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세

제아무리 불신자 무신론자라 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건 마치 “목 잘린 직후의 느낌이 어떻냐”만큼이나.. 체험해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질 못하니 실험으로 입증할 수 없다. 당연히 과학적인 방법론이 접근할 수도 없으며, 사람들이 제각각 자기 종교관에 의지해서 신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윤회· 환생이든, 완전 소멸이든, 하늘과 지옥이든 그 무엇이든지 말이다.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다 보니, 옳다 그르다 같은 감정 싸움은 딱히 없다. 뭐, 굳이 하나 지적하자면 “예수 안 믿으면 다 지옥 간다니 너네 종교는 참 편협하고 배타적이다” 정도의 딴지만 있을 뿐.
그러나 그건 협박이나 공갈이 아니다. 공의로운 하나님이 죄를 심판해서 죄인을 지옥에 보낸다는 거지, 그 말을 전하는 크리스천이 다른 사람을 제멋대로 해코지 차원에서 지옥에 보낸다는 말이 아니다. 그 교리가 안 믿어지면 그냥 개인적으로만 안 받아들이고 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기독교의 내세관은 그 배타적인 것 딱 하나만 받아들이고 넘기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굉장히 뒤끝 없고 깔끔하고 건전하다! 이건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귀신 없고 미신 없고,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교류 없고, 죽은 사람 갖고 현질(=돈 내라)을 유도하는 지긋지긋한 종교 장난질이 없다! 그 대신 부활의 소망만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사람이 죽고 나서 혼이 소멸하고 모든 게 그대로 끝이라면... 내가 단언하는데 이 세상을 지금처럼 힘들게 살 필요라고는 눈꼽만큼도 조금도 없다~~!!! 자살이 전혀 죄가 될 필요가 없다. 누구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다.

5. 보편적인 윤리

기독교가 가르치는 성경적 윤리관은 어지간한 세상 사람들이 ‘진보 트렌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는 완전 정반대인 수구꼴통(?) 성향이라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일단 필요악이라고 여겨지는 것에는 다 긍정적이다. 사형제, 체벌, 나라 지키는 군대, 공권력 같은 것. 절대적인 선악 기준이 없을 때는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처럼 흉악범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 피해자 유족의 인권이 더 중요한지를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가 있어서 범죄가 줄어들었느냐, 범죄자의 교화는 어떡하냐 그딴 건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다. 성경의 판결은 “흉계를 품고 사람을 고의로 죽게 한 사람은 이 땅에서 살 자격이 없다.” / “ ‘살인하지 말라’를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인 것이다. “너 고소”가 아니라 “너 죽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동일하다.
흉악범도 개인적으로야 예수 믿고 구원받을 수 있지만, 법적으로는 형벌에 의해 세상 하직해야 한다. 자기 목숨 바쳐서 피해자 유족들의 한을 풀고 자기 피로 땅을 깨끗하게 해 준 뒤, 빨랑 하늘나라 가야 된다.

그리고 성(sex) 관념도 진짜 깔끔하다. (1) 결혼한 (2) 남자사람과 (3) 여자사람이 하는 것 말고는.. (1)부터 (3)까지 한 단서라도 누락되거나 바뀐 것은 전부 음행, 죄악이고 그것도 굉장히 큰 죄이다.

이런 법칙들이 온갖 인간적인 부조리와 모순을 핑계로 문란해지고 무너졌다고 해서 인권이(특히 여성 인권) 실질적으로 향상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야금야금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만이 열릴 뿐이다. 당장 당신의 부모님이 당신을 낳은 뒤 책임감 있게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한 당신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늘 이상한 통계 자료나 주고받으면서 답 없는 쳇바퀴 같은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이 윤리관의 경우, 다른 창조/진화나 성경 같은 이슈와는 달리, 굳이 크리스천이 아니어도 단순히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크리스천과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위에서 소개된 여러 아이템들도 중요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기독교와 비기독교를 가르는 가장 크리티컬한 변수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인식이다!

세속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만화, 인명 사전, 위키백과 같은 데서 ‘예수’를 찾아 보시라. 제아무리 개독안티라 해도 예수라는 인물 자체가 허구라고는 안 그런다. 그건 역사적 증거가 너무 분명해서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열이면 열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얘기로 끝난다. 아니면 부활까지도 소개는 하지만 “성경이라는 책에 따르면 그랬다고 한다, 기독경에 따르면 그랬다고 전해진다”라고 단서는 꼭 붙이고서, 우리는 저 진술에 책임 안 진다는 식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말한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 보아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묻혔다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라고 쓰는 순간 그 책은 객관성을 잃고 특정 종교 집단의 교리를 대변하는 경전(?) 내지 간증집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부활이 역사적으로 진짜 사실인지 아닌지는 이 시점에서 관심사가 아니다.

정체불명의 위경이나 이상한 사료를 토대로 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정하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다. 예수는 사실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해 있었으며, 나중에 제자들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한 뒤,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후손을 남기고 죽었다는 얘기까지 지어낸 개독안티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고대의 철학자나 석학들도 현대의 지성인 무신론자보다 지성과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얼마 못 가 쏙 들어갔다. 지금도 예수 부활을 공격하는 얘기가 강경한 개독안티 커뮤니티 위주로 없지는 않으나, 그래도 성경 자체에 대한 공격 내지 창조/진화보다는 강도가 “훨씬” 덜하다. 이 주제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마치 ‘내세’만큼이나, “진실은 저 너머에” 수준으로 그냥 쉬쉬 하는 분위기다.

그야말로 오합지졸 겁쟁이었던 예수님 제자들이 불과 수십 일 만에 예수 전하느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역전의 용사로 뒤바뀐 것, 고대로부터 수많은 신자들이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면서 믿음을 지킨 것, 더 나아가 오늘날까지 기독교회가 수백, 수천 년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우려먹는 레퍼토리이자 복음의 핵심 근거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새마을호 열차에서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온 사건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그게 호락호락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당할 것 같은가? 아예 예수님을 비롯해 사도들의 존재를 송두리째 다 무시하고 부정하지 않는 이상, 부활만 쏙 부정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예수님이 기절했다가 주변의 도움으로 무덤을 탈출해서 살아난 거라면 제자들이 그걸 모를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 겨우 그런 예수님을 보고는 역전의 용사로 바뀌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담대히 증언하다가 순교까지 했다고? 에라이..

모르긴 몰라도 아폴로 계획 달 탐사 자작극 음모론을 반박하는 것만큼이나 예수 기절설 같은 건 단박에 반박 가능할 것이다. 법학자로서 무신론· 회의론자이다가 예수님의 부활이 법적으로 너무 분명하고 확실한 사건이라는 걸 발견한 사이먼 그린리프 같은 사람은 과연 무엇을 알아낸 것인지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이 예수라는 인물이 정말 부활했는지의 여부에 따라, 성경 전체의 실질적인 진위 여부와 여러분의 혼의 미래까지 180도 달라질 수 있다!

※ 결론

잠시 눈을 돌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분쟁을 좀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는 당장 북한과 휴전 상태이고 대립 상태이다. 물론 365일 24시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으면 너무 피곤하고 피차 좋을 게 없으니, 가끔은 대화도 시도하고 화해 무드도 만들려 노력한다. 그러나 둘은 근본적으로 통치 체제와 지향하는 바가 180도 완전히 너무 다른 정치 집단이며 상대방을 적대적으로 보고 있다. 그러니 이 상태로는 둘은 도저히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하고도 미묘한 애증의 관계가 있다. 경제 쪽으로는 분명 협력과 공존 관계이며, 개인적으로야 한국인과 일본인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독도 때문에 여전히 대립하고 있고, 과거사 문제도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

바로 이런 세상 국가들의 정치적 분쟁과 비슷한 맥락으로..
개인간의 영적 세계에는 예수님을 두고, 생명의 기원을 두고, 성경을 두고 다양한 분쟁 지대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도 일시적인 휴전 상태일 뿐, 완전한 종전이 아니다. 기회가 되면 이 불씨는 언제든지 대형 화재로 번질 수 있다. 크리스천은 불신자와는 얼마나 넘사벽급으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췄는지 자신의 영적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건 혈과 육의 싸움이 전혀 아니다. 그러니, 이런 걸로 신자와 불신자끼리 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싸운다거나, 한 신념을 남에게 폭력과 협박으로 강요한다거나, 그걸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차별의 근거로 활용한다거나 해서는 정말 절대로 안 된다. 크리스천은 다른 불신자와도 ‘가능한 한’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롬 12:18).

그런데.. 종교 쪽 논쟁은 서로 싸워 봤자 별로 답도 안 나오고 서로 말도 안 통하고 감정만 나빠진다고 해서 아예 완전 입 다물고 말을 말고 “너는 네 식대로 믿어라. 나는 내 식대로 믿는다”고 선을 마냥 그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경의 판결대로라면 이건 또 다른 극단이며 크리스천의 직무유기죄로 빠진다. 성경을 읽다 보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진술로 인해 그럼 도대체 뭐 어쩌라는 건지 싶은 딜레마가 느껴질 때가 왕왕 있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크리스천으로 최소한의 영적 생명력은 갖췄다고 하겠다.
그런데, 나라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게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개독안티와의 어떤 논쟁도 다 이길 방대한 지식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리고 비록 악의적인 의도는 아니었지만 왕년에 간증 잃을 병맛 같은 행실도 많이 남겼다. 게다가 나 또한 하나님의 모든 사고방식이 다 이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성품을 다듬고 내 행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지도록, 오늘은 어제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간구하고 노력을 할 뿐이다. 최소한 상대방이 복음이 무엇이고 기독교 교리가 무엇인지 알기는 제대로 알고서 거절하든가 반대하지, 삐쳐서 마음을 확 닫아 버리는 일은 없게 내 말에 너를 ‘위한다’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한다.

사실, 불신자가 예수 믿기 위해서 지금 당장 안 믿어지는 창조론이라든가 하나님의 경륜을 납득해야 할 필요도 없고, 자기 힘으로 술· 담배를 끊어야 할 필요도 없고, 성경관· 윤리관 같은 사상을 인위로 개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 노력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구원을 위해 당장 가장 중요한 건 4번과 6번일 것이다. 일단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면 나머지 믿음은 추가로 공급된다.

그러니 길거리에서 복음 전하다가 불신자가 1~3, 5번 같은 걸 갖고 불필요하게 논쟁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 적당히 커트를 하는 기지도 발휘해야 한다. 그런 데에 끌려가면 힘만 빠지지 결론 절대 안 난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이 모든 걸 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께서 유한하고 부족하고 여건마저 제각각 불공평(?)하게 타고나는 사람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육신적인 스펙이 아니라 ‘믿음’으로 귀착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그래도 공평하게 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평한 거다.

기독교는 처음에 잘 이해가 안 되는 몇몇 전제조건 아이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뒤에는 나름대로 상당히 건전한 원칙과 일관성과 체계가 잡혀 있다. 크리스천들은 그걸 세상에 전해야 한다. 그리고 안 믿는 건 개인 자유인데,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걸 남들이 기독교라고 부를 권리는 없다는 것도 분명히 전해야 한다. 이렇게 영적 전투를 치르는 것이 신자의 권리이자 의무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5/06 08:28 2014/05/06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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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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