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감았다 뜨니 이튿날 새벽 5시 반이었다. 텐트에서 잘 자긴 했는데, 이 시간엔 날씨가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쌀쌀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난 침낭을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텐트 밖으로 나가니 지금이 무슨 10~11월은 된 것 같았다. 그나마 텐트 안은 바깥보다 훨씬 더 따뜻해서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지낼 만했다. 극과 극인 일교차를 다시 실감했고, 시원한 여기까지 찾아간 보람을 느꼈다.
철원에는 한킹을 사용하는 말보회 계열 지역교회가 있더라. 일요일이니 본인은 거기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언뜻 본 기억으로 온 사람이 20여 명 정도 온 것 같았다. 이 시골에 이런 마이너한 교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목사님 부부를 포함해 교회 사람들이 본인을 아주 반갑게 환영하고 맞이해 주셨다. 목사님 부부는 평일에는 다른 생업이 있으신 듯했으며.. 사모님이 아주 당차고 믿음이 굳건하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들이 아니라 딸이 있어서 예배 때 플루트를 부는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교회에서 오전· 오후 예배에 참석하고 점심을 먹고 노트북 배터리도 든든히 충전했다.
여기 근처에 박 정희 대통령의 군 전역 기념 공원(현재 명칭은 군탄 공원)이 있다고 해서 잠시 들른 뒤, 다음으로 동북쪽 화천 방면으로 길을 떠났다(국도 5).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다시는 없기를 바랍니다" 이 유명한 말을 한 곳이 여기였단 말인가..??
공원은 이렇게 생겼고 넓은 풀밭이 잘 꾸며져 있었다. 국도 43호선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이렇게 박 정희 대통령을 기리는 조형물--동상, 기념비, 친필 석판--들이 세워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박 정희 기념관 방문 같은 체험을 하고 가는구나. ^^.
(그나저나 박 정희도 그렇고 나중에 전 두환도 그렇고.. 이 사람들은 현역 시절에 유의미하게 복무한 계급은 투스타 소장이다. 중장은 몇 달 정도만 달고 있다가 대장으로 진급하고, 그러고 나서 거의 직후에 전역했다. 그래서 최종 계급은 다들 포스타인데..
장군 계급장이 무슨 병 작대기 계급장도 아니고 뭐냐..;; 전역하는 달 내지 당일에 병장 달아 주고 전역시키는 것 같은 느낌이다. -_-;; )
3. 철원-화천 사이
군탄 공원을 둘러본 뒤, 본인은 국도 43호선을 타고 북쪽 끝까지 이동했다. 길은 저렇게 전형적인 좁은 시골길 모양이었다.
9년 전에는 제일 동쪽 끝까지 갔던 게 전선 휴게소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동쪽이다.
그런데 국도 43에서 국도 5로 갈아타는 길목이 민통선으로 막혔고 더 진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쪽으로 도로 후퇴해서 국도 56을 타고 막힌 구간을 우회한 다음에야 국도 5의 화천 방면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 부분에서 예기치 못한 삽질을 좀 했다.
서쪽의 지방도 464도 일부 구간이 민통선으로 막혀 있는데.. 여기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서 철원과 화천을 왕래하는 국도 5호선 산길도 통째로 다 민통선 안이다.
하지만 여기는 외지인은 자기 연락처를 알려준 뒤, 임시 통행증을 받아서 단순 통과 정도는 할 수 있었다. 30분 안으로 건너편 초소에 도달해서 통행증을 반납하란다. ㄲㄲㄲㄲㄲ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근남면 마현리 마을이 바로 이 민통선 안에 있더라. 아아..
조국 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울진에서 발생한 태풍 사라의 수재민 66세대가 1960년 4월 7일 (4 19 의거 직전이었군!! 인생 한번 참 타이밍..)
이 땅에 입주하여 고달픈 천막 생활과 허기진 배를 주리며
피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6· 25 동란 이후 버려졌던 황무지를 옥토로 가꿨던 것이다"
저 때는 울진이 강원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강원도지사의 재량으로 철원 이주가 가능했다.
그랬는데, 일단 저기 가면 지원 많이 해 주겠다는 약속이 정권이 바뀌면서 전부 나가리 났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고 입주했던 첫 세대들이 새 되고 피똥 싸는 고생을 했다고 한다.
이건 기념비 옆에 선 내 모습 사진도 남기고 싶었으나, 동승자도 없고 주변에 다른 사람도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
기념비의 뒤에는 실제 입주했던 66세대의 세대주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경부 고속도로 건설 순직자 위령탑도 뒤를 보면 순직자 77인의 명단이 새겨져 있는데, 이와 같은 이치이다.
마을 안은 이렇게 생겼더라. 마현 초등학교라는 학교가 있기도 했으나, 이건 이미 15년도 더 전에 폐교 상태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는데.. 오오, 금성 지구 전투 전적비가 있었다. 저거 6 25 사변 중 최후의 고지전 전투가 아니었던가? (중공은 오늘날까지도 이 전투에서 국군과 UN군을 꺾은 걸 대대적으로 자랑하고 선전한다)
잠깐 차에서 내려서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었다.
옆에 웬 탱크도 하나 전시돼 있어서 둘러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차량 번호 oooo 운전자 김 용묵 선생님이시죠?" / "네 그렇습니다" (왜??? 차 빼달라는 연락도 아니고 뭐지??)
"xx시 xx분경에 yyy초소를 통과하시고 지금 전차 옆에 서 계시죠?" (헉 뭐야)
"CCTV로 보고 말씀드리는 건데요. 정차하고 차에서 내리시면 안 돼서 연락드립니다"
(으악) "아.. 전적비가 하나 있어서 구경 좀 하고 있었는데.. ㅠㅠㅠ 네 알겠습니다."
웬 또랑또랑한 여자 목소리로 이런 얘기가.. 게다가 유선 전화도 아니고 010 개인 핸드폰 번호이던데 말이다.
너무 놀라서 탱크 사진은 찍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차로 돌아갔다. ㄷㄷㄷㄷㄷ
작년쯤에 버스 정류장 안에서 마스크 써 달라는 방송을 듣고 화들짝 놀랐던 거 이래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참, 저 전적비의 근처에는 이렇게 순직 군장병 위령비? 추모비가 있었다.
지난 1996년 7월 26~27일 사이에 여기 일대엔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고, 특히 산사태가 병영을 덮쳤던가 보다. 이 때문에 군인이 23명이나 순직했다고 한다. 병뿐만 아니라 간부도 여럿 희생됐다.
직장 사람 중에 공교롭게도 그때 저 지역에서 군복무를 해서 저 사고를 어깨 너머로 직접 들은 사람도 있었다.;;
이 추모비는 저 전화가 오기 전에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이런 일을 겪은 뒤, 5시 반쯤에 화천의 산양리 마을에 도착했다.
그 전에 마현리가 너무 길게 계속되는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철원 근남면 마현리와 화천 상서면 마현리가 서로 인접해 있다고 한다. ㄲㄲㄲㄲㄲ
동서울 터미널에서 행선지 이름으로만 봤던 '산양리'를 실제로 구경하다니!!
주변엔 식당, 편의점, PC방과 버스 터미널이 있어서 나도 캠핑을 앞두고 음료수와 간식을 샀다. 일요일 저녁이다 보니 휴가 마치고 복귀하는 듯한 군인들이 아주 많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여기는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있어서 참 좋았다.
여기서 더 동쪽으로 가려면 지방도 460으로 갈아타야 하는데, 그러려면 남쪽의 읍내까지 가야 했다. 읍내에는 북한강이 거의 중랑천과 비슷한 강폭으로 흐르고 있어서 경치가 아주 좋았다.
그리고 드디어 화천과 양구 사이의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산길.. 그 이름도 유명한 지방도 460에 진입했다.
산 정상과 긴 터널을 지나서 한참을 달린 뒤에야 7년 전에 들른 적이 있는 '해산 전망대' 공터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한구석에 텐트를 치니 시간은 7시 반이 넘어 있었다.
산 속에서 해가 지니 조용하고 적막하고 으스스한 데다 쌀쌀하고 춥기까지 했다. 하지만 텐트 안은 바깥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포근하고 아늑했다.
이 뜻깊은 장소에서 캠핑을 하게 되니 너무 행복했다. 텐트로도 모자라서 침낭까지 뒤집어쓰고 눕는 이 편안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물가와는 달리 여기는 차와 텐트가 가깝고, 이동할 때 수직 이동이 없어서 더 좋았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