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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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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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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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때 국내에서는 일제에 항거한 여러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그 중 유명한 분들은 위인전이 만들어지고 학교에서도 그 행적이 거듭 가르쳐지고 있다. 유 관순, 안 중근, 윤 봉길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거의 국부급의 존경을 받고 위인전이 만들어지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를 살해한 안 의사가 존경받고 떠받들여지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이념적으로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통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가능하게 했다고 그 공로를 인정한다. 특히 삼일절에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하여, 그 날이 공휴일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고, 삼일 운동의 이념을 물려받았다고 헌법에 명시가 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에 대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남한과는 달리 삼일절에 거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북한 사람들은 1919년 이 날에 무슨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유 관순을 그렇게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공휴일도 물론 아님. 사실, 북한이 태극기를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삼일절을 그렇게 좋게 부각시키고 싶지 않을 법도 해 보인다.

그런데 역사를 공부해 보니, 그런 major한 독립 운동가뿐만이 아니라 다소 minor한 분들의 행적에 대해서도 본인은 관심이 간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다니엘, 예레미야뿐만이 아니라 학개, 나훔, 요엘 같은 사람도 알게 되듯이 말이다.

예를 들어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 1909년에 안 중근 의사가 하얼삔 역에서 총살하기 전에, 이미 한국 내에서도 1905년, 경부선 열차 탑승 중에 원 태우 의사에게서 짱돌 테러를 당해 매우 크게 다친 적이 있었다. 을사조약 체결에 분개한 나머지 이토의 얼굴에다 깨진 유리 파편 세례를 안긴 원 의사는 그때 겨우 24세 청년이었다!

체포된 원 의사는 비록 곧바로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온몸이 만신창이 불구+고자 신세가 되었고, 형기를 마치고 풀려난 뒤에도 일제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힌 채 감시와 착취를 당하며 기구한 일생을 살았다. 그래도 다행히 일제가 망할 때까지 끈질기게 생존하면서 천수에 가깝게 살긴 했다(1882~1950). 게다가 안 중근의 의거도 원 태우의 의거에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하니, 원 의사는 비록 안 의사만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 공적이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틴데일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의 관계처럼?

(여담이다만, 이 이토 히로부미라는 양반은 열차 여행 중에 저렇게 크게 다치고 나중엔 아예 역 플랫폼에서 살해당하기까지 하니, 개인적으로는 철도 트라우마가 생길 법도 해 보인다.)

오늘은 이분 말고 또 다른 인물을 소개하겠다. 일제로부터 직접적으로 해코지를 당한 적이 있는 독립 운동가 중 최연소자는 흔히 유 관순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더 어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주 재년(1929~1944). 요절하지 않았다면 지금 80대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전라남도 여수 출신이다.

그는 일제 말기를 산 사람이었다. 전쟁 때문에 일제의 식민 통치는 그야말로 막장 of 막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일제는 식량을 포함해 온갖 물자를 수탈하였으며 조선 사람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꼬투리를 잡아 체포· 구금하고 노동자나 군인으로 강제 징용해 갔다. 조선어의 교육은 이미 금지되었고, 학교에서는 조선인들도 천황 폐하에게 충성을 바쳐서 대동아 공영권에 이바지하라는 개드립을 어린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 재년은 저것들은 다 헛소리일 뿐이고 일제는 이 상태로는 아무리 발악을 해 봤자 물자가 곧 바닥나고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 우리 조선은 그 기회를 타고 미국 같은 연합국의 힘을 이용해서 독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통· 통신이 안습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에 이 정도로 앞서간 생각을 했다는 건 여간 대단한 게 아니었다. 물론 일본 헌병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건 나 죽여 달라는 소리와 동급이었지만 말이다.

1943년 9월 23일, 그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일본 디스 문구를 집 근처 돌담장에다가 공개적으로 새겨 적고 말았다.
“조선과 일본은 서로 다른 나라이다. 일본 섬놈들은 반드시 패망한다. 조선 만세!”
실제로 쓰기는 한문으로 썼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은 이 문구가 일본 헌병들의 눈에 띈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서였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100여 명에 달하는 경찰과 헌병들이 동원되어 이런 말을 씨부린 놈이 누구냐고 마을을 샅샅이 뒤지면서 주민들을 다그쳤다. 자수하는 놈이 없으면 마을을 다 불질러 버리겠다고 공갈까지 했다. 그랬는데 자신이 범인이라며 자수하는 사람은 겨우 10대 중반의 중학생(오늘날로 치면)이었으니 왜경들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수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그 뒤에 당한 건 유 관순 때와 똑같았다. “이런 짓을 네놈 혼자 저질렀을 리가 없다. 공범· 배후가 누구냐? 누가 이런 사실을 알려 줬는지 어서 대라!”라는 심문과 함께, 그는 구타,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굽히지 않고 이건 자신만의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우리 개념으로 치면 내란 선동에 의한 치안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44년 1월에 풀려나긴 했다. 나이가 너무 어리고 물리적으로 누굴 죽이고 부순 것도 아니니 실형을 곧바로 집행하지는 않았지만, 집행유예 기간을 보아라. 상당히 긴 기간 동안 네놈을 블랙리스트 인물로 여기고 계속 감시하겠다는 일제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유 관순이 징역 3년이었고, 의자 집어 던진 것 때문에 법정 모독죄 4년 추가였다)

그러나 그는 15~16살의 나이에 당한 악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건강이 이미 심하게 망가진 상태였으며, 결국 그 해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교회사를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날짜를 보고 뭔가 패턴이 보일 것이다. 최 권능 목사라고 불리던 최 봉석 목사의 소천일이 1944년 4월 15일이요, 주 기철 목사가 4월 21일(혹은 22일)이니, 그야말로 1주 간격이다. 어째 이 시기에 유명한 항일 인사가 많이 세상을 떠났다.

유 관순에 비해 주 재년 열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져 있지 못했다. 메이저급 독립 운동가나 항일 열사들은 박 정희 정권 시절인 196, 70년대에 이미 훈장이 추서되었고 나중에는 심지어 사회주의· 좌파 계열 독립 운동가들까지도 공적이 추가로 인정되었다. 그 반면, 주 열사에 대해서는 유족들이 끈질기게 국가를 상대로 청원을 한 끝에야 재조명을 받았으며 2006년에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일제로부터 독립 운동을 하다 투옥 당하고 형벌을 받았다는 판결 문헌 기록이 발견된 덕분이다.

그 시절에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여 신문을 내고 선생질을 하기 위해서는 어지간히 의협심이 충만한 사람이 아닌 이상, 비록 진심은 그게 아니더라도 윤 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 규탄(?)하는 기사를 내고 디스를 해야 했으며, 강단에서는 천황 폐하께 충성하라고 징병 독려를 해야 했다. 맨날 손 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 같은 짓만 했다간 신문사고 학교고 다 남아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프로파간다를 듣는 사람들은, 쟤도 입에 풀칠하려고 그저 그러려니 하는 개소리로 여기고 재해석을 해서 받아들였다. 그땐 그랬다.

그런데 그 와중에 겨우 10대 소년이 목숨을 걸고 저렇게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진실을 있는 그대로 까발렸다니 정말 타의 귀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춘천에 김유정 역이 있고 안산에 상록수 역이 있는 것처럼 주 재년 열사는 여수가 자랑하는 위인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주 열사에 대해 더 관심 있으신 분은 오마이뉴스 기사를 참고하라.

Posted by 사무엘

2012/05/11 08:28 2012/05/1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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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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