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기철, 손 양원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손꼽히는 의인· 위인이요 순교자이다. 단순히 자기가 믿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행실도 정말 훌륭했고(남을 위해 헌신, 봉사..) 크리스천으로서 남에게 큰 귀감이 됐던 분이다.
이분들의 생전 "주요" 행적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됐고(각각 평양 경찰서 구속, 사랑의 원자탄 등등..), 이 글에서는 이분들의 순교 당시 배경에 대해서만 추가적으로 생각을 좀 해 보았다.

1. 손 양원

6· 25 사변 발발 당시에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은 똑같이 남부 지방이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영남은 나라 사정이 제일 위급했던 1950년 9월 무렵에도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 칠곡, 영천 정도가 마지노 선이었고 거기보다 더 동남쪽은 그나마 북괴에게 함락· 점령당한 적이 없다. 6월 26일 새벽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도 거둔 덕분에 거기는 더욱 빨갱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은 전지역이 북괴에게 점령당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의 동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지만 서남쪽에는 중국이 있으니 이는 지리적으로, 군사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손 양원 목사는 부산보다도 위도가 더 낮은 최남단 후방인 여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들에 의해 순교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일제 말기의 신사 참배 때보다도 6· 25 전쟁 중에 더 많았다.
신사 참배는 오히려 교단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굴복했기 때문에 더 적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교회들이 빨갱이들 앞에서는 호락호락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게 되면 적어도 크리스천 한정으로 반공 교육은 저절로 덤으로 이뤄지게 된다.

손 양원 목사가 여수에서 순교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겨우 사흘 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데 이게 뭘 기념해서 정해진 날짜인지 아는가? 38선 돌파 북진을 기념한 거다.
그때는 인천 상륙 작전이 이제 막 성공해서 북괴 공산군이 급 후퇴를 시작했으며 9월 28일은 1차 서울 수복일이기도 했다!

UN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획기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고, 결국 낙동강 전선의 전면돌파가 아니라 적군의 중간 보급로를 차단하는 특공대의 투입을 떠올리게 됐다.
인천은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악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갯벌 뻘밭은 배로도, 차량으로도 다닐 수 없고 알보병들이 아무 엄폐물도 없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최악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평택, 군산, 심지어 남포나 동해상의 항구 도시도 같이 고려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남포는 평양과 매우 가까운 만큼 위험성이 너무 커서 배제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비록 당장 상륙 난이도는 더 낮을지 몰라도 내륙에서 곧장 북괴의 보급로를 끊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 보급로란 곧 경부선 철도를 의미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이 당첨됐다. 일단 상륙에만 성공하면 인천 시내 시가전 정도만 거친 뒤 곧장 서울에 도달할 수 있고, 서울을 먹으면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의 장악도 금방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평택과 더불어 한반도 전체에서 서쪽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가장 깊게 파인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상륙 작전의 추진과 성공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우리나라는 기사회생했다. 이 와중에 손 목사도 며칠만 더 버텼으면 살았을 텐데 인간적인 면에서는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국어학자인 최 현배 박사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 중에 1945년 8월 18일 처형 예정이었는데.. 사흘 일찍 아주 갑작스럽게 광복이 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손 목사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안 그래도 그 전의 여순 반란 사건 때 아들을 잃었는데 전쟁 때는 당사자가 희생되어 정말 고난과 순교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 주 기철 + 주 영진

1944년 주 목사의 죽음에 대해, 당시 주 목사와 가까이에서 수감되었던 안 이숙 여사는 일제가 주 목사를 약물을 주입해서 살해한 거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마치 윤 동주 시인의 죽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해당 주장 외에 다른 교차검증 가능 요소가 없고, 또 그렇잖아도 고문 때문에 몸이 극도로 망가져 있던 사람을 일제가 일부러 교묘하게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에서는 의구심이 든다. 더구나 그 당시 일제는 주 목사를 다 죽여 놓고는 면피를 위해서 오히려 보석 명목으로 풀어 주려 했는데, 오 정모 사모가 이 꼼수를 눈치채고 보석을 거부했었다.

윤 동주야 옥중에서 고문 당한 것 없고 건강한 상태로 멀쩡히 수감돼 있었는데, 이상한 주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점점 쇠약해지고 이내 죽고 말았다. 이건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여러 증언이 일치하며, 그 주사 맞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윤 동주는 반도도 아닌 일본 본토의 형무소에서 수감됐었다. 그러니 윤 동주는 생체실험 약물 주사로 인한 사망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반면, 주 기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여겨진다.

주 목사를 다룬 이전 글에서 본인이 이미 지적했듯, 주 목사는 재판 받고 형을 정식으로 선고받은 기결수가 아니었다. 윤 동주는 말할 것도 없고 유 관순, 최 현배 같은 분들과도 사정이 다르다. 그냥 경찰이 제멋대로 "너 이 셰끼 왜 신사참배 안 해?" 식으로 주 목사를 불법 구금하고 괴롭힌 것에 가깝다.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가 있을 곳은 교도소는 절대 아니고 기껏 유치장 내지 구치소(정식으로 기소라도 했을 경우) 레벨밖에 안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을 몇 년 씩이나(마지막 4차던가 5차 검속 기준) 가둬 놓는 건 말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구속 기간은 법적으로 180일로 정해져 있고, 그때까지 기소할 껀덕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피의자를 풀어 줘야 한다.

한 마디로 주 목사는 기독교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관점에서도 꽤 불법 막장 절차에 의해 구속당했던 것이다. 지금 박 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언제는 태블릿이고 뭐고 증거가 넘쳐난다더니, 그 긴 기간 동안에 혐의 하나 입증을 못 하고 구속 기간만 억지로 질질 연장해서 가둬 놓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의 법 체계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게 잘 적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가 엄밀한 구분 없이 그냥 '형무소'라는 시설 하나로 뒤죽박죽 통합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주 목사가 법적으로 기결수였는지 미결수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었다. (☞ 평양 형무소 관련 자료)

끝으로 주 목사의 장남인 주 영진 장로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목회자의 길, 그것도 평범한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가다가 끝내 순교했다.

일제의 박해가 끝나나 싶었는데 평양은 잘 알다시피 북괴 공산당의 소굴이 되었다. 이분은 뜻을 품고서 아예 월남하지도 않고 고난을 자처했으며, 거기서 종교인 반동분자로 단단히 찍혀 있다가 6· 25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이미 잡혀가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관련 자료) 본인은 저분도 순교했다는 것까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예 월남하지도 않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5 19:34 2017/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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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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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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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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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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