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작년 5월에 철원에 성공적으로 다녀 온 것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토요일 개천절에 경기도로 테마 여행을 떠났다.
날씨는 한창 맑고 좋고, 학교는 입시생들 논술고사 때문에 폐쇄이고, 공휴일이라 교회 신학원도 안 하니 이런 날은 잠시 짬을 내어 어디 갔다 올 가치가 충분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2가 아직 갈 길이 멀며 회사일과 학교 과제가 날 압박해 오고 있지만, 일단은 잠시 잊기로 했다.
주유를 한 직후에 고속도로를 좀 뛰었더니, 역시나 시내 구간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엄청난 연비가 나왔다.
사람에게 힘든 건 기계에도 동일하게 힘든 법. 경제 속도 + 최대한 관성으로 쭉쭉 달려 주는 게 답이다.
(주유를 하고 나면 차내 컴퓨터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연비 정보가 싹 없어지고 초기화된다.)
그리고 아침 일찍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옛 수려선에 있던 오천 역 건물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협궤 철도역사이다.
수려선(수원-여주)은 일제 강점기이던 1930년에 부설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에 가깝게 전인 1972년에 이미 폐선되어 없어진 철도이다.
선로와 노반은 다 사라졌지만, 이천에 있던 오천 역 건물만은 민가로 바뀌어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붉은 벽돌 외형이 그 대표적인 예. 요즘 지어지는 철도역들은 유리궁전 스타일이 대세이지만 그때는 저게 주된 건축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이 건물은 거주민이 없이 흉가처럼 방치됐고, 부지 일대는 재개발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저 건물도 언제 불도저로 싹 밀려 쥐도 새도 모르게 철거될지 알 수 없다.
철덕으로서 나도 어서 가 봐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드디어 성지순례를 마쳤다. 역사 주변의 여러 지점에서 사진을 찍은 뒤, 마지막으로 옆 건물에 올라가서 역사를 내려다보며 한 컷을 더 찍었다.
아무쪼록 저 건물은 사라지지 않고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이 됐으면 좋겠다. 경의선 신촌 역 옛 역사가 보존된 것처럼 말이다.
오천 역 건물을 답사한 뒤에는 '진짜' 성지순례를 하러 갔다. 인근에 있는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방문한 것이다. 오천 역에서 거의 7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본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곳을 동시에 답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순교자 기념관은 어느 성도가 산 속 사유지를 기증해서 건립되었으며, 지금 서울 합정동에 있는 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던가? 거기서 걷히는 헌금으로 운영된대서 입장료조차도 안 받는 대인배 기념관이었다.
가는 길부터가 포스가 넘쳤다. 몇몇 주택과 회사· 공장을 지나서 산을 계속 오르자, 산상설교부터 시작해서 성경 구절 팻말들이 방문자를 반겨 주었다. 나중에는 한국에서 순교한 목사· 전도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들이 옆에 쭈욱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이 나타났다.
기념관 안에는 이런 그림체로 순교를 묘사한 그림이 많았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 때 목숨을 잃은 토머스 목사/선교사는 '순직'인 건 명백하겠지만 '순교'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지난 2004년에 김 선일 씨도 이라크에서 업무상 '순직'을 한 것이지 '순교'는.. 글쎄? 인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요나에 대해서도 순교자로 묘사해 놓은 그림이 있었다. 요나가 요나서를 기록하고 나서 나중에 다른 일을 하다가 순교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나서의 그 사건에서만은 그는 성경적으로 볼 때 절대로 순교자 모드가 아니었다. 이런 건 좀 분별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거시적으로는 정말 선교의 빚을 지고 있는 게 맞다. 그 옛날에 미국에서 (헬)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낸 건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무슨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따위로 선교사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본인 당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처자식까지 얼마나 고생해야만 했을까?
건물의 2층에는 예배실이 있어서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온 사람들이 모여서 간단히 예배 집회를 열 수 있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벽에는 우리나라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글과 사진 자료들이 걸려 있었다.
한글 성경 번역의 변천사. 스캔 하나는 참 깨끗하게 잘 했다.
다만,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킹 제임스 성경 계열의 역본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 3층에는 '순교자' 믿음의 선배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기독교(개신교 포함)는 천주교와 달리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는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고, 공권력에 의한 박해보다는 제사 거부 같은 걸로 인한 민간 차원에서의 박해가 더 많았다.
그나마 구한말 때의 거의 유일한 순교자로는 백 홍준 장로만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도 직접적으로 사형을 당한 건 아니고 옥사다.
일제 강점기 때도, 독립 운동과 무관하게 기독교 신앙 자체만으로 인한 박해는 말기의 신사 참배 강요 이전까지는 딱히 심한 지경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정말로 엄청난 수의 순교자가 발생한 건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였다. 공산주의자, 일명 빨갱이들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일당독재 우상화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지독하게 박해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념관에 적혀 있는 소개 문구이다.
"38선이 놓이면서 북한에서는 교회의 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피하여 많은 신도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교회가 새롭게 재건되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되자 1946년 11월 3일이 일요일인데도 이 날을 북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날로 정했다(참고로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일은 월요일!). 이에 교회들은 즉시 반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 이러한 항거에 부딪치자 공산당들은 이들을 투옥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박해를 가했다.
드디어 1946년 11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 일성을 절대 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되거나 추방 당했다."
옛날 로마 제국 시절에 대음모자 콘스탄틴이 부패한 국가 어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신)를 만들고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더 악랄하게 괴롭히고 박해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평양이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우리 남한, 대한민국은..
"해방 후 남한은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만세!) 일제 말엽에 강제로 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뤄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 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 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각 교파 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한지라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등 각 교파는 각자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이래서 남한과 북한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린 것이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한없이 타락하던 북이스라엘과, 그나마 좋은 왕과 나쁜 왕이 번갈아가며 나오던 남유다 왕국처럼!
난 개인적으로 교파가 저렇게 찢어진 것을 그렇게 나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 때처럼 사람의 신앙의 자유를 거슬러서 강제로 통합을 하고 그 통합을 주도한 주체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게 훨~씬 더 나쁘고 악한 현상이다.
대한민국은 크리스천 초대 대통령 덕분에.. 한중일 나라들 중 유일하게 건국/정부 수립 거의 직후부터 성탄절이 빨간날로 지정되었으며, 군대 내부에 군목을 비롯한 군종 병과가 가장 앞장서서 제정되었다. 정교일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헌 국회 기도문 같은 건 본인은 아주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