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벌식과 세벌식 한글 입력 방식을 제각각 가장 극단적인 FM 형태로 디자인해 보면,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세벌식은 초성 결합 지향적이고,
두벌식은 종성 결합 지향적이다!

공 병우 세벌식에서 가장 극단적인 FM을 추구한 입력 방식은 바로, 이중모음 정석이 강요되고 겹받침 조합이 없이 모든 겹받침을 반드시 Shift+한 타로만 치게 되어 있는 세벌식 최종이다.

즉, 이 입력 방식에서는 초성 쌍자음을 해당 자음의 연타로 입력하고, 중성 겹모음은 겹모음용 전용 ㅗ와 ㅜ를 통해서만 제한적으로 입력한다. (ㅢ도 반드시 8로만 한 타에 입력해야 하고, ㅡ+ㅣ로는 입력할 수 없음) 끝으로 종성에는 낱자 결합 규칙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제약이 존재하는 덕분에 이 입력 방식은 기계식 타자기와 100% 싱크가 가능하다.
세벌식 기계식 타자기는 글쇠가 종이에 찍히는 초점이 두 군데 있으며, 글쇠도 부동(不動)키와 동(動)키로 나뉜다. 초성과 일반 모음들은 동키이고, 겹모음용 ㅗㅜ와 종성은 부동키이다. (한 글쇠에서 아랫글쇠는 동키, 윗글쇠는 부동키가 되는 경우를 대비해 복잡한 지침이 있긴 한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 자리에서 생략)

부동키는 글쇠를 찍은 뒤에도 종이가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기계식 타자기에서 낱자 결합용으로 쓰일 수 없다. 초성이야 동키이기 때문에 연타로 아쉬운 대로 쌍자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반면, 종성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중성과 종성을 모두 왼손이 담당하고 있다는 특성상(글쇠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배열인 것도 기계 친화적인 이유가 있음), Shift+한 타로 겹받침을 누르는 것은 왼손의 연타 부담을 경감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런 심오한 이유 때문에 공 병우 세벌식은 초성 쌍자음만을 연타로 입력하고 나머지 중성과 종성은 연타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그에 반해 가장 FM에 충실한 두벌식은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에서 추가된 종성 지향 두벌식처럼 자음은 모든 문맥에서 종성과 같은 형태로 결합하는 입력 방식이다.

아래아한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의 한글 입력 방식에서는, 두벌식도 마치 세벌식처럼 초성과 종성의 낱자 결합 규칙이 따로 적용되어서 쌍자음을 해당 자음의 연타로 입력할 수 있는 구현체가 있다. 그러나 FM대로라면 초성이든 종성이든 쌍자음은 반드시 Shift+한 타로 입력해야 한다. 애초에 '국가'와 '구까'를 모두 구분하여 연달아 입력하려면 쌍자음은 그렇게 입력해야만 한다.

따라서 두벌식은, 겹받침을 Shift+한 타로 입력하는 세벌식과는 정반대로 초성 쌍자음을 Shift+한 타로 입력하며, 초성에 낱자 결합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세벌식은 그런 극단적인 이념을 추구함으로써 컴퓨터와 기계식 타자기 사이의 글자판 통일을 이루었으며, 기계적으로 유리한 점과 빠르고 편한 타자 사이의 상당히 괜찮은 합의점까지 잘 찾아 낸 반면, 두벌식은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이 없다.

두벌식 타자기는 어차피 받침은 Shift부터 반드시 먼저 누르고 쳐야 하기 때문에 치는 방식이 컴퓨터와 다를 뿐만 아니라, 결국은 ㄲ과 ㅆ, 그리고 자주 쓰이는 겹받침이나 겹모음은 예쁜 자형으로 찍기 위해 별도의 글쇠로 따로 있어야 할 수밖에 없다.

단적인 예로, 똑같이 한 타로 입력하는 겹자음이라도 ㄲ과 ㅆ은 초성과 종성에서 모두 쓰이지만, 나머지 ㄸ, ㅃ, ㅉ은 초성에서만 쓰인다. 이것을 기계식 타자기로 어떻게 구분하겠는가? 게다가 Shift+ㄱ은 어차피 ㄲ이 아니라 초성 ㄱ과 받침 ㄱ을 구분하는 데 써야 하는데? 결국은 겹자음의 처리가 두 그룹이 서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벌식으로는 기계간의 글자판 통일을 이루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이 말이다.

두벌식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니 그 반대편에 있는 세벌식에 대해서도 예전보다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다시 말하는데 그 알량한 글쇠 수 좀 줄이려고 PC에서 한글을 두벌식으로 쓰는 건 너무 아깝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너무 많다.

두벌식이 완전 백해무익한 쓰레기라는 말이 아니라, 가능한 한 세벌식이 엄연히 main이 되고 두벌식은 sub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벌식으로는 간단한 기본 오토마타를 토대로 하여 더 발전하는 응용이 가능한 반면, 두벌식은 지금 있는 꼼수를 체계화하는 데에만 온갖 노력을 들여야 한다. 내 학위 논문이 주장하고자 한 바가 바로 이것이다.

여담이지만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아이콘에서 '한글'을 나타낼 때 쓰는 한글 글자는 대개 '가' 아니면 '한'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이를 모두 활용하며, 현 글자판이 세벌식으로 판단되면 '한'이 나오고, 두벌식이면 '가'가 나온다. 꽤 옛날 버전부터 이어져 온 관행인데 이게 나름 합리적인 디자인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2/10/24 08:18 2012/10/2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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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yn 2012/10/25 10:12 # M/D Reply Permalink

    드보락 유저는 게임할때마다 웁니다 ㅡㅜ

    1. 주의사신 2012/10/25 10:48 # M/D Permalink

      Lyn님도 드보락 사용자셨나요? 저도 드보락 쓰는데...

      드보락 쓸려고 날개셋을 설치한 매우 특이한 사용자라고 하더군요.

    2. 사무엘 2012/10/25 11:51 # M/D Permalink

      오오, 그러게요. 주의사신 님밖에 안 계신 줄 알았는데 드보락 사용자가 한 분 더.. ^^
      저는 세벌식과의 비교 목표로 드보락을 쓸 줄은 알지만, 본격적으로 영작을 할 때 외에는 쓰지 않습니다.
      코딩은 그냥 쿼티로 합니다.

  2. 팥알 2012/10/25 19:45 # M/D Reply Permalink

    기계식 타자기에 대한 움직/안움직(동/부동) 글쇠에 대한 설명이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네요.
    공병우 타자기를 많이 만져 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만져 본 건 홀소리가 모두 움직 글쇠에 들어가서 ㅗㅗ나 ㅜㅜ를 지금처럼 칠 수 있었습니다.
    겹홀소리에 들어가는 ㅗ, ㅜ는 받침처럼 쭉 안움직 글쇠에 들어간 걸로 아는데요.
    ㅏ/ㅓ처럼 옆에 붙는 홀소리와 ㅗ/ㅜ/ㅡ처럼 밑에 붙는 홀소리의 움직/안움직 글쇠 구성이 다른 기계식 공병우 타자기가 있었나요?

    1. 사무엘 2012/10/26 01:03 # M/D Permalink

      엌... 제가 그냥 옛날 기억에 의지해서 글을 쓰다 보니 세벌식 타자기의 동작 원리에 대해서 그만 없는 소설을 써 버렸군요..
      다시 자료를 찾고 질문(...)도 해서 답변을 받아 보니, 팥알 님의 설명이 맞습니다. 일반 홑모음은 동키이고, “이중모음용 ㅗㅜ”가 부동키입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타자기에서 '외' 할 때의 ㅣ와, '이'의 ㅣ가 다른 위치에 찍여야 할 이유가 없으니, 이중모음용 ㅗㅜ만 부동키로 하는 걸로도 충분하죠.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세벌식 고수이시네요..!

    2. 팥알 2012/10/26 08:10 # M/D Permalink

      네, 겹홀소리에 쓰는 ㅗ·ㅜ가 아예 없었던 첫 세대 공병우 타자기처럼 혹시나 작동 방식이 다른 계열이 있었나 했습니다.
      저도 공병우 타자기를 조금 써 본 경험에 기대다 보니 작동 방식이 머릿속에서 자주 헛갈리네요. ㅗㅗ와 ㅜㅜ를 찍었던 종이를 다시 살펴 봤는데, ㅗ와 ㅜ의 획이 옆으로 길어서 조금 겹쳐 찍히는군요.

  3. DOMA 2012/11/17 16:08 # M/D Reply Permalink

    안년하세요 사무엘님
    덕분에 날개셋 타자연습으로
    쉽게 세벌식을 배우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근데 "쾌"는 어찌 입력하는 게 좋을까요?

    1. 사무엘 2012/11/17 21:14 # M/D Permalink

      안녕하세요? 세벌식을 익히고 계신다니 더욱 반갑습니다.
      이중모음 ??는 / 로 입력하면 됩니다. 따라서 '쾌'는 '0/R'가 됩니다.

    2. 세벌 2013/02/05 13:46 # M/D Permalink

      세벌식에서 쾌는 영어쿼티자판기준으로 0/r

  4. 김경록 2013/02/28 13:56 # M/D Reply Permalink

    운 좋게 맥미니 구형을 얻어서 SnowLeopard를 잠깐 써본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쓰던 dvorak으로 자판을 설정하고 사용해 보았는데요. 단축키까지 바뀌어서 너무 불편하더라구요. 이를테면 ctrl+c는 qwerty자판으로 치면 ctrl+i로 바뀌는 등 불편했습니다. ctrl+c, ctrl+v, ctrl+x, ctrl+z, ctrl+s, ctrl+a 등의 단축키는 qwerty자리가 편한 듯 합니다.

    1. 사무엘 2013/03/01 17:08 # M/D Permalink

      네, 글자판에 익숙해지는 것과, 단축키에 익숙해지는 건 또 별개인 것 같더군요. 저도 드보락 사용자로서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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