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창경· 창덕궁과 종묘를 다녀오고 나서 몇 달 뒤, 다음으로는 종로가 아닌 시청, 정동 쪽으로 놓여 있는 고궁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자전거 없이 전적으로 걸어다니기만 했는데, 답사 동선의 고저차를 감안하면 궁극적으로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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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시청 역은 서울 시청 및 서울 광장뿐만 아니라 덕수궁과도 아주 가까이 있다. 입구의 이름은 '대한문'인데, 본인은 저 명칭을 20여 년 전에 나왔던 어린이용 비디오 한자 교재의 출판사 이름으로 먼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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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대는 지난 2017년 3월, 반공 애국 시민들이 박 근혜 대통령의 인민재판 부당 탄핵을 반대한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목놓아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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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으로 들어간다. 정전인 중화전이다. (돌바닥에 비석 같은 신하들 자리..) 이런 것들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어떠했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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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는 동서양 건축 양식이 퓨전으로 섞인 의외의 건물이 있었다. 이름은 '정관헌'이라고 하고, 구한말인 1900년에 고종이 연회장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추가로 지은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석조전'이라고 더 나중에 지어진 서양식 석조 건물도 있다. 덕수궁은 마냥 기와집 일색이 아니라 안에 의외로 이런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물론 지금 있는 건물은 재건 복원된 것이고,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나머지 덕흥전, 함녕전 등의 건물도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소개를 생략하겠다. 이렇게 덕수궁을 둘러본 뒤 본인은 후문 쪽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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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구세군 회관을 지났다. 옛날엔 뭔가 근대식 건물이라 하면 전부 붉은 벽돌 일색이었던 것 같다. 그게 지금으로 치면 '유리궁전' 같은 유행이었던 듯.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도 뭔가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는지,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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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로와 새문안로2길 사이에는.. 서울 도심의 최고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복원을 위한 문화재 발굴과 조사라는 명목으로 민간인의 접근이 봉인된 넓은 폐허(?) 공터가 있다. 다른 구간은 높은 담장 때문에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지만, 그래도 출입문이 있는 곳에서는 철문 사이에다 렌즈를 집어넣어서 내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인제 와서 서대문(돈의문)이라든가 이 일대의 한양도성도 과연 부지 확보와 복원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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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그 이름도 유명한 구 러시아 공사관 첨탑에 도달했다. 고종 황제의 흑역사인 1896년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구'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러시아가 아니라 공산주의 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 시절 얘기다. 노(魯)뿐만 아니라 아(俄)도 러시아를 가리키는 한자로 쓰인 것이 생소하게 보인다.

원래 러시아 공사관은 훨씬 더 넓고 큰 건물이었지만 그것들은 6· 25 전쟁 중에 몽땅 파괴되고 이 부분만 현재까지 남아서 전해진다. 아까 그 폐허 부지와 직선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높이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여기로 가려면 정동 공원 등 다른 곳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주변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구도는 전부 탑을 올려다보는 형태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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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아래의 정동 공원도 경치가 좋아서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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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 다음으로 나가서 새문안로를 횡단하니 경희궁의 진입로인 흥화문은 곧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희궁은 조선의 궁전 5개 중에서는 존재감이 제일 없다. 서울의 궁전들 중에서 훼손이 제일 심해서 볼 게 제일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 궁전들보다 잔디밭 마당이 유난히 넓고, 곳곳이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본인조차도 한글 학회 회관 근처에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오피스텔 단지가 있는 걸 보고는, 수 년 동안 "경복궁도 아니고 경희궁은 뭐야?"라고 생각했지, 이 도심 근처에 다른 궁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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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은 자기 건물만 철거된 게 아니라 부지 자체도 다른 건물로 막 잠식당해 왔다. 한때는 명문 서울 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있다가 그나마 강남으로 이전했으며, 서울 교육청도 여기에 떡 자리잡고 있다.
컨텐츠가 빈약하고 온통 공사판이어서 그런지, 여기는 인서울 궁전들 중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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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건물 없이 땅만 덩그러니 놀고 있다. 대문인 흥화문, 그리고 정전인 숭정전이 사실상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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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구경은 뭐 이 정도로 끝..?? 주변 사진을 더 찍은 것도 있지만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공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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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인은 경희궁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역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학교에 갈 때 버스를 갈아타는 지점이며, 마당에는 노면 전차가 하나 전시되어 있기도 하니 본인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1층은 도서관 자료실과 특별 전시관이고, 2층은 조선 시대, 일제 시대, 해방 이후의 순으로 상설 전시관이 있었다. 아, 여기 역시 관대하게도 무료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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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특별 전시가 두 개가 진행 중이었다. 하나는 "파독 간호사 여성들의 삶"이라고 뭔가 국제시장스러운 소재였다. 그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하나로, 우당 이 회영 육형제 가문에 관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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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조선 시대에 요즘 시세로 치면 못해도 몇백 억에 달할 땅과 재산을 소유한 플래티넘 금수저 출신이었다. 단순히 농사나 장사로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대대로 관료였다. 얘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묵인만 해도 원래 하던 정치인이나 법조인 한 자리나 꿰차서 전관예우를 충분히 받고 얼마든지 계속해서 떵떵거리며 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육형제 전체가 삼국지의 도원결의보다 더 드라마틱한 결의를 했다. 그 많던 재산을 정말 헐값에 몽땅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서 '신흥 무관 학교'를 세우는 미친 짓을 했다. 그리고 지지리도 돈 안 되는 일인 무장 투쟁 노선 독립운동가의 양성과 지원에 가산을 탕진했다. 이거 무슨 독립 운동가 배출의 숨은 요람이었다는 남쪽 끝 '소안도' 섬 얘기를 듣는 느낌이다.

여섯째인 막내는 맏형에 비하면 거의 맏형의 아들 수준으로 터울이 크긴 하다만.. 이 육형제가 모두 그 부자 가문에 걸맞지 않은 힘든 가시밭길을 걷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나마 다섯째 '이 시영'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에까지 살아남아서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선행을 한 독립 운동가와 그 가문이 안 중근· 윤 봉길, 유 관순, 김 구만치 진작부터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지 못한 주 이유는 이들이 일체의 진영과 파벌을 싫어하고 뭔가 신 채호처럼 이상주의 순수주의 무정부주의 독고다이 아나키즘 성향의 항일 노선을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그리 호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처음엔 같이 관여하다가 감투 싸움 밥그릇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뛰쳐나왔다. 기독교계로 치면 하나님은 믿되 일종의 무교회주의를 지향한 셈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어디든 진영 논리 파벌 싸움이 지저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영과 파벌과 정치로 여러 사람을 한데 결집시키지 않고서는 뭔가 큰 일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분들의 행적은 2% 부족한 듯한 아쉬움과 한계가 남았다. 전근대적인 조선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점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 뒤에 현실적인 대안 역할을 할 이념을 제대로 판단하고 채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저런 중립 노선만으로도 아예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빨 노선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고 나았다.

부통령 '이 시영'이라는 이름을 본인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 사람이 저런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은 지금까지 미처 몰랐다. 저런 이상주의 중립 성향의 사람이.. 미국물 먹은 노련한 현실주의자요 강경한 반공 독재 스타일인 이 승만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전쟁이 나고 희대의 흑역사 병크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까지 터지자, 그는 "내가 이럴려고 정치인 됐나"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청렴한 정치와 남북 통일까지 이루기에는 현실이 너무 급박하고 안 좋았다.

그나저나, '신흥 무관 학교'와 옆의 '경희궁'이 나란히 등장하는 건 참 절묘한 우연인 것 같다. 저 학교가 경희 대학교의 먼 전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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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경을 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박물관의 이름답게 서울의 역사가 조선 이 성계 시절부터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순신· 세종대왕의 동상이 놓여 있는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가 옛날에는 저런 모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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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이전에 한반도에서 통용되던 대로(큰길)들은 이런 형태였구나.
해남대로는 경부선+호남선을 얼추 합한 선형이며 오늘날의 국도 1호선과 비슷한 것 같고, 영남대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긴 하지만 잘 알다시피 용인-이천-충주-문경을 경유하니 경부선이나 경부 고속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선형이다. 그리고 부산도 우리가 지금 아는 부산항 쪽으로 가는 건 아니다.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자료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의 파노라마 사진 내지 서울 축소 지도가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해방 후 대한민국 시절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은 마장동의 청계천로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도 가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본인은 성곽이나 궁궐을 몽땅 원형대로 복원하라는 식으로 무작정 환경이나 문화재 덕후 성향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하고 굴욕적으로 망했으니 끝이 매우 좋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필요 이상으로 국뽕 불어넣고 미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특히 민비 미화..)
하지만 반대 극단으로 가서 무작정 조선만 인구의 과반이 노비이고 길거리에 똥덩어리가 굴러다니던 헬 중의 헬이었으며 차라리 일제 통치가 나았다는 식의 비하 역시 걸러 가며 들으려 한다.

그리고 본인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예우하고 존경하지만, 그 사람을 띄워 주면서 의도하는 결론이 또 되도 않은 친일파 괴담 내지 분단의 원흉 이딴 식이라면 그 진영의 주장 역시 철저하게 씹을 것이다. 늘 말하지만 걔네들은 일본· 미국을 비판하는 잣대와 중국· 북괴를 비판하는 잣대가 절~대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믿고 거르는 게 건전한 역사관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1 08:32 2018/01/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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