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각각 무어라 말할까?
선민인 유대인에 대해서도 죄를 짓고 계약을 위반했을 때는 역사적으로 정말 많이 심판하고 정말 처참한 꼴을 많이 허락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얘들은 완전히 뿌리뽑히고 멸망하지는 않고, 잡초처럼 처절하고 끈질기게 살아남고 회복되고 최후의 승자가 될 거라는 보장만 해 주셨을 뿐이다.
한편, 이방인에 대해서는 가장 대표적으로 부정적으로 얘기한 예는 가나안 민족과 소돔이다. 전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짐승과 어린아이까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싹 죽이라고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셨고 앞뒤 문맥을 모르는 개독안티들이 그걸 트집을 잡을 정도이다. 후자 소돔은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하지만 그런 부분을 제외하면 이방인에 대해서도 의외로 긍정적으로 나온 게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비록 유대인 같은 명시적인 율법을 받지 않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들어서 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얘들도 기본적으로 알 거 다 알았다. 살인이나 간음죄를 저지르면 안 되고, 그랬다가는 천벌과 인과응보를 받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구약 시대에 이방인들은 어떻게 구원받았나?"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 아비멜렉(창 20:4-5)은 간음이 죄라는 것을 뼛속까지 숙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다. 26장에 나오는 다른 아비멜렉도 마찬가지.
- 이방인이던 아하수에로 왕의 측근들은 남편과 아내와 가정의 영적 질서에 대해서 우리처럼 바울 서신을 보지 않고도 잘 알고 있었다(에 1:17,18).
- 요나와 같은 배를 탔던 이방인들은 살인을 저질렀다가는 자신들이 큰일 난다는 관념이 박혀 있었다(욘 1:14). 요나를 바다에 던지기 전에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지를 보라.
- 바울을 맞이했던 미개한 백성들도 살인을 저지르면 반드시 천벌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행 28:4).
2.
느부갓네살 왕은 유대인 포함 온갖 민족들을 심판한 정복자였으며 어찌 보면 유례를 찾기 힘든 개막장 폭군이었다. 역사상 "꿈 내용이 생각은 안 나는데 어쨌든 니들이 내 기억을 복원해서 해석까지 안 해 주면 몽땅 뒈질 줄 알아라" 이런 짓거리를 한 군주가 있었던가? -_-;;
그런데 그런 막장인 것치고는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도 많이 나오고 성경에서의 묘사가 꽤 호탕하고 긍정적이다. 이방인 주제에 하나님께서 "나의 종"(렘 43:10)이라고 불러 주셨다.
게다가 미쳐서 소처럼 됐다가도 다시 왕위를 회복까지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느부갓네살은 출애굽기의 파라오처럼 성경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예표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 개인은 궁극적으로 아마 구원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참 독특한 인물이다.
3.
- 에스더: 법을 지키는 것, 예전 법을 초월하는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에 대한 개념 차이를 보여 준다. 권위의 영적 의미에 대한 좋은 조명을 준다.
- 요나: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존중하는 한편으로, 이를 초월한 구원 이념을 가르친다.
4.
- 미래에 대해서: 이 구절은 아직 성취된 예언이 아니라 더 멀리 재림 때가 돼서야 성취될 사건이다.
- 과거에 대해서: 이 구절은 노아의 홍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더 옛날 이전 세상 시점의 일이다.
생물학적인 남녀와 부모· 자녀 관계가 있기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부터 아버지와 아들 개념이 있었고, 남녀간의 사랑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이 존재했다.
그런 것처럼 지구의 자전으로 인한 24시간짜리 낮과 밤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전우주적인 빛이 있었고 빛과 어둠의 분리로 인한 낮과 밤이 있었다. 6일 창조 중 첫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은 넷째 날에 나오는 낮과 밤하고는 개념적으로 차이가 있다. 성경은 가시적인 만물과 비가시적인 영적 만물이 서로 나란히 대칭을 이룬다는 비례와 예표 원리를 줄곧 가르친다.
5.
성경에는 잘못 해석할 경우 의미와 뉘앙스가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는 지뢰밭이 몇 군데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용어부터 살펴보면, '누룩', '불 침례' 같은 건 긍정적인 심상이 절대로 아니다. 마 3과 눅 3에서 나오는 불 침례는 지옥에서 온몸이 불에 활활 타는 걸 얘기한다. 절대로 불 같은 성령의 권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아마 '불꽃'의 모양처럼 갈라진 혀(행 2:3)랑 헷갈린 것 같은데.. 성경의 묘사는 그게 전부이다. 좌우 문맥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그리고 크리스천 개인의 작지만 소중한 믿음, 희생, 헌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싶으면 '겨자씨' 내지 요 12:24에서 모티브를 따서 차라리 '밀알'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절하다. 그 반면 누룩은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존재이다. 누룩이 들어가서 온 빵이 부풀었다는 비유(마 13:33) 역시 교회의 기형적인 팽창과 부패와 변질을 얘기하는 것이지, 무슨 복음 전파나 하나님 나라 확장 같은 긍정적인 얘기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보아하니 '누룩 선교회'도 있다고 한다. 헐.. -_-;; IT 기업이 "버그 소프트웨어" 내지 "BSOD 시스템즈" 이렇게 상호를 지은 것과 비슷하다.
하긴, 똑같은 겨자도 마 17:20의 '겨자씨만 한 믿음'은 긍정적인 반면, 마 13:31-32에서 '겨자가 나무가 된 이야기'는 부정적인 묘사이니 이것도 참 절묘하다. 그건 누룩과 마찬가지로 변질과 부패를 가리킨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를 정면으로 거스른 현상이며, '공중의 새' 역시 성경적으로 심히 부정적인 심상이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계 18:2)을 떠올린다면 심상이 100% 동일하지는 않아도 얼추 맞게 연결된다.
이런 '누룩'과 동일 선상에서 하나 더 첨언하자면, '썩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썩음'(corruption)은 행 2:27, 행 13:34-37, 롬 1:23, 고전 15:42, 벧전 1:23 등 성경에서 일관되게 매우 부정적인 심상이며 크리스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 12:24와, 심지어 고전 15:36도 뿌려진 씨앗은 떨어져서 그냥 '죽는다고' 했지, 죽어서 굳이 썩는다고 얘기하지는 않았다! 크리스천은 단어를 선택할 때도 주의를 매우 기울여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살후 2:7의 막고 있는 자, 계 6:2의 흰 말 탄 자는 적그리스도이지 예수님 같은 좋은 쪽이 아니다. 다니엘서에도 이렇게 주객이 뒤바뀔 여지가 있는 예언이 나오는데 당장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난다.
변개된 성경들은 사 14:12에서 루시퍼의 정체를 감추고 아예 마귀에게 예수님의 칭호를 부여하거나(계 22:16), 혹은 예수님을 저렇게 심판 받는 나쁜놈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6.
성경에서 "어, 왜 이럴까?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잠시 생각을 좀 해야 하는 대목으로 본인은 다음 장면들을 꼽겠다.
- 히브리 산파의 거짓말(출 1:17-20)과 라합의 거짓말(수 2)
-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
- 일한 시간과 무관하게 같은 보수를 받은 포도원 일꾼 비유(마 20)
상반된 진술이 동시에 나오는 부분으로는
-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라 vs 대답하지 말라 (잠 26:4,5)
-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의사들에게 구했더라"(대하 16:12) vs "네 위장을 위해 약 처방을 하라"(딤전 5:23)
이것 말고 예가 더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문맥 분간을 잘하고 잘 "나눠야" 하는 대목들이다.
7.
성경에는 김대기스러운 '적절하게'가 바울 서신에서 두 번이나 나온다. (고전 6:12; 10:23)
그리고 성경에는 "A가 B와 대응하는데 하물며 C와 대응할 D는 어떻겠느냐?" 요런 비례식 논법이 신구약을 통틀어 즐겨 쓰인다 바울도 자주 사용했다. 대표적인 예는 "유대인들의 삽질과 실족만으로도 우리에게 이런 유익을 줬는데 하물며 쟤들이 잘되면 얼마나 복이 크겠는가?"(롬 11:12) 앞으로 성경을 읽을 때 요 표현을 눈여겨보시기 바란다.
8.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시 12:6)
하나님의 말씀의 순수함과 보존 약속에 대한 근거를 논할 때 KJV 신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구절이다. 순수함이 금속 가공에다 비유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인데, 여기서 은을 try하고 거듭 purify했다는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제련’일까 ‘재련’일까?
우리말에서 ㅐ와 ㅔ의 발음 구분이 문란해지면서 외래어 표기와(데미지/대미지?) 일부 고유어의 스펠링까지(결제/결재? 메다/매다?) 오락가락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제련/재련도 대표적인 예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시 12:6이 말하는 작업은 ‘제련’이다. 제련은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서 금속을 뽑아 내는 일을 말한다. 석유로 치면 원유를 분별 증류하여 휘발유, 경유, 등유 따위를 얻는 일이다.
그 반면 재련은 일단 주성분이 결정된 쇠붙이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또 시뻘겋게 달군 채로 두들기고 찬물에 확 담그는 작업을 말한다.
딱히 칼이나 낫 같은 물건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면, 일상적으로 제철소에서 하는 일, 특히 금속의 순도와 관계가 있는 일은 전부 ‘제련’이다. 재련의 용례는 거의 대부분이 제련의 잘못이다. 금속 냉병기를 아이템으로 다루는 국내 온라인 게임들은 이거 용어가 제대로 사용돼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시 12:6이 말하는 것처럼 제련도 반복 작업이 있을 수 있다. 또한 닥치고 용광로에서 다 녹여 버리는 제련과는 달리, 재련은 정말 말 그대로 두들기고 달구고 식히는 등 마치 사우나를 하는 것 같은 ‘연단/단련’의 느낌이 더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단련을 받은 뒤에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같은 구절에서는 재련을 연상하기가 더 쉽다.
그러나 여기서도 표현이 ‘강철같이 나오리라’가 아니라 ‘금같이 나오리라’이고, 불순물이 없는 pure gold/fine gold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일단은 재련이 아니라 제련을 말하는 것이 맞다. 성경에는 용광로도 지옥뿐만이 아니라 고난이나 연단의 의미가 있다. (잠 17:3, 렘 11:4 등)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