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옛날 언어의 간결함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세상에 생명의 기원보다도 더 알 수 없는 게 바로 언어의 기원이다.
먼 옛날, 최초의 언어가 어떠했는지는 문헌 기록도 음성 녹음도 없고, 아예 문자조차 없으니 제대로 알 길이 없다. 이런 게 저절로 우연히 생겨날 수는 없다고 믿어 버리면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고 그냥 개인 신념의 영역이 된다.

언어별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대체로 고대 언어는 현대의 언어보다 문법이 더 복잡하고 불규칙도 더 많고, 사용되는 음운도 더 다양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반대로 옛날 언어가 어휘나 표현이 더 간결한 것도 있었다.

(1) 예를 들어.. 영어 고어에는 before보다 더 짧은 ere(air, heir와 같은 '에어')가 있고.. enemy보다 더 짧은 foe가 있다. 그리고 뻔한 문맥에서 목적어 같은 걸 생략도 많이 했다. 아래의 KJV 구절을 살펴보자.

  • Abimelech king of Gerar sent, and took Sarah. (창 20:2)
  • Bring these men home, and slay, and make ready. (창 43:16)

'사람을 보내어'인데 그냥 sent를 자동사인 듯이 썼으며
'가축을 잡아서'인데 그냥 slay 한 단어로만 씨크하게 표현했다.

(2) 그런데 영어 이전의 성경의 언어였던 히브리어· 그리스어 레벨에서는 이런 자비심 없는 축약이 더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KJV 영어 본문에서 이탤릭체 처리된 단어들을 찾아보면.. 없으면 단순히 문법적으로만 어색하거나, 아까 사람 내지 가축처럼 어렴풋이 유추 가능한 정도를 넘어서 뜻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들도 있다.

시 12:5 끝부분의 "I will set [him] in safety [from him that] puffeth at him."에서 []로 둘러싸인 부분이 전부 이탤릭이다. 도대체 히브리어 원어 원문은 얼마나 암호처럼 짧게 기록됐길래 영어에서 저런 목적어와 수식어를 창작해서 집어넣어 줘야 했는지가 궁금해진다. (물론 KJV 외의 타 성경들도 동일하게 저렇게 번역했음)

(3) KJV는 they라는 짤막한 단어를 3인칭 복수 대명사로도 쓰고, people 같은 '일반적인 사람' 용도로도 쓴다. 이것 자체는 현대 영어에서도 존재하는 관행이지만, KJV는 중의성· 모호성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they를 즐겨 쓰는 감이 있다.
왕하 19:35를 보면.. "they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they는 모두 죽은 송장이 되어 있었더라"처럼..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they가 쓰인다.

출 20:13 "살인하지 말라"도 타 성경들은 murder 정도를 넣었지만 KJV만은 그냥 짧은 kill이다.

(4) 영어를 비롯한 성경 언어 쪽 얘기가 길어졌는데, 반대편의 한국어도 마찬가지이다. 훈민정음 서문이라든가 이 윤탁 한글 영비 같은 걸 보면.. "영한 비라. 거운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말이 굉장히 짧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요즘 같으면 못해도 "이것은 신령한 비입니다. 이 비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재앙을 당할 것입니다" 정도로는 풀어서 쓸 텐데? 띄어쓰기가 없는 고어체를 감안하더라도 주어 생략에다 '거우다?'라는 짤막한 단어.. 뭔가 현대 한국어의 화자는 알지 못하는 옛 한국어의 면모인 것 같다.

2. 의존명사

한국어에는 의존명사라는 게 있다. '리', '수' 같은 건 분명 고유한 뜻과 뉘앙스가 있긴 한데,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난감하다. 얘들은 '-ㄹ' 꼴로 활용된 용언으로부터 수식을 받은 바로 다음에만 등장하며(그럴 리, 할 수..), 특히 '리' 다음에는 '없다'만 쓰인다.

어처구니, 어이 같은 단어는 그런 통상적인 의존명사에 속하지는 않지만.. 뒤에 붙는 용언이 답정너 너무 뻔하고 다른 형태로 쓰이는 일이 없다시피하다. 그래서 '어이없다, 어처구니없다'가 그냥 한 단어로 인정될 지경이다. '쓸데없다'처럼 말이다.

한국어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너무 어렵고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원성이 자자하지만.. 한국어가 단어와 형태소의 경계를 구분하는 게 그만치 어렵다. 이것 때문에 사전 편찬자와 국어 문법학자들도 고충이 많다. 용언에 극도로 제한된 뻔한 형태로만 활용되는 불완전동사가 있는 것만큼이나(더불다, 가로다, 달다) 체언에는 아주 제한된 형태로만 쓰이는 의존명사 같은 물건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한된 형태, 관용구 형태로만 쓰이는 명사가 영어에도 있는 것 같다. 유익· 편의라는 뜻인 sake 내지 behalf 같은 단어 말이다. 얘들은 오로지 one's sake, ?n behalf of .., for the sake of 형태로만 쓰이고 단독 내지 다른 형태로 쓰이는 일이 없다. 이것 말고 다른 예도 있지 싶다.

3.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

(1) 외래어 표기법의 노답 문제

  • 자음 음절 경계: 플룻 플루트 로보트 백 태그..;; 답이 없다. ㅡ는 음가가 참 불분명한 모음이다.
  • 장모음: 윈도우 보우 리모트 보트 스노우.. [ou]라는 영어 장모음은 u를 무시하고 '오'로만 표기하는 게 원칙이지만 snow나 window 같은 단어는 여전히 '우'까지 표기한 형태가 더 익숙하다.
  • 모음 경계: washer는 와셔일까, 워셔일까? ㅏ~ㅓ, ㅗ~ㅓ 경계가 의외로 헷갈린다.

(2) 한글 맞춤법 및 발음에서 노답 문제

  • 사잇소리와 사이시옷: 비빔밥/볶음밥 중에서 왜 전자만 밥이 '빱'으로 바뀔까? 물고기/불고기 중에서 왜 전자만 '꼬' 소리가 날까? '김밥'의 발음은 밥과 빱 중에 무엇이 더 바람직할까?
  • 띄어쓰기: 한자어 복합명사들의 띄어쓰기부터가 아주 모호하다. 또한, 순우리말 중에도 '잘 만 듯 못' 요런 어절들은 단어도 되고 접사도 되기 때문에, 뒤에 '+하다' 같은 게 이어질 때 띄어쓰기 여부가 아주 구리다.

4. ㅐ와 ㅔ의 발음

이건 한국어 음운 체계에 남아 있는 희대의 미스터리이다.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만큼이나, I와 you를 구분할 정도로 완전히 다른 소리였는데 어쩌다가 요즘 사람들이 절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소리의 쌍으로 전락했나 모르겠다. 서로 다르게 발음도 못 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장음· 단음 구분이 망가진 것처럼 말이다.

요즘 통용되는 그 소리는 원래의 ㅐ도, ㅔ도 아닌 중간의 소리라고들 한다. 그런데 그 소리가 영어나 일본어에서도 쓰이는 보편적인(?) 소리인 건지도 모르겠다.
ㅐ/ㅔ뿐만 아니라 ㅒ와 ㅖ의 구분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ㅙ/ㅞ/ㅚ도 서로 변별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덕분에 재련과 제련, 결재와 결제, 제제와 제재 같은 한자어의 표기도 굉장히 헷갈리게 되었다.

한글이 처음 창제되던 당시에는 저 모음들이 어떻게 구분되어 발음되었는지.. 몇백 년 전 사람을 만나서 물어 보고 싶기라도 한 심정이다.

5. 사라져 가는 순우리말

까닭(이유), 달걀(계란), 뭍(육지, 땅) 같은 순우리말 단어는 한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방송과 도서에서 종종 접할 수 있는 단어였는데 갈수록 용례가 줄어들고 있는 게 보인다. 특히 '뭍'의 경우, 옛날에 전래동화 책에서 봤던 기억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제는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단어로 전락했다.

이런 식으로 '미덥다, 미쁘다, 미련하다' 같은 단어도 사라지는 것 같다. 어째 다 '미'짜로 시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콩팥은 신장에 밀려서, 허파도 폐에 밀려서 앞날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인다.
지금 세대는 알아듣기라도 하지만 다음 세대 애들한테는 완전히 듣보잡이 되겠지?

Posted by 사무엘

2019/04/03 08:35 2019/04/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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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세카이 2019/04/13 21:16 # M/D Reply Permalink

    맞춤법 같은 경우는 어느 정도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언어생활에서 문자의 경우 쓸데없이 맞춤법이 복잡해서는 되고
    일관성과 규칙성이 있어야 할 텐데
    이런 거 있잖아요 본동사 뒤에 보조동사에서
    아 어 다음은 띄어쓰는 게 원칙이지만 붙여쓰는 것도 허용한다
    허용할 거면 아예 다 붙여쓰자고 하든지 아니면 허용하지 말든지

    또 대부분 사람들이 맞춤법을 잘 지키지 않드라고요
    모두가 지킬 수 없는 신호등이 있다면 모두가 그 신호등에 맞추는 게 아니라
    그 신호등을 대부분이 맞출 수 있게 바꾸는 게 맞겠죠

    일본어는 띄어쓰기가 아예 없고 로마자를 쓰는 나라는 대부분 단어 별로 띄어쓰죠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청각적 분별력인데 이것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꼭 순우리말이 아니여도 상관없다고 판단됩니다
    이미 한국어는 한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아닌 경우도 많지만 한자를 알면
    단어를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것도 일부분 사실이긴 합니다
    그렇다고 한자를 같이 표기하자는 것은 엇나간 것이고
    스마트폰으로 디지털화 된 시대에 바람직하지 않겠죠

    그리고 언어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이 스며들어 있는데
    한국어에서 '우리'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나'가 들어갈 자리에 많이 쓰느데
    이것은 한국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정립하지 않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 투영하는 것을 나타내는 듯 합니다
    저는 우리라는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내 집 내 회사 내 팀 이라고 말하죠
    또 다르다 와 틀리다를 구분하지 않는 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틀린 의견으로 간주하는
    남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집단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는 거 같습니다

    그리고 쓸데없이 높임법이 발달된 것도
    존중의 의미보다는 남과 나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서열을 매기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들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영어권처럼 그냥 이름을 부르던지 상대를 you라고 편하게 부르는 게
    저 개인적으로는 더 좋습니다

    저는 제 직장 상사나 사장도 제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거래 관계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언어라는 것이 혼자서만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사회의 변화에 맞게 언어도 변하고
    개인은 그 흐름에 맞춰야겠죠

    1. 사무엘 2019/04/14 00:18 # M/D Permalink

      여러 좋은 의견에 감사드립니다.

      청각적 변별이 중요하니, 괜히 잘 쓰이고 있는 외래어들을 어설프게 순화할 게 아니라 장(chapter) 같은 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은 단음절 한자어나 대체 용어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어에서 상용 한자의 한계를 정했듯이.. 우리말 한자어들도 한글로만 표기했을 때 의미 파악에 지장이 없는 것의 한계를 정하고 나머지 듣보잡들은 실생활에서는 쓰지 말거나 순화해서 쓰는 식으로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나-우리', '다르다-틀리다'에 대한 생각에도 동의하구요,
      쓸데없는 높임법 대신 아무나 이름과 you로 부를 수 있는 언어가 더 합리적이고 편하다는 것 역시 공감합니다.
      하지만 당장 모국어와 문자가 이런 식으로 형성돼 버렸고 언어의 사회성이라는 걸 개인이 하루아침에 뜯어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니..;; 비합리적이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이 먼저 형성돼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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