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 빌 보면서 든 생각들

이미 수 년 전부터 B급 병맛 명품 액션 영화인 <킬 빌>에 대해서 종종 언급하고 한두 마디 잡생각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서 아이템 몇 가지를 별도의 글로 더 늘어놓고자 한다.

1.
킬 빌 2부에는 베아트릭스 키도가 암염탄을 맞고 생매장을 당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관을 정권지르기로 뚫고 무덤을 탈출해 버린다.
누님은 완전 흙투성이가 된 몰골로 지상으로 나온다. 그리고는 근처의 어느 카페에 불쑥 들어가서 점원에게 물 한 잔 좀 달라고 부탁한다.

거기 점원은 혼자 커피 맛을 보면서 빈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서 뽀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다가오는 누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엥, 저게 뭐야?" 하며 표정이 굳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게.. <라이터를 켜라>에서, 허 봉구가 열차 옆문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본 식당칸 직원이 어리둥절해하는 것과 굉장히 유사한 장면 같다. 뭔가 음식 서빙을 하는 직원이 단역으로 잠시 출연하고, 시간대가 밤이고, 뭔가 위급한 상황인 주인공을 독대한다는 공통점이 있지 않은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역시 2부를 보면 왕년에 베아트릭스 키도가 위치가 노출되는 바람에 호텔 방에서 '카렌'이라는 다른 여성 킬러와 대치했던 장면이 나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부분에서 누님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Well, guess what, bitch?
I'm better than Annie Oakley. And I got you right in my sight.
"근데 말야.. 난 애니 오클리보다도 명사수이고 넌 이미 내 사정거리에 들어있어.
손만 까딱하면 곧바로 네년 이마에 납덩이가 박힐 거야. 그러니 곱게 내 말 들으라고.."


엥? 애니 오클리? 저 사람은 누구지? 그래서 찾아봤다.
그녀는 미국에서 거의 전설을 넘어 레전드 급이던 여성 총잡이(1860-1926)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지만 이 바닥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는지, 자기보다 나이 더 많고 경력 많은 남성 총잡이 라이벌들까지 모조리 쳐바르면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다. 길고 두툼한 치마 차림의 아가씨가 저 멀리 사람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동전을 총을 쏴서 명중시켰다.. 총기도 권총, 라이플, 샷건을 가리지 않았다.

하긴, 1800년대 후반이 딱 마침 백색화약과 탄피 같은 게 막 도입되어서 총기가 우리가 아는 형태로 발전한 그 시기였다.
애니 오클리보다도 총 잘 쏜다는 말은 박 태환보다 수영 더 잘하고 김 연아보다 얼음판 스케이트를 더 잘 탄다는 얘기와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옛날 사람인 관계로 스포츠 사격으로 가서 우리가 아는 그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거나 하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 수백 명을 장거리 저격해서 전공을 세운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리즈 시절이 세계 대전이나 남북 전쟁, 서부 개척 같은 격변의 시기를 묘하게 비껴 가서 그런가 보다. 그 놀라운 사격 실력이 주로 수렵 내지 서커스 묘기로나 선보여졌다는 게 아쉽다.

저분은 19세기 말에 북미 대륙에서 총 쏘며 살았으니 여행비둘기도 많이 잡았으려나 모르겠다.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을 정도로 많던 놈들이 1914년에 결국 멸종..)
저격수 '스나이퍼'라는 단어도.. 날아다니는 도도새를 쏴서 맞힐 정도로 총 잘 쏘는 사람, 즉 수렵에서 유래되긴 했다.

아무튼 킬 빌 덕분에 이런 역사 상식을 하나 주워 담았다. ^^
물론, 한국 사람이 애니 오클리가 누군지 알 리가 없으니, 한국어 자막은 당연히 영어 곧이곧대로 번역되지 않았다.
'블랙 맘바'조차도 생소하다고 그냥 코브라로 번역됐을 정도인걸..

3.
한편, 앞의 저 장면에서 상대편 암살자인 카렌 김을 연기한 배우(헬렌 김)은 한국계라고 한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성인 윤막순을 연기했던 한국계 배우 스텔라 최와 비슷한 캐스팅 같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국제시장에서 이산가족 상봉 씬을 보고 있으면.. 처음엔 통역사가 영어를 통역해 주는데, 상봉이 성공한 뒤부터는 영어가 갑자기 자막으로 동시 통역되어 나온다.
이건 실제 생방송에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처리이다. 하지만 울고불고 하는 장면에서 통역사가 말을 일일이 통역하는 게 어색하니 마치 '시적 허용'처럼 영화적 각색이 들어간 셈이다.

킬 빌에서는..?? 키도 누님이 시퍼런 일본도를 수하물도 아니고 버젓이 기내에 반입한 채로 비행기 타고 오키나와에서 도쿄로 가는 것만 해도 완전 비현실적인 각색이다.

4.
2편에서는 엘 드라이버가 돈가방에다가 블랙 맘바 독사를 몰래 숨겨서는 버드를 교묘하게 죽여 버리는 장면이 있다.
버드가 독사에게 물려서 의식을 잃고 죽어 가는 동안, 엘은 아주 태연하게 인터넷에서 찾아 본 블랙 맘바의 독의 위력을 설명해 주는데..
그때 사용하는 표현들이 정말 가관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연출만 한 게 아니라 각본도 썼다는데, 문학 조예가 굉장히 뛰어난 것 같다.

The amount of venom that can be delivered from a single bite can be gargantuan.
You know, I've always liked that word, "gargantuan."
I so rarely have an opportunity to use it in a sentence.
단 한 방만 물려도 주입되는 독의 양은 gargantuan(무진장 많은.. 거대한, 크고 아름다운)이래.
이거 알아? 난 gargantuan이란 단어를 완전 좋아하거든.
지금까지 이 단어를 사용할 기회가 좀체 없었는데 말야.


저 생소한 단어는 또 어디서 찾아 와서 써먹었는지 원..;;
그리고 엘은 끝에 가서야 자기가 너(버드)를 죽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 준다.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실력만은 개인적으로 인정했던 베아트릭스 키도가.. 자기와 결투라도 벌인 끝에 장렬하게 죽은 게 아니라 겨우 너 같은 찌질한 놈팽이에게 어이없이 제압 당하고 죽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랜다.

Now in these last agonizing minutes of life you have left,
let me answer that question you asked earlier more thoroughly.
Right at this moment, the biggest "R" I feel is regret.
Regret that maybe the greatest warrior I have ever met, met her end at the hands of a bushwhackin', scrub, alkie, piece of shit like you. That woman deserved better.


여기서 갑자기 biggest "R"이 왜 나오느냐 하면.. 이 부분 대사는 원래 다음과 같이 더 길게 쓰여졌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상영 시간 등 모종의 이유로 인해 편집됐다.

Now in these last agonizing minutes of life you have left,
let me answer the question you asked earlier more thoroughly.
When it comes to that bitch, I gotta lotta "R's" in me.
Revenge is one. Retribution is another. Rivalry is definitely one.
But I got another "R" for that bitch you might be surprised to find out. Respect.

But right at this moment, the biggest "R" I feel, is Regret.
Regret that maybe the greatest warrior I have ever met, met her end at the hands of a bushwhackin, scrub, alacky piece of shit like you. That woman deserved better.


복수, 응징, 경쟁.. 거기에다 존경심. 하지만 지금 제일 강하게 느끼는 건 유감스러움.
이것들이 전부 R로 시작하는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천재적이지 않은가?

5.
1부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핫토리 한조 아저씨의 가게 장면을 보니 갑자기 그게 너무 땡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혼밥을 이렇게 질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steel이 단순히 강철 자체가 아니라 sword처럼 검을 가리킬 때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어떤 분은 킬 빌을 많이 보고 나니 KB 국민은행을 보고도 KB가 영화 제목 이니셜인가.. 생각하고 순간 뿜었다고 그런다..;;
킬 빌 1에서는 그야말로 수십 명 이상이 죽어 나가지만 2에서는 단 세 명밖에 안 죽는다. 버드, 파이 메이, 빌.
그리고 전부 남자가 여자에게 죽임 당한다.

1편에서는 일본 사무라이가 나오더니만, 2편에서는 중국 쿵푸와 총질까지.. 뭔가 만화적인 무술 잡탕이다. 최종 병기는 오지심장파열술이라는 궁극의 기술이 아니던가..;;
정말.. 어지간한 평범한 창의력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거 같다... ^__^

Posted by 사무엘

2018/07/04 08:37 2018/07/04 08:37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oogi.new21.org/tc/rss/response/1507

Trackback URL : http://moogi.new21.org/tc/trackback/1507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45 : 46 : 47 : 48 : 49 : 50 : 51 : 52 : 53 : ... 1452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철도를 명절 때에나 떠오르는 4대 교통수단 중 하나로만 아는 것은, 예수님을 사대성인· 성인군자 중 하나로만 아는 것과 같다.

- 사무엘

Archives

Authors

  1. 사무엘

Calendar

«   2018/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Site Stats

Total hits:
1058512
Today:
267
Yesterday:
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