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한테 이토 히로부미야 뭐.. 을사조약을 밀어붙인 민족의 침략자 원쑤이며 악당이다.
원 태우 의사가 암살하려다 실패했지만, 나중에 안 중근 의사가 쏜 권총에 맞아 골로 갔다. 죽어서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걸로 인과응보를 받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놈은 “남자는 배꼽 아래부터는 인격이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으며, 뒤지는 순간에도 女짜 포즈를 그리며 쓰러졌다는 풍자가 나돌 정도의 호색한이었다.
과연 악당 캐릭터에 걸맞은 성품이다. 울나라에서는 이 정도의 이미지가 전부이다. 코 옆에 점이나 있는 사악한 흰 수염 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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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이 사람을 암살한 안 중근 의사는 울나라에서 뭐.. 그야말로 초딩용 위인전에도 수록돼 있는 애국자에 민족의 영웅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운동 업계에서 개인 테러 분야의 원조 ‘알파’이다. 피날레 ‘오메가’는 윤 봉길 의사이고. ㄲㄲㄲㄲㄲ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니 관련 영상물도 당연히 여럿 만들어져 나왔다.
바로 떠오르는 건 "도마 안 중근"... 아 이건 좀 작품성이나 감독의 자질에 논란이 많고..
검색을 해 보니 애시당초 해방되자마자 1946년에 바로 "의사 안 중근"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나왔다. 하지만 얘는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으며, 1972년에 동일한 제목으로 리메이크된 영화가 그나마 더 유명하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천추의 한이었으면 1940년대 말에는 열차 이름도 '해방자'호였으며, 유 관순이고 윤 봉길이고 안 중근이고 항일 독립운동가 전기 영화부터 먼저 잔뜩 만들어졌었다. 그나마 "검사와 여선생"이 그 시절에 비정치 순수 픽션 분야에서 흥행 성공한 얼마 안 되는 신파 영화였다고도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유 관순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 중근 영화도 1959년에 "고종 황제와 의사 안 중근"이 하나 더 나왔고..
심지어 북한에서도 "안 중근, 이등 박문을 쏘다"(1979)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었다. 유 관순은 북한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반면, 안 중근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알고 보니 지난 2016년에는 "마지막 간수"라고 울산 MBC에서 다큐 반, 영화 반쯤 되는 성격의 TV 프로를 방영했었다. (☞ 보기)
마치 "조피 숄의 최후의 날"처럼 안 중근이 거사 이후 체포되고 취조받는 장면만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공교롭게도 KBS에서 주 기철 목사 다큐 겸 전기 영화인 "일사각오"를 만든 때와 시기가 아주 비슷하다. 그런데 저거는 중앙도 아닌 지방 방송에서 전기 드라마를 자체적으로 만든 거라니 무척 흥미롭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2022년 말에는 "영웅"이라는 이름으로 또 21세기 안 중근 전기 영화가 만들어져 있다. ㄲㄲㄲㄲ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안 중근과 이토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그래도 일본에서는 안 중근을 위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반면, 한국에서 이토를 그냥 외국 정치인으로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만, 이토는 그 당시 일본의 진짜 제국주의 정한론 침략자들에 비해서는 '온건한' 편이었고,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만 두면서 둘이 평화로운 공존을 바라고 있었다면서 이토에게 최소한의 실드를 치는 시각은 국내에도 일부 있다. 이 영상에서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오는구나. (☞ 보기)

  • “조선 정도의 전통과 규모가 있는 나라를 일본이 완전히 합병해 버리는 건 일본의 입장에서도 매우 힘든 일입니다. 대한제국이 자치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합니다.”
  • “독자적인 문화를 1천 년 이상 가진 민족을 식민지로 병합한다면 일본으로서는 큰 후환을 만들게 됩니다”

  • “일본인 교사는 여가 시간에 틈틈이 한국어를 공부하십시오” (참고로, 이토 본인은 영국 유학파였고 영어를 아주 잘한 사람이었음)
  • “종교는 조선인들 자유에 속하는 문제이니 이렇다 저렇다 평론하지 마십시오”

근현대에 일본은 어느 때건 온건파와 강경파가 늘 대립했던 것 같다.
한국 식민지화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나중에는 천황에 대한 생각(황도파 vs 통제파), 더 나중엔 태평양 전쟁 때 미국에 대한 생각에서도 말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개인적으로야 살아 생전에 한복 코스프레 즐기고 조선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저 정도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토가 진짜로 저런 생각을 갖고 저렇게 말했는데 울나라 국사에서 일부러 누락시키고 안 가르친 것인가?

이토가 한국의 잠재성을 믿었다느니 하는 말은 아무래도 오바 같다.
을사조약의 제5항에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의 유지를 보증한다”라고 적혀는 있다. 나무위키에서는 여기에 밑줄 치고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로 링크가 걸려 있다. -_-

그는 조선을 보호국으로 먼저 만들고 나서 천천히.. 그래도 영국이나 로마 제국을 흉내라도 내면서 조선을 온건하게 일본과 동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영국 유학파답게..
이렇게 비유를 해 보니 이토한테서 뭔가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후자는 미국 유학파이군..

그러니 고종이 헤이그 밀사를 몰래 보내면서 허튼수작 부린 것에 대해서는 이토도 강제 퇴위로 대응하면서 칼같이 응징했다.
그 시절에 고종은 아무리 봐도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에서.. 그리고 친일과 항일 사이에서 오락가락 여기저기 양다리 걸치다가 죽도 밥도 못 쑨 것 같다. ㄲㄲㄲㄲ

안 중근 의사는 이토가 한국을 배신하고 동양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를 들면서 그를 사살해 버렸다. 그러면서 이토의 구체적인 죄목 15가지를 법정에서 주장했다. 아무리 온건파니 뭐니 해도 조선인 사이에서는 이토가 완전 죽일놈이라는 공감대가 전국적으로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시일야방성대곡'만 봐도 "이토 히로부미가 우리 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을사조약 결과를 보니 전혀 아니었구나~ 저놈이 우릴 낚았구나!! 아이고 우리 어이할꼬"라는 내용이 전부이지 않던가..?

물론 역사적으로 볼 때 안 중근이 주장한 아이템들이 100% 다 팩트이고 맞는 얘기는 아니었던 걸로 난 알고 있다. 집필 중이던 "동양 평화론"이 완성되지 못해서 그의 생각을 다 알 수 없게 된 것이 일면 안타깝다.

안 의사는 체포된 뒤에는 자기를 적장을 사살하고 잡힌 군 장성급 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총살이 아닌 교수형을 당한 건지도 모르겠다. 정작 윤 봉길 의사는 그런 요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로까지 압송돼서는 군 교도소에서 총살형을 당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이토와 안 중근에 대해 어지간한 얘기는 다 나온 것 같다.
객관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1) 이토는 일본 자국에서는 한국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안 중근이 존경받는 것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 않다.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 것 같은 유치한 행적 때문이 아니다. 그는 일본 자체를 개조하고 근대화시킨 아버지 정도로 추앙받는다. 거의 울나라의 박 정희 수준? 괜히 지폐에까지 들어간 게 아니다.

그리고 하나 더. 김 옥균 암살과 효수(시즌 1), 거기에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시즌 2)..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에 대한 더 부정적인 인식을 심고, (2) 조선을 더 강하게 병탄하고 더 험악하게 취급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건 분명하다고 하겠다. 쉽게 말해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는 시기를 크게 앞당겼다.

대만의 일제 통치에 비해 한반도의 일제 통치가 더 가혹했던 것, 처음부터 무단 통치에 헌병이고 고문이고가 횡행했던 것에 이런 사건이 직· 간접적으로 기여했지 싶다.
해방 이후에 김 구가 갑자기 암살 당하는 바람에 1940년대 말에 서로 눈치만 보던 남북 관계가 더 싸늘해지고, 6 25 같은 전쟁이 더 빨리 벌어지게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사람의 다른 행적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물론 을미사변이라든가(시즌 1) 의병에 대한 무자비한 토벌(시즌 2) 때문에 조선 쪽에서도 감정이 빡돈 게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선이 일본을 완전히 몰아낼 군사력 국력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국지적인 저항과 도발만 하는 건 그냥 일본을 빡돌게만 할 뿐, "곱게 식민지 될래, 맞고 식민지 될래"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없었다.;;

마치 진주만 공격이 그때 당시에는 일본의 대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천조국을 빡돌게 해서 그 뒤로...!!@#@!#@! 됐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은 그로부터 10년쯤 뒤, 3· 1 운동이 비폭력을 지향하면서 크게 벌어지니 그제서야 일제도 발톱을 쓱 감추고 좀 고삐를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하게 됐다.

안 중근이 1910년대 국제 정세를 얼마나 크게 바꿔 놓았는지는 반대로 안 중근의 거사가 실패했다고 가정하고 쓰여진 대체역사 소설 "비명을 찾아서" 같은 걸 읽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이 저렇게 무식하게 가혹하게 통치를 했으니 반일 항일 감정도 강해지고 강한 독립 열망이 형성되고 그게 실제로 이뤄지기도 한 것이다. 이토 같은 사람이 오래 살아서 조선을 반발심 없이 교묘하게 잘 다스렸으면.. 한국이 진짜로 일본과 동화돼 버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나머지 관련 잡학들

  • 일본은 우리나라와 달리 성이 이름 급으로 엄청 다양하고 많은데, '이토'는 그래도 그나마 흔한 축에 드는 성씨라고 한다.
  • 휴먼버그 대학교에 고정 출연하는 주인공 중에 불사신의 직장인 ‘사타케 히로부미(박문!!)’가 있다. 이 사람 이름도 좀 다시 보게 되겠다. ㄲㄲㄲㄲㄲㄲㄲㄲㄲ

  • 안 중근 의사가 거사를 벌이던 당시에는 하얼삔 역에 일본군보다는 러시아군이 훨씬 더 많았다. 안 의사도 러시아 헌병들에게 제압 당하고 체포됐다.

  • 이토가 마지막으로 "나를 쏜 자가 누군가? 조센징이라고? 이런 빠가야로.." 이런 말을 남겼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고 후손의 증언에 의해 부정된 바 있다. 또한, 이토를 쏜 사람이 러시아 저격수라고 따로 있다는 황당한 낭설이 있는데, 이 역시 그냥 주작이다.

  • 우리나라는 35년에 달하는 일제 식민지 트라우마로 인해, 훗날 UN이 제안하는 신탁통치조차도 극렬 반대하고 차라리 이대로 미군정-소련군정을 거쳐 분단을 선택한 것에 가깝다.;; 신탁통치 오보 같은 황당한 사건도 울나라의 미래에 영원한 쐐기를 박아 버렸다.

Posted by 사무엘

2023/07/31 08:35 2023/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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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의병이 토벌된 이후로 일제 시대에 무력을 사용한 항일 독립운동 분야의 최초 원조는 (1)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 중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한일합방보다도 전이니 독보적인 원조이다.
그 뒤 한 10년 정도 일제의 무단 통치를 경험하고 3· 1 운동까지 진압된 걸 보니, 일제를 상대로 테러와 게릴라전을 동원해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1919년 말에는 김 원봉의 주도로 의열단이라는 게 생겼다.

아, 의열단보다 근소하게 전인 1919년 9월엔.. (2)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강 우규가 등장했다. 하지만 이건 실패했다. 그는 현장을 탈출하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나중에 같은 조선인의 밀고로 체포되어서 조선인 형사에게 취조를 받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 이후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그래도 사이토 총독의 입장에서는 3· 1 운동이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었지, 게다가 부임 당일에 자기 목을 노린 폭탄 의거까지 벌어졌지.. 당장은 이빨과 발톱을 감추고 민심을 달래야만 했다. 괜히 문화 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통치 양상이 더 교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의열단이 벌인 최초의 거사는 (3) 부산 경찰서를 노린 박 재혁이었다. 1920년 9월, 폭탄을 터뜨려서 경찰서장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도 다친 채로 체포됐고 옥중에서 단식 자결했다. 당시 경찰서장이 중국 고전 덕후라는 정보가 있어서 그는 중국인 고서 상인으로 위장해서 들어갔었다.

그 뒤 1920년대 초중반엔 본토 밖에서는 독립군이 활동했고, 본토 안 서울에서 권총과 폭탄을 쥔 의열단의 리즈 시절이 잠깐 벌어졌다.

(4) 김 익상은 일본인 전기 기사로 변장해서 1921년에 무려 조선총독부 청사 안으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폭탄을 몇 군데 투척해서 터뜨리긴 했지만 불발탄도 있었고 유의미한 인명 살상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자신도 변장 잘하고 일본어를 유창히 구사한 덕분에 안 잡히고 무사히 탈출했다.

의열단에서는 거기까지 들어갔다가 살아서 돌아온 게 참으로 용한데, 이제 그만 은퇴하고 니 인생 즐기라고 그에게 권유했다. 그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이듬해에 일본의 육군 대장(다나카 기이치)을 암살하러 동지 2명과 함께 상하이에 갔으나.. 여기서도 권총 사격과 폭탄 모두 지독하게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들은 임무에 실패한 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김 익상은 뭔가 유의미한 1차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조선총독부 내부에 대놓고 침투해서 저만치라도 타격했던 전무후무한 인물이다. 2차 의거 때도 사형은 면했지만 1943년까지 일제 시대 기간 대부분과 자기 2, 30대 나이를 몽땅 감방에서 보내게 됐다. 명목상 석방된 뒤에도 일제로부터 감시를 받다가 또 다시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모로 좀 특이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다음으로 (5) 김 상옥이 1923년 1월, 종로 경찰서 내부에서 폭탄을 터뜨려서 주변 일본인들 여러 명을 다치게 했다. 당일에는 도주에 성공했지만 며칠 뒤 은신처가 탄로나고 서울 시내에서 포위되었는데, 이때 자신을 체포하려는 수많은 일본 경찰들을 상대로 혼자서 권총 두 자루만 쥐고 수 시간 동안 시가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서장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견 간부급을 사살하고 부하들에게 중상도 입했다고 한다.
그는 총알이 다 떨어지자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했다.

(6) 나 석주는 1926년 말, 의열단의 거의 끝물을 장식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위장해서는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을 던져서 내부 시설을 부쉈다. 다음으로는 사장이나 행장 같은 특정 타겟 없이 그냥 주변의 VIP 같아 보이는 일본인들을 권총으로 마구 사살하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과도 대치하게 됐다.

결말은 3년 전의 선배 김 상옥과 비슷해졌다. 그 역시 마지막에는 자결을 시도했지만.. 단번에 절명하지 못하고 체포된 채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래도 충분한 치명상을 입은 덕분에 다행히 일제에 의해 고문과 처형 당하지는 않고 병원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은 이 글에서 언급되지 않은 실패한 거사도 몇 건 더 추진한 바 있다.
몇 년간 그렇게 해 봤는데 우리 역랑이 부족한 게 느껴지고, 딱히 대세가 바뀌는 건 없는데 귀중한 대원들의 희생만 더 커지고, 임시정부와도 손발이 썩 맞지 않고..

의열단은 일제 내지 내부 배신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일망타진 와해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악재들이 겹치면서 해체되었다. 김 원봉은 무장 투쟁을 할 거면 이런 게릴라 공작원 테러리스트 급이 아니라 정규군 급의 병력을 양성할 필요를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그래서 1930년대 초에는 김 구가 의열단을 대신하여 임시정부 명의로 한인애국단이라는 비밀 단체를 만들었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은 의열단이 아니라 바로 저기 소속으로 활동했던 사람이다.

(7) 이 봉창은 잘 알다시피..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잘하고 일본인 지인도 많고 심지어 일본 경찰과도 인맥이 있어서 김 구가 처음에 이놈은 밀정이 아닌지 진지하게 의심했을 정도였다. 한참을 얘기를 나눠 본 뒤에야 끄나풀이 아니고 레알 동지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조선 총독도 아니고 무려 히로히토 일본 천황을 암살하러 1932년 1월에 본토에 갔으며, 현장까지 잘 도달해서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발 없이 잘 터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신이나 마찬가지인 천황이 사람들에게 호락호락 얼굴을 비춰 줄 리 없었다. 천황은 면상은커녕 항복 방송 옥음(!)을 들려준 것만으로도 신민들이 벌벌 떨었던 존재인걸..;; 그는 똑같이 생긴 여러 대의 마차 중에 어느 게 천황이 탄 마차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목표물을 맞히지 못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히로히토의 생일에 훙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8) 윤 봉길 의사의 의거는 무장 항일 독립운동 역사상 역대급의 대박을 터뜨렸다. 물리적인 인명 살상 실적으로나, 상징성으로나..

게다가 이런 스타일의 유의미한 거사는 훗날 해방될 때까지 저게 사실상 마지막 대단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윤 봉길 이후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김 구의 신변도 위험해졌기 때문에 한인애국단은 활동이 지속되지 못하고 1933년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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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봉창과 윤 봉길은 모두 외국에서 거사를 벌이고 외국에서 순국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의열단 시절과 달리, 이렇게 가입 선서식 사진까지 존재하는데.. 그런데 사진들의 태극기 배경은 다 합성인 것 같다.)

그러니 사람들이 안 중근과 윤 봉길만 기억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게 이 분야의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용한 무기(전자는 권총, 후자는 폭탄)나 처형된 방식을 헷갈리기도 한다(전자는 교수형, 후자는 총살). 이들 이후로는 김 구도 개인· 소수 단위의 테러 의거가 아니라 광복군이라는 정규군을 양성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이상이다.
누가 만들어 낸 구분인지는 모르겠으나.. 똑같이 항거하고 투쟁했더라도 무기를 들고 싸운 사람은 의사라고 부르고, 맨몸으로 싸운 사람은 열사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 준(헤이그 밀사), 유 관순, 전 태일 같은 사람은 열사이고,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은 의사이다. 국어사전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통상적으로는 진짜로 저 기준으로 나뉘는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제 강점기는 컴퓨터라든가 각종 전자 출입 카드, X선 금속 탐지기 따위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저런 방식의 무장 항일 투쟁도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외국에서 만들어진 폭탄과 권총을 어떻게 한반도로 반입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안 중근(하얼빈 역)과 윤 봉길(훙커우 공원)의 경우, 초대장 내지 입장권이 없었기 때문에 원래 해당 행사 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걸 유창한 일본어로 "아이 씨, 티켓을 깜빡 잊고 안 가져왔네.. 이런 경사스러운 행사에 자국민도 못 들어가요?"라고 유창한 거짓말을 구사하며 둘러댄 덕분에 들어간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멘탈과 배짱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은 무장 투쟁이건 외교건 국민 계몽이건.. 독립 운동을 위해 다 필요한 것이었다고 인정하는 주의이다.
현실성만 따지면 어느 것도 다 비슷하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고 비효율적인 삽질 같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런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도 안 했으면 일본이 원폭 맞고 깨갱 하고 물러갔다 해도 한반도가 자유 독립국이 된다는 보장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이 주제와 관련하여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으로는.. 그 시절에도 난창 폭동이라든가 자유시 참변 등, 공산주의 진영에서는 조선의 독립과 관련하여 선한 게 나온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 중에서는 적의 적은 친구일 거라는 논리로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외국의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기대에 부합하게 도움을 준 적은 결코 없다. 중국에서는 국공합작이라도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역시 그런 거 없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그렇게도 임시정부가 좋으면.. 친중을 하지 말고 지금까지도 일관되게 친대만을 해야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라. 장 제스가 임시정부와 대한 독립을 도와 줬지 마오 쩌둥이 도와준 적이 있었냐? 후자는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 통일을 저지한 원흉일 뿐이다.
오늘날 친중종북분자들의 유체이탈 궤변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20/04/12 19:35 2020/04/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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