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창덕궁, 창경궁

서울에서 광화문과 경복궁이야 매우 유명한 역사 유물 겸 관광지이다. 그리고 그 근처의 종로3가에는 탑골공원이 있으며, 여기까지는 본인이 오래 전에 진작부터 가 봤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옆에 종로3가와 4가 사이, 그리고 종로와 율곡로 사이에 서울 도심을 떡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유적지는 궁궐도 아닌 것이 도대체 정체가 뭔지 오래 전부터 굉장히 궁금했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진입로를 어렴풋이 보긴 했지만 들를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책을 사 오면서 드디어 저기를 들르게 되었다.
서울 시내는 차를 몰고 돌아다닐 곳은 못 되고, 대중교통은 자기 경로를 벗어난 곳은 가지 않으며 단거리를 조금씩만 이동할 때도 기본요금이 깨지는 게 부담되니.. 찔끔 찔끔 돌아다닐 때는 정말 자전거가 최고였다.
덕분에 먼저 창덕궁과 창경궁을 구경한 뒤, 그 아래에 있는 종묘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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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안국 역 근처 현대 그룹 사옥의 옆에 있다.
원래는 종묘와 창덕궁이 경계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일제가 교통 편의를 위해 둘 사이에 율곡로라는 도로를 닦으면서 둘은 담장을 두고 단절됐다. 율곡 이 이의 생가가 거기 일대에 있었대나 어쨌대나..
안에 들어가면 이렇게 넓은 공터와 드문드문 놓인 기와집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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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이라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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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기와, 담장, 벽면만 이렇게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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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터 구석에 혼자 짱박혀 있어도 힐링힐링 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곳은 아무래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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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창경궁 쪽으로 갈 수도 있다. 이때는 입장료가 추가로 부과되나, 구매한 당일 동안은 창덕궁과 창경궁 구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내부는 꽤 넓다. 북쪽으로는 저렇게 호수도 있고 식물원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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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과 그 근처에는 이런 건물과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판들이 다 저런 스타일이었구나.
몇 년 전에 광화문 현판 때문에 여론이 분열되어 대판 싸움 벌어졌던 시절이 생각난다. (1) 역사와 고증에 충실하게 저런 한문 스타일로 복원하자는 쪽이 있었지만, (2) 광화문은 여느 유적과는 달리 차들이 씽씽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 중심부의 상징인데.. 기왕 한글 현판이 몇십 년 동안 있었다면(박통 친필..!) 새 현판도 우리 고유 문자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 역시 매우 강경하게 맞섰다.

한글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본인 역시 적극 이해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문제는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이냐 같은 심각한 급이 아니다. 그냥 East Sea냐 Sea of Japan이냐 하는 문제와 비슷한 격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외국인이 무슨 명칭을 쓰건, 우리나라 동쪽 영해의 범위가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으니,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 Korea라는 명칭이 엄연히 붙은 채로 정착한 '대한 해협'처럼 말이다.

광화문 현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을 무슨 퓨전 사극 만들듯이 리메이크라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옛날 스타일로 복원하는 거라면 굳이 기를 쓰고 한글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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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근처에 있는 이 건물은 벽면에 붉은색이 없이 배색이 좀 소박했으며 담장의 텍스처도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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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랑 비교하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종묘로 넘어간다. 이곳은 조선 시대 왕들의 묘지는 아니지만 이들의 위패 안장해 놓은 사당이다. 뭔가를 쓸데없이 높게 떠받드는 걸 빈정댈 때 '신줏단지 모시듯'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의 '신주'(神主)가 바로 저 위패를 가리킨다.

태조 이 성계가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자기 궁궐보다도 종묘와 사직단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의 종묘는 설계 크기가 지금보다 작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셔야 할 위패가 증가하면서 가로로 쭉쭉 몇 차례 증축되어 왔다.
그래서 종묘는 100미터가 넘는 긴 길이를 자랑하는 목조 건물이다. 그리고 '정전'이라는 본 건물만 있다가 나중에는 좀 더 작은 복제품(?) 격인 '영녕전'도 따로 만들어졌는데.. 궁금하신 분은 구글 등에서 검색해서 유래를 알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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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안은 간단하게만 묘사하면 "숲이 우거진 공원 산책로 + 넓은 돌바닥 마당이 깔린 집회 장소" 정도 된다. 산책로 안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또한 나름 조상님들이 들어가라고 돌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내 눈에는 뭔가 철도의 전신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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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이 건물과 터뿐만 아니라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퍼포먼스까지 무형 문화재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1년에 다섯 번이나 임금님까지 친히 나서서 제사 행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1년에 두 번만 재연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공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이런 걸 진작에 버리고 전통과 단절해 버린 관계로.. 오히려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과거의 종묘 제도에 대해 연구한다고 그런다.

위의 건물은 음식을 요리하는 등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작업하고 거주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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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은 정말 길쭉하고 마당이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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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중앙에 이렇게 돌출된 입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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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단위 입장만 가능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취한 조치라고 그런다. 토요일(일요일 말고)이나 일부 특례가 적용되는 날에만 가이드 없이 개인 단위 자유 입장이 가능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는 옛 종묘를 불질렀지만, 그때 이후로 재건된 지금의 종묘는 훗날 일제 강점기 때도 별다른 훼손 없이 잘 버텼으며, 심지어 6· 25 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았다.
종로라는 그 번화가 바로 근처에 이렇게 속세를 완전히 이탈한 듯한 관광지가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비록 조상신을 이런 식으로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건 내 개인적인 종교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행이다만.. 임금은 어느 문으로 들어와서 어느 문으로 나가고, 건물이 이렇게 돼 있고 이렇게 설명을 듣는 게 마치 성경의 출애굽기와 에스겔서에서 각각 성막과 성전의 규격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서울에서 조선 시대 역사 관광지들을 많이 봤으니, 나중에 고향 갈 일이 있으면 더 옛날 신라의 역사 관광지도 더 눈여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 지역까지 갈 수 있다면 고려 시대 역사 관광지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여전히 불가능 봉인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31 08:38 2017/10/3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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