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했던 말도 있지만 오랜만에 철도 역사 얘기를 정리해 본다.

1.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경부선 남쪽 방면 종점은 1974년 첫 개통 이래로 30년 가까이 쭉~ 수원이었다. 그러다가 지난 2003년 4월 30일, 거의 30년 만에 딱 두 정거장 남하한 병점으로 연장됐다. 그리고 2005년 1월 20일, 이 종점은 무려 천안까지 내려갔다. 경부선 천안-수원간 2복선 전철화가 모두 완료됐다.

그럼.. 수원 다음에 바로 천안으로 한꺼번에 개통하면 될 것을.. 아니면 화끈하게 오산이나 평택 정도의 중간 지점도 아니고, 그 당시에 겨우 화성시 병점까지만 먼저 연장 개통한 이유는 무엇일까?
수원과 병점 사이에는 '세류'라는 역 하나만 달랑 있다. 여기는 바로 옆에 공군 기지가 있어서 여객 수요가 별로 없고, 전철이 굳이 선개통을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여객이 아니라 시설 때문이었다.
수원을 살짝 벗어난 병점 역 근처에 병점 차량기지가 만들어졌고, 전동차 회차를 위한 전용 입체교차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게 전철 운영을 위해 꼭 필요했기 때문에 이 짧은 구간부터 먼저 개통을 한 것이다.

2.
이 과정은 우리나라의 지폐 신권의 도입 과정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원래 한국 은행의 의도는 2009년에 새로운 5만원권과 함께 기존 지폐들도 새 도안을 내놓고, 모든 지폐를 한꺼번에 신권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전 2007년에 기존권의 신권을 먼저 풀게 되었고 특히 5천원은 2006년 초에.. 0순위로 제일 먼저 시급히 내놓았다. 신권을 이렇게 준비되는 대로 찔끔찔끔 '축차투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그 당시에 5천원 구권의 위조지폐가 엄청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명 "77246 위조지폐" 사건인데, 이 엄청난 사고를 친 범인은 무려 2013년에야 잡혔다.
돈은 위조지폐 때문에 신권이 일찍 나오게 됐고 전철은 수원 역의 회차 시설이 너무 열악했기 때문에 병점부터 먼저 시급히 개통했다.

병점 기지와 입체 회차 시설이 없던 시절에는 수원까지 간 하행 전동차가 상행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로 치면.. "유턴"이라는 걸 해야 하는데.. 하행 외선에서 상행 외선으로 평면교차로 가다 보니 중간에 내선 일반열차 선로를 횡단해야 했다.
새마을호처럼 수원 역을 전속력으로 무정차 통과하는 열차도 있는 선로를 횡단하는 건... '비보호 좌회전'만큼이나 굉장히 위험 부담이 큰 기동이었다.

물론 철도는 아주 정교한 신호와 시각표의 통제를 받기 때문에 이게 진짜 자동차 도로 같은 비보호인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전철은 일반열차를 피해서 회차를 해야 하니 회차 용량을 늘릴 수 없고, 이 때문에 경부선 전철 자체를 충분히 증차할 수 없었다. 1981년에 애써 경부선 서울-수원 2복선화까지 했는데 회차 용량이 선로 용량을 많이 까먹어서 도루묵으로 만들었다.

2002년 2월에는 수원 역 부근에서 서울 메트로 소속 전동차가 일반열차를 먼저 보내주려 신호 대기 중이었는데.. 철도청 선로 보수 차량이 이를 추돌하는 사고가 나기도 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철도청 새내기 신입 기관사가 앞을 제대로 못 보고 사고를 낸 거라고 전해진다. 아마 이 사고도 철도청에게 트라우마를 안기고, 병점 역의 시급 조기 개통에 영향을 줬으리라 생각된다.

3.
그리고 이 병점 차량기지는 아무 곳에다 새로 만든 게 아니었다.
경부선 수원-천안간 2복선화 과정에서 병점 부근의 선로가 선형개량이 되어서 딴 데로 이설되었다. 병점 기지는 바로 이설 전 기존 선로 부지에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 그리고 2010년에는 여기에 '서동탄'이라는 전철역도 만들어지게 됐다.

이건 뭐랑 비슷한가 하면.. 서울 송파구 잠실 근처에 있는 석촌 호수이다.
여기는 원래 한강의 남쪽 지류가 흐르던 곳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서 물길의 방향을 통째로 바꿔 버리고, 거기만 호수로 남겨둔 것이다. 그래서 거기 일대에 '송파 나루' 같은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석촌호수가 원래 한강이 있던 곳이었다면, 병점 차량기지는 원래 경부선 선로가 있던 곳이었던 셈이다.

4.
(1) 참고로, 병점 기지가 만들어지고 2년쯤 뒤인 2005년 7월엔 인서울인 이문 차량기지가 새로 생겼다. 얘는 망우선의 잉여역이던 '이문 역'을 대체하는 형태로 부지를 확보해서 만들어졌다. 근처에 이미 '신이문'이라는 전철역이 별도로 있다.

(2) 2005년 1월 20일로부터 11개월 뒤, 12월 20일엔 경부선에 이어 경인선도 주안 이후로 동인천 역까지.. 즉, 마지막 인천 역을 제외한 나머지 전구간이 2복선화가 완료됐다.
이로써 수도권 전철 1호선은 인천 라인과 수원-천안 라인이 모두 복복선으로 갖춰졌다. 경부선 라인은 2008년에 천안 이남으로 장항선 구간까지 침투해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존재감이 좀 덜하다.
그리고 인천은 일반열차가 다니지는 않지만.. 승장장 이후로 인상선로가 없어서 열차가 빨리 진입하지 못하며, 이게 회차 용량을 여전히 떨어뜨린다. 이 한계는 오늘날까지도 개선되지 않았다.

(3) 병점 차량기지는 오랫동안 누리로 전동차의 주박 기지로 쓰였다. 하지만 지난 2020년 5월말부터 서울-신창 누리로 열차가 폐지됐고, 얘들은 경부선 대신 웬 중앙· 영동· 태백선 쪽으로 전보(!!) 발령됐다. 소속도 강릉 기지로 변경.. 그러니 병점 기지에서는 이제 누리로를 볼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7 08:35 2023/02/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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