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보 저장, 상태 보관이란 걸 몽땅 실물로 해야 했음

세상에 컴퓨터와 정보 저장 매체라는 게 없던 시절엔..
길고 빽빽한 텍스트가 아니라 겨우 수 바이트, 수십 비트가 채 되지 않을 '객체 상태'도 일일이 다 실물로 관리해야 하니 참으로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 보드 게임의 말들은 잡히면 몽땅 다 즉사이지, HP 같은 건 없다. 윷놀이, 바둑, 체스, 장기..
그도 그럴 것이 각 말들의 HP가 깎이는 걸 또 별도의 기물로 구현하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 하다못해 죄수의 볼기를 줘 패도 매번 때릴 때마다 늘 "n대요~!!" 라고 크게 복명복창을 해야 했다. 정해진 횟수를 절대 틀리지 말라고.
(물론 단순 숫자 한두 개 정도는 마치 운동 경기 스코어 x:y처럼 종이 판떼기로도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태형을 집행하는 국가에서 굳이 그런 물건까지 동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

-- 교통수단에서 환승 할인이란 걸 구현하는 게 참 난감했다. 기껏해야 승차권에다가 특수한 구멍을 뚫어서 인증하는 정도?

-- 고속도로 톨비도 말이다. 요즘 고속도로는 국영과 민영 구간이 오락가락이고, 대도시에서는 개방식과 폐쇄식이 왔다갔다 한다. 거기에다 차종과 이용 시간대별 할인이 있고, 심지어 차로 수가 적은 고속도로와 많은 고속도로 간에도 미세하게나마 요율이 다르다..!! 이거 정확한 계산을 재래식 종이 통행권으로 하려면 톨게이트를 엄청 많이 만들어 놓고 매번 차를 세워야 할 것이다.

-- 대중교통은 자리를 알아서 찾아서 앉는 자유석 형태로만 운용 가능할 것이다. 좌석 지정 탑승권은 거의 불가능. 1980년대에 새마을호 열차에서 전산 승차권(고정석) 발매가 그만큼 파격적이었던 조치였다. 그 반대급부로, 새마을호는 일부 객차만 자유석을 운영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행정에서 이 복잡한 state 계산의 끝판왕은 운전자 벌점이지 싶다. 이건 3년이라는 유효기간이 존재하는 마일리지와 비슷한 개념이다.
유효한 벌점이 40점 이상이 되면 면허가 정지되는데, 면허정지에 기여한 벌점은 처분벌점에서는 빠지지만 누산벌점에는 남아 있고 이건 또 뭐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고... 나도 제대로 이해를 못 했다.

게임에서 이렇게 하면 HP가 깎이지만 이렇게 하면 HP와 관계없이 즉사(면허 취소)...;; 이렇다.
행정 전산화가 되기 전엔 이런 거 어떻게 관리했을까...?? 경이롭다.

2. 오늘날 같은 획기적인 무선 고속 통신 인프라가 없었음

-- 휴대폰이 없었을 때는 차를 운전하다가 사고 나면 보험사에다 연락을 어떻게 했을까..??
고속도로의 경우, 일정 거리 간격으로 긴급 통화가 가능한 전화기가 비치됐으며 일정 시간 간격으로 순찰차가 다니기는 했다. 그러나 고속도로처럼 잘 관리되는 도로가 아니라 시골 깡촌 농로나 산길이라면 정말 난감할 것이다.

참고로 카폰은 아직 엄청난 사치품이었다.
기계값도 값이지만 지금처럼 제한된 주파수를 쪼개고 쪼개서 수많은 사용자들에게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통신 기술과 인프라가 없었다. 카폰은 전화국과 교신하는 무전기보다 크게 나은 게 없던 지경..

그래서 지금처럼 전 국민이 무선 통화를 하는 게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하긴, 더 옛날에는 유선 전화조차도 회선이 부족하고 자동 교환 기술이 부족해서 집집마다 개통하는 게 불가능했었다.

-- 쌍팔년도 시절, '브레인 바이러스'라는 악성 코드는 1985년에 파키스탄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게 1987년에 미국에서 첫 발견됐고,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에야 발견됐다.
무선 인터넷이 없던 시절엔 컴퓨터로 뭔가가 퍼져나가는 속도도 정말 끔찍하게 느렸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지경.

-- 좀 더 옛날 얘기를 꺼내자면 레이더나 무전기라는 것도 2차 대전 시기에 발명됐다.
그 전 제1차 세계 대전 때만 해도 아직 전령이라는 게 현역이었다! 목숨 걸고 발품 팔아서 전방 소식을 후방에다 전하는 병과 말이다. 히틀러가 이 시기에 전령병 출신이었고 그것만으로도 부상 당하고 훈장도 받았을 정도였다.
심지어 비둘기 발에다가 편지를 묶어서 전하는 구닥다리 테크닉까지 쓰였었다.

하긴, 2차 대전 때는 말 탄 기병이 아직 현역이었다. 자동차라는 게 있긴 했지만 아직 너무 비싸고 귀했기 때문.. 우리가 누리는 교통 통신 인프라가 지금 같은 가성비를 갖추게 된 건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3. 금융 거래도 전산화되지 않았음

-- 월급을 직접 현찰로 봉투에 넣어서 나눠줬다. 월급날 시즌에는 회사들마다 현금을 수송하느라 분주했다.
심지어 국제선 여객기를 조종하는 기장들도.. 도착지 공항에서 유류비를 지불하려고 돈다발이 들어있는 가방을 조종실에 싣고 다녔다.;;;

-- 신용카드라는 게 있긴 했으나.. 지금 우리처럼 간편하게 긁고 통신이 되는 형태가 아니었다.
가게에서는 손님이 카드를 긁었음을 입증하는 종이 전표 실물 뭉치를 잘 보관했다가 카드사에다 직접 청구하고, 카드사는 그걸 보고 대금을 지급했다. 옛날 신용카드에 카드 일련번호가 양각으로 돌출됐던 이유는 이걸 일종의 도장처럼 쓰기 위해서였다.;;; ㄷㄷㄷㄷㄷㄷ

단순히 음성과 영상을 주고받는 통신뿐만 아니라 금융 거래가 전부 무선 자동화 전산화된 것도 세상을 정말 편리하게 바꿔 놓았다. 종이 없는 사무실보다는 현금 없는 세상이 더 많이 실현됐다.
물론 통신으로 돈 거래를 몽땅 가상화시킨 배후에는 디지털 서명을 가능케 한 비대칭 암호화라는 특급 보안 기술이 있었다. ^^
영상· 음성을 디지털로 주고받는 배후에는 압축 알고리즘(코덱..)이 있듯이 말이다.

4. 정보 검색 인프라

지금 같은 학술 정보 검색 인프라가 없던 시절에는 논문을 어떻게 쓰고 참고문헌을 어떻게 찾아봤을까??
뭐 그 시절에는 학계마다 분야별 최신 논문 목록이 마치 전화번호부처럼 종이책 형태로 주기적으로 발간되기는 했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 골동품이겠지만..

그래서 그 시절 옛날 논문들은 참고문헌 목록이 21세기 이후 논문들처럼 풍부하지는 못했던 편이라고 한다.
이런 게 '정보 고속도로'니, 'information at your fingertip' 이런 90년대 구호가 실현되기 전의 모습이다. 유비쿼터스, IoT니 하는 구호는 2000년대 이후에나 등장했다.

하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위논문들이 타자기로 작성되곤 했다. 타자기로 수학식을 표현하려면.. ㄷㄷㄷ
좀 얼리어답터인 사람이 몇백만 원짜리 컴퓨터를 장만해서 아래아한글 1.X로 논문을 써 보겠네 마네 하던 지경이었다.

갤럭시니 아이폰이니 하는 오늘날의 스마트폰은 "둥그런 브라운관 화면을 통해 상대방을 보면서 영상 통화" 정도를 상상했던 쌍팔년도 시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 됐다. ^^

Posted by 사무엘

2024/10/12 08:35 2024/10/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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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0년대: 시점의 변경

우리나라의 대표 고속도로라고 일컬어지는 경부 고속도로는 1970년에 전 구간이 4차로 크기로 만들어졌다.
옛날 사진을 보니, 그 당시엔 중앙분리대에 화단이 꾸며졌거나, 아니면 비상활주로 운용을 염두에 두고 중앙분리대가 이동식으로 허접하게 꾸며진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1970년대 개통 초기에는 경부 고속도로의 법적 시점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즉 도심 한복판이었다.
그때는 한남대교와 그 이북 제1 남산 터널까지(남산 1호 터널) 합쳐서 '서울부산선'으로 쳤던 것 같다. 마침 얘들 역시 1969년 말(한남대교)과 1970년 광복절(터널), 경부 고속도로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통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로서는 저 교량과 터널도 어마어마한 토목 공사였고 "조국 근대화 잘 살아 보세, 우리는 할 수 있다" 국뽕 아이템이었다.

경부 고속도로 덕분에 한국에는 고속버스라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초창기에는 서울 구시가지의 근처인 신촌이나 종로5가 같은 곳에 고속버스 터미널이 회사와 행선지별로 듬성듬성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풍경이지만..

그러다가 1970년대 말에 강북 구간은 이 고속도로의 법적 시점에서 짤렸다. 지금으로 치면 한남IC 부근으로 시점이 남하했다. 옛날에 철도는 경부선 서울 역이 서대문에서 남대문으로 남하하기는 했었다만.. 고속도로는 아예 한강 이남으로 내려간 게 흥미롭다.

이때는 몇 차례 북괴의 도발을 겪고 나서(땅굴, 무장공비, 판문점 도끼 만행..) 가카께서 수도를 통째로 남쪽으로 옮길까 하는 극단적인 고민까지 하던 시절이었다.
그 정도 남하까지는 아니어도 이런 시국 덕분인지 서울 강남이 집중적으로 개발됐다. 그리고 이 시기에 서울 강남 반포에 최초의 통합 '고속버스 터미날'이 만들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에는 엄청난 외곽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지금은 이 터미널조차 주변이 너무 비좁다면서 이전 요구가 나오는 실정이다.

2. 1980년대: 서울 요금소의 남하, 최초의 확장 공사

(1) 경부 고속도로에 처음으로 확장 공사가 행해진 시기와 구간은 바로 1987년.. 중부 고속도로(35)와의 분기· 합류 지점이다. 회덕(대전)-남이(청주) 사이가 처음으로 6차로로 확장됐다. 그 뒤 나라에서는 중부 고속도로도 좀 이용하라고 강남 고텀에 이어 강변 동서울 시외버스 터미널을 개장했다~!

쌍팔년도 이전엔 경부 고속도로가 심지어 서울-판교-수원 구간조차도 아직 겨우 4차로였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 역 주변 역시 쓰레기 매립지였을 정도로 엄청난 미개발 황무지였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다른 이름을 붙일 게 도무지 없어서 걍 밋밋한 '강변'이었던 거다. 마치 대전광역시의 이름이 과거에 '한밭' 뻘밭이었던 것과 비슷한 작명이다. 1987~88년 사이에 울나라 고속도로 업계에 참 많은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경부 고속도로의 최북단 요금소인 서울 요금소에도 변화가 생겼다. 원래 이 요금소는 양재 IC 부근에 있었다. 그러던 게 1987년 말에 훨씬 더 남쪽인 지금의 성남 궁내동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기존 요금소는 명색이 서울의 관문인데 매표소 차로가 겨우 7개 밖에 없어서 너무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다. 주변에 더 확장할 부지는 없고.. 더 남쪽 외곽으로 이사 가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늘날 서울 요금소는 행정구역상 서울에 있는 게 아니다. 거길 통과하고도 한참을 더 달려야 인서울이 나온다.
옛 서울 톨게이트가 차지하던 부지는 만남의 광장 휴게소로 바뀌었다.

(3)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경부 고속도로'라는 명칭이 공식 명칭으로 정착한 것도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 전에는 얘는 그냥 서울부산선,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남침 땅굴도 1970년대 당대에는 '지하 터널'이라고 불렸고, 한강대교 양화대교 한남대교도 1980년대 이전에는 그냥 제1~3 한강교라고 불렸듯이 말이다. 1980년대에는 이런 아기자기한 명칭들이 많이 확립됐다.

3. 1990년대: 계속되는 확장과 버스 전용 차로

경부 고속도로는 '빨리빨리 선개통 후개량'의 산물인지라 찔끔찔끔 땜질과 확장 공사가 끊이질 않았다. 그렇다고 이걸 악의적인 졸속 부실시공이라고 폄하하는 건.. 열악했던 예산과 부족한 시간과 온갖 시행착오 속에서 고생했던 작업자들에 대한 모독일 터. 그땐 고속도로를 만든다는 것 자체가 쌩판 처음이던 시절이었다는 걸 감안할 필요가 있다.

(1) 저렇게 최초의 확장 공사가 행해진 뒤, 1990년대 초엔 터져나가던 수도권 양재(서울)-수원 구간에 드디어 칼질이 가해졌다. 얘는 도로의 양쪽 끝에 차로를 더 만드는 게 아니라, 옆에다가 똑같은 4차로 도로를 하나 더 만드는 식으로 한꺼번에 8차로로 확장됐다.

같은 시기에 오늘날 수도권1순환(외곽순환) 고속도로의 전신인 구리-판교 고속도로도 건설이 시작됐다. 서울 요금소를 남쪽으로 옮긴 것은 쟤를 '개방식' 톨게이트 구간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 성격도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기에 철도 업계에서는 경부선에 구로-서울 3복선화 공사가 시작됐다. 경인선 2복선화와 경부선 수원-천안 2복선화도 시작됐지만 얘들은 2000년대가 돼서야 완료됐고..

(2) 1995년부터는 이렇게 넓어진 차로를 바탕으로 경부의 수도권 구간에서 버스 전용 차로가 처음으로 시행됐다.
서울 시내의 천호대로에서 중앙 버스 전용 차로가 시행된 것과도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 시내버스와 고속버스는 분야가 완전히 다른데도 말이다.
천호대로는.. 서울 지하철 5호선을 건설하느라 어차피 파헤쳤던 도로를 복구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정류장을 설치할 수 있었다. 타이밍이 잘 맞았던 셈이다.

4. 2000년대 이후

(1) 2003년에는 김천-영동-옥천 쪽에 대대적으로 선형이 개량되었다. 산 타면서 꼬불꼬불 위험하게 가던 길이 고가 교량으로 바뀌었다. 30여 년 전에 그렇게도 고생하며 힘들게 만들었던 구닥다리 대전육교와 당재터널(옥천터널)이 드디어 현역에서 은퇴했다.

2000년엔가 추풍령 일대에서 연쇄 추돌 교통사고가 거하게 난 뒤에야 과업에 속도가 붙었다. 단, 얘들은 4차로로 만들어져 버려서 추후에 차로 확장이 꽤 난감해졌다.
비슷한 시기에 경부선 철도에서는 수원 역에서 전철의 평면교차 회차를 없애려고 수원-병점간 2복선화 공사가 한창이었다.

(2) 서울 수도권 구간은 10차로 더 확장됐고 대전· 대구 구간도 다 이런 식으로 확장됐다. 수원신갈 IC의 경우, 넘쳐나는 차들을 감당치 못해서 톨게이트가 상행과 하행별로 따로 분리되는 기괴한 구조가 됐다. 모든 차들이 종이 통행권 대신 하이패스가 장착돼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2010년대 중후반에는 아직도 4차로인 구간은 옥천 부근과 영천-경주-울산 두 곳밖에 남지 않았다.

그랬는데 드디어 경주 부근도 엄청 오랫동안 공사를 한 끝에 6차로로 확장됐다. 경부 고속도로 최초의 터널이라 일컬어지는 경주 터널도 옆에 광폭 터널을 하나 더 뚫어서 확장됐다.
이제 경부 고속도로 전체를 통틀어서 4차로는 20여 년 전에 개량됐던 옥천 구간이 유일하다.

(3) 그리고 2020년대에는 경부 고속도로에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칼질이 가해졌는데.. 바로 지하화다.
동탄 부근 1km 남짓한 구간이 잠깐 지하 터널로 내려갔다. 으음~~~
앞으로 이런 구간이 얼마나 더 생길지는 모르겠다.

이상이다. 경부 고속도로에 대해서 지금까지 글을 많이 썼지만 이런 식으로 역사를 정리하고 종합한 건 처음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24/10/09 08:47 2024/10/0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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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부자 금수저 열전

우리나라엔 삼성이니 현대니 백 종원, 이 수만=_=이니 하는 기업인 말고도 다음 인물들이 정말 엄청난 부자였다. 물려받았던 자수성가했건..

1. 육 영수 (훗날 박 정희 대통령 영부인)

옥천에서 손꼽히는 초호화 부잣집 출신이었다. 일제 시대 1930~40년대에 이미 집에 자가용이 있었고 전화기가 있었다. =_=;;
생가를 찾아가 보면.. 꼴랑 집 한 채가 아니라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의 '단지' 형태이다. 근처에 있는 정 지용 시인 생가하고는 완전 넘사벽 급으로 차이가 난다.

그러니 이분의 애비(육 종관)는 사위 박 정희를 아주 깔보고 개무시했다. 가난한 군바리 놈팽이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저 때는 인재가 부족해서 30대에 무궁화나 별까지 다는 사람도 있는 "대신"에, 계급이 높아 봤자 군인들의 연봉이나 복리후생도 개판이었다.

"신랑 육 영수 군과 신부 박 정희 양.."은 실제로, 진짜로 그 당시 결혼식 사회자가 저질렀던 실수이다. 심지어 신부가 신랑보다 키도 더 컸고. ㄲㄲㄲㄲㄲ
그랬는데 사위가 결혼 후 10년 만에 나라를 뒤엎어버리고 대통령이 되니.. 장인어른이 뒤늦게 사위에게 사죄를 했댄다.

박 정희는 모욕을 당한 건 절대로 잊지 않고 이를 악물고 자기 신분을 상승해서 설욕하는 타입이었다. 교사였다가 일본군 장교가 돼서, 나중엔 대통령이 돼서..

2. 공 병우 (안과 의사 + 한글 기계화 연구인)

이 사람은 진짜 개룡남이다. 그 옛날, 1930년대에 혈혈단신으로 일본 유학 가서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까지 따고 안과 의사가 됐다.
그 뒤 경성 한복판에서 개원을 했으니 진짜 돈을 빗자루로 쓸어담았다. 물려받은 거 없이 자기 노력 능력만으로 저렇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창기엔 개인 납세자 중에서 전국 톱급으로 세금을 많이 낸 걸로 유명세를 탔다. 안 그래도 능력자 억만장자인 데다, 강직하고 옳곧은 성품 덕에 소득을 하나도 안 숨기고 곧이곧대로 신고했더니 저런 세금폭탄이 떨어졌다.. 근데 그거 다 내고도 하나도 꼴리는 거 없었댄다.
"왜놈들로부터 해방돼서 이제야 내 나라가 세워졌는데 닥치고 정직하게 세금 내서 나랏님을 도와주자" 그런 마음이었다고.. ㅠㅠㅠㅠ

공 박사는 1950년대, 나라가 6 25 때문에 보릿고개니 국제시장, 몽실언니 이러는 개판오분전 폐허가 됐을 때도 혼자 여권 발급받고 미국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유학이나 비즈니스가 아니라 단순 관광 목적으로 말이다..!! (창랑호 만송호 이런 뱅기를 탔으려나?)
1960년대 글자판 표준화 갖고 싸우던 시절에도 이미 외제차 자가용을 굴렸고 아예 운전수까지 고용했다.

그때 나라에서 세벌식 자판을 표준으로 채택했으면 공 박사가 고맙다고 꾸벅꾸벅 하면서 ETRI 같은 기관에 저 사람 사재만으로 슈퍼컴이나 각종 연구 자재 장비가 더 기증될 수도 있었다(고 본다. 내 뇌피셜).;;;
그 시절에 공 박사 같은 애국자 천재와 국가가 대립하고 싸우는 관계가 돼 버린 건.. 참 두고두고 땅을 칠 국가적 불행이었다.

3. 백 남준 (예술가)

1950년대에 서울 한복판에서 자가용 있고 "피아노" 있고, 바나나를 먹을 수 있는 집에서 자랐다. =_=;; 자 이 정도면 말 다 했지? 아마 집에서 TV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니 그는 생계 걱정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덕질을 마음껏 할 수 있었고, 그게 개인적인 천재성까지 가미돼서 독보적인 비디오 아티스트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분은 정~~말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고 겸손하고, 칭찬이나 공을 주변 조력자들에게 돌리고.. 인성이 정말 킹왕짱이었다고 한다. 개차반 졸부가 절대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공 병우 박사에 대해서는 2000년대 이후 스마트폰 모바일 시대까지 살아 있었으면 무슨 덕질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백 남준은 2010년대 이후 브라운관 디스플레이가 없어진 뒤에는 무슨 덕질을 했을지 궁금해진다.
난 오랫동안 백 남준과 백 "낙"준이 헷갈리긴 했다.. ^^

4. 근현대사 관련 인물

  • 윤 보선도 예상 이상의 명문가 금수저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 시대에 사비로 영국 유학까지 가능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의외로 정치에도 관심이 있었는지.. 2공화국이 물 건너간 뒤에도 박 정희의 라이벌 격으로 대선에 출마했었다.
  • 이 시영· 이 회영 6형제는 대대로 고위 벼슬을 지낸 갑부 집안 출신이었는데.. 독립운동 하느라 가산을 탕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 그 반면 이 완용· 이 하영 이런 인간들은 친일매국의 댓가로 일제 시대 동안 신흥 갑부로 등극했다. 부동산 재산이 정말 엄청났었다. 물론 그게 전부 일제로부터 받은 건 아니고, 자기들이 머리 굴려서 재테크로 재산을 더 불린 것도 많다.

5. 나머지

한편, 서울대 치대를 나와서 치과 의사를 하다가 관두고 사업을 해서 여느 치과 의사보다 훨씬 더 떼돈 번 사람도 있다. 하긴, 치과 의사가 될 머리로 뭘 하든 성공 못 하겠나 싶다.

  • 오스템임플란트 창업자
  • 원로 배우 신 영균 (.....;)

글쎄, 가수 자우림 윤아의 남편도 서울대 치대 나온 치과 의사이다. 자우림이 어느 인터뷰에서 "설대 치대 출신 치과 의사와 같이 살아 보니 어때요?"라는 질문에 "지금까지 남편이 저보다 돈 더 많이 벌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라고 대답해서 주변을 벙 찌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마지막으로, 이런 인물도 떠오른다.

  • 정석의 저자 홍 성대: 사립 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모교에다 강의동을 지어서 기증할 정도로 억만장자가 됐다.
  • 前 카이스트 화학과 김 봉수 교수: 생활비가 교수 월급만으로 감당이 안 돼서 주식을 시작했다는데.. 관심 분야 업계 흐름과 주식의 세계를 그야말로 자기 전공 공부하듯이 공부한 듯하다. 그야말로 교수 연봉의 수십, 수백 배를 벌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4/10/04 08:35 2024/10/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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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철도 역사 -- 그땐 그랬지

예전에 한 번씩 언급했던 얘기들도 있지만 다들 한데 모아서 나열해 본다.

1. 구한말

(1) 을미사변이 일어나던 당시, 민비를 살해하러 경복궁으로 침투했던 일본 낭인들은 무려 배를 타고 한반도를 빙 돌아서 인천항에 도착한 뒤, 거기서 서울로 갔다. 그때는 아직 경부선 철도라는 게 없었고, 비행기는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2) 한반도의 첫 철도인 경인선이 표준궤로 부설된 것은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진 것이고 무척 다행이었다. 일제는 미국이 건설하다가 만 이 철도를 도로 협궤로 개궤할까 고민을 했었지만.. 이내 고민을 접고 표준궤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 궤간이 경부선으로도 이어졌다. 그때는 이미 자국 내에서도 협궤는 좀 아닌 것 같다는 논의가 나오고 있었다고 한다.

(3) 이토 히로부미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다가 수원-안양 부근에서 원 태우 의사가 던진 돌에 맞아서 다쳤고, 끝내는 최후도 기차역에서 맞이했다. (국내 철도역은 아니지만)

2. 일제강점기

  • 이때는 부산 방면이 상행이고, 경성과 대륙 방면은 하행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게 당연한 선택이다.
  • 지금의 부산 역은 그때는 그냥 초량 역이었다. 진짜 부산 역은 더 남쪽의 바다 코앞에 만들어져 있었으며, 거기서 곧장 연락선으로 갈아타서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 원래 서대문이 경성 역이었는데 3· 1 운동 이후에 없어지고, 남대문이 경성 역이 된 건 유명한 일화이다. 경성-신촌의 과격한 90도 드리프트에는 사연과 내력이 존재할 것이다.
  • 1930년대 이후의 아카츠키 호가 서울-부산을 6시간 반 만에 찍었다. 이게 그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육상 교통수단이었다.
  • 저 시절에 한반도의 유일한 복선 철도는 경부· 경의선이었다. 경인선과 경원선도 복선화 계획이 있긴 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 저 시절에 한반도의 유일한 전기 철도는 금강산선이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는 게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무리였기 때문이다.
  • 오늘날 경인선은 전철만 복복선으로 다니는 노선이다만.. 저 시절에는 단선에서 모든 열차가 모든 역에 정차하는 형태로 하루 10여 회 남짓 운행됐었다.
  • 일제가 건설 중이던 최후의 철도는 동해중부선이었다. 금강산선의 선로조차도 전쟁 물자로 공출되어 나가던 와중에 저기는 그래도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1) 경부선 철도는 1905년 개통 당시에는 지금의 국도 4호선의 선형처럼 금오산 고갯길을 오르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실제로 열차를 운행해 보니 증기 기관차의 출력이 너무 딸려서 고작 그 오르막도 제대로 오르지를 못했다.
보조 기관차를 장착하는 별짓을 다 하다가 10여 년 뒤에는 결국 산기슭을 북쪽으로 빙빙 돌면서 구미 시내를 더 가까이 우회하는 형태로 철길이 새로 만들어졌다. 참 공교롭게도 박 정희가 비슷한 시기에 딱 거기 일대에서 태어났다.

(2) 1930년대에는 경성(서울 역)-서소문(충정로)-아현-신촌-서강-대흥-공덕-용산을 삥 도는 10km 남짓한 '경성 순환 노선'이라는 일종의 단거리 도시철도가 다닌 적이 있었다. 노면전차가 아니니 혼동하지 말 것~!!
이 짧은 단선 철도에서 꽤 빡세게 교행을 하면서 양방향 운행을 했다니 일본이 철도 운영 기술은 정말 뛰어났던 것 같다. 딱 이 비슷한 시기에 서울-부산을 증기 기관차로 6시간 반을 찍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철도는 전철이 아니었으며, 디젤 동차 내지 휘발유 동차가 투입됐었다고 한다.
1944년에 일제가 전쟁 때문에 물자 공출 명목으로 선로와 차량을 뜯어가 버리면서 폐지됐다. 하긴, 저 때는 기름이 없어서 목탄가스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경제 사정이 궁핍했었다.

3. 해방 이후

(1) 경인선은 나름 증기 기관차 → 디젤 동차 → 전철을 모두 경험한 철도이다. 디젤 기관차나 휘발유 동차가 공식 운행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디젤 동차의 경우, 1965~66년 사이에 복선화와 함께 도입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요런 차량이 경원선에서도(용산-성북) 전철화 이전에 운행됐었다.

(2) 우리나라 철도에서 공식 운행된 마지막 협궤는 잘 알다시피 구 수인선이다.
정규 열차 운행 구간 중에 마지막 통표 폐색 구간은 정선선 정선-아우라지 구간이라고 알려져 있다. 정선선은 비둘기호가 마지막으로 다녔던 곳이기도 하고, 원시적인 폐색 방식이 최후까지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한 셈이다.
한편, 원시적인 완목 신호기가 2024년 현재 아직도 현역으로 쓰이는 최후의 장소는 강원도 북평선의 삼화 역이라고 한다. 여기는 여객철도는 아니고 시멘트 공장에서 운영하는 사철/화물철도라고 한다.

(3) 공장이나 발전소로 들어가던 철길 중에 없어진 것들이 많다. 서천화력선(장항선의 지선), 화순선(우리나라 탄광 1호!), 군산 부근에 있던 전설적인 세풍제지선..
오류동 역에서 뻗어서 남쪽 부천과 시흥시의 공장과 군부대로 들어가던 경기화학선도 생각난다.
부산에는 문현선이라고 1972년, 수려선과 비슷한 시기에 폐선된 철도가 있었다. 그 반면 우암선은 지금도 현역이다.

현대제철(당진)· 포스코 같은 제철소로 들어가는 철도는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반면, 서빙고 역에서 용산 미군 기지로 들어가는 철도, 호남선의 지선으로서 논산 육군훈련소 부지로 들어가는 철도(연무대 역!)는 아마 지금은 준폐선 상태겠지..??

(4) 철도청 포함 정부에서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시골에서 전적으로 주민들이 요구하고 주민들이 역 건물을 직접 짓기까지 해서 만들어진 역이 딱 두 곳 있다. 경부선 신거(새마을 운동 관련)와 영동선 양원(진짜 노답 첩첩산중 오지여서). 물론 둘 다 지금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역은 아니다.

(5) 교외선은 폐선될 듯 말 듯하면서도 그래도 완전히 버려지지는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복선 노반만 확보해 놓고 일단은 단선으로라도 전철화해서 가끔 전동차나 ITX-청춘, 화물열차를 굴리면 되지 않을까 싶다.

해방 후에 우리나라에서는 교외선과 경원선 선로를 주축으로 해서 순환 노선 열차를 운행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절 당시의 자그마한 경성순환선보다 고리의 크기가 훨씬 더 커졌다.
고속도로는 '서울외곽순환'이 '수도권1순환'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는데, 철도는 '서울교외'가 그냥 '교외'라고 개명됐다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9 19:35 2024/07/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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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위대한 일을 했지만 곧 사자에게 물려 죽은 어느 일회용 선지자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 이야기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교훈거리가 많다. 그건 예전에 "자의와 타의의 경계 문제" 글에서 이미 다뤘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엘리야 이야기부터 시작하도록 하겠다.

1. 갈멜 산에서의 불 대결

(1) 열왕기상 18장에 기록된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 말이다.
안 그래도 극심한 가뭄 때문에 물이 귀한 상태였는데.. 엘리야는 기도를 하기 전에 제단에다가 물을 수십 리터 이상 끼얹어서 아예 도랑을 만들었다. 왜 그랬을까...??

아 물론 화력 조절을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화재, 산불 예방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내 뇌피셜이다.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왕상 18:38)
모든 게 바짝 말라 있던 산에서 저런 화염이 떨어져서 불똥이 잘못 튀면.. 그야말로 대재앙이 벌어지지 않았겠느냐 말이다. =_=;;

저 때 도랑의 물은 불길의 열기 때문에 순식간에 증발하면서 허연 수증기를 왕창 뿜어냈지 싶다.
로켓 발사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발사대의 아래에는 로켓 엔진이 뿜어대는 어마어마한 화염 열기를 받아내고 주변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물이 잔뜩 담겨 있다. 로켓 발사 직후에 천지를 뒤덮는 허연 연기들은 대부분이 수증기이지, 단순 배기가스가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대륙 정도나 횡단하는 가벼운 미사일은 순식간에 쌩 날아가서 발사대를 벗어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사람이나 인공위성을 싣고, 정지 궤도 진입까지 목표로 연료까지 왕창 많이 실은 거대한 우주 발사체는..??
너무 무겁다. 발사 직후에는 몹시 굼뜨면서 완전히 상승할 때까지 발사대에 오랫동안 대미지를 준다. 마치 무거운 디젤 트럭이 갓 출발할 때는 시꺼먼 매연이 왕창 많이 나오는 것처럼..
그러니 이런 대형 우주 발사체의 발사대는 하단에 냉각 설비를 특별히 빵빵하게 갖춰야 한다.

아이고 엘리야 얘기하다가 우주 발사체 얘기로..
뭐 엘리야는 신의 도움으로 하늘에서 불을 내린 적이 있었고, 심지어 자기도 승천해서 하늘로 올라갔다. 저런 무거운 로켓 엔진의 도움이 없이도!
그러니 엘리야 이야기와 우주 발사체 얘기는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으잉? ㄲㄲㄲㄲㄲ

(3) 저 때 엘리야를 대적했던 사람이 무려 950명이나 됐다. 18량에 길이가 388m이나 되는 KTX 열차 한 편성에 간신히 다 탈 수 있는 인원이다.;;
바알 선지자 450은 이해되는데 나머지 400명은.. 아세라(한킹)? 작은 숲(흠정역)? 도대체 뭘 숭배한 걸까?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둘은 음역이냐 번역이냐의 차이이다. 나무를 깎아서 무슨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장승 목상이라도 만들어서 숭배한 건 아니고.. 저거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말한다.
근데 숲이라고 하면 무슨 대자연 mother nature 숲의 정령이라도 숭배하나.. 이런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저쪽 진영에서는 그냥 평범한 숲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아세라' 음역을 선택한 것이다.

요약하자면,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자체를 지지하지 않는 진영에서는 장승 같은 '목상'을 떠올리고, 킹 진영에서는 살아 있는 나무가 심긴 숲을 떠올린다. 근데 한킹 진영에서는 숲과 우상을 모두 반영하려고 아세라 음역을 했고, 딴 킹 진영에서는 '작은 숲'을 골랐다는 것이다.
참고로 흠정역은 탬버린도 '작은북'이라고 옮겼기 때문에 '작은'이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4)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알인지 뭐시긴지, 그 배후에 있는 사탄 마귀도 원래 하늘에서 불을 내릴 능력 자체는 있는 놈이다. 욥 1:16을 보면 생존자가 이건 하나님의 불이라고 착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갈멜 산의 대결 중에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불 내리는 걸 막고, 허용하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사자들의 입을 막은 것처럼 말이다.

(5) 비가 진짜로 내릴 거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 안 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성을 간다, 내 전재산 다 건다" 이런 극단적인 약속은 못 하더라도 최소한 밖에 나갈 때 우산이라도 챙겨 가야 하는 법이다. 그게 그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최소한의 증거이다.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린 다음에는 당장 불보다도 더 필요한 비도 실제로 끌어 오는 데 성공했다. 그 반면, 출애굽기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개구리들을 생성하는 훼이크까지는 쳤지만 개구리를 없애는 일은 흉내 내지 못했다.

2. 기근

열왕기상 3장에는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기록돼 있다.
한 집에 같이 사는 여인 2명이 각각 자기 아들을 낳았다. 그런데 그 중 한 여인이 자기 아이를 실수로 압사? 질식사 시키고는 남의 아이를 몰래 바꿔치기해 버렸다. 이 때문에 그 아이의 진짜 엄마가 누군지를 갖고 분쟁.

이런 사건은 CCTV나 하다못해 유전자 감식 기술만 있었으면 실제 엄마를 찾아내는 게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저 때는 무려 기원전 900년대였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왕은 칼 한 자루만으로 사건을 간단히 해결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00여 년 남짓 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여기서도 여인 2명이 애 때문에 다투고 있고 국왕에게 중재를 호소한다. 여기까지는 솔로몬의 재판과 아주 비슷한데 이 본문에서 여인들이 다투는 이유는 정말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이때도 인류 멸망 급의 기근이 있었다. 그 흉년 기근을 견디다 못해 두 집이 아이를 서로 맞바꿔서 잡아먹을 지경이 됐다. 자기 친자식을 차마 먹을 수는 없어서 말이다. 이거 무슨 더러워진 양말이나 속옷을 갈아입긴 하는데 새것이 아니라 상대방 속옷을 교환한다거나 심지어 겉과 속을 뒤집어서 입는 것 같다.. =_=;;;

그런데 그 와중에 A가 B 집 애를 먹어 놓고는 자기네 애를 B에게 넘겨주지 않고 먹튀를 시전했다는 것이다. ㄷㄷㄷㄷㄷㄷ 이건 왕이 뭐 어찌 중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다. >_<

참고로 성경 전체에서 뭔가 물가 예시를 들면서(= 물가 폭등) 극심한 기근을 묘사하는 게 저 열왕기(왕하 6:25), 그리고 계시록 대환란(계 6:6) 이 둘뿐이다.
그 뒤 예레미야애가에도 소말리아나 북한 애들 같은 끔찍한 묘사가 여럿 나온다. 어린애가 밥을 너무 못 먹어서 졸도한다거나(애 2:12), 애엄마가 자녀를 잡아먹거나(애 2:21).. 심지어 제일 인정 많고 여리고 소녀감성 유리멘탈 물멘탈이던 여인일지라도 인륜이고 천륜이고 다 저버리고 오로지 밥에 목숨 거는 짐승처럼 돌변한다는 묘사가 있다(애 4:10)!

요즘은 농업과 상업이 발달한 덕분에 저런 원초적인 기근은 아니어도.. 빚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부모가 자녀와 같이 동반 ㅈㅅ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 전쟁에서는 천하의 미군도.. 기근은 아니지만 인간의 한계까지 너무 고생하고 쪽발이들의 광기에 학을 떼다 보니 일부가 맛이 가 버리기도 했다. 죽은 일본군 시체를 분해해서 두개골을 전리품으로 갖고 다니고, 찦차나 땅크에다 악세사리처럼 장착하고, 그걸 심지어 여친한테 선물로 주기도 하고.. -_-;;

사람은 조금만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 정신줄 놓고 금세 야만인으로 바뀔 수 있는 것 같다. 그게 새삼스러운 일이 절대 아니다.

3. 바빌론 포로기

그 뒤 이스라엘은 갈 데까지 가서 북왕국은 아시리아에게, 남왕국은 바빌론에게 모두 멸망해 버렸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바빌론 포로기 70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죄악을 정산한 기간이면서 한편으로 이들 민족을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개조시킨 기간이다. 그리고 안식년을 한 번도 맞이하지 못한 채 혹사당하던 땅을 강제로 휴경시키고 지력을 회복시킨 기간이기도 하다. (대하 36:21)

이때 “쳐맞고 바빌론 갈래, 그냥 바빌론 갈래?”밖에 선택지가 없다고 진실을 선포했던 선지자는 졸지에 매국노 민족반역자 비국민으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예레미야.
그러나 70년이 지나자 아무 기적이나 이변이 없는데 정말 뜬금없이 귀환령이 딱 떨어진 것도 과거의 출애굽 사건 이상으로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70년은 인간의 자연 수명에 필적하는 기간이다. 우리나라 일제강점기나 이스라엘 출애굽 세대의 광야 뺑뺑이 기간의 2배에 가까운 기간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역사도 인제 얼추 70년을 넘었다.
이 70년은 단기간이 아니니 당장 집 짓고 농사 짓고 정착은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대대로 수백 년 영원무궁토록 눌러앉아 있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기간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사는 크리스천들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당장 이 세상에서 자기 생업을 갖고 돈 벌고 저축도 하면서 열심히 살 필요는 있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인 듯이 미련을 갖고 매몰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들을 언제든지 몽땅 놔두고 버려두고 떠나게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건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특히 구원 받은)이 죽었을 때, 당장은 당연히 슬퍼하고 애도하고 유족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땅이 꺼질 듯이 멘탈 붕괴되고 실신한다거나, 너무 상심해서 그 뒤로 매일 술에 파묻혀 산다거나 심지어 자기도 같이 따라 죽는다거나.. 그 정도로 극단적으로 행동할 필요는 없는 것과도 비슷한 자세인 것 같다. 크리스천들에게는 그것보다 더 큰 그림과 보험 보장이 있고 진짜 본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바빌론 포로기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니 꽤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대이동을 했던 기원전 500년대부터 400년대 사이.. 하필 이 시기에 아시아에서 불교와 유교가 생기고, 중국 대륙에 온갖 제자백가 사상가 철학자들이 나타나 활동했던 것은 개인적으로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4/07/14 08:35 2024/07/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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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1912년 4월)로부터 딱 25년 뒤인 1937년 5월엔.. 그 이름도 유명한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화재· 추락 사고가 났다. 둘 다 출발 후 3일인가 4일 정도 지나서 사고가 났다. 특히 후자는 목적지인 뉴욕까지 완전히 다 와서 착륙 직전이었다.

증기선과 비행선이라니.. 오늘날--적어도 20세기 후반부터--에는 한물 간 느린 물건이 저 시절엔 장거리 대륙 횡단 여행용으로 현역이었다는 게 흥미롭다.
둘 다 엄청 거대하기도 했다. 타이타닉이 길이가 거의 270m인데, 힌덴부르크도 무려 245m에 달했다고 한다.

비행선이 아니라 비행기인 에어버스 A380이나 보잉 747 등은 그냥 70m 남짓이다. 힌덴부르크의 길이의 1/3이 채 되지 않으며, 명함도 내밀 수 없다.
물론 배수량이 50000톤이 넘는 타이타닉과 달리, 힌덴부르크 기체의 최대 이륙 가능 중량은 232톤에 불과했다. 덩치는 저렇게 육중하지만 실제 무게는 오늘날의 대형 비행기보다 가벼웠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박은 물에만 뜨면 되지만 비행선은 아예 공기 중에서도 떠야 했으니 말이다.

공통점 말고 차이점을 더 살펴보면.. 타이타닉 호는 영국 소속이었던 반면, 힌덴부르크 호는 히 총통 휘하의 나치 독일 소속이었다.
그리고 타이타닉 때는 탑승자가 2200여 명 중 1/3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한 반면, 후자 때는 반대로 탑승자 97명 중1/3 정도만 희생되고 나머지는 살아남았다. 탑승자가 100명이 채 안 됐었고 그냥 옛날 콩코드와 비슷했다;;

2.
일반적인 비행기들은 끊임없이 빠르게 움직여야만 양력을 얻을 수 있는 반면, 비행선이나 헬리콥터나 인공위성(정지궤도)은 공중에 뜬 채로 가만히 있을 수 있다. 떠 있는 방식이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지만 말이다. ㄲㄲㄲㄲㄲ
비행선은 오늘날의 양력 기반 비행기와는 비행 원리가 완전히 다른 관계로, 사고가 나도 비행기보다는 훨씬 덜 위험했다.
일단 화재의 규모부터. 저 거대한 몸뚱아리에다가 헬륨이 아닌 수소를 집어넣었으니 엄청난 불바다 생지옥이 펼쳐졌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비행선 안의 수소는 부력 생성용의 가벼운 몸빵일 뿐, 내연기관 구동용 연료가 아니다! 수소를 초저온에 액화시키거나 압축해서 꽉꽉 구겨넣은 게 아니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저 때는 그런 기술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화재라기보다는 가스 폭발에 가깝게 한번 쾅 화염이 치솟은 뒤엔.. 불은 생각보다 금방 꺼지고 없어졌다.

오히려 오늘날 최신 배터리 기술이 접목되어 만들어진 전기차들이 한번 불이 나면 불이 지독하게 안 꺼져서 골칫거리이다. 그 작은 몸체에서 열과 불길이 끝도 없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엄청난 비열을 자랑하는 물조차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불을 끄는 게 아니라 자기가 몽땅 증발해 버린댄다.
그래서 불 끄는 데 물이 수만 리터가 필요하다는 거다. 비행선의 수소 탱크도 위험물이긴 하지만 저 정도로 에너지가 밀집된 위험물은 아니었다.

끝으로.. 힌덴부르크의 경우, 공중도 아니고 다 도착해서 하강과 주기(!!!) 거의 직전까지 가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했다. 수소가 빠져나가고 부력을 상실할 때도 생각보다 천천히 사뿐히 내려앉았다.
출입문 쪽이 바닥을 향하게 내려앉는 바람에 거기 있던 사람들이 탈출을 못 하고 죽긴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 화재로 인한 사망이지, 추락 충격으로 인한 사망은 전혀 아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힌덴부르크가 미국에 다 와서 사뿐히 내려앉는 최후의 모습이 일단 영화 필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여러 방송사에서 촬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꽃이 튀고 화재가 발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엔 하필 아무도 촬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그 모습은 참 안타깝지만 기록이 없다!! 폭발 사고가 나는 모습이 생생히 촬영된 챌린저 우주왕복선과는 상황이 달랐다. (☞ 당시 기록 영상. 2:53~54 사이)

오늘날 전해지는 최후 모습을 보면.. 둥실둥실 기지로 내려가다가 (중간 생략) 갑자기 불길에 휩싸인 채 기우뚱 상태..로 화면이 바뀐다. 눈부신 화염으로 인한 광량차 때문에 하늘 배경은 갑자기 저녁처럼 어두워져 있고 말이다.

1975년에는 나치에 반대하는 유대인 공작원이 힌덴부르크 안에다가 몰래 폭탄을 심었다는 음모론을 넣어서 '힌덴부르크'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음모론은 음모론일 뿐.. 도대체 어디서 불이 갑자기 왜 났는지.. 힌덴부르크의 사고 원인은 결국 정확하게 밝혀내지 못하고 공식적으로 '불명'으로 처리됐다.

저 당시에 사람이 타는 비행선에 위험한 수소가 잔뜩 들어있었던 이유를 아는 분들은 이미 아실 것이다. 안전한 헬륨은 수소보다 더 비싸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그 당시 미국이 적성국인 나치 독일에다가는 헬륨을 수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어찌나 물자가 풍부했는지 독일을 상대로는 헬륨을 안 팔고, 일본을 상대로는 석유를 안 팔아서 추축국들을 똥줄 타게 만들었다. 참 흥미로운 점이다.

여담이지만.. 옛날에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 역에서 안 중근 의사에게 저격 당했을 때 말이다. 이건 중요한 행사이니 러시아에서 전 과정을 영화 필름으로 녹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영상을 일본에서 입수해서는 이토가 총 맞는 장면은 완전히 폐기하고 없애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토의 최후 영상도 이미 쓰러져서 실려가는 장면만 녹화됐지, 안 중근이 나오고 저격 당하는 장면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건 마치 힌덴부르크 비행선의 최후와 비슷한 구석이 느껴진다.

4.
저렇게 갑자기 불길에 휩싸여 추락하는 힌덴부르크의 모습을 보고 어느 기자가 너무 멘붕해서 "Oh the humanity!!" 무슨 세상 종말 인류 멸망급의 감탄사를 내뱉었다. Doom Comics에도 나오는 대사인데 그게 이 힌덴부르크 사고에서 유래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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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몸소 이 지옥의 괴물들을 무찔러 주면 뭘하나~ 지구가 이미 방사능에 오염돼 버렸는걸.. 그럼 우리 아이와 아이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오~ 인류여!!! (oh the humanity!!)"
이런 미친 병맛 중2병 쩌는 개드립 대사가 있다~~~ ㅠㅠㅠㅠㅠㅠㅠ

5.
비행선의 비행 원리와 관련하여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으려나 모르겠다.
탱크 안에다가 수소나 헬륨 따위를 넣을 게 아니라, 공기를 싹 빼내서 아무 물질도 없는 진공으로 만들어 버리면 어떨까? 진공 비행선은 만들 수만 있다면 수소 비행선보다도 더 가볍고, 폭발 위험도 없지 않겠느냐 말이다.

옛날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진작부터 했었다. 그러나 이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구의 대기압이라는 게 진공을 호락호락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힌덴부르크 같은 거대한 비행선이 내부가 진공이면.. 대기압에 짓눌려 금세 짜부러져 버린다.
그리고 그 압력을 버틸 정도로 튼튼한 진공 탱크는 두꺼운 금속 재질이 필수이며.. 그러면 너무 무거워져서 어차피 비행선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뭔가 영구기관 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비록 비행선이 오늘날 같은 정교한 엔진이 탑재된 물건은 아니지만, 저걸 만드는 것도 말처럼 쉽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옛날에 마찰이라는 물리 현상을 모르던 시절엔 사람들이 자연이 물체가 움직이는 걸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처럼 대기압이라는 걸 모르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자연이 진공을 싫어한다, 진공을 만드는 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거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4/06/14 08:35 2024/06/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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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스코(포항 제철) 1고로: 1973 ~ 2021 (48년)

1960년대 말, 울나라에서 그 깜냥에 제철소를 만들겠다니 말도 안 된다면서 선진국 금융기관들에서는 울나라에 돈을 빌려 주지 않았다. (보나마나 실패할 것이고, 빌려준 돈은 떼일 것이다) 그래서 울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갓 수교를 맺은 일본으로부터 일제 시대 착취 피해자 배상 명분으로 받았던 보상금과 차관을 슬쩍 전용해서 제철소의 건설에다 투입했다.

그러니 포항 제철 박 태준 초대 회장은 기공식 때 "우린 조상님들 피값으로 제철소를 만든다. 감히 실패한다면 다같이 우향우 해서 쪼기 영일만 바닷물에 뛰어내려서 죽어서 속죄하자" 이렇게 결의했었다.
1973년 6월 9일, 이렇게 만들어진 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박 회장과 측근들은 만세 부르고 부둥켜안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한국 철강 협회에서는 6월 9일을 '철의 날'이라고 자체적으로 기리는 기념일로 정했다. 고속도로를 만든 다음에 제철소, 제철소도 만든 그 다음에야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엄청난 고온에서 불순물 없이 품질 좋고 단단한 철을 저렴하게 많이 뽑아내는 건 첨단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바로 그 제1고로가 수명이 한참 다해서 지난 2021년 12월 29일에 종풍식을 하고 폐쇄됐다.
참고로 용광로는 마치 냉동실이나 원자로처럼 일부러 끄고 대대적인 정비를 할 때를 제외하면 중간에 가동이 절대로 중단돼서는 안 되는 크리티컬한 물건이다. 뜨거운 쇳물이 24시간 내내 흐르고 있어야지, 그게 아무 준비 없이 식어서 굳어 버리면.. 고로에 엉겨붙어서 장비가 다 망가지기 때문이다.

포스코 측에서는 이 1고로를 보존하고 활용해서 철강 박물관 같은 걸 만들려는가 보다. 마땅히 그리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도 제1정수장이 지금 수도 박물관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활용이다.

2. 고리 원자력 발전소 원자로 1호기: 1978 ~ 2017 (39년)

포항제철은 만드는 데 3년이 걸렸지만, 울나라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는 더 어려워서 그런지 6년이나 걸렸다. 1972년부터 박통의 8대 유신 시절 내내 만들어서 1978년 4월 말에야 상업 운전이 시작됐다.

원자력 같은 어려운 전문 분야는 박통의 공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원자력이라든가 항공· 우주 쪽은 일찍이 1950년대 후반, 할배 때부터 외국 유학파 공돌이들을 국비장학생 명목으로 육성했기 때문이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나랏돈을 근근이 쪼개서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중에 박통 시절에 "부디 귀국해서 우리나라를 위해서 일해 주시오~" 이렇게 읍소할 한국인 엘리트 공돌이들이 있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 고리 원전의 건설에도 경부 고속도로나 포항제철, 현대차, 삼양 라면 같은 일화가 전해지는 게 더 있는지 궁금하다.

원자로는 가동을 중단한다고 다가 아니다. 완전히 폐쇄하고 해체하는 데만 10수 년씩 걸린다. 더구나 잔여 시설을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것도 좀.. 곤란할 것이다. =_=;;
고리 다음으로 월성 원자력 발전소 1호기의 생애는 1983 ~ 2018이었다. 그 시절 뭉 머시기 정권의 탈원전 기조에 희생되어 실제 성능과 안정성 대비 무리해서 일찍 퇴역하게 됐다고 난 알고 있다.

3. 고가도로들

다음으로 교통 인프라 차례다.
대도시는 길거리에 차가 너무 많이 다니다 보니 차선과 중앙선을 긋고, 폭을 넓혀서 차로를 늘리고, 교차로에는 신호등을 설치하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호 대기가 없는 입체 교차 고가도로를 만드는 게 상징처럼 됐다.
옛날엔 그랬다. 우리나라는 박통 시절에 이걸 집중적으로 많이 만들었다.

시내 도로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도 옛날에 산을 꼬불꼬불 타넘던 걸 터널과 고가를 남발하면서 곧게 뻗은 길로 다시 만들곤 했다. 그러면 예전의 길은 국도나 지방도로 격하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너무 노후하고 붕괴 위험이 커지고, 굳이 유지 보수할 명분이 사라진 고가 도로는 나중에 도로 철거되기도 했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열거해도 이 정도이다.

  • 아현(1968-2014)
  • 청계(1976-2003)
  • 서울 역(1969-2015)
  • 서대문(1971-2015)

요즘은 옛날보다는 친환경, 보행자 위주 교통 인프라를 추구하고 있기는 하다. 그래도 예전엔 저런 것들이 조국 근대화 흔적이고 상징이었다.

그나저나.. 이웃 일본에서는 1950~60년대에 수도 고속도로라는 걸 온통 고가도로로 도배하면서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시설이 온통 낡고 노후화해서 대대적으로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게 돈이 한두 푼 드는 일이 아니어서 그럴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재정이 부족하니 장기적으로 고속도로 톨비 징수를 폐지하려는 계획도 완전히 물 건너갔다. 이런 것도 참 문제이다.;;

4. 서울 지하철 일명 초저항: 1974 ~ 2004 (30년)

끝으로, 이건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차량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역사상 최초로 운행되었던 지하철 전동차는 아주 의미심장한 역사 유물이다.

전방에 출입문이 있고 단면이 식빵처럼 생긴 바로 그 차량. 운영 회사에 따라 파랑(철도청) 또는 빨강(지하철 공사)으로 나뉘었던 차량이다. 동호인 용어로는 '초저항'(초기 저항)이라고 한다.
얘는 198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도입되었다. 초기 도입분은 일본 히타치 사에서 생산했지만, 그 뒤로 한국과 일본의 여러 기업이 이 차량의 생산에 개입했다.

얘는 1호선뿐만 아니라 2호선(지하철 공사)과 안산선(철도청)에서도 활약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개조 저항'이라고 정말 극소수 낡은 차량의 일부 객차 짬뽕 편성에서나 이 차량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거 말고 오리지날 식빵 모양을 유지하던 그 차량은 2004년경에 다 퇴역해서 지금은 없다.

코레일과 서울 메트로 모두 이 차량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자기 방식대로 한 량씩 보존해 놓고는 있다. (철도박물관 vs 신정 차량기지)

Posted by 사무엘

2024/06/09 08:35 2024/06/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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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년쯤 전이던 2023년 4~5월 사이에 국내외에서는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았던 크리스천 세 분 정도가 소천하여 주님 품으로 갔다.
공교롭게도 표준역 킹 제임스 성경 2판이 출간되어서 막 시끌시끌하던 시기와 비슷하다.
다들 이 블로그에서 이전 글에 언급한 적이 있었던 분들이긴 하다만.. 그때 이후로 새로 추가된 정보도 있으니 한데 모아서 다시 소개하도록 하겠다.

1. 론 해밀턴 (1950 ~ 2023. 4. 19.)

O Rejoice in the Lord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 ...)라는 훌륭한 찬송가의 작사 작곡자이다. “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후렴 끝부분이 “나 주 안에 연단 받은 후 정금같이 되리”인 그 곡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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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분은 질병 때문에 왼쪽 눈을 잃고 인생 대부분을 궁예처럼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눈을 하나 잃은 때도 1978년.. 저 찬송가는 작곡자가 눈을 잃은 뒤에 인생 간증을 담아서 만든 거라고 한다.

본인은 저 찬송가 가사의 안티테제(?) 격으로 An American Crime이라는 2007년도 영화가 떠오른다. 1965년에 미국 인디애나 주 깡촌에서 벌어졌던 실비아 라이컨스 양 학대치사 사건을 다룬 끔찍한 범죄 영화 말이다. 이것도 이미 이 블로그에서 옛날에 언급했던 바 있다.
영화에서는 피해자인 10대 소녀가 누적된 질병과 상처, 영양실조로 인해 결국 죽고 나서 쓸쓸히.. 이렇게 독백하는 걸로 끝난다.

Reverend Bill used to say: "In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 (살아 생전에 다녔던 동네 교회 목사의 말)
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 (그 계획이 뭔지 난 여전히 알쏭달쏭하다)

개인적으로 저 찬송을 부를 때면 저렇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다 포함해서 하나님의 plan이 무엇이고 허락하시는 뜻이 어디까지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하곤 한다. 찬송가 영어 가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결코 실수를 하지 않으시고 내 인생 행로를 다 아신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세월이 흘러서 그 가사를 쓴 찬송가의 작곡자도 소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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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실비아 라이컨스를 연기한 배우 엘렌 페이지.
현재는 남자로 성전환을 해서 ‘엘리엇 페이지’가 됐다 ㄷㄷㄷㄷㄷ)

2. 오야마 레이지 목사 (1927 ~ 2023. 5. 16.)

이 사람은 자기 나라가 이웃 민족에게 저지른 참혹한 죄악에 대해 알게 되고는 너무 멘붕해서 반세기 이상 평생을 사죄하는 일에 앞장섰던 엄청난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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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19년 4월, 제암리 학살 사건에 꽂혔다. 한국과 일본이 이제 막 수교를 맺었던 1965년~67년엔가 한국을 찾아와서 사죄하고.. 십시일반 모금을 해서 제암리 예배당 재건 비용을 대려 했다.
이때는 정작 제암리 학살 유족 후손들조차 더러운 왜놈의 돈 따위 받기 싫다고 차갑게 거절했는데도 말이다.

“바로 옆의 니 형제와도 화해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이 일본 교회의 예배를 받아 주실 리가 없다~ 일본은 대대적으로 사죄해야 한다 //
일본의 과거 침략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그만 됐다고 하실 때까지 계속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있겠습니다” 이랬고..

제일 최근엔 2019년까지도 노구를 이끌고 한국 와서 도게자를 했다. 당연히 삼일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다.
저분은 소천했지만 그의 아들이 계속해서 사죄와 화해 운동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 2020년대에 와서는 새에덴교회 소 강석 목사와 접촉 중인가 보다.

무려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사죄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신앙의 양심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성 특유의 끈질긴 집념과 근성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JR 서일본에서 2005년도 전철 탈선 사고 사과문을 홈페이지에다 현재까지 박제해 놓고 있고, JAL(일본항공)에서 신입사원들한테 1985년도 여객기 추락 사고를 세뇌 주입시키고, 일각에서 20년 전의 의사자 이 수현 씨를 계속 기억하고 추모하기도 하니 말이다.

저 정도로 진심을 다했으니 승무원들이 훈련이 워낙 투철하게 돼서 지난 1월 2일의 여객기 화재 사고 때 수백 명의 승객들이 단 1명도 사망하지 않고 질서정연하게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정 광진 변호사 (1937 ~ 2023. 5. 19.)

딸을 4명 두고 있었는데 3명을 1995년 백화점 붕괴 때문에 한꺼번에 잃은 그야말로 욥의 현실판인 분이었다. 그것도 다들 20대 꽃다운 나이였는데!!
이분은 종로학원의 설립자 정 경진의 동생이고.. 서울대 법대 나와서 사법시험 합격하고 판사로만 10여 년 재직하며 엘리트 코스를 갔다. 그런데 장녀가 초등학교 시절에 질병으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론 해밀턴보다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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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치료를 시도하느라 의료비도 많이 들었는데, 완전히 맹인이 된 뒤에는 특수학교로 통학을 시켜야 하니 자가용이 없으면 도저히 안 되는 지경이 됐다. 자녀 4명이나 키우는데 이런 일까지 생기니 판사를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는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음..;;;

그래도 장녀를 미국 유학까지 보내고 정말 잘 키웠는데.. 그 아이들을 한꺼번에 잃었고 시신조차 못 찾았다고 한다. 그나마 하나 남은 딸도 사고의 충격 때문인지 몇 년 뒤 병으로 죽었다.
이 정도면 이분도 아까 저 American Crime의 결말부 만만찮게 “신이란 게 있다면 도대체 지금 머릿속에 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따질 만도 해 보인다.

저분은 사고 보상금에다가 사재를 보태서 '삼윤 장학재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자기보다 형편이 더 어렵지만 '살아는 있는' 장애인들의 교육과 지원에 애썼다. 그러고 작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하긴, 이렇게 자녀를 잃은 사람이 죽은 자녀 몸값으로 억만금을 받는다 한들.. 그걸로 서울 한강뷰 아파트를 사겠는가, 세계일주 오성급 호텔 원정을 가겠는가? 자녀 이름을 딴 장학 재단 만들거나 복지와 관련된 일에 보상금을 쓰게 된다.

딸들은 살아 생전에 서울에 소재한 영화교회라는 곳을 다녔으며, 이분도 신앙이 있었고 교회 장로였다고 전해진다. 소천했을 때 빈소가 분당 서울대 병원이었고, 새에덴교회에서 무료 법률 상담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니 노후는 분당에서 보냈던 것 같다.
어째 새에덴교회가 오야마 레이지 목사와 정 광진 변호사하고 모두 접점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Posted by 사무엘

2024/05/14 19:35 2024/05/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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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조국의 "까라면 까"

1. 까라면 까

20세기 중반에 미국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공밀레 "까라면 까"는 이 둘이지 싶다. -_-;;

(1) "흠~~~ 엔진이랑(정확히는 보일러) 엘리베이터가 큰 이상 없다니 그럼 됐다. 이 정도 대미지는 사흘이면 충분하다. 요크타운을 이 기한 안에 수리를 마치도록. 우린 지금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체스터 니미츠 제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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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시절, 배수량이 2만 톤을 넘는 큰 항모가 갑판에 이전 전투(산호해 해전) 폭탄을 맞고 다 부서져서 함재기를 적재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전문가들이 보니 이건 제대로 수리하는 데 3개월은 잡아야 할 큰 대미지였는데.. 우리의 제독님이 3주도 아니고 3일로 기간을 일방적으로 후려쳤다.

군에서는 화들짝 놀라서 SCV들을 싹싹 긁어모아서 밤새도록 갈아넣고 특근을 시켰다. 무려 1400명에 달하는 정비공들이 달라붙어서 사흘 만에 간신히 외형을 복원하고, 함재기 적재와 항해가 가능한 상태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이걸로 모든 수리가 제대로 끝난 건 물론 아니었다.;;; 그러니 요크타운이 일본놈들과 싸우러 출항할 때, 공구를 바리바리 싣고 수리공들을 같이 태우고 갔다. 항해하면서도 계속 내부를 땜질하고 수리해야 했다.

이 조치 덕분에 나중에 일본군도 놀랐다. "어, 코쟁이들한테 항모가 하나 더 있었나? 요크타운은 우리가 분명 박살을 냈는데..???"
이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뒤, 이번엔 완전히 격침되어 침몰하는 걸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우리나라 손 원일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 군함을 사 올 때 미친 협상력으로 가격을 말도 안 되게 후려쳤었는데... 니미츠는 이렇게 전시에 군함의 수리 일정을 후려쳤다는 차이가 있다.

(2) "우리는 이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말 것입니다. 그게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케네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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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이렇게 선언을 덜컥 해 버리니 그 당시 NASA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모든 게 소련에게 뒤쳐져 있었고 아무 기술이고 노하우가 없었는데.. 도대체 어쩌라고?

근데 천조국의 돈지랄과 미친 공밀레가 기적을 만들어 냈다.
1968년 말의 아폴로 8호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실험들을 여러 단계 한꺼번에 밀어붙여서 사람이 기어이 달을 한 바퀴 돌고 무사히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뭐 하나 삐끗 잘못했으면 사람이 지구로 못 돌아오고 우주에서 죽어 버릴 수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10호는 달에 내려가는 시늉만 잠깐 하다가 돌아왔다. 이때 승무원이 자기는 달에 뼈를 묻고 말겠다고 객기 일탈을 부렸으면.. 큰일날 수도 있었다. =_=;; 아직 지구로 귀환하는 시스템은 없었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1969년 7월, 아폴로 11호는 1960년대가 가기 전에 정말 가까스로 인간을 달에 무사히 착륙시키고 지구로 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젊은 대통령 케네디.
자기가 직접 글을 썼는지, 아니면 참모진이 대필해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역설의 진리로 독자들을 불끈 울컥 하도록 글을 잘 쓴 것 같다. 저 연설도 그렇고, "나라로부터 무엇을 받을지 생각하기 전에 자기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지부터 생각해 주십시오" 라는 취임사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_=;;

2. 우리나라의 사례

(1) 우리나라에서 6 25가 터져서 한국 은행이 삽시간에 북괴한테 넘어가 버렸다. 이 때문에 울나라는 돈을 황급히 다시 만들어서 찍고 뿌려야 했는데.. 그걸 맥아더에게 부탁했고 맥아더는 "일본을 상대로 까라면 까"를 시전했다.

1분 1초가 아까운 위급한 상황이었고 패전국 일본은 이 기회에 무조건 미국한테 잘 보여야 했으니... 조폐국(?? 그 당시 대장성) 인쇄부 근로자들을 무기한 야근 철야 명령과 함께 갈아넣었다. 나중엔 GHQ 병사들이 총 들고 인쇄 공장을 찾아와서 직원들을 호위 겸 감시· 재촉했대나..
새 돈 도안 마스터판은 단 이틀 만에 완성됐으며, 돈 한 트럭 분량을 열흘 만에 찍어서 비행기로 실어 날랐댄다. 이거 통상적으로 최대 6개월 가까이 걸릴 일이었다고 한다. =_=;;

(2) 미국이 인간을 달에 보내려고 용 쓰던 동안 우리나라는 경부 고속도로 닦겠다고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으며 용쓰고 있었다. 당재 터널 하나 못 뚫어서 사람 10여 명이 죽고 난리였었다. =_=;;;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는다.
인부들이 며칠 씻거나 옷을 못 갈아입으면서 일했고, 도로 포장을 하던 롤러 운전사는 작업하다가 시간이 없어서 용변을 그냥 자리에서 지릴 정도였다. =_=;.

3. 태평양 전쟁 시절의 미국 대통령

사실, 태평양 전쟁 시절엔 니미츠 제독 이전에 미국 대통령부터가 노발대발해서 내리갈굼을 제일 먼저 시전했었다.
영화 진주만에서 나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명대사. "Do not tell me it cannot be done"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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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인 나도 이렇게 벌떡 일어섰는데 당신들 내 앞에서 안 된다는 소리는 일체 말고 까라면 까시오.
우리 조국의 아들들이 불의의 기습을 당해서 차디찬 바다 속에 수장됐는데 뭐? 폭격기 항속거리가 부족하다고? 무리하다간 항공모함마저 털릴 위험이 있다고?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왜놈들한테 무조건 당장 보복하도록 하시오! =_=;;"

천조국은 이때부터 한 근성 했던 것 같다.
쟤들은 일본에게 천 배 만 배 보복한답시고 처음부터 일본을 통째로 지도에서 지워 버린다거나, 일본 민간인까지 몽땅 잔인하게 학살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쟤들도 우리처럼 똑같이 기습 당하고 허를 찔리고 뒤통수 얻어맞게 해야 된다고.. 여기에 목숨을 걸었다. 단순히 평범하게 전투에서 힘으로 밀어서 패배시키는 것 이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항공모함에서 자그마한 함재기(프로펠러가 중앙에)가 아니라.. 육중한 육군 폭격기를 발진시킨(프로펠러가 양 날개에) 둘리틀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병맛스러운 일본 카미카제 특공대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멋있지 않은가?

4. 통계와 숫자

영화 미드웨이를 보면 이런 장면이 있다.

- 레이튼: 일본군의 현재 동태는 이러한데, 첩보에 따르면 아마 요 때쯤에 요기 일대에서 요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추측됩니다~~ (어쩌구저쩌구 브리핑)
- 니미츠: 그래서 결론이 뭐지? 그 추측만으로는 범위가 너무 넓고 막연한데? 어렵겠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라. 그래야 작전을 짤 수 있겠다.
- 레이튼: (하... 나더러 어쩌라고~ 자포자기하듯) 일본군은 오는 6월 4일 현지 시각 아침 7시 정각에 북서쪽 325도 방향으로부터 러쉬를 와서 미드웨이로부터 175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될 예정입니다.
- 니미츠: 좋아~ 난 내 부하의 말을 믿는다. 참모진은 저 정보를 바탕으로 곧바로 작전을 짜도록 해라.

(나중에 실전 당일에)

- 아무개: 적 항공모함이 미드웨이 북서쪽 320도 방향, 18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관측됐습니다~!
- 니미츠: (시계를 보더니) 오~ 레이튼. 오차가 딱 5분, 5마일, 5도밖에 나지 않았군?
- 레이튼: 충성! 다음번엔 더 잘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 상황에서나 저렇게 레이튼 소령 같은 뽀록을 만들 수야 없겠지만.. =_=;;윗사람, 경영을 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거, 숫자, 통계, 데이터를 좋아한다. 저게 뭔가 군대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일 잘하는 요령이고,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할 때 좋은 인상을 주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요령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또 하게 된 계기는 그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국정연설이었다. (미드웨이는 거의 2019년 말 개봉이었고 저거는 2020년 초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 미쿡이 지난 반세기 이래 제일 낮은 실업률.
  • 700만 개의 일자리 창출, 지난 3년 동안 경제활동인구 350만 명 증가. 공장이 12000개 증설.
  • 어디 여성 취업률 72%..;;
  • 주식 시장 70% 성장, 국부 창줄 12조 달러.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우리민족끼리 평화, 착한 경제, 사람이 먼저 소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따박따박 무언가가 얼마만큼 생기고 경제가 살아난 걸 입증해 보이는 게.. 일단 말만 들어도 시원시원하다.

물론 숫자와 통계에도 속임수와 말장난과 조작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저것만 너무 집착하면 또 전시행정 같은 다른 부작용 폐단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숫자와 통계는 두리뭉실하지 않고 일단 객관적이다. 하다못해 그걸 까고 반박하는 거라도 정확하게 공략해서 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고, 최소한의 전문성과 책임감이 담겨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숫자를 이용할 뿐이다"란 말도 있잖느냐 말이다. (by 마크 트웨인 ㄲㄲㄲ)

우리나라도 근로자건 정치인이건 저런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우대했으면 좋겠다.
자매품으로 '협상 잘하는 요령'은.. 영화 패트리어트에 나와 있다고 여겨진다. 민병대 대장인 마틴이 적진에 홀로 찾아가서 구라까지 쳐서 포로들을 무사히 데리고 온 거 말이다.

5. 미국의 인내심의 한계

미국은 복수귀로 돌변하여 일본을 차근차근 쳐발랐다.
그런데 전쟁이 너무 길어지고, 일본은 제 살 깎아먹으면서도 도무지 항복을 안 하면서 악으로 깡으로 미국에 출혈을 강요했다. 이오지마 전투의 트라우마까지 추가되니 미국도 점점 지치고 악이 받쳤다.

병사들은 일본군 skull trophy를 챙기는 지경이 됐고, 수뇌부들은 핵폭탄 등 온갖 극단적인 방법까지 고려하게 됐다.
핵 투하는 정말 인내심이 한계 중의 한계에 도달한 뒤에야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미국은 그걸로도 모자라서 "쪽발이들은 이래도 항복을 안 할 것이다", "소련이라도 끌어들여서 힘을 합쳐 일본을 조져야 된다" 이런 비관적인 방향으로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랬는데 리 승만 할배는 미국에게 그러지 말라고.. "니 혼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일본은 항복할 거다. 소련을 끌어들이지 마라. 전후에 한반도엔 미국만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 이렇게 독려했었다. 그게 해방 후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봤던 선견지명이었는데..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우리나라는 식민지 트라우마 때문에 신탁통치조차도 반대하고 남북분단을 선택했으며.. 그게 이제 반영구적으로 굳어져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28 08:35 2024/04/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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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남 도발 내력

이 글에서는 일단 100% 확실한 팩트부터 늘어놓은 뒤, 논란이 있는 분야로 화제를 차차 옮기도록 하겠다.
쟤들은..

  • 대놓고 전면전을 벌인 건 1950년 6· 25 사변이 3년쯤 뒤 휴전으로 끝난 이래로 두 번 다시 엄두를 못 냈다.
  • 여객기 납치 내지 테러는 1987년 대한항공 858편 폭파가 마지막이다. (그 전엔 창랑호, YS-11기 납북)
  • 남침 땅굴이 발견된 건 공식적으로는 1990년 제4땅굴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70년대 중후반에 1~3땅굴)
  • 전투기를 몰고 온 귀순은 1996년 이 철수가 마지막이다. (그 전에는 1983년, 이 웅평)
  • 고전적인 방식의 무장공비 침투는 1996년 강릉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1968년 서울 청와대 부근 습격과, 울진-삼척이 아주 유명)
  • 수상함을 이용한 해상 무력 도발은 2009년 대청해전이 마지막이다. (그 전엔 2002년 제2 연평해전이 유명) 이 방식으로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쟤들은 이듬해에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을 일으켰다.
  • 핵실험은 2017년 제6차가 마지막이다. (2009년에 첫 시도)
  • 그리고 미사일 도발은 지금까지도 간간이 하고 있다.

북괴는 도발하는 방식만을 바꿨을 뿐, 본질적인 전략은 지금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쟤들이 도발하는 방식을 바꾸게 된 건 국군이 기존 알려진 도발 방식을 꾸준히 차단· 저지하고 가성비를 떨어뜨리고 봉쇄해서 나라를 지켰기 때문이다.

2. 관련 영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잠복 (잠입)" (2020)이라는 독립 영화가 있던데..
나름 "태양 아래"(2016)를 능가하는 엄청난 근성의 산물인 것 같다.
주인공이 북한에 단순 외국인 관광객 신분이 아니라 아예 무기 밀매상으로 위장하고 들어가서 북한의 치부를 아주 오랫동안 몰래 촬영해 온 것이다.
20여 년 전에 '기 들릴'이라는 외국인 만화가가 공개했던 평양 체류기 만화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난 처음엔 영화의 배경부터가 이해가 잘 안 됐다.
"엥 KFA? 유럽에 사는 교포 빨갱이가 아니라 유럽 백인들 중에 위수김동 거리는 미친놈이 있다고? 구소련이 있던 쌍팔년도 시절 얘기 아냐?" 출국(2018) 같은 배경이 떠올랐는데.. 전혀 아니구나.
2010년대, 심지어 "태양 아래"와 동시대 얘기이다.

북괴가 대북제재를 어떻게 회피하고 먹고 살려고 몸부림쳐 왔는지, 쟤들이 얼마나 세계 평화에 도움이 안 되는 민폐 짓거리만 일삼고 있는지를 이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접했던 그 어떤 북한 고발 매체· 컨텐츠와도 겹치지 않는 참신한 내용이더라.

국정원 1급 요원도 못 할 일을 제3국 평범한 소시민이 해내서 북한 체제를 엿먹였다. 이런 영화가 국내에 더 많이 알려지기를..
북괴에서는 이 영화 내용에 대해 당연히 다 조작이라고 반발하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실제 북한 미사일 TEL 같은 디테일을 일개 밀덕이나 영화 감독이 뽀샵으로 주작 가능하지는 않다.

이게 '락스퍼 국제영화제'의 앙코르 상영 명목으로 작년 가을에 서울 종로3가에 위치한 CGV피카디리에서 재상영됐다.
나름 상영관에 사람들이 많이 오고, 주연배우 간담회 때 질문도 많았다.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교회 댕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많이 퍼진 듯했다.

본인은 여기서 일하시고 영화 포스터를 제작도 하신 분의 초청으로 뒤풀이 저녁 식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한테 방명록을 돌리고 있던 게 나한테도 왔다.
앞을 보니 누군가가 이름인지 소속인지를 '오이박사'라고 써 놨더라.
오오~~ 오이라고? 난 '호박박사'라고 쓸려고 하다가... 관뒀다. ^^

오이박사는 알고 보니 '오직 이 승만 박 정희 사랑'의 이니셜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이와 호박 모두 박과 채소인데... 저분은 농사 짓는 분이 아니었군. ^^
사실 난 그냥 호박소년이지, 호박박사까지는 과분하기도 하다.

이제 다음부터는 글이 다루는 소재와 분위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앞의 1, 2번 확실한 팩트를 염두에 두고서 판단을 해 보시기 바란다.

3. 극단적인 성향

우리나라의 지 만원 박사, 그리고 미국의 게일 리플링거라는 저술가는 다 1940년대생이다. 지금은 무려 80 부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지 박사는 자기가 피타고라스 같은 수학 정리인지 알고리즘인지를 6개나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는 미 해군대학원과 육사에서 잠시 교수로 재직한 적도 있었다.

리플링거는 건축 디자인, 인테리어 분야를 전공했고, 대학교 전공 서적 급의 교과서를 6권이나 집필했다고 자랑한다. 그리고 켄트 주립대에서 수 년간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었고, 테뉴어까지 받았었다고 한다. 다들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랬는데 지 박사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우리나라 현대사와 이념 쪽에 꽂혔고, 나중에는 광주 사태 연구를 계기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버렸다. 땅굴이나 부정선거 말고 저쪽에서 가히 독보적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폭동, 군대 의문사 등등의 배후에는 어지간해서는 다 북괴가 있고, 내 말에 동의 안 하면 다들 빨갱이. ㅠㅠㅠ

이 바닥을 제일 음모론스럽게 강경하게 해석하기 때문에 적이 많이 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우파 보수 사람과도 많이 척졌다. 급기야는 말년에 기어이 구치소에 가게 됐다.

다음으로 리플링거는 자기 전공이 전혀 아니던 성경 역본 이슈에 꽂히더니, New Age Bible Versions라는 책을 써서 이 바닥의 유명인사가 됐다.
그냥 "KJV가 가장 우수한 성경 역본이다" 정도가 아니라 "원래 히브리/그리스어 본문을 언어적으로 압도하고 능가하는 성경이다~" 그리고 나머지 현대 역본들은 변개된 정도가 아니라, 용어와 번역 방식 자체부터가 아주 불순한 뉴에이지(??) 음모론 영향을 받았다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학계부터가 다 부패하고 썩었다고 제일 과격하고 수위 쎈 주장을 한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에 반대자와 적이 많이 생겼으며, 심지어 일부 온건(?) 킹 옹호자조차도 "저건 선 넘었지" 이럴 정도이다. 그렇잖아도 스스로 공개하는 프로필이나 개인사에 불분명한 것, 주작 과장 의심 사항도 있어서 더욱 논란이 되고 있다.

세상에 지 만원 박사와 게일 리플링거를 비교하다니 내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뜬금없군.. -_-;; 활동한 분야 자체 what은 완전 극과 극이고 접점이 1도 없는 사람이다만, how에서는 일말의 동질감이 있는 것 같다. 똑똑한 것 같긴 한데 중년에 생뚱맞은 분야에서 큰 어그로와 논란을 일으키고 강경 파이터가 됐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도 정치 쪽이든 종교 쪽이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장 자체의 사실 여부, 논리적 타당성만 보면서 판단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비판 대상에 대해서 제대로 정확히 알기는 하고서 비판하자. 그리고 인신공격을 하지는 말자."
이 주제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 나도 5 18 항쟁을 무슨 6 25 참전이나 심지어 4 19보다도 더 위대한 듯이 미화하고 무슨 벼슬처럼 나대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한다. 폭동이라고 비하까지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광주 사태라고 계속 부르고 싶다.
  • 6 25는 북괴의 일방과실이고, 광주 사태는 민군경 간의 쌍방과실이다. (민간인 사격이나 반대로 군경 희생자 발생 같은) 희생자를 추모하고 화해니 과거 청산이니 하려면 양측을 다 추모해야 한다.

  •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부 지방 해안까지 북괴 간첩이나 무장공비가 침투하긴 했었다. 저 때 광주에도 소수의 정체불명의 양측 이간질 선동꾼 공작원이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슨 600명씩은 아니며, 시민군이 빨갱이였던 건 더욱 아니다. 600명 침투는 6 25 대한해협 해전 때 있었을 뿐이다. (얼굴 매칭 광수놀이는 제발 좀 ㅠㅠㅠ)

  • 허나,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저 아저씨를 무슨 징역 2년씩이나 매기는 것도 매우 잘못됐다. 광주 왜곡을 처벌하려면 이 승만 대통령 왜곡도 똑같이 처벌해야 한다.
  •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를 허용하려면 "금남로에서 전 땅크 만세"도 똑같이 허용해라. 김 일성 회고록을 출간하려거든 전 두환 회고록도 출간 허용해라.

4. 다른 우파 인사

(1) 조 갑제: 한때 엄청난 극우 수꼴의 대명사로 악명(?)을 떨쳤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과격 극단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지금 종북은 친일보다 더 나쁘다, 대한민국 체제를 부정하는 넘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사라져야 된다" 정도... 이 당연한 말이 뭐 어때서?? 더구나 젊은 시절, 이 사람이 서슬 퍼런 군사정권 때 기자로서 남긴 행적은 그 누가 보기에도 훌륭하고 대단했으니 말이다.

이 사람은 "내가 그때 현장에 직접 취재를 가 봐서 아는데.. 광주에 북한군 따윈 없었다" 이것 때문에 지 박사와 견원지간이 됐다. 다만, 겨우 저런 주장은 "니가 취재한 것만이 전부라고 어떻게 장담하는데?"라는 카운터에 취약해 보인다.

(2) 서 정갑: 옛날에 노 무현 대통령 장례식 때 분향소에서 깽판 쳤던 바로 그 사람이다. 군복 차림에 전형적인 아스팔트 까스통 수꼴 우파스러운=_=;;; 인상이 짙은 분이다만.. 이 사람도 광주 북한군 개입은 단호히 부인한다. 그 시절에 광주 취재는 아니지만.. 계엄사에서 실제로 근무를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개미 새끼 하나 틈타지 못할 정도로 우리 기관에서 샅샅이 다 뒤졌슴다. 그런데 북괴군 600여 명 중에 한 놈도 안 걸렸다..?? 그건 말이 안 돼요."

그는 5 18뿐만 아니라 무슨 이상한 땅굴 음모론도 단호히 일축하고, 530 GP가 단순 아군 팀킬 총기 난사가 아니라 북괴와의 교전 중 전사라는 음모론 역시 부인한다. 이것들이 아예 대한민국 우파 진영을 좀먹는 3대 거짓말이라고까지 선을 긋는다.
근데 이건 최대한 의심하면서 삐딱하게 보면.. 단순히 군의 명예 위신을 위해서 저렇게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과거에 타이타닉 호 생존 승무원이.. 배는 절대로 두 동강 나지 않았다고 입을 맞춰 증언했던 것처럼 말이다.

(3) 이 진삼: 이 사람은 예편 후의 이빨 까는 행적은 좀 똥군기 똥별스러워서 인상이 별로 안 좋지만.. 그래도 1960년대 말에 전방에서 북괴 무장공비와 여러 차례 교전하면서 적을 때려잡고 도발 시도를 저지한 적이 있다. 20여 년 뒤 지휘관 시절엔 제4 땅굴을 찾아내기도 했고.. 그러니 왕년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데 기여한 게 제법 있는 사람이다. 그건 인정해 주자.

이 사람은 "내가 땅굴에 대해서는 좀 아는데... 무슨 내륙 지방까지 땅굴은 개뿔.. 북괴 입장에서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다. 만에 하나 그게 가능하다 쳐도, 그렇게 긴 땅굴을 하나 파느니 그냥 전방에 짧은 땅굴 수십 개를 파고 만다" 이런 식으로 제법 디테일한 논리를 동원해서 땅굴 음모론을 부정한다.

지 만원, 서 정갑 모두 최종 계급이 대령인 반면, 이 진삼은..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포스타 대장=_=;; 출신이다. 군에서의 레벨이 까마득히 다르다. (뭐,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대령만으로도 대기업 부장 급의 아득한 고위직이지만.)
하긴, 지 박사는 5 18과 530 GP에 대해서는 좀 무리수스러운 북괴군 개입을 주장하긴 해도, 땅굴 음모론은 주장하지 않는 걸로 난 알고 있다. 글쎄, 전자는 천동설이지만 후자는 아예 지구 평평이 아닌가 우려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4/14 08:35 2024/04/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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