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과서의 문체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지 싶은데..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형· 누나(가족, 사촌 등)의 교과서를 미리 보니, 교과서가 갈수록 글자 크기가 작아지고, 컬러이던 것이 흑백으로 바뀌는(중등 이상) 것에서 일종의 문화 충격을 느꼈고 심리적으로 겁을 먹었었다.
특히 말투가 반말로 바뀌는 게 싫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990년대엔 초1~2에서는 '해요체'였고, 과도기인 초3에서 좀 더 격식을 차린 '하오체', 그 다음 초4부터 '해라체' 반말로 바뀌었다. 지금은 어떤가 모르겠다.
그냥 반말도 모자라서 '하여라(해라)/써라'에서 연결어미가 더 생략되어 '하라/쓰라'라고만 하면.. 더 건조하고 무뚝뚝하게 느껴졌다.
- 하십시오: 아주 높임
- 하시오: 약간 높임
- 하세요: 두루 높임
- 해요: 두루 낮춤
- 하게: 약간 낮춤
- 해라: 아주 낮춤
이게 바로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어의 문체이다. 군대에서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요'로 끝나는 비격식체 '두루 높임/낮춤'이다.
학교 교과서는 맨 처음엔 두루 높임으로 시작했다가(계산하세요), 약간 높임을 보여준 뒤(계산하시오) 곧장 아주 낮춤으로 바뀐 셈이다(계산하여라).
물론 한국어의 글에서는 존댓말보다 이런 반말이 훨씬 더 보편적이다. 그리고 간결하기 때문에 쓰는 것일 뿐, 굳이 독자를 낮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다. 사실 한국어는 제일 짧은 반말을 쓰더라도 용언 뒤에 각종 어미들이 덕지덕지 달라붙느라 여전히 좀 거추장스러운 구석이 있다. (예: 프로그래밍 언어를 한국어로 설계해 보면?)
하지만 저런 말투의 변화조차도 어린 동심의 입장에서는 병아리가 알을 깨는 것과 같은 큰 변화였던 것이다.
한국과 달리 서양 내지 영어권 애들은 그런 거 고민이 필요 없는 언어를 쓴다. 부모님 하나님도 그냥 you라고 부르고.. 나이 꼰대질 없이 누구든 그냥 통성명부터 한 뒤, you 아니면 이름으로 부르면 되니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군대에서도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sir을 앞뒤에 덧붙이는 것만 빼면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말하면 된다.
이런 의사소통에서의 효율이 더 멀리 나아가 학문과 기술의 발달 깊이, 그리고 업무 프로세스의 효율 차이까지 가져온 건지도 모른다.
1990년대 대한항공 여객기 추락 사고 같은 극단적인 예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말이다.
2. 옛날 한글 개역성경의 이색 문체
오늘날 우리말에서 성경 같은 경전은 '-느니라, -도다, -노라, -소서' 같은 엄격 진지 근엄한 고어 문체의 최후의 보루로 여겨지고 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전근대적인 절대권위라는 게 몽땅 무너진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에서 저런 말투를 사용하거나 접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천주교야 오래 전부터 현대어 스타일로 번역된 공동번역을 사용했기 때문에 상황이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독교회 쪽은 사정이 달라서 개역성경의 문체를 하루아침에 탈피하는 건 신자들의 정서상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러니 2000년대에 와서도 교회에서 예배용으로 사용하는 성경의 주류는 여전히 개역성경을 약간만 고친 개역개정판에 머무르고 있다.
심지어 킹 제임스 성경 진영에서도 본문 내용이 변개되고 삭제된 것들을 논할 뿐, 문체는 개역성경의 고어 문체를 별 이의 없이 그대로 수용해서 성경을 번역하는 편이다. 아니, KJV도 고어체이니 한국어 역시 의도적으로 고어체로 번역하는 게 더 어울릴 지경이다.
본인은 어린 시절에 성경의 이런 문체가 신기하게 느껴졌으며, 또 맨 끝에 있던 계 22:18-19.. 그 유명한 성경 변개 금지 경고문(말씀에다 더하거나 빼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에서도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본인을 훗날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로 이끈 건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아직 한글 개역성경만 보던 옛날에..
본인은 한글 개역성경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지시는 부분만이 이례적으로 고어체 대신 평범한 '-다'로 끝나는 것을 일찍부터 주목했다. 이것도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
-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마 27:50)
-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막 15:37)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눅 23:46)
-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 19:30)
요한복음만 빼고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저렇다.
동사 용언이 ㄴ이나 '았' 같은 시제 선어말 어미 없이 으뜸꼴 형태 그대로 쓰이는 건 무슨 제목이나 자막 같은 데서.. "누구누구 죽다", "어디에 가다"처럼 드물게 쓰이기는 한다.
그런데 존대 선어말 어미 '시'는 붙어서 '떠나시다, 운명하시다'는 어린 동심에 굉장히 특이한 심상을 만들어 냈다.
개역성경에서 '-시다'라고 끝나는 구절을 찾아보면 사복음서에만 딱 10군데가 나온다. 마 16:4 "떠나가시다"부터 요 18:1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까지..
하지만 이것들은 별 의미는 없고, 단순히 이 부분을 맡은 번역자의 번역 스타일 때문에 들어간 특이한 일탈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훗날 개역개정판에서는 다들 '떠나시니라'(마 27:50), '숨지시니라'(막 15:37, 눅 23:46) 같은 '-시니라' 꼴로 바뀌었다.
3. 여담: 한중일의 언어 정책 변화
동북아시아 삼국은 20세기가 가히 격변의 시대였다. 사회· 정치뿐만 아니라 문자 언어 쪽도 큰 변화를 겪었다.
(1) 중국: 1956~1964년에 걸쳐 공산당 마오의 령도력으로 한자들의 획을 대폭 줄인 '간체자'를 제정했다. 1953년, 6· 25 휴전 협정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은 '나라 국'을 國이라고 쓰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불과 몇 년 뒤부터는 그렇지 않게 됐다.
또한 보조 표음용으로 알파벳 기반의 한어병음도 1958년에 전격 시행하여 기존 주음부호를 대체했다. 오늘날은 '대만'만 옛날 정체(번체)와 주음부호를 계속해서 쓰고 있다.
(2) 일본: 1949년, 아직 미군정 하에 있을 때 '신자체'를 만들었다.
이런 글자의 변화 말고도 지금처럼 히라가나를 고유어의 표기에 활용하는 일본어 정서법 역시 해방(한국의)/패전(일본의) 이후에 도입되고 정착했다. 그 전에는 지금은 히라가나로 표기했을 말도 다 가타카나로 표기했다.
(3) 한국: 아직 일제 시대이던 1933년에 초안이 나온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업적이었다. 이때 아래아 같은 잉여 옛한글은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한국어 정서법이 지금과 얼추 비슷하게 정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서법을 바탕으로 한국어 성경(개역성경전서 1938)과 국어사전(조선어 학회 큰사전 1947~57)이 출간될 수 있었다. 저 1938년도 성경을 또 개정하여 1961년에 나온 것이 바로 개역개정판 이전까지 국내에서 널리 쓰였던 그 개역성경이다.
한국은 중· 일과 달리, 국가 차원에서 한자를 손본 적은 없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그냥 정자체를 그대로 쓰고 있고, 그냥 조금 한자깨나 아는 사람들이 중국보다는 일본식 약자를 무단으로 쓰는 편이었다.
4. 여담: 소나기
자고로 옛날에 이 승만은 지금 본인과 비슷한 나이 때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소설가 황 순원은 지금 본인과 비슷한 나이 때 일생일대의 명작 걸작인 단편소설 <소나기>를 지었다.
소나기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아니 그 전에 한메 같은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신물나도록 봤다. 내가 알기로 이 소설은 발표된 이래로 자국의 국어 교과서에서 누락된 적이 없다. 영화와 애니로도 이미 실컷 만들어져 나왔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직 6· 25 전쟁도 안 끝났고 나라가 온통 박살이 나 있었을 때..
쉽게 말해 그 암울하던 이 범선의 <학마을 사람들> 사건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을 시절에 어째 저런 전원적이고 낭만적이고 아기자기 예쁜 소설이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놀랍기 그지없다.
- 초 중딩 시절에는 소나기 정도만 해도 텍스트가 상당히 길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느낌이 안 든다.
- 남자애는.. 정말 숙맥이다.;;
- 한편으로는 단선 철길 폐색 구간의 양방향에서 잘못 진입한 열차가 떠오르기도 한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