이래서 뭐든지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보고 팩트 확인을 꼼꼼히 해야 되는구나..

뭐 그래도 벧전 2:2에서는 서로 제 갈 길 가는지 DRB는 변개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이고, WYC는 어째 KJV에 더 가까운 스타일로 번역되었다.

As newborn babes, desire the rational milk without guile, that thereby you may grow unto salvation. (DRB)
as now born young children, reasonable, without guile, covet ye milk [of full teaching], that in it ye wax into health; (WYC)

다시 말해 골 1:14와 벧전 2:2를 비교해 보면 KJV는 OO, 개역 NIV 따위는 XX인데.. DRB는 OX요, 위클리프는 XO인 셈이다.
본인은 세상의 모든 성경은 OO 타입 아니면 XX 타입이지, OX나 XO 타입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런 중간형이 존재했던 모양이다.

어찌된 일일까? 이런 사실은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5분만 관심을 갖고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는데 나도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뭐, 킹 제임스 지지자건 반대자건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회색지대 영역이어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위의 사실은 가톨릭 쪽이든 개신교 쪽이든, 성경이 필사되고 전수된 과정이 모 아니면 도 하나로 언제나 딱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게 그나마 긍정적인 쪽으로(OO)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건 에라스무스의 공인 본문 정립이다. 그리고 이를 대적하기 위해서 부정적인 쪽으로(XX) 크게 교통 정리가 된 것은 19세기 말의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본문과 RV 역본이다.

16세기에는 요일 5:7에 실제로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세 분”이 기록돼 있었나,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진짜로 기록돼 있었나 하는 것은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건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이래로 본문비평이라고.. 성경 변개를 학술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수작 하에서 근현대에 와서야 제기된 낭설이다.

종교 개혁으로 인해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반목과 대립이 심하던 16세기에 진짜 중요했던 것은 “성경에 외경--가톨릭에서 제2경전이라고 부르는--을 넣을 것인가? 넣는다면 구약의 일부로서 embed시킬 것인가 아니면 부록으로 별도로 넣을 것인가?”였다. 천주교 식이라면 토비트, 유딧, 에스드라, 마카베오 같은 책도 구약에 자연스럽게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에스더기는 10장 3절 이후로도 계속되어 무려 16장까지 있게 된다.

킹 제임스조차도 당대의 관행과 종교적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외경이 포함되어 나왔다. 그러나 성경 본문은 절대 아니고 구약으로부터 분리된 부록 형태로 수록되었다. 그 시절엔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신의 한 수 파격이었고 교황 추종자들로부터 밉보일 짓이었으며, 최악의 경우 번역자들이 신변의 위협을 겪고 암살 당할 수도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출처) 1611년도 KJV 원판에서 외경의 한 페이지이다. 보다시피.. 에스더기만 해도 10장 4절부터 시작되는 외경 영역은 완전히 분리해서 수록하지 않았는가? The rest of the chapters of the book of Esther, which are found neither in the Hebrew, nor in the Calde라고 말이다. 세상에 그 어떤 천주교 성경도 에스더기 뒷부분을 이딴 식으로 편집해서 수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가톨릭 정신이 너무 투철한 일부 사람들은 KJV도 외경이 들어갔기 때문에 친가톨릭 성경이라고 비판하고 1611년판이 아니라 1655년인가 뭔가 외경이 완전히 제외된 KJV가 진짜 KJV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건 역사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며, 별 영양가 없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얘기가 길어졌으니 슬슬 정리를 하겠다.
본인은 KJV 유일주의자로서 가톨릭이 성경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기여를 한 것을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독립된 분야로 요약하겠다.

1. (과거) 가장 먼저 옛날에야 일반인들에게 성경의 소지를 금하고 번역도 금하고.. 자기들 말고는 성경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실물을 불태웠다.
차라리 이단도 생기고 온갖 교단 교파들로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수많은 지역 교회들이 잡초처럼 생겨나는 것이 성경적이지, 저기 같은 피라미드 중앙 집권 체계는 성경적인 교회 모델이 아니다. 뭐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어서 쟤들도 물리적인 박해는 못 한다.

2. 오리겐 같은 옛날 사람들이 조금씩 독소를 넣고 변개해 놓은 일명 알렉산드리아 원문을 토대로 변개된 라틴어 본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대한 물리적 접근성 자체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그 당시엔 본문 변개의 여파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기에 DRB에도 올바른 다수 사본의 영향을 받은 맞는 표현도 여럿 등장했던 것이다.

3. 구약 성경에다 외경을 추가해 넣고, 십계명을 고쳤다. 이건 오늘날 개신교 쪽의 변개된 성경에서도 따르지 않는 사항이니 골 1:14, 벧전 2:2 같은 변개하고는 성격이 좀 다르다.

4. (과거) 한때 DRB 같은 마리아 숭배용 엽기적인 역본도 만들었다. 물론 오늘날은 천주교 성경에서도 그런 식으로 번역을 하지는 않으니 저건 흑역사가 되었다.

5. 그리고.. 옛날 성경에서 O를 확실하게 X로 몽땅 바꾼 개정판을 만들고, 20세기 이래로 모든 성경들의 번역 트렌드가 이걸 따라가게 만들었다. 2에다가 학문적인 근거(?)를 추가해서 그 영향력을 소위 기독교계 전체에 파급시킨 것이다.

본인은 이번 리서치를 통해서 2와 5를 더 명확하게 구분하게 되었다.
요일 5:7이 원래는 없다가 후대에 추가됐네 이딴 소리들은 2가 아니라 5의 산물인 것이다. 그놈의 후대라는 건 도대체 정확하게 언제쯤 후대를 가리키는 걸까?

사실, 논리를 더 명확하게 세우려면 천주교에서는 DRB 이후로 어떤 영어 성경을 사용해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개신교계가 KJV를 300년 가까이 사용하다가 갑자기 19세기 말부터 RV, ASV의 순으로 부패가 시작됐는데 저쪽도 DRB를 천주교계의 KJV마냥 수백 년 사용하다가 성경이 바뀌었는지?

1970년대에 나온 천주교용 NAB (New American Bible)은 이미 변개된 XX 스타일로 다 바뀌었다. 개신교가 이미 변개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는데 가톨릭에도 그런 변화가 없었을 리가 없다.
사실 본인은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기 전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무슨 성경을 사용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설마 개신교 쪽 성경을 봤을 리는 없을 테고, 아니면 아예 성경 없이 교리문답서만 보고 살았는가?

적장은 적장을 알아본다고 가톨릭은 오늘날도 위클리프나 루터나 틴데일이나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당연히 절대로 호의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지금이 옛날 같은 종교 재판, 이단 심문 같은 게 존재하지는 않으며 다들 평화니 화합이니 하고 있지만.. 결국 교리와 믿음이 다른 것은 다른 것이다. 그 차이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두 버전으로 주셨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둘 다 옳을 수는 없다.

가톨릭의 듀에이-림즈는 현재 가톨릭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골동품이지만, 기독교의 킹 제임스 성경은 오류가 없는 최종 권위 말씀이며 하나님께서 말씀 보존 약속을 이행해 주신 바로 그 실물이다. 아멘.

  • 종교 개혁의 불모지이고 예수회의 본산지이던 스페인에도 그래도 ‘레이나-발레라’라고 바른 계보의 성경 역본이 있다. 요일 5:7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얘는 누가 언제 어떤 계기로 번역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한국은 1990년대가 돼서야 바른 계보 번역 성경이 나왔는걸..;;
  • 우리 진영 교회사에서는 맨날 사악한 가해자, 거의 공산주의자 급의 종교 공작원이라고 묘사되는 예수회가 일본에서는 박해받은 ‘기리시탄’이라고 불렸다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중세 일본에서 사용했던 예수쟁이 식별법 중엔.. 나 같은 사람이라면 굳이 걸려들지 않았을 방법도 있다. 형상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그렇다.

Posted by 사무엘

2020/05/05 08:35 2020/05/05 08:35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48

1. 경부선의 전철화

우리나라 최대의 간선 철도인 경부선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전철화가 됐다.

(1)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직통으로 수도권 전철 운행을 하기 위해 서울-수원 구간이 가장 먼저 전철화됐다. 하지만 이때 이후로 거의 30년 동안 추가적인 전철화는 전무했다. 뭐, 여기 대신 경부고속선을 따로 만들긴 했지만..

(2) 2003년 4월 30일, 수원에서 딱 두 정거장 더 남하한 수원-병점 구간이 전철화된 동시에 선형 개량과 2복선화도 같이 진행됐다. 원래 있던 선로 방향에는 병점 차량기지가 만들어졌으며, 회차를 위한 입체교차 선로도 같이 만들어졌다.

(3) 2004년 4월 1일, KTX의 운행을 위해 대전-옥천, 대구-부산 구간이 전철화됐다. 전용 고속선이 없기 때문에 기존선의 전철화부터 먼저 한 것이다.
옛날에 중앙선이 전구간 복선화를 할 여력이 도저히 안 되니 신호장이라도 늘리고 단선 전철화부터 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하겠다. 거기는 힘이 더 좋은 전기 기관차를 투입하는 것만으로도 화물의 수송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4) 2005년 1월 20일, 병점-천안 구간이 전철화 및 2복선화됐다. 이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수원과 오산, 평택을 넘어 천안까지 가게 되었다. 병점은 수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다 차량기지와 입체교차 시설 때문에 중요도가 높아서 2년 먼저 미리 개통했던 것이다.

(5) 2005년 3월 30일, 전철화된 근처의 충북선과 서울 방면의 연계 강화를 위해 천안-조치원 구간이 전철화됐다.

(6) 2005년 7월 1일, 충북선과 대전 방면의 연계 강화를 위해 조치원-대전 구간도 전철화됐다. 대전-제천 무궁화호에 전기 기관차를 투입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렇게 2005년에 천안 이남에서 전철화 과업은 앞의 광역전철이나 고속철처럼 여객의 관점에서 변화를 야기한 것이 없다 보니.. 존재감이 매우 미미하다. 잘 알려지거나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에서 관련 언론 보도를 거의 찾을 수 없다.

(7) 그리고 2006년 12월 7일, 대구-옥천이 산악 구간의 선형 개량과 함께 전철화됨으로써 경부선 441km 전구간이 전철화가 완료되었다. 선형 개량을 하면서 길이도 좀 짧아졌을 텐데 얼마나 개선됐는지는 딱히 자료를 못 찾겠다.
경부선의 전구간 전철화는 상징성이 크니 언론에서도 대대적으로 알리고 보도했었다. 이제야 중앙선뿐만 아니라 경부선 일반열차에서도 전기 기관차를 볼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 새마을호의 후신인 ITX-새마을 전동차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경부선의 전구간 전철화 완료 이후 1주일 남짓 뒤인 12월 15일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의 북쪽이 의정부북부에서 소요산까지 연장됐다는 것도 추가로 알아두면 좋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2년 뒤인 2008년 12월 15일엔 남쪽 끝이 천안에서 또 연장되어 장항선의 신창까지 가게 됐다. 2009년 여름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누리로 전동차가 등장한다.

그 사이의 2008년 1월에 장항선과 군산선이 새 선로로 연결되었다. 거기 일대에 있는 세풍제지선이 한때 철덕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없어졌다. 그게 그 시절 그 지역의 주요 철도 역사이다.

2. 고속선의 개통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기에는 좀 짧으니, 기존선 말고 고속선도 살펴보면 이렇다.

  • 2004년 4월 1일, 서울-대전-대구 (1차)
  • 2010년 11월 1일, 대구-부산 (2차)
  • 2015년 8월 1일, 대전과 대구 도심 구간까지

경부선 쪽은 이런 순서대로 완공됐다.
호남 고속철은 2015년 4월 2일에야 오송-광주송정 구간이 완공되어 1차 개통했으며, 광주송정에서 목포까지는 여전히 호남선 기존선 기반이다. 경부고속선이 대구까지만 개통했던 과거 시절과 상황이 비슷하다. 잔여 구간은 현재까지도 고속화 공사가 진행 중이며 앞으로 몇 년은 더 있어야 완료될 것 같다.

이제는 시속 300까지 밟지는 못해도 그래도 200 정도는 밟을 수 있는 준고속선이라는 개념도 생겨 있다. 경강선 내지, 개량된 전라선처럼 말이다.
참, 포항 쪽도 준고속선이 완공되어 호남선 개통과 같은 날에 KTX가 개통했다. 그쪽은 기존 동해남부선이 완전히 걷히고 기존 경주 역이 신경주 역으로 완전히 대체될 날만 남았다. 아울러 대구선과 중앙선 복선 전철화가 진행 중이다.

3. 2020년 상반기의 철도계 동향

(1) 경의선 수도권 전철화 구간이 문산을 넘어 드디어 임진강까지 연장됐다(3월 28일). 그 사이에 있던 임시승강장인 운천 역은 폐쇄되고 정식 역사가 지어지고 있으며, 문산-도라산 사이는 하루 4번 셔틀 열차만 왕래하고 있다.
이는 중앙선 끝의 지평 역에도 하루 단 4회만 열차가 운행되는 것과 처지가 같지는 않지만 비슷해 보인다. 경의중앙선의 양 끝에는 열차가 하루에 4회만 다니는 셈이다.

내년에는 도라산 역까지도 전철화가 되고 경원선도 소요산 이북의 연천까지 수도권 전철이 연장될 예정이니 더욱 기대된다. 그런데 단선 전철이라니..
경남 양산에서 건설 중인 경전철이 전국 최초의 단선 도시철도가 될 예정인데.. 경원선은 전국 최초의 단선 '중전철' 광역전철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게 되겠다.

(2) 지난 4월 1일부터 서울 지하철들의 새벽 1시 운행이 중단되고 막차 시간대가 자정으로 당겨졌다.
기억하는 분이 계신지 모르겠지만 이건 2002년, 이 명박 서울 시장 시절부터 행해진 것이다. 그 1시간 연장 운행 관행이 거의 18년 만에 무기한 중단되고 원래대로 돌아간 셈이다.

자동차에다가 비유하자면.. 일반인이 시속 200까지 밟을 일이라고는 현실에서 거의 없다. 그래도 시속 200까지 내는 고성능 차를 몰면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120쯤은 아주 가볍고 여유롭고 가뿐하게 달릴 수 있다.
그것처럼 열차가 막차가 1시이면 그 전의 자정 시간대엔 중간 주박역에서 끊어지지 않고 종점까지 쭉 가는 열차를 탈 수 있다. 열차의 막차 시각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다.

4. 참고: 철도역과 고속도로 나들목의 위상

어떤 지역에서 그 지역명을 그대로 딴 대표 철도역은 대체로 그 지역의 대표 행정기관(시청· 군청)과도 별 차이 없을 정도로 완전 시내 도심 중심부에 있는 편이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부산과 인천이야 항구와 더 가까이 있지만, 그래도 수도 서울이나 대구 정도만 해도 시청과 철도역이 꽤 가까이 있다.

그 이유는 뭐.. 다방면으로 생각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게는.. 철도가 개통하던 시절에는 전국 어디건 시가지의 크기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기준으로는 철도가 좀 변두리 외곽에 만들어진 것인데도 나중에는 그 철길 주변도 역세권 버프를 받고 온통 개발되어, 결과적으로 도시의 중심부처럼 바뀌었을 수 있다. 서울 남산이 지금은 남쪽 끝의 산이 전혀 아니라 그냥 서울 중심부의 산으로 바뀌었듯이 말이다.

더구나 옛날에는 자동차가 지금처럼 보급돼 있지 않았으며, 승객을 철도역까지 연계하는 보조 대중교통이 충분치 못했다. 그러니 철도의 혜택을 입으려면 닥치고 최대한 역에 가까이 붙어서 살아야만 했다. 철도역이 도시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철도역과 달리, 고속도로 나들목은 이용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넘사벽 급의 수송력을 자랑하는 자동차이다. 여기는 애초에 일반 도로와 자동차 전용 도로를 구분하는 경계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고속도로 나들목은 태생적으로 도시의 외곽 변두리 끄트머리에 있는 게 자연스럽다. 고속도로 나들목 주변까지 온통 개발되고 건물로 뒤덮힌 경우는 수원 IC처럼 매우 드물다. 경인이나 외곽순환 고속도로 나들목 주변은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이런 개념조차 생소했다. 그래서 도시의 시장이라는 사람이 XXX 나들목을 자기 관할인 XXX 시의 도심 안으로 유치하겠다고 떼를 쓰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새로 만들어지거나 이설되는 철도역들도 마치 고속도로 나들목처럼 온통 외곽 변두리에 자리잡는 추세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선로의 선형을 최대한 직선으로 만들려다 보니 기존 도심지를 경유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굳이 간선 철도가 시가지를 대놓고 통과하지 않더라도 시가지와 철도를 연계해 주는 다른 교통수단이 충분하다는 것.

결국은 철도는 당장 역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도 고속화와 직선화로 대량 간선 수송에 충실하고, 단거리 연계는 다른 교통수단이나 도시철도가 담당하는 것이 시스템 전체의 교통 효율에 좋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즘 철도역들이 20세기의 철도역처럼 시내 깊숙히 들어와 있지 않고 외곽으로 멀어지는 것을 마냥 나쁘게만 보지 말고, 그 트렌드에 대해 어느 정도 적응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22 08:35 2020/04/22 08:35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43

구한말 의병이 토벌된 이후로 일제 시대에 무력을 사용한 항일 독립운동 분야의 최초 원조는 (1)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보다도 전이니 독보적인 원조이다.
그 뒤 한 10년 정도 일제의 무단 통치를 경험하고 3· 1 운동까지 진압된 걸 보니, 일제를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동원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1919년 말에는 김 원봉의 주도로 의열단이라는 게 생겼다.

아, 의열단보다 근소하게 전인 1919년 9월엔.. (2)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 우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건 실패했다. 그는 현장을 탈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나중에 같은 조선인의 밀고로 체포되어서 조선인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래도 사이토 총독의 입장에서는 3· 1 운동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었지, 게다가 부임 당일에 자기 목을 노린 폭탄 의거까지 벌어졌지.. 당장은 이빨과 발톱을 감추고 민심을 달래야만 했다. 괜히 문화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통치 양상이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열단이 벌인 최초의 거사는 (3) 부산 경찰서를 노린 박 재혁이었다. 1920년 9월, 폭탄을 터뜨려서 경찰서장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다친 채로 체포됐고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당시 경찰서장이 중국 고전 덕후라는 정보가 있어서 그는 중국인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서 들어갔었다.

그 뒤 1920년대 초중반엔 본토 밖에서는 독립군이 활동했고, 본토 안 서울에서 권총과 폭탄을 쥔 의열단의 리즈 시절이 잠깐 벌어졌다.

(4) 김 익상은 일본인 전기 기사로 변장해서 1921년에 무려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폭탄을 몇 군데 투척해서 터뜨리긴 했지만 불발탄도 있었고 유의미한 인명 살상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도 변장 잘하고 일본어를 유창히 구사한 덕분에 안 잡히고 무사히 탈출했다.

의열단에서는 거기까지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게 참으로 용한데, 이제 그만 은퇴하고 니 인생 즐기라고 그에게 권유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이듬해에 일본의 육군 대장(다나카 기이치)을 암살하러 동지 2명과 함께 상하이에 갔으나.. 여기서도 권총 사격과 폭탄 모두 지독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들은 임무에 실패한 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김 익상은 뭔가 유의미한 1차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조선총독부 내부에 대놓고 침투해서 저만치라도 타격했던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2차 의거 때도 사형은 면했지만 1943년까지 일제 시대 기간 대부분과 자기 2, 30대 나이를 몽땅 감방에서 보내게 됐다. 명목상 석방된 뒤에도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다가 또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모로 좀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5) 김 상옥이 1923년 1월, 종로 경찰서 내부에서 폭탄을 터뜨려서 주변 일본인들 여러 명을 다치게 했다. 당일에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며칠 뒤 은신처가 탄로나고 서울 시내에서 포위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체포하려는 수많은 일본 경찰들을 상대로 혼자서 권총 두 자루만 쥐고 수 시간 동안 시가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견 간부급을 사살하고 부하들에게 중상도 입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했다.

(6) 나 석주는 1926년 말, 의열단의 거의 끝물을 장식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위장해서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져서 내부 시설을 부쉈다. 다음으로는 사장이나 행장 같은 특정 타겟 없이 그냥 주변의 VIP 같아 보이는 일본인들을 권총으로 마구 사살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도 대치하게 됐다.

결말은 3년 전의 선배 김 상옥과 비슷해졌다. 그 역시 마지막에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단번에 절명하지 못하고 체포된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충분한 치명상을 입은 덕분에 다행히 일제에 의해 고문과 처형 당하지는 않고 병원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은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실패한 거사도 몇 건 더 추진한 바 있다.
몇 년간 그렇게 해 봤는데 우리 역랑이 부족한 게 느껴지고, 딱히 대세가 바뀌는 건 없는데 귀중한 대원들의 희생만 더 커지고, 임시정부와도 손발이 썩 맞지 않고..

의열단은 일제 내지 내부 배신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일망타진 와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해체되었다. 김 원봉은 무장 투쟁을 할 거면 이런 게릴라 공작원 테러리스트 급이 아니라 정규군 급의 병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1930년대 초에는 김 구가 의열단을 대신하여 임시정부 명의로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은 의열단이 아니라 바로 저기 소속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7) 이 봉창은 잘 알다시피..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하고 일본인 지인도 많고 심지어 일본 경찰과도 인맥이 있어서 김 구가 처음에 이놈은 밀정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한참을 얘기를 나눠 본 뒤에야 끄나풀이 아니고 레알 동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총독도 아니고 무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하러 1932년 1월에 본토에 갔으며, 현장까지 잘 도달해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발 없이 잘 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신이나 마찬가지인 천황이 사람들에게 호락호락 얼굴을 비춰 줄 리 없었다. 천황은 면상은커녕 항복 방송 옥음(!)을 들려준 것만으로도 신민들이 벌벌 떨었던 존재인걸..;; 그는 똑같이 생긴 여러 대의 마차 중에 어느 게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히로히토의 생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8) 윤 봉길 의사의 의거는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역대급의 대박을 터뜨렸다. 물리적인 인명 살상 실적으로나, 상징성으로나..

게다가 이런 스타일의 유의미한 거사는 훗날 해방될 때까지 저게 사실상 마지막 대단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윤 봉길 이후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김 구의 신변도 위험해졌기 때문에 한인애국단은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1933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봉창과 윤 봉길은 모두 외국에서 거사를 벌이고 외국에서 순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열단 시절과 달리, 이렇게 가입 선서식 사진까지 존재하는데.. 그런데 사진들의 태극기 배경은 다 합성인 것 같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중근과 윤 봉길만 기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게 이 분야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용한 무기(전자는 권총, 후자는 폭탄)나 처형된 방식을 헷갈리기도 한다(전자는 교수형, 후자는 총살). 이들 이후로는 김 구도 개인· 소수 단위의 테러 의거가 아니라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이상이다.
누가 만들어 낸 구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똑같이 항거하고 투쟁했더라도 무기를 들고 싸운 사람은 의사라고 부르고, 맨몸으로 싸운 사람은 열사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준(헤이그 밀사), 유 관순, 전 태일 같은 사람은 열사이고,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은 의사이다. 국어사전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는 진짜로 저 기준으로 나뉘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는 컴퓨터라든가 각종 전자 출입 카드, X선 금속 탐지기 따위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저런 방식의 무장 항일 투쟁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폭탄과 권총을 어떻게 한반도로 반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안 중근(하얼빈 역)과 윤 봉길(훙커우 공원)의 경우, 초대장 내지 입장권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해당 행사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유창한 일본어로 "아이 씨, 티켓을 깜빡 잊고 안 가져왔네.. 이런 경사스러운 행사에 자국민도 못 들어가요?"라고 유창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둘러댄 덕분에 들어간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멘탈과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무장 투쟁이건 외교건 국민 계몽이건.. 독립 운동을 위해 다 필요한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주의이다.
현실성만 따지면 어느 것도 다 비슷하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고 비효율적인 삽질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안 했으면 일본이 원폭 맞고 깨갱 하고 물러갔다 해도 한반도가 자유 독립국이 된다는 보장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으로는.. 그 시절에도 난창 폭동이라든가 자유시 참변 등,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관련하여 선한 게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일 거라는 논리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게 도움을 준 적은 결코 없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라도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역시 그런 거 없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그렇게도 임시정부가 좋으면.. 친중을 하지 말고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친대만을 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장 제스가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도와 줬지 마오 쩌둥이 도와준 적이 있었냐? 후자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 통일을 저지한 원흉일 뿐이다.
오늘날 친중종북분자들의 유체이탈 궤변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12 19:35 2020/04/12 19:35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39

1. 고대와 현대의 전쟁 방식 차이 복습

옛날 전쟁에서는 겨우 성을 하나 정복하는 것만 해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거나 같은 높이의 언덕을 쌓는 등 별짓을 다 해야 했다.
그리고 해전에서는 배와 배끼리 접근하여 부딪치고, 발판을 놓아서 상대편 배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였다. 적선은 완전히 부수고 침몰시키기보다는 나포해 오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뭐, 목선이었으니까 아예 불질러 없앨 수는 있겠지만 그랬다가 잘못하면 아군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적의 군함을 노획(!)해 오는 병사는 그야말로 평생 놀고 먹어도 될 정도의 포상을 받았다. 군량미 한 섬을 적군 것을 노획해도 그건 아군이 일일이 수송해 온 군량미의 10배가 넘는 전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는데 하물며 배는 뭐.. 그 정도로 보상해 줘도 국가의 입장에서는 남는 장사였다. 지금 우리나라도 단순 간첩 신고 포상금보다 "간첩선"의 신고 포상금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뭐, 그렇게 눈에 보이는 전과를 세우는 병사 말고 공성전에서 사다리를 제일 먼저 오르기, 전열보병(!!) 시절에 제일 앞줄에서 머스킷 주고받기.. 이렇게 제 발로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지만 누군가가 반드시 맡아야만 하는 임무에도 동기 부여를 위해 엄청난 포상과(생사 여부 무관), 반대로 도주 시 엄청난 처벌이 뒤따르곤 했다.
무기의 화력이 부족하고 부족하고 시설이 열악하던 옛날에는 어느 분야의 조직에나 닥치고 근성 의지드립 똥군기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횡행해야만 했을지가 짐작된다.

그런데 화포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이런 싸움의 양상이 바뀌었다. 갑옷이 없어지고 방탄복으로 바뀌었다. 공성전이라는 것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을 쌓는 게 아니라 참호를 잔뜩 파서 방어하는 전술이 잠시 등장했다가 그걸 뚫기 위해 탱크라는 게 발명되었다.

현대의 해전은 교전 거리가 이미 수~수십 km에 달하며, 포탄은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히 먼 곳에서 날아온다. 눈에 보이는 거리에서 총탄을 교환하는 건 그냥 백병전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니 제2 연평해전 때 배 옆구리를 들이대서 막던 기동이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하고 불리한 짓이었는지도 다시 생각을..)

이렇게 먼 거리에 포를 정확하게 쏘려면 직사가 아니라 중력과 공기 저항을 감안한 곡사 궤적은 물론이요, 심지어 지구가 둥근 것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해수면이 무한한 평면이라고만 단순하게 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쏘는 방향에 따라서는 심지어 지구의 자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향력도 고려 대상이 된다. 포 하나 쏘는데 오만 물리 지식이 동원된다. 그게 바로 오늘날의 전장의 현실이다.

그래서 20세기 초· 중까지는 군함이 크기가 왕창 커졌다. 돛 달린 목선이 엔진 달린 철갑선으로 바뀐 데다, 배가 커지면 더 많은 사람이 타고 더 멀리 더 오랫동안 항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함포도 그에 비례해서 더 커질 수 있으며, 더 강한 화력과 더 긴 사정거리를 보장하게 된다. 큰 배 한 척이 작은 배 여러 척보다 훨씬 더 나았다.

배의 지하에 수십 명의 노꾼들이 타고, 위에서 수병들이 화살을 쏘다가 상대편 적선으로 건너가서 칼싸움을 벌이던 시절에 비하면 상황이 얼마나 극과 극으로 달라졌는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임진왜란 거북선만 해도 노꾼이 필요한 배였다.

하지만 제국주의와 세계 대전 시절이 끝나고, 군함을 폭격기와 미사일로 잡는 시대가 되면서 군함이 한없이 더 커지는 유행도 끝났다.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자그마한 비행기들이 추락에 가까운 고각 급강하를 하면서 적국 군함에다 포탄 내지 어뢰를 떨군 뒤 튀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해야 자유 낙하만 시키는 것보다 탄의 명중률이 올라가기 때문이지만, 이건 비행기의 입장에서는 항공역학적으로나(실속..) 군사적으로나(대공포 피격 가능성..) 매우 위험한 기동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반 폭탄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뢰도 군함이나 잠수함이 아닌 비행기가 투하하고 가는 게 이례적인데.. 아무래도 비행기가 군함의 머리 위로 위험하게 접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그리고 배의 아래에서 더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비행기에서 발사하는 항공 어뢰는 더 높은 고도에서 더 고속으로 바닷물에 떨어져도 내부 부품이 손상되지 않고 곧장 추진과 격발이 가능하도록 성능과 신뢰도가 계속해서 개선되었다.

이렇듯, 군용기야 같은 비행기끼리 공중전을 벌이는 전투기가 있고, 지상이나 수면의 목표물을 타격하는 폭격기도 있다.
그럼 전함은..?? 망망대해에서 같은 배끼리만 싸우는 것 같지만.. 적당히 큰 배는 현대전에서 의외의 역할도 한다. 바로 육지에 근접해서 내륙에다 신나게 엄호 포격을 퍼부어서 아군의 상륙 작전을 지원하는 것 말이다. 얘들이 어지간한 포병 부대를 능가하는 화력을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천 내지 장사리 상륙 작전 같은 영화를 보면 이런 포격 장면을 응당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인천의 경우, 해안이 매우 얕고 조수 간만의 차이도 심하기 때문에 군함이 한없이 안쪽으로 들어와 줄 수 없다. 해병대가 차량 지원도 없이 뻘밭을 달려서 상륙해야 되니 더욱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라고 일컬어진 것이다. 현대전에서는 옛날처럼 사다리 타고 성벽을 오른다거나 적진 참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갈려 나가는 일은 없지만(대응 전술이 개발되었으니), 이런 해병대라든가 낙하산 메고 적진에 뛰어내리는 공수부대가 성벽을 오르는 거나 다름없어 보인다.

2. 태평양 전쟁

1940년대의 태평양 전쟁 때 활약했던 일본군 장성 중에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리고 나중에 쿠리바야시 타다미치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반인륜 범죄 같은 이슈들을 배제하고 생각할 때, 군인으로서는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소신이었다. 그저 친미나 평화주의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 국력으로 미국 같은 나라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는 논리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틀어지고 무역로도 봉쇄되는 등 국제 정세가 계속 불리하게 흘러가자..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기왕 미국과 싸워야 한다면 지금 같은 여건에서 상상 밖의 통수를 치는 것밖에 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치 서울대를 가기 위해 수능을 무조건 만점 맞는 게 아니라 남들보다만 잘하면 되고, 위조지폐도 무조건 완벽하게가 아니라 그저 액면가보다만 비싸지 않은 퀄리티를 투자하면 되듯.. 적당히 미국을 타격하면 쟤들로 하여금 "쟤랑 싸우면 우리가 이기기야 하겠지만 우리도 출혈이 클 테니 그건 귀찮.. 차라리 적당히 협상" 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수 있을 거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는 40여 년 전에 러시아를 꺾었듯이 이번에도 미국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은 신이 지켜 주는 나라이고 우리 민족은 야마토 정신이 깃든 대단한 민족이니까" 같은 근자감도 들어갔을 것이고..
그 결과 그는 1941년 12월에 그 이름도 유명한 진주만 공습을 실행해서 처음엔 실제로 굉장한 피해를 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일본은 그 뒤로도 반 년 정도, 대략 1942년 5월 정도까지는 승승장구했다. 연합국 연합군이 우왕좌왕 하던 사이에 동남아시아 지역을 순식간에 정복하면서 리즈 시절을 찍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그 기세에 밀려 필리핀에서 철수하면서 "I shall return."이라는 말을 남긴 게 그 해 3월 11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리즈 시절은 거기까지였다.
미국은 통수에는 통수로.. 먼저 둘리틀 특공대를 보내서 일본 본토를 타격하는 깜짝쇼를 선보였다. 그 뒤 전열을 가다듬고 자기 국력을 총동원해 가히 show me the money급의 물량으로 비행기고 배고 무기고 식량이고 팍팍 찍어냈다.

일본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불굴의 정신력도 사실은 미국이 압도했다. 대공황을 버틴 깡다구에다가 일본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으로 눈이 시뻘개진 젊은이들이 "꼭 입대해서 쪽발이들을 내 손으로 때려잡고 싶습니다!"라고 줄을 서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홀시 제독이 외쳤던 "Kill Japs, kill Japs, kill more Japs"는 요즘으로 치면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쑤" 내지, 둠가이의 "Rip and tear"이나 다름없는 구호였다. 그땐 물론 임프, 카코데몬 따위가 아니라 쪽발이를 성경의 왕하 2:24처럼 찢고 죽인다는 얘기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디 그 뿐이랴, 미국은 정보전마저도 일본을 앞섰다. 쟤들은 일본군의 통신 암호를 쭉 해독해서 사실상 맵핵까지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연합군은 서부 유럽 독일군의 에니그마만 해독한 게 아니었다.
심지어는 "놈들이(일본) AF라는 곳을 공격할 거라는데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딜까? 혹시 여기가 맞는지 우리가 낚시 무전을 평문으로 보내서 쟤들이 반응하는지 확인해 볼까?"라고 떠봤는데, 쟤들이 정확하게 거기에 낚여 준 덕분에 작전을 사전에 다 파악한 적도 있었다.

저기서 AF란 그 이름도 유명한 미드웨이였다. 일본이 미국의 통신을 도청했다고 자국으로 송신하는 메시지까지도 미국이 통째로 도청해 낸 것이다.
일본은 하와이와 가까이 있는 미드웨이 일대를 점령해서 영토를 넓히고 전세를 더 유리하게 이끌고 싶었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942년 6월에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공모함 4척을 모두 잃는 참패를 당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대비가 단단히 돼 있었고, 전사자 수는 일본의 1/10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전투에서 많이 손상을 입었던 요크타운 항공모함 한 척이 격침된 것 정도가 전부였다.

미드웨이 해전은 우리 식으로 풀이하자면 미국판 명량해전이나 마찬가지인 승전보였다. 얘는 인류의 전쟁 역사상 최초로, 해전이지만 전함의 함포가 아니라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서로 먼저 마주쳐서 싸우고 적선까지 격침시킨 전투였다.
그 뒤 1942년 11월에 벌어진 과달카날 해전은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의 보급로를 완전히 끊어 놓았으며, 이때부터 전세는 슬슬 미국과 연합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듬해 4월에는 미국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동선과 스케줄을 '맵핵'으로 파악했다. 그래서 우연을 가장한 특별 작전을 펼쳐서 그 적장을 제거해 버렸다! 소수의 전투기를 출격시킨 뒤, 전선 시찰 중이던 저 사람이 탄 수송기를 벌집으로 만들어서 추락시키고 튄 것이다.
미국은 자신이 일본의 무전을 도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번 사건도 철저하게 우연한 전과로 치부했으며, 그 뒤에 일본이 의심스러워서 낚시 역정보를 퍼뜨리는 것에는 반대로 절대 응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일본을 아주 그냥 갖고 논 거나 다름없었다.

1944년의 필리핀 해 해전과 레이테 만 해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더는 회생 불가능한 치명타를 입었고..
맥아더 장군은 필리핀을 떠난 지 2년 반쯤 뒤인 1944년 10월에야 귀환해서 I have returned라고 자평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에는 여느 전선보다는 일본에서 굉장히 가까운 곳인 이오지마 섬에 미군이 상륙하게 되었다. 이때 최선임 지휘관이었던 일본군 장성이 바로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이다.
그는 어차피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면 우리가 최대한 오래 살아서 미군의 진격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놈들을 최대한 귀찮게 하고 최대한 피해라도 끼치자고.. 지는 걸 전제로 하고 예전과 좀 색다른 전술을 폈다. 3년 전쯤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통하는 면이 있어 보인다.

놈들은 화력이 워낙 넘사벽이기 때문에, 엄폐물 없는 해변에서 상륙 자체를 저지하는 것은 무의미 불가능하다. 그러니 일단 상륙은 허용한 뒤, 적이 깊숙이 들어왔을 때 게릴라전을 펼치며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괴롭히면서 정신을 빼 놓았다. 그는 반자이 어택 따위 하면서 절대로 허무하게 개죽음 당하지 말고, 가늘고 길게 끈질기게 살아남아서 적을 괴롭히라고 부하들에게 훈시했다. 해변에 방어를 구축하는 게 아니라 섬 내륙 곳곳에 지하 땅굴과 동굴을 이용한 아지트 네트워크를 꾸며 놓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론 그래 봤자 섬은 끝내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궤멸을 맞이했다. 그래도 구리바야시 다다미치의 전략이 적중한 덕분에 미군은 1주일이면 끝날 거라고 쉽게 생각했던 땅따먹기에 1개월이나 소모해야 했다. 그리고 상상 이상의 인명 피해도 당하게 되었다. 워낙 고생해서 그런지 이모지마 섬 전투와 관련해서는 미 해병대원들이 산꼭대기에다 성조기를 꽂는 모습의 저 사진이 유명해졌다.

바로 다음 달 3월 9일과 10일에는 이제 도쿄 대공습이 펼쳐져서 일본의 수도가 불바다 잿더미로 바뀌었다. 옥쇄 항전 운운하는 정신나간 일본을 보면서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당했을 때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으며, 한편으로는 저런 또라이들의 본거지에 직접 쳐들어가는 것에도 부담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직접 쳐들어가지 않는 대신 원자폭탄을 떨구게 됐다. 이제야 일본 천황이 직접 무조건 항복을 하고 드디어 전쟁 종결..

굽시니스트 님의 ‘본격 2차 세계 대전 만화’ 시리즈를 본 게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인 진주만, 그리고 피날레인 원자폭탄 사이에도 연대기별로 다양한 사건과 전투가 있었다. 2차 대전은 전역이 워낙 넓었고 전개가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영화로도 제일 많이 만들어져 나왔다. 올해 초엔 마침 영화 ‘미드웨이’가 개봉해서 본인은 아주 재미있게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차 대전이 전투기와 탱크가 첫 등장한 전쟁이라면 2차 대전은 로켓, 미사일, 핵무기, 컴퓨터 같은 것을 개발시킨 전쟁이다. 그래도 2차 대전을 끝으로 식민지니 제국주의니 하던 구도가 완전히 종결되었으며, 세계가 고전적인 형태의 전쟁은 없이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시절에 일본은 정말 또라이 같은 나라였다. 쟤들이 어쩌다가 영국· 미국 하고도 사이가 순식간에 틀어졌는지 참 신통한 노릇이다.
물론 일본은 그 옛날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항공모함과 전투기, 잠수함을 독일로부터 기술 원조를 받아서든 어떻게든 자체 제작까지 했던 대단한 선진국인 건 사실이었다. 조선 따위 범접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국력이 미국에 비하면 택도 안 되는데 육군과 해군이 대립하면서 따로 놀고, 레이더는 개발해 놓은 것을 적국이 먼저 활용하고 있는데도 정작 자기는 활용을 못 하고, 거기에다 무식한 똥군기와 의지드립으로 인한 폭주, 점령한 식민지에서 차라리 예전의 백인의 지배가 훨씬 더 나았다고 원주민들이 학을 뗄 정도의 폭압 학정 병크 등..
전반적인 행정 시스템과 정신 세계랄까.. 그런 소프트웨어들이 도저히 미국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일본 제국은 총체적 난국을 겪으면서 비참하게 몰락하고 전쟁에서 졌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07 08:34 2020/04/07 08:34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37

먼저 관련 용어 정리부터 좀 하자.

휴전선 = 군사분계선(MDL) = 6· 25 전쟁 휴전 이후의 남북간 영토 경계선

38선 = 6· 25 전쟁 전의 남북간 영토 경계선


남한 기준으로 육지에 추가적으로 존재하는 경계 계층들을 위도의 "내림차순(북→남)"으로 정리하면

군사분계선 > 비무장지대(DMZ), GP > 북방한계선(NLL) 철책, GOP > 민통선


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지형 스타일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완전 바다(인천 옹진의 서해5도)

북괴가 제해력이 없던 덕분에 이 섬들은 북한 본토와 상당히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수복할 수 있었다. 위도상으로 38보다 근소하게 이남이고 6· 25 이전부터 남한 땅이었기 때문에, 국군+UN군이 여기는 휴전 이후에도 북한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여기는 육지 형태의 DMZ가 없으며, 북방한계선이 곧 군사분계선이다. 그리고 물만 건너면 바로 앞이 북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교동도 같은 민통선 안도 아니며, 여기 주민 자녀는 무슨 대성동 주민처럼 납세와 병역 면제 같은 특혜도 없다. (대학 입시 때 실향민이나 오지 특별전형 같은 것만 있는 걸로 앎..)
워낙 멀고 가기 힘든 곳이니 굳이 민통선 지정을 안 해도 일반인들이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저기는 평범한 육군이 아닌 해병대가 주둔한다.

2. 한강 하구 또는 평지(김포, 강화, 파주 일대)

본토의 서부전선은 지형상의 불리함과 판문점 근처라는 이유 때문에 크게 북진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한강 주변까지 후퇴하게 됐다.
이 지역에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하며, 서쪽 끝의 하구에는 여전히 해병대도 있다. 강화군부터는 민통선이 존재하지만 출입 검문이 동부 전선만치 빡세지는 않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군사분계선은 옛 38선 근처의 평지로 옮겨진다. 아직까지는 민통선 다음에 곧장 군사분계선이지, NLL/GOP 같은 분명한 구분은 없다.

3. 첩첩산중(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까지 대부분의 본토 전방)

이제 여기가 군사분계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최전방 지형이며, 과거에 땅을 조금이라도 더 수복하려고 처절한 고지전이 치러졌던 곳이다. 길이로나 군인 비율로나 뭐.. 주변의 1, 2, 4를 모두 합해도 이 3 하나보다 모자랄 것이다.
대부분 험한 산지이지만 철원에는 주변에 평야와 호수도 있다. 그리고 양구에는 혼자 땜통처럼 동그랗게 파인 펀치볼 지형이 있다.

4. 산과 해안(강원도 고성)

여기도 기본적으로는 첩첩산중이지만 군사분계선이 -가 아닌 / 모양으로 더욱 가파르게 상승하여 고위도로 간다. 그리고 뒤로는 바다도 있어서 해안경계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여느 내륙과는 지형이 차이가 있다. 황해가 아닌 동해의 맑고 청명한 해수욕장 백사장이 남북 분단 때문에 이렇게도 많이 봉인돼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정리하자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갈수록 군사분계선이 물이던 것이 평지를 거쳐 산으로 바뀌며, 민통선이니 북방한계선이니 DMZ니 하는 더 세밀한 구분이 생긴다.
참고로 민통선 내부에 주민이 상시 거주하는 예외적인 마을이 교동도 말고 내륙에도 파주, 연천, 철원 정도에 걸쳐서 전국적으로 몇 남짓 있다. 단순 논밭이 아니라 주택 말이다. 가령, 연천의 경우 횡산리 마을이라고 임진강과 코앞의 군사분계선으로 둘러싸인 실향민 마을이 있는데.. 분위기는 거의 대성동 마을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성동의 경우 판문점이 가까이 있기도 하고 근처에 있는 철조망이 북방한계선이 아니라 진짜 군사분계선이기 때문에 DMZ 안에 있는 유니크한 마을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대성동 말고 타 민통선 마을 출신들도 각종 면제 혜택이 있다고 위키에 적혀 있는데, 정말 그러한지 그 근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철원보다 더 동쪽으로는 군사분계선 주변의 지형이 워낙 험하니 민통선 마을 같은 건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다음은 우리나라 안보 관광지의 양대 산맥인 파주와 철원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굉장히 오래 전에 표로 정리한 것이다.

  파주 철원
철도 교통편 경의선. 역에서 직결 가능 경원선. 추가 이동 필요
관련 철도 임진강, 그리고 민통선 안의 도라산 역 (다 영업 중) 백마고지 역.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철원 역 옛 터. 금강산선 교량 흔적
거점 관광 지역 임진각 고석정 인근의 철의 삼각 전적지
남북 철도 연결 여부 아니요. 민통선 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철도중단점 있음
녹슨 증기 기관차 옛날 장단 역에 있던 것이 지금은 복원 처리 후에 임진각에 전시돼 있음 월정리 역 구내에 부서진 기관차 잔해가 있으나 상태는 안 좋음
도로 교통 강변북로+자유로+통일로. 자동차 전용 도로 연계가 좋음 동부간선+국도 3 또는 43호선. 서울 바깥부터는 자동차 전용 도로 없음
가는 길목에 강안 경계 초소를 볼 수 있음 38선 돌파 기념비가 있음
땅굴 제3 제2 (제3보다 더 긺)
지역 특징 판문점, 대성동/기정동, 개성 공단 자연 경치가 더 아름다움. 수복 전의 북한 시설이 있음 (노동당사)
인근 전망대 도라 평화, 승리
인근 하천 임진강 한탄강
민통선 안에서 식사 통일촌 또는 해마루촌. 관광 연계 가능 전선 휴게소. 개인적으로 직접 예약하고 자차로 방문해야 함
민통선 경계 대체로 임진강 선형을 따라 있음 (리비 사거리 등) 육로에 민통선 초소가 있음

이런 식으로 고성의 통일 전망대와 파주의 오두산 통일 전망대도 비교 대조 가능하다.
오두산의 경우, 고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위도에 있지만 강과 강이 합류하는 경치 좋은 곳이면서 군사분계선도 강을 따라 형성되었으니.. 고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망대를 만들기에 굉장히 좋은 입지를 갖추게 됐다. 그쪽으로 자유로 도로를 닦으면서 괜히 전망대를 만든 게 아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30 08:33 2020/03/30 08:33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34

1.
신 상묵(1916-1984)이라는 사람은 살았던 시기와 젊은 시절 행적과 프로필이 원조가카(1917-1979)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기 때문에 같이 비교해 볼 만하다.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해서 교사를 몇 년 하다가 그만두고 일본군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사만 해도 수입 안정적이고 명예와 처우가 좋은 매우 훌륭한 직업인데.. 그걸로 만족하지 않고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갔다는 점에서 이건 이례적이었다.

물론 이건 1930년대 말 이후가 돼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전쟁을 벌이느라 일손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조선인까지 징병제로 징집하기 시작했으며, 더 나아가 황족이 아닌 평민 조선인에게도 일본군 간부가 될 기회가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입장에서 조선인에게 총을 믿고 쥐어주고 자기 군대를 맡기기 위해서는.. 내선일체와 조선 민족 정체성 말살 프로파간다를 미치도록 밀어붙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 신 상묵과 원조가카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은 교사가 된 덕분에 또래 청년들과 달리 군대 걱정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 "징병제 때문에 기왕 군대에 끌려갈 거라면, 더 공부하고 준비해서 병이 아닌 간부로 다녀오자"가 아니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입신양명을 위해 일본군 간부에 지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세부 디테일은 좀 차이가 있었다.

신 상묵은 부사관을 지원해서 오장/조장, 지금 국군으로 치면 거의 상사· 원사급에 올랐다. 근무지도 조선의 일본군 헌병대로, 정말 대놓고 항일 인사들을 고문하고 동족을 괴롭히는 경찰 같은 군인 보직을 맡았다.

1940년대 일제 말기에는 한반도 내부에서 옛날 같은 수준의 독립 운동이야 이미 씨가 마른 상태였다. 그저 일부 자잘한 비밀 결사 수준의 국지적 저항이나 있을 뿐이었는데.. 그 중 하나였던 "무궁당 사건"의 수사와 피의자 취조를 이 사람이 했다. 당연히 악랄하게 했다. 이런 바닥에서 조선인이 단순히 헌병 보조원 끄나풀을 넘어서 최상위 간부 계급에 짧은 시간 만에 도달한 것은 아무래도 구린 실적이 좋았던 덕분일 것이다.

2.
그에 비해 박 정희는?
부사관보다 더 되기 어려운 장교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들어갔다.
그는 거기서도 성적 우수자여서 온갖 특혜가 주어졌지만, 최소한 조선 본토에 오지 않았으며 타지에서도 있지도 않은 동족 독립군이 아니라 중공군과 싸우러 갔다. 하긴, 한 나라의 육사까지 나온 장교에게 겨우 헌병은 완전 재능낭비의 비전투 한직 병과일 테니..

요컨대 원조가카는 신 상묵보다 더 노력해서 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신 상묵보다 훨씬 덜 악질적으로 일본군 복무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긴 칼 차고 돌아와서 교사 시절에 자기를 깔보고 무시하던 일본인 동료들에게 설욕을 했다.

이 정도면 그의 의도는.. 본인이 누차 강조하지만 그냥 현실 불만족으로 인한 출세욕, 신분 상승 욕구였을 뿐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이스트 졸업하고 나서 국내 공돌이들의 처우가 불만족스러워서 로스쿨, 의전을 다시 들어갔거나,
유명 운동 선수가 여러 처우 문제 때문에 외국으로 귀화한 것 정도의 일탈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1940년대에 무슨 스포츠팀처럼 한국군과 일본군을 선택 가능하기라도 했었나? (광복군은 뭐...;; 논외로 하자. -_-)
그 시절에 일제로부터 월급 받는 업종에 종사했던 모든 조선인을 싸잡아 친일파 매국노라고 욕할 게 아니라면, 이 이상의 쓸데없는 친일파 헛소리는 논할 가치가 없다.

3.
그러고 보니 이 종찬(1916-1983)도 저 두 사람과 거의 같은 연배이고 일본군 복무 경력이 있는 사람이다. 다만, 이 사람은 부역자 수준을 넘어 진짜 매국노급 친일파인.. 이 하영의 후손이어서 집이 귀족 금수저 가문이었다. 그는 그런 빽 덕분에 박 정희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일본 육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기를 쓰고 거기 들어가려고 누구처럼 멸사봉공 혈서 따위 안 써도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에 참 군인 소리 들을 개념 행적을 많이 남겼으며, 이에 대해서는 할배나 원조가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저 사람은 애초에 일본군 복무하던 시절에도 비윤리적인 명령에 대해 "본인은 천황 폐하께서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소신껏 항명을 할 정도로 강직했다.

4.
또한, 먼저 언급했던 저 신 상묵의 아들이 바로.. 국회의원 출신에다 열린우리당, 더불어민주당 진영에서 지금도 잘나가고 있는 정치인 신 기남이다.
이 사람은 다른 건 모르겠고 지난 2000년대에 한글날의 국경일 재지정에 관심을 많이 갖고 애썼던 덕분에 한글 학회 등 관련 운동 단체로부터 애국자라고 칭송받고 상도 잔뜩 받았었다. 그랬는데 부친의 과거 이력 흑역사가 뒤늦게 알려져서 곤혹을 치렀다.

5.
두 사람 얘기만 하려다가 세 사람 얘기가 돼 버렸는데..
내가 이런 얘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한쪽에다가만 친일파 프레임 씌우는 불순하고 멍청한 수작에 속는 사람이 없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것도 본인의 오래된 생각이고 누차 강조하는 사항인데.. 우리나라가 겨우 1940년대 말 건국 초기에 일제 군경 경력자를 재등용한 것은 Windows 95가 그때 컴터 환경의 한계상 도스/16비트 코드를 그대로 수용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당장은 신 상묵 같은 사람이 없으면 안 됐다. 항일 인사를 잡던 그 수사 기술이라도 재활용해서 일본놈보다 더 질 나쁜 빨갱이들을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 상묵은 해방 후에 대한민국에서는 원조가카 같은 군인이 아니라, 경찰 간부가 됐다.

오죽했으면 그 시절에 반민특위를 해체했던 법무부 장관조차도 골수 친일파이기는 개뿔, 항일인사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한글 학회에 엄청난 사재를 기부한 민족주의자였다.
필요 이상의 쓸데없는 망상을 30대 나이가 넘어서까지 갖고 있어서는 심히 곤란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3/04 19:35 2020/03/04 19:35
, ,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24

우리나라의 경춘선 철도는 일제 강점기의 말기에 근접한 1939년에 개통했다. 1939년부터 1941년에 걸쳐 찔끔찔끔 개통한 중앙선과 시기가 비슷하다.
경춘선은 그 당시 사철 형태로 건설됐으며, 다른 철도와 달리 설립 배경에 왜색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나름 춘천 지역 조선인 유지들의 자본이 많이 투입된 것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 경춘선은 국영 철도로 편입됐다. 경춘선은 원래 지금의 제기동 역 근처의 '성동' 역에서 시작했지만 1971년에 해당 선로가 폐선되었다. 그 대신 청량리에서 출발해서 성북(지금의 광운대)에서 경춘선 선로가 분기하는 형태로 선형이 바뀌었다.

경춘선에는 한동안 무궁화호와 통일호라는 두 종류의 일반열차가 다녔지만 2004년 3월, KTX의 개통과 함께 구닥다리 통일호는 퇴역했다. 그 뒤 2010년 12월, 복선전철화가 완료되면서 선형이 대대적으로 바뀌었고 차량은 광역전철 전동차로 대체되었다.
급행 전동차도 잠깐 다녔지만 없어지고 이내 ITX-청춘으로 바뀌었다.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급행 전동차는 현대 YF 쏘나타의 2400cc 고급형 모델이 자취를 감춘 것과 시기적으로 비슷하게 없어진 것 같다.

경춘선의 복선전철화는 차량뿐만 아니라 선로에도 굉장히 큰 변화를 야기했다.
광운대 역 부근은 경원선 복선 선로이다. 경춘선 열차가 거기서 경춘선으로 나가려면 경원선의 맞은편 열차 선로를 타넘으며 잠시 평면교차를 해야 했다. 열차가 몇 분 간격으로 다니는 철도에서 평면교차는 단선 교행만큼이나 절대로 좋은 여건이 아니었다. 선로 용량이 줄어들고, 사고의 위험도 커지고..

그랬는데 새로운 복선전철 선로는 경원선이 아니라 중앙선의 상봉· 망우 역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얘들은 중앙선으로 합류 자체를 안 하고 중앙선보다 북쪽의 선로에서 따로 노니 평면교차를 하지 않게 됐다.
(물론 더 멀리 용산까지 가는 ITX-청춘은 여전히 평면교차를 한다. 그리고 지금 분당선 전동차 중에서도 가끔 왕십리를 넘어 청량리까지 가는 열차도 선로를 건너갈 때는 불가피하게 잠시 평면교차를 한다.)

이로써 성동-성북 선로가 없어진 지 거의 40년 만에 성북-갈매의 꼬불꼬불한 시내 선로도 폐지됐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신공덕, 화랑대 같은 역도 없어졌다.
이 두 역은 초라해 보여도 나름 1939년 경춘선의 개통 당시부터 있었던 역사 깊은 역이었다. 물론 이름이야 일제 시대에 거기 근처에 대한민국 육사가 있었을 리가 없으니, 처음엔 화랑대가 아니라 태릉이고.. 그런 식이었다.

경춘선의 시내 관통 구선로가 있던 곳에는 숲길 산책로가 꾸며졌다. 이 점에서는 역시  공원 산책로가 조성된 용산선 구선로 구간과도 상황이 비슷해 보인다. 수도권 전철 경의선이 개통한 때도 2009년이니 서로 더욱 비슷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용산선은 경의선 신촌-가좌 구간에 밀려서 현역 시절에도 존재감이 너무 없었고 2000년대부터 사실상 화물 전용에 폐선 신세였지만.. 경춘선은 그런 지경이 아니었다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일까? 경춘선 구선로는 ‘경춘선 숲길’이라는 별칭이 붙은 한편으로.. 상당수의 구간에 기존 레일이 고스란히 남겨지고 보존되었다. 소리소문 없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용산선 선로와는 다른 처분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서울여대 정문과 육사 정문 사이의 공간, 즉 구 화랑대 역은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었으며, 주변에 ‘화랑대 철도 공원’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본인은 이를 답사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 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동차 도로와 육사 정문의 갈림길 사이에 '경춘선 숲길'이 나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먼저 본인을 반긴 것은 협궤 선로용 소형 증기 기관차인 '혀기'였다.
삼성 교통 박물관에서도 동명의 기관차를 본 적이 있는데, 그것과 저건 규격이 달랐다.
교통 박물관 것은 더 옛날 1937년에 제조되어서 1952년까지 운행되었으며, 탄수차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텐더식). 그러나 여기에 있는 것은 1951년에 제작되어 1973년 초까지 운행된 신형인 한편으로 탄수차가 별도로 있지 않는 탱크식이다.

우리나라 철도에서 협궤는 수려선과 수인선뿐이었고 이들 기관차도 딱 저기만 다녔다. 그리고 1973이라는 연도에서 미뤄 볼 때, 얘는 수려선이 폐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같이 퇴역한 것으로 보인다.

1967년 8월 말에 증기 기관차가 현업에서 공식적으로 퇴역한 뒤에도 협궤 전용인 혀기 기관차는 거의 1970년대 중후반까지 더 굴러다녔다. 그래서 1977년작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같은 영화에서 주 기철 목사 가족이 평양으로 가는 것을 묘사한 열차씬에서도 고증 오류를 무릅쓰고 폭이 대놓고 좁은 협궤 열차가 달리는 모습이 잠깐 나온다.
경의선은 협궤가 아니었지만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현역 증기 기관차를 간단하게 카메라에 담을 수 있는 수인선 구간을 답사했음이 분명하다. 아무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객차의 안에도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웬 외국산 전동차..는 아니고 노면전차이다. 저게 전동차라면 출입문이 저렇게 낮게까지 만들어지고 더구나 폴딩 형태이기까지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나름 화랑대 역 승강장 레플리카와.. 무려 무궁화호 객차 세트가 등장했다.
세상에, 인서울에서 이 정도 퀄리티의 철도 기념물을 구경하게 될 줄이야~!
본인은 작년 이맘때쯤엔 문정 근린 공원에서 철길 흔적을 발견했다고 좋아서 난리를 쳤었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한 거물을 발견하게 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화랑대 구역사는 마치 옛날 신촌 역처럼 봉인되고 보존된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바로 옆에 있는 육사 정문의 모습이다.
생도들은 좋겠다. 학교 주변에 이런 철도 기념 공원이 있으니 말이다. 서울여대 애들도 마찬가지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궁화호 객차의 앞에 놓여 있는 건 미카 증기 기관차였다. 맨 처음 봤던 혀기보다 훨씬 더 크다.
증기 기관차들은 어린이 대공원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겨 놓은 거라고 한다. 어린이 대공원은 50여 년 전에 처음 만들어지던 시절에는 꼭 필요했던 시설이지만 지금은 다른 유원지나 공원, 놀이 시설에 밀려서 너무 낡은 감이 있다. 뭐, 그래도 주말이면 지금도 차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건 변함없으니, 완전히 파리 날리고 망한 지경은 아니다.

근처에는 마지막으로 다른 1량짜리 일본 전동차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사진 첨부를 생략하겠다.
증기 기관차들은 다 유래에 대해 설명이 나와 있던데 정작 이런 외국 차량들은 그냥 병풍으로 갖다놓은 건지 아무 설명이 없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서 동쪽으로 더 가면 이제 철도 공원은 끝나고 철길과 함께 산책로만 이어진다. 이런 식이다. 생각보다 길어서 1~2km는 된 것 같다.
육사를 완전히 지나고 태릉 선수촌과 태릉 골프장까지 거친 뒤에야 끝나더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전에 철길부터 먼저 끝난다. 이제 여기 이후부터는 그냥 철길 노반 자갈밭만 몇백 m 이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이렇게 경춘선 숲길이 통째로 끝난다. 저기부터는 행정구역도 서울을 벗어나서 구리시이다.
참고로 철길 산책로는 철도 공원의 동쪽뿐만 아니라 서쪽으로도 제법 길게 이어져 있다. 거기는 주변이 여기처럼 한적한 차도나 육사 캠퍼스가 아니라 본격적인 주택가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달라 보인다. 이 글은 동쪽으로만 끝까지 가 본 답사기임을 밝힌다.

여기서 경춘선 전철 갈매 역까지는 10분 정도 더 걸어서 도달할 수 있었다. 본인은 거기서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작년 말에 개통한 지하철 6호선 신내 역도 이번 기회에 드디어 구경할 수 있었다. 여기 근처에 있으니까... 서울 지하철에서 차량기지 내부에 있는 단선 종착역은 지금까지 7호선 장암밖에 없었는데 이제 6호선 신내도 추가됐다. 7호선은 전역인 도봉산이 환승역인 반면, 6호선은 종착역 자체가 환승역이 됐다는 차이가 있다.

9호선 개화도 차량기지 내부에 있는 종착역인 것까지는 일치한다. 그러나 거기는 단선이 아니며 모든 일반열차들이 도달하는 정규 종착역이다. 장암이나 신내처럼 전체 열차의 절반 이하만 찔끔찔끔 드나드는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2/13 08:36 2020/02/13 08:36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16

우리나라가 6· 25 사변 때 육해공을 통틀어서 첫 승리를 거둔 전투는... 6월 25일 당일 밤에 북괴의 부산 해안 침투를 막아낸 대한해협 해전이다.
그럼 졸전과 패배와 후퇴만 거듭했던 본토에서 육군의 첫 승리로 기록된 전투는 무엇일까?
그건 충주-음성 일대의 동락리 전투라고 여겨진다. (7월 5~8일) 3~400명 남짓한 병력으로 2천 명에 달하는 연대급의 적군 병력을 무찌른 대승이었다.

비록 승리 후에도 얼마 못 가 후퇴하게 되긴 했지만 이건 노획물, 아군의 사기 진작, 그리고 훗날 낙동강 방어선과 인천 상륙 작전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도 버는 매우 값진 승리였다. 특히 이때 노획한 소련제 무기들을 통해서 북괴가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음이 명확히 입증됐으며, 이는 우리도 유엔군의 지원을 받는 명분이 되었다. (☞ 관련 동영상 링크 1, 링크 2)

이 전투의 승리에는 동락 국민학교 교사 김 재옥 선생(1931-1963)이 피난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다가.. 목숨을 걸고 국군을 찾아가서 공산군의 상황을 제보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기습을 유도한 것이 매우 크게 기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에는 공산군이 들어와서 진을 쳐 있고, 우리 국군은 어디 있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로 한밤중에 깜깜한 시골길을 몇 시간을 헤매면서 무작정 달린 끝에, 4~5km 남짓 떨어져 있던 국군 진영을 발견한 것이다. 이때 이분은 겨우 20세의 처녀였다.

큰 승전을 보고받은 할배 대통령은 입이 귀 밑까지 찢어졌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동락리 전투를 치렀던 6사단 7연대 2대대 대원들은 전원 1계급 특진했으며 해당 지휘관은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다.

군인들뿐만 아니라 김 선생 역시 민간인으로서 태극 무공 훈장을 받았다는 말이 떠돌지만, 정확하게 검증 확인이 안 된다. 오히려 김 재옥 기념사업회 같은 단체에서는 나라에서 이런 대단한 영웅에게 훈장 하나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이제라도 줘야 한다고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탄원을 넣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말이 진실인지 모르겠다.
최종적으로는 2012년에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긴 했다. 그리고 이분의 근무지이던 동락 초등학교에 기념비와 기념관는 진작부터 세워져서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본인은 공교롭게도 바로 지난주 설 명절 귀성길 때.. 동락 초등학교를 잠시 들러서 저 현충탑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자가용의 내비가 횡축 이동 경로로 혼잡한 영동 고속도로(50) 대신 평택-제천 고속도로(40)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학교는 서충주 IC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이 행적은 훗날 <전장과 여교사>(1966)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필름이 소실되어 영영 사라진 줄 알았다가 뒤늦게 발견되고 복원되어서 한국 영상 자료원에서 지난 2015년 봄에 공개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분은 그 위기의 순간에 마주쳤던 어느 젊은 장교(이 득주 소위)와 눈이 맞아서 그 해 10월에 결혼까지 하게 됐다! 모든 게 해피엔딩으로 귀결된 것 같았으나 하지만...

이분의 생몰년을 살펴보면 굉장히 일찍 죽은 것을 알 수 있는데, 병이나 사고나 북괴의 테러로 죽은 게 아니었다.
군 복무 중에 중에 자기 상관에 대해 앙심을 품었던 고 재봉이라는 이름의 어느 병사(상병)가그 상관을 죽여 버리려고 관사를 찾아갔는데, 정작 죽이고 싶은 간부는 전출 가고 없고, 하필 그 집에 김 재옥 선생 일가족이 입주해 있었다.

그 병사는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인 줄 모르는 채로 흉기(도끼...)를 휘둘러서 일가족을 몰살했다. 김 재옥 선생은 이때 허무하게 참변을 당했다. 마치 1969년에 영화 배우 샤론 테이트가 찰스 맨슨 패거리에게 오인 살해당한 것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큰아들 딱 한 명(이 훈)만이 그 당시 친척집에 가 있어서 화를 면했고, 덕분에 대가 완전히 끊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해자는 곧 붙잡혀서 당연히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신문 그림의 우측 하단에서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우는 표정인 아이가 바로 유일한 생존자이고 사건 당시에 10대 소년이었던 이 훈 군이다. 지금이야 7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 있다. 국가 유공자의 후예인 데다 대가 끊길 수준의 일가족 몰살까지 경험한 고아 출신이니, 젊은 시절에 병역은 무조건 면제됐지 싶다.)

내 머릿속 잡학 사전에 또 거물 아이템이 하나 새로 입력됐다.
그런데 이런 엄청나고 드라마틱한 사실을 난 왜 30대 중후반의 나이가 돼서야 알게 됐을까? ㅠㅠㅠㅠ 난 6· 25 전쟁과 관련해서 조지 리비 중사, 김 재현 기관사 등 여러 마이너한 인물들에 대해 주워 들었는데, 김 재옥 선생에 대해서는 정말 난생 처음 들었다.
더구나 난 고 재봉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단지, 피해자가 저런 사람이었다는 걸 지금까지 몰랐던 것이다.

일각에서는 고 재봉이 당변병이며 상관으로부터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말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 링크) 그냥 저 병사가 처음부터 도벽도 있고 성질이 포악하고 더러운 놈이었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 글에서는 김 재옥 선생이 주제이므로 가해자의 배경에 대한 판단은 하고 싶지 않지만, 가해자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뒤에도 능숙하게 도피 생활을 하고 체포된 뒤에도 태도가 너무 당당하고 뻔뻔스러운 걸 보면.. 정말로 그냥 처음부터 성질이 더러운 놈이 맞았던 것 같다. 원래 착하던 사람이 도를 넘는 가혹행위를 당하면서 욱해서 정신줄을 놓은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20/01/31 08:35 2020/01/31 08:35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711

« Previous : 1 : 2 : 3 : 4 : 5 : ... 20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20/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1407208
Today:
42
Yesterday:
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