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기대

옛날에, 특히 '카이스트'라는 SBS 드라마가 방영되던 수십 년 전에는 이런 아재개그가 유행했었다고 한다.

어떤 노인: 자네는 어디를 다니는가?
대학생 A: 저는 쪼오기 충남대를 다닙니다.
어떤 노인: 오~ 지거국이라니 괜찮은 학교를 다니네. 그럼 옆에 자네는?
대학생 B: 충대 옆에 과기대에 다니는데요.
어떤 노인: 그래~ 공부 못 하면 얼렁 기술이라도 배워야지.

지금이야 문제의 저 학교가 '과기대' 대신 영문 이니셜의 독음인 '카이스트'으로 훨씬 더 유명해졌지만.. ㄲㄲㄲㄲ (국제연합 대신 유엔처럼)
1990년대만 하더라도 저 학교는 무슨 SKY도 아니고, 과학고 학생들이나 2학년 수료 후에 들어가는 신비로운 그 무언가.. 수준이었다. 인지도가 아주 낮고 참신하기(!!) 때문에 저 때는 저기를 소재로 TV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 저 기관의 공식 명칭은 '한국 과학 기술원'이다. '학교'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 오늘날은 '과학 기술원'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대구, 울산, 광주에도 더 있다. 그런데 거기는 학부 코스도 있던가..?? 그런 문제도 있고, 과학 기술원의 원조는 아무래도 대전에 소재한 저기가 맞다.
  • 이제는 서울 산업 대학교가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로 이름 바꾼 상태이다. 이제는 얘가 약칭이 '과기대'가 됐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얘는 나름 인서울에 굉장히 넓은 부지를 보유한 국립 대학교이다.

1980년대에 대전 카이스트에 학부 과정이 추가된 것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다. 원래 과학 기술원은 대학원 내지 연구소만 표방하며 만들어졌으나.. 5공 시절에 계획하고 있던 이공계 특성화 국립 대학교 설립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둘이 합쳐진 거라고 한다. 저 때는 그러고 보니 포항공대가 생긴 시기와도 비슷하네..
그래서 이공계에는 SKY 같은 종합 대학들 단순 서열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성화 대학교들이 여럿 존재하게 됐다.

2. MIT의 굴욕

다음 대화는 MIT에서 어느 학부 수업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한다.

교수: 자네는 인도 출신인데 가까운 IIT(인도 공과대학)를 안 가고 왜 여기까지 힘들게 유학 왔는가?
인도인 학생: IIT를 떨어지고 못 가서요..

이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도는 신분 상승을 위한 살인적인 입시 경쟁과 사교육 열풍이 한국보다 더하면 더하지 절대 못하지 않다. IIT 입시는 어지간한 경시대회 수준의 살인적인 난이도를 자랑한다고 한다.

뭐, 우리나라에서도 올림피아드에서 날고 기던 수학· 과학 영재가 내신 때문에 서울대를 떨어지고 MIT에 냉큼 들어간 경우가 있었다는데.. 인도와 완전히 같은 유형은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도 강남 8학군 대치동 어쩌구 하면서 사교육이 장난이 아니다. 거기 고등학교들의 국영수 중간 기말 시험은 시험 자체에 대한 문제 풀이 테크닉을 익히지 않으면 대졸 성인 전공자라도 제한 시간 내에 킬러 문항을 파훼하고 문제를 다 푸는 게 절대 불가능하다고 한다..;;
더구나 울나라는 이런 열풍이 인도처럼 일류대 공대를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의대 열풍인 게 좀 씁쓸하다.

허나, 인도라고 해서 상황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인도 애들이 워낙 똑똑하고 지금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의 CEO조차 인도계 공돌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람들이 정작 자기 조국에게 기여하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냥 외국으로 인재 유출시키고 자국은 빈부격차 불평등이 더 심해지고 그걸로 끝이다.
자국에는 유의미한 일자리가 없고, 또 자국 이름으로 이렇다 할 컨텐츠가 나오는 게 아니니 이것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3. 고고학자의 굴욕

지금까지 이공계 얘기를 많이 늘어놨는데, 그 다음으로 좀 다른 영역 썰을 풀겠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 공원을 갓 조성하던 쌍팔년도 시절에 말이다. 그때 몽촌토성 유적지가 처음 발견됐다.
서울대 고고학과 모 교수 연구팀은 여기를 탐사하고 발굴하느라 대학원생 제자들과 함께 현장에서 노가다를 뛰고 있었는데.. 곁을 지나가는 어느 애와 엄마가 이런 대화를 나눴댄다.

아이: 엄마, 저 사람들은 왜 저기서 저런 힘들게 고생해요?
엄마: 응. 너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커서 저런 꼴 나는 거야. ㅉㅉㅉㅉ


그 말을 옆에서 들은 그 교수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ㅡ,.ㅡ;;
古짜가 들어가는 고고학이나 고생물학 쪽 전공은 하는 답사· 발굴 활동이 몹시 고달픈 것으로 유명하다.;;; 단적인 예로, 역사 박물관에 가 보면 무슨 옛날 도자기, 항아리가 전시돼 있는데.. 그건 와장창 깨진 조각들을 발굴해서는 해당 분야 대학원생이나 심지어 포닥 연구원들이 근성으로 끼워맞추고 복원해 낸 결과물이다. ㄷㄷㄷ

어디 항아리 조각뿐이겠는가? 커다란 공룡 한 마리의 뼈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원되는 데 인력 노동력이 얼마나 갈려 들어갔겠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건 유골을 발굴한 게 아니라 화석에서 뼈 형체를 발라낸 거다! 이런 거 복원은 아무한테나 덥석 시킬 수 있는 일도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에는 애들 열나게 공부 시켜서 출세시키고 돈 많이 벌고, 무엇보다 '힘든 육체 노동' 안 하는 직업을 갖게 하는 게 학부모들의 최대 목표였던 것 같다. 그런 교육열이 나라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오늘날은 망국병 부작용도 크게 일으켰다.

지금은 그냥 택배만 해도 얼마든지 먹고 산다. 택배야말로 문앞 배송까지 100% 로봇이나 드론이 대체하지 않는 한, 가까운 미래에 없어지지 않을 걸로 여겨지는 직업이다. 거기에다 세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환경미화원 자리에 이공계 석사 출신까지 지원하는 지경이 됐다.
(그렇잖아도 석사는 포지션이 애매하고 학벌세탁 용도로 많이 쓰여서 인식이 마냥 좋지는 않은 듯... 박사나 의사 같은 급이 아니면 사회에서는 그냥 학부 학벌이 깡패로 통용된다는 것이 현실이다.;;)

대학의 가성비가 예전만 하지 않고, 어설프게 지잡대 문과를 가느니 차라리 고졸로 일찍 취업해서 돈 모으는 게 더 나은 지경.. 심지어는 언젠가 디씨에서 '장안대 vs 장독대 비교' 이런 개드립 차트가 올라오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아무리 이류 삼류 지잡대라도 4년제 대학 생활 자체를 통해서 얻는 이익도 있다는 반론 역시 존재한다. 학교가 단순히 지식만 전달받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제와 시험, 동아리 활동, 사회성 함양 등등..

일각에서는 검정고시에 독학사, 방통대 등을 거쳐서 20대 초반의 엄청 어린 나이에 로스쿨에 들어가고 역대 최연소 변호사가 배출됐네 뭐네 하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무슨 문학, 예술, 이공계에서 창의력 쩌는 천재가 아니라 단순 사짜 전문직은 천재보다는 영재에게 더 어울리는 직업일 텐데. 남들 다 하는 무난한 코스에서 두각을 보여서 엘리트 코스로 차츰차츰 가는 게 어떨까 싶다.

아무쪼록, 전근대적인 직업의 귀천 의식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아직도 조선 시대 사농공상 사고방식으로 살 참인가?
허울 뿐인 대졸자가 너무 많아져서 사회 인프라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어 난리이고, 반대로 교육비 감당 못 해서 결혼이고 출산이고 안 하는 병폐 역시 개선돼야 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나라도 인식이 차차 바뀌어 가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5/10/14 19:35 2025/10/1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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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입시 제도

옛날엔 대학 입시는 그냥 깔끔하게 대학별 본고사 아니면 학력고사 한 방이었고, 법조인 선발과 양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법 시험 원큐였다.
그러다가 지금은 아시다시피 사법 시험은 로스쿨로 바뀌었으며, 요즘 대학 입시는.. 뭐 내신에 수능에 수시가 어떻고 수행평가가 어떻고 생활기록부가 어떻고 등등~

확실하게 차이를 말할 수 있는 건, 어느 분야든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졌고 돈 더 들게 됐다는 것이다. 추세가 그렇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과거와 현재의 차이 내지 장단점은 무엇일까?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는 모름지기 (1) 평가 잣대가 객관적이고 공정해야 하고, (2) 부유층 사교육 돈지랄로 변질되지 않고 기회의 평등이 잘 제공돼야 한다.
그러면서 시험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게 (3) 시험 당일의 원큐 운빨에 너무 좌지우지되지 않고 문제풀이 테크닉만 익히는 방식이 되지 않아야 하며, (4) 응시자의 지식(현재) AND/OR 잠재적인 학업 능력(미래)을 전인적으로 잘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들을 모두 만족하는 제도를 만들기란 대단히 어렵다. 사실은 이들 이념 중에는 교통수단의 접근성과 이동성만큼이나 상호 모순적이어서 둘 다 만족하기가 근본적으로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있다.

시험 한 방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금수저건 흙수저건 무조건 공평하게 서열화되는 체계라면 (1)이 주장하는 객관성이나 평등 같은 건 잘 달성 가능하다. 요즘은 교통· 통신 수단의 발달과 복지 제도 발달 덕분에 기회의 평등은 옛날에 비해 굉장히 잘 보장되고 있다. 파이의 크기는 별로 안 커져서 각종 고학력 전문직들을 위한 일자리는 부족하고 불경기 때문에 기업들이 투자와 채용은 안 하려 하는 판에 기회는 누구에게나 다 열려 있으니, 이것 때문에 경쟁이 더 치열해진 것은 세상을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늘 말하지만 옛날에 고학력 실업자가 없고 석사만 졸업하고도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건 옛날이 파라다이스여서 그랬던 건 개뿔 전혀 아니고, 애초에 국민들 대다수가 깡촌에서 대학 갈 여건 자체가 안 됐기 때문이다. 관점을 달리해서 봐야 한다.

(2)는? 듣기로는 차라리 7, 80년대 같은 적당한 옛날이 지금보다 더 나았다고 그러는 것 같다. 교과서에 충실하게 시험 공부만 죽어라고 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그럭저럭 가능했던 모양이다.
다만, 학력고사조차 없이 대학별 본고사만 있던 완전 195, 60년대 옛날에는 대학들이 자기 학교 자존심을 걸고 문제를 살인적으로 어렵게 냈다. 가령, "sqrt(2)가 무리수임을 증명하시오"가 옛날에 서울대 본고사 문제였다. 수능에 최적화된 요즘 고딩들 중에 귀류법을 생각해 내서 쓱쓱 풀어 낼 애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실력 측정 변별력은 좋았을지 모르겠으나, 그걸 대비한 맞춤형 사교육이 횡행했다. 그리고 채점이 전적으로 대학 재량이었던 관계로 내부 부정도 있어서 (1)이 절대적으로 보장되기가 더욱 어려웠다. 그러니 결국 나라가 개입해서 학력고사라는 걸 만들었고, 그게 나중에는 수능으로 바뀌었다. 수능은 학력고사와는 달리 현재의 암기 지식 측정보다는 말 그대로 미래의 학업 능력 측정 지향적이다. "일단은" 말이다.

(3)은 수능처럼 굉장히 형식화되고 과거 학력고사· 본고사에 비해 쉬워진 시험이 (1)과 (2)를 건진 대신에 상대적으로 비판받고 있는 점이다. 수능이 첫 도입되었던 시절에는 '원큐'에 대한 부담감을 덜어 준답시고 수능을 1년에 두 번 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수능을 두 번 준비하는 게 수험생에게 더 큰 짐을 지운다는 지적으로 인해 연 1회로 제도가 바뀌어 정착했으며, 시험에 대한 감을 익히는 건 그냥 모의고사로 대체되었다.

마지막 (4)로 가면.. 고민할 게 많다. 이것 때문에 중등 교육을 포함해 각종 법조나 행정 고시 분야들이 제도가 바뀌고 갈팡질팡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입식 입시 위주의 교육이란 게 단시간에 학생에게 많은 지식을 주입하는 용도로는 효율적이고 평가자에게나 학생에게나 비용이 덜 들며, 평가 방식도 일면 객관적이고 공평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특히나 나라가 가난하고 이것저것 배부른 고민 할 여유가 없던 시절, 인성이고 창의성이고 나발이고 그건 개나 줘 버리고, 학교에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에는 장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의 의식 수준과 경제 수준이 올라가면서 그런 무식한 교육 방식은 약발이 다했다. 정작 사회가 필요로 하는 다방면 융합 적응형의 창의적인(?) 인재를 발굴하는 데는 한계에 다다랐다. 학교 성적 비관해서 자살한 애들 소식에,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이젠 족해"로 시작하는 서 태지 노래도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서 30년 전 소식이 돼 간다.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설계하는 높으신 분들도 바보는 아니니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척'은 한다.

2. 로스쿨

다음으로 법조인 양성 시험 얘기로 넘어가 보자.
물론 법전과 판례를 달달 암기하는 머리가 기본적으로는 필요하지만.. 머리가 오로지 그 쪽으로만 굳어 버리면 요즘 세상에 온갖 다양한 분야에서 발생하는 민사 소송에 대처하기 힘들다. 가령, 소프트웨어의 저작권 관련 온갖 복잡한 라이선스(특히 오픈소스 진영)들을 이해하고 법 자문을 하는 건 그 바닥으로 배경이 전혀 없는 채로 별세계에서 사시만 달랑 합격해서 온 사람보다는 학부 때 컴공 전공하고 실제로 GPL이니 MIT 라이선스니 하는 오픈소스 끌어다가 간단한 프로젝트 진행한 경험도 있다가 로스쿨에서 따로 추가로 법 공부한 사람이 맡는 게 더 믿음이 가긴 할 것이다.

물론, 변리사나 특허 심사위원처럼 법과 이공계를 융합한 전문 업종이 이미 있기도 하고, 평생 글만 팠던 사시 출신 변호사라도 생소한 빽빽한 글을 비판적으로 읽는 건 전문가이며 대체로 상상을 초월하는 지능과 학업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러니 저런 새로운 분야 하나쯤 새로 공부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국정원 요원만 해도 자기가 지키려는 기술이 뭔지 최소한의 배경은 알아야 산업 스파이가 노리는 걸 눈치채고 방어를 할 테니 관련 분야 논문도 찾아보고 늘 새로운 걸 공부한댄다.
이게 답이 딱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니 지금도 사시 존치론자와 로스쿨 옹호론자들은 상대방을 로퀴와 사시충이라고 부르면서 싸워 왔다. 하지만 로스쿨 자체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정착 단계에 도달하긴 했다.

로스쿨은.. (1) 입학을 위해 대학 졸업장을 요구하고 (2) 학비 작살나게 많이 깨지되 정말 공인된 일부 극소수 중의 극소수 빈곤층에게만 장학 혜택 있고, (3) 3년 과정이 사법연수원 역할까지 포함하며, (4) 처음에 뽑을 때 전국에서 2천 명 정도 균등하게 많이 뽑고, (5) 나중에 변호사 시험은 최대 5년 동안 5번밖에 응시 못 하는 식으로 강제 필터링.. 이런 시스템적인 제약이 몇 가지 추가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로스쿨은 알다시피 출세로 가는 길로 여겨져서 문과· 이과를 가리지 않고 전국에서 날고 기는 공부벌레 수재들이 몰린다. 사시에서는 고민할 필요가 없던 출신 대학과 평점이 매우 중요하다. 변호사 시험도 아니고 맨 처음 입문 단계의 법학 적성, 일명 LEET 시험은 당장 복잡한 법학 지식을 묻는 시험이 아니며 무슨 미적분 같은 수학 시험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기출문제 한번 봐라. 눈 돌아간다. 수능 언어 영역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어렵고 길고 생소한 글을 읽고서 "주어진 텍스트로부터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등.. 수학 없이도 독해력, 논리력, 추리력을 통해서 공부 적성 아닌 사람, 머리 나쁜 사람 떨구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로스쿨은 합격하고 입학한 것만으로도 경사 났다고 추켜세울 지경이었다. 그래도 그 뒤엔 3년간 미칠 듯한 공부지옥과 점수 경쟁, 변호사 시험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변호사 시험은 의대의 국시와는 달리, 점수가 아닌 등수가 중요한 상대평가이다!)

그런데.. 입문자에 대한 진입장벽이나 고시낭인 양성을 막기 위한 단순 제약 같은 것은 사시에도 도입 가능해 보이는 것들이고, 로스쿨의 교육 시스템 자체가 딱히 법대 + 사시 학원 강의보다 크게 나은 차별화 요소가 있나? 난 잘 모르겠다.
다재다능한 배경의 인재를 뽑겠다고 도입한 전국의 로스쿨들도 출신 배경의 다양성은 개뿔이고 결국은 변시 합격률에 목 메는 반쯤 학원처럼 돼 있다.

내가 거시적으로 보기에 로스쿨의 가장 큰 의미는 국가가 나서서 법조인 양성 과정을 좀 더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고, 사시 특유의 지나친 고위험성· 투기성을 여러 제도를 통해서 강제로 분산한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가 추상화 계층이 늘면 성능 오버헤드가 조금씩 추가되듯, 그 과정에서 입문하는 소비자(학생)의 금전적인 부담이 증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로스쿨은 의대· 공대처럼 실험 장비· 기자재를 쓰는 게 없고 밤낮 책과만 씨름하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학비가 엄청나게 비싼 걸로 악명 높다. 사시 학원 강사보다 교수(법대 교수 내지 현직 법조인 출신의..)가 인건비가 훨씬 더 높기도 하거니와, 학교당 로스쿨이 인원도 굉장히 적기 때문에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로스쿨은 무슨 신림동 고시촌처럼 한데 밀집해 있는 게 아니고 전국의 지거국이나 명문대를 중심으로 학교와 학생이 골고루 흩어져 있다. 그나마 서울대 로스쿨의 TO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200명인데, 그래도 이는 과거의 서울대 법대가 매년 배출하던 사시 합격자 수보다 훨씬 적은 수이다. 그럼 하물며 학생 수가 50명밖에 안 되는 지방대 로스쿨에서 법학을 가르치는 그 많은 교수들을 굴리려면 학교 입장에서는 돈이 얼마나 들까? 로스쿨 유치를 위해 대학들이 거액을 들여 건물 짓고 시설 새로 만들었으며, 투자 비용을 학생으로부터 회수해야 하는 건 부가적인 문제일 뿐이고 말이다.

결국 로스쿨은 학벌 타파(?)와 지역 평등을 위해 구조적으로, 근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비효율과 더욱 가중되는 학생 부담을 감수했음을 의미한다. 이건 극소수 장학 제도 갖고 실드 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시 옹호론자이든 로스쿨 찬성론자이든 일단 이 원론적인 설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로스쿨이 그런 것을 다 상쇄할 정도로 기존 사시 체제의 단점을 보완해 주느냐, "단순 시험 점수 잘 받은 사람"과 "훌륭한 법조인 자질" 사이의 괴리를 더 잘 상쇄해 주느냐로 귀착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참고로 노 무현, 문 재인, 조 국 등 일명 진보 내지 좌파라고 불리는 법조인 배경의 인사들은 다 로스쿨 찬성론자였으며, 노 무현의 경우 대통령 재임 시절에 로스쿨을 도입한 것 때문에 자기가 신분 상승을 위해 올라탔던 사다리(= 사시)를 자기가 치워 버렸다고 비판받기도 했다는 것 역시 생각할 점이다.

3. 측정할 수 없거나 측정하기 어려운 것을 무리하게 측정하려는 것이 근본 문제

사시와 로스쿨 문제도 그렇고 앞서 언급했던 대학 입시도 그렇고.. 시험으로 줄세우기만 하면 제일 뒤끝 없고 공정하고 그나마 빈부격차 문제에서도 제일 자유로운 것 같다. 그러나 그로 인한 병폐도 있고, 단순 시험 문제 풀이 기계와 실제로 시험이 의도했던 모범적인 인재(?)상 사이의 괴리도 커진다.

그 폐단을 해결하려고 시험 점수만 보는 게 아니라 학생의 출신과 배경을 보고 대외 활동을 보는 식으로 비정량적인 것을 좀 보자니 그건 또 사교육 돈지랄로 변질되고 입시 제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오락가락 바뀐다. 오죽했으면 교외 경시대회 실적은 학생부에 반영도 안 하게 됐는데..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의 혜택을 크게 입은 본인으로서는 참 애석함을 느낀다. 그것도 안 하면 도대체 학교 시험만으로 나타나지 않은 학생의 잠재성을 어떻게 보라고?

그리고 그 어떤 교육과정이나 시험으로도 사람 내면에 있는 사상이나 인성을 본질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어려운 사법 시험을 떡 붙고도 6· 25 전쟁이 무슨침인지를 분간 못 하는 똑똑한 바보도 법조인이 되는데, 이를 걸러내질 못한다.

창의성 같은 건 일부 공모전이나 경진대회를 통해 측정 가능하겠지만 정량적인 측정이 아니니 이 역시 사교육+부정으로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수치화하기 어려운 능력이나 배경까지 무리해서 측정하려다 보니 결국 부정이 들어갈 수 있고, 사교육 돈지랄로 귀착되는 식으로 거기는 거기대로 또 병폐와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걸 측정하려는 걸 아예 포기해서도 안 되는데.. 참 어려운 문제이다.

이 글에서는 로스쿨 얘기에 대학 입시 얘기가 조금 두서없이 뒤섞이긴 했다만.. 이런 시험 관련 제도들 관련 문제는 딱 떨어지는 답이 없어 보인다.
애초에 근본적으로 국가나 사회 분위기가 '무리해서 대학 갈 필요 없는 세상', '자기 기술만 기막히게 좋으면 대접받고 충분히 성공하는 세상' 이런 식으로 가지 않는 한은, 전제가 애초부터 잘못된 상태에서 결론이 올바로 나올 수가 없다.

위에 높으신 분들이 무슨 대책을 내놓고 교육과정과 입시제도를 업데이트 한다 해도, 이랬다 저랬다 여러 이념을 어중간하게 절충한 조삼모사에 윗돌 빼서 아랫돌 괴기 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한계는 염두에 둬야 할 듯하다. 그래야 그 한계 안에서 차선· 차악을 찾아 적응할 수 있지 괜히 답이 없는 문제에 끙끙대다 세상 비관 염세주의로 빠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7/19 08:31 2017/07/1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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