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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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저지른 만행 중에서 물자나 노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한 것, 사람을 차별 대우한 것, 독립 운동을 탄압한 것 자체는 아무래도 식민 통치를 하고 식민지에서 뽕을 뽑으려는 주체로서 당연히 할 만한 짓을 한 것이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생학과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그 시절에 일제만의 독보적인 악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조선에서의 양반 쌍놈 차별이라든가 기존 탐관오리들의 악행도 같이 비교한다면 상대적인 수위가 더욱 낮아진다.

그 반면,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 관련 뻘짓과 악행은 성격이 좀 다르며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1) 일반적인 차별과 착취, 그리고 (2) 전쟁 준비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제가 특별히 큰 죄악을 저지른 것, 정당하지 않은 명분으로 조선 민간인을 싹 학살한 만행을 추려내면 제암리 학살이라든가 관동 대지진 학살 정도가 남는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안부보다도 관동 대지진 학살이 죄질이 더 나쁘다고 본다.

뭐, 일제도 한 마을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싸이코패스마냥 몰살시키고 마을을 지도에서 지워 버린 건 아니었다.
3· 1 운동 만세 시위를 진압하던 헌병인가 누군가 한두 명이 성난 군중에게 구타 당해 죽었다. 그러자 일제는 범인이 저 마을 사람 중에 있다는 명목으로 보복을 저렇게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처음엔 태극기만 들고 평화롭게 함성 지르며 행진하던 시위대가 격분· 흥분한 건 일본 헌병들이 실탄을 발사하고 피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유 관순 같은 시위대 리더들이 우리까지 폭력으로 나서면 안 된다고.. 그랬다가는 더 큰 보복을 당하고 만세 시위가 더 큰 참극으로 바뀐다고 군중을 말렸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처음에 일부 헌병 주재소가 박살나고 유치장 수용자들이 풀려나긴 했지만, 일본 쪽의 추가 지원 병력이 도착한 뒤부터는 시위대는 공중분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헌병들도 흥분해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마을 집까지 불지르게 되었다.

이때는 오늘날 민주 국가의 경찰처럼 폴리스라인 치고 공포탄 경고 사격부터 몇 발 한 뒤에 암염탄이니 테이저건이니 발사하는 신사적인 매뉴얼이 없었다. 일제 저놈의 입장에서도 남의 나라 식민 통치라는 건 처음 해 보고, 반항하는 애들에 대해서는 그냥 닥치고 총칼로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여서 제압한다는 매뉴얼밖에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조차도 해방 이후에 4 19 같은 시위를 진압할 때 잘 알다시피 경찰이 대놓고 시위대에게 총질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보고 배우고 행한 관행이 그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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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제암리 학살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석 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가 제암리 학살 현장의 참상을 촬영하고 세계에 타전해 줬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 하나만 달랑 믿고 무슨 "꿈은 이루어진다"마냥 "대한 독립 만세"를 열심히 외치면 진짜 일제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정한 현실에 비춰 본다면야 3· 1 운동은 그냥 숱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만 야기한 순진해 빠진 망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희생을 치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다른 민족이며 일제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하나는 세계에 확실하게 전하고 일제의 입장을 굉장히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술의 패배 대신 전략의 승리를 얻은 건지..?

강대국이 식민 통치를 하는 것 자체는 합법이고 관행이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당신 일본은 식민지를 얼마나 개판으로 관리했으면 10년을 못 채우고 저런 대규모 항쟁이 전국에서 벌어졌냐? 그리고 그걸 또 그 따구 방식으로 겨우 진압했냐?"라는 질타가 들어왔을 정도였다. 그러니 조선 총독도 본토로부터 당연히 내리갈굼을 먹었다. -_-;;

그래도 3· 1 운동 같은 발악이 있었던 덕분인지 일본 내부에도 조선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소수의 일본인이 생겨났으며,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자국의 만행을 사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거 마치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으로 귀순한 왜군 장수를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최근에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탄 건 2년 전, 2019년 2월경이다.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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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

"주여, 식민 통치 시절 일본 관헌들에 의해 가장 험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 제암 교회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했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최악의 한일 관계가 호전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습니다. (저희 사죄는) 작은 일이지만 주께서 저희를 사용해 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아멘."


우와, 읽는 내가 눈물이 나려 한다. (반어법이 아님!)
저 사람들이 다른 사회· 정치 쪽으로 다른 이상한 운동에 연루돼 있지 않고, 신학 노선이 그리 이상한 곳도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난 저 사죄가 진심 레알임을 인정한다.

정치인들의 정식 사죄??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외교적으로는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의 까임권을 다 써 버린 지 오래다. 그걸 아직도 우려먹는 게 비정상이고, 외교 신뢰를 깎아먹는 바보짓이다. (이제 더 논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퉁쳤잖아! 그런데 이거 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달라지니..)

정치인이 아니면 민간에서라도.. 저렇게 자기 나라 참전 때문에 남북 분단을 영구히 고착시켜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대륙 사람이나 조선족이 어디 있나? 비열한 전쟁과 테러 공작에 대해서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고 화해하고 싶어 하는 동족이 이북에 어디 있긴 하냐?
이러니 내가 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쁘다고 논리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주장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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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대표 기도를 한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라는 목사는 나이가 이미 90을 넘은 고령인데..
행적이 정말 엄청난 분이더라. 제암리 학살에 대한 사죄와 추모를 50년 이상 전부터, 1965년 한일 수교가 최초로 이뤄졌던 시절부터 일평생을 바쳐 해 왔다!
1969년 4월 15일, 인류가 아직 달에도 가기 전이었던 시절의 중앙일보 보도를 보자. (☞ 링크)

오야마 이마히도(미산금인).. 저 사람 맞다. 령을 금이라고 표기한 건 종이 신문 OCR의 한자 판독 오류일 테고..
그는 진작부터 하나님께 나아오기 전에 니 형제와 화해부터 먼저 하라(마 5:23-24)는 말씀으로부터 깊은 부담을 느꼈고, 60년대부터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기억하기 전에 제암리부터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 링크)

"제암 교회 방화 사건 속죄 실행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자국에서 성금을 1천만 원(50년 전 물가.. 책 한 권 가격이 백원대 단위이던 시절)을 모아서.. 제암리 교회를 재건하고 주민 의료 진료소까지 만들려고 했다...;;

감리교 교단에서는 이를 환영하고 동의했으나(오리지널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음).. 문제는 민심이었다.
제암리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왜놈들의 더러운 돈으로 교회를 세우는 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다. 죽어도 결사 반대!!" 이렇게 나오면서 성금 따위 한 푼도 안 받으려 했으며, 오야마 씨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반공과 반일이 가히 하늘을 찌를 기세였던 시절이다. 일가족이 몰살당했던 유족들의 저 까칠한 반응에 대해서도 후손인 우리 세대가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야마 목사는 저런 냉대조차도 담담히 감내하면서 몇십 년을 한결같이.. 2019년까지도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래 왔던 것이다. 한국, 일본 모두로부터 그다지 지지나 환영받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 정도면 대인배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하고.. 예수쟁이로서 좀 거시기한 표현이긴 하지만.. 가히 보살 급이지 않은가..??
이 뿐만이 아니다. 쟤들은 무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의사자 이 수현 씨를 아직도 기억하면서 매년 추모식을 연다.

JR 서일본(☞ 링크)은 2005년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에 대한 사죄와 반성 문구를 자사 홈페이지에다가 15년째.. 지금까지도 사실상 영구 박제 수준으로 걸어 놓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일본인의 근성에 참으로 놀라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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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마히도 목사도 신학을 한 구체적인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서 꼭 기억할 만한 양심적이고 훌륭한 일본인이라 하겠다. 얼마 안 있으면 소천해서 근황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제암리 학살과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꺼내고 글을 맺겠다.
미국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20년 전 옛날 영화 '패트리어트'에서는 영국군 레드 코트들을 개 싸이코 악마 병신으로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오마주 한 듯한 장면이 들어갔다.
니들이 식민지군 반역자들을 숨기고 있다는 죄목으로 주민들을 예배당 안에 한데 모아 놓고 문을 못질 하고 건물을 불지른 것.

하지만 영국군이 그런 잔학한 짓까지 실제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이 장면에서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제암리 학살조차도 여자, 아이들까지 다 예배당에다 가두고 문에 못질을 한 건 아니었다고 사료가 정정되고 있다. 키가 일정 수준 이상인 15세 이상 남자만 죽였다고.. 뭐 그것도 비무장 양민에 대한 반인륜적인 학살인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때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어떤 여인이 "제발 우리 아이만은 살려 주오"라고 담요에 둘러싸인 아기를 밖으로 내밀었는데 헌병들이 칼질을 했던가 총질을 했던가.. 그런 얘기까지 전해지는데.. 그것도 일단은 현실성을 의심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1/04/24 08:35 2021/04/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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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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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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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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