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1.
레크리에이션 시간에 하는 OX 퀴즈 말이다. 이거 완전 퀵 정렬스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지?
퀴즈는 PIVOT값이다. 정말 알쏭달쏭해서 사람들이 O와 X로 반반씩 갈려야 좋은 문제이고,
너무 쉽거나 해서 사람들이 한데 쏠리면 그건 난감하다. 퀵 정렬도 완전 똑같다. ㅋㅋ

2.
수업 시간에 각 학생들에게 설문지를 돌리거나 과제물을 나눠 준다. 내게도 서류 뭉치가 왔는데, 이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고 내가 살펴본 뒤에 다음으로 이걸 어느 방향에다가 넘겨줘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이건 C++로 치면 iterator이다. 서류 뭉치는 모든 학생들을 한 번씩 순회하는데, ++itor; 명령이 수행되려면 지금의 순회 위치로부터 다음 순회 위치를 알 수 있어야 한다. 트리 구조를 순회한다면, 각 노드마다 부모 노드 포인터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

3.
요즘 존재하는 수많은 웹사이트들 중, html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것들은 로컬 환경으로 치면 기계어로 짠 네이티브 프로그램이고, 블로그 엔진 기반은 닷넷처럼 일종의 상부 계층 위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에다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 사용자가 나모 같은 에디터로 홈페이지를 만들 일이 없어졌다는 건, 윈도우 환경에서 어셈블러 수작업으로 프로그램을 만들 일이 없어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Win32 API 같은 네이티브 계층 자체가 완전히 없어지는 날은 과연 올까?

4.
외솔관에 있는 대학원생 독서실에 있다가 위당관으로 수업을 들으러 간다. 두 건물의 뒤쪽엔 높은 언덕이 있기 때문에 3층과 4층이 뒷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경로를 이용하면 건물 사이를 왕래할 때 번거롭게 1층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갈 필요가 없다.
바깥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두운 건물 복도를 걸으면서 지하철 터널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다가 잠시 밖으로 나가면, 지하철이 강을 건너거나 서울 지하철 8호선의 복정-산성 구간 같은 곳을 지나느라 잠시 지상으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5.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한다. 노래를 부르는데 반주자가 악보를 넘기느라 잠시 피아노 반주가 중단되었다. 그래도 노래는 박자나 음정의 어긋남이 없이 계속 잘 이어진다.
이것은 절연 구간을 지나느라 전동차에 전원 공급이 잠시 중단되더라도 차가 관성으로 계속 달리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울러, 바닷물과 민물을 넘나드는 연어는 교류-직류 겸용 전동차의 예표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철도 패턴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6.
대학 학부까지만 학업을 마치고 취업을 한 건, 지금 생각해 보니 학업이라는 지하철이 서울 시계까지만 건설된 뒤 노선이 끊어졌던 듯한 느낌이다. 학부를 졸업한 지 5년이 지나서야 대학원에 들어가니, 그 선로를 이어서 장거리 광역전철을 건설하는 것 같다.

7.
<날개셋> 한글 입력기 5.65를 공개한 후, 소스를 대대적으로 뒤집어엎었다.
null-terminate 스트링의 write 버퍼를 받는 모든 함수에는 버퍼의 크기에 대한 정보를 추가하고, sprintf 같은 함수 호출도 버퍼 오버런을 일으키지 않게 다 손질했다.
파일을 읽고 쓰는 과정에서 에러 처리를 더욱 강화하고, 범용적인 dll 모듈은 thread-safe하도록 고쳤다.
좀 비효율적이고 불합리하게 만들어져 있던 라이브러리 API를 뜯어고쳤다.

그래서 다음 버전으로 잠정 계획 중인 <날개셋> 한글 입력기 5.8은 5.5 시절부터 비교적 잘 유지되어 왔던 API 하위 호환성이 모두 깨질 예정이다.
타자연습도 덩달아 버전업된다. 입력기에 적용된 프로그래밍 테크닉이 그대로 적용되고, 그리고 연습글을 좀 정리할 생각이다.

6만 줄에 달하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 소스 코드를 들여다보노라면 정말 나만의 세계, 나만의 건축물, 나만의 철도 노선에 들어온 느낌이다. 의존도라고는 Win32 API와 몇몇 Ansi C 함수밖에 없으며, 나머지 코드들은 100% 자체 제작이다. 다른 프레임워크나 오픈소스 작품 같은 거 쓴 것이 전혀 없다.

누구에게 돈이나 시간 면에서 단 한 치도 얽매인 게 없이, 전적으로 개인 취미 생활로 개발하는 것이다 보니,
단순히 기능만 되게 하는 게 아니라 소스 코드의 질에도 굉장히 신경을 쓴다.
비록 한 줄에 100칼럼을 꽉꽉 채우느라 겉보기로는 코드가 좀 지저분해 보여도, 구조는 의외로 깔끔한 편. ㅋㅋㅋㅋ

코드에 무슨 공통된 패턴이 반복되는 게 발견되면 함수로 따로 떼낸다거나, 모듈 간의 공통된 기능을 한 기반 클래스로 빼낸다거나.. 이런 식으로 "리팩터링"을 수시로 진행한다는 뜻이다.
이런 거 공사 하나 잘 해서 추상적인 클래스가 하나 탄생하고 상속 계층이 한 단계 올라간다거나 하면,
어려운 버그를 잡은 것만큼이나 기쁘다.

Posted by 사무엘

2010/10/17 18:08 2010/10/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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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주 2010/10/17 21:08 # M/D Reply Permalink

    그런데 그 리팩터링 때문에 새로운 버그가 생겨나면 수명이 줄어드는 걸 느끼게 됩니다.

    1. 사무엘 2010/10/17 23:08 # M/D Permalink

      리팩터링이 side effect를 남긴다면... 음 좀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겠죠. ㅋ

  2. 삼각형 2010/10/17 22:33 # M/D Reply Permalink

    그러고 보니 전 그런 식의 직업병은 딱히 없네요. 해봐야 숫자 샐 때 0부터 샌다거나 그 정도. 직업이 아니라서 그런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OS에 종속적이기는 해도 그런 식이라면 다른 OS나 플랫폼으로의 이식도 크게 문제 없겠군요. 어짜피 입력기의 처리는 비슷할 테니까요.

    빠른 64bit 지원도 시스템에 종속적인 저수준의 함수를 쓰지 않으니 가능하자 않았나 합니다. 반면 세나루 64bit 지원은 되기는 할지 의문.

    1. 사무엘 2010/10/17 23:08 # M/D Permalink

      이식성을 고려한다면 운영체제 API 직통이 아니라,
      qt 같은 크로스 플랫폼 GUI 툴킷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더 유리하지요. 그 대신 이 경우 프로그램 덩치는 심하게 더 커지게 됩니다. ㅎㅎ
      외부 모듈 같은 프로그램은 이래저래 해당 운영체제의 API 직통으로 가볍고 효율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 점에서는 새나루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플랫폼을 바꿔서 빌드만 해 주면 64비트 지원은 아무 문제 없을 거예요.
      직업병은 삼각형 님도 대학 가서 전공 과목 들어 보시면 생길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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