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공장소와 누구나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망이 있지만, 사람마다 사생활도 있고 비밀도 있다. 이런 게 보장되지 않으면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으며, 사실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없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장소나 어떤 정보는 내부의 믿을 수 있는 사람, 우리 조직 소속인 사람만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전자에 대해서는 열쇠와 자물쇠라는 게 만들어져 왔고, 후자를 위해서는 암호 기술이라는 게 개발되었다. 열쇠가 없는 사람, 암호를 모르는 사람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없고 그 자료를 열람할 수 없다. 심지어 정보가 담긴 매체라든가 물건이 담긴 금고 자체가 유출되더라도 그 안의 물건에 손댈 수는 없다.

열쇠와 암호는 서로 담당하는 영역이 다르지만 심상이 아주 비슷한 구석도 있다. 요즘은 자물쇠도 열쇠 대신 일종의 숫자 암호인 디지털 도어락으로 바뀌고 있고, 암호학에서도 key라는 용어가 즐겨 쓰이니 말이다.

다만, password라는 개념의 '암호'와, 원본 정보를 password 없이는 알아볼 수 없게 변조하는 '암호화'(cryptography, encryption), 그리고 암호화가 적용된 텍스트를 작성하는 것 내지 그 결과물인 암호문(cipher).. 이게 우리말에서는 딱 부러지게 잘 구분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마치 '뛰다'(jump/run), '다른'(other/different), '푸르다'(green/blue) 이런 게 잘 구분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보이니치 괴문서처럼 암호 사용 여부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체계와 의미가 파악되지 못한 물건도 decipher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에 비해 한국어 ‘해독’은 동음이의어 한자의 특성 때문에 ‘독’에 read라는 뜻뿐만 아니라 poison이라는 뜻까지 있어서.. 미묘하게 중의적인 심상을 자아낸다. 마치 ‘충전’의 중의적인 심상처럼 말이다. (전기도 충전, 금액도 충전..)

1. 패스워드의 관리, 해시 함수

먼저, 암호화와 무관하게 로그인 패스워드 자체에 대한 보안을 논하는 기본 원칙이 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본인이 마지막으로 글을 썼던 때가 무려 7년 전이었구나.;; (☞ 이전 글)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문자를 섞어서 최소한 10자 이상의 긴 문자열로 정할 것, 주기적으로 바꿔 줄 것” 이런 게 있다.

물론 누군가의 원한을 사고 있어서 작정하고 당신의 계정을 뚫으려 노력하는 공격자라도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얘기에 지나치게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 암호 좀 허술하게 만든다고 해서 현실에서 당장 위험에 빠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234, asdf, iloveyou, 생일, 전화번호 정도로 암호를 너무 성의없게 만드는 건 정말 피해야 한다.

그리고 사용자의 접속 정보를 저장하는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암호를 절~대로 평문 그대로 저장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암호 문자열이 무슨 도스 시절 파일 이름마냥 10~15자 같은 제약이 걸려 있거나 특정 특수문자 기호를 지정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기본적인 보안 관념도 없던 쌍팔년도 시절 사고방식의 미개한 사이트라고 욕 먹어야 할 것이다.

사용자가 암호를 잊어버렸다면 사이트 운영자라도 그 암호를 알 수 없는 게 정상이다. 본인 인증을 시행한 뒤에 임의로 지정한 새 암호를 알려줘야지, 기존 암호를 그대로 알려주는 사이트는 그 자체가 보안이 매우 허술하다고 실토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패스워드는 딱히 key 없는 단방향 암호화라는 변조를 거쳐서 저장해야 하는데, 이럴 때 해시 함수라는 게 쓰인다. hash란 어떤 임의의 길이의 원본 문자열이 주어졌을 때 원본과는 완전히 다르고 무질서하게 변조된 다른 고정된 길이의 문자열 내지 바이트 시퀀스를 되돌리는 수학 함수이다. 원본 문자열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확 달라진 결과값이 나와야 한다.

F(X) → Y인데, 역으로 Y로부터 X를 복원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F(A) ≠ F(B) 라면 절대적으로 A≠B이지만, F(A)=F(B)이면서 여전히 A≠B일 확률은 매우 매우 낮은 확률로 존재한다. 비유하자면, 퀵 정렬의 시간 복잡도를 n^2로 만드는 input을 우연히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확률로 존재한다.

패스워드의 비교는 사용자가 입력한 문자열을 hash한 결과와, 저장된 패스워드 hash값을 비교함으로써 행해진다. 평문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이런 해시 함수는 패스워드의 보관뿐만 아니라 방대한 파일이 정확하게 잘 전송되었는지 동등성을 검증하는 용도로도 즐겨 쓰인다. 수 GB짜리 파일의 해시값이 얼마가 나와야 정상인데 엉뚱한 값이 나왔다면 중간에 오류가 있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해시 함수가 튼튼하고 안전하려면 (1) F(X)로부터 X를 역으로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해야 하고, (2) 서로 다른 두 입력 A, B에 대해서 동일한 해시값이 산출되는.. 다시 말해 ‘충돌’ 사례가 없어야 한다. 전자는 암호화된 값으로부터 패스워드를 복원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암호로 원래 패스워드의 사칭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성능 좋은 해시 알고리즘으로는 MD5니, SHA-256 이런 부류가 공개되어 쓰이고 있다. 이들도 한번 만들고 끝이 아니라 버전과 출력 해시의 길이가 올라가는 편인데, 기를 쓰고 공격하려 애쓰는 연구자에 의해 충돌하는 입력값 쌍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러면 그게 해당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의 잠재적 보안 결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해시값으로부터 원래 입력을 역추적하기 위해 요즘은 상상을 초월하는 물량 데이터빨이 동원된다. “MD5 해시값을 자동으로 계산해서 구해 드립니다”라는 웹페이지를 개설한 뒤, 전세계 사용자가 입력했던 문자열과 그 해시값 수십억 개를 몽땅 보관해 놓는 것이다. 그래서 산술 연산을 하는 게 아니라 DB를 조회함으로써 해시값 복원을 한다. 우리가 남들도 떠올릴 만한 평범한 문자열로 패스워드를 만들면 위험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2. 대칭 키 암호화

이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데이터 암호화이다. 발신자가 A라는 텍스트를 K라는 패스워드(혹은 key)를 이용해서 E라는 암호화 함수로 암호화해서 B라는 암호문을 얻는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B=E(A, K) 정도? 그러면 수신자는 D라는 복호화 함수를 이용해서 D(B, K)를 돌림으로써 A를 얻는다.
이걸로 끝.. ‘대칭’이라는 말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K라는 동일한, ‘대칭인’ key를 공유하는 암호 체계라는 뜻이다.

암호화 함수는 해시 함수와는 달리 복호화 함수도 존재하며, key만 안다면 원문 복원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해시 함수는 애초에 어떤 입력에도 128비트 같은 동일한 길이, 즉 동일한 정보량을 가진 해시값이 돌아오지만, 암호화 함수는 출력의 정보량이 입력의 정보량과 대등하다. 그러니 용도가 서로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도 마치 VMS로부터 WNT (Windows NT)라는 명칭을 만드는 것처럼 글자들을 일정 간격 앞뒤의 것으로 변조하거나, 심지어 key 문자열의 형태를 토대로 각 글자들을 가변적인(하지만 규칙과 패턴은 물론 있는) 오프셋만치 변조하는 기법 정도는 응당 쓰였다. 모든 글자를 고정적인 오프셋만치 변조하는 암호는 각 글자들의 빈도수 분석을 통해 비교적 금방 깰 수 있을 것이다.

2차 세계 대전까지만 하더라도 전자식 컴퓨터라는 게 사실상 없던 시절이었고, 지금에 비하면 매우 단순하고 원시적인 암호가 쓰였다. 연합군이 승리한 것에는 적국(일본, 독일) 군대의 암호를 풀어낸 것이 아주 큰 기여를 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컴퓨터가 등장한 뒤부터는 매우 컴퓨터 친화적인 비트 회전과 XOR 연산이 암호화에 즐겨 쓰이고 있으며 그 수준이 과거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다. 문자열을 암호화하기 위해서는 문자열을 구상하는 각 문자들을 숫자처럼 취급하는 게 필수이다.

정보 보호라는 업계에서 이런 암호화와 관련하여 통용되는 철칙이 있다. 암호화 알고리즘은 자신의 동작 방식과 로직이 소스 코드 차원에서 몽땅 공개되어 있더라도 절대적으로 안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터의 안전은 key가 보장해야지, 알고리즘을 공격자가 알고 있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바닥은 소스를 공개할 수 없는 우리만의 초특급 비밀 노하우 원천기술 같은 게 없다. 모든 게 투명하게 공개돼 있고 심지어 취약점이 발견된 것, 수정 내역도 공개된다. 이런 열린 관행 덕분에 컴퓨터 세계는 역설적으로 더 안전해질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지난 2009년엔 ‘코드소프트’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느 스타트업 기업에서 상금까지 걸면서 자기네 암호화 알고리즘에 대한 크랙 공모전을 주최했으나 비슷한 시기의 T-max 운영체제 같은 흑역사만 남겼던 적이 있다. 자기네 핵심 기술이라던 암호화 알고리즘은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겨우 몇 시간 만에 뚫려서 큰 망신을 당했으며, 그 회사도 얼마 못 가 통째로 폐업했기 때문이다(소스는 비공개이고 임의의 데이터에 대한 암호화 결과 확인만 가능). 걔들은 암호화 알고리즘의 전문가는 고사하고 보안에 대한 기본 관념이 있긴 한 기업이었는지가 의문이 든다.

대칭 키 암호화 알고리즘으로는 AES, DES 같은 기성 표준 알고리즘이 있고 이것도 버전 내지 사용하는 정보량(비트수)이 올라가고 있다. AES는 오늘날의 컴퓨터 성능으로는 뚫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위험할 정도로 짧아졌기 때문에 이제 사용이 권장되지 않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SEED, ARIA, LEA라는 알고리즘을 자체 개발해서 국가 표준으로 지정한 바 있다. 국정원 내지 한국 인터넷 진흥원 이런 데서 날고 기는 수학 박사를 채용해서 머리 굴려서 개발한 듯하다.

문서나 압축 파일에 암호를 거는 기능에도 응당 이런 암호화 알고리즘이 쓰인다.파일 내부에다가 패스워드를 평문으로 저장하는 미친 짓을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혹은 파일 내용 자체를 암호화하지 않아서 헤더의 패스워드 부분만 건너뛰고 나면 나머지 내용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게 하는 것도 치명적으로 잘못된 설계이다.
틀린 패스워드를 주면 해독이 잘못되어 완전히 엉뚱한 파일이 생성될 텐데, 패스워드가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하는 건 정상적으로 해독됐을 때의 파일 checksum hash 같은 걸 별도로 둬서 확인해야 한다. 암호화 알고리즘 다음에 붙는 CBC, GCM 같은 모드 명칭은 바로 이런 검증 방식을 가리킨다.

안전한 암호화 알고리즘이라면 평문이나 key가 조금만 달라져도 이들의 원래 형태와 통계적 특성을 전혀 알 수 없는 엉뚱한 암호화 결과가 출력으로 나와야(혼돈과 확산) 안전할 것이다. 이 점에서는 해시와 비슷한 구석이 존재하며 심지어 난수 생성 알고리즘과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입력을 0, 1, 2 .. 순차적으로 주고 이를 hash시킨 결과가 난수나 마찬가지이고 암호화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암호화, 해시, 난수는 전문적으로 들어가면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분야라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임의로 생성 가능한 문자열과 이를 hash한 문자열을 혼합하면.. 올바른 번호와 잘못된 번호의 구분이 존재하는 일련번호(serial key) 체계도 생성할 수 있다.
간단하게는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가 대표적인 예이다. 검증용으로 쓰이는 마지막 자리 숫자가 hash 함수의 결과값이니까 말이다.

소프트웨어에서 불법 복제를 감지하고 예방하기 위해 발급되는 제품 key도 다 이런 원리로 발급된다. 상업용 소프트웨어야 처음부터 고정된 시리얼 키가 제품 패키지에 들어있으니 사용자 이름과 무관하겠지만, 셰어웨어 등록판을 생성하는 시리얼 키는 사용자의 이름도 공식에 응당 반영된다.

규칙에 어긋난 잘못된 문자열을 입력하면 해당 제품의 설치 프로그램은 에러 메시지를 내뱉으면서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하지 않을 것이다. key의 생성 규칙은 그 제품 개발사의 중대한 영업 기밀이다.

하지만 이렇게 수학적인 방법, 소프트웨어적인 방법은 역공학을 통해서 뚫리기도 너무 쉽다. 암호학에서 알고리즘이 아니라 key만 믿어야 한다고 괜히 강조하는 게 아니다.
옛날에 불법 복제 어둠의 경로를 가 보면 도대체 어떻게 알아냈는지 특정 소프트웨어의 제품 key를 생성해 주는 툴이 버젓이 굴러다니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은 이 제품 key가 실제 구매자가 사용하는지의 여부를 제품 개발사 서버로부터 일일이 추가로 확인받곤 한다.

설계 차원에서 결함이 있지 않은 안전한 암호화 알고리즘이라면 key 없이 복호화를 하는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암호문은 그냥 a부터 z까지 모든 글자 조합을 무식하게 일일이 대입하는 brute force 방식으로만 풀 수 있다.
패스워드의 길이가 한 글자 늘어날 때마다 공격에 소요되는 시간이 수십 배씩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이 시간 덕분에 오늘도 인간의 컴퓨팅 세계는 딱히 금융 사고나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별로 없이 안전하게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컴퓨터의 계산 성능은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고 있고 암호 공격은 병렬화에도 아주 유리한 분야이다.
이런 brute force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요즘 암호를 입력받는 프로그램, 웹사이트 등에서는 암호가 틀릴 때마다 수 초씩 딜레이를 일부러 주고, n번 이상 암호를 틀리면 계정을 정지시키는 조치까지 취한다. 그 어떤 암호 시스템도 하나하나 다 대입해 보는 제일 무식하고 원천적인 전수조사에는 언젠가 뚫릴 수밖에 없는데.. key가 너무 허술하게 만들어져 있으면 거기에 더욱 취약해질 것이다.

3. 공개 키 암호화

지금까지 key를 따로 받지 않는 대표값 변조(해싱), 그리고 key를 받는 대칭 키 암호화까지 얘기가 나왔다. 대칭 키 암호화는 입력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 블록 암호화 내지 스트림 암호화로도 나뉘는데, AES/DES 같은 것들은 블록 암호화로 분류된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이런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른 완전히 새로운 암호화 분야가 개척되었다. 바로 대칭이 아닌 비대칭, 또는 공개 키 알고리즘이라는 개념이 제안되고 개발된 것이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복잡 정교한 암호화 알고리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발신자와 수신자가 모두 동일한 key를 알아야 하고 보안을 위해서는 수시로 교체해야 하고, 그 바뀐 key를 모든 구성원에게 전해 줘야 한다는 원천적인 한계와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새 암구호를 어떤 절차를 통해 전파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key를 주고 받는 건 암호라는 걸 운용하는 모든 조직이 감내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 같다. 하지만 암호화 때 사용되는 key와 복호화 때 사용되는 key가 다르고(비대칭), 전자는 마음대로 주변에 공개해도 되는(공개 키) 알고리즘은 이런 한계를 극복해 준다. 이런 마법 같은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암호화는 수학적 비가역성 내지 난해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자릿수가 많은 두 수를 곱하는 건 사람의 입장에서 몹시 고된 노가다이겠지만.. 역으로 이미 곱해진 듣보잡 수를 아예 소인수분해 하는 것은.. 뭐 차원이 다를 정도로 난감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 것이다. 페르마 수 같은 게 n이 조금만 커져도 합성수인 것만 알려졌을 뿐 완전한 소인수분해가 안 된 놈들이 부지기수인 게 이 때문이다.

공개 키 암호화 중 하나로 유명한 RSA는 수십 자리 이상의 엄청나게 큰 소수 둘을 골라서 이 원천으로부터 공개 key와 개인 key pair를 만들어 낸다. 즉, 처음부터 동일한 원천으로부터 두 key 쌍이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계산이긴 해도 한 key로부터 나머지 key를 역으로 유도하는 것은 무진장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이런 공개 키 암호화는 제약이 크다. 앞서 살펴봤던 재래식(?) 암호화처럼 임의의 메모리 블록이나 문자열을 취급하지는 못하며, 평문과 key, 암호화 결과 모두 그냥 숫자 달랑 하나일 뿐이다. 숫자에다가 문자열에 맞먹는 정보를 담으려면 그 수가 엄청나게 커져야 한다.
그리고 얘는 그런 주제에 계산량이 차원이 다르게 많다. 컴퓨터 친화적인 XOR이나 비트 회전 같은 게 아니라 거대 정수에 대한 산술 연산을 무진장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암호화 알고리즘은 재래식 블록 암호화처럼 몇 MB짜리 데이터 자체를 암호화하는 단순한 용도로 쓸 수 없다.
그 대신 재래식 암호화 알고리즘에다가 돌릴 짤막한 key만을 암호화하는 용도로 병행해서 쓰인다. 멀티스레드 프로그램에서 TLS 슬롯은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니 거기에다가 생 데이터를 몽땅 저장하는 게 아니라 그냥 포인터만 저장해 놓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마치 손실 압축과 비손실 압축만큼이나 고유한 용도가 있는 셈이다.

https 보안 사이트 내지 인터넷 뱅킹에서 로그인을 할 때 시간이 0.n초나마 랙이 있는 이유는 네트워크 트래픽 때문이 아니라 순수하게 계산 때문에 그렇다. 그때마다 암호 해독을 위해 OpenSSL에 구현된 BigInt 같은 라이브러리의 코드가 실행되면서 큰 수 연산과 값 비교가 행해진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공개 키 암호화로서 RSA가 아주 유명하지만 이런 소수와 소인수분해 말고 타원곡선이나 이산로그 같은 다른 어려운 연산에 기반을 둔 알고리즘도 있다.
이 암호화 기술은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생활을 크게 바꿔 놓았다. key를 위험하게 통째로 주고받지 않아도 되는 암호화 덕분에 인터넷 상으로 금융 거래도 할 수 있게 되고 디지털 서명, 인증서라는 것도 존재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보통은 공개 key로 암호화를 해서 개인 key로 복호화를 하는데, 반대로 어떤 문서를 개인 key로 암호화하고 공개 key로 복호화하게 하면 된다. 그러면 이 문서는 누구나 열람은 가능하지만, 만든 사람은 그 공개 key에 대응하는 개인 key의 소유자밖에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 놀랍지 않은가?

hash가 어떤 데이터가 원본과 동일한지 무결성을 보장한다면, 공개 key 암호화는 어떤 데이터가 반드시 특정인으로부터 만들어졌고 변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도장이고 자필 서명이고 자물쇠와 열쇠 같은 모든 실물은 조작이 가능하며 컴퓨터야 뭐 0과 1 무엇이건 해킹이 가능한 디지털 세상이다. 이런 바닥에서 믿을 것은 수학적인 비가역성밖에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다루는 의료 다음으로 중요하고 착오가 절대로 없어야 하는 크리티컬한 임무는 아무래도 돈 거래, 기밀 거래일 텐데, 이 정도 기반은 갖춰진 뒤에야 인터넷이 안전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에 인터넷은 기반 프로토콜 차원에서 이런 암호화 알고리즘이 제공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상거래나 인터넷 뱅킹을 남보다 일찍 서둘러 구현하려면 특정 운영체제에 종속적인 온갖 비표준 편법 기술이 동원돼야 했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초에 SEED 같은 알고리즘까지 개발한 걸 보면 공개 키뿐만 아니라 대칭 키 암호화까지 모두 허술했던가 보다.
허나 이게 바로 우리나라 특유의 IE + ActiveX 의존이라는 독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본이 일찍부터 철도 왕국이 되긴 했지만 협궤 때문에 발목 잡힌 것과 비슷한 현상이랄까..?

이상이다. 인증서가 어떻고 공개 키, 개인 키, 디지털 서명 이러는 바닥은 통상적인 hash나 블록 암호화와는 영역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 그리고 이런 공개 키 암호화 덕분에 인터넷 보안 수준의 차원이 달라졌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 바닥도 날고 기는 괴수들이 너무 많다..;;

Posted by 사무엘

2021/03/31 08:33 2021/03/3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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