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격세지감

1.
1996년이던 걸로 기억한다. 본인이 중학생이던 시절, 경기 과학 고등학교가 TV 방송으로 소개되는 걸 봤다.
'경곽'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이 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교한 과학고이기도 하다. (서울 과학고가 최초가 아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학교의 자랑이랍시고 흘러나온 멘트 중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학교는 인터넷 전용 회선이 갖춰져 있고 전교생이 인터넷 다룰 줄 안다" 였다. ㅜ.ㅜ "전교생이 이메일 계정 갖고 있다"란 말도 했던가?

1993-4년이 CD롬, 사운드 카드를 위시한 멀티미디어 시대였다면, 1996-7년이 이제 막 윈도우 95가 보급되면서 인터넷, 멀티넷 이러면서 제대로 떠들던 시절이었다. ^^;;
요즘은 "전교생에게 노트북 지급하고, 학교 전구역에서 무선 인터넷 된다" 정도는 돼야 자랑거리가 될 것이고, 그게 그렇게 큰 자랑거리도 못 될 것이다.

하긴, 본인도 전화(모뎀)가 아닌 전용선 인터넷 자체를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접했으며 이메일 계정이란 걸 처음 만든 것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중학교 때 PC 통신, 고등학교 때 인터넷, 대학교 때 휴대전화 순으로 문명의 이기를 접해 왔다. 정보 사냥(검색) 대회라는 게 사라진 게 언제쯤이더라? ^^

2.
2002-3년 사이인 걸로 기억한다. 그 무렵에 TV 도전 골든벨 프로를 봤는데, 맨 마지막 50번 문제가 무슨 IT 용어를 묻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았던 여학생은 그 문제를 못 맞혔다.
그런데 그 문제의 답은 바로...

'블로그' 였다. ㅜ.ㅜ
그때까지 블로그라는 단어는 본인조차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용어였다. 지금은 블로그도 모자라서 트위터 같은 마이크로블로그까지 등장해 있는데도 말이다. ^^
저 때는 근성 충만한 IT계 초 얼리 어답터, 파워 유저들이나 블로그를 했지, 나머지 대다수는 나모 웹에디터 HTML 글자판때기 코딩으로 홈페이지를 만들거나, 아니면 싸이 내지 아이러브스쿨, 다모임 같은 것밖에 안 하던 시절이었다. 아울러, 소리바다가 아직 있던 시절.

그러다가 그 비슷한 시기에 네이버에서 지식(인) 검색이라는 걸 만들어서 대박을 냈고, 한국의 인터넷 문화를 뒤집어엎었다. 엠파스에서 자연어 처리 / 질문 문장 검색 비슷한 서비스를 하긴 했는데 그걸 네이버가 더욱 발전시킨 걸로 알고 있다. 야후, 알타비스타, 심마니 같은 초창기 검색 엔진들을 다 골로 보냈다.
나중에는 카페, 블로그 서비스까지 만들면서 네이버는 다음 같은 종합 포탈 사이트로 거듭난다. 맞춤형 홈페이지(myhome) 서비스는 꽤 오래 전에 중단했다.

2002-3년이면 아직 구글도 국내에서 파워 유저가 아닌 계층에서는 완전 듣보잡이던 시절이었다. 외국 사이트는 잘 찾았지만, 내 이름을 한글로 쳐 보면, 온갖 인명들을 검색에 걸리라고 일부러 수집해 놓은 쓰레기 성인 사이트들만 잔뜩 뜨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Posted by 사무엘

2010/07/31 16:20 2010/07/31 16:20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35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335

Comments List

  1. 김 기윤 2010/07/31 17:49 # M/D Reply Permalink

    정보처리 분야는 1년이 다르게 시대가 달라져 있으니..;;

  2. 비밀방문자 2010/08/01 02:22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시스템 클럽과의 인연

2005년 초의 일이다. 그때 본인은 인터넷 상으로 짜증나는 소식을 하나 접했다.
고려 대학교의 한 모 교수(정확히는 이미 명예 교수 랭킹인)가 일본의 무슨 출판물에다가 “일제 식민 통치는 조선에게 축복”이었다고 기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치고 상식적으로 이 한 줄만 딱 접하고서 열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사람을 옹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본인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친일파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평균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패거리들이 또 고루고루 나서서 ㅈㄹ을 하는군.. 이번엔 대체 누구야?’ 정도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2005년에는 연초부터 일명 ‘박 정희 배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도 개봉해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여차여차 하다 보니 관람하게 됐고, <만화 박정희>라는 책도 나왔다. 박 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써 놓은 광화문 현판을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글 진영 내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다 비슷한 시기이다! 이게 다 우연일까?

게다가 압권이었던 것은 CBS 방송국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 바로 이를 계기로 본인 역시 지 만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으며, 시스템 클럽이라는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공개 토론을 계기로 지 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미친 수꼴 개새끼로 확실하게 인증 받게 됐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회자조차 그다지 중립적인 위치에 안 서고 진 중권 씨와 한 패가 되어 지 박사를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보기 안 좋았다. (성공회대 교수라는데 성향 면에서 뭘 더 바라겠는가.)

도대체 지 만원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갑툭튀한 사람인가? 당사자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히 인상이 좀 얍실한 족제비-_- 같고 영화로 치면 주동 인물보다는 반동 인물, 진짜 친일파처럼 보이긴 했다. O<-<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스템 클럽 글을 읽고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외부로도 보도가 되어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골수 수꼴로 굳히는 데 일조한 글로는,

<민족, 외세만 아는 바퀴벌레들>: 공산주의, 좌익, 운동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감
<역대 대통령의 자질 추이>: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만 우왕ㅋ굳ㅋ이었고  그 후대 대통령들은 타락일로

이런 것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가 결코 아니며 그런 글들을 쓰는 것이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본인은 느낄 수 있었다. 김 완섭 같은 싸이코 부류가 절대 아니다! 일본 내지 친일파 후손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며, 군 복무도 월남전 참전까지 하면서 명예롭게 마쳤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서 미 해군 대학원에서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말마따나 자신만의 정리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일평생을 자기 계발과 교양 수련에 투자하고 살았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정말 대쪽같은 분이다. 본인은 진 중권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 지 박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중에, 저 정도로 대인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지 박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스템 공학자 내지 군사 평론가를 비롯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리랜서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김 대중 정권 때부터 나라에서 하는 짓을 보니까 이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한 2002년부터 본업을 버리고 시사 논객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혀 청렴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민주화 패거리 저질 정치인들이.. 능력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옛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욕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 기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살짝 수구 극우 성향이고 시국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음모론스럽게 확대 해석하는 면모가 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만한 수준이다. 음모론이야 반대편 진영도 어차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안함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등등등.. 지 박사의 주장이 선동조라면,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13구절이나 통째로 삭제되고 무려 6만 개의 단어가 변개됐다"는 주장도 충격적이고 선동조이긴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의 문제의 발언도 “조선이 러시아에게 안 먹히고 일제에게 먹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요지였다. 그에 대해서 “차라리 러시아가 낫지 일제는 훨씬 더 막장이었다”라고 정당한 반론을 할지언정, 앞뒤 문맥 다 떼어내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조센징을 일제가 보살펴 준 건 축복이었다”고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 매장하는 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본인은 예전에 “그나마 숙군 작업부터 한 뒤에 6 25가 터진 건 천만다행이었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걸 마치 “김 용묵이라는 작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터진 게 잘 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인 것이다. 난독증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본인은 지 박사의 행적에서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 본업을 버리고 생뚱맞은 분야로 뛰어든 점,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점(공 박사는 남산으로, 지 박사는 광주로. -_-)이 말이다. 특히 지 박사가 5 18 사태에 대해서 야사를 캐고 자료 모으는 건, 공 박사 버전으로 치면 과거 글자판 제정 과정의 흑역사를 추적하는 수준과 맞먹는다.

물론 본인은 이 승만과 박 정희에 대한 견해 외에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그의 견해에 다 동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잘 모르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의 자세를 높게 사고 존경할 뿐이다. 요즘 세상에 색깔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서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 자가 바로 빨갱이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빨갱이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렇게 분명한 흑백논리 자체는 성경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다. 빨갱이 대신에 죄나 지옥 같은 개념을 집어넣어 봐라. (게다가 지 박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일제 강점기가 ‘러시아 강점기에 비해서’ 축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이 나라에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주민 중에도 지 박사를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건 상식. 지금 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지 박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티를 공개적으로 낸 것만으로도 본인을 싫어하게 되고 떠나고, 심지어 <날개셋> 사용마저 보이콧한 사람이 좀 있다. ^^;;; 지 만원 박사의 사상이 뭐가 그렇게도 악하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대화조차도 원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있을 것이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지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2 08:30 2010/07/02 08:30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309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309

Comments List

  1. 김재주 2010/07/04 21:02 # M/D Reply Permalink

    음 뭐.. 글쎄요.
    최소한 어처구니없는 친일파가 아니라는 점은 그가 쓰는 글들 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라는 건 사실입니다만, 과연 지만원 씨가 돌아가신 공병우 박사님과 비교할 만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1. 사무엘 2010/07/04 22:39 # M/D Permalink

      물론 저 사람이 세벌식 타자기를 발명한 정도의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외골수, 애국심과 대쪽 같은 성품과 지조 같은 면에서는 여러 모로 공 박사를 닮았습니다. 공 병우 박사의 직속 제자이신 송 현 한글 문화원 원장님도 지 박사를 괜히 존경하시는 게 아니죠.

      저 사람이 아닌 다른 논객만 있었다면(ㅈㄱㅈ, ㄱㄷㄱ 등), 제가 우리나라의 소위 우익 진영이라는 곳에 지금 정도의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겁니다.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조선 총독부 청사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 시기적으로 우리나라의 1990년대 중반에 해당하는 김 영삼 정권 때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었으며, 고속도로 통행료의 징수 방식이 후불제로 바뀌었다. 직할시가 이때부터 광역시로 바뀌기도 했다. 물론 성수 대교와 삼풍 백화점의 붕괴, 그리고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같은 비극적인 대형 참사도 이 정권 때 유독 많았다.

이외에도 1994년엔 서울 600주년을 기념한 타임캡슐 매장 행사가 열렸고 여기에 아래아한글 2.5가 포함되기도 했다. 이에 덧붙여 또 의미 있는 거사가 추진된 게 있다. 바로 반세기 가까이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조선 총독부 청사가 1995년에 헐린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나저나 세종로는 예나 지금이나 폭이 기겁을 할 정도로 넓고 아름답다. 저 차선 수를 봐라... 사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길이라 함.)
조선 총독부 청사는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긴 후 일제가 경복궁 건물의 일부를 헐고 그 부지에다 지은 건물이다. 둥근 돔은 마치 옛날 서울 역의 외관을 떠올리게 하며, 1920년대에는 그게 고급스러운 유행이었던 것 같다. (조선 총독부 청사 1926년, 서울 역 1923년)

하지만 우리로서는 침략자요 민족의 원수들이 사는 곳으로 정말 치욕의 기억이 사린 건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위치조차 경복궁을 딱 가로막는 구도이니 말이다. 그 당시엔 조선 총독부로 들어가 요인 암살과 건물 파괴를 시도한 독립 운동가들의 의거도 물론 있었다. 동양 척식 주식회사(흠,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생각나네)와 더불어 테러 대상 1순위.

그 후 일제는 패망했다. 마음 같았으면 저 얄미운 건물도 당장 부숴 버리고 싶었을 것이고, 실제로 초대 대통령인 이 승만부터가 수 차례 이를 계획하고 지시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럴 수 없었다. 우리나라가 당시 얼마나 가난했던가. 근처의 경복궁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저놈만 곱게 폭파할 비용도 기술도 없었고, 당장 우리나라 정부가 사용할 건물도 없는 마당에 그 건물은 한동안 대한민국 정부의 중앙청으로 쓰이게 됐다.

세월이 흘러 인근에 정부 종합 청사 건물이 따로 지어지면서, 조선 총독부 청사는 잠시 국립 중앙 박물관으로 용도가 변경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을 철거해야 하느냐 그냥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보존하느냐를 두고 양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특히 한글 학회처럼 민족 성향이 강한 단체에서는 저 흉물을 하루빨리 철거해 달라고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청원을 해 왔다.

본인은 뭐 그렇게 풍수지리 같은 건 안 믿는다. 뭐 우리 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쇠말뚝을 박고 뭘 관통시키고 이런 거... 별로 관심 없다. 하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때 조선 총독부 건물은 철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첫째, 상술했듯이 경복궁을 가로막는 저 위치가 너무 부자연스럽고 우리나라 문화 유적에 대한 좋은 인상을 못 준다.
둘째, 차라리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서대문 형무소 같은 장소야 당장 피지배자들이 직접적인 고초를 겪었던 곳이고 보존 가치가 있지만, 저기는 어차피 한국 서민이나 독립 운동과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었으며 역사 교육 효과보다는 생뚱맞음과 민족적 반감만 더 키운다.

게다가, 믿거나 말거나, 서울을 방문한 일본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저기였다고 한다.
자기 민족이 한때 남의 민족을 관광-_-했던 본부로 반드시 관광 간다는 것. 어???

그래서였을까?
김 영삼 정권 때 본격적으로 조선 총독부 청사 철거 떡밥--독도 폭파 떡밥도 아니고--이 나돌기 시작했을 때, 일본 정부는 공문까지 보내어 우리에게 아주 정중하게 이렇게 제안했다.
"이건 그래도 옛날에 우리가 지은 건물이니, 우리가 알아서 곱게 해체해서 잔해를 본국으로 가져가 보관하겠다. 모든 과정의 비용은 우리가 일체 부담하겠다"고 말이다.

와.. 이건 무슨 전사자 유골 찾아 가는 것도 아니고...;;; 저 말에 무슨 뉘앙스가 깔렸는지는 빤히 보이지 않는가?
이 말에 빡친 김 영삼 대통령은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씹었으며, 도리어 대통령 특명을 내려서 서둘러 건물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일부는 폭파하고 돔 같은 일부 주요 부품(?)만 독립 기념관으로 가져가서 보존해 놨다. 그때 외인 아파트만 폭파한 게 아니다. ^^ 이것 덕분에 당시 대통령의 지지도가 크게 올라갔다는 후문.

이 일에 대해서
"그래도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인데 왜 굳이 우리 돈까지 들여서 헐어 버렸냐?"
"그나마 철거도 일본이 알아서 완전 공짜로 해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왜 그렇게 경솔하게 행동했냐?"
뭐 이런 말도 오가곤 했으나, 본인은 별로 영양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때도 그렇잖아도 일본이 독도 망언 엄청 하던 시절이었으며, 이 때문에 사기업도, 공기업도 아니고 무려 정부 기관이었던 철도청조차 열차 내 일본어 안내 방송을 잠시 중단한 적까지 있었다. 과연 대인배이다. ㅋㅋ

참고로, 6 25 때도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은 이 총독부 청사는 무척 튼튼했다고 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말하듯,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도로· 건물· 철도 따위가 오늘날까지도 끄떡없을 정도로 전반적으로 잘 만들어졌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다. =_=;;

성인이 되고 서울에서 좀 살아 보니까, 서울 지리를 아는 게 세상 문물을 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는 걸 느낀다.
성북동이 어디 있는지, 서울의 도시 개발 역사가 어땠는지 까맣게 모르는 상태에서 <성북동 비둘기> 같은 시가 감흥이 와 닿을 수가 없으며,
동작동이 어딘지도 모르고서 동작동 국립 묘지 운운하는 반공 웅변 원고 외우는 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을 이용해서 경복궁 구경을 하고 왔는데 그 터에 옛날에는 저런 건물이 있었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간다.

다음은 이 글 내용과 관련하여 덧붙이는 아이템들.

1. 일본이 저런 식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슬쩍 제안을 한 사례가 나중에 또 있었다. 바로 1999년, 김 대중 정권이 김 종필 총리를 위시하여 웬 한자 병용 병크를 터뜨렸을 때의 일이다. 그 해 2월 11일에 서울에 온 일본 외무 장관 '고무라 마사히코'는 우리나라의 홍 순영 외무 장관에게 "기왕 한자를 병용할 거면 우리 일본식 한자를 써 주시죠? ㅋㅋ"라고 요청을 했다.
비단 이런 사례뿐만이 아니라, 또 민족 감정 같은 걸 배제하더라도 일본인의 관점에서야 한국이 한글 전용보다는 한자 혼용하기를 훨씬 더 원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한글 학회 같은 진영에서는 이 사실을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며 그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갖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대로 선생님의 글을 참고하자.

2. 그나저나 왜 자꾸 "일제 36년"이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뺄셈도 못 하나? 1945-1910은 35이지 36이 아니다. 게다가 8월 29일부터 8월 15일까지니까 엄밀히 말하면 만 35년도 아니고 34년 350몇 일이다!
나라 주권을 외세에게 빼앗겨 지낸 게 뭐가 자랑스럽다고 무슨 사람 나이처럼 1을 덧붙이는지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5 08:27 2010/06/15 08:27
,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95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95

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10/06/24 13:2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사무엘 2010/06/24 18:09 # M/D Permalink

      아앗...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ㅋㅋ
      잘 기억하시네요. 자료를 좀더 찾아보니, 역시 폭파는 아니고 그렇게 헐었더랬습니다.
      지금 세종로는 편도 4차선 정도로 차선수가 확 줄어들고, 중앙에 커다란 섬? 문화 공간이 생겼더군요. 이 순신 장군 동상에 이어 세종대왕 동상도 세워졌고요.
      그래도 저 중앙청 건물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경관에 백 번 낫습니다. ^^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추억의 공익 광고들

1. 주제: 공중도덕
파란 정장 차림의 한 남성이 갑자기 털이 북실북실 나면서 원숭이로 변한다. 그리고는 새치기, 운동 경기장에서 난동 등 갖가지 추한 행동을 다 한다.
거의 1990년대 초반에... 엄청 옛날에 본 광고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그러고 보니 전화기도 다이얼이요, TV도 채널 바꾸는 다이얼이 있었구나.
사람 얼굴이 원숭이 얼굴로 바뀌는 CG가 하도 엽기적이고 흉악했던지라, 초등학교나 그 이전에 봤을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2. 주제: 환경
어느 아날로그시계가 물속에 빠져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시계 바늘은 째깍거리면서 점차 자정으로 다가가고, 물은 점점 흐려지고 더러워져서 시계를 볼 수가 없게 된다. 아마 시계도 고장 나서 작동을 멈췄지 싶다. 어린 나이에 보기에 은근히 무서운 인상을 받았다.

3. 주제: 환경
남녀 어린이들이 하얀 세트장에서 놀고 있는데, 바닥 곳곳이 시꺼멓게 변하고, 그런 구역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 공간도 갈수록 좁아진다. 애들은 겁에 질리고...
이것도 보기 무서웠다.

4. 주제: 과소비
새까만 세트를 배경으로 어느 중년 남성과 여성이 번갈아가면서 풍선을 분다. 부풀어 오르는 그 풍선에는 외제차, 고급 양주, 보석 등의 사진이 번갈아가며 오버랩된다. 그러다 나중에 풍선은 펑! 터지고 “과소비는 나라 경제를 어렵게 만듭니다”라는 무거운 멘트가 나간다.
닥치고 근검 절약 국산품 애용하자고 한창 밀어붙이던 5공스러운 이념이 좀 담긴 공익 광고이긴 하나, 오늘날도 곱씹을 가치는 있는 내용이다.

"국민 소득 4천 $. 소비 수준은 2만 $." 와.. 정말 언제적 멘트냐..;;
옛날 <과학의 노래>에서 수출 100억 $, 국민 소득 1천 $.. 이랬지 싶은데.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국민 소득 2만 $에는 도달 못 해 있다. 흠좀무.

5. 주제: 에너지 절약
다른 건 기억 안 나는데, 나중에 석유 드럼통이 견디질 못하고 옆으로 쿵!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6. 주제: 음주 운전
사고로 처참하게 부서진 차 옆에 운전자가 바깥까지 튕겨나간 채 죽어 있다. 그런데 카메라의 역방향 재생이 시작된다. 차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오고 운전자가 다시 운전석으로 쓰윽 돌아온다. 차는 비틀거리면서 한없이 후진을 반복하는데... 재생이 끝나는 곳은, 바로 운전자가 술잔을 거하게 짠~ 부딪치는 지점.
나름 참신하게 잘 만든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은 되돌릴 수 있어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술 마시고 나서 '필름 끓겼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니 무척 잘 만든 광고 카피이다. 마치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갑니다"처럼 말이다.

요즘은 음주 운전뿐만 아니라 '운전 중 전화질'도 안전을 아주 위협하는 요소로 등극한지라, 외국에서는 Don't text and drive라고 교통사고 장면을 꽤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묘사한 공익 광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음주 운전 단속은 꽤 엄격하게 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는 성 범죄는 여전히 왜 이리도 술에 관대한 걸까?

7. 주제: 언어 순화
앵무새가 ‘저 녀석! 저 녀석!’ 이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학습한 말을 흉내 내는 게 나온다.
평소에 앵무새 주인이 말을 험악하게 하다 보니, 말을 조심해야 할 곳에서 앵무새가 자기 주인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나름대로 시간 순으로 배열했다. (1 oldest, 7 latest)
기억에 남는 공익 광고들을 나열해 보니까 은근히 많네... 혹시 이런 것들 기억하는 분은 없으신지?
.
.
.

이 글을 쓰고 난 후...
http://www.kobaco.co.kr/ 에서 위의 공익 광고 방송들을 다 열람해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참 대단하다. -_-;; 그래도 내 기억도 상당히 정확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1990 늑대인간
1989 생활하수
1990 런칭
1989 풍선
1990 스위치
1991 필름역회전
1995 앵무새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건,
요즘 광고들은 처참하거나 무서운 장면을 옛날만치 노골적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히 본인이 나이가 들고 감수성이 무뎌져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노골적인 공포감과 혐오감 조장은 지양하는 한편으로 메시지는 더욱 implicit(간접· 암시적)해졌다.
가령, 옛날 광고에서는 무질서 난동 부리는 나쁜놈을 저렇게 원숭이로 묘사하여 노골적으로 깠다면, 요즘은 마치 서울 메트로 광고처럼 럭비 선수에다 비유해서 "님들은 럭비 선수가 아닙니다. 지하철 탑승을 그렇게 하는 건 반칙입니당^^"이라고... 재치를 동원하는 식.

환경을 소재로 한 광고만 해도, 옛날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게 주변 환경이 시꺼매지고 더러워지는 모습, 물고기들이 몰살 당해 물에 떠오른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1996년도 광고를 보면 그냥 민속 그림을 CG로 애니메이션화해서 보여주면서 "그 (물이 깨끗하던) 시절이 정말 그립습니다"라고 표현의 수위가 한결 누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0 08:57 2010/06/10 08:57
, ,
Response
No Trackback , 3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91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91

Comments List

  1. http://whitemagnolia.myid.net/  2010/06/10 11:18 # M/D Reply Permalink

    많이 기억하시네요 ㅎㅎㅎ

    전 기억나는게 없네요.. ㅠㅠ
    코바코 감사합니다. 함 가서 봐야겠네요. ㅎ

  2. 정 용태 2010/06/10 13:52 # M/D Reply Permalink

    저는 7번만 머리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직접적으로 하지 말라고 하면 반발감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것 같네요.. 그러나 가끔씩 직접적으로 찔러줄 필요도 있을듯합니다 ^^

  3. 사무엘 2010/06/10 18:05 # M/D Reply Permalink

    의견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 일곱 중에서는 그나마 <앵무새>가 최근 작품이죠. 그래 봤자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지만.. 나머지는 다 20년 가까이 전, 제가 무려 초등학교 저학년 나이일 때 만들어지고 방영된 광고입니다.
    사물에 대한 고정 관념과 편견이 형성되기 전, 어렸을 때 접한 영상물이 정말 안 잊혀지고 평생 가더군요.
    지금 방영된 공익 광고들은 20년 뒤에 저도 거의 기억 못 할 것 같습니다. ^^;;;
    옛날 광고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살벌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죠.

    6번인 필름 역회전의 경우 해외에서도 무슨 광고 공모전에서 입상했다고 들었습니다. 명작이죠.
    유튜브 같은 데서는 역회전을 다시 뒤집어서.. 사고 나는 장면이 그대로 묘사되는 버전도 돌아다니더랍니다. =_=;;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본인은 예전에 쓴 적이 있는 <일제 강점기의 드라마틱한 크리스천 커플>이라는 글을 이 블로그뿐만 아니라 몇몇 크리스천 커뮤니티에다가도 올렸다.
이런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는 두 위인 커플의 일대기와 연애 생활에 대해서 그냥 재미로 읽으라고 글을 올렸고, 정치색 같은 건 전혀 표방하지 않았다.

그러나, 글을 올린 곳에서 모두.. 이 승만에 대해서 내가 묘사한 표현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댓글이 꼭 하나씩은 올라왔다.
그 댓글을 읽어보면 이 승만에 대한 진정어린 혐오와 증오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혐오와 증오심의 근거는 본인이 보기에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들...

4· 19에 대한 기억이 워낙 짙어서 독재자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그 밑으로 해방 직후와 심지어 일제 강점기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고인에 대한 원색적인 비방과 험담은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모르겠다.
“전후 상황과 문맥 다 무시하고 오로지 이 승만 개새끼 만들기”이다.

이 승만이 대통령 해 먹으면서 그렇게까지 죽을 죄를 지었나? 정말 김 일성이나 이 완용 욕도 저렇게 할까 싶을 정도이다.
평생을 기독교 정신으로 술· 담배 안 하고 검소하게 살았고 교리적으로 배도하지 않았으며, 딸 같은 서양 여자와 결혼한 게 특이점일 뿐이지 그래도 섹스 스캔들 전혀 없으며, 고위 관리들 회식 때 기생 끌어들이지 말고 대신 각자 자기 아내를 데리고 오게 하고..

그 정도로 행실상의 선한 간증이 있는 사람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면, 일단 좌우 정황부터 좀 살펴야 하지 않는가? 왜 저 사람에게만 유달리 평가의 잣대가 그리도 가혹한가?
부정 선거, 부산 정치 파동, 보도 연맹 등을 줄줄 외우는 사람들이 평화선, 반공 포로 석방, 원자력 협정 같은 건 얼마나 알까?

지식이 편파적인 것으로밖에 안 보인다. 개독안티들도 얼마나 지식이 뛰어나고 논리정연한가? 그 문맥 안에서만 말이다. 걔네들 글대로 논리에 이끌려 가기만 하면 정말로 야훼는 완전 미친 변태 같은 무능한 신이고, 바이블 같은 ㅂㅅ 같은 책이 어떻게 수천 년간 존재해 왔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게 된다. 단지 그들이 전제로 깔고 있는 설정들이 전혀 사실이 아니어서 문제일 뿐이지.

이 승만에 대한 주된 오해와 나의 반박을 열거한다.

1.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싸가지 없고 고집불통 안하무인이어서 파벌이나 만들었다
이 말만 들으면 언뜻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 대신 실력으로 용서된다” 수준이다.
집안에서만 싸가지가 없었던 게 아니라, 미국 정치인들에게도 싸가지 없고(?) 콧대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 승만은 너무 똑똑하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고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는 레벨이 넘사벽으로 달랐다. 이 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이 특이한 것만큼이나 특이한 사람이었다.

2. 무력 독립 운동 노선을 반대했다
신념과 관점의 차이일 뿐이며 정황상 그는 반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우리나라가 무력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해명은 본인의 이전 글 <안 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참고하라.

3. 남북 분단의 원흉이다
정말 말이 안 된다. 대다수 사람들이 UN이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도 잘 모르던 시절에, 스탈린과 기회주의자 김 일성의 흉계를 간파하고 미국을 설득해서 남쪽에만이라도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외교력을 두고두고 칭송해도 시원찮을 판에, 어떻게 헐뜯어도 저렇게 치졸하고 민망하게 헐뜯을 수 있을까?
이 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고 헐뜯는 건 우리나라가 북한 김 일성 손아귀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 난 것과 같다. 정말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뀌고 선과 악 관념이 날조된 것이다(사 5:20).

4. 친미 (나쁜 의미의)
전혀 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이 승만만치.. 그 보잘것없는 허약한 국력으로도 외교 능수능란하게 잘 해 내고, 미국 정치인들을 쩔쩔매게 만들고 미국으로부터 최대의 국익을 얻어낸 정치인은 없었다. 일본하고만 짝짜꿍이 잘 맞던 미국을 한국의 친구로 바꾼 게 이 승만이다. 그 옛날에 중국이나 소련이 아닌 미국을 바라본 것이다. 이게 욕 얻어먹을 짓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도 그는 독립 운동가 시절부터 미국에서 40여 년을 지내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일부러 거부하고 무국적자로 버텼다. 이게 친미인가? “대한민국은 곧 독립할 거고 나는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시민권 같은 건 없어도 됩니다”가 그의 지론. 나라가 쌩쌩 잘 돌아가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하면 대통령병 권력욕이지만,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이런 말을 한 건 지극한 애국심이다.

5. 친일 (나쁜 의미의)
이건 본인도 처음엔 궁금했다. 일제로부터 지명수배를 받은 독립 운동가 출신이며 평생 일본을 그렇게도 싫어하고 지냈다는 사람이, 왜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 출신 관료들에게 기회를 줬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나이가 들고 세상 물정을 좀 알고 나니까, 안타깝지만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걸 적극 공감하기 시작했다. 나치에게 겨우 3, 4년 남짓 점령당했다는 프랑스도 아니고 무려 한 세대에 가깝게 일제의 손아귀에 있던 나라가 그럼 일본 경찰· 군인 출신 인재를 활용 안 하고 어떻게 당장 치안과 국방을 유지하겠는가? 더구나 국군 수뇌부에조차도 ‘빨갱이’들이 있어서 적과 내통하는지, 사상이 어떤지 알 수가 없었고 이북에서는 수시로 폭동을 일으키고 건국을 음해하고 방해하던 마당에 말이다.

우리나라의 건국 초기에 친일파 청산을 가장 방해하고 그들이 설 빌미를 제공한 장본인은 다름아닌 북한이라는 게 본인의 지론이다. 박 정희도, 안 두희(김 구 암살범)도 다 6 25 덕분에 면죄부가 주어지고 복직할 수 있었는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리요?

6. 6· 25 때 혼자 도망치고는 다리 폭파나 했다
그런 적 없다. 이 승만은 “국민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쌩고집을 부렸고, 그걸 영부인과 측근들이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피난길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 국군이 이기고 있다는 거짓 방송이 왜 며칠째 울려 퍼졌는지, 결정적으로 한강 다리를 누가 폭파하라고 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휴전선 인근의 늘 있던 교전이어서 전쟁을 대수롭지않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고, 다리 폭파의 경우 손발이 안 맞은 작전 실수였을 수도 있으며, 정말로 군부를 장악했던 불순세력이 자기네가 싼 똥을 남한 정부에다 전가시킨 것일 수도 있다.
단 하나, 이 승만이 “용용 난 먼저 피난 가지롱. 너희는 엿 먹어라” 하면서 다리 폭파한 건 절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이 승만의 업적과 잘못 내지 한계는 컴퓨터 식으로 말하자면 윈도우 95 정도에다 비유할 수 있다. 윈도우 95는 도스와 16비트 윈도우에 머물러 있던 평범한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무려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OS를 선사함으로써 생활을 완전히 바꿔 놨다(민주주의 주권 국가)! 하지만 도스에서 잘 살고 있던 사람들의 반발이 만만찮았으며, 윈95 역시 내부에는 상당수 16비트 코드를 답습할 수밖에 없었다. 호환성을 맞추다 보니 태생적으로 안정적일 수가 없었다. 불안정하다고 까이고, 또 확장완성형 때문에 한글 파괴라고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아주 그럴싸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러나 우리나라 IT가 윈도우 95 없이 세계 무대에서 나란히 설 수 있었을까? 그 당시에 윈도우 NT 돌릴 수 있는 컴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그 후, 나라의 기틀이 잡히고 외교력보다는 이제 진짜 국내 민생을 살피는 지도력이 더 필요해지면서, 너무 늙어 버린 이 승만의 통찰력은 한계를 보인다. 인의 장막에 휩싸여 여당의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하고, 부하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부정 선거에까지 연루되어 독재자로 낙인 찍힌 불운한 말년을 맞이한다.

그는 그래도 “나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 내 부하놈들에게 속았다”, “고의적인 실수이다, 오해이다” 궁시렁궁시렁.. 요즘 정치인들처럼 입만 열면 거짓말로, 찌질한 변명과 험담으로 일관하지 않았다! 그냥 아무 말 없이 “국민이 원하면 하야한다” 한 마디로 모든 책임을 지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남들이 욕하건 말건 역사의 평가에 모든 걸 맡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고매한 품위와 명예를 지킨 것이다.

솔까말 본인은..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나 정치 놀이(?)-_-에 발을 들여놓기 전부터도 이 승만에 대해서는 “독립 운동가 출신의 초대 대통령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 사람은 아주 똑똑하고 고집 세고.. 훌륭한 분이긴 한데 욕심 부리다 좀 추하게 끝났지..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까지 오래 권력 맛을 보고 싶어서 징징댔던 걸까? 그래도 나중에라도 정신이 들어서 스스로 물러난 덕에 더 험한 꼴은 안 봤다” 정도만 알고 있었고 그 정도만으도 그럭저럭 상당히 정확한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 승만은 후대의 전· 현직 '장로 대통령'보다 신앙면에서도 앞섰고 인물의 그릇 크기와 프로필도 월등히 앞선 분이다. 심지어 미국의 초대 대통령조차도 사실은 크리스천이 아니고 그냥 이신론자일 뿐이라는 설이 지배적인데, 이 승만은 확실하게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다. 최소한 "우리 가족은 종교가 제각기 다 다르지만 싸우지 않고 잘 지냅니다" 이러던 에큐메니컬 전직 대통령보다야 100배는 더 낫다! 그런데 세상적인 불신자도 아니고, 크리스천이 어떻게 이 승만을 그렇게까지 싫어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국 건국 초기에 살았던 법학자인 사이먼 그린리프 박사(Simon Greenleaf; 1783-1853)는 성경은 훼이크이고, 예수의 부활도 다 허구라고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법학 지식을 동원하여 문헌 조사를 해 보니 세상에 예수의 부활만치 정확하게 잘 기록된 사건도 없고 이 정도면 법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는 완벽한 증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결국 자신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것처럼 처음엔 멋도 모르고 이 승만 욕만 하다가 공부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어 그를 존경하게 되고, 그 사람의 스케일과 인품에 감명 받은 지식인이 적지 않다. 알고 나니 '까'에서 '빠'로 돌아선 것. 그의 업적은 비가시적이고 하다못해 박 정희의 경제 개발보다도 더욱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게 업적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 승만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통치자 밑에서 탄식하고 신음하기 전에(우린 이미 이걸 경험 중이다!), 위인과 영웅의 업적부터 바로 알아봤으면 좋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osted by 사무엘

2010/05/31 08:35 2010/05/31 08:35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80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80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우리나라의 원로 군인

※ 손 원일 (1910~1980)

가문, 출생부터 시작해서 과거 행적까지 이거 뭐 나쁜점은커녕, 약점 잡힐 거리 하나 찾을 수 없는 존경스러운 분이더라. 독립 운동가 겸 목사인 손 정도의 아들인데, 유 관순 열사도 이화 학당 시절에 정동 교회를 다니면서 그의 설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고 한다.

손 원일은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국군이 창설되던 당시, 쓸 사람이라고는 고작 일본군 간부 출신밖에 없던 때에 그는 일제와는 관계가 없는 중국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상하이 독립 운동 단체 출신이었다. 그러니 진보 진영이 싫어할 거리가 없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아무 기반도 없던 밑바닥에서 해안 경비대를 창설하고 초대 해군 참모 총장을 지냈으며, 1952년 중장으로 예편한 후에도 우리나라 국방· 외교· 사회 각 분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몇 년 전 우리나라가 자체 개발에 성공한 모 잠수함 이름을 '손원일함'이라고 짓기도 했다.

게다가 이분은 공 병우 박사의 자서전에, 외솔 최 현배 박사와 더불어 한글 타자기, 한글 기계화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후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로 아주 좋게 언급돼 있다. 원츄!

  나는 전쟁 중에도 한글 타자기를 빛낸 손 원일 해군 제독과 최 현배 박사를 잊을 수가 없다.

재미있는 사실: 손 원일은 왕년, 그러니까 1960, 70년대에 각종 재향 군인회, 반공 단체의 고문과 대표를 역임했다(위키백과에서 참고함). 기독교 집안인 데다 이쯤 되면, 소위 말하는 친북 좌파와는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성향이다. 하지만 그의 형 손 원태 박사는 1991년, 김 일성의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어찌 된 영문일까? 그의 아버지 손 정도 목사가 왕년에 일제 강점기 시절 김 일성의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이 칭찬하고 좋게 띄워 주는 인물이다 보니, 정작 우리나라의 과거 반공-_- 정부에서 손 목사의 업적에 대해 쉬쉬할 정도였다고 한다. 남과 북을 초월하여 이렇게 존경 받을 수 있는 인물과 가문이 무척 부럽다.

※ 이 종찬 (1916~1983)

육군 참모 총장을 지났으며, 이 승만을 증오하는 진영에서 '참 군인'이라고 아주 좋게 띄우는 사람이다.
이 승만이 독재를 목적으로 야당 국회의원들을 불법 억류하고 반대 여론을 제멋대로 군대까지 동원하여 잠재우려 했을 때, 그 지시를 "각하, 우리 군은 UN 사령관의 명령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멋진 한 마디로 일축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끝내 총장 자리에서도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이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경질된 것처럼??)
일명 부산 정치 파동이라고, 6 25 전쟁 도중에 일어난 일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아주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종찬은 그 청렴한 행적과는 어울리지 않게,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 이 하영의 손자이다.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교육도 잘 받았으며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49기로 졸업하여(박 정희는 57기) 중일· 태평양/전쟁 때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정도 경력이 있으니 해방 직후 반민특위로부터 조사도 받았고 친일 인명 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도 등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찬은, 친일파 후손이라고 해서 질이 다 나쁘지는 않으며 친일 행적을 참회하는 사람도 있다는 예로 종종 인용되곤 한다.

※ 백 선엽 (1920~)

위의 두 사람보다는 어리지만 그렇다고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은 놀랍게도 2010년 현재 아직도 살아 있다. 그는 우리나라의 창군 주역이며, 육군 참모 총장으로서 쓰리스타 중장이 아닌 진짜 포스타★★★★ '대장'으로 예편했다. 미군조차도 깍듯이 예를 표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를 빼고서 6 25 때 국군의 활약이라든가 그 후 우리나라 육군의 변천사를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진보 진영에서는 그렇게 좋아할 수 없는 과거를 지닌 사람이다. 일본 만주국 장교로 복무했으며, 40년대 말에 박 정희가 남로당 간부로 구속되었던 시절에 아주 기풍당당한 "저를 좀 도와 주시겠습니까?" 멘트에 감화되어 그의 구명에 적극 나선 인물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정 일권(역시 역대 육군 참모 총장. 군인 겸 정치인), 방 일영(조선일보 전 회장) 같은 사람까지.. 다 그 나물에 그 바닥이다.

2008년엔 창군 60주년을 맞이해 일각에서는 국군 역사의 산 증인인 이 사람을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별 다섯짜리 원수 계급이니, 이 사람은 거의 국군의 신 정도로 추앙받게 되겠다. 물론 박 정희 부류를 증오하는 진영에서는 그걸 결사 반대한다. 그 반면, 보수 진영에서는 찬성하거나 최소한 반대하지는 않는다.

본인은 뭐 별로 반대는 안 한다 주의이다. 그런데 이 명박 정부로 들어와서 갑자기 건국절이라는 말도 나오고 백 선엽 명예 원수 추대 이런 말도 나오는 걸 보니, 정부의 성향이 과거 10년과 비교했을 때 바뀌긴 바뀌었다는 점 하나는 확실하게 느낀다. 참고로 건국절이라는 말에 대해 이 승만 전대통령의 양자인 이 인수 박사는 아주 환영하는 뜻을 밝힌 바 있음을 인터넷 뉴스로 본 적 있다. ㅋㅋㅋ

공 병우 박사의 자서전에 나타나 있는 이 사람의 문자관은, 손 원일과는 정반대이다. 나는 그가 군인으로서는 훌륭한 원로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문자관에 대해서는 전혀 존경하지 않는다.

  그런데 타자기 열기가 뜨겁게 번져 나가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찬물을 끼얹어 제동을 거는 사람이 나타났다. 1957년에 육군 참모총장이 된 백선엽 장군이다. 백 장군은 한글로만 작성된 공문은 한자가 없으니 읽기가 불편하다면서 문서를 한자 혼용에다 펜으로 써서 올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한 줄 요약: 손 원일 제독 짱. 밑으로 갈수록 일본 냄새가 짙어짐.

Posted by 사무엘

2010/05/05 18:50 2010/05/05 18:50
, , , , ,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59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59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차우셰스쿠 정권의 몰락

1989~1991년이면 한국으로 치면, 올림픽이 끝나고 한창 노 태우 정권이던 시절이다. 본인은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구소련이 붕괴하여 국제 정세가 또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올림픽을 계기로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진 게 1989년이고, 그 후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은 이중 국적 허용까지 이뤄질 조짐이다. 1991년엔 우리나라도 북한과 나란히 UN에 가입했다. 92년에는 대만 대신 중국과 수교까지... 뭐 그때는 대략 그런 시절이었다.

아무튼 세계가 격변하던 그 무렵에, 유럽의 어느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수십 년 동안 국민들을 착취한 어느 악랄한 독재자가 혁명에 의해 축출되었다. 외국으로 도피하려다가 실패하고, 결국 국민의 즉결 심판을 받아 총살당했다.
이쯤 되면 누군지 알아맞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바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이다.

그는 명목상으로는 4선까지 한 ‘대통령’이었다. 통치차로서의 임기가 1967~1989였으니 박 정희(1963~1979)와 비슷하지만, 저 사람의 집권 기간이 더 길다.

그는 처음부터 또라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 김 일성 정권을 벤치마킹하면서 점점 맛이 가기 시작했다. 내 나라도 저 북한처럼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다!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완벽한 독재 정치로 인민을 지도자의 총알받이로 개조시키고, 정권을 아들에게까지 대대손손 물려 줘야겠다고 말이다. ㅎㄷㄷㄷㄷ;;;

그는 2천만 인구밖에 안 되는 자국 내에 3백만 개에 달하는 도청 장비를 설치하고 국민들을 감시했다. 잘못된 경제 정책으로 서민 생활을 파멸로 몰아넣었다. 중국은 인구를 억제하고 있는데 이 나라는 반대로 인구를 강제로 늘리려고 별 엽기적인 정책을 다 폈다. 주체 사상을 루마니아어로 번역해서 보급했으며 자기를 위대한 수령님처럼 우상화하는 한편, 성경을 지원 받아서는 화장지로 만들어 보급했다. -_-;;

그러면서 차우셰스쿠 자기는 궁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호화 사치 향락을 즐겼다. “10점 만점에 10점이오!” 전설의 체조 선수 나디아 코마네치의 인생의 흑역사에도 이 부패한 정권이 개입해 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모래성 같은 그의 권력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혁명이 일어난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어쨌든 차우셰스쿠가 유지해 왔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정권이 무너졌다. 그는 정신적 지주-_-;;인 김 일성이 사는 북한으로 도피하려고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비밀 재판을 받았다. 일부에서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그를 헌법대로 민사 재판에 회부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현실은 시궁창. 재판은 마치 북한의 인민 재판 식으로 군사 재판이라는 명의로 아주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예수님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기로 미리 각본을 다 짜 놓았던 것처럼, 사형이 확정되고 집행되었다. 왜냐하면 시간이 부족해서였다. 차우셰스쿠를 구하러 외국 군대의 파병까지 점쳐지는 상황이었고 지금 이 놈을 신속하게 없애지 않으면, 전세가 뒤집혀서 혁명군이 반역자로 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검사는 나라를 말아먹고 수많은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린 차우셰스쿠 부부에게 총살형을 구형했다. 그때 검사가 했다는 말이 압권이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사형 반대론자이지만, 이 친구는 어차피 인간이 아니므로 상관없다.” ㅎㄷㄷ;; 이에 맞서 차우셰스쿠는 누구도 자기를 재판할 권리가 없다면서(무슨 유 관순이냐? -_-) 길길이 날뛰었고, 명목상 그의 변호사는 이 친구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식의 변론밖에 할 게 없었지만.. 나중엔 변호사마저도 검사와 한 패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솔직히 이 정도 죄질이면 의뢰인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사형 당해도 싼 게 맞죠?” ㅜ.ㅜ

보통 문명 국가에서 사형을 집행할 때는 집행관의 정신적 부담을 덜도록(사형 제도는 지극히 성경적이다. 하나도 부담이나 양심의 가책 느낄 필요가 없는데..!!!) 교수대의 경우 여러 사람이 스위치를 동시에 누르는데 그 중 랜덤한 일부만이 동작하고, 여러 사람이 총을 쏴도 일부의 총만이 실탄이 들어있게 하는 방식을 쓴다. 루마니아에서도 차우셰스쿠를 총살할 때도 혁명군은 사수 10명을 모집하여 그 중 절반에게만 실탄을 지급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우셰스쿠를 너무 증오한 나머지 병사들이 수십 명씩이나 “저 놈은 꼭 내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하고 사수로 지원했다고 한다. ㅜ.ㅜ 그리고 사수들이 실탄을 제각기 사비로 다 지참해 왔다! 사수의 숫자를 줄이고 줄였지만 차우셰스쿠는 거의 160발에 달하는 총알 세례를 받고 진짜 ‘벌집’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1989년 성탄절에 말이다. 나중에 제기될지 모르는 차우셰스쿠 생존설을 완전히 일축하기 위해, 사형 집행 과정은 혁명군 진영이 실시간으로 방송에다 생중계를 했다고 한다.

지금도 루마니아 사람들은 깽판 독재자인 차우셰스쿠를 당연히 증오한다. 우리나라의 유명 독재자야 그나마 나라를 살리는 독재도 했으니 ‘빠’와 ‘까’가 양분된 수준에서 그쳐 있지, 저 사람은 어디 존경할 구석이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명분이 정당했다고 한들, 그를 재판하고 처형하는 과정은 반인권· 비민주적이고 몰상식했다는 게 중론이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본인이 받은 교훈은...
어지간해서는 남한테 원한 살 일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정말 무섭다.
'피의 보복'은 사실 성경조차도 인정한 개념이다. 괜히 도피성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다.

원한 하니까 또 생각난다. 과거 중국에는 잘 알다시피 능지처참이라는 끔찍한 형벌이 있었다. ‘능지’는 원래 경사가 부드럽고 원만하고 언덕을 의미하는데, 그렇게 사람을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부터 각을 뜨면서 아주 천천히 고통스럽게 '끔살'한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는 단어이다. 뼈와 살이 분리되는 정도가 아니라 내 눈으로 내 심장과 간이 꺼내지는 걸 보고서 죽는다. -_- 참고로 팔다리와 목을 가축으로 잡아당겨서 찢어 죽이는 건 능지처참이 아니고 ‘거열형’임.

명나라 때는 매관매직과 부정축재를 일삼던 악명 높은 ‘유근’(劉瑾)이라는 관리가 있었다. 이 사람은 나중에 황제 자리까지 넘보다가 결국 반역죄로 체포되어서 능지처참을 당했는데... 거의 사흘 동안 손가락 발가락부터 시작해 3천 번이 넘는 칼질을 당하면서 신체 부위가 잘리고 살점이 베어져 나갔다. 산 채로 말이다. ㅎㄷㄷ;;

형 집행이 끝나자 예전에 그에 의해 핍박 받은 백성들, 그리고 그로부터 모함을 받아 망한 사람이나 유족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시체를 물어뜯고 찢으면서 그야말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난도질을 했다고 한다. 유근에 의해 억울하게 능지처참을 당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이것도 원한과 보복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런데 도대체 막장 또라이 국가인 저 이북 왕조는 언제까지 남아 있으려나..;; 과연 살아 생전에 김 정일이 차우셰스쿠 꼴 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지?
예수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02 21:55 2010/05/02 21:55
, ,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57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57

Comments List

  1. 땅콩맨 2010/05/03 09:20 # M/D Reply Permalink

    피의보복이라...
    무섭네요. ㅎㄷㄷㄷㄷ;;

    1. 사무엘 2010/05/07 22:28 # M/D Permalink

      성경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동일하게 보복하라'라고 쓰여 있는 건
      하나님이 잔인해서가 절대 아니라 인간이 잔인해서이죠.
      성경에 그렇게 안 써 놨으면, 되로 받은 걸 말로 되갚는 게 인간의 심리니까요. (창 4:23)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절대로 별개 따로가 아닙니다.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과학의 날, 과학 노래

1. 과학 하는 마음으로 능률 있게 일하고
사람마다 손에 손에 한 가지씩 기술 익혀
부지런한 하루하루 소복소복 부는 살림
세상에 으뜸 가는 복된 나라 이루세

2. 과학으로 이치 찾아 새로운 것 발명하고
겨레의 슬기 모아 산업 크게 일으켜서
천 불 소득 백 억 수출 무럭무럭 크는 국력
세상에 으뜸 가는 힘 센 나라 이루세

3. 과학 하는 국민으로 기술 가진 국민으로
살림살이 늘려 가고 산업 크게 일으키면
나라의 힘 용솟음쳐 다가오는 평화 통일
세상에 으뜸 가는 민족 중흥 이루세


이 노래 아시는 분?
1970년대에 제정된 과학의 (날) 노래이다.
정말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만만찮게 그 시절 냄새가 아주 노골적으로 난다.

(박 정희는 교사 출신이고 음악· 미술 같은 예능에도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새마을 노래>-_-는 누구 대필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진짜로 스스로 작사· 작곡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3절의 '민족 중흥' 하면 생각나는 거 없는지?
국민 교육 헌장에서 말고는 요즘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단어인데, 그때 '그분'이 저 표현을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국민 소득 1천 달러, 수출 100억 달러' 이런 가사는 정말, 철도의 노래로 치면 '지축을 흔드는 우렁찬 소리' 급의 옛날 추억이 돼 있다.

4월 19일은 우리나라에서 4 19 혁명일일 뿐만 아니라 찰스 다윈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다른 훌륭한 과학자도 많은데 왜 하필 다윈이야.. -_-)
우리나라에서 과학의 날은 일제 강점기이던 1934년에 다윈의 기일을 기려 처음 시작됐다.
소파 방 정환 선생이 제정한 어린이날보다 약 10년 정도 늦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다가 과학 기술처가 발족된 4월 21일을 기려, 1968년부터 과학의 날이 재제정되었다. 참고로 국민 교육 헌장은 1968년 12월에 공표되었다.

본인은 저런 노래를 어떻게 아냐고?
엄청 어렸을 때 옛날 국민(초등)학교 음악 테이프에서 들었던 노래들은, 죽을 때까지 안 잊어버리고 기억하고 있어서이다. 머릿속 시스템 디렉터리에 known DLL로 등록됐다. ㅋㅋㅋㅋ
딱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이미 '읍니다'는 '습니다'로 바뀌어 있었고 국민 교육 헌장도 다 삭제되었지만, 그렇게 바뀌기 전의 교과서들을 본 기억은 있다. 정말 엄청난 옛날이 됐다.

본인은 딱히 수꼴 성향이거나 박통교-_- 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 시절은, 이공계 과학 기술자가 "지금보다야" 정말 대접 받았으며, 긍지를 갖고서 마음껏 국가를 위해 일하던 시절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반면 지금은? 현직 과학자들부터가 "내 자식 새끼는 절대로 이공계에 진학 안 시킬 거다" 그러는 시절이지 않은가!

  "그 어려운 살림에서도 박대통령은 과학 기술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틈만 나면 과학기술자들 곁을 찾았다. 과로로 숨진 과학자들도 여러 명이나 됐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가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머지 대통령들에겐 입으로만 과학이 중요했다."

아무리 지 만원 박사의 정치 성향이 싫다 하더라도 위의 내용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국방 과학 연구소는 정말 사기에 가까운 업적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고 지키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작년에도 과로로 순직한 분이 있었다!
나라가 잘 돌아가고 있을 때는 의료· 법조· 금융 같은 제로썸 산업 종사자가 아니라, 기술자가 늘 대접을 받았다.

  또 예루살렘에서 솜씨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계(engine)들을 만들게 하여 망대와 보루 위에 두고 그것들로 화살과 큰 돌을 쏘게 하였더라. 그의 이름이 멀리 퍼졌으니 그가 놀랍게 도움을 받아 마침내 강하게 되었더라. (대하 26:15)

성경에서 역대기하 26장의 웃시야 왕의 업적을 읽어보면 정말 우리나라가 농업 개량을 하고 경제 개발하고 국방을 강화하던 1960~70년대 시절이 오버랩된다. 웃시야 왕은 교만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도 박통과 일치하는 것 같다.

본인은 요즘 우리나라가 중산층이 몰락하고 빈부 격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고 성토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럼 이 땅에 중산층이 생기긴 언제 생겼냐고 말이다.
과학과 관련된 노래로 옛날에 드라마 카이스트 주제가가 생각나고, 대전 엑스포 주제가도 생각난다. 코리아나는 영 건전 가요 컨셉인 것 같다. 88 올림픽 주제가에 비해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후자의 가사를 소개하며 글을 맺는다.


푸른 산들은 우리에게 말하네 고운 햇살 뿌려 달라고
이제 모두가 슬기로운 손길로 밝은 내일 꾸며 가 보자
아름다운 마음 마음 모여서 사랑으로 보살펴 주면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네 그 날은

우리 모두가 힘을 한데 모아서 끊임없이 달려 가 보자
하루하루가 다시 열릴 때마다 놀랄 일이 너무도 많아
우주 안에 감추어진 비밀을 차근차근 벗겨 가 보면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다네 그 날은

그 날은 찾아오리라 그 날은 찾아오리라
미래의 물결 속에서 그 날은 찾아오리라 그 날은, 그 날은

Posted by 사무엘

2010/04/23 22:47 2010/04/23 22:47
, ,
Response
No Trackback , 4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52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52

Comments List

  1. ajfRhfkqk 2010/04/24 13:18 # M/D Reply Permalink

    공부좀 한다면 개성 적성 특기는 깡그리 무시한채
    죄다 서연고 법대 의대 한의대나 가는 더러운 세상.
    꼭 누굴 욕할게 아니라
    기술직을 천대하는 썩어빠진 국민성부터 성토해야 함.
    의사 판사 검사 '사'짜 돌림이나 우러러보고
    손에 기름 묻는 직업은 천시하는
    조선시대 풍토가 아직도 나라 망치고 있네요
    3D는 ㅈㄹ 3D.
    개나소나 사무실에 처앉아서 에어콘 바람이나 쐬려하고
    기름묻히고 땀흘려 일하는 직업들은
    최저임금이나 주면서 죄다 외국인 노동자 써먹는
    되먹지 못한 근성.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국 같은데 가면
    별반 차이 없다 하던데.
    우리네들도 그런데 가면 밑바닥에서 3D업종에
    종사들 많이 한다던데.
    도올선생이 그랬었다죠
    유교때문에 이모양 이꼴이라고
    적잖히 개공감.

    1. 사무엘 2010/04/24 15:28 # M/D Permalink

      의료, 법조, 금융 쪽은 물론 똑똑한 사람이 가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도로 피터지게 경쟁해서 그 정도로 날고 기는 천재가 필요한 분야는 결코 아니죠.
      사회 저변 계층에서 힘들게 일하는 근로자뿐만 아니라 이공계 고학력 연구직도 어렵고, 심지어 인문계나 기초 과학 쪽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수요보다 공급이 너무 늘어서 의대· 법대조차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결국은, 우왕좌왕 휩쓸리지 말고 어느 분야에서든 자기 적성을 잘 골라서 거기서 날고 기는 사람만이 대접 받는 사회가 돼야 할 텐데 말이죠. ^^

  2. 땅콩맨 2010/04/24 19:11 # M/D Reply Permalink

    과학의 노래가사가 입에 착착 감기는데요? ㅎ
    정말 카이스트 드라마주제가를 들으면 드라마내용이 생각이나기도하고
    갑자기 어디선가 솟는힘(?)이 불끈불끈나고 해요.. ^^

    1. 사무엘 2010/04/25 01:29 # M/D Permalink

      훗.. 타고난 공돌이 인증? ㅋㅋ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4 19 혁명 50주년

오늘은 4 19 혁명 50주년.
어렸을 때는 의거라고 배웠는데 요즘은 혁명이라고 명칭이 바뀌었더라. 둘의 차이가 뭔지는 모르겠다.
이 사건에 대해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 선거에 항거하는 전국적인 시위이다. 결과는 자유당의 붕괴와 이 승만 자진 하야.
 
이 사건은 이 승만 전대통령의 인생에서 최대· 최악의 흑역사로 기록되었으며, 이거 딱 하나 잘못한 것 때문에 그는 구한말 시절부터 평생을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 미국을 이용하여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나라를 지킨 공은 싹 잊혀지고 말았다.
한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영예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단호하게 지킨 공적도 온데간데없고,
특히 역사를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로부터는 독재 깽판 개새끼로 두고두고 씹히고 까이는 신세가 됐다. 거 참...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시행했다는 미국에서도, 처음에는 초대 대통령인 죠지 워싱턴 당사자조차 왕과 대통령 사이가 오락가락했다. 자기를 3인칭으로 '짐'으로 지칭했다니, 이 정도면 각하가 아니라 폐하 수준이지 않은지? 하지만 그는 후대 대통령에게 좋은 관례를 남겨야 한다면서 딱 자기 임기만 마치고서 권좌에서 물러났다. 자기는 원래 재산이 많기 때문에 월급도 안 받고 일하려고 했으나, 후대 대통령 중엔 가난한 사람도 나올 수 있으므로 전적으로 관례를 남기기 위해 월급을 받았다고 함.
 
그럼 우리나라는? 이 승만은 그 때까지 이뤄 놓은 것만으로도 전세계 어느 정상과 비교해도 프로필과 학력, 경력, 정치력이 꿀리지 않는 거물이었다. 3선까지만 하고 딱 물러났으면 정말 우리나라 국부로 손색이 없는 한국의 "워싱턴" 대통령 취급을 받았을 텐데, 너무 늙어서 말년에 통찰력이 흐려진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쪽으로 역사를 공부한 분이라면 내막을 좀 알겠지만, 이 승만은 부정을 안 저질러도 4선은 자동으로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야당 후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비리비리 하다 보니 단독 출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부정 선거는 부통령까지 코드가 잘 맞는 자유당 인물로 만들려고 저지른 것이었다.
 
그때 저 치들이 정말 국민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미 자유당을 찍어 놓은 투표 용지에다, 정치 깡패, 교묘한 야당 탄압, 금품 살포, 게다가 돈만 내면 1인이 최대 20표까지... 정말 눈 뜨고 차마 볼 수 없는 노골적인 부정이 막장까지 버젓이 자행됐다. 너무 오버가 되는 바람에, 어떤 지역에서는 이거 뭐 북한 공산당 투표도 아니고 자유당 후보가 100%에 심지어 100%를 초과하는 득표가 나온지라, 숫자를 좀 낮춰 발표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정도였다.
 
결국 선거 직후,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마산에서 최초로 시작됐다. 4 19의 전신인 3 15 시위이다. 정부는 시위대를 정치 깡패와 실탄 발포로 진압했으니 그때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극에 달했을까?
 
이 시위의 불길에다 기름을 확 붓는 계기가 된 사건은 역시 김 주열 군의 시신 발견이다. 당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이 어린 학생이 어떻게 실종되고 죽었는지, 시체가 어떻게 버려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르는줄 알았는데, 이것도 이미 다 밝혀져 있다. -_-) 그런데 실종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마산 앞바다에서 어부 그물에 걸려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큼직한 최루탄 탄환이 왼쪽 눈을 뚫고 얼굴까지 완전히 박혀 관통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끔살 당한 것이다. (...) 아래의 사진은 전파를 타고 외신으로도 대서특필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게다가 김 주열보다도 한 살 더 어린 여중생 진 영숙(한성여중) 양이 4 19 시위에 참가하기 직전에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보냈다는 편지는 10대 중반의 소녀가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함과 전율 그 자체이다.
이건 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그러고 보니 유 관순하고도 나이가 거의 일치하는군!)이나 1949년의 육탄 십용사 수준이다. 그리고 그 편지는 유서가 되고 말았다. 진 양은 시위 중에 경찰에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전투 중에 전사한 것도 아니고 뭐야 대체...;;;
 
물론 부정 선거는 나쁘며 국민이 충분히 분노할 만한 일이다. 4 19 혁명 희생자의 뜻을 기려야 하는 것도 맞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 헌법 서문에 대한민국은 3 1 운동과 더불어 4 19 혁명 정신을 계승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관점을 조금 바꿔서 다시 생각해 보자.
당대 사람들은 벌써부터 그 정도로 민주주의의 맛을 보고 그걸 진심으로 갈망했던 것일까?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겨우 10대 중학생이 저런 편지를 남길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던 것일까?

6 25야 우리가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했으면 대한민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고 한반도가 다 김 일성 손아귀로 넘어가 생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정 선거 정도야.. 이거 하나쯤 묵인했어도, 자유당이 한 번쯤 더 부정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완전히 본질적으로 달라진다거나, 국민들이 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주민 꼴 난다거나, 언론/종교의 자유가 사라진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걔네들이 아무리 부패했기로서니 설마 북한 로동당 수준의 독재로 갔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의를 국민이 용납하지 않은 것은, 그 못 살던 시절에도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민 의식이 짧은 시간 동안에도 상당히 성숙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결국 시민이 승리했다. 이 승만은 그 길로 경무대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몇 달만 있다가 돌아오려고 했는데 결국 그는 거기서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박 정희 군사 정권은 국민 정서를 감안해서 이 승만의 거듭된 귀국 요청을 "거절"했다.
 
- 우리나라는 세계 각국과 통상하고 교류하며(저 이북의 미친 폐쇄 국가처럼 되지 말고) 지내야 한다. 하지만 특이한 과거사가 있는 만큼 일본과의 외교는 우리만의 방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한번 빼앗겼던 나라를 되찾는 것이 얼마나 뼈아프게 힘든 일이었는지를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민족은 앞으로 굳세게 서서 경제나 군사나 어느 방면에서나 다시는 종의 멍에를 쓰지 말아야 한다. (갈 5:1)
 
이 승만의 양아들인 이 인수 씨에 따르면, 이것이 양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고 한다.
저런 애국자가 왜 말년에 독재자의 오명을 쓰고 권좌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는지 참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두둔하거나 까기가 좀 그렇다.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앞으로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는 경제도 급성장했지만, 정치와 치안의 안정화와 민주화도 정말 수준급으로 단시간에 이뤄 냈다. 대단하다. 반세기 전만 해도 이 땅에서는 고문이 횡행한 건 말할 것도 없고 경찰이 대놓고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는가?
 
덧붙이자면, 그 시절에 박 정희는 어차피 이 승만 정권마저도 쿠데타로 뒤집어엎을 준비를 미리 다 하고 있었다! 그게 이 승만의 자진 하야 덕분에 교묘하게 빗나가서 실현되지 않았으며, 둘이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이 승만이 그때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진 하야한 것은 더 큰 화를 예방한 현명한 조치였다. 계속 고집을 부렸으면 그는 더 비참하고 험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며, "건국의 아버지 이 승만과 근대화의 아버지 박 정희"를 동일선상에 두고 칭송하는 진영이 생기기도 난감해졌을 거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_-;;

Posted by 사무엘

2010/04/19 22:37 2010/04/19 22:37
, , ,
Response
No Trackback , 6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50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50

Comments List

  1. 땅콩맨 2010/04/20 01:09 # M/D Reply Permalink

    그러고보니
    어제가 4·19 혁명 50주년이되던해 였네요.
    지난주일 목사님의 설교중에 4·19를 언급했던것이
    기억이 납니다. ^^

    잊고지냈었나요
    잊으면 안되는데...

  2. 김재주 2010/04/21 04:03 # M/D Reply Permalink

    혹자가 그러더군요.

    자유당 정권의 최대 실책은 부패한 주제에 국민들에게 민주주의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는 점이다.


    오히려 시민의식은 지금보다 그 때가 나았을지 모른다는 말도 함께.

  3. 사무엘 2010/04/21 07:42 # M/D Reply Permalink

    땅콩맨: 어떤 설교 내용이었는지가 궁금해지네요.

    김재주: 일본이 과거에 미국한테 덤비다가 망했듯이, 자유당도 일종의 자가당착에 빠져서 망했다는 얘기이군요. ^^
    그 시절에 지금처럼 청년들에게 "닥치고 오로지 취업과 스펙 관리" 같은 압박이 있었을 리가 없으니, 시민 의식이 그런 면에서는 지금보다 월등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대학 내 운동권이 맥을 못추는 이유가 사회 정의-_-가 이뤄져서 운동권이 필요 없어졌다거나... 학생들이 정치 성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취업에 도움 안 되는 활동'엔 완전 신경 끄고 살기 때문이라네요.
    물론 그래도 촛불 시위 같은 것 보면 완전 무관심해진 것만은 아닙니다만.

  4. ajfRhkqk 2010/04/23 12:55 # M/D Reply Permalink

    대학생들이 멍청하게 MB 찍은것도 다 취업 시켜주겠단 공약때문이었죠.
    누굴 탓하겠어요 넘어간 사람이 바보지.

    1. 사무엘 2010/04/23 18:05 # M/D Permalink

      저도 현 대통령을 그다지 지지하지 않으며 주변에도 좋아하는 사람을 도통 보질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정도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졸부들이 서민들보다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그래도 '머릿수'일 텐데 저 표는 다 어디서 나온 걸까요? =_= 투표 안 해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인물의 당선을 못 막았다면 그건 정말 자기 잘못이죠.

  5. ajfRhfkqk 2010/04/24 13:23 # M/D Reply Permalink

    경제대통령 이미지가 제대로 먹혔었죠.
    경제 살린다 일자리 만들어준다는 공약에
    죄다 바보들같이 넘어간 거에요.
    우리나라 아직 멀었어요.
    조삼모사라고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현혹돼서
    멀리보지를 못해요.
    원래 인간이란 존재가 그런건가??
    여튼
    대선 당시 TV에서 득표율 같은거 볼때
    딴지방은 못보고 서울꺼만 틀어주는거 봣는데
    ㅋㅋㅋㅋㅋㅋ
    전지역이 죄다 한나라당=MB 우세더군요
    수도권에 인구의 40~50%이상인가 몰려있다던데
    그걸 대표하는 서울지역의 표심이 그러햇다면
    말 끝난 것이었죠
    죄다 정말 바보같애. ㅉㅉㅉ
    누굴 욕할게 아니라
    평소 정치 욕만할줄 알았지 도통 무관심으로만 일관햇던
    우리들 스스로부터 처절하게 반성해야 할 일입니다. 제기랄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역사 인물들 잡설

1. 한글을 창제한 성군 세종대왕은 육식을 무진장 좋아했으며, 사망 당시 체중이 110kg이 넘었고 사실 세자 시절부터 극심한 비만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세종대왕 동상은 꽤 많이 미화된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듦.

2. 매국노 이 완용은 평생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몰랐고, 일본 정상들과 나라 팔아먹는 대화도 다 영어로 주고받았다고 한다. 흠좀;; -_- 그땐 개그 만화 같은 일본 애니류가 없어서 그랬던 걸까?
더 믿기 힘든 사실은, 죽기 전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앞으로는 미국이 뜰 거 같으니 미국 편에 잘 붙어 봐라”였다나?? 저 사람은 일본만을 진정으로 사랑한 친일파라기보다는, 당대의 대부분의 친일파가 그랬듯이 그저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어떤 점에서는 박 정희와 무척 닮은 것 같다. 아니, 반대로 박 정희가 나폴레옹을 닮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키도 작고 작은 동네에서 자랐지만 야망이 크고 권력욕에 충실하게 살았다는 것, 군인 출신인데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은 것, 그러다 초라한 말년을 맞이했다는 것, 통이 컸던 것만큼이나 여러 악행과 흑역사도 존재하여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 말이다.
부하 군인의 아내와 바람 피우려고 그 남편을 자기 권한으로 최전방으로 강제 전출시킨 건(그래서 전사까지 시키고..) 성경에서 다윗의 죄를 100% 그대로 따라한 거던데.. ㄱㅅ

4. 그런데 히틀러는 나폴레옹을 매우 존경했으며,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파리에 진출해서는 나폴레옹의 무덤부터 방문하여 진심으로 참배했다고 한다.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서 “지금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고 다그쳤던 사람 같지가 않다.

5.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이었던 마라토너 고 손 기정 씨는 히틀러와 대면하여 악수를 나눈 사실상 유일한 한국인일 것이다. 후덜덜... 꼭 빌 게이츠를 만나고 온 것 같은 이미지가 느껴지는 건 왜일까?
손 기정은 “한 국가의 원수답게 히틀러의 손은 큼직하더라”라고 회상하였으며, 반대로 히틀러는 그에게 덕담이랍시고 “젊은이, 조국에 돌아가거든 조국을 위해 싸워 주기 바라네”라는 말을 해 줬다고 한다.

히틀러 역시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알았다. 빌 게이츠도 윈도우 95 시절에 한국에 완성형, 조합형, 확장완성형 때문에 지지고 볶고 싸우는 걸 알 정도였다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 같다. -_-;;
'아니, 마라톤에서 1등과 3등을 나란히 휩쓴 민족이 왜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나? 얘네들도 능력에 비해 그 잠재성을 발휘 못 하고 있는 우리 위대한 게르만 민족과 동병상련이진 않은지?' 히틀러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흠좀무.

히틀러야 깽판을 벌인 권역이 한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별개인 곳이다 보니, 그는 저지른 악행에 비해서 우리가 딱히 민족적으로 싫어할 구석은 별로 없는 인물이다. (게다가 나치 당원이던 어느 독일인이 난징 대학살이 벌어지던 곳의 수많은 중국인을 일본군의 손으로부터 구해 줬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적이 있는 유럽 국가 사람들은 우리가 일본놈을 싫어하듯이 히틀러를 혐오한다. 하긴, 독일은 조금이라도 나치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는 문화 컨텐츠 자체가 금지 사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4/17 16:41 2010/04/17 16:41
, , , , ,
Response
No Trackback , 3 Comments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248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248

Comments List

  1. ajfRhfkqk 2010/04/18 20:47 # M/D Reply Permalink

    오랜만에 또 들렸어요~
    오늘은 맨정신으로 왔으니 저번같은 만행은 자제할꼐요;; ㄷㄷ

    여튼;
    오늘도 여러가지 생각할 꺼리를 던져 주시는군요~
    놀러올때마다 늘 감사히 여기며~

    흠 하긴 원래 인간이란게 그런것 같아요
    아무리 나쁜 시키도 나에게 해가 전혀 없거나
    오히려 나에게는 잘해준 사람이라면
    남들은 다 욕해도 나만큼을 그사람을 욕하거나
    그를 두둔하지는 못할망정 남들처럼 나서서 욕할수 없는것 처럼...
    원래 인간이란 존재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잖아요
    일부 성인들은 그런 개인의 삶에서 탈피하고 초월했기 때문에
    성인군자로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는것이겠지만..
    우리같은 일개 양민들이야 뭐 ㅎㅎ;;;
    여튼 나치 히틀러 홀로코스트 같은 것들은
    문화를 초월해 전인류적으로 질타는 받는 공공의 적 이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제 3자적인 객관적인 시각또한
    필요한듯 싶네요..
    하긴 뭐 그 객관적인 시각이란것 또한
    따지고 보면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할수 밖에 없는
    처지긴 하겠지만 말이죠..
    여튼 쪽바리놈도 싫고 멍청하게 당하기만 하는 한심한
    우리 정부도 싫고... ㅠㅠ

    1. 사무엘 2010/04/18 23:37 # M/D Permalink

      반갑습니다. 언제나 환영입니다. ㅎㅎ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그 당시 세계에서 객관적으로 차지한 위상...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 나의 현 좌표를 제대로 간파하는 것은 정말 어렵지만 꼭 필요하고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히틀러는 정말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정치가이고 많은 사람들을 큰 불행에 빠뜨린 전쟁 범죄자입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인물이며 어떤 한국인하고는 오히려 저런 훈훈한(?) 추억까지 갖고 있죠.
      그런 것들에까지 하나하나 안목을 넓히는 게 지적 성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또라이 나치 독일이 보기에도 같은 추축국이던 일제는 더욱 막장이고 또라이였다는 것입니다. ㄲㄲ

  2. 땅콩맨 2010/04/19 16:28 # M/D Reply Permalink

    손기정이 히틀러와 만났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불현듯 "~와 스티브잡스"가 만나는것도 기록으로 남으면 남을수
    있겠구나라는 생각

    더나아가 ~와에서 "~"가 되지말고 (~와) '○' 가 되어야죠
    오늘 하루도 화이팅 하시기 바랍니다!

Leave a comment
[로그인][오픈아이디란?]
« Previous : 1 : 2 : 3 : 4 : 5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철도를 사랑하고 한글에 관심이 많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프로그래머의 개인 공간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Recent Trackbacks

Calendar

«   2010/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Site Stats

Total hits:
14648
Today:
15
Yesterday: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