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서울역-DMC는 서울에 있는 도시철도/광역전철 중 배차간격이 가장 긴 구간이다. 사실 인서울뿐만이 아니라 수도권 전체, 아니 전국의 지하철까지 다 포함해도 말이다. 1시간에 1대꼴이니 이건 배차가 길기로 악명 높은 중앙선이나 2호선 지선조차도 가뿐히 관광 태우기에 충분하다.
이 구간에 열차가 이렇게 드문 이유는 잘 알다시피 용산-서울역에서 수색 기지로 입출고하는 KTX 포함 일반열차들이 차지하는 트래픽 때문이다. 몇 분 간격으로 화물도 아닌 여객 열차들이 드나드니, 이곳 선로를 2복선 이상으로 확장하지 않는 이상 경의선 전철은 도저히 더 늘릴 수가 없다. 수색 기지를 지난 뒤인 DMC 이북부터나 현재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으로 열차가 다니는 실정이다.
서울역-DMC 사이에 있는 경의선의 중간 경유역으로는 신촌과 가좌가 있다. 외곽의 차량 기지 주변의 시종착역도 아니고, 엄연히 서울 중심부에 이런 특이한 역이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신촌은 지하철 2호선의 역과 이름이 겹치기도 하기 때문에 흔히 '기차 신촌 역'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엄밀히는 경의선 신촌 역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신촌과 가좌는 이렇게 열차 운행 위상은 동일하지만 실질적인 지위는 가히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신촌은 연세대와 이화여대에 인접했다는 천혜의 위치 덕분에 이용객이 많고 진작에 큼직한 민자역사가 만들어졌다. 게다가 넓은 광장까지 있다! 일반열차도 안 서고 1시간에 1대꼴로 다니는 전철밖에 없는 것치고는 상당히 과분한 대우이다. 아담하던 구역사는 진작에 한쪽 구석으로 이설되었고,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다.
그 반면 가좌 역은 아직 신역사가 건설 중이고 구역사는 서울 시내의 '간이역' 수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직접 가 보면 그 초라함과 허접함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가좌 역에서 내리면 우리를 반기고 있는 것은 급조한 듯한 임시 섬식 승강장 하나이다(그러고 보니 신촌도 섬식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하지만). 역사는 선로와는 따로 작은 건물로 존재하는데, 승강장에서 거기로 가려면 놀랍게도... 철길을 건널목으로 평면 횡단해야 한다! 수도권, 고상홈 전동차를 타는 역에 선로 평면 횡단이 존재하는 역은 수도권, 아니 전국을 통틀어 유일하게 여기밖에 없을 것이다. 가히 수도권 전철계의 '영동선 스위치백' 같은 유물(legacy)이지 않은지?
역 건물은 한 층밖에 안 되고 냉방도 없이 철도 대합실 같은 분위기이다. 내부에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이란 게 없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인천 역과 딱 비슷한 분위기이다. 인천 역이 '바로타'이듯이 가좌 역도 '바로타'이다. 다만 인천 역은 종점이다 보니 두단식 승강장이 가능한 반면, 가좌는 그렇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건널목이 존재하는 것이다.
신촌과 가좌 역에는 역사적인 사연이 있다.
철덕이라면 옛날에 용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고 거기엔 중간에 효창, 서강이라는 역이 있었다는 걸 아실 것이다. 용산선은 용산 역에서 출발하여 지금의 서울 지하철 6호선과 비슷한 선형을 탔다가 가좌 역에서 지금의 경의선과 합류를 했다. 서강 역에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로 분기하는 지선도 있어서 발전소에 석탄 공급 화차가 다녔으나, 이 선로는 1980년대에 폐선됐다.
그리고 사실은 용산선이 오리지널 경의선 구간이었다. 경의선은 서울 역보다 시기적으로 훨씬 더 앞서 있다. 서울 역에서 출발하여 신촌을 경유하는 경의선 신선은 나중에 1920년대가 돼서야 생겼다. 신촌 역이 바로 이 시기에 영업을 시작했으며, 오늘날 서울 역의 전신인 경성 역은 그로부터 수 년이 더 지나서야 완공되었다.
그래서 서울 역 이북으로 신촌, 가좌 쪽으로 가는 선로는 왼쪽으로 상당히 급격한 드리프트가 있고 중간에 터널까지 지난다. 뭐, 용산선도 드리프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경의선 신선은 구선보다도 없는 길을 무리해서 힘들게 만든 흔적이 역력함을 알 수 있다. 경의선이 처음부터 서울 역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면 이런 곡선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선로는 용산 대신 경성/서울 역을 뒤늦게 한반도의 허브 철도역으로 육성하기 위한 결과물인 것이다.
용산선은 여객 취급은 안 하고 코레일이 내부적으로 비밀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단선 철길이었는데 수 년 전에 드디어 폐선되어 선로가 철거되었다. 그러나 해당 구간은 지하화되어 복선 전철로 재건설되고 있다. 이미 공항 철도가 동일 구간을 아주 깊숙히 지나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수도권 전철 경의선은 지하에서 용산까지 간 후, 지금의 중앙선 복선 전철과 직통 운행을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도 글로 썼듯이, 서울 역에 공항 철도가 들어왔다면 용산 역엔 경의선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경춘선 ITX 청춘에 이어 경의선까지 말이다!
신촌과 가좌의 미래의 위상은 여기서도 또 갈린다. 가좌는 지하 용산/경의선에 속하는 구간이기 때문에 지하에 승강장이 새로 건설된다. 그런데 용산을 기점으로 하는 지하 경의선이 개통하더라도 지금 신촌을 경유하는 서울 계통 경의선도 여전히 존치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의 인지도와 수요도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 지금 DMC에서 멈추는 열차들만 용산까지 그대로 연장되고, 서울-신촌 경유 열차는 변동 사항이 없이 1시간에 1대꼴로 유지된다는 뜻 되겠다.
그래서 지금은 비록 초라한 몰골의 가좌 역이지만, 계획대로라면 이 역은 지상 승강장과 지하 승강장을 모두 갖춘 특이한 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파주, 문산 쪽으로 간다면야 지상과 지하 중 먼저 오는 열차를 아무거나 타면 될 것이며, 용산으로 가려면 지하 승강장으로 가고, 서울로 가려면 시각표 보고 지상 승강장으로 가면 된다.
새롭게 태어나는 가좌 역의 모습이 기대된다. 용산 방면 지하 경의선 복선 전철이 개통하면 이것이 경의선의 본선 역할을 할 것이고, 기존의 서울-신촌 방면 지상 경의선은 열차의 회송이 main이고 전동차는 보조인 지선 성격으로 위상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철덕이라면 환골탈태하기 전의 지금의 가좌 역을 어서 다시 방문하여 구경해 보시기 바란다. 열차가 1시간에 1대꼴로 다니니, 인서울이면서도 어지간한 근성 없이는 찾아가기 쉽지 않은 곳이다. 본인은 밀덕, 역사덕, 애니덕 등 여러 덕 중에서도 하필 철덕이 된 것을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특히 새마을호 Looking for you를 계기로 철덕이 된 것은 그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
Posted by 사무엘