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8 3 사채 동결 조치
1972년, 박 정희 시절에 국내에서 시행됐던 8 3 사채 동결 조치는
- 그린벨트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개인의 재산과 시장 구조를 인위로 좌지우지했던.. 반시장적이지만 필요악 성격이 있는 조치였다.
- 김 영삼 때의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헌정사상 제일 마지막에 행해졌던 대통령 긴급명령이다. 둘 다 금융· 경제 분야라는 공통점이 있다. (마지막 계엄과 마지막 국민투표는 5공 시절)
- 우리나라가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 기반이 얼마나 허술하고 경제 구조가 얼마나 취약했는지, 오죽했으면 경제 개발을 위해서 그런 통제가 필요했는지를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얘는 10월 유신과도 관계가 있다.
박 정희 시절에 우리나라는 무슨 공산주의 식으로 사유재산을 없앤다거나 땅을 몽땅 국유화한다거나 통치자를 우상화하거나 인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업· 경제 구조가 완전히 자유 방임인 것도 아니어서 국가가 이것저것 통제를 많이 했다. 이건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다.
그때는 국가 차원에서 돈줄이 끊어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공급이 충분치 않은 원자재나 농수산물에 수요가 너무 쏠리는 것을 분산시켜야만 사회 안정을 유지시킬 수 있었다. 가령, 혼· 분식 장려 운동은 쌀 소비를 제어하려는 취지였으며, 연탄 보급은 산림을 보호하고 비싼 석유의 소비를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2. 수도 이전 계획
과거에 일제 강점기가 태평양 전쟁과 일제 패망 같은 이변 없이 20세기 중후반까지 계속됐으면 한반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정황상 조선인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졌을 수 있고, 철도의 관점에서는 만들다가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완공됐을 것이다. 경부-경의선뿐만 아니라 경인선과 경원선의 복선화는 그 시절에도 이미 논의됐던 계획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60년대 자료에 따르면, 쟤들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를 경성에서 근처의 용인으로 옮길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출처: <국토종합개발의 역사>, 일본 국토계획협회, 1961) 음.. 도대체 왜?
하긴, 서울 구시가지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한데 엉켜 살기엔 너무 비좁아지긴 했다. 북쪽은 산으로 가로막혀서 더 확장을 못 하고..
그런데 지금 서울처럼 한강 이남을 개발하고 다리를 잔뜩 건설하는 게 아니라, 다른 장소를 개척할 생각을 했다는 게 흥미롭다.
심지어 조센징들은 만주로 쫓아내고 일본인들 뉴타운을 조성하려 했다는데.. 현실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교통 연계는 어찌 될까? 수려선이 있긴 하지만 얘는 협궤였다. 얘가 당장 표준궤로 개궤되고 복선화도 되고, 경부선과의 연결선이 만들어져야 했을 것이다.
한편, 해방 후 리 승만 할배 시절에야 '경성부'가 서울 '특별시'로 바뀌었고 수도 이전 따위는 전~~혀 논의될 가치가 없는 주제였다. 하지만 1970년대에 박 정희는 남한의 중심부인 충청도쯤으로 수도 이전을 염두에는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국토 균형 개발이라기보다는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까워서 불안하다고 말이다.
무장공비들이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1 21 사태가 큰 트라우마를 남겼지 싶다.
(내 개인적으로, 박통 시절에 훗날 통치 스타일에까지 영향을 줬을 정도로 비극적이었던 사건 둘은 1 21 (1968), 그리고 영부인 피격(1974)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박통은 어디 멀리 가지는 못하더라도 차선책인 강남을 적극 개발했다. 강북 여기저기에 난립해 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통합해서 마침 경부 고속도로와도 가까이 있는 서초구에다가 전용 터미널을 만들었다.
여기는 일제 시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리 승만 때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이었지, 애초에 인서울 자체가 아니었다.
박 정희는 유신 헌법 하에서 9대 임기만 채웠어도 1984년까지는 했을 텐데..
여러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마지막 과업으로 (1) 행정 수도 이전, (2) 1996년쯤을 목표로 올림픽 유치 준비, (3) 핵무기 개발을 목표로 잡았던 듯하다. 각색이 들어간 오글거리는 낭설일 수도 있겠지만, "핵무기를 국군의 날 기념식 때 짠~ 공개하고는 미리 점찍어 둔 후임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퇴임한다~~" 급이었다고 한다.
저 사람 이후 행정수도 이전은 세종시로 그럭저럭 실현됐고, 이제는 대통령 집무실이 경복궁 뒤의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졌다.
올림픽은 뭐.. 바로 후임인 전땅끄가 의욕적으로 추진해서 결국 잘 해냈다. 다만, 핵무기는 미국의 강력한 견제와 반대 때문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뭐.. 일제의 '용인 철도'와 마찬가지로, 계획만 했다고 해서 진짜 실현된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다는 걸 유의하자.
완전히 180도 틀어져 버린 서울 지하철 1~5호선 초창기 계획처럼 말이다.
그리고 경제 개발 5개년 정도는 박 정희 이전의 장 면 내각도 생각했던 것이고, 심지어 박 정희도 그걸 참고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걸 실제로 추진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3. 청와대 주변의 잠금해제 내력
청와대 부근은 1968년, 북괴 무장공비가 청와대 코앞까지 침투했던 김 신조 사태를 계기로 주변 경비가 역대 최고로 강화됐다. 주변의 산길까지 몽땅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고 묶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간첩 식별을 위한 주민등록번호(지금과 같은 번호 체계는 아니지만), 5분대기조, 실미도 공작원 양성 등 엄청 많은 일이 있었으며, 특히 군복무 중이던 사람들은 복무 기간 역대 최장(3년)으로 연장이라는 날벼락을 제대로 맞았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청와대 주변 등산로의 전면 봉인쯤은 아주 작은 변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평창동 마을이 이때 육성됐으며 북악스카이웨이 도로도 1968년 9월에 개통했다. 그 당시엔 유료 도로였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나 지난 1993년, 김 영삼 대통령 취임과 함께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 등산로가 개방됐다.
단, 주요 전망대 포토존에는 공익인지 의경인지 어쨌든 군인까지는 아니지만 경찰에 준하는 아재들이 상주하고 있어서 청와대 쪽으로는 사진을 못 찍게 감시하곤 했다. 본인은 그 시절에 인왕산을 올랐던 경험과 기억이 있다.
청와대를 촬영하지 못하게 하는 게 목적이니, 차라리 해 떨어지고 시야가 불량해진 밤에 인왕산을 오르는 건 괜찮았던가 보다.
그리고 매주 월요일인가? 1주일에 한 번은 감시 요원들이 사정이 있어서 그런지 여전히 입산 금지였다.
1993년 말엔 창의문(a.k.a. 자하문) 일대 구간이 개방됐다고 한다. 헐~ 옛날엔 거기도 민간인 접근 금지였어?? 하긴 북악산 쪽은 월담하지 못하게 높은 담장이 쳐져 있긴 하더라.
한양도성의 북쪽에 있는 숙정문 일대는 2006년 4월, 무려 노 무현 시절에야 개방됐다고 한다. 식목일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면서 거의 동시에 저기도 해금됐다는 뜻이다.
그 뒤 2007년은 1월 1일부로 전국의 국립공원들이 무료화되어 입장료 징수가 폐지됐다.
2007년 식목일엔 북악산의 한양도성 구간 산책로가 개방됐다. 단, 신분증 까고 목걸이를 받아야만 출입 가능하다. 남쪽의 청와대 방면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의 기존 북악스카이웨이와 팔각정 방면으로도 왕래는 불가능하다.
2009년 7월 10일엔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에 있는 우이령길이 매일 최대 500명에 예약제 형태로 민간에 개방됐다. 사실, 안보보다는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선뜻 개방을 못 하고 있었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이 첫 개통을 앞두고 있고,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개통했던 시절의 일이다.
그리고 그 해 10월 24일엔 북악산에서 "성북천 발원지 - 하늘마루" 사이의 제2 산책로, 일명 김 신조 루트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렇게 규제가 차츰차츰 풀리다가 2019년쯤..?? 인왕산의 촬영 감시요원이 없어졌다. 그리고 북악산 목걸이는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만, 개인 정보까지 수집하지는 않고 그냥 드나드는 인원 집계만 하는 출입 태그로 바뀌었다.
2020년 11월부터는.. 산중턱의 북악스카이웨이에서 한양도성 청운대 - 곡장 사이를 오가는 등산로가 추가로 개방됐다.
그리고 2022년.. 대통령의 집무실 자체가 청와대 말고 용산 국방부 청사 안으로 이사를 감으로써.. 청와대를 경호하기 위해 취해졌던 온갖 봉쇄· 금지 조치들도 모두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북악산 등산로는 모두 개방되고 목걸이 자체가 폐지되고, 북악산은 지금의 남산이나 인왕산과 별 차이 없는 서울 중심부의 친근한 야산으로 바뀔 것이며, 청와대 기존 건물은 청남대의 서울 버전뻘 될 것이고 흠.. 큰 변화가 예상된다.
이제 구글 지도가 아닌 국내 지도 사이트들에서도 청와대의 전체 구조가 멀쩡히 다 표시된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궁궐이라면, 청와대는 대한민국 초기의 궁궐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2020년대 이전의 과거를 배경으로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 "청와대 세트"를 따로 차릴 필요가 없겠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