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실수한 이유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베드로의 인생일대 흑역사가 기록돼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님하와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는..
정작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타이밍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는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린 사건 말이다.

게다가 부인할 때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아 ㅆㅂ, 내가 저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니까? 성을 간다! 내가 할복이라도 해야 내 말 믿어 줄 거야?” 급의 극언까지 불사했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건 인간의 멘탈의 한계를 너무나 강렬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저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꼴 좋다 졸장부 찌질이 등신"이라는 비난보다는 동정과 공감의 시각이 더 강한 편이다.
"평소에 허세 똥군기만 잔뜩 부리던 녀석일수록 정작 실전에서는 총소리만 나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거다. 천하의 베드로조차 저랬는데 하물며 너 같은 쪼렙 X밥은?"과 같은 패턴으로 아주 즐겨 거론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베드로는 천성이 저돌적이며, 저 정도로 찌질한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언장담 맹세 자체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적 진영의 똘마니에게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서 귀 한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요 18:10)
예수님이 베드로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로마 병정들을 그렇게 온몸으로 저지하다가 혼자 또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여 열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허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선의의 대응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뜯어말리셨다. “야, 내가 어디 무력이 부족해서 잡혀 가는 줄 아니? 지금은 성경 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 아니냐?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잘 하라고..”
그리고 그분은 베드로를 말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격을 받아 귀가 짤린 그 똘마니를 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눅 22:51)

이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급 ‘시무룩~’ 무기력 모드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모세의 소싯적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는 나름 동족을 위한답시고 어느 노예 감독을 몰래 죽여서 없애 줬는데, 동족은 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날 “허 참, 당신은 노예 감독 다음으로는 우리도 때려죽일 거야?”라고 모세에게 따진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급 당황하고 멘붕하여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치게 된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최악의 취약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당부처럼 딱히 믿음의 강건을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전한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느냐 하면 그리하지도 않고, 위험한 적진 내부를 혼자 계속 맴돌면서 염탐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 저 작자도 예수랑 한 패였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런 말이 들리니 허를 완벽하게 제대로 찔린 것이다. 갑자기 겁에 사로잡혔는지, 멘탈이 나갔는지, 아니면 고의로 삐딱서니를 타고 싶었는지.. 이때 베드로는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태도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거듭해서 부인하게 됐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이 베드로의 심경 변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비겁한 허세 겁쟁이는 아니었을 수 있다.
설마.. 의기탱천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괜히 쿠사리를 먹여서 의욕을 꺾는 바람에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겠는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내면의 두려움을 그저 알량한 혈과 육과 객기로 찍어누르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분은 베드로의 본질적인 상태를 간파하고서 그러지 말라고, 영에 속한 싸움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물 위를 걷기 시작했는데 '어어..' 딴 생각을 하다가 불안해지고 물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요 11의 "예수께서 우시니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 것이다(창 50에서 요셉이 운 이유도 같이 참고를..).
그것처럼 베드로의 흑역사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신앙생활이 단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인 투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을 죽이는 의사 투사든, 자기를 죽이는 열사든 무엇이건 말이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제자들이 모두 성경을 잘 알고 성령 충만하게 FM대로 대처했다면 어찌 됐을까?
“스승님을 잡아갈 거면 우리도 다같이 잡아 가시오! / 우리부터 먼저 죽이시오~” 이렇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들러리 도적 대신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가 같이 달리게 됐을 수도 있다.

혹은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만 잡아들이고 제자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체포됐을 때처럼 골방에서 열심히 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 싶다.
뭐, 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낭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베드로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실컷 배반하고 나서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또 바뀐 걸까? 뭔 바람이 들어서 뒤늦게 돈을 반환하고 난리를 치다가 자살을 했겠는지도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9 08:35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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