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평전

성경에 나오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치고는 너무 괴팍하고 특이했던 사람이며, 천하장사였지만 여자에게 배신을 당해서 인생을 망친 비운의 사나이라고 비기독교인에게도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삼손은 혼자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을 벌여서 블레셋으로부터 확실하게 독립을 쟁취해 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명색이 민족 지도자인데 적국의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너무 똘끼 넘치게 행동했다.

민족 대표, 민족 지도자라 불리는 사람은 적국이 아니라 그냥 중립적인 외국인을 애인·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만 해도 민족 정서상 대외 평판에 절대로 좋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연걸의 정무문> 영화에서 일본인 여자를 사귄 진진, 그리고 에티오피아 여인과 재혼했다고 비방을 받은 모세(민 12:1) . 거기에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도 그 많고 많은 한국 여자를 놔 두고 '호주댁'과 결혼했다고 비방 받곤 했다. 삼손 역시 그런 격이었다.

사사기 14장을 보자.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첫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다. 이건 단순히 위험에 처한 상황이기에 앞서 여러가지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 포도원인 걸까?

삼손은 나사르 서원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어서(삿 16:17) 머리를 깎는 것뿐만이 아니라 포도도 절대 금지이다. 단순히 알코올 성분이 든 포도주를 안 마시는 것 정도를 넘어, 아예 생 포도송이, 포도 주스, 건포도 같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민수기 6장 참고) 불자에다 비유하자면 오신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삼손은 왜 포도원을 갔을까?
그리고 포도원에서 뱀이라든가, 혹은 여우(아 2:15)처럼 성경에도 나오고 이솝 우화에도 나오고 침입자로서 비교적 흔히 연상 가능한 동물을 만난 게 아니라, 하필 야생 맹수인 사자를 만난 걸까?

구약 역사서에서 동물 사자는 사람을 징벌하는 용도로 종종 쓰였다. 그러나 저기서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몬스터/몹만 소환한 게 아니라 Doom 2 게임으로 치면 Berserk 파워업 치트키를 먹여 주셨다. 다윗은 돌팔매질로 맹수들을 내쫓았다지만, 삼손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냥 맨주먹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 FPS 용어로 치면 gib을 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무용담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라는 공개적인 간증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화재 현장에서 저를 기적적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 "오 그래요? 어디서 화재를 겪으셨는데요?" / "나이트클럽에서요" =_=;;; 이런 꼴이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공인으로서 포도원 안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삼손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도 이변이 생겼다. 더러운 구더기가 들끓는 게 아니라 여왕벌이 들어오기라도 했는지 안에 벌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꿀이어도 그렇지 저건 시체 안에 담겨 있는 건데..;;
원효대사의 이야기만 봐도, 밤에 마셨던 물이 더러운 해골 안에 담겼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사람이 우웩~ 하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손은 참 멘탈도, 비위도 강했나 보다. 부정한 걸 만져서는 더욱 안 되는 나사르 인인데도 손수 사자의 시체를 뒤져서 꿀을 가져와서는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도 줬다.
이것 다음에 꿀 이야기는 사무엘기상 14장에서 또 나오는데 이것과는 어떤 영적 관계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삼손은 혼자서 사자를 때려 잡고 그 시체에서 꿀까지 득템한 행적을, 비록 공개적으로 간증은 못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뿌듯한 자랑거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율법을 몽땅 어긴 건 안중에 없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그걸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문제로 냈다. 사자와 꿀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리기란 물론 불가능했다.

삼손의 친구들은 치사하게도 삼손의 여친을 공갈 협박해서 답을 알아 냈다. 이것은 오늘날 정보 보호· 보안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이다.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암호를 걸어 놔도, 관리자 당사자 내지 그 지인을 매수하거나 족치는 데 성공하면 그냥 끝이니까. 결국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졌으며, 옷 서른 벌을 마련하느라 다른 동네의 블레셋 사람 30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게 됐다. 옷 서른 벌 때문에 30킬이라니 오늘날로 치면 그야말로 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따로 없다. "피해자들은 모조리 시체도 없이 실종"되거나 또는 "피해자들은 모두 겉옷이 없어졌다는 공통점 있음" ㅎㄷㄷㄷㄷ
그 시절에 마을 곳곳에 CCTV가 없었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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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림의 출처는 삼손의 생애를 그린 칙 출판사 만화 전도지 <Superman?> (1990) 편.)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벗겨서 줘야 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옷이 찢어지거나 핏자국이 묻지 않게 매우 조심해서 죽여야 했다는 점이다. 때리거나 칼로 찔러서는 안 되고, 뒤에서 덮쳐서 목을 조르거나 비틀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삼손은 워낙 천하장사 인간흉기였으니, 사람 목을 움켜쥐고서 손가락에 까딱 힘만 주면 곧바로 경동맥이 작살이 났을 테고, 사람을 무슨 개미를 눌러 죽이듯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인 건 고전 FPS로 치면 천하무적 주인공이 잡몹들을 싸그리 사냥하면서 1000 kill / frags를 달성하는 것과 똑같다. 삼손의 이야기는 은근히 게임스럽다. 턱뼈가 아니라 칼이나 창 같은 진짜 냉병기가 있었다면 삼손의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그냥 죽는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사지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 이 사건은 포도원에서의 사자 킬과는 달리 공적인 찬양 명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딱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내가 당나귀 턱뼈로 시체로 산을 쌓으며 1천 킬을 달성했도다"라고 으쓱하기만 했다(삿 15:16).
이에 삼손은 싸움을 다 이겨 놓고는 곧 극심한 갈증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 됐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당장의 기도 응답과 승리는 주시지만 그래도 뼈 있는 경고도 같이 주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경고에 담긴 메시지를 삼손이 더 일찍 간파했으면 자기 자신이나 민족이 훨씬 덜 불행을 겪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것들 말고도 삼손의 차력 기행 중에는 성을 탈출하기 위해 그 크고 무거운 성문을 잠금 장치까지 포함해 통째로 뜯어 버린 뒤, 그걸 방패 삼아 등에 지고 도망친 것이 있다(삿 16:3). 못해도 수백 kg 내지 몇 톤에 달하는 무게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전의를 상실케 하는 충격과 공포 도시전설 괴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상황이 역전되어 블레셋에서 골리앗이 배출된 것이 참 공교롭다. 삼손과 골리앗이 일대일 맞장을 떴으면 어땠을까? =_=)

그런데 삼손이 그저 무식하게 힘만 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와 꼬리를 묶고 불붙는 나무 조각들을 취하여" (삿 15:4)
이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산과 들로 나가서 여우를 300 마리나... 그것도 학살이 아니라 산 채로 수집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들었을까?

이건 힘만 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퀘이크로 치면 Frags나 Excellent가 아니라 Impressive, Perfect, Accuracy 같은 분야에 속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생포하는 과정에서 여우를 다리 같은 걸 조금이라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여우들을 꼬리에 불을 붙인 채 풀어 줘서 남의 밭을 왕창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밭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삼손은 늘 개인 플레이를 하다 보니, 딱히 자기 동지· 부하나 공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공범이 좀 있다 하더라도 여우를 300마리나 곱게 사로잡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삼손은 굉장한 근성가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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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삼손이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너무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기의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헬스 트레이너-_-로든 성경· 정치· 군사 어느 쪽으로도 후계자 양성을 못 하고 정규전 한 번 제대로 못 치른 채 혼자 원맨쇼만 일삼다가 자폭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삼손은 들릴라의 치명적이고 위험천만한 질문에 대해 너무 째째하고 진지하고 재미없게(?) "당신, 내 힘의 근원을 알려고 했다간 다쳐. 그런 건 다시는 묻지 마시오. / 내 힘은 우리 민족의 신인 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오" 이렇게 원천차단 돌직구를 날리기에는... 너무 대인배였다.
예전에 사자를 죽이던 시절부터 수수께끼와 내기를 즐기던 근성이 여전했다. 이제는 절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자기의 힘의 근원마저도 수수께끼 소재로 삼아서 "그게 궁금해? 그럼 내가 힌트 줄 테니 알아맞혀 보셔" 유흥거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살얼음판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교활하거나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동족들로부터 버림받을지언정 자기가 먼저 동족을 해치지는 않으려 했으며, 철저하게 피아 구분을 할 줄 알았다. "나 한 몸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리라"라는 뭔가 요나와 예수님의 예표스러운 행적도 있다.
그 스펙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자한테는 완전 순애보였고..;; 어쨌든 교활 잔머리의 천재인 발람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성향이었다.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삿 16:28,30)는 눈물이 핑 돌 정도의 회한 서린 비장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은 적군에게 잡히고 나서 꼴좋다고 얼마나 새디스틱한 모욕과 능멸을 당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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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치면 ㅎㅎ/ㅋㅋㅋ를 W를 붙여서 haw haw라고 표현하는 건 칙 만화 전도지의 고유한 관행이다.)

가정용 소형 맷돌이 아니라 아예 감옥에 있는 대형 맷돌은 나귀나 소 같은 동물을 동원해서 돌리는 물건이다.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내연기관이나 모터를 쓰지 생명체는 쓰지도 않는다. 자동차에 밀려서 인력거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삼손은 딴 데다 비유하자면, 배나 건물의 지하 기계실 같은 데서 평생 힘만 쓰는 동력 셔틀로 전락하고 말았다(삿 16:21).
작업 환경이 어두컴컴한 건 삼손에게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눈이 없는 상태이니까. 사람을 무진장 귀찮게 하던 파리나 모기가 결국 생포당해서 날개가 뽑힌 것과 비슷한 격이다.

삼손의 생애를 각색한 드라마 중에는 (1) 들릴라가 마치 가룟 유다마냥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삼손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이야기가 들어간 게 있다. 요즘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악 구도보다는 대체로 입체적인 인물 위주의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또한, 삼손이 마지막 순간엔 자기가 신전의 기둥을 붙드는 것을 도와 준 소년에게는 몰래 (2) "고맙소. 당신은 이 신전에서 최대한 멀리 빨리 탈출하시오."(내가 곧 신전을 무너뜨릴 거니까)라고 귀띔을 하는 애드립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진실은 저 너머에"이다. (1)과 (2)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애드립일 뿐인 것을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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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따르면 삼손은 거대한 석조 건물을 맨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자폭하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 수가 생전에 죽인 블레셋 사람 수보다 더 많았다고 말한다. 저 정도 대형 신전은 폭탄 테러로 붕괴시킨다고 해도 TNT가 몇 톤짜리가 필요했겠는가? =_=;;; 이거 정말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참고로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가 TNT 2.3톤 정도의 위력이었으며 영국의 Gunpowder plot이 위력계수 0.55짜리 흑색 화약 1.n톤이니 TNT 1톤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의 위력으로 추정됨)

성경에 기록된 생전의 kill 수만 해도 최하 1000+30+알파인데, 저 붕괴 사고로 몰살당한 사람은 제일 적게 잡아도 3천 명가량으로 추정한다(삿 16:27, 30). 블레셋 민족의 원수 삼손이 재주 부리는 꼴을 보러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죽은 사람이 6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이니 저 살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삼손은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덕분에 자살· 자폭을 하고도 정황상 얼마든지 구원받는 게 가능하다는 예로도 언급된다. 삼손이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선진이라는 것을 히브리서의 저자(아마 사도 바울)가 확실하게 인증한 셈이다. "삼손도 믿음으로 신전을 무너뜨렸다." 같은 말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히 11:32).
또한 딸을 죽이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입다 역시 같이 믿음장에 있는데, 삼손은 저 사람하고도 뭔가 통하는 맥이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머털도사가 삼손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도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게 나오는데..;;

Posted by 사무엘

2015/08/18 08:27 2015/08/1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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