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토지 조사 같은 것만 한 게 아니다. 자기가 다스리는 조센징들이 옛날에 무슨 찬란한 문화재 유물들을 만들었는지도 아주 면밀히 조사했다.
그래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跡圖譜)라는 총 15권짜리 방대한 도감을 1915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편찬해 냈다.

왜, 1910년대에 돌덩이가 다 무너진 폐가 흉가 수준의 불국사와 석굴암의 모습 사진을 보신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거 출처가 이 도감이다. 일본인들이 촬영해서 기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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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제5권, 불국사는 제4권에 수록돼 있다.)

그리고 각종 역사 만화나 교과서를 보면, 북한 지역에 있는 문화재들은 마치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흑백 사진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역시 일제 시대에 일본이 촬영한 저 도감의 옛날 사진을 인용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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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990년대부터야 냉전이 끝나고 남북 민간 교류가 잦아지고 정보 통신 기술도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예전에 비해서는 북한의 현지 정보도 훨씬 더 풍부하게 얻을 수 있게 됐다(현대에 컬러로 찍은 사진도 포함..). 하지만 그 전에는 개성의 선죽교 사진조차도 일제 시대에 찍힌 흑백 사진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대한민국은 말할 것도 없고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공권력으로 이런 것들을 파악하고 기록을 남긴 게 아니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우리나라 네임드급 독립운동가들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어 각종 훈장이 추서된 게 1962~63년, 원조가카의 집권 초기라면,
우리나라 네임드급 문화재들이 대대적으로 조사되고 사진이 처음으로 찍힌 건 1910년대 일제 시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저건 “식민지에 원래 이런 문화재들이 있었는데 이제 이것들도 다 우리 일본 것이 됐다. 그러니 우리가 철저히 관리해야지” 그런 정치 행정적인 차원에서 조사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걔들도 최소한 이상한 감정--심지어 조선에 대한 열등감까지!!!--을 갖고 “다 때려부숴 버려야지, 없애서 조센징들 민족 정기를 말살해 버려야지” 이러지는 않았다.

일제 시대의 초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 뭐시기 하는 그 아저씨는.. 정치 쪽은 가혹한 헌병 무단 통치 때문에 우리 쪽에서 썩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의외로 불상 덕후에 문화재 덕후 기질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반도의 문화재들을 보존하고, 그게 일본 본토로 무단 반출되지 않게 하는 일에 나름 애쓰기도 했다.

일례로, 그 당시의 석굴암 복원 작업은 졸속 날림으로 진행된 게 비판의 여지가 있을지언정, 최소한 악의적인 고의 훼손은 절대 아니었다. 폭탄 맞은 듯한 폐허 상태에 비하면 그 기술과 자금 하에서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든 거지, 악화시킨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석굴암이 저런 막장 상태가 되도록 수백 년째 방치한 건 숭유억불의 조선 왕조였으니 말이다.

석굴암이 옛 신라인들의 넘사벽 lost technology를 동원해서 만들어졌는데 왜놈들이 어설프게 콘크리트를 쳐발라서 망가뜨리는 바람에 습도 조절이 안 되고 내부 상태가 꼬였네 뭐네 하는 소리는 2020년대에는 좀 안 나와야 할 것이다. 걔들은 문화재를 진짜로 다 때려부순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이나 요즘 탈레반 집단보다는 정신 세계나 행정 시스템이 더 나은 애들이었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조선 임금들의 초상화인 '어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 6· 25 사변 중에 소실된 것, 그리고 결정타로 부산 용두산 대화재 때 전부나 일부가 소실된 것이 대부분이다. 현재까지 원본이 제대로 보존된 게 별로 없는 지경이다.
그런데 순종을 비롯해 일부 왕의 어진은 2010년대에 그림을 다시 그려서 복원이 완료되기도 했다. 이때는 소실된 부분을 무엇을 토대로 유추해 냈을까?

바로 일제 시대에 조선총독부에서 어진을 흑백으로나마 사진을 찍어 놓은 자료가 있어서 이를 참조해서 복원했다.
일부 소실인 경우, 색깔이야 불타지 않고 남은 부분으로부터 유추가 가능하니까 흑백 사진만 있으면 전체 복원이 가능해진다.
심지어 순종의 경우, 김 은호 화백이 어진을 그리는 모습까지 촬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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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저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자료인지, 아니면 다른 별개의 촬영 기록인지 본인은 잘 모르겠다.

※ 여담: 문화재 관련 박물관

문화재 관리 얘기가 나왔으니, 이것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 얘기도 같이 안 할 수가 없겠다.
박물관이야 워낙 분야가 다양하긴 하지만 무슨 국립 박물관이라 하면 일단은 상술했던 옛날 전근대 시절의 국보/보물 문화재를 전시해 놓은 곳을 말한다. 역사 박물관이라든가 아예 미술관하고는 영역이 약간 겹칠 수 있겠지만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일제 시대에도 한반도엔 총독부 박물관이니, 이왕가 박물관이니 하는 전시 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립 중앙 박물관’이 그 역할을 대체하게 되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경주, 제주, 전주 등 10여 곳에 국립 박물관 에디션이 있긴 하지만.. ‘중앙’이라는 타이틀까지 붙은 박물관은 서울 에디션이다.

엄청 옛날에는 국립 중앙 박물관이 경복궁이나 덕수궁 같은 고궁 안에 있었다. 1980년대에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입주하기도 했었으나, 훗날 그게 헐리면서 지금과 같은 용산 부지에 새로 자리를 잡게 됐다. 전에는 거기가 미군 골프장이었다고 한다.

※ 여담: 과학관

다른 관련 주제를 하나만 더 열거하자면..
이런 옛날 문화재 박물관 말고 나라에서 직접 운영하면서 여러 지역에 ‘파생 에디션’까지 존재하는 또 다른 관람 시설은.. 바로 ‘과학 박물관’, 일명 과학관이다.

얘 역시 나름 일제 시대부터 전신이 존재했었다. 조선총독부가 광화문 청사로 이전하자 남산 기슭에 자리잡은 기존 건물이 ‘은사 기념 과학관’으로 바뀌었는데, 이게 해방 후에도 이름만 ‘국립 과학 박물관’으로 바뀌어서 운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는 와룡동, 혜화 역 근처 지금의 위치에 ‘국립 서울 과학관’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부지가 너무 좁기도 하고 나중에 대전 엑스포가 개최되기도 했으니 대전에 엄청 큰 과학관이 새로 건립되면서 얘가 ‘중앙’ 타이틀을 대체하게 됐다. 즉, 국립 중앙 박물관과 달리, 국립 중앙 과학관은 대전에 있다.

지금은 수도권의 과천을 포함해 대구, 부산 같은 몇몇 대도시에 국립 과학관이 몇 곳 더 있다. 기존의 서울 과학관은 ‘어린이’ 과학관으로 리모델링 됐으며, 이와 별개로 강북에 서울 시립 과학관이 추가로 더 개관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1/12/19 19:35 2021/12/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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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서울의 중심부에 속하는 광화문-시청-종각 일대는 어쩐 일인지 대형 서점이 두 개나 비교적 서로 가까운 거리(광화문 교보, 종각 영풍)에 입점해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사러 잠시 들르기 좋다.
본인은 여러 볼일을 보러 시내에 갔는데, 광화문 근처에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근래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거기도 짬을 내어 들렀다.

아래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관람하는 형태이고, 2층은 그냥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3층은 이 승만 시절의 건국 초기, 4층은 산업화와 민주화 ~ 현대의 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 사진을 소개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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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 시대는 제끼고..
저건 1948년 5· 10 총선거를 앞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라는 걸 해 보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요령을 설명하는 포스터이다.
저 때는 지금 같은 주민 등록 번호나 신분증이 없었던 관계로 투표를 하려면 유권자 등록부터 먼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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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자는커녕 한글도 못 읽고 심지어 아라비아 숫자조차 못 읽는 사람이 있었나? 막대 표기라니 무슨 로마 숫자 같다.
당사자에게는 좀 잔인하고 미안한 얘기이지만, 이 정도로 무지·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무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 선출과 민주주의 따위를 바랄 수 있었겠는지 본인으로서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이 무슨 정책이나 이념이나 공약을 보고 자기 소신대로 투표를 하겠는가? 그냥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향응을 주는 진영에서 부탁하는 대로, 혹은 빨갱이들이 지상락원 선동하는 대로 우루루 끌려갈 확률이 99.9%이지.. 이래 갖고는 나라 망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에서 불철주야 애들만 상대하던 교사가 퇴직하고 나와서 어설프게 사업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그 교사의 퇴직금은 반쯤 과장 보태면 그냥 먼저 맡은 놈(= 사기꾼)이 임자라고 한다. 심지어 현직 교사들조차도 자기들이 학교 밖 사회에서는 완전 호구 취급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할 정도이다.

오늘날 교사는 분명 아무나 될 수 없는 직업이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사까지 된 사람은 일반인들 평균 이상의 지능과 체력과 리더십을 갖춘 인재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될 수가 있다. 하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의 투표권이 어떤 방식으로 오· 남· 악용될지 대해서야 뭐 안 봐도 비디오이다.

투표권이란 게 무슨 운전 면허에 준하는 급으로, 혹은 군복무 조건까지 요구할 정도로 까다롭게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와 학력, 그리고 자기 소득으로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최소한의 경제력 같은 조건 정도는 붙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소한 연령을 지금보다 더 낮춰서 무슨 중· 고등학생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건.. 영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애들이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5월 총선거 이후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생일이니 박물관에서도 당시 경축 기념식을 하던 분위기 회고록과 할배 대통령의 축사 연설 육성 같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단, 제헌 국회 때 애드립으로 드려졌던 기도문은 종교색 때문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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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분단과 북괴 정권의 수립 과정, 1940년대에 좌익이 저지른 각종 반란과 혼란 공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곧장 6· 25 전쟁 파트로 넘어갔다.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절반인 10만 명에 불과하던 남한의 육군은 휴전 이후 1954년엔 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영상 자료가 소개하는 바와 같이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고? 이제 상시 징병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난 1950년대 이 승만 때는 원자력 연구소만 만들고 국방 과학 연구소는 순전히 1970년대 박통의 작품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 때도 '국방부 과학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연구 기관이 생기긴 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긴, 저 때는 어떻게든 북괴의 남침 시즌 2를 원천 봉쇄하는 게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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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으로 1960년대로 넘어간다. 저게 바로 그 시절에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해 낸 자석식 전화기와 라디오이다. ㅠ.ㅠ
전화기는 다이얼조차 없이 수동 발전기로 최소한의 전기 신호를 전화선을 통해 보내는 기능만 있다. 그리고 라디오는 기능이 굉장히 빈약해 보이는데 크기는 꽤=_= 크다.
하긴, 저 때는 저렇게 전파를 통해 아날로그 신호를 수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최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으로부터 5년도 더 전에 아날로그 송출이 중단되고 디지털로 전환된 반면, 라디오는 그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자용 아니면 비상용으로 TV와는 용도가 확 다르니 예로부터 통용되는 단순한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그나저나 라디오 중에는 TV 채널의 음성 부분만 추출 가능한 물건도 있었는데, 그럼 이제 그건 불가능해진 건가 모르겠다. 라디오 방송국이 일부러 TV 방송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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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교통 박물관에서 봤던 시발 자동차를 여기서도 보게 됐다. 색깔도 동일하다.
저 시절엔 자매품으로 시발 리무진과 시발 버스도 있었는데.. 그건 실물은 말할 것도 없고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것도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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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절, 박통의 원대한 국토 마개조 야망이 저 지도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짧은 역사 동안 정말 박통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다. 옛날에 무슨 "인도와 마 광수를 바꾸지 않겠다" 이런 구호가 있었던가 본데, 저 시절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건전하고 불가피하고 선했던 경제 개발 반공 독재라면 어줍잖은 2공 의원내각이니 사분오열 당파싸움 민주주의 따위하고는 얼마든지 맞바꾸고도 남는 장사였다.

저 과업들을 다 일관되게 이루려 하다 보니 통상적인 임기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그걸 추진하려면 돈이 왕창 많이 필요한데 돈이란 게 땅 판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국가고 국민이고 다들 가난했다.
초창기에는 삼성과 현대도 그냥 오늘 내일 직원 월급 주는 걸 걱정하는 아류 영세 기업일 뿐이었으며, 돈줄은 제도권 은행이 아니라 지하에서 민간 사채업자들이 잔뜩 쥐고 있었다. 그만치 나라 사정이 답이 없고 열악했다.

그러니 박통은 화폐 개혁을 감행하고, 기업들이 돈 걱정 없이 투자를 할 수 있게 사채의 전부나 일부를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강제로 탕감해 버리기도 하고, 국민들에게는 온통 저축을 강조하면서 경제 개발 자금이 은행으로 모이도록 독려했다. 일본과 수교하면서 받은 소위 일제 피해 배상금도 최소한 다른 이상한 짓거리로 탕진하지 않고, 경부 고속도로와 포항 제철의 건설에 썼다. 왜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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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국가가 잘살고 국민들이 다들 등 따시고 배 부른 중산층이 되어 자기 생업에만 종사하면서 가족과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살기만 한다면.. 골치 아픈 정치에 관심 가질 필요 따위 없고 반공은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장 자기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면 무슨 계급 갈등에 자본가들을 타도해야 되네 혁명 과업을 이뤄야 하네 식의 불순한 수작에 귀를 기울일 일이 없다.

그러니 위의 포스터는 그저 정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력으로 일본을 이기는 게 가장 훌륭한 극일 반일이듯이, 자유 시장 경제 하에서 북괴보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반공이다.
오늘날의 좌익 종북 빨갱이 위정자들은 이와 정반대 짓거리를 하고 있다. 기업을 몽땅 망가뜨리고 서민 경제를 파탄 몰락시키는 게 대남적화에 어떤 형태로든 더 유리하다. (선동에 더 취약해지고 먹을것 앞에서 인간성이 더 쉽게 상실되는 등..) 이른바 경제 무장의 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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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야당의 쓸데없는 태클은 심해지고 기존 선거 방식대로는 계속 당선되기가 어려우니..
박통은 헌법을 뜯어고치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10월 유신.. 이게 '우리식 사회주의'...가 아니고, '한국식 민주주의'이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긍정적인 프로파간다 홍보를 죽어라고 해야 했다. 병신 같지만 왠지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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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니는 뉴질랜드로 수출되었던 것을 역수입한 것이어서 포니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핸들이다. 게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자동 변속기이더라. 2도 아니고 1이 오토라니.. 정말 보기 드문 모델이다.
옛날에 무슨 영화 찍고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하는 용도로 이집트에 수출되었던 포니를 하나 역수입했다고 그러던데, 그 시절에 포니가 참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긴 했었다.

이렇게 산업화 얘기부터 한 뒤에 한켠에 개발 부작용에 대한 한계, 민주화 열망 그런 얘기도 소개돼 있었다.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듯했다.

이 승만은 건국 초기와 관련하여 육성과 사진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반면, 박통에 대해서는 경제 성장 성과만 저렇게 소개돼 있고 당사자의 족적은 박물관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더 관심이 있으면 아무래도 상암동에 소재한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또한 못살던 시절, 한창 산업화 하던 시절에 서민들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는 경희궁 근처의 "서울 역사 박물관"과도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이라면 차라리 구한말· 일제 시대를 빼 버리고, 서울 올림픽이나 대전 엑스포, IMF 극복 같은 역사 자료도 더 풍부하게 넣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도 벌써 2~30년 묵은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청년부 동생과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라면서 좁은 세상을 실감했다. =_=;;;

※ 외솔 상 시상식

이 날 서점과 박물관을 방문한 뒤 본인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울 시청 근처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올해치 외솔 상 시상식이었다. 본인은 수상자와는 별 인연이 없지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지인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재단법인 외솔회"라고 국어학자 외솔 최 현배 박사를 기념하는 단체가 있다. 거기서는 매년 고인의 탄신일(10월 19일)에 즈음해서 한국어· 한글과 관련해 문화· 학술 분야에서 1명, 계몽· 운동 분야에서 1명 이렇게 총 2명을 선정해서 상을 준다.
그렇게 시작된 시상식이 2018년 기준 벌써 40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공 병우 박사도 외솔 상의 아주 초창기 수상자였다.

올해는 학술 분야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겸 국립 국어원 원장을 역임했던 권 재일 교수가, 운동 분야는 한글 문화 연대의 어느 간부가 받았다.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돼 가는 허 웅(한글 학회 회장) 박사가 외솔의 제자였고, 권 교수는 허 웅의 제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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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입구에는 본인이 다니는 대학원의 총장과,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명의로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외솔회는 재단법인이지만, 비슷한 업종(?)에 속하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는 사단법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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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은 상만 씨크하게 주고 끝인 게 아니라 외솔 선생의 생전 육성 청취, 수상자의 소감 연설, 심지어 "한글이 목숨이다"를 가사로 뮤지컬 공연까지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많았다. 게다가 뷔페 저녁 식사도 공짜로 줬다.

전공 분야와 관련해서 외솔의 사상과 행적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듯하다.
킹 제임스 성경 신자가 0.5초 만에 이해 가능하게 한데 요약하자면, 요일 5:7 구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대신에 '말, 글, 얼'을 집어넣으면 씽크로율이 99%에 근접할 것이다.
이분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개인적인 종교가 실제로 기독교였다고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런 신앙보다는 그냥 방망이 깎던 노인 스타일의 대쪽 강직한 고집쟁이 원칙주의자 "한글이 목숨" 언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 봄, 아폴로 13호의 발사를 세 주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분이 그 근성으로 성경· 신학 쪽도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면 이 분야 순우리말 용어에도 분명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혼과 영 대신에 넋과 얼을 제안도 분명 했으리라고 본인은 추측해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8 08:33 2018/10/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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