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컴퓨터쟁이 코더에게는 '통역(사)'라고 하면 컴파일러의 반의어인 인터프리터가 바로 떠오르는 동시에, 니콜 키드먼이 통역사로 연기하는 10년 전쯤의 영화 인터프리터도 생각난다.
성경에서는 단순히 풀이/해석 말고 진짜 외국어 통역을 뜻하는 interpret은 창세기에서 이집트 총리가 된 요셉과 자기 형들 사이의 대화, 그리고 저 멀리 신약 성경에서.. 통역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외국어 방언 쓰지 말고 “그 입 다물라”라고 권면한 것 정도가 등장한다.
아울러 우리 교회의 담임목사님이 통번역 대학원 출신의 스페인어 박사급 전문가이시다. 그래서 왕년에 대학 강단에 서기도 하고 국가적으로 꽤나 높으신 분들 행사의 통역에 동원된 경력이 있으며, 관련 국가고시 문제 출제에도 참여한 적이 있으시다.
통역은.. 문자 언어를 비교적 충분한 시간 동안 고퀄리티로 옮기는 '번역'과는 다소 다른 개념이다. 오프라인 렌더링과 실시간 렌더링의 차이랄까..
그런데 통역도 방식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화자 먼저 한 문장을 말하고서 쉬는 동안 통역이 말하는 '순차통역'은 그나마 양반이다. 그 반면, 듣는 사람은 헤드폰을 끼고 있고 화자는 쉬지 않고 계속 말하는 걸 통역사가 딴 장소에서 부랴부랴 옮기는 '동시통역'이 있다.
당연히 동시통역이 훨씬 더 정신없고 어려우며 보수가 더 높다.
게다가 순차인 경우, 화자는 바로 옆에 있는 통역사를 의식해서 더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하는 편이며, 통역사 역시 잘 못 알아들으면 화자에게 “뭐라고요?” 이럴 기회라도 있는 반면..
동시통역의 경우 화자와 통역사는 격리되어 있으며, 화자는 통역사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진짜 자비심 없이 자기 할 말만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영화 인터프리터에 나오는 것처럼 UN 회의를 동시통역하는 정도이면.. 난이도와 중요도가 정말 톱 중의 톱이며, 그야말로 최고의 정예 통역사가 최고의 보수를 받으며 일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그 대신, 오역 때문에 무슨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이 틀어지기라도 했다가는 사고를 낸 통역사는 교도소에 갈 각오도 해야 할 것이고.
단순 관광 가이드 통역 수준이 아니라, 각종 전문 분야 설교나 연설의 동시통역을 하려면 양 외국어 자체만 기똥차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며, 통역 이론과 방법론에 대한 추가적인 학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군대도 미군과의 의존성이 높다는 특성상 어학병이라는 보직이 존재한다. 물론, 날고 기는 영어 귀재들에 비해 TO는 바늘 구멍 수준이지만 말이다. 카투사야 어느 정도 이상의 공인 영어 점수만 받고 나면 그 뒤부터는 추첨이지만, 어학병이 되려면 정말로 토익 정도는 만점에 가깝게 나와야 하며, 겨우 본토에서 머리로만 주입한 수준을 초월하는 영어 실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통역을 해도 순차이지, 일개 군인이 설마 동시통역까지 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박 근혜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영어로 연설을 할 때 방송사들은 한국인이 구사한 영어를 동시통역해서 연설 내용을 생방송으로 내보냈었다.
아, 그나저나 먼 옛날엔 국내 방송사에서 아침 7시 뉴스를 하기 전에 '세계 뉴스'라고 해서 CNN, NHK 등 주요 외신의 하이라이트 한 토막을 자막 내지 더빙으로 내보낸 적이 있었다. 생방송은 아닐 테니 동시통역까지는 아니었을 테고. 인터넷으로 어중이떠중이 다 세계 뉴스에 접근이 가능해진 오늘날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아련한 추억이다.
어쨌거나 외국어 잘하는 사람이 참 부럽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