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탐험 -- 下

아문센이 선택한 경로는 스콧이 선택한 경로보다 남극점에 96km 정도, 즉 서울-천안 정도의 거리만치 더 가까운 경로였지만,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해서 가는 것이었다. 스콧의 경로는 선배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이 갔던 경로와 동일했다. 거기에다 아문센은 스콧보다 출발도 열흘 정도 더 일찍 했다.
아문센은 1등에 대한 압박 때문에 더 일찍 출발하려 시도를 했지만 역시 맹추위와 준비 미숙 때문에 포기하고 되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잖아도 아문센은 북극점을 먼저 정복하려 했는데 선두를 미국인에게 빼앗겨서 조바심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섀클턴은 스콧보다 먼저 남극 탐험을 갔지만, 준비 미숙과 물자로 부족으로 인한 실패를 인정하고 북극점을 약 150km 정도 앞둔 지점에서 미련 없이 진행을 포기하고 되돌아온 사람이다. 그 대신 모든 대원들이 생환하는 데 성공했다.

아문센은 남극점을 빨리 찍고 돌아온다는 그 목표에만 집중하여 대원들도 전부 항해 측량술을 알고 스키를 능숙하게 탈 줄 알며 혹한 환경에서의 생존 능력이 뛰어난 베테랑들로 뽑았다. 그러나 스콧은 겸사겸사 학술 탐사에도 큰 비중을 둬서 대원 중엔 과학자들도 있었다. 군인보다는 민간인을 선호했던 셈. 스콧은 그 힘든 와중에도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남극에서 채취한 광물을 16kg치나 갖고 보관하고 있었다.

아문센은 북극 원주민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은 대로 남극에 갈 때도 물이 스며들지 않는 두꺼운 가죽옷을 입었고, 짐을 싣는 썰매는 개들을 이용해 운반했다. 현지에서도 수시로 바다표범들을 사냥해서 식량을 비축했고, 탐험 중에도 효용이 떨어진다 싶으면 가차없이 개들을 잡아먹고 심지어 잡은 개고기를 다른 개에게 사료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스콧은 원주민들이나 입는 가죽옷을 저속하다고 거부하고 개고기도 안 먹었으며, 현지에서의 사냥 역시 할 생각을 않았다. 개나 말이 죽으면 잡아먹기는커녕 묻어서 장례를 치러 줬을 정도이니! 모든 물자는 대영제국에서 조달하는 것만으로 충당하려 했던가 보다. 그러나 영국제 모직물 코트는 옷이 물에 젖고 얼면서 ‘망했어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개 대신 조랑말과 스노우모빌(설상차)을 활용했는데, 말은 평범한 환경에서야 개보다 먹는 양에 비해 큰 수송력을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별도의 사료를 챙겨 가야 하며 개들보다 추위에 훨씬 취약했고 잘못해서 크레바스에 빠지기라도 하면 답이 없었다. 스노우모빌은 매서운 추위와 험악한 지형에서 무용지물로 전락했으며, 후원사로부터 지원받은 막대한 양의 통조림도 얼어서 안 따지거나 심지어 터지기 일쑤였다.

영국이 자랑하던 자본력과 당대의 과학 기술은 남극에서만은 그들이 한낱 피지배민 루저로 치부하던 원주민들의 생활 노하우를 앞설 수 없었다.

아문센은 1911년 10월 20일부터 그 해 12월 14일까지 55일 동안 거의 13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한 끝에 남극점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매일 23~24km씩 진행한 셈. 남극점 주변엔 그 어떤 인간의 흔적도 없었으니 그들이 1등을 한 게 확실했다.

아문센은 영국인들이 한 근성을 하기 때문에 스콧 팀도 아마 며칠 안으로 남극점에 곧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콧 팀이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4일이나 지난 이듬해 1월 17일이었다. 출발 시기가 열흘이 차이가 나고 거리 차이가 100km 정도 났으니 두 주~보름 정도의 간극은 자연스럽지만 한 달이 넘게 차이가 났다는 건 스콧 팀이 시스템적인 비효율로 인해 진행도 더뎠음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하루 전인 16일부터 무수한 개들과 썰매 자국을 발견했다. 그리고 남극점에 다다르니 거기엔 역시나 노르웨이 깃발과 함께 천막이 만들어져 있었고, 약간의 물자와 쪽지가 적혀 있었다. 쪽지에 적힌 글은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고 한다.

“존경하는 스콧 대장님, 우리가 먼저 남극점에 도착한 듯합니다. 만약 우리가 살아서 귀환하지 못한다면 대장님께서 이 쪽지를 본국으로 전달해서 우리에 대한 증거로 삼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식료품과 털옷을 좀 남겨 놓고 가니, 필요하면 부담 갖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대장님의 무사 귀환을 빕니다. 아문센 올림”


아문센은 라이벌을 배려해서 정말 정중하고 대인배스러운 행동을 한 것이었지만, 이 문구는 스콧에게는 가히 자존심을 건드리고 비수를 꽂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스콧 팀은 물자가 부족해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아문센이 남긴 보급 물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것은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아문센 팀은 1월 25일에 자기네 베이스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다. 갔던 길의 역순으로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었고, 귀환이 42일이 걸렸으니 55일이 걸린 출발보다 기간이 두 주 정도 더 단축됐다.

그러나 개도, 말도, 설상차도 없이 터덜터덜 허탈하게 귀환하던 스콧 팀에게는 이제부터 재앙이 시작되었다. 귀환을 시작한 지 한 달이 경과한 2월 17일인데 이들은 거의 반밖에 진행을 못 했다. 그리고 이때 팀원 중 지질학자인 에드가 에반스가 가장 먼저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미 몇 번 추락 사고를 당해서 뇌진탕과 폐렴 증세로 인해 건강이 몹시 안 좋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경과하여 3월 17일이 되었다. 귀환 60일째이고 전체 경로의 70% 정도는 완주한 시점이었다. 대원 중 로렌스 오츠는 발에 심한 동상을 입어서 이미 괴저가 발생하고 거의 걸을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있었다. 그는 대원들이 자신을 부축하고 자신과 보조를 맞추느라 귀환이 지체되고 있는 걸 알았으며, 제발 자기를 버리고 먼저 가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스콧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에 오츠는 그 날 저녁, “대장님, 밖에 좀 나갔다가 오겠습니다”란 말을 남기고는 불편한 발을 이끌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캠프 밖으로 절뚝거리며 나갔고, 그 길로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는 시신조차도 영영 발견되지 않았다. (눈보라가 얼마나 지독했으면, 눈에 찍힌 발자국조차 이내 사라졌던가 보다.) 스콧은 오츠가 일부러 죽음을 택했다는 걸 눈치 채고, 그가 영국 신사다운 최후를 맞이했다고 슬퍼하는 한편으로 그를 칭송했다.

그러나 이런 오츠의 살신성인도 나머지 세 명을 궁극적으로 살리지는 못했다. 살인적인 악천후 때문에 3월 19일자 캠프에서 스콧 일행은 더 나아가질 못하고 1주일이 넘게 고립되었다. 베이스 캠프까지는 약 200km쯤 남았기 때문에(이미 1000km를 넘게 이동했고, 다 와 감) 저 기간 동안 조금만 더 분발했으면 근처의 보급 기지에도 도착했을 것이고, 베이스 캠프에까지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은 충분했을 터이나 그들은 그럴 수 없었다.

남극에 무슨 생각으로 물을 끓여야 하는 번거로운 홍차를 가져갔는지 모르겠다. 식료품과 연료는 이미 다 떨어졌고 홍차는 생잎을 뜯어먹어야 했다. 그러다가 3월 29일, 나머지 대원인 에드워드 윌슨과 헨리 바우어즈가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어둠, 절망으로 인한 기력 소진 때문에 목숨을 잃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탐험대장인 스콧도 같은 캠프 안에서 사망했다. 그의 일기장에 죽은 두 대원에 대한 언급도 있기 때문에 스콧이 가장 나중에 죽은 것으로 여겨진다.

익사나 추락사처럼 단번에 훅 간 게 아니라 마치 성냥팔이 소녀처럼 굉장히 처절하고 비참하게 죽은 셈이다. 스콧 일행의 시신은 그로부터 무려 8개월 뒤에 남극에 여름이 다시 찾아왔을 때 미국의 탐사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자, 다음 그림은 아문센(빨간색)과 스콧(초록색)의 남극 탐험 경로를 정리한 것이다. (출처: 영문 위키백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국에서는 영국 신사의 기품을 지키면서 남극에서 장렬히 산화한 스콧을 애국자와 영웅으로 열렬히 치켜세우고 떠받드는 한편으로, 어쨌든 1등을 해 버린 아문센을 헐뜯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때는 아예 대놓고 역사를 왜곡하여 스콧이 먼저 남극점에 도착했다고 가르치기까지 하다가, 국제 사회로부터의 조롱과 비웃음을 한몸에 받고서야 슬쩍 시정했다.

영국이 이런 데서 은근히 찌질한 짓도 좀 했다. 영국인 중에서 양심껏 소신껏 아문센을 지지하고 그의 업적을 인정한 사람은 스콧의 롤모델 탐험가이던 섀클턴 정도가 고작이었다. 어니스트 섀클턴은 이 글에서는 많이 다루지 않지만, 아폴로 13호 같은 ‘성공적인 실패’를 기적적으로 이룩한 덕분에 이 양반 역시 아문센만큼이나 전설이 아니라 레전드급인 위대한 탐험가로 역사에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 보기 바란다.

콩진호, 콩라인-_- 같은 예외를 빼면, 세상 역사에서 2등은 정말 너무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기억에 남지 못하는 게 통념이다. 허나, 남극에서만큼은 영국의 저런 집요한 로비로 인해 각종 시설물에 꼭 ‘스콧-아문센’ 브랜드가 심심찮게 남아 있다.

남극의 정복자 아문센은 거의 60년 뒤에 달에 갔다 온 닐 암스트롱만큼이나 세계의 영웅으로 등극하였고 곳곳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노르웨이 국내에서야 물어 보면 잔소리. 지금 한국으로 치면 김 연아, 안 철수 급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듣보잡 빈곤국이던 노르웨이의 위상을 그만치 끌어올린 사람이 역사상 누가 있었겠는가?

아문센은 교통 덕후여서 이 탐사 후에도 활발히 탐험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는 항공기 기술이 개발되던 시기인지라 남극을 아예 비행선으로 횡단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8년에 비행선 사고로 인해 행방불명되는 걸로 최후를 맞이했다.

훗날 냉전 시절에 미국과 소련이 우주 개발 경쟁을 할 때도 인공위성을 먼저 띄우고 달에 사람을 먼저 보내려고 기싸움이 엄청 벌어지긴 했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전적으로 자본력과 기술에 의해 승패가 기울었으며, 다행히 우주 공간에서 실종되거나 죽은 사람도 없다. 또한, 소련은 자기네 연구 과정을 워낙 폐쇄적으로 공개를 잘 안 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래서 아문센과 스콧에 필적하는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없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11 19:39 2012/06/1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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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탐험 -- 上

인류 역사상 인간이 지구 밖으로 제일 멀리 나간 여행은 1970년의 아폴로 13호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세 명의 승무원이 모두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예상치 못한 폭발 때문에 계획이 틀어진 후 승무원과 관제 센터 직원들은 가히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으며, 특히 승무원들은 갈증과 추위에 떨면서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은 8848m(현재는 더 높아져서 8850이라고도 하는데)의 높이를 자랑하는 에베레스트 산이며,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등반 후 생환에 성공한 것은 1953년의 에드먼드 힐과 텐징 노르게이의 공동 등반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산들은 높아 봤자 대류권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으며, 대류권에서는 고도가 1km 상승할수록 온도는 대략 6.4도 정도 떨어진다. 그래서 이런 높은 산들은 일년 내내 기온이 영하이고 눈이 녹지 않는 만년설 지대이다.
또한 해발 고도가 5천 m 정도 되면 기압도 해수면의 절반 정도로 떨어지고,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 무렵에서는 아예 1/3기압이 된다. 물은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에 밥을 지어도 쌀이 잘 익지 않으며, 산소도 덩덜아 부족하기 때문에 비숙련자는 조금 걷기만 해도 지표면에서 100미터 전력질주를 한 것처럼 헉헉 숨이 차게 된다고 한다.

에베레스트 산 정도면 지형이 그렇게 험하지 않으며(특히 이웃의 콩라인 K2에 비해서) 인지도도 압도적이고, 덕분에 등산로도 개척될 대로 개척되어 있어서 찾는 사람이 연간 수백여 명에 달한다. 그래서 인근의 네팔은 등산료와 관광 수입을 톡톡히 챙기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잘 알다시피 심지어 산소통 없이 등반한 사람까지 나왔다. 그러나 세계의 지붕인 이런 산들은 오늘날에도 만만한 곳이 아니어서 날씨가 험악할 때는 입산할 수 없으며, 해마다 최소한 국내의 철길 건널목 사망자 정도만치는 산에 오르다 죽는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한편,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필리핀의 근처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 중에서도 더욱 아래에 11034m의 깊이를 자랑하는 비티아즈 해연이다. 1957년에 이곳을 발견한 구소련의 탐사선 비티아즈 호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탐사선이 그렇다고 해연의 밑바닥까지 다 내려가 본 건 아니고, 일정 수준 이상의 깊이부터는 그냥 초음파만으로 깊이를 측정한 거라고. 실제로 거기 밑바닥까지 내려간 건 1960년에 미국에서 트리에스테-II 호가 해냈다.

일반 비행기가 공기 때문에 성층권도 못 벗어나고 한없이 높게 뜰 수는 없듯, 일반적인 잠수함들 역시 의외로 깊게 못 들어간다. 겨우 대륙붕 정도의 깊이밖에 못 들어가고 최첨단 핵잠수함도 500~700m 정도의 수심이 한계라고 한다. 군사 목적으로도 더 깊게는 들어갈 필요도 없고, 어차피 그 깊이 안에서 더 오래 머무르는 것만이 목적이니까 말이다. 더 깊게 들어가려면 그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심해 잠수정을 써야 한다.

1만 미터 정도의 수심에서 물체가 받는 압력은 무려 1천 기압. 1㎠당 8톤의 힘이 가해져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살인적인 압력이다. 수심이 10미터 깊어질 때마다 대략 1기압이 증가하며(참고로 금성의 표면의 대기압이 90~95기압. 덜덜~) 덩달아 빛도 적어져서 어두워진다. 그래서 어느 수심과 압력 이상부터는 그야말로 암흑천지가 된다. 태양열이 닿지 않으니 수온 역시 영하급이다.

심해 잠수정은 실용성은 포기한 채 최대한 둥글고 작고 단단하게 만들어졌고, 트리에스테 호는 무거운 추를 잡고 가라앉은 뒤, 그 추를 바다에 버리고 다시 떠 올라오는 방법을 썼는데, 그때는 기술상의 한계로 20분 남짓밖에 못 머무르고 다시 올라와야 했다. 그러다가 타이타닉 호의 제작자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거의 반세기 만에 비티아즈는 아니고 챌린저 해연이라고 만만찮게 깊은 밑바닥을 2012년 지난 3월 말에 탐사한 바 있다.

우주나 심해 탐사는 아무래도 전적으로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산 등정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극소수의 연구원이 최첨단 기계에 탑승해서 탐험하는 형태가 아니라 목적지를 직접 발로 걸으면서 탐험하며, 물자를 보급하는 보조 staff의 숫자도 아주 많다. 마치 영화 한 편이 배우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이 말이다.

오늘날은 마음만 먹으면 항공기로 금방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산을 오르냐는 질문은, 이건 마치 상대방을 쓰러뜨리려면 권총을 쓰면 되는데 뭣 하러 무술을 연마하냐 하는 식의 우문우답이 될 듯하다.

지구에 저런 높은 산 말고 또 남아 있는 혹독한 미지의 환경으로는 사막과 극지방이 있다. 이 중 사막은 제끼고, 지구의 자전을 느낄 수 없는 두 꼭지점인 북극점과 남극점은 18세기~19세기 초 사이에 탐험계의 성배로 여겨져 왔다. 그 당시 인류 최초로 북극점을 정ㅋ벅ㅋ한 사람은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로 알려져 있었다(1909년 4월. 훗날 그건 오류로 판명되긴 했지만). 그리고 남극점을 정복한 사람은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노르웨이의 로알 아문센이다(1911년 12월).

산이나 해저나 우주 같은 다른 곳에 비해서는 비교적 일찍 정복된 영역이지만, 두 극점 중에서 남극점에는 다른 미지의 영역에는 없는 특이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때는 노르웨이의 아문센 팀과 영국의 로버트 스콧 팀이 남극점을 먼저 찍으려고 경쟁 중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유럽의 듣보잡 빈민국에 불과했던 노르웨이가 물자가 월등히 더 풍부했던 대영제국을 누르고 압도적인 1등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문센 팀은 1등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와서(개들만 약 40마리쯤 죽었음;;) 국제적인 영웅이 된 반면, 스콧 팀은 그렇잖아도 1등 자리를 빼앗기고 우울하게 돌아오는 길에 며칠째 혹독한 눈보라 때문에 조난을 당해서 스콧 포함 5명의 팀원들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 모조리 목숨을 잃고 말았다.

두 팀의 결말이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달라진 것에는 단순히 운(날씨)보다 훨씬 더한 차이가 존재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아문센은 원주민들의 노하우를 받아들여 극도로 최적화와 현지화를 잘 해 간데 반해 스콧은 남극 탐험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했으며 쓸데없는 곳에서 괜히 명분과 품위만 따지다가 참혹한 낭패를 당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사람들 얘기를 좀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6/09 19:25 2012/06/09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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