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이번엔 먼저 난센스 퀴즈 개드립부터 좀 시작하자. 노아(성경에 나오는)의 아내의 이름이 무엇일까?
정답은 잔 다르크.
저 이름은 잘 알다시피 '아르크의 잔/요안'이라는 뜻이며, Arc(아르크)는 ark(궤, 방주)와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아 제기랄....;;; 아무리 난센스라지만 그 병맛스러움은 이말년 서유기에서 나타태자가 시전했던 희대의 병맛 퀴즈,
궁예가 몰고 다니는 승용차의 이름은? 애꾸스
지금 인도는 몇 시일까? 인도네시아
귀가 불타면? 타이어. (이건 뭐 그... 거북선, 소방관, 포크레인, 활명수던가.. 그 초병맛 그림 퀴즈의 소재로 써도 되겠다 -_-;;;)
그리고 본격 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 롬멜 준장이 시전한 초썰렁 퀴즈
네덜란드에 있는 강력한 방어선은? 암스테르 '담'
이 전차가 왜 '3호 전차'일까? '3호선'이면 일산까지밖에 못 가니까.
영국의 수상은 왜 이름이 '처칠'일까? 부인이 일곱 명이어서
에 필적하는 것 같다. 썰렁하게 해서 죄송~~ ㅡ,.ㅡ;;
1.
성경에는 서로 다른 책 내지 다른 문맥에서 굉장히 놀라울 정도로 유사/동일한 표현이 존재하는 쌍(pair)이 있다. 예를 들어,
-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이야기는 아들을 낳고는 죽은 산모: 라헬(창 35:16-18), 그리고 이름도 안 나오는 엘리의 며느리 및 비느하스의 아내(삼상 4:19-21)
- 동성애자들의 "우리가 그들을 알리라" 드립: 소돔 (창 19:4-5), 그리고 베냐민 지파의 벨리알의 아들들(삿 19:21-22)
이것들은 비록 시기와 장소가 다르지만 심상은 서로 동일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without form and void는 창 1:2와 렘 4:23이 서로 동일하게 부정적인 심상이다. 시기가 각각 과거와 미래로 다를지라도 말이다.
또한, 창 1:28과 창 9:1의 replenish the earth 역시 "예전에 꽉 차 있다가 비게 된 땅을 다시 채우라"라는 동일한 심상이 존재한다고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2.
성경에서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니지만, 결국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로 seamless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서는 둘이 동일하다고 볼 수도 있는 개념의 쌍이 있다.
- 무교절과 유월절: 눅 22:1 vs 행 12:3-4. 유월절이 끝난 뒤에 곧바로 무교절이 이어지지만, 가끔은 단일한 명절 series로 취급되기도 한다.
- 지옥과 불못: 계 20:14. 궁극적으로는 지옥도 불못에 던져지긴 하지만 지옥에 있던 혼들이 다 그대로 불못으로도 가므로 둘은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영원을 보내게 되는 장소"라는 개념 하에서는 하나로 볼 수도 있다.
- 하늘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 마 19:23-24와 막 10:23-24. 두 왕국은 일면 다른 개념이긴 하지만, 가끔 성경에서 두 용어가 좀 구분 없이 섞여 쓰인 듯한 곳도 있다. 처음에는 구분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는데 유대인의 예수님 거부, 교회 태동, 초림과 재림 사이의 gap으로 인해 더 분명하게 다른 개념이 된 셈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는 절대로 건드리지 않으신다. 무슨 마인드 컨트롤 해서 로봇처럼 강제 조종을 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먹고 방향을 결정한 사람이 일단 나아가기 시작하면 거기에 '가속도'를 불어 넣기는 하신다. 마치 자동차의 파워스티어링처럼 일단 핸들을 살짝 돌리기 시작하면 작은 힘으로도 확 돌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단 삐딱서니 타고 반골 기질을 보인 파라오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만드셨으며, 기타 여러 악인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농락하셨다. 그분은 미혹의 영을 보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게 낚기도 하신다. (살후 2:11; 왕상 22)
그렇게 거짓을 믿게도 하실진대 반대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믿도록 우리가 가진 믿음이 아니라 '이 땅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믿었던 예수님의 믿음'을 선물로 주기도 하신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더욱 수긍이 간다. faith of Jesus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의 믿음인 것이다.
4.
우리는 무슨 분야에서든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삶의 질은 '지금'보다는 어떤 형태로든 당연히 더 나아진다. 단지, '남들만치'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ㅋㅋㅋ
내가 열심히 코딩을 하면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예전 버전보다 더 좋아지고, 한글 입력 기능의 범위가 더 확장되고 내가 자아성취와 정신건강에 증가한다는 건 지당한 이치이다. 단지 이거 만든다고 해서 반드시 무슨 부귀영화가 찾아온다는 보장이 없을 뿐이다. 음 이건 뭐 자가디스인가.. ㅎㅎ
이건 마치 성경 말씀처럼 들린다.
- 시험을 피할 길을 내서 너희가 능히 시험을 능히 감당 가능하게 해 주겠다고 말했지, 시험을 아예 없애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고전 10:13) 크리스천에게 구원의 영원한 보장만큼이나 확실하게 면제· 바이패스가 보장된 건 '그 대환란'뿐이다.
- 간구를 잘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안을 주겠다고 했지, 역경과 고난 자체를 없애고 당장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빌 4:7)
- 영적으로 복을 주신다고 했고 어찌 보면 크리스천들은 복을 이미 넘치도록 받았다(엡 1:3). 사랑도 받았다. 단지, 구약 시대처럼 당장 땅(부동산!)과 재물의 복을 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고 반대로, 예수쟁이들은 성경대로 살면 365일 24시간 내내 가시밭길뿐이고 오로지 시험과 고난과 박해밖에 없고 배 쫄쫄 굶는 거지가 된다는 얘기도 아니다(북한 같은 예외· 극단적인 곳이 아닌 한!). 하나님은 그렇게 야박하고 잔인한 분이 아니다. 물질적인 복은 그냥 케바케일 뿐이란 뜻임. 요 21:23에서 제자들의 미래 순교 여부가 그냥 랜덤 케바케였던 것처럼 말이다. 구원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고 덜 중요한 이런 후천적이고 환경적인 요인들이나 가변적인 것이다.
이래저래 겉을 남하고 비교하고 상대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사람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게 별로 없다. 비교를 굳이 하려면 "저 사람은 평소에 기도와 성경 읽기를 어떻게 하나?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이 무엇일까? 도대체 어떻게 저 상황에서 기쁨과 감사가 나올까?" 이런 걸 벤치마킹하고 자기에게 도입할 생각을 해야 한다.
5.
(사람을 채용할 때는) "또 그 사람의 '구글다움(googleyness)' 여부를 봅니다." (☞ 관련 기사)
여기서 KJV 신자로서 나의 직업병이 0.1초 만에 하나 발동되는데..
성경에서 우리말로 옮기기 난감한 대표적인 단어 중 하나인 godliness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것도 이와 방식으로 만들어진 단어이다.
정말 직관적으로 풀이하자면 '신스러운'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는, 하나님다운.. 정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한때 '경건'이라고 옮기곤 했는데 이건 단순 '독실, 엄숙' 같은 뜻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번역은 아니다. 게다가 반의어인 ungodliness로까지 가면.. 그래도 울며 겨자 먹기로 '불경건'을 쓸 수밖에.
한 가지 확실한 건, 구글 직원이라면 구글다워야 하는 것만큼이나
크리스천에게서는 지식과 행실, 머리와 심장에서 모두 하나님답고 하나님의 성품이 잘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종교적인 연기· 위선이나 정신줄 놓은 광신하고 분간이 안 돼서 오해와 편견이 무진장 많다는 게 문제일 뿐.
6.
로보캅...은 아니고 초대 교회 시절에 사도 요한의 제자라고 알려진 '폴리캅'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교회 중에 서마나 교회의 감독이었으며, 80대 중반의 나이로 AD 150~160년경에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다.
"지금이라도 예수 믿지 말고 황제에게 경배하고 제물을 바치면 당신의 나이를 감안해서라도 반역 행위를 없던 걸로 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예수님은 내 인생 80년 평생 동안 한 번도 나를 배반한 적이 없고 늘 신실하셨는데 내가 어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이오?"
그는 처음에는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방법으로 처형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화형으로 방식이 바뀌었다.
불태웠는데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지도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 한다. 결국은 칼과 창으로 난도질 당함으로써 순교했는데.. 전승에 따르면 폴리캅이 죽을 때 그의 몸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튀어나왔고, 피가 넘치면서 화형장에 붙어 있던 불을 꺼 버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차돈처럼 하얀 피가 나온 건 아니었고.
그 당시 군중들은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저 개독 예수쟁이 뒈져라!"라고 외치지 않았다. "저 무신론자 뒈져라!"라고 외쳤다! 눈앞에 있는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어떤 형상 성물도 없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개념을 이해를 못 한지라 크리스천들을 숫제 무신론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온갖 성물 형상들로 가득한 종교와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음이 틀림없다.
7.
유대교 신정국가이던 구약 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지구상의 그 어떤 민족· 부족도 하지 않는 이상한 종교 행위를 해야 했다.
누가 죄를 지었으면 지금 천주교에서 하는 것처럼 고해성사를 하고 죄를 지은 당사자가 자가속죄를 위해 무슨 고행이나 뺑이를 치는 게 아니라, 웬 뜬금없이 흠 없는 불쌍한 가축을 잔인하게 죽이고 피를 쏟고 시체를 불태워야 했다.
구약 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해설하는 화이트칼라 먹물 문돌이이기만 한 게 아니라, 반쯤은 동물 잡는 백정 같은 일을 하면서 고된 육체 노동도 해야 했다.
그러니 신체에 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런 직분을 맡을 수 없다고 모세오경에 기록된 게 있는데, 이걸 보고는 성경이 무슨 장애인을 차별하고 비하하네 이렇게 이상하게 트집잡는 개독안티도 있다. 별로 상대할 가치 없다.
죄라는 건 겨우 고행이나 얼차려로 대충 말소하거나 다른 어설픈 선행으로 퉁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피를 흘려야만 대속이 가능한 심각한 사항이며, 그래서 불쌍한 동물의 죽음이 야기되어야 하고.. 죄의 형벌을 받는 지옥이라는 게 저런 뜨거운 불이 가득한 고통의 장소라는 것을 유대인들은 매일 시청각으로 접하며 지냈다.
요즘 병원이나 제약 연구소의 뒤뜰을 보면 사람을 대신하여 임상실험에 동원됐다가 죽은 동물들을 기리는 위령탑이 있고 연구원들이 1년에 한 번쯤은 거기서 쥐나 토끼가 좋아하는 먹이를 얹어서 고사(?)도 지낸다.
그런 사고방식이라면 구약 성전 뒤뜰에서는 성전 직원(?)들이 1년에 몇 번이고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죽은 동물들의 고사를 지내 주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사고방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히브리서 9~10장은 죄사함을 위해서는 동물의 피만으로는 오히려 부족하다, 불완전하다는 말만 할 뿐, 동물을 불쌍히 여기는 박애주의(?) 따위와는 억만 리 떨어져 있다.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라.” (히 10:4)
끝으로, 동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상식 차원에서 이미 아는 분도 계실 텐데, 성경은 신구약 66권을 통틀어 고양이에 대한 언급이 전무하다. 쥐, 개, 여우 같은 주변 동물은 다 등장하는데도. 더구나 성경이 다루는 시기와 지역에 고양이는 분명히 존재했을 텐데 부정한 동물로라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무척 흥미로운 점이다.
8.
구약은 저렇고, 신약 기독교회의 역사에는 피흘린 순교자의 발자취가 있다.
교회가 그냥 세상 정부의 군대 같은 조직이거나 여느 시민 단체와 별 차이가 없었다면, 자기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의 영웅적인 행적을 그야말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정훈 교육 소재로 써먹어야 한다.
당장 한글 학회는 조선어 학회 사건에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조선어 학회 '수난'(그냥 사건이 아니라)이라고 부른다. 자기네 행사가 있을 때는 국민의례를 하고 나서 그때 고초를 겪은 국어학자들(특히 옥사한 이 윤재· 한 징 선생)에 대한 묵념을 추가적으로 한다.
그런 식이라면 교회 예배당엔 주 기철 목사 동상을 곳곳에 만들고 누구를 기리는 노래를 만들고, 매주 예배 때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묵념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기독교회의 현충일 같은 날도 좀 있어야 한다. 그나마 천주교가 이에 근접해서 각종 성인 성자들을 만들어 놓고 별걸 다 기념하긴 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짐승들의 공로와 마찬가지로 순교자들의 공로 역시, 그게 아무리 크다 해도 예수님의 공로보다 더 위대하다고 여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니 둘은 완전히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교자들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그 많은 순교자들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 다시 기쁘게 만나 볼 사람들이다. 그러니 애초에 영원히 못 볼 사람인양 추모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단순히 교훈과 도전을 얻고 예우를 하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우상화할 필요도 없다. 그들 역시 똑같은 인간이었고 우리 역시 이미 그들과 동급의 성도(saint. 성인 성자가 아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을 요약하자면 이렇게 된다.
- 구약 유대교: 죽임당한 동물 위령탑 없음
- 신약 기독교: 순교자 묵념 없음
아울러, 신약 시대에 교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의식 내지 규례는 딱 두 가지, (1) 침례와 (2) 주의 만찬이다. 둘 다 예수님의 재림 이전까지만 유효하며, '상징'일 뿐이지 혼의 구원하고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 에구, 서로 다른 글들을 한데 묶고 편집해서 올리는 것도 고역이다. -_-;;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