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으로부터 계속됨)
그 다음으로는.. 한국어 정보 처리· 전산화 분야의 1세대 숨은 원로이며 올해 초에 작고하신 고 박 동인 부장을 회고하고 추모하는 순서가 있었다.
이분은 공식적인 최종 학력은 의외로 그냥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사가 끝이지만, 업계에서의 실력과 짬은 석박사급 연구원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였다. 주변으로부터 "대학원 가서 학위 좀 받지?" 권유도 받았지만 자기는 그냥 현장에서 '부장' 호칭으로 불리는 게 좋다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없는 사실상의 박사 포스인 게 철도계로 치면 30년간 열차 시각표 외길만 간 김 영근 씨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2014년 한글날엔 국가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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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분을 대학원 코스웍 재학 시절에 교수님이 특강 강사로 초청하신 덕분에 알게 됐으며 나름 같이 얘기도 나눈 적이 있다. 알다시피 본인은 옛날 이야기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절이 어떻고 성 기수 박사가 어떻고 글자판이 어떻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관련 질문을 하자 그분도 굉장히 놀라고 대단해하고 내 나이를 궁금해하셨다. "자네 대전으로 내려와서 살아도 괜찮으면 ETRI에 입사하는 거 어때?" 이런 말씀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셨다. ㅎㅎ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인이 박 부장님을 대면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이분은 전공과 학벌은 보다시피 박 근혜 대통령과 동일하지만, 외모와 인상은 대조적으로 문 재인 씨와 아주 비슷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어째 고인의 생전 모습 사진 한 장을 제대로 구할 수가 없나 모르겠네.. 어쨌든 그렇다. 나이도 1952~53년생 연배로 거의 일치함.

추모 세션이 끝난 뒤엔 학술대회하고 나란히 개최된 올해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의 시상식이 있었다. 내가 참가했던 2011년 당시보다 대회 진행이 더욱 체계적으로 잘 바뀌어 있었다. 대회 측에서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성능을 측정해서 순위가 매겨지게 진짜 '경진대회'처럼 바뀌었으며, 분야가 이런 지정 과제와 자유 공모로 딱 이원화됐다. 단, 상은 여전히 두 분야를 통합해서 주더라.

이로써 학회의 첫째 날 일정이 저녁 7시쯤에 모두 끝났다. 주최 측에서 근처 식당에서 쇠고기 전골과 육회 요리로 만찬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본인은 일행이 전혀 없는 관계로 어디에 앉을지가 좀 난감한 상태였는데.. NC 소프트에 재직하면서 동시에 대학원도 다니고 있어서 나처럼 박사 수료 상태인 어떤 여자분과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분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논문을 투고했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논문 발표가 나하고 같은 세션에서 나의 바로 다음 차례였다. 기막힌 우연이군.

식사를 마친 뒤엔 난 다시 혼자가 됐다. 이 날은 어제와는 달리 숙소 안 잡고 (1) 노숙하거나 (2) 24시간 영업하는 가게(PC방, 패스트푸드점, 카페 따위) 에서 버티거나 정말 춥고 피곤할 때에만 (3) 찜질방 정도에나 가려고 생각해 둔 상태였다.

어제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으니 오늘은 그 다음으로 유명한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갔다. 광안리는 해운대만큼이나 지하철 2호선 역에서 비교적 편하게 접근 가능했으며, 21세기 부산의 명물이라는 광안대교가 전방에 보이고 경치가 멋있었다. 단, 모래의 품질은 해운대보다 못해서 자갈이 종종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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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이튿날 아침에 찍은 것임)

여기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뒹굴면서 바다와 교감을 했다. 본격 신선놀음 모드. 해변의 구석진 곳에 가서 진짜로 여기서 잠까지 잘 생각도 했으나..
부슬부슬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1시 반쯤부터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결국 근처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에서 이튿날 아침 6시까지 버텼다.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차를 가져갔으면 전천후 이동식 텐트가 있으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런 상황에서 숙박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기기 충전은 해결할 수 없으며, 기름값과 톨비 깨지고 어딜 가나 주차비를 뜯겼을 테니 부산 정도는 이렇게 자는 게 더 낫고 마음이 편했다.

※ 토요일(10/8): 학회, 부경 대학교 석당 박물관, 용두산 공원+부산 타워, 국제/자갈치 시장

오늘은 드디어 논문 발표 세션이 있었다. 본인은 아침 9시에 제일 먼저 하기 때문에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다.
13년 전의 동일 학회에서는 금요일 오후부터 논문 투고자의 발표 세션이 곧장 시작됐고, 토요일에도 점심을 먹은 뒤에까지 세션이 이어졌다. 그 당시에 당장 내 논문의 발표가 토요일 오후 제일 끄트머리였기 때문에 교수님이 "니가 발표할 때쯤엔 사람들이 다들 가고 별로 없겠다" 그러실 정도였다(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던 걸로 기억. -_-).

허나 그 사이에 절차가 많이 간소화됐는지 지금은 토요일 오전에 발표 세션을 몽땅 몰아서 진행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 대신 세션이 무려 4개가 동시에 진행된다.
어째 개수를 맞췄는지 논문이 총 64개가 투고됐으며, 구두 발표가 절반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린 이런 실험을 했소" 통계와 결과 나열이기만 해서 굳이 구두 발표가 필요하지 않은 논문은 포스터 발표로 대체했는데, 이게 나머지 절반이었다. 논문 투고자들이 원하는 발표 형태가 처음부터 감쪽같이 32/32로 나뉘지는 않았을 텐데 중간 조정이 있었지 싶다.

나는 뭔가 발표나 강의를 할 때 비록 말하는 속도가 여전히 너무 빠를지언정, 시간은 그리 초과되지 않고 그럭저럭 지키는 노하우를 오랜 시행착오 끝에 터득했다. 이런 연구를 왜 했고 논문의 초 핵심 본질만 요약하는 한편으로, 논문에서 분량상 차마 다루지 못한 보충 설명 위주로만 발표를 했다. ppt는 14장이고 사실은 지금까지 탱자탱자 놀다가 ppt 자체를 전날 밤에 카페에서 급조해서 준비했다. -_-;;

나는 그럭저럭 후회 없이 말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들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1인당 발표 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다고 공지가 됐을 텐데 다른 분들은 최하 20장 이상에 30~40장짜리.. 이거 무슨 30분에서 1시간 분량으로 자기 연구의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소개하는 강의 자료를 가져오신 경우가 많았다.
난 14장짜리 ppt로도 15분에 간신히 맞춰서(약간만 초과해서) 발표를 마쳤는데도 말이다.

본인은 어쩌다 보니 한글 입력기와 글꼴 같은 글자 단위의 입출력 기술 관련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내 최대의 관심사는 "한글이니까 가능한 고유한 활용 방법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하게 언어정보학 내지 언어공학의 범주에 든다. 그게 아니면 다른 카테고리를 붙일 여지가 없다.
순수하게 전산학이나 컴공의 영역도 아니고, 순수하게 언어학이나 산업디자인의 영역도 아님. 저 바닥엔 난 독자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고 논문 쓸 거리도 더 있다.

허나, 언어공학을 한다면서 정작 인공지능에 통계, 빅데이터, 머신 러닝 어쩌구 하는 분야는 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으며 딱히 전문가도 아니다. 내가 자동차나 철도 공학에 관심만 많지 그쪽으로 딱히 전문가가 아닌 것만큼이나 저쪽도 막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창작한 프로그램과 논문들은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라는 범주에는 들지만 뭔가 '주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교수님들도 잘 모르고 생각 못 한 기괴한 주제로 논문을 쓸 거니까 뭐 시간만 주어지면 졸업이야 별 문제 없이 하겠지만, 이렇게 학위 받아서 내 논문의 연구 분야를 주제로 일자리 수요가 있을지, 취업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약간의 어두운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나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고민 할 시간에 날개셋 코딩이나 한 줄 더 해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나 말고 '비주류' 주제 연구는 사실상 딱 하나 더 있었다. 숭실대에서 한글 메타폰트에 대해서 연구 발표를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역시 본인과 동일한 세션에 있었다.
오전엔 이런 식으로 내 논문 발표 후에는 남들 발표를 듣고 포스터를 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학회에서는 먼저 가 버리지 말고 논문 발표를 끝까지 듣고 귀가하라는 취지에서, 세션이 다 끝난 뒤에 점심 식권을 배부했다. 덕분에 점심도 우동 스타일의 만두국으로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학회가 완전히 끝났고, 본인은 오후에 계획했던 주변 관광을 시작했다. 그런데 비가 아침에 좀 그치나 싶었는데 낮부터 또 빗줄기가 굵어졌다. 본인은 열차의 선반에 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왔지만, 돗자리와 담요는 챙겼어도 우산은 가져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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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도 피할 겸 먼저 학회장 바로 옆에 있는 석당 박물관부터 관람했다. 건물도 근대 문화재급인데 안에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와, 토기, 인물화· 풍경화 등 고미술품과 과거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연세 대학교는 일부 건물이 구한말 때 지어져서 근현대 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도 나름 건립 배경은 다르지만 그에 준하는 옛날 건물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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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물 밖에 있는 부산 전차도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원래 이 시간대엔 내부도 개방하지만 비 때문에 이번엔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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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학교 밖으로 나와서 비를 맞으면서 용두산 방면 동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영락 교회라고 크고 역사가 길고 유명한 듯한 교회 예배당을 지나쳐 갔다.
용두산 공원 진입로와 부산 타워가 가까이 보일 무렵에 '부산 근대 역사관'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보수산에서 관람했던 '부산 광복 기념관'과 비슷한 컨셉으로 반일 항일 테마인 박물관이었다. 여기에도 응당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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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곳이었다. 부산이 항구 무역 도시이니만큼 일제의 경제 침탈을 더욱 부각시켜 설명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아, 해방 후 얘기도 없지는 않음. 안에는 부산 전차를 비롯해 옛날 부산 시내와 상점들을 재연해 놓은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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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남산에 타워가 있다면, 부산은 용두산에 타워가 있다. 하지만 용두산은 높이가 50여 m에 불과한 아주 낮은 언덕일 뿐이기 때문에 캐리어 끌고 도보로도 큰 부담 없이 쓱싹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서울 남산 같은 케이블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부산 타워도 높이나 크기면에서 서울 남산 타워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부산 타워는 그냥 하얀 등대 컨셉이며, 서울의 것과는 달리 전파 송신 기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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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옆엔 웬 공터와 정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비 오는 날 공원이나 산 속 정자에서 혼자 누워서 비를 피해 자거나 코딩하는 것을.. 바닷가에서 뒹구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여기서 좀 쉬다가 입장료를 내고 타워를 올랐다. 본인 주변엔 온통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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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에서 영도 쪽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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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 시장 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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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건 자갈치 시장 방면이다. 본인은 타워에서 내려온 뒤엔 이쪽으로 직접 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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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있는 다리가 영도대교이다. "매일 오후 2시 정각~15분, 도개 중엔 차량 진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시간대가 안 맞아서 실제로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은 못 봤다.
본인은 몇 년 전에 해양 대학교로 가느라 바로 저 영도대교를 건넌 적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지금 같은 부산 지리 감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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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노량진 수산 시장이 있으며 본인은 몇 번 가 봤다. 허나 부산은 아예 바다를 낀 항구 도시이니 수산 시장의 규모가 서울을 능가할 수밖에 없다.
'자갈치'는 과자 이름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원전이 따로 있더라. 또한, 저 캐치프레이즈는 "왔노라, 보았노라, 질렀노라"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시저가 남긴 말의 원래 뜻은 우리말로 치면 "나 왔음. 봤음. 이김."처럼 극도로 간결하고 시크한 뉘앙스일 뿐인데 번역 과정에서 '-노라'라는 종결어미가 동원되면서 필요 이상의 간지가 추가된 것에 가깝다.
갈매기 모양의 상점 본건물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굳이 여기에 사진을 또 첨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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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먹어 봤기 때문에 부산에서는 특별히 광어에 준하는 우럭을 선택했다.
예전에 해수욕장 투어를 하면서 식당에서 코스 요리도 먹어 보고 그냥 회덮밥도 먹어 봤으니, 이번에는 포장만 해서 먹어 봤다.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우산 쓰고서 청승맞다면 청승맞은 모습으로 회를 혼자 열심히 "쳐묵쳐묵" 했다. 정말 꿀맛이었다. 돼지도 그렇고 광어나 우럭도 그렇고, 외형이 못생긴 편인 동물들이 살은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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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하면서 식사를 했다.

허기를 달랜 뒤 북쪽으로 가서 국제 시장 일대를 더 돌아다니려 했으나, 비가 계속 많이 오고 길거리가 예상 이상으로 차와 사람들로 굉장히 혼잡한 관계로, 계획한 것만치 많이는 못 다녔다. 안 그래도 날이 빠르게 어두워져서 사진을 찍기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해수욕장에서 더 놀자니 비가 계속 내릴 뿐만 아니라, 돗자리가 양면에 모두 흙이 너무 많이 묻어서 더는 무리였다. 김해 경전철 시승을 하자니 여기서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동선이 안 맞았다. 사실, 비 내리는 한낮이라면 편안히 이동하면서 비 내리는 차창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김해 경전철 시승도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했을 텐데 말이다.

이것저것 고민 끝에 당초 계획보다 일찍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는데 경주를 들르는 건 자연스러운 동선이니까. 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산에서 이 정도로 역사 안보 관광을 했는데 UN군 묘지 공원을 미처 못 들른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부전 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폰과 컴퓨터를 충전했다. 역에서 자체적으로 아예 벽면 콘센트에다가 멀티탭을 연결해 놓고 "필요하면 전자기기 충전하고 가세요"라고 친절하게 써 붙여 놓아 있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지만 복선전철로 탈바꿈한 동해남부선의 모습을 얼추 확인할 수 있었다. 선로를 복선으로 폭을 확장하려다 보니 시내 접근성을 희생하고 선로가 바다 구경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많이 이설됐다. 대표적으로 (신)해운대 역은 바다와는 완전히 동떨어졌고 오히려 군부대가 가까이 있는 산기슭으로 이사 갔다. 경춘선 강촌 역과 비슷한 꼴이 났다. 얘도 이름과는 달리 이제 전혀 강 근처에 있지 않으니 말이다.

리모델링된 역들은 무궁화호가 서는 저상홈 승강장과 전철이 서는 고상홈 승강장이 수평으로 나란히(수직· 앞뒤가 아니라) 생겼는데, 신기한 것은 같은 역이 무궁화호 승강장에 적힌 역명과 전철 승강장에 적힌 역명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전자는 수영 역인데 후자는 센텀 역, 그리고 전자는 그냥 해운대인데 후자는 신해운대. 궁극적으로는 전철역명으로 변경할 거라고는 하는데 그럴 거면 옛 역명으로 간판을 만들기는 왜 만들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2015년쯤부터는 동해남부선이 완전히 신선으로 이설돼서 지금의 서경주· 경주 역도 다 없어지고 신경주 역이 일반열차까지 취급하게 될 거라고 하는데 2016년 말인 현재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도 동남권 '부울경'에 철도가 앞으로 많이 바뀔 예정이니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얼마 안 있어 동해남부선 광역전철이 개통하면 임랑이나 일광, 송정처럼 부산 북부에 교통이 더 불편한 곳에 있는 해수욕장들도 찾아가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는 오랜만에 KTX를 이용했다.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저렇게 차선 곳곳을 틀어막고 공사 중인 걸 보니 주말에 고속버스를 탔다가는 왕창 막힐 것 같아서였다.
비록 철도 노조가 파업 중이긴 하지만 코레일도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사람이 부족하다 해도 회사에 돈을 압도적으로 제일 많이 벌어 주는 cash cow 효자인 KTX는 그야말로 최하 우선순위로 감축될 것이다. 게다가 입석 승객까지 넘쳐나는 일요일 오후에 상행은 감축 같은 건 절대 없다고 봐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차를 기필코 굴릴 것이다.

사실, 대전· 대구 시내 구간이 개통한 지도 1년이 넘었는데 그 뒤로 KTX를 타 보는 게 처음이었다. 열차는 대구 시내를 벗어나자 곧장 지하 터널로 들어갔으며, 대전 근처에서도 옥천에서부터 천천히 가는 게 아니라 또 터널로 들어가서 곧장 판암 IC까지 직통으로 달렸다. 예전에 비해 느리게 달리는 구간이 확실히 줄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이거 뭐 날씨가 싹 바뀌었다. KTX를 탄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계절이 다른 나라로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학회가 1주일만 늦게 열렸어도 해수욕은 못 할 수도 있었겠다.

이렇게.. 논문 쓰느라 코딩 시간을 빼앗기고 좀 힘든 나날을 보내긴 했지만, 덕분에 부산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왔다. 2003년엔 대전에 있다가 서울을 갔다 왔지만, 2016년엔 서울에 있다가 부산을 다녀 왔다.
그리고 학회가 끝난 뒤엔 내가 쓴 논문이 우수 논문 중 하나로 뽑혔다는 뜻밖의 기쁜 소식도 덤으로 접했다. 요즘 뜨고 잘나가는 연구 분야를 다룬 게 아닌데 이런 논문도 알아 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01 19:32 2016/11/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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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여름에 <부산행>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얼마 전엔 어째 진짜로 부산을 갈 일이 생겼다.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 학술대회에다 논문을 투고하고 발표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는 28회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쓴 건 아니고.. 학술지에 소논문을 게재하는 게 박사 졸업 이수요건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두 편이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걸 조만간 하나 더 써야 한다.

이번에 쓴 논문은 사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에 넣으려 했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주제이다(하지만 결국 못 넣고 또 다음 버전 기약을..ㅠㅠ). 분량 제한 때문에 모든 아이디어나 진짜 복잡한 고급 기능 소개는 넣지도 못하고 그냥 기본적인 것에다 약간의 응용 수준까지만 다뤘다.
이런 논문은 학술지 사이트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고 후속 연구자들이 검색해서 열람도 하게 되는데, 저런 태생적인 한계만 감안한다면야 나름 후회 없게 논문을 썼다.

이런 기능을 넣을 생각 자체는 회사일을 하다가 떠올리게 됐다. 별개인 것 같은 기능이 알고 보니 한글 입력에다가 이렇게 접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게 내 개인 프로그램에다가도 들어가고 논문으로 써서 졸업 이수요건도 채우게 됐으니 MS의 과거 캐치프레이즈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everything at once를 얼추 달성했다.

본인이 저 학술대회와 인연을 맺은 것 자체는 대학 학부 시절이던 엄청난 옛날, 2003년 제15회 시절이다. 지금은 은퇴하신 김 진형 교수님의 제안으로 논문을 덜컥 투고했는데, 지금도 검색하면 그걸 볼 수는 있다. 물론 그로부터 13년 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버전이 8.x가 꺾인 지금 관점에서 보면 겨우 2.x를 기준으로 작성된 논문은 가히 흑역사 급의 민망한 퀄리티가 돼 있다.
하지만 그 학술대회에서는 기조 강연 겸 기념품으로 Unicode CJK IME를 득템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아직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외부 모듈조차 개발돼 있지 않던 당시에 중요한 동기 부여와 기폭제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2012년에는 이 학술대회는 아니지만 비슷한 격으로 동시 병행 개최되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를 참관하러 부산을 방문했었다. 거기서 전년인 2011년 대회의 입상자들을 초청해서 관람권을 줬기 때문이다. 그때 경진대회와 학술대회의 개최 장소는 해양 대학교였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올해 대회도 또 부산에서 열리니, 본인으로서는 지리적인 면모가 약간 아쉬웠다.
여기는 자가용과는 완전 상극인 위치였다. 강원도나 경기도의 적당한 오지라면 미지 탐험도 할 겸 응당 차를 가져갔겠지만, 일행도 없이 혼자 이 장거리를 차 끌고 가는 건 금전과 체력 소모가 심하다.
또한 부산은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 대비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걸로 전국적으로 악명 높으며, 반대로 학회 장소는 지하철역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러니 여행은 어딜 가든 캐리어 끌면서 뚜벅이 형태로 가게 됐다.

그리고 교통· 지리와 관련된 또 다른 악재는.. 기왕 부산을 대중교통만으로 방문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왔는데, 하필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의 개통 시기를 미묘하게 비껴 가게 됐다는 것이다. 선로는 다 완공됐지만 서울 수도권 바깥에서 통근형 전동차가 다니는 진풍경은 못 봤다.

단점 얘기는 여기까지. 뭐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본인은 태어난 이래로 제일 치밀하게 부산 투어를 해서 제한된 시간 동안 뽕을 뽑고 왔다.
<부산행>, <해운대> 같은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부산은 어째 재난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부산은 근대기 개항 이래로 일제 강점기, 6· 25, 그 뒤 민주화 운동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은 동네이다.

대도시로서 1960년대에 전국에서 최초로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해방 직후에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노면전차가 다녔던 3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6· 25 전쟁 중에 평양에 잠시 태극기가 꽂힌 적이 있던 것만큼이나, 부산은 전쟁 중에 임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전국의 피난민들이 한데 몰려들었으며, 전국의 대학교들이 부산에 한 자리에 임시 캠퍼스를 개설해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학회 장소인 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부산 역사의 중심지인 아주 기가 막힌 곳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람찬 관광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 목요일(10/6): 해운대 해수욕장

학회의 시작은 금요일부터이지만, 본인은 부산에서 작정하고 놀기 위해서 그 전날에 집을 나섰다. 물놀이와 노숙이 가능하게 갈아입을 옷 여러 벌에다 돗자리와 작은 담요까지 커다란 캐리어에다 몽땅 집어넣었다.

8월 말까지는 논문 쓰는 것 때문에 '문장을 어떻게 다듬을까, 주제별 분량 편성을 어떻게 할까' 갖고 왕창 고민했다면, 9월 말에 학회 참가가 확정된 뒤부터는 여행 계획을 짜느라 '일정 전후로 관광은 어떻게 할까, 열차냐 버스냐, 어디부터 먼저 갈까, 산에서 잘까 바다에서 잘까'로 고민의 양상이 바뀌었다.
차 없이 장거리 여행을 하면 무슨 교통편을 선택할지가 마치 프로그램 짜듯 고민거리가 된다. 그런데 동서울-해운대 직행 시외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가는 길은 모든 논란이 종결돼 버렸다. okay!

해운대까지는 5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오랜만에 보는 대구-부산 민자 고속도로 구간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지나고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단,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영동뿐만 아니라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죄다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었으며, 차선이 하나 틀어막혀서 차량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남쪽으로 몇 블록 걸어가니 말로만 듣던 해운대 해수욕장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서 짐들을 갖다놓고, 물놀이용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버스 안에서 배터리를 다 소진해 버린 폰과 노트북 PC는 콘센트에 꽂아서 충전시켜 놨다. 그 뒤 방 열쇠만 몸에 지닌 채 해변으로 가서 물에 뛰어들었다.

나 요즘 해수욕 즐기는 데 재미 붙였다. 올해에만 해도 동· 서· 남해 바다에서 제각각 다 놀아 봤다.
계곡이나 강에 비해서 바다는 물이 덜 시원하고 끈적거리고 모래 붙는 거 신경을 써야 한다. 물놀이를 마친 뒤에 샤워 같은 후처리가 반드시 필요해서 번거롭다. 하지만 일단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으며 파도가 치는 게 역동적이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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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아주 맑고 따스해서 물놀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로 전날 이 동네에 강풍과 물폭탄이 쏟아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만, 시설이 부서진 게 있는지 근처에서는 무슨 복구 공사가 한창이긴 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품 해수욕장답게 모래는 자갈· 돌 같은 걸 전혀 찾을 수 없으며 품질이 좋아 보였다. 글쎄, 소실되는 양이 많아서 모래를 외부에서 사 와서 보충한다고는 하던데..;;
또한, 시골이 아닌 대도시 소재이다 보니, 모래사장 바로 뒤로 곧장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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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물에서 돌아다닌 뒤엔 여관으로 돌아가서 씻고 옷을 다시 갈아입고, 해변에 두 번째로 찾아갔다. 이제부터는 물엔 가끔씩 발만 담그고 나왔으며, 모래밭에 돗자리를 깔고 이런 식으로 뒹굴거렸다. 점심 도시락도 이 자리에서 꺼내서 먹었다.
맥북은 산과 바다 어디에서든 저렇게 나의 든든한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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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이 공식적으로는 폐장한 상태이고 평일에 날도 저물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해변의 끝부분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물놀이에다 산책을 많이 하니 꽤 피곤해져서 숙소로 돌아가 좀 쉬었다. 그 뒤 완전히 밤이 된 뒤에 세 번째로 해변으로 갔다. 돗자리와 담요, 컴퓨터, 간식/야식거리만 챙겨서 아까보다는 짐을 줄인 상태로 가서 뒹굴거렸다.

부산 아니랄까봐, 해수욕장 모래밭에서도 인근 건물에서 쏘는 와이파이가 잡혔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의 업로드와 내 홈페이지 갱신은 바로 부산 해운대에서 행해졌다.
인제는 제법 쌀쌀함이 느껴져서 담요가 제 역할을 했다. 이대로 자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잠들었다.

※ 금요일(10/7): 보수산 중앙/민주 공원, 임시 수도 기념관, 학회, 광안리 해수욕장

오후부터 드디어 학회가 시작되니 그 전에 아침엔 부산 역과 동아 대학교의 사이에 있는 보수산이라는 산을 올랐다. 이 산의 정상에는 꽤 큰 규모의 여러 공원들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 6· 25, 민주 항쟁 등 이념 한번 참 다양하더라.

해운대에서 부산 역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목적지까지는 버스 환승을 했다.
여담이지만 부산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서면 역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당한 개념환승(환승 거리 짧음)인 게 좋았다. 서울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신설동 역은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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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북쪽에 있는 무슨 충혼탑. 검색을 해 보면 무엇을 기리기 위해 언제 세운 탑인지가 나오겠지만 생략한다. =_=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은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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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의 이남으로는 이렇게 조각 공원도 조성돼 있었다. 경치 좋고 날씨도 좋아서 여기서 산책이나 혼자 코딩, 아니면 심지어 노숙을 하기에도 적절해 보였다.
그 뒤로는 4· 19 혁명 기념탑이 있었는데 사진은 생략함.
또한 산 정상에서 주변 풍경을 몇 장 찍은 것도 있으나, 이것보다는 부산 타워에서 찍은 사진이 더 높고 전망이 좋으니 그걸로 대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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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근처에는 부산 광복 기념관이 있었다. 이건 일제 강점기 역사 버전이다.
1876년에 체결되었던 강화도 조약이 생각보다 꽤 불평등한 조약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3· 1 운동 기간 당시(1919년 3~4월)에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각지에서 벌어졌던 만세 시위에 대한 기록도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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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의 글씨체부터가 뭔가 노사모스럽고 "사람이 먼저" 이런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부에 안내 표지판들의 주요 용어들도 통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로 바꿔 적어서 옷차림으로 치면 개량 한복스러운 느낌이 났다. 나도 엄청 국수주의적인(?) 한글 입력기를 전문으로 개발하는 사람이고 저런 시도 자체는 나쁠 게 없으나, 정치색과 관련된 이상한 편견이 생기고 나니 보기가 괜히 민망하다. =_=;;

보수산 꼭대기에 있는 각종 건물과 시설 중 이 민주 항쟁 기념관이 규모가 제일 컸다. 그래서 공원 전체의 대표 이름도 '민주 공원'이다.
이 승만 말기의 4· 19라든가 박 정희 말기의 부마 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까지는 나도 의미를 인정하겠다만.. 거기에 왜 5· 18까지 다루고 있고(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며 지역적으로 딱히 부산과 관계가 있지도 않음) 효순· 미선 반미 시위나 6· 15 정상 회담 얘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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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주 항쟁 기념관보다도 더 남쪽으로 가서 샛길로 빠지면 '대한해협 전승비'가 나온다.
6· 25 전쟁 당시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서 육로 전방으로만 쳐들어온 게 아니라 동시에 부산으로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무장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랬는데 우리나라 해군이 1950년 6월 26일 새벽에 이 괴선박을 발견하여 격침시켜서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들을 꼬르륵~ 수장시켰다. 비록 국군이 그 뒤로 밀려서 서울도 빼앗기고 후퇴하게 됐지만 어쨌든 이 전투가 우리나라로서는 6· 25 '전쟁' 중에 벌어진 전투들 중 최초의 '승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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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산에는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볼것들이 아주 많았다.
산을 오르내리는 지름길은 이렇게 압박스러웠다. 이런 데서는 살기가 무척 힘들 것 같다.
여기서 동아 대학교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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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 먼저 날 반겼는데, 이건 실제로 옛날 건물이며 지금은 동아 대학교에서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학회는 그 옆의 신축 건물인 '국제관'에서 열림.
여기까지 관람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일단 본인은 학교 뒤에 있는 임시 수도 기념관을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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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도 기념관도 빨간 벽돌 스타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상하이에 임시 정부 거처가 있었던 것처럼 6· 25 전쟁 중엔 우리나라 정부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대통령이 바로 여기에서 지냈다. 국회도 부산에서 열렸고.
저 건물은 그때의 그 건물 자체는 아니고 원형을 따라 나중에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대통령 관저, 그리고 전시관 이렇게 두 파트로 나뉘어 있으며, 두 건물은 살짝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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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과 대통령 집무실이다. 지난번에 고성에서 봤던 대통령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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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저렇게만 써 놔도 업적과 흑역사에 대해 충분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잘 써 놨다.
한강 다리 폭파나 보도연맹 같은 극단적인 팩트까지 다룰려거들랑 남조선 대통령의 실책에다가 0이 몇 개는 더 붙은 수준의 훨씬 더한 악행을 저지른 공산당의 민간인 학살까지 같이 거론해야지. 예를 들면 개전 초기의 서울대 병원 대학살 같은.

오글거리는 미화나 우상화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악의적이고 불순한 왜곡이나 좀 하지 마라. 그 시절에 저런 대통령이나 희생이라도 없었고, 욕먹을 걸 감수하고라도 살짝 장기집권 안 했으면, 남조선 전체가 빨갱이 치하에 들어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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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시장>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역사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53년에는 부산에 화재 참사가 두 번이나 났었다. 1월 30일엔 국제 시장에서, 그리고 그 해 11월 27일엔 부산 역 일대에서 큰 불이 나서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

그리고 195~60년대 우리나라의 컬러 사진을 보면 산업화 이전의 옛날이 오히려 꼬질꼬질하며, 산과 언덕에도 나무라고는 찾을 수 없고 지금의 북한처럼 누런 흙이 다 드러나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이 낡고 바래서 누런 톤으로 변한 게 아니다. 인간이 화석 연료와 각종 금속· 플라스틱 재료를 활용하기 전에는 당장 동네 뒷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그런 연료와 건축 자재 역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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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할 때는 총기를 갖고 오되(우리가 득템 노획해야 하니까), 손에 쥐지 말고 목에다 덜렁덜렁 걸치고 오너라."
"살 수 있는 유일의 길은 귀순뿐이다! 용단을 내려서 귀순하라!"
전시관에는 6· 25 전쟁 당시에 살포되었던 삐라들이 특집 전시되어 있었다. 하긴, 강원도 화천의 파로호 안보 기념관에서도 봤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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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는 무슨 초등~중등학교가 아니라 인서울 대학교들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저런 데서 수업이 진행됐다.

역사 얘기를 더 보충하자면, 6· 25 전쟁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1950년 8월 18일부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다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에 평양까지 점령하자 정부는 10월 27일에 환도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1년에 전세가 도로 38선 이남으로 밀리자 정부는 1· 4 후퇴 바로 직전인 1월 3일에 다시 부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이 1950년 10월 1일인데, 적군이 38선 이남으로 도로 넘어온 날이 1951년 1월 1일이니 정확히 3개월 만의 통한의 후퇴였다.

3월 14일, 아군이 2차 서울 수복을 이뤄 냈지만 이번에는 우리 정부는 예전처럼 곧장 환도하지 않고, 전쟁이 완전히 휴전으로 귀착될 때까지 후방인 부산에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1953년 광복절에야 2차 환도가 이뤄졌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 특히 서울 시민이라면 윤 봉길· 안 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 거사를 이룬 날이나 순국한 날뿐만 아니라 6· 25 전쟁 때 우리나라가 서울을 수복한 날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 구경하고 나니 이제 시간이 되어 본인은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첫째 날에는 강당에서 가만히 앉아서 그저 강연들을 듣기만 하면 됐다. 처음에는 근래에(지금으로부터 1년 이내에) 언어 공학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진 연구자들 4명이 초청을 받아 자기 연구 분야에 대한 강의를 했고, 그 다음엔 이 바닥에 이미 유명한 교수들 4분이 강의를 했다.

카이스트 학부 시절에는 얼굴을 한 번도 못 뵈었고 딱히 학부 강의를 하지도 않는 것 같으시던 최 기선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시맨틱 웹이 어떻고 온톨로지가 어떻고 하는 외길을 가시는 듯하던데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_=;;
경주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변 정용 교수님도 여기서 강의를 하셨고 본인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분들 말고 또 기계번역과 관련된 강의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학술대회에 후원을 많이 해 준 네이버, NC소프트와 솔트룩스라는 기업의 "자기 회사 자랑 + 인재 모집" 소개 세션도 있었다. 네이버야 검색엔진 전문이니까 자연어 처리에 관심이 왕창 많을 수밖에 없는 기업이지만, 엔씨는 온라인 게임 개발사 아냐?
비주얼 C++에 유니티 3D 엔진을 잘 다루는 클라이언트 개발자, 유닉스 셸 스크립트와 컴터 보안에 능통한 서버/DB 개발자, 혹은 2D 원화/3D 모델 디자이너만 뽑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거기 내부에도 인공지능 및 자연어 처리 연구소가 있어서 석· 박사급 연구원들이 논문도 많이 내고 있었다. 경쟁사인 넥슨엔 그런 게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 말이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10/29 08:30 2016/10/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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