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

밀덕 역덕에게 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선 또는 서부 전선, 독소 전쟁 따위)은 아주 친숙할 것이고 한국 한정으로 6· 25도 친숙할 것이다. 그에 비해 러일 전쟁은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일본이 1905년에 한반도에 경부선 철도를 완공하고, 을사조약까지 체결해서 조선을 완전히 병탄하던 당시에... 대외적으로는 무슨 짓을 하고 있었고 내부의 사정이 어땠을까? 이를 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이때의 일본은 훗날 1940년대의 일본과는 여러 모로 다른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1) “203고지” 같은 그 시절 영화를 보니, 러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이 군복이 검정이었다. 완전 생소하게 느껴지며 적응이 안 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일제 시대 황록색 군복은 공교롭게도 딱 1910년대 초반부터 도입됐다.
뭐, 19세기 말에는 심지어 대한제국군의 군복조차도 검정이었으니 그 당시에 블랙이 세계적인 유행이었나 보다. 이때가 총기의 발달로 인해, 군대에서 때깔 고운 예복과 위장 친화적인 전투복의 구분이 이제 막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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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전을 앞두고 일본군에서는 보급로 개척과 동계 전투력 테스트 명목으로 한 육군 중대를 동원해 장거리 산악 행군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산중턱에서 전례가 없던 기록적인 혹한과 눈보라를 만나 완전히 길을 잃고 조난을 당해 버렸다. 이 때문에 210여 명의 병력이 거의 다 얼어 죽고 겨우 11명만 생환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전시도 아닌데 병력을 이렇게 많이 잃다니.. 이 사고는 1902년 ‘핫코다 산 참사’라고 불린다.

러일 전쟁은 명목상 일본의 승전으로 기록됐지만 속내는 잘 알다시피.. 마침 러시아도 상황이 안 좋고 일본도 전쟁을 더 끌었다가는 쫄딱 망하기 직전이었는데, 여러 뽀록이 잘 터지고 주변 국가들이 중재도 해 준 덕분에 간신히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것에 더 가까웠다. 이 때문에 일본은 전쟁 피해 배상금도 못 받았다.

러일 전쟁에서 빠질 수 없는 일본군 지휘관으로는 해군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더불어 육군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있다. 이 사람은 10여 년 전 청일 전쟁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그 다음으로 맞붙은 러시아는 중국과는 급이 다른 상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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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생겼다..;; 조선의 고종 황제도 그렇고, 20세기 초엔 장군이나 군주 같은 높으신 분이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저런 스타일의 제복을 입는 게 유행이었나 보다.)

러시아의 함대가 대양을 횡단하여 도착하기 전에 뤼순 고지를 점령하려고 대규모 육군 병력을 “반자이 어택” 시켰으나.. 이전 같은 무식한 전술이 여기서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조선 동학 농민군만 일본군의 기관총에 갈려나간 줄 알았는데, 일본군도 러시아의 맥심 기관총에 엄청나게 갈려나갔다. 1차 대전 서부 전선에서 유럽 병사들이 기관총 참호를 뚫지 못해 갈려나갔던 일이 이때도 비슷하게 미리 벌어진 것이다.

저것들이 다 전술 교리가 신무기의 발달을 따라가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이제 막 발명되었던 탄피와 후장식 총기만으로도 혁명 그 자체였고 전쟁의 양상이 획기적으로 바뀌었는데, 하물며 기관총은.. 오늘날로 치면 핵무기와도 비슷한 압도적인 포스를 자랑했다. 기관총이 그 시절에 괜히 세상의 모든 전쟁을 종결시킬 최종 병기라고 불렸던 게 아니다.

아무튼, 이 때문에 전사자 유가족들이 단체로 노기 장군에게 쌍욕 편지를 보냈으며, 집 앞에 모여서 돌 던지고 “내 아들 살려내라, 이 살인자야!”라고 항의 시위를 할 정도였다. 이런 반발과 저항도 일본이 아직 태평양 전쟁 같은 막장 시절보다야 훨씬 민주적인 분위기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노기 장군 또한 인품이 아주 고매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는 유가족들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사죄하고 부상병들을 일일이 문병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재활을 위해 사재 기부도 많이 했다. 결정적으로는.. 자기도 친아들 두 명을 이 전쟁에서 잃었다!
그는 그러고도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할복 자살을 하려 했다. 그러나 그를 매우 신임하고 아끼던 메이지 천황이 명령을 내려 할복을 금지했다.

일본은 내부적으로 이런 삽질과 큰 희생을 치른 뒤에야 어쨌든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에서 이기긴 했다. 일본은 이 결과만으로도 세계를 놀라게 하고 선진국 열강 인증을 받기에 충분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러시아와 일제 중 어디 식민지가 되느냐의 답이 한쪽으로 확 기울게 됐다. 그리고 노기 장군은 실책은 가려지고 최종적인 공이 부각되면서 전쟁 영웅으로 등극했다.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에는 세상 정세를 잘 몰라서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미 조선인지 대한제국인지 하는 나라는 일본과 맺은 각종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하나 둘 빗장 풀리고 해체되고 망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일본군 역시 이때는 서양 스타일을 표방한답시고 포로 학대나 민간인 약탈을 금지하며 일말의 신사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아직은 타락하기 전이었으니 낭만도 좀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20세기 초에 세계 여론은 일본에게 아주 호의적이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나라 따윈 거의 없었다. 훗날 미국에서 “관동 대지진 때문에 어려움에 빠진 일본을 도와줍시다” 성금 모금까지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끝으로, 러일 전쟁 때 명암을 남겼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1912년에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자 뒤따라 자결했다..;; 자결하지 말라고 자기를 말리던 상관이 죽고 없어지자 곧바로 상관의 뒤를 따른 것이다. 이것도 참..
이 정도로 솔선수범하고 책임을 졌다면, 노기 장군에게 러일 전쟁 초기의 판단 미스와 패전에 대한 개인적인 비판을 더 늘어놓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10 08:36 2021/01/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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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운전자들

1. 최초의 여성 운전자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기도 한참 전이던 1886년, 독일의 공돌이 발명가 칼 벤츠는 인류 최초로 상용화된 내연기관 자동차를 개발해서 세상에 내놓았다. 증기 기관차만치 거대하지 않고, 그렇다고 말이 끌지도 않는 아주 기괴한 디자인의 수레?를 선보인 것이다.

'벤츠 페이턴트 모터바겐'이라는 이름의 삼륜차는 954cc짜리 단기통 휘발유 엔진으로 최대 출력은 겨우 0.75(초기형)내지 2마력(후기형??), 변속기는 2단에 최대 속도 16km/h 남짓밖에 안 됐다.

20여 년 뒤에 조선 땅에 들어온 순종 어차도 거의 5000cc급 배기량으로 최대 출력은 3~40마력대밖에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요즘 승용차가 저런 배기량이면 마력수 뒤에 0이 하나 더 붙을 텐데..;;
그리고 요즘 954cc면 그냥 경차 배기량이고, 그걸로도 70마력 정도는 나올 것이다. 이게 바로 100년이라는 세월이 만들어 낸 기술력의 차이이다.

그 시절의 자동차 발명가들은 기술적인 난관뿐만 아니라 교통사고의 증가로 인한 규제, 기존 마차 업자들과의 마찰, 사람들의 회의적인 반응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런데 그때 칼 벤츠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조력자는 그의 아내인 '베르타 벤츠'였다.

약혼 시절부터 결혼 자금까지 동원해서 남친의 창업 자금을 대 주고, 결혼해서 애도 다섯이나 낳아서 키우고..
남편의 발명을 격려하기 위해 1888년 8월 5일엔.. 애들 둘만 태우고 남편 몰래, 성인 남자 없이 혼자 직접 '모터바겐'을 몰고 약 106km 떨어진 친정집까지 다녀오는 근성의 대장정을 감행했다! 이 기괴한 자동차만 있으면 나 같은 아녀자도 간편하게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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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차가 퍼지면 "어머 오또케 오또케.. ㅠㅠㅠ" 퍼질러앉은 게 아니라, 직접 뚜껑 열어서 차를 수리하고 땜질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주변 약국에서 휘발유인지 벤젠인지를 사 와서 해결했다. 덕분에 이분은 세계 최초의 여성 운전사.. 그리고 그 약국은 세계 최초의 자동차 주유소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획득했다.

베르타는 남편에게 "자기야, 나 자기 차 혼자 몰고 친정집에 잘 갔어!"라고 전보를 보냈고, 사흘 뒤에 자가운전으로 귀환도 무사히 했다.
칼은 너무 감격해서 일기에 "She drove more than a car, she drove an industry" 라고 썼다고 한다.
거의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같은 대사가 아닐 수 없다.

그 뒤로 벤츠는 성능이 더욱 개량된 자동차를 개발하고 갖가지 특허를 따면서 승승장구 했다. 세상을 바꿔 놓은 자동차 산업의 태동기를 주도했던 여걸의 이야기가 어찌나 멋있게 들리는지!
그나저나 요즘 벤츠 승용차에 4MATIC은 승용차 주제에 찦차처럼 사륜구동도 된다는 뜻이었군. 처음 알게 됐다.;;

  • 차량 제작사에서는 진작에 이 일화를 짤막한 광고 영화 두 편으로 각색한 바 있다. The First DriverThe Journey That Changed Everything을 참고하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실감나는 현장감을 경험할 수 있다.
  • 메르데세스-벤츠에서 '메르데세스'도 여자 이름에서 유래됐다. 다만 이 여인은 차량의 개발에 직접적으로 영감을 주거나 기여한 인물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타 사이트의 글을 참고하라.
  • 벤츠는 저런 훌륭한 부인의 내조를 받으면서 자동차를 개발했지만, 그로부터 10~15년쯤 뒤에 미국의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와 부인을 둘 다 신경 쓸 시간은 없다"...;;는 지론과 함께 평생 독신으로 살며 비행기를 발명했다. 단지, 교사이던 여동생의 내조를 받긴 했다. 공돌이들의 인생은 그냥 케바케인 것 같다.
  • 독일에는 어째 유명한 약국이 몇 군데 있다. 세계 최초의 주유소 역할을 한 약국뿐만 아니라, '티거 전차'에서 모티브를 딴 '호랑이 약국'을 운영했던 독일군 탱크 운전수 오토 카리우스도 있기 때문이다. ㅎㅎ (전후에 약사가 됨)

벤츠가 최초로 만들었던 페이턴트 모터바겐 원품이야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의 설계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에 원품과 100% 동일한 레플리카, 그것도 시동 걸리고 주행 가능한 레플리카가 여러 대 만들어져 있으며, 그게 굴러가는 유튜브 동영상도 있다. 이런 팔팔한 레플리카가 있는 게 후세들에겐 차라리 더 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자필 원본 따위야 진작에 다 소멸되고 없지만, 원본과 동등한 권위를 갖고 지금도 동일하게 살아 역사하는 필사본과 번역본이 고스란히 보존되어서 전해지고 있다. 다 낡아빠진 죽은 골동품의 형태가 아니다.

2. 최초의 한국인 폭주족

한국인 중에 자동차 과속 폭주족의 원조는 바로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 할배다. 오토바이 말고 사륜 자동차 말이다. 다음 글을 보자.

"... 84세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낙엽 뒹구는 이화장 뜨락에서 10월 8일의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대통령과의 카라이프를 회고한다." (☞ 링크)

그이는 난폭에다 지독한 과속운전을 했죠. 그러나 나를 보고는 ‘당신은 실키 드라이버야’라고 칭찬을 했어요.
독립운동을 하느라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돌아다닐 때였어요. 그이는 여기 저기 약속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운전대만 잡았다 하면 과속에다 난폭 드라이버로 돌변했어요. 시속 140km 이상은 예사였지요.

“제발, 오 제발... (please)”
“여보, 뒤를 보지 말아요. 나를 믿으시오.”

이때 순간적이지만 ‘이분과는 헤어져야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차를 탈 때마다 간이 콩알만 해지니 살 수가 있어야죠.


참고로 프란체스카는 할배 이전의 독일인 남편도 '카레이서'였다. (헬무트 뵈룅.. 이혼)

경찰은 연설을 마치고 나오는 우남은 쳐다보지도 않고 나를 향해 말했어요.
“기동경찰 20년에 내가 따라잡지 못한 최초의 교통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이오. 일찍 천당 안 가려거든 부인이 조심시키시오.”


인터넷에 굴러다니는 이 일화의 출처는 월간 자동차생활 1984년 10월호이다.
자동차생활은 바로 전인 1984년 9월에 창간됐다! 창간되자마자 거의 곧장 할배의 폭주족 일화를 소개했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표지를 보면 "특별 취재 -- 대통령의 첫 번째 운전사는 나, 프란체스카였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제로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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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절 미국의 자동차들은 성능과 제원이 어느 정도였을까?
미국 GM에서 1936년에 제작했던 수동 변속기의 원리 고퀄 강의 동영상을 보면.. 서민용 승용차에 변속기는 꼴랑 3단까지 있고, 속도계 눈금은 시속 100마일, 160km/h까지 적혀 있었다. (9분 18초 지점)

진정한 선각자는 1800년대 말에 이미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감옥에서 영한사전을 만들고 독립정신 책을 썼다. 그리고 1930년대 자동차로도 시속 140~160을 밟았다. 그러면서도 교통사고는 당연히 전혀 내지 않았다.

할배 대통령을 존경하는 후예라면 무슨 나라를 세우거나 구하는 일은 못 하더라도.. 할배가 남겨 준 자유를 누리면서 훨씬 더 성능 좋은 자동차와 훨씬 더 잘 닦인 고속도로에서 못해도 시속 200은 밟아 줘야 하지 않겠는가?

3. 최초의 경부 고속도로 폭주족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도 산업화 근대화의 길을 갔으며, 원조가카의 영도력 하에 경부 고속도로라는 게 개통했다. 이 도로에서 악셀을 사정없이 밟은 최초의 폭주족은 바로.. 20세기 중반을 풍미한 톱스타 배우인 신 성일 씨였다. 이 사람도 한 스피드 했었다.
그는 겨우 34세의 나이로 얼마나 성공해서 억만장자가 됐는지.. 1960년대 말에 이미 집값보다 더 비싸던 빨간 외제차 포드 머스탱(무스탕)을 자가용으로 뽑았다.

그 옛날에 남한에서 8기통에 7300cc가 넘는 배기량의 차량이라니.. 그 시절에 새나라 내지 도요타 코로나 같은 일반적인(?) 승용차가 20~30만 원대였고 이것만으로도 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는데, 신 성일의 애마의 가격은 그런 차량의 2~30배에 달하는 무려 640만원이었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람보르기니 포르셰를 넘어 롤스로이스니 부가티 급이나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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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가 전구간 개통됐던 1970년 7월 7일에 원조가카 일행은 부산에서 서울로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왔다.
그런데 신 성일은 그 날 반대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도로를 시속 200으로 밟으면서 딱 중간 지점인 영동-추풍령 일대에서 대통령 일행을 쌩~~~~~ 하고 지나쳐 가 버렸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1970년에 한국 땅에서 말이다. 대통령의 스케줄과 동선을 알기도 쉽지 않던 시절에 시간 계산을 꽤 절묘하게 해서 일부러 대통령 일행을 마주보며 초고속으로 쓱 스쳐 지나가는 똘끼를 부린 것이다. (☞ 관련 기사)
버스나 트럭이 아니라 웬 외제 승용차가 고속도로 개통 당일에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이 따위로 과속 폭주를 하다니.. 원조가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뭐야 저건..? 저 차 운전자를 잡아 왓!" 호통을 쳤다.

그렇잖아도 무려 1970년에 대한민국 땅에서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갑부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차량 번호를 몰라도 대략의 차종과 색깔만으로도 곧장 추적해 낼 수 있었다.
운전자가 배우 신 성일 씨라는 얘기를 듣자, 원조가카는 고개를 저으며 "젊은 친구가 ㅉㅉㅉ.. 오래 살고 싶으면 운전 좀 살살 하라고 그래" 하면서 넘겼다고 한다.

자기 말고는 자동차가 없다시피하고 과속 단속 카메라 따위도 하나도 없었을 그 긴 도로를 혼자 200을 밟으며 달렸다니.. 정말 부럽지 않은가? 1970년이면 안 그래도 콩코드 초음속기에 아폴로 우주선이니 하던 시절이었는데..
나도 야밤이나 새벽에 그렇게 풀 악셀 밟으면서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싶다. 과속과 과식은 매우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기 때문이다.

단, 얼마 못 가 석유 파동이 벌어지자 국가에서는 고배기량 차량을 사치품으로 간주하여 온갖 방법으로 규제했으며, 극도의 기름 절약과 내핍을 강조했다. 꼴랑 2000cc 배기량을 6기통으로 구현하기도 하던 시절에 장관들의 관용차를 4기통 엔진 차량으로 제약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그때는 신 성일 씨도 어쩔 수 없이 머스탱을 처분하고 자가용을 작은 국산차로 바꿔야 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1/01/02 08:36 2021/01/0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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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여 년쯤 전엔 당시 우리나라 국방부 장관이었던 분이 간담회를 하던 중에 “(...) 지금 아프리카를 보세요. 거기는 그냥 밀림 자연뿐이고 무식한 흑인들이나 뛰어다니는 곳입니다”라는 말을 내뱉는 바람에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아 물론, 저 사람은 군인과 공직자로서는 아주 유능하고 훌륭하고 청렴하기까지 한 분이었다. 그리고 저게 솔직히 말하면 우리 같은 사람이 흔히 갖기 쉬운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기도 하다.

심지어 소싯절에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해서 1950년대에 노벨 상까지 받았던 생물학자 제임스 왓슨도.. 2007년경엔 “흑인은 유전자 차원에서 백인보다 지능이 떨어짐” 이런 말을 버젓이 해서 세계적으로 물의를 빚었으며, 늘그막의 이미지를 다 구긴 바 있다.

지능까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리카 흑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처지가 대체로 기구한 건 사실이어 보인다. 노예로 유난히 많이 팔려간 내력이 있으며, 2차 대전 이후에 그나마 유럽 강대국들로부터 해방되고 독립한 뒤에도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내전 벌이면서 여전히 못 사는 경우가 많다.

저 동네는 딱히 이슬람· 공산주의· 파시즘 따위가 적극 유입되지 않았는데도 과거에 이디 아민 같은 미친 독재자가 떡하니 나왔다. 쟤가 무슨 폴 포트나 히틀러나 김 일성, 마오처럼 무슨 이념에 사로잡혀서 맛이 가서 똘끼 학살극을 벌인 것 같지는 않다.

소말리아니 르완다니 하는 곳이야 오늘날까지도 상황이 어떤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다. 모잠비크와 짐바브웨는 완전히 경제 파탄 상태이며, 지금 우간다는 대통령이 동성애 반대하는 기독교인이라고는 하지만 뭔가 다른 방면으로 정상이 아닌 것 같다.;;; (사실, 아프리카 국가들은 토속 신앙을 제외하면 이슬람이나 가톨릭이 아니라 의외로 기독교가 강세이다. 정확히 무슨 교파인지는 모르겠지만..)

19~20세기에는 유럽인들이 제국주의 기류에 편승해서 흑인을 미개하고 열등한 인종으로 취급하고 식민지 착취를 자행하긴 했다. 유럽에서 한편으로는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면서, 한편으로는 정치인· 기업인과 군인들이 저런 짓을 한 게 참 아이러니이다. 인간이 하는 일이 100% 다 선하거나 100% 다 악한 건 아니었을 테니..
그 중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는 고무 채취 할당량을 못 채우면 콩고 원주민들의 손목을 자르는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손목 다음엔 당연히 목을 쳤으며, 급기야는 마을 주민을 몽땅 몰살했다.

영국 같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조차 그건 너무하다고 국제적으로 규탄하고 뜯어말렸을 정도였다. 도둑질 하다가 잡힌 죄인의 손목을 자르는 것쯤은 아주 양반으로 보일 지경이니... 벨기에나 일본처럼 제국주의 대열에 뒤늦게 뛰어든 나라들이 식민 통치 노하우가 없기도 하고 의욕만 넘쳐서 피지배 주민들을 더 잔혹하게 다스린 편이었다.

다만, 유럽 백인들이 처음부터 아프리카에서 저런 깽판을 쳤던 것은 아니다. 저건 항생제와 기관총이 발명된 뒤부터 가능해진 일이다.
그 전 18~19세기의 흑인 노예는 나름 거래를 해서 ‘사 온’ 것이었다. 그때는 총칼을 앞세워서 아프리카 땅 자체를 식민지화한 게 아니라, 노예를 사서 아프리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그 노예들은 아프리카에서 자유롭고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무슨 테이큰 찍듯이 악마 백인들에게 납치 인신매매 당해서 노예로 팔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본토에서도 이미 노예 신세이다가 유럽인에게 팔렸을 뿐이다. 마치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켰지만.. 쟤들도 주변의 이웃 부족들을 식민지로 부려먹고 심지어 인신공양까지 시켜 온 것처럼 말이다. 오로지 유럽 백인 한 놈만 절대악인 게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흑인 부족들끼리도 아웅다웅 싸움이 있었으며, 진 부족은 이긴 부족의 노예로 전락했다. 이긴 부족은 그 노예를 유럽의 무역상들에게 팔고 백인들로부터 총이나 다른 물건을 샀다. 노예들은 유럽으로도 팔려가고 미국으로도 끌려갔다.

물론 처음부터 신분이 그랬다고 해서 유럽 백인이 노예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인권 유린이 정당화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 노예들을 배에다가 싣고 수송한 방식부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인간적이고 끔찍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의 작사자 존 뉴턴이 바로 이런 노예 무역선의 선장으로 재직하다가 본업을 때려치우고 노예 제도 반대  소신을 지닌 성공회 성직자로 전향했다. 저 찬송시가 써진 게 1770년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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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의 나치 유대인 수용소 vs 노예선)

한편, 조선은 흑인이 아니라 자국민 노비가 말기로 갈수록 좀 많아졌던 것 같다.;; 도대체 그냥 쌍놈 천민이랑 노비의 경계와 차이는 무엇인지, 단순 종이나 머슴은 무엇인지 이 시점에서 용어를 좀 정리하고 싶어진다.
뭐, 이웃 일본도 근대화 이전에 영주나 무사 같은 높으신 분들 말고 쌍것들의 생활이 참혹한 것은 변함없었다. 세금 부담이 너무 심해서 오죽했으면 낳았던 아이를 도로 죽여 버릴 정도였다(마비키).

훗날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물론 나쁜짓이었지만, 최소한 일제가 고종 휘하에서 오순도순 행복하게 잘 살던 조선인들의 평안과 안녕을 파괴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더 빼앗을 평안과 안녕 자체가 별로 없던 지경이었다는 것도 생각할 점이다.;;

그리고 현대로 와서 일본군 위안부의 경우.. 일본놈들이 알바니아 트로포야 출신의 마르코라도 된 듯이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일방적으로 강제 납치한 게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당장 조선인들끼리도 여자 인권은 가히 헬이었으며, 같은 동족 포주가 그 소녀들에게 일자리니 학업이니 알선해 주겠다고 꼬드기면서 사람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 놓곤 했다. 서양의 흑인 노예 무역이 돌아간 것과 비슷하게 돌아갔다는 뜻이다.

이 쯤에서 본질적인 의문을 하나 던져 본다. 인류 역사상 노예라는 건 어쩌다가 왜 존재하게 된 것일까?
단순히 사회 조직에서 하는 일의 지위가 갑이 아니라 을인 것만으로 노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노예는 거주지 이동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가 현저히 침해받고 사생활과 사유 재산이 심각하게 제약받으며, 인생의 대부분을 남이 시키는 일만(그것도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 위주로) 해야 하면서 시세 대비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보수를 받는 비참한 사람을 일컫는다.

게다가 자기 신분이 자녀에게 세습까지 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노예로 팔아 버릴 수도 있었다. 이런...

그 반면, 오늘날은 세상에 그 어떤 막장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그 일을 언제라도 때려치우고 나갈 수는 있다. 그런데 그마저도 금지돼 있고 목숨을 걸고 탈출해야 할 정도라면 노예 지수는 수직 상승한다. 북한 주민들이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으며 해방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기본적인 자유마저 박탈당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목숨 부지하기 위해 다른 인간에게 무조건적으로 굴종하게 된 것은 먼 옛날부터 있었던 일이다. 학교 안에 불량 학생 양아치와 호구 뺭셔틀이 있는 것만큼이나.. 바람직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현상이다.

또한, 지금처럼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해지고 선조들의 많은 시행착오 역사 자료가 쌓이기 전.. 옛날엔 집안을 다 말아먹는 사고를 쳐서 나가 죽는 것 외에는 도무지 답이 없을 때.. "목숨만은 살려 준다. 하지만 너는 이제 평생 내 밑에서 일하며 죄값을 갚아라" 이것만으로도 주종 관계는 아주 간단하게 형성됐다. 전쟁에서 졌다거나, 실수로 불을 내서 마을 전체를 태워먹었거나..

예수님이 사시던 로마 제국 시절에야 당연히 노예가 있었다. 일부 용감한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다 붙잡히고 주동자는 예수님처럼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다. 먼 옛날에 한국사에서도 '만적의 난'이라는 미수 사건이 있었고 말이다.
중세 봉건 시절에는 '농노'라고 전통적인 노예보다는 약간 권한이 생겼지만, 여전히 지주에게 속박된 반쯤 노예이면서 국가에 대한 의무도 져야 하는 이상한 중간 신분도 있었다.

물론 세상일이 무작정 노예만 총칼로 위협하면서 억지로 갈아넣는다고 다 이뤄지는 건 아니다. 벤허 시절의 갤리선 노 젓기는 일자무식 노예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어렵고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전문적인 자유민 노꾼이 담당했다고 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건설도 노예가 아니라 자유 평민이 고대치고는 꽤 후한 보수와 권한을 약속받고서 참여한 거라고 한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집트에 노예 운용이 아예 없었다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피라미드가 다 지어졌으니 피라미드의 내부 구조를 아는 너희 일꾼들은 이제 죽어 줘야겠다" 괴담도 내가 알기로 괴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고 함)

노예· 죄수를 무작정 선원이나 군인이나 공작원으로 양성하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인해 영화적 과장이 아주 많이 들어가며 현실성이 별로 없다. 우리야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 징용한 일제를 나쁜놈이라고 욕하겠지만, 놈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상황이 다급해도 조선인들에게 안심하고 믿고 총을 쥐어 주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신대륙 식민지를 개척하고 거기 원주민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든 것은 앞서 언급했던 아프리카 개척보다 훨씬 전의 일이다. 그때는 기관총이 아닌 대포와 화승총만으로 원주민들의 냉병기를 꺾었던 때였다.
아프리카는 뭐랄까 유라시아 같은 구대륙도 아니고, 아메리카나 오세아니아 같은 신대륙도 아니면서 딱히 세계사에 등장하는 일도 별로 없고 존재감이 참 거시기하다.

어디까지가 단순한 종이다가 어디부터가 노비, 노예의 범주에 드는지는 판단 기준이 다소 주관적인 구석이 있다.
다만, 성경은 고대 사회에 존재하는 종(servant)이라는 신분 자체는 인정한다. slave 노예가 아니라 servant이다. 넓게 보면 현대 사회에서 월급 받는 피고용자 직원도 종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에서 말하는 "너희 주인에게 순종하라" 하는 문맥에서 말이다. 노예는 계 18:13 같은 데서나 극히 드물게 등장한다.

아프리카부터 시작해서 노예라는 주제로 여러 시대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다루게 됐다.
사람의 신분과 계층의 차이는 결국 죄 때문에(일진 양아치), 혹은 반대로 죄를 방지하고 막기 위해(공권력), 또 죄값을 갚기 위해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존재하게 됐다. 물론 그 지위를 이용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유린하는 경우도 당연히 왕창 많다. 이것이 인생이다.

이렇게 인간 사회에서 보편적인 현상을 근거로 인종의 우열을 논한다거나, 한쪽만 절대적인 선 내지 절대적인 악이라고 몰아세우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 하겠다. 현대 사회는 과거의 선조들이 겪은 시행착오들을 많이 개선해서 사회 구조와 삶의 양상을 많이 바꿔 놓긴 했지만, 양상만 바뀌었지 또 다른 형태의 노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갈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생각해 봐도 아프리카는 그 잠재성에 비해 상황이 너무 안습한 지경인 건 틀림없다. =_=;;

Posted by 사무엘

2020/12/16 08:35 2020/12/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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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6호선 역촌 역의 4번 출구로 나가면 ‘은평 평화 공원’이라는 자그마한 공원이 있다. 지하철역 출구에 곧바로 자그마한 도시공원이 꾸며져 있는 건 대전 서대전네거리역과 비슷한 느낌이다.
저기는 2010년부터 공원으로 개장했고 그 전엔 그냥 평범한 건물 부지였던 것 같다만.. 은평구에서 무슨 생각으로 공원을 만들었나 모르겠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데 말이다.

아무튼, 은평 평화 공원의 한쪽 구석에는 윌리엄 해밀턴 쇼(1922-1950).. 라는 6 25 참전용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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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대단한 집안에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한 분이었다.
일단 부모가 한국에 온 감리교 선교사였고, 저 사람을 평양에서 낳았다.
그는 한국에서 자라서 대학교까지 들어갔는데 2차 세계대전 땐 해군 장교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 뒤에 한국에서 또 6· 25 사변이 터지자 대학원 박사 학업까지 미루면서 해병대 장교로 참전했다.

1950년 9월 22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 수복 전투가 벌어졌을 때.. 이분은 녹번동.. 바로 이 일대에서 전투를 수행하다가 적으로부터 저격을 당해 전사했다고 한다. 김 재현 기관사(1923 ~ 1950. 7. 20. 대전)와 비슷한 연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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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그리고 저 사람(아들)까지 모두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호머 헐버트처럼 말이다.

“내 친구 나라 한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같이 도와주지 않고 나중에 전쟁이 끝났을 때 슬그머니 선교사로 들어가는 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요 15:13)? 공부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온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같이 적힌 약력과 소개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런 사람이 소개돼 있다는 것만으로도 은평 평화 공원은 찾아가 볼 가치가 충분하다. 우연인지 뭣 때문인지, 은평은 이름을 구성하는 한자부터가 grace & peace 굉장히 성경적인 심상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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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은 천수를 누렸으면 하버드에서 한국학 전문 연구자의 커리어를 쌓았을 것이고, 아마 그 당시 하버드에서 한국학을 개척하고 있었던 서 두수 교수(서 남표 카이스트 전 총장의 부친!) 같은 분과도 인연이 분명 생겼지 싶다. 이를 생각하면 더욱 아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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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이 완용..????)

위의 저 말은 두고두고 기억되고 영원히 감사와 존경과 칭송을 받았으면 좋겠지만...

“적이 핵이나 미사일 얘기를 할수록 우리는 더욱 강하게 평화를 외쳐야 한다.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한복판에서도 평화를 외치는 사람만이 더 정의롭고 정당할 수 있다”


잠깐 욕 좀 퍼부어야겠으니 독자 여러분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이런 하드코어 빨갱이 씨발새끼의 저주받을 암 유발 망언은 두고두고 박제되어서 영원무궁토록 규탄과 개쌍욕을 쳐먹었으면 좋겠다. 저런 새끼는 애국시민과 자유를 되찾은 동족 북한 주민들의 분노의 돌탕질에 맞아 대가리가 깨져 뒈지기를 개인적으로 간절히 바랄 뿐이다.

만약 이 땅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못해서 저런 놈이 천수를 누리고 편하게 죽고 무덤까지 만들어진다면.. 묘비에다가는 저 말이라도 꼭 새겨 넣어 줬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말하지만 온라인 공간에서 빨갱이가 아닌 다른 사유로는 결코 욕설을 노출하지 않는다. 뭐 독도는 일본땅? 저런 진짜 개씹창 망언부터 참교육 시켜 주고 난 다음에 대응해도 전혀 문제될 것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0/12/14 08:35 2020/12/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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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현장 몰카 사진

카메라라는 물건이 발명된 이래로 세상에 많고 많은 몰카가 촬영됐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진귀하고 중요한 몰카 축에 드는 사진은 바로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 근처에서 정말 목숨 걸고 몰래 촬영된 이 사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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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치 독일에 의해 고용되어 학살된 동족들 시체를 치우는 등의 뒷정리를 하던 소극적 부역자.. 일명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에 속하는 유대인들의 협조로 도촬됐다.
존더코만도는 식사와 보급은 일반 수용자보다 약간 더 좋게 받았지만, 동족을 적극적으로 괴롭히거나 밀고· 통제하지 않았으며, 용도가 다하면 역시 가스실로 가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카포 같은 급의 악질 끄나풀은 아니었다.

글쎄, 나치 수용소 내부에서 수감자들의 처참한 몰골이라든가 시체더미를 치우는 실제 사진(연출이 아닌)이나 동영상이야 물론 있다. 하지만 그건 연합국이 전쟁에서 이겨서 해당 지역의 수용소가 해방된 뒤에 연합군의 주도로 촬영된 것들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나치 독일에 의해 현업으로 돌아가고 있는 동안에..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관제 어용 기록 말고, 현장 내부의 라이브 사진이 몰래 찍힌 것은 놀랍게도 저게 유일하다고 한다.

삼청교육대에서 웃통 벗고 목봉 체조 열심히 하면서 "저희는 여기서 참교육 받으면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대본만 읊는 입소자 인터뷰 영상이랑, 거기 내부 음지에서 온갖 끔찍한 가혹행위가 저질러지는 게 몰래 카메라에 찍힌 것은.. 퀄리티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다르지 않겠는가?

이 사진들은 주변 배경을 자르고 사람이 나온 부분만 확대하고 보정을 많이 한 것이다. 더구나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촬영자와 카메라의 근처에도 나치 간부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멀리서 줌 당겨서 정말 몰래 급하게 허겁지겁 찍느라 각도와 구도는 엉망이고 초점도 흐리고.. 퀄리티는 열악함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사진이 찍히는 곳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장감과 섬뜩함이 더 느껴진다. 한 트럭 가득한 시체들을 불태우는 장면, 여성 수용자가 야외에서 나체로 가스실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

마지막 장은 도저히 피치 못할 상황에서 각도를 너무 높게 든 걸 확인도 못 하고 셔터를 누른 바람에, 사람과 건물을 찍지 못하고 하늘과 나무만 찍었다.
찍고 나서 필름은 치약 튜브 안에다 넣어진 채로 폴란드의 레지스탕스에게 무사히 전달됐다고 한다.

2. 승리의 날에 기습 키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두 방 맞고 무조건 항복했을 때..
저 괴물 같던 일제가 "드디어, 드디어" 항복했고 지긋지긋하던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고 미국 시민들은 기뻐서 난리가 났다.

길거리에 뛰쳐나와서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얼싸안고 춤추고 날뛰었다.
우리나라의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결승 진출..?? 그 분위기쯤은 저리 가라였다.
그 당시 영상 기록을 보면 무슨 미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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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J day in Times Square이라는 제목으로 남겨진 이 사진은..
1945년 8월 14일, 길거리에 나와 있던 한 간호사가 근처의 어느 생면부지의 해군 수병에게서 기습 키스(!!)를 당하는 순간이 절묘하게 기자의 카메라에 담긴 것이다. (누군지는 검색해 보면 다 나옴ㅋㅋ)
저 VJ는 비디오자키 따위의 뜻이 당연히 아니고 victory over Japan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저 두 사람은 커플이 아니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특히 요즘 같으면 저런 짓은 영락없이 성추행 성희롱이고, 여자 쪽으로부터 귀싸대기가 날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저 당사자 아가씨는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인데, 그리고 여느 괴한도 아니고 지금까지 조국을 위해 정말 고생했던 군인 아저씨인데" 하는 생각으로 눈 딱 감고 키스를 받아 줬다고 한다. 눈을 감은 채, 저 남자가 누군지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 간호사는 저 사건을 마음속에만 묻어 놓은 채로 훗날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저 간호사가 자신이었다고는 한 1970년대가 돼서야 언론에다 털어놓았다.
하지만 기습 키스를 날린 수병이 누군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 수병은 어차피 저 아가씨에게만 키스를 날린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_=;;;

Posted by 사무엘

2020/11/30 19:35 2020/11/30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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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처럼 컴퓨터의 문자 인코딩이 유니코드로 천하통일이 되기 전엔 국내에서는 2바이트 완성형과 조합형 한글 코드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완성형은 94*94 격자 모양의 단순하고 국제 규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인코딩돼 있었지만 한글의 구성 원리를 무시하고 한글을 난도질했다는 비판을 떠안고 있었다.

완성형은 “한글 vs 비한글”을 구분하고 처리하는 데 유리했다.
그에 비해 민간에서는 “한글 글자 vs 낱자”의 처리가 더 용이한 조합형이 훨씬 더 대중적으로 쓰였다. 그도 그럴 것이 640KB 기본 메모리를 1KB라도 더 확보하려고 목숨 걸던 시절, 메모리 모델이 어떻고 far 포인터가 어떻고 이러던 시절에.. 한글 처리를 위해서 2350자 테이블을 내장하고 다닌다는 건 성능과 효율로나 민족 정서(?)로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명목상 국가 표준은 완성형이었기 때문에 마소 역시 도스와 Windows의 한글판을 전적으로 완성형 기반으로 만들었다. 완성형은 두벌식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에 소프트웨의 한글판을 필요 이상으로 더 무겁게 만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다만, 이건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표준을 이상하게 만든 게 잘못이지 마소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Windows 3.1이야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한글 IME로 똠, 펲 같은 글자가 입력되지 않았으며, 또ㅁ, 페ㅍ이라고 글자가 풀어졌다. ‘썅’은 2350자에 속해 있는데 중간의 ‘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썅’까지 덩달아 입력할 수 없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쌰’를 입력하면 ‘ㅆㅑ’라고 잘 갈라지는데, 두벌식에서 ‘있’ 다음에 ㅑ를 입력하면 ‘이ㅆㅑ’가  되지 않고 뭔가 올바른 동작이 나오지 않았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이런 것들이 한글 입력기, 특히 특정 문자 입력 제한이 걸린 두벌식 입력 방식을 구현할 때 고려해야 하는 복병이다. 날개셋이야 이 분야 전문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도 다 정상적으로 처리해 준다.

그럼 차기 버전인 Windows 95는 상황이 어땠을까?
Windows 95는 오늘날 세계 표준 문자 집합 겸 인코딩인 유니코드, 특히 유니코드 중에서도 버전 2.0이 한창 제정되고 있던 와중에 개발되고 먼저 출시되었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수 년 전 유니코드 1.x 시절에는 완성형 2350자만 그대로 제출하는 삽질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유니코드 2.0에서 문자 체계를 싹 재정비하는 인류 역사상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을 때.. 한글을 11172자 모두 순서대로 등록하려는 과감한, 역사적인 계획을 세웠다. 그래야 글자 코드값으로 자모 정보를 쉽게 추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스타에다 비유하자면 종족 밸런스를 앞으로 다시는 바꾸지 않는 1.08 패치와 비슷한 타이밍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세계를 설득해야 했다.
다른 나라들은(특히 일본과 중국도) BMP 영역의 1/5 가까이를.. 그것도 사용자가 1억도 채 안 되는 언어의 고유 문자로 싹 도배하려는 한국을 고깝게 보고 이의를 제기했다.
유니코드 회의에서 누가 발언권을 얻으려면 한화로 억대에 달하는 회원 등록비도 많이 내야 하는데, 이런 비용을 한컴 같은 기업에서 많이 후원해 줬다. 저 때는 삼성전자도 훈민정음 워드 같은 프로그램이나 간간이 만들었지, 지금 정도로 IT계에 세계구급 영향을 행사하는 기업이 아니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한글 11172자는 1996년 7월, 유니코드 위원회의 승인을 받아서 성공적으로 등재되었다. 이거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것도 1981년 서울 올림픽 바덴바덴의 기적에 맞먹는 외교 승리라고 여기고 칭송한다. 올림픽은 52:27의 압승이라도 했지만 11172자 등재는 찬성이 반대를 한 표 차이로 정말 간신히 꺾은 거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Windows 95는 유니코드 2.0이 정식으로 발표되기 미묘하게 약간 전에 출시되었다는 것이다. 한글판도 1995년 11월 말에 출시됐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종 글꼴과 코드 변환 테이블은 이미 유니코드 2.0을 기준으로 맞춰져 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유니코드 2.0에다가 한글을 2350자가 아니라 11172자를 몽땅 집어넣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했다. 유니코드가 아닌 기존 2바이트 인코딩 중에도 한글 11172자 표현이 가능한 놈이 있어야 했다.
그럼 Windows가 처음부터 조합형 코드로 개발됐으면 좋았겠지만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리 되지 못했고.. 결국은 기존 완성형에다가 지저분한 독자적인 편법을 동원해서 비완성형 한글을 끼워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 이름도 유명한 확장완성형, 일명 CP949 인코딩이다.
KS X 1001은 한글 2350자, 한자 4888자 등을 포함하는 그 2바이트 완성형 문자 집합/코드이고, KS X 1003은 역슬래시를 원화로 대체한 그 한국 특유의 1바이트 영문/숫자 아스키 문자 집합이다. 이 둘을 합쳐서 EUC-KR이라고 부르고, 여기에다가 확장완성형까지 추가하면 CP949가 된다. 집합 관계를 정리하자면 (KS X 1001 ∪ KS X 1003) = EUC-KR ⊂ CP949이다.

(참고: KS X 1002는 완성형 형태로 현대 한글, 옛한글, 한자를 추가로 정의하는 규격이다. 하지만 KS X 1001과 병용하는 인코딩 규칙이 제정되지 않아서 컴퓨터에서 실제로 쓰인 적은 없는 캐잉여이다. 얘는 애초에 유니코드 1.1에다가 글자를 추가로 등록할 근거를 마련하려고 어거지로 만든 문자 집합에 지나지 않는데, 이제는 유니코드 1.1 자체도 오래 전에 흑역사가 됐으니 더욱 의미와 존재감이 없다.)

이렇듯, 확장완성형이라는 건.. 비록 처음에 첫단추를 잘못 끼우긴 했지만 뒤늦게 유니코드 2.0에라도 한글을 11172자를 순서대로 다 집어넣기 위해서 도입한 2바이트용 타협 절충안이었다. 마소에서는 한국 편을 들면서 도와 주면 도와 줬지, 최소한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든 건 절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당시에는 마소에서 완성형에다가 그보다 더한 확장완성형까지 집어넣어서 한글을 난도질한다고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심지어 한컴에서도 아래아한글 도움말 및 제품 광고에서 이 괴담을 어느 정도 활용하고 부추겼다.

왜 한글을 난도질 하느냐 하면, 확장완성형은 이미 2350가 조밀하게 순서대로 배치된 건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머지 틈새에다가 비완성형 8822자를 집어넣는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겉보기로는 11172자가 모두 배당되지만 문자의 코드값 순서가 그 문자의 사전상의 배열 순서와 일치하지 않게 된다. 사전 순 정렬을 하려면 코드값을 별도로 보정을 해야 한다.

물론 코드값만으로 문자를 정렬할 수 있는 게 가능하지 않은 것보다는 더 직관적이고 깔끔하고 낫다. 하지만 오늘날 유니코드는 시간 차를 두고 뜬금없이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추가된 문자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특히 한자~!!), 거시적으로 봤을 때 코드값만으로 문자들을 정렬하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고 무의미해져 있다.

뭐, 이것도 논란이 다 끝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니까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 2바이트 한글 코드만 단독으로 생각하던 시절에 확장완성형이 답답하고 지저분하게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그리고 마소는 훗날 IMF 때 경영난에 빠진 한컴에다가 돈줄을 대 주는 대신 아래아한글의 개발을 중단시키려 했던 바 있다. 그러니 확장완성형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 실드를 감안하더라도 마소에 대한 국민 감정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 시절 Windows 95는 유니코드 2.0의 정식 도입을 선도하면서 온전한 한글 11172자의 입출력이 가능해지려는 과도기에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참고로 95 말고 Windows NT는 도스 짬뽕이던 기존 Windows와 달리, 1993년 첫 버전부터 2바이트 wide char 유니코드 기반이었다. 얘도 유니코드 2.0이 정착할 무렵이 돼서야 본격적으로 정식 한글판이 나올 수 있었다. 3.51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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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NT 3.5 한글판의 ‘베타 버전’ 평가판. 이건 Windows NT의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한글판으로, 정말 엄청난 희귀 레어템이다. 마치 Windows 2.x의 듣보잡 한글판처럼 말이다.

저 화면에서 한글 글꼴은 기존 Windows 3.1의 돋움체(큐닉스 제작) 8포인트이다. 하지만 영문은 정체를 모르겠다. W와 i의 폭이 다른 가변폭인 걸 보니 같은 돋움체의 영문은 아닌데, Arial은 물론이고 심지어 후대에 등장한 Tahoma나 Verdana까지 그 어떤 영문 글꼴도 저 크기에서 9나 5의 획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저 영문 모양이 내가 보기에 전혀 낯설지는 않다.
마소에서 개발한 1990년대 옛날 프로그램의 스플래시 화면 내지 About 대화상자에서 Copyright 문구가 저런 스타일의 글꼴로 표시된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Windows NT 3.51의 정식 한글판은 3.51의 특성상 Windows 3.1과 같은 구형 UI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한글 글꼴은 이미 Windows 95 한글판과 동일한 한양 시스템 글꼴로 갈아탔다.
Windows NT의 역사에서 유니코드 1.1 방식 한글이 존재했던 적은 내가 아는 한 없다. 만에 하나 있다면 그건 조합형 코드를 잠깐 썼었다고 전해지는 MS-DOS의 초창기 한글판만큼이나 완전 전설 속에나 존재하지 싶다.

이렇게 95건 NT건 온전한 11172자짜리 유니코드 2.0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95의 한글 IME를 써 보면.. 구버전인 Windows 3.1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2350자밖에 입력할 수 없었다. 다만, “있+ㅑ”일 때는 ㅆ이 뒷글자로 넘어가지 않도록 로직이 약간 개선돼 있었다.;; ㅎㅎ

사실, Windows 95의 한글 IME는 확장완성형을 기반으로 11172자를 모두 입력하는 기능도 구현은 돼 있었다. 하지만 그걸 기본적으로는 봉인해 놓았으며, 사용 여부를 별도의 유틸리티를 통해 따로 지정할 수 있었다!
바로, C:\Windows 디렉터리에 있는 iso10646.exe라는 30KB짜리 자그마한 프로그램이다. 역시 괜히 과도기였던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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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 UI에는 유니코드니 완성형이니 같은 말은 없고 그냥 "ISO 10646 사용 여부"가 전부였다. 유니코드의 문자 집합을 가리키는 표준 규격 명칭이 ISO 10646이기 때문이다.
전체 사용 아니면 특정 프로그램에서만 사용.. 이런 걸 지정해 주면 타 프로그램에서 똠쌰 등등의 글자를 입력할 수 있었다.

신기한 것은 Windows용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도스용 mshbios의 한글 입력기까지 이 설정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설정값을 레지스트리가 아니라 파일에다 저장했던가 보다. 아니면 도스에서도 레지스트리 파일에 저수준으로 접근을 했던지..

확장 한자의 사용 여부를 옵션으로 지정하는 것처럼 2350/11172자 입력 범위도 그냥 IME의 옵션으로 지정하면 됐을 것 같은데 굳이 별도로.. 제대로 문서화되지도 않은 프로그램에다 저렇게 꽁꽁 숨겨 놨다.
부작용을 어지간히도 의식했는지 각종 프로그램별로 입력 범위를 달리 지정할 수 있게 신경을 썼다. 즉, 여느 평범한 IME 옵션이 아니라.. 날개셋으로 치면 응용 프로그램별 동작 보정 옵션과 비슷한 걸로 취급한 것이다.

훗날 MS Office 97이 나왔고.. 그 중 Word는 단품으로 따로 팔기도 했다.
마소 역시 한컴 진영의 조합형 한글 마케팅을 많이 의식했는지, 신문 광고에서 조그맣게.. "우리 마소 제품에서도 똠방각하 펩시콜라 찦차를 입력할 수 있습니다." 문구와 함께, iso10646 프로그램 사용법을 소개해 놓기도 했었다.

본인은 학창 시절에 그 광고를 직접 본 기억이 있다.
지금도 구글에서 iso10646.exe 라고 검색해 보면 옛날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마소의 전략은.. 요런 프로그램을 몰래 집어넣은 뒤, 확장완성형이 계속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Windows 95는 그딴 거 지원한 적 없다고 발뺌 하면서 2350자 기존 완성형에만 머무르면 될 것이고,
한글을 2350자밖에 입력 못 한다고 욕먹는 게 더 크면, 저 비장의 프로그램을 음지에서 양지로 끄집어내려는 속셈이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해 간보기 전략이다.

그러다가 Windows 98부터는 이런 간보기가 없어지고 그냥 모든 프로그램에서 확장완성형까지 활용한 11172자 한글 입력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Office 2000과 함께 옛한글 입력기가 도입됐을 때는 이제 마소의 제품이 옛한글의 표현 능력도 아래아한글 97과 한컴 2바이트 코드를 추월하게 됐다.

이상이다. “라떼는 말이야” 같은 얘기가 좀 길어졌다.. ^^
25년 전, Windows 3.1에서 95로 넘어간 것은 정말 엄청난 격변이었다. 하지만 Windows 95와 98 사이에도 컴퓨터 환경은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가정용 PC의 평균 램 용량이 4~16MB대이던 것이 그 짧은 기간 동안 32~128MB로 순식간에 뻥튀기 됐다. PC 규격도 이것저것 많이 바뀌고.. 또 무엇보다도 이 사이에 유니코드 2.0이 제정되었다. 운영체제 차원에서 UTF-8 인코딩이 직접 지원되기 시작한 최초의 Windows가 바로 98이다.

Windows에서 완성형 2350자에 구애받지 않고 한글 입력이 가능해지기까지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Windows 98은 현대 한글이 완전히 해금됐고, 지난 Windows 8 (2012)부터는 옛한글까지 해금됐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그 사이의 XP는 입력 프로토콜이 IME에서 TSF로 넘어간 과도기였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옛한글 말뭉치를 엄청나게 많이 구축한 21세기 세종 계획은 이것보다 미묘하게 일찍 진행된 바람에 비표준 한양PUA 방식으로 결과물을 산출해 버렸으니 타이밍이 안습했던 구석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11/09 08:35 2020/11/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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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할배에 대한 밴 플리트 장군의 인물평 / 증언

본인은 맹목적인 사대주의를 권장· 조장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국(특히 미국)에서 좋은 평판과 예우를 받는 사람이나 물건은 실제로도 매우 훌륭한 인물이거나 우수한 물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더 깍듯이 받들어 모시던 백 선엽 장군이라든가.. 이 글에서 다룰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건국 대통령 할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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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ident Syngman Rhee is worth his weight in diamonds. That describes him in a nutshell. (리 승만 대통령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자기 체중만 한 다이아몬드의 값어치가 나가는 인물이다.)

저 문구를 오래 전부터 어디선가 보긴 했었는데.. 출처를 찾아보니 바로 나온다. 주작이 아니었다~! ㅠㅠㅠㅠ

  • Christian gentleman
  • his whole life has been devoted to the liberation of his country
  • the true meaning of a long and selfless life devoted solely to the welfare of other people -- Korean people) 오로지 동족의 안녕을 위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인생을 통째로 바친 위인
  • great patriot 위대한 애국자
  • the immortal Messiah of Korea 한국의 구세주
  • 한국의 마하트마 간디
  • I deem it a very great honor to be called friend 내가 할배의 지인이라는 사실이 영광스럽다.
  • has so much wisdom ... it makes us feel like small boys around him. 워낙 노련 현명한 사람이어서 우리가 그냥 허접 쪼렙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고문관'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유래됐구나~!! ㅋㅋㅋ Komunkuan

"세계에선 극찬하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을
우리나라만 독재자라고 쌍욕한다.
더 심각한 건,
현재 존재하는 북한 김 정은에 대해선
평화적으로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한다.
악마 김 정은보다 자국 건국 대통령을
죽일 듯 흥분하는 나라
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난 이런 착한 독재가 있다면 단임 직선제 그런 거 없어도 되니 독재 치하에 좀 있고 싶다. 북괴 같은 독재 말고.

할배 대통령에 대해서 꼬리처럼 따라다니는 매우 저열한 중상모략 누명 낙인을 둘 꼽자면 단연 (1) 친일파 청산(?) 문제와 (2) 6 25 개전 초기의 피난과 한강 다리 폭파 타이밍 문제이다.
이에 대해 본인은 (1) Windows 95가 램 4~8MB짜리 PC에서 도스 호환성까지 맞추면서 겨우 돌아가기 위해서 16비트 코드를 재등용했던 것하고 완전히 똑같은 현상이다. 조 병옥, 이 인 같은 애국지사도 괜히 반민특위를 해체시킨 게 아니다.

(2) 방송국의 피랍 등 여러 착오들이 겹쳐진 불운이었지만 악의적인 짓은 절대 아니었고 저 사람은 자기 고국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는 것 위주로 변명과 실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중공 입국을 고의로 막지 않아서 우한 폐렴 초기 방역을 완전히 망친 현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진영논리 정치병자라면 6 25 개전 초기의 실책도 비판할 자격이 없다.

이것들은 반일정신병과 합쳐져서 사람들 정신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망상 정신병이며 망국병이다.
사람 뇌를 컴퓨터에다 비유하자면 저건 친중종북이라는 악성코드가 침투하는 주요 보안 취약 지점이다.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을 반박해 주고 헛소리들을 잠재워야 한다.
좌좀좌빨의 잘못되고 왜곡된 역사관과 가치관의 거의 전부가 할배에 대한 증오심에서 시작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 금별과 똥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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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정말로" 밑에 것들이 지휘 재량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극도로 잘못했거나 자질이 없었을 수도 있다.
군대에서 탈영이나 자살 사고 났다고 닥치고 다짜고짜 무조건 윗대가리 모가지만 쳐서 정말 유능하던 장교의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은 문제가 있는 조치이다.

하지만 당사자가 직접, 습관적으로 대놓고 변명이나 틱틱 하면서 아랫사람 탓 핑계 늘어놓는 것.. 짧은 시간 동안 그런 패턴이 계속 반복되는 건.. 우연이나 예외가 아니다. 옛날과 비교했을 때 명백하게 유의미한 변화이다. ---
"높으신 분들이 질이 점점 떨어지고 인성이 타락하고 있다는 것" 말이다.

북괴에서 사격 과녁에 얼굴이 그려지기까지 했던.. 참 군인 금별이 계시던 시절이 너무  그립다.
"니가 중대장이구나? / 고생 많다. 긴장하지 마. 내가 그리 겁나냐? / 적이 도발을 하면.. '쏠까요' 이렇게 묻지를 마. 일단 닥치고 그냥 쏴. 무자비하게 응징해서 도발할 엄두를 못 내게 하라고. 뒤에 책임은 내가 진다." (☞ 그 당시 동영상. 이를 두고 평소에 늘 실망만 하던 중대장이 바짝 쫄아서 긴장했다는 개드립이 나돌았다. 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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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 방역? 과연?

(1) 1950년대 말, 독일에서 '탈리도마이드'라고 임신 여성의 입덧을 기가 막히게 가라앉혀 주는 약을 선보였다.
효과 탁월하고 독성 없고 동물 대상 실험에서 부작용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엔 정말 기적의 발명품으로 여겨졌지만..
알고 보니 얘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산모는 괜찮은데 정작 배 속 태아가 약의 성분 때문에 사지의 혈관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사지가 짤막 뭉툭 오그라든 기형아가 된 것이다!!

이 약 때문에 전세계에서 수천 명에 달하는 기형아가 태어나 버렸지만 그 시절 미국에서는 피해 사례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전혀까지는 아니겠지만..). '프랜시스 켈시'라는 약학자 출신의 FDA(미 식품의약국) 관료가 인체 임상실험 근거 불충분을 이유로, 온갖 집요한 외압을 뿌리치고 이 약의 수입 판매를 끝까지 거부·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분의 소신 판단이 미국에서 기형아 대재앙을 예방했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이분은 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훈장까지 받게 됐다.

(2) 더 옛날 태평양 전쟁 당시에.. 미국의 해군 정보장교이던 에드윈 레이튼 소령은 일본군이 여러 정황상 진주만을 공습할 것이라고 수차례 보고하고 건의했으나, 상부로부터 의견이 묵살당했다. 결국 진주만은 예고대로 처절하게 털렸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결정권자이던 상부의 책임이지, 레이튼 소령의 잘못은 아니다. 그래서 태평양 전선 사령관이던 허즈번드 킴멜이 책임을 지고 짤렸다.

그러나 레이튼 소령은 "그때 상부에 더 강하게 건의하고 설득했어야 했다. 나는 건국 이래 가장 처절한 정보전 패배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며 자신을 자책했고.. 더욱 분발하여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분석했다. 그래서 훗날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언제쯤 어디로 쳐들어올지를 거의 점쟁이 수준으로 정확하게 알아 맞혀서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3) 위의 두 사람은 미국의 사례이구나.
자, 그럼 다음으로 지금 우리나라의 질병본부장을 맡아 왔고 이젠 청장으로 승격도 된 그분은..
정치색이나 악의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성실한 성격에 고생 많이 하고 있어 보이긴 한다. 세금 아까운 어지간한 먹튀 관료들보다야 나은 건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대기업 인사고과로 치면 B 정도인 평타 월급값만 하고 있는 것이지,
무슨 특출난 선견지명, 희생, 헌신이라든가 천재, 기적 같은 단어로 수식해야 할 영웅 행적으로까지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저 1, 2번의 인물이 막아낸 것과 이뤄낸 것을 같이 비교한다면 더욱 말이다. 심지어 '악의 평범성'의 범주에나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는데, 관련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 정 은경과 아이히만)

4. 로스쿨 교수 출신의 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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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중년 여인은 구치소에 갇혀서 아픈 몸을 이끌고 주 4회 꼬박꼬박 재판을 받았구만 저년은 무슨 엄살이냐?
그리고 성경 이후로 이 정도로 완벽한 교리적 적용과 문자적인 예언 성취는 처음 본다. 설마 저것도 영감 받아서 기록됐나...???

난 진짜 많이도 안 바라고..
저 악의 무리들이 딱 심은 대로만, 자기들이 남을 판단하고 남에게 행했던 대로만 정확하게 거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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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가 무슨 군대를 불법으로 빠졌나, 로스쿨 의대 공기업 대기업 같은 본격 신분 상승 코스에 엄마 아빠 찬스 특혜로 들어갔나?
원래부터 등골 브레이커 종목이고 월급쟁이 서민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듣보잡 승마 정도나 기업 협찬 받아서 했던 게 뭐가 그리 잘못인가?

기소조차 못 할 혐의를 가지고 온 국민이 애꿎은 유부녀를 마녀 사냥을 하고 해외 인터폴에 수배까지 하고 얼굴 다 까고 수갑까지 채워서 언론에 대서특필까지 하게 만든 새끼들이... 자기 비리에 대해서는..?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
내가 좌빨좌좀 대깨문 부류를 극도로 혐오하며, 죽여야 한다는 급의 극언까지 불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 내로남불 위선이 때려죽이고 싶도록 싫어서(악한 것): 한 70%
    최숭실 vs 조둑 애미추, 북괴 중공 vs 일본 미국.. 잣대가 전혀 일관되지 않음
  • 사상이 옳지 않고 잘못됐으며, 거짓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틀린 것): 약 25%
    우리나라 근현대사 왜곡, 반일 정신병, 동맹과 주적을 서로 뒤바꿔서 인식
  • 나와 생각이 다른 것 자체 때문에 싫은 것(다른 것): 5% 미만

반대편도 비리 저지르고 위선적이기는 마찬가지라고? 말 잘했다. 그러면 네놈들도 똑같이 대통령직 짤리고 교도소 가면 된다. 공평하게 동일한 취급 받으면 나도 이런 글 안 쓴다.
틀린 것만 있으면 나도 정중하게 반박만 하고 말지, 감정적인 반응까지 하지는 않는다.

저 철면피 인간 악마들이 자기들이 입으로 씨부렸던 것, 남에게 들이댔던 잣대를 이제 그대로 되돌려받게 해야 한다는 말(주장, 생각)은.. 악한 생각이 전혀 아니며 정치 편향적인 발언도 절대 아니다.
오히려 음주운전 교통사고 가해자에게 유족들이 엄벌을 탄원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봐야 한다!

미국에서 평소에 민간 화재 보험 안 들고 기고만장하다가 자기 집에 불 나니 보험 조합에서 불 안 꺼 주고,
"보험료 몇 배라도 줄 테니 제발 불 꺼 줘 plz" / "안 돼. 그런 요청을 들어 주면 평소에 아무도 보험을 안 들어 놓게 됨."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악하거나 비인도 가학적인 사고방식인가? 그게 전혀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거의 똑같은 논리 내지 사고방식은 성경에도 있다. 잠언 1장 뒷부분 말이다. 하나님도 남을 조롱하고 비웃을 줄 아신다.
아니, "살아 있을 때 복음 안 받아들이면 죽어서 지옥"이라는 기독교의 그 시스템 자체도 철저하게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5. 군함도의 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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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군함도 강제 징용 조선인의 애절한 낙서라고 전해지는 이 그림 말이다.
실상은 이 승복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든가 성경의 요한의 콤마(요일 5:7), ‘없음’ 구절 따위가 아니라, 이런 문구야말로 진짜로 “후대”에 “추가”된 주작이다.

“이 낙서는 조선총련 산하 단체인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 한일수교에 대한 반대 운동의 일환으로 1965년에 제작한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를 촬영하는 가운데 연출된 것이다.
이 영화에 강제연행의 흔적을 담기 위해 제작진 4명이 치쿠호 탄광촌에서 현장 촬영을 했다. 그때 폐허가 된 징용공 합숙소에서 제작진 가운데 녹음을 담당한 여성이 나무를 꺾어 벽에 문제의 낙서를 새긴 것이다.
위조 사실을 상세히 밝힌 西日本新聞의 취재에 대해, 영화 제작진 가운데 한 사람은 당시 폐허가 된 합숙소에서 촬영할 것이 없어서, 제작진이 모두 합의하여 낙서를 새기도록 했으며, 부드러운 필체로 하기 위해 여성에게 쓰도록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쉽게 말해 저건 진실성 신뢰성이 로스웰 외계인 해부 필름의 그것과 동급이라는 뜻이다!!

  • 백범일지의 허위 주작 의심 기록,
  • 청산리 전투의 전과 주작 의심 사항
  • 유 관순 열사의 진짜 사인
  • 만주에서 심지어 일본군이 조선인을 빨갱이들로부터 보호해 줬던 사실

이런 것들도 알 만한 사람들한테는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만천하에 다 밝혀져야 한다.
지금은 무려 2020년이다. 아직까지도 거짓 주작까지 서슴지 않는 미개하고 저주받을 반일 정신병은 이 땅에서 제발 좀 근절되고 추방돼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10/20 08:34 2020/10/20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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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0여 년 전, 찰스 린드버그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

요즘 An-2니 세스나 172니 하는 경비행기들은 항속거리가 대체로 1000km대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찰스 린드버그는 무려 1927년에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로 직접 마개조한 붕붕이 경비행기를 조종해서 대서양을 무착륙 직통 횡단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뉴욕에서 파리까지는 직선 최단거리만으로도 무려 5800km를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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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속 300km 정도 될까..? 딱 KTX 열차의 주행 속도로 나아가는 비행기를 꼬박 33시간 동안 혼자서 한숨도 안 자고 조종했다. 한 순간도 조종간을 놓지 않고, 밥도 안 먹고 용변도 그냥 제자리에서 해결하면서 근성으로 날아갔다.. (☞ 관련 자료)

그는 1920년대 기술로 만들어진 가냘픈 경비행기로 초장거리 무착륙 비행을 하기 위해, 닥치고 기체의 무게를 줄이고 연료를 무조건 많이 꽉꽉 채워넣고, 기계 시스템을 최대한 '신뢰성' 있게 꾸미는 데 목숨을 걸었다.
그래서 일체의 편의장비를 제거했다. 엔진은 단발로 편성하고, 교대 운전도 포기하고 자기 혼자 타고, 고도계 속도계 오토파일럿, 무전기, 전등, 비상 탈출용 낙하산 전부 없앴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경마 기수 수준으로 살 빼고 체중을 줄였다.

아문센이 1910년대 기술로 남극점까지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기 위해 체면 따위 마다하고 개썰매와 개고기까지 적극 활용했으며, 1940년대에 둘리틀 특공대가 항공모함에서 함재기가 아닌 뚱뚱한 육군 폭격기를 이륙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다 떼어내고 눈물겨운 최적화를 한 것과 같은 급의 노력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린드버그는 파리에 잘 도착했다. 환영 인파들에게 간단히 답례를 한 뒤, 그는 그대로 탈진했다. 다 때려치우고 곧장 근처 호텔에 가서 방 잡고 잠부터 잤다. 비행 시간만 33시간 반이고, 자기 자신은 거의 50시간이 넘게 잠을 안 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으로 귀환할 때는 비행기째로 미군 항공모함에다 싣고 그냥 배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1920년대엔 한국인 중에도 안 창남, 신 용욱 등의 비행기 조종사가 최초로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동양에서 이제 막 파일럿이 배출될 정도이면 서양에서는 더 앞서가서 저런 엄청난 똘끼를 발산한 사람이 나온 셈이다.
무모하고 위험한 짓을 한 대신, 그는 지금 같은 복잡한 비행 계획 신고, 관제 교신에 착륙료, 영공 통과료 지불 따위 없이 아무도 없고 아무의 통제도 받지 않던 하늘을 최초로 날 수 있었다. 그야말로 무한한 자유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은 파리에 도착해서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착륙 지점을 찾는 심정이 어땠을까? 아폴로 우주선이 처음 보는 달 표면 지형을 내려다보면서 착륙 지점을 찾는 것과 비슷했지 싶다~!

2. 20세기 전반과 후반의 비행기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아직..

(1) 로켓 엔진이 없었고 미사일이라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에서 전함을 격침시키기 위해 가냘픈 함재기들이 폭탄을 싣고 직접 날아가서 급강하 폭격을 하거나.. 해수면 근처까지 하강해서 어뢰를 떨궈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힘든 원시적이고 위험천만한 기동이지만, 그 시절엔 통상적인 해전이 항공모함 함재기 교전으로 바뀐 것만 해도 공상과학 느낌이 들 정도로 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미사일이 없으니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도 미군의 폭격기가 현장까지 친히 찾아가서 떨구고 갔다. 버튼 하나 누르면 자동으로 핵 미사일이 발사되는 것 따위는 그때 없었다.

그리고 지상이나 수면의 목표물이니까 위력이 강한 폭탄이지, 높이가 자신과 대등한 비행기끼리는 여전히 기총사격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도 옛날에는 이것만으로도 공중전을 벌여서 적기를 잡았다.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만 해도 항공 이동 중에 미군의 습격을 받았으며, 기관총에 벌집이 돼서 전사했다.

(2) 사실은 아직 제트 엔진도 없었다. 독일에서 말기에 간신히 개발에 성공해서 잠깐 투입했던 물건을 제외하면 이때 활약했던 모든 비행기들은 아직 피스톤 왕복 엔진 기반의 붕붕이였으며 프로펠러기였다.

그리고 초음속 비행이라는 것도 전무했다. 그런 것들은 다 종전 후에 등장하고 가능해졌다. 그로부터 몇 년 되지도 않아 6· 25 사변 때 곧바로 P-80 같은 미군 최초의 신형 고성능 제트 전투기가 나타났으니.. 그 시절 사람들이 ‘쌕쌕이’라고 부르며 신기해할 만도 했다.

비행기에서 제트 엔진의 등장은 열차가 증기 기관차에서 디젤이나 전기 기관차로 바뀐 것만큼이나 큰 혁신이었다. 등장 시기도 서로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열차가 좀 더 먼저) 20세기 중반 정도로 비슷한 편이다.

오늘날은 비행기고 배고 미사일이면 다 끝나는 것 같다. 그리고 전투기들이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오히려 2차 대전 시절 같은 툭탁툭탁 공중전이 벌어질 여지가 없어진 감이 있다.

3. 이스라엘의 일란 & 아사프 라몬 국제공항

바로 1년 반쯤 전, 2019년 1월에는 이스라엘의 남부에서 '일란 & 아사프 라몬 국제공항'이라는 커다란 공항이 개항했다. 넓은 땅을 찾다 보니 간척지나 인공섬이 아닌 더운 사막에 최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공항이 지어졌다.

이 공항은 명칭에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의 이름이 부여된 게 인상적이다. 저건 친형제나 부부의 이름이 아니라 부자(아버지 아들)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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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란 라몬은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이스라엘이 배출한 최초의 우주비행사였으나.. 2003년, 컬럼비아 호 우주왕복선 공중분해 사고 때 순직했다. 이때는 이스라엘 전국민이 슬퍼하면서 추모하고 난리가 났다.
다음으로 아들인 아사프 라몬은 부친을 따라 공군 조종사의 길을 갔는데.. F-16 훈련 비행을 하던 중 추락 사고를 당해 2009년, 겨우 20대 초반의 나이에 순직했다.

부자가 나란히 나라를 대표해서 항공우주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순직했으니 이들의 이름은 공항의 이름으로 매우 적절하게 쓰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라몬(Ramon)'이라는 명칭은 비록 어원은 전혀 다르겠지만 필리핀의 옛 대통령도 떠오르게 한다. 라몬 막사이사이.
매우 공교롭게도 이 사람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순직했고, 공항 이름에 쓰여도 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드골 국제공항, 케네디 국제공항..)

세상에 재임 중에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은 국가 원수가 세계적으로 얼마나 되겠다 궁금했는데.. 찾아 보니 생각보다 많다. (☞ 링크) 위키백과가 별 걸 다 정리해 놨다.;;

4. 보잉 사

보잉 사는 초창기엔 지금 록히드 마틴이 그러는 것처럼 방산업체로서 군용기의 인지도가 더 높은 기업이었으며, 먼 옛날엔 심지어 선박도 만들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여객기 제조의 넘사벽 명가로 잘 자리잡은 데에는 경영자가 비행기 시장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게 크게 기여했다. IT 업체에다 비유하자면 처음엔 SI 외주 개발이나 정부 과제만으로 먹고 살다가.. 온라인 게임 하나 자체 개발해서 초대박을 터뜨린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격이다. 닥치고 비행기를 만들기만 한 게 다가 아니다.

군용기를 만들던 노하우를 살려서 명작 707로 숨통을 튼 뒤, 삼발기 시절에 727, 그리고 대형 점보 여객기가 각광받을 때 747, 적당히 작은 중거리용으로 737, 나중에 여객기의 트렌드가 2발기로 다운사이징 될 때 777로 시장을 적절히 잘 공략했다.

옛날에 초음속 여객기라는 도박이 시도되던 시절에는.. 같이 개발하던 747을 언제든지 화물기로 개조할 수 있게 대비를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주판알을 튕겨 보니 초음속기는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게 명백해지자, 개발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손 뗐다.

콩코드를 굴리던 영국과 프랑스는 비록 체면과 명성은 얻었지만, 기체를 처음 예상한 것만치 다 생산하지도 못하고 적자 때문에 많이 고생해야 했다.
그 반면 아음속기 747은 1970년대에 여객과 화물에서 모두 흥행 대박을 냈다. 석유 파동 시국에 경제적인 아음속기가 옳은 선택이었음이 더 명백해졌다.

훗날 유럽의 에어버스는 보잉 747보다 더 큰 A380을 내놓으면서 크기면에서 747을 추월했다.
하지만 21세기는 초대형 여객기, 더 나아가 4발기의 시대 자체가 저물고 있었다. 결국 A380도 콩코드와는 다른 이유로 인해 처음 예상 분량만치 생산을 못 하고 단종되게 됐다.
보잉 사는 오랜 역사에 비해 이런 식으로 시대를 잘못 읽은 삽질이 별로 없이 경영을 잘 해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20/10/17 19:35 2020/10/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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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도의 변화 추이

1. 수인분당선

지난 9월 12일에는 우리나라 철도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이벤트가 하나 발생했다. 바로 수인선이 전구간 복선 전철(시설)로 완공되었으며, 곧장 분당선과 연결되어 수인분당선이라는 이름의 수도권 광역전철(운행 계통) 형태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의중앙선의 사례와 비슷하다.
원래 용산-성북 국철이라고 불리던 1호선 짜끄레기 지선(?)이 중앙선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색깔이 옥색으로 바뀌고 덕소, 팔당, 국수.. 지금은 양평을 넘어 용문까지 정말 엄청나게 길어졌는데.. 그게 2009년부터 DMC/서울 역까지만 개통해 있던 경의선과도 연결됐기 때문이다. 2014년에 용산선 구간이 모두 지하로 재개통한 덕분이다.
그래서 경의중앙선은 문산(임진강)-용문(지평)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하는 옥색 광역전철이 되었다.

그러면 수인분당선은 어땠는가?
1994년 9월, 철도 불모지이던 서울 동남부에 수서-오리 분당선이 개통했다. 얘는 색깔도 확 튀는 노란색인 데다, 철도청이 건설하는 철도 중에는 그 당시에 기존 철도와 만나는 게 전혀 없이 단절돼 있던 유일한 철도였다. 2009년 용인-서울 고속도로(171)가 건설 당시에 기존 고속도로와 만나는 분기점이 전혀 없이 단절된 고속도로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랬는데 분당선은 남북으로 쭉쭉 길어져서 왕십리와 수원을 잇는 거대한 전철 노선이 됐고.. 급기야는 이제 수인선과 연결돼 버렸다. 그래서 역 수가 60개가 넘는 왕십리-(수원 경유)-인천이라는 초월적인 노선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1호선의 무려 소요산-천안이 역 수가 얼추 60개;; )

다만, 수인-분당선은 구간별로 성격과 수요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상당수의 열차는 여전히 과거의 분당선 아니면 오이도 이북의(시흥-인천) 수인선 구간만 다닐 예정이다. 여느 방사형 노선들은 서울로부터 멀어지는 말단 외곽이 수요가 적지만.. 수인선은 반대로 양 말단인 인천과 분당· 서울 쪽이 수요가 많고 중간의 화성· 안산 쪽은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기존 안산선 구간인 오이도-한대앞을 포함해서 이번에 새로 개통한 사리-야목-고색 등의 구간을 다니는 열차는 왕십리부터 인천까지 전구간 풀코스를 다니는 열차만으로 국한된다. 이런 열차는 1시간에 2~3대꼴로만 운행된다.

그러므로 오이도 역은 동쪽에서는 4호선의 종착역이기도 하면서, 서쪽에서는 수인선의 중간 종착역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하게 된다.
사실은 한대앞-오이도는 애초에 안산선이 기존 수인선의 선형을 따라 건설된 것이었다. 그걸 수인선 복선전철이 나중에 되찾았을 뿐.. 여기는 2복선 같은 것 없이 한 선로에서 안산선과 수인선 열차가 모두 오가게 된다. 같은 선형이지만 선로는 복층으로 다른 경의선 & 공항 철도의 서울 시내 용산선 구간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과거에 분당선 수원 행에 대응하던 운행 계통은 종점이 수원이 아니라 서쪽으로 한 정거장 더 진행한 고색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1호선 수원 행 계통이 2003년부터 병점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현상 같다. 어쩐지 그래서 고색 역은 시종착역 역할을 하기 위해 지하에서 이례적으로 쌍섬식으로 건설돼 있었다.

그래서 수원 역은 1호선도, 수인분당선도 모두 중간 종착역 역할을 하지 않게 됐는데, 이것은 두 노선의 중간 종착역 역할을 꾸역꾸역 수행하고 있는 오이도 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본인은 9월 12일이 낀 주말에 답사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기는 글과 사진을 정리하는 대로 이 블로그에다 공개할 예정이다.

아울러, 이렇게 철도에 거대한 수도권 순환선이 추가된 2020년 9월부터.. 고속도로에서는 서울 외곽순환 고속도로(100)의 명칭이 수도권 제1순환 고속도로라고 개명되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변화인 것 같다.
저 동네가 서울 외곽 변두리 짜끄레기라는 부정적인 어감을 걷어내고, 또 더 큰 제2순환선(400)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반영한 개명이다.

2. 급행 전동차의 변화

지난 2019년 말~2020년 초 사이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경부선 급행열차 체계가 꽤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용산-구로 사이의 급행 선로는 동인천 급행만이 사용하는 경인선 전용 선로로 바뀌었고, 천안 급행은 내선(급행 및 일반열차 선로)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군포와 의왕 같은 몇몇 역에다가 대피선 추가)

이 때문에 경부선 급행은 안양-수원 구간에서 내선을 주행하던 과거에 비해 속도빨이 조금 감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경부선 급행을 더 많이 투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용산에서 끊어지는 게 아니라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까지 더 길게 운행 가능해졌다. 환승역인 금정 역에 정차할 수 있게 된 건 덤이다.

어째 운영 시스템을 이렇게 개편할 생각을 했는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나 모르겠다.
이런 조치 덕분에 이제는 서울 지하철 9호선뿐만 아니라 1호선의 지하철 구간에서도 이따금씩 ‘천안 급행’이라는 어색한 열차 행선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레일에서는 요런 완행 기반의 경부선 급행을 늘린 대신에, 하루 세 번 있는 기존의 서울-천안 급행을 슬쩍 폐지했는데.. 그건 승객들의 반발에 부딪혀 곧 무산됐다.
이제 하루 세 번 있는 이 열차만이 안양-수원에서 일반열차 선로를 주행하는 유일한 전동차이다. 누리로도, 급행 체계 대개편도 1981년 경부선 서울-수원 복복선 개통과 함께 등장한 이 40년 짬밥의 전동차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3. 고속버스(고속도로) 대비 철도의 변화

우리나라에 좌석에 종아리 받침대가 있는 고급 육상 교통수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이다.
1991년인가 92년 사이에 등장한 우등 고속버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새마을호 장대형 객차.
열차와 버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한데.. 어느 게 어느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본인도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예전에 언급한 적이 있다.

좌석 자체가 더 두툼 큼직하고 푹신한 것은 우등 고속버스이다. 특히 팔걸이의 폭 말이다. 하지만 앞뒤 간격이 훨씬 더 넉넉하고 전반적인 승차감이 더 좋은 것은 열차이다.

그리고 저 때 이후 2010년대부터 고속버스와 열차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고속버스는 기존 우등보다도 더 비싸고 좌석이 더 안락한 프리미엄 우등이란 게 나와서 일부 노선에서 운행 중이다.
그러나 열차의 경우, 저 새마을호가 한국 철도 12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크고 안락한 좌석을 보유한 차량이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지금은 KTX 특실 좌석에도 종아리 받침대 따윈 없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열차는 인테리어만 한없이 더 고급화하는 게 아니라, 속도가 더 빨라지는 쪽으로 일면 바람직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요즘 제트 여객기가 과거의 비행선이나 대륙 횡단 여객선처럼 내장재를 신경쓰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나라도 KTX가 없고 열차의 증속에 한계가 있던 시절엔, 내장재와 정차역만으로 상위 등급 열차를 운용해야 했다. 새마을호의 크고 안락한 좌석은 그 시절이 만들어 냈던 유물인 것이다.

물론 기존 인프라만 갖고 노오력을 쥐어 짜내서 서울-부산을 4시간 10분까지 단축시켰으며(1985년), 더 장기적으로 3시간 반 정도까지 단축시키려는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그거 갖고 철도가 갈수록 늘어나는 고속도로와 자가용, 고속버스의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고속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훨씬 더 절실히 필요했던 사업이었다. 김포 공항을 대체하는 인천 공항만큼이나 말이다.

같은 논리를 적용해 보면 고속버스가.. 우등이라고 해서 카레이서 출신의 엘리트 기사가 대형 버스로 고속도로를 시속 150~200으로 밟으면서 '초고속버스' 같은 운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장재만 고급화한 버스를 운용하는 것이다.

서울-부산을 1시간 만에 가는 여객기, 2시간 반 만에 가는 열차가 있는 와중에.. 도로 교통수단이 시간 메리트가 없다면, 고속 와이파이는 물론, 최소한 좌석마다 개별 영상 서비스와 콘센트가 달린 버스 정도는 요즘 세상에 정말로 나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4. 서빙 카트

오늘날 승무원이 먹을것을 실은 카트를 끌고 복도를 왕래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열차와 여객기 정도인 듯하다.

참고로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던 1960~80년대 먼 옛날에는 안내양이 버스 안에서 스튜어디스와 비슷한 일을 했다. 탑승 전 검표, 안전벨트 착용 안내뿐만 아니라 무슨 관광버스처럼 지금 차량이 지나고 있는 지역의 특산물 소개 같은 방송도 하고 주기적으로 음료 서빙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시대의 변화 때문이겠지만 인건비의 급격한 상승도 안내양이 없어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여객기나 과거의 고속버스 같은 건 승차권 가격에 포함된 정식 서비스를 모든 승객에게 동등하게 제공하기 위해서 승무원이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차는 별도로 판매되는 간식류들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카트의 성격이 좀 다르다. 다른 교통수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오~

철도청 시절에는 이런 일을 홍익회라는 유착(?) 법인에서 전담했지만 공사화 이후에는 이런 풍경을 거의 볼 수 없어졌다. 그나마 KTX 같은 고급 고속열차에서는 코레일네트웍스 같은 자회사 소속 직원이 카트를 끌고 다닐 뿐.. 수익이 적은 새마을/무궁화호 열차를 시발역에서 타면 "우리 열차는 차내 영업사원이 탑승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탑승 전에 해결하시거나 차내 카페객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가 자주 나왔었다.

5. 토목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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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장소는 서울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일명 고텀) 역의 환승 통로이며, 9호선 승강장의 위층에 있는 거대한 공터이다. 직접 본 적이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높은 천장을 뚫고 딱 15cm만 위로 올라가면 지하철 3호선 선로가 나온다.
9호선 고텀 역은 그 무거운 전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 3호선과 7호선의 바로 위와 옆으로 아슬아슬 아찔하게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이들 역이 동시에 건설된 것도 아님을 주목하라. 신기하지 않은가?

불과 30년 남짓 전에 2호선이 처음 건설됐던 시절엔.. 복잡한 영등포 역 아래를 그렇게 뚫고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로 밑으로 땅 잘못 파면 선로가 내려앉아서 1993년의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같은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는 한적한 곳까지 비껴 가서 신도림역을 환승용으로 따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고텀 역의 경우, 옛날 3호선은 그냥 개착식, 7호선은 NATM(발파..), 9호선은 CAM(cellular arch) 공법으로.. 적용 알고리즘이 모두 다르다.

우리나라의 '삼부토건'이라는 건설사는 자기 회사를 소개할 때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여의나루 한강 하저 터널을 건설했던 이력을 반드시 자랑으로 내세운다. 그건 1990년대 초에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했던 장거리 하저 터널이기 때문이다.
광나루-천호도 하저 터널이지만, 그건 댐을 쌓아서 강물을 다 걷어내고 개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크게 새롭지는 않다.

서울 지하철 7호선 남성-숭실대입구역 구간의 경우, 시공사는 기억이 안 난다만 아무튼 중간에 길을 벗어나서 관악 현대 아파트의 아래를 대놓고 관통한다.
물론 공사는 20여 년 전에 그 위에서 살았던 아파트 입주민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스텔스로 잘 끝났다.

이런 게 21세기 토목 기술의 힘이다. 이미 부산 시내를 몽땅 지하로 관통하는 경부고속선이 완공됐고, 이제는 서울에서 평택까지 전부 지하로 가는 SRT, 그리고 고심도 광역 급행 전철까지 만들어지는 중이다.

참고로 지하 시설이라는 건 공간만 냈다고 장땡이 아니다. 내부에 계속해서 환기를 해 줘야 하며, 지형에 따라서는 지하수를 빼내는 펌프를 24시간 내내 가동해야 한다. 안 그러면 햇볕도 안 들어오는 탁한 지하 공간에서 사람이 지낼 수가 없어진다.
이런 최소한의 토목 디테일을 알면 북괴의 초장거리(?) 남침 땅굴 굴착설 같은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괴담임을 간파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7 08:34 2020/09/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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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 관순 열사의 모습

유 관순은 겨우 100여 년 남짓 전의 근현대 사람이고 초등학교 위인전에서도 언급되는 톱 네임드급 위인인 것치고는.. 검증되지 않은 myth와 알 수 없는 mystery가 의외로 많은 인물이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정정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1904년생으로 알려졌다가 1902년생으로 정정되고, 징역 7년형이던 게 5년으로 바뀌고, 형무소에서의 정확한 사인도 2013년에야 기록을 통해 밝혀졌지 않던가?

그 뿐만이 아니다. 이분은 멀쩡히 서울에서 순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해가 남아 있지 않고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극히 드물다.
의열단 내지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벌이기 전에 근사하게 혹은 비장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을 남기곤 했지만(안 중근, 윤 봉길, 이 봉창..) 유 관순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는 학생이었고, 만세 운동 자체를 "난 오늘만 산다" 급으로 무조건 죽을 각오를 하고 벌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난 오늘만 산다" 같은 항일 투쟁 패러다임 자체가 3· 1 운동이 실패하고 이런 만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겠다 싶으니까 등장한 것이다. 또한 그때는 경제력 없는 어린 학생이 사진을 쉽게 남길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1 운동 전날 밤에 유 관순이 자기가 직접 그린 태극기 하나 들고 동지나 친구들하고 포즈를 취한 인증샷 하나 없는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사진이 없었으면 유 관순의 공신력 있는 독사진--단체로 같이 찍힌 것 말고--이랍시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일제가 찍은 죄수 머그샷밖에 없다! 이게 유일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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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맹목적인 국뽕 반일 종족주의를 배격하고 조선 시대를 극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모 진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이렇게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절에는 미혼 소녀는 댕기머리이고 기혼 여성은 비녀+쪽머리가 보편적이었는데, 미혼인 유 관순이 왜 유부녀 헤어스타일이냐는 것이다.

유 관순은 안 그래도 저렇게 온통 의혹투성이인 인물인데 저 사진은 애초에 이화학당 학생 유 관순이 아니라 아예 다른 유부녀 동명이인 아줌마가 아니냐는 극단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헐..
황당해 보이지만 완전 터무니없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다음은 유 관순의 형무소 동기이던 임 명애 열사의 머그샷이다. 이분은 1886년생으로 유 관순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더 많았고 진짜 유부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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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명애와 비슷한 연배의 유부녀인 어 윤희 열사도 머그샷이 이와 비슷한 풍이다.
그 반면, 1919년 말과 이듬해에 만세 시위 시즌 2를 일으켰다가 경찰서 정모를 했던 비슷한 연배의 여학생들 사진을 보자. 박 양순, 박 신삼은 명백하게 댕기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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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화라는 학생은 댕기를 머리 위로 감아올린 것을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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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10대 학생들은 얼굴이 명백하게 앳되어 보이는 반면, 오늘날 전해지는 유 관순의 얼굴은 꽤 노안이다. 내가 보기엔 인상으로나 헤어스타일로나 학생보다는 아줌마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_=;; 물론 우리는 그 이유가 고문과 구타를 너무 많이 당해서 얼굴이 부어 터졌기 때문이라고 배워 왔다.

그럼 학생과 아줌마의 중간에 속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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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순경 열사는 1902년생으로 유 관순과 동갑이다. 다만, 투옥되었던 당시에 학생은 아니었고, 학교를 졸업해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딱 1920년 당시에 이분이 벌써 결혼까지 한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개인사가 전해지지는 않으나, 이분의 장녀라는 사람이 1920년대 중후반생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의 결혼 생활이 아이 없이 신혼만 5~6년씩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순경의 헤어스타일은 유 관순과 비슷한 쪽머리이다. 이 정도라면 저 시절 머그샷 사진의 헤어스타일과 당사자의 결혼 여부에 딱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유 관순 사진 자체가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좀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윤 봉길의 체포 장면 사진을 갖고도 저건 진짜 윤 봉길 사진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재반박되고.. 그 정도 합리적인 의심과 의혹 제기 및 검증은 건전한 학문 발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유 관순은 10대 소녀라는 특이한 프로필로 인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유 관순의 이화학당 입학 초기 사진을 첨부하며 이 주제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 얼굴이랑 불과 몇 년 뒤의 형무소 머그샷이 동일 인물이라 간주할 수 있겠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거 무슨 광수 얼굴 찾기 게임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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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 기철 목사의 일화

예전부터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는 사항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본인은 예수쟁이 신자로서 주 기철 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다섯 가지 나의 소원”이라는 그의 설교문은 오래 전부터 내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들어가 있었을 정도이다. 다만,

(1) 저 사람이 대단한 거지, 그 당시에 가족을 동반한 집요한 협박에 못 이겨서 신사참배에 타협한 다른 사람들을 ‘도를 넘게’ 욕하거나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에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윤 봉길 의사를 비난하는 보도를 냈던 국내 언론사들을 친일매국(?) 어용언론이라고 욕하는 게 아무 쓰잘데기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전설처럼 따라다니는 ‘맨발로 못 위를 걸은 일화’는 도대체 언제 어느 형무소(의성?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고 출처가 누구의 증언이며, 신빙성이 있는 사건인지 내 노력으로는 분별과 검증을 더 못 하겠다.
일본으로부터 저 정도로 비슷한 레벨의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떤 분야의 지조를 지킨 건 신라 박 제상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3) 한국의 기독교 수난사 순교사가 오로지 일제 말기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1950년 가을~겨울에 전국 각지에서 온갖 냉병기로 두들겨맞고 머리에 총알 박혀 순교한 더 많은 순교자들을 언급하는 건 무슨 정치 발언으로 매도돼 가니.. 정말 어이가 없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분별력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3· 1 운동 당시에 유 관순 말고 다른 여성 독립 운동가들도 재조명되어야 하듯, 이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3. 신념형 친일파 박 중양

세상에 유 관순이나 주 기철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구한말부터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중에는 아무 사심 없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던 친일파도 있었고, 돈과 벼슬까지 받으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놈, 마냥 생계형 부역이라고 실드 치기에는 도를 넘은 부역자 등 여러 종류의 친일파가 존재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1930년대쯤부터는 일본은 절대 망할 일이 없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다는 인식이 짙어졌다. 그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인정하고, 일본 내에서 2등 신민인 조선인의 인권과 권익을 향상시키는 운동을 하는 게 순리이겠다고 노선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박 중양(1872-1959)이라는 인물은.. 부귀영화와 개인 영달 기회주의형이 아니라 그냥 조선을 자기 신념상 너무 혐오해서 충성의 대상을 일본 정부로 바꾼 좀 이례적인 사람이었다. 김 옥균 같은 친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화파들이 잔혹하기 그지없게 가족까지 몽땅 숙청되는 걸 보고는 이놈의 X같은 야만적인 나라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지는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괴롭힌 것도 아니고..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관료로서는 아주 강직 청렴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인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로 높은 등급의 관료가 됐으니 원... 윤 치호와 비슷한 위치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한 타이밍 더 일찍 신념이 저렇게 바뀐 셈이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회부됐을 때도 이 사람은 "일제가 그렇게 폭삭 망할지 몰랐어~!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려야 했잖아!" 같은 구차한 변명 따위 없었다. "조선인들은 더 고매한 일본인의 통치를 받는 게 객관적으로 더 이익이다"라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저 팩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굳이 날 죽여야겠다면 죽여라. 난 아무 미련 없다. 하지만 나 말고 일제 시대 유능한 인재들을 친일파로 몰아서 해코지하지 말고 오히려 잘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해라. 그리고 애국자의 탈을 쓴 다른 위선자들에게 속지 마라."라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이 양반은 돈과 권력을 좇는 여느 기회주의형 악랄 친일파는 아니라는 것에 조사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저 양반은 투옥과 처벌이 아니라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였다.

뭐, 조선 정부에서(고종과 민 씨 일가..) 개화파를 완전히 박살을 내는 현실을 똑같이 보고서 박 중양은 신념형 친일로 돌아섰다. 윤 치호도 자국민의 국민성에 절망한 나머지 변절해 버렸다. 하지만 구한말 때 직접 죽을 위기를 겪었던 이 승만은 그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솔직히 할배에 대해서는 그의 독선을 욕할 게 아니라 무슨 뚝심과 근자감으로 조선이 망한 후에도 외국에서 무국적자로 살면서 줄곧 독립 운동을 했는지.. 그걸 더 대단하게 여겨야 하지 싶다.

4. 이 승만 정권 때 처형 당한 최 능진, 조 봉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첫 헌정 체제이던 이 승만 1공화국은 군사정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단과 6· 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만큼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나라 분위기가 그쪽으로는 극도로 민감하고 경직돼 있었다. 통일이라는 건 당연히 북진 멸공 통일을 해야지, 감히 화해와 평화 통일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고 잡혀갈 수 있었다.

난 개인적인 신념으로는 그게 이해가 되며 일면 옳다고도 생각한다. 김 일성 같은 사악한 저질 집단은 애초에 대화고 화해 따위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놈들의 개수작에 속지 말고, 힘으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없다면 단호하게 분리와 격리라도 하는 게 백 번 옳다. 통째로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을 온갖 개지랄 발광 발악을 한 끝에 겨우 반반으로 퉁친 것이다.

다만, 모든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할배와 같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저것들은 지금 나라의 여건상 친일 부역자 출신 군경을 동원해서라도 몽땅 제거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 능진의 경우 경찰 고위 간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친일 부역자 청산을 부르짖었고, 이 때문에 이 승만뿐만 아니라 조 병옥과도 크게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최 능진은 과거의 일제 시절부터도 안 창호 라인이었고 독불장군인 이 승만을 싫어했다.

결국 이 사람은 이 승만 정권의 눈밖에 나고 종종 체포되고 투옥되다가.. 결국 6· 25 전쟁 중에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빨갱이 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훗날 비슷한 연배의 조 봉암(1898-1959)이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통일도 대화와 평화 노선을 주장했다.

자, 지금 할배를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을 보고도 나라를 팔아먹네 뭐네 매국노네 하면서 날뛴다. 그렇지 않은가?
1950년에 조 봉암이 제안했던 "UN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은 그들이 국제연맹 위임 청원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빨갱이로 몰리기 딱 좋은 혐오 발언이었다. 두 케이스 다 발언 당사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해가 있었다.

솔직히 이 승만이 외교 노선을 아무리 펴봤자 국제 연맹 시절의 강대국들이 일본의 합법적인 식민지이던 조선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그와 완전 동급이다. 저런 민족주의자 애국자들도,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북괴가 공산 적화 흉계를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으며 남북 평화 통일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끼리 친일 청산도 다 하고 공산화도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 도대체 무슨 수로 가능하다는 건가? 이렇게 국민성 더럽고 국력은 쥐뿔도 없던 헬조선 반도 땅에서? 이 승만 없이 김 구나 여 운형만 대통령 됐으면?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그러면 김 일성도 이렇게 흑화하지 않고 개과천선했을까? 허 참.. 난 내 사고실험의 결과를 봐서는 전혀 상상이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7, 80년 전 같은 무지와 야만의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반쯤 불가피, 반쯤 지나친 오바). 그리고 빨갱이 자체가 없어진다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없어질 테니 이 나라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9 08:33 2020/09/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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